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년 06월 20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생각보다 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둘째날 약 8km / 4시간 40분
☞ 참석인원: 무시무시한 산꾼들 15명과 함께
☞ 산행코스: 묘향대(묘향암)-폭포수골-박영발 비트-뱀사골(제도권 등로 진입)-유유교-간장소
이끼폭포 갈림길-제승대-병풍소-병소-금포교-탁용소-와운마을 입구
☞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어제 저녁에 코로나 주사의 휴유증인지 몸에 열도나고, 너무 힘이들어서 일찍 묘향암 요사채로
혼자 들어와서 저녁 8시쯤 잠자리에 들었다...생각 같아서는 좀 무리해서라도 반야낙조를
보러가는 후배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 또한 후배들에게 민폐가 될 거 같아 포기를 했다.
요사채는 아궁이가 없는 방이라 불을 땔수가 없어 방구들은 얼음장 같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몸은 자꾸만 아프고 이러다가 이곳에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불편한 잠자리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지리산의 여명은 시작된다.
방을 나와서 부처님전에 참배를 하러 법당 안으로 들어서려니 요사채(스님방을 포함해 방 2개)를
빼앗겨 버린(?) 스님이 주무시기에 그냥 마당을 내려선 다음에 샘으로 가서 石間水 한바가지를
마시고 법당 한바퀴를 돌아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수헌님 블로그 인용)
묘향암에서 바라본 일출
천왕봉에서 올라오는 일출은 장관이다
묘향대(암)의 석간수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이가 시릴정도로 물은 차갑고 물맛은 꿀맛이다.
지리산에 전해오는 대(臺)의 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지리산의 臺는 암벽과 석간수,
수도처라는 공통점이라 있는데 반야봉 아래 묘향대 "묘향암"은 삼 칸 함석 절집으로,
암자에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大菩提心을 얻고자 하는 수도승이 수행하고 있으며, 수도처답게
지리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신비롭고 俗人에게도 영험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묘향대(妙香臺)
묘향암은 지리산 반야봉 신록이 감춰둔 한국불교의 마지막 전설인 것이다.
해발 고도가 1,500m이니 반야봉 8부 능선에 자리잡은 셈이다.
설악산 봉정암(1,224m)이나 태백산 망경사(1,363m)보다 더 높다.
지리산의 심장은 반야봉(般若峰)...불교적 의미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인 셈이다.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지혜를 뜻하는 말로,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의
참모습을 환하게 알게 되는 지혜가 반야(般若)의 참뜻인데, 이 지혜를 얻어야 성불(成佛)한다는
것이 바로 반야(般若)인 거이다.
신라 진흥왕 때 화엄사와 연곡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띠집을 짓고 도를 닦았다는 곳으로
역사 기록에는 조선시대부터 묘향대에 관한 얘기가 회자되고 있는데, 시작은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그중 가장 유명한게 개운당조사가 수도해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묘향대(妙香臺)는 문수(文殊:범어 원어는 만주슈리(Manjushri)를 한역을 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 등이 되는데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문수대, 우번대... 등과 함께 묘향대는 현존하는 암자와 수도하는 분이 머물고 있다.
수도처답게 지리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며 기를 느낄 수 있고 영험한 느낌이 든다.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은 70년대 초반으로 화엄사를 새롭게 일으킨 도광 스님이 주변의
도움을 얻어 토굴에서 절 집의 모습으로 가꾸었다. 근처에 금강굴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또한 스님들에게는 유명한 수행처이나 현재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묘향대는 수백년 동안 토굴로 이어져오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 1970년대 초반이라고 한다.
1970년대 화엄사를 새롭게 일으키기 위한 불사를 완성한 도광스님이 주변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소박한
절 집의 모습으로 가꾸었다고 하며, 녹슨 양철지붕이 초가지붕을 걷어낸 1970년대의 농가를 연상케
하는데 지금은 노란지붕으로 페인트로 칠을 한 것은 호림스님께서 하셨다고 한다
암자 뒤로는 묘향대라 불리는 바위가 부처님 뒤의 광배처럼 받치고 있고, 건물 앞에는 조그마한 마당까지
확보되어 있고 마당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그 끝에 평평한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괴나무를
잘라 만든 좌대가 놓여있고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코끼리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구나
묘향암 마당 끄트머리에 있었던 코끼리상(2016. 08, 27일 산행때의 사진)
묘향암 공양간
절집 마당의 비박꾼들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고 그 가운데 절집 쥔장인
호림스님의 호위무사인 일광이가 비박꾼들을 외호하고 있다
묘향암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개운당조사(開雲堂祖師)는 누구인가?
개운당 조사는 1790년(정조 10년)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로 자라 13세에 문경 봉암사로 출가해 혜암(慧庵)선사의 제자가 됐다.
이후 여러 경로를 거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상주 도장산(道藏山, 828m) 심원사(深源寺)로 들어갔다.
거기서 51세까지 수행 정진한 나머지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어 중생으로서 최고 경지에 올랐다.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지리산 묘향암에서 신선이 됐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본 사람이 없어 신선이 됐다는 설이 제기된 전설적인 인물이다.
개운조사로도 불리는 스님은 불도(佛道)와 선도(仙道)에 모두 조예가 깊은 대도인으로서,
지리산 묘향암(반야봉 아래 묘향대)에서 신선이 되었다고 하며, 출가하여 수행한 후 선도에
정통하여 선인과 같은 많은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13세 때 출가한 개운당조사는 희양산의 환적암(幻寂庵)과 백련암(白蓮庵), 청화산 맞은 편의
도장산 심원사(尋源寺.또는 深源寺)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여 크게 성도한 후 평소에 수많은 신비의
이적을 보여 주기도 하였는데, 도장산은 한자(漢字)로 '길 도(道)'자에 '감출 장(藏)'자를 쓴다. 이름이 기이하다.
'도가 감춰져있다'는 뜻인데 범상치가 않다.
51세 때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琉伽心印正本首楞嚴經)의 주해원고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심원사 경전서가 천장 위에 깊이 간직해 둔 뒤 더 깊이 수행하기 위해
아주 인적이 드문 지리산 반야봉의 묘향대로 들어가 그 종적을 감추었다.
개운조사가 이곳 묘향대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또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 아무도 모른다.
묘향대를 떠나 그 다음엔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으며, 속리산 동쪽의 도장산에서 '아나함'이라는
득도의 경지를 얻었으니, 지리산에서는 더 높은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아나함' 보다 높은 경지는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불사불멸의 존재다.
선가(仙家)에서 보면 선인(仙人)이다.
'유가수련증험설'은 '아라한'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라한이 되면, 티 하나 없이 맑고 드높아져서 하늘과 일치한다.
마음은 항상 화엄국(극락, 천국 仙界)에서 노닌다. 세상과 인간의 일을 모두 알 수 있다.
아득한 과거의 일, 까마득한 미래의 일도 모두 환하게 헤아린다.
또 공덕과 수행이 부처님을 빼닮는다. 눈에는 붉은 노을이 가득하고 금빛 광채가 온몸을 감싼다.
주위에 오색구름이 둘러싸며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하늘 높이 날기도 하고, 한 순간에 수천 수만리 떨어진 곳을 옮겨가기도 한다。
신라때 창건된 천년고찰 화엄사 산내암자인 묘향암은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도량이다.
묘향암 신중단
묘향암 해우소(解憂所)
해우소(解憂所)란 절집에서 화장실을 말하는데 “근심을 푸는 곳 또는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해우소(解憂所) 내부의 모습
묘향암을 떠나기 전에 해우소에 들려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떠날 채비를 한다
묘향암에서 바라본 지리능선...묘봉(妙峰)에 가려진 천왕봉이 아련하게만 보인다
忙中閑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절집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지만 성이 차지 않는다.
어제 저녁에 컨디션 난조로 인해 보지못한 般若落照는 산으로님이 내 카메라로
찍어온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손 치더라도 이른 아침에 반야봉에 올라가서 노고단과
불무장등과 화개골에 퍼져있는 멋진 운해와 반야봉 주변의 야생화를 담을려고 6kg가
넘는 카메라 장비를 지고온 게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제부터 우리 일행중에 굳은 일을 도맡아 해주신 J3중부 지부장 출신인
이한검 대장님께서 찌게를 끓여 주셨고, 후배산꾼들이 무겁게 지고온 햇반과 반찬으로
아침을 준비했는데, 선배랍시고 갑질 아닌 갑질로 숟가락만 얹어 아침밥을 해결한다
식사를 마치고나니 이 절집의 쥔장인 호림스님께서 직접 끓이신 차 한잔씩을 대접한다
호림스님과 동행한 무시무시한 산꾼들과의 기념사진...이 또한 무한한 영광이다
호림(虎林)스님과의 기념사진
스님이시기라기보다 마치 옆집 아저씨같은 느낌을 주는 호림스님
예전에 이곳을 들렸을 때는 사시불공때의 모습만 뵈었는데 후배 현오님과의
인연으로 직접 만나뵙기는 처음이다...호위무사 日光(강아지)이가 스님을 외호하고 계시는구나.
지리산 3대 봉우리(천왕봉, 반야봉, 길상봉(노고봉))중에 하나인 반야봉 8부능선인
해발 1,500m 고지에 자리를 잡고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절집인 묘향암에
주석하고 계시는 호림스님...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고, 비탐구간이라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전기도, 수도도 없는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이곳 묘향암을 20여년을
지키고 계시는 호림스님...그리 예사롭지 않은 스님 곁에서니 法香이 가득하다.
왜 이곳을 수행처로 삼고 계시냐며 이것저것 여쭙고 싶지만 나 역시 조계종단의 포교사로
활동하고 있어 佛家의 法道를 알기에 호림스님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
佛家에서는 出家한 스님에게 묻지 말아야 세가지 禁忌가 있다.
1, 스님! 언제 출가하셨습니까?.
2, 스님! 왜 출가하셨습니까?.
3, 스님! 나이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스님과의 작별할 시간(09:20)
다들 떠날 채비를 한다...법당에 들려 관음보살님께 고두삼배의 예를 갖추고
나와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끼폭포 계곡쪽으로 내려가서 멋진 사진을 한 장
건지려했는데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오늘은 이끼폭포쪽인 함박골은 국공파들이
100% 단속을 할거라면서 폭포수 계곡으로 내려가라고 하신다
스님에게 작별의 예를 올리고 폭포수 계곡으로 향한다
스님 홀로 고독하게 계셨던 묘향암이 어젯밤에는 16명의 산꾼들로 오랫만에 사람사는
냄새가 났을터인데 이렇게 떠나고 나면 스님께서 얼마나 적적하실까...
마치 명절에 고향집에 들렸다가 서울로 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노부모님의 심정이 아닐까.
20여년을 그렇게 생활하셨으니 이제는 이 골이 나셨겠지... 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난다
폭포수 계곡으로 내려가는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말 그대로 원시름을 방불케 한다.
비가 내린 이후로 등로도 엄청 미끄럽고 바위가 많아서 제대로 걸을수가 없다
박영발 비트 입구(09:52)
힘들게 30분을 내려오니 박영발 비트 입구가 나온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인들 동족상쟁의 아픔을 간직하지 않는 계곡이 있으랴마는 폭포수계곡도
그 아픔을 비켜나지 못한 곳인데 그 이유는 6.25동란 당시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을 맡았던
박영발(朴榮發:1913~1954) 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국군토벌대에 저항하며 빨치산의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비트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다가 베낭을 벗어놓고 박영발 비트 방향으로 향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한겨레 신문 인용)
경북 봉화군 출신인 박영발은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적색노조 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 일하던 중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다.
미 군정 초기에 좌익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고,
전평의 집행위원도 겸임했했으며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1947년경에 월북하였고, 전문일꾼 육성 정책에 따른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으며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하였을 때 합법적으로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곧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전남 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박영발 비트(09:58)
2005년 2월 14일 3회에 걸친 수색 끝에 박영발 전남도당위원장의 최후 비트를 발견했다.
어마어마힌 바위 안에 형성된 자연동굴이 있으며 밑으로 내려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하는 복층구조로 이곳에서 '조국출판사' 라는 이름으로 각종 유인물들을 발행했다.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를 주로 사용했다.
이 동굴에서는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으며, 그리고 여성비서를 제외한 일곱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박남진(54년 12월 체포)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5지구당 위원장이
빗점골에서 전사하자 박영발 위원장의 보위대가 암벽 지대가 많은 반야봉 아래에 비트를 마련해
그 해 10월 말부터 다음 해인 1954년 2월 박 위원장 전사까지 약 4개월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했다.
*비트란 뜻은 비밀아지트의 준말이다
비트에 들어가려면 저 사다리로 올라가야 한다
밖에서 볼 때는 그냥 암릉으로 보이는데 누군가가 사다리를 설치해놨다
사다리로 올라가보니 서너명이 앉을 수 있는 옴팍한 공터가 보인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에 지리산에 숨어서 빨치산 활동을 벌이던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의 은신처로 이 비트는 빨치산 보위대원들이 박영발의 은신을 위해 반야봉 일대를
샅샅히 뒤져 찾아낸 천연동굴로, 박영발은 이곳에서 1953년 10월부터 1954년 2월까지
4개월간 이곳에서 은신하였는데, 국군토벌대의 끈질긴 추격끝에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박영발 비트에서 베낭을 벗어논 곳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길을 떠난다.
10시 반이 조금 늦은 시간인데 앞서가던 무시무시한 산꾼들이 이른 시간에 점심 밥상을 펼친다.
이곳에서 후배들이 끓인 라면에다가 햇반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내리막길은 천혜의 원시림인데다가 폭포수란 계곡의 이름다운 크고작은 이름없는
폭포들이 많이 보이고, 비탐구간이라 그런지 등로가 보였다가 안 보이기를 계속한다.
계곡을 건너기를 왔다가다를 하다가 꽤나 많은 물이 고여있는 계곡의 바위를 잘못
디디어 그냥 물속으로 꼬꾸라지는 바람에 메고있던 세컨드 카메라가 작동을 멈추어 버린다
몇번을 시도해도 작동이 되지 않는다...그나마 천만 다행인 것은 이한검 대장님께서
내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메인 카메라를 지고 가는 바람에 비싼 카메라는 화를 입지 않았다
물속으로 한번 빠지고나니 정신이 없다...그나마 다치지 않은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묘향암에서 제도권 등로까지 거리는 그리멀지 않으나 비탐구간의
원시림인데다가 계곡과 암릉...등로가 없어 산행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비탐구간에서 제도권 등로에 들어서면서 만난 시그널...포스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계곡을 지나 화개재에서 내려오는 제도권 등로로 들어선다.
늘 습관처럼 몸을 조금 숨겨 주위를 살핀 다음에 얼른 제도권 등로로 들어선다.
지금부터는 고생끝... 행복 시작이다
유유교(幽幽橋:12:25)
유유(幽幽)을 직역하면 “깊고 그윽하다”는 뜻인데 뭘 의미하는지?
유유교를 지나 15분 정도 걸어 내려오니 간장소라는 소가 나온다
간장소(12:40)
옛날 영.호남 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화개재에서 2.7km 지점에 있는 소(沼)로
시원한 검푸른 색을 띠고 있는게 특징이며, 옛날 소금 상인들이 하동 화개장터에서
화개재를 넘어오다 소금 짐이 이 소에 빠져 간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이 소(沼)의 물을
마시면 간장(肝腸)까지 시원해진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져 간장소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간장소를 지나서...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걸어간다
이끼폭포 갈림길(12:45)
이끼폭포에서 내려오는 함박골은 국공파들은 철통같이 막아놨다
틈이 안 보인다...그래도 갈 사람은 다 가더라
반선으로 향하는 계속되는 내리막길
반선까지 아직 5.5km라나 남았구나...절반의 신선이라는 뜻이다
반선으로 이어지는 뱁사골 계곡은...
지금으로 부터 1,300여년 전 이곳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의 실상사 보다 100여년이
앞선 대찰로 1년에 한 번씩 스님 한 분을 뽑아 칠월 백중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하면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 하여 이 행사를 해마다 계속하였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긴 고승이 독약이 묻은
옷을 스님에게 입히고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드리게 했다한다. 그 날 새벽 괴성과 함께 기도드린
스님은 간곳 없고 계곡내 용소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그 후 이 계곡을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반의 신선'의
준말로 마을을 반선(伴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리를 몇개나 건넜는지 모르겠다
제승대(祭僧臺:720m:12:55)
1,300여년 전 송림사 고승인 정진스님이 불자들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하여
제(祭)를 올렸던 장소로 소원의 영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제승대라 불린다고 한다
옥류교를 지나 병풍소를 만난다
병풍소(屛風沼:718m:13:20)
뱀사골 계곡에는 여울과 소(沼)가 교대로 분포하여 수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沼)는 게곡물이 흘러가다 균열이 많이 생긴 약한 바위를 만나면 집중적으로 바위를 깎아
형성되게 되는데 뱀사골 계곡에는 간장소, 병풍소, 병소, 등 다양한 소가 존재하며 그 중에
병풍소(屛風沼)는 계곡물에 의해 깎인 모양이 병풍(屛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고도를 낮출수록 더위가 몰려온다...산 위에서는 약간의 추위를 느꼈는데...
병소(甁沼:13:25)
뱀사골 계곡에는 많은 명소들이 있는데 요룡대(搖龍臺), 탁용소(濯龍沼), 뱀소 등은 용이나
뱀에 관련된 병소(甁沼)는 소(沼)의 모양이 마치 호리병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금포교(13:48)
산수국도 滿開를 준비한다
탁용소(濯龍沼:13:57)
큰 뱀이 목욕을 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을 하나 이곳 암반위에 떨어져
100여m나 되는 자국이 생겨나고, 그 자국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탁용소 주위가 뱀사골 계곡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한다
와운마을이 가까워진 모양이다...뱀사골 계곡을 가로지르는 10개이상의 다리를
건넌 다음에야 와운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와운(臥雲)마을 갈림길(14:00)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와운마을은 지리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마을로 1595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鄭씨 일가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일제시대와 6.25동란때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목기를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1980년대는 한봉(韓蜂)으로 생계를 이었다
와운마을은 이곳에 도로를 따라서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하며 10여가구가
민박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데 과거에는 산골마을로 영화촬영 장소로도
유명했고 수령이 500~800년된 천년송(千年松:천년기념물 제423호)이 이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가 잘 나있어 옛 정취는 많이 훼손되어 버린 곳이다
와운마을 안내판
천신만고 끝에 뱀사골 자락에 있는 와운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하는데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 만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그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서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까지 12km,
장장 39여리의 물줄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선인대,오룡대, 뱀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리고 뱀사골의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와운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권작가(현오)님이 인월 택시 2대를 불러놨다.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산행에 비박팀으로 참석하신 목포에서 오신 부부팀이
자가용으로 뒷풀이 장소인 인월의 청국장집까지 모시겠다고 하여 연장자인 나와 남원에서 오신
고남님이라는 분과 이 분들의 차를타고 먼저 인월의 식당으로 향한다
인월의 청국장집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청국장집이다.
난 개인적으로 청국장의 냄새가 싫어서 잘 안먹는 편인데 이 집의 청국장은
냄새를 느끼지 못하면서 청국장 특유의 맛을내고 있어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곳에서 일부는 바빠서 먼저 가시고 서울팀과 비박팀은 뒷풀이를 끝낸 다음에
권작가를 비롯한 서울팀들도 남원에 있는 고남님의 자택으로 가고 나를 비롯한
수헌, 산으로님만 인월 터미널로 향한다.
이번 산행을 하면서 많이 사람들에게 민폐를 너무 끼쳐서 미안하다.
다들 고마웠습니다...특히 J3 이한검 대장님과 수헌, 현오, 산으로 후배님
고맙고 미안했습니다...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인월터미널
식당에서 10분정도 걸어서 인월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원래는 타고갈 버스가 백무동에서 나오는 18시 30분 막차였는데 앞차인 17시 50분
인월발 → 동서울 버스표를 바꾸어 놓고 터미널 대합실에 잠깐동안 멍때리기를 한다.
인월 터미널 버스 시간표
인월발 → 동서울 버스표
예상보다 40분 먼저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인월을 출발하여 함양터미널에 도착하여
10분 이상을 정차한 다음에 동서울 터미널로 출발을 한다.
이번 산행은 참으로 힘들게 산행을 했다.
멋진 사진하나 찍으려고 과욕을 부렸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여러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
오늘도 지리산이란 스승에게 또한의 가르침을 배운다.
자만하지 말라...겸손하라는 가르침을...
물에 빠진 카메라의 메모리 복원이 어려워 수헌님의 자료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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