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2월 7일) 칠곡에 있는 황학(금호)지맥 2구간에 가서 날씨가 너무 추워서 개고생을 했다.
일요일은 오늘에는 쉬고 싶기도 하여 푹 쉬기로 했는데 10년을 넘게 매주 주말에 베낭을메고
집을 나선 탓인지 범여의 몸뚱아리는 어김없이 새벽 4시가 되니 잠에서 깨어난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니 갈데가 없어서 아침까지 방에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아침을 먹고
청계산 아래에 있는 범여의 은사스님의 절집에서 행사가 있어 들렸다가 가까운 청계산을향한다
예전에 독립군 이전에 다녔던 산악회의 후배 산꾼들이 수도권 55산을 하는데 오늘은이 구간을 한다고 한다...
젊은 것이 내 허락도 없이 남의 나와바리 구역에 들어 오다니...
그래도 예전에 대간길을 같이 걸었던 아그들이 보고 싶어서 청계산으로 향한다
청계산의 지도
절집에 들렸다가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청계산의 등로인 어둔골로 향한다.
청계산을 걷다보면 유난히도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색, 변계랑, 조윤 등...
대표적인 인물이 려말선초(麗末鮮初)에 이셩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자
이성계가 친구였던 조윤(趙胤)에게 사람을 사람을 보내 조선의 높은 벼슬을 제수했으나
그는 이곳 청계산에 숨어 살면서 고려의 개(犬)로 살지언정 조선의 벼슬아치로 살지 않겠다면서
이름도 조윤(趙胤)에서 ‘개를 뜻하는 조견(趙犬)’으로 바꿔 버렸다
조선시대에도 일두 정여창과 추사 김정희 등이 나라를 걱정하며 숨어 산 곳이 이곳 청계산이다.
그런데 요즘의 정치인들과 고위직 벼슬아치들은 민초들의 안위에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들의
부귀영화와 안위에만 신경을 쓰니 참으로 썹쓸하다
상적동(上笛洞) 어둔골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上笛洞)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적동(笛洞)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노상동을 병합하여 상적리라 하였다.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상적동이라 하여 성남시에 편입된
상적동은 북쪽의 인릉산과 서쪽의 청계산 아래에 있는 산지 지역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 제한
구역 및 군사 보호 지역으로 되어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고등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상적동은 호걸들이 피리를 불며 유람하던 곳이라 하여 적촌(笛村), 저푸리, 적취리라 하였다.
저푸리를 중심으로 노상동(路上洞)[옛골, 禮谷]과 노하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상동의 ‘상(上)’자와 적취리(笛吹里)에서 ‘적(笛)’자를 취하여 상적동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일설에는 인근에 살던 덕수이씨네의 잦은 과거급제[등과(登科)]로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하였고 옛 마을이 있던 여둥골(어둥골, 어둔골)이 있던 계곡이다
청계산으로 오르는 등로는 참으로 많지만 범여가 즐겨걷는 코스가 어둔골 코스이다
이 코스는 이수봉으로 오르는 급경사의 깔딱고개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코스보다는 등산객이 적어서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고, 다른 곳과는 달리 계곡에
水量이 많고 야생화가 청계산의 다른 곳보다 훨씬 많아서 범여가 즐겨찾는 곳이다
사람들이 별로없던 경암정에는 70이 넘어 보이는 고교 동창생인듯한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홀로 맥길을 걷는 범여로서는 부럽기만 하다...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평소에는 여유로웠던 경암정의 현판
음지라 그런지 계곡물이 많이 얼어있다
예전에 범여가 자주 마셨던 약수터 물도 얼어 버렸다.
야생화 안내판
청계산 어둔골 계곡은 무늬 둥굴레, 산괴불주머니, 미나리 냉이, 개별꽃, 벌깨덩굴, 괭이눈 열매,
애기나리, 선밀나물꽃, 말발도리, 괭이눈, 피나물, 졸방제비꽃, 연복초, 통둘굴레 등이 자생하는
청계산의 야생화 寶庫가 어둔골 계곡이다
빡세게 깔딱고개로 향하는데 숨이 멈춰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힘들게 올라서니...쉼터가 있는 깔딱고개가 나온다
깔딱고개
깔딱고개에서 이수봉(貳壽峰)으로 향한다.
호젓하게 이수봉으로 향하는데 오늘은 시간도 구애받지 않고, 집으로 갈 교통편도
걱정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오랫만에 산꾼이 아닌 등산객으로 길을 걷는다
멋쟁이 암릉도 예전 그대로이니 그저 반갑기만 하다
옛골에서 금토동, 목배동 능선을 지나 이수봉으로 오르는 등로와 만나는
성남시 도시환경 연구소 철조망이 나오는데 원래 이곳이 이수봉이다
철조망을 따라서 이수봉으로 가니 하오고개, 국사봉을 거쳐 이수봉에 먼저 도착한 후배들이 반겨준다
아그들 잘 있었는가...
먼저 도착한 후배산꾼들이 격하게(?) 환영을 해준다
이수봉(貳壽峰:545m)
조선조 연산군 때 연산군의 스승이자 유학자인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친구인 김굉필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자, 변고를 예견하며 한때 이 산에 은거하여 ‘생명의 위기를
2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선생이 이수봉(貳壽峰)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오랫만에 후배산꾼들과 邂逅를 하고 후배들이 준 간식을 얻어먹고 만경대로 향한다
웬 의왕대간... 하는 짓거리하고는 백두대간도 아니고 의왕대간이라니
모르면 하지를 말든가, 전문가에게 물어나 보던가...하옇던 무식하기는......
등로에서 바라본 국사봉(國思峰:540m)의 모습
고려말의 충신 조견이 이 봉우리에 올라
나라(고려)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여 국사봉(國思峰)
또는 국은봉(國恩峰)의 이름으로 불리워오다가 이 봉우리 밑에 있는 운중동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개원되자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국은봉(國恩峰)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松山조견(趙絹)선생과 망경대(望京臺)
송산 조견선생(1351~1425)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평양(平壤)이고 초휘는 윤(胤),
자는 거경(巨卿), 호는 송산(松山), 시호(詩號)는 평간공(平簡公)이다.고려충렬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아우로 고려말 영남 안렴사(嶺南按廉使)로 있을 때
나라가 망하자 통곡하며 두류산(頭流山.현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을 견(鵑)으로 고치고, 자도 종견(從犬)이라 하였다.
조선 개국초에 이태조가 공(公)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능을 아껴서 호조전서(戶曺典書)에 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은거 하여 건너편 망경대(望京臺)에 자주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슬퍼 하다가 마왕굴 샘물로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본래 상봉에 오르면 눈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그곳에 자주올라 개경을 바라 보았다하여
"망경대" 부르게 되고 세간에는 망경대의 노래도 유행 되었다고 한다.
이태조가 한양에 정도 한후 다시 조준을 대동하고 청계사로 찾아가 옛친구 사이로 마주앉아
도와 줄 것을 간청했지만 한번 굳은 맹세를 돌이키지는 못하고 청계산일대를 붕지로 내려으나
공은 곧 양주 송산마을로 옮겨 은거 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절골 갈림길
좌측으로 내려가면 경기도 지정문화재 자료 6호인 청계사가 있어서 절골이라고 한다
이곳은 백운산에서 시작하여 염창교 아래에 한강과 안양천의 합수점인 관악지맥 능선이기도
하지만 이 길은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큰 법등이었던 경허대선사(鏡虛大禪師)가 주석하였던
절이기도 하다... 또한 몇년전에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가 다녔던 길이라 하여 최인호 루트라 불리기도
했고, 천주교 신자였던 최인호가 경허선사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길 없는 길’의 배경이 된 등로이다
청계사 와불상(臥佛象:경기문화재 자료 제6호)
태종실록에 의하면 1407년(태종 7년 12월)에는 고을에 복을 빌던 자복사(資福寺)를 명찰
청계사로 정(定)하였으니 광주(廣州)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세종실록 1445년(세종 27)에는
광평대군(廣平大君)과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이곳에서 불경(佛經)을 읽었는데 신하들이 금할 것을
요청했지만 세종은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이 청계사는 평양조씨의 원찰로만
머물지 않고 이 지역에 주요 사찰이 되었는데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도성 안의 모든 사찰을 폐쇄되자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선종(禪宗) 본찰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 한 번 왕실과의 인연은 정조 때의 일이다. ‘청계사법당중건대공덕주’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원찰은 용주사를 지정하기 이전에 청계사를 먼저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 일과 관련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무인 조심태(趙心泰)였다. 그는 청계사를 창건한 조인규의 후손이다.
흔히 정조의 측근을 떠올릴 때면 번암 채제공과 다산 정약용을 떠올린다.
그러나 조심태 또한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수원부사(水原府使) 때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을
수원에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이 되게 하였으니 이때까지는 용주사가 지어지기 전이라 자연스레
청계사를 사도세자 원찰로 삼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정조의 원행(園幸)길이 청계사에 가까운 인덕원을
지나는 길이기에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절골 갈림길에서 헬기장으로 내려선다
헬기장에 도착하니 총무라는 여인이 선배에게 복분자를 한 잔 건넨다
이곳에서 후배가 복분자 한잔을 얻어 마시니...속이 알싸하다.
이 참에 힘든 지맥길 접고 아그들 따라서 꽃길로 나설까.
아뭏든 복분자 잘 먹었소이다...다들 복받을 겨
다시 석기봉으로 향한다.
오랫만에 후배들과 함께...
헬기장에서 올라서니 예전에 헬기장이며 넓은 공터라 산객들의 쉼터였는데
군부대 시설이 들어서 버렸다
군부대가 들어선 예전의 헬기장에서 석기봉으로 향한다
가야할 석기봉의 모습
석기봉(石基峰:592m)
청계산에서 망경대와 함께 조망이 가장 좋은 봉우리로 원래의 지명은 신선대(神仙臺)였는데
미군들에 의해 영문낙서(yankee rock:미국사람 바위)가 심해지자 석기봉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석기봉에서 바라본 본 망경대의 모습
마왕굴(魔王窟) 윗쪽의 모습
고려가 망하기전에 청계산 정상의 지명은 ‘만가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만경대(萬景臺)라
하였는데 조선초기에 고려의 유신(遺臣)들이 망국(亡國:고려)을 흠모하여 망경대(望京臺)로 불렀다는
청계산은 산자락이 깊고 넓어 나라가 평안할 때 왕의 사냥터로 주로 이용했고, 나라가 혼란스럽고,
탐관오리가 들끓을 땐 산적과 범죄자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단종과, 세조, 성종, 연산군 등이 주로 청계산에서 사냥을 즐겼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청계산에서 각종 새들과 노루, 뫳돼지, 토끼 등을 많이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기봉 아래에 있는 마왕굴은 무오사화 때에 청계산으로 숨어든 정여창이 숨었던 굴이란다.
무오사화 때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정여창은 인적이 드문 청계산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지리산이나 덕유산으로 가기위해 영남대로로 들어섰다가 관원들이 하루 묵던 원터에서
뒤쫒아 오던 군사들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수봉(貳壽峰)과 국사봉의 모습
석기봉에서 내려와 금샘으로 내려간다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는데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람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
(道山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금정수(金井水)
석기봉 아래에 있는 석간수(石間水)가 흐르는 샘이 있는데 금정수 또는 하늘샘이라고 한다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였던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이 이곳에 은거하며 애용했던 샘으로
무오사화와 관련하여 벗인 김굉필과 함경도 종성땅에서 사사되자 이 샘이 핏빛으로 변했으나
사후(死後)인 1517년(중종12)에 복권이 되자 샘물이 금빛으로 변하여 충절의 금정수라 부르게
되었는데, 금정수의 유래는 과천현 신수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능선3거리에서 조금 내려가 능선3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마왕굴,마왕샘이있다
계속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이다
고려가 망하기 직전 맥이라고 하는 이상하게 생긴 큰 짐승이 여러 산짐승을 몰고 이 굴로 들어갔다 하여
"오막난이굴"이라고도 불리며 마왕굴 암벽사이에서 솟는 샘물이 있는데 마왕샘(단비샘)이라고 한다
고려말 충신 송산松山 조견(조윤趙胤1351-1425)선생이 청계산에 은거하면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갈증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석기봉을 뒤돌아 보면서 만경대로 향한다
금정샘에서 만경대로 향하는 등로는 험하기에 마니아들 이외는 잘 다니지 않는 코스이다
군부대 옹벽을 지나고...
접근할 수 없는 망경대 정상의모습
망경대(望京臺:618m)
경기도 상남시 수정구 상적동과 과천시 막계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 청계산의 최고봉이지만
국가의 중요 시설과 kt 송신소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민간인의 접급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우측 아랫쪽에 과천정부종합청사와 서울대공원, 경마장이 보이고 좌측 아래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망경대(望京臺)는 청계산 정상으로(618m) 바위 절벽위에 있는 곳인데 옛날 성터와 망루가 있었다 하며
목은 이색(牧隱 李穡)등이 송도를 바라봤다 하며 만경대(萬景臺)라 불리다가 정여창에 의해 망경대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자 통곡했던 조견. 이성계가 조견의 절개를 찬양하면서 호조전서에 명했지만 조견은
이를 거부하고 이 곳 청계산으로 들어온다. 조견은 망경대에 자주 올라왔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해서
만경(萬景)이라 이름 지었지만, 후에 사람들이 "수도 개경을 바라봤다"는 뜻으로 망경(望京)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성계와 조견은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이곳에 망경대란 정상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흔적만 보인다
망경대에서 바라본 관악산(冠岳山:629m)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풍이 바위와 어우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으며,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5악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에 이른다.
청계산은 서쪽에 위치한 관악산(冠岳山, 629m)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루는 산이다
고려말 이색의 시에 ‘청룡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청룡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과천 관아의 왼편에 해당되어 좌청룡에서 청룡산의 산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는 청룡이 승천했던 곳이라 청룡산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망경대(望京臺)ㆍ국사봉(國思峰)ㆍ옥녀봉(玉女峰)ㆍ청계봉ㆍ이수봉 등 여러 산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기반암을 이루는 것은 화강편마암으로 호상(縞狀)을 이루는데, 정상에 있는 망경대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다우며 주능선의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으며 산의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서쪽 사면에는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서울경마장이 들어섰으며, 산의 서쪽 기슭으로 서울대공원 및 서울랜드 등
시민을 위한 휴양시설이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입지하여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북한산이나 관악산이 화강암 기반으로 바위가 많이 솟아 있으니, 청계산은 편마암 산지로 흙이 덮여있어
주말이면 찾는 등산객이 많으네 산의 중턱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자료 6호인 청계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울대공원이 98년 6월부터 삼림욕장을 개설하여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등산로는 성남시 상적동
옛골에서 시작하거나, 의왕시 청계동에서 오르는 길이 있으며, 특히 서초구 원지동에 위치한 등산로
입구는 교통이 좋아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
청계산은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등 우국절사들이 청계사와 망경대,
금정수에 숨어들어 고려의 국권회복을 꾀했던게 그 하나이고 남쪽 국사봉은 이색들이 기우는 나라를
걱정했다하여 붙인 亡國의 恨이 서려있는 산이기도 하다
주암동쪽에서 망경대 쪽으로 오르다 보면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의 묘터가 있던 옥녀봉이 나타난다
망경대에서 뒤돌아 본 청계산의 모습
망경대에는 여말선초의 고려충신 조견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청계산은 유달리 고려충신들에 얽힌 지명이 많다.
망경대 정상에서의 후배 산꾼들
내가 넘 험한 곳으로 안내했나?
목포에서도 왔다 가셨군요
응달인데다 눈에 얼어있어 조심스럽게 혈읍재로 내려간다
협읍재(血泣峙)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에 있는 서울대공원에서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을 넘어가는 고개이다.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였던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1450~1504) 선생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 실현이 좌절되자 은거지인 금정수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통분을 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이 고개를 혈읍재라 명명하였다.
정여창 선생은 청계산 금정수(金井水:망경대 아래 석기봉 옆)에서 은거하다가 결국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史禍: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스승 김종직, 벗 김굉필과 함께
유배 후에 사사(賜死) 되었으며, 그 후 갑자사화 때 함경북도 종성땅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연산군의 왕사(王師)이었던 정여창은 연산군에게 2번이나 죽임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협읍재 이정표
매봉으로 향한다
예전에 참으로 많이 다녔던 능선... 멋쟁이 소나무는 하나도 안 변했다
매봉(鷹峰:582.5m)
서울 서초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3시(市) 경계봉이다.
청계산의 최고봉은 만경봉이나, 그곳은 국가의 중요시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등산객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청계산의 주봉(主峰) 노릇을 하고 있으며 사시사철 등산객이 많은 곳이다.
왜 매봉이라 불렀는지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예전에 이곳에 꿩과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단다.
우리 속담에 ‘꿩 잡는게 매’라고 했는데 꿩을 잡아먹는 매들 때문에 생긴 지명은 아닌지?(범여의 생각 中에서)
누비길을 따라서 매바위로 향한다
매바위(578m:鷹岩)
예전에 매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몰라도 국민은행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있고,
주위 전망이 뛰어난 곳으로 구룡산과 대모산이 보이며 그 너머로 우리 아파트도 보이는
곳인데 미세먼지 탓에 오늘은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다.
매바위에서 바라본 인능산(仁陵山:326.5m)
서울 서초구 내곡동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인릉산이라는 명칭은
『대동여지도』나 『광주부읍지』에는 천림산(天臨山)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나 산 북쪽에
위치한 순조의 능인 인릉의 조산(朝山)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무단으로 왜곡한 것이라고도 한다.
매바위에서 바라본 구룡산과 대모산.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대모산과 구룡산
대모산(大母山:293m)의 지명유래는 산의 모양새가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할미산이라
부르다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의 헌릉이 산 아래에 모셔진 이후 어명(御命)으로
대모산(大母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구룡산(九龍山:306m)은 서초구 염곡동과 강남구 개포동 일대에 위치한 산으로, 산을 자세히 보면
9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염곡동을 감싸안은 구룡산(九龍山)은 옛날 임신한 여인이 용 10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1마리가 떨어져 죽고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가
구룡산이라 불리게 되었고, 하늘에 오르지 못한 1마리는 좋은 재목, 좋은 재산인 물이 되어 양재천(良才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보다 낮은 이 산의 주봉(主峰)은 국수봉(國守峰)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전부터
정상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국가를 지킨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이 곳에는 바위굴이 있어 봉수군(烽燧軍)이
기거했다고 한다
돌문바위(石門巖)
입자(入字) 모양으로 된 바위 옆에는 ‘청계산의 정기(精氣) 듬뿍 받아가셔요’ 팻말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탁발을 하던 스님이 계셨는데 요즘은 보이질 않으신다
돌문바위를 지나면서 좌측 능선 아래 평평한 바위가 보이는 저 곳이 예전에 범여의 아지트였다.
저 곳은 등산객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옷을 벗고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때리던 곳이다
헬기장의 이정표
494m봉 정상 삼각점(△수원 404)
국립지리원에서는 측랑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 국가 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분야에 이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삼각점은 전국에 일정한
간격으로 16,000여점이 설치되어 지도제작, 지적측량, 건설공사, 각종 시설물의 설치 및 유
지관리 등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용되는 국가중요시설물로써 국민 모두의 소중한 재산이다.
이러한 삼각점은 누구든지 파손하거나 그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되며 만약
무단으로 훼손하는 경우에는 이 지역의 모든 측량을 실시할 수 없으며 관련자는 측량법령에
따라 벌을 받게 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곳에 설치된 삼각점(수원404)의 위치는 표주의 심자선 중심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동경: 127.2.58(도분초)
북위:37.25.41(도분초)
494m봉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서 옛골로 향한다
뒷풀이 장소인 옛골토성
이 집 쥔장인 권태균 회장님과 범여는 30년 넘게 개포동에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는 사이이다
이곳에서 오랫만에 만나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고 집으로 향한다
후배님들! 오랫만에 만나 허벌나게 반가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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