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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차 북진(終)

제13구간 - 소사고개에서 부항령까지(역산행)

by 범여(梵如) 2023. 10. 18.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갔던 산행

 

☞ 산행일시: 2023년 10월 08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간간히 불어대는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14.2km + 들머리 0.6km / 7시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삼도봉 터널(1,089번 지방도)-부항령-폐헬기장-안부-돌탑봉-쉼터-무명봉

                    안부-안부-853.2m봉-암봉-854m봉-안부-무명봉-850m봉-무명봉-선황당재

                    810m봉-y자 임도갈림길- 안부- 폐광터 전망대- 무명묘지- 833.0m봉 갈림길

                    833.0m봉- 안부- 덕산재- 무명봉- 723.1m봉- 무명묘지- 안부- 안부

                    얼음폭포 갈림길- 얼음폭포- 얼음골 약수터- 안부- 무명봉- 안부- 암봉

                    조망바위- 안부- 대덕산- 헬기장- 쉼터- 1,256.2m봉- 공터- 안부- 조망바위

                    초점산- 황강(수도)지맥 분기점- 공터- 쉼터- 소사마을 진입로- 묘지

                    죽산전씨 가족 묘- 안부- 소사고개

☞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고제면 / 전북 무주군 무풍면 / 경북 김천시 대덕면, 부항면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후 변화 탓이련가.

주말마다 내리는 비로 인해서 매주 내가 정해서 가야하는 산행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멘붕아닌 멘붕이 온다고나 할까...올해가 가기전에 4번째 백두대간 길을 끝내고

162개 지맥중에 30여개 남은 지맥을 2년안 마무리하고 스틱을 접으려고 생각하는데

자꾸만 날씨가 발목을 잡는다.

 

몇개 남지않은 강원도 구간의 대간길을 끝내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이번 주말에도

강원도에 비가 온단다...날씨가 춥고, 11월 중순이 넘어서 경방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강원도 대간길을 끝내려는 내 스케줄이 또 바뀐다...하는 수 없이 비가 오지

않는쪽을 찾다보니 남쪽으로 가야할 듯 싶은데 자료를 찾다보니 야생화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려고 아껴 두었던(?) 무주와 김천 지역 경계능선에 있는 소사고개~

부항령 구간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급하게 산행지를 변경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역(05:15)

집 앞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05시15분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홈플레이트로 가서 정차한 열차에 오른다

서울발 → 대전행 열차표

05시 27분에 대전역으로 향하는 ktx열차를 타고 가는데 10월이 지나서

그런지 06시가 넘었는데도 차창밖은 아직도 어둠이 걷힐 기미가 없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10분이나 늦게 대전역에 도착한다

대전역(06:45)

대전역을 빠져나와 대전복합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탄 후 10분정도만에

터미널에 도착하는데 비가 오려는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왠지 불안한 느낌이다

대전복합터미널(06:57)

터미널에 도착하여 설천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이곳에 오면 간간히 들리는 식당에서 된장찌게로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 한잔을 얻어먹은 다음에 버스 승차장으로 향한다

대전복합터미널발 → 설천행 버스표

설천가는 버스를 타면서 예전에 이용했던 무풍 택시를 예약한 다음에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무주터미널에 도착하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대다수의 승객들은 이곳에서 다 내리고 설천과 무주구천동을

향하는 버스에는 나를 포함해서 3명의 승객뿐이다

설천(雪川)버스 정류소(08:40)

설천(雪川)이란 지명은 1724년(영조 즉위년) 문관 이봉상(李鳳祥)이 이곳에 살면서 설천(雪川)이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후손들이 이곳에 설천사(雪川詞)를 세워 위폐를 모셨다 하여 ‘설천’이라고 하였다.

또 구천동에서 수도하던 9,000명의 승려들이 밥을 지으면서 내려보낸 쌀뜨물로 인해 계곡물이

하얗게 보였다고 하여 '눈 설(雪)' 자와 '내 천(川)' 자를 따서 ‘설천(雪川)’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설천 버스 정류장 시간표

난생 처음 설천이란 곳을 와본다...이곳을 많이 지나가긴 했지만 이곳에 내리기는

처음이다...버스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타고 부항령으로 향한다

삼도봉 터널(605.1m:09:05)

경북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탄방(坊:쑥뱅이)

마을 경계에 있는 길이가 391m( 경북 151m, 전북 240m)이며,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연결하는 1089 지방 도로가 관통하는 터널로, 1999년 12월 6일 무주와 김천의 교통이

단절돼 있던 두 지역의 교류 촉진을 위해 백두대간 길목인 부항령(가목재)에 도로를 내고

터널을 개통했다고 한다

 

삼도봉 터널 개통으로 무주로 가는 길을 가는 영.호남인들이 더욱더 가까워졌으며,

삼도봉 터널 앞 소공원은 영.호남인의 화합과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교통량이 거의 없어 여름이면 500m 터널 양쪽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길이 없을

만큼 돗자리를 펴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하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속도를 줄이거나 함께 피서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도봉 터널 지명에 대한 유감

지명은 당연히 '부항령 터널'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8km나

떨어진 삼도봉의 지명을 데려와서 생뚱맞게 삼도봉 터널이라니...사연은 이렇다.

'부항령 터널'로 명명할 경우 부항은 부항면의 경상도만 돋보여서 안 된다는

전라도(무풍면) 쪽에서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삼도봉'을 데려와서 지명으로 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 씁쓸하다

택시기사와 유쾌한 작별을 하고 차에서 내리니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지금으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다...거기다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는 통에 서둘러 산행 채비를 한다

삼도봉 터널 입구에 있는 이정표와 백두대간 안내지도

김천 방향으로 가목마을 살짝 보이는데 가목(부항:釜項)마을의 유래를 보면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釜項)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가목재에서 감내(甘川)의 큰 줄기 샘이 발원하는데,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 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9:10)

산행 초입에서 만난 배초향...산행을 시작하면서 야생화와 하는 눈맞춤,

왠지 기분이 좋고, 오늘 산행을 하면서 존일이 있을것만 같은 느낌이다

구절양장의 길을 따라서 부항령으로 올라간다

부항령 가는길에서 바라본 부항면 어전리(漁田里)의 산그리메

어전리는 임진왜란 때 피난 온 허인(許仁)이 마을 앞 들판의 형상이 물고기와 같음을

보고 어전(魚田)이라 하였으며, 옛날 마을을 지나던 한 도인이 마을 뒤 계곡 폭포 속에

많은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실제로 산비탈에 둘러싸인

앞들의 형세가 부항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을 따라 헤엄쳐 나가는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다.

부항령(釜項嶺:680m:09:14)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과거에는 김천과 무주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로서 우마차가 넘어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었지만 인근의 덕산재에 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 이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지방도가 만들어진 이후에 비로소 부항령을 이용하게 되었다

 

경북과 전북의 도계를 이루는 부항령의 지명유래는 가목마을에 있는 고개여서 마을의

지명을 따 가목령 또는 부항령 (釜項嶺)이라 하였으며, 가목은 '가매목'의 줄임말인데,

부뚜막이란 의미로 ‘부뚜막을 닮은 고개란 뜻’인데, 이를 한자로 '부항(釜項)'이라 적는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오래된 고갯마루인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에도

'부항현(釜項峴)' 으로 기록돼 있다... 부항령에서 무주군으로 이동하면 나제통문 (羅濟通門)이

있는데, 현재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지만 과거에는 나제통문

지역을 기점으로 생활권이 달랐다고 한다.

 

* 나제통문 (羅濟通門) 은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 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모산(石絹山)에

  위치한 바위 굴이다...무주군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 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는 말에 따라 ‘나제통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삼국은 통일 전쟁 무렵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通一門)’이라고

  불렀다고도 하며,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 마을인 무주군 무풍면 방면의 이남 마을과

  무주읍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 행정 구역으로는 모두 설천면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풍속과 전통이

  각기 다르게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부항령 안내판

바람도 드세고 날씨가 상당히 차갑다...바람막이 자켓을 입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부항령에서 올라서자마자 축대처럼 생긴 돌담이 있는 폐헬기장에 도착한다

폐헬기장(09:17)

날씨는 계속 꾸무리한데 오랜 산행 경험상의 느낌인데 지금 부는 바람으로 봐서는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초반부터 마음이 급해 부지런히 걸으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니 렌즈의 초점이 맞지 않은지 자꾸만 그림이 흐리다

헬기장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09:19)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 조병화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게 산의 이치지만

그게 어디 산에서만 해당되던 부분이던가

世上事를 살아가면서도 적용되는게 오르 내림이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들에게는 格言처럼 새겨들어야 할 말이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내리막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막이 있다”는 그 말...

오늘은 초반부터 시작되는 오르 내리막 능선...별 특징도 없고,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대간길이지만 아니 갈 수 없는 곳이 오늘의 산길이다

고도를 조금 높혀서 올라서니...

등로 주위에는 토실토실한 밤들이 많이 떨어져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物慾에 약하다는 건 증명해 보이는게

오늘의 산길이련가...베낭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서

씨알을 굵지 않으나 맛이 있을법한 토종 밤을 줏으면서 

걸어간다

돌탑봉(725m:09:25)

돌탑봉을 지나면서 등로에 펼쳐지는 밤밭(?)

산행이고 지랄이고 거두절미하고 아예 베낭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씨앗이 굵고, 벌레가 먹지않는 밤을 베낭에

줏어 담기에 정신이 없다...바람이 불고 약간 쌀쌀한 날씨에 15분정도

밤을 줏었는데 조그만 됫박으로 3되쯤은 돼 보이고 베낭은 묵직하다

또다시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밤을 줏으면서 걸어간다

오늘 산행은 염불(대간 종주)보다는 잿밥(밤줏기)에 마음이 가는 산행이다

쉼터(09:45)

쉼터에는 산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 2개 앞에 쓰러져 있는

고사목이 이채롭고, 이정표(→ 덕산재 4400m, 대덕산 7400m

← 부항령 800m, 삼도봉 8200m)가 외롭게 쉼터를 지키고 있다

무명봉(09:48)

쉼터를 지나고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 무명봉 근처에도 밤들이 지천이다.

이걸 다 줏었다가는 베낭이 무거워서 걸을수가 없을것 같은 기분이라

지금부터는 더 이상 밤을 줏지 말아야겠다 

사랑놀음?

안부(09:50)

다시 완만한 오르막...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내리막길은 펼쳐지고...

고도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마치 롤러코스트 타듯 등로가 이어지는데

흔히 산꾼들은 이런곳을 두고 빨래판 구간이라고 하제...

안부(09:55)

나무로 만든 계단은 간격이 넓어서 나같은 숏다리는 엄청 불편하다

아무런 생각없이 걷고 또 걷다보니... 

삼각점이 있는 853.2m봉 정상에 도착한다

853.2m봉(10:10)

853.2m봉 정상에는 대간길에서는 볼 수 없는 준.희쌤의 산패를 만난다.

우리나라 脈산행에 있어서 전설적인 레전드이시며, 大家이신  이 분의

흔적을 알현하는 영광을 누린다...의자 2개와 이정표, 4등 삼각점이 있다

853.2m봉 정상 이정표(→ 덕산재 3500m, 대덕산 6500m ← 부항령 1700m, 삼도봉 9100m)

853.2m봉 정상 4등삼각점(△무풍 413 /1980 재설)

생각보다 바람이 차고 춥다...엊그제만 해도 더워서 

힘들었는데, 벌써 가을은 생략하고 겨울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

853.2m봉 정상을 내려서는데 이곳에도 토실토실한 밤이 지천이다.

조금전에 베낭이 무거워서 밤을 안줍겠다고 했던 나 자신과의 약속은

깜박 잊고, 이곳에서도 베낭을 내려놓고 정신없이 밤을 줍는다

고도차 없고, 평평한 안부를 연상케하는 등로는 肺腑가

부실한 범여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등로이다.

아무도 오지않은 호젓한 이 대간길을 홀로 전세내어 걷는 

기분은 참으로 좋다...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

추가열이라는 가수의 “소풍같은 인생”이라는 노랫가락에

맞춰 흥얼거리면서 오늘의 중간 기착지인 덕산재로 향한다

잠시후면 生을 마감할 구절초와도 눈맞춤을 한다

그래...산에 꽃이 없다면 황량한 들판에 발가 벗긴채

내몰린듯한 산행을 하는 그 밋밋함이라고나 할까.

아직까지 꽃을 보면서 길을 걷는다는 자체를 제공해 준

너에게 그저 고맙기만 하는구나.

암봉(10:20)

암봉을 지나자마자 854m봉을 만난다

854m봉(10:22)

854m봉에서의 내리막길 나무 계단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홀로 걷는 산꾼을 위협한다...내가 맨 처음 백두대간을 시작할 즈음에

물먹은 나무 뿌리에 미끄러져서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고생을

했던 트라우마가 있기에 이런 곳에서는 늘 긴장을 하는 편이다

내리막 등로 좌측으로는 리기다소나무 조림지가 보이고,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10:24)

안부에서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

등로 좌측 아랫쪽으로는 부항면 어전리 마을쪽인데

약간의 등로가 열리긴 해도 나뭇가지로 인해 마을은

보이지가 않는구나

무명봉(10:26)

움푹 파인 웅덩이가 있는 무명봉에서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예전에 빨치산의 비트인지...아니면 6.25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흔적같은 저 웅덩이...분명 뭔가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빛바랜 시그널

예전에 진양, 팔공, 호미,한강기맥을 같이했던 친구인데

한강기맥을 끝내고나서는 만나지 못했다...하기사 산꾼이야

산 이외에서 만나는 것도 이상하제...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니 의자 2개와 이정표 넓은 공터가 있는 850m봉이 나온다

850m봉(10:28)

850m봉 이정표(→ 덕산재 2800m, 대덕산 5800m ← 부항령 2400m, 삼도봉 9800m)

내리막 활엽수 사이로 가야할 봉우리들이 보이는데

안개로 인해 사물을 인식하지못할만큼 오리무중이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난 밤을 줏어 담은 物慾으로 지체된

산행 시간을 줄일 수 있는 편안한 내리막길은 독립군의 기분을

맞춰주는 같아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무명봉(10:30)

무명봉을 지나서 또다시 내리막길은 시작되고...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 사이로 빨간 열매를 내민 천남성(天南星)

예전에는 저 열매가 死藥의 원료로 쓰였고, 조선시대에

숙종의 총애를 받아, 치맛자락 휘날리며, 無所不爲

권력을 휘두르다 말년에 숙종이 내린 천남성으로 만든

사약 한사발을 one shot하고 生을 마감한 禧嬪 張氏도

저 열매한테 당했다지...예나 지금이나 모난돌이 정맞는 건

불변의 이치인 모양이다

리기다소나무 조림지 사이로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

편하게 생각없이 내려서다보니 지도상의 선황당재이다

선황당재(710m:10:35)

경북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어전마을에서 전북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부평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옛날에 민초들이 영,호남을 넘나들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부항령 있는 삼도봉 터널이 지나가는 1089지방도를

이용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잊혀진 고개라 되어 버린듯

하다...지명은 예전에 선황당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 모양이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수가 없는 폐헬기장처럼 느껴지는 펑퍼지만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우측의 무주쪽은 무주 반딧불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구역이다.

선황당재 무주쪽의 모습

무주 반딧불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구역으로 부평마을로

내려가는 등로는 사람들이 다니는지 등로는 아주 뚜렸하다

선황당재에서 오르는 길은 직진의 급경사가 아닌

나같은 산꾼들을 위함인지 사면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놨다.

가쁜숨을 몰아 쉬면서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이제사 피기 시작하는 꼬들빼기가 한마디 거든다.

어디 쉬운 산이 있는 것 봤슈...

능선으로 올라서니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이 차갑다.

그러나 초반에 잔뜩 찌푸린 날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밝아지니 비가 올 것지는 않다

810m봉(10:50)

나뭇가지 사이로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어전마을이

육안으로는 보이나,똑닥이 카메라로는 뚜렸이 잡히질 않는다

뫳돼지 쉬키들이 마루금을 난도질 해놨다...이노무 쉬키들...

오늘 산행은 아직까지는 저질 체력인 내 기준으로 봤을때는

편안한 발걸음이다...오랜 산행을 하면서 산 이야기를 하다보면

상대방에서 던지는 질문...‘많은 산을 탔다고 하는데 어느곳이

가장 힘이 들던가요’에 대한 대답은 ‘그때 그때 달라요’

y자 임도갈림길(10:53)

이곳에서부터 좌측의 남쪽 방향은 오늘 산행 시작부터 같이해 온

김천시 부항면과 작별하고 김천시 대덕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지만

북측은 끝까지 무주군 무풍면과 같이할 것이다

잠시후에 넓은 임도가 대간 마루금과 같이 하는데, 예전에 이곳이

탄광지대였다가 지금은 폐광이 된 곳인데 그때 이용했던 길이란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듯이, 토실토실한

알밤을 이곳에서도 꽤많이 수확한다

임도가 끝나는 싯점에서 데크목 시설을 만나고...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왜 이리 편안한 등로에 이런 시설을 해놨는지 이해가 안된다.

거기다가 데크목들은 썩어 문들어져 발이 빠지는 곳도 있으니

무심코 걷다가 다칠수도 있겠다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예전에 광산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꽤나 넓은 평지가 습지처럼 보인다

안부(10:58)

다시 썩어 문드러진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폐광터 전망대(770m:11:00)

폐광터 전망대에서 바라본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蓮花里)의 산그리메

연화리(蓮花里)는 마을의 북쪽과 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덕산천과 감주천이

마을 동쪽에서 합류하며 두 냇물의 양안에 비교적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남면 연화라 불렀으나, 1985년에 남면이 세 개로 나뉘면서

상남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소태를 병합하여 연화리라 하고 김천군 대덕면에

편입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을 지내다 전사한 쌍호(雙湖) 장홍한(張鴻翰)의

처(妻) 연안 이씨가어린 아들 장귀동(張貴東)과 함께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인동 장씨

판관공파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여내실[일명 연화실, 연화] 소태실[일명 소태] 등이 있는데, 소태실은

임진왜란 때 안동 김씨 김응보(金應宝)가 피난 와서 정착한 이래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 시대 왕자의 태(胎)를 마을 굴밧골 뒷산에 안치하고 마을 이름을 태실(胎室), 태를 묻은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였다가 뒤에 왕자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예전의 태실’이라는

뜻에서 소태실(小胎室)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 표기가 바뀌어 소태(小台)가 되었다.

태봉산은 삼각 형태로 우뚝 솟아 한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산임을 직감할 수 있었는데 어떤 사

유로 태실이 이안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예부터 김천(金泉)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는데,‘삼산이수’란

세 개의 산과 두 개의 물이라는 의미이니, 이는 곧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으로, 김천을 대표하는 삼산(三山)은 황악산(1,111m),

금오산(969.0m) , 대덕산(1,290.1m)이며, 이수(二水)는 감천 (甘川) 과 직지천(直指川)

일컫는다 .

 

원래 '삼산이수'란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는데 314년 중국 동진(東晋)이 나라를 세우고

지금의 남경(南京) 지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금릉'이라 이름이 붙였다. 그 뒤 여러 번 나라가

바뀌면서도 금릉은 도읍지로 살아남았으며(?) 그 덕에 많은 유적을 간직할 수 있었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금릉에는 산으로 세 봉우리가 있고 두 줄기로 갈라진 진천(秦川)과 회천(淮川)이 있어

'삼산이수'라 불렀으며. 특히 많은 시인묵객들이 금릉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는데 당나라의

대표적인 문객인 이태백(李太白)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최호(崔顥)의 '등황악루'(登黃鶴樓)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천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금릉(金陵)'인데, 예전 김천 사대부들이 중국에 대한

모화(慕華)사상이 높을 때 중국문학을 대표하는이태백과 최호를 흠모해 지명을 빌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에는 금릉 이외에도 삼산이수. 봉황대, 황학산 등의 지명이 있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특히 김천 선비들은 지역에 있는 자산(紫山:성내동)`황산(凰山:지좌동)`응봉산(鷹峰山:신음동)을

김천의 '삼산'으로, '직지천'과 '감천'을 '이수'로 명했는데, 세월이 흘러 김천의 시세가 확장되면서

'황악산`고성산`금오산을 김천의 '삼산'으로 했다가 최근에는 황악산`금오산에다 대덕산을 넣어

'삼산이수'로 부르고 있다.

무명묘지(11:02)

늦둥이 산괘불주머니...아직 뭔 미련이 남아 있느냐?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편안한 걸음으로 833.0m봉으로 향하는데...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833.0m봉 갈림길(11:10)

쉼터  의자 2개와 이정표(↓ 부항령 2400m, 삼도봉 9800m → 덕산재 2800m, 대덕산 5800m)가

있는 능선 좌측으로 1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삼각점이 있는 족보있는 833.0m봉이 있기에

베낭을 벗어놓고 833.0m봉으로 향한다 

철쭉 군락지인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833.0m봉(11:13)

이곳에서도 반가운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다

833.0m봉 정상 삼각점(△무풍 414/ 2003복구)

833.0m봉에서 다시 되돌아오니 능선이라 그런지 바람이 드세다

산행하면서 벗었던 자켓을 다시 꺼내입고 점심으로 두유와 앙꼬빵 하나

사과로 점심을 해결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벙커처럼 웅덩이가 있는 봉우리를 지난 다음에...

덕산재로 향하는 급경사의 내리막이 시작된다

계속되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거의 다 내려왔는지 등로 아래에서 차량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안부(11:35)

도로가 보이면서 덕산재로 내려서는데...

고개 정상에 있는 표석과 지도를 비롯한 모든 자료에도 “덕산재”라 

해놓고는 국토부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는 “대덕재”라 표기가 되어있어

상당히 헷갈린다

김천시와 무주군이 경쟁적(?)으로 설치한 안내판이 어림잡아 10개도

훨씬 넘게보여, 지나가는 산꾼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무풍 십승지(茂豊十勝地)가 있는 무주군 무풍면은 조선시대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예언집 정감록(鄭鑑錄) 에서 10곳을 지정하여 십승지라 일컬었다

승지(勝地)라는 말은 주변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나 살기 좋은 곳이며

전란(戰亂) , 재해(災害) , 재난(災難)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을 지칭하는데,

대덕산 인근 마을에는 국난이나 천재지변을 피해 온 이들이 많았다.

 

특히 무풍 마을은 조선 명종 때 예언가이자 학자인 격암 남사고(格庵 南師古)가

지목한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이다.

서울의 모 산악회의 버스가 서있는 주차장 뒷쪽에 있는 건물은 맨 처음에는

주유소였던 자리가 산삼연구소로 밭끼었다가 다시 언젠가 이 길을 지날때는

염불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던 절집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폐가가 된 채로

방치되어 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곳인가보다

지도상에는 주차장 옆에 덕산재에 설치한 수준점이 있다고 해서

지도에 표기한 곳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길이없어 포기를 한다

수준점 수색(?)에 실패하고 패잔병의 심정으로 대덕산 들머리로 향한다

덕산재(德山峙:644.2m:11:37~42)

전북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무풍과 대덕을 잇는 30번 국도가 지나가지만 도로는 의외로 한가하다.

 

 삼도봉과 대덕산 사이에 있으며, 덕산재 동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이 덕산리·

연화리를 거쳐 관기리에서 수도산에서 발원한 감천(甘川) 상류로 흘러들고

덕산재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금평천(金坪川)이 무주 남대천을 이룬다.

 

덕산재는 과거부터 김천과 무주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현재도 30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 주치(朱峙)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지례에서

무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에는 주치령(走峙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치령은 옛날에 산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 만약 고개를 넘다가

산적이 나타나면 고개 아랫마을로 빨리 달려와야 살 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한편 덕산재라는 이름은 고개 아래에 있는 덕산 마을에서 유례되었다고 한다

 

주치령 아래에 있는 주치마을은 달리 옴배미마을이라고 하는데

마을이 대덕산(大德山:1,290.9m), 주치령, 국사봉(國士峰)에 둘러싸여

유난히 포근한 곳이므로 ‘따뜻할 온(溫)’와 일정한 면적의 땅을 뜻하는

사투리인 ‘배미’를 합하여 온배미라 한 것이 변한 이름이다.

덕산재 안내판

 

덕산재 이곳 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대덕산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으로 향한다

최신 이정표에는 3,000m라고 표기됐고, 옛날 이정표에는 3.5km란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어차피 시간과 땀을 흘려야만

대덕산 정상에 도착할 터인데...

대덕산으로 향하는 들머리에 걸려있는 대간꾼들의 시그널들은

마치 예전에 티벳과 부탄에 불교성지순례 갔을 때 만난

다르초(오색 번)를 연상케하는 신비로움을 느낀다

이곳에서 대덕산까지 오르막 구간은 고도를 600m정도 치고 올라가기에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흔히 감기가 걸리면, 어느 정도 앓고 난 다음에야

낫듯이 산행도 시간과 땀을 흘러야하는 수고로움이 겪어야만이 정상이란

과실을 맛볼 수 있겠지...빡세게 한달음을 치고 오르니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11:54)

대덕산을 오르기 위한 warming-up인가

잠깐동안의 편안한 길을 걷다보니 암봉을 만나는데 

이곳이  국토정보지리원에 등록된 족보있는 723.1m봉이다

723.1m봉(11:56)

723.1m봉 아래로 내려서니...

암릉이 있는 구간에는 편하게 걸어라고 데목 다리를 만들어 놨다

암릉 구간을 통과하고...

송이가 나올법한 소나무 군락지를 통과한다

안부처럼 보이는 평지를 통과한 다음에 오르막에 올라서니

망자의 천년주택(무명묘지) 한 기가 산꾼을 맞이한다

무명묘지(12:04)

많은 낙엽송 사이에 유난히 사스레 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추운곳에서 자라는 나무라 한대(寒帶) 수종(樹種)으로 꼽히는 사스레 나무의

중국 이름은 악화(岳樺)로 ‘높은 산 자작나무’란 뜻이니 사스래나무의 생태

특성이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

 

사스래나무의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은 껍질인데, 대부분의 나무가 칙칙하고

어두운 껍질을 가지는데 비해 사스래나무 껍질은 하얗고,사촌격인 자작나무나

거제수나무와 비슷하지만 사스래나무는 푸른빛이 살짝 들어간 흰색이 더 선명해 보인다.

 

얇은 종이처럼 벗겨지고 기름기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산사람들의 불쏘시개로

이만한 것이 없는데, 산을 생활터전으로 삼는 심마니나 약초를 캐는 사람들은

사스래나무 껍질로 불을 일군다고 한다.

안부(12:07)

좌측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이름처럼 두리뭉실하게 德스럽게 보이는 대덕산이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9월도 지나고 10월도 초순이 지나가건만 아직도 구절초

너를 볼 수 있다니, 이또한 즐겁지 아니한 가...

안부(12:16)

밋밋한 육산에서 만나는 앙증맞은 암릉...참으로 귀엽구나

공룡알 바위(?)...범여의 생각 中에서

이곳을 지나면서 대덕산으로 오르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빡센 오르막길을 살짝 사면길로 돌려놔서

이런 곳 산행때는 범여에겐 아주 고통스런 곳인데 이렇게

해주니 고맙구먼...

무명봉(12:25)

무명봉을 힘들게 올라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너덜겅이 시작되고...

좌측의 완만한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힘든 길을 걷는데 꼬들빼기와...

투구꽃의 응원을 받으면서 걷다보니 얼음폭포 갈림길이 나온다

얼음폭포 갈림길(12:29)

얼음폭포(980m:12:30)

대덕산 동북 사면에 위치한 이 골짜기 지명이 얼음골이라서

붙혀진 지명인 모양이나 대덕산의 자료에는 ‘방아골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은 낙동강의 발원지가 된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정확한 기록은 대덕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감천(甘川)을

지나 낙동강에 入水하는 덕산천(德山川)이라 표기해야 맞는데

왠 쌩뚱맞은 낙동강 발원지라니...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다시 오르막으로 향한다

은근히 빡센 오르막길이라 그런지 점점 발걸음이 느려진다

덕산재에서 이곳까지의 오르막길은 워밍업이라 생각하고 이곳부터

본격적인 대덕산을 향한 된비알이 시작되는데, 예전같으면 입에

게거품을 내듯이 힘이 들었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그리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올라서는 느낌이라 맘이 훨씬 편하다.

돌길로 올라서는데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대덕산은 멀기만 하다

알 수 없는 나무 이정목을 보며, 천천히 대덕산을 향한 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아무런 생각없이 라디오에는

흘러나오는 음악의 노래가사를 따라서 흥얼거리는 이 길

언제 내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이렇게

홀로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행복이다

앞만 보면서 묵묵히 수행자의 심정으로 걷다보니

산죽밭에 묻혀 있는듯한 얼음골약수터가 나타난다

약수터 기능을 잃어버린듯한 얼음골 약수터

탄산과 유황성분의 맛이 비치고 이가 시릴 정도의 물맛은 어느 약수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 신비의 약수터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명성에 비해 자꾸만 초라해지는 느낌이, 마치 범여의

변해가는 모습과도 같은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측은지심이 든다

얼음골 약수터(13:18)

올해는 비가 많이 왔는데도 예전에 비해서 水量도 보잘것 없고, 

바가지도 안 보이니, 산꾼들은 이곳의 약수를 잘 이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얼음골 약수터에서 목을 추기는 길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 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대덕산 얼음골 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대덕산을 향해 고도를 높일수록 山竹들은 기고만장하다

대덕산의 언저리도 이제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나보다

그래 지구는 돌고도는 自轉을 하고, 세월도 봄.여름.가을.겨울로

바뀌는게 이치라...다들 그것에 충실하면서 군말없이 잘 따르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 중에는 逆行하며서 살아가는 자가 있어

가끔은 문제를 일으키고 사달이 나는 경우도 있제...

덕산재에서 2.5km를 왔다는 얘기인데 아직도 대덕산은 멀기만 하다

덕산재에서 시작된 급경사의 힘든 구간은 어느 정도

끝난듯 하나 아직도 대덕산은 조금 더 가야한다

안부(13:40)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간길을 지키고 있는 저 나무는

늘 대간 산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면서 변치않고 있구나

그러기에 나같은 저질 체력으로도 대간길을 한번 더 걸어보려고

희망을 가지고 오늘 여기왔고, 너를 보면서 이 길을 지나간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뾰족한 바위가 보이고...

陸山에서 만나는 암릉지대...조금은 이채롭게 보인다

참새바위?

무명봉(13:45)

이 무명봉 아래가 조금전에 본 암릉구간이다

안부(13:46)

오전까지 극성을 부리던 박무는 오후가 들면서 많이 걷힌

느낌이지만, 아직까지 완전체는 아닌 듯하다...덕산재에서

대덕산을 향한 빡센 된비알은 끝이 났는지 완만한 오르막으로

대덕산을 향한 범여의 발걸음은 가볍다

암봉(13:47)

암봉을 좌측으로 돌아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부스럭하는

소리에 놀라서 앞을보니 대간꾼인듯한 산객 2명이 내려오면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선두조인 모양인데 남자 한명과 동행한

금발 미인인 외국인 여성이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오르막을 올라서니 조망이 멋진...

 조망바위가 풀섶에 숨어있다

조망바위(1,271m:13:50)

잠시후에 가야할 대덕산이 코 앞에 나타난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김천시 대덕면(大德面)의  산그리메

김천시의 남쪽에 있는 대덕면은 동쪽으로 증산면, 서쪽으로 전라북도 무주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북쪽으로 자례면·부항면과 이웃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수도산·우두령 등 높은 산과 고개가 많다.

3번 국도와 30번 국도가 면 중앙부에서 교차하며, 포도 농사가 성한 지역이다

대덕면은 조선시대 지례현 남면(南面)이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상남(上南)·

하남(下南)·외남(外南)의 3개 면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에 3개 면을 다시 합쳐

김천군 대덕면을 만들었다... 1949년 금릉군 대덕면이 되었고, 1995년에 김천시

대덕면이 되었으며, 연화리·덕산리 등 12개 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 소재지는 관기리이다.

대덕면의 전신인 남면은 『여지도서』를 비롯한 조선 후기 지리지와 지도에 기록되어 있으며,

상남면·하남면·외남면은 『조선지지자료』에 기재되어 있고,  대덕면의 이름은 면의 서쪽에

있는 높은 산인 대덕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망바위에 내려와서 대덕산으로 향한다

안부(13:53)

덕산재를 지난지 6km 되는 지점이다

대덕산으로 가는 산죽길 좌측으로 바라보니...

덕유산 주릉이 흐릿하기만 하다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있는 대덕산 정상으로 올라선다

대덕산(大德山:1,290.7m:14:00)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주능선상에 솟아 있는 후덕한 산으로 또다른 지명으로 투구봉이라고도 부른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의 등 끝부분에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으며 북쪽으로 삼도봉, 동쪽으로 수도산,

서쪽으로 덕유산, 남쪽으로 삼봉산이 자리 잡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지례)에는 “현의 남쪽 40리에 있으며, 전라도 무주현 임내인

무풍현의 경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에 속한 산’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대덕산 주변에 운장포호두(雲莊包虎頭; 구름에 호랑이 머리가 감춰져 있다)라는

명당이 있어 근처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고, 이 부근에 살려고 오는 사람들은

모두 큰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됐다고 하는데, 이 모두가 대덕산 지기(地氣)의 힘을 입어

그렇다고 하여 대덕산(大德山)이라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산의 모양새가 좋으면 그 주변에 흉한 일이나 재난이 일어나지 않아,

격암 남사고가 예언하길 산형길자무흉재(山形吉者 無凶災)라고 했으니 대덕산이야말로

산의 모양새가 잘 생겨서 주변에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다.

 

특히 대덕산 서쪽의 무풍은 대덕산을 배경으로 하고, 금강 상류를 앞에 품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吉地)여서 예로부터 충청도 괴산군의 연풍(延豊),

경상도 영주의 풍기(豊基)와 더불어 살기 좋은 三豊 가운데 하나라고 하던  곳이어서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는데,

 

이 또한 대덕산과 무관하지 않으니

덕(德)이 많은 산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그리하여 대덕산은 부드러운 육산이지마는

규모가 커서 마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인심이 너그러운 종가댁을 연상케 하는 산이다.

 

부드러운 육산이면서 우직한 남성다운 산으로 옛부터 수많은 인걸을 배출했고

남사고(南師古)는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로 하나로 꼽힌 곳이기도 한

산으로 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때 전라 병사 이광악(李光岳)이 왜적을 물리쳤고

영조 4년(1728) 이인좌 난 때는 이 고장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쳤던 명산이다.

 

또 영.호남지역의 분수령으로 금강의 지류인 무풍천과 낙동강 지류인 감천(甘川)이

각각 동.서 사면에서 발원하며,  동쪽 얼음골약수와 얼음폭포에서 발원한 물은 덕산리

방아골로 흘러내려 덕산천을 거쳐 김천 이수 중 한 곳인 감천 상류를 형성하고 직지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며, 서쪽은 덕유산, 남동쪽은 가야산국립공원이 있다.

 

* 산형길자무흉재(山形吉者 無凶災)란 예로부터 '산의 모양새가 좋으면 흉한 일이나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란 뜻이다

대덕산 표시석 뒷면

디지털 김천문화대전에는 대덕산 명칭 유래가 다음과 같은 유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한 도인이 옛날 이 산에서 100일 기도 후 공덕을 쌓아 도가 통했다고 하여

대덕산이라 부른다'라고 한다... 현지에서는 산기슭의 마을에서 큰 인물과

부자가 나와, 산으로부터 '큰(大) 덕(德)'을 입은 결과라 하여 대덕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과거에는 다락산(多樂山), 다악산(多惡山), 투구봉 등으로 불렸는데 다락은 높다는

의미이며, 투구는 산의 생김새가 장수들이 전장에서 쓰는 투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산정(山頂)에는 기우단이 있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니

예로부터 지역의 영산(靈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인증샷

*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조선시대 『남사고비결』, 『남격암십승지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도사(道士)로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 역학(易學)·참위(讖緯)·

  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祕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으며,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한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남사고가 직접 저술한 것인지 아니면 위탁되어 후대에 쓰인 것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고,  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 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편저에 『선택기요(選擇紀要)』가 있다.

대덕산 정상 2등 삼각점(무풍22 / 1988재설)

대덕산 정상 이정표(→소사동 5.2km, ← 덕산재 3.5km)

 

"태산(泰山)은 한 줌 흙을 마다하지 않았고 황하(黃河)는 한 방울의 물방울도

다 받아들였기에 대하(大河)를 이루었다"며 "산은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찾지 않는 사람에게도 언제나 마음을 열어 주며(往者不追 來者不拒), ...

삼라만상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넉넉하게 안아주지만 다만

인간이 산의 호불호(好不好)를 논한다"는 말을 들려준다. 

내가 지금 서있는 대덕산이 이처럼 넉넉한 산이 아닐까.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다.

아직도 소사고개까지 5.2km나 남았다니...헐...갑자기 맘이 급해진다

밍기저거릴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 베낭을 둘러메고, 다시 길을 떠난다

억새밭을 통과하는데 길은 보이지 않고 기럭지가 짧은 범여의

몸뚱아리는 억새밭에 묻혀, 그냥 감각적으로 걸어가는데 북진하는

대간팀들 서너명씩 무리를 지나가는데 자주 만난다...아마도 조금전

덕산재에 서있는 버스...좋은 사람들 산악회 팀인듯 싶다

헬기장(14:05)

억새밭 너머로는 가야할 1,256.2m봉(우측)과 초점산(좌측)이 나를 기다린다

억새밭을 빠져 나오니 군락을 이룬 산죽들이 범여를 반긴다

쉼터(14:08)

산죽이 끝나고 다시 억새밭으로 올라선다

1,256.2m봉(14:12)

산죽밭을 지나 억새밭으로 빠져 나오니 갑자기 視野가 트이면서

거창의 산그리메가 한 눈에 펼쳐지는데, 아쉽다면 옅은 박무가

태클을 걸어대니 모든 산들이 흐릿하게 보이는게 단점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거창의 명산들

거창에는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 국립공원들이 인근에 있는 탓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난히  명산들이 많으며, 군내(郡內)에 1,000m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高峰들이 13개나 된다고 한다.

 

우선 일본 개국신화와 관련된 산이며 속세를 떠나 "별유천지비인간"이라 할 만큼 

경치가 빼어나 별유산이라고 부르는 우두산이 있고, 금원산, 기백산, 현성산, 월성산,

의상봉, 월여산, 비계산, 대봉산, 금귀봉, 감악산, 양각산, 흰데미산, 보해산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명산을 보유하고 있는 山勢 탓인지 많이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는

고장이며, 지금도 거창에는 많은 명문고들이 있어 고육의 도시로 잘 알려진 곳이다

공터(14:17)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북진을 하는 좋은사람들 산악회 대간꾼들을

수시로 조우하며 인사를 나무면서 헤어진다

구절초 / 김복희

 

깊은 산속에서

구월 구일 날

구절초를 캐었다.

 

거친 세상살이 같은

쓰디쓴 인생의 맛을

구절초에서 배웠다.

 

고난 뒤에 오는 정은

냉한 속을 다스리는 마음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하늘이 더 맑아 보이도록

초점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산죽길

안부를 지나니...

 잠시후에 오를 초점산이 한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억새밭에서 만난 귀한 손님...이게 누구십니까.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은 억새밭에 숨어있는 자주쓴풀꽃...

남녘지방에서는 만나기 그리 쉽지않은 꽃이라서 더 반가운 느낌이다.

 

자주쓴풀(꽃말:덧없는 사랑)

자주쓴풀은 모양이 쓴풀과 비슷하나 줄기에 검은 자주색이 돌며, 꽃이 자주색이라서

‘자주’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쓴풀은 흰색 꽃이 피며, 키도 자주쓴풀이 15~30㎝로

쓴풀의 키 5~20㎝에 비해 약간 크며, 줄기를 자르면 흰 유액이 나오는데, 맛이 쓰다고

하여 쓴풀이라고 하는데 용담보다도 쓴맛이 10배나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담과에 속하며 털쓴풀이라고도 하고 자지쓴풀, 쓴풀, 어담초, 장아채, 수황연이라고도

하며, 가을에 채취하여 말린 잎과 줄기를 당약(當藥)이라고 하며 건위제와 지사제 등

약재로 이용하며,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헤이룽강(黑龍江) 등지에 분포한다.

내 키보다도 더 억새밭 사이로 상큼한 바람이 스친다.

나는 힘들게 찾은 자유와 신선한 이 땅을 둘러싼 공기를 사랑한다.

그렇다. 쉽게 이룬 자유와 행복과 멋은 금새 내 곁을 떠날 것이다.

편안한 길은 싫다...어차피 인간은 다 똑 같은 삶을 살아 갈 수는 없겠지.

어울려 살아가자는 사람들의 좋은 의도도,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튀는

남들의 행동에는 모난 징으로 응징하며 시기하지만 ,행여나

자기들의 머리위를 걸어감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갑자기 억새밭에서 불쑥 나타나는 북진하는 대간꾼들...

그래도 외로이 홀로걷는 대간꾼 범여에게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부디 무탈하게 목적지까지 잘 가시기를 바랍니다

삼봉산 아래로 펼쳐지는 밭 사이로 내가 오늘 가야할 소사고개가 보인다

억새밭을 내려서면서 또다시 펼쳐지는 산죽밭

간간히 만나는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왜 이리도 반가운지...난 아직 시그널을 만들어서 걸어보지 못했다.

산을 걷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 다르겠지만, 내 持論은 산에 갔다

올 때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늘 남의 것에 신세를 진다

안부(14:35)

예전에는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길이 아예 보이질 않는다

초점산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는 관리가 안된 대덕산농장 그물망이 보인다

요즘 산에서 부쩍 자주 만나는 산부추(꽃말:신선)

백합과에 속하는 식물로 전국의 산과 숲속 등에 서식하며,크기는 약 60cm이다.

꽃은 한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붉은색으로 피며. 식재료로 사용할 때에는

줄기와 어린순을 쓰는 것이 보편적이며, 효능으로는 이뇨작용의 촉진 등이 있다

너럭길에 올라서서 숨한번 크게 쉬고 있는데

북진하는 대간팀의 꼴찌로 가고있는 남.녀 산꾼을 만난다.

선두와는 거의 2시간은 차이가 나는듯 한데, 저러다가

동료 산꾼들을에 밉상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쩌면 나를 보는것 같아 惻隱之心마저 든다.

산수국 니는 지금 정신줄 놓고 사니?...

8월에 피는 넘이 지금피면 어떡하냐...곧 추위가 올터인데

걱정이구나

급경사의 오르막은 시작되고...

조망바위(14:45)

이 바위위에 올라서면 지나온 대덕산이 잘 보이는 곳이지만

소위 말해서 귀차니즘이랄까...귀찮아서 그냥 초점산으로 향한다

한달음 치고 올라서니...

우측으로 삼봉산이 보이면서...

삼도봉이라고도 불리는 초점산 정상에 도착한다

초점산 정상에 어지럽게 걸려있는 대간꾼들의 흔적

김천시에서는 초점산을 대덕산에 속한 부속 산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초점산(草岾山:1249.1m:14:50)

경북 김천시 대덕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3개도에 걸쳐있는

산봉우리로 '풀이 많은 고개'란 뜻이며, 정상에는 거창군에서 세운 멋진 정상석과 이정표

데덕산 등산안내 지도 표시목과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잘 걸려있는데 또다른 지명으로는

3개도가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라 '삼도봉'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 봉우리다.

 

정상석 뒷면에는 뒷면은 거창 극북점 E127 53 20 N35 54 40이라 적혀있다.

이 산은 거창의 최북단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서 남쪽으로 4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황강(신산경표상:수도)지맥이 분기해 남쪽 가야산까지 이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산꾼들 사이에는 초점산보다는 삼도봉으로 더 알려진 곳이었으나,

창군에서 정상에다  초점산이란 표시석을 세우는 바람에 점차 초점산으로 이름을

되찾아가는 분위기며, 예전에 있었던 삼도봉이라라는 표지석은 지금 없어졌다

대덕산 삼도봉이라고도 불리는 초점산(草岾山)은 온 산이 초지뿐인

민둥산이란 뜻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대간 산꾼들 빼고는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탓인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이름이 무색하지만 

남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는 바람에, 바로 앞에는 황강(신산경표상:수도)지맥

능선에 있는 국사봉(875.1m)과 수도산, 동남쪽으로는 법보종찰 해인사를

품고있는 가야산, 남쪽으로는 지리산 능선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서남쪽으로는 지난 8월의 무더위에 걸었던 삼봉산의 능선과 망덕산(872.8m)과

그 뒷쪽으로는 덕유산 향적봉을 뎃빵으로 한 덕유산의 주릉이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정감록에 등장하는 무풍 십승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초점산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伽倻山:1,432.6m) 의 모습

가야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법보종찰 해인사(海印寺)일 것이다

그리고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고, 조계종 종정(宗正: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을

2번이나 지내셨던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1912~1993)이 계셨던 절집이 아니던가.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선어(禪語)를 던지며 단박에 깨달으라고 일갈했던 큰 스님...큰스님께서 계셨더라면

요즘 혼탁해진 작금의 世俗 중생들에게 어떤 죽비(竹篦)를 내려쳤을까...큰 스님이 그립다

 

해인사를 품고있는 가야산을 바라보며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생전에 스님을 찾아오시는 그 누구에게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삼천배를 시키는걸로 유명하셨고, 돈많고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한없이 엄격했고, 힘없고 가난한 자에게는 봄날같은 따스함으로 보듬어셨던

큰 스님...생전에 조계사에서 있은 법회때 딱 한번 뵙었지만 지금도 큰스님에 대한

그 기억은 아직도 뚜렸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야산은 선사시대 이래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처로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 이유로 가야산은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쉬는 명산이자 영산()이라 일컫을 만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에 기록된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설산()·상왕산()·중향산(

기달산() 등 여섯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환이 저술한《택리지(擇里志) 》에 기록된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 : ··)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의 주장은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것인데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인데, 이와 관련하여 주봉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 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억새 뒷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이정표에 표기된 수리봉이다

초점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수리봉을 거쳐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인데, 덕산리는 온배미라고 부르는 마을로

호두가 유명해서 산천생태마을로 김천시에서 지정한 마을이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진부령으로 향하는 남한의 백두대간에는 '삼도봉'이

3개나 있는데 첫번째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있는 날라리봉(1,501.0m)으로

지리산 서부 능선에 위치하며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 전북을 구분 짓는데

이 삼도봉의 원래 이름은 낫의 날을 닮아 낫날봉. 발음이 쉽지 않아 날라리봉으로

불리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삼도봉으로 명명된 봉우리고, 두번째는

지금 이곳인 대덕산 삼도봉(초점산 1,249.1m)으로 경북 김천과, 전북 무주,

경남 거창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고, 세번째는 민주지산 동남쪽에 위치하며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조선팔도의

개념으로 보면, 충청, 전라, 경상의 꼭짓점이니 오리지널 삼도봉인 셈인데

원래의 지명은 화전봉(1,177.7m)이었다고 한다 

초점산에 잠깐 머무는데 오후가 되면서 불기 시작한 바람이

차가워 서둘러 소사고개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초점산을 내려서면서 동쪽 능선은 부항령부터 같이해 온

경북 김천시와 작별을 하고 행정구역은 경남 거창군 고제면으로 바뀐다. 

이곳은 일반 등산객들이 자주 오지않는 곳이라 그런지 등로는 약간 거친 편이다

계속되는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황강(수도)지맥 분기점이 나온다

황강(수도)지맥 분기점(15:00)

이정표(↑국사봉 7.2km, ↓소사 2.8 km, ↖ 초점산(삼도봉) 0.4km)가 있는 분기점,

예전에 있었던 준.희 쌤의 산패 “수도지맥 분기점”이란 팻말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국사봉으로 향하는 지맥꾼들의 시그널만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이 황강지맥의 합수점인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는 범여의 고향과 아주 가까운 곳이다

지맥치고는 거리도 상당히 길고(105.8km), 거쳐가는 명산들이 많아서 그런지

지맥꾼들에게 상당히 인기(?)있는 지맥으로 나 역시 2012년 12월 16일에

걸었으니 어언 12여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그때가 범여에겐 봄날이었는데,

이제는 몸뚱아리도 말을 안듣고, 발걸음도 느려지니, 가는 세월앞에 장사가 없구나

황강(수도)지맥의 개념과 지도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군과 경북 김천군과 경남 거창군 등 삼도가 만나는 대덕산(大德山:1,290.7m)

남쪽의 삼도봉(일명 초점산.1,249.1m)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가는 황강지맥은 도상거리 105.8km로 행정구역은 경북 김천시, 성주군,

고령군과 경남 거창군, 합천군을 지난다.

 

경상남,북 도계를 따라 봉산(902m), 수도산(1,317m), 단지봉(1,326.7m), 좌일곡령(1,257.6m)을 지나

가야산을 목전에 두고 두리봉(1,133m)에서 도계를 벗어나 남쪽으로 거창군과 합천군경계를 따라 

남산(1,113m), 마령(1,006.5m), 우두산(의상봉.1,046.2m), 비계산(1,130m), 88고속도로,

두무산(1,038.4m),오도산(1,120m)등 1,000m이상의 장쾌한 능선이 60여km 이어진 다음에

오도산에서 거창군과는 작별을하고 온전한 합천땅으로 들어서며 고도를 낮춰 토곡산(644m)를

지난 다음, 다시 경상남,북도계를 만나 고령군과 합천군계를 따라 만대산(688m), 시리봉(408m)을

지나 솜등산(271m)에 올라선 도계능선과는 작별을 하고 마지막 여력으로 필봉(330m), 부수봉(317m),

성산(205.7m)을 내려서며 맥을 다한다.

  

 황강(수도)지맥 동북쪽으로 흐르는 감천(甘川)은 길이 69km, 유역면적 10만 ㎢로 수도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의 지명을 낳게 하고 김천시 일대를 지나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지맥의 동쪽내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회천(會川)은 길이 78km, 유역면적 78000㎢로

수도산 동쪽기슭에서 발원하여 대가천(大伽川)을 이루어 성주호에 들었다가

다시 동으로 흘러 고령읍에서 소가천(小伽川), 안림천(安林川과 합류하고

고령군 덕곡면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수도지맥 서쪽으로 흐르는 황강(黃江)은 길이 111km,유역면적 13만 ㎢로

남덕유산(1507m)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합천호(陜川湖)에

들었다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들며 맥을 다한다.

황강(신산경표상:수도)지맥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소사고개를 향해  우측으로 향한다

공터(15:03)

공터에서 서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고제면의 넉넉한 논,밭이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그 뒷쪽으로는 남덕유에서 시작하여 북덕유로 이어지는

덕유 능선의 고산준령 스카이 라인은 흐릿하기만 하다

삼봉산 아래로 펼쳐지는 거창군의 산그리메

거창에는 금원산, 기백산, 단지봉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10개

이상이나 되며,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 사이로 냇물이 흐르는데 조선 중기

석루 이경전(李慶全) 선생은 거창을 보고 “푸른 산봉우리들 사방에 모였는데,

한 가닥 냇물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흐르도다”라고 했다.

 

지금이야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있어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이전에는 덕유산과 가야산에서 뻗은 산들을 넘어야만  거창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거창에선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양의 중앙관리가 거창으로 발령 받으면 교통이 불편해 ‘내가 이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고 울었다가 막상 임기가 끝나  거창을 떠날 때는 물자가 풍부하고 산수 경치가 좋아 떠나기

싫어 또 울었다는 것이다.

거창은 예부터 거열(居列), 거타(居陀), 한들, 거창(居昌), 아림(娥林), 제창(濟唱) 등으로

불렀는데, 이것을 종합하면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거창분지가 내륙산악지대에서 보기 드문 평야이므로 생긴 이름으로, 지금도 거창평야의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고 있는데 한들은 한밭(大田), 한길(大路)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라는

뜻이다...이 땅에서는 사과, 딸기, 포도, 쌀, 수박, 버섯, 오미자, 밤, 양파, 배추, 무 등이 특산물로

생산되며,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고 했다.

소사마을 향하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빨간 열매가 잔뜩 달려있는 나무를 만나는데 뭔 나무인지 모르겠다

알바를 하지않고 잘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기사 대간길을 4번이나 걷고 있는데 알바를

하면 안되제...짠밥이 얼마인데...

예전에 없었던 통나무 계단도 만난다

쉼터(15:22)

산이 마을로 내려선다...중생들의 삶이 궁금했던 탓일까

사람이 산을 그리워하듯 산도 사람이 그리운 모양이다.

철지난 배초향...급한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다보니

사진이 심하게 흔들린 것이 마치 아웃포커싱 방법으로 찍은듯 하다

무풍 십승지 지도

소사고개가는길에서 바라본 삼봉산과 우측에 십승지 중의 하나인 무주군 무풍면 모습

 

전북 무주군 무풍면(茂豊面)은 무릉도원십승지지(茂陵挑原十勝之地)중의 하나로 조선후기에

참위설(讒緯說)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신봉하던 술가(術家)들이 복지(卜地)로

선망하던 곳인데  임진왜란때는 난리를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 온 곳이도 하다.

 

천재로 인해 변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으로의 열군데인 십승지는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영주의 춘양면, 보은, 상주의 속리산아래 우복동

남원 운봉의 두류산, 예천의 금당동, 공주의 유구와 마곡, 영월의 정동상류

무주의 무풍면, 부안의 변산과 성주의 만수동을 일컫는다.

 

북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구천동은 오지의 대명사라 세상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구천동에서 왔느냐고 할 정도로 속세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왔지만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에서 가장 오지인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을 십승지로

꼽았는데 이는 무풍이 단순히 피란지로서 십승지가 아니라 예로부터 삼풍에서

인재를 구하라고 했듯이, 연풍, 현풍과 함께 삼풍에 속하기 때문이다.

초점산부터 시작된 급경사의 내리막은 다 내려온 듯 하다

소사마을을 바라보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산을 내려서니 소사마을을 진입하는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이정표( ←초점산 1.8km, →삼봉산 4.6km)가 보인다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 다음에 좌측으로 향한다

소사마을 진입로(15:35)

시멘트 도로 끄트머리에서 도로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선다

오르막을 올라서니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보이고 출입금지

로프가 길을 막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걸어간다

이 지역의 대간길은 지금 과수원으로 변하는 중인데

아직까지 대간길은 살아 있으나, 사유지라 언제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묘지(15:38)

조금전에 길을 걸어면서 우려했던게 현실로 바뀌고 있다.

대간 마루금이 사과밭으로 변하고 있는데, 수확기에는

산꾼들과 농장 쥔장과의 마찰이 있거나 우회를 해야할 듯 싶다

농장 끄트머리에서 살아있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앞에 보이는 삼봉산이 안타까운 듯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남은 내 인생도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꽃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를 다시 만난다

이정표( ←초점산 2.4km, →삼봉산 4.2km)가  나오고,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소사고개로 향한다

앞에 보이는 삼봉산을 보면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파란색 물탱크가 보이는 지점 10여m앞에서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무심코 도로를 따라가면 대형 알바를 하기 딱 좋은 곳이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쓰면 크게 염려를 안해도 되는데 좌측의 밭으로

내려서니 나뭇가지에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 4개가 걸려있다

밭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대간길 마루금

대간길 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는 民家

쥔장은 출타중인지 안보이고, 개쉬끼 서너마리가 지랄발광을 한다

이 민가가 육시동 가족농장인가 보다...

민가를 빠져나와서 도로를 따라서 소사고개로 향한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반원형으로 휘어지는 도로에 이정표(←황강천 발원지(1.53km)↗지경마을)외 2개 서 있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지경마을로 향하고, 마루금은 소사고개 방향으로 향한다

 

지경((地境)마을은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 속해 있는 마을로 전북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부흥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전북과 경남의 道界에 걸쳐있는 마을로

거창군의 최북단에 있는 지경 마을은 서쪽 산지의 골짜기 쪽에 있으며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고, 현재는 영호남의 경계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경상도 땅 안에 있으므로 "지경내"라고 하며 장포 (長浦)라고도 썼다.

 옛 기록에는 이곳이 생초령(省草嶺) 이라는 지명으로 되어있는 자료도 보인다

 

우측으로 올라가면 초점산으로 올라가는 대간길로 이어지는 농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황강(黃江)발원지 가는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황강은 거창군 고제면 삼도봉(초점산) 남사면에서 발원하여 합천군을 중심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거창읍을 거쳐,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거창 위천과 합류하여

합천호를 이룬후, 합천읍을 지나 합천군 청덕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황강 지명은 '黃'의 의미가 크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설이 있으며, 옛 삼가현

(합천군 삼가면 일대)의 황산(黃山)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 초계에서는 황둔진 또는 황둔강이라고도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에 "남강이 동쪽으로 흘러 초계군 경계에 들어가서 황둔진이 된다."라는 관련 기록이 있다.

 

합천에서는 예전에 남강-앞강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서쪽에서 흘러온 황강이 고을

남쪽을 휘돌아 흐른다는 것에서 지명이 비롯되었으며, 황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는 감물창진이라 하였고 문헌상 '영호수'라는 이름도 보인다.

황강 일대는 고대에 가야와 신라 사이의 국경지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때 황산강 상류에서 황룡(黃龍)이 물속에 나타났으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합천 고을 동쪽 13리에 견천(犬遷) 또는 개비리

(개벼리)라는 황강변의 벼랑이 있는데 위는 절벽이고 아래는 깊은 못으로서 꼬불꼬불한

잔도(棧道)였다고 하며, 이곳에 길이 생긴 것은 합천과 초계 고을에 사는 암수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만나기 위하여 다니다가 벼랑에 길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정표( ←초점산(삼도봉) 2.4km, ↑소사 0.8km)가 서 있는

좌측 절개지쪽의 사과밭으로 향한다

사과밭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고...

사과밭 가장 자리를 따라간다

사과밭 끄트머리에서 우측으로 빙 돌아선 간 다음에...

뚜렸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잡풀이 무성한 곳에서 좌측으로 향하니...

또다른 사과밭이 나오고...

과수원 뒷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나름대로 등로는 뚜렸하다

죽산전씨 가족 묘(16:02)

죽산전씨 가족 묘 뒷쪽으로 올라간 다음에...

숲속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빠져 나오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6:04)

안부를 지나니 또 다른 죽산전씨 가족묘를 만난다

묘지를 지나니 소사고개가 가까워졌는지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오늘 산행의 大尾를 장식하는 대간꾼들의 흔적

대간길을 이어주는 생태통로는 막혀있고...

우측으로 내려서니 소사마을 표시석이 있는 소사고개로 내려간다

소사고개(少:690m:16:10)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 소사동에 있는 고개로 1089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예전엔 없었던 생태통로가 새로 생겨서 도로로 끊어졌던 대간길은 이어졌지만

정작 대간꾼들은 통과할 수 없게 막아놔 버려 도로로 내려와서 우회를 해야한다.

 

옛 지명은 도마재(都麻峙), 도마현(都麻峴)으로 불렸으며, 또 다른 기록으로는

호랑이에 죽은 귀신(창귀:倀鬼)에 제사를 올리는 호식총(虎食塚)이 있어, '산맥이'

불리우는 산제의 한 형태로 행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대간 산꾼들에게는

소사고개로 알려져 있다.

 

소사고개는 소사마을에서 유래되었으며, 고갯마루가 항상 바람에 씻기어 모래가

희고 깨끗하다고 해서 “소사”라 불렀다고 하며, 충청도를 아우러는 삼남대로에서

소사고개는 문헌이나 지도에서 중요한 고개로 등장하였지만, 현재는 도로가

시설되고, 옛길은 사라져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소사고개가 전북과 경남의 경계가 아니지만, 과거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던 이루던 지역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기도 한 곳이다

소사고개 안내판

현재는 마을 이름을 따서 소사 고개로 부르지만

원래의 이름은 경계선 이라는 의미의 '지경령(地境嶺)'이다.

소사마을 표시석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 있는 소사마을은 집집마다 마루바닥에 가는(細) 모래가

깔리는데 일년내내 미풍이 불어 쌓여있는 모래가 모두 날아가 기쁜 마음으로

소사현(笑沙縣)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사마을에 있는 수퍼이름이 왜 하필이면 탑선이란 지명일까?

아마도 이 집 쥔장이 탑선마을 출신인가 보다..탑선마을은

생태통로 우측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 있는 탑선(塔仙)마을은 옛날 죽산전씨(竹山全氏)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마을앞에 높이 1m의 2층 석탑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동쪽 원탑선을 “탑서이˝라 하고, 서쪽에 소사, 북쪽에 지경이

있는데 이 세 마을을 통털어서 “탑서이˝라 부르며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

있는 해발 700여m에 고냉지대 마을이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7시간동안 편하게 걸은 다음에 아침에 이용했던 택시를

호출하여 무주터미널로 향한다...17시 45분에 서울 남부터미널로 향하는

버스표가 있을지 모르겠다

무주공용버스터미널(16:50)

무주발 → 서울 남부행 버스표

여기를 올 때마다 서울가는 버스표가 매진되어 대전으로 간 다음에 서울로

가는 바람에 귀경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내일이 한글날 연휴라서 그런지

다행히 오늘은 표가 있어서 편하게 표를 예매하고는 화장실에 가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베낭에 남은 우유와 빵 하나로 허기를 면한 다음에

한참 동안을 대합실에서 멍때리기를 한다

무주군 군내버스 시간표

서울가는 버스 시간표

17시 45분에 서울가는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 차창밖을 바라보니 버스는 안성을 지나고 있다.

연휴라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평일보다 더 한산하여 예상보다

한참 빠른 시간에 서울에 도착하여 터미널에서 15분거리에 있는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끝내고 일치감치 잠자리에 든다

오늘 산행중의 전리폼

이런 봉다리 3개정도 밤을 주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닌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