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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부처님 같이

제18회 팔재계수계대법회

by 범여(梵如) 2022. 9. 26.

일시:2022년 09월 24일

장소: 속리산 법주사

 

40대 중반인 2000년대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 고시에 합격하여 포교사로

활동한 지 어언 23여년이 되었다...그 당시 젊은 나이에 포교사로 활동했던지

같이 활동했던 道伴들은 50대 후반에서 70대 사이의 연로하신 분들이 많아서

막내로서 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는데, 부처님의 佛法 홍포에 정말

열심히 하셨던 분들은 거의 대다수가 연로하셔서 활동을 중단했거나 돌아가신

분들이 많고, 나 역시 어영부영 70이 다 되어가는 나이니 세상 참 無常하구나.

 

지금은 포교사단 행사에 참석해봐야 내 동기들은 거의없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포교사들은 10~15년차 후배들이다 보니 늘 異邦人 같은 느낌이고, 이제 나 역시

은퇴 싯점이 온 듯 하다...그러다 보니 지극한 發心으로 부처님에게 다가갔던

모습은 사라져 버린 날나리 포교사가 된 느낌이다.

 

그래도 이마저도 끈을 놓아버리면 안될것 같아 정기연수에는 가급적 참석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코로나라는 역병 때문에 3년간이나 열리지 못하다가 올해는 1박

2일 연수가 아닌 당일 행사가 참석하기로 한다.

이른 아침에 조계사로 가서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법주사로 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내가 탄 버스에는 포교사단의 배려인지 올드 포교사들만 

탑승하겠끔 한 모양이다...다들 마스크를 착용하여 누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40명이 탑승한 버스에는 내가 아는 포교사는 딱  2명밖에 안보인다.

 

버스는 법주사 초입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곧 바로 버스에서 내려 사천왕문을

통과하면서 예를 올리고 들어서니 법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중에 하나인

팔상전이 나온다.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국보 제55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으로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捌相殿)이라 이름 붙였다.

법주사 팔상전은 석가모니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모시고 있는 5층 목탑으로, 법주사를 처음 만들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것을 조선조 선조 38년(1605)부터 인조 4년(1626)에 걸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주관하여 다시 세웠다.

 

팔상전(捌相殿)은 두 단의 석조계단 위에 세워져 있고, 기단 네 면의 돌계단이 있으며,

이 기단과 계단은 통일 신리시대의 것으로, 각 층의 밑면은 정사각형이며, 1층과 2층은

다섯칸, 3층과 4층은 세 칸, 5층은 두 칸으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처마끝에 무게를 받치는 공포(栱包:1)는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식(柱心包式:2)이고,

5층은 다포식(多包式:3)으로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으며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공포(栱包)는 일반적으로 궁궐·사찰·기념적 건축에 쓰이며, 기둥과 보, 기둥과 도리 등의

    수직재(垂直材)와 횡재(橫材)가 맞추어질 때 장식적 또는 구조적으로 짜여져서 여러

    부재(部材)결속된 것을 말한다

2, 주심포식(柱心包式)은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은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한 짜임새인

    공포(栱包)가 놓여지는 위치와 결합방법에 따라 주심포(柱心包) 형식, 다포(多包) 형식,

   익공(翼工) 형식으로 분류되는데 주심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배치하는 양식으로

   사찰의 주요법당을 비롯하여 지방의 성곽문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3, 다포식(多包式)은 공포가 기둥 위 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놓이는 것이 특징인데,

    기둥 위와 창방 위에 걸쳐서 넓고 두터운 평방(平枋)을 돌려 이 평방 위에 두공을 설치하는 것이다.

    다포는 주로 장중하고 위엄 있는 목조양식으로, 궁궐의 정전(正殿)과 주요건물 및 사찰의 법당에

    주로 사용되었고, 고려 후기 원나라를 통해서 전파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에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팔상전 내부의 팔상도(八相圖)

팔상도란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그림으로 석가팔상·팔상성도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BC 2세기경에 이미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도가 성립되었으며, 그 내용은

출생·성도·전법륜, 열반의 사상과 탁태·출유·출가·항마로 모두 합쳐서 팔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팔상도는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을 기본으로 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447년에 제작된 〈석보상절 釋譜詳節〉의 목판 팔상도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월인석보 月印釋譜〉(1568)·

〈석씨원류응화사적 釋氏源流應化事蹟〉(1673)의 목판 팔상도도 있다.

조선 후기의 팔상도에는 각 장면마다 공통적으로 도솔래의상·비람강생상·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설산수도상·수하항마상·녹원전법상·쌍림열반상이라는 팔상의 명칭이 씌어 있다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兜率來儀相)

②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毘藍降生相)

③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四門遊觀相)

④ 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상(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상(鹿苑轉法相)

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雙林涅槃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주사 팔상전 “정(井)자살문”...문살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짰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539~575) 14년(553년)에 천축에서 불법을 구하고 귀국한 의신조사에

창건된 가람으로서 불법을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가람이란 뜻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한 이곳이 속세를 떠니 불법의 진리를 펼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중건됐는데 지금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헤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고려 태조1년(918년)에

증통국사가 중건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추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1626년(조선 인조4년)에 벽암대사가 옛건물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년)에 탄응선사가 머물면서 15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의

법주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일제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기존 조성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 월드컵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인데, 개금방법은 승식전기도금공법으로 굼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에 

황금 8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명이었다.

전국에서 오신 3,200여 포교사들이 팔재계수계법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기수단 입장식이 시작될 모양이다

법주사의 주전(主殿)인 대웅보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버린후 인조 2년(1624)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면적이

402.80㎡, 높이가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이 건물과 같은 수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보물제915호)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절집의 3대 불전(佛殿)중의 하나로

2층 구조로 지붕은 여덟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776년(신라 혜공왕 12년)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율사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으며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법주사 마당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금동미륵대불과 팔상전

대웅전 앞에서 본 법주사 경내. 마당이 상당히 넓어 보이는데, 대웅보전 앞 사천왕 석등은

원래 팔상전 서쪽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하며, 삼국시대 1탑 1금당식 가람배치였으며,

쌍사자석등이 있는 곳에 금당이 있었으며, 지금의 대웅보전 자리에는 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속해있는 서울지역단 포교사님들의 忙中閑

전국 각지 지역단에서 차량을 대절했고 개별적으로 이동한 포교사들을 포함한 사부대중이

오전10시 법주사에 모여, 10시부터 10시30분까지 식전행사로 김혜은 메조소프라노가

“관세음보살 찬가”를 불렀고 김무한 불교명상음악가가 “우리도 부처님같이” 등을 불렀다.

 

10시30분부터 입재식이 시작됐다.

사회는 김성필씨 집전은 장병욱 포교사가 맡았다.

내빈입장이후 개회선언을 했고 단기입장이 있었다. 삼귀의와 우리말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포교사의 다짐을 전체 합송하고 합창단의 포교사의 노래가 있었다.

식전 행사가 끝나고 기수단 입장식이 시작된다

조계종 포교사단(단장 김영석)은 9월24일 제5교구본사 법주사 도량에서

‘제18회 팔재계수계실천대법회’를 봉행했는데, 법회에는 포교원장이자 포교사단 총재

범해 스님을 비롯해 제5교구 본사 법주사 주지 정도, 포교부장 선업, 연구실장 용주,

포교국장 혜교, 신도국장 윤성, 사무국장 혜안 스님과 각 13개 지역단 본사 포교국장 스님들과

포교사단 임원, 역대 단장 등이 참석했다.

팔재계수계법회는 일반 재가자를 대상으로한 포교사 선발 제도와 함께 2001년 출범한

포교사단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의례법회로, 2003년 8월17일을 시작으로 올해 18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자리다. 그러나 코로나19 여파로 2020년 후로 개최되지

못하다가 3년만에 법주사에서 당일 행사로 치러지게 됐다.

3년 만에 재개된 만큼 팔재계를 향한 포교사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3200명이 넘는 포교사들이

오후 불식을 실천하며 법회에 참여했다. 뜨거운 뙤약볕도 이들의 전법을 향한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범해스님은 "깊어가는 가을의 향기가 법주사 도량에 가득하다.

3년 만에 코로나로 인해 법회를 재개하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한다.

법주사 주지 정도스님 이하 사부대중께 감사드리고 법회를 준비한 포교사단과 범일 김영석 단장을

비롯한 포교사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팔관재계는 여덟 가지 계율을 수지하는 것을 통해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을 다짐하고 수행을 점검하게 되는데 그동안 법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가 3년만에 재개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다. 오늘 품수를 받는 포교사들을 비롯한 이 자리에 모인 포교사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있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범일 김영석 단장은 "3년만에 팔재계수계대법회가 열렸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포교원장 범해스님과 법주사 정도스님을 비롯한 3사 7증의 덕이 높은

스님들을 모시고 제18회 팔재계수계대법회와 제27회 일반포교사 품수식을 봉행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호서제일가람인 법주사에서 하루 동안 여덟가지의 계율을 지키고 선근을 증장시키고자 한다.

포교원장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는 청법가를 부르는 포교사님들

조계종 포교원장이자 포교사단 총재 범해 스님은 “포교란 부처님 법을 내 삶에 녹여내

진정한 자비의 마음으로 이타적 삶을 실현하고 뭇 생명의 안락과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부처님 법을 닦는 도반으로 함께 걸어가자고 손을 내미는 포교사들은 대승보살의 삶을

실천해 나가는 소중한 공덕자들”이라고 격려했다.

 

“전국 각지에서 전법에 매진하고 계신 포교사님들”이라고 이어 말한 스님은 “지난 시간의 성과와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한국불교와 조계종단은 물론 포교사단의 역사를 장엄해나가고 있다”며

“포교사들은 한국불교의 희망이다. 앞으로도 부처님 법 따라 스님들과 종단을 외호하고

사부대중의 정진을 북돋으며 정토세상 만드는데 앞장서달라”고 했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후에 제27기 일반포교사 품수식이 이어졌는데, 김기병 초대단장이

고불문을 낭독하고 한지훈씨, 조주연씨가 대표로 제27기 일반포교사증과 단복을 수여받았다.

윤지홍씨가 전도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팔재계 수계식이 이어졌다.

 

전계사 범해스님을 모시고 참회와 연비의식을 통해 속세에서 지은 여러 죄를 참회하고 새롭게

부처님의 제자로 거듭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표준 한글 금강경 독송을 합송했다.

무대에는 서울지역단의 포교사들이 한글 금강경을 합송하고 전체 포교사들이 수행정진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대웅보전을 참배하러 간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하고 있으며,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며,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智拳印)을 하고 있고, 오른쪽 노사나불의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여래가 있다.

음향각 너머로 보이는 속리산 능선의 모습

사홍서원을 끝으로 팔재계수계법회를 마치고 단체기념사진을 찍은 후 귀경을 준비한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국보제5호)

높이 3.3m. 간주(竿柱)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8각석등으로

지표에 놓인 넓은 팔각 지대석(地臺石)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우주형(隅柱形)을 표시하였으나

각 면에 조식(彫飾)은 없고 상면에는 각형(角形)과 반원형 2단의 뚜렷한 굄이 표현되었다.

 

하대석(下臺石)은 8각으로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복련(單瓣覆蓮) 8엽이

조각되었으며,  8각기둥을 대신한 쌍사자(雙獅子)는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어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上臺石)을 받쳤으며, 머리는 들어서 위를 향하였는데 머리에는

갈기가 있고 다리와 몸에는 근육까지 표현되었다.

 

상대석에는 서로 양식이 다른 단판의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조각하였고,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어

다른 기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개석(蓋石)은 크고 8각이며 처마 밑은 수평이나 추녀 끝이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정상에는 복련을 조각하였으며, 옥개 위에는 구형(球形)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도 간단하고 예스러운 조각수법과 넓은 지대석 및 옥개석 등의

비례에서 장중한 품격이 넘치고 있다. 법주사에 전하는 또하나의 사천왕석등과 함께 신라 석등의

걸작이며, 조성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회향식이 끝나고 지역별로 찍은 단체사진

수계식을 마치고 받은 호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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