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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문경시 산북면의 마을 지명유래

by 범여(梵如) 2019. 11. 25.

가곡리(加谷里)
- 개잘∙가재골∙가곡(加谷里)
1680년경 심상봉(沈相逢)이라는 사람이 개척하였으며 그 당시 마을 앞의 개울에 가재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그 주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하기 힘든 곳이어서 이곳의가재를 잡아 반찬을 마련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하여 이곳을 가재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후에 개잘로 변음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가곡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 소리실∙성곡(聲谷)
개잘에서 남쪽 배나무 재를 넘어 서쪽으로 1㎞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개척 당시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동민들이 솔숯을 구워가며 어렵게 생활하였다. 당시 마을 산 중턱에 가택사(加宅寺)라는 사찰이 있어 이곳에서 들려 오는 은은한 범종 소리에 맞추어 마을사람들이 기거 생활을 하였다 하여 소리실 또는 성곡이라 하였다 한다.
- 가마골
옛날 절골 뒷산에 가택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한 스님이 남의 여자를 탐내다가 주지 스님에게 발각되어 벌로 가마솥에 넣어 질식사시켰다고 하는 전설이 전하여 내려오면서 가마골이라 하였다 한다.

 


가좌리(加佐里)
- 가재목∙가좌목(佳在目∙加佐目)
가좌목의 목(目)은 팔목지지(八目之地:여목,도목,늘목.장구목 등)에 속하는 곳으로 마을 앞개울에 가재가 많이 서식하고 지형 또한 가재목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재목이라 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공을 받아 복주(현;안동)로 피난 왔을 때 이곳의 산수가 수려하고 왕에 대한 주민들의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마을이름을 가좌목(加佐目)이라 부르게 하고 환도 후에 이 마을을 지원하였다 한다. 이로 인하여 왕으로부터 도움을 더 많이 받았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가자(佳字)를 가자(加字)로 개칭하여 가좌목(加佐目)이라 하였다 한다.
- 산막(山幕)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산에 움막을 치고 약초를 캐며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하여 산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새터∙새마∙신기(新基)
가좌목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조선 세조때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선생이 은신하면서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새터 또는 새마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의 후손인 김녕(金寧)김씨 수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거산리(巨山里)
- 거무(錦衣)∙거산(巨山)
1630년경 김금의(金錦衣)라는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거무라 불렀고 전설에 의하면 김금의와 그의 부인 매화가 사망하여 합장하니 금매(錦梅)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거무란말은 이곳의 지형이 비단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이라 전하며 거산은 큰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거산(巨山)이라 하였다 한다.
- 모래바리∙사촌(沙村)
옛날 이곳에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사촌(沙村)끼리 살았는데, 자기 조상을 금혈(金穴) 명당(名堂)에 매장하고 내일 모레면 꼭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고 기다렸다 하여 모레바래라 불렀던 것이 점차 변음되어 모래바리가 되었으며, 사촌(沙村)이란 이름은 사(四)자를 사자(沙字)로 고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김룡리(金龍里)
- 김룡(金龍)
480년경 김장자(金長者)라는 사람이 이곳에 살았는데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어느날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영롱한 무지개가 생기자 김장자는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 그 후 사람들이 이 마을을 김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한편 신라 진평왕 10년(588) 운달조사가 김룡사를 창건한 이후에 김룡(金龍)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갯마∙신기(新基)
김룡마을옆에 숲이 있었는데 김장자의 둘째 동생이 이 숲속에 새로 집터를 형성하여 집을 지어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신기라 하였고 개천가 갯벌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갯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오미∙오산(烏山)
김장자의 막내동생이 산이 병풍같이 둘러져 있는 곳에 집터를 잡고 살았는데 갑자기 까마귀가 많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오산이라 불렀으나 후에 변음되어 오미가 되었다 한다.

내화리(內化里)

- 화장(花庄)∙내화(內化)
양천허씨(陽川許氏)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였으며 조선 성종때 장말손(張末孫)과 그의 사위 박인양(朴寅亮)이란 선비가 관직을 사퇴하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마을을 발전시켰으며 인근에 폐사된 화장사라는 절이 있어서 동명(洞名)을 화장이라 불렀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내화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 동로방면으로 1㎞쯤 가면 노루목 고개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6∙25동란 직전인 1949년 9월 16일 새벽 4시경 동로로 출동하던 경찰병력이 매복공비의 기습을 받아 많은 병력이 전사했다. 이때 전몰한 호국경찰의 넋을 위로하고자 전공비가 세워져 오늘날 반공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 탑들∙사동(沙洞)
신라시대(연대 미상) 창건된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약 100년전에 폐사되고 3층 석탑만 허술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1960년에 복원하여 보물 제51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는데 탑과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탑들 또는 사동(沙洞)이라 하였다 한다.
- 가매바우∙교암(轎岩)
내화 남서쪽 산기슭에 몇 집이 모여 사는 조그마한 마을로서 동리 입구에 가마 모양으로 생긴 큰 바위가 있어서 지명을 가매바우 또는 교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상리(大上里)>

- 한두리∙아랫한두리∙도촌∙대도리(大道里) 대상(大上)
장수인(張水人) 황사웅이란 선비가 이곳에 이주 정착하면서 도(道)와 덕(德)으로 마을을 개척함에 도덕군자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도촌(道村)이라 하다가 다시 대도촌(大道村)이라 하였고 우리말로 한두리라 하였는데 이곳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위쪽에 한두리를 대하리 아래쪽 한두리를 대상리라 하였다 한다. 또 상하(上下) 두개의 마을이 한 들에서 농사를 지었다 하여 한두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상이라 개칭하였다.
- 오미기∙오목(烏木)
신라시대때 임씨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의 후손인 임학선(林學先)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이 까마귀 혈(穴)이고 까마귀는 나무 위에 둥지를 틀어 서식하므로 마을 이름을 오미기 또는 오목이라 하였다 한다.
- 지보실∙지보(知保)
임학선의 후손이 오미기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새로 터전을 잡고 정착한 후 자손들이 번성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마을을 잘 보존한다는 뜻에서 지보실 또는 지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하리(大下里)
- 한두리∙웃한두리∙대도촌(大道村)∙대하(大下)
고려 말엽 단양우씨가 막골에 터전을 잡고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으며 그후 조선 세종때 명신(名臣) 황희정승의 후손인 황정(黃珽)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한두리의 위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웃한두리라 칭하게 되었고 광천 막골 신평 영각등 5개의자연부락을 대하(大下)라 칭하였다 하며 조선조 때에는 대도촌 또는 도촌이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 너부내∙광천(廣川)
웃한두리 북쪽에 있으며 김룡에서 흐르는 아천(雅川)과 동로(東魯)에서 내려오는 금천(錦川)이 합류하여 강폭이 넓어졌으므로 너부내 또는 광천이라 부르며 강 건너편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 막골∙막곡
조선 초기에 단양인(丹陽人) 우순복이 광천에서 1㎞쯤 떨어진 이곳 계곡에서 무성했던 칡덩굴을 제거하면서 마을을 개척하였을 당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서 흡사 막을 친 것과 같다 하여 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평(新坪)
광천에서 북동쪽으로 500m 지점에 있는 아천교(雅川橋)를 지나면 10여가구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말기에 인근 동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 터전을 마련하여 생활하였다 하여 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영각(影閣)
웃한두리에서 북쪽으로 삼거리 분기점을 거쳐 영각교를 건너면 황희정승의 영정을 모셨던 영각(현재는 대하로 옮겼음)이 있었던 곳의 마을이라 하여 영각이라 불렀다 한다.

 


서중리(書中里)
- 서중(書中)∙근암(近癌)∙보가리(保家里)∙서원(書院 )
1330년경 밀양박씨를 선두로 안동김씨 안동권씨등 삼성(3姓)이 집단적으로 이 마을을 개척한 후 권씨문중에서는 마을 맞은 편 가까운 산인 근품산(近品山)의 品字 와 山字 를 합하면 암자(癌字)가 되므로 마을이름을 근암(近癌)이라 하였고, 박씨문중에서는 서원이 있는 마을이므로 서원이라 불렀으며, 김씨문중에서는 집을 보존한다는 뜻에서 보가리(保家里)라 호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이 상주 목(牧)에 속하였을 때에는 서원중리(書院中里)라 호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자(書字)와 중자(中字)를 따서 서중(書中)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특기 할만한 것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추석절에는 석전(石戰)놀이, 정월 보름날에는 화전(火戰)놀이가 연례행사로 시행되었으나 현재는 놀이의 위험성으로 풍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곰우챙이∙웅창(熊倉)
서중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납세한 양곡을 보관했던 곰과 같이 큰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곰우챙이 또는 웅창이라 칭하였다 한다.

 


석봉리(石鳳里)
- 샛골∙새모기(鳳項)
1380년경 영산(永山) 김석천(金石川)이란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경주이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뒷재의 모양이 새의 목과 같이 생겼다 하여 새목재라 이름 짓고 새목재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새모기라 불렀으나 이것이 변하여 후일에 샛골이라 불리어 지게 되었다.
- 굴골
마을 뒤편에 석회암(石灰岩)으로 되어 있는 병모양의 동굴이 있고 동굴 밑에 골이 형성되어 이 골을 중심으로 마을이 있었다 하여 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최근(1980년대)까지 이 마을 뒤편에 있는 석봉광산과 단산광산에서 무연탄을 생산하였었다.
- 돌담골∙석달(石達)
동네의 산등성이가 내려온 모양이 닭이 잠을 자는 홰와 같은 모양이어서 돌닭이 홰에 오르는 모양과 같다 하여 석달(石達)이라 불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구전되는 과정에서 돌담골이라 불렀다 한다.
- 장자골
옛날에 이곳에 정착하여 살던 사람이 이 골짜기를 개간하여 비탈진 밭에 조를 심고 가을에 천석이나 수확하였으므로 천석(千石)을 하는 부자가 살던 부유한 골짜기의 마을이라 하여 장자골이라 불렀다 한다.
- 허런골∙희룡골(希龍谷)
마을 앞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 한 곳에 깊고 푸른 소(沼)가 있었는데 그 소(沼)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가 한 마리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허런골∙희룡골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소야리(昭野里)

- 소야(蘇野∙野野)
고려말에 소(蘇) 정승이란 분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이주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소야(蘇野)란 이름이 생겼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소야(蘇野)로 바뀌었다고 한다.

 


약석리(藥石里)
- 약석(藥石)∙약산(藥山)
1580년경 신존재(申尊在)란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집을 세우려고 뒷산에 임목(林木)을 구하고자 오르던 중 바위틈에서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갈증이 나던 참이라 물을 많이 마셨던 바 갈증은 물론이고 몸의 피로도 깨끗이 없어지고 전신이 가벼워지므로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말이 사방으로 퍼져 이 물이 약수라면서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 마을을 약석 또는 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 구룡판(九龍板)
약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려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산 기슭에 평평한 곳이 있어 이곳에 마을을 세우고 동명을 구룡판이라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때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나타날 지세라고 하면서 산혈(山穴)을 끊어 버리자 흙의 색깔도 붉게 되고 산 고개도 잘록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배골∙비아골
고래무덤 북쪽에 위치하며 마을을 싸고있는 뒷산및 좌우산 줄기와 마을 전체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듯 하다하여 비아골이라고 하였으며 비아곡(飛鵝谷)이라 쓰고 변음이되어 배골이 되었다. 마을의 양날개와 머리부분을 이루는 산줄기를 손상시키지않고 나무를 잘 가꾸고 보존해야 마을이 잘되고 인물이 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 고래무덤∙괴화동(槐花洞)
고려 때 늙고 병든 사람은 산채로 광에 가두었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매장하는 풍습이 있어서 이를 고려장 또는 고래장이라 하였는데 이 마을 가까이에 이러한 무덤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고래무덤이라 하였고 또 이 마을에 괴목이 많고 꽃이 아름답게 피는 까닭에 괴화동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우곡리(于谷里)
- 읍실∙우읍실∙우곡(于谷)
단종때(1453년경) 영월 엄씨 한 분이 이 곳에서 약초를 캐며, 머루 다래 덩굴을 제거하면서 개척한 마을로서 임진왜란 때에는 평해 황씨의 자손들이 그들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을 짓고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읍(揖)을 하였다고 하여 읍실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읍실이 깊은 계곡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우곡(于谷)이라 하였다 한다.
- 도치골∙도치동(道致洞)
1680년경에 엄상문(嚴相紋)이란 선비가 처음으로 험준한 계곡을 개간하여 마을을 조성하고 이웃 동리와 통하는 길도 이 골짜기에 개설하였다 하여 도치골이라 하였다가 후에 인가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다시 동명을 도치동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 황새골∙대조동(大鳥洞)
마을 뒤의 산세가 흡사 황새목과 같이 생겼으며 산위 우거진 푸른 소나무 가지에는 황새떼가 서식하여 장관을 이룸으로써 황새골 또는 대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현재는 그 많던 황새들이 자취를 감추고 푸른 숲만이 무성하여 마을 사람들은 옛 정취를 아쉬워하고 있다.


월천리(月川里

- 새발개∙사발개∙사월동(사월동)∙월천(月川)
1650년경 예천사람 임규순(임규순)이란 선비가 칡덩굴을 헤치고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 후 동민들이 사기 그릇을 만들어 생활하였다고 하여 사발개라 부르다가 달이 지도록 이일을 했다 하여 사월동(沙月洞)이라 일컬었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사월동(沙月洞)의 월자(月字)와 이천리(伊川里)의 천자(川字)를 따서 월천(月川)이라 하였다 한다.
- 큰들∙이천리(伊川里 )
사발개에서 진등재를 넘어 잇질(伊川) 동쪽에 있는 마을로 산골의 들로서는 비교적 넓은 편이며 들 가운데 이천이라는 시내가 흐르고 있어 농사 짓기에 좋다고 하여 큰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반대로 큰 들은 있으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논농사를 겨우 이어 대준다는 뜻에서 잇질 또는 이천리(伊川里)라 하였다 한다.
- 쉬안골
사발개에서 지내리(池內里)로 가는 길옆 골짜기로서 옛날부터 나뭇꾼들이 나무하러 오다가다 쉬어 가는 계곡이라 하여 쉬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경지면적은 적으나 이곳에 취락이 형성되었다.

 


이곡리(梨谷里)
- 배나무지이∙이정(梨亭)
1530년경 순흥안씨 안성(安成)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게 되었는데 개척할 당시 마을 입구에 큰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배나무지이라 불렀고 그 배나무 밑에 아름다운 정자를 많이 지어(안씨, 박씨, 윤씨 등) 동민들의 휴식처로 제공하였다 하여 이정이라 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큰 홍수가 났을때 배가 이 마을까지 들어 왔다고 하여 불리어진 동명이라고도 한다.
- 갯마∙배실∙이하리(梨下里)
배나무지이 서쪽 약 300m지점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지금의 마을자리가 하천이었는데 큰 홍수로 인하여 물길이 바뀌어 새로운 하천이 생기고, 전에 하천이었던 자리에 마을을 세웠다 하여 갯마로 불려 오고 있다. 또 배실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있는 골짜기 전체의 모습이 배모양이고 마을이 골짜기의 중심되는 위치에 있다 하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다. 이하리는 이정 위의 두 마을 중 아랫마을이라 하여 행정구역 개편때 붙여진 동명이다.
- 달고개∙월현리(月峴里)
배나무지이 남쪽 60m 지점에 호계면 지천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에서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양쪽의 산 높이가 똑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달이 뜰 때의 높이와 질 때의 높이가 똑 같다 하여 달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이 고개의 입구에 있는 마을을 고개 이름에 따라 달고개라 불렀다.
- 도장골∙도당곡(都堂谷)∙이상리(梨上里)
배나무지이 서쪽 800m 지점에 있는 마을로 마을 입구의 큰 나무 밑에 도당(都堂)이있어 해마다 마을을 위해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도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당곡이라 불리어 오다가 변음되어 도장골로 되었다 한다.

 


전두리(田頭里)
- 구암(龜岩)
1480년경 노창일(盧昌一)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앞산 머리에 있는 바위가 거북이 모양이어서 길상(吉商)이라 믿고 마을을 개척하여 구암이라 불렀다 한다.
- 창전(蒼田)
1470년경에 형성된 마을로서 논은 없고 밭만 개간된 곳으로서 주위에 머루 덩굴이 무성하게 얽혔다 하여 창건(蒼田)이라 불렀다 한다.
- 송전(松林)∙전두(田頭)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년 전에 평산인(平山人) 신성균(申性均)이란 분이 밭머리에 있는 선고(先考)의 묘(墓) 모양이 노서하전(老鼠下田)이라,그 이름을 따서 마을의 이름을 전두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곡리(種谷里 )

- 씨실∙종곡(種谷)∙비룡(飛龍)
옛날 이 마을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 나무가 많았으므로 종자가 풍부하였다. 그래서 이 많은 종자를 인근 마을에 나누어주었다 하여 씨실 또는 종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 마을 앞산인 비룡산의 모습이 나르는 용의 형상이라서 비룡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지솟마∙지소(紙所)
씨실의 북동쪽 약 5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이곳에 세워졌다고 하여 지솟마 또는 지소로 불려지게 되었다.
- 사기점(沙器店)
씨실의 북동쪽 약 1.5㎞지점인 산중턱에 있는 마을로서 1700년경 처음으로 이 곳에서 사기그릇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하여 사기점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전지화(田地化)된 것이 아쉽다. 그러나 옛날 사기그릇을 굽던 흔적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지내리(池內里 )

- 못안∙모산∙지내(池內)
고려말 강릉인(江陵人) 함재구(咸在求)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나 조선 중엽(1640년경)에 경주이씨들이 입향하여 마을 앞에 못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못안∙모산이라 불렀다. 그 후 행정구역 개편때 지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한다.
- 마치기∙마책(馬策)∙마체(馬體)
모산에서 장군석을 지나면 나타나는 마을로서 조선중기 반남박씨(潘南朴氏) 남태(南台) 선생의 묘를 들인 후부터 마치기로 불리었다 하며 마을 뒤 소봉(小峯)을 마책봉(馬策峯)이라 부르고 마을 입구의 큰 바위를 장군석, 남동쪽 언덕위의 바위를 탕건바위, 앞산을 용마산(龍馬山) 또는 마우산이라 부르고 있다.
- 신안동(新安洞)∙샛터
지내리에서 조그마한 언덕을 넘어 월천리(月川里)로 가는 중간, 월지초등학교의 동쪽골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 중엽 순흥안씨들이 텃골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샛터 또는 신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구리(蒼邱里)

- 창구(蒼邱∙蒼鳩)
1380년경에 인동인(仁同人) 장보충(張補充)이라는 분이 푸른 언덕에 비둘기 떼가 많이 서식하는 이곳을 天下名地(天下名地)라 생각하고 이주 정착하면서 동명을 창구(蒼鳩)라 하였으나 차츰 마을이 번창하고 인구도 증가하여 비둘기 떼가 인적이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리자 비둘기가 서식하던 언덕에는 풀만 무성하게 되어 그 후로는 동명을 창구(蒼邱)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쇠점마(金店村)∙금곡(金谷)
창구 동쪽 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400년경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은 창구(蒼邱),호암(虎岩),가좌(加佐)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옛날에 대장간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쇠점마,또는 금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암리(虎岩里)

- 갈골(葛谷)∙호암(虎岩)
박세옥(朴世玉)이란 분이 이 곳에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칡덩굴이 많아 이를 제거하고 마을을 형성하여 갈넘, 갈골이라 하였는데 그 후 차차 칡덩굴이 자연 고사(枯死)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은 동네가 망할 징조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앞산의 용맹스럽게 생긴 큰 바위와 같이 마을이 번성해 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호암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 불당골∙불당(佛堂)
갈골 서쪽 산기슭을 따라 500m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마을로서 개척 당시에 불당이 있었다고 하여 불당골 또는 불당이라 불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송씨라는 부인이 자식을 얻기 위해 밤마다 불공을 드리려고 불당을 찾아 온갖 정성을 다하니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밤길을 밝혀 주고 보호하였다고 한다.


회룡리(回龍里)

- 젓절∙회룡(回龍)
처음 이곳을 개척한 사람이 평산인(平山人) 신씨(申氏)라고 하나 임진왜란 때 이천인(利川人) 서홍제(徐弘濟)라는 분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마을을 개척한 후 마을 뒤쪽 삼재에 있는 절로부터 들려 오는 은은한 종소리에 심취되어 젓절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흡사 용이 몸을 뒤틀며 기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동명을 회룡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1963년 이 냇물의 하구를 막아 회룡저수지가 구축되었다.
- 잇 질
젓절에서 월천리(月川里)로 가는 길옆에 있는 마을로서 동리 앞을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하여 논농사를 간신히 어렵게 지었다 하여 잇질 또는 이천이라 하고 윗잇질과 아랫잇질로 양분되어 있다.

흑송리(黑松里)
- 검실∙흑송(黑松)
고려때(1275년경) 용강인 팽장군이라는 분이 이곳을 개척할 당시 뒷산에 있는 소나무가 검은빛이 났다 하여 검실 또는 흑송이라 불렀다 하며 또한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벽헌(碧軒) 장명희(張明禧)라는 분이 여주에서 이주 정착하여 장군 대좌혈(待坐穴)이라 하여 이 마을을 개척할 때 검은 기와와 검은 기둥이 출토되었다고 하여 흑송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 새마
흑송 동남쪽에 위치하며 1926년 박우춘(朴友春)이라는 분이 처음으로 개척한 후 새로 분가하는 분들이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새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여 새마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