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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3구간 - 화개재에서 성삼재까지(역산행)

by 범여(梵如) 2022. 8. 28.

반야봉...마고할미의 꼬라지는 누가 말리나?

 

☞ 산행일시: 2022년 08월 26일~27(무박산행)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약간의 안개...오후에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0.5km + 날머리12.7km  / 9시간 45분 소요

☞ 참석인원: 안내산악회 따라갔다가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성삼재-임도-무넹기고개(코재)-갈림길-노고단대피소-노고단 고개-돌탑

                     헬기장-공터-헬기장-1,411.6m봉-돼지령-국가 장기 생태 연구지

                     피아재삼거리-임걸령-임걸령 쉼터-쉼터-노루목-반야봉 삼거리-안부

                     반야봉 쉼터-반야봉-1,622.0m봉-다시 반야봉 삼거리-합류점-소금장수 묘

                     묘향암 갈림길-안부-삼도봉-안부-548계단-화개재-샘터-화개교-선봉교

                     막차쉼터-연하교-안영교-박영발비트 갈림길-유유교-간장소-출렁다리

                     반달교-함박골 입구-소원교-신선교-제승대-대웅교-옥류교-명선교-병풍소

                      병풍교-병소-금표교-탁용소-와운마을 입구-부부송-와운마을-천년송

                      다시 와운마운입구-요룡대-석실-돗재-야영장 입구-반선교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산동면, 토지면 / 전북 남원시 산내면 / 경남 하동군 화개면

 

2주전에 계획했던 1박2일간의 지리산 종주 계획이 기상 때문에 취소되고 나니 약간의

멘붕이 온 상태이나 산꾼은 그런걸로 인하여 산엘 안 간다는 건 핑계거리일 뿐이다.

4인이 같이 산행 일정을 맞춘다는 건 그리 쉽지가 않다...나만 빼놓고는 대한민국

1%안에 들어가는 산행 고수들인 분들과 일정을 맞추기가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다.

 

묘향암의 호림스님 찾아뵙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혼자라도 같다 와야겠다

대간길의 지리산 마지막 구간을 마치기로 하고 안내 산악회를 따라서

양재역에서 산악회 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향한다.

 

이 산악회는 처음으로 가보는 산악회인데 지난 6월에 설악산으로 따라 나선

다른 안내산악회와는 quality가 확실히 다르다...6월에 갔던 산악회는 가격은 엄청나게

싸긴했어도 기사의 불친절과 여러가지 문제도 좀 불쾌했었는데, 이곳은 가격은

비쌌지만 28인승 리무진 버스에다 산행에 관한한 아주 고수인듯한 산행대장도

있고, 거기다가 지도까지 주며, 산행 시간도 아주 널널하게 주는 바람에 느림보에다

볼 거 다봐야되고, 들릴곳은 다 들려야 되는 牛步걸음의 범여에겐 아주 굿이다.

거기다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 쓸 일도 없고, 어디서 뭔 지랄(?)을 하던지

산악회에서 지정한 시간내에 주차장에 도착하여 귀경 차량만 타면 된다.

 

집 근처인 양재역에서 탑승하여 전주~순천간 고속도로 오수휴게소에서 30여분정도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여 구례I.C를 빠져나와 성삼재도 도착하니 03시 30분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역시 지리산이다...버스에서 내리니 바람은 불지 않으나 寒氣를 느낄정도로 춥다.

서둘러 베낭에서 바람막이 자켙을 꺼내 입고 산행을 준비한다.

 

전남의 북동부와 지리산의 남서방 기슭에 위치한 구례군(求禮郡)은 백제 때에는

구차례(求次禮)현이라 불리웠고, 신라 경덕왕 때에 구례현으로 고쳐 불리우며 곡성군에

속하였으며, 고려 초는 남원부에 속했다가 인종 때에 감무(監務)가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주현(州縣)으로 승격되고, 말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석주관을 축성했는데 토지면의

석주관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 혹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 石柱關은 전라도의 구례(토지면)와 경상도의 하동(화개면)을 잇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내륙으로 통하는 곳으로 일본군의 호남 내륙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싸우다 순절한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과 구례 현감 이원춘의 위폐를 모신 칠의단이 있다.


조선의 태종 때는 현감이 파견되고, 그 후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남원부에 속했거나 다시

현(縣)으로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가옥이 137호이고, 인구는

677명이라 기록되어 있어 매우 작은 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으며 기름진 땅』을 뜻하는 '고래실'을 전라도의 사투리로 표현하면

'구레실''구레논''구렛들'로 구례는 그런 의미를 내포한 말인데, 왜냐하면 전남·전북·경남의

경계를 이룬 삼도봉(三道峰)을 꼭지로 삼아 흐른 섬진강을 감싼 구례는 산흙이 흘러내려

기름진 '구레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중환이 저술한『택리지(擇里志)』에서도 구례 땅은 비록 들은 좁지만 농산물의

수확은 많고,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가니 가뭄타는 일이 적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구례는 지리산에서 가지친 해발 1,000m 가까운 험준한 산들이 사방을 감싸안은 그 안쪽에

자리한 분지에 해당되어 평야가 적다... 하지만 군의 중앙을 남류하는 서시천이 섬진강에

합류하면서 서시천의 양쪽 사면과 섬진강과의 합수점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자리잡았다.

하지만 군의 80%는 산지로 주산물은 구례분지 중심의 곡물과 원예작물이고, 근래에는

밤의 생산도 많고 산수유는 전국 최대의 주산지이다.

성삼재 (性三峙:1,090.7m:03:35)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1988년 개통된

지리산 횡단도로(지방도 861번)가 통과하고 있으며, 고갯마루에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성삼재의 지명유래는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대군(大軍)에 쫒기던 마한(馬韓)왕이

전쟁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면서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하여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을 달궁이라 불렀다.

 

그 당시 마한왕은 달궁을 지키기 위하여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하여, 팔랑치(八郞峙), 서쪽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하여

정령치(鄭嶺峙), 동쪽은 황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다 하여 황령치(黃嶺峙),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姓)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다하여 성삼재(姓三峙)라 부르게 된데서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지리산 관문중에 하나인 성삼재는 지리산 서쪽에 있는 백두대간 고개 중 하나로

외지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지리산의 목재를 수탈하기

위해 길을 내면서부터인데 이 길이 6·25전쟁 때는 빨치산 토벌을 위한 군사작전 도로로

활용됐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찾은 외국인들이 지리산 구경을 하도록 이 도로를

넓히면서 지금의 성삼재도로(861번 지방도)가 됐다.

삼한(韓三)시대의 지도

* 진한(辰韓)은 기원전후부터 AD 4세기 무렵까지 주로 지금의 낙동강 동쪽 경상도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정치집단을 통괄하는 명칭으로 〈삼국지〉 동이전에는 12개의 소국이

보이며 규모가 큰 것은 4,000~5,000가, 작은 것은 600~700가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진국의 후신이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진한뿐만 아니라 삼한 전체의 전신이라고 기록하여 진국과 진한의 관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삼국지〉 진한조에 의하면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대체로 마한에 비해 열세였던 것으로 보이며,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반 사이에

사로국에 의해 통합되어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했다

 

* 마한(馬韓)은 기원전부터 AD 4세기 무렵까지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분포했던

  여러 정치집단을 통칭하는 말로 3세기 후반의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에는 54개의 소국들이 분립하고 있었다.

 

마한이라고 부르는 정치세력들의 등장시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충청남도 지역의 경우 BC 3세기

이전부터 상당히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영위한 세력들이 존재했음을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 BC 2세기초 한반도 서북부의 주민집단 일부가 고조선 내부의 세력교체와 관련해

남하해온 것이 이 지역 토착사회의 성장에 일정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북방으로부터 많은 유이민이 파상적으로 남하해 토착세력과 투쟁·연합하는

과정에서 여러 정치집단들간의 정치·경제적 결합이 촉진되었다. 그중 자체적인 물적 기반의

확대와 중국 군현과의 교역주도권 확보 등을 통해 세력이 우월해진 집단을 중심으로 느슨하게나마

연맹체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3세기 전반 당시 연맹체의 주도세력은 목지국(目支國)이었으나  3세기 후반 경기도·충청남도

일원 연맹체의 주도권은 한강유역에서 발흥한 백제국으로 넘어갔고,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소국들마저 백제에 의해 군사적으로 복속당함으로써 마한연맹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변한(弁韓)은 기원전부터 기원후 4세기경까지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분포했던 여러 정치집단

가운데 진한연맹체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을 통칭하는 말로 이들 중 대부분이 가야연맹체를

구성하는 주요소국들로 성장했다.

 

진한과의 구분은 낙동강 동쪽과 서쪽이라는 지역적 차이로 보기도 하고 종족의 차이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영남지역의 1~3세기에 해당하는 유적·유물상에는

지역적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변진에 속한 소국으로 김해지방에 있던 구야국, 함안지방에 있던 안야국,

고령지방에 있던 미오야마국, 동래지방에 있던 독로국 등 12개 나라의 이름이 전한다.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한 철산지로 유명하며, 왜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는 문신의 풍습이 있었다.

나이 먹을수록 자꾸만 사회에서 고립되고 천대받는 서글픈 나의 인생

오늘은 베낭도 줄일겸 성삼재 매점에서 아침을 해결하려고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

예전에 영월지맥을 하면서 제천의 용두산 근처의 산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개고생한 트라우마 때문에 산에 다닐때 카트를 잘 안가져 다니고, 가져가더라도

 산악회 버스를 타고가면 보조가방에다 두고 내리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도 지갑을

가져오긴 했지만, 카드는 안 가져왔고, 지갑에서 돈 20,000원만 주머니에 넣고

지갑은 차에 두고 내렸다.

 

이마트 24시란 편의점이 있어서 올라가니 산꾼들이 컵라면 등을 먹고 있다.

근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하니 새벽이라 그런지 무인판매 시설 형태이다.

입구에 들어가려면 신용카드를 꽂아야 문이 열리는데 카드가 없으니  나에겐

그림의 떡이다...하는 수 없다...베낭에는 초코파이 2개와, 쥬스 2병, 복숭아 2개,

초콜렛이 있으니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냐싶어 그냥 편의점을 내려온다.

 

나도 이젠 생활 패턴을 바꿔야 하나...하긴 그게 하루 아침에 바뀌진 안겠지만...

난 아직도 내 눈으로 봐야하고, 내손으로 만져봐야 구매하는 스타일이라

그러기에 내 평생 인터넷같은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해 본 적이 없다.

산행을 시작하다(03:45)

매점에서 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고 탐방로 입구에 있는 해우소에서 볼 일을 보고,

등로로 나오니 같이 온 등산객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어둠속에 하늘을 바라보니 청명한

하늘에는 음력 팔월 초하룻날의 새벽에 빛나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하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고개까지는 아무나 갈 수 있게 자동차가 다닐만큼 완만한 등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대간길이나 성중종주를 하시는 분들은 이 길을 우습게 보고 속력을

냈다가는 오버페이스를 하여 체력 방전으로 인해 개고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한 곳이다.

성삼재(1,090.7m)에서 노고단 고개(1,440m)까지의 거리가 2.5km에다 고도차가

350여m나 나기 때문에 우습게 봤다가는 개고생하는 코스라 초반이기도 하지만 몸도

풀리지 않은 상태이기에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노고단 고개로 향한다.

 

 또한 이곳은 지리주능선 종주나 지리산 트레킹을 하는 등산객들이야 편안한 길을

따라가도 상관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대간꾼들은 성삼재에서 종석대,

노고단을 거쳐 돼지령 직전까지 코스가 늘 맘에 걸리는 코스인데, 국공파들의 행정

편의주의(?) 발상으로 인해 코스를 놀려놔도 너무 엉뚱한 곳으로 돌려 놓은 곳이다.

그래도 산꾼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길들여진  순한 양처럼 국공파들이 정해준 길을

따라서 걸어야한 한다...왜냐고요!...힘없고 빽없으니까.

이런저런 씨잘데 없는 잡념속에 걷다가보니 화엄사쪽 방향으로 빙빙 돌아서

노고단 고개가는 도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임도(04:12)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에서 우측으로 가면 화엄사 가는 길이 나오고

남서쪽으로는 갈 수 없는 종석대가 있는데, 오늘 내가 따라온 산악회에서

산행 시간은 널널하게 충분히 주어서 종석대를 한번 가보고 싶지만, 아직 黎明이

시작도 않은 탓의 음력 팔월 초하룻날의 어둠을 뚫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종석대를

가기에는 예전처럼 체력이 안 따라줄것 같아서 포기를 한다.

 

* 종석대(鍾石臺:1,360.9m)는 우번대사가 수도 중에 여인의 모습에 끌려 지금의

  우번암에 이르니 석종소리가 들려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있어 임도를 버리고 오르막을 오른 다음에

방금전에 헤어진 노고단가는 넓은 길을 다시 만나는데, 자꾸만 등산객을 나약하게

만드는 인공 시설물들이 참으로 맘에 안든다...제발 자연은 그대로 두어라.

지리산은 우리 잠깐 빌려쓰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인데, 이렇게 망가트리면 안되제...

무넹기 고개(코재:04:15)

무넹기는 '물이넘쳐 마을로 들어온다' 라는 뜻을 가진 "무너미"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엄사에서 이곳으로 오르는데 그 가파름에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 코재 ' 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리산 남부 탐방소 김승완님의 고견에 의하면 " 코재 " 의 유래는 노고단을

얼굴 전체로 보면 코에 해당하는 부분의 위치에 있어서 코재라 불려진다고 한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코재 위에 눈썹 바위가 있고 무넹기를 전라도 방언으로 ' 데망생이

 '( 표준어: 이마 ) 라하니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코재라는 유래 보다 현재의 위치가 코에

해당한다는 유래가 신빙성이 더 있지 않나 싶다. (자료 인용)

어둠속에 만난 무넹기

옛날 구례군 화엄사 아래 섬지뜰에 가뭄이 들어 남원으로만 흐르던 노고단의 물을 사이좋게

나누어서 구례쪽으로 수로를 만들어서 섬지뜰(섬진강과 지리산의 뜰)은 풍요로운 뜰이 되었다.

1930년 노고단에서 남원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일부를 구례 화엄사쪽으로 물길을 돌렸다고

하여 물을 넘긴다는 의미로 무넹기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길상봉(노고봉)에서 시작된 이 물길은

원래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가야하는데 물길을 인위적으로 섬진강으로 돌린 곳이다.

사람들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생사가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이 물길도 똑같은 셈이다

이 나라를 규제덩어리로 만드는 행정편의주의 발상의 흔적

무넹기를 따라서 들리는 물소리가 참으로 청량하게 들린다.

홀로 無念無想으로 어둠속에 걷는 이 길...참으로 좋다.

마치 求道者가 깨달음을 얻기위해 布行하는 것처럼 걷다보니

노고단으로 향하는 삥둘러가는 길을 버리고 질러가는 길의

이정표가 나온다. 

갈림길(1,338m:04:23)

이곳에서 또 다시 노고단 고개로 향하는 삥돌아가는 길을 버리고 이정표를 따라서

올라가는데 이정표 옆에는 구조이정목(지리(전남):24- 05:해발 1,338m)이 있다.

샛길로 올라서니 토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돌길을 만들어 놨는데 아무도

만나지 않는 어둠속의 이 길...고도를 높이면서 노고단 대피소로 향한다.

 

1주일 사이에 날씨가 많이 바뀐 모양이다...성삼재에서 출발을 하면서 입은

바람막이 자켓을 입고 걷는데도 땀한방울은 커녕, 오히려 추운 느낌이다.

꽤나 빡센 오르막길을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10분정도 걸어가니

사람들 소리가 왁짜지껄하게 들리는 노고단 대피소가 나온다.

노고단 대피소(1,350m:04:33)

이 대피소는 1920년대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양선교사들이 풍토병

치료를 위해 지었던 수양관 건물이었다고 한다...그러다가 38년간 지리산을 지켜

털보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함태식(1928~2013)선생의 노력으로 산악인들과

함께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지리산 9개소의 대피소 중에서 최초로

설치된 대피소로, 지금의 건물은 1988년에 노후 된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75평 크기의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은 것이다. 

대피소답게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취사장에는 라면을 끓이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이고, 구수한 라면 냄새가 범여의 침샘을 자극한다.

한 젓가락 얻어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냥 노고단 고개로 향한다.

노고단 고개(老姑壇:1,440m:04:45~05:05)

노고단(길상봉) 아래에 있는 노고단 고개는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오르지 못하는

노고단을 대신 하고 있는데 초소와 돌탑, 노고단 탐방지원센터 등 각종 시설물 등,

넓은 공터가 있는 곳으로 지리 주능선을 걷는 등산객들이 쉬어가는 고개이다.

 

노고단이란 늙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사터를 말하며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라고 한다.

노()는 존칭의 의미이며, 고()는 마고를 뜻하기도 해서 마고할매를 위한 제사터라고한다

마고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여신으로 그가 사는곳은 마고성이라고 하며

원래 마고(麻姑)는 젊은여성이었으나 오랜 전설속의 여신이므로 마고할매라고 불린다

 

노고단(老姑壇)이라는 지명은 할미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할미’는 도교(道敎)의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어머니), 또는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일컫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설에는 늙은 할미라는 뜻의

‘노고(老姑)’가 ‘마고(麻姑) 할미’를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성삼재를 출발한 지 1시간만에 노고단고개에 도착하니 헤드렌턴을 켠 채로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이 많이 보인다...나 역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오늘은 시간적 여유가 많고, 어둠속에 걷는 산행은 아무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노고단으로 올라가서 智異十景중에 하나인

노고운해(老姑雲海)가 아닌 노고일출(老姑日出)을 구경하고 노고단에서

돼지령으로 이어지는 비탐구간인 오리지널 백두대간을 걸어 볼 생각이다.

노고단가는 길

예전엔 없어던 탐방지원센터에 노고단(길상봉)으로 가는 체크계수기가 있다.

이곳에는 사전 예약을 한 다음에 스마트폰 속의 사전 QR코드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곳이다...2016년 8월 27일 새벽에 이곳을 

지나갈 때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않고 노고단을 갔다 왔었는데...

다른곳의 국립공원에는 허가를 받고 출입하는 지역은 대체적으로 국공파들이 공무원의

출근 시간이 되서야 통제를 하는데 이곳은 새벽 5시부터 출입이 되는 곳으로 국공파들이

잠을 안 자고 나오는지, 아니면 이곳에서 숙식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5시도 안되었는데도

마스크를 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른 새벽이고 컴퓨터를 잘 할줄 몰라서 사전 예약을 못했는데 좀 들여보내주면 안되냐고

사정을 하니 국공파는 씨알도 안먹힌다... 하긴 저 친구야 자기 본분에 충실한데 뭔 탓을 하랴.

융통성없는 윗 분들이 문제지...렌턴을 끄고 우회하여 숲 속으로 치고 오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 나이에 그짓거리 하면서 산행을 한들 뭔 富貴榮華를 얻겠는가...포기하자.

조선시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그의 지리산 기행록인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노고단을 고모당(姑母堂)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곳은 한여름에도 기온이 서늘한 아고산지대로서 약 30만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원추리 군락과 각종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큰 산이란 늘 변화무쌍하다고 했던가.

성삼재 오를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하늘의 별빛이 쏟아질 것만 같은 맑은 하늘이

노고단 고개에 올라서니 갑자기 밀려오는 짙은 안개가 노고단고개를 뒤덮어 버린다.

그래 이런 날씨에 노고단(길상봉) 정상으로 오른들 뭔 소용이겠나.

노고단 고개에 있는 안내판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은 한국 5대 명산 중 하나로, 웅장하고 경치가 뛰어나며

3도, 5개 시군, 15개 면에 걸쳐 484km2 (1억3,000만 평)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천왕봉(1,915m), 노고단(1,507m)으로 이어지는 100리 능선에 반야봉(1,731m), 토끼봉 등

10여 개의 고산 준봉을 비롯해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있으며, 화개천, 연곡천, 경호강,

덕천강 등 10여 개 하천의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지리산 12동천(洞天)을 이루고 있다.

 2016년 8월 27일(지리 종주시 사진)

 

노고단(老姑壇:1502.9m) 은

전북 남원군 산내면과 전남 구레군 토지면의 경계에 위치한 봉우리로

천왕봉(1915.4m), 반야봉(1731.8m)과 더불어 지리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이다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老姑)를 모시는 곳(壇)이라 하여 노고단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신라시대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가을에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고, 신라 화랑들이 이 곳을 수련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 제사터는 원래 천왕봉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노고단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서 서양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별장터였던

노고단은 6.25 당시에 빨치산 소탕 작전때에 불타버려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노고단 고개 정상에서 黎明을 기다리며 20분을 쉬었는데도 여명은 커녕 갈수록

짙은 안개가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아서 노고단가는 걸 포기하고 어둠속에

반야봉을 향하는 길을 나선다(05:06)

어둠속 산행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범여이지만 설악산이나 지리산같은 들.날머리가

긴 산에서는 무박산행이 아니면 갈 수 없기에 무박 산행을 나서 어둠속에 길을

걸어 가지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홀로 걷는 이 길...肉眼이 아닌 慧眼으로 걷는다.

 

석가모니께서 상수제자(常隨弟子)인 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한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육안으로 길은 보이지 않아도 혜안으로 어둠속의 길을 걷는 셈이다.

시간이 갈수록 짙게 밀려오는 안개가 2주만에 다시 찾아온 범여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 보이는지 가시거리가 10m가 안되어 보일 정도이다.

흔히들 지리산의 仙景을 보려면 3대가 德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德이 모자람을 탓해야지 지리산의 박무(薄霧)를 탓해서 뭣하겠는가.

자연에 순응하면서 산길을 걷는게 산꾼이 산에 대하는 예의겠지.

노고단 고개를 출발한 지 1.0km지점...짙은 어둠과 안개가 뒤범벅이 된 등로.

올 때마다 등산객들로 번잡했던 이 길은 이른 새벽에 동이 트지 않아서 그런지

1km를 걸어오면서 등산객 한 명도 만나지 않고 호젓하게 반야봉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한참을 우회했던 백두대간 마루금으로 복귀를 한다

성삼재에서 헤어져 종석대(鐘石臺:1.360.9m), 노고단(老姑壇:1,502.9m), 1471.8m봉을

거쳐서 내려오는 등로와 만나는 곳이다...출입금지 팻말과 금줄(禁線)이 처져있다.

궁금하여 금줄을 넘어서 들어가보니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아마 이곳에서 生을 다한 산꾼의 묘지인듯한 돌무기에 나무토막이 세워져 있는데,

조난 당한분의 묘지인 듯 하다...해가 긴 여름밤의 새벽에 와서 비탐구간인 이곳을

국공파를 따돌리고 꼭한번 걸어 보리라... 

노고단고개에서 임걸령까지는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지리 주능선중에서

고도차가 별로없는 가장 편안한 길이다...마치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을 걷는 기분이다.

이정표(05:40)

나홀로 느릿느릿한 황소걸음으로 반야봉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아직까진 어둠속이다.

아마 여명이 시작될 모양인지 동쪽의 먹구름 사이로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돌탑(05:45)

성삼재에서 출발한 지 2시간만에 돌탑이 있는곳에 도착한다.

구름이 잔뜩 끼여있어 흐리긴 하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헬기장(05:48)

똑닥이 카메라에 갑자기 노이즈 현상이 생긴다는 자막이 뜨면서 그림이 엉망이 되버린다.

헬기장에서 올라서니 등로에서 1~2m정도 벗어나 있는 족보가 있는 1,411.6m봉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홀대받는 느낌을 받는 봉우리이다.

1,411.6m봉(05:50)

자꾸만 똑닥이가 쥔장에게 쏙을 썩이는데 이걸 우짜면 좋노...

전망은 좋으나 구라청의 예보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조금은 불안하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동남쪽으로는 여인의 乳頭처럼 솟아오른 왕시루봉(1,263.2m)과

그 뒷쪽으로는 질등(1,147.4m)과 문수골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천왕봉쪽에서 일출이 시작될 모양인지 하늘이 벌겋게 붉어지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 천왕봉은 백두대간이 멈추는 천하의

대명당이라고 설명했다. ...‘古語曰 天下名山 僧占多(고어왈 천하명산 승점다)천하의 명산을

승려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했고, 이 지역이 고향인 남명 조식 선생은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하며,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그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지리 8경’ 중의 으뜸인 ‘천왕일출’인데,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광경이다.

1,411.6m봉에서 바라본 반야봉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반야봉 정상의 모습이다.

뾰족하게 여인의 궁둥이처럼 생긴 봉우리 우측이 반야봉이고 좌측이 중봉이다.

원래는 좌측이 반야봉이고 우측이 중봉인데...“현오와 걷는 지리산”의 저자인

권작가님의 설명에 의하면 국립공단에서 두개의 봉우리 지명을 바꿔 버렸다고 한다 

천왕봉 윗쪽으로 일출이 시작된다.

자꾸만 나타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똑닥이카메라의 노이즈 현상

날이 밝아졌는데도 짙은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지리산을 한번 더와야 되것 같다...지난주에 묘향암의 호림스님과의

약속을 기상 변화로 인해 취소한 것을 알았는지 마고할미의 꼬라지가 시작된 모양이다

좁은 산죽길을 따라서 호젓하게 나홀로 걷는다...지리산 등로도 이런날이 있구나.

등로에서 만난 취나물 씨방

등로에서 바라본 왕시루봉과 피아골의 모습

지리산의 골짜기치고 분단의 간직하고 있지않은 골짜기가 있을까마는

안개속에 갇혀진 피아골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 피아골에서 죽은 이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이곳 직전(稷田)마을에서 오곡 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피밭골이 피아골로 변한 것으로 지리산 주능선 상의 삼도봉과 노고단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모여드는 골짜기로 동으로는 불무장등 능선, 서로는 왕시루봉 능선 사이에 깊이 파여 있다.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조선 중기에 좌퇴계, 우남명(左退溪, 右南冥)으로 불리웠던 남명조식((南冥 曺植:1501~1572)은

“피아골은 온 산이 붉게 타서 산홍(山紅)이고,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춰서 수홍(水紅)이며,

그 몸에 안긴 사람도 붉게 물들어 보이니 인홍(人紅)이라고 해서 옛부터 삼홍(三紅)의

명승지라 일컬어 왔다.” 고 했다.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의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남명 조식 선생의 詩 '삼홍소'

돼지령(1,370m:06:00)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 능선에 있는 돼지령은 주변으로 여름이면 원추리가

군락을 이루는 곳으로 멧돼지들이 원추리 뿌리를 캐먹기 위해 자주 출몰했는데

그런 사유로 돼지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30년전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마지막 회(1992년 2월6일)에

운무가 낀 설원의 산정(山頂)에서 하림(박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인공 대치(최재성) 와

여옥(채시라)가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촬영지가 바로 이곳 돼지령과 노고단

일원이었다고 한다...그 때 하림이 한 마지막 대사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 무정한 세월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다"는 말... 30년이 지난 지금의 이 시대에서도 유효한 듯 하다

돼지령 헬기장에서 여인의 엉덩이처럼 보이는 반야봉을 바라보며...

 내리막으로 내려가는데 지도상에 대간 마루금으로 되어있는 1,383.4m봉이

앞에 보이지만 저곳은 자연보호라는 명목 아래 국공파들이 비탐구역으로 만들어 놨다.

국가 장기 생태 연구지(06:04)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대판’이라 표기를 해놨는데 뭔 뜻인지 모르겠다.

남쪽으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없었던 전망대를 만들어놨다.

이제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 아닌 유원지(?)가 되어가는 느낌이라

기분이 씁쓰럼하다...예전에는 지리산을 주능선을 종주했다하면 부러운

눈치로 쳐다봤는데 지금은 개나 소나 다 다니는 둘레길처럼 변해가는 중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왕시루봉에서 질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은 박무에 갇혀 버렸다

됐다, 안됐다를 반복하는 똑닥이의 노이즈 현상...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제도권 등로 우측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포기하고 사면길을 걷다보니 

우측의 피아골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있는 1,347.4m봉이 나온다

죽어서도 본분에 충실한 枯死木

피아골 삼거리(06:15)

지리산의 단풍 산행코스로 유명한 피아골은 6.25전쟁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피로물들은

계곡이라해서 피아골로 불린다고 알려져있으나  피아골이란 지명은 이곳에 피밭(직전,稷田)이 

많아 붙은 이름으로 오곡중 하나인 피를 많이심었던 골짜기라, 즉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피는 보이지않고, 빨치산과 토벌대가 흘린 수많은 피가 먼저 생각나는건 아마도 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피아골이란 유래는 옛날 속세를 버리고 이곳의 한적한 仙景을 찾은 仙客들이 이곳에서 오고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을  그 후 변음이 되어 피아골로 불렀단다 

제도권 따라서 걷다가 보니 식수를 보충할 수 있는 샘이 있는 임걸령에 도착한다.

노고단 고개에서 돼지령 오는 어둠속의 등로에서는 독초로 알려진 

흰진범이 많이 보이더니만 날이 밝으면서 처음에 만난꽃이 멸가치다.

 

멸가치(꽃말:당신에게 모든걸 바칩니다)

조금의 생소한 이름의 야생화로 이름으로 미루어봐서 멸치와의 연관성이

있어 보이나 전혀 관계가 없으며, 나물로 이용하는 취나물 종류이다보니

‘취’가 ‘치’로 바뀌어서 멸가취가 아닌 멸가치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으며, 지혈과 이뇨작용에 효과가 있으며, 염료로도

이용할 수 있는 식물이다

서서히 나타나는 야생화를 구경을 하니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러는 사이에 조망바위처럼 보이는 임걸령에 도착한다

임걸령(林傑嶺:1320m:06:30~50)

조선 선조때의 좀도둑인 임걸년(林傑年)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활동무대는 반야봉 일대였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임걸년은 

팔도행상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한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라고

하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선조때 남원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의하면

‘1594년 6월 영남사람 임걸년이 도당(徒黨:불순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룬 무리)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출몰하여 도적질을 하였다’ 적혀 있는데 임걸년이 와전되어 임걸령으로 된듯 싶다

 

그는 화계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때의 임걸년은 지리산의 모든 사찰을 털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그가 활동한 장소라해서 임걸령(林傑)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숲이 울창해서 

고갯마루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며 이곳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저술한

   조선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역사서이다

등로 좌측 아래로 내려서면 지리산 샘물중에 가장 물맛이 좋다는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임걸년 샘이 있다....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여기까지 오면서

물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이곳의 물 한모금 마시지 않으면

샘에 대한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물 한모금 시원하게 마시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지리산에 관한한 거의 신신령 수준인 “현오와 걷는 지리산(리더북스 출판)”의 저자인

권작가(현오)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임걸령 샘이 아닌 천호샘으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곳은 날씨 탓인지 아직까지 취나물 씨방이 건강(?)해 보인다

임걸령 샘물 근처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짚신나물

성삼재에서 출발한 지 3시간만에 임걸령에 도착하여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이곳은 평소같으면 등산객들이 항상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오늘은 한 명도 없다.

임걸령을 전세내어 휴식을 취하면서 가져온 복숭아 하나와, 쥬스한병, 초콜렛 하나로

아침을 해결한다...베낭 무게를 줄이려고 아침을 싸오지 않았고, 성삼재 휴게소에서

아침을 해결하지 못한 탓에 오늘 산행도 20km가 훨씬 넘는 거리라 식량을 조절해야

할 판이지만, 그래도 아직 베낭에는 쥬스 한병과, 복숭아 한개, 초코바 2개와 육포

3조각, 알사탕 5개나 있어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임걸령에서 바라본 지리 남부 능선의 모습

골짜기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이지만

슬픈 내색 한번 하지않는  아버지의 가슴만큼이 넉넉한 곳...지리산

 

보이는 저 곳 지리산 남부 능선은 한국 현대사의 이념갈등과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1951년 12월 2천여명에 이르는 이영회 부대 빨치산들이 군.경 토벌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숨어든 이 골짜기에 그 이듬해 1월 마지막 화력을 퍼부어 엄청난 사상자를 낸 곳이

이곳 좌측의  대성골과 우측의 거림골이다

좌.우의 이념 대결에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간 저 민초들의 원한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임걸령에서 아침을 겸한 20분간의 긴 휴식을 취한 다음에 노루목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노루목을 지나서 반야봉까지 고도를 420m 이상을 높혀야 하는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드는 구간이다...오르막 구간에서는 범여에겐 쥐약이다.

이런 곳에서는 심장에 무리가 오지않게 최대한 느리게 걷는 방법밖에 없다.

이 핸디캡만 없어도 눈치 안보고 후배들 따라서 대간길을 따라 나서고 싶지만

이것 때문에 느림보가 되어 밉상소리 안들을려고 혼자서 다니지만, 쥐꼬리만한

연금받아, 돈이없어 걸어다니는 산꾼에겐 지출이 좀 심한 편이다.

임갈령 쉼터(1,388m:07:02)

임걸령 쉼터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남):01- 07:해발 1,388m)

이정표를 지나면서 반야봉을 향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곳도 지난해 6월까지만해도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있었어

편하게는 오르지만 맘이 그리 편치가 않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예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도로를 개설하고 통행료를 받아라...ㅉㅉㅉ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아니라 지리산을 망가뜨리는 공단인 건 아닌지...

둥근이질풀도 내 뜻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떡인다

산길이란 쉬운면 쉬운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걷는게 正道인데 말이다

쉼터(07:25)

다시 노루목을 향하는 오름길이 시작되지만 나혼자 걸으니

부담도 없고, 맘이 편하다...흐린날씨에 오르막길만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통증도 오늘따라 아직 없으니 그런대로 걸을만 하다

오르막 능선길은 우측으로 돌려놨고, 큰 산에 오니 마루금 지형이

참으로 많이 변해 버렸다...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편하려면 삐까 번쩍한 자가용타고 드라이버를

즐겨야지, 힘든 산에 왜 오는가...힘들게 정상에 올라 느끼는 歡喜⼼의

참맛을 아는자만이 산에 오를수 있는 자격이 있는걸 왜 모른단 말인가.

노루목 직전에 만난 암두(巖頭)

노루목이란 명칭은 이곳의 암두(巖頭)의 모양새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불려졌다는 설과 노루가 지나 다니는 길목이라 해서 붙혀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문순태의 장편소설 “철쭉제”에서는 ‘산에서의 세갈래길’을 흔히 노루목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길목인 노루목에서는 흔히 세갈래 길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또한 땅의 모양이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으로 ‘널’자에 지점이라는

뜻의 ‘목’자가 합쳐져 널목→놀목→날목→너르목→노루목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노루목 (1498m:07:35)

노루목이란 이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해서 붙은 지명인데 항간에는

노루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붙었다고 하고 또 다른 일설은 노루목 앞에 있는

바위의 모양새가 노루가 목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이라 노루목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노루목에는 유래에 대한 몇가지의 설(說)이 있다.

 

1. 귀여운 노루와 그 모가지 자태설

반야봉 아래 노루목은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의미도 되지만,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2. 널목 유래설

노루목이라는 지명은 우리나라 곳곳에 너무나 많을 뿐만 아니라, 한자로 노루(獐)과

목(項)을 사용하여 [장항]이란 산마을 지명도 있다. (지리산 달궁계곡 초입마을)  
 
이처럼 귀여운 노루보다 우리말 어원에서 설명하는 방식은 이러하다.

즉, 땅의 모양이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의 [널]자와, 지점이라는 뜻의 [목]자가 합쳐져

널목, 날목 > 너르목, 노루목 등으로 변하였다는 것인데 산줄기가 내려오다가 경사가

늘어진 곳이나 넓어진 곳에 붙였던 이름이다... 이 고개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 즉,

노루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명이라 볼 수 있다

이곳은 반야봉으로 가는 갈림길인데 반야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일부러 가기에는 그리 쉽지않는 봉우리이라 예전에 대간을 걸을때는

반야봉쪽으로 가질 않고 우측의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사면길로 향했는데

실제 백두대간 마루금은 이곳에서 반야봉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 반야봉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오리지널 대간 마루금이다

이곳에 오니 오늘 산악회에서 리딩을 하시는 산적이란 닉을 가지신 분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꼴찌인가?...그거랑 무슨 상관이여...뭔 지랄을 하던간에 시간안에 도착하면 되는데...

산적이면 험상궂은 얼굴에 도(盜)선생의 냄새가 나야 하는데, 곱상한 얼굴에 풍기는

용모는 산적과는 전혀 다른 범생이(모범생) 얼굴이다.

선 채로 잠깐 대화를 해보니 산에 관한한 해박한 지식에다, 출중한 산행 실력이 과연 대장답다.

반야봉 갈림길의 오르는 길에는 철쭉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반야봉 삼거리(1,550m:07:50)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가진고 반야봉으로 향한다

반야봉으로 향하는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寤寐不忘 그리던 산오이풀꽃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내가 오늘 이 구간의 산행 목적은 지리산 구간의 대간길을 마무리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상의 주목적은 반야봉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 꽃을 보기 위해서이다.

반야봉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흰듬등(1,437.7m)과 불무장등(不無長嶝:1,441.1m)

불무장등(1,441.1m)은 지리산에서 유독 장등이란 명칭을 쓰고있는 봉우리다.

 

그런데 불무장등(不無長嶝) 봉우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한문으로 풀이하면 ‘없지 아니한 긴 산등성이’처럼 그저 밋밋한 고갯마루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 산세가 대장간의 화로인 풀무와 같은 형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경상남도 문화관광국 관광행정담당은 “올바른 표기는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 또는 불모(佛母)를 용어를 사용하는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불모장등은

반야봉에서 시작한 반야장등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다.

 

“반야”라는 중복된 같은 글자를 피하고 같은 의미인 불모장등(佛母長嶝)이란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불모” 또는 “불무”로 읽어 현재의 불무장등이란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불무장등 능선은 반야봉에서 시작되어 하동군 화개면 탑리까지 능선으로 이어지는 날나리봉이라고도 한다

흰쑥부쟁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산오이풀(꽃말:애교)

지리산, 설악산 및 북부지방 고산의 중턱 이상에서 자라며,  8~9월에 붉은자줏빛 꽃이 피고

어린 싹은 관상용, 뿌리는 지혈제로 사용하며, 잎을 문지르며 오이냄새가 난다고 해서

붙혀진 꽃 이름...지리산에서는 세석고원과 이곳 반야봉의 산오이풀이 유명한데

개인적으로는 반야봉의 산오이풀의 꽃이 훨씬 이쁜 느낌이다.

 

다만 산행 시기가 맞질 않아 꽃이 끝물이라 썩 맘에 드는 꽃이 보이지 않는구나.

올해의  야생화들은 서서히 시즌 마감을 준비중이라 조금은 아쉽다.

이제는 볼 수 있는 곳이라곤 소백산 비로봉 아래 아고산 지대와 9월 중순쯤

滿開하는 평창 대덕사 계곡의 물매화 밖에 없을 듯 하다.

물론 영광 불갑사와 고창 선운사 계곡에서 피는 상사화(꽃무릇)가 있긴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상사화는 원예종이지 야생화는 아닌듯 하다.

반야봉 가는 길에서 만난 이건 또 뭐여.

산이란 참으로 공평하다...빡세게 올라선 다음에 편안한 안부길을 걸어 마고할매 만나러 간다

서덜각시취도 서서히 내년을 기약하며 이별을 준비한다

안부(08:02)

반야봉의 또다른 자랑거리는 지리산만의 풍요로움과 고고함과 풍겨주는

반야봉 주변의 구상나무, 분비나무,신갈나무 등 원수림 수해(樹海) 이다.

반야봉 일대는 광양 백운산과 함께 서울대학교 학습림이기도 한 지역이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반야봉을 망가뜨리는 시설물

반야봉 쉼터(08:10)

꼴도 보기 싫지만 이곳으로 걷지 않으면 반야봉 정상으로 갈 수가 없으니

울면서 겨자먹기 식으로 긴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반야봉으로 향한다.

반야봉의 쥔장인 마고할매가 꼬라지를 부릴만도 하다.

 

계단이 끝나고 예전의 돌길로 걸어가면서 야생화와의 눈맞춤을 시작한다.

둥근이질풀

산오이풀

투구꽃과 交感을 나누는 잠깐 사이에 반야봉 정상에 도착한다.

반야봉(般若峰1,732.1m:08:23~30)

반야봉은 지리산 10경중 제3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봉우리로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기궁뎅이처럼 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으로 국토지리 정보원의 지도에는 권작가(현오)의

의견이 반영되었는지 반야봉을 중봉이라 표기해놨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중봉을

반야봉이라 표기를 해놨다.

 

반야란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으로 반야의 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하는데,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반야봉은 운해(雲海)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되는데,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秘境) 그 자체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般若)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佛道)를 닦았다...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 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완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한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증샷

반야봉 정상 바로 아래에는 예전에 없었던 전망대가 있지만

짙은 안개가 반야봉 주변의 仙景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을 망가뜨린데 대한 마고할매의 꼬라지인가?.

아님 반야도사에 대한 한없는 미련과 원망이련가

하긴 지리산 진면목을 보려면 3대가 福을 쌓아야 한다고 했거늘

나처럼 제대로 福을 쌓지 않고 무임승차로 지리산의 선경을 감상할 순 없겠지.

반야봉은 대부분의 봉우리가 지리주릉에 있는 것과 달리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고단 방향에서는 노루목에서 곧바로 오르면 되고, 반대 방향인 삼도봉에서는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된다.

 

반야봉을 중심으로 등산로는 여러 곳 있었는데, 주릉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입통제

구간이고, 달궁 쟁기소에서 시작하는 8km의 길은 원시림에 파묻힌 부드러운 길이고,

심원마을에서 시작하는 9km의 길은 노고단 방면으로 펼쳐지는 부챗살 모양의 전망이 일품이고,

반선마을에서 심마니능선을 경유하는 코스는 지리주릉, 서북능선, 삼정능선이 모두 조망된다.

이 외에도 심원마을에서 대소골, 반선마을에서 뱀사골-이끼폭포를 경유해서 올라오는 코스도

있는데 이 코스 또한 통제 되었다.

 

2016년 8월 27일에 나홀로 금선(禁線)을 넘어서 중봉, 묘향암, 이끼폭포를 경유하여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 갔었던 이곳 역시 예전에 없었던 철제 휀스로 막아놓고

경고판도 많이 붙혀 놨구나...산꾼이 산길을 못 걷는다는 건 서글픈 일인데 말이야.

마고할매의 꼬라지로 인해 반야봉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멋진 仙景은 

一場春夢이 돼버렸고, 진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반야봉 갈림길 가는 길에서 만난 동자꽃

산구절초도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내년 8월초에 다시한번 너를 찾아오마...

풀섶에 숨어 수줍은 채 산꾼을 바라보는 투구꽃.

금마티리도 얼굴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 안개 깔린 하늘 비치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히 쳐다보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가

그 좋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 이성부의《지리산》중에서 “좋은 사람들 때문에” -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되돌아 가는 산꾼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1,622.0m봉(08:40)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등재된 봉우리이건만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는구나.

1,622.0m봉을 우회하여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간다

1,622.0m봉을 뒤돌아서 본 모습

지리산은 1967년 12월 국내최초의국립공원으로지정 전북과 전남, 경남 등의 3개도, 5개 시,군,

15개읍. 면에,속하는 산악형 국립공원으로, 지리산의 총면적은 약472㎢이고 이는 계룡산

국립공원의 7배, 제주도 면적의4/1이자 서울시 면적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다

 

지리산(智異山)의 명칭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라는

뜻에서 유래된것으로 이는 수많은 隱者들이 이 산에 숨어 도를 닦으며 정진 해왔음을 말해준다.

지리산은 옛날에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고도 하였고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었으며, 신라시대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을 오악(五岳)이라 하였는데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南岳)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14억 5천 6백만평)으로서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 라고 썼다...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 에서 음을 따와 한문으로

쓰다보니  '두류(頭流)'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야봉에서 꽉 막혔던 박무는 조금 걷히기는 했으나 사물이 뚜렸히 보이지 않는다.

앞에 보이는 삼도봉(일명:날나리봉)에서 갈라지는 피아골과 목통골의 경계.

아니 전남과 경남의 도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봉이 흐릿하게 보인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 이름이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서

출발하는데,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비문에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다시 반야봉 갈림길(08:50)

반야봉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벗어논 베낭을 메고 삼도봉으로 향한다

미역취(꽃말:경계, 예방)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돼지나물'이라고도 하며,  한반도와 일본 등

산지 전역에 자생하며, 울릉도 산지에서는 식용을 위해 재배하기도 한다.

국을 끓이면 미역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여 '미역취'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어린순으로 나물을 무치거나 튀겨서 먹고, 데쳐서 말린 후 묵나물을 만들어

먹기도 하며, 한방에서는 건위제·강장제·이뇨제로 쓴다.

내리막길에서 늦둥이 꿩의다리 꽃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노루목에서 반야봉으로 오르지 않고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등로의 합류점을 만나 삼도봉으로 향한다

묘향암가는 길(09:03)

묘향암 가는길에는 반달곰이 출현하는 지역이라 비탐구간이 해놨다.

호림스님은 굶어 죽으란 얘기인가?...신도들이 찾아가야 하는데...

스님!...조만간 일정을 조율하여 찾아뵙겠습니다.

묘향암(妙香庵)...2021년 6월 20일 묘향암에서 1박 하면서...

 

화엄사의 말사에 속한 암자로 해발 1500m고지에 있는 오지중에 오지에 있는 암자이다

천왕봉 아래에 있는 법계사(1,450m)나 설악산 봉정암(1,200여m) 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

예부터 선승들은 북에는 묘향산 법왕대, 남에는 지리산 묘향대를 꼽았다고 한다.

 

묘향(妙香)이란 단어는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 나오는 불교 용어로 “기이한

향기(奇香)”를 말하는데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 계향(戒香), 시향(施香)이 있다

이 향은 바람을 거슬러 냄새를 풍기다고 하며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정화하는

보살의 정신, 세상의 논리를 거슬러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소금장수 묘(09:04)

삼도봉가는 등로 우측에 묘지가 한 기 있는데 권작가의 말로는 소금장수 묘라고 한다.

150년전 일흔살된 소금장수가 소금을 진 채 오르다가 지쳐 죽어 묻혔다는 `운봉무더미`이다

 

삼도봉 아래에 있는 화개재에는 하동에서 올라온 해산물과 남원에서 내려온 농산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場이 열리곤 했는데 그와 관련된 묘인 듯 싶다.

그런데 2주전에 화개재에서 명선봉가는 길에 운봉무덤이란 곳이 있어서 헷갈린다

안부(09:05)

삼도봉 가는 길

삼도봉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반야봉은 아직도 마고할매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는지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다.

산오이풀은 이것으로 오늘 산행에서 마지막이다.

그 대신에 며느리밥풀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비스무리한 사면길을 따라서 올라가니 삼도봉 정상이 나온다.

삼도봉(三道峰:1,501.0m:09:08~25)

전남 구례군 토지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 경남 하동군 화계면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리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날나리봉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라 이도봉(二道峰)이 맞는게 아닐까?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낫의 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닐리리 맘보'를 연상시키는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삼도의 경계면에 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으며, 정상에는 석재가

아닌 강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있다

인증샷

삼도봉에서 바라본 불무장등 능선

지리산에서 유독 이 봉우리만 장등이란 명칭을 쓰고 있는데, 봉우리처럼 우뚝 하지도 않고

봉긋 솟아 있지도 않는데,  한자 이름 그대로 "없지 아니한 긴 산등성이"처럼 그저 밋밋한

고갯마루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불무장등이다.

 

어떤 사람은 불무장등(佛無長橙)으로,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부처는 있다는 것이다.

大道無門(대도무문): 대도(大道)는 문(門)이 없다
千差有路(천착유로): 천차만별로 길이 있으나
透得此關(투득차관): 이 관(關)을 꿰뚫어 얻으면
乾坤獨步(건곤독보): 하늘 땅에 홀로 걸으리라.

삼도봉 정상에서 17분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복숭아 한알과 쥬스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화개재로 향한다...이곳에서 반선마을 주차장까지 12km정도 남았지만

내리막길이고, 초코파이 2개와, 알사탕, 육포 몇조각이 있기에 허기는 면할 것 같다.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삼도봉 내려가면서 바라본 암봉의 모습.

암릉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등로를 따라서 화개재로 향한다

물이 보이지 않는 곳인데 물봉선이 보이는구나.

잘있어라...내년쯤에 다시오마.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01- 12:해발 1,440m)

안부로 가는 길

안부(09:30)

원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나

국공파들이 비탐구간으로 막아놔서 오를수 없는 곳이다

안부에서 바라본 목통골의 모습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있는 목통골 마을은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중에

하나로, 가야국 김수로왕이 성불(成佛)한 왕자들을 보러와 머문 마을이라는 설도 있는데,

‘왕이 머문 곳’라고 해 “범왕(梵王)”이란 지명도 가지고 있는데 가야 칠왕자와 관련된 

‘아(亞)’방으로 유명한 칠불사도 있으며,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물레방아도 있다.

1960년대부터 이 물레방아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 덕에 지리산 자락의 마을중에

최초로 전깃불을 켰던 마을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화개재로 내려가는 548계단이라는 곳인데 지금은

엄청나게 연장을 시켜놔서 세어보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3배정도는 되는 듯 싶다.

데크목 우측 능선이 원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10분정도를 내려오니 맨 바닥이 나오고...

백두대간의 원래 마루금을 만나서 화개재로 향한다

화개재가 200m나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등로 주위에는 맹독성을 가진 흰진범들이 군락을 이루며 꽃을 피우고 있다.

이곳에는 비가 왔나?...참취꽃들이 물을 머금고 있다.

데크목을 따라서 내려가니...

화개재가 나오고 2주전에 걸었던 묘봉(妙峰:토끼봉)은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지

짙은 안개속에 숨어 버렸다. 

화개재(花開峙:1,316m:09:42)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 종주 코스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는 곳으로 먼 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하며, 옛날 산내장터에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다 너무 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 서려있다.

 

옛날 화개장터의 소금과 해산물, 남원의 산내와 운봉 그리고 하동의 화개의

내륙 특산물을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로 헬기장으로 쓰였던

넓은 공터(장터)에는 지금 식생대 보호를 위해 출입을 막고있다.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긴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터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등이 인월,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70년대 가수 김상진이 불러서 히트쳤던 「이정표없는 거리」

“이리가면 고향이요 저리가면 타향인데”.....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박대림 작사, 정민섭이 작곡했다.

 

진주가 고향인 작사가 박대림은 1970년 뱀사골을 거쳐 화개재로 올라와서 이곳

이정표를 보고서 지리산의 넓고 장대한 산줄기에 매료되어 이 곡의 가사를 썼다고 한다

화개재에서 뒤돌아 본 삼도봉의 모습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10.5km의 대간길을 6시간에 걸쳐서 호젓하게 걸었다.

이곳부터 반선마을까지 약 12km를 내려가야 하는데 내리막길은 크게 걱정할 거 없다.

거기다가 2주전에 이곳으로 올라왔던 탓에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으니...

 

예전에는 성삼재에서 천왕봉 거쳐 중산리까지 대간길을 한 방에 끝냈는데

이제는 3번을 나누어도 힘이드니 무거운 베낭을 내려놓을 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래 3년만 열심히 다니면 남은 40여개의 지맥과 십승지중 남은 9개를

마무리하고 등산화를 벗을 계획인데...어찌 세상사가 내 맘대로 될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雜念을 추스리면서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간다

데크목 계단이 끝나고 돌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등로가 물을 머금고 있어서 미끄럽다.

폐허가 되어 버린 뱀사골탐방지원센터

샘터(09:48)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18:해발 1,253m)

이곳에서부터 뱀사골 계곡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당귀꽃도 보이고...

4월에 주로 피는 피나물꽃이 8월말에 보이는 건 뭔 조화인가?

인간들이 제 정신 아니니 꽃들도 인간을 닮아가나 보다.

 

피나물꽃(꽃말: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겉에서는 안 보이지만 줄기를 자르면 노란빛을 띤 붉은 유액이 나온다하여

피나물이라 불리는 꽃이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는 내리막을 내려서니 좌.우로 희미한 등로들이 겨우 보이는데 

이 길은 예전에 도벌꾼들과 해방 전후에 지리산에서 숨어지낸 빨치산들의 루트였다고 한다

좌측으로는 반야봉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명선봉으로 연결되는 길은듯 싶다  

화개교(花開橋:10:05)

화개재에서 뱀사골로 내려서면서 첫번째 만나는 다리이다.

돌로 만들어진 등로는 와운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는데 내리막이긴 해도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다...버스를 같이 타고온 등산객들은 다 갔는지

꼬빼기도 안 보인다...하기사 만나도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 일도 없다.

선봉교(先鋒橋:10:10)

 뱀사골의 상류지대는 원시림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껏 편하게 걸어온  등로는 꾸미지 않은 투박한 돌길로 변하지만 그래도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하는 지맥길에 비하면 고속도로이긴 하지만...

이곳을 ‘들돌골(擧石谷)’이라 부르는데 이 돌밭길을 두고 하는 말이란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16:해발 1,105m)

싫던 좋던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간다.

막차쉼터(1,088m:10:15)

이정표 아래에 ‘막차’라는 표시가 나오는데 예전에 지리산 벌목을 할 때

산판 차량이 드나들 때 쓰는 표시라고하며, 이곳까지 차량이 올라온 모양이다

연하교(煙霞橋:10:17)

계속되는  들돌골(擧石谷)

안영교(安永橋:10:25)

계곡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내려서니... 좌측으로 박영발 비트로 이어지는 비탐구간이 나온다.

2주전에 걸었던 길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2주전에 많이 보였던 모싯대와 기름나물,

산수국, 긴산꼬리풀 등은 그 사이에 꽃이 다 떨어져 버렸으니 볼 것이 별로없다

박영발 비트 갈림길(10:40)

좌측의 돌무더기 옆으로 박영발 비트가 있는 폭포수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면 박영발 비트와 묘향암~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비탐구간 등로가 있으나

원시림에 가까운데다 국공파의 단속이 엄청 심한 곳으로 지난해 6월말경에

묘향암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가슴 조이면서 걸었던 길이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인들 동족상쟁의 아픔을 간직하지 않는 계곡이 있으랴마는 폭포수계곡도

그 아픔을 비켜나지 못한 곳인데 그 이유는 6.25동란 당시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을 맡았던

박영발(朴榮發:1913~1954) 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국군토벌대에 저항하며 빨치산의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비트가 있는 곳이다.

박영발 비트 갈림길을 지나면서 뱀사골 계곡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손에 쥐고 있는 지도를 보니 나와 같은 산악회의 차를 타고온 모양이다

또다시 똑닥이에 노이즈 현상이 생기면서 쏙을 썩이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왜 이리 꼬라지를 부리는지?...

뱀사골 상류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유유교에 올라선다

유유교(幽幽橋:10:42)

유유(幽幽)을 직역하면 “깊고 그윽하다”는 뜻인데 뭘 의미하는지?

유유교를 지나 산죽길을 따라서 나홀로 호젓하게 걸어간다.

뱀사골 계곡은 백무동이나 한신계곡에 비하면 등산객이

적은 편이라 그런지 내가 좋아하는 독립군 스타일의 등로이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13:해발 890m)

유유교를 지나서 계곡의 사면길로 걸어가니 소금장수의 전설이 깃든 간장소가 나온다.

간장소의 안내판...2주전에는 어둠속에 지나갔던 곳이다

간장소(10:50)

간장소는 옛날 영.호남 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화개재에서  약 2.7km 아래에

위치한 소(沼)로서 시원한 검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옛날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장수의 소금짐이 이 소에 빠져 간장이 되었다는 설과 이 소의 물을

마시면 간장(肝腸)까지 시원해진다하여 간장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화개장터에서 거래된 소금이나 해산물이 민초들의 등짐을

수송수단으로 하여 화개재와 뱀사골을 통해서 인월이나 산내 등 내륙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간장소의 전설같은 것이 유래되었을 것이다

출렁다리(10:54)

부지런히 내려왔다 싶었는데 이제 겨우 2.7km밖에 못 왔다니...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반달교(10:58)

아치형 다리를 건너 간다...몇개의 다리를 지났는지 모르겠다.

함박골 입구(11:03)

이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뱀사골 계곡에서 아주 멋진 이끼폭포가 나오고

그 윗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곳에 위치한 묘향암을 지나서

중봉(지리산에는 중봉이 2군데 있음), 반야봉, 심마니골로 이어지는 능선인데

등로가 아주 難解한데다 1년내내 국공파들의 감시가 심한 비탐구간이다.

요즘에는 이끼폭포로 이어지는 등로의 감시가 아주 심하다고 한다.

얼마전에 이끼폭포에서 등산객 한명이 사진을 찍다가 실족사하는

사고가 있은 이후부터는 국공파들이 이곳에 CCTV를 여러대를

설치하여 탐방객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8월 27일에 나홀로 반야봉에서 월담하여 묘향대, 이끼폭포를 지나

험하고 험한 함박골 계곡인 이곳으로 내려온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끼폭포를 다시한번 갈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철제 휀스를 이중삼중으로 쳐놓아서 도데체 틈이 보이지 않는다.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하는데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澄潭)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만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그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서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까지 12km,

장장 39여리의 물줄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선인대, 요룡대, 뱀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리고 뱀사골의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데크목으로 만든 둘레길을 따라 걷는 기분으로 참으로 편하게 산행을 할 수 있는 계곡이다

다리 가운데 전망대가 있는 곳을 지나간다.

내려온 길을 뒤돌아 본 뱀사골 계곡의 모습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11:해발 787m)

와운마을까지 들리려면 아직도 8km 가까이 남은 듯 하다

 

소원교(所願橋:11:15)

뱀사골 계곡의 무명폭포가 世俗에 찌들었던 범여의 肉身을 편하게 해준다.

그러기에 이런 맛에 매주 산에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신선교(神仙橋:11:16)

신선교 아래에 있는 제승대가 있는데 등로에서 접근이 힘든 곳이다

제승대 안내판

등로에서 바라본 제승대의 모습

제승대(祭僧臺:720m)는 1,300여년 전 송림사 고승인 정진스님이 불자들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하여 제(祭)를 올렸던 장소로 소원의 영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제승대라 불린다

제승대를 지나면서 만든 등로는 마치 에스컬에이트를 걷는 기분이다.

대웅교(大雄橋:710m:11:20)

佛家에서는 대웅(大雄)을 석가모니불을 칭하는데 여기에는 큰 곰을 뜻하는

대웅(大熊)인지, 석가모니불을 칭하는 대웅(大雄)인지 모르겠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10:해발 674m)

고도를 확 낮추어서 그런지 아니면 길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밀려오는 졸음에 못이겨 졸면서 걷기를 계속한다

예전의 집터같은 곳을 지나고...

편하게 걷다보니...옥류교가 나온다

옥류교(玉流橋:11:25)

지나온 뱀사골 계곡을 뒤돌아 본다

명선교(明善橋:11:28)

명선교를 지나자마자 병풍소의 안내판이 보이고, 옆에는 병풍소 쉼터가 있다

병풍소 쉼터(11:31)

병풍소는 계곡 아래에 내려갈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다.

병풍소(屛風沼:718m:11:31)

뱀사골 계곡에는 여울과 소(沼)가 교대로 분포하여 수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沼)는 계곡물이 흘러가다 균열이 많이 생긴 약한 바위를 만나면 집중적으로 바위를 깎아

형성되게 되는데 뱀사골 계곡에는 간장소, 병풍소, 병소, 등 다양한 소가 존재하며 그 중에

병풍소(屛風沼)는 계곡물에 의해 깎인 모양이 병풍(屛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병풍소는 뱀사골의 제1경으로 소(沼)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짙푸른 소와 폭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계곡으로 난 등로에서는 많이 떨어져 있어 등로에서 뚜렸이는 안 보인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09:해발 674m)

다리 가운데 전망대가 있는 무명다리를 지난다.

병풍교(屛風橋:11:38)

병풍교를 지나자마자...

 병소 안내판이 나온다

병소(甁沼:11:39)

뱀사골 계곡에는 많은 명소들이 있는데 요룡대(搖龍臺), 탁용소(濯龍沼), 뱀소 등은 용이나

뱀에 관련된 소(沼)이지만, 병소(甁沼)는 소(沼)의 모양이 마치 호리병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08:해발 674m)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07:해발 654m)

뱀사골 계곡옆의 등로를 따라서 와운마을 입구로 향한다

2주전에어둠속에 걸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안내판과 이정표를 만난다.

깃대종이란 특정한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동물이나 식물을 말하는데,

지리산의 깃대종 동물은 반달가슴곰이고 식물은 히어리라고 한다.

히어리라는 지명은 언뜻 듣기에는 외래종의 꽃이름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히어리는 싸리, 원추리, 고사리, 미나리처럼 ‘리’자로 끝나는 순우리말 이름의 토종식물이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06:해발 634m)

이제 거의 평지구간의 등로를 걷는데 긴장이 풀리는지 계속해서 잠이 쏟아진다

금표교(12:00)

화개재를 출발하여 와운마을로 내려가는 등로에서 만나는 마지막 다리이다.

저 아래의 물가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와운마을의 천년송이

눈 앞을 가려서 거기를 가보겠다는 생각에 쉴수도 없어 계속해서 걸어간다

2주전에 어둠속에 올랐던 길하고는 또다른 느낌이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05:해발 610m)

탁용소 안내판

탁용소(濯龍沼:12:10)

큰 뱀이 목욕을 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을 하나 이곳 암반위에 떨어져

100여m나 되는 자국이 생겨나고, 그 자국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탁용소 주위가 뱀사골 계곡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한다. 

 

탁용소에서 금포교까지의 거리가 10여분정도 밖에 안 되지만 뱀사골에서 계곡미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뱀사골은 가파르게 파인 협곡형 계곡이 아니라서 큰 폭포같은

곳은 발달해 있지 않지만, 그 대신에 계곡 암반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매끄럽게 파이고

다듬어져서 기기묘묘한 소(沼)와 담(潭)을 만들어 놨다

뱀사골 계곡에서 만나는 지형 안내판...많은 도움이 됐다

데크목으로 설치된 등로를 따라서 가는데...

와운마을 입구가 나온다.

와운마을로 이어지는 와운교의 모습

와운마을 입구(572m:12:15)

반선마을 주차장까지 14시 30분까지만 가면 되기에 이곳에다 베낭을 걸어놓고,

와운마을의 천년송을 보고 싶어서 목책에다 베낭을 걸어놓고 와운마을로 향한다

와운교를 지나면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는데 오전내내 찌뿌등한 날씨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니 날씨는 아주 화창하다...마고할매의 꼬라지가 밉기만 하다.

20%의 경사도를 올라서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와운마을로 향하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부부송(12:25)

와운마을 입구의 바위위에 소나무 2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데 부부송이란다

부부송의 안내판

도로옆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와운마을 위에 있는 천년송으로 향한다

와운마을 입구(12:35)

지리산의 명선봉 아래 해발 850m 고지에 위치한 와운(臥雲)마을은 첩첩산중의 고지대라

구름도 곧추서지 못하고 누워서 지나간다고... 마을 이름이 ‘와운(臥雲)’인데, 눈골 또는

누운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마을이다

와운마을 입구에서 급경사의 계단을 따라서 천년송으로 향한다

와운 천년송의 안내판

와운교에서 이곳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내가 배가 고프고 지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천년송 만나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와운마을

와운(臥雲)마을은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의 지리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마을로

1595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鄭씨 일가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일제시대와 6.25동란때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강점기에는 목기를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1980년대는

한봉(韓蜂)으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와운마을은  10여가구가 민박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데 과거에는

산골마을로 영화촬영 장소로도 유명했고 수령이 500~800년된 천년송

(千年松:천년기념물 제423호)이 이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가

잘 나있어 옛 정취는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와운마을 천년송(千年松:천연기념물 제424호:12:42~47)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와운마을 윗쪽 해발 850m의 지리산 자락명선봉 아래에 자리잡은

천년송의 나무 높이는 20m, 둘레는 4.3m.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폭은 18m에 달하는데

보는 자체만으로 압도를 당하는 느낌을 들 정도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소나무다.

어젯밤 버스에서 산행 대장이 이곳에 들려 꼭 氣를 받으라고 산행 시간을 더 줬는데

牛步걸음의 나를 배려해 준 것 같아서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대장님! 복받을 겨

천년송 할머니 소나무

천년송(千年松)이란 과장된 것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뻥을 친다고나 할까.

천년송의 진짜 나이는 1000년의 절반인 500년 남짓. 할매(할머니) 소나무라 부르는 천년송

뒤쪽에 한아시(할아버지) 소나무라 부르는 나무가 있는데, 두 나무 나이를 합치면 1000년에

가깝다는 얘기인데 그라먼 오백년송이라 불러야 맞는거 아닌가...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이런 나무를 볼 수 있다는 자체에다 더 의미를 둬야제

천년송을 오르는 길에 처음으로 만나는 멋진 소나무가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소나무’다.

지리산을 말할 때, 흔히들 어머니 품안같은 포근한 산이라 불러서 그런가.

천년송 안내판

예로부터 와운마을에서는 소나무 바람을 태아에게 들려주는 솔바람 태교가 전해오고 있으며,

출산이나 장 담글 때 치는 금줄과 혼례상(床)에 솔가지를 꽂는 풍습이 있는데, 이처럼 와운마을

사람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이 소나무는 신성한 천년송(千年松)으로서 와운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당산목(堂山木)이다

할머니송을 구경하고 할아버지 송으로 향한다.

 한아시(할아버지) 소나무라 부르는 할배 소나무는 할매소나무에 비해서

많이 왜소하고 덩치도 훨씬 적은편이다...배가 너무 고파서 곧바로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바라본 와운마을의 모습

오늘따라서 마고할매의 꼬라지에 범여도 그리 기분은 좋지는 않은 편이다.

산에서는 박무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산행이 끝내고 나니 날씨가 좋은지 모르겠다. 

지리산 자락의 깊은 오지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웠던 구례의 심원마을은 지난 2017년에 철거돼 사라졌지만, 이곳 남원의 와운마을은

‘국립공원 명품 마을’이 됐는데  와운마을이 살아남은 건 이 깊은 오지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산 지 자그마치 1300년이나 됐다는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마을 뒷산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천년송의 존재감 때문은 아닐런지?

와운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오늘은 계속되는 흐린 날씨라 모자를 안쓰고 이곳에 왔다가 갑자기 내리쬐는 따가운 햇빛을

받으니 얼굴이 익는 느낌이다...내려오는 길에 하도 배가 고파서 와운마을 식당에 들려서

산채 비빔밥 한그릇을 시켰더니만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포기하고 왔던길을 되돌아 간다.

와운마을 입구로 향하는 계속되는 내리막길

다시 와운마을 입구(13:00)

범여의 황소 걸음으로 약2km의 거리를 왕복 45분이나 걸렸는데 꼭 갔다와야만

후회를 안 할것만 같다...산적대장이란 분에게 그저 고맙기만 하다.

이곳의 목책에 걸어둔 베낭은 얌전히 쥔장을 기다리고 있다.

나혼자 눈을 호강하고 와서 미안하이...너를 메고 가기에는

이제는 체력이 안되는 걸 우짜겠노... 

반선마을로 향하는 길은 좌측으로 차량이 다니는 길과 계곡옆의 데크목 계단길이 있다.

이곳이야 마루금이 아니니 당연히 편안한 길을 택한다...어쩌면 이율배반적일지는 몰라도...

神仙이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으나 계곡을 따라서 요룡대, 돗소같은 곳을 감상하려니

어쩔수가 없구나

와운마을 입구에서 뱀사골 신선길이라는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2분정도 

걸어서 내려가니 요룡대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요룡대(13:02)

높이 30m가 넘는 큰 바위로 마치 용이 승천(昇天)하려고 머리를 흔들며

몸부림치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일명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석실(石室:13:05)

 "빨치산들이 소식지 및 사상교육 자료를 인쇄하던 곳"이라는 역사적 장소인데

빠르게 걸으면서 사진을 찍다보니 그림이 흔들려 버렸다...무장애길이 시작된다

지리산 반야봉과 명선봉 사이에 위치한 뱀사골은  반선마을에서 화개재까지

골짜기를 따라 장장 14㎞가 이어지는 계곡이다.

지리산의 골짜기는 몇개나 될까...일흔세개라고도 하고, 아흔아홉개란 얘기도

있는데 뱀사골 계곡은 그 중에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

그러나 섣불리 최고라 단정하지 못하는 건, 지리산의 품이 워낙 넓고 깊어서다.

1, 뱀사골이란 지명 유래는 여러개가 있으나 조선조 중엽 선조때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불탄 인근의 절 배암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물이 뱀처럼 곡류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2, 뱀이 죽은 골짜기

옛날 골짜기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매년 칠월칠석날 밤이면 주지스님이

사라져 마을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님으로 승천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산대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칠석날에 주지스님에게 소매에 비상약을

달아 입혀 예년과 같이 독경을 하도록 시켰는데, 새벽녘이 되어 큰소리를 내며 뱀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기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가서 보니 용이 못된 큰 이무기가

죽어 있어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를 

반선(半仙)이라 불러 동네이름을 반선이라 하다가 언제 부턴가 반선(伴仙)으로 바뀌었다 한다.

 

3. 뱀이 많이 나는 계곡

이곳이 지리산에서 가장 뱀이 많이 잡히는 곳으로, 전국에 유명한 뱀의 산지로 뱀사골로

불리어졌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지리산 약뱀이 많이 잡히는데 그래서 예전에는 반선마을

사람들은 뱀을 잡아 많은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4, 또 다른 유래로는 뱀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비탈이 심한 골짜기’라는 뜻의 ‘밴샅골’이

    變音이 되어 뱀사골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망처(13:07)

바위위에 ‘계곡의 형성’이라는 안내판이 쉬어가기 좋은 곳인데 뱀사골 계곡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고할매의 공깃돌인가?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뜻하는 ‘무장애길’ 명명된 편안한 길을 따라서 반선마을로 향한다.

설악산 신흥사 입구에서 비선대까지 구간도 무장애길이라 했는데...이곳에서도 만나네...

삶이 고달픈 노거수...물가와 대출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수입은 제자리이니 고달픈 범여와의 삶과 같으니

우리는 同病相憐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지리(전북):17- 02:해발 527m)

히어리의 안내판을 지나면서 유난히 계곡물이 파랗게 보이는 돗소에 도착한다

돗소(13:17)

멧돼지가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하며, 돼지의

지방어 "돗"이 이곳 소(沼)의 이름이 되어 돗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얕은 물은

투명하고 깊은 물은 푸른 이유는 "계곡물이 파랑과 녹색 빛만 반사하고 나머지

색깔의 빛은 모두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뱀사골 계곡 안내도를 지나면서 ...

와운마을에서 차량이 내려오는 길과 합류를 한다.

뱀사골 야영장 입구(13:24)

뱀사골 야영장을 지나니 지리산국립공원 뱀사골 탐방안내소와 

지리산 전적기념비와 화장실이 있는 곳을 지나 매표소를 통과한다

반선교(半仙橋:13:27)

전북 남원시 인월면 부운리에 있는 반선마을 앞으로는 인월에서 심원마을, 달궁, 성삼재를

통과하여 지리산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지리산 횡단도로’라 불리는 861번 지방도로가

만수천 물길을 끼고있는 마을이 반선마을이다.


뱀사골에 들어서지 않고 반선교를 건너지 않아 직진해 861번 도로를 따라가면 이어지는

7㎞ 남짓의 계곡이 심원계곡이 있고,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달궁’이 나온다.

달궁이란 ‘달의 궁전’이란 뜻으로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리를 피해 도성을 지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300년 전쯤 출간된 남원의 인문지리지인 『용성지(龍城誌)』  나오는 얘기로 그 근거로 삼은 건

지리산의 명승을 찾아다니며 수도생활을 한 서산대사가 지은 글 ‘지리산 황령암기(黃嶺庵記)’인데,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과 마한의 시대는 1600년이나 차이가 나니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지명이 지리산 곳곳에 남아있다.

 

* ‘용성지’는 조선 전기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지리지와는 달리 남원의

   연혁과 산천, 풍속, 인물, 고적 등 인문지리지로서 다루어야 할 거의 모든 사항을 상세하게 담고

   있어 17~18세기 남원은 물론 조선 후기 향촌 사회를 연구하는 중요한 문헌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반선교에서 지루하게 내려왔던 뱀사골 계곡을 뒤돌아보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13:30)

다리를 건너니 반선마을의 식당가가 줄지어 있는데 식당마다 메뉴가 똑같은데

한결같이 비빔밥이다...이곳에서 돌솥비빔밥에 소주한병으로 나홀로 지리산

종주를 자축하고 식사후에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의관정제를 한 다음에

이곳에서 6~700m 떨어져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14시 20분.

버스가 출발하려면 아직도 40분이나 남아있어 나무 그늘에서 나무에 기대어

꿀맛같은 쪽잠을 즐긴후에 귀경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18시 40분.

오랫만에 일찍 집에 도착하니 좀 이상하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