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2018년 8월 25일
장소: 부안 내소사 일원과 고청 선운사와 참당암 일원
수술을 한 지도 어언 2달이 지났건만 수술후의 통증의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다가 지난 8월 8일경부터 시작된 방사선 치료를 매일 6주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힘이든다.
수술하는 마취 과정에서 성대가 약간 마비가 되어 목소리가 잘 안나오니 자꾸만 사람을 피하게 되고 우울증이
오는 느낌이다... 거기다가 월요일 같은 날은 이비인후과, 호흡기내과, 식도외과, 종양내과, 영상의학과, 음성치료
방사선 치료를 하루에 받는 날이라 아침 8시에 병원을 가서 오후 4시경에 집엘 오니 아산병원 쇼핑을 하러 가는지
치료를 받으러 가는지 나도 헷갈린다
방사선 치료는 너무 힘들고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어 정말 안받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단다
더군더나 이 치료는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식도가 타는 느낌이라 미칠 지경이다
부수적으로 음식을 먹을때 아무런 味覺 을 전혀 느끼지 못하니 음식을 그냥 체력 유지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먹는 셈이다
부지런히 치료를 끝내고 10월쯤부터는 지맥길에 복귀를 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자꾸만 자신이 없어진다.
이번주 토요일은 절기로는 칠월 백중이이지만 절에서 우란분절이라고 해서 돌아가신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고
천도를 하는 날이다... 은사스님 사찰에 부모님의 제사를 올려놓긴 했으나 몸이 아프니 참석을 포기한다
제를 올리지 못할 정도의 몸은 아니나 아픈 몸으로 조상님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예가 아닐것 같아서 말이다
3주전 부모님의 기제사에도 참석하지 못해 미안함도 있고하여 올 가을 체력이 돌아오면 아들 데리고 시골 산소나
한번 갔다올 생각이다
절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주지스님에게 잘 이야기하여 우리 부모님 제사를 여법하게 지내달라고
부탁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면서 입고가실 옷과 제물값을 입금하고 나니 조금은 맘이 편하다
토욜날은 근처 산이라도 혼자서 살살 가보려고 했는데 식구들의 감시가 어찌나 심하던지(?) 포기하고
법보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성지를 순례를 가기 위해 6시쯤 집을 나선다.
백중의 유래
백종일(百種日)·망혼일(亡魂日)·중원(中元)이라고도 한다.(중원은 중간에 든 기준일)
고래로 백중날에는 남녀가 모여 온갖 음식을 갖추어 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놀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씨름대회·장치기[手傳] 등의 놀이로 내기도 한다.
농촌에서는 백중날을 전후해서 시장이 섰는데, 이를 백중장(百中場)이라고 하였다.
백종(白踵)은 머슴의 발꿈치가 오랜만에 하얗게 되는 휴가일이라는 뜻이다.
머슴을 둔 집에서는 이날 하루를 쉬게 하며 취흥에 젖게 한다.
또 그 해에 농사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워 위로하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백중날에 차례를 지내기도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산소에 벌초를 하고 성묘도 한다. 백중날은 일손을 쉬고 노는 날이지만,
제주에서는 바닷일을 더 많이 한다. 백중날에 살찐 해물이 더 많이 잡힌다고 믿기 때문이다.
백중이라는 말은 백종(百種), 즉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 같다
참당암 지장전
백중 (우란분절)의 유래
‘백중’은 부처님 오신 날과 싯타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찾아 집을 떠난 날인 ‘출가재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날인 ‘성도재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재일’과 더불어 불교의 5대 명절로서‘우란분절’이라고도 한다.
‘우란분재’는 부처님 당시 여름 안거를 끝내고 자자(自咨)를 하는 날인 음력 7월 15일에 지옥에 떨어진 조상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올리는 재이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에 신통력이 뛰어난 목련존자가 있다.
어느 날 목련존자는 어머니가 선행을 닦지 못해 아귀도에 떨어져 배가 고파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목련존자가 신통력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음식이 새까맣게 타서 어머니는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존자는 지옥에 갇힌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비통해하며 그 원인을 부처님께 여쭙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니의 죄업의 뿌리가 너무 깊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시방의 여러 스님들의 위신력(威神力)만이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목련존자에게 모든 스님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점검하는 자자(自恣)일에,
과거 7대 부모와 현세의 부모 중에 재앙에 빠진 자가 있으면 밥을 비롯한 백가지 음식과 다섯 가지 과일을 우란분(盂蘭盆)에
담고 향과 촛불을 켜서 시방의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라고 하셨다.
모든 스님들이 이 공양을 받으면, 그 공덕으로 인해 현재의 부모가 무병장수하며 복락을 누리고 돌아가신 조상은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태어나고 끝없는 福樂을 누린다고 하였는데 이후 佛家에서는 자자를 끝내는 날에
우란분재를 올리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는데, 불교의 4대 명절과 큰 행사였다.
중국에서는 양(梁)나라 무제 때 동태사(東泰寺)에서 처음으로 우란분재를 지냈다고 하며 그 후 당나라에서
크게 성했다가 점차 민간풍습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우란분((盂蘭盆)이란 말을 번역하자면 구도현(救到懸)이란 의미인데 넓은 이 법계에 살고있는 유주무주 영혼들이
육도중에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고있는 것을 이날 부처님의 위신력과 대중의 지극한 정성으로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하여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뜻이다
선운사 지장보살상
중생이란 생로병사의 苦解에서 벗어날 날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저 세상으로 가게되는 것이 이치이거늘
거기에는 생전에 善業과 惡業의 인과응보가 남게 되는법...死後에 꼭 지옥이란 곳을
통과하여 생전에 지은 선.악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 곳이 지옥이다
그 지옥에는 지장보살님이 계시는데 이 분은 지옥에 한명의 중생이라도 고통받는 자가
있는다면 성불하지 안겠다고 하였는데 오늘이 그 지옥문이 열린다는 우란분절이다
뜻깊은 우란분절날에 우리나라 지장신앙의 성지인 선운사로 향한다
선운사에는 天(도솔암 내원궁), 地(참당암 지장전), 人(선운사 성보박물관)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어 우리나라 지장신앙의 성지라고 하며 곁들여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부안의
내소사까지 끼워넣어 성지순례에 나선다
내소사 가람 배치도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633년(무왕 34)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靑旻)이 대웅보전을 지어 중건하였고,
1604년(인조 18)청영(淸映)이 설선당과 요사를 지었다
1902년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1983년 일주문을 세우고 198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으며,
1986년 천왕문을 짓고 설선당과 요사를 보수하였고, 1987년 봉래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8년 요사인
진화사(眞華舍)를 건립하였고, 1995년 수각(水閣)과 종각을 짓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현존하는 당우 및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괘불 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
보종각(寶鐘閣)·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으로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그림도 일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 하고,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화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동종은 1222년(고종 9)변산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든 종인데, 1850년 땅속에서 발굴된 뒤 이 절로 옮겨졌다.
그리고 법화경절본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씨 부인이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 글자를 쓰고
한번 절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필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설선당은 인조 때
승려의 수학 장소로 건축되었고, 봉래루는 1414년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하였으며, 현재 산문(山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입구의 지장암(地藏庵)과 절 후방 1.5㎞ 지점에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절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Daum백과] 내소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본 콘텐츠 인용
내소사 사역(寺域) 내 주차장
내소사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전나무 숲길은 우리나라 100대 아름다운 길에 속하나
순례객들 중에는 연로하신 분이 많기도 하지만 걷기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아
주최측의 갑질(?) 로 일주문 밖의 주차장이 아닌 사역내의 주차장까지 버스로 올라간다
내소사 사적비(좌)와 해안당 대종사 행적비(우)
해안(海眼) 대종사는 부안군 격포리에에 1901년에 태어나 내소사로 한학을 공부하러
왔다가 만허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한국 선불교의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그 분은 훗날 출가의 緣을 이렇게 고백하였다고 한다
난 새벽 종소리와 목탁소리에 꼬여서 머리를 깍았어.
마치 수백년이 되어 가지와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줄기만 남은 고목처럼 알맞게 마른
홍안(紅顔)의 노승이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것은 어느 선인도(仙人圖)에서나 볼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이었지
마치 나는 부귀영화도 싫다. 천당.지옥 그런거 내 알 바 아니다.그런 광경이었으니까
해안당(海眼黨)대종사는 일제 강점기에 선풍(禪風)을 일으킨 스님으로 참선 수행하는 승려들에겐
농사와 참선을 병행하는 반농반선(半農半禪)할 것을 주창하여 승려가 무위도식한다는 비난을 듣지
않도록 함으로써 당대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는 당의 선승
백장 청규의 확립 시켰는데 그 뒤 산기슭에 대종사의 부도탑이 있다.
해안당대종사의 행적비에는 스님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고 비각 아래는 받침대로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용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비희, 이문, 포뢰, 폐안, 도철, 공하, 애자, 산예, 초도라고 한다
비를 받치고 있는 용은 비희로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하는 성질이 있고, 비의 위에 있는 용은 이문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기를 좋아하고 불을 싫어하기에 화재 예방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 천왕문으로 가는길은 벚꽃나무가 도열해 있다.
이곳은 봄에오면 정말 멋있는 곳인데 오늘 우리들을 지도해주실 주수완 박사님
천왕문을 바라보면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으시다
내소사 천왕문
사천왕(四天王)은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한 상(像)으로 즉,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도상화한 것으로 인도에서는 사천왕상에 대한 규범이 일정하지 않아서 귀족의 형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으나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이르러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확립되었다
천왕문에 있는 주련은 이곳에서 출가하고, 평생을 이곳에서 설법한 근대의 선지식인 해안대종사의 오도송이다
내변산 내소사 천왕문 주련
鐸鳴鐘落又竹篦(탁명종락우죽비)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 울리니
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봉황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도다.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만약 누가 나에게 기쁜 소식 묻는다면
會僧堂裡滿鉢供 (회승당리만발공) :회승당에 발우 가득 대중공양 올리리라.
주련은 해안(海眼)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천왕문 들어서기 직전에 주박사님의 사찰 안내는 시작되고...
비파를 들고 있는 동방지국천왕(좌측)은 동쪽의 세계를 관할하면서 인간의 기쁜 감정과 봄을 관할하는 천왕이다
칼을 든 증장천왕(우측)은 남쪽 세계를 관할하면서 인간의 사랑과 여름을 관장한다고 한다
용과 여의주를 든 광목천왕(좌측)은 서쪽세계를 관장하면서 인간의 노여움과 가을을 주관하는 천왕이고
탑과 깃대를 들고있는 다문천왕(우측)은 북방세계를 관장하면서 인간의 즐거움과 겨울을 주관하는 천왕이다
내소사 천왕문을 지나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수령 700여년쯤 당산나무가 참배객을 반기는데
이름하여 할머니 당산나무... 당산나무와 산신각 같은것은 민속신앙이 불교에 습화된 것이다
내소사 경내에 있는 할머니 당산나무
뒤돌아 본 천왕문의 모습
물 한모금 마시고 대웅보전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내소사 보종각(寶鐘閣)
보종각은 정면과 측면이 한칸밖에 안되는 팔작지붕으로 안에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이 있다
내소사 동종은 1222년(고려 고종9년)에 제작된 것으로 내소사의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원래는 변산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던 청림사에 있었던 종이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동종은 높이가 103cm, 입지름이 67cm로 좀 작은 편이며, 항아리를 엎은듯한 고복형으로 종신(鐘身)에는
상대와 하대에 모란당초문(牧丹唐草紋)이 새겨져 있고, 어깨부분에는 이중여의두문(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가 배치되어 있으며, 종의 정상부에는 주형(珠形)이 달린 종신에는 용통(勇筒)을 두고
큰 머리의 용뉴가 있는데,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종신에는 당초문의 띠 밑에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으로 된 유곽(乳郭) 4개를 두고 유곽안에 당초문을 새겼으며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였고, 또 유곽 아래에는 12개의 연잎으로 장식된 당좌(撞座)가 원좌(圓座) 밖에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인 종신 중앙부에는 꽃송이 위로 구름을 표현하고 구름위에 삼존상(三尊像)을 새겼다.
3존상 가운데 본존상은 연꽃 위에 앉아있고, 협시상(脇侍像)은 서 있으며, 모두 동그런 두광(頭
光)을 갖추었다. 그리고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고려시대 범종 문양의
특징과 화려한 장엄미를 드러낸다. 또한 당좌와 당좌 사이에 종의 신상에 대한 3종류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1222년에 새겨지고 1853년 이곳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내소사 동종은 고려 후기의 특징인 입상화문대를 갖추고 있고, 표면의 묘사 수법과 함께 정교하고
사실적인 주조기술로 우리나라 종의 양식을 잘 계승한 것으로 꼽힌다. 그래서 일찍이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표시석
이 동종은 본래 청림사에서 사용되었던 이 동종은 청림사 폐사 후 땅에 묻힌 걸 어느 농부가 발견 했는데
종이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자 변산에 있는 절 이름들을 대면서 쳐보다 내소사요! 라고 외치니 드디어
종이 소리가 나 지금의 내소사로 옮겨졌다는 말이 설이 있다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높이 103㎝의 부안 내소사 동종 (扶安來蘇寺銅鍾)으로,
원래 청림사에 있던 종을 1856년(철종 7)에 현위치로 옮겼으며 구리 700근을 사용하여
1222년에 제작하였고, 한중서(韓仲敍)라는 주종장의 이름도 확인되었는데 그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장인으로, 시위군(侍衛軍)이라는 말단 군사에서 정7품 관직으로 출세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로, 내소사 동종 이외에도 무술명 범종(1238), 복천사 반자(1238), 임자명 반자(1252) 등
다양한 작품의 제작에 참여 하였다.
내소사 동종은 전통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입상화문대와 음통의 세부 장식에서 고려만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어 뛰어난 주조 기술이 반영되었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원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명문을 통해 봉안사찰, 조성시기, 주종장 등 제작 전반에 대한 내용도 파악 되었으며,
고려시대 13세기 범종의 양식과 장인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된다고 한다.
용통에 붙어 있는 구슬과 입화 장식에서 고려시대 종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전체 외형은 종의
입구가 좁아지는 형태이며, 단룡(單龍)의 종뉴와 구슬 장식이 있는 음통을 갖추었고, 천판에는 입상화문대가
있고 상대와 하대는 당초문으로 장식 하였으며 상대 아래에는 연곽이 있고 그 하단에는 당좌를 배치하였다.
당좌는 뾰족한 꽃잎을 이중으로 둘러싼 형태로 화려하게 표현되었고, 몸체의 중심에는 삼존불좌상이
네 군데 부조되었으며 활짝 핀 연꽃 위로 구름이 있는 자리에 삼존불이 묘사되었는데, 본존은 연화좌에 앉아있고
협시보살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서 있으며 삼존상의 두광 뒤쪽에는 구름의 꼬리가 묘사되어, 천상에서
내려오는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며 그 위에 묘사된 천개에도 바람에 날리는 술 장식이 표현되어, 삼존불의
움직임을 강조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조각 솜씨가 돋보이며, 음통, 입상화문대, 당좌 등의
세부장식도 화려하고 섬세 한데 종의 몸체 하단에는 추가된 기록을 포함하여, 세 종류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원래는 청림사에 봉안하기 위해 주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내소사 봉래루(蓬來樓)
천왕문을 지나니 봉래루가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면서 순례객을 맞이하는데 이곳은 대웅전을
돋보이게 하면서 외지인이나 스님들의 휴식처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조선 태종 12년(1414)에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였으며 이들 초석(礎石)의 배치는 전면 5칸 12.23m로 각 기둥 사이가
215-244-305-244-215cm로 중앙의 칸으로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측면은 외열 기둥 사이가 3칸으로 6.20m이며 각 기둥 사이는 215-190-215cm의 간격으로 되어 있지만
내부 2칸은 각 칸이 310cm를 유지하고 있다
내소사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자연석 추춧돌을 사용한 바람에 주춧돌 위에 올려놓은 기둥들도 짧았다 길었다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삐뚤고 짧은 나무토막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이렇듯 훌륭하게 재목으로 쓴 선조들의 지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봉래루 2층 누각에는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1856)’, ‘변산 내소사 사자암 중건기(1856)’‘변산 내소사 영세불망기(1875)’
등의 편액과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의 시문 “題邊山蘇來寺”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워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다.
하지만 대웅전 마당에서 이어지는 누각 다리가 아쉽게 막혀있어 봉래루 2층으로는 접근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내소사 산수유
봉래루를 지나 절 마당에 들어서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단청이 전혀 되어 있지않아 소박한 절집인데 범여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절이다
꾸미지 않은 그 순수함 때문에...내소사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1년)에 중건되었는데
그 당시 유교 건축의 영향으로 자연석 그대로의 주초위에 세워져 더욱 더 정감이 가는 느낌이다
내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원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 신라의 혜구(惠丘)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꿨다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이 절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과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가운데 정지상이 지은
〈제변산소래사 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있고, 이규보의 〈남행일기 南行日記〉가 있는데
모두 '소래사'로 기록되어 있어 언제 '내소사'로 바뀌었는지 분명치 않다.
1633년(인조 11) 청민(靑旻)에 의해 중건되었고 1902년 관해(觀海)에 의해 수축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법화경절본사경(보물 제278호),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가 있고 그밖에 설선당·보종각·연래루·
3층석탑 등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
(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 않는다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扶安來蘇寺大雄寶殿)으로, 1633년(인조 11)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圓柱)을 세웠으며 기둥의 밑부분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하였으며,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과
내5출목(內五出目)으로서 기둥 위에는 물론 주간(柱間)에도 공간포(空間包)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며, 주두(柱頭: 대접받침)는
굽면이 사면(斜面)으로 끊기고 굽받침이 없으며 소첨차(小檐遮)나 대첨차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조각 되었으며,
초제공(初諸工)에서 3제공까지의 살미첨차(山彌檐遮)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4제공은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대웅보전 후불 백의 관음상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으며 안팎 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난 아직 믿음이 부족한 지 백의관음의 눈이 돌아가는게 보이질 않는다
천정 중앙에 자리한 우물천정은 48개 사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 모두 연꽃과 극락조(極樂鳥)
등의 새가 새겨져 있다. 단청은 좀 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에 전혀 재를 뿌리지 않는다.
천정 대들보 위에는 대웅전을 지키는 용의 머리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고
다른 용머리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이들 외에도 10여 종의 악기가 천정과 대들보 사
이에 그려져 있는데, 천정을 장식하는 이들은 모두 부처의 설법(說法)을 듣고 기쁜 마음을 나타
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바닷게 여러 마리를 두어 이곳이 해중사찰(海中寺刹)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천정 전체를 조그만 불국토(佛國土)로 꾸민 셈이다
비어있는 공포
내소사 대웅전은 못을 쓰지않고, 나무토막을 깍아맞추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청민선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목침덩이만하게 토막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이 그 중에 한개를 감추어 버렸다.
나무깍기를 마치고 토막수를 헤아려 본 목수는 자신의 실력이 법당 짓기에 부족하다며
일을 포기하려 했다...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놨지만 목수는 부정탄 재목을 쓸 수없다
하여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법당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앞, 천장만 왼쪽에 비해 나무 한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법당 내부의 단청도 한군데 빠진데가 있다.
법당 건물이 완성된 후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하면서 백일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부탁하였다...99일째 되던날, 이번에도 궁금증을 참지못한
사미승이 몰래 안을 들여다 보고 말았다.
법당 안에서 금빛 새 한마리가 입에다 붓을물고 그림을 그리다가 사미승이 보는 것을 알고는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법당 좌.우에 쌍으로 그려졌어야 하는 용과 선녀의 그림이 오른쪽에는 그려지지 못했다고 한다
내소사 대웅보전 삼존불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중심로, 우측에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보처(補處) 보살인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좌측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내부의 공포(貢包)는 살미첨차가 모두 판형(板形)으로 되어 그 끝에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장식하고 있으며, 가구(架構)는 대들보 앞면에서는 평주(平柱)에 걸고 뒷면에서는
내고주(內高柱)에 걸었으며,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게 하였는데 종보부터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으며, 양측면의 평주에서는 충량(衝樑: 대들보의 직각방향으로
얹힌 짧은 대들보)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었는데, 보머리에는 용이 목어(木魚)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마주하고 있는 보머리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도 한다
내소사 영산회괘불탱(來蘇寺 靈山會掛佛幀:보물 제1268호)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로서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화면 가득 그리고
석가모니불 우측에 보현보살, 세지보살, 아미타여래를, 좌측에 문수보살, 관음보살, 다보여래를 배치하였다.
상들은 둥근 얼굴에 원만한 체구를 지녔으며 뺨과 눈두덩, 턱밑, 손발에 옅은 분홍색을 써서 화사한 느낌을 준다.
이 불화는 1700년(숙종 26)에 조성된 영산회괘불화(靈山會掛佛畵)이며 불화의 내용은
『법화경(法華經)』이 설해졌던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의 설법모임을 도설화(圖說化)하였다.
괘불화는 주로 법당 바깥에서 베풀어지는 큰 의식이나 법회에서 사용되었는데, 영산회괘불화의 경우는
특히 영산재(靈山齋)에서 사용되었고,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내소사(來蘇寺)에 소장되어 있다.
대웅보전 뒷쪽에 있는 괘불탱 보관함
내소사 대웅보전 문살
정면 창호는 2짝, 4짝, 2짝으로 구성되어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 연꽃 국화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수백년이 흐른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 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자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8짝의 문짝마다 연꽃, 해바라기, 국화 등 서로 다른 형태의 꽃무늬로 엇갈리게 배열을 해놨다.
현존하는 꽃살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란다
문짝을 자세히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법당안의 보살이 어찌나 눈치를 주던지... 제대로 찍질 못했다
내소사 대웅보전 외부 공포의 모습
설선당의 편액도 이광사 선생의 글씨란다
내소사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나 신라시대의 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다시 상륜(相輪)을 올린 형태로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의 높이는 3.46m, 폭 1.43m로 기단과 탑신부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경사가 급해 보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석재 2개로 상륜부를 이루고 있다
관심당(觀心堂)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편에 있으며, 1911년 관해선사가 선실로 건립하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내소사 설선당(說禪堂)
설선당은 정말 건축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이다.
뒷쪽 산 능선과 조화를 이루면서 설계한 지붕... 관음봉(능가산)을 살리면서 조화로운 절집이다
내소사 설선당(說禪堂)과 요사(寮舍: 전북 유형문화재 제125호)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설선당과 요사가 있는 두 건물은 서로 별개이지만 서로 이어져 있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1640년에 청민선사가 세운 것으로 전면 중앙에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두어 '回'자형의 특이한 모습을 이룬다. 그리고 안마당에는 우물이 닦여져 있어 생활의 편리를 도모했다
설선당은 중앙에 우물천정을 배치한 구조로 동쪽 측면 1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있으며, 주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썼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설치했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거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승방(僧房
)과 공양간, 부엌으로 쓰이며, 2층은 마루로 식량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 벽면에 환기창
을 설치했다. 이들 건물은 서로 높낮이가 다르지만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다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초석만을 사용했고, 설선당 동쪽과 요사 서쪽 서까래의 일부를 잘라내고 건물의 용마
루를 끼워 지붕을 서로 맞추어 세운 점이 눈길을 끈다
설선당 중앙에 걸린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가(名筆家)로 크게 위엄을 떨친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범종각(梵鐘樓)
내소사 대웅전 우측에 있는 범종각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하는 목어(木魚)와 허공을 나는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운판(雲版)이 있으며, 법고(法鼓)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법음을 전하며,
범종(梵鍾)은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여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는 무설당(無說堂)
설설당으로 통하는 자비문
조사당(祖師堂)
내소사를 빛낸 여러 고승(高僧)의 진영(眞影)이 봉안된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삼성각이었으나 2010년 이후 조사당으로 이름을 갈고 고승의 진영을 봉안했으며, 삼성각에 봉안된
존재들은 뒤에 따로 마련된 거처로 모두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41년에 능파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1986년과 1993년에 우암혜산이 보수했다
조사당 내부의 모습
지장전에서 바라본 대소사 전경
무설당(無說堂)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소사 지장전
21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명부10왕을 봉안한 전각으로 2010년 건립하였다
오늘이 불교의 5대 명절인 우란분절이라 기도객들로 인해 발디딜 뜸이 없어 포기하고 삼성각으로 향한다
지장전의 외벽 벽화
삼성각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내소사 대웅보전의 모습
내소사 삼성각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으며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는데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다 삼성각의 현판은 구당의 글씨이다
삼성각 내부의 모습
삼성각 외벽 벽화
진화사(眞和舍)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내소사 지장전에는 아직도 기도객들이 많다
법당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예를 올리고 일주문으로 향한다
내소사의 명물인 산수유 나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집 내소사를 뒤로하고...
봉래루 지나...
할머니 당산나무 밑에서...
출가한 울 딸의 안녕을 위해 기와불사도 한다
할머니 당산나무 밑둥치의 모습
천왕문을 나오면서 뒤돌아서서 선 채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내소사 관람을 마치고 벚꽃길을 걸어나오다가 우측의 내소사 천원지방과 부도전으로 향한다
천원지방에서 바라본 부도전의 모습
내소사 부도전(浮屠殿)
부도전(浮屠殿)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부도가 모여 있는 근대의 선지식인 해안(海眼)대종사의
부도를 찾을수 있어, 해안당 봉수대종사(海眼堂 鳳秀大宗師)는 1901년생을, 호는 해안이며,14세에 내소사
만호스님을 은사로 출가,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20년 불교중앙학림을
수료했으며 중국의 북경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연구했고, 귀국 후 내소사 앞 입암리에 계명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 및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백양사 동래사 순회포교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교화활동을 폈다.
1945년 금산사 주지취임 이후 서래선림을 개설하여 참선지도에 전념했으며, 1950년 다시 변산 서래산림으로 옮겨
토굴에서 두문불출하며 정진 하였으며, 1974년 4월 1일 내소사 서래선원에서 창립5주년 기념 7일 정진법회를 마친
다음 세수 74세 법랍 57세로 입적 했다.
부도전의 모습
9기의 부도 가운데 앞줄 4기는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있으나 뒷줄 5기는 미상(未詳)이다
앞줄은 왼쪽부터 능파당, 만허당, 관해당, 해안당으로 근대의 부도이며 뒷줄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능소화도 참으로 곱게 피어있다
천왕문을 나와 벚꽃길을 걷다가보면 좌측으로 사각으로된 연못이 보인다
내소사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 우주관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옛 연못은 네모나고,
그 안에 있는 섬은 둥글게 만들어 났는데 지난달 들렸던 선암사 삼인당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개 사찰 연못은 연지(蓮池)와 영지(影池), 둘 종류로 나누게 되는데,
연지(蓮池)는 연꽃을 비롯하여 수생식물이나 물고기를 조성한 연못이며,
영지(影池)는 절 입구에 조성하여 일주문 가까이에 있는경우가 많으며,
수행자들에게 끊임없이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기를 묵언으로 촉구하고 있어서,
마음이 맑고 고요하면 삼라만상의 이치를 볼 수 있는 깨침의 경지가 되어서 영지에 비친
경관을 보는 것은, 곧 마음의 바탕인 불성(佛性)을 보는 것과 같다.
내소사를 빠져나와 전나무숲길을 걷는다
내소사의 특징인 600m에 달하는 100년생 전나무숲길은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세상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일명 ‘해탈의 길’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00選에도 들어간다
내소사 일주문 옆에 있는 할머니 당산나무
내소사 일주문 앞에는 커다란 당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할머니 당산나무라고 한다
높이는 약 20m이고, 둘레는 7.5m, 수령은 약 1,000년쯤 된다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나무는 내소사 마당에 있는데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독경을 하며 입암마을 사람들과 함께 당산제를 지낸다. 해방 전까지는
줄다리기를 하고 그 줄로 당산나무에 옷을 입히기도 했으나 지금은 인줄만 쳐 놓고 제를 지낸다.
할머니 당산나무 앞의 모습
당산제 안내판
아침에 차량으로 가는 바람에 내려오면서 일주문을 만난다
내소사(來蘇寺)일주문(一柱門)
절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의 문으로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로,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세워진 사찰의 경계이기도 하는 문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혜구(惠丘)두타 스님이 이 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며,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내소사 일주문 편액... 용두 2개가 일주문을 외호하고 있다
일주문 옆에 있는 내소사 안내판
입암마을 버스 정류장
이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순례객들이 타고온 버스를 타고 점심식사 장소로 향한다
점심공양
내소사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고창 방향으로 30분정도 가다가 길가에 있는 쌈밥집에 들렸다.
미리 예약하여 식당에 들어서자 쥔장이 직접 재배했다는 상치를 비롯한 야채가 나오는데
한결같이 못 생겼다... 농약을 안쳐서 그렇단다
음식값 대비 가성비는 엄청나게 좋다...음식도 깔끔하고 맛도 있고 담에 기회가 되면 다시한번 오리라
식사를 하고 나오니 고창읍내 뒷쪽으로 영산기맥길이 펼쳐진다... 개고생하면서 저 산을 걸을때가 엊그제 같은데...
점심 공양을 마치고 선운사로 향한다...8년전 주지스님이 그대로 계실란가
그 당시 학교 동호회에서 2일간 이곳으로 교수님들과 함께 골프치러 왔다가 대접을 융슝하게 받았는데
벌써 옛날이 되어 버렸으니...20여분을 달린끝에 선운사 경내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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