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면 마을 지명유래
화지리
- 임진왜란때 오미(고산리)에 터를 잡았던 파평인 윤문(1547-1628)의 후손들이 18세기에 개척한 마을로 지형이 매화가지 처럼 생겼고 마을 앞 유등천에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목화재배도 성하여 화지라 칭함.
고산리
- 이곳 동신제문에 의하면 진주강씨가 이곳을 개척하였고 그 후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파평인 화음윤문(1547-1628)이 이곳에 내려와 살다가 마을 앞 들 가운데 외딴산을 독산 또는 오미봉이라고 하는데서 마을 이름도 독산 또는 오미라 칭함 1850년(철종1)에 고산으로 개칭.
성평리
- 고려 충선왕때 정승 예천부원군 권한공과 그의 아들 조선 태종때 영의정 예천백 권중화 등의 집이 이곳 후평에 있어서 삼정승 팔달관이 나왔으므로 삼덕팔달을 칭송하여 덕달이라 칭함. 그후 18세기 전반에도 순흥안씨가 들어왔다. 1840년경에 경주이씨가 고산동에서 성지버들로 옮겨와 살면서 성주동이라 하다가 덕달로 이거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평동과 고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성주와 후평의 이름을 따서 성평이라 칭함.
광전리
- 임진왜란(1592)전 가평인 이춘백이 이곳에 피란와서 살때 넓은 평원이 손기리까지 뻗쳐 있었다 하여 넓은 밭이라는 뜻으로 너밭(광전)이라 함.
- 병자호란(1636)후 서울에서 피란을 온 참판공 송계당 남양 홍만적(1660-1733)이 다시 개척하여 광전이라함.
손기리
- 1462년(세조8)에 예안인 김자가 개척하여 뒷산에 향기로운 손초(난의 일종) 가 많아서 손골(손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동과 장기를 병합하여 손기라 칭함.
수심리
- 원래 지만사가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1592)을 전후하여 김해김씨가 지만사 근처 산위에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곳은 화기가 있어 불이 자주 일어나므로 그 산아래 물이 깊게 괸것(수심)같은 지형을 찾아 음지쪽으로 마을을 옮겨서 음지마을이라고도 하고 물이 불을 이긴다는 오행설에 따라 무리피라(수심)함. 1730년(영조6)경에 무리피의 후손이 지만사 터에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지만이라고 함.
송전리
- 솔밭(송전)에서 가장 일찍 사람이 살았고 솔밭 또는 송전이라 함. 18세기초에 인동장씨들이 지심을 개척하였고 18세기 후반에 영일 정씨들이 명당곡을 개척하였음. 도한 18세기 말에 영일 정씨가 새마을을 개척함.
중평리
- 18세기 초 파평윤씨가 개척하여 넓은 들판 가운데 이루어진 마을이어서 중평이라 함.
죽안리
- 임진왜란(1592년) 청송으로 피란온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후 18세기 중엽에 경주 최씨가 청송에서 이웃한곳에 또 대나무 숲을 헤치고 개척하여 이랑이 긴밭을 이루고 장평이라 함.
- 그 후 평해 황씨가 죽안을 개척함. 대나무가 언덕에 많다하여 죽안이라 칭함.
마천리
- 18세기 전반기에 남원양씨와 청송인 심사도가 개척하여 삼(마)이 많고 마을 중앙에 내(천)가 흘러 마래(마천)아라 함 또한 국사봉 남쪽 아래에 있어 뫼아래라고도 하고 뒷골에는 여러 갈래의 내(천)가 삼단같이 흐르기에 마천이라고 불림.
화전리
- 임진왜란(1592)때 영월인 엄천 손이 가족을 데리고 피란와서 개척하여 목화가 잘되어 화지터(화전)아 하였으며 본래 예천군 지서면 화전동 지역으로 1914년 이후에 화전이라 칭함.
사곡리
- 동쪽 절골에는 사찰이 있었으며 그 후 최씨 최흥문과 함녕김씨가 기묘사화(1519)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사곡 또는 돌개라 불렀다. 그 후 抑佛의 영향으로 사곡이라 바꾸어 칭함.
고림리
- 신라시대 당동현 개척당시 수원백씨가 개척함. 개척당시 수목이 짙어 다래넝쿨을 헤치고 정착하였다 하며 높은 나무숲이 우거졌다하여 고림이라 전한다.
송지리
- 임란 후 지금의 마을입구에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으나 200여년전 정자가 소실되자 재건을 염원하던 것이 유래가 되어 망정이라 하였고 솔안은 송지의 안에 있다하여 지어진 자연부락임. 본래 당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송내, 지곡, 망정, 율현, 문경 흑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내와 송지의 이름을 따서 송지라 칭함.
율현리
- 고려말에 조씨가 이곳에 마을을 개척하여 조동이라 불렀고 조선 세종때 장흥인 임귀지(1422-1508)가 다른 곳을 개척하면서 중국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율리를 따서 둔율리(遯栗里)라 하다가 세조때 율현으로 개칭
연천리
- 18세기 후반에 개성고씨가 개척하여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보인다 하여 연화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못이 1845(헌종11)년 매몰된 후부터는 모산이라 불렀다.1914년 한천동을 병합하여 연천이라 불렀다.
용암리
- 19세기 전반에 영월엄씨가 용암을 개척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장흥임씨가 종산을 개척하였음.
- 본래 당동면 용암동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유천에 편입되어 용암으로 불림.
초적리
- 충주 지씨가 처음 개척하였고 1581년(선조14)에 경주인 최득수가 산북면 원곡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개포면 우두원과 머글바 사이에 넓은 풀밭(초원)이 있었는데 그 풀밭위에서 신선들이 피리(적)를 불고 놀았고 그 피리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하여 "푸적골" 또는 초적이라 함.
매산리
- 17세기 후반 남양인 퇴곡 홍씨가 영월부사로 있다가 이곳에 와서 퇴치라 하였고 18세기 초에는 반남인 박선원이 화장에서 이곳에 와서 매산이라 함. 퇴치는 1974년 비행장부지로 들어갔음.
가 리
- 국사봉에서 산줄기가 이곳까지 뻗어왔는데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상(와우형)과 같고 소의 가리뼈에 해당되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가리골이라 했으며 경치가 산고수려하여 가곡리라 함.
- 17세기 전반기에 진주인 강홍제(감찰)가 개척하여 가리곡이라 부르다가 가동리가 됨.
개포면 마을 지명유래
- 내성천(乃城川)과 한천(漢川)이 개포면의 남동쪽으로 흐르고, 면적이 36㎢, 예천군 남서부에 위치한다. 구한말까지는 용궁군(龍宮郡) 북상면의 풍정(楓井), 송포(松浦), 입암(立岩), 봉산(鳳山), 갈마(葛麻), 봉암(鳳岩), 종산(宗山), 장화(長化), 적현(赤峴), 송동(松洞), 성도(盛島), 가산(加山), 황산(黃山), 신천(新泉), 보수(保守), 가오(佳五), 원곡(元谷), 화산(化山), 송계(松溪), 신기(新基), 화음(化陰)과 구읍면(舊邑面)의 지동(紙洞), 대은(大隱) 일부와, 지금 금동으로 불리는 예천군 노포리면(蘆浦里面)이 철종 때에 옥개동(玉開洞)의 “개”(開)와 노포(蘆浦)의 “포”(浦)를 합하여 「개포면(開浦面)」으로 개칭되었으며, 신기, 도장(道莊), 우감(牛甘), 승동(蠅洞), 동송(冬松), 지동(池洞), 경진(京津), 금동(琴洞), 옥동(玉洞), 소옥(素玉), 검암(劍巖), 이사(伊四), 상리(上里) 등을 관할하였다.
- 한때는 관내(管內) 상리면(上里面)에서 발원한 한천(漢川)과 봉화군(奉化郡)에서 발원한 내성천(乃城川)이 북(北)쪽에서 흘러와서 경진리(京津里)에서 합수(合水)하여 갯벌 주변 갈대가 장관(壯觀)을 이룬다 하여 노포리면(蘆浦里面)이라고 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이 두 지역이 금동, 경진동, 동송동, 이사동, 우감동, 신음리, 가곡리, 황산리, 장송리, 입암리, 갈마리, 풍정리, 상동의 13개 리,동으로 개편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상동이 예천읍으로 이관되면서 12개의 리,동이 되었고, 이 무렵 입암리와 갈마리의 대부분이 특수부지로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동(洞)을 리(里)로 바꾸었다.
- 농지(農地)는 전면적의 41%인 14㎢이며, 승두산이 218m로 가장 높아서 산지(山地)가 없고 거의가 구릉지이면서, 동(東)으로는 예천읍과 호명면, 남(南)으로는 지보면, 서(西)로는 용궁면과 문경시 산북면, 북(北)으로는 유천면과 접하여 있다.
- 관광자원으로는 가오실지(佳五室池)가 있고, 특산물은 개포풋고추, 수박, 오이, 풋호박이 유명하다.
가곡리(佳谷里
- 가오실(佳五谷, 佳五)가곡리(佳谷里)에서 으뜸되는 마을, 경치가 아름다워서 지중소도(池中小島), 침하오천(枕下嗚泉), 용산명월(龍山明月), 풍각숙운(風崗宿雲), 두가수오청(杜佳樹五淸)의 오경(五景)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가오리(佳五里)라 한다.송담(松潭), 송계(松溪)영양(英陽) 남씨(南氏)이 사는 마을로 마을 앞에 우거진 큰 소나무숲이 있고, 그 숲 아래 못이 있는데, 그 못물이 흘러 개울이 된곳에 마을이 있어 마을 이름을 송담(松潭)또는 송계(松溪)라 부른다. 어룡(魚龍)의 남(南)쪽에 있다.
- 1549년 본관(本貫) 가평(加平) 호(號) 상심헌(賞心軒) 이경백(李景伯)이 개척한 가평이씨(加平李氏) 집성촌(集成村)이다.
- 어링이, 어룡(魚龍)300년간을 한씨(韓氏)만 사는 마을이며 뒷山은 용머리같고 앞산은 물고기 머리같다고 하는 곳에 생긴 마을이다. 어룡산(魚龍山)밑 매봉대의 샘 자리에 1930년대에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어 어룡(魚龍)이 함께 서식할 터를 만들었으며 농업용수(農業用水)로도 쓴다. 가오실 동쪽에 있다.
- 못안, 모단, 지내(池內)물이 늘 부족하여 농사에 걱정이 많던 들판이므로 가뭄이 없어지라고 한퇴(旱退)라고 불렀던 마을 앞 들판에 1930年 못을 파고 농사에 걱정이 없어지자 그 못 뒷골 안쪽에 마을이 생겼다하여 모단,못안, 지내(池內)라 한다. 가오실 남서쪽에 있다.
- 붉은바우, 적암(赤岩),신화리(新化里)흙빛이 붉고 많은 곳에 400여년전 경주(慶州) 손씨(孫氏)가 터를 잡은 곳으로 마을 앞에 빛이 붉은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붉은바우 또는 적암(赤岩)이라 한다. 송담(松潭) 남서쪽에 있다.
- 종미, 종산(宗山, 鍾山)가오실 사람들이 조선(朝鮮) 영조(英祖) 년간(年間) 옮겨와서 종처럼 생긴 산 아래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이 곳을 개척(開拓)한 분은 종산(鍾山)으로 자호(自號) 를 삼기도 했으며 가평(加平) 이씨(李氏)가 살고 있다. 가오실 북쪽에 있다.
- 원둣골, 원딧골, 원곡(元谷)고려(高麗)때 이곳 동쪽끝에 사찰(寺刹)이 있어 부근에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어서 원곡(元谷)이라 하며, 우두원(牛頭院)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 원고개를 넘으면 첫마을이어서 원두곡(院頭谷),또 우두원(牛頭院)의 뒤에 있어 원딧골이라 한다. 가오실 남서쪽에 있다.
갈마리(葛麻里)
- 봉암동(鳳岩洞), 봉현동(鳳峴洞)본래는 봉현동(鳳峴洞) 1909년경 뒷산이 응봉(鷹鳳)이므로 응봉(鷹鳳)의 응자(鷹字)를 봉자(鳳字)로 하고 마을 주위에 있는 바위가 마을을 향하고 있고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부엉이처럼 앉았다고 하여 암자(岩字)를 따서 봉암동(鳳岩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새동네갈마리(葛麻里) 대부분이 특수부지로 편입되었는데 이 지구(地區)의 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새마을을 이루고 있다.
경진리(京津里)
- 검바우, 갈가리, 노포(蘆浦), 검암(劍岩)예안(禮安) 김씨(金氏)들의 집성촌이며 옛 노포면(蘆浦面)의 중심마을이다. 김윤안(金胤安(1550년)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앞의 큰 바위가 모양이 칼처럼 생겼다 하여 검(劍)바우라고 했으며 또 갈대가 우거진 곳이었다고 갈가리라고도 했다. 이 마을 300번지는 노포면소(蘆浦面所)자리이다.
- 신옥동(新玉洞), 교회(敎會)마을, 교회촌(敎會村)옥동(玉洞) 북쪽에 100여년전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신옥동(新玉洞)이며 6.25사변 이후 마을앞에 교회(敎會)가 서면서 교회마을로 통한다.
- 옥골, 옥동(玉洞), 옥산동(玉山洞), 옥개동(玉開洞)동래(東萊) 정씨(鄭氏) 집성촌 이며 마을터가 환옥(還玉)모양이라 하여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불린다. 또 조선초 옥계(玉溪) 신달정(辛達廷)이 여기 살면서 마을 이름으로 호(號)를 삼았다.
- 서울나들이, 경진(京津)한천(漢川) 내성천(乃城川)이 합류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科擧)보러 갈 때 이 나루터를 건너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조선말까지는 매우 붐비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벙어리도 3년만 머물면 의식(衣食)걱정은 없을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으나 돈을 벌면 이 마을을 떠나야 살림을 지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3대(代)를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 갱잇골, 학교앞1962년 경진국민학교(京津國民學校)가 개교되기 전에는 들판이었으나 교통이 불편한 소릿골 주민들이 이 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 소릿골, 소옥동(小玉洞)신안(新安) 주씨(朱氏)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한 곳 뿐이라는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사는 마을이다. 뒷산에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그 짐승들 울음 소리가 밤낮 들려오던 곳이므로 소릿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 새터서울나드리 마을 북서쪽 큰길가에 새로 된 마을, 처음에는 서울나드리 나루터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음.
금리(琴里)
- 짓골, 집골, 지동(池洞)구릉을 배경으로 동남향(東南向) 하고 있는 이 마을은 옛날에 지씨(池氏)들이 마을 앞에 못을 막았다 하며 청주(淸州) 한씨(韓氏)가 사는 마을이다.
- 거문골, 금동(琴洞)산세(山勢)가 베틀에서 옥녀(玉女)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인 직녀탐금형(織女彈琴形)이므로 거문골이라 하였다. 뒷산은 옥녀봉(玉女峰)이고 마을 앞들 가운데 따로 생긴 봉우리는 베틀짜는 신짝이라 한다. 또 마을 모양이 자연(自然) 길게 생겨서 양지 마을과 음지 마을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청주(淸州) 한씨(韓氏)와 함양(咸陽) 박씨(朴氏)가 주로 살고 있다.
동송리(冬松里)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부채산과 불탄골의 소나무가 한 겨울에도 푸르게 숲을 이루고 있어 마을 이름을 동송(冬松)이라 하였다 하며 풍수설(風水說)에 다르면 근방의 지명이 모두 악기(樂器)의 이름이므로 이 마을도 동소리(冬簫里)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을 중앙부(中央部)에 동신(洞神)나무인 느티나무(지금은 없음)를 중심으로 웃마, 아랫마가 있고 동쪽 들 가운데는 평밭(坪田) 마을이 따로 있다.
이사리(伊泗里)
- 큰이사리, 옛터, 고기(古基)寧越 辛氏 集成村이며 가장 먼저 이들 祖上이 터를 잡은 마을이고 본디는 옛 절터였다고 한다. 지금도 절 터라고 전해지는 곳에서는 기와족들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열두 이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 작은이사리큰 이사리에서 동쪽으로 2마정쯤 떨어진 골짜기에 생긴 작은 마을,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어 열두이사라 한다.
- 안골(內洞 )역시 열두 이사리의 한 마을이며 골짜기 썩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 음지마, 음지촌(陰地村)마을이 북향이고 옛터 음달 쪽에 있으며 열두이사리의 한 마을이고 영월 신씨(辛氏)들이 살고 있다. 옛터에 살던 사람들이 생활의 편의와 농토(農土)를 따라 옮겨 왔으며 20가구가 산다.
- 절골, 사곡(寺谷), 사동(寺洞)고려 때 서학사라는 절이 있었던 터에 생긴 마을이다.
- 참샘이, 한천(寒泉)열두이사리의 가장 끝 마을이며 마을 앞에 수량(水量)이 많은 찬물이 나는 샘이 있어 마을 이름을 참샘이라 불렀다 한다. 360 군도(郡道)(용궁-경진선)가 마을 앞을 동서로 통하여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하고 영월 신씨(辛氏)가 집단으로 산다.
- 당 미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
우감리(牛甘里)
- 도장골, 도장(道莊)450년전 豊山(풍산) 柳氏(유씨)와 眞城(진성) 李氏(이씨)가 開拓(개척)한 마을로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金海(당시김해) 金氏(김씨) 1家(가)와 密陽(밀양) 朴氏(박씨) 1家(가)가 定着(정착)한 후 柳氏(유씨)와 李氏(이씨)는 떠나고 現在(현재) 密陽(밀양) 朴氏(박씨)와 金海(김해) 金氏(김씨)가 主姓(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온 朴氏(박씨)라는 사람이 여기 形局(형국)을 살펴보니 골이 마치 곡식을 넣어두는 도장방처럼 생겼으므로 도장골이라고 부르고 맏아들과 함께 안마을을 開拓(개척)했고 둘째 아들이 살림집을 그 마을 밖에 짓고 바깥도장골이라 했으며 셋째 아들은 酒幕(주막)거리라고 하는 들판 위쪽에 分家(분가)시켜 웃주막거리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바깥도장골이 가장 큰 마을이다.
- 파릿골, 승동(蠅洞)마을 뒷산이 옛날 大洪水(대홍수)때 四方(사방)이 모두 물바다가 되었으나 파리머리만큼 남았었다는 해발 218m 蠅頭山(승두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農樂(농악)을 울리는 일이 없는데 그 이유는 농악을 울리면 파리가 놀라 달아날까 봐 그렇다고 전해지고 있다. 高氏(고씨)가 가장 많이 산다.
- 소감, 우감(牛甘)고려(高麗) 때부터 있던 마을이라 한다. 서씨(徐氏)와 차씨(車氏)가 개척(開拓)했다가 서씨(徐氏)는 먼저 떠나고 차씨(車氏)만 살았는데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 임씨(林氏)가 이주(移住)해 와서 살자 차씨(車氏)는 쇠잔(衰殘)해졌다. 이때 차씨(車氏)들이 모여 궁리한 끝에 임(林)은 수풀이니 우마(牛馬)가 들어가서 짓밟으면 세(勢)가 꺽이고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겨 말 한 필을 돌로 다듬어 마을 복판에서 뒷산을 향해 세웠으나 밤에는 차씨(車氏)들 몰래 임씨(林氏)들이 그 석마(石馬)를 마을 바깥쪽을 향하게 돌려놓고 아침이면 차씨(車氏)들이 또 뒷산을 향하게 돌려놓는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나 임씨(林氏)는 점점 번성(繁盛)하고 오히려 차씨(車氏)들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모두 떠났다고 한다. 그것은 말이 풀밭에 똥을 누어 수풀을 가꾸고 수레를 끌어다 버린 때문이라는 민담(民談)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임씨(林氏)들은 그 마석(馬石)앞에 느티나무를 심고 동제단(洞祭檀)을 삼았으며 그 모양이 송아지처럼 생겼으므로 송아지가 풀을 달게 뜯어 먹고 마을을 편하게 보호(保護)해 달라는 뜻으로 소감이라고 했다.
신음리(新陰里)
- 우대골, 우다골, 우대궁터, 상대궁(上大宮), 우두원(牛頭院)옛날 우대감(禹大監)이란 이가 살던 곳이라 하며 우대골이라고 하며, 고려말(高麗末) 공민왕(恭愍王)홍건적(紅巾賊)을 피해 안동(安東)에 머물다가 상주(尙州)로 가는 길에 여기서 묵어갔다고 하여 우대궁터라고도 한다. 신음리(新陰里)에는 고려(高麗) 때부터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우두원(牛頭院)의 터가 남아 있다. 또 잿마루가 높아서 이 재를 넘을 때 울고 넘어 간다고 하여 우다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대밭, 죽전(竹田), 감나무골내성천변(乃城川邊)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부터 400여년전에 경주최씨(慶州崔氏)가 터를 잡아 살다가 농토가 메말라 붉은바우로 옮겨 가고 그 후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대밭이라고 불렀으며 50여년전부터는 경주최씨가 새로 이 마을을 형성할 때 마을에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감나무골이라고도 하고, 죽전(竹田)이라 부르기도 한다.
- 새터, 신기(新基)본시(本是) 이 마을은 영양(英陽) 남씨(南氏)의 거주지이며, 처음에는 마을 건너편 골에 마을이 있었는데 1858年 큰 장마로 마을이 떠내려가자 당시 용궁현감(龍宮縣監)게 진정(陳情)을 하여 허락을 받아 이 곳에 새로 터를 잡아 옮겨와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 섬마, 화산(火山), 화음(化陰)들판 가운데 개울물이 둘러 흐르고 있어 마치 섬처럼 보이는 마을이라 하여 섬마라고 부른다 한다. 1914년 이후 면소재지(面所在地)가 되고 1957년부터 시장(市場)이 개설(開設)된 곳으로 개포면(開浦面)의 중심지이다.
입암리(立岩里)
- 선바우(立岩)옛날 밀양인(密陽人) 박선달(朴先達)이 개척(開拓)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성주(星州) 이씨(李氏)가 들어와 살면서 중종(中宗)때 이구(李構)가 전국 초유의 향약(鄕約)을 실시(實施)했던 곳이라 한다.
- 1982년 부락(部落) 전체가 특수부지(特殊敷地)로 편입(編入)되어 서남쪽 약100m되는 구릉지(丘陵地)산 아래 옛날 절터라고 전해 오는 곳으로 옮겨가 사는데 역시 선바우라 부른다. 마귀 할멈이 바위 3개를 하나는 이고, 하나는 들고, 또 하나는 치마폭에 싸가지고 와서 서로 기대어 세웠다는 바위가 공군부대 부지로 편입되었으나 지금도 보존하고 있으며 그래서 선바우(立岩)이라 한다.
- 방터, 방터골, 방기(方基, 芳基)방씨(方氏)들이 400여년전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방터골이라고도 하고 개척(開拓) 당시 해당화(海棠花)가 많이 피어 있어 아름답다 하여 방기(芳基) 즉 방터라고 칭하였다. 경북선(慶北線) 개포역(開浦驛) 마을앞에 있고 34번국도가 마을 앞을 통하고 있어 교통의 중심지다. 오일(五日)보다 시장(市場)이 섰으나 1962년 이후로 없어졌다.
- 봉산동(鳳山洞)순흥(順興) 안씨(安氏)가 대봉산(지금 주봉(主峰)이 없고 지맥(支脈)이 남서(南西)쪽으로 뻗어 있다)
- 서쪽에 마을터를 잡았다고 봉산동(鳳山洞)이라고 하며 또한 온갖 새들이 모여 들어 축복(祝福)을 해주는 곳이라고 봉산동(鳳山洞)이라고 한다. 선바우 사람들이 1982년 에 이리로 이거(移居) 왔다고 하며 북으로 대봉산 지맥(支脈)이 둘여 있고 남향의 마을이며 앞은 넓은 들판이다.
장송리(長松里)
- 장화(長化), 장송(長松)약 500년전 이사언이라는 선비가 개척(開拓)하였다는 마을이며 마을터를 잡을 때 노송(老松)이 많이 있었으므로 장송(長松)이라고 한다는 곳이고 마을 뒤 산이 성주(星州) 이씨(李氏) 집거(集居) 마을이다.
- 솔골, 송곡(松谷)솔숲이 우거진 골에 성주(星州) 이씨(李氏)가 개척(開拓)한 마을로 앞산은 청룡산(淸龍山)이며 장송리(長松里)에서는 으뜸되는 마을이다.
- 붉은디기, 적현(赤峴)30여 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터와 뒷산의 흙이 모두 붉고, 마을 앞 국도변(國道邊)에 붉은대기라는 주막(酒幕)이 있어 경진(京津)으로부터 이곳을 거쳐 문경(聞慶) 조령(鳥嶺)을 넘어서 서울에 갔다고 하며 붉은대기 주막집은 6.25동란 후 없어지고 말았다.
- 바느물, 침정(針井)마을 뒷산의 끝이 뾰족하여 바늘산이라고 불렀고 그 정상에 우물이 있어 침전(針井)이라 하였는데 그 아래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바느물 혹은 침전(針井)이라 불렀다.
- 던지미, 둔지미, 성조(盛鳥)바느물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힘센 사람이 들어서 던질만큼 조그만 산이 뒤에 있어 온갖 새들이 깃든다고 하여 성조(盛鳥)라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병이 이 곳을 지나면서 둔(屯)을 치지 않았다고 하여 둔지미라 불렀다고 한다.
풍정리(楓井里)
- 시누물, 풍정(楓井)성주(星州) 이씨(李氏)가 살고 있는 마을로 마을 터를 잡을 때 큰 시무나무 밑에 맑은 샘물이 솟았다 하여 시누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모산, 못안(池內)풍정리(楓井里)에서 가장 큰마을, 못 안쪽이 됨
- 솔안, 소란, 송포(松浦)마을 터를 잡을 때 뒷산은 소나무가 우거졌고 마을 앞에는 깊은 늪이 있었다고 솔안, 송포(松浦)이며 풍정(楓井) 남동쪽에 있으며 경주이씨가 주로 산다.
- 안방터(芳基)입암리(立岩里) 방터의 안쪽이며 솔안 남서쪽에 있고 방씨(方氏)들이 살았던 터라고도 전해지며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던 곳에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안방터라 불렀다 한다. 개포역(開浦驛) 뒤가 된다.
황산리(黃山里)
- 뒷미, 도산(道山), 도미(道味), 가산(加山)마을 뒤에 높은 산이 있고 그 앞에도 낮은산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겨 가산(加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을 순천박씨(順天朴氏)와 송씨(宋氏)들이 개척(開拓) 한 터에 용궁면(龍宮面) 무이리에서 옮겨 온 백씨(白氏)들이 살고 있으며 도미(道味)의 마을명은 중간마을(山井) 뒷편에 있다하여 뒷미(뒷마을)라 하였으며 행정구역 리동설치시 도미라고 이름하였다.
- 집너메, 황전(黃田)마을 뒷동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고 집너메이며, 또 흙빛이 누렇기 때문에 황전(黃田)이라고 한다. 1914년 이후에는 신천동(新泉洞)이었으나 그 당시 면소재지(面所在地)가 황전(黃田)에 있기로 황색은 5색(五色)의 중앙이므로 황산(黃山)의 대를 맞추어 황전(黃田)이라고 했다.
- 중간마을, 시누물, 산정(山井), 신천(新泉)경주최씨(慶州崔氏)가 개척(開拓)하여 그 후 인동(仁同) 장씨(張氏) 이씨(李氏) 현(現)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에 살던 백씨(白氏)들이 순조(純組)때 들어와 그 후손(後孫)들이 현재에도 살고 있다. 이 마을 식수로 쓰는 뒷산 중허리에서 맛좋은 물이 솟아나 사람키로 세 길이 나 되는 깊은 샘이 있어 그 샘을 산우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한다.
- 갓마중간마을에서 바깥쪽에 있으므로 갓마라 하였으며 옛날 인동(仁同) 장씨(張氏) 주부공(主簿公) 후손이 살다가 모두 이거(移居)하고 현재는 장길(張拮)의 후손이 주로 살고 있다.
- 보수동(保守洞)조선말기(朝鮮末期)에 파평(坡平) 윤씨(尹氏)들이 가산남서(加山南西)의 동수목(洞守木)이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잘 보호(保護)하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용궁면 마을 지명유래
가야리(佳野里)
- 강당(講堂)개이 서쪽에 있는 마을, 강당이 있었음.
- 넙운개이, 넘은갱이(可也 , 佳野)가야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 축산 전씨(竺山 全氏)들이 금산(琴山)을 넘어 새로운 마을을 개척한 곳이므로 넘운개이 라고 하며, 이 마을은 고려 이후 전원발(全元發)의 유훈으로 새운 국파강당이 있다. 강당 마을과 함께 전씨(全氏)와 유서가 깊은 곳이다. 경북선 철도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 황죽촌(黃竹村) , 강당기계 전 인(箕溪 全 仁)(1502~1557)이 선조 전원발(全元發)의 유훈을 받들어 국파강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며 이 강당은 지금도 유림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넘운개이에 정착한 전씨(全氏)들이 이 곳에 또한 마을을 이룩했으며, 전 인(全 仁)은 이 곳을 황죽촌(黃竹村)이라고 했다. 마을 중앙부에는 가야사(佳野祠)가 있다.
- 하미동, 해미동, 화미동(化味洞)마을 동쪽에 고살미 산이 있고 그 아래 생긴 마을이며 넘은개이 동쪽 마을이며, 서쪽이 트여서 서풍받이로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이웃이 정답게 살아가며 뒷산의 석질이 매우 좋아서 석공예가 발달했다.
- 장승리(長升里), 장성계(長城界)옛날 서울로 통하는 큰 길가에 맑은 샘물과, 기천 냇가에 늘어선 버드나무가 장성을 이루어 오가는 길손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으며 길가에 이정을 표시하는 큰 장성이 서 있던 옛 용궁현(龍宮縣)과 상주목(尙州牧)의 경계마을이고 넘운개이 북쪽이다. 마을앞을 경북선 철도가 지나고 있고, 조선 경종(朝鮮 景宗)말기(1724년경) 청주 한씨(淸州 韓氏), 함안 조씨(咸安 趙氏), 축산 전씨(竺山 全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잇따라 이거해 와서 마을이 구성되었다.
- 방메, 박매(朴山)장성계 뒷산 원시낭골에 있는 박감사(朴監司)라는 이의 묘소 부근 산천이 모두 박씨(朴氏)들 소유였으므로 마을 이름을 박씨(朴氏)들 산천이었다란 뜻으로 박매라 부른다고 한다. 넘운개이 북서쪽 마을이다.
금남리(琴南里)
- 삼미, 살미(山尾)조선조 경종(景宗)때(1724년대) 김해인 김세봉(金海人 金世鳳)과 경주인 이중일(慶州人 李重一), 순종(純宗)(1910년경)때 영일 정부기(迎日 鄭父基)등 삼성이 낙동강 상류인 금천(錦川)(성화천(省火川)) 주변에 터를 잡고 그 후손이 살다가 조선 철종(朝鮮 哲宗)7년(1856년) 홍수로 마을이 떠내려가자 그 마을터 뒤로 이주하게 되면서 동리 위치가 산꼬리에 있다고 하여 산미(山尾)라 했다고 전해진다.
- 휘넛들, 호느들, 노넛들, 훤평(喧坪)450여년전 울진장씨 선조 금계 장한보(蔚珍張氏 先祖 錦溪 張漢輔)가 충주에서 옮겨 와 정착한 고장이다. 마을 옆에 넓은 들이 있어서 농부들이 늘 오가면서 격양가를 부르느라고 떠들썩하던 곳이며 옛날의 성화원(省火阮) 터가 있고 또 훤평사(喧坪祠)가 있다고 하여 훤평(喧坪)이라 한다.
- 금원(琴原, 錦元)금남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라 해서 금원이라 이름이 되었다 하고, 휘넛들 북서쪽 금산 아래에 있는 평원에 생긴 마을로 270여년전 안동 권씨(安東 權氏)가 개척 하였다고 하고 그 후 경주 이씨(慶州 李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함창 김씨(咸昌 金氏)등이 차례로 입주하였고 울진 장씨(張氏)들이 세덕사(世德祠)를 지어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 작은봇들금원 서쪽에 있는 마을로 용수보(用水洑)가 발달되어 옥토 700여 두락의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천에 막아 놓은 보(洑)는 큰 보라 하는 반면 작은 봇들이라 한다.
- 새동네, 신촌(新村)금원 마을 동쪽에 있고 들판이 있는데 무오년(戊午年)(1918년) 홍수때 기천변(箕川邊)의 작은 봇들 수재민들이 고지대로 이주하여 새로운 동리를 이룩하여 동명을 새동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정씨(鄭氏), 김씨(金氏)들이 살고 있다.
- 청산모링이, 천산모링이금천에 해마다 한 번씨 지나가는 홍수로 청산 앞에 소(沼)가 생겼다 하는데 이 청산소 뒷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청산모링이라 불러진다. 1972년 이후 특수 지역성토 공사로 많은 자갈과 모래를 채취했으므로 하상(河床)이 낮아지고 소(沼)가 묻혔다.
- 용두징이, 용두진(龍頭津)금원 서쪽 금천가에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긴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소금배가 1910년대까지도 오르내리던 나루터였다고 한다.
대은리(大隱里)
- 대은(大隱, 대은역, 역골, 역촌)축산(竺山) 동쪽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에 위치하고 구읍(舊邑)(향석리(鄕石里)) 동쪽 산(축산맥(竺山脈)) 너머에 동향마을로 지금은 파평 윤씨 집성촌(坡坪 尹氏 集成村)으로 윤사석(尹師晳)이 조선 연산 폭정(朝鮮 燕山 暴政)을 피하여 청주로 옮겨 갔다가 그 아들 윤(尹) 욱이 후환이 두려워 조선(朝鮮) 12대 인종(仁宗)때 용궁 무이(龍宮 武夷)에 이거하였으나 은신처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그의 6대손 윤인(尹仁)이 이 곳으로 다시 옮겨와 크게 숨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대은(大隱)이라 하였다 한다. 대은리(大隱里)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 실름실, 실음실(瑟音室)대은 서쪽에 있고 풍수설에 의하면 옥녀탄금(玉女彈琴), 즉 옥녀가 비파를 타는 것과 같이 생겼다는 형국이다. 마을 앞에 낮고 곱게 생긴 야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비파모양으로 생겼으며 산 기슭 양편으로 집들이 있고, 지금은 그 산 능선에 전선이 가설되어 있어 더욱 비파 타는 지칭을 실감나게 해주고 있다.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개척하고 김해 김씨(金海 金氏), 예천 임씨(醴泉 林氏)등 모두 18가구가 살고 있다.
- 쌍수문걸(雙水門一)무지(舞紙) 앞들의 관개(灌漑)를 위하여 큰 돌로 수문 2개를 마련하고 쌍수문이라 하던 언저리에 생긴 마을이며, 개울이 마을 가운데를 흐르기 때문에 쌍수문걸이며 달성 서씨(達城 徐氏)가 100여년전에 개척했다고 하고 윤씨(尹氏)도 살고 있어, 모두 14가구가 있다.
- 신당(神堂, 新塘)1905년경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굽이쳐 흐르는 강변에 전주 이씨(全州 李氏) 두 집이 터를 잡았고, 임씨(林氏), 김씨(金氏), 양씨(梁氏)가 점차 이거해온 후 마을이 커졌으며 신당(神堂)이 있던 자리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신당(神堂)이라 불린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못(池)를 새로 막은 곳이라 하여 같은 발음 신당(神塘)으로 개칭하였다. 동학란때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개척하고 김해 김씨(金海 金氏), 예천 임씨(醴泉 林氏), 남원 양씨(南原 梁氏)등 17가구가 살고 있다.
- 회룡(回龍)고두실 남쪽 내성천 건너 비룡산 동단(飛龍山 東端)아래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 조선 철종(朝鮮 哲宗)7년(1856년) 대홍수 이후 구읍(舊邑)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마을을 개척했으며 뒷산이 비룡산(飛龍山)이고 내성천이 새을자(乙字)로 돌아 흐르는 곳이라 하여 회룡(回龍)이라 불린다 한다. 경주 김씨(慶州 金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안동 김씨(安東 金氏), 함안 조씨(咸安 趙氏)들이 23가구가 살고 있다. 감나무가 많아서 감은 옛부터 유명하다.
- 고두실(高頭谷), 동림(東林)신당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856년큰 홍수로 “상대” 라는 마을이 폐동(廢洞)되고 이 곳 동림일대의 높은 지대의 계곡으로 이주하여 동쪽의 숲이 있는곳 또는 높은 곳이라 고두곡(高頭谷) 즉 고두실, 또 동림(東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10가구, 공주 이씨(公州 李氏) 1가구가 살고 있다.
- 의성개, 의성포(義城浦)회룡서남(回龍西南)쪽 내성천이 굽어도는 용궁면(龍宮面)의 최남단(最南端)에 섬처럼 형성된 마을로 물이 굽이굽이 돌아간다는 회룡(回龍)과 인접한 곳으로 기묘하게 이루어진 지형이 의로운 자연환경을 이루었다하여 의자(義字)와 내성천(乃城川)이란 성자를 따서 의성(義城)이라하고 삼면이 강변이니 개(浦)가 끼어 있다하여 포자(浦字)를 합하여 의성포(義城浦)라 명하였다고 유래된다. 경주 김씨(慶州 金氏)가 11가구 살고 있으며 6?25전쟁시 피난지(避亂地)로 유명하며 마을 앞으로 펼쳐진 백사장은 너무나 깨끗하여 누구나 쉬어가고 싶은 자연환경이다.
덕계리(德溪里)
- 덕봉(德峰)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 피난(紅巾賊 避亂)길에 마을 뒷산 소나무에 옷을 걸고 쉬어 가다고 왕의산(王衣山)(338.6m)이라 부르는 산 밑에 성주 도씨(星州 都氏)의 세거지(世居地)로 마을 앞 남단에는 도명천(都命天), 도명찬(都命燦)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쌍효각(雙孝閣)이 있어 마을 이름을 덕봉(德峰)이라 부른다.
- 평장골(坪章), 평창(坪倉)옛날부터 평화롭고 인심이 후덕하여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어 농사짓고 살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이 홍건적 피난중 이 곳에 평창(坪倉)을 두었다고 하는데 마을 이름도 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달계(達溪)평장골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는 반씨(潘氏)가 살던 마을이라고 하며 거제 반씨(巨濟 潘氏)들이 살던 유적인 충효각(忠孝閣)과 관물당(觀物堂)이 남아 있고 약포 정 탁(藥圃 鄭 琢)의 처가인 반씨(潘氏)가 번성하게 살았는데 뒤에 거의 떠났고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산다.
- 복거리, 보거리, 복계(洑溪, 福溪)덕봉(德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덕과 복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라 하여 복거리라고 했다고 한다. 또 이 마을 남쪽 평창들에 관개(灌漑)하던 보가 있었으므로 보계(洑溪)라고 부른다고 한다. 도씨(都氏)가 산다.
무이리(武夷里)
- 무레실, 무리실, 무이(茂李室, 武夷)현재 인근면에 산재하고 있는 남포 백씨(藍浦 白氏) 낙향선조(落鄕先祖)인 백홍정(白弘正)이, 백형 이정(伯兄 ?正)이 고려 충선왕 복위사건(高麗 忠宣王 復位事件)에 연루되자 그 화를 면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피신정착(避身定着)하여 개척한 곳이라 하며 백홍정(白弘正)이 고향의 그리운 정에서 현 충청남도 보령군 남포(忠淸南道 保寧郡 藍捕)에 무이산명(珷夷山名)을 따서 무이실(武夷室)이라 이름한데서 기인한다고 하며 기후 백씨(白氏)가 대대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후 역시 선조(宣祖)때 이 곳으로 옮겨온 여주인 창(驪州人 滄)암 이윤수(李潤壽)라는 이가 마을에 오얏나무가 무성함으로 성씨를 맞추어 마을이름을 무이(茂李)라고도 부르며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 기천(箕川)이 3면을 둘러서 흐르므로 무레실로도 부른다고 하며 무이실(茂李室)을 주려서 무촌(茂村)이라고도 한다. 내무(內武)마을(안마), 외무(外武)마을(밭마)이 있는데 동쪽마을이 내무(內武), 즉 안마고 서쪽이 외무(外武), 즉 밭마라고 한다.
- 갯마, 포촌(浦村)안마 동쪽 갯가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이다. 갯들이 광활해서 채소를 많이 가꾸며 가을철에 마장(김장 무, 배추를 파는 갯가의 장)때면 원근에서 소를 몰고와서 소등에 무, 배추를 싣고 가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며 근간은 추럭과 경운기 등으로 운반한다고 하며 갯밭, 동남쪽으로 바로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며, 6가구가 사는 적은 마을이다.
- 누문골, 누문동(樓門洞)안마 동쪽 작은 등성이 넘어 구읍(舊邑)(鄕石(향석)1리)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누문(樓門)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누문동(樓門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6호가 사는 적은 마을이다.
- 소천마, 소천(蘇川)원(元)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귀국할 때, 고려(高麗)가 바치던 많은 조공(朝貢)을 국력에 알맞게 줄이게 하였고 뒤에는 또 명(明) 나라에 대한 조공도 줄이게 하는데 공헌하였다는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이 살았던 고장으로 마을앞 성화천(省火川)(금금천(今錦川))을 국명에 의해 소천(蘇川)이라고 고쳐 부르고 1702년 2월 후손들이 소천서원(蘇川書院)을 세워 전원발(全元發)을 봉향(奉享)하면서 마을 이름도 소천(蘇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마을 서남단 금천변(錦川邊)에 전원발(全元發)이 산수를 즐겼다는 정자가 있고 암석에는 청원정(淸遠亭)이라 전서(篆書)의 각자(刻字)가 있는데 당시의 명필 김구용(金九容)의 글씨라 전한다.
무지리(舞紙里)
- 쥣골, 조우골, 지동(紙洞)조선 중엽 한산 이씨(朝鮮 中葉 韓山 李氏)가 개척한 무동(舞洞) 남동쪽 마을이며 이곳은 닥나무(楮)가 많아서 옛날부터 한지를 만드는 지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닥나무 껍질만 생산하고 윤(尹), 김(金), 박(朴) 3성이 살고 있는 무지리(舞紙里)의 으뜸되는 마을이다.
- 무동(舞洞)지동(紙洞) 서쪽 1㎞ 지점에 있는 마을인데, 풍수설에 이 마을은 옥녀 탄금형(玉女 彈琴刑)의 뒷산 앞에서 어린이가 춤을 추는 형상이라는 무동형(舞童形)의 마을이라 한데서 마을 이름을 무동(舞洞)으로 하였다 한다.
산택리(山澤里)
- 산못, 산택(山澤)마을 뒤를 구릉성(丘陵性) 산지로 둘러싸고 마을 남단에서 우뚝 솟은 고종산(鼓鍾山)이 옥야십리 용궁평야(沃野十里 龍宮平野)를 내려다보고 마을 앞에 자생수(自生水)를 뿜으며 자생연(自生蓮)이 피는 연못이 있어 산택(山澤)이라 부른다고 한다. 총 300여년전에 영양 김씨(英陽 金氏), 울진 장씨(蔚珍 張氏)가 개척하였다 함.
- 호미(虎尾), 화미(花美, 化味)고종산(鼓鍾山)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마치 표호하는 호랑이와 같고 그 호랑이 꼬리 부분에 취락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호미(虎尾) 또는 음화(音化) 되어 화미로 부르기도 한다고 함. 200여년전 울진 장씨(蔚珍 張氏), 영양 김씨(英陽 金氏)가 이곳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이따라 경주 이씨(慶州 李氏), 한산 이씨(韓山 李氏)가 이주하여 살고 있다.
- 치내, 치냇걸, 기천(箕川)마을 앞에 치내, 기천(箕川)이 흐르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치내라 하였다 하며 호미(虎尾)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산택리(山澤里) 남서단이 되고 치내를 경계로 동쪽이 산택리(山澤里)에 속하는 자연부락이고, 서쪽 마을은 읍부리(邑部里)이다. 장씨(張氏), 윤씨(尹氏), 임씨(林氏)등이 살고 있다.
- 원당(元塘 또는 隱塘)치내걸 남동쪽에 있고 산택리(山澤里)의 최남단이 되며 이조(李朝)때 나그네의 편의를 돕기 위한 원터가 있던 곳이며 마을 앞에 둥근 못이 있고 그 뒤에 성황당이 있다. 김길보(金吉寶), 김길남(金吉南) 두 형제가 충주 신우실에서 약 350년전에 이 곳으로 옮겨와 마을을 개척 하였다. 영월 엄씨(寧越 嚴氏), 야성 송씨(冶城 宋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경주 이씨(慶州 李氏), 백씨(白氏)등이 살고 있다.
- 덩암마, 등암(?岩)말등자처럼 생긴 큰 등자바위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덩암마라고 하며 산택못 북동쪽에 있다. 일제(日帝) 초 신작로를 닦을 때 이 바위는 부서졌으나 마을 이름은 예대로 등암이다. 장씨(張氏), 김씨(金氏) 두 성이 산다.
송암리(松岩里)
- 용바우, 용암(龍岩)분토골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인 옥녀봉(玉女峯) 꼭대기에 약물샘이 있었는데 그샘에 하늘에서 용이 자주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고 하며 그 용이 늙어서 죽으니 이 샘의 약물도 말라 버리고 그 옥녀봉(玉女峯) 밑에 큰 바위가 용머리같이 생긴 것이 솟아나서 마을 이름을 용암(龍岩)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그 산마루를 약물탕 꼭대기라고 부른다. 임난(壬亂) 직후 청주인 한 호(淸州人 韓 頀)가 개척하였다.
- 법고개, 법현(法峴)경암 남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고개가 법고개인데 그 밑에 있는 마을이며 지금은 장씨(張氏)들이 정자를 지어 놓았다. 약 400여년 전에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개척하였다 함.
- 이암, 인암(印岩)법고개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산사태에 의하여 둘레 1m가량의 돌 하나가 드러났는데 둥굴고 기둥같이 생겨서 도장(인장)과 같다 하여 인암(印岩)이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가 있는곳에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인암(印岩)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법고개 개척과 같은 무렵 약 400여년 전에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개척하였다 함.
- 경바우, 경암(景岩)약 500여년 전 청도에 살던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이 곳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을 때 뒷산 송림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큰 바위가 아침 햇살에 광채를 발산하므로 마을 이름을 경암 또는 경바위라고 불렀다 함.
- 분톳골, 분토(粉土)경암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 마을은 근처의 흙이 분처럼 곱고 흰 가루 흙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지형이 단지 모양을 하고 있어 분톳골이라 불려지고 있고, 영월 엄씨(寧越 嚴氏)만이 10여호가 산다.
월오리(月梧里)
- 다래이, 달오이, 월내, 달안(達安), 월오(月梧)약 500여 년 전 이 마을 개척한 후 마을의 모양이 반월형(半月型)이고 마을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이 있어 월오(月梧)라고 불렀으며 또 순흥 안씨(順興 安氏)가 정착하여 산다고 달안(達安)이라고도 한다. 아랫마을은 순흥 안씨(順興 安氏)가 윗마을에는 중화 양씨(中和 楊氏)와 울진 임씨(蔚珍 林氏)가 산다.
- 장평(章坪, 長坪, 長平), 장야평(長野坪)글(章)을 잘 하는 선비가 많이 산다고 장평(章坪)으로 불렀으나, 지금의 장평국민학교가 설립되면서 오래도록 편안함을 기원하는 뜻에서 장평(長平)으로 부른다. 17세기에 약포 정탁(藥圃 鄭琢)의 아들 청풍자 정윤복(淸風子 鄭允複)은 앞들이 농사짓기에 편하고 넓은 들이므로 장야평(長野坪)이라고 이름하고 들을 개척하고 보(洑)를 내었다고 축산승람(竺山勝覽)에 기록하고 있다.
- 절골, 사곡(寺谷)고려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다고 절골이라고 한다는 골짜기인데 다래이 앞에 터잡은 마을이다. 근처에 감나무가 많아서 곶감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 가래미, 나산(蘿山)가래산 밑에 있고 마을 뒷산에 담쟁이가 많아서 가나산(佳蘿山)이며 여기서 지명을 따 나산으로 불렀다 하며 이문흥(李文興)이라는 이가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고 한다.
- 안터가래미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뒷산 모양이 마치 소쿠리와 같이 생겼고 그 안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안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 사람들은 지세 때문에 의식이 넉넉하다고 하며 안씨(安氏)와 이씨(李氏)가 산다.
- 벼락고개, 별락(別樂)월오(月梧)마을 앞에 벼락고개가 있고 옛날에는 그 고개 너머 마을이라 하여 별락(別樂)이라고도 썼다. 또 동네 앞 고개에 벼락이 떨어져서 산맥이 끊어지고 그 자리로 길이 났다고 하여 벼락고개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 등자바위월오(月梧) 동편 도로변 개포면 장송리(開浦面 長松里)와 등을 사이에 두고 남향으로 형성된 마을로 등자와 같은 바위가 있어서 이름이 되었고 경주 이씨(慶州 李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밀양 우씨(密陽 禹氏)등 8호가 산다.
읍부리(邑部里)
- 용궁면(龍宮面) 행정의 중심지이다. 향석(鄕石)에 있던 용궁현청(龍宮縣廳)이 1856년 내성천(乃城川)의 홍수로 유실되고, 1857년 이 곳으로 옮겨 온 뒤로 가야(佳野)라고 부르던 이 곳은 신읍면(新邑面)이 되고 1914년 이후 읍부리(邑部里)로 되었으며, 현재의 용궁면(龍宮面) 사무소 자리인 읍부리(邑部里) 278번지는 현청(縣廳)터이다. 마을이 커져서 방위에 따라 동, 서, 남, 북부로 나누기도 한다.
- 치냇걸, 기천(箕川)지형이 호랑이 꼬리처럼 생겼다는 호미(虎尾) 남서쪽의 치내걸 양 옆에 생긴 마을이므로 채냇걸 이라고 부르며 동쪽 마을은 산택(山澤)에 서쪽 마을은 읍부리(邑部里)에 속해 있고, 치냇걸은 이 지방의 젖줄 구실을 하는 하천이다.
- 버들쑤, 유수(柳藪)읍부(邑部)의 남쪽 기천(箕川)강변에는 지대가 낮아 습지대이므로 이 곳에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숲을 이루었는데 그 버들 숲 사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버들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 새마, 신동(新洞), 북부(北部)현청(縣廳)이 향석리 구읍(鄕石里 舊邑)에서 포금산(抱琴山) 밑의 가야리(佳野里) 곧 지금의 읍부리(邑部里)로 옮겨져서 신읍(新邑)이 형성될 때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마라고 부르며 읍부리(邑部里)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부(北部)라기도 하는 마을이다.
- 복호(伏虎)읍부리(邑部里) 서쪽 논 가운데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다. 산양다리 건너편 산이 호랑이 머리의 형상이며 그 산줄기의 호랑이 배부분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므로 복호(伏虎)라고 하였다고 한다.
향석리(鄕石里)
- 구읍(舊邑), 향사리(鄕舍里), 안마1413년부터 1856년 이전까지 약 440여년간 용궁현청(龍宮縣廳)이었던 마을이다. 1856년 6월 영남지방의 대홍수로 낙동강(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 3강수가 합수되는 풍양면(豊壤面) 삼강리(三江里)가 여기서 남쪽 2㎞ 밖에 되지 않음) 내성천(乃城川)이 범람하여 현청(縣廳)이 유실되어 이듬해 읍부리(邑部里)로 이전했다. 뒷산의 높이 158m의 축산(竺山)이므로 신라때는 용궁군(龍宮郡)을 축산(竺山)이라고 했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 세거지이며 함양 박씨(咸陽 朴氏), 영일 정씨(迎日 鄭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들이 주로 산다.
- 지잣걸, 시항(市巷)고을이 읍부리(邑部里)로 옮겨 가기 전의 장터거리였으며 마을 앞 내성천(乃城川)가에 있으므로 이 지방의 산물인 쌀을 소금배에 싣고 온 물화들과 교역을 하던 곳이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가 살며 60여년 전부터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박씨(朴氏)와 탁씨(卓氏)도 몇집 산다.
- 돌 우물, 석정(石井)마을 복판에 옛 용궁현감(龍宮縣監)이 식수로 쓰던 물이 암석 사이에서 용솟음 치는 샘이 있는 마을이다. 뒷날 용궁현감(龍宮縣監)은 읍부리(邑部里)로 고을을 옮겨 간 후에도 물맛이 좋아 여름철만 되면 석정(石井)의 물을 가져다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로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살고 있다.
- 생교골, 향교(鄕校), 교촌(校村)구읍(舊邑) 서쪽 지금의 향석리(鄕石里) 299번지 용궁향교(龍宮鄕校)가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이라 한 것이 변음되어 생곳골이라고 불린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가장 오래전에 왔고 김씨(金氏), 박씨(朴氏), 윤씨(尹氏)등 명성촌이다.
- 샛마생곳골과 구읍 사이에 있으므로 마을의 위치를 마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언래 현청(縣廳)과 향교의 사무를 연락하던 전씨(全氏)가 생활의 편의를 위해 여기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전씨(全氏)가 먼저 살고 이씨(李氏), 박씨(朴氏), 허씨(許氏)등이 살고 있다.
- 성밑, 성저(城底)구읍(舊邑) 남서쪽에 내성천(乃城川) 건너 높이 189m의 비룡산(飛龍山)에 둘레 871척, 높이 7척의 산봉 안에 군창(軍倉)터와 우물 3개가 현존하는 토석으로 쌓은 원산성(圓山城) 아랫 마을로 예천 임씨(醴泉 林氏)가 개척한 마을이라 한다. 마한(馬韓)의 마지막 남은 산성으로 온조왕(溫祚王) 7년에 백제국(百濟國)에 망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주가 되고 한산 이씨(韓山 李氏), 파평 윤씨(坡平 尹氏), 영월 신씨(寧越 辛氏)등이 살고 있다.
'지명 유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시 법정동 177동명 유래 (0) | 2021.05.21 |
---|---|
구미시 마을 지명 유래 (0) | 2021.05.11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의 지명 유래 (0) | 2020.01.29 |
분당구 각 동의 지명유래 (0) | 2020.01.29 |
문경시 산북면의 마을 지명유래 (0) | 2019.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