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산행)보다 잿밥(꽃)에 더 관심이 많았던 변산지맥 3구간
☞ 산행일자: 2019년 03월 01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지독한 미세먼지...생각보다 상당히 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9.5km + 2km / 6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바드재-묘지-암봉-옥녀봉 갈림길-옥녀봉-구조이정목-암봉-이정표-이동통신탑-안부-용각봉갈림길
용각봉-330.8봉-묘지-안부-276.6봉-안부-갈림길-247.7봉-묘지-279.6봉-슬랩지대-암봉-묘지
슬랩지대-세봉삼거리-안부-세봉-슬랩지대-안부-암봉-안부-관음봉-헬기장-관음봉삼거리-안부
마당바위-355.9봉-마당바위 쉼터-재백이고개-이동통신탑-돌탑-슬랩지대-암봉-조망바위-273.4봉
대소고개-석포리1구
☞ 소 재 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상서면, 변산면, 진서면
요즘들어 계속되는 지독한 미세먼지로 인하여 생활하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운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도 나에겐 걷는게 최고란다.
이번주에는 산행도 할 겸 남도지방의 봄소식을 접해보려고 지난주에 빡세게 걸었던
변신지맥 3구간을 나서는데 그곳은 중국과 가까운 서해쪽이라 미세먼지 걱정에 조금은 찜짐하다.
오늘은 대중교통이 아니라 愛馬를 가져가야 할 듯 싶다.
산행을 일찍 끝내고 야생화를 보러 가려면 청림마을과 내변산 탐방소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택시로는 요금을 감당할 수가 없기에...
새벽 4시반에 집을 나서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에 들어서
정안 휴게소를 지나 공주 서천간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르겠지만 가시거리가 100m가 안될 정도로 심한데 이것이 자그마치 들머리인
내변산의 바드재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지체되는 느낌이다.
하는 수 없어 군산휴게소에 들려 콩나물 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짙은 안개속에 조심스럽게
바드재에 도착하니 산이라 그런지 기온이 영하 7도를 가리키는데 생각보다 훨씬 춥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부안I.C를 빠져나와 짙은 안개사이를 저속으로 조심스럽게 운전하여 바드재를 향하는데
바드재(07:45)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서 보안면 우동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1번 군도가 지나간다
고개 좌측 아래에 있는 우반동(우동리)은 조선 숙종 때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살았던 마을이라 한다
고개는 마치 강원도에 있는 고개처럼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멋진 고개이건만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산행을 시작하다(07:45)
생각보다 날씨가 너무 추워 곧바로 산행을 시작하는데, 안내표지판 뒷쪽으로 올라간다
미세먼지를 뚫고 해는 벌써 저만치 올라와 버렸다.
능선에 오르니 낡은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초반부터 급경사의 오로막이 시작된다
초반부터 빡세게 치고 오르는 능선...현재의 내 컨디션으로는 이런곳이 완전 쥐약이다
묘지(07:53)
빡센 오름길...아직까지 몸뚱아리가 예열이 덜되어서 그런지 숨이 멎을것 같은 통증이 몰려온다.
거기다가 미세먼지의 휴유증까지... 그러나 어쩌랴, 기왕에 시작된 산행...가는데까지 가봐야지
암릉에서 바라본 구절양장의 바드재의 모습
맑은 날씨에 보면 조망이 끝내주는 곳이련만 온 천지가 흐릿하게 보이니 아쉽기만 하다.
우측 아래에 성계폭포가 있고 우동재가 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반계선생이 낙향하여 살았다는 곳이 저 아래 어디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반계 유형운(磻溪 柳馨遠:1622~1673)은 본관은 문화 유씨이며, 세종때에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 손으로 조선조 광해군 14년(1622)에 외가인 서울 정릉에서 태어놨다.
조선조 효종 10년(1653)때인 32세에 부안군 우반동(우동리)으로 이사하여 20여년동안 살면서
개혁 사상이 담긴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편찬하였으며 부안군 우반동에 남아있는 반계의
유적으로는 우거지터, 반계서당, 반계우물, 묘터 등이 있으며, 반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고안한 배 4~5척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으며 말을 기르기도 했다.
또한 활과 조총 수십자루를 준비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우물을 만들어 주기도 하었다.
이것은 반계가 자신의 학문을 직접 실천하고자 했던 증거이기도 했으며, 반계는 부안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켜 산경표를 저술한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황윤석(黃胤錫), 위백규(魏伯珪),
이복원(李馥遠), 하백원(河百源), 이윤성(李潤聖 ) 등, 이 지역 출신의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
했다는 점에서 한국 실학의 비조(鼻祖)인 동시에 호남 실학의 비조이기도 하다
구조 이정목이 있다는 건 제도권 등로라는 얘기이고 더군더나 국립공원인데
등로는 지맥길처럼 관리가 안되어 있으니....급경사를 0.3km를 올라서는데 25분이 걸렸다
급경사를 올라서니 완만한 산죽길이 나온다
죽고 못나는 사이인가?
등로에서 멋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고...
계속되는 암릉구간이나 초반에 비해 등로는 많이 완만해진 느낌이다
바드재에서 내려가면 성계폭포와 우동재와 반계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골짜기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멋지게 보이기는 하지만 설악산의 용아장성이나 공룡능선 처럼의 몽환적 분위기는 아닌듯 하다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암봉이 보이고 그 너머로 옥녀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암봉(08:14)
변산의 주봉인 의상봉이 미세먼지에 가려진 채 희미하게 보인다.
정상에는 국가의 주요 시설이 차지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변산을 얘기하면서 의상봉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부안군지와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일명 기상봉으로 불리는 의상봉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고승 의상대사가 변산의 마천대(磨天臺) 북쪽에 의상사를 짓고 수도한데서 유래됐다.
신라 진덕여왕 때 고승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영조, 영희와 함께 수도를 가던 길에 벙어리인
묘화(妙花)라는 여인을 만나 말문이 열리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부모가 천상배필임을 알고
결혼을 청했으나 부설이 거절하자 묘화가 “억조창생을 구하려는 고승이 작은 계집의 소원도
못 들어 주느냐”는 말에 승복해서 묘화와 살며 월명과 등운 남매를 낳았다.
그는 현재 월명암 선방으로 쓰이는 부설암을 짓고 수도에 정진하면서, 딸에게는 월명암,
아내를 위해 월명암 옆에 묘화암(일명 묘적암), 아들에게는 등운사를 지어 수도케 했다.
월명암에서 홀로 수도하던 월명에게 불목하니가 음심을 품자 의상사에서 수도하던
의상대사에게 상의하여 그 청을 들어줬는데 그래도 끝임 없는 불목하니의 음심을 참지 못한
월명의 하소연을 듣다 못한 의상대사가 불목하니를 아궁이에 밀어 넣어 죽여 버리고 말았다.
결국 불목하니의 육보시(肉普施) 청을 들어준 월명은 생불하고 살인을 저지른 의상대사는
생불하지 못했다는 가슴 아픈 설화도 전해온다
슬랩지대(08:16)
뒤돌아 본 지난 구간 상여봉의 모습
옥녀봉 오르는 길
슬랩지대를 올라서니 집터의 흔적인지 묘지를 보호하기 위한 돌담인지 모를 돌무더기가 있고...
정상에는 앙증맞은 묘지 한 기가 있다옥녀봉 갈림길(08:23)
지맥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옥녀봉으로 향한다
옥녀봉 정상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옥녀는 보이질 않고 무인산불감시초소만 산꾼을 감시한다
옥녀봉(玉女峰:434.4m:08:22)
내변산국립공원내의 옥녀봉은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와 보안면 우동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우리나라 산의 지명중에서 백운산, 깃대봉, 국사봉과 함께 유난히도 산 이름중에 옥녀봉도 참 많다.
옥녀(玉女)란 몸과 마음이 깨끗한 여인으로, 절세의 미인으로 표현되는 옥녀는 도교(道敎)에
등장하는 인물로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절세미인인 동시에 다산(多産)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옥녀봉 정상 삼각점(△부안 431 / 1984재설)
옥녀봉에서 바라본 내변산의 山群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는 변산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 산중에는<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의상봉 마천대의 일명 다람쥐 절터로
유명한 사찰 터로는 실상사, 청림사, 의상암, 등운사. 부사의 방장, 선계사 등이 즐비하다. 원효대사, 부설거사,
의상대사, 진표율사, 진묵대사, 월명 등 불가의 이름난 고승들이 변산에서 배출되었으며, 근래에는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 원불교의 소태산 등이 월명암을 비롯한 주변의 사찰에서 득도했다는데, <부안군지>와
<한국지명총람>에는 일명 기상봉으로 불리는 의상봉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고승 의상대사가 변산 마천대 북
쪽에 의상사를 짓고 수도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의상봉 아래에 있는 부사의방에 내려가서 천인단애를 이룬 절벽을 내려가자 오금이 저린다.
부사의방(不思議房)은 진표율사가 절벽으로 몸을 던지고 망신참법(亡身懺法)을 통해 득도했다는
베낭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옥녀봉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옥녀봉 갈림길(08:25)
이곳은 변산국립공원의 제도권 등로인지 구조 이정목도 보이고...
비교적 등로는 뚜렸한 편이다
꽤나 긴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우회하면서 걷는다
구조이정목(08:37)
변산06-03(←용각봉 삼거리 0.5km →바드재1.4km)가 표기되어 있다.
암봉(08:39)
뒤돌아 본 옥녀봉의 모습
이정표(08:41)
뚜렸한 등로로 내려가니...
이동통신탑(08:45)
이정표가 있는 안부가 나온다
안부(250m:08:46)
우측으로는 청림리의 가마소와 와룡소로 내려가는 등로인데 옥녀봉에 왔던
등산객들이 이쪽으로 내려가는지 일반 산악회의 띠지들이 많이 보이고 좌측의
우동리쪽에는 굴바위라는 표지가 보이는데 굴바위 입구에는 남근석 2개가 서 있다.
남근석이 세워진 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마치 여인들의 자궁처럼 생긴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이곳을 굴바위라고 한다
안부에는 목책과 이정표, 구조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이정표(↑가마소 삼거리 3.3km ↓굴바위 0.9km, →옥녀봉1.1km)가 있다.
그러나 용각봉쪽으로는 이정표가 없는데 이곳은 등산객이 다닐 수 없는 비탐구간이다
구조 이정목을 지나서...
본격적인 비탐구간을 오르는데 급경사의 오르막에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올라간다
옥녀봉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온 만큼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용각봉 갈림길이 나온다
용각봉 갈림길(09:03)
용각봉(龍角峰:366m:09:05)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와 상서면 청림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용의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인듯 한데 그런 감흥은 들지 않는다.
용각봉의 斷崖
미세먼지만 아니였다면 정말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터인데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이곳 부안은 옛부터 풍요의 고장이라 그런지 문화 예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던 이매창과 시조시인 신석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황진이, 김부용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기생으로 꼽힌 이매창은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호는 매창, 계창, 계량이었으며 부안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庶女)로 부안의 관기였던
이매창은 시와 가무에 능하였으며 가사(歌詞), 한시(漢詩), 거문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흔히 황진이와 비교될 정도인 이매창은 부안에서만 살아 황진이에 비해 명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으로는 시조와 한시 58수이며 매창집 1권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대표적 시조시인이었던 신석정(1907~1974)은 역시 전북 부안출신으로
평생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전원적, 목가적, 낭만주의적 시풍(詩風)으로
반세속적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하여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실을 피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문신 정지상을 비롯해 조선의 서거정, 김종직, 김시습 등이 절경에 이끌려 부안을 찾았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조선의 ‘체게바라’가 되기를 원했던 허균은 파직당한 후 부안으로
내려와 선계폭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위치한 정사암에 머물며 ‘홍길동전’을 창작했다.
성리학의 폐단에 분노한 조선 중기 실학자 유형원도 내변산과 외변산의 길목에 위치한 우동리에
19년 동안 머물며 ‘반계수록’을 완성한다.
이매창(李梅窓)이 그 주인공인데 ‘매화가 핀 창’이라는 뜻의 호를 가진 그녀의 이름은 이계생.
조선 선조 때 부안현 현리의 서녀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천애의 고아가 되면서 부안현청에 기적을 올린다.
그리고 시인이자 선비인 유희경을 만나 변산반도의 산하를 주유하면서 시를 짓고 때로는 거문고를 탔다.
하지만 28세 연상인 유희경과의 만남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매창은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는 시로 애끓는 심정을 전했다.
그러니 유희경은 답시(答詩)로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이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라는 시로 화답했다.
목가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신석정(1907∼1974)이 번역했다.
부안이 낳은 대표적 시인인 신석정은 자연과 민족, 민중을 소재로 주옥 같은 시를 남긴 인물.
특히 1967년 발표한 ‘산의 서곡’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으로 100여 종의 꽃이 등장한다.
변산의 산세는 용맥이 강이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경우에 해당해, 이른바
산진처(山盡處)의 명당이란다. “변산의 청룡, 즉 동쪽 산세는 사창재, 노승봉(상여봉),
바드재를 건너 옥녀봉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남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내소사의 주산인
세봉을 건너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으로 반원을 그리며 내뻗은 다음에 학치, 청림리
삼예봉에서 끝난다고 한다
변산의 백호, 즉 서쪽 산세는 개암사의 주산인 우금산에서 우슬재를 거쳐 의상봉으로
이어진다고 보며 이 두 흐름을 갈라놓은 것이 그 옛날 백천이었는데, 지금은 부안호가 돼 없어졌다.
‘정감록’에 나오는 변산 동쪽의 길지(吉地)는 구체적으로 어딘가?
내변산으로 통하는 입구인 우슬재나 바드재를 좀 잘 봐야된다.
그저 그 길목만 잘 지키면 인근의 청림리와 중계리는 참 좋은 피난처가 되는 셈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호암을 찾으려면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어가면 되는데,우슬재를
살짝 넘어가면 쇠뿔바위가 나오는데 이 봉우리는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의 오른쪽에 있다
변산은 아주 옛날서부터 미륵이 나타난 땅이고, 관음보살의 성지요. 원효, 진표, 진묵 등
큰 스님들이 도를 닦으신 것만 봐도 이게 보통 땅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 보이는 셈이다.
근세엔 증산교를 세운 강일순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다 여기 변산서 도를 닦았던 곳이다
용각봉 삼거리에서 직진으로 향하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용각동 갈림길에서 다시 관음봉으로 향해 길을 나서는데 이곳은 변산국립공원
지구중에서 비탐방 구간이라 그런지 그 흔한 이정표도 없고 등로도 상당히 거칠다.
마치 庶子 취급을 받는 등로인 셈이다...앞에 뾰족하게 353.7봉이 보이지만 지맥 능선은 아니다
등로는 보이지 않고...
330.8봉(09:13)
무명봉에서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비실이부부님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묘지(09:16)
급하게 내려서니 V자형 안부가 나온다
안부(210m:09:24)
좌측으로는 석포저수지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우측은 가마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가마솥 이름이 붙여진 것 같고 변산 산중에서 교통이 제일 불편한 곳에 있었으나,
기암절벽과 협곡은 수석이 수려하여 내변산의 풍치를 더욱 어울리는 곳이기도 하다
암릉구간을 타고 올라간다
276.6봉(09:35)
돌무더기가 있는 276.6봉에서 물 한모금 마시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안부(09:48)
갈림길(09:50)
변산반도 국립공원 안에 있는 등로이지만 비탐구간이라는 이유로
부드러운 등로가 아닌 지맥길의 본색을 드러내며 상당히 거친 구간이다
247.7봉(09:55)
무명봉을 지나 올라선 다음에...
묘지(10:02)
묘지를 옮긴듯한 넓은 공터도 지난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가니...
279.6봉(10:03)
돌담처럼 생긴 등로를 만난다.
넘어진 폐목들의 저항이 심하다
슬랩지대(10:10)
계곡 아랫쪽에 있는 석포저수지와 구룡댐은 지금 五里霧中
가야할 세봉 삼거리 갈림봉이 보인다
암봉(10:12)
암봉을 내려서니...
우측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임도가 보인다
묘지(10:14)
묘지를 지나자마자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으로 간 다음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슬랩지대(10:20)
세봉삼거리가 있는 봉우리를 바라보며 계속되는 오르막길
庶子의 등로이라 여느 지맥길 못지않게 거칠기만 하는데 마치 홍길동과 같은 길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같은 국립공원 안에 있는 등로이건만 비탐구간이란 이유로 이렇게 홀대를 받고 있다니...
무명봉(10:26)
바드재에서부터 급하게 정상에 올랐다가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시작되는 계속되는 V형 등로
힘든 범여를 더 빨리 지치게 하는데 자꾸만 산행 속력은 늦어지고 가뿐 숨만 몰아쉰다.
이런 산에도 미세먼지가 심하거늘...서울은 어떨까 걱정이네
또다시 꼿꼿하게 선 세봉삼거리가 있는 봉우리로 올라선다
천종산이 아련히 보이고...
산죽지대를 지나서...
또다시 급한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선 채로 몇번을 쉬었다가 올라간다
선돌(立石)도 보이고...
암릉구석을 올라서니...
내소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세봉 방향으로 향한다
세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세봉 삼거리(10:53)
관음봉 삼거리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가야할 관음봉과 세봉의 모습
세봉 가는길
안부(10:58)
청련암으로 내려가는 샛길...출입금지라는데 난 갈일 없소
안부에서 나무계단을 따라서 세봉으로 향한다
세봉삼거리에서 천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세봉(細峰:402.5m:11:05)
부안군 상서면,변산면, 진서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바로옆에 있는 관음봉의 명성에 밀려
덜 알려져 있으나 뾰족하게 솟은 암릉 봉우리가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어떤 자료에는 관음봉과 함께 능가산이라 부르고 있다.
한문의 표기로는 ‘가늘 세(細), 봉우리 봉(峰)’이라 표기해 논 것을 보아 봉우리가 뾰족해서
붙혀진 이름이 아닐까? (범여의 생각中에서)
세봉 좌측 아래쪽에는 내소사의 부속암자인 청련암이 자리를 잡고 있다.
관음봉 가는길
등로는 겨우내 얼었다가 녹은 탓인지 상당히 미끄럽다
슬랩지대(11:08)
가야할 관음봉의 모습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등로에서 바라본 청련암(靑蓮庵)의 모습
지장암과 함께 내소사에 딸린 부속암자로 관음봉과 세봉 사이에 자리해 있으며
산 아래로 곰소항이 보이고 줄포만 건너 선운산 자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가 17세 때(1907)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ㆍ백관수도 함께
수학하며 평생의 지기가 되었던 곳이며,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이
곰소에서 실상동으로 올 때 보통 우동리로 하여 우바위재를 넘어가나 때로는 내소사 앞을 지나
왼쪽으로 직소폭포로 넘어가는 완만한 길을 택했던 곳에 있는 곳이 청련암이다
청련암 근처에는 복수초와 노루귀 군락지가 있다고 하니 내년쯤 다시 와볼 생각이다
안부(11:14)
관음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슬랩지대로 올라선다
예로부터 변산에 유명한 것이 세 가지로 변재(邊材), 변청(邊淸), 변란(邊蘭) 삼변(三邊)을 꼽았다.
변재(邊材)는 변산의 소나무를 이르는 것이며, 변청(邊淸)은 변산 곳곳의 바위벼랑 벌집에서 따는
꿀을 이르는 것으로 질이 좋기로 유명해 왕실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 변란(邊蘭)은 변산에
자생하는 난으로 보춘화(報春花)를 이르는 말이다. 보춘화는 일찌감치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난이다.
변산은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공원으로 산이지만 바다와 산을 동시에 품고 있다.
산을 낀 곳을 내변산이라 하고 해안쪽은 외변산으로 부르며 이를 통칭해 변산반도라 일컫는다.
변산반도는 부안군의 보안면, 상서면, 진서면, 변산면, 하서면 등 5개면이 연접되어 있는
서해바다쪽으로 돌출된 반도로 변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의 길이가 98㎞에 이른다.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명소로 전북의 대표 관광지로1987년까지는
도립공원으로 부안군에서 관리하였으나, 88년에 우리나라의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호남정맥에서 나뉘어 온 하나의 산줄기가 서해로 튕겨나온 듯한 변산반도 내변산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와 그 사이 직소폭포·봉래구곡·낙조대 등 절경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그 주변에는 유천도요지·구암 지석묘군·호벌치·우금산성 등의 역사 유적지와 내소사와 월명암이라는
역사깊은 사찰이 있다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슬랩지대의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지나온 세봉과 세봉 삼거리의 모습
변산 십승지 종주지도
예부터 변산을 일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이 겹겹이 쌓여 높고 깎아지른 듯하며 바위와
골이 그윽하다"고 하였으며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도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라고 묘사하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았다.
철계단을 따라서 암봉으로 올라선다
미세먼지에 갇혀버린 내소사(來蘇寺)
뜻으로 소래사(蘇來寺)였는데, 조선 인조 11년(1633년)에 청민선사가 중건한 뒤부터 이름이
내소사(來蘇寺)로 바뀌었다고 하며 당나라 소정방의 시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의 성인 '蘇'자를
따서 내소라 했다는 이야기는 낭설이라고 한다
마천대라 불리는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508.6m)은 메세먼지에 갇혀버려 아쉬움만 남는다
암봉(11:28)
오금이 저릴 정도의 아찔한 내리막길
안부(11:30)
다시 관음봉을 향한 오르막길
뒤돌아 본 암봉의 모습
관음봉 이정표
관음봉(觀音峰:424m:11:33~11:54)
내소사 뒷편에 우뚝 솟아 있는 관음봉은 변산면, 진서면, 상서면 등 3면 경계에
세봉과 함께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예전엔 능가산이었고, 내소사 일주문에도 능가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 관음봉으로 지명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서쪽은 망포대, 신선암 줄기가, 동쪽은 옥녀봉 줄기가 역시 곰소만 쪽으로 뻗어내려 곰소만을
북쪽으로 함께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 남쪽 기슭에 품고 있는 고찰 내소사에서 바라보면
동서북에서 에워싸 아늑하고 포근한 맛을 준다.
관음봉은 동쪽의 세봉과 함께 능가산, 봉래산이라고도 부르며 지금도 내소사 일주문에는
'능가산내소사'란 현판이 걸려있는 이 산은 바위를 깍아 세운 듯 내소사를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형상으로 바위봉과 울창한 수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내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을 비롯 쌍선봉과 천홀산(또는 천총산) 그리고 북으로 흘러내리는 직소천과
백천내, 해창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과 남으로는 곰소만이 작은 강이나 호수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하면서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산에서 사람을 만난다.
명산이라 그런지 등산객이 생각보다 많았고 나도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한참을 쉰다
최고봉인 의상봉(509m)을 비롯한 신선봉(486m), 쌍선봉(459m) 관음봉(424.5m)등 기암괴석
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와 그 사이 개암사, 내소사, 월명암 등 유서 깊은 고찰이 있다.
또한 직소폭포, 봉래구곡, 낙조대 등 승경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유천도요지,
구암 지석묘군, 호벌치와 우금산성 등 역사 유적지가 있다. 채석강, 적벽강, 신석정 시비, 한국에서
최초로 조성된 금구원 조각공원, 그리고 변산 해수욕장, 격포해수욕장 등 4개의 해수욕장까지 갖추고 있다.
1988년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57km2 넓이에 35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곳이다.
변(邊)으로 되었고 변한(卞韓)의 이름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변산을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으로 천부(天府)라 했다하며, 고려시대 이규보(李圭報)의 시를
인용하여 '강산이 맑고 좋음은 영주산, 봉래산과 겨룰 만 하고 옥을 세우고 은을 녹여 만고에 한가지로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으니 옛날에 변한(卞韓)이라고 하였다.
(百濟地有卞山故云卞韓)’는 구절이 있으니 변한의 위치와 관계없이 변한에서 유래한 듯하다.
내소사의 일주문에 능가산(들어가기 힘들다는 뜻으로 법어에서 나온 말)으로 쓰여 있다.
격포를 잇는 서해의 아름다운 밤의에 낚시를 드리운 어촌의 평화로운 풍경), 2경: 30m를 비류직하
하는 직소폭포, 3경;소사모종(내소사의 저녁 종소리) 4경:월명무애(월명암에서 내려 본 내변산의 아지랑이),
5경: 서해낙조(낙조대의 낙조와 채석강의 낙조), 6경: 채석강의 돛단배, 7경:지포신경(止浦神景)
(지서리에서 쌍선봉까지의 경관), 8경: 개암고적(개암사 부근의 주류성 등 고적)이다
조망대에서 바라본 곰소항 방향은 미세먼지로 인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변산8경중에 웅연조대(雄淵釣臺) 라 불리는 곰소항도 미세먼지에 갇혀버렸다
웅연조대
안내판
변산 팔경중의 제3경인 소사모종((蘇寺暮鐘) 안내판
변산(卞山)을 능가산(楞伽山)이라고 하는데 이건 불교 경전인 능가경(楞伽經)에서 따온 지명이다
능가산(楞伽山:Lanka)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능가경(楞伽經)을 설한 곳으로 ‘도달하기
어려움(不可到)’ ‘오르기 힘듬(難入)’이 담긴 뜻이며, 능가산(楞伽山)이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스리랑카(Sri Lanka)로 비정한다...능가경(楞伽經)은 ‘랑카에서 설법한 내용을 담은 경전’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원제는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Saddharma-Lankavatara-Sutra)이다
중생속에 갖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수 있는 씨앗인 여래장(如來藏)에 대한 사상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불경(佛經)이다
인간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미륵성지 변산은 <정감록>에 우리나라 십승지로 기록돼 있다
예로부터 부안(扶安)을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의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어염시초(魚鹽柴草:물고기, 소금,나무)”가 풍부하여
부모님 봉양하기가 좋아 생거부안으로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산해절승(山海絶勝)으로 유명하다
또 부안에는 풍요를 뜻하는 “변산삼락(邊山三樂:맛과 풍경, 이야기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관음봉 정상에서 한참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예전엔 없었던 양탄자(?)를 깔아놨다
헬기장(11:58)
이정표를 지나고...
데크목 계단이 나오고 가야할 마당바위가 보인다
좌측 능선이 원 지맥길이나 암릉구간이라 갈 수 없는 곳이다
정통파라고 자처하는 범여는 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참으로 많이 남는다
등로에서 바라본 직소폭포
약 30m 높이의 물줄기가 벼랑위에서 쏱아져 내리는 그 장관, 그 아름다움은 황홀하기까지하다.
예로부터 직소폭포와 중계계곡을 보지 않고는 변산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폭포의 소(沼)를
실상용추(實相龍湫)라고 하는데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뜻으로 불경(佛經)에 나온다
아래로 내려가며 분옥담, 선녀탕, 금강소 영지, 백천, 음지가 직소폭포 위의 대소와 함께
봉래구곡(蓬來九曲)인데 1곡 대소(大蘇), 2곡 직소폭포(直沼瀑布) 3곡 분옥담(噴玉淡),
4곡 선녀탕(仙女湯), 5곡 봉래곡(蓬來谷)은 있으나, 아쉽게도 부안댐 축조로 인해 6곡에서
9곡까지는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관음봉을 우회하여 절개지 사면으로 걸어간다
낙석방지용 계단을 지나고...
저 윗쪽이 지맥길인데...
등로에서 바라본 관음봉의 모습
뒤돌아 본 관음봉 정상이 마치 관세음보살님의 보관(寶冠)처럼 보인다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관음봉 삼거리(12:12)
좌측은 내소사로 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내려간다
안부(12:16)
철계단을 올라가서 뒤돌아서...
관음봉을 바라본다
마당바위(12:20)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변산 8경중 제1景인 웅연조대(雄淵釣臺)
줄포만에서 시작해서 곰소항 앞까지 이르는 호수같이 잔잔한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정경을 말하는 것으로 야등(夜燈)을 밝힌 어선과 돛단배가 한가롭게 앞바다를
지날 때, 휘황찬란한 야등 불빛이 투영(投影)돼 물에 어리는 광경이 장관을 이루며
어부들이 뱃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웅연조대라 하면 변산8경중 제1경으로 친다.
곰소항(熊淵港)은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있는 항구로 전라북도에서는 군산항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어항인데 줄포항이 토사로 메워져 폐항이 되자 1938년 진서리 앞바다의 곰섬을
중심으로 동쪽의 범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과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만든 항만이며
서해어업의 전진기지항이다.
곰소[態淵]라는 말은 곰처럼 생긴 두개의 섬이라는 말과 그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생긴
이름이며 ‘곰소 둔벙속같이 깊다.’라는 속담이 있으며 곰소항을 대표하는 것은 대규모의 젓갈시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젓갈가게가 밀집되어 있다는 이곳은 여느 곳의 생산물보다 깊은 맛이 있고
쓴맛이 덜하다는 곰소염전의 천일염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가지 젓갈들을 직접 맛보고
어느 곳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겨울날의 어리굴젓을 시작으로 토하젓, 낙지젓, 명란젓,
밴댕이젓 등 십수 가지의 젓갈들이 나름의 맛을 뽐내며 준비되어 있는 곰소항의 풍경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활기가 넘치는 장소이다일반 등산로는 마당바위 아랫쪽으로 이어지나 지맥길은 이정표 뒷쪽으로 이어진다
가야할 변산지맥 능선의 모습
마당바위 뒷쪽으로 돌아가니...
355.9봉(12:22)
등로에서 좀 외진 곳이라 그런지 일반 등산객들의 뒷간(화장실)이 되어 버렸다
암릉이 나오고...
암릉 좌측 아래로 내려간다
암릉구간은 상당히 미끄럽다
산꾼들의 흔적이 보이고...
산죽길을 헤집고 내려서니...
마당바위에서 헤어진 일반등산로를 만난다
마당바위 쉼터(12:32)
재백이재 가는길
우측으로 내려서니 2년전에 걸었던 재백이재가 나온다
재백이 고개(宰伯峴:160m:12:42)
내소사 초입에 위치한 입암마을에서 내소사를 거치지 않고, 관음봉이나
직소폭포 방향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원밭재 또는 원바위재라고도 부른다.
옛날 나라에 가뭄이 들면 원님들이 직소폭포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넘나들었든 고개로 재백이는 재상과 관백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출입금지 팻말 뒷쪽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직소폭포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신경쓰인다
묘지가 나오고 재빨리 좌측 등로로 들어서는데 어느 등산객이 그쪽은 길이없고
직소폭포는 아랫쪽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직소폭포롤 가는 등산객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비탐구간이라 그런지 등로가 잘 보이질 않는다
이동통신탑(12:48)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가야할 능선
등로에서 바라본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원암마을의 모습
원암은 뒷산에 원바우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붙혀진 지명이다
돌탑(12:58)
슬랩지대(12:59)
지맥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335.9봉의 모습
비탐구간이지만 다닐 사람은 다 다니는지 등로는 생각보다 뚜렸하다
암봉(13:02)
암릉길 사면으로 우회를 한다
능선으로 올라가니...
조망바위(13:05)
통신탑이 있는 가야할 273.4봉이 보인다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다시 오르막길
273.4봉(13:12)
273.4봉에 있는 이동통신탑
급경사의 내리막길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대소고개(13:20)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서 대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개 우측 아래에는 대소마을이 있고 직소천이 흐르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석포리 마을인데 석포리의 행정구역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원래 산행 계획은 말재까지 가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초반에 체력을 너무
소진하는 바람에 야생화를 보러 가려니 아무래도 여기서 산행을 접어야 할 듯 싶다
이곳에서 산행을 접으려니 다음에 접속구간이 길고 말재까지 가면 다음에 접속구간이
없으나 야생화을 보러갈 시간이 없어 이곳에서 과감하게 산행을 종료한다
석포리 내려가는 길 옆에는 관리가 안된 남평문씨 묘지가 보인다
석포리 가는길
임도에서 바라본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295.9봉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석포리의 모습
부안군 진서면에 있는 석포리(石浦里)의 모습
마을 앞은 서해와 맞닿아 있으며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원암, 입암 등이 있다.
원암은 뒷산에 원바우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입암은 큰 바위가 우뚝 서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내소사고려동종(보물 277), 대웅보전(보물 291),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 등의 고적이 있다
마을 도로로 내려서서 5일전에 이용했던 줄포개인택시한테 전화를 했더니만 술을 먹어서 못 오겠단다
곰소택시는 전화를 받지도 않고...이젠 젠장맞을...
하는 수 없이 부안읍내의 택시를 콜한다
뒤돌아본 변산지맥 능선의 모습
20분이면 온다는 택시는 오질않고 30번 도로에 거의 다 내려오니 그때서야 택시가 온다
택시를 타고 바드재를 향한다
바드재 가는길
바드재 가는길에서 택시를 잠깐 세워 우동제와 선계폭포를 감상한다
선계폭포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며 공부와 무예를 닦았다해서 성계골이라 했고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조선의 4대 여류시인 중의 한사람인 이매창과 시문과 인생을
논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곳으로 홍길동의 활동무대의 배경으로 작품을 쓴 곳이기도 한 곳이다
선계폭포 안내문
다시 택시를 타고 바드재로 향한다
바드재에서 얌전히 쥔장을 기다리고 있는 범여의 愛馬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변산바람꽃을 보러 청림마을로 향한다(14:20)
청림마을(14:40)
청림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변산바람꽃 군락지로 향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진사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보리밭 건너에 2~3명이 바람꽃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국립공원과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 속에서도 봄을 알리는 변산 바람꽃 군락지, 노루귀 등 각종 야생화 천지이다.
봄의 전령사 변산바람꽃
맨처음 피는 한국 특산종으로 발견지인 변산반도의 이름을 따 변산바람꽃으로 꽃이름이 붙여졌다.
변산바람꽃(꽃말:덧없는 사랑, 기다림 )
1993년 전북대학교 선병윤 교수가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에서 처음으로 발견하여 ‘변산바람꽃’이란
이름을 지어졌는데 출생지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에서 처음 발견된 ‘바람꽃’이라는 뜻이다.
‘바람꽃’이란 이름은 바람에 잘 흔들릴 정도로 줄기가 아주 가늘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워 유래했다고 한다.
너무나 건방지고 도도해 보이는 변산 바람꽃
너의 그 요염한 자태에 不遠千里를 마다하지 않고 오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는 바람꽃 종류가 17가지나 될 정도로 참 많다.
일찍 피는 너도바람꽃을 비롯하여 만주바람꽃, 꿩의바람꽃, 회리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세바람꽃, 나도바람꽃, 가장 늦게 여름에 피는 바람꽃 등등. 그렇지만
변산바람꽃은 여느 바람꽃과는 달리 참 특이한 꽃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꽃, 그래서 한국특산식물이다
지난 겨울에 지독한 가뭄탓인지 지난해에 비해 개채수도 적고 색감도 그리 곱지 못하다
산속의 낙엽속을 헤매다가 어렵사리 하얀 노루귀란 놈을 만났다.
이 지역의 날씨가 추웠던 탓일까... 아직까지 별로 눈에 뛰질 않는다
바로옆에 빨간 노루귀란 놈도 이제서야 기지개를 필 준비를 하고 있다.
작년 3월3일에 왔을때는 너무도 좋았는데 올해는 1주일 뒤에 왔으면 좋았을 걸...많이 아쉽다
노루귀 꽃말(당신을 믿는다. 신뢰)
산골에 어떤 분이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루가 와서 나무에 숨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냥꾼이 따라와
노루를 봤느냐고 물었지만....
그 분은 모른다고 했다.
사냥꾼이 떠나고 노루가 나와
그분의 옷을 물고 자꾸 어디로 끌고 갔는데..
그 장소에서 노루는 몸으로 명당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분은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곳에다가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 후로 자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핀 꽃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하여
노루귀로 가 이름이 지었다고 한다
참으로 요염하다
변산바람꽃 자생지 입구에 버려진 경운기
마을이 청림마을이 들어선 자리에는 과거 변산의 4대사찰의 하나인 청림사가 있었던 지역이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때 역적들의 소굴이던 청림사가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린 후
절터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사람들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이
청림사의 종으로 내소사로 옮겨진 것이다
청림마을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내변산탐방지원센터로 향한다
내변산 탐방지원센터(15:40)
청림마을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내변산 탐방지원센터가 있다
탐방지원센터에서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변산바람꽃 자생지로
갔는데 이곳은 청림마을과는 반대로 변산바람꽃은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다.
임시로 개방하여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실제 개방은 담주 월요일(3월4일)에 한다고
하니 내가 너무 성급하게 온 듯하다
자생지에서 간간히 보이는 변산 바람꽃
자생 윗쪽으로 보이는 안장바위
오늘은 복수초를 전혀 구경을 못했는데 탐방지원센터 화단에서 귀한 복수초를 만난다
봄꽃 중에서도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알려진 복수초(福壽草)는 글자 그대로 복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축복의 뜻이 담겨 있는 야생화. 한낮에는 노란색 꽃잎이 벌어지고 밤에는 꽃잎이
오므라드는 복수초는 한겨울 눈을 뚫고 핀다고 해서 ‘봄의 전령사’로 불린다
이곳은 노루귀는 생각보다 활짝 피어있다
하얀 노루귀도 예쁘게 피었다
갈매빛 준령이 달려 나갔다
하늘도 나직이 떠도는 들에
노루귀 빨간 꽃바람에 사운대고
해도 한나절 겨워 가는 들 건너
은빛 바다가 넘실거린다
신석정의 ‘다시 들길에 서서’ 중에서
청림마을에서 보지못한 노루귀
이곳에서나마 보았으니 여한이 없다
이 꽃을 보려고 부안까지 왔었다
사이좋게...
願을 풀었으니 귀경해야지
내변산 탐방소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는데 사위한테서 전화가 온다.
‘아버님 저녁식사를 같이했으면 합니다’...그 전화를 받고 서울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논스톱으로... 2시간 반만에 도착한다.
오랫만에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였다... 출가한 딸에게는 늘 미안하다
역마살 낀 아빠땜에 자주 볼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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