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9년 05월 26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위
☞ 산행거리: 도상거리 12.5km + 어프로치 2.2km / 7시간 25분 소요
☞ 참석인원: 백두사랑산악회 지맥팀 9명과 함께
☞ 산행코스: 3번국도-토파이재-중부내륙고속도로 지하-청풍김공 묘-서산-심실고개-경주이공 묘
오봉산-쉼터-쉼터-NO32송전탑- 전망대-봉우재-무명봉-안부-무명봉-갈림길
절충장군 밀양손공 묘-235.7봉-무명봉-안부-안부-삼면경계봉-무명봉-안부-203봉
솔티고개-177.5봉 갈림길-무명봉-묘지-무명봉-200봉-204.7봉-210봉-무명봉
서낭고개-김해김씨 묘-묘지-220봉-두리봉-242봉-무명봉-무명봉-안부-286봉
건지산-260봉-무명봉-청주정공 묘-안부-갈림길-묘지-무명봉-무명봉-경주이씨 묘
갈미고개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공검면, 이안면, 사벌면, 함창읍
4일만에 다시 산행을 나서는데 몸뚱아리의 컨디션이 썩 좋은편은 아니다.
3일전부터 갑자기 일어서면 조금씩 어지럽고, 뭘 먹으면 약간의 체기가 있다가
사라지곤 하기에 대수롭지 않기에 오늘은 혼자가 아닌 지난 겨울에 같이 다녔던
지맥팀들과 산행을 나선다.
현재의 내 컨디션으로 단체 산행을 하면 一長一短이 있다...장점은 조금 편하게 들머리에
접근할 수 있고, 경비가 적게 들며 가족들이 크게 걱정을 안 한다는 점이고, 단점은 무지막지한
맥꾼들을 따라서 가야 하기도 하거니야 일단 목표점까지는 무조건 가야 하기에 페이스 조절이 힘들다는 점이다.
나홀로 간다면야 컨디션이 좋으면 거리를 더 늘리 수 있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줄일수도 있다.
거기다가 상주 같은 곳이야 서울서 거리도 그리 멀지않고 산행이 끝난 후에 상주나 점촌까지만
나오면 늦은 시간까지 서울로 오는 교통편이 좋아서 혼자 갈까 많이 망설이다가 지맥팀에 합류한다
예전에는 80L이상의 무거운 베낭에다 텐트, 침낭까지 짊어지고 2박 3일씩 충북 알프스 같은 곳을
종주할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연산(連山)이 아닌 며칠 쉬었는데도 산행이 겁이나니,,,
자우지간에 살아가면서 몸뚱아리에 칼은 대지(수술) 말아야 하는데 왜 이리 되어 버렸는지 하는
자괴감에 오늘도 산행에 나서지만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걱정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3번 국도(08:50)
양재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용인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가 중부내륙 고속도로 북상주 I.C를 빠져나와
들머리인 3번 국도인 토파이재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인데도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햇볕이 따갑다
들머리 우측에 있는 공검면 역곡리 토파이 들(野)의 모습
심실 북서쪽에 있는 들로 한자로 ‘토판(土板)’이라고 기록한 곳도 있는데 ‘토파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산줄기가 이 곳에서 심히 낮아졌는데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곳을 산꾼들은 토파이 고개라 한다
영양 남일제 선생 유적비
유적비 안내석
산행을 시작한다(09:00)
중부내륙고속도로 지하(09:01)
고속도로 지하를 통과하여 우측으로 꺽어진다
고속도로 윗쪽에는‘ 10km 전방에 문경 휴게소’ 안내판이 보인다
시멘트 도로 우측에 예전에 토파이 저수지가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인해서인지 저수지는 안 보인다
고속도로옆 시멘트 도로에서 좌측으로...
누에고치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라 그런지 뽕나무가 많이 보인다
먼저가던 동료산꾼들이 까맣게 달린 오디를 따 먹느라 정신이 없다
도로에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는 잘 보이지 않고...
청풍김공 묘(09:08)
초반부터 키작은 아카시아 나무들이 태클을 걸어댄다
능선에 올라서니 판독이 불가능한 깨진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로 올라선다.
서산(西山:192.1m:09:18)
상주시 공검면 역곡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깨진 삼각점(△문경452)이 있고 국립지리정보원에서
세운 표시판이 있다...새터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오봉산의 서쪽 봉우리라고 하여 서산이라 부른다
서산에서 바라본 공검면 역곡리 샛터마을과 중부내륙 고속도로의 모습
아카시아 나무의 거센 저항을 받으면서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려간다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잠시후에 오를 오봉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엉퀑퀴
엉겅퀴는 국화과의 다년초로 흔히 가시나물이라고도 하며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데 높이 50~100cm이고
전체에 흰 털과 더불어 거미줄 같은 털이 있으며 뿌리잎은 꽃필 때까지 남아 있고 줄기잎보다 크다.
줄기잎은 피침상 타원형으로 깃처럼 갈라지고 밑은 원대를 감싸며 갈라진 가장자리가 다시 갈라지고
결각상의 톱니와 더불어 가시가 있다.
꽃은 6~8월에 피고 자주색에서 적색이며 연한 식물체를 나물로 하고 성숙한 뿌리를 약용으로 한다.
한국, 일본, 중국 북동부 및 우수리에 분포하며 잎이 좁고 녹색이며 가시가 다소 많은 것을 좁은잎엉겅퀴,
잎이 다닥다닥 달리고 보다 가시가 많은 것을 가시엉겅퀴,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가시 엉겅퀴라고 한다.
엉겅퀴는 정력을 보강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엉겅퀴를 우리말로는 조방가새, 약 이름으로는
소계라 하며, 1m가 넘게 자라는 엉겅퀴를 우리말로는 항가새, 약 이름으로는 대계라고 한다. 두 가지 모두
약으로 쓰지만 주로 약효가 더 좋은 대계를 많이 이용한다.
독은 없으며 맛은 달고 이뇨, 해독, 소염작용이 있으며 열이 혈액의 정상 순환을 방해하지 않도록 다스린다.
지혈작용이 있어 각종 출혈, 예를 들면 토혈, 코피, 잇몸출혈, 대변출혈, 소변출혈, 자궁출혈 등에 응용된다.
내리막길 우측에는 스텐레스로 된 저수조가 보인다
심실고개(09:28)
공검면 역곡리 심실마을에서 이안면 이안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시멘트 구조물이 보인다
심실마을은 새터 마을 북쪽과 서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건너당. 윗당. 아래당 마을이 있다.
한 때 역원(驛院)이 있어서 역곡(力谷)이라 했다고도 하였으며 처음에는 마을이름이 심곡이었으나
심실로 바뀌고, 다시 일제 때 역곡(力谷)으로 바뀌었는데 임진란 전에는 김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지만
그 후는 이씨가 난을 피해 정착한 뒤로는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서니 잡풀에 묻혀버린 경주이공 묘지가 나온다
경주이공 묘(09:29)
산꾼들을 괴롭히는 존재중에 하나인 자리공도 보인다
묘지를 지나면서 오봉산으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너럭바위가 나오고 기린초 군락지도 보인다
기린초(麒麟草:꽃말:소녀의 사랑)
돌나물과의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하며 중북부지방에 분포하며 산지의 바위틈에서 자란다.
군생으로 나오는 원줄기는 높이 15~30cm 정도이고 뿌리가 굵으며 어긋나는 잎은 길이 2~4cm, 너비 1~2cm 정
도의 도란형 또는 넓은 도피침형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양면에 털이 없다.
6~7월에 개화하며 산방상 취산꽃차례에 많이 달리는 꽃은 황색이ㅕ ‘가는기린초’와 달리 줄기가 총생하며 때로는
가지가 갈라지고 잎은 도란상 또는 도란상타원형인데 어릴 때에는 식용하고 봄에 어린순을 삶아 나물로 먹거나
데쳐서 초고추장이나 된장에 무쳐 먹는다. 데친 나물을 김밥에 넣어 먹기도 하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오봉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이런 곳을 자주 본다
능선에 올라서니 커다란 돌기둥이 보이는데 오봉산 정상이다
오봉산(五峯山:240.4m:09:50)
상주시 공검면 역곡리. 함창읍 신흥리. 이안면 이안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맞이공원 표석과 제단이 있고 아래쪽에는 정상석과 운동기구가 놓여있다.
오봉산은 이안면과 공검면, 함창읍 삼면봉으로 이곳부터 북쪽은 이안면에서 함창읍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다섯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오봉산'이라는 명칭은 『여지도서』(함창)에 "관아의 남쪽 7리에 있다. 황령산(칠봉산) 뒤
삼령(三嶺)에서 뻗어 나온다... 장차 비가 내리려고 하면 산 위에 구름과 안개가 피어 오른다.
냉천과 기우제를 지내는 단이 있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산이 무지봉·봉화봉·병풍봉·
밥봉·매봉(묘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동지도』와 『1872년지방지도』에도 오봉산(五峯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봉우리 아래로 내려가니...
운동기구들이 있고 또다른 정상석이 서 있다
인증샷
이 지역(함창읍 신흥리)이 오봉산 고분군(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26호)이 있는 곳이다
함창은 옛부터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의 수도였다고 전해지거니와 상주에 속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 고도(古都)로 신흥리 고분군(일명 오봉산 고분군)은, 함창이
사벌국 세력과는 달리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편제되면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고분군은 속칭 달랑골, 안생 원골을 사이에 두고 조성되어 있으며 첫째 군은,
오봉산에서 신흥리 쪽으로 뻗어 내린 3개 지맥의 능선과 자락에 조영된 것으로
주로 소형 석곽과 중형급의 고분이 주류다.
둘째 군은 속칭 검은동 마을에서 돗질 마을까지 연결되는 산자락의 하단부와 정상부에
조영된 것들로서 중대형급 고분이 연속해 분포되었고 게중에는 직경 24m가 넘는 대형분도
포함되었으며, 이 일대의 고분군 발굴로 토기류, 금동류, 마구류 등의 유물이 발굴되어 정밀
분석과 연구에 들어가 있는 상태며, 대체로 삼국 시대의 이른 초기에 사용되었던 유물로 보고 있다.
셋째 군은, 둘째 군의 동남쪽 신흥2리의 뒷편 야산에 분포한 고분군이다.
삼국 시대 이후 오봉산록(五鳳山麓)에는 성벽 둘레가 약 1.37km 정도의 남산성(南山城)이
해발 238m에 조성되어 있었다. 이 산성과 일대의 고분군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며,
고분의 규모 면에서 상주 지역 내에서는 병성산 고분군과 필적할 만한 고분군으로서,
함창 지역에는 사벌국 세력에 비견할 만한 지방 세력이 기원초 부터 형성되었을 것임을 시
사하는 바가 크다. (상주문화원 자료 인용)
2번째 만난 표시석 아래의 넓은 임도로 내려간다
쉼터(09:57)
능선에서 바라본 함창읍(咸昌邑)의 모습
'함창' 지명은 조선시대 함창현의 중심 지역이었던 데서 유래한 지명으로 『고려사지리지』에
"함창군은 원래 고령(古寧) 가야국으로 신라가 빼앗아서 고동람군(古冬欖郡, 古陵郡이라고도 함)
으로 만들었고 경덕왕이 고령군으로 고쳤다. 광종 15년(964)에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본 목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함창)와 『신증동국여지승람』(함창)에도 같은 내용의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본래 조선시대 함창현 현내면(縣內面)·동면(東面)· 북면(北面) 지역이었다.
『호구총수』(함창)와 『여지도서』(함창)에 현내면·동면·현북면이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1872년지방지도』 등에는 현내면·동면·북면이 표시되어 있다. 1914년 이들 3개 면을 중심으로
수하면, 상주군 외서면, 문경군 영순면과 호서남면의 일부 동리를 합쳐 상주군 함창면으로 하여
현재의 15개 동리를 관할하게 하였으며, 1980년 읍으로 승격하였고, 1986년 상주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상주시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사벌면 들녘의 모습
쉼터(10:00)
NO32 송전탑(10:01)
줌인해 본 문경시 점촌읍의 모습
조선시대에는 상주군 영순면(永順面) 소속이었고, 1895년(고종 32)에 문경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달산리(達山里) 일부를 통합하여 점촌리(店村里)로 되면서
호서남면(戶西南面)으로 편입되었고 1949년에 문경군청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니 1979년
문경읍으로 이전했고, 1956년에 호서남면은 점촌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에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고, 1995년에 점촌시와 문경군이 문경시로 통합되면서 문경시 소속으로 되었다.
마을에는 옥녀산발(玉女散髮)형이라는 돈달산이 있고, 1928년에 설치된경북선 역인 점촌역이 있다.
점촌동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00년경부터 산세와 지세를 따라 '밋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진마을'이라고도 불러 왔다. 1829년 무렵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점방(店房)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지자, 이곳 장인들이 마을을 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점촌으로 되었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넓은 공터에는 함창읍에서 세운 ‘해맞이 자리’라고 쓴 커다란 빗돌이 있다.
함창읍 들판을 적시면서 지나가는 이안천의 보인다
전망대(10:04)
조금전 오봉산 정상에는 해돋이 공원이라 쓴 빗돌과 제단석이 있었는데 이곳은 함창읍에서
설치한 해맞이 자리라니 그 넘이 그 넘이 아닌가...조금전 것은 공검면에서 설치한 것인가?
확인을 해보지 안했지만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 한 곳에 있어야지,,,입맛이 씁쓸하다
빗돌 너머로 잠시후에 가야할 235.7봉이 보인다
저 봉우리는 성산 봉수대 터가 있는 자리이며 오봉산의 봉우리 중 하나이다
해맞이 자리에서 내려서니 감나무 단지가 나온다
봉우재(170m:10:07)
상주시 공검면 역곡리 심실마을에서 함창읍 신흥리 셋집마로 넘어가는 고개로 시멘트
도로 주위에는 감나무밭이 많이 보이는데 봉(烽)+(우)+재(峴)+고개(峴)=봉우재고개.
‘봉’을 ‘보우’라고 소리 내었다.
지명의 유래는 우측 아래쪽에 있는 봉우재 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이 마을에는
임호서원(臨湖書院)이 있었으며, 1909년 경 이 마을에 천주교 신자가 59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시대 말까지는 100여호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으나, 마을이
없어졌다가 근래 다시 두 집이 들어와 살고 있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터가 있다.
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간다
언 넘의 쉬끼가 이딴 짓거리를...
오르막을 오르는데 몸에서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다
아주 작은 오르막인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곳은 늘 꼴찌가 나와 조여사님,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는 산동네 대장님인데
오늘은 산동네님은 도망을 가버리고 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초반부터 선두와 너무 처져 쉴 수도 없다
무명봉(10:15)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최근에 조성한 듯한 묘지가 나온다
묘지로 이어지는 임도에서 좌측으로 올라간다
안부(10:22)
등로는 잘 보이지 않고 서서히 맥길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명봉(10:24)
무명봉에서 조금을 더 지나 가다가...
갈림길(10:27)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감사합니다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내가 길을 만들어서 간다
묘지가 보이고 배밭이 있는 묵밭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로 내려선다
절충장군 밀성손공 묘(10:30)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조선 시대은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의 무관 품계로 1392년(태조 1) 7월
조선건국 직후 처음 관제를 정할 때 문산계에서 독립된 무산계 가운데 가장 높은 관계로 규정되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 당상관으로 되으며 무반관원(武班官員)으로서 절충장군에서 승진하여
종2품 이상의 산계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문산계에 따르고 있다
묘지를 지나 넓은 공터인데 예전에 밭이었던 모양이다...우측에는 배밭이 있다
잡풀이 무성한 곳을 올라간다
235.7봉(10:37)
공검면의 자료를 보면 이곳은 예전에 성산봉수대 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성산봉수(城山烽燧)는 봉우재 마을 남쪽 남산고성 안의 서쪽 봉우리인 해발 245m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 곳은 사방이 훤하게 트여 함창. 공검. 이안지역이 내려다 보여 조망이 매우 좋은 입지이다.
봉수의 축대는 많이 무너지고 억새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등 훼손이 심하여 보존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일대에는 와편이 산재해 있다
『함창현지』 여지는, 봉수에서 ‘군의 남쪽 10리의 오봉산에 있는데 남으로 상주 소산과 연락하고,
북으로는 문경 선암산과 연락했는데 서로의 거리는 40리다. 별장 1명. 원군 25명. 보군 75명이 있다.’고 전한다.
『세종장헌대왕실록』은 권 제150지리지에서, ‘의성군 다인면 소이산 봉수가 동으로는 안정 대암산 봉수와,
북으로는 26리 220보 거리의 함창 쌍화산 봉수와 연락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쌍화산’이라는
기록은 잘못으로 본다. 봉수재가 있는 서쪽 봉우리와 동쪽의 봉우리가 쌍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옛 지도에서 쌍호는 함창읍 윤직리 사암(처자바우)을 쌍화로 표기학고 있기 때문이다.》
235.7봉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잡풀이 무성한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예전에 밭인것 같은데 워낙 풀이 많아 感이 안온다
무명봉(10:45)
맥길은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안부(10:48)
안부를 지나니 넓은 등로가 나오고 좌측으로 올라선다
아카시아 나무 숲속을 지나니...
묵힌 밭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를 만난다.
우측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는데 차량소리가 상당히 시끄럽다
오늘따라 아카시아나무를 많이 만난다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컨디션은 자꾸만 저하된다
완만한 오르막길
안부(11:08)
삼면 경계봉(11:18)
상주시 함창읍, 공검면, 사벌면의 경계접에 있는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우측의 행정구역은 공검면에서 사벌면으로 面界가 바뀐다
점점 등로는 희미해지고...
무명봉(11:21)
안부(11:22)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간간히 만나는 재선충에 걸린 소나무의 무덤
오늘은 바람한 점 불어주지 않고 날씨는 더우나 다행히 그늘이라 아직은 견딜만 하다
컨디션의 급격하게 다운이 되어 발걸음이 느려진다
산동네 대장님이 배신(?)을 때리고 도망을 가버리는 바람에 나를 부대장이라고
하면서 의지해서 가는 조여사님의 발걸음보다 느려지니 자꾸만 미안한 생각이 든다
203봉(11:40)
이곳에서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서야 하는데...
점심시간(11:40~12:00)
조여사님과 이곳에서 점심상을 펼친다.
컨디션이 좋지않아 점심을 굶어려고 생각했으나 허기가 지면 걸을수가 없기에
억지로 물에다가 밥말아서 억지로 도시락을 비우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떠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등로가 아예없고 낙엽만 수북하다...미끄럼을 타듯이 내려서니 벌목지가 보인다
솔티고개(松峴:12:05)
상주시 사벌면 목가리 원터 마을에서 함창읍 신덕리 솔티 마을로 가는 고개로 고개
꼭대기에는 지금도 성황당터가 남아 있고, 고개의 남족에는 미륵불과 탑이 있으며
상주와 함창을 잇는 옛길이 있었다.
황룡사에서 청주 사람 이봉(李逢)을 대장으로 조직한 상주지역 의병대인 창의진(昌義陣)이
1592년 8월 7일 임진왜란 당시 송원현 마을 입구에 매복하여 왜적 6명을 사살하고, 화통.
철환. 화약을 노획했다.
고개에 소나무가 무성하다 하여 솔티라 하고, 송현이라 한다
《솔(小)+티(峙)=솔 티→송현(松峴). ‘솔’은 ‘솔다, 좁다’의 뜻을 가진 말이다.》
솔티고개 사벌면쪽의 모습
사벌면쪽은 비포장 도로이고 함창읍쪽은 시멘트 도로이다
벌목지를 가로질러 올라 가는데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벌목지로 올라서 능선으로 들어서니 등로는 험하다...우측으로 꺽어진다
등로의 잡목이 산꾼을 상당히 괴롭힌다
177.5봉 갈림길(12:14)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삼각점이 있고 족보가 있는 177.5봉이 있지만 모든게
귀찮고 관심 밖이라 좌측의 맥길로 향한다
안부에서 다시 오름길
무명봉(12:36)
묘지(12:38)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잔디가 아닌 둥굴레가 점령해 버린 묘지를 지난다
무명봉(12:46)
조금전에 먹은 점심을 먹었는데 체기가 온다.
자꾸만 식은 땀이 나고 몸이 무거워 합수점까지 갈 자신이 없다.
같이가던 조여사님에게 미안함을 표현하고 먼저간 대장한테
조여사님을 모셔갈 것을 전화를하고 중탈을 결심한다
200봉(12:54)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이내 등로는 좋아지나 컨디션 저하로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204.7봉(13:04)
소나무 숲을 지나지만 바람 한 점이 없다
210봉(13:11)
내리막길에서 묘지 2기를 만난다
무명봉(12:17)
능선에 올라서니...
등로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키작은 아카시아. 미국 자리공, 쓰러진 고사목이 자꾸만 태클을 걸어댄다.
산동네 대장님에게 조여사이 가니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70넘은 여인이
이 험한 길을 잘 찾아가는지 모르겠다...괜스레 미안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솔티(松峴)마을의 모습
아카시아 숲사이를 기다시피하여 빠져 나온다
아카시아 나무의 저항을 뚫고 등로로 빠져 나온다
등로를 내려오니 벌목중인 능선이 나오고 서낭고개에서 이어지는 도로와 사벌면 덕가리 가막골 마을이 보인다
가막골은 덕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약 500년 전 강릉(江陵) 함씨(咸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할 때
어떤 풍수가 막을 치고 마을을 이루어 살면 인정 바르게 같이 살 수 있는 명당이라 하여 불린 이름이라 한다.
《‘큰 마을’ 또는 ‘큰 골짜기’의 뜻인 ‘감골’이 · 감(大)+골(谷)=감골→감아 골→가마 골→가막 골→까막 골이 된 것이다.
‘거무골’도 같은 뜻으로 본다.》
벌목지 아래로 내려간다
서낭고개(180m:13:30)
상주시 사벌면 덕가리 가막골에서 함창면 금곡리 시실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부산 동래에 이어지는 가장 짧은 영남대로길의 고개인데
민초들의 哀歡이 깃든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고개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시대의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존재했던 한성에서 동래까지 잇는
간선도로로 이 중에서 영남대로(嶺南大路)와 영남로(嶺南路), 동래로(東萊路) 등의 명칭으로도 불린다
이곳에서 중간 탈출을 결심하고 도로 근처 숲에 들어가 10분정도 휴식을 취하고 나니
몸이 좀 괜찮아지기에 가는데 까지 가보자 하고 능선에 오르니 유인 김해김씨 묘지가 나온다
유인 김해김씨 묘(13:50)
묘지에서 오르는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길이 없는 곳을 치고 올라서니 비교적 뚜렸한 등로와 선답자의 보인다
예전에 묘지가 있었는데 이장을 한 모양인지 봉분은 없고 이장을 한 흔적만 보인다
아무래도 점심을 급하게 먹은 탓인지 체기가 있는가보다
식은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리고 다리가 무겁다.
다시 서낭고개로 내려갈까 생각을 수도없이 하는 갈등을 겪는다
곧추선 급경사의 오르막길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등로에 누워 버린다
그리고는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향한다
급경사의 오르막길 몇번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묘지(14:20)
220봉(14:24)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지고 키작은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길로 오른다
두리봉(斗里峰:252.2m:14:28)
상주시 사벌면 덕가리와 함창읍 금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몇년전에 작고하신
故한현우님께서 붙혀논 코팅지와 선답자의 시그널만 몇개 있을뿐 특징이 없는 산이다
두리봉의 지명유래는 산봉우리가 둥글거나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거나, 어느 터를 둥글게
울타리 치듯 다른 산과 함께 휘어 도는 산에 붙여지는 이름이라 붙혀진 지명이란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직진으로 이어간다
240봉(14:38)
이곳에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묘지가 보이고,,,
묘지에 내려섰다가 우측으로 꺽어진다
잡목속에 묻혀버린 등로를 보물찾기하듯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무명봉(14:42)
우측으로 살짝 틀었다가 다시 완만한 좌측으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못난이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무명봉(14:50)
봉우리 아래에는 무명묘지가 보인다
가야할 286봉이 고개를 내밀고 산꾼을 바라본다
안부(14:52)
철조망이 등로를 가로막고 있다
가야할 286봉의 모습
철조망의 우측 능선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산불이 난 모양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두리봉의 모습
아직도 화근내가 나는 걸 보니 산불이 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다
286봉(15:10)
등로에서 바라본 함창읍 금곡리의 산그리메
금곡리(金谷里)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북쪽에 낙동강이 흐르며 금이 많이 났으므로 금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쇠실, 봉황대, 비석골, 새마, 양지마, 살개방웃골마을 등이 있다.
쇠실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금곡리의 그것과 같으며, 봉황대마을은 봉황대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석골마을은 유씨의 묘비가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새마마을은 쇠실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양지마마을은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살개방웃골마을은 쌀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가야할 금지산이 보인다
금지산 가는길도 산불의 피해가 많다... 특히 소나무가...
으아리꽃(꽃말:아름다운 당신의 마음)
응아리, 선인초라고도 하며 으아리꽃이라 불리우게 된 유래는 몇가지가 있는데
첫번째 유래는 으아리꽃의 줄기가 연하고 약하게 보여 쉽게 끊을수 있을듯 하여 손으로 잡아채면
줄기가 끊어지지않고손의 살로 파고들어 갑작스런 아픔때문에 으아~악 비명을 질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두번째 유래는 으아리의 열매가 응어리진 팔랑개비처럼 생겼다고 하여
응아리 에서 으아리로 변했다고 하며 세번째 유래는 옛날에 지게끈으로 칡넝쿨이나 인동넝클, 등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으아리보다 줄기는 굵었지만 쉽게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사위사랑이 남달랐던 장모가 사위에게 짐을 많이 지지 못하게 할려고 일부러 이런
종류의 덩굴을 끊어주었단다...그런데 사위는 평상시보다 짐을 더 많은 짐을 지었는데도
덩굴이 끊어지지않아 으아 하고 놀랐다고 하여 그 덩굴을 으아리 라고 하였다고 한다
火魔를 피해 살아남은 산으로님의 시그널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금지산 오름길도 그리만만하지는 않다...정상에 올라서니 새로만든 듯한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주위가 전부 불에 타버렸는데 웬 산불감시초소...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격이네
금지산 정상에 올라서니 노음산이 시원하게 보이고 사벌면 들판이 풍요롭게만 보인다.
면 단위로만 따진다면 전국에서 2번째로 쌀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란다
저 들판에서 생산되는 쌀만으로도 강원도 전체 인구가 1년을 먹고도 남는다고 한다
금지산 정상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아 보인다
건지산(乾芝山:336.7m15:30)
상주시 사벌면 덕가리와 함창읍 금곡리, 하갈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정상석이 있으나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지 정상에는 잡풀만 무성하고 주위에는 산불로 인해
나무들이 불타 버렸다...산꾼들의 지도와 산행기에는 금지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상주시의
어느 자료에도 금지산이란 지명은 없다.
그 대신에 건지산 (乾池山 또는 建芝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 갈미마을이다
건지산(乾芝山)에는 옛부터 칡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지명을 금지산이 아닌 건지산으로 불러야 맞을 것 같다
火魔를 피해 건지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老松
맥길은 정상석을 끼고 급하게 내려간다
길은 보이질 않고...
솜다리인가?
건지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참으로 難解하다
갈길은 바쁜데 태클을 걸어대는 넘이 왜 이리도 많은지...
260봉(15:45)
260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지자마자 뚜렸한 직진 능선으로 버리고 좌측으로 내려선다
희미한 등로를 내려가다가 다시한번 좌측으로 꺽어진다
迷路로 계속되는 지맥길...거기다가 잔잔한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막...이런 잔펀치에 맥꾼은 맛이가지
무명봉(13:58)
등로가 보이질 않는 곳을 내려서니 묘지가 보인다
청주정공 묘(16:00)
멧돼지 체력 단련장
안부(16:03)
건지산을 지나면서부터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갈림길(16:06)
묘지(16:10)
사면길이 나오는 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6:15)
갈수록 등로는 거칠어진다
무명봉(16:24)
경주이씨 묘(16:25)
묘지에서 이어지는 편안한 도로로 내려간다
갈미고개(230m:16:27)
상주시 함창읍 하갈리 상갈마을에서 사벌면 묵상리 묵실 북쪽 지강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길이 없고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만 보인다
갈+미(山)+고개(峴)+서낭당. ‘갈미’는 ‘산이 갈라지는 것’을 뜻한다.
‘갈미’는 ‘광삼(光蔘)’과 ‘갈모’의 뜻도 있다.
이제 제 컨디션이 돌아왔지만 아직도 가야할 거리가 6km 이상 남아있어 많은 고민을 한다
지금의 컨디션으로는 아무래도 2시간 30분정도 걸려야 할 듯 싶다.
나홀로 산행이면 조금 늦더라도 합수점까지 가서 점촌으로 나가서 서울가는 버스를 타면
되지만 일행이 있기에 너무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아쉽지만 이곳에서 묵상리로 탈출을 결심한다
여기서 탈출하면 다음 구간에 택시를 타야하기에 경비가 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행에게 먼저 서울로 가라고 하고 산행을 마무리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아닌것 같고...갈등이 심하다
도로를 따라서 묵상리로 향하는데 조금 내려오니 좌측으로 각근사로 가는 길이 보인다
곶감으로 유명한 상주라 그런지 유난히도 감나무밭이 많이 보인다
조금을 더 내려서니 지강서원(芝岡書院) 터가 보인다
지강서원(芝岡書院) 터
상주시 시벌면 묵상리 묵계마을 위에 있는 지강서원(芝岡書院) 터는 영천자 신잠 목사가 창건한
18개 서당 중 하나인 매악서당(梅嶽書堂)이 모체가 되었다... 매악서당은 처음에 덕가 패목(佩目, 배미기) 마을
서당골에 있었는데, 뒤에 용담리 황룡 마을로 옮겼다가 1648년(인조 26) 매악산 서쪽 기슭인 묵계(墨溪) 위로 옮겼었다.
1745년(영조 21)에 창건되어 1870년에 훼철되었고, 1925년 단소를 설치했다.
정국성(鄭國成, 1526~1592). 조우신(趙又新, 1583~1650). 조희인(曺希仁, 1578~1660).
조정융(曺挺融, 1598~1678) 등 네 분을 봉안했었다. 현관 세 점(芝岡書院. 尙賢祠.:1 齋)이 전한다.
정국성(1526년~:2) : 자는 숙거, 호는 복장, 본관은 진주이고 계함의 아들이다. 정경세의 증조부이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음을 아프게 여겨 누님을 어머니같이 섬기고 죽으매
마음으로 3년 상을 입었다.
목사 윤국형의 천거로 연은전 참봉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임진란에 의병을 일으켜 안령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조우신(1583년~:3) : 자는 여즘, 호는 백담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정경세와 이준의 문인이며,
광해군에게 상소하여 인목대비를 폐하는 것과 영창대군 살해에 대해 부당함을 말하고, 발론한
삼적신(정인홍. 이이첨. 류희분) 등의 참형을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년 동안 과거를 아니보고
두문불출하였으며, 1648년에 문과에 올라 정자에 이르렀다.
학문과 덕행이 높아 그를 추모하는 뜻으로 별묘가 있는 덕담의 마을을 그의 호를 따라 백담(흰대미)라고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희인(1578년~1660) : 자는 여신, 호는 묵계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몽신의 아들이며, 조우인의 아우이고,
정경세의 문인이다. 1612년에 역옥이 일어 나서 정경세가 투옥되자 친척도 화를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
아니 하는데, 그는 시종 문 밖에서 주선하였다. 1621년에 문과에 오르고 상례를 지냈다.
군수로 있을 때에 선정하여 거사비가 섰으며,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를 거쳐 상례가 되었다.
조정융(1598~1678년) : 자는 유첨, 호는 호옹, 본관은 창녕, 우인의 아들이다.
163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에 이르고, 4개 군수를 역임했으며 모두 거사비가 섰고, 성균관 사예를 지냈다.
글씨와 문자에 능하였으며 문집이 있다.
감나무밭을 한없이 걸어 내려와 묵상리 버스 정류장이 있는곳에 도착한다
상주시 사벌면 묵상면 묵실마을에 도착한다(16:45)
갈미고개에서 이곳까지 2.2km인데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20분만에 도착한다
묵실마을은 묵상에서 가장 큰 동네인듯 싶다...그런데 사람이라곤 구경조차 할 수가 없다
묵실마을은 150여 년 전 이 곳에 서당이 있었는데, 서당 훈장이 명필이라 붓끝에서 글씨가
실같이 잘 나온다 하여 묵사(墨絲)라 하던 것이 묵실(墨室)이 되었다고 한다.
‘묵’은 ‘크다’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즉 ‘검은 것’을 ‘묵(墨)’으로 취한 것으로 보이는데,
‘검은’은 ‘크다’는 뜻의 옛말 ‘감, 검’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묵상마을 버스 시간표
버스 정류장 앞에는 팔각정과 체육시설이 있고 수도가 있다
이곳에서 조금 쉬고 있는데 노인정에서 할매 2분이 나오신다
퇴강리 가는 버스가 몇시에 있느냐고 물으니 16시에 있고, 19시 20분에 있다고 한다
시간이 애매하다...이곳에는 916번 지방도로가 지나는데 차량통행이 거의 없고
근처에 공사장이 있는지 25톤 트럭만 흙을 싣고 왔다갔다 한다
그렇다고 내가 타고온 버스 기사에게 이곳으로 오라는 소리를 못하겠다
하는 수 없이 버스 정류장에 있는 택시번호를 보고 전화를 하니 이 택시는 상주에서 오는데
상주에서 미터기를 꺽기 때문에 거기부터 요금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양반 정신이 있나 없나...돈이 없어서 걸어 다니는 산꾼에 독박을 씌우려 들다니...
됐고요... 하고는 도로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데 들에 갔다오는지 1톤 트럭이 한 대 오더니
마을안으로 들어가고 있다...쫒아가서 여차여차하여 퇴강리로 가려고 하는데 상주 택시를
호출하니 못 온다고 뻥을 쳤다...처음엔 자기가 구미를 가야 하기에 바쁘다고 하면서 거절을 한다
이 양반이 나를 한참 쳐다 보더니 내 몰골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이 너머 매호리까지만 태워 주겠단다.
매호리에서 퇴강리까지는 그리 멀지않고 다니는 차도 있다고 한다
그게 어디여! 일단 타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맘이 변해 버스가 있는 곳까지 태워 주겠단다.
후배산꾼들이 내가 히치대왕(앵벌이)으로 인정하는지 인제 알았지...ㅋㅋㅋ
퇴강리까지 태워주신 트럭 아저씨...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내가 트럭에서 내리는데 막 선두팀들이 도착하는 거 아닌가...이게 뭐여(17:10)
이럴줄 알았다면 끝까지 산행을 할 껄..무쟈게 후회스럽다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리는데 후미팀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내려오는 거 아닌가
이 시간대면 나도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었다.
오늘 산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무식하면 용감하기라도 해야 했는데
오늘 산행은 무식하긴 했어도 용감하지는 못했다.
다음에 이 짧은 6km짜리 산행 때문에 이 먼곳까지 와야하는 숙제를 남긴다
합수점 앞에있는 퇴강 매운탕집에서 저녁을 먹고 20:00시가 좀 넘어서 서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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