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20년 03월 01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지독한 미세먼지...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6.1km + 어프로치 1,2km / 3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대소고개-안부-암봉-290봉-안부-295.7봉-302봉-무명봉-안부-295.5봉-조망바위-433.7봉
신선암봉-신선봉-437봉-폐헬기장-헬기장-지맥우회길-조망바위-496봉-다시 조망바위-조망바위
413봉-운호고개-무명봉-무명봉-삼신산-351봉-갈림길-말재
☞ 소 재 지: 전북 부안군 변산면, 진서면
지난 1월부터 시작된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시작된 우한 폐렴이 언젠가 부터 코로나 19 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 역병이 시작되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중국인 입국을 금지 시켰고, 우리나라에서도
의사협회를 비롯한 감염 예방 당국이 중국인 입국 금지를 시키라고 요구했으나 우리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안위를 지켜야 할 대통령 나리께서는 너무 안이하게 판단하여 금방 잡힐 것이라는 말을 해
민초들의 가슴에 소금을 뿌리지 않나, 거기다가 짱깨의 뎃방 시진핑이란 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 이라는 위로 전화까지 하면서 중국인의 입국을 막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구에 있는 이단 교회인 신천지 교회라는 곳에서 시작되어 들불처럼 일어나 폭발적으로 이 나라를
집어삼킨 역병 때문에 전 세계에서 80여개국이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시켰고, 심지어 우리가 우호적으로 대했던
중국마저도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시켜 항의를 하니 ‘외교보다 방역이 먼저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뒷통수를 맞지않나
전 세계에서 한국인을 입국금지조치를 하는데도 외교장관이란 여인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몰라도 유럽이나
다니고, 국민의 건강을 책임질 보건복지부 장관이라 자는 ‘이 병은 중국인 입국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을
같다온 한국인이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이 양반이 중국 장관이 하는 소리줄 알고
내 귀를 의심했다...거기다가 국무총리라는 자는 마스크를 사지 못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민초들에게
내일이면, 마스크를 편히 살 수 있다하여 나도 사무실옆 우체국에 갔더니만 마스크는 커녕 구경도 못하고 왔다.
우리 백성들은 마스크 몇 장을 사기위해 비를 맞으면서 너뎃 시간씩 줄을서도 못사는 판국에 중국에다
마스크와 손 세정제, 방호복을 무상으로 갖다 바치는 이 나라...
민초들의 안위도 못 지켜주는 이 곳이 나라인가, 정령 내 조국이련가...
저렇게 하니 아직도 짱깨들이 이 나라를 자기들 속국처럼 생각하지...정말 이 나라 떠나고 싶다
구정을 지내고 나서부터 나같은 자영업자들은 매출이 急転直下하고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니 매출이
오르지 않아 심각한 타격이 예상되는데 이 넘의 역병이 언제 멈출지 모르니 답답하기만 하다
매주 가야하는 산행도 접어야 할 듯 싶은데 그건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구나.
지난주 멋모르고 의성 지역으로 나섰다가 가족들에게 고초를 당하여 이번에는 나서기가 좀 거시기하다
특히 출가한 딸내미의 질책이 얼마나 심한지... 그래서 이번주는 산행을 포기하고 꽃이나 보러 가야겠다
그것도 대중 교통이 아닌 차를 가져가기로 하고 해마다 이맘쯤이면 가는 변산바람꽃을 보러간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카메라 가방과 갈아입을 옷을 넣을 조그만 베낭만 챙기고 가족들 몰래
도둑 고양이처럼 집을나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를 지나 공주~서천간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짙은 안개로 인해 앞이 보이질 않으나 고속도로는 텅 비어있다.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군산휴게소에 도착하니 얼마나 빨리 왔는지 6시가 좀 넘은 시간이다
이곳에서 1시간 이상을 차에서 자고 일어나 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부안으로 향하는데 너무 일찍 와버렸는지 지금 시간에 야생화를 보러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지난해인 딱 오늘(2019.03.01)에 변산지맥 3구간을 일찍 끝내고 야생화를
보러가는 바람에 남은 4구간이 당일 산행으로는 좀 먼거리인 20여km가 남아있어 이걸 좀 줄여 놓으면
다음에 내려와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차를 몰고 산행 들머리인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로 향한다
군산휴게소에서 석포리까지는 꽤나 먼 거리이다...부안I.C가 아닌 줄포I.C를 빠져나와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을 지나 내소사 가는 들머리에서 좌측 마을길로 들어서 맨 끄트머리에 차를 주차한다(08:40)
산행을 시작하다(08:45)
카메라 가방은 차에다 두고 갈아입을 옷가방과 물 한병, 스틱만 가지고 길을 나선다
대소고개로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농장에 있는
개쉬키들이 지랄발광을 하면서 짖어대는데,,,짖던지 말던지 계속 걸어간다
잠시후에 감야할 맥길은 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1년전에 내려왔던 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조망바위(08:53)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석포리가 아련히 보이고 변산 8경중 제1景인 웅연조대(雄淵釣臺)로 불리는
곰소항은 아예 보이지도 않아 아쉽기만 하다
곰소(態淵)라는 말은 곰처럼 생긴 두개의 섬이라는 말과 그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생긴
이름이며 ‘곰소 둔벙속같이 깊다.’라는 속담이 있으며 곰소항을 대표하는 것은 대규모의 젓갈시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젓갈가게가 밀집되어 있다는 이곳은 여느 곳의 생산물보다 깊은 맛이 있고
쓴맛이 덜하다는 곰소염전의 천일염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가지 젓갈들을 직접 맛보고
어느 곳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겨울날의 어리굴젓을 시작으로 토하젓, 낙지젓, 명란젓,
밴댕이젓 등 십수 가지의 젓갈들이 나름의 맛을 뽐내며 준비되어 있는 곰소항의 풍경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활기가 넘치는 장소이다
부안군 진서면에 속해있는 석포리(石浦里)는 생각보다 생각보다 상당히 크다
범여가 가장 좋아하는 절집인 내소사도 석포리에 있고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도 석포리에 있다
그리고 석포리 계곡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석포천의 발원지도 있고, 마을 앞은 서해와
맞닿아 있으며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원암, 입암 등이 있다.
원암은 뒷산에 원바우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입암은 큰 바위가 우뚝 서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내소사고려동종(보물 277), 대웅보전(보물 291),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 등의 고적이 있다.
미세먼지로 인해 곰소항의 멋진 전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대소고개로 향한다
대소고개(202m:09:00)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서 대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유인남평문씨 묘지 가운데로 길이 나있다.
우측에는 봉분과 상석이 있고 좌측에는 석물이 있는데 도로를 내는데도 예의가 있지,
이건 좀 심하다는 느낌이다... 고개 우측 아래에 있는 대소마을은 부안에 있는 가장
오지(奧地)에 속하는 마을로 어떤 자료에 의하면 지리산 청학동의 시발점이 이곳
대소마을이라고 한다.
대소마을의 옛 지명은 ‘대소뜸’으로 현재는 ‘큰 대(大) 늪 소(沼)’를 써서 대소(大沼)라
부르나 근처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의 원래 자리의 주장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이
부안의 향토사학자의 의견을 들어보면 낭설이라 하며,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이 일대의 지명들이 노래 부르는 노릿재(노랫재), 북치고 장구치는 북재, 지금은
아차봉이라 부르는 징바위 등, 노랫가락과 연관된 지명이 많아 퉁소를 뜻하는 ‘대소(大簫)’
라고 불러야 맞다고 하며, 이 고개를 이 지역 사람들은 대소고개가 아닌 노릿재라 부른다
대소고개에 있는 유인남평문씨 묘
대소마을쪽으로 내려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맥산행이 시작된다
샛길 출입금지라...그라먼 대체 등로를 만들어 주던지...제발 탁상행정 그만합시다
고개를 지나자마자 멋진 암릉을 만나고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09:02)
안부를 지나 오르막길로 오르는데 오늘은 조금 편하게 올라간다
베낭에 물 한통, 자켓 한벌밖에 없어 베낭이 가벼워서 그런가?
능선에 오르면서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암봉(09:13)
이곳에서 서면 내소사 뒷봉인 관음봉과 곰소항이 멋지게 조망되는 곳이련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290봉(09:14)
290봉 정상에서 본 여백
석포리쪽은 五里霧中
암릉구간 능선을 계속 걸어간다
암릉구간에서 안부로 내려간다
안부(09:17)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295.7봉(09:20)
좌측으로는 진서면 운호리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내리막길의 등로는 아주 지저분하다
다시 등로는 뚜렸하다
302봉(09:24)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좌측 운호저수지 방향으로도 맥꾼 시그널이 걸려있어 햇갈린다
등로 좌측으로는 화산석같은 구멍이 숭숭 뚫린 암릉들이 많이 보인다
浮石
계속되는 암릉구간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무명봉(09:29)
멋진암릉을 바라보면서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의 등로라 그런지 등로는 비교적 뚜렸하다
안부(09:32)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295.5봉(09:35)
평평한 등로를 걷는데 미세먼지가 걷힐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다시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치킨게임?
암릉이 맥길을 가로막고 있다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조망바위(09:45)
내가 개인적으로 이곳 변산을 참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내소사, 개암사, 월명암 등 멋진 절집들도 많고, 전쟁과 기근이 닥쳐도 끄떡 없다는 십승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들판과, 젓갈을 비롯한 수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자장율사가 처절하게 수행했다는 부사의방(不思議房), 범여의 선조이기도 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머물면서 물을 마셨다는 어수대(御水臺), 거기다가 멋진 산과, 야생화가 지천인 땅 변산,
조선의 3대 기생(황진이, 홍랑, 이매창)중에 하나인 이 매창의 고향이 이곳이 아니였던가...
산죽길도 지나고...
또 다시 암릉이 맥길을 막는다
우측으로 우회하여...
암릉구간 윗쪽으로 올라간다
암릉구간 능선으로 올라간다
낙엽속에 금등롱(金燈籠)이라 불리는 산자고(꽃말:봄처녀)가 꽃말처럼 수줍게 피고 있다
433.7봉(09:55)
정상에는 돌탑과 묘지 한 기가 있으나 상석(床石:망자의 밥상)이 좀 튿이한 형태이다
묘지 봉분에는 잔디 사이로 산자고가 많이 피고 있다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 다음에...
다시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힘들게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는데 조망이 탁 트인 곳이나 모든게 오리무중이라 아쉽기만 하다
오늘 산행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기분으로 걸어간다
신선암봉(神仙岩峰:440m:10:02)
넓은 암릉구간으로 펼쳐지는 곳으로 신선봉 아래에 있는 암릉구간이라 신선암봉이라 부른다
평평한 암릉구간이 펼처져 있으며 앙증맞은 돌탑도 서너개가 보이고 맞은편의 신선봉은 보이지 않는다
너럭바위처럼 생긴 암릉구간 위를 따라서 걷는다
나무 사이로 맥길은 이어지고...
암릉구간을 지나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산죽길이 펼쳐진다
산죽길을 지나 신선봉으로 향한다
신선봉에 올라서니 산불감시 카메라가 범여를 째려보고 있다
신선봉(神仙峰:488.2m:10:12)
부안군 진서면과 변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산불감시 카메라가 있다.
이곳은 변산 십승지로 이어지는 등로로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에는 유난히도 신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신선대, 신선봉, 신선암, 쌍선봉, 선인봉, 삼신산, 선녀탕, 선계폭포,
관선마을 등이 있으나 그 정점에 있는 산이 이곳 신선봉이라고 한다.
인증샷
신선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능선으로 내려서니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미세먼지가 조금씩 옅어지는 느낌이다
암릉구간을 지나고...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산죽이 살짝 보이긴해도 그리 많지는 않다
나무들이 빽빽한 드넓은 능선을 걷는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이 상화님의 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437봉(10:27)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
신선들의 공깃돌인가?
멋진 바위도 만난다
폐헬기장(10:29)
고도차가 완만한 능선길을 걸어간다
헬기장(10:32)
헬기장인데 거의 사용을 안하는지 잡풀만 무성한데 관리번호가 있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이어지는 맥길은 생각보다 뚜렸하다
지맥 우회길(10:39)
지맥길은 이곳에서 조금지나 조망바위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나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는 산꾼이 많다
이곳은 변산반도 국립공원내라 그런지, 아니면 국공파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선답자의 시그널이 잘 안보인다
직진의 뚜렸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0:41)
지맥길은 이곳에서 조망바위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디
변산십승지(망포대)로 이어지는 직진의 윗쪽 능선길이 뚜렸하다
이곳에서 물 한모금 마시면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조망바위 윗쪽으로 가본다
496봉(10:53)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1.2km 정도만 가면 변산 십승지 구간에 있는 망포대, 쌍선봉,
남여치로 이어지는데 거기(망포대)까지 같다오면 야생화보러 가는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언젠가 걸어볼 변산십승지 구간에 다시 오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조망바위로 되돌아 간다
다시 조망바위(10:55)
조망바위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대소고개에서 이곳까지 변산 십승지 코스와 겹쳐지는
등로인데 지금부터는 변산 십승지와 작별을 하고 온전히 변산지맥길로 들어선다
변산십승지 개요도(지도...운해님 자료인용)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十勝地)는 거의가 백두대간 자락에 위치하는데, 백두대간을 벗어난 승지가 두 곳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공주(公州), 유구(維鳩)이고, 또 다른 하나가 변산 동쪽의 호암(壺岩, 병 바위)이다.
그 중 공주 유구는 백두대간에서 나온 금북정맥(錦北正脈)이 산간(山間)으로 이어져 터를 정하고 있지만,
변산은 호남정맥(湖南正脈)에서 분지(分支)된 지맥이 머리를 북쪽으로 치올리면서 나지막한 구릉(丘陵)지대와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변환하며, 천전은맥(穿田隱脈)으로 진행하여 서해 바닷가 앞에서 몸통을 위로 솟구친
산진처(山盡處)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십승지 중,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으면서 삼면(三面)을 바다에 드리우는데, 수 백 개의 산봉우리가
해안과 내륙에서 첩첩이 터를 보듬는 승지이다. 그래서 전북지방에서는 예전부터 변산을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라 불렀다. 그것은 고창의 방장산(方丈山)과 고부의 두승산(斗升山, 瀛洲山이라 함)을
합쳐 호남의 삼신산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한편 변산이 감추고 있는 십승지도 여타의 승지처럼 딱 여기라고 꼬집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곳 역시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정감록의 두 비기(秘記) 모두 변산
호암(壺岩)아래 동쪽임을 분명히 제시하므로 써 '병 바위' 또는 '병' 과 관련된 장소나 사물의
소재를 유추(類推)해야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조망바위로 내려서니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길을 만들어서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진 우회길을 만나 내려간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삼신산으로 향한다
암릉구간 아래로 내려서 조금을 더 가니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1:00)
미세먼지가 아침에 비해 많이 옅어진 느낌이나 여전히 답답하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신선봉의 모습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망포대
산절승, 해절승인 호남의 3대 명산 변산의 여덟 곳 경치를 가리켜 ‘변산 8경’이라 한다.
제1경 웅연조대(熊淵釣臺), 제2경 직소폭포(直沼瀑布), 제3경 소사모종(蘇寺暮鐘),
제4경 월명무애(月明霧靄), 제5경 서해낙조(西海落照), 제6경 채석범주(採石帆舟),
제7경 지포신경(止浦神景), 제8경 개암고적(開巖古蹟)이 그곳이다.
변산은 바깥에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이다.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98km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변산’이라 부르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僧場)이 섰다는,
산의 안쪽을 ‘안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봉인 의상봉(508m), 주류산성(331m), 남옥녀봉(432.7m),
옥락봉, 세봉, 관음봉(424m), 신선대(486m), 망포대(492m), 쌍선봉(459m) 등의 산들이 안변산을 에워싼다.
그 안에 백천내의 물이 부안 댐에 갇혀 고창·부안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고, 남은 물은 해창(海昌)에서
서해로 흘러 보낸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야생화의 寶庫인 운호계곡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413봉(11:04)
급경사인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뒤돌아 보니 멋진 암릉이 보이고 안부인 운호고개로 내려간다
운호고개(雲湖峴:11:08)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운호저수지 윗쪽 계곡 능선에 있는 고개로 야생화가 지천이다
특히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붉노랑 상사화(꽃무릇)와 복수초 등이 많아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찿는 곳이다
운호고개에서 만난 붉노랑 상사화
붉노랑 상사화는 수선화과에 속하며 8월말에서 9월초 사이에 개화하며 꽃은 붉은 빛을 띤
노란색 꽃이 피며, 우리나라 고유 자생종인 붉노랑 상사화는 잎이 사라진 다음에 꽃줄기가
나와 꽃을 피우는데 꽃의 색깔은 연한 노랑색이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붉은빛을
띠고,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 사모한다고 해서 붉노랑 상사화라고 이름 붙혀졌다.
국내의 상사화속 식물은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제주상사화, 진노랑상사화, 백양꽃상사화
석산 등이 있다
복수초 군락지
전국에 많은 복수초군락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곳은 처음본다
흐미 대포 카메라를 가져올 것...에공 아까운거
운호고개 아랫쪽에는 시진을 찍어러온 진사들이 있는지 사람소리가 많이 들린다
흐미...이쁜넘들
복수초(꽃말:영원한 행복)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복수초(福壽草)는 복(福)과 장수(長壽)를 상징하며 한낮에만 꽃잎이
벌어지고 추운 밤 꽃잎을 오므린다고 알려져 있으며 '눈 속에서 꽃이 핀다'하여 설연화(雪蓮花),
'얼음 사이에서 핀다'하여 빙리화(氷里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복수초는 복을 받으며 장수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특히 일본에서는 새해가 되면 복수초를 선물하는 풍습이 남아 있는데, 또 일본에는 복수초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옛날 안개의 성에 아름다운 여신 구노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구노를 토룡의 신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토룡의 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구노는 결혼식 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버지와 토룡의 신은 사방으로 찾아 헤매다가 며칠 만에 구노를 발견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구노를 한 포기 풀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듬해 이 풀에서 구노와 같이 아름답고
가녀린 노란 꽃이 피어났고, 이 꽃이 바로 복수초이다.
복수초 군락지를 바라보면서 대포를 가지고 오지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급경사로 올라간다
등로는 보이질 않고 오늘 산행중에 가장 급경사의 오르막길이다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선다.
조금전에 내가 걸었던 등로의 궤적
능선에서 바라본 운호계곡
부안군 진서면에 있는 운호리(雲湖里의 원래 지명은 마을 본래 이름은 ‘여룬개’이다.
지금도 객지로 시집간 할머니들을 여룬개떡(댁)이라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개’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닷가를 뜻하는 말이다(갯마을, 개흙, 갯바위). ‘여룬’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며 다만 마을 명칭이
‘여룬개 ->운포->운호리’로 변경되었는데 이를 참고로 추정한다면 ‘여룬’은 ‘열운’을 소리 나는 대로
풀어 쓴 게 아닌가 생각되며 여기서 ‘운’은 구름 운(雲)자가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걸로 보아
‘구름’을 뜻하는 것다.
운호저수지 우측으로 노적봉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여기서는 보이지 않음) 관선마을이 있다
관선마을은 신선봉과 연관이 있는 마을로 부안을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들의 얘기로는
‘신선봉에는 아마도 신선이 되고자 염원했던 인간들과 이를 이끌던 신선이 살았을 것이고
그 중에 지도자들급만 우화등선(羽化登仙 :사람이 날개가 돋아서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말)하듯 신선봉 주위에서 살았고, 일반 사람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 수행하듯 살며
신선봉을 바라보며 살던 장소가 관선(觀仙)마을이었다고 한다
능선에서 바라본 가야할 삼신산의 모습
무명봉(11:25)
완만한 오르막길
짝뚱 연리지?
무명봉(11:30)
무명봉에서 바라본 신선봉
사면길 같은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
고도차가 없는 능선을 3~40m 정도 걸어가니 삼신산 정상에 도착한다
삼신산(三神山:486.4m:11:36)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와 변산면 마포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형도에는 삼신산이란
지명의 표기는 없고 그냥 486.4m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며 부안군의 자료에도
삼신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근처에 있는 신선봉에 대한 지명에 관련된
산 이름이 아닐까(범여의 생각中에서)
삼신산 우측에 있는 부안군 변산면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림이 우거져 예로부터 사람 살기가
적당한 지역으로 중부지역에 ‘생거진천, 사거용인’ 이란 말이 있기 전부터 호남지역에서는
‘생거부안, 사거순천’이란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부안 내에서도 ‘살아서는 변산이요,
죽어서는 순천’이란 말이 고서(古書)나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성종때 편찬한「동국여지승람」에는 “변산은 하늘이 내린 천부(天府:흙이매우기름져서
생산물이 많이 나는 땅)’라 기록되어 있고,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풍수가, 예언가이기도 했던
격안(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자신의 저서인 “격암유록(格庵遺錄)” 에 ‘변산은 변란과 기근이 없는
십승지지(十勝之地)요, 사람의 몸을 능히 지킬수 있는 보길지(保吉地)’라 했다.
옛 사람들은 변산(내변산)을 일컬어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 중의 하나인 봉래산으로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 이라 했고, 내변산과 외변산을 만물의 시원(始原)과 바람의 근원지인 태극지형으로
보아 산태극, 물태극의 요지라 하여 명당지혈(明堂之穴)로도 여겼다.
특히 변산은 산맥이 다하여 바다로 떨어지면서 지기(地氣:땅의 기운)가 강하게 응결된 곳,
즉, 산진처(山盡處)라 하여 모두가 살고싶어 하는 양택명당처이다
삼신산을 지나자마자 맥길은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대구 산꾼의 전설인 비실이부부님의 흔적이 보인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處世不求無難(처세불구무난)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난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나니라.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중에서
등로는 보이지 않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계속 내려간다
지적도근점같은 시멘트 말뚝도 보인다
우측의 능선으로 내려서니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351봉(11:50)
계속 내리막으로 맥길은 이어진다
갈림길(11:53)
간간히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등로 주위에는 철쭉들이 많이 보인다
희미한 맥길...최대한 좌측 능선으로 따라서 간다
등로는 잘 보이지 않고 낙엽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암릉구간에서 좌측 방향의 능선으로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니...
진서면과 변산면 경계인 말재고개로 내려선다
말재(馬峙:86m:12:15)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와 변산면 마포리 마동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마동마을과 관련되어 있으나 자료는 찾을길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736번 지방도가 지나가면, 옹벽위에는 깨진 수준점이 있고 운호리쪽에는 배수지가 있다
마포리쪽에는 말재 북쪽 유유 마을(儒遊洞)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유유천에서 북류하며
유유교를 지나 만들어진 유유제(儒遊堤)가 있으며 유유천을 타고 마포리 입구 고사포해수욕장
남쪽에서 서해로 유입하며, 부안 누에타운이 있다.
말재고개의 수준점
이곳에서 간단하게 산행을 종료하고 愛馬가 있는 석포리를 가기 위해 곰소택시(063-582-2577)를
부르는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택시가 왔다...근데 이 택시를 타고 석포리로 향하는데 기사한테 전화가 온다
정읍을 가야할 손님이라면서 빨리 오라고 하는 전화를 받더니만 갑자기 난폭운전이 시작된다.
꼬부랑길 2차선 도로에 앞에 차가 3대가 있는데도 중앙선을 넘어서 추월을 하지않나 바지에 오줌을
저릴 정도로 난폭운전을 해대는데 난 정신이 나가 버렸다...이렇게 하시면 어떡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싫으면 내리나는 투인데 얼마나 내달리는지 내 애마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내리는데 택시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는데 정말 이 새끼 부안 경찰서에 난폭운전으로 신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택시에서 내려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다...택시한번 잘못 타 황천길 갈 뻔 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 내소사로 향하는데 내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식당에 들려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내소사로 향한다
내소사 가람배치도
내소사 일주문과 할아버지 당산나무
식당을 나와 내소사로 향하는데 가장 먼저 범여를 맞이한 게 내소사 일주문과 할아버지 당산나무다
일주문(一柱門)이란 절집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일심(一心)을 상징한다...청정한 도량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며, 내소사의 전각중에 가장 화려하다.
“楞伽山 來蘇寺”의 편액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작품인데 이 분은 내소사 이외에도 전북의 대표적인 가람인
김제 금산사와 고창 선운사의 일주문 편액도 쓰신 분으로, 당시(일제시대)에 대단한 서예가이셨다
내소사는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년)신라의 스님인 혜구(惠丘)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592~667)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뀌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이 절에 관한 기록은「동국여지승람」과 고려 후기의 문신인 최자의 보한집(補閑集) 가운데
고려 중기의 문신인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漢詩〈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있고,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가 있는데 모두 소래사로 기록이 되어 있어 언제 내소사로 절 이름이
바뀐지는 분명하지 않다...1633년(인조11)에 청민(靑旻)스님에 의해 중건되었고, 1902년
관해(觀海) 스님에 의해 수축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제277호), 법화경절본사본(보물제278호),
대웅보전(보물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1268호)가 있고 그 밖에 설선당, 보종각,봉래루,
3층석탑 등이 있다
일주문 앞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나무
내소사에는 일주문 앞과 경내의 봉래루 앞 마당에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다
일주문 앞에 있는 당산나무는 수령이 약 700년된 할아버지 당산나무이고 절집 안에 있는
당산나무는 수령이 약 1,000년쯤 되는 할머니 당산나무가 서 있다
이곳 진서면 석포리 입암(立岩:선돌)마을 사람들과 내소사가 함께 음력 정월 열나흘날에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堂山神: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의 의례인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나무를 할아버지 당산나무를 둘러보고 내소사 경내로 들어가는데
나는 불교 신도라 입장료도 안내고 들어간다
내소사 전나무숲
내소사 전나무숲은 일주문에서 피안교(彼岸橋)까지 길이가 600여m 밖에 안되는 거리이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전나무 숲으로 오대산 월정사숲에 비견될 정도로 멋진 전나무숲이다
내소사는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곳으로 내소사 앞 터가 휑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들이 전나무를 심었고 지금은 약 500그루가 울창히 서 있다
전나무에서는 하얀 수액이 나오는데 이 때문에 '젖나무'로 불리던 것이 전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전나무에서는 피톤치드(phytoncide) 라는 살균물질이 나무에서 분비되기
때문인데, 전나무가 편백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피톤치드가 많이 방출되는 나무라고 한다
피안교(彼岸橋)에서 바라본 내소사 뒷산인 관음봉의 모습
피안(彼岸)이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서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번역어로, 이승의번뇌를해탈하여열반의세계에
도달하는 것 또는 그런 경지를 이른다는 뜻이다
피안교를 지나니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에 벚꽃나무가 도열해 있다
좌측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연지(蓮池)가 있고 우측에는 내소사사적비와 해안당대종사의
행적비가 보이고, 이곳에서 예전에 TV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대장금(大長今) 촬영지란 표식이 있다
내소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집의 삼문(三門:일주문, 천왕문,불이문) 가운데
2번째의 문으로 부처님과 가람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동방에는 용을 든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는 보탑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에는 비파를 들고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 칼을 들고있는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을 모셔 놨는데 지금 내소사에는 사천왕상을 새로 조성중이라 가림막으로 막아놨다.
천왕문 주련(柱聯)은 김제와 부안에서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내소사를 크게 중흥시킨 해안(海眼)대종사의
오도송( 悟道頌 :고승(高僧)들이 불도(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가(詩歌))이다
부안 내소사 천왕문(주련)鐸鳴鐘落又竹篦(탁명종락우죽비):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 울리고 내리는데,
鳳飛銀山鐵城外(봉비은산철성외):은산위에 철성의 바깥에서 봉황새 날아드네.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누군가가 있어서 희소식을 나에게 묻는다면,
會僧堂裡滿鉢供(회승당리만발공):당우안의 스님들 밥그릇에 공양이 가득하네.
내소사 경내에 있는 할머니 당산나무
1000년 수령에 할머니 당산나무로 불리며 내소사 당산제 때 신목(神木)으로 받들여 진다.
내소사 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치러지는데, 다른 여타 당산제와는 달리 민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찰이 주도해 온 것이 특징이었다 한다.
1990년 내소사가 당산제를 마을로 이관해 지금은 주민들의 주도로 치러진다
조선 후기 불교가 중흥되면서 민간신앙이 대거 절집으로 들어 왔는데
내소사는 당산나무까지 들어온 예로서 유일하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낸지가 얼마되지 않았는지 금줄이 처져있다
당산나무를 지나니 벌써부터 초파일 연등을 접수하는 모양이다
절집에서 1년 수입의 70%가 초파일 수입으로 이루어지는데 코로나 바이러스19인가
뭔가 지랄같은 역병 때문에 올해 절집 살림이 힘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집이 내소사인데 큰 맘먹고 등이나 하나 달아야겠다
내소사 설선당(說禪堂)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종무소 역할을 한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으며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관음봉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선당 앞에 있는 산수유 나무
내소사 봉래루(蓬萊樓)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으며 이들 초석의 배치는 전면 5칸 12.23m로 각 기둥 사이가
215-244-305-244-215cm로 중앙의 칸으로 갈수록 넒어지고 있다.
측면은 외열 기둥 사이가 3칸으로 6.20m이며 각 기둥 사이는 215-190-215cm의 간격으로되어
있지만 내부는 2칸으로 각 칸이 310cm를 유지하고 있다.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며, 봉래루에 오르면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시주질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자세히 볼 수 없다는게 아쉽기만 하다
봉래루의 덤벙주초와 막돌초석
전통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덤벙주초이지만 내소사에서는 특히 덤벙주초를 또렸하게 많이 볼 수 있다.
기둥을 세울 때의 주춧돌은 상면을 잘 다듬은 주초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막돌 초석으로 나뉘는데,
막돌초석을 덤벙덤벙 놓았다는 뜻으로 덤벙주초라 하며, 초석 상면이 울퉁불퉁하여 그 모양에 맞도록
기둥뿌리를 깍아 맞추는 ‘그렝이질’을 한 다음에 다음 기둥을 세운다
내소사 범종각(梵鐘閣)
내소사에는 종각이 2개가 있는데 봉래루를 기준으로 했을때 우측에는 범종각(梵鐘閣)이
있고, 좌측에는 보물제277호 고려동종(高麗銅鐘)을 안치한 보종각(寶鐘閣)이 있다.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내소사 보종각(寶鐘閣)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하는데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고려동종(高麗銅鐘:보물제277호)
고려 시대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높이 103cm, 입지름 67cm의 크기로
종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고,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으며,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으나,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겼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내소사 3층석탑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신앙의 상징적인 대상이 되는 조형물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 있으며 하층기단은
전고 3.46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으며 이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되었으며,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하였고,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을 각출하였다.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배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고,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제291호)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대웅보전 좌측에는 조사당과 지장전이 있고 마당 옆에는 주지스님의 요사로 쓰이는 무설당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않고, 나무를 깍아 끼우 맞춰 세운 것으로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고
여덟짝의 문짝이 연꽃과 모란, 국화로 수놓인 화사한 꽃밭처럼 보인다.
대웅보전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부처님께 참배를 하고 불사를 하는 보살님께 간다
보살님께 가서 거금 10만원을 내고 초파일 등을 하나 접수하면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대웅보전 내의 사진 몇 커트를 찍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니 처음에는 난감해 하신다.
이곳 내소사는 강진 무위사와 함께 범여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절집이다
사실 이곳 내소사에는 지인스님 한 분이 계시는데 요즘같은 어수선한 시기에 스님을
친견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닐것 같아 오면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보살님께서는 조금 생각을 하시더니 얼른 찍으시라고 하시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참고로 내소사 대웅보전은 사진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내소사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
대웅보전 법당 뒷쪽에 가면 바닥에는 1년에 딱 한번만(사월 초파일) 공개되는 커다란 곽에 들어있는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이 있고, 삼존불 벽면 뒤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백의관음보살이 있다.
이곳은 절대 촬영금지구역이기도 하지만 괘불탱 곽 때문에 구도를 잡기가 아주 고약한 곳이다.
관음벽화는 부안 내소사,강진 무위사, 공주 마곡사, 완주 위봉사, 창녕 관룡사, 양산 신흥사에도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강진 무위사 백의관음도가 가장 좋아 보였던 기억이 있다.
이 백의관음보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좁은 통로를 따라서 옆으로 걸어가는 동안 백의관음도의 눈과 계속 맞춰지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설이 전하는데, 실은 화공(畵工)이 관음보살의 대자비심을 마음깊이 받아 그렸기 때문에 누구나
눈을 맞출수가 있다.
이같은 특이한 구조는 불단(佛壇)앞의 중생은 피안(彼岸: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의 세게에 있지만 차안(此岸:삶과 죽음이 있는 세계)의 세계인 불단 뒤의 중생은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바, 이들을 이끌어 제도하고자 백의관음보살은 대자비심으로 비좁은 후불벽에서
고해(苦海)속의 중생을 향해 계신다고 한다
대웅보전 천정의 단청
화려하지 않고 빛바랜 단청이 범여의 마음을 다 뺏아가는 느낌이다...범여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단청은 전체적으로 내·외부 모두 금단청 형식으로 용문양을 비롯해 학, 봉황, 주악천인, 매화도 등이
그려진 계풍별화와 나한도가 그려진 판벽화, 그리고 불상이 표현된 포벽화 등 다양한 소재의 문양과
회화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내부단청은 고식(古式)으로 18세기 단청의 특징을 보이고,
외부단청은 박락이 심해 자세히 파악하기 어렵다.
주요 체목부 부재의 문양은 직휘, 머리초, 휘, 계풍, 풍혈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장부에는 주화문을
중심으로 한 종다라니 문양이 있고 어칸 우물반자에는 범서를 포함한 8엽연화문·모란문·쌍학문·
연화문이 확인되고, 협칸에는 가야금·생황·월금·나발·바라·장구·절고·해금·비파·박拍의 10가지
악기가 그려져 있다.
주요 체목부에는 금실을 두른 녹색 꽃문양으로 병머리초 형식 또는 역병머리초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계풍에는 금문을 바탕에 두고 풍혈을 만들어 그곳에 별화를 넣는 경우와 계풍에 바로 별화를 표현한
경우가 있으며, 대량머리초의 구성을 살펴보면 뒷목에는 칠보여의완자운문이 들어갔으며 직휘에는
결련금문을 넣고 머리초는 금실을 두른 녹색 연꽃문양을 문양으로 한 병머리초 형식이다.
휘는 인휘로 3개가 있고 휘끝에는 이중쇠첩을 표현하였다.
계풍에는 용문을 넣었고 뱃바닥은 색긋기로 표현하였다
법당 내부를 장식에는 단청에는 한 군데 빠진곳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전설이 있다.
대웅보전이 완성된 후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을 하면서 100일동안
아무도 법당안으로 들여 보내지 말라고 했다...9일째 되는 날, 한 사미승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법당안을 몰래 들여다 보고 말았다.
법당 안에는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사미승이
엿보는 것을 알고는 그냥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미완성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천장의 공포 한 군데에도 목침 크기만 한 빈 공간이 있는데 법당을 지을 때 동자승이 재목을 감추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의장(意匠)과 기법도 독창적이며 아주 복잡한 구조의 다포식 구조이지만
못을 쓴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순전히 나무로만 깎고 짜맞춘 솜씨가 그야말로 구도의 경지 그 자체이다
대웅보전 목조 아미타 삼존불 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내소사 목조 아미타 삼존불 좌상은 3구의 불상으로 대웅보전이 지어졌던 인조11년(1633년)에
청민대사가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라 전해지며,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무릎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며,
귀는 길고 목은 신체에 비해 짧은 편이다.
또한 반달형의 중앙 계주(繫珠:불상의 상투 가운데 있는 구슬)와 반구형의 정상 계주가 잘 표현되 있다
이 불상은 형태가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후기의 불교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 전북지역의 목조 불상
대부분은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으나, 이 불상은 17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시대의 명필(名筆)이었던 원교(員喬)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사람이 달리는듯한 느낌을 주는 ‘大’자 특이한데 이광사는 이곳 이외에도 해남 대흥사,
구례 천은사 등 호남의 명찰의 전각에 편액을 많이 썼다
대웅보전 전면의 8짝 봉합창문을 장엄(莊嚴)하고 있는 꽃 문살
연꽃, 국화, 모란 등 여러 꽃무늬를 조각한 꽃문살인데 마치 꽃잎이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답고 정교하다
내소사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ㅁ’자 가람배치의 정점인 대웅보전(보물 291호)이다.
1633년 만들어져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조선중기의 대표작격 전각으로 전각의 단청은
모두 벗겨졌지만 “남길 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무소유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이름난 전각이지만 누가 어떻게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대신 숱한 설화들만 전하는데
설화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大虎)선사가 지었고,
관세음보살상 등의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푸른 새가 그린 것으로 통한다
마당에서 뒤돌아 본 내소사와 능가산이라 불리는 관음봉의 모습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승경전인 능가경(楞伽經)을 설했다는 ‘능가산’.‘능히 모든 마장(魔障)을 끊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담긴 불가의 마음속 성지(聖地)이자 길지(吉地)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내소사의 주봉인 관음봉이 능가산이라 불리면서 이 내소사는 ‘능가산 내소사’로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피안교를 건너면서 천상세계인 피안에서 사바세계인 차안으로 되돌아 온다.
뒤돌아 보면서 내소사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전나무숲으로 향한다
일주문 앞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나무앞 불상을 보고 동전한닢 던지고 주차장으로 가서 내변산탐방소로 향한다
내변산 탐방소로 향하는데 오후시간에다 바닷가쪽이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되니 상당히 춥다.
선계폭포를 지나 구절양장의 바드재를 넘어 내변산 탐방소에 도착하니 오후 3시 20분정도 되었다
내소사에 반해 너무 시간을 지체한 느낌이다
탐방안내소에 들려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출입증을 받아 나오는데 직원 한명이 감시요원으로 따른다.
그러면서 이곳에는 삼각대를 사용하면 절대 안 된다고 몇번이나 강조를 한다
백색노루귀
노루귀(꽃말:인내)
이른봄에 눈을 비집고 꽃이 나온다고 하여 파설초(破雪草)라고도 한다
가느다란 꽃줄기와 잎에 길고 흰 털이 많이나 있고, 삐쭉이 틔어 나온 입사귀는
노루의 귀처럼 보이기에 꽃이름을 노루귀라 부르며 백색, 분홍색, 청색 노루귀가 있다
분홍 노루귀 백색 노루귀
국공파 직원의 말에 의하면 3일전 이곳에 엄청난 눈이와서 꽃이 피다가 멈춰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꽃이 너무 적어 조금 일찍 왔나싶어 조금은 후회가 된다
노루귀 전설
옛날 어느 산골에 함평이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집이 무척이나 가난하여 나무를 해서 팔아 겨우 연명하였다.
하루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커다란 노루가 한 마리 달려와 그가 해놓은 나무더미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러자 잠시후에 포수가 헐레벌떡 뛰어와 도망가는 노루 한 마리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다고 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노루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듯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의 옷자락을 물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데, 이상한 일도 다 있다싶어 노루를 따라서 가니까.
산 중턱에 다다른 노루는 멈춰서서 한 자리를 앞 발로 치다가 드러눕는 행동을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뭇꾼은 마침내 그 뜻을 짐작했다.
‘아! 이 자리가 명당이라는 뜻이구나’
그는 그곳을 표시해두었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그 자리에 부모님의 묘를 썼다.
과연 그 후로 그의 자손들이 번창했음은 물론이요, 가문에서 많은 공신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장소에 핀 꽃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하여 노루귀로 가 이름이 지었다고 한다
흐미~~~멋진 변산 처자들
너를 보려고 不遠千里를 달려 왔노라
봄의 전령사 변산바람꽃
맨처음 피는 한국 특산종으로 발견지인 변산반도의 이름을 따 변산바람꽃으로 꽃이름이 붙여졌다.
변산바람꽃(꽃말:덧없는 사랑, 기다림 )
1993년 전북대학교 선병윤 교수가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에서 처음으로 발견하여 ‘변산바람꽃’이란
이름을 지어졌는데 출생지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에서 처음 발견된 ‘바람꽃’이라는 뜻이다.
‘바람꽃’이란 이름은 바람에 잘 흔들릴 정도로 줄기가 아주 가늘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워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바람꽃 종류가 17가지나 될 정도로 참 많다.
일찍 피는 너도바람꽃을 비롯하여 만주바람꽃, 꿩의바람꽃, 회리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세바람꽃, 나도바람꽃, 가장 늦게 여름에 피는 바람꽃 등등. 그렇지만
변산바람꽃은 여느 바람꽃과는 달리 참 특이한 꽃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꽃, 그래서 한국특산식물이다
외로운 변산처자
이곳의 변산처자들은 사흘전에 내린 눈 때문에 상태가 많이 좋지않아 작품으로 할만한게 없다
더군더나 야샹화를 촬영하려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삼각대 사용이 필수적인데 국공파 직원이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어 도저히 삼각대 사용이 불가하여 1시간정도 이곳 저곳을 헤메다 종료한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오후 4시 20분...내소사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탓에 청림마을 가기에는 너무
늦어 귀경길에 오른다
내변산 탐방소를 출발하여 부안I.C까지 나오는데 꽤많은 거리와 시간이 걸린다
부안I.C에 들어선 다음 서해안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이게 고속도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량이 없어 오랫만에 시속 160~198km의 속도으로 달려본다.
다시 서천~공주간 고속도로에 들어선 선 다음에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 휴게소까지
오는데 이곳은 상습 정체구간인데도 오늘은 차가 별로 없어 오랫만에 이 구간도 시원스레
달리고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면서 차량 게이지를 보니 기름이 앵꼬 직전이다'
부안에서 출발할 때 기름양을 볼 때 서울에 도착하고도 남을 충분한 양이였는데 과속을 했더니만
하는 수 없이 양재I.C까지 못가고 판교I,C로 빠져나와 근처에 기름을 넣고 집에와도 2시간이 채 안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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