5박 8일간의 스리랑카 불교 성지순례 맨 첫날에
지난해 8월에 부탄 불교성지 순례를 주관했는 법보신문에서 주관하는 스리랑카 성자 순례에 나선다
2000년 당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재학시절에 스리랑카 왕사스님의 상좌이셨던 란다 라타나 스님을
동행하시고 당시 8박 10일간의 성지순례를 하였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티지털 카메라도 없었고
특별한 가이드도 없이 여행 개념으로 갔다 왔으니 당시의 기록도 없었고 기억에 남는것도 별로 없었다
이번에는 불교 유적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법보신문 성지탐사 전문 기자인 남수연 기자가 함께 동행한다
지난해 8월 부탄성지순례 때에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쳤기에 무한 신뢰를 보내며 따라 나선다
스리랑카는 인도양에 있는 섬 나라이며 옛 이름은 실론(Ceylon)이며 팔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인도 반도의
남동 해안과 마주보고 있으며 경제수도는 콜롬보이고 행정수도는 스리자야와루데네푸라코테, 화폐는 스리랑카 루피다.
팔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인도 반도의 남동 해안과 마주보고 있으며, 섬의 형태는 대체적으로 서양 배
모양이며 북위 5∼10°(남북길이 약 437km), 동경 79∼82°(동서길이 약 225km)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스리랑카는 지형상 중부 고지와 남서부, 동부, 북부 저지의 4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평균고도 1,500m 이상인
중부 고지가 섬의 중심을 이루며, 이 지역은 높은 산과 고원들, 좁은 협곡들, 깊은 하곡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심 부근에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피두루탈라갈라 산(2,524m)이 솟아 있다.
남서부지역 역시 산악지대로 중부 고지의 라크와나 산맥 줄기가 이어져 내려오며, 동부지역은 잔구들이 곳곳에
산재하는 파랑상의 평원이다. 북부 저지지역은 평평하고 넓은 비옥한 평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러 개의 작은
하천들이 흐르고 간간이 능선들이 나타난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강은 중부 고지 북쪽을 향해 동류하는 마하웰리강이며며, 적도 기후지대로 연평균기온이
27∼28℃에 이르며 대부분 지역에서 상대습도가 매우 높다. 그러나 인도 대륙이 가까이 있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입지조건으로 인해 강우가 고르지 않은(적도 몬순 기후) 수정 적도기후의 특징을 나타내며,
연평균강우량은 북부와 동부 건조지대의 1,000㎜ 이하에서 남서부 습지대의 5,000㎜ 이상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자연식생은 북동부지역의 건성 혼합 상록수림(흑단과 마호가니)에서 북서부와 남동부 지역의 가시덤불, 동부의
사바나와 같은 초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야생동물로는 사슴·표범·곰·멧돼지·코끼리와 온갖 종류의 원숭이가 있다.
광물자원으로는 철광석·티탄광석·흑연·고령토·귀석 등이 있다. 남서부의 라트나푸라 시 근처 자갈 크기의 퇴적물로
이루어진 충적층에서는 상당량의 사파이어·루비·토파즈·석류석·월장석·지르콘이 발견되기도 했다
스리랑카 지도
1948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였고 국호도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국호로 변경하였는데
고대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인도에서는 랑카(Lanka) 싱할라(Singhala) 등으로 불렀으며,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타프로바네(Taprobane) (/təˈprɒbəniː/),아랍권에서는 Serendib ("세렌디피티"(serendipity)
말씀의 원조)라고 불렀고 고대 인도에서는 본 섬의 이름을 마하바라타(Mahabharata) 및 라마야나(Ramayana)로 불렀다.
1972년, 영연방에서 탈퇴하여 공식 국호를 "스리랑카 자유 주권 독립 공화국"로 변경하였으며 1978년에도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하였지만 실론(Ceylon)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많이 쓰이는 편이다
예전에는 '실론'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었으며 한때 인도와 함께 영국의 속령이 되어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가
1948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였고 국호도 '실론' 에서 현재의 국호로 변경하였다. 이전까지는 콜롬보가 수도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리자야와루데네푸라코테(행정 수도)와 콜롬보(정치 경제적 실질적 수도)로 분류되고 있다.
인도의 남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과거에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인도의 눈물'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는 '국토의 생김새'가 꼭 '눈물' 혹은 '진주'처럼 생겨, 지리적으로도 인도의 꼬리 쪽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국토의 면적은 6만 5610km2로, 남한의 약 2/3 정도 된다. 정글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다.
스리랑카 국기
스링랑카에는 싱할이어와 타밀어가 공용어이고 영어가 통용어로 쓰이고 있는네 싱할라어는
스리랑카인 대다수가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이며, 타밀어는 근대 이후 영국인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본격 유입된 인도의 타밀 지방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타밀 사람들의 많은 수가 싱할라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
문제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한편 영국 식민 시대의 영향으로 영어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인종은 싱할라족이 74%, 타밀족이 18%, 스리랑카 무어족 8%, 버거족, 말라족이 군소부족이 있다
구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원래 스리랑카에서 살아 오던 사람들은 싱할리족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인도에서 건너온 왕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인도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인도 남부에 살고 있던 타밀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어
스리랑카 민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이 타밀 사람들의 유입은 영국의 스리랑카 식민 지배와 함께 본격화되었는데, 캔디 인근의 고산지대가
홍차 재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인들이 인도의 타밀인들을 노동자로 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에도 타밀인들은 스리랑카에 남았다.
싱할리인 대부분이 독실한 불교 신자(69%)인데 비해 타밀인들은 주로 힌두교(16%)를 믿으며 인종적,
문화적인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영국 식민 시대에 유입된 타밀인들이 주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싱할리인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여러 차이로 인해 싱할리인들과
타밀인들 사이는 좀처럼 융합하지 못했으며 결국 폭력을 불러왔다.
1976년 결국 북부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약 30여년에 걸쳐 타밀 호랑이 조직과 스리랑카
정부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2001년에 노르웨이의 중재로 일단 심각한 폭력적 분쟁은 사그라들었지만 갈등의 불씨는 완벽하게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2009년 타밀 반군이 정부군에 항복하면서 스리랑카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또다른 종족으론 이곳이 예전 아라비아 상인들의 무역 근거지인 탓에 이슬람교(7%)가 7%이고 과거 포루트칼과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탓에 남부지역에는 천주교와 기독교(7.5%)가 분포되어 있다
스리랑카 국화...사진 펌
스리랑카 인구의 74%를 차지하고 있는 싱할리족은 BC 6세기경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와 원주민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루었다...그들은 인도 남부 타밀족의 침략을 받아 차차 그 세력이 밀리게 되었고, 타밀족은 북부에
따라 왕국을 설립하였다...싱할리 왕조는 BC3세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수용 보호하였으며, 남방 상좌부
(上座部) 불교의 정통파로서 실론 불교의 정통성을 다지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는 유럽 열강들의 침입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포르투칼인들이 해안지역 일부를 점령했다.
이어 1602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침입하여 포르투칼인들을 몰아냈고, 1795년에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1815년에는 캔디에 근거를 둔 싱할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지난해 개장한 탓에 깔끔하고 분위기도 참으로 좋았다
인천공항은 세계 어느 공항보다도 규모와 시설면에서 최고가 아닐까 싶다
20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도착한 시간이 19시 20분이다
그런데 다들 일찍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여행사 사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도착하자 나를 대신해서 티켓팅과 좌석을 배정해주고 돌아가신다
처음이라 조금은 어리버리하다... 조금을 헤매다가 게이트를 통과하여 출국수속을 끝내고 탑승구쪽으로
가니 예전에 부탄에 같이갔던 불자님들도 계시고 하여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잠시후 국회의원 불자회인 정각회 회장이신 주호영 국회의원 일행도 우리와 같은 코스로 성지순례를 나선다
정치인답게 먼저 다가와 명함을 주면서 인사를 건낸다
성지순례 명찰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서 22시 10분에 출발한다는 비행기는 20분이 지나서야 이륙을 하고
기내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서니 아직도 창밖에는 아직도 어둠속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9시간이 조금 넘어서 스리랑카 네곰보 공항에 도착한다
이곳 사간은 04시 30분 정도이다... 시차는 우리나라와 3시 30분이다
네곰보 공항내의 불상
불교의 나라답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게 부처님이시다
2000년의 공항이 아니고 새로운 공항인지 예전에 비해선 아주 넓고 그 당시에 비해선 깨끗하다
게이트를 빠져나와 가이드와 미팅을 하고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도 아직도 어둠속이다
버스에서 다시 잠에 빠지고 스리랑카 최대 불교 유적지인 아누라다푸라로 이동중 아침 식사를
하기위기 호텔로 들어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잠결에서 내리니 아침 식사를 하러온 호텔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기온이 30도가 넘는 느낌이다
케리어에서 여름옷을 께내서 갈아입고 잠도 깰겸 호텔앞 정원을 걷는다
호텔앞의 인도양의 모습
인도가 ‘붓다의 땅’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불리고 있을 때 스리랑카, 이 작은 섬에는 언제나 눈물이란
단어로 시작됐다.
어떤이는 스리랑카를 가리켜 ‘인도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이라고 하고 어떤이는 ‘슬픔의 진액이 뭉쳐 떨군 눈물’ 이라고도
했는데, 지도위에 그려진 스리랑카의 모양새가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양을 닮았다고는 하나, 굳이 눈물에 비유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근거리 역사속의 스리랑카가 늘 대륙의 열강지 식민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리랑카 식민 역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인 1,5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리상 발견의 시대’로 부리는 15~16세기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동양을 유럽에 소개한 이후
서양인들의 관심은 온통 동쪽으로 쏠려 있었고, 이 가운데 인도로 향하는 海路를 발견한 포르투칼은 동방 무역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505년 스리랑카 해안에 포르투칼 선박이 처음 등장한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1948년까지 스리랑카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고, 500여년 가까이 기독교계 국가들의 침입속에서 불교는 탄압과 박해 수준을
넘어 절멸의 위기를 수없이 겪어야만 했다.
사원은 파괴되고 많은 스님들은 학살되었으며, 개종을 거부한 국민들은 처참한 고문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법난의 역사를 겪고도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있는 스리랑카 불교의 모습에 오히려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국땅에서 처음보는 쪽배
하지만 스리랑카의 역사는 곧 불교의 남방전래사이며, 스리랑카 불교사의 흥망성쇠는 고스란히 스리랑카 역사의
그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불교는 스리랑카 역사의 살아있는 주인공이다
이러한 자부심에 스리랑카 불교가2500여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부처님재세시의 생생한 숨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기인하고 있으며, 붓다가 남긴 법과 계율을 살아있는 붓다처럼 의지하며, 황색 카사야의 승단과
그 발아래 기꺼이 머리를 조아리는 스리랑카 불자의 모습은 열반시 붓다께서 남긴 당부가 변함없이 살아 숨쉬는
땅임을 각인시켜 주며, 순박한 미소로 이방인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눈물에 비유되는 이 섬이 결코 슬픔의
진액이 아닌, 그 옛날 신드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보물섬 ‘셀린디브’이며, 마르코폴로가 예찬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임을 화인시켜 주기에 충분하며, 또한 연꽃 한송이를 불단에 올리는 그들의 신심은 이고이야말로
붓다가 살았던 위대한 진리의 시대를 순수하ㅔ 간직하고 있는 보석같은 佛法의 땅임을 보여준다
쪽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갖다오는 어부... 물고기는 한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호텔마당에서 본 열대과일...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곳당이리고 한다
호텔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본격적인 불교성지 순례를 위해 아누라다푸라로 향한다
인도양의 해변을 따라서 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을 달린끝에 도착한 아누라다푸라
버스에서 내리니 숨이 막힐정도로 무더위가 몰려오고...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아누라다푸라(싱할리어අනුරාධපුර,타밀어:அனுராதபுரம்)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약 1,000년간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고대 도시이다
아누라다푸라에는 2,000년 이상된 불교 사원인 투파라마 다고바(Thuparmaya dagoba)에는 고타마 붓다의 뼈가 모셔져 있다.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제타바나 다고바(Jatavana dagoba)가 있으며, 1,600개의 기둥이 있는 로비마하하파야(Loamahapava)
7층 궁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처조각으로 평가받는 사마디부다상(Samadhi Statue),이수루무니야의 연인들이라는 조각이
일품인이수루무니야 사원(Isrumuniya), 그 밖의 박물관 등 많은 유적지와 관광지가 산재해 있다
도시의 옛 구역은 지금은 고고학 공원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스리랑카의 고대 유적 도시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가까이에 사원, 조각, 궁전, 물을 마실 수 있는 옛 저수지들뿐 아니라 작은 벽돌로 지은 종 모양의 거대한 사리탑
(불교의 기념 성골함)들이 있rh 또한 원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라고 알려진 고대 인도의
보리수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보리수 가지는 BC 245년경 심은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누라다푸라는 BC 5세기에 세워졌으며, BC 4세기부터 AD 11세기에 남인도로부터 침략을 받아 수도를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스리랑카 싱할라족의 수도였다.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버려져 밀림으로 덮여 있던 이 도시는 19세기에 영국인들에게 다시 발견되어
불교 순례지가 되었다...이 도시의 복구는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옛 수도의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20세기 중엽에 시가지 대부분이 옮겨진 지금의 도시는 스리랑카 북부의 주요도로
교차점으로 철도가 지난다. 실론 고고학 탐사부의 본부도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가장 먼저 만난곳이 유료 화장실이다
마치 70년대 서울의 모습을 연상케하는데 스리랑카에는 호텔을 제외하곤 모든 화장실이 유료이다
아누라다푸라가 싱할라왕조의 수도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400여년 전이다.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BC 437~377)왕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가 왕국의 수도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데바남피야팃샤왕에 이르러서다. 즉 불교가 전해진 이후다.
이후 1017년 남쪽에 위치한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이전하기까지 1400여년동안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였으며
불교의 중심지였다. 아누라다푸라를 발판으로 삼아 불교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남방불교의 거대한 줄기가 스리랑카로부터 뻗어나갔다면 아누라다푸라는 그 줄기의 뿌리였다.
스리마하보디로 향한다
스리마하 보디 입구
마치 입구가 어린이 대공원이나 과천대공원의 입구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사찰로 보면 일주문이 서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건물이다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인가?
뜨거운 햇살을 이겨내면서 스리마하보디사원으로 향한다
스리마하보디 정문
이곳에서 부터는 복장에 대한 이런 느슨한 규정과는 달리 외국인이라도 절대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
사원에 들어설 때 입구에서 모자와 신발을 반드시 벗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원 입구에는 ‘문스톤(Moon Stone)’이라 불리는 반원 모양의 석조 발판이 있는데 바로 이 지점이
신발과 모자를 벗어야 하는 곳으로 부처님에 대한 禮敬의 표시라고 한다
문스톤(Moon Stone)
문스톤은 윤회의 상징으로 불꽃, 코끼리, 말, 사자, 소, 꽃, 새, 연꽃 등을 통해
인간 세계의 생노병사와 그로부터의 해탈, 열반 등을 상징하고 있다.
신발을 벗어 옆에있는 신발 보관소에 맡기고 선 채로 저두 3배의 예를 올리후 마당으로 올라선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해백한 불교지식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남기자님
그리고 스리랑카의 모든 사찰에는 세가지 엄격하게 지켜야 할 계율이 있다
1, 절대로 짧은 옷은 안된다
2 ,모든 모자와 신발은 벗어야 한다
3, 붓다와 함께 자신을 사진에 담을때에는 뒷모습 보여서는 안된다
부처님전에 꽃공양을 올리고 계시는 보살님
스리마하보디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워서 불교를 보호하고 포교한 이상적인 왕으로 많은 설화와 유적을 남겼던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스님이 스리랑카로 전법활동을 하러 그 시절, 마힌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귀의한 데바남파얏티샤왕의 부인 아눌라 왕비 또한 정법을 만난 기쁨을 감출수가 없었다
기쁨은 눈부신 신심이 되었고 타오르는 구도(求道)의 열정을 더 이상 억누룰 수 없었던 왕비는 왕에게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왕비의 요청에 데바남파얏티샤왕도 고개를 끄떡였다.
왕비의 출가의 뜻을 밝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힌다 스님의 기쁨도 컷다
하지만 스리랑카에는 아눌라 왕비에게 비구계를 전해줄 비구니 스님이 없었다.
마힌다 스님은 서둘러 부왕인 아쇼카에게 비구니계를 전할 스님을 파견해 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당시 왕비에게 비구니계를 전한다는 것은 인도를 떠나 다른 나라에 또 하나의 뿌리를 내리는
불교계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그 대작 불사를 이끌 적임자로 마힌다 스님은 자신의 동생 상카미타를 추천했다
아쇼카왕은 잠시 고민했다...비록 출가를 해서 속세의 인연을 끊었지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더없이 위대한 전법의 소임이지만 남매가 모두 자신을 떠난다는 것은 왕으로서는 서운함이 컷을 것이다
마힌다 스님의 뜻을 전해들은 상카미타 스님은 의지가 결연했다.
아버지라해도, 왕이라 해도 상카미타 스님의 뜻을 꺽을수는 없었다
아쇼카왕은 손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보리수 가지 하나를 꺽어
상카미타 스님에게 건네 주었는데 이것은 상카미타 스님의 파견을 요청한 마힌다 스님의 부탁이기도 한다
당시 스리랑카 사람들은 나무를 숭상하는 민간신앙을 갖고 있었다
마힌다 스님은 이런점에 착안하여 불교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보다 깊숙히 자리를 잡기위한 방편으로
보리수를 떠올렸고, 보리수 가지와 함께 배에오른 상카미타 스님은 막갓라(스리랑카 고대력 10~11월)
초하룻날 아누라다푸라에서 그리 멀지않은 스리랑카 북부 바닷가에 닿았다
왕과 왕비는 바닷가로 나가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카미타 스님과 보리수를 맞이했다.
보리수는 마힌다 스님을 비롯해 스님ㄷ르의 수행처로 국왕이 보시한 마하메가완나 숲에 심어졌다
그리고 얼마후에 아눌라 왕비는 상카미타 스님에게 수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성스러운 보리수 스리마하보디
데바남피야팃샤왕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보시한 마하메가완나에 심어진
보리수를 스리랑카 사람들은 위대한 보리수 ‘스리마하보디’라고 불렀다
불법에 귀의한 아누나다푸라의 백성들에게 보리수는 살아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이다
스리마하보디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키워가듯, 불교는 백성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이후 수많은 스리랑카의 사찰에 스리마하보디의 가지가 옮겨 심어졌다
2,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리마하보디와 그 후손 나무들은 스리랑카 곳곳에서 불자들의 구심점이다
스리랑카의 사찰이 여법한 도량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불상과 탑, 그리고 보리수나무다
그 가운데서도 불자들의 신행은 보리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탑돌이를 하듯 보리수 주변을 돌고
부처님에게 꽃과 청수(淸水)를 공양하듯 보리수에 꽃과 청수를 올린다
계단에 소원지를 걸고있는 스리랑카 불자들
보리수 나무에 자신들의 발원을 적어 보리수 나무에 걸어 놓는데 이곳에는
보리수를 보호하기 위해 들어가지 못하기에 계단에다가 발원지를 걸어 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보리수 나무
아쇼카왕의 딸 싱가미타공주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 가지를 가져와
옮겨 심은지 4200년이 되어 현존하는 식물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공인된 나무이란다
보리수를 향해 예배를 올리는 스리랑카 불자들
보리수 앞 불전함
수령이 2,000여년이나 되었다는 보리수 나무
보리수 주변에는 높은 벽과 황금색 철책이 처져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 높은벽은 19세기경에 야생코끼리와 동물로 부터 보리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할머니 엄마, 손녀 3대가 부처님에게 예를 올린다
젊은 불자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스리랑카에는 불교의 희망을 보는듯 하다
꽃공양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려고 할 때
당시 그 옆에 있던 사라나무가 때아닌 때에 꽃을 피었다
그때 부처님이 발씀하기를,,
"저 꽃들은 부처의 열반을 맞이해서 천상의 신들이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이다,
그러나 부처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양은 저것이 아니니라,
부처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양은 법(진리)을 따라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의 공양은 꽃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의 지혜를 따라 수행정진해서,
깨달음의 삶에서 풍기는 향기를 공양으로 올리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공양이다,
법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월장석(月長石:Moonstone)
스리랑카 역사서에는 마힌다와 상카미타 스님의 출생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 디파왐사(Dipavamsa:島史)에 따르면 아쇼카왕은 젊은 시절
부왕의 명령에 따라 웃자인의 관리로 파견되는 길에 비데사 지역에서 만난 여인 데비와 결혼한다
아쇼카와 데비와 사이에서는 남매가 태어났는데 바로 마힌다와 상카미타 스님이었다
비록 정식 국혼(國婚)은 아니였지만 마힌다 스님은 아쇼카왕의 장자였다
스리랑카 역사서에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 아쇼카는 수도인 파트나푸라로 되돌아가 100여명에 달한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곧이어 참혹한 정복전쟁이 뒤따랐고, 환멸을 느낀 아쇼카왕은 불교에 귀의해 법왕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헤어졌던 남매와 재회를 했는데, 아쇼카왕에게는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마힌다와 상카미타
스님에 대한 父情 애틋함 그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가하면 5세기경에 법현스님은 수행자가 된 아쇼카왕의 동생을 거론하고 있지만 그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다
7세기경에 현장스님은 전해들은 바를 전제로 아쇼카왕의 동생 마혜인타라 스님에 관한 기록이 있어 마힌다 스님을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나 그 출생과 행적에 관해서도 스리랑카 역사서에 비해 신뢰할 바는 아니다
법당에서 기도에 동참하는 순례자들
마힌다와 상카미타 스님은 모두 다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에서 입적을 하셨다고 한다
마힌다 스님의 사리탑은 마힌탈레 언덕위에 있는 암바스탈라다고다라고 한다
하지만 동생 상카미타 스님의 행적은 묘연하다...데바남피야팃샤왕 사후 웃티야왕이 즉위한 지
9년만에 스님의 세수 59년에 입적한 것으로 스리랑카 역사서는 전한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청수통
저 통에다 맑은 물을 담아서 보리수 주위를 탑돌이하듯 돈 후에 보리수 나무에다 뿌린다
예불에 쓰이는 법구(法具)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입구의 하얀 탑 위에는 보리수 가지를 들고있는 상카미타 스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곳 사찰내에는 부탄만큼 개들이 보이질 않는다
스리마하보디를 참배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루완웰리사야대탑으로 향한다
루완웰리셀리대탑으로 가는 길
축대는 코끼리상으로 되어있는데 금방이라도 코를 날름거리며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다
루완웰리세야대탑(RuwanweliSaya Dagoba)
스리마하보디와 함께 아누라다푸라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탑의 높이만도 55m로 넓은 평원에
위치한 탓인지 하나의 산처럼보일정도 거대한 백탑이 평원 가운데 서 있는게 이채롭다
맨발로 탑돌이를 하는데 섭씨 35도의 날씨에 모자도 써지 못하니 살갗이 금새 타버리는 느낌이다
루완웰리세야대탑에 관한 전설
이 탑을 조성한 둣타가마니(Dutthagamani:B.C167~137)왕은 아누라다푸라를 침략해 온 엘라라(Elara)왕을
무찌른 싱할라 왕조의 영웅으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조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불교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며
부처님의 사리를 자신의 창 끝에 넣고 전쟁에 임했다...불교를 수호하겠다는 둣타가마니의 선언은 싱할리족을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둣타가마니왕이 불교 수호를 전재의 목표로 내세울 정도로 당시 싱할라인들의 신심은 견고했다.
이러한 신념에 힘입어 둣타가마니 왕은 타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다.
하지만 전투에서 수천명의 적군을 죽인 왕은 괴로워했다
이때 여덟명의 스님들이 나서서 왕을 위로했다.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해야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며“적군(타밀군)들은
동물과 다름 없으며 따라서 왕은 이 전쟁에서 한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은 이 말에 크게 위안을 받고 불교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당시 스리랑카 불교계의 이러한 논리는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불교는 왕조의 보호아래
더욱 융성해졌다.
아누라다푸라를 지킨 둣타가마니왕은 말년에 엄청나게 큰 루완웰리세야탑을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탑의 높이는 자그마치 110m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둣타가마니왕은 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공사를 지휘하던 사다팃사 왕자는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하자 대나무와 흰 천을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탑의 모양을 만들었고, 임종을 앞둔 왕에게 “탑이 완성됐다”며 창문을 열어
루완웰리세야탑을 보여 주었다...기운이 쇠해 시력마저 흐릿해진 두타가마니 왕은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거대한 흰 탑을 보고는 타이 완성됐다고 믿으며 편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탑을 향해 합장을 하고있는 두타가마니왕의 동상
탑의 입구에는 단정하게 합장하고 서 있는 둣타가마니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비록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창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수천명의 적군을 죽여야 했던
그의 괴로움이 이 아름다운 탑을 낳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죄업을 조금이라도 닦아내기 위해 탑을 만든 왕의 참회가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
탑에 예배를 올리는 스리랑카 불자들
탑돌이는 계속되고...
노부부의 붓다에 대한 예경은 지극히 엄숙하다
대탑옆에는 자그만한 탑도 보인다
루완웰리세야탑 앞에는 간절한 소원을 바라면서 걸어논 소원지도 많이 보인다
붓다를 외호하는 신장님인가?
꽃공양을 올리는 불자들
다음 성지를 떠나면서 불탑을 바라보고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젊은 독일처자들... 뭣이 저리도 즐거운 지...
길거리에서도 불경을 암송하고 있다
다음 성지순례를 위하여...
원숭이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아누라다푸라에서는 사방 어느곳으로 발길을 옮기던 수많은 불교 유적을 만난다
데바남피야 티샤왕이 마힌다 스님을 위해 지었다는 이수루무니아 정사, 스리랑카를
한 때 융성했던 대승불교의 상징 아브하야기리다고바, 스리랑카 최초의 불탑인
투파라마다고바 등...이런한 유적들은 이 도시가 과거에 얼마나 화려한 영화를
누렸는지 말해주고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아누라다푸라는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사원에는 여전히 많은 스님들이 살고 있고, 불자들은 수백, 수천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과 보리수, 불상앞에 오늘도 변함없이 등불과 꽃을 공양하고 있다
“아누라다푸라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스리랑카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2300여 년 전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처음 받은 그 기분이 아닐까?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보리수를 전해받는 데바남피야티샤왕의 모습
남수연 기자님의 해박한 지식으로 루완웰리세야 탑의 설명을 듣고 다음 성지인 이수루무니야 정사로 향한다
이수루무니야정사(Isurumuniya Vihara)안내판
2,300여년 전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세운 사찰이라고하며 일명 록템풀, 즉 바위사원으로 불린다
법당 입구 우측 에는 연못이 있는데 살리야 왕자와 연인 아소카말라가 데이트를 즐겼다는 곳인데
짙푸른 녹색 연못과 맞닿는 바위 아래엔 보기에도 앙증맞은 웃는 코끼리 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수루무니야정사 입구에서 신발과 모자를 벗고 정문을 통과하는데 섭씨 35도의 날씨라 발바닥에 불이나는 느낌이다
이수루무니야정사
고대 스리랑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통치한
데바남피야티샤왕에 의해 세워졌으며, 당시 카스트가높은 집안의 아들 500명이 승려로 출가를 하였는데
이 사원은 그들을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후에 카샤파(Kaesapa:473~491)왕이 사원을 개축하고
“보우뿔완 까숩기리 라드마하 위하라”로 개명했다.이 이름은 왕과 그의 두 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뚝솟은 바위 아래에 서로 연결된 동굴 사원이 있고, 그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탑들이 있다.
바위에 조각된 코끼리의 모습은 역동적이고, 이수루무니야의 연인이라는 이름의 조각이 경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두뚜게무누 왕의 아들인 살리야와 그의 연인인 아소까말라의 모습이라고 한다
살리야 왕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왕권을 포기하였으며, 이 사원에서 발굴된 조각들은
스리랑카 불교 미술중에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조각은 누가 조각을 했는지는 모르나 2천년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왕권을 포기한 살리야 왕자라고 하는데
살리야 왕자의 조각상 윗쪽에는 말의 형상을 하고 있고, 연못 아랫쪽엔 세마리의 코끼리가 조각되어 있는
조각품이 보이는데 이 작품은 스리랑카 불교미술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코끼리가 조각되어 있어 코끼리 연못이라고 부른다
코끼리상 윗쪽에는 사각으로 홈이 파져 있는데 아마도 불상이 모셔져 있었던 자리인 모양이다
지금은 참배객들이 동전을 던지는 장소가 되었으며, 저 곳에 명중을 시키면 소원을 이루어질거라 믿으면서...
동굴 법당안으로 들어간다
동굴 법당 石柱의 모습
부처님의 열반상
부처님의 와불상과 열반상의 차이를 아시나요?
부처님의 양발이 가지런히 있으면 열반상이요, 약간 엇비슷하게 있으면 와불상이다
흔히 록 템플이라 불리는 것이 이수루무니야 정사인데 바위를 파낸 듯이 지어진 불당과 바위 위에 세운
다고바(불탑) 밝은 색으로 칠해진 불상을 모신 본당, 귀중한 발굴물을 보관하는 보물관은 아누라다푸라의
어떤 유적과도 다른 이색적인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사원으로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승원의 일부가 복구될 때
사원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래서 본당은 비교적 새 건물이라 크게 감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화려한 色感으로 치장한 석굴불상
석굴법당 안에서
이수루무니아 박물관의 모습
본당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사원 북쪽의 왕궁 정원에서 발견되었다는 연인의 상과 왕족의 상이 있다.
연인의 상은 5세기 무렵의 작품이라는데, 여기 조각된 남녀는 기원전 2세기 도투게무누왕의 아들 살리야 왕자와
그의 연인 아소까말라라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가족사진과 같은 조각인데 도투게무누왕과 왕비, 살리야 왕자가 있는데 시녀였던 아소까말라는
맨 오른쪽 구석의 조그만하게 조각되어 있다...왕으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며느리인걸 어쩌겠냐
예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는데 그 당시의 도투게무누왕도 자식을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수르무니야의 연인
남자의 무릎위에 앉아있는 저 조각상은 살리야 왕자와 시녀였던 아소카말라고 한다
이 조각상은 원래 사원옆 왕실 정원옆에 있었던 조각상인데 두투가무누 왕의 아들인
살리야 왕자가 왕실 정원을 거닐다가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있는 시녀를 보게된다
박물관을 나와...
좁은 바위 사이를 지나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로 향한다
하브하야기리 다고바((Abhayagin Dogoba)
데바남피야 티샤왕이 마힌다 스님을 위해 지었다는 이수루무니아 정사에는 스리랑카에
한 때 융성했던 대승불교의 상징 하브하야기리 다고바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위에 구멍이 뚫여있는 것이 이채로운데 가이드인 남기자의 얘기로는 저기에다 기름을
넣어 불을 붙인 다음에 수행을 할 때 요긴하게 썼다고 하는데 쉽게 말해 호롱불인 셈이다
돌계단을 따라서 하브하야기리 다고바로 올라서니 주위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커다란 탑쪽으로는 순례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이곳에는 붓다의 발자국이 있는 바위가 있다는데 아쉽게도 보지 못하고 그냥 내려온다
팃사웨와 저수지의 모습
이수루무니아 사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팃사웨와 저수지
저수지라기보다는 강이나 바다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게 크게 보인다
이 저수지는 기원전 3세기경에 데바남피야 티샤왕이 축조한 것인데
이 왕은 수리시설 정비에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2세기경에 등극한 둣타가마니왕도 저수지와 관계수로를 정비하여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모든것이 불교와 관련짓지 않고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게 전부 불교유적이다
돌계단을 내려와 이수루무니아 정사 앞으로 나오니 조금전에 만났던 연못이 나온다
쿳탐포쿠나 연못(Kuttam Pokuna)
이곳은 예전에 스님들의 목욕탕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물을 채워
수영장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견고한 모습이다
이런한 유적들은 이 도시가 과거에 얼마나 화려한 영화를 누렸는지 말해주고 있다.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엊ㄴ 세련된 도로와 지하 2층에 2.3층 규모를 자랑했던 가옥들
그리고 보석으로 치장된 방이 1,000개나 있었다는 궁전과 금,은 보석으로 치장된 다고바...
가이드의 설명에 아둔한 범여로선 상상조차 되지 않는 느낌이다
시간에 쫒겨 이수루무니아 정사를 수박 겉할기식으로 둘러보고 마지막 순례지인 미힌탈레로 향한다
미힌탈레 안내판
미힌탈레는 콜롬보나 캔디에 비해 그리 귀한 이름이 아니다
2000년 스리랑카 방문때는 이곳에 와보질 못했고, 관광객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스리랑카의 불교사와 그 유적지를 보고자하는 순래객이라면 “불교도래지 미힌탈레”를 결코 빼놓수가 없다
남 기자의 열정적인 유적지에 관한 설명...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스님들의 공양간이었던 다나살라와에 남아있는 돌확
500여명의 스님들이 함께 공양할 수 있도록 밥을 담았던 거대한 공양기 바트오루와의
엄청난 크기는 당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함께 수행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거대한 발우와 수도시설, 우물, 회의실, 법당터, 승가법이 쓰여있는 비석이 보인다
보이는 저 돌비석에는 싱할리어로 승사법이 적혀 있는데 왕이 직접 승가의 대표들과 상의해
승가법을 만들어 공포한 비석으로, 좌측 비석에는 승가 재정의 투명성과, 승가의 규율이 적혀 있고,
우측에는 승단에서 근무하는 스님과 재가자들의 월급과 채용과 해고관리, 근무자들의 자세들이 기록되어 있다
다나살라와(Dana Salawa)
다나살라와(Dana Salawa)로 불리는 이 유적지는 스님들의 공양간이다.
예전에는 줄지어 서 있는 기둥 위로 비를 막고 그늘을 드리워주는 지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넓은 직사각형의 터만 남아있는데, 입구에서 바라보면 중앙에 넓은 홀이
조성돼 있고 맞은편 맨 안쪽에는 거대한 화강암 돌확이 자리하고 있다.
바트오루와(Bat Oruwa)로 불리는 이 돌확은 스님들에게 공양 올린 밥을 담았던 거대한 그릇이다.
바트오루와 옆에는 캔다오루와(Kenda Oruwa)로 불리는 조금 작은 크기의 돌확이 하나 더 남아있다.
캔다오루와에는 죽이나 물을 담았는데, 돌로 만들었지만 정교하게 다듬어져있어 갈라진 틈을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돌을 다루던 석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데, 또 돌확 안쪽에는 음식이나 물이 새지 않도록 금속판을
덧대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이 돌확의 크기를 살펴보면 적어도 500명 이상의 스님들이 한 번에 공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교 유적지에 풀을 자르고 있는 여인
야트막한 산악지역인 미힌탈레 유적은 까막득히 뻗어있는 계단 아래에서부터 시작한다
1934년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 거대한 유적은 정글에 묻혀 있었다.
주차장에서 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돌계단이 무려 1,840개나 된다고 한다
섭씨 35~6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미힌탈레 마당에 들어서기 직전에 신발을 보관소에
맡기고 마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게 임바스탈라 다고바이다
임바스탈라 다고바(Ambastala Dagoba)
이 탑이 서있는 자리는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스님과 데바남피야팃샤왕이 처음 대면한 장소다.
1세기경 싱할라왕국을 다스린 마하다티카 마하나가(Mahadatika Mahanaga. A.D 9~21)왕이
역사적인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미힌탈레는 그리 크지 않은 야트막한 산인데, 야쇼카왕의 아들이자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이
이곳에 도착해 데바남피야팃샤왕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 이후 미힌탈레 주변에는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아누라다푸라가 스리랑카의 수도로 14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미힌탈레 역시 싱할라왕조와 함께
찬란한 불교사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렸다
마힌다 스님이 계셨다는 바위산을 향해 예를 올리는 데바남피야팃샤왕
바위산에 도착한 마힌다 스님과 일행들은 이곳에서 며칠간 선정에 든다.
그리고 5월의 보름날 마침내 싱할라왕국을 다스리던 국왕 데바남피야팃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하왐사’는 마힌다 스님과 왕의 만남이 이곳 산신의 주선(?)에 의해서 성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힌다 스님이 머물고 있는 산 정상으로 왕을 이끌기 위해 산신은 아름다운 사슴으로 모습을 바꿔 사냥 나온 왕을 유인했다.
사슴을 좇아 산 정상으로 올라온 왕은 명상에 들어있는 마힌다 스님 일행을 발견한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수행자의 모습에 왕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마힌다 스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왕을 부른다. 그
리고 ‘왜 이곳에 있는지’ ‘누구인지’를 묻는 왕의 물음에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두 사람의 일문일답이 이어진다.
마힌다 스님이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먼저 질문을 던진다.
“이 나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나무는 망고라고 불립니다.”
“이 망고나무 말고 또 다른 망고나무가 있습니까?”
“이곳엔 망고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 이 망고나무들 외에 또 다른 나무가 있습니까?”
“망고나무 외에도 다른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망고나무들과 망고 아닌 나무들 외에 또 다른 나무가 있습니까?”
“…이 망고나무가 있을 뿐입니다.”
왕의 대답을 들은 마힌다 스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왕에게는 친척들이 많이 있습니까?”
“예, 친척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친척 외에 사람들이 있습니까?”
“친척 외에도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척과 친척 외의 사람들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까?”
“…오직 저 자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의 대답은 흡족스러웠다. 마힌다 스님은 데바남피야팃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간파했다.
‘상적유소경(象跡喩小經)’이 설해졌고 마힌다 스님의 예상대로 왕은 곧바로 불교에 귀의했다. 왕은 마힌다 스님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해 법회를 열었다. 왕비와 신하, 백성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무려 8500명에 달했다.
왕은 귀족의 자제들을 선발해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게 했다. 마침내 스리랑카에 최초로 여법한 승단이 구성된 것이다
마하세야다고바를 참배하기 위해 맨발로 돌계단으로 올라서는데 발바닥에 불이나는 느낌이다
마하세야다고바(Mahaseya Dagoba)
미힌탈레 언덕 가장 높은 정상에는 암바스탈라다고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탑이 조성돼 있다.
높이 약 45m, 탑의 지름이 136m에 달하는 마하세야다고바(Mahaseya Dagoba)다.
이 탑 역시 마하다티카 마하나가왕에 의해 조성됐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가파른 산 정상에 탑을 조성하는
불사가 매우 난공사였지만 왕은 목숨을 걸고 이 탑을 완성시켰다고 전하는데 역사의 기록과는 달리 불사 현장에서
목숨을 건 이가 분명 왕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탑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봉안돼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어떻게 스리랑카에 전해졌는지 그 기록 또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 만나는 누구에게 물어보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곳에는 분명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봉안돼 있다고. 저렇게 큰 탑 어딘가에 봉안돼 있다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찾을 방법은 없다
마하세야다고바(Mahaseya Dagoba) 내부에 모셔져 있는 열반상
마하세야탑에 83세에 입적한 마힌다 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마힌다 스님의 유골을 모신 사리탑으로 조성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탑을 조성하며
마힌다 스님의 유골을 모신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탑의 역사 또한 스리랑카불교사 만큼이나 장대하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은 이곳에서 입적에 들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마힌다 스님은 스리랑카에 법을 전하고 여법하게 승단이 구성된 것을
확인한 후 조국인 마가다왕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사리탑 ‘투파라마’ 조성불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탑의 완성을 보기위해 스리랑카에 남기로 결심한 마힌다 스님은 결국 이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법당 입구의 개
미힌탈레는 야트막한 산이긴 해도 온 사방이 다 보이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주변으로는 불교유적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마하세야다고바 주변의 숲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원숭이들은 사람들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듯 하다
마하세야다고바에서 바라본 마힌다 스님
마힌다 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해 맨처음 스리랑카에 도착했다는 바위산의 모습
임바스탈라 다고바로 내려와 바위산으로 향한다
미힌탈레는 ‘마힌다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마힌다는 스리랑카불교사의 서막을 연 스님이다.
그보다는 ‘인도의 법왕’으로 불리는 아쇼카왕의 아들이라는 설명이 보다 쉽게 와 닿을 것 같다.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스님에 의한 불교 전래는 스리랑카 고대역사서 ‘마하왐사(Mahavamsa.大史)’에도 등장한다.
인도 아쇼카왕(B.C.E 268~232년 경)은 재위기간 동안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외국으로 전법사를 파견했다.
아쇼카의 아들이자 20세에 출가한 마힌다 스님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 32살이 되던 해 아홉 번째 전법사가 되어
4명의 장로스님들 그리고 2명의 사미와 함께 스리랑카로 향한다. 마힌다 스님이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바위산 꼭대기다.
물론 하늘을 날아왔다 전해지고 있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미힌탈레 바위산 정상의 모습
정상에는 대여섯명이 겨우 올라설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바위산 정상에 맨발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서니 멕시코에서 왔다는 젊은
친구와 나를 보고는 스트롱맨이라고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들고 치켜 세운다
바위산에서 바라본 마하세야다고바
당겨본 마힌다 스님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데바남피야팃샤왕은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 거대한 탑을 조성하고 스님들이 생활할 수 있는 승원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스님들은 도심에서 적당히 떨어진 외곽, 특히 산속의 동굴 등에서
수행하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 같다. 데바남피야팃샤왕 또한 1개의 승원과 68개의
동굴을 스님들의 거처로 보시했다는 기록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68개의 동굴이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곳 미힌탈레 곳곳에서도
동굴 수행처의 모습이 확인되고 있어 불교 전래 초기부터 이곳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됐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힌다 언덕으로 불리는 미힌탈레 성지순례를 끝으로 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호텔로 향한다
많은 자료는 법보신문 남수연 기자의 기사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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