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에 닭이라 했던가...
☞산행일자: 2023년 09월 24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27.6km / 10시간 28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진고개- 진고개 고위평탄면- 개자니 고개- 안전쉼터- 쉼터- 쉼터
1,311.8m봉- 노인봉 삼거리- 노인봉- 1,335.1m봉- 다시 노인봉 삼거리
노인봉 대피소- 합류점- 폐헬기장- 안부- 1,280.2m봉- 무명봉- 안부
1,193.5m봉- 1,187.8m봉- 안개자니 갈림길- 무명봉- 안부- 무명봉
안부- 안부- 무명봉- 안부- 1,329.0m봉- 소황병산- 안부- 1,191.2m봉
1,169.2m봉- 안부- 계곡- 안부- 1,155.9m봉- 안부- 1,137.1m봉- 안부
무명봉- 무명봉- 안부- 1,101.0m봉- 안부- 1,118.6m봉- 안부- 안부
임도- 갈림길-매봉- 1,163m봉- 임도- 안부- 임도- 희망의 전망대
주차장- 바람의 언덕- 1,147.3m봉- 임도 삼거리- 곤신봉- 대공산성 갈림길
1,005.3m봉- 나즈목이-선자령-쉼터-쉼터-안부-쉼터- 새봉 갈림길
합류점- 항공무선표시소 입구- kt대관령 중계기지- 성황사- 대관령
☞ 소 재 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舊도암면) / 강릉시 연곡면, 사천면, 성산면
요즘 들어서 자꾸만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체력 탓인지 걱정이 태산이다.
가고 싶은 산은 수도없이 많은데 체력탓에 예전에 부리던 豪氣는 온데간데
없고, 초라한 내 몰골이 더욱 초라하게만 보인다... 2주전에 남설악 구간을
산행할 때, 설악산을 바라보며, 더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설악산을 한번 갔다와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백두대간상에 걸쳐있는 한계령에서 마등령까지는 지난해
6월과 7월에 2번에 걸쳐서 했기에 남은 구간이라고는 마등령에서 미시령 구간이다.
이곳은 아시다시피 전 구간이 출입을 금지하는 통제구간이라 일반 등산객들은
다니지 않고, 대간 산꾼들만 도둑 고양이처럼 다니는 구간이긴 하지만 산행
거리가 짧고, 마등령까지만 오면 백담사로 내려가는 코스는 계속되는 완만한
내리막길에다 등로가 너무좋아 큰 무리가 없다...마등령 삼거리에서 바라보는
설악의 멋진 산그리메는 환상적일 것 같다...며칠전에 우연히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조그만 절집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예전에 같이 공부했던 도반 스님과
통화할 일이 있어서 통화를 하면서 설악산을 가고 싶다고 하니까...내 건강
상태를 아는 스님이라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행여 오실 계획이
있으시면, 절에 들려서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한다
그러마고 약속을 했지만 괜히 수행 정진중인 스님에게 민폐일 것 같아서
절집은 가지않고, 산행을 하기 위해 24일 자정경에 집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출발하여 미시령 고개 정상에 차를 세워놓고 눈을 붙인 다음에
날이 밝는대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고 초저녁에 잠깐 잠을 청하려는데,
집에 손님이 오시는 바람에 전혀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손님이 간 이후에
잠깐 누웠다가 자정이 조금 지난후에 자동차를 몰고, 미시령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와 지도
진고개~대관령 구간 3D 지도
헐~~~이게 뭐여
자정경에 집을 출발하여 서울 양양간 고속도로에 접어든 다음에 가평 휴게소에
들려서 졸음을 쫒기위해 커피 한잔을 마시고, 찬바람을 쐰 다음에 동홍천I.C를
빠져나와 인제, 원통을 거쳐서 백담사를 지나고, 용대리에서 속초로 이어지는
56번 국도 미시령 터널 직전에서 미시령 고개로 이어지는 미시령 옛길로 올라
가는데, 도로를 임시통제 한다는 플랑카드가 붙어있는 차단기가 있어서 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나와서 미시령터널을 통과하여 소노펠리체 콘도옆으로
이어지는 반대편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이곳 역시 바리게이트가 굳게 잠겨있어
미시령 고개 정상으로 오를수가 없다...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지면서 멘붕 상태이다
지금 시간이 새벽 2시 30분...
어떻게 하지 하면서 마음을 진정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 아랫쪽에
몇구간 남은 코스중에서 여기서 가장 가까운 진고개에서 대관령 구간을 하기로
하고 동해고속도로 속초I.C를 통과하여 시속 150km에 가까운 속도로 달려서
남양양I.C를 빠져나와 7번 국도를 타고 주문진을 지나, 연곡에서 6번 국도를
바꿔타고 진고개에 도착하니 05시 15분...속초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차로 달린
거리가 96km이다
진고개 휴게소 차를 세우자마자 긴장이 풀리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지만
여기서 잠에 빠지면 이것도 저것도 안될것 같아서, 차밖으로 나와서 찬바람을
쐰 다음에 黎明이 시작됨과 동시에 산행을 준비한다.
어둠속에 진고개 주차장에 愛馬를 세워두고, 애마의 응원을 받으면서 산행을 준비한다
진고개탐방지원센터(06:05)
산행을 시작하다(06:07)
약간의 어둠이 남아있긴 하지만 헤드렌턴은 착용하지 않고 산행을 시작한다
진고개 휴게소 윗쪽에는 예전에 없었던 동물생태통로가 새로 설치되어 있다
동물생태통로에서 바라본 동대산의 모습
지난 8월 27일에 양양남(신산경표상:만월)지맥 1구간 때에
올랐던 동대산...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달이란 세월이 지났구나.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제도권 등로라서 그런지 대간길이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 둘레길처럼 변해 버렸구나
조금을 걷다보니 사물이 구분될 정도로 날은 밝아지고
진고개고위평탄면 안내판이 나온다
진고개 고위평탄면(06:14)
진고개 고위평탄면 지역이란 진고개 정상부 일원에는 해발 900~1,000m
고지임에도 비교적 넓고 평탄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경동성 요곡운동과
관련되어 형성된 유형지물인 고위평탄면(침식작용을 받은 평탄면이 융기하여
높은 고도에 위치한 지형)이라는 지형에 해당되며, 고위 평탄면은 융기 이전의
한반도가 평탄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지형으로 융기 이후 지속된 개석작용
(골짜기 침식작용)으로 한반도 일부지역에만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 융기와 관련된 특징은 고개 양쪽의 사면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진고개
서쪽의 사면인 평창방면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동쪽 사면인 강릉방면은
상대적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비대칭 형태를 하고 있다
즉 동해안쪽 사면은 짧고 가파르지만, 서쪽 사면은 길고 완만하여 기복이 적은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는 신생대 제3기 말기부터한반도는 수평 횡압력에 의한
동해의 해저지각 확장으로 인해 융기하였는데 이때 융기축이 동쪽으로 더 많이
치우쳐 동쪽은 높이 솟아올라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은 완경사를 이루어
동고서저(東高西低) 의 비대칭 단면으로 이루게 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남북,
북동, 남서방향으로 뻗어있는 산줄기들은 모두 비대칭 모습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한반도의 1차적인 골격이라고 한다
* 경동성 요곡 운동한반도는 유라시아 판 내부에 위치해 있으나, 필리핀 판 및 태평양
판이 유라시아 판과 충돌하는 일본 열도와 가까이 있어 이들 지각판의 충돌 과정에서
생성된 횡압력의 영향을 받았다... 태평양 판이 일본 열도 아래로 들어가고 동해 지각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횡압력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신생대 제3기 이래 비대칭적으로
융기하여 태백 산지나 함경 산지를 중심으로 동쪽 사면은 급하고 서쪽 사면이 완만한
경동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등로에서 바라본 고위평탄면의 모습과 그 아래론 개자니 계곡이 보인다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屛內里)에 있는 거릿자니는 바깥개자니,
외구숙 등으로 불리는데 개자나 바깥 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개자니 고개(06:17)
평창군 대관령면(구 지명:도암면) 병내리에서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금의 진고개가 생기기 전에 민초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로 원래의 진고개로 보면 될 듯하다
병곡리의 유래를 찾아보니 개자니에서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로 넘어가는
가는 고개를 진고개라 하였는데 장현, 이현이라고도 하는데, 고갯길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진고개에서 편안하게 개자니고개까지 왔다가 본격적인 숲속으로 들어선다
국립공원구역에서 만나는 전매특허격인 돌길을 지나니...
노인봉은 이어지는 고무매트 계단을 따라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범여가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것이 예의건만,
인간들은 늘 자기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자연을 괴롭힌다.
나 역시 늘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그 편리함의 習에 자꾸 빠져들고 있으니
二律背反的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안전쉼터(06:40)
심장마비를 조심하라는 친절한 안내판이 있는 안전 쉼터를 지나는데
젊은 남녀 2명이 물만 들어가는 쌕만 메고 스틱도 없이 노인봉을
향해서 질주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항상 젊은 것은 아니니 조심해서 살살 댕기소...그러게 다니면 도가니
아작나는 건 시간 문제라오...
예전에 없었던 야자매트까지 등장하는구나...
지금 길을 걷고 있지만 아침에 겪은 멘붕상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非夢似夢간에 길을 걷고 있는데, 급하게 등로가 바뀌는 바람에
이곳에 대한 산길의 선행 학습을 하지않고 온 바람에 조금은 걱정이 된다
쉼터(06:46)
쉼터에서 좌측의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최근에 계속내린 가을비 탓인지 등로는 촉촉히 젖어 있으나 숨쉬기는 너무 좋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7: 해발1,138m:↑ 노인봉, ↓진고개)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등로...100대 명산으로 지정된 산이라
그런지 등로는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고, 등산객이 늘 북적거리는
등로이지만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등산객이 전혀없어 호젓하게
홀로 여유로운 길을 걸어면서 정신나간 내 영혼을 달래는 중이다
현재의 나는 멘붕상태이지만 그래도 아직 이렇게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쥔장 잘못만난 내 두다리(足)에게는 늘 미안하다
걷고 또 걷는데 능선 아래에서 짙은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안개가 밀려오던 말던 개의치 않고, 뚜벅뚜벅 뚜버기 걸음으로 노인봉으로 향한다.
살짝 빗물을 머금은 등로 주변의 나무들은 아직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었는지 싱그러운 모습이다...하지만 조만간 가을 채비를 해야 할 듯 싶다.
이른 새벽에 진고개에서 잠깐 머물렀는데 추위를 느낄만큼 기온이 많이 떨어지더라...
노인봉을 오르던 등산객의 흔적인가?
돌멩이를 올려놓고 무슨 소망을 기원했을까?
걷고, 또 걸으면서 번잡한 이 등로의 새벽 풍경을 호젓하게 홀로 감상한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6: 해발1,220m:↑ 노인봉, ↓진고개)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면 족보가 있고 삼각점(△연곡452 / 2005재설)이
설치되어 있는 1,242.0m봉이지만 대간 마루금은 편안한 사면길로 이어진다
지금 걷고있는 이 길은 해발 1,200m가 훨씬 높은 곳이지만 워낙 등로가
완만하여 아무런 感을 느끼지 못하고 룰루랄라하면서 걷는데 갑자기 코스가
바뀐 산행에다 밤을 꼬박 세면서 운전을 한 터라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5: 해발1,251m:↑ 노인봉, ↓진고개)
구조이정목과 이정표가 번갈아가면서 산꾼을 안내한다.
행여 과잉 친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초반부터 졸음이 밀려오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愛馬를 가져왔으니 귀경 걱정은 안해도 되는데 단 한가지
걱정이라면 먹거리가 걱정이다...원래 계획으로 산행을 했다면
미시령에서 마등령 삼거리까지 초코파이 2개와 두유, 육포로
허기를 면하고 하산길에 오세암에 들려서 절밥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면 베낭 무게를 훨씬 줄일 수 있기에 먹거리를
거의 준비하지 않았는데 초반부터 계획이 어긋났으니 우찌 될 지 모르겠다.
노인봉으로 가는 길에는 이정표와 구조이정목이 계속해서 번갈아 나타난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4: 해발1,280m:↑ 노인봉, ↓진고개)
오늘 산행의 거리는 엄청나게 길지만 등로가 좋아서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걱정이라면 밀려오는 졸음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3: 해발1,264m:↑ 노인봉, ↓진고개)
오룩스맵상의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가서
노인봉을 찍고 내려와야 하는게 정상적인 대간길인데 어느
누구도 간 산꾼이 없어서 길은 아예 없다...나 역시 편한 길을 따른다
비에젖은 투구꽃을 급하게 걸으면서 찍다보니 그림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쉼터(07:10)
쉼터를 지나면서 원 대간길은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초반부터 시간을 허비하면 후반에 힘들것 같아서 그냥 사면길을 따른다
1,311.8m봉(07:12)
등로 바로 윗쪽이 족보있는 1,311.8m봉이지만 눈팅이만 하고 그냥 패스를 한다
이정표 윗쪽으로 보이는 저 능선이...
대간 마루금이건만 오르지 않고 그냥 편안길을 따른다.
지맥길을 잠깐 멈췄더니만 나 역시 조금씩 野性을 잊어버리는 느낌이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2: 해발1,280m:↑ 노인봉, ↓진고개)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Oruxmap에서 경로를 이탈했다고
지랄발광을 한다...나도 알어...그런데 아무도 가지않고 길도
없는 곳에 올라갈 일이 없잖아...
Oruxmap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뚜벅뚜벅 걷다보니
노인봉 갈림길이 나오면서 백두대간 마루금에 복귀한다
노인봉 삼거리(1,286m:07:19)
좌측의 노인봉으로 향한다...원 마루금은 노인봉에서 내려오는 길이
마루금인데 그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은듯 하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1: 해발1,286m:↑ 노인봉, ↓진고개)
노인봉으로 가는 길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가지고 오른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정상으로 향하는데 아침에 데크목
계단에서 만난 남.여 등산객이 내려오면서, 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안전산행 하시라고 하면서 다시 진고개로 향하고
난 심마니 노인이 잘 계시는지 확인하러 노인봉으로 향한다
노인봉 정상 안부에 도착하니 송천계곡에서 밀려오는 안개가 불안하다.
주위 전망이 一望無際인 노인봉 정상이 궁금하여 정상으로 향한다
구조이정목(현위치 번호:오대03-20: 해발1,315m:↑ 노인봉, ↓진고개)
암릉 위에 있는 노인봉 정상석이 보인다.
노인봉(老人峰:1338.8m:07:25)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와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에 걸쳐 있으며,
오대산국립공원권에 속하는 산으로 황병산과 오대산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산자락에 소금강 계곡을 거느리고 있는 전망이 일품인 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서 산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이 있어 노인봉이라 하였는데, 그 전설은 “옛날에 마음씨 착한 심마니가
산삼을 캐러 노인봉에 왔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더니 ‘이 근처에 무밭이 있으니 거기 가서 무를 캐거라.’ 하고 일러 주었다.
꿈에서 깬 심마니는 꿈이 하도 생생하고 신기하여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정말로 그 곳에는 오래된 산삼 수십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멀리서 보면 노인봉 정상의 바위가 마치 머리가 하얀 노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인봉이라 했다고도 한다.
노인봉 아래의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명승1호로 지정되었다.
일부에서는 연곡 소금강, 오대산 소금강, 청학동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일컫는 '소금강'이란 이름은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탐방하고 쓴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 》에서 유래되었으며 무릉계곡 바위에 아직 '소금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낙영폭포·만물상·구룡폭포·무릉계곡으로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는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산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를 흘러내리며 이룬 소금강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 30여 개가 넘는
경관지를 빚어냈는데 특히 금강산의 그것과 흡사한 만물상·구룡연·상팔담 등이 볼 만하다.
오대산은 주봉(主峰)인 비로봉( 毘盧峰:1,565.4m), 동대산(東臺山:1,433.5m),
두로봉(頭老峰:1,422.7m), 상왕봉(象王峰:1,493.0m), 호령봉(虎嶺峰:1,565.5m)의
오대산 지구와 노인봉(老人峰:1338.8m ), 황병산(黃柄山:1,408.1m),
매봉산(鷹峰山1,173.4m) 의 소금강지구로 나누는데, 노인봉은 소금강의
주봉으로, 이 소금강 지구는 현재 청학동 소금강으로 불리는 곳과 거의 일치한다
*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는 조선 전기 문인 율곡( 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강릉 청학동 소금강의 절경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으로 이이가 청학산을 유람하게 된 배경,
청학산의 지명에 대한 소개,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청학산의 아름다움 등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이가 벼슬을 그만둔 1569년(선조 2)에 강릉으로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경치 좋은 천석(泉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이는 박유에게서 “깊숙한 곳에는 청학이
바위 봉우리 위에 깃들이고 있어 참으로 선경이지만, 숨겨진 채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듣고 기행에 나섰다
‘청학동 청학산 소금강’의 지명 유래에 있어서 ‘청학산’이라는 지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이이의 「유청학산기」를 꼽을 수 있다. 청학산이라 부르던 것을 지금은 '금강산을 축소한 것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청학동 소금강 지역이 1975년에 오대산 국립 공원으로
편입되면서 지금의 명칭인 ‘오대산 소금강’으로 불리고 있으며 청학산[지금의 소금강]의 아름다운
명승을 최초로 알린 글은 이이의 「유청학산기」를 통해서이다. 식당암, 구룡폭포, 금강산성(金剛山城)
등의 지명이 모두 이이의 「유청학산기」에 등장한다.
노인봉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오대산 너머로 2주전에 걸었던 점봉산이
아련히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설악산도 보이나 내가 산행을 계획했던
미시령은 워낙 거리가 遠景이라 肉眼으로는 확인조차 안되니 아쉽구나.
노인봉 정상에서 바라본 동남쪽의 풍경
동남쪽으로는 잠시후에 내가 걸어야 할 능선... 그 뒷쪽으로는 공군부대가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황병산은 구름에 살짝 가려져 있어 夢幻的
분위기를 연출한다
북쪽 아랫쪽으로는 진고개에서 연곡으로 이어지는 송천계곡이 멋지게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3주전에 걸었던 양양 남(신산경표상:만월)지맥 능선이 뚜렸이 보인다
그대는 먼 산이어라 / 장태현
그림자도 그리운, 그대는
먼 산이어라
내 영혼에
뿌리 깊이 고인 인연
산정에서면
더욱 아득하여
손을 뻗을수록 그리워
말없이 바라볼 뿐
바람에 둥실둥실
그대 모습 파도처럼 밀려와도
알 수 없는 그 마음
가슴만 태우고
돌아서면 더욱 그리워
핏빛 서린 두 눈으로 바라볼 뿐
아득하여라
바라볼수록 멀어지는 그대는
실핏줄처럼 뿌리를 내리고
안개처럼 겹겹이
온 산을 흐르는 그대 체온 그리워
몸부림치듯 두 팔을 벌려 볼 뿐
인증샷
노인봉 정상에 살짝 바람이 불어대니 생각보다 추운 느낌이라
잠시후에 가야할 길을 바라보면서 서둘러 노인봉 정상을 내려온다
노인봉 정상 아래 안부로 내려와서 노인봉 우측에 삼각점이 있는
1,335.1m봉으로 가본다
암봉으로 되어 있는1,335.1m봉
조금전에 1,311.8m봉에서 능선으로 올라와서 이곳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져 노인봉 삼거리로 이어지는게 정상적인
대간길이다
1,335.1m봉(07:33)
1,335.1m봉 정상 삼각점(△연곡319 / 2005재설)
1,335.1m봉 정상을 찍고 노인봉 정상아래 안부로 내려와서 왔던길을 되돌아 간다
벗어둔 베낭을 다시메고 길을 나선다
다시 노인봉 삼거리(07:38)
노인정 삼거리 팻말 뒷쪽으로 난 등로가 뚜렸하다.
저곳이 대간 마루금이라 간간히 원칙을 고집하는 대간꾼들이
가는 경우도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제도권 등로인 노인봉
대피소 방향으로 향한다.
노인봉 대피소(07:40)
노인봉 대피소에서 직진을 하면 오대산 소금강이라 불리는
청학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이곳에서 목책을
넘어서 우측으로 가야하는데, 20년도 훨씬 지난 시절에 소금강 계곡을
내려간 기억은 있으나,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구나.
이곳에서 부터 매봉까지 14km가 입산금지구역 상시 단속구간이라 단속요원들이
출근하기전인 8시 이전에 통과해야 하고 노인봉 대피소에서 우측으로 45도를 꺽어져
출입 금지구역에 이르는데, 대피소 안을 들여다보니 요즘은 국공파의 단속요원들이
상주하지 않는지, 대피소 안은 아주 지저분하다
2017년 9월 3일에 나홀로 이 구간을 종주하다가 국공파한테 걸려서
아들뻘되는 국공파 직원에게 다시는 안오겠다고하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사정했던 아픈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합류점(07:42)
노인봉 삼거리의 목책 뒷쪽으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 마루금에 복귀한다
비탐구간에서 만난 대간꾼의 흔적
폐헬기장(07:43)
헐...! 근데 이건 또 뭐여...
6년전에는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내용처럼 비탐구간에 들어온
대간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대간산꾼들에게 저승사자처럼 군림하던
CCTV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다...이게 뭔 조화란 말인가?
6년전인 2017년 가을에 저 CCTV에 포착되어 갖은 수모를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드러누워 있는 CCTV 옆의 공터에는 구절초들이 범여를 격려한다.
지금은 국공파들이 단속을 하지 않으니 편히 가시라고...
* 소설 “1984”는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극도로 억압적인
미래 사회를 상상한 소설로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작으로 1936년에서 1937년 사이
여러 가지 국제 정세를 지켜보면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가치를 지지하는 글을
써왔던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의 성공에 힘입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융합한 소설이다.
1946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그는 1948년 새로운 소설을 탈고하면서 1948년의 뒷자리를 바꾸어
《1984》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7개월 후 조지 오웰이 세상을 떠나며 그의 유작이자
대표작이 된 《1984》는 사회 비판을 담은 소설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인 예언서로도 읽힌다.
소설의 줄거리는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삼대 강국으로 편성되어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극도로 전체주의적 국가인 오세아니아는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 장치와
빅 브라더라는 지도자의 통치를 받고 있다... 오세아니아 런던의 외부당원인 윈스턴 스미스는
은연중 당의 노선에 반기를 들고 금지 행위인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추적하는
사상경찰이라 생각했던 줄리아에게 사랑 고백을 받고 연인 사이가 된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당의 고급 관리인 오브라이언을 통해 지하조직인 ‘형제단’과 접촉을 시도한다.
그러나 오브라이언이 준 격려와 도움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고 두 사람은 체포되고, 오브라이언이
‘치료’라고 부르는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윈스턴과 줄리아는 서로를 배반하고, 얼마 후 완전히
세뇌된 윈스턴은 자신이 빅 브라더를 무한히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넘어져 있는 폐헬기장의 CCTV에 憐憫의 情을 느끼면서 소황병산으로 향한다
안부(07:47)
1,280.2m봉(07:50)
1,280.2m봉에 있는 조망바위...이곳에 서면 노인봉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지만 갈 길이 멀어서 그냥 지나친다
산에만 들어서면 세속의 힘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렇게 좋은데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맘껏 힐링하며 편한 길은 계속된다
무명봉(07:54)
부지런히 걷다보니 무명봉이 나오고 무명봉 근처에 있는 암릉의
이끼들은 태고적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 마루금을 이어가는길에
나무에는 노란 비표들이 보이는데 황병산이 특전사의 동계 훈련지로 활용되는
곳이라 아마도 특전사의 훈련용 비표(秘標: 한 개인이나 한정된 집단에서만
인지되는 표지) 인듯 싶다
오랫만에 산에서 만나는 빛내림...정말 환상적이다
안부(07:57)
산림유전자구역 안내판
편히 걷다보니...
2번째 비표를 만난다
1,193.5m봉(08:00)
1,193.5m봉에서 대간 마루금은 완만한 좌측으로 이어진다
1,187.8m봉(08:04)
안개자니 갈림길(08:06)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 안개자니 마을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요즘은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지 등로에는 잡풀이 수북한데 안개자니의 지명유래
개자니는 지형이 개가 잠을 자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바깥개자니와 안개자니
마을이 있으니 개자니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무명봉(08:09)
올여름에 지독히도 극성을 부리던 무더위도 한풀 꺽이고
이제는 슬슬 가을을 준비한다...세월앞에 장사(壯士) 없듯이,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는가 보다...나뭇잎이 붉은색으로 변해간다
안부(08:12)
무명봉(08:14)
안부(08:22)
안부(08:35)
소황병산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고...
지도상에는 좌측에 육잠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오르막 좌측에 암릉이 보이는 봉우리가 나오고 지도상의
육잠바위는 이곳에서 꽤나 먼 곳에 있으니 이 바위는
육잠바위가 아닌 듯 하다
무명봉(08:48)
빗물을 잠뜩 머금은 등로는 생기발랄한 느낌이다
안부(08:52)
B-3.4.5는 어디 갔을까?...B-2를 만난 다음에 만난 B-6...니가 왜 거기서 나오니...
맷돌바위?
물기를 머금고 있는 등로의 암릉이 생각보다 미끄럽다.
곧이어 목책과 원형 철조망이 길을 막고있는 삼양목장 초지가 나온다
원형 철조망을 통과하여 초지로 들어선다
1,329.0m봉(09:00)
초지옆에 CCTV와 소황병산 공원지킴터 초소가 있고 오룩스맵 지도에는
이곳을 소황병산이라고 표시를 해놨는데 약간은 헷갈리는 느낌이다
초소의 팻말이 바뀌었구나.
예전의 팻말에는 백두대간 불법산행 통제초소라고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소황병산 공원지킴터라고 써놨다... 그러면 단속을 안한다는
뜻이렸다
가야할 소황병산을 바라본다
군부대가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황병산의 모습
지금은 멀리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괜찮을란가 모르겠다.
지난 5월에 느닷없이 나에게 충북경찰청 안보수사대에서 군보안법을
위반했다고, 청주에 있는 충북경찰청 조사실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 당시 건강상태가 아주 않좋아서 충주까지 가기가 힘들다고 하니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니만. 한달후에 수사관들이 서울로 갈테니
서울의 모 경찰서 조사실로 출두하라고 하여 2시간정도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다.
사연인 즉...충북 제천에 있는 지맥길을 걸으면서 지맥길에 걸쳐있는
군부대 탄약창 사진을 몇 컷 찍어서 산행기를 썼는데, 그것을 군부대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고발을 해서 이첩을 받아 조사 하느라고 한다.
그 당시 난 암 수술이후에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산행을 하면서 한 행동이라 하니
수술 자료를 제출하라고 해서 했고...그 이후에 충북경찰청에서 청주지검으로
송치됐고, 그 이후에 서울지검으로 이송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 말고도 지맥꾼들이 많이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군부대를
지날때는 근접 촬영은 절대로 하지말고 조심해야 할 듯 싶다
草地에서 바라본 황병산의 모습
황병산(黃柄山:1,408.1m)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의 차항리와 병내리 횡계리에
걸쳐있는 황병산은 정상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산이라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는 지역있고,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해있는 비탐구간으로 산 정상이
평탄면으로 발달되어 옛부터 군용으로 이용되었고, 6.25 당시에는 미군들이
주둔했던 산이기도 하다
황병산의 지명은 ‘누른(黃) 자루(柄)’처럼 길다랗게 생긴 산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산 정상 아래에는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 형성되어 있고, 오대천과 송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산으로, 북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청학동 소금강으로 1970년에
우리나라 명승 1호로 지정된 곳이며, 소금강에는 오작담(烏鵲潭)만물상(萬物相),
구룡폭(九龍瀑), 십자소(十字沼)가 있으며, 황병산에 본 하늘에 뜬구름은
횡계팔경(橫溪八景) 가운데 두번째 것으로 유명하다.
산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옛부터 군용지로 이용였다고 하며 행병산(行兵山)이라고도 했는데
「여지도서」에는 황병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름에는 서늘한 기후를 이용하여 배추, 무,
채소 등 고랭지 농업이 활발하며,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젖소와 산양을 놓아 기르는
목축업과 낙동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초지를 따라서 소황병산으로 향한다
소황병산(小黃柄山: 1,336.8m:09:07)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이라기 보다는
그냥 삼양목장 가운데 여인의 乳頭처럼 볼록 생긴 봉우리인데 그렇지만 오늘 산행구간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은 대관령목장의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표지석과 함께 안내판이 서 있으며
황병산은 ‘누른(黃) 자루(柄)’처럼 길다랗게 생긴 산이라 붙여졌으며 소황병산은
황병산과 산허리를 맞대고 있어 같은 산이지만 높이가 조금 낮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청학동 소금강 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지만 내륙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고산 구릉지대로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완만한 구릉지를 모두 목장용 초지로
개발하여 지금은 수천 두의 소를 방목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목장이 되었다.
삼양식품 대관령목장과 한일목장, 그리고 농촌진흥청의 고랭지 시험장의 경작지도
이 지역에 있으며, 소황병산 산에 서면 잠시후에 가야할 매봉과 곤신봉, 선자령 등 대간
봉우리들이 시계방향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 드넓은 목초지가 그 주변 횡계리의 시골풍경도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백두대간에 분기하는 오대(신산경표상:황병)지맥의 분기점이다
오대(황병:黃柄枝脈) 지맥이란?
황병지맥(黃柄枝脈)은 백두대간 대관령과 노인봉사이 소황병산(1329m)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오대천과 송천의 물길을 나누며 황병산(1407.1m),용산(1028m),
두타산(구 박지산.1391m)을 지나 불당재위 1270m봉에서 한천골을 사이에 두고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줄기는 상원산(1422m), 옥갑산봉(1302m)을 지나 송천(길이 81.4km.
유역면적 352.06㎢)이 골지천에 합류하는 정선 여량의 아우라지로 가고, 또 한줄기는
갈미봉(1269m),백석봉(1171m)을 지나 오대천(길이 59.6km.유역면적 451.67km)이 골지천에
합류하여 조양강이 되는 나전교에서 금대지맥의 끝인 오음봉을 마주보며 끝이난다.
오대지맥의 본줄기를 신산경표는 상원산-아우라지로 가고 있으나(49.7km),
길이도 3km정도 더 길고 하천의 유역면적도 더 넓고 ,금대지맥과 마주보고 있고,
골지천이 비로소 조양강이란 이름이 붙는 나전교쪽을 본줄기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 지맥은 군부대가 있는 황병산은 정문에서 울타리를 오른쪽으로 돌아나갈 수 있으나
분기점에서 백일평 임도까지가 오대산 국립공원 지역으로 지정등산로가 아니라는 이유로
출입이 제한된다...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 산경표에서는 오대지맥이라 부른다
인증샷
소황병산 표식뒤에 있는 삼각점에 도착하니 풀섶에 묻혀있는 삼각점이 나온다
소황병산 정상 삼각점(△연곡26 / 2005재설)
소황병산 정상 아래에는 삼양식품 그룹에서 설치한 표석
소황병산을 찍고 다시 되돌아서 가는데 이곳이 2008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질메늪이다
질뫼늪은 고층습원으로 '땅이 질척질척한 산'이란 뜻으로 이 질뫼늪에는 이산화탄소를
분해하는 능력이 숲의 7배인 이탄층이 있는데, 이탄층의 두께는 80cm이고 1cm
퇴적되는데 10년 넘게 걸리니 수백 년 넘게 짙푸른 생명력을 뿜어 온 것이다.
이곳에서 희귀 동식물이 자생하는 곳으로 보호해야 할 자연환경이다.
가야할 매봉 너머로 동해바다가 아스라히 보인다
소황병산을 찍고 초지를 벗어나서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거리 총길이 27km중 약 17km가 목초지, 임도, 아스팔트,
콘크리트길이라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곳인데 갑자기 등로가 바뀌는 바람에
먹거리를 준비하지 않아서 허기를 어떻게 극복할 지가 관건일 듯 싶다
예전의 출입금지 팻말은 그대로 있으나 CCTV는 철거가 되었는지 자취를 감추었다
그라먼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단속구간은 없어졌다는 얘긴인가?
숲으로 들어가는데 용담을 많이 닮은 과남풀들이 내년을
기약하며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는 저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거칠숲을 헤치고 들어서니 땅바닥에는 원형 철망이 태클을
걸어대지만 거기에 굴복한 대간 산꾼들은 없을 것이다
뚜렸한 등로를 만나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09:20)
특전사의 비표를 바라보면서 계속되는 내리막 산길
아무런 생각없이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밋밋한 등로 가운데를
오룩스맵에서 1,191.2m봉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1,191.2m봉(09:26)
대간꾼들의 흔적을 보면서 내려서는데 1,191.2m봉
바로 아래에 지도상의 1,169.2m봉에 도착한다
1,169.2m봉(09:32)
좌측 능선이 대간길이나 그냥 편안한 제도권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안부(09:35)
계곡(09:37)
안부를 지나니 오리지널 대간길에서 내려오는 마루금에 복귀한다
오리지널 마루금은 목책 너머인데 출입금지 팻말이 보인다
마루금에 복귀하니 좌측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션하게 흘러간다
법구경에서 말하기를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하다”고 했다
千千爲敵 一夫勝之(천천위적 일부승지)
전장에 나가 수천의 적을 혼자 싸워 이기는 것보다
未若自勝 爲戰中上(미약자승 위전중상)
미약한 자신을 이기는 것이 용감한 전사 중에도 최고이다
나 역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기에 암 수술후 좌측 폐를 도려내고도 이만큼
걸을 수 있다는데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안부(09:40)
출입금지(?)를 풀어줬으면 이런 것들도 제거해 줬으면 좋으련만...
살짝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밋밋한 1,155.9m봉에 도착한다
1,155.9m봉(09:46)
편안한 등로는 먼 거리를 가야할 오늘 길에 맘을 훨 편하게 해준다
안부(09:50)
숲길은 조금씩 가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137.1m봉(09:53)
마치 둘레길 같은 대간길을 걷다보니 초반부터 졸음이 밀려온다
안부(09:58)
무명봉(10:00)
무명봉을 지나면서 등로는 살짝 좌측으로 내려간다
무명봉(10:05)
안부같은 무명봉을 내려서니 등로는 아주 좋다
편안한 길을 내려서니 목책이 나오고...
넓은 초지가 펼쳐지는 삼양목장이 보인다
드넓게 펼쳐지는 초지위에 자리잡은 소나무 4형제...너희들의 우애가 부럽구나
보라색 쑥부쟁이가 홀로걷는 산꾼을 반긴다
안부(10:15)
1,101.0m봉(10:18)
등로에서 살짝 우측으로 벗어나 있다
안부(10:20)
초지를 벗어나서 숲으로 들어서니 등로는 아주 좋다
숲길에서 뒤돌아 보니 조금전에 지나온 소황병산은 멀게만 보인다
조그만 내 두다리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다...그리고 정말 고맙다
약간의 오르막길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대부지(垈. 敷地)경계 표시석들이 간간히 보인다
대.부지(垈. 敷地)란 건축 용어로 공간 구축물 관리법에서 시행된 28개 항목중에
하나로, 대지(垈地)란 둘 이상의 필지를 하나의 대지로 할 수 있는 토지를 말하며,
부지(敷地)란 주택이나 공장을 짓거나 도로를 내기위해 마련된 땅을 말한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채취한 것이 가장 약효가 좋다 하여 이름 붙혀진 구절초.
줄기의 마디가 단오에는 다섯 중양절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뜻의 구와 중양절의
"절", 혹은 꺽는다는 뜻의 절자를 써서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길을 걷는다
여전히 도도함을 잃지않은 멋진 소나무... 너에게 박수를 보낸다
1,118.6m봉(10:28)
숲속에는 산림청 홍수경보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초지를 벗어나서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잠시후에 오를 매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시 숲을 빠져나와 초지와 숲의 경계를 따라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바람이 거센 지역인가 보다...가지가 한결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자연에 逆行하지 않고 順應 하면서 살아가는 저 소나무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저러기에 산은 늘 인간의 스승이라 했을까?
잠시후에 오를 매봉이 이제는 손에 잡힐듯이 가까워진 느낌이다
안부(10:38)
안부에 서있는 출입금지 표지판을 보면서 草地를 버리고 숲으로 들어선다
숲길에서 만난 대간꾼의 흔적
숲길에 들어서 야생화와 以心傳心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조금전에 지나온 황병산과 소황병산쪽 능선은 서서히 가을을 향해 가는구나
안부(10:44)
안부에서 오르막으로 오르는 등로 우측으로는 잣나무를 심어놓고
대나무 가림막으로 막아놓은 식생보호지가 많이 보인다
가을편지 / 김사랑
잘계시나요
사랑한다
편지를 보냈지만
늘 당신의 안부가
궁금했지요
행여나 저를 잊었을까
걱정하다가도
가끔은 생각하겠지
가을 하늘에
얼굴을 그려 봅니다
고추잠자리는
할 일없이 왔다가고
돌담 위 누런 호박은
갈 햇살에 익어가고
내 사랑도 익어 갑니다
오늘 등로에서는 용담꽃은 보이지 않고, 용담꽃의 사촌격인 과남풀만 자주
만나는데,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용담꽃이 가장 많은곳은 점봉산인듯 하다.
용담(龍膽)은 초가을부터 늦게는 11월까지 종처럼 생긴 꽃을 피우는데 뿌리의 쓴맛이
웅담(熊膽)보다 더 강하다고 용담(龍膽)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용담은 꽃잎을 활짝
벌리고 있어서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과남풀과 구분된다
용담하면 생각나는 분이 계시는데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그는 생전에 우리 문화재를 아낀 것 못지않게 우리 야생화도 사랑하신 분으로 한국미 사랑을 담은 산문집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라는 이 책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었는데
그는 우리 야생화 중에서도 용담을 가장 좋아했는데, 산문집에 ‘그리워서 슬픈 나의 용담꽃’이라는
글까지 있다
저 과남꽃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사학자이셨던 그 분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산행이 꿩 대신에 닭이듯이 용담 대신에 과남풀꽃을 바라본다
망가진 철조망이 처져있는 등로를 걷는데 주변의 숲속에는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구절초들이 군락을 이루면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다...자연의 원형 그대로 피어있는
구절초는 아마도 구절초 축제가 열리는 전북 정읍보다도 훨씬 크다는 느낌이 든다
원형 철망과 목책을 넘어서 임도에 들어선다
6년전 대간 3차때는 이곳에서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지나가는 산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CCTV는 사라졌구나
이제는 맘놓고 대간길을 걸을수 있도록 허락하겠단 뜻인가?
임도(10:55)
임도 우측에는 산림청기상관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위에 있는 매봉을
오르지않고, 선자령으로 우회하는 길이며, 좌측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등로로는 연곡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소금강과 천마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매봉으로 향하는 직진 등로로 올라간다
매봉 오르는 길에 뒤돌아보니 아침에 지나온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서북쪽으로는
오대산 능선에 가지를 친 양양 남(신산경표상:만월)지맥 능선이 주문진방향으로 장쾌하게
펼쳐진다
갈림길(11:05)
능선에 올라 걷다보니 매봉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의 매봉으로 향한다
매봉(膺峰:1,173.4m:11:06)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사천면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옛날 미데기(바닷물)가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 매 한 마리가 겨우 앉을 자리만 남기고 이 봉 꼭대기까지
바닷물이 가득찼다고 해서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매 응(膺)자와
봉우리 봉(峰)자를 써서 매봉이라 부르며, 정상에는 건물이 부서진 흔적이 보이면
3등 삼각점이 있다
매봉 정상 삼각점(△연곡 320 / 1985 복구)
매봉 정상에서 바라본 선자령 방향의 모습
매봉정상에서 바라본 주문진(注文津) 읍내의 모습
주문진은 강원도 강릉시의 북단에 위치한 읍으로 본래 주문진은 연곡현(連谷縣)에
소속된 지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곡현은 본래 고구려 지산현(支山縣)이며
양곡이라고도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에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연곡면에 예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1955년 강릉읍 · 성덕면 · 경포면이 합해 강릉시 로 승격할 때 명주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시군통합으로 다시 강릉시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문진이 보이며, 『대동여지도』에서도 주문진이 신리 천변에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서는 신리천이 항구
쪽으로 흘러들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을 주문진이라 하였다.
매봉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간 다음에 삼거리에서 직진의 뚜렸한 능선으로 향한다
원형 철조망을 넘어서서 폐헬기장처럼 보이는 지도상의 1,163m봉에 도착한다
1,163m봉 (11:10)
이곳부터 "노인봉대피소"까지라고 단속구간이라 표식해논 표지판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아있고, 폐헬기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인데
대간꾼들의 어떤 산행기에는 이곳을 매봉이라 기록한 글도 보이지만 매봉은 아니다
목적이 "야생 동식물 서식지 보호"라고 명시해 놓았는데 정작 이 지역엔 나무를
거의 전부 베어내고 목초지를 만들어 목장을 만들었고, 목장 관리를 위해 수많은
트렉터 등의 차량들이 운행 되고 있으며 야생 동식물 서식지 보호"가 목적인지,
"목장 보호"가 목적인지 모르겠다.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걸려있는 1,163m봉을 내려서니...
삼양목장 초지가 나온다
매봉을 내려서면 대관령까지((매봉 - 대관령 도상거리 약 12km) 동행하게 되는 손님이
기다리는데, 그 손님은 다름아닌 이곳을 이국적인 풍경을 연상케 하는 풍력발전기다'
높이가 수십m로 ‘윙윙’거리는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내며 등산객을 압도하는 풍력발전기는
에너지가 부족한 이 땅에서 풍력이라는 천연자연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고자 설치한
장치라고 한다...수력 및 화력 발전소를 건설하자면 인근 주민들로부터 많은 민원이
제기되고 자연 파괴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라고도 하는데, 요즘 한창 회자되는
신재생에너지, 지속성장이 가능한 에너지, 脫(탈)석유 에너지, 녹색에너지인 셈이다.
지난 정권때 VIP란 자가 '판도라'라는 영화 한편을 보고는 전력 요금이
다른 시설에 엄청나게 싼 원자력을 좌악시하고 그 대신에, 자기들이 청정연료라
우기는 태양광 패널들로 전국토를 시꺼멓게 뒤덮었고 전국의 산과 바다에 풍력
바람개비를 설치하였는데 태양광과 풍력은 전력원가가 매우 비쌀 뿐 아니라
해가 나고 바람이 불어야만 전력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친환경, 친환경을 외치면서 설치한 그 시설들이 되레 환경을 파괴하고, 자기들의
이익 추구을 위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부패온상이 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없이 돌아가는 저 바람개비는 아는지 모르겠다
저 쑥부쟁이가 말한다.
지도자 한사람의 誤判으로 파생되는 결과물의 고통은 고스란히
힘없는 民草들의 것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냐고 핀잔을 하는듯 하다
임도로 내려가기 직전의 나무에 무수히 걸려있는 대간꾼들의 흔적
임도(11:25)
조금전의 매봉 아래에서 헤어진 우측 임도를 여기서 만난다.
노인봉 대피소에서 이곳까지가 출입금지역이었는데 지금은
단속을 하지않아 아무런 제지를 받지않고 이곳까지 왔다.
임도에서 곧바로 초지로 올라서서 가장자리로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등로 주위에는 각시취들이 많이 보인다
안부(11:27)
안부에서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초지와 숲사이가
뚜렸한 경계를 이루면서 대간길 마루금을 이어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백두대간을 걷는게 아니라 마치 알프스 산맥을 지나는 느낌이고
선자령으로 향하는 길에 끝없이 펼쳐지는 풍력발전기 행렬(?)
관계자들에 의하면 높이 수십m에 이르는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니 건축기술에 도움을
가져오며, 발전(發電)을 하는 기계장치 및 부품개발에도 적지 않은 파급효과를 가져온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풍력발전기가 이토록 유용하니 그렇다면 이 땅의 수호신이라고 불리어져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 구조물을 보면 왜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걸까.
그런데 왜 수호신이라기보다는 괴물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까.
사실은 이 많은 풍력발전기들이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해내는지는 잘 모른다.
그리고 생산된 전력은 어디에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보호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일까?
풍력발전기에 대한 의구심(疑懼心)을 품어면서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1,100m:11:40)
임도로 내려선 다음에 삼양목장 내에 있는 비포장 도로를 따른다
좌측에 보이는 저 능선이 대간길이나 그냥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좌측 풍력발전기 뒷쪽에 족보있는 1,105.9m봉이 있으나 그냥 길로 걸어간다
잠시후에 삼양목장에서 설치한 희망의 전망대라는 곳에 도착한다
각시취(꽃말:연정)
식물 이름에 각시수련, 각시붓꽃, 각시원추리처럼 ‘각시’ 자가 들어가는 것은 작고
연약해 보이며 예쁜 풀꽃들인데, 각시취 역시 어여쁜 각시처럼 예쁘다.
그러나 키가 30~150㎝로 크고 튼튼해 보이는 것이 이색적이며, 꽃은 기본적으로
자줏빛을 띠지만 분홍색에 가까운 자주색도 있고, 보라색과 연한 자주색도 있어서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색깔이 함께 핀다.
각시취는 우리나라 각처의 산과 들에서 자라는 두해살이풀로, 양지 또는 반그늘의
풀숲에서 자라며, 뿌리에서 나온 잎은 꽃이 필 때쯤 없어지고 표면과 뒷면에는
작은 털이 있고 8~10월에 자주색 꽃이 핀다.
꽃의 길이는 1~1.5㎝로 원줄기 끝과 가지 끝에서 피는데 꽃가지가 밑에 있는
것은 길고 위의 것은 짧아 서로 길이의 균형을 이루며 거의 편평하게 된다.
10~11월경에 자줏빛이 도는 열매를 맺는데, 길이 0.7~0.8㎝ 정도의 갓털이 2줄로 있다.
각시취는 국화과에 속하며 나래취, 고려솜나물, 가는각시취, 홑각시취, 나래솜나물,
민각시취, 큰잎솜나물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한자로는 미화풍모국
(美花風毛菊)이라고도 하며, 이는 ‘아름다운 꽃을 가진 국화’라는 뜻이며, 잎에 털이
있어서 참솜나물이라고도 한다...유사종으로 흰색 꽃이 피는 흰각시취, 원줄기에
날개가 없고 잎이 깃꼴로 갈라지는 가는각시취가 있다.
희망의 전망대(1,105.9m:11:47)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경계 능선에 있는 전망대로 주문진과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많은 인원이 쉴 수 있는 넓은 전망대와
삼양라면 창업주 故전중윤 회장을 기리는 표시석이 서 있는데 표시석에는
“茫茫大海 日出壯觀, 希望의 展望台”라고 적혀있다
동해전망대는 등산객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삼양목장 측에서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곳으로, 그래서 전망대 오른편엔 관광객을 위한 넓은 주차장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주문진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아침의 일출을 보기에 좋은 곳이라고 하며 사방으로 전망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라면을 생산한 삼양식품 전윤중 회장을 기리면서 만든 전망대이다
故 전중윤 회장님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1963년도 삼양식품을 창업하여 일본으로 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소고기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정직과 신용이라 기치
아래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술마신 다음날 라면에 고추가루를
타서 먹으니 얼큰하고 좋다고 했을 정도라고 했는데, 그렇게 시작된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가 올해 60년째 되는해로 지금은 전세계로 수출되는 K-푸드의 대표적 식품이다
희망의 전망대로 올라간다
한 눈에 펼쳐지는 주문진 시가지와 동해바다의 모습
이곳에는 전망대 주차장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간간히 보인다
전망대를 내려와서 바로옆에 있는 쉼터에서 점심상을 펼친다
전망대 쉼터에서 주변의 방위를 표시한 돌과 쉼터 의자 역할을 하는 돌이
보이고, 그 옆에는 예전에 밀크하우스라 표시해논 FRP시설물은 흉물처럼 보인다
주변을 표시한 방위석(方位石)
점심만찬(11:50~12:10)
오세암에서 따뜻한 국물에다 밥한숫갈 말아서 먹는 절집밥을 연상하며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점심을 싸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등로가 바뀌는
바람에 먹거리라고는 집에서 가져온 식혜와 배 몇 조각이 오늘 점심이다.
그러나 큰 걱정은 없다...베낭속에는 아직 육포 한조각과 초코파이 2개
두유 2개, 알사탕 몇개가 남아 있기에...이곳에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쉼터 바위를 베개삼아 10분정도 쪽잠을 자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12:12)
전망대에서 2분정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니 삼양목장에서 운영하는
투어버스가 서 있다...이곳은 거미줄처럼 얽힌 임도가 목장 운영에
필요해서 예전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풍력발전기를
연결하는 도로로 이용되는 듯 한데, 풍력발전기가 고장이라도 나면
차를 몰고 와야 하니 임도級 도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풍력발전기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렇듯 오늘 구간은,
입으로는 ‘자연보호’ 실제로는 ‘자연파괴’라는 생태정신 분열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꾸짖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넓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바람의 언덕(1,150m:12:13)
삼양 목장 목책로 안내판과 바람의 언덕, 해발 1,150m 표지석
이정표(←동해 전망대 0.2km, ↑ 연애소설 나무 1,9km, 청연주묵원 4,5km)와
공중화장실이 있고 바람의 언덕이라는 조형물을 따라서 초지와 숲의 경계를
이루는 가운데의 임도를 따라서 걸어간다
1,147.3m봉(12:16)
쉼터의자 3개와 멋진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 좌측의 봉우리가
삼각점(△도암422 / 2005재설)이 있는 1,147.3m봉인데 무심코
걷다가 지나쳐 버렸다...다시 확인하려다가 그냥 선자봉으로 향한다
초지 좌측의 능선으로 대간 마루금이 이어지는데 그냥 우측의 편안한 길로 내려간다
임도 삼거리(1,140m:12:18)
이 곳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투 동막골”의 촬영지란다
주변에 풍력발전기 많이 서 있는데 왜 대간 마루금 상에 서 있느냐라는 점이다.
물론 바람이 많으니 여기에 서 있겠지만 대간에 이러한 구조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은 모순도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 대간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지리학의 개념과
이론을 제공하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신앙이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우리민족의 精氣를 절단하기 위해 대간 마루금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놨는데, 워낙 많이 박았기에 아직도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이라고 쇠말뚝을 찾아내고 제거하면 뉴스거리로 다루어지고 있다.
풍력발전기를 세우려면 쇠말뚝이 아니라 이 보다 몇 백배 더한 파일을 대간
마루금에 박아야 하는데, 대간 마루금에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아 우리
정기를 말살하면 안 되고 우리가 파일을 박아 스스로 정기를 파괴해도 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오늘 이 구간의 무수히 많은 풍력발전기들이 外資에 의해 들어섰다는 소문도 있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외자가 어느 나라에서 들여왔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風水라는 미신에 현혹된 논리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제기될 수 있지만, 풍수는 소위
지도층에 의해 더 많이 신봉되는 사상이기도 하다... 풍수는 현대 과학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과학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대간 마루금
상에 주인처럼 버티고 있는 괴물은 후손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기는 셈이다.
임도삼거리에서 좌측의 임도를 따르는데 삼양목장측에서 출입금지
팻말과 바리게이트가 있지만 그거야 목장에서 하는 일이지 내가
해결할 문제는 아니잖는가... 묵묵히 대간길을 이어간다
마루금을 벗어나 임도로 우회를 했다가 다시 대간 능선에 복귀하여 마루금을 이어간다
여기서 선자령으로 오르기 직전까지 임도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동양 최대의 목장인 삼양목장(삼양라면)의 전경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삼양라면의 역사와 괘를 같이하는데, 1963년
9월 20일에 탄생한 삼양라면...사람으로 치면 올해가 라면의 환갑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 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날
삼양식품의 창업주인 전중윤회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보고 전 회장은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중윤 회장은
어렵게 일본에서 묘조(明星) 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렵게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기술을 들여온게
한국 라면의 역사이다
삼양식품은 쇠고기와 우유를 생산하는 대단위 목장을 건립하는데 이곳 삼양목장이다.
서울 여의도의 7.5배, 남한 전체의 1/5000 규모로 동양최대의 목초지라고 하는 대관령
삼양목장은 삼양식품의 원료공급원 역할을 하는 곳으로 무공해, 무농약 목초를 먹고
자란 소는 삼양식품의 라면 제품 스프 원료로 제공된다고 한다.
삼양식품이 소고기라면을 시작한 동기가 바로 이곳에 있다.
배고픈 민초들을 '잘 먹이자'는 의미인데, 삼양라면에서 맨 처음만든
라면이름이 삼양 소고기 라면이었다고 한다
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그래서 소를 직접 길러야겠다 생각하고 직접 키워
건강한 소고기를 듬뿍 넣자하고 시작한게 목장 사업의 계기다"라고 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삼양목장 너머로 대관령면 횡계리 뒷쪽으로 발왕산을
바라 보면서 곤신봉으로 향한다
곤신봉 (坤申峰:1135.2m:12:45)
곤신봉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강릉시사」에 의하면 곤신봉은 강릉부에서 볼 때 거의 서쪽에 있는데
전통적 방위 용어로 곤신(坤申)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황병산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강릉 칠사당(七事堂) 서북에서 제일 높고 방위가
곤신방(坤申方)이라 해선 곤신봉이라 한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이 능선의 줄기에 명당이 많아 묘자리로 많이 쓰이는데 이곳에서 부는 바람이
세차서 곤신봉을 향해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곤신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능선부에 대공산성(大公山城)이 있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성산면 보광리에는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이 있다.
대공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주군왕릉은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묘이다
곤신봉은 강릉 동헌에서 볼 때 거의 서쪽, 즉 옛날 방위 용어로
곤신(坤申)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서 부는
바람을 곤신풍(坤申風)이라 한다(江陵市史 자료 참조)
곤신풍(坤申風)은 곤방(方)이나 신방(方) 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서남풍'을 의미한다.
대공산성 갈림길(12:49)
곤신봉에서 300여m 정도를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오고 풍력발전기를 만나는데
예전에는 임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곤신봉 0.3km, 대공산성 1.3km,
선자령 2.2km, 보현사 3.4km'라 적혀 있었는데 오늘은 그걸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 확 꺽어져 넓은 임도를 따라서 선자령으로 향한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은 일명 보현산성(普賢山城 )혹은 대궁산성(大弓山城 :1,008.3m)
이라고도 하는데, 발해 왕 대조영(大祚榮)이 쌓았다고도 하고, 고구려 유민(流民) 이
쌓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대공산성 안에는 강릉시내에서
약20여km 떨어져 있는 대공산(大公山:1,008.3m)이 있는데 내가 주로 사용하는
오록스맵에는 대궁산(大弓山)으로 표시되어 있고, 보현산(普賢山)이란 기록도 나온다.
대공산성지(大公山城址)는 강원도 기념물 제28호로 강릉시(江陵市)의 서쪽 약 20km쯤
되는 성산면 보광리 산 544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보광리(普光里)의 북쪽에 솟은
높은 봉우리(대공산大公山1010m)에 위치한 둘레 약 4km의 석축(石築) 산성(山城)이다.
북쪽의 성벽(城壁)은 자연적인 험준한 절벽을 이용해 쌓았는데 거의 붕괴되었고, 지금은
남쪽 방면으로 높이 2m쯤의 다듬지 않은 할석(割石)으로 쌓은 성벽과 동·서·북쪽의 문터(門址)가
남아 있는데, 성 안에는 약 1,000여년 전에 쌓았다는 우물터가 아직도 있다고 한다.
전설(傳說)에는 백제(百濟)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또는 발해(渤海)의 왕족(王族)인
대씨(大氏)가 쌓았다고 하나 분명치 않으며, 기록에는 이곳을 보현산(普賢山)이라 하고
성은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둘레가 1,707척이라고 하였다... 조선(朝鮮) 고종(高宗)
32년(1895) 이른바 을미의병(乙未義兵) 때에 민용호(閔龍鎬)가 이끄는 의병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선자령가는 길은 牧歌的이고 이국적인 풍경이 마치 유럽의 어느곳에
와 있는듯한 착각에 들 정도이다...뒷쪽에 보이는 산그리메가 환상적이다
1,005.3m봉(13:02)
임도옆의 숲속 봉우리가 오룩스맵의 지도에는 1,005.3m봉이라는데
약간 거친 도로를 따라서 대간 마루금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숲으로
이어지지만 배도 고프고 졸음이 몰려오기에 그냥 편안한 임도로 향한다
목장의 출입을 금하는 철문을 지나서 선자령을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각시취가 먹을게 없어 배고픈 설음을 겪는 범여에게 힘내라고 응원한다
빙돌아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나즈목이(13:29)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선자령으로 오르는 등로가 있는데 나즈목이 란 뜻은 ‘낮은 목’. 강릉
사투리로 ‘안부’라는 뜻이란다.
낮으목이에서 임도 좌측의 숲속길이 대간길이지만 숲이 너무 우거져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냥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낮은목이로 향한다
선자령 입구(13:32)
선자령 등로 입구의 모습
마루금을 포기하고 한참을 우회하여 선자령으로 향하는 편안길로 올라간다
선자령 오름길에 서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뒤돌아 본다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황병산 방공망 시설이 아련히 보이고 그 우측에
초지로 조성된 소황병산...그리고 우측 능선이 오늘 내가 걸었던 능선이다
조그만 내 두다리로 참으로 많이도 걸었구나...아직도 날머리인 대관령
까지 가려면 6km가 훨씬 더 남았는데 갈 수 있을란지 모르겠다
선자령에 거의 다 온 모양이다...편안한 길이 나온다.
드디어 선자령 정상에 도착한다
평평한 넓은 공터로 형성된 선자령 정상에는 각종 시설물들이 많다.
선자령 안내판
선자령(仙子嶺:1155.7m:13:45)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능선에 우뚝 솟아 있으며, 100대 명산중에 하나로 일반
등산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산으로 특히 겨울철 산행지로 유명한 곳이다
산 이름을 '산'이나 '봉'이 아닌 선자령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大關山)'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에는 그 아래 보현사의 이름에 따라 '보현산(普賢山)'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특히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만월산(滿月山)'으로 적혀 있다.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되며 선자령은 해발 840m인 대관령의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대관령에서
약 6km밖에 되지 않아 산행이 힘들지 않고 겨울철 적설 등반지로 적합하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조 중종때 이 지방
사람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따라서 거의 평지길이나 다름없는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므로 산길은 매우 완만하다.
이 능선길은 적설기와 신록기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곳으로 적설기에는 많은 눈에 덮여
은세계를 이루어 황홀하고, 신록기에는 새로 자라난 연녹색의 초원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화원을 이루고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선자령 표시석 뒷면
대부분 산의 봉우리는 "산(山)","봉(峰)","대(臺)"로 불리고 고개는 "령(嶺)","재",
"치(峙)","현(峴)"으로 불리는데 그런데 선자령은 산의 봉우리인데 "령 (嶺) "으로
이름지어져 있어 좀 특이하다...이 지역의 지형이 완만하고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선자령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선자령 안부 동쪽 보현사골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선자령이라고
불렸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인증샷
선자령 정상 2등 삼각점(△ 도암 23 / 1991 복구)
선자령 정상에는 늦은 시간임도 불구하고 명산답게 심심찮게 사람들이 보인다
비록 내리막 등로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날머리까지는 6km이상이나
걸어야 길이 남아있어 잠깐 머물다가 서둘러 길을 나선다
선자령을 내려서면서 가야할 길을 바라본다.
맨 앞 풍력발전기 뒷쪽으로 하얗게 보이는 항공무선표시소가 있고
그 뒷쪽으로는 고려 우왕의 슬픈 추억이 서려있는 제왕산과 2번째
풍력발전기 뒷쪽으로는 지난 겨울에 겁없이 도전했다가 개고생을 한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잠깐 사이의 숲을 빠져나와 CCTV와 이정표(←선자령 0.1km, → 대관령 4.9km)를
지나니 다시 삼양목장 초지가 나오고 초지 사이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이어간다
대관령가는 길에 뒤돌아 본 선자령의 모습
목장쥔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초지에는 비박족들의 텐트들이 많이 보인다
쉼터(13:54)
넓은 임도의 내리막길 너머로는 능경봉과 고루포기산도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이는 산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노추산인듯 하고
우측으로는 발왕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시간을 줄여보려고 빠른 속도로 걸어보지만 너무 허기가 진 탓일까
생각보다 산행 속도도 나지 않지만, 배고픔보다 더 힘든건 밀려오는
졸음이다...등로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졸면서 걸어간다
이번에는 소나무가 시비를 걸어온다.
참으로 불쌍한 중생이구먼...뭔 개고생을 사서 하시나...
過猶不及이란 단어도 모르는가...난 지금 생존을 위해서 걷는다오.
너무 타박은 하지 마시게나...
대관령 숲길은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일원에서 바다와 육지를 함께 조망할
수 있도록 조성된 총 103km의 숲길로 2021년 5월 우리나라 최초 국가숲길로
지정됐다고 한다.
쉼터(14:02)
대관령 가는 길
이곳을 이렇게 편한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조였던 고형산이란 분의 노고 때문이 아닐까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였던 고형산(高荊山)
강릉대 교수 장정룡이 쓴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는 대관령의 역사와
개척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으로, 그의 글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 민력(民力)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大怒)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고형산은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축출하는데 기여한 인물로, 훗날 그의 부관참시는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뿌리를 둔 사건일 뿐, 대관령 개척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의 공간적 배경과 대관령 역시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어려웠던 시절에 도로를
개척한 공로를 일관되게 부정적 측면으로 폄하한 이유 또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고형산이 대관령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장정룡의 글은,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 부관참시(剖棺斬屍)란
예전에,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다시 극형에 처하는 형벌로,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걸던 일을 말한다
잠시후에 걸어야 힐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맨앞의 볼록한 봉우리가 새봉, 그 뒷쪽 하얀 시설물이 항공무선송신소이고
그 뒷쪽의 뾰족한 봉우리가 제왕산, 우측의 산이 능경봉이다
안부(14:10)
7~8에 피는 미역취가 이곳에는 이제서야 피기 시작하는구나.
국을 끓이면 미역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여 '미역취'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돼지나물'이라고도 하며, 한방에서는 건위제·
강장제·이뇨제로 사용되는 꽃이다.
이곳이 대관령 국가숲길 목장 코스란다
잠시후에 가야할 새봉(1,059.5m)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각시탈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쉼터(14:13)
계속되는 편안한 길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새봉 갈림길(14:25)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향하고 편안한 우회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새벽에 미시령에서 황철봉으로 갔어야 했는데 길을 막는 바람에
오르지 못하고 진고개까지 100여km를 운전하고 와서 산행을
시작했는데,지금의 체력은 완전히 바닥이 나버렸다.
꿩 대신에 닭을 택했다가 개고생 중이다...마루금을 포기하고
우회길을 택한다
길가에서 만난 벌개미취
편안길을 가다가 너무 아쉬워 트랙을 보니 좌측 바로 윗쪽이 새봉으로 나온다
아쉬워서 우회길을 벗어나 올라가보지만 산죽의 강력한 태클에 체력만 소진하고
새봉가는 길을 포기하고 우회길로 내려온다
편안한 도로를 따라가면서 새봉이 눈앞에 아른거려 자꾸만 좌측 위를 바라본다
저 윗쪽이 새봉(1,059.5m) 정상이고 정상에는 기상관측 시스템 장비가
설치되어 있고 강릉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있는데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3번이나 올라갔던 봉우리라 큰 아쉬움은 없다
사면길을 걷다보니 새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다시 만난다
합류점(14:42)
새봉과 전망바위를 지나 내리막길에서 우회길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목장코스 이정표( ↑ 대관령(합류) 2.8km →대관령 2.9km ←선자령 2.1km)와
뱀과 독충을 조심하라는 플랑카드가 걸려있다
이정표 옆에는 뉴밀레니엄기념 천년수 주목식재 표시석이 있는데
도지사라는 사람이 꼭 저런걸 해야하나...
좌측 윗쪽이 백두대간 마루금이지만 무선표시소가 있어서 그냥 임도로 걷는다
좌측 능선위에 항공무선 표시소가 있다
무선표시소 아랫쪽의 편안한 길을 걷는다
종비나무 표지판
무선표시소 우측 아래는 종비나무 조림지가 보이는데
난 저 나무가 종비나무라는걸 오늘 처음 알았다
목장 초지에 가는 비박족인 모양인데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나도 20여년전에는 그레고리 데날드 110L짜리 베낭을 메고
비박에 미친적이 있는데, 이제는 흘러간 아련한 옛추억이 되버렸다
야자매트의 등로를 따라서 나오니 항공무선표시소 입구가 나온다
항공무선표시소 입구에 있는 대관령 숲길 안내판
항공무선표시소 입구(14:52)
항공무선표시소 입구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kt대관령 중계기지(14:56)
등로 좌측 아랫쪽으로는 예전에 없었던 강릉바우길과 대관령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직진의 도로로 따라가야 대간길이지만 우측의 국사성황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국사성황사 가는 길
국사성황사 입구에 도착하여 성황사로 향한다
강릉단오제에 얽힌 인물과 전설
강릉단오제는 세 신, 즉 대관령 국사 성황신, 대관령 국사 여성황신, 대관령
산신을 모셔와 축제를 치르고 다시 이 신들을 돌려보내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범일국사(梵日國師) ,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정씨 여인,
대관령 산신은 김유신 장군이 각각 신격화된 존재인 것이다.
먼저 대관령국사 성황신이 된 범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옛날 학산에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우물가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속에 해가 떠 있었다 한다...별 생각 없이 그대로 물을 마신 처녀의 몸에는 이상이
생기고 마침내달이 차서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맹물 먹고 아이가 선’ 처녀는
부모님의 노여움이 두려워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뒷산 학바위에 갖다 버렸다.
자식을 버렸지만 마음이 편했을 리 없는 처녀는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 학바위로
올라갔다...갓난아기는 포대기에 싸인 채 고이 잠을 자고 있었고, 잠시 후 학(鶴)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감싸고 단실 3개를 먹여주곤 날아갔다...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처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웠는데, 이 아이가 곧 범일이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으며 자라던 범일은 7세가 되어 어머니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듣고 난 후 경주로 공부하러 떠났고, 공부를 하여 국사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영화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굴산사(堀山寺)를 짓고 포교를 하였다.
이때 왜구가 쳐들어왔는데 범일이 술법을 써서 왜구를 물리쳤다.
도력으로 강릉을 지켜낸 범일은 죽은 다음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되어서 이 지역을
돌보게 되었다고 한다.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정씨 여인이 신격화된 존재다.
옛날 경방에 초계정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 딸이 노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대관령 서낭님이 보낸 호랑이에게 붙잡혀갔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딸의 방에 가 보니 딸이 보이질 않았다.
집 주위를 살펴도 보이지 않아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호랑이가
업고 가더라고 했다...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버지는 얼마 전 꾼 꿈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딸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서낭신을 사위로 삼을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급히 대관령 서낭당에 가보니 딸이 서낭신과 함께 있는데 벌써 비석처럼
굳어 있었고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려 세우니 시신이 떨어졌다... 국사서낭과 처녀가
혼배한 날이 4월 15일로 그 뒤로 정씨 집안의 딸은 여성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독특하게도 김유신 장군은 역사적인 위인으로서 산신의 대우를 받게 된 경우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을 왔는데 그 재주가 특출해서 검술을 산신에게 가르쳤을
정도였는데, 김유신이 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고, 장군은 이 칼로 생전에 말갈족을 평정하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시대는 다르지만 모두 실존인물(또는 실존인물로 전해지는 인물)인데
범일국사와 정씨 여인은 강릉 출신이고, 김유신은 이 지방에 머물렀다.
범일(810~889)은 신라 때 강릉 지역의 지배세력이던 강릉김씨로 술원(述元)의 손이고,
어머니는 문씨다... 술원은 명주도독겸평찰(溟州都督兼平察)을 역임한 강릉의 토호였고,
범일의 외가는 여러 대를 강릉 지방에서 살아온 호족이다.
범일은 15세 때 승려가 되어 흥덕왕 4년(829)에 경주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당나라에 가서 제안대사(濟安大師)에게 사사(師事)하며 6년 동안 수도하고 귀국했다.
귀국하여서 고향 강릉으로 돌아 굴산사에서 40여년을 보내는 동안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국사가 되어달라는 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굴산사에 머물며
선문(禪門)에 매진했다.
정씨 여인은 초계정씨의 시조인 정배걸(鄭倍傑)의 21대 손 정완주(鄭完柱; 조선
숙종 때 사람)와 어머니 안동권씨의 외동딸로, 정현덕(鄭顯德)의 5대조 고모가 된다.
정현덕은 대원군 때 동래부사를 지낸 분으로 정씨 여인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다는
집의 주인이다.
정씨 여인은 창원 사람 황수징(黃壽徵)과 혼례를 올리고 난 후 시댁이 멀리 있어
알묘(謁廟)를 하지 못한 채, 친정 경방(經方)에 머물고 있었는데 5월 단오날 집에서
국사 성황행차를 구경하다가 호랑이에게 업혀갔다.
가족들이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찾아가니 이미 시신이 되어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친정어머니 산소 앞에 안장했는데 지금도 정씨 여인의 묘가 강릉교도소
서쪽 산 능선(맴소)에 있다... 정씨 여인은 사후에 국사성황과 혼배를 하고, 국사여성황으로
추앙되었다.
김유신(金庾信:595~673)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어려서 화랑이 되어 심신을
수련했고, 장수가 되어 강릉 지역에 주둔하면서 말갈족을 물리치고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성황사 산신당(城隍祠 山神堂:15:03~15)
산신당 안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장군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김유신은 이곳에서 대관령 산신으로 추앙받는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을 왔는데 그 재주가 특출해서 검술을 산신에게
가르쳤을 정도였다고 한다...김유신이 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고 하며, 장군은 이 칼로 생전에 말갈족을
평정하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요사채와 산신당, 성황사, 대관사로 국사성황당을 이루고 있다.
산신당 내부에 있는 김유신...산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산신당 뒷쪽에는 용왕당이 있다
범일국사를 모셔놓은 성황사(城隍祠)
‘매년 음력 4월15일에 봉행되는 대관령국사성황제는 통일신라시대에 국사로
추앙된 범일국사가 사후에 대관령 성황신이 되었다는 제(祭)를 지내는 의식으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의하면 매년 음력 4월15일에 강릉부 호장(戶長)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칸의 산사에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하여 나무에 신이내려 흔들리면 기운 센 사람들이
들고오게 한다’고 하였다
이 행차를 국사(國師)의 행차라고 하였는데 날나리를 부르는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고
무당들이 징을치고 북을 울리면서 따르고 호장이 대창역마를 타고 그 뒤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때 도로가에 도로가에 담을 쌓은것과 같이 종이나 천을 신목에 걸고 기원하거나
음식을 장만하여 무당들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대관령에서 내려와 저녁에 강릉부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는데 하급
관노(官奴: 고려와 조선 시대의 지방 관청에 소속된 남자 노비)들이 신목(神木)을
맞이하여 성황사 안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 신목(神木)이란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오색 댕기를 매어 둔 나무를 말한다
성황사에 내에 있는 범일국사
신라 말 입당 구법승 가운데 굴산산문(堀山山門 혹은 사굴산문)을 일으킨 범일국사
(梵日國師:810∼889)는 현재 가장 한국적으로 변신한 모습으로 강릉 일대에서 섬겨진다.
이는 범일국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릉단오제, ‘강릉대관령국사성황제’의
주신(主神)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는 당나라 유학 후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온
보답을 톡톡히 받고 있다...그는 해마다 5월 단오제에 주신으로 모셔져 민중의 친근한
존재임을 과시한다.
한국에서 오늘날 범일국사가 전통 마을 굿, 무속 굿의 형태로 진행되는 단오제의 주신으로
섬겨지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범일국사는 무불습합(巫佛習合)의 역행인
불무습합(佛巫褶合)의 전형적인 예인데, 범일국사는 선승에서 무신(巫神)으로 반본한 셈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불교의 선종(禪宗)은 말을 부정적으로 보는,불립문자(不立文字)의
한자문화권의 혁명적 불교인데 선종은 직관을 중시한다. 직관은 선종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그 이전의 샤머니즘과 통한다. 샤머니즘이야말로 만물과의 기통(氣通)을 전제한 것이다.
대관사(大關寺)
이곳은 여느 사찰과 비교해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대웅전격인 대관사는 변방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고 무당들의 굿당인 성황사와 산신당이 훨씬 대접받는 느낌이다
성황사 옆에는 대관사(大關寺)라는 절이 있고 부처님을 모셔놨지만 산신당과 성황사에
비해 훨씬 초라해 보인다.
성황사를 빠져나와 다시 kt대관령 중계기지로 올라가서 대간길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냥 성황사에서 편안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성황사에서 8분정도 내려와서 kt대관령 중계기지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나서 대관령으로 향한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대관령으로 향하는데 성황사에서 나오는
승용차 한대가 보이기에 ‘대간이고 지랄이고 살고봐야 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손을 흔드니 차를 세워주고는 타라고 한다
잠깐 사이에 여차여차하여 이렇다고 하면서 오늘 산행을 한
연유를 얘기하니 대관령 정상까지 태워주는게 아닌가.
대관령(大關嶺:832m:15:35)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서울과
영동을 잇는 백두대간의 관문이면서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년 11월
횡계-강릉 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이 변해 대관령이 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에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 유래되었다 한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으로 흐르는 五十川은 강릉을 지나 東海로 흐르며,
서쪽은 松川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흐르며, 대관령 일대는 선자령,발왕산,
황병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평탄면 지형으로 북쪽으로는 오대산국립공원이 가
까이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약 16.1도로 봄,가을이 아주 짧다... 여름은 서늘하며
무상기일(無霜期日)이 짧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9월에 서리가 내리고
첫 얼음이 언다.
서늘한 기후에 적합한 고랭지 채소,씨감자,홉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활발하다.
대관령은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스키장을 건설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조선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인 高荊山이 수레를 이용하여 대관령의 길을 넓혔는데
그 후 병자호란 때 청군이 대관령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진군했다고 하여
죽은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 部棺斬屍했다고 전해지는 고개이다.
* 무상기일(無霜期日)이란
늦은 봄의 마지막 서리가 내린 날부터 초가을 첫서리가 내린 날까지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의 길이는 농업에 큰 영향을 미치며 농작물의 종류나 수확량
따위를 제약한다.
그 분께서 인증샷까지 찍어주고는 고속도로 방향으로 가시는데, 복받을 깁니다
정상석 뒷쪽으로는 신사임당이 시댁에 가는길에 강릉의 친정을 향해 지었다는
詩 <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이 생각나는구나
踰大關嶺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 늙으신 어머님를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貴人과 유쾌한 작별을 하고 횡계택시를 불러 진고개로 향한다
진고개(16:10)
대관령에서 진고개로 가는 택시에서 30여분간의 꿀맛같은 잠이 든 사이에
택시가 대관령에 도착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진고개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고, 나의 愛馬만이 덩그러니 홀로 쥔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텅텅 빈 주차장에서 베낭을 정리하고 수통에 조금남은 물에다 타월을 적셔
몸을 대충 닦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진고개를 출발하여 월정사 입구를
지나 진부가는 길에 순대국밥집이 있어서 따끈한 순대국밥 한그릇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다음에 국밥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시간 30분정도의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국밥집의 가게 불은 꺼져있고, 주변은 암흑 천지이다
19시 30분경에 국밥집을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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