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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병성(숭덕)지맥)終)

병성(숭덕)지맥 제3-2구간 - 갈미고개에서 영강/낙동강 합수점까지

by 범여(梵如) 2019. 11. 11.

☞ 산행일시: 2019년 11월 09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쌀쌀한 늦가을

산행거리: 도상거리 5.5km  / 2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갈미고개-280봉-마루봉 기지국-무명봉-336.8봉-용해사 입구-임도-예술촌 입구

                 매악산(국사봉)-조망바위-전망대-고개-군암산-갈림길-김해김공 묘-퇴강성당

                 퇴강리 버스 정류장-영강/낙동강 합수점-계집막 휴게소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사벌면 / 함창읍

 

지난 5월 26일에 숭덕(병성)지맥 마지막 구간을 걷다가 급격하게 심장에 무리가 오는 바람에 중간에

탈출하여 약 6여km 남겨논 것이 두고두고 마음 한 곳 언저리에 남아있어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해를 넘기기 전에 마감을 해야지 생각하고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여 다음주에 할 일을 대충 해놓고

베낭속에 내려와서 갈아입을 옷 한벌과 물 한병만 챙겨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상주행 10시 버스표

동서울에서 상주로 출발하는 버스는 2시간 30분정도 걸린다고 하니 상주에 내려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상주에서 13시 10분에 묵상, 퇴강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묵상리에서 내려 가지고 지난번에

내려왔던 도로를 따라서 갈미고개까지 걸어서 산행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점촌 터미널(13:20)

오늘 계획은 버스가 타는 순간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평소에는 버스가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점촌I.C를 빠져나와

점촌을 경유하여 상주로 갔었는데 오늘 이 버스는 중부고속도로가 너무 막힌다고 하면서 올림픽대로

를거쳐 경부고속도로에 접어 들었다가 옥산J.C를 빠져나와 새로생긴 아산~청주간 도로를 타고 간다

경부고속도로 안성을 지나면서 도로가 엄청나게 막히는 바람에 시간이 상당히 지체가 됐다.

다시 오창J.C를 빠져나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증평I.C를 빠져나와 508번 지방도로 타고 
가다가 34번 국도를 따르고 괴산, 중원대학교를 지나 연풍I.C을 다시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점촌에 도착하니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 늦어 버렸다.버스 기사의 잔머리에 빨리 오려다가 더 늦어 버린 셈이다...

 

승객들은 아우성이다

점촌에 도착하니 동서울 터미널에서 10시 20분에 출발한 뒤에 버스가 30분전에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여기서 상주까지 다시 20분이상 걸려야 하기에 상주에서 묵상가는 버스타기는 불가능하다

상주에서 묵상으로 가는 다음 버스는 15시 50분... 이 차를 타면 묵상에서 갈미고개까지 걸어서 

40분정도 가야 하기에 일몰전까지 산행을 끝내기는 무리할 듯 싶어 점촌에서 일단 내린다  

점촌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떡국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택시로 갈미고개로 향한다

점촌에서 갈미고개까지 생각보다도 거리는 멀다

택시 요금이 28,000원 나오는데 좀 비싼 생각이 든다고 하니 3,000원을 깍아준다

갈미고개(14:10)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반묵실 마을에서 함창읍 하갈리 상갈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고 고개 윗쪽엔 묘지가 있으며 고개 아래엔 각근사라는 사찰이 있다

흔히들 갈미고개라는 지명은 칡이 많은 고개를 의미하는데 이곳의 갈미고개는

갈+미(山)+고개(峴)+서낭당. ‘갈미’는 ‘산이 갈라지는 것’을 뜻한다.

‘갈미’는 ‘광삼(光蔘)’과 ‘갈모’의 뜻도 있다고 한다

고개옆 묘지에는 철없는 보라색 제비꽃도 보이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다른 꽃들도 보인다

제발 정신줄 놓지마소

산행을 시작하다(14:15)

묘지로 올라서 숲속으로 들어선다

등로는 보이지 않으나 빨간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산꾼을 반긴다 

초반부터 잡목의 거친 태클이 시작된다

이 넘도 엄청나게 텃세를 한다

안부에서 능선으로 오른다

기세등등하게 산꾼을 괴롭히던 자리공도 서리를 맞아서 한풀 꺽힌 모습이다

280봉(14:30)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니...

전봇대가 보이고 우측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나온다

諸行無常

마루봉 기지국(14:32)

SK에서 운영하는 통신 기지국이었는데 지금은 운영을 안하는지 폐허처럼 변해 버렸다

임도를 따라서 올라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묘지 뒷쪽으로 올라간다

사나운 길을 지나고...

관리가 잘된 등로가 나온다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무명봉(14:40)

안부를 지나고...

뚜렸한 등로는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다시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맥길에서 30여m 떨어져 있는 336.8봉으로 향한다 

336.8봉(14:42)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진다

용해사 입구(14:45)

이정표(이정표(←용해사입구 0.3km,↑마루봉기지국 0.5km,정상 0.5km→)가 있다
용해사 입구에서 내려서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14:47)

임도 끄트머리 아래에는 늪지대같은 곳이 보인다

임도에 서 있는 이정표

매악산 국사봉으로 향하는 제도권 등로에 접어든다

등로는 무쟈게 좋다

예술촌 갈림길(14:51)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에 있는 폐교가 된 매호초등학교가 상주 예술촌이 되었다

예술촌 갈림길에서 매악산으로 향해서 올라간다

간간히 벤취도 보인다

매악산 가는 길

등로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사벌면((沙伐面)의 모습

사벌(沙伐)이라는 지명은 상주의 옛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벌국(沙伐國)에서 유래되었으며

『삼국사기지리지』에 신라 첨해왕 때 사벌국을 취하여 사벌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확인되었다.

이곳은 예전에 KBS 대하 드라마 ‘왕건’에서 견훤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아자개’가 거점으로

삼은 지역으로 아자개는 사벌성의 성주(이칭으로 사불성이라고도 함)로 이 지역의 토착 세력가이다

후삼국 시대에 사벌주는 견훤이나 왕건의 입장에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던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공검면과 함창읍이 동쪽으로 예천군 중동면, 남쪽으로는 북문동 · 계림동 · 동문동이 접해있으며

현재는 15개의 동리를 관할하고 있는데 면내에 낙동강과 그 지류인 북천 및 동천이 흐르고 북서쪽은 250m

전후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으며 중남부 지역은 평탄한 지역으로 되어 있어 쌀 산지가 되고 있다.

과수로 배가 유명하며 잎담배 및 양잠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문화재로 보물 제117호인 화달리 3층 석탑,

정기룡 장군 유물(보물 제669호) 및 전 사벌왕릉과 사벌왕 신도비, 영사각, 충의사 등이 있다

매악산(梅岳山:385.1m:14:58)

상주시 사벌면 매요리와 퇴강리, 함창읍 하갈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이정표와

삼각점, 헬기장이 있고, 2년전에 이곳에 대형 산불이 난 아픔으로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산이다

매악산은 사벌국 고도에 나지막하게 낙동강과 어우러져 있는 육산으로 사벌국은 성읍 국가시절에

읍성을 쌓고 살던 부족 집단이었으나 부족연맹체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 점해왕 7년(254년)에

신라와 병합된 후 사벌주로 되었던 유서깊은 지역으로 그 때의 유적이 병풍산과 사벌면 일대에 산재해

있으며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산 44-1 번지에 사벌왕릉이 있어 그 시절 번성을 말해주고 있다

매악산 정상은 국사봉(國師峰)이라 부르는데 상주시 사벌면의 마을 지명 유래편을 보면

동디 샛땀 뒤로 보이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바위산인데 이 부근의 땅을 이재(:1齋)

조우인(曺友仁) 선생이 국록(國祿)을 받은 땅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 한다.

 

이병선은 오늘 날의 ‘나라(國)’는 ‘국가’의 뜻으로 고대에 있어서의 ‘나라’보다는 그 뜻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오늘 날과 같은 영역국이 아닌 고대의 성읍국시대는 ‘나라’는 ‘君主’의 뜻으로 왕이 있는 ‘조정(朝廷)’을

‘나라 뜰’이라 하고 ‘국왕’을 ‘나라님’이라 했다. 그러므로 ‘國’은 ‘主’의 뜻이다. ‘국사(國師)’ 또는 ‘국사(國士)’는

 ‘nara-sa‘의 표기로 ’주령(主嶺)‘을 뜻한다고 본다.

 

조선시대 말에서 ‘성(城)’을 뜻하는 말에 ‘자, 재, 잣’이 있는데 두음(頭音) ‘ts-‘는 고대 국어에서는 ’s‘의

변이음(變異音)이었을 것이므로 ‘자(城)’의 고대어는 ‘sa‘로 추정된다. 그리고 ’성(城)‘을 뜻하는 ’자, 재‘는

 ’령(嶺)‘을 뜻하는 ’자, 재‘와 같은 어형(語形)이므로 ’국사(國師), 국사(國士)‘의 ’사(師, 士)‘는 ’령(嶺)‘을

뜻하는 ’sa‘의 표기로 보고 있다. 어떤 이는 국사봉은 산천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사(師)’는 ‘남신(南神)’을

뜻한다고도 한다.

매악산 정상에 있는 국사봉의 유래 안내판

원래 ‘마리산’의 이름은 국사봉이 었는데 둘레길 정비와 산행코스 정비시 전국적으로 너무흔한

국사봉 이름이라 여러 문헌과 고증을 찾아 ‘마리산(馬里山)’으로 태어났다.

국사봉(國師峰)은 이재,조우인(曺友仁)선생이 1623년 인조임금으로부터 ‘매호십리강산(每胡十里江山)’을

국록(國祿)으로 받은 지역이어서 부르는 산이름이고, 마리산(馬里山)의 유래는 낙동강변 ‘동디’마을 뒷산으로

용마(龍馬)가 비상(飛上)하고 쇠로만든 말(馬)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마리산이 중요한 또 한가지 이유는 상주의 옛이름이 상락(上洛)이었으며 상락동쪽에 흐르는강을 낙동강으로 불렀다.

낙동강은 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하천과 지류를 받아들여 흐르다가 이곳 상주에 이르러 문경의 영강과

합류하여 강(江)다운 강으로 사벌면 퇴강리에서 칠백리본류가 흐른다고 이준(李埈)의 낙강범월시서(洛江泛月詩序)와

 ‘택리지’또한 ‘열여실기술’에 전(傳)하고 있다

매악산 정상에 있는 벤취

산불로 불타버린 예전의 정상 표지판

매악산을 마리산(摩泥山)이라고도 부른다

 

사벌면 마을 지명 유래집을 보면 산봉우리에 쇠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재 선생이 십리강산을 국록(國祿)으로 받은 지역이어서 국사봉이라고 한다.

『상산지』는, 조언박(曺彦博)의 우역(牛疫)을 치료하기 위해 임(林) 씨라는 사람이

이 산에 대장간을 만들고 쇠를 녹여 기물을 만들었고, 지금도 그 터가 있다고 전한다.

 

동쪽에 2001년도 세운 이재(:1齋) 조우인(曺友仁)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건지산에서 왔다.

《‘마리산’에서 ‘마리’는 ‘:2:3(宗), :4리’, ‘마리. 머리(頭)’의 표기인 듯하다. 우리 나라 말에

높은 곳을 ‘마루’라고 한다. 예를 들면 ‘산마루’가 있다.》

매악산 정상 삼각점(△예천 23 / 1980복구)

매악산 정상의 헬기장

매악산 정상에서 낙동강 너머로 바라본 예천군 풍양면의 모습

잠시후에 가야 할 군암산의 모습

군암산 너머로 작약(영강)지맥의 마지막 능선이 보인다

매악산 국사봉에서 다시 길을 나선다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내려간다

불에탄 산등성이에는 싸리나무가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등로를 찾는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조망바위(15:08)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예천군 풍양면(豊壤面)의 모습

경북 예천군남단에 있는 면으로 남부의 건지봉(421m)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이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낙동강이 북쪽과 서쪽의 경계를 따라 흐르고, 면내에는

소규모 하천이 복잡한 하계망을 이루고 있다. 제법 큰 농경지가 이들 하천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조선시대에는 용궁군 남하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남상면(13개 동리), 비안군 현서면(15개 동리), 문경군 영순면(8개 동리)이 합쳐져 풍양면이 되었다.

풍양부곡()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현재 면소재지인 낙상리를 포함하여 15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낙상리()는 본래 문경군 영순면 지역인데 1914년 여러 마을을 합하고 낙동강 가에 있는

낙상암이라는 바위 이름을 빌려 명명한 것으로 삼강리()는 본래 용궁면 남상면 지역인데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마을 앞에서 합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오지리()는 오지그릇을 만들던 마을이었으며 우망리()는 서우망월형()의

명당이 있어서 우망()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근심을 잊는다는 뜻으로 우망()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풍리()는 낙동강이 북서안을 싸고돌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흥천리()는 1914년에 만들어진 합성지명인데 흥천사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아직도 매악산의 산불의 아픔을 아직도 고스란히 그대로 안고 있다

불탄지역을 걷다가보니 옷은 완전히 숯검댕이가 되어 버렸다

나뭇가지로 함창(좌)과 점촌(우)이 아련하게 보인다

내 마음 갈 곳 없어 그리움도 둘 곳 없어바람에 띄워 보낸다내 아픈 기억들

 

가진 게 너무나 없어뼈저리게 서러울 땐사랑과 우정도 내겐 사치라 믿었어

시린 고독과 악수하며견더온 날들모두 가지면행복할 줄 알았는데


되돌아 가고 싶다.다시 살 수 있다면사랑하는 사람과평생 소박하게 나 살고파...

또 다시 불에 탄 나무들과 전쟁을 치러면서 힘들게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전망대(15:20)

전망대에서 바라본 사벌면 매요리의 모습

낙동강변의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는 농촌마을이다.

낙동강가가 되므로 매호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매호, 동동, 매호장터, 물두붕골, 못안,

새터마을 등이 있는데 매호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매호리의 그것과 같다.

동동마을은 매호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매호장터마을은 장이 섰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물두붕골마을은 두붕(두레박)처럼 생긴 산 앞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못안마을은 매호지라는 못 앞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새터마을은 매호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도 산행이 아니라 전쟁에 가깝다

암릉구간을 내려서고...

참으로 힘이 드는구나

가야할 군암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산불피해 지역을 벗어나니...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천신만고 끝에 불탄 지역을 벗어난다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좌측 능선으로 내려간다

 넓은 농로가 보이고...

좌.우로 밭이 보이는 고개가 나온다

고개(15:38)

함창읍 하갈리에서 사벌면 퇴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개 좌측으로 오르니...

이정표에는 조금전에 지나온 매악산을 마리산으로 표기해 놓았다 

뚜렸한 능선을 따라서 군암산으로 향한다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선다

등로 가운데 있는 암릉을 지난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올라서니...

군암산 정상이 나온다

군암산(君岩山:280.6m:16:00)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와 함창읍 하갈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숭덕(병성)지맥의 마지막 산이다

산에 임금바위가 있다고 해서 군암산이라 했는데 임금바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인증샷

합수점으로 향한다

끄트머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낙엽에 묻혀버린 나뭇계단을 따라서 내려간다

갈림길(16:08)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한 등로로 내려간다

등로는 상당히 지저분하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인데 상당히 미끄럽다

암릉구간을 지나 급경사의 좌측으로 내려간다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묘지 가운데로 내려간다

김해김공 묘(16:23)

가선대부겸 동지사를 지낸 김해김공 묘지를 지난다

가선대부(嘉善大夫)는 고려시대의 자덕대부(資德大夫)에 해당하며 1392년(태조 1) 7월 새로이

관제를 제정할 때 설치되었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칙임관(勅任官)의 하한(下限)인

종2품을 가선대부라 하고, 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 각 아문 협판(協辦), 경무사(警務使) 중

초임자가 이에 해당하였다

 

동지사는 대개 동지를 전후하여 보내기 때문에 동지사라 하였으며,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와 더불어

삼절사(三節使)라 하였으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보내는 임시사절이 아니라 정례사행(定例使行)이었다.

이 정례사행은 원래 별도로 엄격히 시행되다가 1645년(인조 23)부터 피차의 편의를 보아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정조(正朝)에 보내기로 했으며, 1723년(경종 3)에 다시 강조되어 이후로는 동시에 시행되었다.

이 정례사행을 삼절 겸 연공사(三節兼年貢使), 혹은 동지사, 또는 절사(節使)라 불렀다. 이 사행은 동지를

전후하여 출발해서 그해가 지나기 전에 북경에 도착하여 40∼60일 묵은 다음 2월 중에 떠나서 3월 말이나

4월 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퇴강리를 바라 보면서 내려가는 길은 계속 묘지이다

또 다른 김해김공 묘지를 지나 퇴강리 마을로 내려간다

묘지에서 바라본 사벌면 퇴강리의 모습

원래는 상주군 외북면의 지역이었다. 낙동강 가에 있어서 물미(물뫼), 또는 한역하여 퇴강이라 했는데,

1914년 퇴상리(退上里). 퇴중리(退中里). 퇴하리(退下里)를 합하여 퇴강리라 하고, 사벌면에 편입했다

마을 가운데로 내려간다

퇴강리 마을 회관이 나오고 바로 옆에는 퇴강성당이 보인다

퇴강성당(16:28)

병인박해 1년 전인 1865년 마을 주민 김현영이 성서와 교리서를 사서 읽으면서 퇴강리가

천주교를 받아 들이는 기원이 된다. 김현영은 천주교 서적을 만나기 1년 전 30세에 부인을 잃고

자식 3형제를 교육하면서 천주교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1895년 자손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 들이게 하여 1899년 큰 아들 김극배. 소자 김종록. 조카 김운배. 친구 최면집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자신은 1903년 세례를 받을 준비를 했으나 영세 예정일 한달을 남기고 중병에 걸려 죽음에 임박해 영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받을 수 있는 대세(大洗)를 받았다.

 

본래 거창 유씨(劉氏) 마을이었던 물미 마을에 1625년 김해 김씨 입향조가 유씨를 부인으로 맞고 이주해

옴으로써, 김해 김씨 집성촌이 된 후 빠른 속도로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 김현영이 사망한 190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

 

공소는 초가집이었고 회장 김종원이 살림을 하였는데, 가운데 방은 고해소를 사용하였다.

당시 성당 건물과 사제관 김대건 학원을 짓는 데 필요한 부지와 건축비를 김형태와 김희태가 기부했다.

1922년 9월 22일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1924년 十자 형 성당이 건립되었다. 천주교로 인해 새로운 문물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1932년 지금의 사제관 자리에 김대건 학원을 세웠는데, 광복 후 세워진 매호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벌동부국민학교의 퇴강분교로 되었다.

 

그 뒤 1957년 8월 25일 산 아래 낙동강 가까운 곳인 마을 입구에 붉은 벽돌로 十자 형 성당 건물과 사제관

건물을 다시 지었으나, 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로 떠나면서 신자 수가 줄어 들어 1968년 또 다시

함창성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다. 2003년 7월 11일 물미공소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준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퇴강성당 안내판

퇴강 성당을 지나 합수점으로 향한다

천주교요람지(天主敎搖籃地) 표시석을 지나 15번 도로로 내려선다

퇴강리 버스 정류장(16:30)

버스 정류장 시간표

도로를 건너서 낙동강 둑방길로 올라간다

자전거 전용도로와 둘레길 형태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셀카로 지맥길 마지막 인증삿을 남긴다

낙동강 칠백리 표시석(14:31)

상주시 사벌면 마을 지명유래를 보면 많은 곳에 낙강(洛江)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상락(上洛, 상주의 옛 號) 즉 상주의 동쪽을 흐른다고 낙동강이라 한다고 한다.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전해 오는데, 그것은 이 곳에서부터 부산 앞 바다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근래에는 낙동강 1,300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강원도 황지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다.

『경상도지지(慶尙道地志)』 계성현(桂城縣) 조에는 낙동강을 기음강(岐音江)이라 했다.


1196년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상주의 동쪽 낙동강에서 ‘낙동강’ 시를 남기며 선유한 뒤로

이 강은 선비들의 유상처가 되어, 1622년 7월 상주의 선비들이 남긴 『낙강범월록(洛江泛月錄)』은 

171년 간 각종 낙강시회(洛江詩會) 때 창작된 시를 모은 시집으로 전한다.『상산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낙동강의 유래 안내판“수원(水源)이 태백산 황지에서 나와 수 백 리를 흘러 우리 나라의 경계에

들어오면서부터 낙동강이라 하니, 상락(上洛)의 동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주의 북쪽 30리에 삼탄진(三灘津)이 있고, 10리를 지나 회동진(檜洞津)이 있으며, 5리를 가서

비란진(飛鸞津)이 있고, 이수(伊水)가 들어오는 곳에서 5리를 지나 죽암진(竹巖津)이 되고,

위수(渭水)를 받은 10리 허에 낙동진이 있으니 동남으로 여행하는 이는 모두 이 나루를 건너게 된다.

낙동진 위에 관수루가 있고, 바다로 들어 가는 곳까지 모두 낙동강이라 한다.”

이곳은 낙동강변에서 가장 큰 낙동나루가 있는 곳이다옛날 낙동나루는 영남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 가거나 과거를 보러 갈 때에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의 하나였으며, 경산, 영주, 영천, 대구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상주를 거쳐 영동으로 빠지거나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괴산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고, 죽령을 넘는 사람들은 안동, 영양 일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보러 가던 사람들은 ‘주르륵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죽령으로 가지 않았고 추풍령도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말 때문에 넘지 않았으므로 문경새재의 계립령을 넘어서 서울로 갔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상주를 거치는 사람들은 낙동나루를 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낙동 나루터는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에 만들어진 8개의 보(수리시설)중의 하나인 낙단보우안 하류에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전국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혔으며낙동강에 있었던 수 많은 나루중 부산 구포 감동나루, 경남 합천 밤마리나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나루로 불렸는데, 낙동강 하류 지방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온 세곡선이 낙동나루터로 몰려 들었고소금배와 상선 등도 가득했다...낙동나루터를 끼고 형성된 장터와 주막도 번성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상주시 낙동면에서 의성군 단밀면으로 오가는 나룻배와 뗏목이 운행되었으나두 지역을 잇는 낙단교가 건설되면서 낙동나루터의 기능을 상실했다 

다시 합수점으로 향한다

영강/낙동강 합수점(16:35)

영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맥길은 물 속에 입수하면서 범여도 스틱을 접는다

늘 마음속에 찜찜했던 지맥길을 접수하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다스틱을 접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합수점에서 나오면서 바라본 매악산과 군암산의 모습

도로를 따라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계집막 버스 정류장(16:45)

사계집막은 벌면 사벌면 퇴강리에 있는 개진마 동북쪽의 들로 ‘개(浦)+지이(津)+들(野)=개지이들’의

합성어로 보고 있는데 ‘개’는 ‘물 가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갯 땅’이나 ‘갯 논’, ‘개 밭’은 ‘하천 가’에 있는 땅을 말한다.

‘지이’는 ‘진(津 : 나루)’의 이 지역의 발음이다. 오래 전 퇴강 마을에서 문경시 영순면 땅에 갈 때는 관천(串川, 영강)을

건너 다녔다. 개짓 들 옆에 있는 마을 ‘개짓(마)’은 ‘대집 마’라고도 하는데, ‘기와집이 있는(마을)’로 ‘기와집 마을’로

보는 ?채ㅐ?있다. 경기도 평택군 현덕면 신왕리의 ‘갯말’은 기와집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디새’는 ‘기와’의

 고어(古語)다. ‘디새 집 마’, ‘기와집 마’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 퇴산원(退山院)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퇴산원이 기와집이었을 것이므로 이렇게 불린 이름이 아닌지 배제할 수 없다.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이정표

이 도로는 예천의 풍양과 용궁으로 가는 도로라 교통편이 많아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시도하는데 10분 이상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차는 세워주질 않는다

그래도 끈질지게 시도를 했더니만 지나가는 승용차가 세워준다.

함창이나 점촌으로 좀 태워 달라고 하니 점촌을 간다고 하면서 점촌 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홈프러스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고 가신다...감사합니당

점촌 홈플러스 앞 정류장(17:45)

貴人의 도움으로 편하게 점촌까지 와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점촌발 → 동서울행 버스표
18시 10분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생각보다 차량이 밀리지 않아 편하게 서울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