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9년 12월 22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14km / 8시간 20분 소요(시간은 별의미 없음)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법계교-칼바위-갈림길-홈바위교-유암폭포-빙기막터교-장터목 산장
제석봉-통천문-천왕봉-천왕샘-조망바위-개선문-쉼터-법계사-로타리산장-광덕사교
생태탐방로-황경교육원 입구-중산리 탐방 안내소
☞ 소 재 지: 경남 산청군 시천면, 함양군 마천면
참으로 多事多難했던 己亥年의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구나.
개인적으로 힘들게 病魔와 싸우면서 한 해를 보낸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길...내가 조금만 버리고 비우면 될 것을 왜 이리도 아둥바둥살았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이런저런 걸 반성하는 의미에서 해가 저물기 전에 지리산에 올라
나 자신을 뒤돌아 보는 기회를가지려고 했는데 마침 사랑하는 후배 산꾼들이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을
천왕봉을 찍고해단식을 한다고 하기에 나 자신의 체력 테스트로 해볼 겸 따라 나서려고 산방에 신청을
했다마는 엄청나게 걱정이 된다.
행여 축하객으로가 아닌 짐짝 신세로의 천덕꾸러기 민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또 하나는 2017년도 3차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에 무박 산행을 하고는 해보지 않아
무박에 대한 모든게 걱정이고 뭘 준비해야 될 지 모르겠다.
산행 날짜가 동짓날이라 토요일날에 은사스님의 사찰과 지인스님들의 절집 몇군데를
설마 후배 산꾼들이 버리고야 가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을 벗어난 버스는 안성 휴게소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 I.C를
빠져나와 지리산의 오늘 산행 들머리이자 날머리인 중산리로 향하는데 인적이 드문 탓인지
가로등들은 졸고 있는 듯 하다... 잠시 후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나라 의류 혁명을
일으킨 문익점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지나는데 맞은편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문으로 불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 불교계의 큰 별이셨던 성철스님의
생가가 있었던 자리에 있는 겁외사(劫外寺) 는 동짓날 준비를 하는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버스는 20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1047번 좁은 지방도로로 들어 서는데 도로가 얼었는지 버스는
몇번이고 차체가 기우뚱거리더니 겨우 중산리 탐방지원센터앞 거북이 식당 주차장에 도착한다(03:55)
원래는 대형 차량은 이곳까지 오르지 못하는데 야심한 새벽이라 그런지 아니면 식당 쥔장의
막강한 빽(?)인지는 몰라도 그 바람에 30분 이상의 시간을 줄이는 셈이 되었다

산행을 시작하다(04:05)
버스에서 내리니 날씨는 생각보다 그리 춥지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 추위에 엄청나게(?) 약한
범여로서는 그야말로 천만 다행이다...버스 아래에 두었던 베낭을 꺼집어 내어 잠깐 정리하는
사이에 산꾼들은 벌써 천왕봉으로 향하고 있다...대간꾼들도 맥꾼들과 비슷하게 조급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 모양이다.

중산리 탐방 지원센터에서 산행을 허락한 모양이다

내사마! 야간산행은 돈주고 하라케도 안합니더

2014년도 1월 1일에 이 구간을 걸었으니 참으로 오랫만에 온 셈이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한 반달곰 녀석이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는듯한 모습이다
전에는 지리산 어느 코스를 걸었던 간에 1년에 2번 이상은 지리산 골짜기를 헤집고 다녔는데
지금은 힘들고 지저분한(?) 맥길의 魔力에 빠져서 자주 오질 못하는 편이다

법계교(法界橋:04:10)
법계(法界)란 크게 나누어 세계·우주 전체와 진리 그 자체인 진여를 의미하는데 이 둘을 종합하면
인과(因果)의 이치에 지배되고 있는 범위를 뜻하며 원래는 18계의 하나로서 의식의 대상인
법경이나 대승불교의 진여(眞如)· 법신(法身)과 같은 말인데 이 다리의 이름은 법계사로 가는 다리라는 뜻일게다

법계교를 지나니 통천길이라는 조형물이 나오고 야영장이 나온다.
후배산꾼들은 진작에 가버리고 내 뒤에는 오늘 나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배대장 이외는 아무도 없다
오늘 산행은 이 친구의 든든한 빽 때문에 왔는지도 모른다...베낭이 무거울까 내 아침까지 준비해왔단다.
이곳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알려진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의 추모비가 있는 곳이라
참배라도 하고 갔으면 좋으련만 후배들에게 민폐가 될까봐 입맛만 다시고 그냥 지나친다.

우천 허만수 추모비...사진 펌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선생은 진주출신으로 10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해방 후 귀국하여 진주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살았지만 늘 몸과 마음은 지리산에 있었다.
일본에서 결혼한 부인 전경림 여사와의 사이에 딸 셋을 두었지만 결국 지리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세석 고원에서의 갈대와 거적으로 움막 생활을 시작으로 가끔씩 진주를 걸어서 들러는 것
외에는 오직 지리산을 사랑하는 산사람으로서의 일생을 걷게 된다.
산에 살면서 그냥 지내기 보다는 당시에 산을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등산로를 만들기로
하고 험난한 곳에는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놓아 오르내리기 편하게 했으며 산을 멋모르고 찾았다가
낭패를 당하는 조난객들을 구하는 일까지 우천선생의 손발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1976년 6월 60세가 되던 해에 정든 세석의 철쭉꽃을 뒤로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당시 가까이 지내던 산악인들에게 “이제 지리산으로 영원히 들어가니 한 달 내 오지 않으면 내 소지품을
모두 불태우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뒤로는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그가 칠선계곡, 거림골, 도장골 또는 신선너덜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리라는 추측만
무성할 뿐 늘 지리산과 벗하던 그의 최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첫번째 구조 이정목을 만난다.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고도가 약 700m정도이니 정상까지 가려면 고도를 1,200m이상을 올라야 한다
그래 못가면 말지 뭐...오늘이야 목적 산행도 아니고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아니면 일기예보에 흐린날씨라는 예보 탓인지는 몰라도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내 뒤에는 후위무사(?) 배대장의 렌턴 불빛과 나의 거친 숨소리 뿐이다
계속되는 오르막을 걷다가 보니...어둠속에 칼바위가 보인다


칼바위(刀岩:800m:04:45)
어둠속에 뾰족한 바위를 만나는데 칼바위란다
하늘을 향해 칼날처럼 뾰족하게 생겼는데 원래는 하나였으나 번개를 맞아서 쪼개졌다고 한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면서 돌길을 걸어가니 갈림길이 나오고 먼저간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갈림길(04:48)
좌측으로 가면 장터목 대피소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오늘 백두대간 졸업산행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벤트 산행팀은 법계사로 향하고
나머지는 장터목 대피소 구간으로 향한다

어둠속에 걷고 또 걷는다
급경사의 오르막도 오르고 암릉길도 만나고 보이지 않는 계곡의 물소리가 너무좋다.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는걸로 봐서는 이곳 어디쯤에 법천폭포가 있을법한데 야심한
새벽이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간다.
직폭(直瀑)인 법천폭포는 높이가 15m정도로 법계사쪽에 흘러 내려오는 지류(支流)에
위치한다고 해서, 즉 법계사 쪽에 수원(水源)을 두었다고 해서 법천폭포라 부르는데
실제로는 장터목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 본류(本流)에 위치하고 있다.
서서히 고도를 높히기 시작하는데 앞서가던 류소운님을 만난다.
예전의 엄동설한에 각호산,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을 개고생을 같이했던 분인데 참으로
오랫만에 만났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탓일까...얼굴이 몰라보게 변해 버렸다.
대포(카메라) 한대 메고 신선대에 올라 하늘을 지붕삼아 홀로 비박하시는 內工이
정말 대단하신 산꾼이다

어둠속 너덜겅에서 앙증맞은 돌탑들을 만난다.
민족의 영산(靈山)인 지리산에 오르면서 소원하나 안 가진 산꾼이 있으랴.
오늘 범여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후미대장 태양은 형님이 불편할까봐 아예
멀리 처져 있는데 정말로 미안하다...따라 나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늘 앞에서 쏜살같이 가는 넘이 얼마나 답답할까.
이 너덜겅은 어둠속에 보는데도 규모가 대단히 커서 마치 백담사앞의 계곡을 연상케 한다.
천왕봉 남서쪽에 위치한 이 너덜겅은 천왕봉 사면의 암석들이 떨어져 나와 급류에 떠밀려
쌓이면서 산비탈이 아닌 계곡 중앙에 형성된 것으로 그 길이만도 500m가 넘는다고 한다.

홈바위교(06:02)
빡센 오르막길을 따라서 한참 고도를 끌어올려 어둠속에 도착한 곳이 홈바위교이다
길이가 30여m정도로 누워있는 화강암인데 마치 가운데가 홈통처럼 파여서 붙혀진 이름이라는데
똑닥이 카메라로 잡으려고 하니 후레수 불빛이 약한 탓인지 잘 잡히지 않아 포기한다
다리를 건너면서 다시 돌이 깔린 등로를 따라서 호젓하게 걷는다
오늘따라 바람한 점 없는 적막감이 감돌 정도의 지리산 길이다.
걷는것도 수행의 한 방법인 포행(布行)이라 생각하며 장터목 대피소를 향해 걷고 또 걷는다


유암폭포(油岩瀑布:06:12)
등로에서 살짝 우측에 있는 폭포의 물줄기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이름하여 유암폭포란다...어둠속이지만 그리 크지는 않으나 물줄기는 흐른다
10여m 남짓한 매끈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라 폭포라는 느낌은 덜한 편이다
지명은 미끌미끌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라 ‘기름 유(油), 바위 암(岩)’라는데
1998년 지리산 대폭우 당시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들이 매워져 버려 폭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곳이 되어 버렸다

빙기막터교(06:35)
빙기막터교를 지나면서 처음으로 휴식을 취한다
태양아우님과 동행한 류소운님...따뜻한 커피 한잔에 휴식...그야말로 꿀맛이다

다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1km 남짓한 거리를 고도 150m 이상을 치고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길이 쥐약인 범여로서는 苦行의 길이다...시간 지나면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겠지

아침 7시 15분이 지났는데도 어둠속이다...하기사 1년중에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冬至)가 아니던가
앞은 컴컴하지만 뒤돌아보니 여명(黎明)이 시작된다

갑자기 날이 밝아지고(07:25)...장터목대피소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장터목대피소 지붕이 보이고 山客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중산리를 출발한 지 3시간 10분만에 장터목대피소 도착한다.
장터목 대피소에는 다행히 바람한 점 없는 포근한 날씨이지만 날씨는 잔뜩 지푸려 있어
애초부터 일출을 기대하기는 무리일 듯 싶으나 가시거리는 생각보다 좋다

장터목 대피소(07:35~08:05)
인근에 있는 화개재와 함께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장터였던 곳이다
화개재는 하동의 해산물과 소금등이 남원의 운봉과 산내면의 내륙 특산물이 거래됐던
장터라면 이곳 장터목은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의 장터였다
그 당시 험한 지리 능선을 올라왔던 민초들의 수고로움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우리 선조들의 수고로움으로 인해 우리 후손들은 편하게 잘먹고 잘사는 거 아닌가

선조들의 애환이 서린 장터에는 물물교환에 쓰이는 농산물 대신 공사자재들만 어지럽게 널려있고,
그 너머로 여인들의 엉덩이처럼 생긴 반야봉과 지리산 서북 능선의 댓방인 만복대도 시원스레 보인다
장터목 대피소 취사장으로 들어서니 식사를 끝내고 천왕봉으로 간 산꾼들도 있고 가려는 산꾼도 보인다
어차피 나야 대간 산행도 아니고 지리산의 氣를 받으러 온 들러리 산꾼이니 일찍 간들 뭐하며 늦게
간들 뭐하겠는가...사실 난 베낭 무게를 줄이려고 컵라면 하나 달랑 가져왔는데 그것마저도 개봉 안했다.
오늘 대간의 대장을 맡고있는 리더 보스대장의 축하객인 손칸이라는 젊은 산꾼이 끓여주는 사골탕에
젓가락만 가지고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원두커피까지...완벽하게 앵벌이를 했다.
손칸님!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천왕봉을 향해서 다시 길을 나선다(08:05)

뒤돌아 본 장터목 대피소의 모습

장터목에서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은 너무 가팔라 심장이 터질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
쉬고 또 쉬면서 소걸음(牛步)으로 쉬엄 쉬엄 걷다가 뒤돌아 보니 지리산의 주능선과
남부능선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날씨는 잔뜩 흐리고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시야는 좋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파서 능선을 살짝 벗어난 곳에서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리산에서 범여의 영역을 표시한 셈이다...ㅋㅋㅋ

지리산 가는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지리산 주능선의 모습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라는 서산대사의
비유가 있듯 지리산은 날카롭고 빼어남은 부족하나 웅장하고 두리뭉실한 기운이 돋보인다.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천 5백m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남명 조식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 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다.방장산(지리산)의 솔잎이 푸릇푸릇 다함이 없으니
만번 죽어 마땅한 신(臣)이
이것으로 여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남명 선생의 제자이자 범여의 고향(의령)출신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억울한 옥살이를 한 후에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 사절하면서 남긴 말 中에서

身外更無餘(신외갱무여): 몸 밖에 남는 것 없네.
四大終離山(사대종리산): 사대가 종내 흩어지니
快如登太虛(쾌여등태허): 상쾌하기가 마치 허공을 오르는 듯하구나.

제석봉(帝釋峰:1,806m)에 이르는 길에서 만난 고사목(枯死木)이 산꾼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지리산의 아픔...언제쯤 치유가 될까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한 존재인가보다

제석봉(帝釋峰:1,806m:08:45)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천왕봉이 훤히 보이고 사각 전망대가 있는 곳에 제석봉이란 팻말이
보이지만 실제 제석봉 정상은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제석봉 정상이다
시간이 있으면 제석봉 정상으로 오르고 싶지만 맨 꼴찌로 가는 주제에 焉敢生心이다.
얼마전에 수헌아우는 제석봉 정상까지는 가지 못했고 제석단까지 같다 왔다고 했는데
“현오와 걷는 지리산”의 저자 현오 권태화님은 갔다 오셨는지 모르겠다
언제 다시 지리산을 찾는다면 제석봉 정상까지 갔다 오리라

제석봉 등로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의 모습

등로 아래로는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중산리와 그 우측으로 보이는 거림골.
저 어디쯤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산천재(山天齋)가 있겠지
조선 성리학의 영남학파 巨頭였던 남명 조식선생
퇴계 이황과 함께 ‘좌퇴계 우남명’ 으로 불렸던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 자락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퇴계 이황의 근거지였던 안동과 예안은 경상도 좌도의 중심지였고, 남명 조식은
합천과 김해, 진주는 경상도 우도의 중심지로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 으로
나뉘어 졌다.
퇴계 이황은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남명조식은 우뚝솟은 지리산의 기상을 닮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이황과 조식을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규정하면서
“상도(上道)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는 의(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두 사람의 기질을 대비했다
平生事可噓噓已(평생사가허허이):평생의 일들에 한숨만 나올 뿐인데
浮世功將矻矻何(부세공장골골하):뜬 구름같은 세상 부귀공명 힘써 무엇하나.
知子貴無如我意(지자귀무여아의):알겠노라, 그대는 귀하여 나 같은 뜻 없음을
那須身上太華誇(나수신상태화과):어찌 몸이 화산에 올라 과시해야만 하는가.
남명 선생의 漢詩...만성(漫成)

천왕봉을 배경으로 인증샷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간간히 눈이 보이지만 손만 시릴뿐 그리 춥지는 않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
.
.
.
(중략)
.
.
.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천왕봉가는 길에서 바라본 지리산 남부능선 대성골과 의신 가는 능선의 모습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버린
民草들의 흐느낌이 70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제 모든걸 잊버리고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마시고 부디 西方淨土로 가시길...
부디 왕생극락 하옵시고.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눈이 약간 있기는 하나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에 도착한다

통천문(通天門:09:25)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결국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이 문을 지나 하늘의 임금이 살고 있다는 천왕봉 이라는 하늘나라가 있다면
이럴것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스럽고 아름다운 곳임은 분명해 보인다

시인 고은님은 통천문을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고 했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니 우리 인간들이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통천문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巖刻畵)

통천문에서 바라본 제석봉(帝釋峰:1,806m)의 모습
제석신(帝釋神)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帝釋天神)은 도리천(忉利天 )에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천왕봉(天王峰:1,915m)과 중봉(中峰:1,874m)에 이어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로
봉우리 근처에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고, 그 옆에 늘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제석봉 일대 약 33만㎡의 완만한 비탈은 고사목으로
뒤덮여 있으며, 나무 없이 초원만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 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잣나무·구상나무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애려고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큰 산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지 않거나, 많은 일화를 담고 있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차원이 다른데 산이 크다고 산국(山國)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듯이
지리산의 품새는 세상사를 보듬는 포용력이 뛰어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산이라 했겠으며, 지리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은 일이 없다 했겠는가.
이러하기에 지리산은 자연환경을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산국의 역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매번 지리산에 와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벅찬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다가오는 산이다.
흔히들 지리산을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같아 여자들의 산이라고 표현하지만 난
장쾌하고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의 산이라 부르고 싶다.
골짜기마다 슬픈 역사와 동족상쟁의 아픔을 가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지리산의 큰 가르침을 왜 인간들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도 여의도에 있는 흉물스러운(?) 건물 안에서 명색에 국가 지도자라는 인간들이
민초들의 안위에는 털끝만큼도 없고 오직 자기 밥그릇을 위해 피터지게 싸우는
저 인간들은 지리산에는 와 보지 않았겠지...언제쯤이면 저짓거리 안 볼라나...

3代가 德을 쌓아야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을 볼 수 있다는데 범여의 덕이
부족한 지 일출은 보지 못했고 짙은 구름속에 가려버린 해는 흐릿하기만 하다

지리산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울 엄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하고 내가 사랑했던 여인같은 산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늘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여유로움
언제든지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안아주는 여유로움을 가진 산
그런 지리산은 옛날 신선이 내려와서 살았다는 삼신산(三神山: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중의
하나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사는 산”의 뜻이라는 지리산(智異山),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에서 맥이 뻗어 내려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란 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소(沼)를 품은 산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1967.12.29)으로 지정되었고 쌍계사와 화엄사, 실상사
대원사 등 수많은 고찰들은 품은 산, 또한 남.북으로 분단된 이데오르기의 산물로
빨치산이라 불리는 조선인민군 유격대의 근거지가 되어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이데올르기의 제물로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의 영혼을 감싸안은 슬픈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 서북쪽 능선을 바라보니 오늘따라서 왠지 남원으로 귀촌한 젠틀맨님이 보고 싶다
아마도 보이는 저 어디쯤일 것이다...박여사님과 뭉치(젠틀맨 집의 개 이름)도 잘 있겠지

천왕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길...숨이 멎 어버릴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천왕봉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반야봉(般若峰1,734m)
반야봉은 지리산 10경중 제3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산이다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기궁뎅이 처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 뜻은 '절대 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를 닦았다.
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 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완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한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칠선계곡 가는길
등로는 희미하고 목책에 가려져 있으며 예전에 없었던 CCTV도 보인다

북쪽으로 바라보니 함양땅 너머로 남덕유산과 덕유산이 아련히 보인다
함양땅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였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고향이다
함양은 안동 더불어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정여창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당하였으나,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칭송됐던 인물이다

천왕봉이 눈 앞에 보인다

천왕봉 우측 아래에 있는 암릉들

천왕봉 가기 직전의 바위에도 ‘通天門’이라는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다시 천왕봉으로 향하는데 정상 아래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天柱’가 새겨져 있다

남한에서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으며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있다.
정상에는 1982년에 경상남도가 세운 높이 1.5m의 표지석에 ‘慶南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로
쓰였는데 지금은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로 바뀌었다
함양 방면으로는 칠선계곡을 이루고, 산청 방면으로는 통신골·천왕골(상봉골)을 이루어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지며 암릉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항상 구름에 싸여 있어 예로부터
3대에 걸쳐 선행을 쌓아야 이곳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이며,
지리산 10경 가운데 제1경이 천왕일출일 만큼 해돋이가 아름답다. 정상에 1칸 크기의 돌담벽이 있고,
그 안의 너와집 사당에 성모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빨치산에 의해 파손된 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고정상 아래에는 큰 바위 틈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천왕샘이 있다.

인증샷
천왕봉 정상석도 많은 변천을 겪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예전 사진을 보면 1960년대 나무 기둥 같은 것에 천왕봉이라고 한글로 표기하여 세운 것이 있었다.
그 후 진주산악회에서 세웠다고 하는 오석(烏石)에 앞면에는 ‘天王峰‘, 뒷면에는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라는
남명의 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정상석이 1982년 경남도지사 이규호와 당시 민정당 실세였던 권익현이
지금의 정상석을 세우면서 뒷면에 '慶南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썼다가 후에 여차여차한 이유로
'嶺南人'으로 바뀌었다가 언젠가 지금의 '韓國人'으로 다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자 현오 권태화님의 “현오와 걷는 지리산”의 책 471P 인용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본 북동쪽 능선의 모습
코 앞에는 몇년전에 걸었던 덕천(웅석)지맥 능선과 지금 걷고 있는 양천(정수)지맥
너머로 합천 황매산이 아련히 보이고 그 너머가 내고향 의령인데 의령땅의 자굴산은
너무 먼 탓이지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내가 고향땅을 떠난지가 어언 45여년이 지난 탓인가...고향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가야할 중산리 계곡 너머로 육안으로는 진주시내까지 아련히 보인다

천왕봉 정상에서 오랫만에 만난 MK, 류소운님, 사이먼님, 유나님과 아침을 앵벌이한
손칸 패밀리 등과 느긋하게 천왕봉 정상에 머물다가 중산리로 향한다
10번도 넘게 천왕봉을 올랐지만 바람과 눈이 없이 편하게 천왕봉에서 보낸 건 처음이다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바람이 없어서 너무나 좋았다

급경사의 내리막 계단을 내려서니 천왕샘이 나온다

천왕샘(天王泉:10:08)
바위 사이로 흘러 내리는 石間水 한바가지를 마시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지리산 천왕샘은 남강의 발원지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표지판이 사라졌다
남강 발원지는 이곳 천왕샘이 아니고 남덕유산 서쪽 사면에 있는 참샘에서
발원하여 덕천강과 합해지고 진주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함안천과
합해진 다음에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에 있는 기강나루
앞에서 낙동강으로 흡수되는 강이다

예전에 있었던 천왕샘 안내판
남강 발원지가 아닌 걸 알았는지 안내판이 사라졌다

조망바위(10:10)
조망바위에 서서 내 고향 의령땅을 바라 보면서 올 한해 내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아쉬움과 悔恨이 남았던 한 해였지만 그만큼 열심히도 살았던 한 해였다.
지난해 여름 수술대에 올랐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지리산에도 오르지 않았는가...
이제 모든걸 내려놓고 순리대로 살아가련다...그러기에 오늘 지리산에 의미도 다른때와 다르다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천왕봉 아래서 다가오는 벅찬 감동...범여! 무엇으로 표현하리.
채근담(菜根譚)에는 ‘높은 데 오르면 사람의 마음이 넓어진다(登高 使人心曠)’라고 했으며,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지 않았나 싶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바람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
숫타니파타의 명언 중에서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이어지는 등로는 지리산에서 가장 까탈스러운 구간이다.
주봉인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코스이지만 가장 급경사의 코스이기도 한 곳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급경사의 코스에 예전과는 달리 인위적인 구조물들이 많아 예전처럼
짜릿한 맛은 덜한 편이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낙석 때문인지는 몰라도 등로가 많이 변형되어 있는 느낌이다

한참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개선문 바위가 나온다

개선문(凱旋門:1,700m:10:24)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뜻으로 開天門이라고도 부르는 개선문은 서쪽 통천문과 더불어
천왕봉을 오르는 주요 관문으로 원래는 좌우에 비슷한 높이의 바위 기둥이 있었으나
왼편 기둥이 벼락을 맞아 무너졌다고 한다.

쉼터(10:32)
앞서가던 류소운님, MK대장, 이쁜 윤하님과 사이먼님이 휴식을 취하는데
MK대장이 이슬이를 흔들면서 쥐약 한 모금 하라고 하는데 마음뿐이다
예전에 내 키만한 베낭을 메고 겁없이 다녔을 때가 좋았는데...
쉼터 평상 앞으로 옛날 천불암터와 법계사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청계산 아래 옛골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하문인이었던 이륙(李稑:1609~1640)은
그의 저서 「지리산기(智異山記)」에 “천왕봉 동쪽에 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으며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이름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륙이 말한 천불암터가 바로 이곳인데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등로 바닥이 전부 돌이라 무릎의 통증이 그대로 전해진다.
인위적인 길이 너무 싫다...그러기에 있는 그대로인 지맥길이 딱 내 스타일인 모양이다

암릉구간의 등로라 상당히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산이나 권력이나 항상 내려올 때 조심하라 했는데 그 名言을 인간들만 모르는 모양이다.
權不十年이요 花無十一紅이라 했소이다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맞은편 봉우리 옆구리에 불거져 나온 암릉이 보이는데 문창대란다
문창대(文昌臺)는 고운 최치원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 곳이라는데 1979년 10월 진주산악회
학술조사에서 문창대는 저 곳이 아닌 법계사 서북쪽 30m 지점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崔孤雲 杖屨之所(최고운 장구지소: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 두었던 곳)’ 라는
문구가 암벽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갑자기 급한 전화가 와서 전화 통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같이 내려가던
산꾼들은 도망(?)을 가버리고 나홀로 중산리까지 홀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법계사 입구에 도착한다

법계사(法界寺:11:05)
법계사는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있어 천왕봉을 오르는 전초기지 같은 곳이다봉안하여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연기조사는 신라말의 스님이라는 기록이 있어 단지 전해 내려오는
기록일 뿐 법계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阿只抜都)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태종 5년(서기 1405년) 을유년에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께서 중창하셨다.
그 후 임진왜란과 서기 1910년 한일합방때 또 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무인년)에
청신녀 신덕순씨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동란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그간 초라한 초옥
으로 3층석탑을 지켜오다 불자와 신도님들의 발원으로 현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옛 유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인 3층 석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법계사는 고려 우왕 6년(1380) 9월에 이성계에게 황산대첩(남원 운봉지역)에서 크게
패한 왜군이 추성 통로로 후퇴하면서 분풀이로 천왕봉 성모상을 칼로 찍고 법계사마저
불태웠다고 하며, 또한 1908년 항일의병 박동의 부대가 덕산에서 왜군에게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하여 일본군에 다시 맞섰지만 결국은 패하고 일본군이 불을 질러 또 다시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와같은 역사적인 맥락인지는 몰라도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법계사가
없어져야 일본이 흥하는다는 숙명적인 말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법계사 적멸보궁에서는 동지 사시(巳時)중인지 부전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올라가서 참배도 하고 기도에 동참하고 싶지만 대간 졸업팀은 아니다마는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기도 하고 꼴찌로 가는 주제에 눈치 보일까봐서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중산리로 향한다

로타리대피소(1,335m:11:08)
법계사 바로 아래에 있는 로타리 대피소...1972년에 부산 로터리클럽이 세운 산장이란다.
오늘은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그리 많지 않다

로타리 대피소에서 망바위쪽이 아닌 순두류 계곡쪽으로 향한다

망바위쪽 등로보다는 조금 유순한 편이나 엄청나게 지루한 곳이다

앞서가는 MK대장 일행은 보이질 않는구나...이쪽으로 가기로 했는데 저쪽으로 샜나?

급경사의 계단을 내려와서 계곡을 건넌다

광덕사교(11:28)

지루한 등로 탓인지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헐~~~ 아직도 순두류가 1.7km나 남았다니...

계속되는 내리막길

구름다리도 건너고...

계곡도 지나 호젓하게 나홀로 걸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순두류(淳頭流)
순두류는 해발 900m의 지대에 경사 10도로 전개된 3만여평의 완만한 경지를 말하는데
이름 그대로 두류산(頭流山)의 지세가 순하게 흘러서 산 속의 평원을 이룬 곳으로, 가파른
연릉이 사방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특이한 지세이다

순두류길에는 울창한 낙엽송의 숲이 하늘을 찌를듯이 펼쳐진다
순두류의 낙엽송길은 지리산 안에서도 보기 드물게 조림이 잘 된 지역으로
가을철의 금빛이 물 들때가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한다

뭐야!~~~아직도 3.4km가 남았다니...

생태탐방로(12:00)

태양 대장 아우한테서 전화가 온다
어디냐고...

환경교육원 입구(12:05)

경상남도 환경교육원 표시석과 위령비 버스 정류장이 있다
환경교육원 입구쪽에서 렉스턴 RV 차량이 나오고 버스 정류장에 있던 등산객이 타기에
좀 태워 달라고 하니 매몰차게 안 된다고 하면서 가버린다
이곳은 마치 용대리에서 백담사로 이어지는 곳과 같이 일반 차량이 통제되는 구역이니
저 자들은 필시 이곳에서 갑질하는 자들이거나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일텐데 빈 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간다...인간들 하고는 情은 전당포에 잡혀 먹었나...

버스 시간표를 보니 11:30, 13:40분에 차가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예전에는 손님이 많아 수시로 차가 다녔는데 지금은
손님이 너무없어 하루에 차가 6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도로를 따라서 걸어 가는데 3.4km라고 하는데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니 40분 정도면 중산리에 도착하겠지... 무작정 걸어간다

苦

窮하면 通한다고 했던가...
도로를 따라서 걸어 가는데 환경교육원에서 토목 공사를 마치고 간다는
승합차 한 대가 내려오기에 손을 드니 차를 태워준다... 5분정도 내려오다가 보니
아뿔싸! 급하게 차를 타느라 전화기가 호주머니에 빠져 버렸다.
사정을 하여 다시 차를 돌려서 올라가니 도로 가운데 떨어져 있는게 아닌가
핸폰을 찾아서 다시 중산리로 내려 오는데 식당가에서 내리면 버스기사와
택시 기사들이 지랄을 한다고 하면서 주차장 오기전의 도로에 내려 주면서
연신 미안해 하는 바람에 내가 더 미안했다
창원에 사신다는 중년 기사 양반!...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중산리 탐방 안내소(12:35)

貴人의 도움으로 식당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고 후배 산꾼들의 해단식에 동참한다

에파타님 사진 인용
'♣ 일반산행 ♣ > 梵如의 山行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 아래 첫 절집 지리산 묘향암에서 1박2일(2) (0) | 2021.06.25 |
---|---|
하늘 아래 첫 절집 지리산 묘향암에서 1박2일(1) (0) | 2021.06.22 |
亡國의 恨을 간직한 청계산 (0) | 2019.12.10 |
영실탐방 안내소에서 어리목 탐방 안내소까지 (0) | 2019.12.05 |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했던가? (0) | 2018.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