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 산행일자: 2022년 08월 14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안개와 높은 습도
☞ 산행거리: 도상거리 12.9km + 들머리 7.5km +날머리 6.3km=26.7km / 13시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와운마을 입구-탁용소-금표교-병소-병풍교-병풍소-명선교-옥류교-대웅교
제승대-신선교-소원교-함박골 입구-반달교-출렁다리-간장소-유유교
박영발 비트 갈림길-연하교-막차-선봉교-화개교-샘터-화개재-1,343.1m봉
토끼봉-쉼터-안부-운봉무덤-쉼터-명선봉-연하천대피소-음정마을 갈림길
삼각고지-암봉-석문-외부자 바위-너럭바위-부자바위-쉼터-형제봉
형제바위-전망바위-안부-조망바위-석문-벽소령대피소-조망바위-바른재
안부-1,478m봉-안부-덕평봉-선비샘-선비샘 전망대-안부-안부-망바위
칠선봉-안부-1,608m봉-안부-영신봉-세석대피소-음양수 갈림길-세석교
1,400고지 전망대-북해도교-천팔교-홍수 예.경보기-거림탐방지원센터
☞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 함양군 마천면, 산청군 시천면
갑자기 지리산의 야생화가 그리워진다.
원래 계획은 다음주에 지리산에 가서 반야봉의 落照를 감상하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곳에 있는 절집 묘향암에서 하루밤을 留宿한 다음 성삼재에서
세석산장까지 지리산 구간을 마치려고 계획을 잡았는데 후배산꾼들과의 일정
조율이 잘 안되어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싶어서 토요일에 오전만 근무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지리산 산길을 걸으려고 했는데, 세상사가 내 맘대로
안되듯 갑자기 예정에 없던 고객과의 늦은시간까지 상담을 하고나니 진이 빠진다.
그래도 이 나이까지 정년 퇴직이 없는 직업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와서 간단하게 1시간정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밤 11시경에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인월행 버스표
자정 1분전에 지리산 백무동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탑승한다.
토요일 늦은 밤에 백무동으로 향하는 버스는 23:50, 23:55, 23:59분 3대가
거의 동시에 출발하는데 모두 다 滿車 수준이다...차에 오르자마자 피곤했던
탓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서
잠에서 깨어나 차창밖을 바라보니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서상i.c를 지나고
있는데 최근에 비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고속도로 노면이 많이 파인 모양이다.
잠시후에 버스는 함양i.c를 빠져나와 함양터미널에서 1명이 내리고 잠시후에
인월 버스 터미널에서 나혼자 내리고 버스는 백무동으로 향한다
인월버스 터미널(03:10)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에 불이 켜져 있으나 택시 승강장에는 택시가 한대도 안 보인다
이곳에 오면서 자주 이용하는 인월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질 않는다.
하기사...이 시간에 전화를 한 다는 자체가 예의가 아니제...
마땅히 물어볼 곳도 없다...편의점 앞에 대엿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봤으나
자기들도 휴가를 나왔는데 펜션에서 자기들을 태우러 오는 차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날이 밝으며 택시가 오겠지하고 택시 승강장 의자에서 멍때리기를 하고 있는데
20분쯤 지났을까...택시가 한대 보이기에 손을 들었더니만 차를 세워준다.
이곳에서 성삼재까지 예약한 등산객을 태워주고 오는중이란다
택시를 타고 와운마을로 가자고 하니까...이 기사는 와운마을 방문객인 알았던 모양이다.
와운마을을 왜가요 하는거다... 화개재로 올라가려는 등산객이라고 하니까.
택시비가 25,000원 나오는데 30,000원을 달라고 하기에 일단 가자고 하고는 탄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반선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반선마을에서 와운마을
입구까지는 약 2.5km의 거리라 와운마을 입구까지 택시를 타기로 한다.
가는 길에 기사양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와운마을 입구에 있는 와운교에 도착한다.
택시 요금은 22,500원이 나왔는데 30,000원이 좀 과하지 않냐고 하면서 돈이 없어서
걸어다니는 산꾼이 불쌍하지도 않냐고 하니까...기사양반! 쿨하게 5,000원을 깍아준다.
기사양반과 유쾌한 작별을 하고 택시에서 내린다
오늘 이곳으로 오면서 산행코스와 교통편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1, 버스를 타고 백무동까지 가면 곧바로 산행을 시작하면 택시비를 아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거쳐 세석으로 오르는 길은 거리도 길고,
경사도 심해 뱀사골로 오르는 등로보다 1시간 반정도 더 걸린다.
거기다가 날머리를 화개재로 하여 반선마을에서 어차피 인월까지 택시를 타야하고
인월에서 서울가는 교통편이 불편하지만 산행 코스는 역산행이 아닌 정산행으로
하는 점은 유리하다.
2, 오늘 내가 시도하는 와운마을 입구에서 뱀사골을 통과하여 화개재로 오르는 코스는
한신계곡 능선보다는 등로가 완만하고 거리가 짧아 초반에 시간을 좀 줄일수 있고,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와서 원지로 나가면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20분
단위로 있어서 설령 서울에 늦게 도착하더라도 남부터미널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 큰 걱정이 없어서 이곳으로 산행 들머리로 잡았다.
와운마을 입구(04:05)
택시에서 내리니 와운마을로 통하는 와운교가 보이고 어둠속에 뱀사골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엄청나게 크다...와운마을 유래판과 국공파 초소를 비롯한
여러개의 표지판이 어지럽게 서 있는 와운마을 입구에서 나홀로 산행을 준비한다
와운(臥雲)마을은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의 지리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마을로
1595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鄭씨 일가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일제시대와 6.25동란때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강점기에는 목기를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1980년대는
한봉(韓蜂)으로 생계를 이었다
와운마을은 이곳에 도로를 따라서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하며 10여가구가
민박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데 과거에는 산골마을로 영화촬영 장소로도
유명했고 수령이 500~800년된 천년송(千年松:천년기념물 제423호)이 이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가 잘 나있어 옛 정취는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4:10)
국공파 초소를 지나니 데크목으로 설치한 뱀사골 탐방로란 시설물이 나오고
어둠속에 보이지도 않는 뱀사골의 계곡물이 마치 천둥 번개를 치듯이 굉음을
울리면서 들려오지만 어둠속에 홀로걷는 산꾼에겐 그건 큰 장애물이 되질 않는다.
헤드렌턴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걷다보니 탁용소 안내판을 만난다.
뱀사골 등로는 백무동과 함께 지리산 북쪽 능선의 산행 관문이긴 하지만
백무동과는 달리 접근하는데 교통이 불편함 때문인지 들머리보다는
날머리로 많이 이용하는 편이라 등산객이 한명도 없구나...오늘 산행을
하면서 화개재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에 뱀사골 계곡을 전세되어 걷는
바람에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탁용소(濯龍沼:04:15)
큰 뱀이 목욕을 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을 하나 이곳 암반위에 떨어져
100여m나 되는 자국이 생겨나고, 그 자국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탁용소 주위가 뱀사골 계곡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하는데 어둠속에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지만 호젓하게 홀로걷는
독립군에겐 아무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탁용소에서 금포교까지의 거리가 10여분정도 밖에 안 되지만 뱀사골에서 계곡미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는데 어둠속이라 慧眼으로만 감상한다.
뱀사골은 가파르게 파인 협곡형 계곡이 아니라서 큰 폭포같은 곳은 발달해 있지
않지만, 그 대신에 계곡 암반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매끄럽게 파이고 다듬어져서
기기묘묘한 소(沼)와 담(潭)을 만들어 놨다
금표교(04:24)
와운마을을 출발하여 화개재로 향하는 길에서 첫번째 만나는 다리이다.
해가 많이 짧아진 모양이다...1개월전만 하여도 이 시간대이면 黎明이
시작될 시간인데 뱀사골의 계곡은 黎明은 생각치도 않는 모양이다.
어둠속에 걷는 무박산행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범여이지만, 牛步 걸음으로는
지리산이나 설악산은 당일로 걷는다는 언감생심이라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다.
肉眼이 아닌 慧眼으로 들어선 지리능선...이것도 나름 괜찮은 산행인 듯 하다.
더군더나 뱀사골 계곡길은 지리산을 찾는 대부분의 탐방객들에겐 들머리가 아닌
날머리로 선택하는 등산로이기에 어둠속이긴 하지만 홀로 걷기에는 더 없이 좋다.
계곡에서 살짝 멀어졌는지 뱀사골의 물소리는 데시벨이 살짝 줄어든 느낌이다.
지난해 6월에 묘향암에서 이 길을 내려올 때 걸었으니 1년이 조금 넘었구나.
자꾸만 빨라지는 인생시계가 야속하기만 하다...가야할 산은 많은데 시간은
流水같이 빠르고 그에 반비례하여 체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니...
그래!...順應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자꾸나.
어둠속에서 용이 못되고 이무기가 살았다는 뱀소는 어딘지도 모르고 통과하여
녹슨 철계단을 오르면서 다시 물소리는 폭포수처럼 크게 들리고 철난간 아래로
어둠속에 병소(甁沼)라는 소(沼)를 만난다
병소(甁沼:04:43)
뱀사골 계곡에는 많은 명소들이 있는데 요룡대(搖龍臺), 탁용소(濯龍沼), 뱀소 등은 용이나
뱀에 관련된 소(沼)이지만, 병소(甁沼)는 소(沼)의 모양이 마치 호리병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어둠속이라 소(沼)가 잘 안보이긴 하지만 똑닥이카메라에 후레쉬를 장착(?)하여 찍었더니만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계곡에 흐르는 소(沼)의 물길은 보이는구나.
병풍교(屛風橋:04:45)
병풍교를 지나서 뱀사골 계곡을 건너니 지난해엔 없었던 쉼터가 새로 생겼다.
아직까지 쉴 시간은 아니라 꾸준히 걷는다... 바람한 점 없는 날씨에 습도가 높긴
하지만 물가를 걸어서 그런지 아직까진 큰 어려움없이 화개재로 향한다
병풍소(屛風沼:718m:04:50)
뱀사골 계곡에는 여울과 소(沼)가 교대로 분포하여 수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沼)는 계곡물이 흘러가다 균열이 많이 생긴 약한 바위를 만나면 집중적으로 바위를 깎아
형성되게 되는데 뱀사골 계곡에는 간장소, 병풍소, 병소, 등 다양한 소가 존재하며 그 중에
병풍소(屛風沼)는 계곡물에 의해 깎인 모양이 병풍(屛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병풍소는 뱀사골의 제1경으로 소(沼)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짙푸른 소와 폭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계곡으로 난 등로에서는 많이 떨어져 있어 등로에서 뚜렸이는 안 보인다
명선교(明善橋:04:52)
옥류교(玉流橋:04:54)
뱀사골 계곡에서 보물찾기 하듯 몇개의 다리를 들락거리면서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화개재로 향한다
대웅교(大熊橋:710m:04:58)
뭔 넘의 다리가 이렇게도 많은지 그래도 고마운건 무명다리가 아닌 지명이 붙어있다
제승대(祭僧臺:720m:05:00)
1,300여년 전 송림사 고승인 정진스님이 불자들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하여 제(祭)를 올렸던
장소로 소원의 영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제승대라 불린다고 하는데 어둠속이라 확인은
어려우나 민초들의 애환을 대신한 스님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고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신선교(神仙橋:05:01)
어둠속이지만 간간히 뚜렸하게 보이는 계곡의 무명폭포가 世俗에 찌들었던
범여의 肉身을 편하게 해준다...그러기에 매주 산에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소원교(所願橋:05:03)
예전의 철제로 되어 있었던 다리는 너무 낡아서 그랬는지
데크목을 재료로 한 새로운 다리로 변신하였다
이름없는 예전의 철계단을 지나니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 함박골 입구가 나온다.
함박골 입구(05:20)
이곳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뱀사골 계곡에서 아주 멋진 이끼폭포가 나오고
그 윗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곳에 위치한 묘향암을 지나서
중봉(지리산에는 중봉이 2군데 있음), 반야봉, 심마니골로 이어지는 능선인데
등로가 아주 난해한데다 1년내내 국공파들의 감시가 심한 비탐구간이다.
요즘에는 이끼폭포로 이어지는 등로의 감시가 아주 심하다고 한다.
얼마전에 이끼폭포에서 등산객 한명이 사진을 찍다가 실족사하는
사고가 있은 이후부터는 국공파들이 이곳에 CCTV를 여러대를
설치하여 탐방객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8월 27일에 나홀로 반야봉에서 월담하여 묘향대, 이끼폭포를 지나
험하고 험한 함박골 계곡인 이곳으로 내려온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끼폭포를 다시한번 갈 수 있으런지 모르겠다.
묘향암을 수호(?)하고 계시는 호림스님을 잘 계시는지?
스님!...엊그제가 우란분절(칠월 백중)이었는데 우째 잘 보내셨나요.
빠른 시일내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그때 茶談을 한번 나눕시다.
이끼폭포에서 인증샷...2016년 8월 27일
반달교(05:30)
“뱀이 죽은 골짜기”란 뜻의 뱀사골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실제 뱀이 많이
잡히는 골짜기로 유명했다...약효가 좋다고 소문난 흑질백장(黑質白章), 홍사(紅蛇),
청사(靑蛇) 들을 잡아서 팔면 큰 목돈을 쥘수 있었기에 자루와 집게를 들고 숲을
누비며 뱀을잡는 마을 주민들이 많았고, 소득도 짭잘했다고 한다.
그 당시 무분별하게 뱀을 남획하는 바람에 요즘에 뱀사골 뿐만 아니라
지리산에서 뱀을 만날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뱀사골에 서서히 여명이 시작되면서 주위의 사물들이 보이고 음력 칠월
열이렛날의 새벽달은 서서히 저물어가기 시작하는데 화개재로 향하는
범여의 발걸음은 비온후의 높은 습도의 영향인가...초반임에도 발걸음이 무겁다
뱀사골에는 옛날 골짜기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매년 칠월칠석날 밤이면
주지스님이 다음날이면 매번 스님이 사라져 마을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님으로
승천하였다고 믿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산대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칠석날에 주지스님에게
소매에 비상약을 달아 입혀 예년과 같이 독경(讀經)을 하도록 시켰다.
새벽녘이 되어 큰소리를 내며 뱀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기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가서 보니 용이 못된 큰 이무기가 죽어 있어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
그 동안 사라진 스님들은 이무기의 재물이 되었던 셈이다
그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를 반선(半仙)이라 불러 동네이름을 언제 부턴가 반선(伴仙)으로 불렀다고 한다.
날이 밝으면서 바라보이는 하늘은 먹구름이 끼었있고, 예전같으면 寒氣를
느낄만큼 추웠던 뱀사골 계곡이지만 오늘은 바람한 점이 없어서 초반부터
컨디션 조절이 그리 쉽지는 않는구나...출발전에 확인한 이곳의 날씨는
오전에는 잔뜩 흐린 날씨였고, 오후부터는 맑은 날씨라고 했는데 요즘의
기상청 날씨는 하루전 날씨도 제대로 못맞추는 구라청이 되어 버린지
오래이고,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구라청의 예보를 그리 믿는 사람도
많지 않은듯 한데 범여도 그 중에 한사람이다
출렁다리(05:35)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하는데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澄潭)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만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그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서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까지 12km,
장장 39여리의 물줄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선인대,오룡대, 뱀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리고 뱀사골의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데크목으로 만든 둘레길을 따라 걷는 기분으로 참으로 편하게 산행을 할 수 있는 계곡이다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쉼터의자가 보이고...
의자 앞에는 소금장수의 哀歡이 서려있는 못인 간장소의 안내판이 보인다
간장소(05:38)
간장소는 옛날 영.호남 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화개재에서 약 2.7km 아래에
위치한 소(沼)로서 시원한 검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옛날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장수의 소금짐이 이 소에 빠져 간장이 되었다는 설과 이 소의 물을
마시면 간장(肝腸)까지 시원해진다하여 간장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화개장터에서 거래된 소금이나 해산물이 민초들의 등짐을 수송
수단으로 하여 화개재와 뱀사골을 통해서 인월이나 산내 등 내륙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간장소의 전설같은 것이 유래되었을 것이다
간장소를 지나면서 화계재를 향한 고도를 조금씩 높히기 시작한다.
전 세계가 기후변화의 탓인가?...한 여름이긴 해도 예전에 이맘때쯤이면
바람막이 자켓을 하나 걸쳐야 할 정도의 寒氣를 느끼는 뱀사골이었지만
오늘은 바람한 점 불지않고 높은 습도로 인하여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쏟아지니 이것 또한 무슨 조화인지...세상사가 다 변해가는데 나만
낙오자로 시대에 뒤쳐지는 걸까?
유유교(幽幽橋:05:50)
유유(幽幽)을 직역하면 “깊고 그윽하다”는 뜻인데 뭘 의미하는지?
와운마을 입구에서 간장소를 지나 유유교까지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길이
이어지다가 유유교를 지나면서 부터는 너덜길 오르막이 이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이름없는 폭포의 물소리가 청량제을 역할을 하니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박영발 비트 갈림길(05:55)
우측의 돌무더기 우측으로 박영발 비트가 있는 폭포수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면 박영발 비트와 묘향암~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비탐구간 등로가 있으나
원시림에 가까운데다 국공파의 단속이 엄청 심한 곳으로 지난해 6월말경에
묘향암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가슴 조이면서 걸었던 길이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인들 동족상쟁의 아픔을 간직하지 않는 계곡이 있으랴마는 폭포수계곡도
그 아픔을 비켜나지 못한 곳인데 그 이유는 6.25동란 당시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을 맡았던
박영발(朴榮發:1913~1954) 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국군토벌대에 저항하며 빨치산의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비트가 있는 곳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한겨레 신문 인용)
경북 봉화군 출신인 박영발은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적색노조 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 일하던 중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다.
미 군정 초기에 좌익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고,
전평의 집행위원도 겸임했했으며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1947년경에 월북하였고, 전문일꾼 육성 정책에 따른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으며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하였을 때 합법적으로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곧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전남 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2021년 6월 20일에 갔었던 박영발 비트
2005년 2월 14일 3회에 걸친 수색 끝에 박영발 전남도당위원장의 최후 비트를 발견했다.
어마어마힌 바위 안에 형성된 자연동굴이 있으며 밑으로 내려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하는 복층구조로 이곳에서 '조국출판사' 라는 이름으로 각종 유인물들을 발행했다.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를 주로 사용했다.
이 동굴에서는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으며, 그리고 여성비서를 제외한 일곱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박남진(54년 12월 체포)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5지구당 위원장이
빗점골에서 전사하자 박영발 위원장의 보위대가 암벽 지대가 많은 반야봉 아래에
비트를 마련해 그 해 10월 말부터 다음 해인 1954년 2월 박 위원장 전사까지 약 4개월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했다.
*비트란 뜻은 비밀아지트의 준말이다
여태껏 편하게 등로는 잊어버라는 얘기인지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물기를 잔뜩 머금은 돌로된 등로는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안영교(安永橋)를 지나면서 고도는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 山竹사이의 돌로 된 등로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지리산의 야생화와의 交感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맨 처음 만나는 야생화가 짚신나물이다.
줄기에 달린 털들이 짚신에 달라붙어 짚신과 함께 여기저기를 여행했다는데에서
유래했다는 짚시나물꽃...학명의 ‘agrimonia’는 ‘가시가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pilosa’는 ‘부드러운 털’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것이다.
서양에서는 한 왕이 독살의 위험에서 짚신나물을 먹고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마법의 풀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유용한 식물이다.
본격적인 야생화와의 遭遇로 인하여 범여의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느려지는데 남의 눈치 안보고 걷는 독립군의 특권이 아니던가...
산수국...생존을 위한 벌들을 유인하기 위해 헛꽃(무성화)과 참꽃(유성화)의
완벽한 하모니는 가히 환상적이다...식물도 이럴진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남을 비방하고 약점을 들춰네 온갖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추악한 형태가
역겹기만 하다...세속의 지저분한 잊어버리기에는 산만큼 좋은곳이 없는듯 하다.
돌로 된 등로를 지나서 철계단으로 올라서는데 연하교란다.
연하교(煙霞橋:06:30)
야금야금 고도를 높혀서 올라가니 예전에 없었던 쉼터가 있는 막차에 도착한다
막차(1,088m:06:35)
이정표 아래에 ‘막차’라는 표시가 나오는데 예전에 지리산 벌목을 할 때
산판 차량이 드나들 때 쓰는 표시라고하며, 이곳까지 차량이 올라온 모양이다
막차 쉼터...아직까지는 쉬지않고 여기까지 꾸준히 올라왔다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조금은 편하게 올라간다
선봉교(先鋒橋:06:45)
폭포수처럼 우뢰같이 들리던 물소리는 이제 앙증맞은 실개울의 물소리로 변해 버렸다
선봉교를 지나면서부터 뱀사골의 상류지대는 원시림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껏 편하게 걸어온 등로는 꾸미지 않은 투박한 돌길로 변하지만 그래도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하는 지맥길에 비하면 고속도로이긴 하지만
오늘 산행길에는 조금 힘이드는 구간이라는데 아직까진 그런 느낌이 오질 않는다
이곳을 ‘들돌골(擧石谷)’이라 부르는데 이 돌밭길을 두고 하는 말이란다
화개교(花開橋:06:53)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는 오르막을 오르니 좌.우로 희미한 등로들이 겨우 보이는데
이 길은 예전에 도벌꾼들과 해방 전후에 지리산에서 숨어지낸 빨치산들의 루트였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반야봉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명선봉으로 연결되는 길은듯 싶다
고단한함은 인간사에만 있는건 아닌가 보다...
화개재가 가까워질수록 야생화의 종류가 늘어나는데 그중에서도
참나물의 개체수가 가장 많이 보이는구나...너가 참 많이 보고 싶었다
게으름을 피우는 투구꽃은 아직도 꽃이 필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다
긴산꼬리풀도 서서히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흰진범도 명함을 내밀어대니 어찌 너와의 눈맞춤을 아니 할 수 있단 말인가.
흰진범(꽃말:용의 모자, 용사의 모자)
원래의 본명은 진교(秦荞)였으나 이것을 잘못 표기하여 진봉(秦芃)이 되었고
또 다시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면서 내 의지와는 전혀 다른 진범(秦凡)으로
잘못 읽히면서 진범이 되었다는 슬픔을 간직한 꽃이다...홍길동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는 庶子처럼 말이다.
진범은 본래 오독도기라도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표기를 하면서
진범(秦范)이라고 불렀으며, 오독도기는 한라투구꽃의 뿌리를 말린것을
말하는데 진범도 한라투구꽃과 비슷하여 줄오독도기라고 부른다
맹독성이 강하지만 뿌리는 말려서 진통제나 치풍제 등 각종 약재로
사용하나 독성이 강해 주의해야 하며, 민간 요법으로는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렸을 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염한 자태로 범여를 유혹하는 참나물꽃
긴산꼬리풀도 다시한번 눈맞춤을 하고...
한참을 올라왔건만 아직도 고도를 100m이상을 더 올라가야 하는구나.
지리산은 아무에게나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정상을 오를수록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오늘 산행중에
지리산의 멋진 仙景을 감상하기는 애초부터 포기해야 할 모양이다
입을(봉오리) 닫은채 다소곳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 피나물꽃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모싯대도 보이기 시작한다
샘터(07:05)
水量은 그리 많지 않으나 그냥 지나치는 건 샘터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시원한 물 한바가지를 들이키고 화개재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샘터 맞은편에는 뱀사골탐방지원센터가 있는데 페가처럼 보인다
숲속에 묻혀버린 뱀사골탐방지원센터
예전에는 국공파들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산꾼들에게 엄청나게 갑질을
했는데 지금은 상주를 하지 않는지 풀섶에 묻혀서 폐가처럼 보인다.
뱀사골탐방지원센터에서 200여m를 따라서 올라가면 화개재 정상이 나온다.
참취꽃도 보이고...
물봉선도 보이나 생각보다 뗏갈이나 꽃의 상태가 온전치 않아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와운마을 입구에서 출발하여 7.5km를 3시간 조금 넘게 쉬지않고 논스톱으로 화개재에 도착한다
초지가 무성하게 자란 넓은 공터에 황량하기만 하다...옛날 남원과 하동사람들의 물물교환
장소 역할을 톡톡히 했고 장사치와 민초들의 왕래가 분주했던 화개재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이곳부터 오늘의 본격적인 대간 마루금이 시작된다
화개재(花開峙:1,316m:07:15)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 종주 코스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는 곳으로 먼 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하며, 옛날 산내장터에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다 너무 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 서려있다.
옛날 화개장터의 소금과 해산물, 남원의 산내와 운봉 그리고 하동의 화개의
내륙 특산물을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로 헬기장으로 쓰였던
넓은 공터(장터)에는 지금 식생대 보호를 위해 출입을 막고있다.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긴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터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등이 인월,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70년대 가수 김상진이 불러서 히트쳤던 「이정표없는 거리」
“이리가면 고향이요 저리가면 타향인데”.....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박대림 작사, 정민섭이 작곡했다.
진주가 고향인 작사가 박대림은 1970년 뱀사골을 거쳐 화개재로 올라와서 이
이정표를 보고서 지리산의 넓고 장대한 산줄기에 매료되어 이 곡의 가사를 썼다고 한다
화개재에서 바라본 삼도봉(날라리봉)은 갑자기 밀려온 짙은 안개에 숨어버렸고,
피아골(전남)과 목통골(경남)의 도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봉(일명:날나리봉)은
흔적조차 보이지도 않는 오리무중이다.
쉼터가 있는 직진의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등로는연동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초지 아래쪽의 화개재 쉼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등산객은 한 명도 안보인다.
이곳에서 아침상을 펼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 조금은 더 걸을수 있을것 같아서
토끼봉까지 가볼 예정이다.
예정에 없었던 시설물들...플랑카드의 문구를 보면 마치 수술대에 오를때
의사들이 수술전에 각서를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일종의 면피 작전이랄까
대간길의 본 궤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앙증맞은 모싯대가 많이 보이는구나.
1,343.1m봉(07:23)
암릉으로된 정상은 오르지 않고 좌측으로 이어진 제도권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편안한 산죽길을 걷다가 이내 완만한 오르막길로 오른다
속임수의 달인인 산수국도 자주 만난다
참바위취...비가 자주와서 그런지 바위에서 기생하는 참바위취가 아주 곱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향하는 등로는 완만한 등로이긴 하지만
은근히 산꾼을 지치게 하는 코스이다...이럴때일수록 가급적
천천히 걸으면서 페이스 조절을 해야한다...하기사 산이란 곳이
어디 쉬운곳이 있겠냐마는....
늦은 계절에도 참취꽃의 자태는 곱고 도도하다...산이 높아서 그런 모양이다.
과일도 지대가 높은 곳에서 생산되는 과일이 맛있듯이
야생화도 확실히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꽃들의 색깔이 곱다.
이정표가 서있는 쉼터에 올라서니 산죽길이 시작되고...
산죽길 사이의 등로에는 토사유출을 막기 위함인지 야자메트를 깔아놨다.
참나물꽃도 산죽 사이로 많이 보인다
지리산의 등로는 최근에 비가 내렸는지 물기를 머금고 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삼나물이라 부르는 눈개승마는 서서히 이별을 준비할 모양이다.
그래!... 모든 일에서는 마무리가 중요하제.
산행은 하산길에 조심해야하고, 권력은 정상에서 내려올 때
잘해야 하고, 인생을 마감하고 저승길을 갈 때도 남한테 손가락질
안받고, 잘살다 간다는 소리를 들어야 제대로 산 인생인데
그걸 모르고 氣高萬丈하면서 꼴값을 떨다가 신세조진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취도 씨방을 거치면서 이별을 준비하고...
토끼봉이 가까워지면서 둥근이질풀들도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동자승의 한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듯한 동자꽃
푸른여로꽃도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면서 범여와 조우를 한다
올해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개시호를 만난다
개시호(꽃말:당신을 치유하고 싶다)
미나리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50cm 정도이고, 두 줄로
어긋맞게 나며 뿌리잎은 잎자루가 길고 타원형이며, 7~8월에 황색 꽃이 피며,
어린잎은 식용하는데 산의 나무 밑이나 풀밭에 자라며 우리나라 각지에 분포한다
둥근이질풀과...
산오이풀과 눈맞춤을 하면서 정신없이 걷다보니 토끼봉 정상이 나온다
토끼봉(卯峰:1535.3m:07:58~08:20)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 그러는게 아니고
반야봉에서 볼 때 24방위 가운데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토끼를 상징하기 때문에,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건 양식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묘봉(卯峰)이란 지명은 전혀 이치에도 맞지않다.
우선 지리산을 아니 우리나라의 명산에 대한 지명을 알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가 빠른편이다... 오늘 내가 걷고있는 지리산만 해도 그렇다.
최고봉인 천왕봉, 지리산에서 가장 여성스럽다는 반야봉,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버린 제석봉이 다 불교와 관련된 불교용어에서 가져온 지명이며,
토끼봉이라 부르는 묘봉도 예외가 아니다...묘봉(卯峰)이 아닌 묘봉(妙峰)이기 때문이다
묘봉(妙峰)이란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빤히 보이는 반야봉과,
묘향대를 이해해야 한다...佛家에서는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이는데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니고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다.
구족원만(具足圓滿) : 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
묘(妙)는 불교의 공(空) 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不可思議)... 즉 구족원만(具足圓滿)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즉,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이
말로써 억지로 표현하자니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라는 것이다.
불기의 초기 경전중에 하나인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에서는
“묘향(妙香)이란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 중에 3가지 향
즉, 계향(戒香), 문향(聞香), 보시향(布施香)을 말한다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 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
-유마경 제10품 『향적불품』
묘향은 갑옷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한다...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이 妙香은 자주 등장한다.
맞은편의 반야봉(般若峰) 아래 묘향대(妙香臺)가 있으니, 이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 될 것이니,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기(氣)는 서쪽으로는 노고단으로 흘러 화엄사로 내려가게 되고, 동쪽으로
흐르는 그 기는 이 묘봉(妙峰)으로 흘러 좌측으로는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일곱왕자와 관련된 하동 칠불사(七佛寺)로 가고
또 다른 하나는 법계사와 화엄사 등 지리산 골짜기 많은 사찰을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했다는 구례 연곡사( 鷰谷寺)로
가는 능선으로 이어진 이 봉우리가 토끼봉이 아닌 묘봉(妙峰)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토끼봉 정상은 헬기장으로 되어 있으며, 지리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아침식사를 겸한 휴식을 취한다.
헬기장 저 앞쪽에 여러명의 등산객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저 곳 토끼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겨울에 한 번 불을 때면 3개월간 溫氣가 돈다는 ‘亞’자 방으로 유명한
칠불사가 나온다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마치 인공적
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우아할 뿐 아니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림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쉬어가기 알맞은 고봉이다. 정상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에 등장하는 토끼봉은 전국에 44개가 있고, 토끼와 관련된 지명은
300여개 정도였는데, 대체로 지세가 토끼를 닮았다거나 토끼길처럼 좁은 벼랑이 있거나
풍수와 관련된 지명이 많았으나, 이곳의 토끼봉은 묘향대에서 마주보이는 봉우리라
풍수지리학상 묘향대의 안산(案山) 격으로 묘봉(妙峯)으로 부르다가 묘봉(卯峯)으로
와전되고 토끼봉으로 부르게 된 것은 아닌지?...
독림군의 아침밥상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다시 길을 떠나면서 묘향대 방향으로 바라보는데 예전과는 달리 숲이
너무 우거져 묘향암은 보이질 않는구나...지난해 묘향암 절집 마당에서
묘봉을 바라보았을때는 정말 환상적인 모습이었는데...보는 각도에 따라서 너무 다르다.
전기도 안들어 오는 움막집같은 절집에서 獨也靑靑 수행하시는 호림스님께서는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부디 강건하소...조만간에 찾아 뵙겠습니다
연하천을 향하면서 간간히 만나는 원추리꽃
쉼터(08:22)
쉼터를 지나면서 한없이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화개재에서 묘봉을 오른만큼 내려가는 느낌이다
분비나무와 구상나무 등이 간간히 生老病死를 실천하고 있는 고사목들이 보인다
안부(08:40)
우측으로는 간간히 등로가 보이는데 모든 등로가 대부분 화개면 대성리 빗점골로
이어지는데 빗점골은 해방 후에 남부사령관 이 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골짜기이다
이현상은 남조선 로동당의 간부로서 1949년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병사들을 이끌고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남부군)을 지휘했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이현상을 가리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외로운 방랑자’, ‘고독한 공화국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라 칭하고 있다.
이정표 뒷쪽의 능선으로는 원시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화개재를 지나면서부터는 유난히도 동자꽃과 조우를 많이
하는데 아무래도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운봉무덤(1,477.0m:08:57)
화개재를 넘나들며 운봉에서 소금장수를 하던 무덤이라는데
무덤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덩어리이다...국토지리원의 지도에서는
이곳을 운봉무덤이라 표기를 해놨는데 반야봉에서 삼도봉으로
내려오는 등로에 소금장수 무덤을 오인한 것은 아닌지?...
행여 근처에 무덤이 있나 주위를 살펴봤지만 눈을 씻고봐도 보이질
않고, 멋진 야생화들만 산꾼 범여를 반기는구나.
까실쑥부쟁이와 사촌처럼 보이는 참취꽃도 보이고...
독성이 아주 강한 흰진범도 간간히 만난다
오늘 산행중에 발에 걸리는게 참나물꽃이다
참나물은 진짜 나물이라는 뜻으로 향이좋고 맛이 좋아 나물중에
최고로 꼽히며 영양도 만점이고, 변비와 중풍, 노화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명선봉으로 향하는 돌길...고도 높이기가 시작된다.
이정표를 지나니...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육신은 조금 편하다마는
예년과는 달리 높은 습도에다 바람의 협조마져 없다보니 체력 소모가 많다
계단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미역취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니 대간 3차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편안 길을 만난다.
우측 능선이 오리지널 대간길이다.
저쪽 어디쯤에 총각샘이 있다는데 가보고 싶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아서
어디에 있는지 확신도 안서고 가야할 길이 멀어서 추측만 하고 길을 떠난다.
총각샘이란 1970년 7월 지리산악회에서 한 심마니가 혼자 이용하는 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근처를 뒤져서 찾아낸 셈으로 첫 이용자가 심마니
노총각이었던 이유와 당시 지리산악회 회원중에 노총각이 2명 있었던
이유에서 ‘총각샘’이라 명명했는데 장터목에 있는 샘이 일명 ‘산희(山姬)샘’
으로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키려는 배려도 있었다고 한다.
등로에서 우측으로 바라본 빗점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
해방 전후에 지리산에 암약하다 최후를 마친 빨치산 남부사령관 이현상의 恨이련가?
지리산에서 처음만난 서덜각시취
또 한번 치고 올라서니...
오르지 못할 명선봉(明善峰:1,583.4m)이 베일에 가리기 직전이다
쉼터(09:23)
오늘 지리산에서 만난 물봉선은 곤충에게 습격을 당했는지 상처투성이다
세상사는게 참 아무것도 아닌데...왜 이리 고통속에 어렵게 사는지...
능선 우측으로 올라가면 피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명선봉 정상인데 숲이
우거져 원시림을 방불케하는데다 비탐구간으로 지정되어 있어 오르지 못한다
원 대간길은 명선봉에서 연하천 대피소쪽이 아닌 피의 능선을 따라서 삼각고지
방향으로 가는 길이나, 생태복원지로 지정되어 있는 비탐구간이다
꿩대신 닭?...예전에는 이곳의 이정표에 명선봉이란 팻말이 있었으니
이제는 그마져도 보이지 않는 그저 천대받고 멸시받는 봉우리인 듯 하다
명선봉(明善峰:1,583.4m)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의 경계에 있는 연하천 대피소 뒤의 봉우리로 산꾼들이 오를 수 없는 봉우리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있는 명선봉~삼각봉~형제봉~벽소령 능선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과 국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어서 '피의 능선'이라 불리기도 한다.
명선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빗점골이라는 골짜기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알려졌다
명선봉 정상으로 갔다오는 산꾼들이 있는지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연하천대피소 가는 길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니...
안개의 역습(?)을 받고있는 연하천 대피소가 나온다.
연하천(煙霞泉) 대피소(09:38)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와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경계의 명선봉의 북쪽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하여 연하천(烟霞泉) 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하천(煙霞泉)이란 지명은 사실 지형이나 풍광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해방전,후와 한국동란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끝난 이듬해 구례의
연하반산악회에서 자연이 그리워서 병을 얻었다는 뜻의 천석고황(泉石膏肓)과
같은 뜻을 가진 연하고질(煙霞痼疾)에서 가져온 ‘연하반산악회’는 지리 주능선을
종주중에 자신들을 발견한 샘물을 연하천(煙霞泉)이라 하였으며, 나아가서
세석에서 장터목 가는중에 제석봉과 천왕봉의 풍광을 한 눈에 봉우리를 연하봉으로
이름 지었다
연하천은 구례에 있는 연하반 산악회(현 지리산 산악회)에서 명명한 이름이다.
‘구름속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라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연하천의 샘물은 사계절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지역 자체가
고산지대임에도 늪지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항시 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글 이원규, 노래 안치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지리산을 올 때는 다른 산에 비해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게 식수이다.
오늘 산행만 해도 화개재 아래에도 샘터가 있었고, 이곳 연하천, 벽소령, 선비샘,
세석산장에 샘이 있기에 동네 뒷산 걷듯이 500ml짜리 수통 하나만 갖고 왔으니
베낭이 훨씬 가볍다...연하천대피소에서 물 한바가지 시원하게 마시고 수통에다
물을 채운후에 벽소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후에...
데크목이 깔린 늪지대같은 곳을 통과한다.
시간이 갈수록 짙은 안개가 몰려온다...구라청의 오늘 기상 예보로는
오전에 흐림, 오후에 맑음이라고 했는데, 오늘도 산꾼에게 구라를 칠 모양이다
명선봉 정상에서 헤어진 오리지널 대간길...대간길에서 한참
벗어난 연하천대피소에서 내려와서 다시 대간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으시시한 분위기가 느껴질만큼 짙은 안개가
몰려오는데 마치 전설의 고향의 한장면인 듯 하다
우측 능선 아랫쪽은 의신마을쪽인데 아무것도 안 보이고 고사목이 쥔장 행세를 한다
음정마을 갈림길(09:56)
음정(陰丁)마을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속하는 마을로 양정,
하정마을과 함께 삼정리에 속한 마을의 위치가 음지에 취락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뜻에서 음지정제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음지말 남쪽 골짜기를 비내리골이라 하는데 옛날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나뭇꾼과 살다가 날개옷을 찾은 뒤 남편과 자식을 두고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남편과 아들이 하도 원통하여 눈물을 흘려서 비내리골
만들어졌으며 그 자리에서 바위로 변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벽소령 정상에는
부자(父子)바위가 서 있다고 한다
국공파 초소에는 사람들이 전혀 안보이고...
입산통제 시설을 지나서...
삼각고지 방향으로 올라간다.
삼각고지(三角高地:1,484.0m:10:01)
함양군 마천면 심정마을에서 연하천으로 오르는 직등 코스로 6.25 동란 당시
군사 요충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봉우리로서 근처에는 그 당시 벙커의
흔적과 총알을 맞은 나무도 보이고 당시 남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 현상이
사살 당하기 직전까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밋밋한 능선에 지리 01-24 이정목이 서있고 좌측 능선은 삼정산 가는 길이기도 하다
삼각고지에서 조금을 내려서니 음정마을 갈림길이 나온다
하동군 화개면, 함양군 마천면, 남원시 산내면의 경계점인 삼각고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계곡이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 했다는 빗점골인데 삼각고지와
명선봉 일원에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는지 몰라도 혹자는 벽소령까지의 능선을
'피의 능선'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부터 북측의 행정구역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으로 바뀌면서 지리산 전체가 온전히 경남땅으로 들어선다
안개가 몰려오는 삼각고지를 지나서 벽소령으로 향하는 길로 향하는데
지리산도 이제 맘이 변했는지 바람한 점이 없이 덥다...그러나 내일이
말복이라 그런지 폭염이 한풀 꺽여가는 느낌이다
새앙쥐 한마리가 겁도없이 산꾼에게 히야까시(ひやかし)하려고 든다
그러다 다친다...그래 엊그제가 우란분절(칠월백중)이라 조상 천도재를
지내고 온 할배가 살생을 안 할줄 알았던 모양인가.
다시 내리막길...등로가 너무 미끄러워서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나질 않는다.
거리는 줄지 않는데 습도 때문인지 체력은 자꾸만 방전되는 느낌이다
암봉(10:08)
미역취가 곱게 피어있는 능선을 지난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내려서면서 멋진 석문을 만난다
석문(石門:10:10)
다시 내리막길
외부자 바위(10:18)
예전엔 아무것도 지나갔던 암릉이었는데 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외부자바위라고 한다
외부자 바위가 최근에 무너졌는지 암릉 파편이 많이 보이고 낙석주의 표지판이 있다.
산죽길로 내려가니...
너럭바위처럼 보이는 조망처가 나온다
너럭바위(10:20)
안개가 잔뜩낀 저 계곡이 빗점골로 이어지는 곳인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구나.
非凡非聖(비범비성)이여 : 범부도 성인도 아니며
一法不修(일법불수)이니 : 한 법도 닦을것이 없으니
一塵一色(일진일색)이 : 한 티끌 한빛같이
總是一佛(총시일불)이로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도다
菩提煩惱不二(보리번뇌불이) :깨닭음과 번뇌가 둘이 아니며
煩惱本來空寂(번뇌본래공적) : 번뇌는 본래 텅비고 고요하니
大道曉在目前(대도효재목전) : 큰 도는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는데
將道更欲覓道(장도갱욕멱도) :도를 쥐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하네
조계종 종정이셨던 법전 큰스님의 법문 중에서
오이냄새가 난다고해서 이름 붙혀진 산오이풀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너럭바위를 지나서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능선을 지난다.
자꾸만 피로가 몰려오는데 너를 보니 힘이 나는구나...그래서 네가 고맙다...
인생살이가 왜 이리도 힘이드냐...
내리막길 좌측 능선에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있는데 예전엔
무심코 지나갔는데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부자바위라고 한다
나무에 갇혀버린 부자바위(父子岩)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이곳을 부자바위라고 하는데 마천면의 삼정리 사람들은
조금을 더 가면 만날 형제봉을 부자암봉(父子岩峰)이라 부르며, 지리산 산꾼들과
지도에 표기된 형제봉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상당히 헷갈린다
부자바위를 우회하여 미끄러운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쉼터(10:45)
암릉길로 올라간 다음에...
암릉을 우회하며 형제봉으로 향한다
형제봉(兄弟峰:1,452.8m:10:50)
형제바위 위에 있다고해서 형제봉이라 부른다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형제바위로 향한다
형제바위(10:54)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인데
'형제바위'라고 불리는 이 입석바위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智異山女)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로 불린다.
이곳 달빛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벽소령의 명월보다 못지않다.
태고의 정적과 고요 속에 구상나무 숲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빛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고 시리도록 푸르고, 창백한 달빛과 은하수가
아름답다고 한다.
형제바위의 슬픈 아픔을 아는지 산오이풀이 고개를 숙이고 슬퍼하는 모습같다
꽤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벽소령이 1.5km나 남았다고...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나지 않으니 조금씩 맘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다시 내리막길
안개가 걷힌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벽소령 대피소를 품고있는
1,399.4m봉이 보이는데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사면길을 만들어 논 곳이다
노고단에서 이곳까지 13.5km란 얘기다
잠깐동안에 편안한 길을 걷다보니 전망바위가 나온다.
전망바위(11:15)
오늘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지리산을 걷는 등산객들이 많지 않은 듯 하다.
이곳에서 많이 있어야 할 등산객이 한명도 안 보인다
조망바위 바로 아래로는 해방이후의 좌.우 이념에 휘말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아무 말이없는 지리산 능선의 삼태골과 절골, 대성동이 보이고 그 너머로 보여야 할
남해바다와 바다 너머로는 사천 와룡산, 그리고 남서쪽으론 광양 백운산이 보이는
곳이건만 지리산에 대한 범여의 德이 모자람인가...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대간길에서 바라본 피의 능선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1952년 지리산에 숨어 들어 저 곳 대성골과 빗점골, 의신마을로
은거하고 있을 때 군경 토벌대의 공격으로 명선봉쪽으로 도피하던 중 군경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필사의 탈출을 했으나 대분분 전멸한 저곳... 그래서 피의 능선으로 불리는 곳이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
(이태의 소설 남부군 중에서)...
70년전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저 대성골 안에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저 끄트머리의 안개에 파묻힌 봉우리가 벽소령 뒷쪽의 1,399.4m봉이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향하는 등로는 은근히 사람을 지치게 하는 구간이다
암릉 구간을 통과하니...
석문처럼 보이는 암릉 틈사이를 지나서 벽소령으로 향한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는 멸가치가 갈길 먼 산꾼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멸가치(꽃말: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칩니다)
멸가치는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중국과 일본, 한국이 원산지이다.
다소 습기가 있는 응달에 서식하며, 크기는 약 50cm~1m이고 식재료로 사용할 때에는
어린 순을 나물로 먹는 것이 보편적이다. 효능으로는 이뇨작용의 촉진 등이 있다.
안부(11:22)
일월비비추의 씨방
안부에서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계속되는 완만한 오르막길
조금 편안한 길을 걸어가나 싶더니...
구조 이정목을 지나고...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조망바위(11:28)
오늘의 조망을 포기한 지는 오래됐고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좌측의 능선 너머로 보이는 제석봉은 안개와의 遊戱를 맘껏 즐기고 있다
석문(11:35)
석문 우측의 원시림같은 능선이 1,399.4m봉으로 오르는 대간길이나
친절한 국공파들은 산허리의 사면길을 만들어 벽소령으로 인도한다.
요염한 자태로 산꾼을 유혹하는 모싯대 가족들
벽소령이 가까워지는지 돌이 바닥을 장식한 등로가 시작된다.
삼각고지에서 음정마을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너덜길 같은 곳을 지나니...
벽소령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벽소령대피소(碧宵嶺:1,350m:11:50)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와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며,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가 높고 푸른 산릉(山陵)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는데, 달밤이면 푸른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다른 지명으로 벽송령(碧松嶺)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조선조 초기에 칠선계곡의
벽송사에서 주석하셨던 벽송지엄선사(碧松智嚴禪師1464~1534) 의 제자들이 북쪽의
벽송사와 영원사, 남쪽의 쌍계사와 칠불사 등에서 많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남.북쪽의
절집에서 수행하는 도반 스님들끼리 교류하는데 이 고개를 지났을 터...그래서 벽송령이라
했다는 설이다... 지금의 지명의 유래가 됐다는 벽소명월(碧宵明月)은 본래 지명과는
전혀 다름 생뚱맞은 지명이라 볼 수 있다.
벽소령 정상의 이정표.
벽소령의 원래 이름은'초료조(鷦鷯鳥)재'였는데 초료조는 우리가
흔히 촉새 또는 때까치라고 부르는 뱁새의 학명이며, 한국의 텃새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에 나오는
그 뱁새를 말하며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작가 박경리 여사는 소설 토지의 초반부에서
뱁새를 때까치라고 표현을 했다...그리고 벽소령은 '취령(鷲嶺)' 또는 '벽취령'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초로조재와 취령의 우리말은 뱁새재, 수리재라는 뜻이다.
지리산을 잘 아는 사람들은 벽소령 대피소 아래에 있는 샘을 뱁실샘이라 부른다.
묘봉(토끼봉?)에서 식사후 이곳까지 오면서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만 조금 허기가 찾아오기에 이곳에서 잠깐을 휴식을 취하면서
가져온 복숭아 한개와 쥬스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산행 초반에 야생화에 홀렸던 탓에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1시간정도
늦어서 간단하게 휴식을 취하고 서둘러 세석산장으로 향한다.
벽소령에서 세석으로 향하는 1.5km 구간은 예전에 신작로였던 탓에
길이 너무좋아 조금은 산행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부지런히 걷는다
부지런히 걸으면서 뒤돌아 본 벽소령대피소의 모습
부지런히 걷다보니...조망을 뚜렸히 볼 수 있는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1:55)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계곡의 모습
의신마을은 조선시대 한성부좌윤, 대사간을 역임한 유몽인(柳夢寅), 조선전기 한성부우윤,
동지중추부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륙(李陸), 조선조 연산군 시절 사림파였던
김일손(金馹孫) 같은 선비들이 천왕봉을 구경하고 세석고원의 영신사로 이동했다가
쌍계사로 하산할 때 대부분 대성동길을 이용했다는 문헌을 남겼는데 이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터 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선비들의 힘든 여정이 녹아있는 대성동으로 이어지는 저 능선은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 지리산을 하면서 처음 걸어보는 꽃길(?)
꽃대봉의 부자바위를 지나는데 낙석방지를 위한 돌담이 보인다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인데 부지바위 윗쪽이 꽃대봉(1,352.8m)이 있는데
원래 대간길 능선이었으나 등로가 너무 험해서 통제되는 능선이다
낙석이 떨어질 것만 곳을 지나는데 스피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을 지 혼자서 씨부렁거린다
꽃길을 부지런히 걷는데도 생각보다 산행 속도는 나지 않아서 맘이 급하다
헐!...벽소령에서 꽤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0.6km밖에 못 왔구나
가야할 덕평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꽃대봉 능선 큰 바위 낙석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아버지와
세 자녀 형상인 이 부자 바위는 “인걸과 아미 선녀”에 관한
전설의 고향 아버지와 세 아이의 모습과도 같아 부자 바위라고 한다.
인걸과 아미선녀 전설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 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날개 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 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 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 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 후 하늘나라에서는 아미 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 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 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벽소령에 있는 부자바위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세 자녀가 걷는 모습이다.
한 아주머니는 벽소령 도로공사 때 마천 주둔 공병대 병사들이 몇 명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위를 잘못 건드려서라고 설명한다
지리산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울 엄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하고 내가 사랑했던 여인같은 산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늘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여유로움
언제든지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안아주는 여유로움을 가진 산.
그런 지리산은 옛날 신선이 내려와서 살았다는 삼신산(三神山: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중의
하나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사는 산”의 뜻이라는 지리산(智異山),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에서 맥이 뻗어 내려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란 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소(沼)를 품은 산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1967.12.29)으로 지정되었고 쌍계사와 화엄사, 실상사
대원사 등 수많은 고찰들은 품은 산, 또한 남.북으로 분단된 이데오르기의 산물로
빨치산이라 불리는 조선인민군 유격대의 근거지가 되어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이데올르기의 제물로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의 영혼을 감싸안은 슬픈 산이기도 하다
바른재(1,382.6 m:12:10)
꽃대봉과 덕평봉 사이의 안부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벽소령 종단도로인
1,023번 지방도로의 끝지점이 흐릿하게 보이고 이곳에서 백무동 맞은편
오공산으로 이어지는 오공능선의 시발점이기도 한 고개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벽소령대피소가 있는 곳을 신벽소령이라 부르고
이곳을 구벽소령이라 부르는데 구벽소령길이라는 표지판도 있다
바른재로 알려진 비포장도로는 6.25 한국전쟁 시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가 바로 벽소령 작전도로로 삼정마을에서 이어진 도로는 폐쇄
되어 흔적만 남아있고 음정 마을에서 연결된 도로는 아직 남아있다.
바른재 정상에 있는 구벽소령 안내판
바른재 이정표(세석대피소 5.2km, ← 벽소령대피소 1.1km → 지리(경남) 01- 31, 1380m)
안부(12:16)
안부에서 바라본 가야할 덕평봉 정상의 모습
안부에서 뒤돌아 본 꽃대봉
벽소령 대피소에서 편안한 도로를 따라서 오느라 오르지 못한 꽃대봉
꽃대봉(1,432.6m)이라는 이름은 여순반란사건 이후 제2병단 빨치산들이
그 봉우리를 뒤덮은 꽃밭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렇게 불려왔다고 전하는데
우리 민족의 동존상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있는 산이다
안부에서 바라본 대성동골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어버린 저 民草들의 흐느낌이 70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범여의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제 모든걸 잊버리고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마시고 부디 西方淨土로 가시길...
부디 왕생극락 하옵시고.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바른재를 지나 6분후에 만난 안부에서 덕평봉을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1,478m봉(12:22)
이정표( ←세석대피소 4.6km →벽소령 1.7km:지리(경남) 01- 33:해발 1478m)
미끄러운 암릉구간으로 올라가는데 예전에 비해 지리 주능선은
고속도로같은 느낌이라 산행속도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볼 것 많고
궁금증이 많은 범여의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지는데 뭔 조화인가?
세월의 무게를 못이긴 탓인지 체력의 저하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편안한 길을 걷다가 다시 오르막 능선을 치고 올라 가지만
아무리 올라봐야 원시림에 가까운 덕평봉을 눈팅이만 하게 생겼다
안부(12:33)
오르지 못할 덕평봉 정상을 바라보면서 사면길로 걸어간다
돌길을 지나니 덕평봉 정상에 가장 가까운 곳이 나오는데
이곳을 덕평봉을 생각하고 표식을 남긴다
덕평봉(德平峰:1,521.0m:12:40)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상덕평 마을위에 있는 봉우리로 아마 지명은
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이 봉우리 아래에서 우회한다.
1930년대 지리산 유산기의 기록에 덕평(德坪)이란 지명이 나오며,
1934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정기(鄭琦)의 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에도
덕평이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덕평마을에는 일제강점기까지 3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하며, 덕평은 화개-세석 등과 함께 지리산 청학동의
한 장소로도 지목된 바 있는 마을이다.
하동의 주요 관찬(官撰:관청에서 책을 펴냄) 지리지(地理誌)와 군현(郡縣)
지도에는 덕평봉이 나타나지 않아 지명의 유래를 확인하기 어렵다.
덕평봉 정상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선비샘을 향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선비샘 가는길에서 만난 이정표
선비샘(1,443m:12:45)
옛날 덕평골 화전민 이씨 노인은 평소 천대와 멸시를 받고 살았는데 죽어서라도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에 자식들에게 자신을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노인이 죽자 자식들은 샘터 위에 묘를 만들었는데 샘터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고개
숙여 물을 마시니, 무덤에 절하는 형상이라 죽어서 존경 아닌 존경을 받고 있는 셈이다
살아생전 얼마나 천대와 멸시를 받았으면 죽어서라도 억지 존경을 받고 싶어 했을까.
그 한이 매우 컸던 모양이다.
그 후로 동네사람들은 덕평봉 아래에 있는 샘터의 이름을 선비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부지방에는 물폭탄으로 난리였는데 남부지방에는 비가 별로오지 않은듯 하다.
선비샘의 물은 어린애의 오줌마냥 감질나게 흐르지만 그래도 한많은 선비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려면 물 한바가지는 먹고 가야제...물 한바가지 마시고,
세석산장까지 갈 동안 물을 500ml 물통에 가득 채운다
다시 길을 나선다
미끄러운 오르막으로 올라가는데 갈길은 멀고 체력은
떨어지며, 발걸음이 무거워지는데 어쩌면 좋으랴...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이 苦行...그래도 이만큼이라도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선비샘 전망대(12:53)
예전에는 없었던 선비샘 전망대를 만들어 놨고, 벽소령대피소~2.6km~쉼터~
3.7km~세석대피소의 표식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의 남부 능선이 한 눈에 다 보일만한
곳이지만 밀려오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지리산 선경을 감상하지 못한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예전에 걸었던 안부가 나온다
안부(12:57)
잘 관리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암릉의 좌측으로 내려서니 또 다른 안부가 나오고 오르막 계단이 보인다
데크목에 올랐다가 내리막길.
그리고 다시 빡센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선비샘을 지나면서부터 세석산장까지의
5km구간이 지리 주능선중에 가장 힘든 구간으로 육산(陸山)으로 분류되는 주 능선중
멋진 기암괴석과 원시림에 가까운 숲, 돌길이라 가장 힘든 구간이지만 위험 요소가 있는
등로는 고맙게도 대부분이 우회의 사면길로 만들어 놨다
빡센 오르막을 올라서니 이정표(←장터목대피소 6.6km, 세석대피소 3.2km,
→벽소령대피소 3.1km)가 산꾼을 반기는데 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지이 산맥라
표기를 해놨는데 뭔 뜻인지 모르겠다.
지이 산맥이라는 곳을 지나는데 암릉을 휘감고 있는 잡목들이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안부(13:20)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진다...아무래도 산행 초반에 헛짓거리를 많이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하산 시간이 걱정되어 쉴 수가 없다.
힘이 들때는 주위의 야생화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원통암이 있는 방향인데 밀려오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저 아래 어느 골짜기에 서산대사가 출가했다는 원통암이 있는 곳이겠지
원통암은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된 암자로 의신마을 부근에 있던 의신사 31개
산내암자 중 하나였다고 하며 지금은 대부분 다 폐사되고 원통암만 복원되었다고 한다.
서산대사(1520~1604)는 1534년 원통암에 출가해 이곳 주변 암자를 돌며 수도했다.
대사는 두 차례에 걸쳐 18년간 지리산에 머물렀으며 지리산에서 도를 깨쳤고 금강산에서
수양하고 묘향산에서 제자를 길렀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을 조직하여 전쟁에도 참여했고,
사명대사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저술하는 등 조선불교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
* 서산대사가 지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오늘날 불교의 핵심이자
한국 간화선의 교과서로 불리는 책이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세석산장으로 향한다
지리 주능선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고 젊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안내산악회에 매주 등산객을 모집하는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와
성중종주(성삼재~중산리) 코스의 시간도 많이 단축될 듯 싶다.
은근히 산꾼을 지치게 하는 등로이다...오늘은 늘 산꾼을 괴롭히는
지리산 바람신(風神)은 휴가를 갔는지 전혀 바람은 안 불어주고, 높은
습도가 산꾼을 괴롭히긴 해도, 오후에 맑음이라고 예보한 구라청의
예보와는 달리 오후에도 계속 흐림으로 유지되는 바람에, 그늘이
별로없는 지리 주능선을 그래도 걸을만 하다
능선에 올라서니 반달가슴곰 활동지역이라 플랑카드가 걸려있는
곳에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능선이다.
라디오에 흘러 나오는 음악소리에 흥얼거리면서 걷는데 망바위가 보인다
망바위(1,558.3m:13:40)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이곳을 칠선봉이 표기를 해놔서 헷갈린다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을 찾아보세요 표지판이 있는 곳.
천왕봉은 고사하고 코 앞에 있는 칠선봉도 안 보입니다
망바위에 바라본 지리남부 능선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칠선봉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만나는 기암괴석의 멋진 선경은 안개로 인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늘 지리 주능선의 조망은 肉眼이 아닌 慧眼으로만 봐야 이해될 듯 싶다.
계속되는 암릉구간을 걸어서 칠선봉에 도착한다
칠선봉(七仙峰:1,562.3m:13:50)
함양군 마천면 강천리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의 경계에 있는 멋진 암봉으로
일곱개의 바위가 기묘한 암봉으로 서 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천상에서
내려온 칠선녀가 한자리에서 노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칠선봉 정상 이정표(←벽소령대피소 4.4km, →천왕봉 7.0km, 세석대피소 1.9km :해발 1552m)
이정표 좌측으로는 한신계곡(백무동)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이는데 현재 비법정탐방로이다.
칠선봉 앞의 산오이풀들은 죄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칠선녀들과 유희를 즐기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으로 벌을 받는 중인가?
세석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칠선봉의 모습
오르막을 향하는 고행길은 시작되고...
이곳에 발을 한번 삐끗했지만 천만다행인지 다치지는 않았다.
암릉구간을 지나니 안부가 나오고...
범여의 힘듬을 알았나?...편안한 계단이 산꾼을 반긴다.
지난 금욜이 우란분절(칠월백중)이라 절에가서 조상님들께
제를 올리고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했던 가피력인가...
잠깐이지만 편안 길을 걷다보니 멋진 조망바위가 나온다.
젊은 친구가 베낭을 내려놓고 悠悠自適하며 지리 주능선을 즐기고 있다.
날이 좋으면 좋은데로 안개가 끼면 낀대로 慧眼으로 仙景을 만끽하는
저 여유...20여년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아마 저 젊은이도 나와같은 독립군인 모양인데...산은 홀로 걸을때
가장 감칠 맛이 나는걸 일찍 터득하셨군요.
젊은 친구에 민폐를 안 끼치려 전망바위에 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20년만 젊었어도...
세석으로 가는 길에 등로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있는 멋진 기암이 보이는데
아쉽게도 이름이 없는 무명암(無名岩)이다...우람한 모습이 마치 설악산
천불동 계곡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귀면암을 연상케 한다.
저 바위가 岳山인 설악산에 있었으면 멋진 이름을 하나 부여받았을텐데
陸山인 지리산이라서 홀대받는 느낌이다
안부(14:25)
우측으로는 대성골과 영신대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곧바로 175 계단길이 시작된다
삑센 175계단을 따라서 오르는데 자꾸만 힘이 부친다.
중간에 쉼터 2곳이 있지만 등산객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그냥 계단에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면서 쉬엄쉬엄 올라간다.
예전에 계단이 없을때는 로프와 바위 틈새를 오르락 내리락했던
아주 난코스였었는데 지금은예전에 비하면 누워서 떡먹기다.
계단을 오르면서 좌측으로 한신계곡이 보이고 능선에는 연하봉과 옴팍 들어간
장터목대피소 윗쪽에 있는 제석봉은 짙은 안개에 완전히 포로가 되버렸다.
힘이 들어서 그런지 가도가도 황소걸음이라 175계단 끝이 안 보인다.
이럴때는 세월이 약이겠지...마지막 데크목 쉼터를 지나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이곳의 우측에 옛 영신사터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영신사 터(영산대)에는 반듯한 터에 제단만 남아있다는데 시간에 쫒겨서 그냥 지나친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1) 함양군수 시절에 쓴
지리산 산행기인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영신사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뿐이었다. 절의 북쪽 절벽에 가섭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
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宦官)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그 목에난 흠집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고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인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聖母像)과 가섭상(迦葉像)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것이 아닐까’
철계단을 올라서니 멋진 암릉이 산꾼을 반기고 바위 우측 아랫쪽에는
동족상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대성골은 안개에 갇혀 버렸고
그 너머로 보여야 할 노고단과 반야봉, 왕시루봉 능선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정순덕에게 길을 묻다 / 이성부
이 길에서는 온통 그대 생각에
마음이 나를 떠나 낯선 곳으로만 달려가고
내 몸도 어지러워 안갯자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산허리 굽이굽이 돌아 끝없이 가다보면
마침내 나타나는 우리네 살림살이
마을에 깔린 저녁 연기 내음
그러나 그대는 돌아와야 할 때 집을 떠나
죽음이 뻔히 내다보이는 길로 들어갔다
내 몸은 지칠대로 지쳐 주저앉고 싶지만
내 정신은 새처럼 온 산골짜기
넘나들며 푸르구나
열여섯 어린 나이에 산에 들었다면
사상보다는 그리움의 키가 커져서
더 먼 데 하늘 바라보는
눈망울 착한 한 마리 짐승으로 쓸쓸할 뿐
그대 젊음 써리봉 기슭 철쭉이거나
드러난 나무뿌리로 뒤엉켜
지금 나를 자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무르팍 생채기 피를 흘리면
마음도 돌아와 나를 가득 채우느니
아 우리나라 지리산 서러운 하늘내 태어난 숨결이구나!
* 정순덕(鄭順德:1933~2004) 은 산청군 삼장면 출신으로 한국전쟁 중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여성대원으로 빨치산에서 활동한 비전향 장기수였다
한국 전쟁 중 북괴군이 지리산을 점령했을 때 북괴군을 도왔던 남편 성석근이
국군토벌대를 피해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면서 결혼 몇 달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1951년 2월에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챙겨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20여 일 동안 같이 지낸 끝에 남편이 사망하자 유격대에 합류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남성대원인 이홍이와 함께 1963년까지 체포되지 않아 '마지막 빨치산'이 되었고
한국에 전향하기를 거부하다가 2004년도 인천에서 사망했다.
1,608m봉(14:40)
이곳에서 지리산 전체가 조망되는 곳이지만 남부능선과 맞은편에 보여야 할
왕시루봉과 반야봉,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 주능은 꿈도 못꾸고,동북쪽으로는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천왕봉을 바라본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난간에서 바라본 대성골은 속살을 보여주기 싫은 모양이다
대성골을 바라보면서 왜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야만 하는가.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분단국가로 살아야만 하는 이 아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맨날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편가르기하고
쌈박질만하는데 人性이 문제인지 국민성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오늘 대간길의 마지막 봉우리인 영신봉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지리산의 뎃빵인 천왕봉(젤 높은 봉우리)을 바라본다.
천왕봉 바로앞이 제석봉이고 뒷쪽으로는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안부로 내려간다
안부(14:48)
영신봉을 바라보면서 뚜렸한 등로로 걸어간다
암릉위의 50여m 지점인 영신봉 정상인데 비탐구간이라 오를수가 없다.
이곳이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분기점이기도 하다...영신봉에서 시작되는
낙남정맥은 산청, 하동, 사천, 진주, 함안, 마산, 창원, 김해를 거치는
정맥으로 다른 정맥과는 달리 유일하게 경상남도 한 곳만 지나는
정맥으로 합수점이 약간 분쟁의 소지가 있는 정맥이다.
이곳에서 김해의 용지봉까지는 똑같이 가다가 대부분의 맥꾼들은
용지봉에서 좌측으로 가서 금음산, 신어산을 거쳐서 고암나루터로
빠지는데, 일부 산꾼들은 용지봉에서 진해방향으로 틀어서 불모산,
화산을 거쳐서 낙동강 하구언에 있는 녹산 수문으로 향하는 산꾼도 있다.
특히 부산과 경남지역의 산꾼들을 중심으로 낙동강 하구언을 합수점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많으며, 실제 신낙남정맥이라하여 많이 걸으며, 아예
낙남정맥 또는 낙남정간이라고도 부르는데, 양쪽을 다 걸었던 범여도
개인적으로는 낙동강 하구언쪽이 맞는듯 하다.
맞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 문제 산꾼 개인이 판단할 몫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조금을 더 내려가면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는 영신봉이란 곳을 향한다.
이곳에서 우측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있는 영신대(靈神臺)는
지리산 10臺중에 하나로 신령해서 지리산에서 최고로 영험한 기도처이자
가장 기(氣)가 강한 곳으로 영혼의 안식처로서 지리산 최고의 경승지로
영신봉 남사면 암벽 아래 해발 1500m 고지대에 있다.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는 영신봉으로 향한다
영신봉(靈神峰:1,651.6m:15:03)
神을 맞이하는 뜻이라는 봉우리로 지리산 주능선에 있는 봉우리중에
가장 영험한 기운이 모였다해서 명명된 봉우리로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대에는 지리산 10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영신봉의 남사면의 한참 아래쪽에 있는 큰세개골 상단에 영신사라는 절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좌고대와 창불대, 가섭상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에 올라
3번 절하는 사람은 성불(成佛)을 이룬다고 하였다...영신사는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세석평전 아래 음양수 아래 대성동의 큰세개골 위가 영신사 터라고 한다.
영신봉을 내려와서 생태복원지를 지나니 연진낭자의 영혼이 묻어나는 세석고원으로 향한다.
영신봉을 내려오니 사방이 두루 조망은 되지만 광활한 세석고원의 전모가
한 눈에 들어오지만 구름을 잔뜩이고 있는 촛대봉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세석고원은 그 둘레가 12㎞,약 30만 평의 면적을
차지하는데 작은 돌 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 평전, 세석평전(細石平田)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식 표기이므로 세석고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듯 하다
지금과 같은 세석고원의 면모가 드러난 계기는 약 100년 전 (혹은 300년 전이라는 얘기도 있음)
큰 산불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15세기경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 김일손 등의
기행문에서도 세석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걸로 보아 타당한 얘기 같다.
500여년전 점필제 김종직이 저술한 점필제 문집『점필제문집 권2 「유두류록(遊頭流錄」』
에는 다음과 같이 저술되어 있다.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 저여원(沮汝原:지금의 세석고원)에 다다랐다.
단풍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는데 문설주나 문지방처럼 휘어져 있다.
그것을 통해서 나오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아도 됐다.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에 초막 두어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주둔한 병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에서 매를 잡는 초막(草幕)이었다... 세석고원이 옛날에는 저여원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두류기행록(頭流記行錄)」은 김종직이 함양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틈을 내어
산행을 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에 목민관의 정신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리고 문장 끝에서 두류산(지리산)의 숭고함과 웅장함을 예찬하고 있다.
세석(細石)이란 단어의 최초 기록은 연제 송병선의 기록에서 등장한다.
그의 문집 권21에 있는 두류산기(頭流山記)는 1879년 지리산을 오르면서 쓴 기록이다
이 글에는 세석을 외세석과 내세석을 나누고 있는데 현재는 이런 개념이
통용되지 않고 있지만 외세석은 음양수 근처의 평지를 말하고 내세석은
지금의 세석산장이 있는 세석 상층부 일대를 말한다.
* 한말(韓末)의 문신인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으로 일찍이
뛰어난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며 고종(高宗)의 스승이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군산시 임피면)으로 강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사후에 의정(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세석산장 가는 길에서 바라본 촛대봉의 모습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이다
세석고원(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으로 높은 산 고원 어디서 이런 습지가 있단 말인가!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 제공을 한 그 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화개재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의 주능선의 산행을 끝내고 세석산장으로 내려간다
세석대피소(1545m:15:20)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산 325에 위치한 세석대피소는
종전에 있던 대피소를 1995년에 새로 지었는데, 최근에는 24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지리산국립공원 내 대피소 중에 가장 큰 곳이다
세석고원 서쪽 사면에 자리 잡은 세석산장은 1983년 66평방미터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6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산장 전에는 지리산 산신령이라 불렸던
故 허우천(許宇天) 선생이 관리하던 구산장이 세석고원 중앙에 위치했지만
지반이 튼튼하지 못해 철거된 바 있고, 최근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수용인원
240명을 자랑하는 대규모의 시설로 신축되었는데 지리산의 산장 중 가장 크고
운치가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는 세석산장 2층 앞쪽으로는 거림골 코스로 이어진다.
2층은 칸막이가 설치된 가족실로서 5~8인의 단체 가족일 경우 빌려주며
구 산장은 취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늦은 시간이라 세석산장은 눈팅이만 하고 서둘러 거림으로 향한다
음양수 갈림길(1,518m:15:35)
의신마을, 청학동으로 향하는 등로로 10분정도 가면 음양수(陰陽水) 샘이 있다
음양수는 음양수제단이 설치된 바위 바로 아래 있는 석천(石泉)으로,
햇볕이 드는 쪽이 양수(陽水),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고 하며,
두 줄기의 물은 음양화합이 되듯 한 곳으로 합쳐져 흐른다.
자식없는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단다.
좁은 돌틈 사이에서 비집고 이 물은 지리산 샘중에서빼어난 맛을 자랑한다.
음양은 易學에서 우주만물을 만들어내는 상반된 성질의 두 기운을 합친
물이라고 생각하면 될까?...흔히들 지리산을 물이 많다고 해서 여자의 산이라고 한다.
음양수 제단...2015년 7월 28일 남부능선 종주때의 사진
세석평전에서 음양수 내려서기 직전 우측 바위위에 돌탑으로 만든 제단이
있고 넓은 바위 공터가 있는데 이곳은 분단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부군에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을 비롯한 여성대원 15명이 지리산
토벌군에 쫒기다가 이곳에서 포위가 되자 전원 자결했다는 슬픈 기록이 있다.
또 이곳은 우천 허만수라는 분이 좌선대를 만들어 도를 딲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는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이로 지리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처자식까지 내팽겨치고
20대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초막하나 지어놓고 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촛대봉에서 발원하는 거림골의 물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하다
돌길을 지나면서...
세석교로 이어지는 데크목 등로가 나온다
세석교(細石橋:15:50)
아무래도 거림골까지 가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것 같고, 거림에서 서울가는
버스가 있는 원지까지 가려면 교통편이 문제가 될것같아 청학동에서
고사리 농사를 짓는 청학동 아지매한테 갑질 비슷한 전화를 한다
‘아지매! 뭐 하능교... 내가 지금 지리산 왔다가 세석산장에서 거림으로
내려가는 중인데, 시간되면 거림에서 원지까지 좀 태워주소’ 하니까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지만 좀 난감해 하는 분위기다.
‘사장님 우야면 좋노!...신랑이 차를 가지고 진주갔는데 우짜꼬’ 한다.
사정이 안되면 우짤수 없지 하면서 전화를 끊고는 마을이 있는 거림골까지
내려가는게 문제지 하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걷기만 한다
다리를 건너 바위에 박혀있는 철난간을 따라서 내리막을 향하는데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1,400고지 전망대(1,386m:15:56)
해발 1,400m에 있어서 1,400고지 전망대라고 부르는데 실제보다 조금 낮은
1,386m이며 이곳에 서면 삼천포가 잘 보이는 곳이라는데 오늘은 전망이 꽝이다
1,400고지 전망대 안내판
무명교를 건너고...
돌길을 지나...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헐!~~~아직까지 3.9km나 남았다고...자꾸만 맘이 급해진다
내리막길은 자꾸만 거림골의 계곡과 멀어지는 느낌이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북해도교(北海道橋:16:30)
세석산장과 거림골의 대략 중간쯤에 위치한 곳에 북해도교란 다리가 있는데
일본의 북해도처럼 기온이 많이 낮아서 지명을 붙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일제강점기에
오부자와 관련해서 붙혔다는기록만 해놓고 구체적인 내용의 설명은 없다.
맘이 급해서 조금 빠르게 걸었더니만 도가니에 불이 나는 느낌이다
천팔교(千八橋:16:40)
해발 1,008m에 지점에 설치되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다시 거림골에서 내려오니 나뭇가지 사이로 무명폭포가 보이고
좌측의 촛대봉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는 곳이다
뛰다시피 하면서 카메라 셧터를 눌렀더니만 카메라가 흔들려 사진이 엉망이다
아예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1시간 가량을 무작정 뛰다시피 내려오니
홍수 예.경보기가 나온다
홍수 예.경보기(17:40)
이곳 어디쯤에 신선바위가 있다고 했는데 그냥 지나친다.
빡세게 내려오니 쉼터 가운데 노송(老松) 한그루가 거림마을 내려다 본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울리는데, 난 산행을 하면서 전화를 거의 안 받는데
거림의 마을이 보이니 긴장도 풀리고, 전화를 확인하니 청학동아지매다.
전화를 받으니 어디냐고 묻는다...지금 마을로 내려가는 중이라니 자기가
택시를 불러서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으니 천천히 내려 오시란다.
헐!~~~이리 안해도 되는데...
노송이 있는 쉼터에서 바라본 거림골(居林谷)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이 있는 내대리는 골안이 넓다하여 한찰이라 불리는 한차리의
안쪽이라 해서 내대(內大)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내대리의 거림마을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예전에는 거림(居林)이란 이름처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계곡을 메우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용으로 마구 벌목이 되었고 8.15 광복 이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나가 한때는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한다
거림골(居林谷)탐방 지원센터로 내려간다
거림(居林)탐방 지원센터(17:50)
거림탐방지원센터를 지나서 내려오니 주차장이 나오고 택시가 30분 이상을
기다렸다고 하면서 베낭을 정리하기도 전에 택시는 총알처럼 달려서 원지로 향한다
청학동 아지매가 가져온 박카스 한병을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묻으면서 가는데
거림에서 출발한 택시가 덕산을 가기도 전에 피서철이라 그런지 청학동에서 나온
차량과, 중산리, 대원사에서 나온 차량들이 뒤엉켜 도로는 완전히 주차장이 돼버렸다.
시천면소재지가 있는 덕산이 코 앞에 보이는데 1시간 이상을 허비한다...택시기사가 하는 말
이러지 마시고 덕산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원지가는 버스를 타는게 빠를것 같다고
하여 그러라고 한다... 거림에서 덕산까지 20분도 안 걸리는 곳을 1시간 넘게 걸려
덕산정류장에 내리면서 청학동 아지매와 작별을 하고 정류장으로 향한다.
덕산버스 정류장(19:08)
정류장에 도착하니 19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표를 예매하고는 재빨리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고나니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덕산발 → 원지행 버스표
덕산에서 출발한 버스 역시 시천면소재지인 덕산 정류장을 빠져나와
지리산대로인 20번 국도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한참을 버벅대면 차는 가다서다를 반복하다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I.C를 지나면서 정체가 풀리고 원지에 도착하니 예정 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 원지 정류장에 도착한다
원지버스 정류장(20:20)
원지발 → 남부터미널행 버스표
버스표를 예매하고나니 20분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고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시장기 몰려온다...배가 너무 고파서 정류장 건너편의 편의점에서
컵라면에다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 나니 진주에서 출발한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와서 버스에 오른다...아주 비싼 프리미엄 버스인데 기사의 운전 수준은
덤프트럭 기사만큼 어찌나 난폭하게 운전을 하는지 불안해서 잠을 이룰수가 없다.
자정이 다된 시간에 남부터미널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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