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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변산지맥(終)

변산지맥 제2구간 - 송촌마을 도로에서 바드재까지

by 범여(梵如) 2019. 2. 25.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산꾼의 길

 

☞ 산행일자:  2019년 02월 24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지독한 미세먼지...그리고 완연한 봄날

산행거리: 도상거리 30.6km / 9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송촌마을회관-송촌마을 도로-고흥류씨 묘-y갈림길-42.6봉-신광사-신림육교-묘지-23번 국도

                 관동버스 정류장-수침마을 입구-수침 버스정류장-내사마을 입구-63.1봉-사천 삼거리-선운산I.C입구

                 꿈나무 어린이집-흥덕파출소-흥덕경로당-흥덕중학교-배풍산-이동통신탑-갈림길-묘지-전주이씨 묘지

                 성은목장-현대상하목장-신성레미콘-담양국씨세소-신기 삼거리-노동마을 입구-대농주유소-묘지봉-사거리

                 폐기물 처리장-동래정공 묘지-23번 국도-(주)하스프 공장-신송리 버스정류장-농협경제사업장-조경수 유통센터

                상연마을 입구-광산김씨 세장비-연봉재 입구-남당 버스정류장-신덕 삼거리-장미주유소-모충사 입구

                신정마을 입구-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원동고개-평강채씨 세장비-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화전마을

                2번군도 사거리-장동교-710번 지방도-표가네 찐빵-오일뱅크 주유소-삼거리-영전삼거리-갈림길-물탱크

               대성농장 입구-26.3봉-기독교인 묘지-물탱크-23번국도-사거리-용사.만회마을 입구-용사.만회마을회관

              사랑감나무 체험관 입구-밀양박공 묘-갈림길-113.4봉-안부-122.6봉-211.7봉-259.5봉-279.6봉-사창재

              329.9봉-328.1봉-암봉-조망바위-갈림길-안부-상여봉-노승봉-272.2봉-279.7봉-298.4봉-바드재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신림면, 흥덕면 / 부안군 줄포면, 보안면, 상서면

 

서울은 아직까지 춥고, 미세먼지가 아주 심한데 남녘땅에는 봄바람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는 아프다는 핑계로 아직까지 봄꽃을 전혀 하지 보지못해 안달이 날 지경이다.

해마다 들렸던 통도사 자장매화(홍매화) 친견할 기회는 놓쳐 버린듯 하고 김해건설공고의

와매화는 어떤지 모르겠다...그래도 님도보고 뽕도 따려면 아무래도 변산쪽이 나을듯 싶다.

2017년 12월에 안내 산악회 따라서 변산지맥 1구간을 끝냈는데 변산바람꽃과 노루귀,

복수초가 있는 내변산 탐방안내소와 청림마을은 아무래도 3구간이나 되어야 할 듯 싶다.

이번주에 2구간을 빡세게 끝내고, 3월초에 3구간을 짧게하고 바람난 변산여인(?)을 보러갈 계획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수서역(04:45)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역이 있다는 건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 기차를 타려면 서울역이나 용산역을 갔어야 했는데 내가 사는 곳에는

그곳을 접근하려면 교통이 상당히 불편하여 가급적 철도를 잘 이용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집에서 수서역으로 가는 버스가 다니고 있어 편하게 수서역에 도착한다

수서발→정읍행 열차표

수서에서 목포로 출발하는 05시10분 열차에 올라 정읍으로 향한다.

오늘 내가 걸어야하는 변산지맥 2구간은 거의가 도로와 들판이긴 하지만 30km가 넘는 거리이다.

예전 같으면 전날 정읍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산행을 시작할려고 생각했지만 SRT 열차를 알고

부터는 구태여 찜질방에서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수서에서 출발하여 1시간 20분이

채 안 걸리는 시간에 정읍에 도착한다

정읍역(06:28)

정읍역에 도착하였는데 아직 어둠속이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고창군 신림면 송촌마을회관으로 향한다.

고창군 신림면 지역은 행정구역은 고창이지만 생활권은 정읍인 셈이다

정읍에는 고창으로 가는 택시를 타면 지역 요금을 별도로 받지 않지만 고창에서

정읍으로 넘어오면 구간요금을 별도로 받는다고 한다

송촌마을회관(07:00)

고창군 신림면 송룡리에 있는 송촌 마을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송촌()과

용암리()에서 ‘송()’자와 ‘룡()’자를 따 ‘송룡()’이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의견은 농암리()의 ‘농()’을 ‘용()’으로 잘못 따 송용리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

는데, 현재 행정리로 농암()마을이 있고, 마을 이름의 유래가 기록으로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해 보인다.

 

1750년경 고성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흥덕군() 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내동()·송촌·신송리()·농암리 일부와 일서면(西) 수침리()의 일부가

병합되어 송용리가 되었고, 신림면에 편입되었다.

송촌마을과 마을 유래비

2년전에 걸었던 수산(秀山)의 모습

송촌마을 도로(07:15)

산행을 시작하다

김해김씨 산정가족묘원 방향으로 올라간다

기독교인 묘지도 지나고...

2017년에 걸었던 수산을 바라보면 밭 가운데를 가로 질러서 간다

송촌마을회관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따라서 계속 이어지는 변산지맥길

이른 새벽부터 들녘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고 희미한 들판 가운데로 고부천이

흐르고 있는데, 고부천(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에서 발원하여

동림저수지를 지나 동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하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부천이 정읍시 고부면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어,

고부면 지명이 반영된 듯 하다. 고부천()에 눌제가 있어서 눌제천() 이라고도

하는데 상류는 옛 이름이 오천() 즉 가무내인데 현재의 이름은 흥덕천이라고 해야

옳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동진강 제2지류인 고부천은 신림면 도림리 무명산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약 3㎞를 흘러

내려가서 신림면 송용리를 지나 북쪽으로 급회하여 흐르며, 약 6㎞ 흘러 내려가서 좌안으로

가서 동림저수지로 유입한다. 성내면 덕산리를 지나 정읍시를 좌측으로 흐른뒤 동진강과 합류한 뒤

부안군 동진면에서 동진강 하구에서 합류된다.

그 뒤 새만금 지역의 서해로 흘러든다. 고부천은 고창군 내에서 신림면·흥덕면·성내면을 지난다.

동진강 유역은 전라북도의 벼농사 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이다. 이는 김제()의 옛 이름인 벽

골()이 화향()의 이두음()이었고, 김제도 벼를 황금과 같이 귀하게 여겼던 농본사상에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삼국 시대에 축조된 김제시 부량면의 벽골제()와 정읍시 고부면의

눌제() 등은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수하기 위한 수리 시설이다.

예로부터 벽골제와 눌제는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삼호()로 불렸다.

동진강 유역은 동학 농민 혁명의 봉기 발단이 된 주 무대이기도 하는데,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쌓고 수세를 너무 많이 거두어 들인데서 발단이 된 동학 농민 혁명이었다.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정읍시 고부면 방향으로 가다가 동진교를 건너 하류쪽으로 바라보면 만석보를 쌓았던 흔적을 대할 수 있다.

고흥류씨 습득공파 묘(07:22)

묘지 뒷쪽이 맥길이나 그냥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Y갈림길(07:27)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도로에서서 바라본 농암()마을

고창군 신림면 송용리에 있는 농암()마을은 마을 앞 장등에

용바위가 있었는데 그 용바위를 보고 농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묘지가 나오고...

인삼밭을 지난다

밭을 지나 묘지로 향한다

42.6봉(07:33)

지도상에는 엄연히 족보있는 봉우리이고 삼각점이 있다고 했는데 삼각점은 사라지고

김해김공 묘지가 쥔장 행세를 한다...삼각점을 관리하는 국립지리원은 도데체 뭣하는 곳인지?

농로를 따라서 간다

방장산 너머로 일출이 시작되건만 미세먼지로 인해 흐리기만 하다

밭 가운데로 가로질러 내려가니...

태양광 시설이 있는 2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신광사(07:38)

태고종 종단 소속의 사찰이다

범종각과 요사채

도로에서 선 채로 신광사 미륵보살에게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오늘 하루 무사 산행을 기원하면서...

도로를 따라서 길을 떠난다

축사를 지나니 갈림길이 나오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도로에 내려서니 만화리와 임리의 표시석이 있는 23번 구도로 내려선다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에 있는 임리()의 이름에서 ‘숲말’이라고 하여 무림리()가

되었고, 임리()마을은 숲이 우거졌다 하여 임리라 명명하였으며, 만화()마을은

뒷산에 매화낙지 혈이 있다 하여 명명된 마을이다.

무림리는 신림면의 중심지로서  신림초교, 신림중학교가 있고, 기관으로는 신림면사무소,

신림면보건지소, 신림우체국, 흥덕농협 신림지점, 고창경찰서 흥덕지구대 신림치안센터 등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임리마을에 고흥유씨 삼효자 정려()가 있다.

또 수령이 약 200년 되고 높이가 10~15m의 소나무 4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만화마을에는 1949년에 건립된 만화서원()이 있다. 무림리 서쪽에는

국도 23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남쪽에는 지방도 14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각각 지나고 있다

신림육교(07:47)

육교 옆에는 신림초등학교가 있고 육교 아래로는 강진에서 시작하여 함평, 영광, 고창에서

부안, 김제를 거쳐 천안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가 지나는데 생각보다 교통량이 많다

23번 국도 고창쪽의 모습

23번 국도 북쪽의 모습

CU편의점과 알뜰주유소가 보인다

육교에서 내려서니 신림초교 담벼락이 길을 막는다.

학교 안쪽이 맥길이나 그냥 인도로 향한다

북쪽으로 알뜰 주유소와 한국타이어 간판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신림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하여 뽕나무밭이 있는 저 능선이 지맥길 능선이다.

마루금에 복귀하여 포장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흐미~~~ 올해 처음으로 봄꽃을 구경한다

寤寐不忘 그리던 반가운 매화꽃이 아닌가

해마다 찾아갔던 통도사의 자장매화(홍매화)와 김해건설공고 교정의

와매화(臥梅花)는 올해는 아프다는 핑계로 찾아가지 못했더니만 이렇게 안달이 났다.

1주일만 기다려다오...다음주에 대포를 메고와서 너의 멋진 모습을 담아 가리다

백매화도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묘지(07:55)

제단석에 망자의 성명을 한글로 표기해놨는데 후손들이 먼 훗날 뿌리(본관:本貫)나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비포장 도로를 따른다

등로 우측에는 23번 국도가 나란히 지나가고 있다.

신림육교에서 헤어진 23번 국도를 다시 만난다

23번 국도(08:00)

관동 버스 정류장(08:02)

23번 국도가 지맥길이다...23번 국도에 들어서자마자 관동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관동마을 표시석

고창군 신림면  관동마을이 있법지리(法止里)는 원래 ‘법줄()’이라고 불렸으나, 무성한 숲으로

호랑이 피해가 심해 마을을 떠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법() 자()는

불가()에서 호랑이를 뜻하고, 줄() 자()는 숲이 무성하다는 뜻으로, 줄자를 지() 자()로

고치면 피해를 면할 수 있다고 하여, 법지()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법동’·‘법지’·‘법지동’이라도

불렸다고 하는데, 자연마을로는 강변, 관동, 법동, 새터, 서법, 점촌, 통정 마을이 있다

저 멋진 산은 아마도 화시봉(403.6m)인듯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시산은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화시'라는 지명과 관련해

여지도서」에 "화시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반등산(방장산)으로부터 시작해 북쪽으로 소요산에

이르며 전해지는 이야기로 산꼭대기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홀연히 저절로 쪼개져 불화살처럼 날아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대동여지도」에 고창현과 흥덕현 경계에 있는 沙瑟峙에서 북서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지다 화시산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도「해동지도」「광여도」등의 지도에 두 현의 경계부에 '화시산'이 기재되어 있다

전봇대에 걸려있는 준.희 선생의 시그널...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선답자의 흔적을 만난다

고창갈비탕집은 쉬는 날인가보다

수침(砧)마을과 외사((沙)마을 입구 표시석(08:08)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에 있는 수침마을은 본래 용수동으로 불리다가 갈곡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긴 일이 있은 후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고

외사마을은 사천 바깥쪽을 이루는 마을이다

외사마을 입구 옆에는 송파신씨 불망비와...

국회의원을 지낸 신용욱선생 기념사업 현성비가 있다

수침(砧) 버스 정류장(08:10)

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나도 늙어간다는 얘기인가

흥덕으로 가는 길이 400m가 남았다

내사(內沙)마을 입구(08:13)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에 있는 외사마을은 1800년 초 가뭄이 극심할 때 이 지역은 농사에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았는데, 현감이 그 사실을 알고 마을 명칭을 외사천으로 부르게 하던 것이 고쳐진 것이다

외사마을 입구를 지나면서 대명산업이 보인다

다시 23번 국도를 버리고 황토밭으로 올라선다

태양광 단지 옆으로...

대밭 사이로...

길은 보이질 않고...

대밭에는 호랑가시나무가 많이 보인다

누굴 겁박하는거야

대밭을 지나니 절개지가 나오고 과수원을 만난다.

선운사를 품고있는 선운산 능선이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아이 깜짝이야...땅바닥에 진짜 덫과 올무가 보인다

잡목의 저항이 엄청 심하여 능선으로 진행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우측 아랫쪽으로 걷는다

63.1봉(08:27)

산꾼들이 잘 올라오지 않은지 시누대가 밀림을 이루고 있다.

시누대가 밀림(?)을 이루고 있어 내려갈 구멍이 안 보인다

시누대와 사투를 벌이며 내려서니 소나무 조경지가 나온다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도로로 향한다 

등로 우측에는 사천 삼거리가 보인다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사천리(里)는 동쪽은 낮은 언덕지형이고 서쪽은 갈곡천이 흐르는

하천 유역의 평야지역이며 적교, 수침, 외사, 내사, 야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수침은 본래 용수동으로 불리다가 갈곡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긴 일이 있은 후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다. 외사는 1800년 초 가뭄이 극심할 때 이 지역은 농사에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았는데, 현감이 그 사실을 알고 마을 명칭을 외사천으로 부르게 하던 것이 고쳐진 것이다.

T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벽돌공장인 흥덕기업이 있다

조금전에도 내사마을 표시석을 만났는데 이 지역은 유난히도 마을 표시석이 많이 보인다

선운산I.C입구(08:37)

흥덕기사 식당을 지나고...

선운산 I.C로 향하는 이정표를 만난다.

흥덕면소재지로 가기전에 우측의 소나무 조경단지로 올라선다

소나무 이식작업이 한창이다

밭을 가로질러 꿈나무 어린이집쪽으로 향한다

꿈나무어린이집(08:44)

흥덕면소재지의 모습

흥덕면은 고창군 북동부에 있는 면소재로 백제 시대에 흥성현, 고려 시대에 장덕현·흥성현,

조선 태조 때 흥덕현이었다. 조선 말기 현내면()이 되어 한림()·녹사()·동문(

동부()·서문(西)·서부(西)·복룡()·신조()·교촌()·오태()·석호()·치리(

구동()의 13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북면()의 주항()·회목()·사포(

대촌()·후포()·용두()·석우()·신송()·연장()·용소()·목우()·신덕(

연지()·노동()·미동()·구송()·석신()·동림()·동신()·관동()·회화정(

하남당()·외남당()·내남당()·대양()·제내()·용반()·중남당()·오정()의

 29개 동리, 일동면()의 산양()·관동() 각 일부, 부안군 건선면()의 신흥()·신정()

일부, 고부군() 서부면(西)의 중리() 일부를 병합하여 흥덕면이라 하고 고창군에 편입하여

동사·흥덕·교운·오호·치룡·사포·후포·신덕·신송·석우·하남·용반의 12개리로 개편하였다.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벽사면()의 사천(), 석교()의 2개리를 병합하였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따라 신림면 제하리, 1987년 송암리를 병합하였다

 

인근의 성내면·신림면·부안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국도 22호선이

동서로, 국도 23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문화 유적으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인 흥성동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인 흥덕당간지주, 흥덕향교(),

흥덕읍성()[지금의 배풍산공원] 등이 있고, 국보급 판소리 명창 김소희() 생가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흥덕면 출신의 채홍국() 등 90여 명이 호벌치대첩의 성과를 올렸던 남당 회맹단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흥덕에서 남포리까지의 지도(조진대님 자료인용)

꿈나무 유치원을 나오니 우측에 차마고도 찻집이 보이고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흥덕초교 입구를 지나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흥덕파출소(08:55)

파출소 옆 골목으로 향한다

흥덕경로당(08:56)

경로당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지니 흥덕중학교가 나온다

흥덕중학교(08:58)

정문으로 들어와  뒷쪽으로 올라가니...

배풍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이고...

호젓한 등로를 따라서 배풍산으로 향한다

배풍산 둘레길(09:06)

잡목을 헤치면서 절개지를 치고 오른다

체육시설이 있으나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운동하는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고 운동기구들은 죄다 녹이슨 채로 방치되어 있다

배풍산 정상에 있는 배풍정의 모습

배풍산(山:110.1m:09:10)

고창군 흥덕면 치룡리와 교운리·흥덕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은 넓은 공터에

각종 체육시설과 배풍정이라는 2층 팔각정, 흥덕 배풍정 조성비와 3등 삼각점이 있다.

 

배풍산은 산의 형상이 배가 복주()[엎드려 사룀]한 형이라 하여 배풍산이라 부르고 있다.

흥덕면은 지형이 배의 형국이라서 무거운 짐을 싣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신분에 관계없이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지붕을 하는 풍습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식수도 마을 주변을 흐르는 시냇물을 이용하였다.

배풍산은 흥덕면의 주산이고, 흥덕면 소재지에 위치해서 흥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풍산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의 내장산 까치봉과 백암산 사이의 순창새재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영산기맥이 입암산을 지나 방장산을 가기 전 북쪽으로 나눈 변산지맥이 뿌리다.

이 변산지맥은 곧바로 북쪽으로는 두승산으로 산줄기 하나를 나누어 놓고, 다시 배풍산을 지나

변산과 부안군 방향으로 이어지며 물줄기는 동쪽의 고부천을 통해 동진강에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고,

서쪽은 갈곡천을 따라 서해로 흘러든다.

 

흥덕현이 있을 때 배풍산에 토성이 축성되었는데, 북쪽 중턱에는 토성의 흔적이 있고, 기와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며,『호남읍지()』에는 토성 동쪽에 위치한 홍동은 동부라고 부르다가, 1945년부터 홍동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배풍산에는 부안댐 광역 상수도 사업으로 고창군 일원에 수도물을 공급하는 흥덕배수장이

설치되어 있고, 정상에는 흥덕면민을 위한 체육 단련 시설, 잔디광장, 팔각정이 조성된 근린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배풍산에 올라가가는 초입에 흥성동헌이 있다

배풍산 정상 삼각점(△무안 310 / 1984 재설)

인증샷

배풍산에서 이곳 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배풍정 아래로 내려서니 화장실이 나오고 우측 둘레길로 향한다

이동통신탑(09:28)

갈림길(09:30)

흥덕배수장이 나오는 갈림길이 2개가 있는 맨 좌측으로 내려선다 

도로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잡목과 대나무숲의 저항이 엄청나게 심하다

천신만고 끝에 대나무 숲을 빠져 나오니...

밭이 나오고 묘지가 보인다

묘지(09:42)

능선 좌측 아래에도 묘지가 보인다

대밭 사이로 내려가니...

전주이씨 묘지(09:43)

전주이씨 효령대군 19세손 묘지는 봉분이 있고 부인 선산김씨는 봉분은 없고 와비(臥碑)로 되어있다.

효령대군이면 태종의 둘째 아들이고 세종대왕의 형이니 이 분은 왕손(王孫)이네그려

억새밭의 태클을 이겨내고 내려서니 축사가 보인다

억새밭을 지나 목장으로 들어간다

성은목장(09:49)

선운산 능선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이는 산은 경수산인듯...

성은목장을 나와 도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또 다른 목장이 나온다

베낭을 메고 걸어가는 범여를 소들도 궁금한 모양인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상하현대목장(09:55)

목장을 지나니 레미콘 공장이 보인다

신성레미콘(09:58)

양파밭이 멋진 예술로 보인다

신성레미콘 공장을 지나 시멘트 도로를 따른다

소나무가 보이는 곳이 맥길이나 그냥 도로를 따른다

다시 23번 국도를 따라서 변산지맥길을 이어간다

담양국씨세소(10:03)

담양 국씨(潭陽 鞠氏)의 시조는 국주(鞠周)는 송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였는데, 금나라가 송나라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간 정란(政亂)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1128년(인종 6)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는 고려에 입국하자마자 인종을 배알하고 군신의 예를 취하였는데, 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국주에게

감정관(監正官)을 제수(除授)하여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원(中原)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금나라에서 송나라를 제압하고 고려에게 군신의 관계로 대할 것과 많은 공물(貢物)을 요구하였는데,

인종은 국주를 금국봉사(金國奉使)로 임명하여 금나라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국주는 왕명을 받고 여러 번 금나라에 왕래하면서 군신관계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외교적으로 평등관계를

맺고 귀국하였다. 이에 인종은 국주에게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성군(秋城君)에 봉하고 담양(潭陽)을 본관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

신기삼거리(10:04)

신기 삼거리에 있는 안내판들

국악 명창인 김소희 선생 생가를 지난다

김소희 선생은 전북 고창군 흥덕에서 태어난 만정 김소희(晩汀 金素姬 본명:김순옥)는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웠다. 

1917년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하고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춤.기악을 두루 사사하였다.
김소희는 100년에 한번 나기 힘든 천부적인 목소리에 노력을 더하여 3~4년의 짧은 기간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정악, 한학,서예 등을 익혀 그의 예술에 품격을 더하여 왔으며

판소리 춘향가 김소희(制)를 창제하고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 받았다.

 

국창 김소희는 도제교육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국악 전문교육의 초석을 마련하고 해외공연을 통하여 우리 전통음악의 진면목을 세계에 떨친

선구자이다. 김소희는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1회 동리대상,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등을 수상하였고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던 중 1995년 4월(향년 79세)에

타계하였으며 묘소는 유언에 따라 고향에 모셔졌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제1호)을 추서하였고 '광복50주년-역사를 만든 한반도의 주역 50인"에
선정되었다.

노동마을 입구(10:07)

고창군 흥덕면 신송리에 있는 노동마을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려고 할 때,

때마침 기러기가 날아가면서 입에 물고 있던 갈대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갈대골로 부르던 것이 노동으로 고쳐진 것이다

노동마을 버스 정류장을 지난다

SK대농주유소(10:10)

23번 국도로 이어지는 변산지맥길

황토밭과 인삼밭이 보이고...

23번 국도를 버리고 좌측의 인삼밭으로 향한다

밭고랑 사이로 올라간다

묘지봉(32m:10:20)

사거리(10:22)

좌측으로는 흥덕면 후포리 후동, 후서로 가는 길이다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후포리(浦里)는 서쪽으로 갈곡천이 곰소만으로 흘러나가고 낮은 언덕과

일부 평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후서, 후동, 대촌 등이 있다. 후서, 후동은 1700년대 말

김해 김씨 형제가 갯물이 들어오는 길목 언덕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처음에는 뒷개로

부르다가, 후에 후서, 후동으로 고쳐진 것이다.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농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밭고랑 사이로 지맥길은 이어지고...

폐기물 처리장(10:27)

폐기물 처리장으로 올라서니 묘지들이 보인다

동래정공 묘지(10:28)

아침을 먹지 않았던 터라 배가 상당히 고파온다.

이곳에서 망자의 밥상을 빌려 아침겸 점심을 겸하며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식사를 끝내고 묘지를 지나니 조금전에 헤어진 23번 국도를 다시 만난다

23번 국도(10:48)

(주)하스프 공장(10:52)

석우리 갈림길 안내판도 보인다

신송리 버스 정류장(10:53)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신송리(里)는 남동쪽으로 동림저수지가 펼쳐져 있는 낮은 언덕지형이다.

자연마을로는 송내, 불당, 구송, 신송, 노동, 신기 등이 있으며, 신송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신송당으로 부르다가 신송으로 고쳐 부른것이다.

농협 경제사업장(10:55)

도로 건너편에는 고창,부안축협 전자경매 가축시장도 보인다

고창군 산림조합 조경수 유통센터(10:58)

상연마을 입구(11:01)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신덕리(里)자연마을로 목우, 신덕, 원덕, 하연, 상연 등이 있다.

1600년대 후기에 동래 정씨, 전주 최씨, 연안 차씨 등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당시 유명하였던 지리학자 이서구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정씨 거주지역을 [신덕], 최씨 거주지역을 [원덕],

차씨 거주지역을 [재덕]으로 부르면 좋겠다고 하여 그대로 부르던 것이 현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목우는 소를 방목하여 목축을 크게 한 곳이란 뜻에서 목우촌으로 불리다가 목우로 고쳐진 것이다.

상차림 없는 한우 직판장’이란 생전 듣도보도 못한 식당 간판도 보인다...상차림이 없다니 뭔 뜻인지?

광산김씨 세장비(11:06)

연봉재 입구(11:08)

도로 아랫쪽에 멋진 재각이 보이는데 경주김씨 연봉재이다

내가 경주김씨인데 ‘재환공’이라...아마도 큰 派에서 分家한 종중인 모양이다

남당 버스정류장(11:11)

남당마을은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에 있으며 남당마을 뒤에는 임진왜란 때 채홍국(

고덕붕() 등 92인의 의사가 혈맹했다는 혈맹단()[일명 술무덤, 술무덩, 숫무덩, 맹무덤]이 있다

용반리(里)에는 자연마을로 남당, 대양, 용반 등이 있는데, 마을에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승천했다는 바위가 전해 오는데, 이 때문에 처음에는 용바위섬으로 부르다가 후에 용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덕(德) 삼거리(11:12)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신덕리는 마을에서 덕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이라 하여 신덕()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연장동·용소동·

목우촌·용두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덕리라 하고 흥덕면에 편입하였다

 

원덕() 서남쪽으로 삿갓 모양의 삿갓봉[일명 입봉()]이 솟아 있고, 단진포[일명 전정포()]

북쪽으로 임잇골[일명 임희()], 목우() 서쪽으로 예전 절이 있던 절골, 상연() 동북쪽으로 예전

부자가 살 때 황새들이 자주 날아와 부자의 노적가리 위에 새끼를 깠다는 항샛골, 단진포 서쪽으로 어살을

매고 막을 치고 살았다는 살매기 등의 골짜기가 있다.

목우 서남쪽으로 산등성이인 수박등이 있고, 신덕에서 연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삿갓재가 있다.

연장 동쪽에 개방죽이라는 작은 못이 있고, 용소() 서북쪽 골짜기 아래에 단진포라는 개[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가 있으나 지금은 쓸모없는 땅이 되었다.

신덕 삼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

신덕 삼거리를 지나면서 변산지맥 분기점인 쓰리봉에서 같이해 온 고창군과 완전한

작별을 하고 부안군에 접어 들었는데 합수점인 격포항까지 같이 가야한다

장미주유소(11:14)

모충사(慕忠祠) 입구(11:17)

남당회맹단(南堂會盟壇:향토문화유산 제4호)은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에 있는 사적지로

회맹단은 임진왜란(1592)때 이 고장출신 의병장 채홍국과 맹주장 고덕붕 등 92인이 이곳 맹단에 모여

백의종군하기로 창의회맹하고 의곡 300석을 모아 의주행재소로 보내는 한편 동년 10월 25일에 출병하여

순천에 이르렀으나 송경락의 주화로 진격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그 후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그해 3월 23일에 흥덕 장산등에서 왜적을

격퇴하고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동년 4월 23일 부안 호벌치 전투에서 중과부족으로 92의사와 300여

의병이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이런 충절로 채흥국은 고종9년(1872)에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1986년 에는 이곳에

모충사를 건립하고 채홍국, 고덕붕등 92의사와 300여 의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과 더불어 구국혼을

추모하고 있는 사적지이다.

신정마을 입구(11:17)

부안군 줄포면 신리에 있는 새로생긴 마을이라 신정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11:20)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자마자 계속 같이 걸어온 23번 국도를 버리고 우측의 2차선 도로로 향한다

좁은 도로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보인다

도로가 지맥길이다

도로 좌측의 물탱크 있는 곳이 맥길이나 눈팅이만 하고 그냥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오늘 도로를 따라서 고창.부안을 걷는데 유난히도 뽕나무밭이 많이 보인다

이 지역은 오디로 유명한 곳이다

부안의 오디는 전국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는데 ‘참뽕’이란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

의보감에 따르면, 까만 오디는 당뇨병과 오장에 이로우며, 배고픔을 잊게 해주고, 오래 먹으면

귀와 눈을 밝게 해준다고 하며 백발이 검게 변하며 노화를 방지하고 간장과 신장을 보하고 음혈과

피를 길러주며 풍을 없애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현대 과학은 노화억제물질인 C3G가 검정콩의 9배, 포도의 24배 가량 들어있으며 혈당강하

성분과 고혈압 억제물질, 리놀산과 같은 불포화지방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음도 밝혀냈다.

봄이오는 소리

원동고개(11:33)

이동통신탑 지나고...

도로에서 바라본 줄포면 장동리(里)의 모습

부안군 줄포면에 있는 장동리는 두포천이 마을을 따라 길게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각골, 네거리,

금에피, 원장동 등이 있는데 각골은 지형이 잠복한 용의 뿔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네거리는 각골 북서쪽 네 갈림길에 있는 마을이고 소금에피는 앞산이 소금을 굽는 가마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장동은 장동리의 원마을을 말한다.

이정표를 지나니...

평강채씨 세장비(11:44)

세장비(世葬碑)란 선산(선영:先塋) 아래에 당해 성씨들의 선대조고비위의 선영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운 비를 일컫는데 이 지역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세장비가 유난히도 많이 보인다

선조들에 대한 禮敬心이 참으로 대단한 듯 하다 

평강채씨 세장비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꺽어진다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11:45)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화전마을 이정표쪽 좌측 도로로 향한다

반갑습니다

등로에서 바라본 서해안 고속도로

화전마을 입구(11:51)

화전마을이 있는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卵山里)는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길게 뻗어 흐르며

곳곳에 소류지가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나머리, 남면, 목중, 목하, 원난산 등이 있다.

나머리는 원래 남월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나머리가 되었다. 남면은 목중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목중은 목화동상리와 목화동하리 가운데가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목하는 난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목화동의 아래쪽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난산은 난산리의 원마을이다.

2번 군도 사거리(11:58)

도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줄포방향으로 향한다

대단하신 산으로님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장동교(12:03)

3번째 서해안 고속도로 아래로 지나간다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인 장동교를 지나자 전주이씨 세장비가 보인다

710번 도로(12:14)

서해안 고속도로 줄포I.C로 이어지는 710번 도로에서 줄포방향 좌측으로 꺽어진다

표가네 찐빵(12:15)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찐빵

지금 베낭에 남은거라고는 밀감 2개와 초콜릿 하나, 두유 2개밖에 없다

아직 배는 안 고프지만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기에 미리 좀 배를

채우려고 찐빵집에 들렸는데 손님들이 줄을 서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30분정도 걸린다고 하여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찐빵과 만두, 비빔국수를 파는데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찐빵을 사러온 차들이 많다

오일뱅크 주유소(12:23)

줄포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710번  지방도를 버리고 주유소 뒷쪽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면소재지가 있는 줄포리(茁浦里)는 서해와 맞닿은 만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동편, 새터, 서편, 용서동, 은행정, 장성동 등이 있다. 동편은 줄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터는 줄포리에 새로 된 마을이다.

서편은 줄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서동은 지형이 용형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은행정은 정자처럼 쓰던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장성동은 장승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이곳은 동아일보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아들인 김상만의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이 있다 

주유소 뒷쪽으로 돌아가니...

비닐하우스가 나오고 다시 마을 도로를 만난다

농로를 따라서 간다

멋진 전원주택을 끼고 좌측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드넓은 태양광 단지가 보인다.

현 정부들어 친환경 정책을 펼치면서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태양열 전기...과연 저게 정답일까.

저 공사를 하면서 파괴되는 환경은 생각지도 않은 모양이지

우리나라 원자력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되는데도 불구하도 환경론자들은

무조건 폐기를 외치는 바람에 지난해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을 중지한 한전의 적자폭이 무려 6조란다

그러면서 며칠전 한국을 방문한 인도의 모디총리에게 대통령이 한국형 원전을 써달라고 하는 기사를

봤는데 이건 또 뭐야...자기들은 해롭다고 사용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쓰라는건 이율배반이 아닌가.

현 정부의 정책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 사고로 엄청난 재앙을 겪었던 일본과 러시아도 다시 원전을 재가동했고

원전폐기를 선거 공약으로 한 대만의 차이잉원(现任英文)총통도 치솟는 전기료에 두 손을 들고

선거 공약을 수정하지 않았던가...

비단 태양광 문제만은 아닌것 같다

요즘 매스컴에서 이슈가 되고있는 4대강의 보 철거 문제도 그렇다.

자기들이 싫어하는 전 정권의 것이라고 무조건 적폐 청산을 하려는 건지 보 철거에 나섰다.

그 지역 농사짓는 민초들의 의견은 무시하는데 환경을 주장하시는 분들 그 지역에 살아나

봤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제점이라도 알아 봤는지 묻고 싶다.

오죽했으면 자기편인 여당의 시장이 보 철거 반대에 나섰을까.

원전이고 보 철거이고 간에 현장에 가서 민초들의 의견을 좀 경청하소.

현장의 의견을 무시하고 얄팍한 상식으로 탁상행정 놀음은 그만하소...세상살이에 정답은 없소이다

제발 자기들의 이익이 아닌 민초들이 근심 걱정없이 살게 할 수 있는 정사(政事)를 펼쳐주시고

당신네들이 주장하는 ‘사람이 우선이다’...구호만 외칠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소

뽕나무밭도 지나고...

서서히 내가 오늘 가야할 변산국립공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가 저런 멋진 작품을 만들었을까?

삼거리(12:38)

707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영전 삼거리로 내려선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진다

전 삼거리(12:41)

부안군 보안면에 있는 영전리(里)는 자연마을로 기와골, 방죽안, 신월리, 원영전, 찬시암골 등이 있다.

기와골은 신월리 서쪽 마을로 기와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죽안은 신월리 동쪽 마을로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신월리는 영전 북쪽 마을로 반달같이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영전은 영전리의 원마을이다. 찬시암골은 찬물이 솟는 샘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신덕 삼거리에서 이곳까지 같이온 줄포면과 작별을 하고 보안면으로 面界 가 바뀐다

잔차도로 표지판도 보인다

갈림길(12:42)

707번 도로에서 대성농장 간판이 있는 좌측의 시멘트 도로로 향한다

갈림길에서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지고...

물탱크(12:50)

물탱크를 지나니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으로 향한다

대성농장 입구(12:55)

대성농장을 지나고...

등로에서 바라본 보안면 하입석리(下里)의 모습

농장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소나무 조림지가 나오는데 이곳에 지도상 삼각점이 있는 26.3봉이다

26.3봉(△:12:57)

이곳에서 삼각점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가야할 상여봉과 노승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로에서 황토밭 너머에 있는 41봉을 올라가는데  웬 남자가 가지 말라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도로로 향한다

41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다시 만나고...

멋진 주택을 만나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휀스 좌측에는 비젼세라믹 공장 굴뚝이 보인다

등로 우측에도 엄청난 태양광 단지가 보인다

기독교인 묘지(13:20)

물탱크(13:24)

뽕나무밭을 지나고...

묘지가 있는 곳에서 좌측의 도로를 따라서 간다

23번 국도(13:32)

23번 국도 남쪽에는 오일뱅크 주유소가 보이고, 생선회와 매운탕을 파는

어정가든, 원천마을 표시석과 가든 북쪽에는 원천 버스 정류장이 있다 

원천 버스 정류장(13:33)

버스 시간표

23번 국도를 따라서 김제, 부안쪽으로 향한다

사거리(13:40)

23번 국도와 4번 군도가 교차하는 사거리를 직진을 하면 김제, 부안쪽으로 향하고

우측으로는 부안군 주산면, 좌측으로는 격포와 곰소항으로 향하는데 맥길은 직진이다

용사 . 만회마을 입구(13:43)

23번 국도변에 용사.만회마을 표시석과 버스 정류장,  사랑감나무 체험장 표지판이 있다.

용사 마을은 용사동(龍社洞)과 사창(社倉) 두 마을이 합해진 이름으로 국도 23호선이 지나는

이 마을은 3개의(용사동, 사창, 샛터) 뜸이 합해져 구성되었는데, 용사(龍社)라는 지명은 용혈과

개구리 혈이 있어 개구리를 삼키려하는 혈로, 의식(衣食)이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혈이라 하여

용사(龍社)라고 부르다가 1943년 농업용수를 개발하고자 일본인들이 남포저수지를 막으면서

용혈과 개구리 혈이 물에 잠겨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다.

 

이곳 용사 마을 앞쪽 저수지 밑에는 지석묘 6기가 있는데 길이가 3.2m 폭이 2.5m 높이 0.5m의

거대한 지석묘가 있어 옛 선조들의 생활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조곡을 거둬들여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다하여

사창(社倉) 이라 하였rh, 또 다른 지명으로는 이곳을 제안포(濟安浦) 또는 무포란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번 국도를 버리고 좌측 골목안으로 들어선다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뭔 뜻인지?

용사.만회회관(13:45)

만회 마을은 지난 1916년 만석동(萬石洞)과 회룡동(回龍洞) 두개의 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 마을로, 마을 뒤쪽으로는 내변산 줄기인 감로봉이 우뚝 서서 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마을전체를 감싸고 눈을 부릅뜬 채 바라다보는 형상이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이웃마을인 사창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츰 안쪽으로 밭을

일구기 위해 이주하다보니 감로봉 바로 밑에까지 오게 되었다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뒷산의 감로봉은 영봉으로 이 마을 만석동에 천주교 성지인 만석공소가 있어 김대건 신부가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들여온 이래 이곳 만석공소에서 두 분의 신부님과 세분의 수녀 한분의 수사가

배출되었다 하며 지금도 이곳 만석공소에는 한 달에 한번 매주 셋째 주 일요일 20여분이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사랑감마을 체험관 입구(13:47)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만회마을과 용사마을은 대봉감 특산지로 유명한데 가을이 올 때 마다,

마을의 빼곡한 감나무에 황금빛 감이 묵직하게 열려 농민들을 즐겁게 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형물을 겸한 유도사인판도 감나무 모습이다.

 

감 명산지 남포리는 용사, 만회, 남포, 원천동, 신안촌, 모두 5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마을회관을 함께 쓰고 있는 용사마을과 만회마을이 공동으로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었다. 만

회마을은 옛날 만석동과 회룡동이 합해져 태어난 이름이고 용사마을은 용사동과 사창이 합해져 탄생된 이름이다.

사창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세금으로 거둔 조곡을 쌓아두던 창고가 있던 곳이어서 유래된 이름인데

현재 남포리 88번지가 당시 창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저 산윗쪽에 가야할 상여봉이 보인다

이곳에 도착해서 약간의 알바를 한 것을 인지했는데 너무 늦은 것 같다.

옛날에는 홀로 다니면서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달달 외우는 바람에 알바가

전혀 없었는데 요즘은 오룩스앱으로 지도를 다운받아 다니다가 보니 공부를 덜한다

더군더나 오늘같은 도로를 걷는 구간이면 탈출을 신경쓰지 않기에 더 공부를 안하는 편이다

이곳에 도착하여 마을앞으로 水路가 지나는 걸 확인하고 오룩스 앱을 확인하니 좌측으로 살짝

돌아온 것을 확인하는데, 조금전 23번 국도에서 조금 더 올라가서 영성재라는 재각 뒷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ㅉㅉㅉ

지금와서 시간상 돌아갈 수 없었다...주택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간다

손일락님 창고뒷쪽 과수원으로 올라간다

이른 아침부터 이곳까지 도로를 따라서 5시간 35분동안 24km를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대단한 것 같아 묘한 희열을 느낀다

이곳부터는 도로와 직별을 하고 산으로 오르는데 오르기 직전 물 한모금 마시며 잠깐 휴식을 취한다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선다(14:00)

묘지를 지나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넘어진 나무들의 태클이 시작되고... 

밀양박공 &부인 담양전씨 (14:08)

묘지 뒷쪽 빨간색 선답자의 흔적이 보이는데 나말고도 간 사람이 있구나.

갈림길(14:12)

마루금으로 복귀하여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113.4봉(14:17)

내리막길

넘어진 나무들이 갈 길 바쁜 산꾼을 엄청 괴롭힌다

등로에 커다란 개 한마리가 쇠사슬에 묶혀 죽어있다.

왕생극락을 바란다...다음 生에는 부디 좋은곳에 태어나거라

안부(14:19)

지나가신지가 얼마되지 않으신 모양이다

122.6봉(14:32)

계속되는 오르막길 허기가 지는데 먹을게 별로 없다.

나홀로 산행시에는 하산후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다니다 보니

결국 먹는것을 줄일 수 밖에 없다...먹을걸 대신 지고 가주었던 진권아우가 그립다

좌측으로 꺽어지고...

211.7봉(14:52)

다시 힘든 오르막길...등로는 보이질 않고 체력은 고갈되고...

폐초소와...

폐안테나가 있는 봉우리에 오르는데 예전에 군부대였던 모양이다

259.5봉(15:00)

다시 내리막길

넘어진 폐목(廢木)이 엄청 괴롭힌다

279.6봉(15:10)

다시 내리막길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길을 만들면서 내려가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사창재(15:18)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에서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로 이어지는 임도에 위치해 있다.

개암사는 죽염으로 유명한 사찰이며, 이곳부터는 변산국립공원에 속하는지 산꾼을 겁박하는

경고판과 이 지역의 민요가 적혀 있는 안내판이 보인다

오후라 그런지 산에는 강한 바람이 불어대는 바람에 생각보다 상당히 춥다 

사창재에 있는 민요 안내판

사창재를 오르는데 국공파들이 겁박을 한다

국립공원 안의 제도권 등로인데 거칠기는 제도권 밖과 다름이 없다

초반에는 완만한 능선이나...

산죽 군락지가 나오면서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우금산과 그 아래에 있는 개암사가 흐릿하게 보인다

개암사는 634년(무왕 35)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로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676년(문무왕 16)에 원효와 의상대사가 중수하였고, 1276년(충렬왕 2) 원감국사(圓鑑國師)때는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능가경(楞伽經)』설법으로 많은 사람을 교화시켜 이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 선탄(禪坦)이 다시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고 1636년(인조 14)에 계호(戒浩)스님이 다시 중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 292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물이며, 보물 제 12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상회괘불탱은 1749년에 제작된「의겸」의 작품으로

가로 13.25m, 폭 9m 크기의 영산해상도이다. 개암사 뒤, 우금암을 포함한 길이 3,960m의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유물로는 1689년(숙종 5)에 조성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인 동종(銅鐘)과「중건사적기」가 있다.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너무 힘이든다

329.9봉(15:40)

조금전에 내가 올라온 능선을 바라본다

상여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시멘트 말뚝이 보이는데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국립공원 경계 말뚝인듯 싶다

328.1봉(15:47)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암봉(15:51)

조망바위(15:52)

가야할 상여봉은 멀어만 보이고...

조망바위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에서 다시 올라서니 T자 등로가 나오고 좌측으로 올라간다

갈림길(15:57)

등로에서 바라본 주산(山:232m)의 모습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와 주산면 소산리 · 사산리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배뫼는 '배 주()'자

주산의 한글 표기가 아니라 소산() 즉 '바이뫼'가 음운 변화하여 된 것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지』(부안)에 "파산()은 현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일명 망산()으로도 불리고

세간에는 소산()으로도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소산리()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주산면에 편입된

조선 시대 소산면() 등의 지명도 '배뫼'의 한자 표기인 '소산'과 관련된 것이다.

큰 뱀이라는 의미의 파산()과 망산이라는 다른 명칭이 있다.

『조선지형도』(줄포)에 주산()으로 표기되고 있다

안부(16:07)

완만한 산죽길로 올라서니...

상여봉(喪輿峰:389.2m:16:25)

부안군 보안면과 상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상여봉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지도에는 봉우리의 지명은 없고 그냥 389.2봉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판독이 불가능한 상여봉 정상의 삼각점

뒤돌아 본 상여봉 정상의 모습

상여봉 내리막길

비교적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노승봉으로 향한다

노승봉(老僧峰:352.9m:16:35)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와 우동리 상서면 청림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정상에는 선산김공의 묘지가 자리잡고 있고 좌측으로 성계폭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있으나 지맥길은 우측 아래로 내려서는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늙은

스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풍수지리학상으로 보면 고승이 제자들을 모아좋고 불공을

드리는 이른바 노승예불(老僧禮佛), 혹은 호승예불(好僧禮佛)의 지세라 부르는 건

아닌지(범여의 생각中에서) 

노승봉 정상에 있는 선산김공의 묘지

노승봉 아래의 우동리에 있는 선계폭포는 변산의 4대사찰(내소사, 개암사,실상사, 성계암)중의

하나였던 성계암이 있었던 성계암 분지에 있는 폭포이다

이성계가 성계골에 머물면서 도를 닦고 수련하였다는 설에 의하여 성계폭포라고 부르나 정확한

근거는 아니며 근처에는 반계 유원형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노승봉 정상에서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조금 거친길을 내려서니....

산죽지대를 지난다

등로 가운데 콘크리트 말뚝이 있다

272.2봉(16:47)

안부(16:54)

급경사의 오르막길...너무 힘이들어 숨이 멈춰지는 느낌이다

279.7봉(17:00)

정상에는 앙증맞은 무덤 하나가 있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못가겠다...날머리까지의 거리를 확인하고 남은

밀감과 초콜렛 하나, 두유로 허기를 면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봉우리로 향한다

298.4봉(17:14)

바드재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의 내리막에다 낙엽으로 인해 엄청나게 미끄럽다

묘지(17:25)

묘지를 지나 내려서니 엄청난 절개지이다

우회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휀스의 빈 틈이 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엄청나게 미끄러워 꼬꾸라지면서 내려선다.

후답자들은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해야 할 것 같다

바드재(17:30)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서 보안면 우동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1번 군도가 지나간다

고개 좌측 아래에 있는 우반동은 조선 숙종 때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살았던 마을이라 한다

고개는 마치 강원도에 있는 고개처럼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멋진 고개이건만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옥녀봉으로 오르는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이곳은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이다.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하려고 했지만 10분 가까이 있어도

자동차는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고 그 사이에 땀에 젖은 옷이 새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오한(惡寒)이 몰려와 도저히 견딜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줄포개인택시(010-4911-6253)를 불러서 부안터미널로 향한다.

이 지역사람들은 바드재라고 하면 알지 못하고 버디재라야 알아 듣는다(요금 22,000원)

부안시외버스 터미널(18:15)

터미널에 도착하여 표를 예매한 다음에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조금은 개운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터미널 근처에 영업을 하는 식당을 찾을수가 없어서 터미널

근처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빵과 쥬스 하나로 허기를 면하고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18시 40분 부안발→서울행 버스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