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된 산행에 고장난 인간 네비게이션
☞ 산행일자: 2023년 09월 17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바람한 점 없는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7.6km + 들머리 0.7km +날머리 2.9km / 5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카브 까페-작은 차갓재-암봉-무명봉-816m봉-차갓재-802m봉-NO64송전탑
안부-암봉-923m봉-무명봉-927m봉-안부-백두대간 정중간 지점-983.4m봉
무명봉-920m봉-안부-926.5m봉-안부-안부-안부-새목재-823.8m봉-안부
폐헬기장-광천(등곡)지맥 분기점-눈물샘 갈림길-대미산-조망바위
쉼터-부리기재-폐배수탱크-중평분교터-대미산방 농원-중평 버스 정류장
☞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동로면 / 충북 제천시 덕산면
올 가을엔 씨잘데없는 비가 주말마다 오는데 산꾼으로서 정말 짜증이 난다.
지금 오는 비는 송이버섯을 입찰받은 버섯 채취꾼들에게는 반가운 비지만
벼농사나 과일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에겐 百害無益한 비다...그리고 나같이
비를 맞으면서 하는 산행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산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번주 일요일도 어김없이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구라청의 예보라
산행을 포기하고, 오랫만에 인도어 골프 연습장에 가서 몸이나 풀고,
자주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 술이나 한 잔할 생각을 하면서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음주는 화, 목요일에 골프 약속이 잡혀 있기에 산행을 포기했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평소보다 30분정도 일찍 일어나서 컴을 켜서 날씨를
살펴보니, 비는 오질않고 흐림으로 나오는게 아닌가...헐~~~! 사람 미치겠네...
기상청은 불과 몇 시간전만 해도 전국에 걸쳐 비가 온다는 예보를 해놓고는
이게 뭐여...그러니까 산꾼들에게 구라청이라는 비아냥을 듣제...
지금 이 시간에 산행 준비하여 강원도로 가서 산행을 길게 잡기는 뭐하여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부리기재에서 작은 차갓재까지의 짧은 땜방
구간이 보이기에 거기로 가기로 하고 날이 밝고, 지하철이 운행되는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서서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 35분이다
문경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매점에서 캔커피를 하나사서 마신 다음에
버스 탑승장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 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문경행 버스표
06시 30분에 문경으로 출발하는 첫 차는 다이렉트로 가는 우등고속버스이고,
07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충주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건국대학교 충주캠프스를
경유한 다음에 3번 국도를 따라서 수안보, 연풍을 지나 문경으로 가는 일반버스로
차비가 저렴하고 시간이 좀 더 걸리는 단점이 있으나, 오늘 산행거리가 짧아서
큰 걱정은 없다...서울을 출발한 지 2시간 10분만에 문경터미널에 도착한다
문경터미널(09:10)
문경터미널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잠깐 들렸다가 택시를 타고 산행 들머리인
박마을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하려는데, 마을 입구와 도로에 송이가 나는
지역이니 입산하지 말라는 프랑카드들이 많이 걸려있어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동로면 생달리로 가서 역산행을 하기로 한다.
박마을 지나고 여우목 고개를 넘어 동로면에 들어서니 901번 도로 주위에
있는 민가들은 길가에다 오미자들을 내다놓고 파는 집들이 많이 보인다.
지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동로면 오미자 축제 기간이라고 하는데 오늘이
미지막날...올해는 계속 비가오는 바람에 축제를 망쳐버렸다고 기사가 말해준다.
참고로 우리나라 오미자의 45%가 이곳 문경시 동로면서 생산된다고 한다
카브 까페(09:55)
이곳은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 안산다리 마을로 예전에 광산터였던 폐광지에
카페가 들어서 있는 이곳이 작은 차갓재로 향하는 산행 들머리인데, 이곳에
도착하여 워밍업을 한 다음에 산행 준비를 한다.
이곳 생달마을에 대한 재미있는 지명유래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생달리(生達里)는 '산달' 또는 '산다리' 로 불리웠는데 '안산다리'와
'바깥산다리'가 있다
생달은 산과 달만 볼 수 있는 두메산골이라는 뜻으로 산(山)월(月),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고, 그 후 생달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 어귀에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하여 산(生)다리라 해서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속설도 있으며,
또한 마을 뒷산에 고불형(顧佛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풍수설(風水說)에서 안산다리 마을입구에 '고불목'이라는
자연부락이 위치하고 있다.
예전의 폐광자리에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카페를 만든 다음에 와인동굴을
해놨다는데 들어가보지 않아서 내부 구조는 모르겠다.
산행을 시작하다(10:05)
황장산 서사면(西斜面)에 있는 배창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션하다.
올 여름에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꺽인 모양인지 이제 산 속에
들어오면 그렇게 덥다는 생각을 들지 않는구나.
월악산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계수기는 고장이 났는지 무용지물이다
물봉선(꽃말:나를 건드리지 마셔요)
숲 속으로 들어서니 습기가 많은 탓인지 숨쉬가 힘이든다.
느릿느릿한 황소 걸음으로 작은 차갓재로 향한다
늘 산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제는 매주하는 산행이 생활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되어버린 느낌이다...산에 올 일이 없으면 뭔 재미로 살꼬...
앞으로 2년정도면 162지맥길을 얼추 마무리 될껏 같은데, 생각만해도 조금은
끔찍하긴 하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카페에서 출발한 지 400m 지난 지점을 통과하는데 황장산으로
향하는 제도권 등로라서 그런지 이정표와 이정목이 보인다
계곡의 물소리와 작별을 하고...
느릿느릿 오르다가보니 오늘 산행들머리인 작은 차갓재에 도착한다
작은 차갓재(769m:10:22)
이정표와 쉼터 의자가 있고 안생달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뚜렸하다.
차갓재와 작은 차갓재가 있는데 황장산으로 오르는 주 등로는
차갓재가 아닌 작은 차갓재로 형님격인 차갓재에 비해서 훨씬 길이 좋다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 안생달에서 차갓마을과 명전리를 거쳐 충북 단양군
단성면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안생달 마을에서 백두대간길에 올라서면 차갓재와
작은차갓재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차갓재의 유래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동로면 생달리 안생달 마을과 생달리 차갓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차갓마을에서 유래된 고개이다.
일설에는 재 넘어 또 재가 있다는 차가(且加)재에서 유래했다는 고개다.
그런데 여기서 차갓재의 "갓"은 충청도나 전라.경상도에서는 "주변:이란 뜻의 사투리이며
"갓"은 "가치"로 발음되어 이를 한문으로 옮겨적을 때 "가치"에 가장 가까운 까치작(鵲)의
첫 글자를 쓰고 문안골에 있는 작성산성에서 재성(城)자를 빌려와 鵲城山으로 명명하였다.
‘차갓’은 ‘차가’의 본디말로 ‘막힌 집’ 즉 ‘산골의 마지막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작은 차갓재에 도착하여 긴 쉼호흡을 한번 한 다음에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작은 차갓재에서 대미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에는 탐방로가 아니니 출입을
금하다는 팻말과 함께 휀스가 처져 있으나 그걸 지키는 대간꾼은 없나보다.
참고로 이곳에서 남쪽으로 포암산 가기 직전인 마골치까지는 출입금지 구간이다
비가온 이후라서 그런지 공기는 상당히 상쾌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산행하기 좋은 날씨...아쉽다면 바람한 점이 없어서 좀 불편하다
능선에 올라서니 웅덩이에 물이 고여있고,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암봉(10:30)
최근에 계속내린 비 때문인지 촉촉히 젖은 등로에서 베어나오는 상큼함이
코 끝을 시원하게 해주는데 世俗에서 찌든 때가 한꺼번에 벗겨지는 느낌이다
무명봉(10:32)
잘생긴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는데 소나무에서 나오는 상큼한 피톤치드향이 코 끝을 자극한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조그만 봉우리로 올라간다
빗물을 머금은 등로가 미끄럽긴 하지만 해발 7~800m의
고도차가 거의없는 무명봉의 陸山이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816m봉(10:35)
생달리로 이어지는 직진 능선이 아니 우측 사면길로 내려간다
묵묘를 지나...
차갓재로 내려선다
차갓재(740m:10:39)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 안산다리 마을에서 차갓마을과 명전리를 거쳐 충북 단양군
단성면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안생달 마을에서 백두대간길에 올라서면 있는
차갓재와 작은차갓재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예전의 1.2차 대간
길에는 고개 정상에 白頭大將軍과 智異女將軍 장승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펑퍼짐한 고개에 문경 산돌 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남한 중간점 표시석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문경 산돌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남한지점 중간지점 표시석
해발 756.7m, 북위 36º 49’, 동경128º 15’,
경북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 차갓재
백두대간이 용트림하며 힘차게 뻗어가는 이곳은 일천육백여리 대간길 중간에
자리한 지점이다...넉넉하고 온후한 산사람들이 이곳 산 정기를 얻어 즐거운
산행 하시길...(앞면 표시석의 내용)
통일이여! 통일이여!
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한 철조망이 걷히고 막혔던 혈관을 뚫고
끓는 피가 맑게 흐르는 날 대간 길 마루금에 흩날리는 풋풋한
풀꽃 내음을 맘껏 호흡하며, 물안개 피는 북녘땅 삼재령에서
다시 한번 힘찬 발걸음 내딛는 니 모습이 보고 싶다
(표시석 뒷면의 내용)
차갓재에 이르면 대간 남한 구간 중간지점이라는 구조물이 있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중간지점까지 왔으니 대간이 뭔지, 대간은
산맥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겠다.
학창 시절 달달 외우던 산맥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藏文次郞)가
1903년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맥 기준은 땅 위의 어떤 선상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땅 속의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우리 조상들의 대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데, 다시 말하면
대간은 땅의 모양(지형)을 기초로 하여 산줄기를 표시한 데 반해 고토분지로의
산맥개념은 땅의 성질(지질)을 따라 표기한 것이다.
대간개념에는 지리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사상 및 신앙이 담겨져 있으니
일제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떻게 하든 우리의 사상이나
신앙을 자기들이 지배하기 편하도록 고치려고 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산맥 개념 그 자체가 우리 정신문화를 파괴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안생달 마을로 이어지는 등로를 보면서 봉우리로 올라간다
802m봉(10:41)
초반이긴 하지만 여유롭고 편안한 발걸음이다.
구라청은 민초들이 낸 세금으로 엄청나게 비싼 컴퓨터를 사다주고
일 잘하라고 했는데 몇시간후의 기상 예측도 틀리는 바람에 강원도로
못가고 이곳에 오긴 했지만, 비를 안맞고 다니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며 걷는다
NO64송전탑(10:43)
물기를 살짝 머금은 까실쑥부쟁이와 눈맞춤을 하면서 걷는다.
이제는 등로의 야생화들도 슬슬 이별을 준비중인 모양이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서서히 太古적의 등로로 바뀌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실천중...
千差萬別의 각기 다른 사물들이 萬事萬物의 인연들을 만든다
똑같은 존재라도 각기 저 마다의 인연에 따라 길흉화복이 달라지고,
인연으로 와서 인연으로 돌아가는게 지.수.화.풍이 아니던가...
어제내린 비의 영향일까...물기를 잔뜩 머금은 등로가 조금 미끄럽긴 하지만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비를 안맞고, 걷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난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내 삶은 이제 산과는 一心同體가 된 느낌이다
안부(10:54)
넓은 공터에 폐전주 하나가 자리르 지키는 안부가 나오고 풀섶이 수북하다
고사리가 군락을 이루는 안부를 지나서 서서히 고도를 높혀간다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등로 아래에서 밀려오는 薄霧가 등로를
덮기 시작하고 그리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몸뚱아리가 정상이
아닌 범여는 이런 날씨에는 숨쉬기가 좀 힘들어 힘이든다.
암봉(11:00)
암봉으로 오르지 않고, 그 아래로 난 등로를 따라서 대미산으로 향한다
약간 터프한 등로를 지나는데 낙엽사이로 싸리버섯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주위에는 토실토실한 싸리버섯들이 보이는데,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는거 봤어...베낭을 내려놓고
버섯을 수확한다
꽤나많은 싸리버섯을 수확하고 쿨한 기분으로 다시 길을 나서는데,
주변에는 철쭉들이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등로를 호젓하게 지난다
923m봉(11:05)
너덜길은 아니지만 잔돌이 많은 등로는 생각보다 미끄럽다.
오름길 주변에는 흰깔때기버섯이 군락을 이루며 많이 보인다
흰깔때기버섯
흰깔때기버섯의 버섯갓은 처음에 둥근산 모양 혹은 종 모양류이고 후에 펴지고,
직경은 3~4㎝이며 겉면은 처음에 흰색으로서 흰 도료를 바른 것 같고 미세한
털이 있으며 후에 없어지고 연한 누런색으로 된다.
변두리는 안쪽으로 구부러들고 얕게 찢어지며 혹은 물결 모양을 이루며, 살은 흰색이며
만문하고 치밀하며 맛은 온화하고 냄새는 없으며, 버섯주름은 대에 바른 주름 혹은 약간
내린 주름이고 흰색이며 대단히 빽빽하고 폭은 좁고 얇다.
버섯대는 길이 3~10㎝, 직경 0.5~1㎝이며 아래 우의 굵기는 같거나 혹은 밑부분이 실하고
겉면은 흰색이고 거의 털이 없거나 밑부분에 흰색 솜털이 있고 속은 차 있으며, 포자는 둥근
모양 혹은 넓은 닭알 모양이며 크기는 5~6×4~5㎛이고 포자 무늬는 흰색이다.
여름부터 가을기간에 나무숲 속의 땅위에 난다.
천천히 걸어가는데 또다시 싸리버섯들이 보이는데, 늘 산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한없이 베푸는데, 늘 받기만 하고 베풀줄 모르는 인간들의
이기심에 부끄러울 줄 모르고 살고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밋밋한 등로라 심심할까봐서 간간히 만나는 암릉들이 양념처럼 나타난다
무명봉(11:13)
너덜길같은 등로에 뫳돼지라는 넘들이 등로를 작살내놨구나
지하철에서 저런 행동을 했더라면 쩍벌남으로 비난받기 충분하겠구나
927m봉(11:20)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게 산의 이치가 아니던가...
927m봉에서 또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어느정도 내려왔나 보다.
안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부(11:24)
안부에서 다시 고도를 높히면서 오르막이 시작된다
백두대간 정중간 지점(11:30)
조금전에 지나온 차갓재에는 문경 산돌산악회에서 설치한 백두대간
중간지점 표석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2004년 5월에 경기 평택 여산회
백두대간 종주대에서 설치한 표시석이 있다...어느곳이 정중간인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대간 정중간 지점 문경에 있는 대미산 근처인 모양이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중간지점까지 왔으니 대간이 뭔지, 대간은
산맥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다.
“산맥”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藏文次郞)가 1903년 발표한
<조선 산악론>에서 비롯되었는데, 고토분지로가 망아지 네 마리와 인부 6명을
데리고 겨우 14개월 동안 답사한 다음 작성한 것이라 하니 오류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고토분지로의 개념이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도록 했다면
일제의 의도가 불순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개념은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심지어 중국에서도 사용되는 개념이다...산맥 개념에 조선의 氣를 꺽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주장은 지나친 국수주의적 해석이다.
사실 우리의 대간 개념은 거의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는 개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과학적이다
대간이란, 산줄기가 강 유역의 경계를 나누면서 산줄기 전체가 연결되기도 하고,
고을과 동네를 묶어주는 개념이다. 즉 대간이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형성되었으며,이에 따라 우리 고유의 자연, 인문지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간에 따라 물줄기가 나누어지고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마을은
문화, 관습 및 언어 등에 차이를 보인다. 이는 곧 각 지방은 서로
다른 문화와 방언을 가지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대간의 형성 원칙에
따르면 대간은 백두산을 거쳐 중국 대륙을 가로 지른 다음
에베레스트까지 이어지니 참으로 오묘하고 절묘하지 않는가.
그러니 대간과 산맥을 굳이 비교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왜소화할 필요는 없다.
대간은 대간이고 고토분지로의 산맥은 산맥이다.
애당초 서로 다른 개념이다. 분명한 것은 대간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욱 설득력있고 호소력있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인증샷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산맥체계는 1903년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1856~1935)라는
일본인 지리학자가 제안한 지질학을 그대로 옮긴 장본인으로,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에
대한 지질 및 광산조사에 혈안이 돼 있었다.
청일전쟁을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교두보로 삼았고 특히 금에 관심이 많았는데 고토 분지로는
이 시기에 조선에 들어온 지리학자로 그는 교통사정이 열악했던 1900년대 단지 14개월 동안
국내 지질을 연구하고 돌아가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조선의 산악론」과 「지질구조도」를
발표했는데, 산맥 개념이 세워진 것도 이때부터다.
예부터 인식되어왔던 민족정기와 전통 산줄기 개념을 일본 제국주의가 민족정기 말살과
수탈을 목적으로 악용한 것이 바로 지금까지 쓰고 있는 산맥 개념인데,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가 기초하여 야쓰쇼에이(失洋昌永)가 체계화한 산맥명칭이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성토하는 현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일본 제국주의가 1940년 강제로 실시한 ‘창씨개명’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해 무효화되었지만, 경술국치 이전에 우리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일본인 학자가 만든 지질구조선
명칭을 왜 아직도 사용하며, 침략자들이 만든 지도를 근간으로 하는 지명을 아직도 그대로 지도에
(그것도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하는 모든 지도에)표기되고 있는가?
사람이 한국식 이름을 되찾았듯이 산천의 이름도 되돌려 놓아야 한다.
땅 이름은 수 천년을 두고 불러온 것이며, 산줄기에 대한 인식과 그 이름도 같은 기간동안
민족정서를 대변해 왔는데, 통일을 준비하는 시기에 일제의 잔재 청산을 위하여 민족정기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은 반드시 그 의미와 역할에 맞도록 그 이름이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산맥은 지질개념으로 지리를 연구한 한 개인의 연구결과에 불과하다.
백두대간이 단지 명칭상의 문제가 아닌 것도 이 때문인데, 백두대간은 지형의 개념이고
태백산맥은 지질의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맥을 지형의 개념으로 지금껏 써오고 있다.
1906년 당시에도 정연호가 「최신고등대한지지」를 통해 산경표나 대동여지도를 언급하며
대간과 정맥을 말했지만 일제에 의해 금서(禁書)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하나의 산줄기로 연결된 대간과 정맥의 개념을 없애고 산맥개념을 도입해 우리 땅을
여러 갈래로 갈라 놓았는데 고토 분지로의 산맥도에는 아예 백두산이 없다.
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를 식민통치에 편한 체제로 바꾸면서 우리의 지형을
바꿔 놓았고, 일본이 지배하여 역사와 정신을 모조리 훼절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뒤안으로
사라지고 그들이 지은 이름인 마천령, 함경, 태백, 소백 등의 산맥 이름만이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산길도 핍팍을 받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오르막으로 오른다
오르막 능선에 올라서니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족보있는 983.4m봉에 도착한다
983.4m봉(11:38)
지나온 927m봉을 뒤돌아 보지만 짙은 안개로 인하여 모든게 오리무중이다.
올라온만큼 다시 내리막으로 향한다
무명봉(11:42)
만족하며
사는 방법은 없을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이다.
아무리 적어도
마음이 크면
그것은 많은 것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적으면 적은 것이다.
만족은
물질의 크기가 아닌
마음의 크기가 좌우한다
- 하루하루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라 - 중에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세속에서 살아가면서 흔히 많이 듣는 말 “잘나갈 때 조심하라”는 소리...
결국 그 뜻은 放心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그 말은 이런 암릉구간을
통과할 때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비에젖은 등로를 걸을때 암릉과
나무 뿌리를 잘못밟아 삐끗하면 아주 곤란을 겪을 수 있다는 걸, 오랜
산행 경험으로 체득했다
920m봉(11:52)
안부(11:56)
이곳의 평균 고도가 900m가 넘는 능선이지만 고도차가 그리 크지않아
그리 힘들지 않게 걷는 탓인지 고도차를 전혀 느끼지 못한체 편하게 걷는다
926.5m봉(12:03)
안부(12:05)
안부에는 고사목이 널부러져 있고, 철없는(?) 산괴불주머니가 피어있는데
주로 늦봄과 초여름에 滿開하는 이 꽃은 계절 감각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안부에서 올라 능선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약간 휘돌아서 가는 대간길
비탐구간이라 국공파들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오늘 산행을
하면서 대간꾼들의 시그널과 예전의 이정표가 잘 보이지
않는데 나무뒤에 숨어있는 빛바랜 시그널 하나가 왜 그리도 반가운지...
조금을 휘돌아서 내가니 능선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데
미역줄기를 비롯한 넝쿨식물들이 길을 막고있어 살짝 돌아서
내려가니 다시 안부가 나온다
안부(12:13)
안부를 지나니 펑퍼짐한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예전에 3번이나 걸었던
대간길의 옛 추억을 소환하는 느낌이지만, 그때는 이곳을 밤에 통과했거나
산악회를 따라와서 무심코 지나간 탓인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구나
습지에서 피어있는 물봉선이 말한다... ‘그런 기억이 생각날 나이는 아니잖아요’ 라고...
넓은 공터를 내려서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2:30)
안부에서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대미산으로 향한다
안부를 지나자마자 또다른 안부가 나오는데 지도상의 새목재이다
새목재(鳥項峙:826.4m:12:33)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와 명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펑퍼짐한
넓은 공터가 주변에 있어 예전에 밭이 있은 곳처럼 보이는 고개이다.
지명의 유래는 북쪽 아래에 있는 명전리의 주변 산세가 학(鶴)이 날아
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형세라 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듯 하며
명전리에는 건학(乾鶴)마을이 있는데 건학마을의 목(項)에 해당되는 곳이다
첫사랑 그 사람은 /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으로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 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새목재를 지나자마자 잡목이 무성한 폐헬기장이 나온다
823.8m봉(12:35)
잡풀이 무성한 폐헬기장인데 지도상에는 족보있는 봉우리로 되어 있고
삼각점이 있다고 하는데 주위의 풀섶을 아무리 들춰봐도 삼각점은 없다
한참동안 삼각점 수색(?)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아쉬운 맘으로 길을 나선다
안부(12:38)
삼색도장버섯
밤색주름조개버섯이라고도 부르며, 도장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으로 활엽수의
고목이나 가지에 기와처럼 무리 지어 발생하며, 가죽질의 질긴 표피로 된
반원형의 납작한 조개모양이며, 회색과 갈색, 적갈색 들이 화려한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
에르고스테롤, 스티그마스테롤 등 다양한 약용 성분이 들어있으며 종양 억제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대장균, 황색포도상구균 등에 대한 항균 작용이
있다고 보고되었으며 항산화 효과 및 노화 방지와 잔주름 개선, 아토피 개선 등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식용으로는 큰 가치가 없으나 약용으로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약용으로 사용할 때에는 전문가의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폐헬기장인 823.8m봉을 지나면서부터 오늘 산행중의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등로에 널부러진 고사목으로 인해 마치
허들경기 하듯 길을 걷는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
고사목의 장애물...허들경기는 계속되고...
숏다리의 悲哀를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지만 산에 대한 원망은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順應이 뭔지를 배운다
한달음을 치고 오른 다음에 숨 한번을 고른 후 다시 오르막은 계속된다
매번 혼자걷는 대길이지만 간간히 등로에서 대간꾼을 만났는데
오늘 구간에는 아직 대간 산꾼들은 만나지 못하고 홀로 걷는다.
처음에는 조금 외롭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동반자가 있으면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다...인간의 간사함이랄까...근데 언제부터인가
홀로 걷는 이 길이 좋아도 너무 좋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를 들으면서 걷다보니 미역줄기
나무들이 강력하게 태클을 걸어대는 폐헬기장에 도착한다
폐헬기장(13:15)
폐헬기장을 점령하고 있는 잡풀을 헤치고 나오니 광천(등곡)지맥 분기점인
1,049.9m봉이 나온다
광천(등곡)지맥 분기점(1,049.9m:13:17)
경북 문경시 동로면과 충북 제천시 덕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우측으로는
이곳에서 분기하여 충주호로 입수하는 광천(신산경표상:등곡)지맥 분기점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2시간정도 떨어져 있는곳에 멋진 문수봉(文繡峰:1162.2m)으로
이어지는데, 2,020년 3월 29일에 홀로 이곳을 걸었으니 벌써 3년이란 세월이
지나 버렸구나...예전에는 준.희 쌤께서 걸어둔 “등곡지맥 분기점” 산패가 사라졌다
광천(등곡)지맥 개념도
광천(등곡)지맥(嶝谷支脈)이란?
광천(등곡)지맥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대미산을 지난 1046 m봉(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와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의 경계점)에서 북서쪽으로 가지를 쳐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의
한천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1 km의 산줄기로, 1046 m봉에서 시작하여 황학산에서 그 맥을 충주호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는 문수봉(1161.5 m), 큰두리봉(1083 m), 석이봉(826 m), 야미산(525.7 m), 갈미봉(453 m),
떡깔봉(541 m), 등곡산(589 m), 황학산(450 m) 등을 만날 수가 있으며, 이 산줄기의 서남쪽에는 광천,
성천 등이 충주호로 흐르고, 이 산줄기의 북쪽에는 다불천, 지곡천, 수산천, 고명천 등이 충주호로
흘러가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는 광천지맥이라 부른다
예전의 분기점 사진(2,020년 5월16일...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
광천(등곡)지맥 분기점을 지나 좌측으로 향하는데 이곳부터는
간간히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보이고, 등로는 뚜렸하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산꾼을 겁박하지만
그렇다고 가던 길을 멈출수야 없잖은가.
눈물샘 갈림길(13:21)
좌측 아래로 70여m쯤 내려가면 문경 산돌산악회에 조성한 눈물샘이란
약수터가 있어서 2,009년 1차때는 맛있는 약수로 목을 축였었는데
지금은 폐쇄되고 없으니 내려갈 일도 없잖은가...
대미산 눈물샘은 낙동강의 수많은 지류 중 하나인 문경 금천의 발원지로 등로에서
70여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대미산(大美山)의 본래 이름은 대미산(黛眉山)이었으나,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검푸른 눈썹처럼 생긴 산으로 이 샘이 눈썹 밑에 자리했다 하여
눈물샘이라 부르고 있다.
눈물샘은 차진 황토흙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로 일년내내 물이 마르는 법이 없고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물맛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또 눈물샘이
위치한 곳은 겨울 혹한기에도 바람이 없어 샘 바로 옆에 야영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있어
대간길을 가는 종주자들의 좋은 휴식처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눈물샘에 세워놓은 눈물샘 유래 안내판에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산 사람들을 위해 1990년 샘을 다듬과 2003년 다시 정성어린 손길로 그 모습을
되찾으니, 아름다운 대미산과 백두대간 산꾼들의 젖줄이 되어 오래도록 사랑받는
샘터로 그 맥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샘물이 금천으로 흘러들어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2003. 11. 30 문경 산들모임산악회...2,009년 1차 대간때의 자료
어느 산꾼이 눈물샘이 폐쇄되었다는 표식을 해놨다
눈물샘을 지나서 대미산으로 가는 길은 은근히 비탈진 능선이다
천천히 걷고 또 걷는데 갑자기 가지고 다니는 똑닥이 카메라의
전원이 끄지면서 작동을 멈춰 버린다...참으로 난감하다.
난 스마트폰 카메라의 사용이 상당히 어색한 편인데 기록을
위해서는 방법이 없구나,
천천히 걷다보니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지명을 가진 대미산 정상에 도착한다
대미산(黛眉山:1,115.1m:13:33)
경북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와 문경읍 중평리 그리고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문경제산지조(聞慶諸山之祖), 문경 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
이라는 산으로 '대미' 지명은 『여지도서』(문경)에 "대미산(黛眉山)은 현 동북 30리에
있는데 동쪽의 풍기 소백산으로부터 와서 본 현 여러 산들의 주맥이 되었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산 정상부에 눈썹만큼의 봉우리가 돋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이 산 바로 아래의 여우목과 하늘재(계립령)는 문경새재가 있기 전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었다고 한다...『청구도』에 대미산이 계립산(鷄立山) 위쪽에,『1872년지방지도』에는
현재와 다른 한자 표기의 대미산(戴眉山)이 지도 상단에 높은 산지의 대지와도 같이 표시
되어 있으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이황 선생이 대미산(大美山)으로 명명했다고
하여 또 다른 한자 표기가 나타난다
울창한 참나무 숲과 돼지골과 심마니골, 제천 덕산면 방향으로는 용화구곡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다양한 식물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대미산 정상에서 문경이 산그리메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라는데 지금은 주변의 잡목으로 환경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이어진 대미산, 주흘산.
희양산 같은 고봉들이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문경은 골이 깊고 계곡이 아름답다
인증샷
옛 기록에는 黛眉山이라고 하나, 조선조 1936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기록에 퇴계 이황 大美山이라고 명명(命名)하여 현재에도 大美山이라고 한다.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은 이병연(李秉延)이 전국 241개 군 중 129개 군의
인문 지리 현황을 조사하여 1990년에 편찬한 지리서로 1책. 목판 및 목활자본.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전국 241개 군 중 129개 군의 인문 지리 현황을 직접 조사, 편찬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 동안 26개 군에 관한 것이 책으로 만들어져 간행 보급되었으나,
나머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재정난 등으로 간행되지 못한 상태로 보관되어 오다가 1990년
그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여 나오게 되었다.
조선 시대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31개 항목이 조사되어 있으며,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42개 항목이 조사, 편찬된 데 비하여 이 지리서는 49개 항목을 조사,
편찬하였고, 책의 체재는 가로가 20㎝이고 세로는 29㎝인 한지에 목판과 활자를 함께 사용하여
인쇄되어 있다.
각 군(郡)을 독립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도록 되어 있으며 군세가 약한 곳은 100여 쪽 정도이고
큰 군은 300여 쪽에 달하는 큰 분량으로 편찬되어 있으며, 각 권에는 조선지리총설, 조선 명의,
조선 위치, 조선 경계, 조선 연혁, 조선 인종, 조선 방언 등을 앞 부분에 공통으로 넣은 뒤 각 군에
관련된 인문 지리 현황을 49개 항목으로 나누어 게재하였으며, 49개 항목은 산천·명승·형상 등
지리적인 것과 유현·학행·명신·선행·효자·열녀 등 인문 관련 내용까지 망라되어 있다
이곳 대미산은 영강(신산경표상:운달)지맥의 분기봉이기도 한 곳으로
2021년 11월 24일에 1구간을 시작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영강(운달)지맥 개념도
운달지맥은 백두대간의 대미산(1115.1m)에서 분기하여 운달산, 단산,
배나무산, 월방산, 약천산을 지나 천마산에서 두줄기로 갈라지는데....
산줄기 동쪽 금천이 내성천과 만나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산줄기는 48.1km
산줄기 서쪽 영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산줄기는 47.2km이다.
내성천과 영강은 낙동강의 지류로 길이는 106.3km, 영강은 66.2km이며 내성천
에 합류하는 금천은 42.9km인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영강지맥이라고 한다
대미산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은 것 같다.
등로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여우목 마을
저 마을이 천주교 신자들의 제1의 성지라고 하는데 2021년 11월 24일 영강(운달)지맥
1구간 때 저 마을을 지나왔던 기억이 아련하다
여우목은 소백산맥의 준령인 대미산을 경계로 충북 단양과 접하는 곳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충청도 홍주 출신인
이윤일(요한)의 가족과 경상도 초대 신자인 서광수의 후손 치보가 이곳으로 피난오면서
부터라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윤일과 그 가족, 신자 3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1867년 1월 21일에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피난가 있던 서치보의 아들 인순과 익순도
병인박해 때 잡혀 순교하였다...이윤일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성지 안에 서치보와 그의 아들 서인순의 묘가 있으며, 성지 위쪽으로는
산비탈에 대여섯 집의 교우촌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서로 사귀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이다.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중에서
* 불교경전을 요약한 숫타(ⓟsutta)는 ‘경(經)’, 니파타(ⓟnipāta)는 ‘모음(集)’이라는
뜻으로 《숫타니파타(sutta-nipāta)》는 가지각색의 시(詩)와 이야기를 모은
시문집(詩文集)으로, 5장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에 여러 개의 경이 수록되어 있다
조망바위(13:39)
여우목 고개로 올라가는 901번 도로 윗쪽의 국사봉과 그 뒷쪽의 운달산의
夢幻的 분위가 내가 마치 지금 天上의 세계에서 神仙이 된 느낌이 들 정도로
환상적이다...비록 내가 원했던 강원도는 못가고 땜방 구간에 왔지만 후회는 없다.
운달산, 성주봉, 작약산, 속리산, 그리고 이화령 너머 백화산까지
보이는 구간이나 정상은 구름이 연출하는 천상세계가 펼쳐진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산북면의 경계에 있는 운달산(雲達山:1,103.2m은 부운령을
넘어 오정산을 솟게 하고 진남교반으로 뻗어 내리는 운달(영강)지맥의 맹주산으로
산 능선은 동서로 10여㎞에 걸쳐 뻗었으며 그 사이의 마전령(627m),조항령(673m)
등은 예로부터 문경과 다른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천년고찰인 김룡사와 운달계곡을 품고 있으며 특히, 산북면 김룡리의 운달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해 김룡사를 거쳐 문경읍으로 흐르는 운달계곡은 경치가 아름답고
물이 차가워 문경팔경 중 하나로 이름이 높다...운달(雲達)이라는 이름은 '구름에
가 닿는다'는 뜻이지만, '해탈의 경지에 오른다'는 의미도 있다.
김룡사사적서(金龍寺事蹟序)에는 운달산이 ‘운봉(雲峰)’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경시 산북면이 세운 정상비석에는 ‘용뢰산(龍磊山)’이라 새겨져 있는데
그래서, 산 이름이 김룡사를 창건한 운달조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운달산은 육산으로 분류한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감싸고 있는 산세가 부드럽다.
그러나 속살을 파고 들어가면 도처에 암릉과 기암괴석들을 품고 있는 만만찮은 산이다
쉼터(13:43)
아무런 생각없이 내려오다보니 ...
오늘의 산행 날머리인 부리기재에 도착하는데 갑자기 혼란스럽다
불과 4개월 15일전인 2023년 5월 7일에 박마을에서 올라온 부리기재...
그때는 분명히 부리기재 이정표가 온전히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으니 행여 내가 잘못왔나 싶어 지도를 다시봐도 분명히 이곳이
부리기재가 맞다...비탐구간이라 국공파들이 이정표를 제거한 모양이다
하옇던 국공파들의 벤뎅이 소깔머리 하고는...ㅉㅉ
2023년 5월 7일...29구간때의 부리기재
부리기재(879.1m:13:50)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박마을에서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 대미산을 넘어 덕산면 용하구곡을 연결하는 고개로 옛날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짊어진 짐을 내린후에 넘을 수 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는 설과
새의 부리의 옛말인 ‘부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리기재로 부른다고 하나 지금은 용하구곡과 대미산을 경유하는 등산로로 쓰이거나
현지인들의 약초 채취에 이용되고 있어 매우 양호한 등로가 유지되고 있다
부리기재부터 박마을로 내려가는 등로는 아예없다
지난번 박마을에서 올라올 때는 어렴풋이 등로가 보였는데 올 여름에 이곳에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등로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구나...그리고 75º정도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라 굉장히 미끄럽다...아무리봐도 지난 5월에 올라갔던 길이 아니다
갑자기 사라진 방향 감각에 깊은 계곡이라 그런지 GPS조차 작동이 안되는구나.
난 한번 갔던 길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을 하여 친구들이 나보고
인간 네비게이션, 걸어다니는 지도책이라 불렀는데 나이 탓인지, 아니면
update가 안된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 나의 그 명성은 사정없이 무너진다
지난 5월에 걸었던 비교적 뚜렸한 등로는 찾을길이 없고, 너덜길을
내려오다 줄기 식물들에게 한동안 포위(?)를 당해서 버벅거린다
희미한 산죽길이 보이지만 예전의 길은 아니다.
이곳이야 마루금이 아닌 날머리 접속구간이라 알바는 아닌 셈이다
급경사의 절개지는 얼추 다 내려온 느낌이다.
그나마 오늘은 짧은 산행거리에다, 늦은 시간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다...만약 늦은 시간에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큰일날 뻔 했다...조심스레 내려오는데 뱀들이
자주 보인다...가을철에는 저 넘들과 말벌은 공포의 대상이지...
우측 아랫쪽에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얼추 힘든곳을 다 내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 길이었구나.
뚜렸한 등로가 나오는데 지난 5월에 이곳을 올라갈 때 걸었던
등로가 보이니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지 다리에 쥐가 난다
휴식(15:10~30)
부리기재에서 정상적인 등로로 내려왔으면 30분도 채
안 걸릴 거리를 1시간 20분이 걸렸다...아!...이런 날도 있구나
계곡에서 등산화 끈를 풀고 발을 계곡물에 담근 다음에 가지고 온
떡과 식혜로 점심을 겸한 주린 배를 채우고 2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박마을이 있는 날머리를 향해서 다시 길을 나선다
박마을에서 부리기재로 올라가는 길
이곳부터는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이나 등산로가 아닌
약초꾼이나 버섯 채취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다.
간혹 당일로 하는 대간팀들이 들.날머리로 하는 길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예전만큼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은 그리 많치않고,
하더라도 대부분이 무박으로 하는 산꾼들이 많아, 이곳을 들.날머리로
하는 대간팀들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될 듯하다
이 팻말이 보이면 완전히 평지까지 내려왔다고 보면
되는데, 이제는 작동이 되지 않는 인간 네비를 너무 믿지말고,
예전에 콩쥐가 자기를 버리로 가는 계모를 따라가면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위해 조약돌로 표식을 하면서 갔다고 했는데 나도
이젠 그래야 할 모양이다.
부리기재에서 내려오면서 처음만난 대간꾼의 흔적
송이 채취꾼들의 플랑카드...저것들을 무시하고 아침에 이곳을
들머리로 잡았으면, 개고생을 덜 했을텐데...괜스런 오해를
받기위해 역산행을 했다가 개고생을 한 셈이다
폐배수탱크(15:42)
부리기재를 내려오면서 개고생한 추억을 이곳에다 내려놓고
곡공파들이야 단속을 하던말던 상관않고 박마을로 내려간다.
내 생애에 다시 백두대간을 더 걸을 일이 없을것 같으니
너무 걱정마소...더 걸어보고 싶으나 체력이 안되는 우짜겠노...
내가 부리기재에서 내려온 계곡길보다 우측이 송이밭인 모양이다
그래도 오해를 받지않고 대간길 한 구간을 마무리 했으니 다행이다
산에서 빠져나오니 오미자밭들이 보인다
오미자(五味子)
열매를 먹어보면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의 다섯 가지 맛이 모두 섞여 있다 하여
이름 붙혀진 열매가 오미자다
오미자는 갈잎 덩굴나무로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으며, 산기슭이나 계곡 등
수분이 많고 비옥한 땅을 좋아하고,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서 자라며, 약용으로의
수요가 많아 적어도 조선왕조 이전부터 밭에 심어서 키워왔으며, 지금도 경상북도 문경을
비롯하여 대량으로 재배하는 곳이 많다.
잎은 넓은 타원형으로 손바닥 반만 한 크기에 잎자루는 붉은 기가 있고, 꽃은 여름에 잎겨드랑이에서
작은 동전 크기로 피는데, 연분홍이거나 거의 흰색이다. 꽃이 지고 나면 꽃턱(花托)이 길게 자라
앵두처럼 빨갛고 굵은 콩알 크기의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조롱조롱 열리며, 암수가 다른 나무이므로
같이 심어야 열매를 맺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에게 오미자탕을 올린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오미자는 폐와 신장 보호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한방에서는 치료약과 보약 재료로
거의 빠지지 않으며, 그 외에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혈압을 내리며, 당뇨에도 좋고
감기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며, 최근에는 오미자의 성분을 추출하여 여러 가지 임상실험을 거쳐
각종 질병의 치료 효과를 밝히고 있다.
《동의보감》에는 “몸이 약하고 몹시 여윈 것을 보하며, 눈을 밝게 하고 신장을 덥히며, 양기를
세게 하며, 남자의 정(精)을 돕고 음경을 커지게 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소갈증(당뇨병)을
멈추게 하고,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없애주며, 술독을 풀고 기침이 나면서 숨이
찬 것을 치료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미자는 인삼과 거의 같은 수준의 귀한 약재로서
널리 애용되었다.
오미자 종류로는 흑오미자와 남오미자가 있다
《성호사설》에는 “탐라과품으로서 오미자가 있는데, 빛은 새까맣고 크기는 새머루와 같으며
맛도 달며 제주 사람들은 이를 주안상에 쓴다... 마를수록 맛이 더 진기가 있으니 이상하다”라고 했다.
또 조선 숙종 29년(1703)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의 오미자는 세상에서 뛰어난 맛이
있으므로 먼저 임금께 올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다섯 말을 올려 보내고자 합니다” 라고
한 말이 실록에 실려 있다.,, 이 오미자가 바로 제주 특산인 흑오미자이며, 오미자와 비슷하나 열매가
짙은 청색에서 거의 검게 익는다.
박마을 가는길에서 바라본 성주봉(聖主峰:911m)의 모습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에 있는 성주봉(聖主峰:911m)은 백두대간상에 있는
부봉(釜峰:917.0m)과 더불어 문경 산꾼들이 문경내의 2대 아마추어 암릉
산행지로 손꼽는 바위 명산으로, 운달산 서릉 상에 솟은 한 봉이긴 하지만,
밋밋한 육산인 운달산 정상부와 동떨어져 암봉으로 치솟은 기세가 당당하여
성주봉 아닌 성주산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문경시가 발행한 <문경지(聞慶誌)>에 따르면, 고주골 혹은 고줏골은 고주(高州)
부사(府使)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
옥소 (玉所) 권섭(權燮)이 여기서 살 때 마을 뒷산 성주봉이 마치 ‘매화가 활짝 핀 것 같다’
하여 고주골을 화지리(花枝里)로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 산이다.
북동쪽으로 보이는 대미산은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신선놀음 하듯이
흰구름과 悠悠自適하며, 遊戱를 즐기면서 개고생한 범여를 약을 올린다
중평분교터(15:50)
폐허가 되어버린 1992년도에 폐교된 중평분교 뒷쪽으로 보이는 백두대간 능선
내가 오늘 개고생을 하면서 내려온 부리기재를 뒤돌아 본다
동그랗게 보이는 너덜겅 좌측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너덜겅을 타고 내려오면서 개고생을 한 듯하다
대미산방 농원(15:51)
사과밭이 보이고...
오늘 처음으로 남긴 인증샷...박마을 다리를 지나서 901번 도로로 향한다
도로 아래로는 신북천이 흐르고 있는데, 신북천(身北川)은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여우목고개에서 발원하여 조령천을 이루는 하천으로 유로연장 17.8㎞이며
유역면적은 103.22㎢이며, 낙동강의 제3지류로 제1지류인 영강에 연결되는 조령천과
이어지며, 갈평교 앞에서 하늘재에서 발원한 물길을 합류하고 다시 문경교 인근에서
초곡천과 합쳐지는 낙동강의 지천중에 하나이다
901번 도로에서 바라본 박마을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에 속한 박마을은 조선 후기에 밀양 박씨(朴氏)
한 분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한 이후 박 씨들이 늘어나서 지금은
30여호의 박 씨들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박마을'
혹은 '박마'라 하며, 특히 박마을 사람들은 교육열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지도상에는 대부분이 박마을이 아닌 밖마을이라는 정체 불명의
표기가 산꾼들을 혼란케 한다...아마도 '바깥 마을'이라 하던 것이
전이(轉移)를 하여 이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중평 버스 정류장(390.8m:15:55)
문경에서 동로로 이어지는 901번 지방도로에 있는 중평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한다.
박마을 앞을 지나는 901번 지방도는 생각보디 교통량이 많다.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문경읍내로 향하는 차량들을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시도하는데, 10분만에 히치에 성공하여
문경터미널 삼거리에서 내려 터미널로 향한다
문경터미널(16:30)
문경터미널에 도착하여 동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알아보니 17:50분에
동서울로 가는 버스표는 매진이고, 그 다음에 출발하는 18:50분 버스표를
예매한 후, 근처에 있는 곰탕집에 가서 곰탕 한그릇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터미널에 도착하니 17시 05분...
터미널 승차장 의자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점촌에서 온 17시 15분발 성남가는
버스가 들어온다...이 버스를 타고가서 개포동으로 가면 2시간 가량 일찍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사에게 부탁하여 버스를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서둘러 매표소에 가서 동서울행 표를 취소하고 성남행 버스표를 예매한 다음에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향하는데...오늘의 신의 한 수였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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