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급제란 靑雲의 꿈을 안고 漢陽으로
향하는 嶺南 儒生들이 넘었던 문경새재 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22년 07월 02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위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2.1km + 들머리 2.6km / 6시간 47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고사리 주차장-조령산 자연휴양림-쉼터1-쉼터2-임산물 판매장-연풍새재 공원
문경새재(조령3관)-군막터-무명묘지-선바위-조망바위-암봉-마패봉-돌탑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갈림길-철계단-무명봉-안부-쉼터-안부-이정표-북암문-756m봉
스타소나무-안부-734m봉-달천(계명)지맥 분기봉-달천(계명)지맥 분기점-무명봉
안부-무명봉-안부-묘지-무명봉-764m봉-모봉-무명봉-754m봉-741m봉-무명봉
737m봉-느릿골재 갈림길-동암문-이정표-산성터-부봉 갈림길(왕복)-부봉-안부
암릉구간-조망봉-904m봉-암봉-안부-무명봉-947m봉(주흘산 갈림길)-사면길-평천재
831m봉-무명봉-탄항산-무명봉-804m봉-너럭바위-무명봉-안부-삼각점봉?-안부
모래산-물탱크-초소-하늘재
☞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괴산군 연풍면 / 충주시 수안보면
세상이 어지러우니 날씨마져도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절기상으로는 이제서야 겨우 여름철 문턱에 들어섰건만 벌써부터 폭염 경보가 내릴만큼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으니 인간이나 날씨나 모두다 제 정신이 아니니 우야먼 좋겠노...
무성한 잡목과 잡풀로 인하여 길을 찾기가 어려운, 나홀로 걷는 지맥길은 잠시 접어두고
7~8월에는 길도 좋고 3번이나 종주를 한 탓에 길도 확실히 알고있는 대간길을 걷기로 한다.
4차 대간은 순서대로 하는게 아니라 시간이 나고 대간길을 가는 산악회가 있으면 가기로
하는데 예전에 몇번 산행을 했던 그랜드산악회란 곳에서 조령에서 마패봉과 부봉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산행 공지가 올라 왔기에 이번주는 이곳을 따라 가기로 한다.
물론 초반에는 같은 코스로 산행을 하나 산악회에서는 부봉까지는 같이 갔다가 1~6봉을 거쳐
동화원~조령~고사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를 하고 난 부1봉에서 되돌아와서 평천재~탄항산~
모래산~하늘재로 향할 것이다.
오는 길은 하늘재에서 그때 상황을 봐서 미륵리로 내려와서 수안보로 오던가, 아님 관음리로
내려와서 문경으로 가서 동서울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탈것이다.
아침 7시에 잠실역에서 버스에 탑승하러 가는데 몇년동안 지맥길을 같이한 마루님(이 산악회에선
닉이 마그마인지 날짐승이라 하는데 잘 모르겠다)을 만났는데 무척이나 반갑다.
버스는 출발하고 회장님께서 나를 인사시키는데 오랫동안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한
탓인지(?) 이런 분위기에는 왠지 영 어색하다...거기다가 총무 소임을 맡고있는 옥희씨가
떡과 꼬마김밥 도시락에 생수와 사과 한알까지 별도로 챙겨 주는데 고맙고 미안하다.
오늘 내 베낭엔 점심때 먹을 초코파이 2개와 두유 2개, 이온음료와 생수밖에 없는데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다...충주휴게소에 들려서 또다시 아침 대용이라면서 떡 하나와 생수를
주는데 이것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들머리인 고사리 주차장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고사리 주차장(09:40)
2020년 9월 5일 석문 동(신선)지맥 첫 구간을 할 때 자차로 와서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오늘과 똑같은 코스로 마폐봉까지 걸었으니 정확하게 22개월만에 다시 온 셈이다.
이 주차장은 옆에 있는 호텔의 소유인 모양인데 큰 버스가 주차장으로 잠깐 들어가서
회차를 하려고 하니 관리인이라는 인간이 지랄발광을 하면서 차를 못들어오게 막는다.
소갈머리라고는... 벤뎅이속보다 더 좁은 넘을 다봤네...니는 남의 땅 안밟고 사나...
버스에서 내리니 마을 윗쪽으로 22개월전에 걸었던 마폐봉(전봇대 뒷쪽)과 신선봉(젤 높은 곳)이
범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주차장 맞은편 아래에는 고사리의 자랑거리인 조선시대에
암행어사 박문수가 쉬어갔다고 전해지는 350년 된 소나무도 예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있는 고사리 마을의 유래는 조선시대 충청도로 접어드는 영남대로의
첫 숙박지 신혜원(新惠院)이 있었던 마을로 17~18세기에는 주막만 100여 가구가 될 정도로 많았으나
광복 후에 자취를 감추었으며 조령 3관문을 지나 2km쯤 밑에 있는 고사리는 새재 7~8부 능선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옛날에 제1관 문과 대안보에 역촌이 있었는데 상놈이 많다며 양반들이
두 곳을 피해 '고 사이에서 잠을 자고 가자.'라고 하면서 '고사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라고 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9:55)
버스에서 내려 리딩하시는 대장님을 따라서 스트레칭을 하는데 독립군인 범여로서는 어색하다.
갑자기 배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기에 옆에있는 식당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나오니 같이오신 분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나와 산행 목적이 다르니 가던지 말던지 무더운 날씨에 초반부터 오버페이스 할 필요야 있겠나...
牛步 걸음으로 느릿느릿 들머리인 조령(문경새재)으로 향한다
조령산 자연휴양림(10:00)
이곳까지만 차량 통행이 가능하고 여기서부터 문경새재(조령) 정상까지는 등로는 좋으나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다...기상청의 예보로는 오늘 폭염경보가 내려졌다고
하는데 이곳은 숲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그렇게 덥지는 않으나 그래도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면서 만난 좋은 글귀들...
쉼터1(10:07)
데크목 쉼터 주위에는 문경새재에 관한 古文의 詩들이 많이 보인다
쉼터2(10:12)
이 길은 연풍새재길이다...같은 길이건만 흔히들 알고있는 문경새재길이 아니다.
아마도 이곳이 행정구역상 괴산군 연풍면이라 문경새재로 불리웠던게 껄끄러운 모양이다.
문경새재(과거길)는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로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고갯길 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데서, 고갯길 주변에 새(악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기도 하다.
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1496∼156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수(大樹)이며 호는 석천(石川),
본관은 선산(善山), 해남출신으로 담양부사를 지냈으며, 눌재 박상에게 글을 배웠고 1516년에 진사시,
1525년에 문과에 합격했으며 관직은 담양부사, 강원도관찰사를 비롯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
사간·동부승지·세자시강원 설서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했으며, 담양 창평에 머물 당시
성산(식영정)시단을 열어 김성원, 정철, 고경명 등의 제자들과 수창했는데 성산동 관련 한시문은 500여
편으로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
남면(가사문학면) 지곡리 별뫼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 그의 사위인 서하당 김성원이 서하당과
식영정을 짓고 이중 식영정을 석천에게 증여한 것으로 이후 석천은 이곳 식영정이 있는 별뫼를 무대로
많은 작품을 남겨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 이라 불리우고 있다.
정영방(鄭榮邦:1577년 ~ 165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으로 고조부는 홍문관 응교 정환(鄭渙), 증조부는 생원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이며, 생부는 정식(鄭湜), 생모는 안동 권씨로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양부는 정조(鄭澡)이며 양모(養母)는 진성 이씨이며, 부인은 전주 유씨로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된
유복기(柳復起)의 딸이다。
임산물 판매장(10:18)
2년전에 오를때는 코로나라는 역병 때문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지 음악소리도 요란하고 사람들도 보인다...다들 잘되야 할텐데...
임산물 판매장을 지나자마자 좌측 숲속으로 신선봉으로 오르는 샛길이 보인다.
시원한 숲길이지만 덥기는 더운 모양이다..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걷다보니
연풍새재공원 입구에 도착한다
과거(科擧)의 길 동상
옛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秋風嶺)과 북쪽의 죽령(竹嶺), 그리고
가운데 새재(鳥嶺)가 있었는데 영남선비들은 이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禁忌)가 있어 영남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연풍새재 공원(10:25)
과거(科擧)의 길 동상 옆에는 延豐鳥嶺亭이란 쉼터도 보이고 동그란 지구 모양에 한반도 지도가
파여있는 조형물, 백두대간 조령의 비 하단에는 검은색 烏石에다가 조령의 유래를 새겨놨다.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 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서 새(新) 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 대로
(嶺南大路)라 불렸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올해는 과거 급제를 한 사람이 없는가 보다...급제한 유생이 이름이 안보인다
傍 옆에는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목민심서(牧民心書)와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와 , 성호 이익(李瀷)의 문답집인 성호사설
(星湖僿說)의 책 조형물이 보인다.
1, 목민심서는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실학서로 유배지인 강진 다산초당에서 완성한 책으로, 지방의 수령들이 지켜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관리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 및 경계하고 있으며 수령들의 윤리적 각성을
다루고 있는데 총 48권 16책의 필사본으로 되어있다.
2,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으로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26권 10책이다. 44세 때인 1780년 삼종형 명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베이징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기록으로 당시 사회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다.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3, 성호사설(星湖僿說)은 30권 30책. 필사본으로 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의 5부분으로
분류되어 총 3,007항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천지문 223항목은 천문과 지리에 관해 서술했고 만물문
368항목에는 사물을 대하면서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을 수록했다. 경사문 1,048 항목은 여러 고전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대 사서나 사실·인물·제도 등에 관하여 주석·논평한 것이다.
이 책은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자료임과 동시에 고대에서 조선 후기까지 중국과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풍속·사상·역사 및 당시 전래된 서학과 풍물을 모두 망라하여
기록하하여 백과사전적 전서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괴산땅을 넘어서니...
곧바로 지명이 문경새재길로 바뀌어 버린다.
경북 문경에 소재한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힌다.
5백여 년간 문경새재를 넘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중에는 입신양면을 꿈꾸는 청춘도 있고, 거상을 꿈꾸며 봇짐을 메고 다녔던 보부상들도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까지 추풍령을 넘으면 보름, 죽령을 넘으면 열엿새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열나흘 정도면 너끈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지름길인 셈이다.
그런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지름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은 대나무 미끄러지듯 낙방한다는 징크스가 그것이다.
연풍에서 문경으로 이어지는 문경새재는 전 구간이 흙길이다.
우리나라의 부흥시킨 故 박정희 대통령이 문경새재길을 새로 개설하면서
박 대통령께서 이곳만은 시멘트 포장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 옆으로는 계곡과 수로가 있어 언제든지 손발을 닦을 수 있다.
뙤약볕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우거진 숲도 걷는 재미에 한몫을 한다.
이처럼 수려한 자연경관 덕에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서
1위를 차지했던 곳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選'과 명승32호로도 지정됐다.
낮은 물론이고 늦은 밤에도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상상만으로도 운치 있는 풍경이다. 문경새재는 제1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으로 이어진다.
전체 길이는 6.5km. 일정이 빠듯하다면 1관문이나 2관문까지만 걸어도 좋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서면 자연생태전시관, 사계절썰매장, 새재스머프마을,
옛길박물관 등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 중에서 옛길박물관은 과거길,
여행길 등 조선시대 길과 얽힌 문화를 재조명해놓았다.
문경새재(鳥嶺:642m:10:28)
조령3관문의 연풍쪽 현판에는 ‘鳥嶺關’이라 적혀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문경새재는 거리가
짧은 만큼 길이 험하고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鳥嶺)이라 불리기도 했다.
다른 뜻으로 백두대간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란 의미도 포함되며,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는 설도 있도 있는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이다.
백두대간의 등뼈를 이룬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져 충북과 경북의 도계를 이룬 천험의 요새인
조령(鳥嶺)은 제1관문에서 새재계곡을 따라 제3관문까지 이어지며,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嶺南"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 지방이란 뜻이다.
3관문을 지나 문경땅으로 넘어서니 현판이 산꾼들이 부르는 조령 제3문이 아닌 ‘嶺南第三關’이라 적혀있다.
영남제3관이라 적힌 문경관문(聞慶關門:사적제147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수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을 지날 때
성주 흥달(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鷄立嶺 :하늘재)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했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申砬)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했다
그 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습격하였다...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으며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
우측에 있는 조령 산신각(山神閣)에 들려 들려 오늘의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예를 올린 다음에 오늘 걷는 백두대간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군막터(軍莫址:10:30)
예전에 조령관을 지키던 지키던 군사들이 대기하는 장소란다.
본격적인 오르막길...이곳에서 마폐봉까지 0.9km의 짧은 거리에 고도를 280m 올라야
하는 이런 구간...범여의 몸뚱아리는 이런곳엔 아주 쥐약이다.
그래 피하지 못할거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문경시 전시행정?
몇년전인가 문경시가 이곳에다 문경시의 특산물인 오미자를 홍보하기 위하여
하우스 파이프에다가 오미자를 심어놓고 옆에있는 안내판에다 친절하게 설명서까지
만들어놨는데 심어논 오미자는 다 죽어 버리고 안내판 글씨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의 오묘한 5가지 맛의 조화를 이룬다고 해서 이름 붙혀진
오미자(五味子)는 문경시 동로면 황장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 오미자 생산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이보시게 문경시 공무원 나리들...내 돈 아니라고 민초들의 피땀흘려 번 돈을 막써도 되나...
식물이란 토양과 기타 복합적인 것을 고려하여 심어야 살지...이런 산에서 어찌 살겠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령산성을 따라서 마패봉으로 향하는 이 길...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여지도에 기록된 조령산성 지도
조령산성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새재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북쪽의 마패봉(925m), 동쪽의 부봉(917m), 주흘산(1075m),
서쪽의 깃대봉(812.5m), 조령산(1,026m)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곽은 3곳에 위치한 관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각각의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평지성, 평지성과 연결되어 좌·우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루 아래에는 모두 홍예문을 두었고, 평지성은 매끈하게 다듬은 입방체형 석재나 면과 모서리를
다듬은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산성은 20~60㎝ 내외의 석재로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문루의 명칭은 1·2·3관문에 걸려있는 현판에 따라 각각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라 하고, 산성의
명칭은 초곡성, 중성, 조령성이라 하겠다. 산성의 규모는 초곡성(草谷城) 2,270m, 중성(中城) 40m,
조령성 899m 정도 이다. 이 외에 북암문과 동암문에도 각각 333m, 750m 정도의 성벽이 있다.
부대시설로는 동암문, 북암문, 포루, 우물터 등이 있다.
그런데 문경새재와 관련된 각종 고지도에는 이외에 동창, 산창 등이 표기되어 있고,
최영준은 1관문 뒤에 조령관, 별장영, 산창, 병영, 무기고, 마당 등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놓았다.
이것은 곧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위치했던 곳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있으며 이로 인해 옛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묘지(10:48)
며칠간 많은 비가 내렸던 탓인지 하늘은 정말 맑고 상쾌하다
1년에 이렇게 볼 수 있는 날이 과연 몇번이나 있겠는가...
그러나 날씨는 너무 더워서 살갗이 익는 느낌이다...오랫만에 구라청(기상청)의 예보는 맞는거 같다.
묘지에서 가야할 마패봉을 바라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급경사의 오르막길에는 아주 예쁘고 도도한 참나리들이 간간히 보인다.
너무도 도도하고 당당한 네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암릉 사이를 올라선 다음에 잠시후 안부에 있는 선바위를 만난다.
선바위(11:05)
마패봉을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잠시후에 너럭바위를 만나고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다시피 바위를 통과한다.
열이 후끈거리는 암릉을 통과하는데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이런걸 以熱治熱이라고 하는 건가...
이곳에서 좌.우 어느쪽으로 가던 상관은 없다...오늘은 우측으로 올라가 본다
처음 가보는 등로인데 누군가 로프를 설치해놨고 조망도 좌측보다 훨씬 좋다
암릉구간 통과하면서 바라본 부봉 1봉에서 부봉 6봉까지의 능선이 뚜렸하게 보이고
그너머로 우뚝솟은 주흘산의 최고봉인 영봉이 보이고 부봉능선 아래 옴팍한 곳이
옛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한잔의 술과 음식으로 즐겨 쉬어가던 곳인 동화원 자리이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숨이 막힐듯한 무더위와의 전쟁...오늘은 피할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암릉 주위에는 올해 처음으로 반가운 꼬리진달래와의 遭遇를 한다
힘들게 안부에 올라서니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1:20)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일망제이다
조망바위 바로 아래에 있는 문경새재는 綠陰속에 묻혀버렸고 그 윗쪽으로 깃대봉을 필두로
신선암봉~조령산 그리고 좌측으로는 부1봉에서 부6봉으로 내려서는 능선과 주흘산이 보인다
어머니 산(山) / 정연복
하늘에 맞닿은 높은 봉우리와
깊숙히 내려앉은 계곡
드문드문 우람한 바위들과
아가 손만한 작은 돌멩이들
훌쩍 키 큰 나무들과
앉은뱅이 이름없는 풀들
숨가쁜 오르막길과
편안한 내리막길
전망이 탁 트인 능선과
푸른 잎새들의 그늘속 오솔길
천둥과 번개와 벼락
벼락맞아 쓰러진 고목들
산은 너른 품으로
말없이 이 모든것을 포옹한다
오!
어머니 산(山)
꼬리 진달래(꽃말: 절제,신념)
진달래과에 속하는 상록관목으로 중국과 한국, 몽골이 원산지이며, 양지바른 산기슭에 서식한다.
크기는 약 1~2m이며 줄기 마디마디에서 가지가 2~3개씩 나와 나무 모양이 반구형을 이루며,
꽃은 꽃은 6~7월에 피고, 열매는 9월에 익으며 한국에서는 경상북도·충청도·강원도에서 자생한다.
참꽃나무겨우살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향기가 좋은 것이 특징이며 한방에서는 잎과 꽃을 말려
‘조산백’이라는 이름의 약재로 사용하는데, 기관지염 치료제나 지혈약으로 쓴다.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연풍새재 공원 좌측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난다.
어디까지 가셨나요?...산은 늘 거기에 있는데 왜그리들 급하신가요
암봉(11:26)
까치수염도 더위에 지친 모양인지 축 늘어져 있다...힘내거라...더워도 참아야지 우짜겠노...
6개의 봉우리로 이어지는 부봉 뒷쪽으로는 문경읍의 진산이라는 주흘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부봉(釜峰)의 모습
부봉은 6개의 봉우를 가진 산으로 그 독특한 암체로 이루어진 봉우리 하나하나 이어진 봉우리로 문경
북동쪽에 와서 수려한 산들을 떨구어 놓은 백두대간이 속리산으로 내려가기 전, 문경의 진산 주흘산의
북서쪽에 바위벽으로 우뚝 솟게 한 산이기도 하다.
부봉은 옛날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문경새재라고 불리는 제 3관문을 비롯 1, 2관문인 주흘관,
조곡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부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문경새재를 거쳐야 한다.
두 번째 관문까지 거치면 부봉으로 올라가는 표지적을 만날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며 평탄한 산길을 쉬엄쉬엄 오르다가 보면 언제 있었냐는 듯이 가파로운 경사가
펼쳐 있는데 제법 날카로운 기세의 암사면이 버티고 있다.
부봉은 유명한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자생하는 희귀 동식물이 많아 이 일대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곳으로 그 명성을 회복하고 있으므로 꼭 한 번 가볼만한 곳이다.
빡세게 올라서니 마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안부에 도착한다
얼마나 천천히 걸었는지 0.9km의 거리를 1시간 10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마패봉(馬牌峰:925.1m:11:40)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수안보면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암행어사
박 문수가 조령 제3관문 위에 쉬면서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 놓았다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지도상에는 마역봉(馬驛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경북 문경지역에서는 마패봉으로 부르고 충북 괴산지역에서는 마역봉으로 부른다
이 산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의 恨이 서린 조령 삼관문을 안고 있는 산이며
마패봉이란 산 이름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산을 넘으면서 마패를 걸어놓고
쉬어 갔다는데서 유래한다
국토지리원의 자료에 따르면 문경 새재의 정문 격인 제일 관문인 주흘문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문경 새재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산이 마폐산이다
처음에 마폐산을 馬역(門안에 力)山이라 했는데 역(力)은 男根을 말한다.
마폐산의 정상이 마역과 같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또 풍수지리설로서도
말에게 힘을 불어 일으킨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마역산은 외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움으로 1925년경의 지형도부터는
역자와 글자 모양이 가장 가까운 한자인 폐(閉)자를 대신 쓰게 되었다
인증샷
* 박문수(朴文秀:1691~1758)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색당파중에 소론 계열의
인물이나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군정과 세제 개혁의
논의에 참여 했으며 부정한 관리를 적발한 암행어사로 명성을 날렸다
마패봉 정상 좌측으로는 석문 동(신선)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2020년 9월 5일에 이곳에서 첫 구간을 시작했다.
석문동(신선)지맥은 백두 대간 마폐봉(마역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신선봉(996m),
소조령, 송치재,박달산(825m),맹이재,성불산(530m)을 지나 안민천이 달천에 합류하는
충북 괴산군 감물면 오창리에서 끝나는 31.9km되는 산줄기로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석문동천이 달천에 입수하기에 석문동 지맥이라 부르며 신산경표에서는
신선지맥이라고 부른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量何處)
'깨달음의 도량, 즉 행복한 세상은 어디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맞은편 기둥 주련에는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지금 생사가 있는 이곳,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곳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말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집은 지금 이 순간에 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돌탑(11:42)
돌탑을 지나서 넓은 공터에서 우측의 급경사로 내려가는데 앞에 보이는 월악산군(月岳山群)이 정말 멋지다
내가 오늘 걸어야 할 백두대간 능선이 한 눈에 보인다
백두대간 부봉을 지나서 주흘산 영봉 갈림길에서 내려서서 평천재~탄항산~모래산과 하늘재,
그 너머로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포암산...그리고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긴 해도 여인이 누워있는 요염한 모습처럼 보인다
포암산 뒷쪽으로 펼쳐지는 대미산과 좌측의 문수봉, 황장산...그 뒷쪽으로 소백산 능선은
遠景이라 흐릿하기만 하다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갈림길(910m:11:44)
2020년 5월 23일 달천(계명)지맥 첫 구간을 할때에 이곳으로 올라 왔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직진의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사문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사리(大寺里)와
석문동(石門洞)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사문리(寺門里)라 하였으며 ‘대사’는 큰 절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한절’의 한자 표기로, 예전에 큰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석문은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왜군을 막으려고 이곳에 성을 쌓고 돌로 문을 만든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문(寺門)이란 지명은 ‘절로 들어가는 문턱’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신선봉~주흘산~만수봉~포엄산으로 덩어리가 된 산지 사이에 자리한 것이 미륵(彌勒)이다.
절에는 땅 이름이 상징하듯, 5층 석탑과 미륵불 등 문화재로 지정된 불교 유적이 많다.
과거에 번영했던 불교 사원의 자리임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안보(觀音)리가
있는데, 이 또한 불교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에 연유하므로, 불상을 모시는 절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무명봉(11:46)
안부(11:49)
숲길을 따라서 편안하게 걷는다마는 오늘따라 야속하게도 바람한 점이 없다.
세상사 참으로 공평해야 한다는 생각인가...이렇게 좋은 날씨에 깨끗한 산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거기에다 시원한 바람까지 바란다면 사치가 아닐까.
쉼터(11:50)
쉼터를 내려서니 철계단이 시작된다
철계단 아래로 가야할 대간 능선이 뚜렸하게 보인다.
자영업자인 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토요 산행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 옥희씨 따라 산행길에 나선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인지도 모르겠다.
망가진 내리막 계단은 몇년째 보수되지 않은채 방치되어 있어 엄청 불편하다.
이 등로는 예전엔 문경새재 도립공원이었는데 언제인지는 몰라도 월악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지만 대간길은 예전 그대로이다...국립공원에 편입되었지만 庶子 취급받는 등로인 모양이다
안부(11:55)
안면이 있는 시그널들이 많이 보인다...다들 잘 계시죠?
이정표(784m:11:57)
이정표 월악04-05(←하늘재 8km, 부봉 삼거리 3.4km, →마패봉 0.6km)가 서있다
마패봉 오르면서 잠깐 헤어졌던 조령산성 북사면을 만나면서 내려서니 북암문이 나온다
북암문(北暗門:12:03)
넓은 안부로 내려서는데 이곳이 바로 북암문으로 우측으로 동화원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뚜렸히 보인다
동화원(桐華院)은 지금부터 약 500여년前 密陽朴氏가 처음 정착한 이래 30여戶의 民家가 형성되었으며
5~6戶의 객주(客主)와 원(院)이 있던 곳으로옛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한잔의 술과 음식으로 즐겨 쉬어가던
곳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동학 봉기 이후 산적들의 출몰에 여러 길손은 이곳 동화원에서
며칠을 쉬면서 큰무리를 이뤄 안전하게 지나다녔던 곳이기도 였다고 한다.
옛 원(院)은 통상 하루 보행길 삼십리(參拾里) 간격으로 있었으나(新東國與地勝覽),
이곳 문경새재는 조령원(3.5Km)ㅡ>동화원(3.5Km)ㅡ>신혜원(3.5Km)으로 십리(拾里)마다 院이 있었는데,
이는 이곳 문경새재가 운송및 지리적 여건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산적들의 횡포에도 그 영향이 있었다 한다.
또한 동화원은 교통취락 성립에 경제적인 배경에 의한, 역(驛), 원(院), 도(渡), 중의 일부로서
시장 취락형태의 점(店), 막(幕), 주가(酒家), 객주(客主), 여집(旅閣:다락집)을 형성하고 있었던 곳이다
동화원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지 등로는 뚜렸하다
북암문의 이정표
잠시동안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가니...조령산성 흔적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756m봉(12:08)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멋쟁이 스타 소나무가 나온다
스타소나무(12:10)
이 구간에서 대간 산꾼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있는 소나무이다
이정표(734m:12:13)
철쭉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는 대간길을 편하게 걸어간다.
맑은 공기에 녹음이 우거진 대간길을 걷는 자체가 나에겐 삶을 확인하는 길이다
달천(계명)지맥 분기봉(12:19)
봉우리에서 내려서니 분기점이 시작되는 곳 위의 봉우리에 준.희선생의 산패가 걸려있다.
달천(계명)지맥 분기점(12:20)
신산경표상의 계명지맥 (鷄鳴枝脈)은 백두대간 마역봉(마패봉) 동쪽 1.2km지점에서 북쪽으로
분기하여 지릅재. 북바위산(779m).망대봉(730m).대미산(680.8m).발치.남산(636.1m).마즈막재.
계명산(775m)을 지나 달천이 남한강에 합수하는 충주시 탄금대교 앞에서 부용지맥을 마주보며
끝나는 도상거리 36.4km되는 달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로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달천지맥이라고 부른다
무명봉(12:22)
안부(12:25)
무명봉(12:27)
북암문에서 능선으로 올라온 이후부터는 큰 고도차가 없는 등로로 조금은 지루하다
안부(713m:12:28)
이정표(←부봉삼거리 2.4km, 하늘재 7.0km →마패봉 1.6km)가 서 있다
묘지(12:30)
묘지를 지나면서부터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느슨하게 진행하던 걸 조금은 긴장한다.
명색이 정통산꾼이 이런 곳에서 방심하다 다치면 쪽팔리잖아...
무명봉(12:36)
암릉구간을 지나는데 처음으로 시원한 바람이 살짝 불어준다.
물들어올 때 노 젖어라 했던가...조금은 허기가 지기에 이곳에 베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해결한다.
점심만찬(12:45~13:05)
오늘 점심은 여유롭다...나홀로 지맥길을 걸을때는 점심이라봐야 빵이나
떡에다가 음료수가 전부인데다가 시간도 10분이내로 하는게 원칙인데
오늘은 산악회 총무인 옥희씨가 김밥에다 사과...생수까지 줬으니 珍羞盛饌이다
그리고 산악회 버스를 탈 일이 없으니 같이오신 분들에게 늦다고 민폐끼칠 일도 없고
바람을 벗삼아 20분동안 忙中閑을 즐긴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754m봉(13:06)
등로 가운데에 삼각점 같은것이 있으나 자세히 보니 삼각점이 아닌
월악산국립공원 경계 표시인 지적도근점이다
안부에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등로 위에 족보가 있는 762.3m봉이 있는데 등로가 사면이라 무심코 걷다보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모봉(762.3m13:08)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762.3m봉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나 트랭글앱에서는 모봉이라고
알려준다...지명의 유래에 대한 자료는 알 길이 없어 조금은 아쉽다.
내리막길로 내려선 다음에...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무명봉(13:12)
등로는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서 부봉삼거리 방향으로 향한다
754m봉(13:14)
바람한 점 없는 숲속...그리 더운줄은 모르겠으나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점심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지가 얼마 안되었으나 목이 말라 물을 먹으며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이곳에도 꼬리진달래의 군락지를 만나는데 참으로 반갑다.
부봉 1봉에서 6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원하게 보인다.
미세먼지와 박무가 없는 이런 풍광...과연 1년에 몇번이나 볼 수 있을런지...
741m봉(13:20)
이정표(월악 04-09: ←마패봉 2.6km →부봉삼거리 1.4km, 하늘재 6.0km)가 서있다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등로앞을 무명봉이 가로막고 있다...살짝 좌측으로 꺽어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무명봉(13:26)
무명봉 정상은 오르지 않고 좌측의 사면길로 향한 다음에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100여년전의 나라잃은 설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
나라가 힘이없으면 나무들도 수난을 당하는데 이 나라의 정치하는
인간들은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자기들 밥그릇 싸우고 있으니 한심하다.
요즘에 염라대왕님은 뭐 하시는지...民草들의 고통은 眼中에도 없고
자기 이익에 몰두하는 자들을 잡아서 족치지 않는지...
737m봉(13:28)
737m봉 정상에는 월악 04-10 이정목에 →하늘재 5.5km, 부봉삼거리 0.9km, ←마패봉 3.1km 표식이 있다.
능선 가운데에는 내무부 국립공원 표식 말뚝이 있는데 아마도 1970년 중반쯤 것인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이 길...혼자 걷는 여유로움...이 맛을 알면 여럿이 다니는게 엄청 불편하다
조령(조령3관문)을 지나 부봉 삼거리 아래까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조령산성터와 나란히 대간길을
걸어가는데 이곳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다시 산성터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동암문이 있는 느릿골재로 내려선다
느릿골재 갈림길(13:37)
좌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느릿골재로 가는 길이다
혼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다보니 동암문에 도착한다
동암문(東暗門:13:40)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이었던 이곳 1,500여년 역사가 흐르는 곳으로 동쪽에 있는
암문(暗門)이라고 해서 동암문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장군이
한강유역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통로로서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 두었다가
필요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城)을 에워싸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가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동암문이란 동쪽에 있는 암문으로 이곳에서 부봉, 주흘산 영봉 갈립길을 거치지 않고
평천재까지 등로가 연결되어 있어 가끔 임도파들이 이용하는 길이기도 한 곳이다
동암문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면 부봉삼거리를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다행히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조금은 편하게 걷지만 따가운 햋빛이 장난이 아니다
데크목 계단에서 뒤돌아 본 마패봉의 모습
이정표(13:48)
나무 그늘속 호젓한 등로를 따라서 가다가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부봉 삼거리가 나온다
부봉삼거리(848m:14:02)
부봉삼거리에 베낭을 벗어놓고 대간길에서 0.2km로 떨어진 부봉 정상으로 향한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앞서가는 여성 두 분도 힘이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동북쪽으로 월악산군(月岳山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월악산(月岳山)은 달이 뜨면 주봉인 영봉(靈峰·1097m)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문헌에는 삼국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또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름만큼이나 산이 높고 그 세(勢)가 험악해 설악산, 치악산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악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천혜의 지형 덕분에 예로부터 월악산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많았던 산으로 지금의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과 경북 문경시 일대를 말하는 중원(中原)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원을 장악하는 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유 때문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됐고 몽골 침입 때 월악산 일대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동학농민전쟁 때 관군에 패퇴한 서장옥(전봉준의 스승)이 숨어든 곳도 월악산이었고, 광복 후
빨치산 마지막 잔당들이 최후를 마친 곳도 이곳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산 주변엔 많은 역사적 상흔과 전설이 서려있다
풍수학적으로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충족시키는 곳이 명당으로 불린다.
그런 면에서 충주호를 끼고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월악산 일대
곳곳은 대부분이 명당 후보지라고 볼 수 있다.
봉우리 높이만 150m. 하늘을 찌를 듯 기운차게 솟아있는
봉우리는 ‘한국의 마테호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또 영봉은 보는 각도에 따라 진안의 마이산처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그래서 ‘네 얼굴을 가진 봉우리’로도 불린다. 북서쪽에서 보면 쫑긋한 토끼귀,
동쪽에서는 쇠뿔, 남쪽에서 보면 거대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보는 듯 하다고 한다.
부봉가는 길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최고봉인 영봉(1,108.4m)의 모습
우리나라의 많은 산 중에서 영봉이라는 이름은 3군데가 있다고 하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주흘산 영봉, 동북쪽으로 보이는월악산 영봉과, 북한산 영봉이다.
잠시후에 가야할 탄항산과 오늘의 날머리 위에 있는 포암산은 날씨가 더운지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백두대간에서 0.2kmm 떨어진 부봉을 제1봉이라 하고 높이는 917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다음 차례대로 이어져 조곡관에서 가장 가까이 보이는 봉이 제6봉이다.
제2봉은 933.5m, 제3봉이 911m, 제4봉이 923.9m, 제5봉이고 사자바위가
있는 제6봉이 916m이다. 우리들이 부봉이라고 흔히 부르는 봉이 제1봉이다.
2봉이 가장 높지만 백두대간과의 관계 때문일 것으로 본다
부봉(釜峰:917m:14:12)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수안보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정상엔
무명묘지 한 기가 있으며, 주흘산에서 보면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가마솥(부:釜)
봉우리 봉(峰)이라고 붙혀진 지명이란다...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뒤의 암산으로 6개의
봉우리중 제2봉인 부봉(933.5m)가 가장 높으며 좌측으로 동화원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부봉 뒷쪽으로 오늘 같은 버스를 타고온 등산객들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잘들 가셔요...산행의 목적이 달라 나는 왔던길을 되돌아 갑니다
부봉 정상에서 잠깐 머물다가 다시 부봉 삼거리로 향한다
부봉에서 바라본 주흘산(主屹山)의 모습
주흘산 이라는 뜻은 우뚝선 우두머리산 이라는 말로 주변에 대미산과 조령산등
천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어 주변 산들을
호령하는 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던 곳으로
문경읍을 감싸고 있는 문경의 진산으로 주흘산 최고봉은 1,108.6m의 영봉 이다.
하지만 주봉은 영봉보다 낮은 1,079m인데 이곳이 주봉(主峰)이 된것은 산세가 막 비상하려는
학의 모양인데 이곳 주봉이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 이라고 하는 곳으로 주흘산에서 이곳의
조망이 가장 좋은데 그래서 높이에 상관없이 이곳을 주봉(主峰)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을 보면 문경의 지명은
이 주흘산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흘산은 영남에서 서울 가는 방향으로 달리다가 영남의
제일비경지인 진남교반의 고모산성을 돌아서면 우뚝하게 솟아나있다.
1,000m 정도의 아름다운 산이다. 맵시 있는 여자 같기도 하고,
절세미인이 단장을 하고 앉은 듯 단정한 산이다.
좌우대칭이 어우러져 있고, 내리 뻗은 품세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산 모양이 정자관(程子冠)처럼 생긴 것도 문경의 지명생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자관은 모자인데, 모자를 옛 우리말로는 ‘고깔’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 했다.
우리 말 ‘고깔’의 이두 식 표현이라고 보여 진다.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했는데,
이 역시 주흘산의 생긴 모습이 정자관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부봉에서 바라본 월악산과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彌勒里)가 한 눈에 보인다
예전엔 연풍군 고사리면 미륵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다고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가 되었고, 2005년 4월 1일 수안보면 미륵리가 되었다.
지릅재와 하늘재 사이의 계곡 저지대에 형성된 마을로 월악산, 만수산, 포암산, 부봉, 북바위산,
박쥐봉 등이 감싸고 있으며 송계계곡과 만수계곡 등이 있는 월악산국립공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늘재, 부봉, 포암산, 월항삼봉, 지릅재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마을의 골짜기를 돌아 북쪽으로 흘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서 송계계곡을 형성한 뒤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미륵리(彌勒里)라는 명칭은 충주 미륵대원지에 있는 보물 제96호인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미륵리는 일명 미륵뎅이, 미륵댕이라고도 불린다
다시 부봉 삼거리(14:20)
안부(14:22)
혼자 걷는데다가 지맥길이 아닌 등로가 아주 좋은 대간길이다 보니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인가 예상했던 산행시간보다 한참을 오버했다.
조금은 부지런히 걸어야 할 듯 싶다
조그만 봉우리를 넘어서 철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다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열이 받은 철계단 탓인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고통이 수반된다
이 또한 걷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자 숙명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오르막을 올라간다
암릉구간에 철계단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철계단 능선에 올라서서 서쪽의 능선을 바라본다.
계곡 너머로 백두대간 능선의 신선암봉과 조령산...이화령 너머로 이어지는
문경시 가은읍의 뒷산인 조봉~백화산~곰틀봉~이만봉~희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보인다
조금전에 올랐던 부1봉(맨 우측)을 뒤돌아 본다
철계단 맨 끄트머리에 있는 立石의 모습
철계단이 끝나고 계속되는 오르막길 가장 더운 시간이라 그런지 살이 익는 느낌이다
삶이 고달픈 돌양지꽃...마침 요즘의 나를 보는 느낌이다
주흘산 갈림길을 향한 계속되는 오르막길
조망봉을 지나 능선으로로 올라가는데 다행히 숲속으로 들어서니 더위는 피할 수가 있구나
조망봉(14:37)
영봉 갈림길로 오르는 등로...상당히 지루하고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힘이 들기 시작한다
904m봉(14:50)
904m봉 이정표(월악04-13:←하늘재4.0km, →부봉삼거리 0.6km, 마패봉 4.6km)
암릉위로 올라간다
예전엔 몰랐었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지루하다
암봉(14:50)
안부(14:50)
안부를 지나면서 또다시 오르막길...은근히 산꾼을 지치게 하는 코스이다
암릉구간 위로 올라간다
무명봉(14:58)
주흘산(영봉) 갈림길이 나온줄 알았는데 또다시 무명봉을 만난다.
은근과 끈기를 요구하는 등로인데 조금을 더가니 철계단이 보이면서 주흘산(영봉) 갈림길에 도착한다
주흘산(영봉) 갈림길(957m:15:00)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주흘산의 최고봉인 영봉으로 이어지고 대간길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이정표(마패봉5.0km 부봉삼거리1.0km → 하늘재3.6km↓), 월악 04-14표지판이 보인다있
하늘재로 향하는 길은 오금이 저릴 정도의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철계단이 끝나고...
계속되는 내리막길은 평천재까지 이어진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반어법입니다.
비울 수로 충만하다.
모든 인생사가 가득가득 채울수록
부자가 되고 마음이 넉넉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비워야 됩니다.
마음속의 짐과 스트레스를 덜어내고
평안한 마음으로 우리네 삶을
보내야 합니다.
법정스님의 텅 빈 충만 중에서
암릉구간이 나오고 좌측의 계곡으로 내려간다
토사 유출이 심한 곳에서는 안전로프가 처져 있지만 마사토 등로라 상당히 미끄럽다.
山自分水嶺의 원칙을 위배하면서 계곡을 건너고...
호젓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평천재가 나온다.
평천재(平天峙:758m:15:15)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에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를 잇는 고개로
월항재라고도 부르면 탄항산과 부봉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은 대간 산꾼들보다는 봄에 산나물 채취꾼들에게 알려진 고개이다
평천재의 고개 이름이 달목재(동쪽의 평천리에 월항마을 달메기말=달목말이 있다).
탄항재(炭項峙), 숯목재등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문경읍 평천리 월항마을쪽에서 평천재-동암문을 걸처 서쪽의 동화원과
조령으로 이어지고, 북쪽의 미륵리와 수안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영봉갈림길에서 이곳까지 0.6km의 거리를 고도 200m를 낮추어서
평천재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탄항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평천재에서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평균 해발이 830m 정도의 고도차가 별로없는 능선을 따라서 편하게 대간길을 이어간다
831m봉(15:27)
이정표(월악04-16: ←하늘재 2.7km, →마퍠봉 5.9km, 부봉삼거리 1.9km)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
우측으로는 암릉구간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이고 좌측은 안전한 우회길이다.
당연히 암릉 윗쪽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계속되는 암릉구간 능선...
암릉 구간 사이를...
곡예하듯이 대간길을 이어간다
무명봉(15:38)
우측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영봉이 보인다.
주흘산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봉을 빼앗긴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암릉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
능선에 올라선 다음에 탄항산 정상에 도착한다
탄항산(炭項山:854.4m:15:46)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월항삼봉(月項三峰)이라고도 부르며 월악산국립공원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가까이 마의태자 의 전설이 깃든 미륵사지와 고대 삼국시대부터 호서와 영남을
잇는 하늘재를 감싸고 있는 아기자기한 산세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여 삼봉이라 부르나 예전에 산삼이
많이 난다 하여 삼봉(蔘峰)이라 부르기도 하며,또한 탄항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산 남쪽 월항마을 사람들은 봉화봉이라고 부르기도 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에 탄정산(炭頂山)으로 표기되었던 탄항산은 세종실록지리지
문경조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 탄항산으로바로잡아 놓아 지금까지 탄항산으로 불리고 있다
남북으로 수려한 부봉과 포함산이 웅장하게 서있어 백두대간 종주자들에 의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산 정도에 불과한 산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름드리 장송들과 암봉들은 나름대로
산행의 재미를 만끽해 주기에 충분한 산이다.
정상은 노송과 절벽,괴석 등으로 어우러지고 정남으로 주흘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백두대간상의 하늘재 직전에서 남쪽으로 들어간 계곡이 아름답고, 정상 서편에서
북쪽으로 뻗은 칼바위등길은 너럭바위, 홈바위, 칼바위 등으로 어우러져 스릴 있는 하산 길이다
인증샷
탄항산 정상에서 북쪽의 미륵리로 하산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탄항산 정상석 뒷태를 바라보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암릉구간이 나오면서 우측으로 등로가 열린다
문경읍 관음리 너머로 2019년 11월 5일에 영강(신산경표상: 운달)지맥으로
걸었던 운달산과 문경 활공랜드, 단산의 능선이 시원스럽게 보이는구나
국립공원 내무부라고 쓰인 돌기둥은 계속해서 대간 능선에서 만난다.
암릉구간을 우회하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걸려있는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봉(15:50)
늦둥이 비비추(꽃말: 좋은 소식, 하늘이 내린 인연)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원산지는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이다.
키는 약 30~40cm이고 모든 잎이 뿌리에서 돋으면서 비스듬히 퍼지며 잎은 타원형의 달걀모양이고,
표면이 진녹색의 가죽질로 두껍고 줄기는 잎과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열매는 긴 타원형의 삭과로 익으면서 3개로 갈라지며 그늘진 산 속 냇가에 흔히 자란다.
어린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꽃과 뿌리, 잎을 각각 약재로 사용하며 효능으로는 통증 완화 등이 있다.
무명봉을 지나니...
너럭바위가 나온다
804m봉(15:57)
이정표(월악4-18:←마패봉7.1km, 부봉삼거리 3,1km →하늘재 1.5km)가 서 있다
너럭바위(16:00)
문경읍내로 이어지는 능선 너머로 운달산과 활공랜드 정상이 보인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선바위(立石)의 모습
하늘로 통하는 문인지?...하늘재로 가는 문인지 좁은 암릉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무명봉(16:03)
철계단 난관이 보이는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겨울 대간길은 상당히 위험하겠다
고인돌처럼 보이는 암릉을 바라보면서 내리막으로 향한다
철계단을 따라서 암릉길을 우회하면서 걷는다
포암산 너머로 만수봉과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이 시원스레 보이는구나
바로 아래 보이는 움푹 패인곳인 하늘재에서 미륵리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철계단 난간 아래로 내려선다
포암산이 점점 가까워지고 우측으로는 문경읍 관음리가 보인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바라본 바문경읍 관음리(觀音里)의 모습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 관음리는 포암산 아래 위치한 산간마을로 자연마을로는 꼭두바위, 문막, 비바우,
수세골, 중점, 황정모리 등이 있는데 꼭두바위는 뒷산에 있는 바위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문막은 신라에서 고구려로 통행하는 문이 있어 낮에는 개방하고 밤에는 문을 닫아 왕래를 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비바우는 뒷산의 암벽에 흘러내리는 자연수로 인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베를 펴
내건 것과 같이 보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베바우, 포암이라고도 불렀고 수세골은 옛날에 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마을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은 황토로 덮혀 기름진 옥토로 변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곳은 물이씻어준 고을이라고 하여 수세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중점은 조선시대에
옹기 점방이 많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황정모리는 1800년 경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황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薄福한 삶...사는게 왜이리 힘이드냐
안부(16:07)
암릉으로 된 능선으로 오를수가 없어서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울고 싶은데 빰맞은 격이랄까...체력이 점점 소진되어 가는데
오르막이 아닌 사면길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삼각점봉?(16:13)
자세히 보니 삼각점이 아닌 월악산국립공원 경계를 나타내는 지적도근점이 2개나 있다.
자세히 본 지적도근점
안부(16:19)
안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오르막 능선 좌측으로는 마사토로 된 대머리 능선이 보이는데 이곳이 모래산이란다
모래산(沙山:641m:16:23)
등로 아랫쪽에 모래밭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서 모래산이라 지명을 붙인 모양이다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해발 641m’라고 표기가 되어 있고 트랭글앱에서는
모래산이라고 하나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조차 그저 무명봉일 뿐이다
이정표(마패봉8.0km 부봉삼거리4.0km ← 하늘재0.6km→) 가 서있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하면서 문경택시를 호출한다.
여기서 모래재까지는 0.6km밖에 안 남았고 내리막이라 20분이면 충분히 하늘재에
도착할 것 같다...오늘은 너무 여유를 부리면서 볼 것 다보고 쉴것 다 쉬면서 悠悠自適
걷다보니 내가 예정했던 시간보다 2시간 가까이 더 걸린 느낌이다.
시계를 보니 문경터미널에서 17시 50분에 동서울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는 충분히 타겠다.
내리막길에는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하늘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포암산(布巖山)
포암산은 조령 5악으로 꼽히는 명산으로 인근의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등과 함께 조령5악으로
손꼽히는 포암산(962m)은 월악산국립공원 내 충주시 상모면과 경북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옛날에는 베바우산이라고 하였다... 문경읍에서 갈평리를 지나 관음리로 접어들어 하늘재를 보고
오르면 하늘을 가득 채우며 우뚝 솟은 포암산이 마치 커다란 베를 이어 붙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또한 희게 우뚝 솟은 바위가 껍질을 벗겨 놓은 삼 줄기, 즉 지릅같이 보여서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보이고, 계립산(鷄立山)이라고도 한다
로프지대를 지나니...
2번째 데크목 계단을 만나고...잠시후에 소나무를 식재한 밭이 보인다.
2017년 11월 12일 나홀로 3차 북진길을 걸었을 때는 오미자밭이었는데
타산이 안 맞았는지 오미자가 아닌 소나무를 식재해 놓았다.
소나무 조림지를 지나는데 서너그루의 밤나무에서 밤꽃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밤꽃 향기는 남정네의 정액 냄새와 흡사하다고 하여 여인들이 좋아하는 꽃이라 했던가...
믿거나 말거나...
소나무 조림지를 지나니 등로를 살짝 돌려놨다.
다시 우측으로 내려가니 안부가 나오고 스텐레스 물탱크가 보인다
물탱크(16:40)
포암산이 보이고 예전에 이곳에 산림청에서 공원을 조성하여 “백두대간 하늘재“라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그건 보이지도 않고 공원 자리에는 개망초를 비록한 잡풀들이 무성하다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서 하늘재로 내려선다.
하늘재에 있는 국공파 초소(16:42)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구나...아무래도 모래산에서 기사에게
전화를 하고 거기서 빠뜨린 모양이다...갑자기 앞이 컴컴해지면서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찾지 않으면 갈 수도 없다...베낭을 초소옆에다 벗어놓고
혹시 등로에 빠뜨릴수도 있으니 천천히 주위를 살피면서 모래산으로 향한다
다시 모래산(17:02)
20분에 걸쳐서 모래산으로 다시 오니 모래산 이정표 옆에 내 스마트폰이 얌전히 쥔장을 기다리고 있다.
문경 택시기사의 전화질로 핸드폰이 불이 날 지경이다.
내가 전화를 해서 전화기를 잃어버린 연유를 설명하고 뛰다시피 하늘재로 향한다.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 했거늘...서두르지 말거라
다시 하늘재(17:13)
하늘재는 지금 한창 공사중이라 어수선하다...윗쪽 공원에 있었던 돌기둥도
아래로 내려왔고, 예전엔 없었던 산신각도 새로 생겼고, 예전에 있었던
주막집은 형체조차 찾아볼 수가 없이 사라져버려 아쉽기만 하다.
문경시에서 세운 계립령 유허비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이 고개가 계립령이다.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산, 대원령(大院嶺)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 3년(156년) 4월에 죽령과 조령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大路)로서 죽령보다 2년 먼저 길을 열었다.
계립령을 넘어서면 곧 바로 충주에 이르고, 이곳에서부터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로서, 삼국시대에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및 백제가 함께 중요시 한 지역으로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신라는 문경지방을 교두보로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하였고, 이 계립령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연개소문과 온달장군의 실지(失地)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왕건과 몽고의
차라대가 남하 할 때, 또한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몽진(蒙塵)할 때도 이용했을 가능성
등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의 성지로 충북과 문경지방에 이르는 계립령로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그 유적과 사지(寺址)만이 전한다.
조선조 태종 14년(1414년)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고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온 계립령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이 영을 넘는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를 전하고자 이 곳에 유허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자 한다.』
하늘재(天峙:525m:17:13)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觀音里)로 시작해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현재 수안보면)
미륵리(彌勒里)로 연결되는 길로서 관음리쪽은 2차선 포장도로이지만 미륵리쪽은 비포장도로로
되어 있는 곳에 탐방 안내소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 이사금 3년(156년)에 “여름 4월에 계립령(鷄立嶺 :하늘재의 옛 이름)
길을 열었다”라는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에 초의 기록이 있어서 문헌상 가장 오래된 옛길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문헌비고, 만기유람, 동국여지승람 등 다수의 고문헌과 자료에 나타나고
있는 옛길이다...하지만 조선 초기에 문경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가장 오래된 옛길로 알려진 하늘재의 얽힌 역사적 사실(史實)을 살펴보면 고구려(高句麗) 온달(溫達) 장군이
“계립령(鷄立嶺)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 라며 출사표(出師表)를 던질 정도로
삼국의 요충지(要衝地)였던 곳이다.
불교 용어로 관음은 현세불이고 미륵은 내세불이다
문경읍 관음리는 현세이고 상모면 미륵리는 내세이니
하늘재는 미래와 현세를 넘나드는 고갯길이란 뜻인가?
아니면 그 그 중간쯤 되는 고개일까.
2000년 가까운 세월 만큼이나 고개가 품은 역사는 깊다.
계립현, 마목현, 마골산, 마골참, 대원령, 한훤령 등 시대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여럿인
하늘재는 삼국시대에는 정치·군사적 요충지였고, 민초들의 삶의 통로이자 불교문화의 전승로였다.
또 온달장군의 기백이 서려 있고, 궁예는 상주지방을 치러 갈 때 이 고개를 넘었다.
홍건적을 피해 내려온 고려 공민왕의 피란행렬도 이 땅을 밟았고,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의 한이 스며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이 고개가 계립령이다.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산, 대원령(大院嶺)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 3년(156년) 4월에 죽령과 조령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大路)로서 죽령보다 2년 먼저 길을 열었다.
계립령을 넘어서면 곧 바로 충주에 이르고, 이곳에서부터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로서, 삼국시대에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및 백제가 함께 중요시 한 지역으로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신라는 문경지방을 교두보로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하였고, 이 계립령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연개소문과 온달장군의 실지(失地)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왕건과 몽고의
차라대가 남하 할 때, 또한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몽진(蒙塵)할 때도 이용했을 가능성
등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의 성지로 충북과 문경지방에 이르는 계립령로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그 유적과 사지(寺址)만이 전한다.
조선조 태종 14년(1414년)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고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온 계립령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이 영을 넘는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를 전하고자 이 곳에 유허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자 한다.』
새로 조성된 하늘재 산신각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라고
적힌 글이 나오는데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는 의미다.
길에 대한 첫 기록이고 기록상 최고(最古)의 옛길이다. 이어 2년 뒤인 서기 158년에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2,0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하늘재는 정말로 다양한 이름을 가진 고갯길이다.
신라시대에는 계립령(鷄立嶺)이나 마목현(麻木峴), 또는 마골점(麻骨岾), 고려시대에는 계립령 북쪽에
대원사가 창건되면서 절의 이름에서 따 대원령이라 불렀고, 이후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고개 부근에
한훤령산성이 있어 한훤령이라고도 불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이 약화되어 한원령으로 변했다.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강으로 진출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전략거점이다 보니 하늘재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했으며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몽진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으며 신라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향할 때 피눈물을 머금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한다.
하지만 하늘재는 조선태종 14년(1414년)에 지금의 문경새재인 조령이 개통되면서 군사적 요충지와
사통팔달의 아성을 한꺼번에 조령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하늘재에서 하늘이란 무슨 의미로 쓰인 말일까·
하늘재라는 명칭의 유래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고개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고개
아래에서 고개 정상이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늘에 닿아 있다는
표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도 고갯마루의
높이가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 않으며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 사이의 고갯길 중 가장 낮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늘재의 '하늘'의 의미는 '하늘(天)'로 볼 것이 아니라 다른 말에서 변이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가 있다.
택시기사가 나를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 있다...혹시 다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서
얼른 택시를 타라고 하다...이 때의 시간이 17시 25분이다
17시 50분 서울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냐고 물으니 조금 힘들겠다고 하면서
죽기 살기로 달려서 문경터미널에 도착하니 서울가는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 나가고 있다
문경터미널(17:50)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쳐 버렸다...택시기사에게 지금 더워서 미치겠으니
깔끔하게 씻을곳이 없냐고 하니까...문경온천으로 모시겠단다.
거기는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니 다른곳은 없냐고 물으니 문경은 청정지역이란다.
이보소...동네야 청정지역 인지는 모르겠으나 온갖 인간군상들이 모이는 곳이라 불편하다고
했더니 조금은 난감해 하다가 터미널 아래에 있는 공용주차장 화장실로 가란다
참고로 문경터미널에는 화장실이 터미널 밖에 간이화장실 형태라 씻을수가 없다.
택시기사가 가르쳐준 공용주차장 화장실에 가서 문을 걸어 잠구고 20여분동안
호스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니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다.
화장실을 전세내어 샤워를 한 후에 버스표를 예매한다...특이한 건 좌석 지정이 없고
선착순으로 알아서 타고 가란다...베낭에 남은 쥬스와 산악회 옥희씨가 준 떡하나로
저녁을 대신하고 20여분간 대합실 의자에서 멍때리기를 한다
문경터미널 버스 시간표
문경발 → 동서울터미널행 버스 티켓
이 버스는 상주 은척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들렸다가 괴산 연풍을 경유한 후
중부내륙고속도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버스에 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버스는 올림픽대로로 들어서고 있다.
문경을 출발하여 2시간 반만에 서울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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