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하늘 아래 첫 절집 지리산 묘향암에서 1박2일(1)

by 범여(梵如) 2021. 6. 22.

☞ 산행일시: 2021년 06월 19일~20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생각보다 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첫날 약 7.6km  / 5시간 55분

☞ 참석인원: 무시무시한 산꾼들과 함께

☞ 산행코스: 성삼재-무넹기-노고단 대피소-노고단 고개-왕시루봉갈림길-헬기장-돼지령

                    국가장기 생태연구지-피아골 갈림길-임걸령-쉼터-노루봉-반야봉갈림길

                    소금장수 묘-삼도봉-묘향대

☞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산동면, 토지면 / 경남 하동군 화개면 / 전북 남원시 산내면

 

4개여월전 대한산경표상의 구미한천지맥을 마무리하고 그 후 늘 자주 만나는

후배산꾼(현오, 수헌, 산으로님)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들이야 늘 만나면 하는 얘기가 신줄기에 대한 Issue 이외는 다른 주제가 낄 틈이 없다.

그러던 중에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과 “현오와 걷는 지리산”이라는 책의 저자

현오님의 제안으로 지리산 묘향암에 1박을 하면서 반야낙조(般若落照)를 보자는데

의기 투합이 되어 지리산을 가기로 결정하고 절집의 가장 큰 행사인 초파일을 지나고

가기로 한 결정이 이번주 토. 일요일이다

 

근데 하필이면 이번주에 코로나 백신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컨디션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6월 16일(수)에 코로나 백신을 맞았는데 남들은 아무렀지도 않는다는데 난 귀저질환

환자라서 그런지 약간의 미열에다가 어지럼증 증세가 있어서 이틀간 많은 고생을 한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묘향암에 갈때 필요한 공양물을 내가 담당하기로

했고, 후배들과의 약속을 깰 수가 없어서 동행을 하기로 했지만 몸이 따라줄 지 의문이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

묘향암 주변지도

06시 40분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서울남부발 → 구례행 버스를 타기위해 집에서 터미널로

향하는데 준비한 양초 2박스와 부탄가스 등 물건이 너무 많아 집에서 터미널까지 태워준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늘 만나는 후배산꾼들과 오늘 처음 조우한 산꾼 3명 등 7명이 버스를 타고

구례 터미널로 향한다...버스에 오르자마자 늘 습관처럼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탄천휴게소 서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휴게소에 내려서니 이른 아침인데 한여름을 방불케 열기가 올라온다

구례터미널(10:10)

구례터미널에서 내려 차에서 탑승하면서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산꾼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이 분들은 정말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산꾼들이어서 갑자기 겁이 덜컥 나면서 오늘 잘못

따라서 나섰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스럽기만 하다

 

이 분들은 한번 산행을 시작하면 보통 100km 가까이씩 산행을 하는 J3 출신들이다

더군더나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로 나선 난 엄청나게 겁이난다.

구례역에서 택시 2대를 나눠타고 성삼재로 향하면서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을 한다 

성삼재(姓三峙:1,102m:10:45)

삼한시대에 진한 대군에 쫓기던 마한 왕이 전쟁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래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이 달궁이라

이름지어져 불렸다 한다.

 

그 당시 마한(馬韓) 왕은 달궁을 지키기 위하여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峙), 서쪽 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鄭嶺峙), 동쪽은 황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령재(黃嶺峙),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姓三峙)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성삼재 휴게소에서 바라본 구례

전남의 북동부와 지리산의 남서방 기슭에 위치한 구례군(求禮郡)은 백제 때에 구차례(求次禮)현이라 불리고, 

신라 경덕왕 때에 구례현으로 고쳐 불리었으며 곡성군에 속하였으며, 고려 초는 남원부에 속했다가 인종 때에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주현으로 승격되고, 말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석주관을 축성했다.

토지면의 석주관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 혹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조선의 태종 때는 현감이 파견되고, 그 후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남원부에 속했거나 다시 현으로 복구되기를

반복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가옥이 137호이고, 인구는 677명이라 기록되어 있어 매우 작은 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대를 기준하면 작은 아파트 단지에 불과한 가구와 인구에 불과하다.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으며 기름진 땅”을 뜻하는 '고래실'을 전라도의 사투리로 표현하면 '구레실',

'구레논', '구렛들'로 구례는 그런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왜냐하면 전남·전북·경남의 경계를 이룬

삼도봉(三道峰)을 꼭지로 삼아 흐른 섬진강을 감싼 구례는 산흙이 흘러내려 기름진 '구레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택리지』에서도 구례 땅은 비록 들은 좁지만 농산물의 수확은 많고,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가니

가뭄타는 일이 적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구례는 지리산에서 가지친 해발 1,000m 가까운 험준한 산들이 사방을 감싸안은 그 안쪽에 자리한 분지에

해당되어 평야가 적다. 하지만 군의 중앙을 남류하는 서시천이 섬진강에 합류하면서 서시천의 양쪽 사면과

섬진강과의 합수점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자리잡았다. 하지만 군의 80%는 산지로 주산물은 구례분지

중심의 곡물과 원예작물이고, 근래에는 밤의 생산도 많고 산수유는 전국 최대의 주산지이다.

성삼재에 도착하여 휴게소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가져간 짐은 같이간 이한검 대장이라는 분이

국립공원 인맥을 통해 해결하고 식사를 끝낸 다음에 묘향암으로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데 초반부터

몸뚱아리가 코로나 예방주사를 맞은 탓인지 내 의지와는 달리 말을 듣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산행을 포기할 수도 없고하여 산행을 시작한다(11:15)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무시무시한 산꾼들은 노고단고개로 사라져 버리고 나만 뒤쳐진다.

난 그것도 모르고 반야봉의 낙조와 아침에 다시 반야봉으로 올라가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노고운해와 반야봉 근처에 있는 야생화를 찍어보겠다는 욕심으로 대포 카메라(Dslr 마크4)와

렌즈, 삼각대, 후레쉬 등, 카메라 장비만 6kg이상 되니 자연히 걸음을 늦을수 밖에 없다

자꾸만 걸음이 늦어진다.

오늘 산행을 주선한 권작가(현오)님은 발걸음이 느린 선배 때문에 애가 타는 모양이다.

노고단 고개의 문이 12시가 되면 닫히기 때문이다

무넹기 고개(11:45)

무넹기 고개(코재)가나온다. 무넹기는 '물이넘쳐 마을로 들어온다' 라는 뜻을가진 "무너미"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엄사에서 이곳으로 오르는데 그 가파름에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 코재 ' 라고 하기도 한다

 

지리산 남부 탐방소 김승완님의 고견에 의하면

" 코재 " 의 유래는 노고단을 얼굴 전체로 보면 코에 해당하는 부분의 위치에 있어서 코재라 불려진다고 한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코재 위에 눈썹 바위가 있고 무넹기를 전라도 방언으로 ' 데망생이

'( 표준어: 이마 ) 라하니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코재라는 유래 보다 현재의 위치가 코에

해당한다는 유래가 신빙성이 더 있지 않나 싶다. (자료 인용)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화엄사 가는 길이 나오고 남서쪽으로는 갈 수 없는 종석대가 있다.

물길이 바뀌어 버린 무넹기 고개 개울

길상봉(노고봉)에서 시작된 이 물길은 원래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가야하는데

물길을 인위적으로 섬진강으로 돌린 곳이다

무넹기 고개를 지나자마자 우회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따라 노고단을 향하는 빠른 길을 택한다

좁은 샛길을 올라 노고단고개를 12시안에 통과를 해야하는데 베낭의 무게 때문인지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선배가 걱정스러운지 앞서가는 수헌, 현오님이 나와 보조를

맞추려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3년전 큰 수술이후 좌측의 폐를 절개한 탓인지는 몰라도 초반 2시간정도는 엄청 힘이든다

그 이후에 몸뚱아리가 예열이 되면 빨리는 못걸어도 꾸준하게 걸어가는 스타일...나홀로 산행일 때는

그게 가능한데 오늘처럼 동료산꾼들이 무지막지하게 가버리면 더 힘이들어 따라갈 수가 없다.

4인방이 갈 때는 후배들이 나를 엄청 배려해 주는데 오늘 새로 조우하신 산꾼들은 나를

잘 모르기에 그런 배려는 애초 기대도 안했다...高手들을 따라나선 내가 잘못인지

아님 판을 키워버린 권작가가 잘못인지는 몰라도 현오님이 원망스럽다.

 

12시 안에 노고단 고개를 통과해야 반야봉을 갈 수 있는데 먼저가신 j3출신 이한검 대장님이

자기 베낭을 노고단 고개에 내려놓고 되돌아와서 네 베낭을 지고 노고단고개로 향한다  

노고단 대피소(12:00)

성삼재에서 2.6km의 거리를 힘들게 걸어서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는 지금 공사중인데 노고할미가 힘들어 하는 범여를 반긴다

 

이 대피소는 1920년대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풍토병 치료를

위해 지었던 수양관 건물이었는데 지금도 한여름에도 날씨가 서늘하고 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노고단(老姑壇)이란 늙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사터를 말하며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라고 한다.

노()는 존칭의 의미이며, 고()는 마고를 뜻하기도 해서 마고할매를 위한 제사터라고한다

마고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여신으로 그가 사는곳은 마고성이라고 한다.

원래 마고는 젊은여성이었으나 오랜 전설속의 여신이므로 마고할매라고 불린다

이곳은 거의 대부분 야간에 지나간 탓인지 뚜렸한 기억이 별로없다.

예전에 보지 못한듯한 취사장 건물도 보이고 다시 노고단고개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이한검 대장님이 내 베낭을 지고가서 빈 몸뚱이로

오르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모든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다

노고단 고개(1,440m:12:13)

최악의 컨디션으로 노고단 고개에 도착한다.

이곳은 12시면 지리산 주능선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 버린다.

내가 도착한 건 13분 초과...먼저 도착한 이한검 대장님과 현오님이 국립공단에 사정을 하여

겨우 통과한다...오늘은 이래저래 후배 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밉상이 되어 버렸다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본 길상봉(노고봉)의 모습

길상봉 정상은 예약을 해야만 갈 수 있는 모양이다

가야할 능선과 반야봉이 뚜렸하게 보이고 그 너머로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 아련하게 보인다

뾰족하게 여인의 궁둥이처럼 생긴 봉우리 우측이 반야봉이고 좌측이 중봉이다.

원래는 좌측이 반야봉이고 우측이 중봉인데...“현오와 걷는 지리산”의 저자인 권작가님의 설명에

의하면 국립공단에서 두개의 봉우리 지명을 바꿔 버렸다고 한다 

노고단 고개에서 이한검 대장님에게서 베낭을 돌려받아 반야봉으로 향한다.

스마트폰에서 켜진 오룩스맵상의 백두대간 지도에서는 경로이탈을 했다는 경고음이 울린다

왕시루봉 갈림길

길상봉(노고봉)에서 이어지는 오리지널 백두대간 길이다

샛길 경고 플랑카드와  조난산악인이 있었는지 돌무더기가 보인다

왕시루봉으로 가는 샛길

자꾸만 뒤쳐지는 선배가 걱정스러운지 현오님이 나와 보조를 맞추면서 걷는다

범의 꼬리풀

마디풀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중국과 한국이 원산지이고, 산골짜기 양지에 서식하며 크기는 30~80cm 정도이다.

꽃은 늦봄에서 한여름 사이에 흰색 또는 담홍색으로 피며, 꽃말은 ‘키다리’이고 뿌리줄기를 약재로 사용한다. 

노고단에서 임걸령으로 향하는 길은 고도차가 거의없어 그런대로 걸을만한데

오늘 산행을 같이하시는 분들은 워낙 호화준족이라 난 그 분들의 흔적조차 볼 수 없다

헬기장(12:53)

헬기장에서 뒤돌아 본 길상봉(노고봉)의 모습

노고봉(1,507m)은 천왕봉(1,915m)과 반야봉(1,732m)과 함께 지리산 3대봉우리의 하나로

옛날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老古)를 모시는 단(壇)이 있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이곳은 고산지대로서 전망이 매우좋고 시원해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 수련장으로 이용

되었다고 하며과거 192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곳에다 건물을

짓고 여름을 보냈다고 하며 실제로 노고단 대피소 숲속 좌측에과 왕시리봉에 선교사들의

별장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추강 남효온은 그의 지리산 기행록인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노고단을

고모당(姑母堂)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할미당이나 삼신할미당이란 뜻이다

한때 나라의 제사터였을지라도 그러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은 오래전에 맥이 끊긴 상태이라

‘노고’라는 말은 선도성모가 아닌 삼신할미로 보는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기온이 서늘한 아고산지대로서 약 30만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원추리 군락과 각종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왕시루봉이 보인다

등로에는 간간히 꿩의 다리도 보이기 시작한다

고사목을 지나고...

좁은길을 따라가다보니 돼지령이 나온다

돼지령(1,370m:13:08)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 능선에 있는 돼지령은 주변으로 여름이면 원추리가 군락을 이루는데

멧돼지들이 원추리 뿌리를 캐먹기 위해 자주 출몰했는데 그런 사유로 돼지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마지막 회에 운무가 낀

설원의 산정에서 하림(박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인공 대치(최재성) 와 여옥(채시라)가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촬영지가 바로 이곳 돼지령과 노고단 일원이었다고 한다

반야봉을 바라보면서 갈라진 좌측 등로로 향한다

국가 장기 생태 연구지(13:13)

국가 장기 생태 연구지에서 바라본 왕시루봉

서북쪽으로 눈을 돌리니 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장쾌하게 보인다

피아골 삼거리(13:24)

지리산의 단풍 산행코스로 유명한 피아골은 6.25전쟁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피로물들은

계곡이라해서 피아골로 불린다고 알려져있으나 피아골이란 지명은 이곳에

피밭(직전,稷田)이 많아 붙은 이름으로 오곡중 하나인 피를 많이 심었던 골짜기라,

즉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피는 보이지않고, 빨치산과 토벌대가 흘린 수많은

피가 먼저 생각나는건 아마도 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피아골이란 유래는 옛날 속세를 버리고 이곳의 한적한 仙景을 찾은 仙客들이 이곳에서 오고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을 그 후 변음이 되어 피아골로 불렀단다

혼자서 무심코 걷다보니 임걸령에 도착한다

임걸령(林傑嶺:1,320m:13:35)

조선 선조때의 좀도둑인 임걸년(林傑年)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활동무대는 반야봉 일대였다고 한다.

그는 화계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때의 임걸년은 지리산의 모든 사찰을 털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그가 활동한 장소라해서 임걸령(林傑)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숲이 울창해서

고갯마루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며 이곳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임걸령 샘의 물맛을 보기위해 좌측의 샘으로 내려가니 현오, 수헌, 산으로 아우님들이

늦게오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 미안하기만 하다...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신다 

임걸령 약수물

지리산에 관한한 거의 신신령 수준인 권작가(현오)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임걸령 샘이 아닌 천호샘으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

임걸령 샘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후배들과 삼도봉에서 만나기로 하고 노루목까지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서 올라가는데 자꾸만 베낭의 무게가 몸뚱아리를 짓누른다.

나홀로 산행때는 아무런 제약없이 내 페이스대로 걸으니 별 문제가 없는데 오늘은 무지막지한(?)

산꾼들과 걷다보니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심하다.

성삼재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쉼터(13:55)

빡세게 올라오니 예전에는 없었던 쉼터가 나오는데 임걸령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부터 다시 노루목까지 취고 올라가야 하는데, 3년전에 수술했던 부위에 심한

통증이 몰려온다...스트레스가 엄청 심하다는 이야기다.

아직까지 삼도봉까지 2km나 남았다는 얘기인데 자꾸만 걸어갈 자신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앞서간 권작가에게 구원을 청했더니만 이한검 대장이 자기 베낭을

벗어놓고 되돌아와서 내 베낭을 지고가고 난 뒤따라 간다

노루목으로 향하는 계속되는 오르막길

안부를 지나고 다시 노루목으로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노루목 (1498m:14:30)

좌측으로 1km지점에 반야봉이 있고, 저녁에 반야낙조를 감상하기로 하고 삼도봉으로 향한다

노루목이란 이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해서 붙은 지명인데 항간에는 노루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붙었다하며, 또 다른 일설은 노루목 앞에 있는바위의 모양새가 노루가 목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이라

노루목이라고 부른다.

빈 몸뚱아리로도 오늘 처음뵌 J3 출신 이한검 대장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

노루목 정상에 도착하니 대장님이 행여 내가 반야봉으로 갈까 싶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지리산을 20번 이상을 와밨기에 그 정도는 아닌데...

삼도봉으로 향한다 

 

* J3는 지리산 3대종주를 말하는데

1.화엄사-대원사 무박종주

2.성삼재-천왕봉-성삼재 무박왕복종주

3.덕산에서 천왕봉-인월 태극무박종주를 하신 분들을 말한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산꾼들인 앞에가는 이대장님도 그 산꾼중에 하나인데

아마도 전생에 산신령이 아닌지....

반야봉 갈림길(14:44)

오리지널 백두대간 길이다...반야봉은 대간길에서 약 1km정도 벗어나 있다.

소금장수 묘(14:46)

삼도봉가는 등로 우측에 묘지가 한 기 있는데 권작가의 말로는 소금장수 묘라고 한다.

150년전 일흔살된 소금장수가 소금을 진 채 오르다가 지쳐 죽어 묻혔다는 `운봉무더미`이다

 

삼도봉 아래에 있는 화개재에는 하동에서 올라온 해산물과 남원에서 내려온 농산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場이 열리곤 했는데 그와 관련된 묘인 듯 싶다

삼도봉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길상봉(노고봉)의 모습

삼도봉에 올라서면서 바라본 반야봉(般若峰1,734m)

반야봉은 지리산 10경중 제3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봉우리로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 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 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를 닦았다.

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 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왕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하는데 옛날에는 지리산의 主峰이 천왕봉이 아닌 반야봉이란 설이 있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도봉(三道峰:1499m:15:00)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린다.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낫의 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닐리리 맘보'를 연상시키는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삼도의 경계면에 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석재가 아닌 강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있다

인증샷

삼도봉에서 바라본 불무장등(날라리봉) 능선

피아골과 목통골의 경계...아니 전남과 경남의 도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봉(일명:날나리봉)이

시원스럽게 보이는데 불무장등(不無長嶝:1,446m)은 지리산에서 유독 장등이란 명칭을 쓰고있는 봉우리다

그런데 불무장등(不無長嶝) 봉우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한문으로 풀이하면 ‘없지 아니한 긴 산등성이’처럼 그저 밋밋한 고갯마루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 산세가 대장간의 화로인 풀무와 같은 형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경상남도 문화관광국 관광행정담당은 “올바른 표기는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 또는 불모(佛母)를 용어를 사용하는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불모장등은

반야봉에서 시작한 반야장등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다

“반야”라는 중복된 같은 글자를 피하고 같은 의미인 불모장등(佛母長嶝)이란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불모” 또는 “불무”로 읽어 현재의 불무장등이란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불무장등 능선은 반야봉에서 시작되어 하동군 화개면 탑리까지 능선으로 이어지면 날나리봉이라고도 한다

불무장등 능선을 배경으로...

지리산에서 유독 이 봉우리만 장등이란 명칭을 쓰고 있는데, 봉우리처럼 우뚝 하지도 않고

봉긋 솟아 있지도 않는데,  한자 이름 그대로 "없지 아니한 긴 산등성이"처럼 그저 밋밋한

고갯마루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불무장등이다.

 

어떤 사람은 불무장등(佛無長橙)으로,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부처는 있다는 것이다.

삼도봉에 도착하니 권작가, 수헌, 산으로님이 한참 동안이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후배들에게 밉상이 되어 버렸다...그런데도 늘 싫은 내색않고 챙겨주는

후배들이 고맙기만 하고...삼도봉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반야봉과 삼도봉 일대가 서울대학습림이다

소금장수 묘를 지나면서...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져 묘향암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반달곰 출몰지역 표지판이 나오고 비탐구간에 들어선다

묘향암 가는 길

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면 묘향암의 호림스님은 굶어 죽으란 말인가?

 

세상에 험한 산길 다섯 시간 이상을 부지런히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 

묘향암으로 가는길은 반선에서 심마니능선길, 뱀사골 계곡에서 이끼폭포 지나 오르는 길,

종주길의 소금장수 무덤 부근에서 반야봉 허리로 돌아 들어가는 길, 반야 중봉 연안김씨묘 옆으로

내려가는 길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묘향암" 가는 길은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런 길" 이 열려 있다고 한다

등로는 비교적 뚜렸하다

반야봉 아래 사면길로 묘향암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대간꾼들에게 토끼봉으로 알려진 대간길 지리 능선이 보인다

 

토끼봉(卯峰:1534m)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 그러는게 아니고

반야봉에서 볼 때 24방위 가운데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는 토끼를

상징하기 때문에,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현오와 걷는 지리산” 저자

妙가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닌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므로 묘(妙)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구족원만(具足圓滿)의 뜻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출처] 반야봉 그리고 묘향암.....|작성자 현오

호림스님 나와바리구역?

빈 몸으로 가는데도 힘이든다.

아무래도 코로나 예방주사 맞은 영향인 듯 하다...열도나고 머리도 아프다

조그만 물길을 지난다

조심스럽게 암릉 옆으로 내려간다 

묘봉 너머로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 아련하게 보인다

암릉구간을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함박골에서 올라온 비박팀을 만난다.

정말 부럽다...나도 젊을때는 그레고리 데날드프로 베낭을 메고 겁없이 다녔는데

이젠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렸으니...가는 세월을 어찌할 꼬... 

이 분들은 권작가가 초청하신 분들인 모양이다

공터를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조망바위가 나오고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yellow house인 하늘 아래 첫 절집인 묘향암이 보인다

大道無門(대도무문): 대도(大道)는 문(門)이 없다
千差有路(천착유로): 천차만별로 길이 있으나
透得此關(투득차관): 이 관(關)을 꿰뚫어 얻으면
乾坤獨步(건곤독보): 하늘 땅에 홀로 걸으리라.

험한 길을 따라서 내려가니 묘향암 석간수가 산꾼을 반긴다

묘향암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바라본 묘봉의 모습

대한민국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묘향암 석간수

최악의 컨디션으로 인해 정말 힘들게 묘항대에 있는 묘향암에 도착한다(16:20)

2016년 8월 27일에 나홀로 왔었으니 5년만에 다시 온 셈이다.

묘향암(妙香庵)

화엄사의 말사에 속한 암자로 해발 1500m고지에 있는 오지중에 오지에 있는 암자이다

천왕봉 아래에 있는 법계사(1,450m)나 설악산 봉정암(1,200여m) 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

예부터 선승들은 북에는 묘향산 법왕대, 남에는 지리산 묘향대를 꼽았다고 한다

묘향(妙香)이란 단어는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 나오는 불교 용어로 “기이한 향기(奇香)”를

말하는데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 계향(戒香), 시향(施香)이 있다

이 향은 바람을 거슬러 냄새를 풍기다고 하며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정화하는

보살의 정신, 세상의 논리를 거슬러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힘들게 묘향암에 도착하여 법당에 들려 관음보살님에 예를 올리고 신중단과 영단에도

예를 올린 다음에 절집 쥔장인 호림스님에게 예를 올리고 나니 긴장이 풀리는지

머리가 아파오는데 가지고 온 타이레놀 2알을 먹고나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힘들게 가지고 온 양초와 부탄가스, 참기름과 미역을 관음보살님전에 고양물을 올린다

이 절집은 전기도 안들어 오고 취사시설이 없어 가스와 양초가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다

묘향암 묘연문

2016년 8월 27일...묘향암의 모습

지리산에는 옛부터 수도처로 10대(十臺)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대(臺)의 사전적 의미는

‘흙을 높이 쌓아서 사방을 관망할 수 있게 만든 곳’ 을 말하는데 즉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이르기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뜻인데 루(樓) 라는 한자와 좀 비슷한듯 싶다.

 

1. 노고단 아래 질매재로 가는 길에 있는 문수대...

2. 종석대 아래에 있는 우번대...

3. 반야봉 중봉 아래 해발1450m에 있는 묘향대...

4. 피아골 산장 위의 서산대...

5. 불무장등에서 직전마을 내림길에 있는 무착대...

6. 하봉 아래 두류능선의 말봉 근처의 향운대...

7. 법계사 위의 문창대...

8. 영신봉 아래의 영신대...

9. 장터목 산장 아래 천왕봉쪽의 향적대...

10. 금강대는 뱀사골에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장소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법당에 들려 참배를 하고 나오니까, 이 절집의 쥔장인 호림스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전기도 없고 가스도 없는 절집을 수호하고 계시는 호림스님...늘 건안하셔요

 

지리산 十臺중 묘향대(妙香臺)는 한국 불교의 마지막 전설로 불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기도 한 곳으로 전설에 의하면 금강대가

제일의 수행지였다 전해지나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은 이곳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묘향대(妙香臺:1,485m)

지리산 반야봉 신록이 감춰둔 한국불교의 마지막 전설인 것이다.

해발 고도가 1,500여m이니 반야봉 8부 능선에 자리잡은 셈이다.

설악산 봉정암(1,224m)이나 태백산 망경사(1,363m)보다 더 높다.

 

지리산의 심장은 반야봉이다

반야봉은 불교적 의미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인 셈인데,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

지혜를 뜻하는데,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의 참모습을 환하게 알게 되는 지혜가 반야(般若)의 참뜻이다.

이 지혜를 얻어야 성불한다는 것이 바로 반야(般若)인 거이다.

 

묘향대(암)은 신라 진흥왕 때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띠집을 짓고 도를 닦았다는 곳으로

역사 기록에는 조선시대부터 묘향대에 관한 얘기가 회자되고 있는데, 시작은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그중 가장 유명한게 개운당조사가 수도해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묘향대는 수백년 동안 토굴로 이어져오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1970년대 초반이라고 한다.

1970년대 화엄사를 새롭게 일으킨 위한 불사를 완성한 도광스님이 주변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소박한

절 집의 모습으로 가꾸었다고 하는데 녹슨 양철지붕이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을 걷어낸 1970년대의

농가를 연상케 하는데 암자 뒤로는 묘향대라 불리는 바위가 부처님 뒤의 광배처럼 받치고 있고,

건물 앞에는 조그마한 마당까지 확보되어 있다.

스님과 상견례를 끝내고 법당에서 100m정도 떨어진 텃밭에서 이른 저녁을 준비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전기가 없기에 어둡기전에 저녁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림스님 호위무사 日光이...

저질 체력으로 반야봉의 낙조와 이끼폭포를 찍겠다고 6kg 가까운 카메라 장비를

지고 오느라 체력이 바닥이 나버린데다가 코로나 주사로 인해 미열에다가 약간의

寒氣를 느끼기에 아무래도 반야낙조를 포기해야 할 듯 싶다.

 

묘향대에서 반야봉까지는 내 발걸음으로는 1시간 이상 걸릴것 같아서 저녁을 먹고

산으로님에게 똑닥이 카메라로 반야낙조 한 컷을 부탁하고 일찍 묘향암으로 되돌아와서

법당 옆 요사채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닥에 불이 안들어와서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아래의 사진은 산으로님이 내 똑닥이 카메라로 찍은 반야봉의 모습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반야봉 정상의 모습

반야봉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모습

般若落照

한없이 부럽기만 후배들

 

 

 

 

 

 

 

 

 

 

 

 

 

 

P.S: 하산길에 계곡에 쳐박히는 바람에 카메라가 물에 잠겨 메모리카드가

     일부 복원되지 않아 수헌아우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