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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차 북진(終)

제21구간 - 수청거리 삼거리에서 갈령 삼거리까지

by 범여(梵如) 2023. 11. 5.

갈수록 고갈되는 범여의 체력...

남은 산길은 어찌할꼬.

 

 

☞ 산행일자:  2023년 10월 21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강한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3.5km + 들머리2.1km+날머리 1.3km  / 7시간 13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화령터미널- 화서I.C입구- 화령장 지구 전적비- 신봉리 석조보살입상

                     수청거리 삼거리-상곡리갈림길-450m봉-안부-무명봉-무명묘지

                    무명봉-창안마을 갈림길-무명봉-안부-계곡마을 갈림길-490m봉-안부

                    무명봉-반송 갈림길-선재갈림길-갈림길-퉁점마을 갈림길-산불감시초소

                    초영봉-안부-무명봉-무명봉-무명봉-안부-무명봉-봉황산-암봉

                    안부-717,7m봉-안부-암봉-660m봉-암봉-무명봉-안부-무명봉-무명봉

                    폐묘-안부-무명봉-459m봉-비조령-쉼터-무명봉-510m봉-무명봉

                    안부-무명봉-안부-조망바위-무명봉-517.6m봉-안부-무명봉-안부

                    암봉-억시기갈림길-못제-폐헬기장-안부-무명봉-안부-암봉-안부

                    무명봉-갈령삼거리-암봉-암봉-암봉-고릴라 바위-헬기장-갈령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외서면, 화남면, 화북면

 

지난주에 백두대간 최북단 지역인 미시령에서 대간령가는 길을 걸으면서 추위에

너무 힘들어서 잠깐동안의 북쪽 대간길을 잠깐 접어두고, 아랫쪽으로 내려와서

지난 여름에 걷다가 중단한 대간길에서 가장 낮은 중화대 지구에 있는 화령땅

수청거리 삼거리에서 갈령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땜방하기로 한다.

 

이곳은 상주시에 속해 있어서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용이한 곳이다.

저녁에 베낭을 대충 챙겨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경부고속터미널에서 상주로 가면, 집에서 가까워 편하긴 한데, 이른 아침에 상주로

가는 첫 차가 강남에서는  07시 10분이고, 동서울터미널에서는 06:00, 06:30분에 있다.

강남에서 버스를 타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상주에서 화령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내 걸음으로 당일 산행은 너무 늦다

(참고로 상주에서 화령까지 약 40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상주행 버스표

아침 일찍 우리집에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교통편은 불편하다.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선릉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변역까지 가야

하는데 선릉역에서 첫 열차가 05시 46분이라 이 전철을 타고 강변역에

도착하면 06시 05분...상주가는 첫 차를 탈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거금을 투자하여(?)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05시35분... 

버스표를 예매한 다음에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서 마신 후에

상주로 가는 첫 차에 몸을 싣는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늘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보니 중간 기착지인 점촌 터미널이다...이곳부터

정신을 차리고, 20분 후에 상주터미널에 도착한다

상주터미널(08:15)

상주에서 화령, 화북으로 가는 완행버스 시간표

상주발 → 화령행 버스표

화령으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한 후에 터미널 내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고, 30여분정도 의자에 앉아서 멍때리기를

하다가 버스타는 곳으로 향한다

상주발 → 화령행 버스표

09시 15분에 상주를 출발하여, 화령, 보은, 옥천을 거쳐서 청주로 가는

버스에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손님이라곤 나를 포함해서 달랑 5명뿐...

중간에 두어군데 정차하는 구간이 있지만, 손님이 없어서 무정차 하고는

화령 터미널에 도착하니 09시 50분이다...생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화령터미널(09:50)

산행을 시작하다(09:55)

화령터미널에서 들머리인 수청거리 삼거리까지는 25번 국도를 따라서

2km정도의 거리밖에 되질 않아서 쉬엄쉬엄 걸어 가기로 한다

화령 마을을 빠져나와 25번 국도를 따라서 수청거리 삼거리로 향한다.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 (化寧縣) 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화서면은 동으로 내서면과 외서면, 북서쪽으로 화북면, 화남면, 남으로

화동면에 접해있고, 상주시와의 거리는 26km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명은 화서면(化西面)이고, 화령(化寧)이라고 부르며, 저 뒷쪽으로 보이는

뾰족하게 생긴 봉우리가 화령의 鎭山 역할을 하는 잠시후에 가야할 봉황산이다

 

화서는 중화지구(中和地區)의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답달비(答達匕), 답달건비(答達建匕),

또는 답달비현(答達匕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16년에는 화령현(化寧縣) 고쳤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그대로 따라 썼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13년)에 현(縣)으로 고쳐서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다.

화서I.C입구(10:06)

당진~영덕간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화서I.C입구를 지나니 화령장지구

전적비가 보이기에 내 언제 다시 오겠냐 싶어서 구경하기로 한다.

화령장 지구 전적비(10:07)

화령장은 고려시대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온 시장으로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70~80년대엔“다른 지방에서는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던 시장이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6.25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

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는데,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병(傳令兵)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화령장 전적비가 있는 이 곳을 처삼촌 벌초하듯 走馬看山격으로 

둘러보고는 마루금이 시작되는 수청거리 삼거리로 향한다.

화령장 전적비를 지나자마자 단청을 한 앙증맞은 殿閣이 나오는데

옆에있는 안내판을 보니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26호로 지정된

상주 신봉리 석조보살 입상이 목책에 갇힌채로 안치되어 있다

상주 신봉리 석조보살입상(尙州 新鳳里 石造菩薩立像) 안내판

상주 신봉리 석조보살입상(尙州 新鳳里 石造菩薩立像)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에 있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1985년 8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26호로 지정된 불상이다.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국도변에 서 있는 높이 230cm의 보살상으로, 넓적한 1매의 화강암에

돋을새김 하였으며, 머리에는 3면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관에는 작은 부처 3구와 관대(冠帶)

장식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얼굴은 마멸이 심하나 윤곽이 풍만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하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옷주름이 간결하고 두껍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신(佛身)의 뒷부분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형태의 머리광배와 배(舟)모양의 몸광배를 1줄의 굵은 선으로 구분했

간결하면서도 장식성이 적고 둔화된 표현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보살입상 옆에는 공덕비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런데는 별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친다

수청거리 삼거리가는 길에서 만난 주유소

특이하게도 휘발유는 안팔고 디젤만 파는 주유소란다

주유소를 지나 25번 국도를 따라서 들머리로 향하는 국도 좌측으로 잠시후에

오를 대간길 마루금 아래로 풍요한 황금 들녘이 펼쳐지는데 역시 三白의 고향인

상주(尙州)답다

상주시는 삼한시대부터 낙동강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예로부터

산자수려()하고 오곡(五穀)이 풍성하며 민심이 순후(淳厚)한 고장으로,

상주를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 유역에는 분지와 충적 평야가 드넓고 과거부터

수륙(水陸)교통이 교차하는 요충지였으며, 곡창지대로 물자가 풍부해 성읍국가(城邑國家)

시대부터 부족국가가 번성했다.

 

고려시대에는 경상도를 관할하는 절도사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200여 년간 경상감영(慶尙監營)

자리해 곳곳에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고,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 선비 고을이자 충절의 고장이다.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이라하여 쌀·곶감·명주가 유명한데, 특히 곶감은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이상을 차지하는 상주시 대표 농산물이다.

 

* 경상감영(慶尙監營)은 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하에 경상도(慶尙道)를 관할하던

  감영(監營)으료  현대의 도청(道廳)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慶州)에

  위치해 있던 것이 상주(尙州),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지를 옮겨다니다 선조34년((1601년),

  최종적으로 대구로 이전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후 고종(高宗) 33년((1896년) 갑오개혁으로

  지방 행정을 13도제로 개편한 뒤에도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중심지였으며,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하였고, 1996년 경북도청을 포정동에서 산격동으로, 2016년 안동시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상주시에는 18개 읍, 면이 있으며 백두대간이 남북을 가로지르고, 이안(작약)지맥,

병성(숭덕)지맥, 보청(팔음)이 동쪽 낙동강으로 뻗으며 백두대간 거리만도 67km나

되는 넓은 지역이다.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함께 부르면서 유래되었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는 흰쌀과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이다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예부터 이 세 가지로 유명해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는데, ‘삼백미(三白米)’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京畿米)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랏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으로,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곶감은 분명히 말간 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건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粉)이 생겨났는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상주지역의 감은 ‘상주 둥시’로 불리는 떫은 감인데 곶감용이다.

곶감 생산량이 연간 6000~8000t으로 전국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데, 속리산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을 막아주면서 건조하고 찬 바람이 많이 불고 일교 차가 커 맛있는 곶감이 만들어진다.

상주 곶감은 속살이 부드럽게 입 안에서 풀리고 이물감이 없으며, 상주의 전통적인 특산물인

‘삼백(, 쌀·누에·곶감)’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25번 국도에서 바라본 화서면 신봉리 솔의(率儀)마을의 모습

화령장 전투전적기념비와 수청거리 사이의 25번국도 북쪽가에 있는 마을로, 화령현 당시

어떤 장군이 작전을 지휘함에 있어 솔선수범하여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솔의라 하였다 하며,

1978년 취락구조개선사업(聚落構造改善事業)으로 재앙골(率儀) 마을은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고 한다.

 

예부터 곡부 공씨(曲阜孔氏)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20여 호의 곡부 공씨(曲阜孔氏)가 살고 있다.

《솔+의+리(里)=솔이리→소리리. ‘솔’은 ‘솔다, 좁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땅이름 ‘재앙골’은

‘재(자(山)+이 혹은 고개)+안(內)+골(谷)=재 안골→재앙골’로 ‘솔이’와 ‘좁은 장소’임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다.》

수청거리 삼거리(10:20)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와 상곡리와 맞닿아 있는 삼거리로 상주에서 화령, 보은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와 화령에서 화북으로 이어지는 49번 도로가 만나는 곳인데

신봉리 수청마을의 지명을 빌려와 수청거리 삼거리라 부른다

 

수청 마을은 화령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신봉리 동쪽 화령재못 미처 상주로 가는 길과

하송리로 가는 길의 갈림길 곁에 있는 마을로 화령현 당시 관기가(官妓家)가 있어서

불리는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 청지기 또는 녹사, 서리 따위의 구실아치를 해당하는 관야에서 집무하게 하던 일을 ‘수청’이라 한다.

도로옆에 있는 상곡1리 마을 표시석

상주시 화서면에 있는 상곡리(上谷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금강의 지류가 동남방향으로 흐르며, 계곡리, 명통리, 상달리, 금곡리 등을 병합하면서

상달과 금곡의 이름을 따 상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중촌, 명통, 퉁점마을 등이 있다. 금곡마을은 상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금이 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중촌마을은 상곡리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명통마을은 금곡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퉁점마을은 명통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놋점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백두대간 740여km중에 상주를 통과하는 구간은 67km정도인데 큰재 윗쪽인

웅이봉에서 내려와서 큰재부터 이곳 수청거리 삼거리까지는 백두대간길 중에서

가장 편하고 완만한 구간의  중화지구(中和地區)로 흔히 말하는 非山非野 구간이다

상주를 통과하는 편안했던 非山非野 구간이 끝나고, 같은 상주땅의

대간길이지만 이곳부터 속리산 능선의 끝지점인 늘재까지는 멋진 

奇巖怪石이 펼쳐지는 곳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있는 상주땅의

대간길을 오늘 걸을 것이다

초입에서 만난 대간꾼들의 흔적

능선에서 뒤돌아 본 수청거리 삼거리

삼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 너머로 신봉리 마을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당진~영덕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상주를 통과하는 비산비야 구간의 대간길이 끝나고 조금씩

힘든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정표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화령(化寧)의 이름처럼 평온한 이 고갯길에서 이제 속세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비록 영원한 떠남은 아닐지라도 대간의 발걸음을 옮기는 날 만큼은

俗世의 塵土들을 털어버리고 싶다...봉황산을 시작으로 큰 오름을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이질 것만 같은 잔뜩 흐린 날씨에다 해발 400여m밖에

안되는 낮은 능선이긴 해도 산행 초반부터 불어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참취꽃에게 물어본다...비가올 것 같은데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거야 엿장수 맘이지만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하는게

아니가요...범여 曰,...알았소이다...못먹어도 go다 

수청거리 삼거리에서 봉황산 오르는 길.

경사가 그다지 급하지 않아 크게 힘든 코스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이 그러하듯 마루금상의 숲 들은 살아있는

기(生氣)와 뜨거운 濕氣를 머금고 있는게 산이 아니던가.

불과 20여m 사이에 이런 안내판이 2개나 있는데 過猶不及인듯 하다

상곡리(上谷里) 갈림길(10:32)

우측으로 화서면 상곡리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문화식당.여인숙 간판이 보인다

상주시 화서면에 있는 상곡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금강의

지류가 동남방향으로 흐르고 계곡리, 명통리, 상달리, 금곡리 등을 병합하면서 상달과

금곡의 이름을 따 상곡리라 하였다.

상곡리 갈림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을 지나는데 주변에는 잣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대머리(?) 무명묘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어~~~랴...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산행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는 고민을 하다가 일단

가보기로 한다...봉황산 가기전까지는 중간에 탈출로가

많으니 그때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450m봉(10:36)

안부(10:38)

봉황산으로 향하는 길...조금씩 고도를 높혀가긴 해도 아직까지

아직까지 非山非野 구간에 익숙한 탓인지 등로는 완만하다

무명봉(10:41)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던 길들이 천천히 걸어면서 이것저것 

다 보며 걷다보니 모든게 새롭기만 하다...고도차가 그리

많치 않아도 오르 내리막이 꽤나 이어지는 빨래판 구간은

계속된다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 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
하나가 등산이다.


- 폴베이사르 -

무명묘지(10:44)

요즘에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禮敬은 예전만치 못하는지 등로에서 만난

묘지들을 보면서 孝가 뭔지하는 씁쓸함을 느낀다...나 역시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지 못하는 우리 부모님 묘소도 저럴 터이지...슬픈 현실이다

무명묘지를 지나 능선에 올랐다가...

웅덩이같은 봉우리를 지나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능선 불어오는 강한 바람은 계속되나, 다행히 비는 그친다.

내 산행의 철칙은 우중산행과 올빼미 산행은 절대 안하는 편이다.

오늘 날씨는 나를 상당히 배려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예전에 무심코 지나갔던 등로에서 못난이(?) 소나무를

많이 만난다...이런 곳에서는 송이가 나올법한 곳이다

무명봉(10:48)

창안마을 갈림길(10:49)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上縣里)에 있는 창안마을은 상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 창터가 있다.

화령현 당시 관곡(官穀)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다 하며, 뒤에는 탑(塔)이 있었던 곳에

큰 소나무가 서 있어 탑송(반송)이라 불리어지는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으로도 등산객들이 다니는 모양이다...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산부추꽃이 범여를 반긴다...요즘 대간길에서는 산부추꽃이 대세인 듯 싶다

무명봉(10:51)

아침에 버스에서 내렸던 화서면 소재지가 보이고 좌측에

우뚝솟은 산이 대간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백학산이다

안부(10:53)

등로에 밤송이들이 많이 보인다...2주전에 대간길 김천구간을

걸으면서 밤을 꽤 많이 수확했기에 행여 밤이 있나

보았지만 쭉정이밖에 없다...인간들은 왜 物慾에 약한지...

"왜 나는 산에 오르는가 ?"
이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야겠다는 것뿐이다.

- 마르쿠스 슈무크 -

계곡마을 갈림길(10:57)

화서면 상곡리 명통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계곡(鷄谷)이라 하다가, 계곡이 리(里)의 경계를 만들었다 하여 계곡(界谷)이라고 한다고 한다.

화령장으로 가는 재 밑에 있어서 재의길, 또는 지름길이라 하던 것이 변음되어 잿길, 또는

짓질이 되었다 하며, 봉황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여 아늑한 마을로 상곡 1리다.

 

《재(峴)+ㅅ+길(道)=잿길→잿길→짓질. 재를 넘어 가는 길이 대부분 지름길이 되고,

또 산골짜기로 나 있어 계곡이 된다.》

490m봉(10:58)

완만한 안부를 지나고...

나무계단을 따라서 내려간다

나무 계단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봉황산의 모습

안부(11:03)

조금도 힘든 곳이 아니건만 봉우리 사면으로 길을 만들어 놨다

무명봉(11:06)

무명봉을 내려서니 예전엔 없었던 이정표와 나무 계단이 보이는

반송 갈림길로 내려선다

반송 갈림길(11:06)

예전에 없었던 상현리 반송(盤松)으로 내려가는 속리산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반송(盤松)은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에 있는 소나무로 1982년 11월 04일에 천연기념물 제293호로

지정된 이 소나무는 나이가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밑에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높이 16.5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4.3∼4.8m이고 가지는 동서로 23.7m, 남북으로

25.4m 정도 퍼져 있다.

 

큰 가지 1개는 100여 년 전에 벼락을 맞아 죽어버렸다고 하며, 나무의 모양이 탑같이 생겼다 하여

탑송()이라고도 불리며, 마을의 당산목()으로 추앙받고 있어 정월 보름에는 마을사람들이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떨어진 잎을 가져가면 벌을 받는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또 이무기가 살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안개가 낀 날에는 나무 주변을 구름이 덮은 듯이 보이고,

이무기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며, 최근에는 솔잎혹파리의 피해를 받아 쇠약해지고 있다.

 

반송은 소나무과에 속하는 작은 나무로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밑에서 갈라진 가지가 원줄기같이

자라서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생기지 않고, 수관(: 나무의 줄기 위에 있어 많은 가지가 달려 있는

부분)이 펼쳐진 우산처럼 반원형인 점이 다르다.

속리산 둘레길이 조성되어 반송으로 가는 길

속리산둘레길 개념도

속리산 둘레길이란 마을과 사람  숲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상생하는 길로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문경시와 상주시를 연결하는 속리산 권역에

걸쳐있는 총 200km의 길이로 속리산을 끼고 있는 보은길(60km)과 괴산길(70km)은

이미 개장되어 운영하고 있으며 문경길과 상주길도 개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산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자연과 역사문화가 살아 숨시는 속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은 참선의 여정을 내딛는 길이다

반송 갈림길에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반송갈림길에서 2분정도 걸어서 올라가니...

선재갈림길(11:08)

 속리산 둘레길은 우측으로 이어지는 선재방향으로 향하고 대간 마루금은

속리산 둘레길을 버리고 쉼터 의자가 있는 직진의 오르막으로 향한다

봉황산 가는길

갈림길(11:21)

직진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지만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반갑습니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79.3m봉을 향하는 빡센 오르막길...

산이란 낮으면 낮은대로, 높은대로 힘이드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 싶다.

마치 골프장에 홀마다 숨어있는 핸디캡이 있듯이, 낮은 산이라

우습게 봤다가 큰코 다친적이 어디 한두번 이었던가

사면으로 이어지는 빡센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우측으로는

화서면 상곡리 퉁점마을로 이어지는 뚜렸한 내리막길이

보이나 봉황산으로 향하는 대간길은 반원형으로 돌아서

윗쪽으로 올라간다

퉁점마을 갈림길(11:28)

대간길은 좌측으로 반원형으로 꺽어져 올라가는데,우측 아랫쪽으로

문장대로 가는 49번 도로변에 위치한 화서면 상곡리 퉁점마을로 이어지는

등로가 뚜렸하게 보이는데, 명통 마을의 북쪽에 있고, 두고봉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때 동(銅)을 캐어 그릇을 만드는 동점이 있었다 하며, ‘동’이 ‘퉁’으로 변음 되어

퉁점 이라고도 하는데 상곡 1리에 속해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아직까지 단풍보다는 푸르른 숲을 유지하고 있지만

얼마 안 있으면, 만산홍엽으로 물들겠지...그리고 또 한해는

저물것이고, 그리고보면 세상사는 것 참!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리 아둥바둥거리면서 살아야 하는건지...

언제부터인가 俗世를 떠나서 산에 오를때가 범여의

가장 큰 즐거움인 듯 하다

퉁점마을 갈림길을 지나 올라서니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산불감시초소(579.3m:11:33)

아직까지 경방기간이 시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초소문은 굳게 잠겨있다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579.3m봉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산불감시초소 너머로 이안(신산경표상: 작약)지맥 능선에 있는 삼봉(三峰:693.3m)이

보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강풍으로 변해가기에 서둘러 봉황산으로 향한다

이곳부터 비조령 너머까지 이런 플랑카드를 보면서 걸어야 한다

겁이나서 산에 다니겠나...

초영봉(644m:11:38)

일부 지도와 산행기에는 초영봉이라 표기가 되어 있지만,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와 트랭글을 비롯한 모든 자료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는 봉우리고, 지명 유래도 알 길이 없는

무명봉이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오를 봉황산 정상이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온 산을 도배를 한듯 한 플랑카드... 거의 공해 수준이다

안부(11:45)

요즘 산행을 하면서 꼭 한번씩 만나는 철없는 녀석들...

봉황산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드세지고, 비는 오지 않지만

잔뜩 흐린 날씨에 검은 먹구름이 홀로걷는 산꾼을 겁박하고 있다

무명봉(11:51)

봉황산 가는길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

물론 호화준족들이야 해당 사항이 아니지만 예전과는 

달리 저질 체력으로 변해버린 범여의 몸뚱아리로는

언제나 대간길은 버거운 존재인 듯한데, 아직까지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봉황산 오르길에 있는 저 소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않고

대간길을 지키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변하니 우짜먼 좋을꼬...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청계산 두루봉과 대궐터산, 그리고 산아래에

묻혀있는듯한 극락정사라는 절집 너머로 2019년 10월에 성치않은

몸뚱아리로 갈령삼거리에서 출발하여 걸었던 이안(신산경표상:작약)

지맥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칠봉산이 멋진 모습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4년전에 걸었던 그 지맥길이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고 있다 

산 아래는 하북면(문장대)으로 이어지는 49번 도로 윗쪽에 있는 대궐터산

저 산은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과 관련이 있는 산이다

무명봉(11:58)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몸 속을 파고 들지만

그나마 천만 다행인게 간간히 떨어지던 빗방울이 그친다

그것으로도 감사하면서 봉황산으로 향한다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오늘 걸었던 등로 뒷쪽으로

지난 여름에 걸었던 윤지미산(우측)이 보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산이 상주의 남장사와 북장사를 품고있는 노음산(露陰山:725.4m)이다.

 

일명 노악(露嶽)이라고도 하며 상주의 서쪽을 진호하는 산으로, 영남 8경중에

하나로 꼽히며, 고려 말에는 대시인 조운흘(趙云?)이 이 산에 우거(寓居)하여

명시를 남겼는가 하면, 보광전(普光殿: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 에 연해 있는

청천료(淸泉寮, 교남 강당)는 승려만이 아니라 상산 선비들의 문회, 시회의

공간이 되어 많은 시문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깊은 두 사찰, 남장사와 북장사를 품고 있는

佛家의 산으로 830년 이전에 장백사(長栢寺 현, 南長寺 전신)가 있어 진감국사가

동국 최초로 범패를 보급한 곳이며 남장사(南長寺)에는 불교문화의 귀한 보물이 많다

 

얼마전에 남장사 會主로 계셨던 성웅 큰스님께서 열반하셨는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 주지를 2번이나 역임하셨던 큰 스님은 범여의 동국대 선배로

총동창회장을 하셨을 때, 내가 期 회장을 하면서 자주 만났던 큰 스님이셨는데

매스컴을 통해 열반소식을 접하고는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큰 스님 죄송합니다

무명봉(12:00)

손에 잡힐듯이 가까게 보이는 산이지만 생각보다 그리 가깝지

않으니 착시현상일까?...아니면 느려터진 범여의 발걸음 탓일까?

봉황산 오르기 직전에 만난 암릉구간

예전에는 저 능선을 치고 올랐는데 지금은 사면길로

등로를 돌려 놓아서 조금은 편하게 올라간다

사면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대간꾼들의 흔적

안부에 올라서서 우측으로 바라보니 예전에 암릉구간에서

내려왔던 능선이 보이고, 지금은 대간꾼들이 다니지는 않으나

아직까지 등로는 살아있는 느낌이다

안부(12:05)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봉황산의 전위봉인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12:15)

무명봉에 올라서니 북동쪽으로 보이는 산그리메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49번 도로가 지나가는 계곡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내가 오늘 날머리로 정한

갈령삼거리 능선과 형제봉, 속리산의 주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한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북쪽 제일 끄트머리 부분에는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이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를 통해 극찬한 청화산(靑華山:984m)이

보이고, 청화산 남쪽으로는 도장산,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우복동천(牛腹東川) 

십승지 능선의 아랫쪽으 극락정사를 품고있는 대궐터산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당겨본 대궐터산(748.6m)

대궐터산이라 부른 연유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이 산에다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며 산 아래에는 극락정사라는

사찰이 있는 산으로,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甄萱:867~936)이 이곳에 둘레

3.3km의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하여 상주시 화북면 청계동 마을 사람들은

대궐터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대궐터산 아래에 있는 화북면 하오리에는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된 상주 견훤사당 (尙州 甄萱祠堂)이 있다

후백제는 견훤이 완산주(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 진출해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는데 왜 이곳 상주에 견훤의 유적이

많은 이유는 뭘까?...그것은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阿玆蓋)의 고향이

가은이었기 때문이라서 그런 것 같다...문경시 가은읍(加恩邑)의 행정구역이

지금은 문경이지만 원래는 상주땅이었다고 한다...지금도 가은읍을 가면

버스정류장, 5일장터를 비롯한 많은 지명들이 아자개로 불리는게 많다.

 

옛부터 상주는 고대국가 개국과 관련이 많은 지방인데, 맨 처음에 등장하는 국가

사벌국(沙伐國)은 삼한시대에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지역에 있었던 소국(小國)으로

사량벌국(沙梁伐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기원전 58 년경 지금의 영남 지방의 상주라는

곳에는 사벌국이라는 씨족(氏族) 국가가 있었으며, 신라에 흡수되기 전까지 경주와

버금가는 세력으로 번성했던 곳이었으며,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은 사벌국의 도읍이었던

낙양에서 유래한 것으로,‘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국가는 고령가야(古寧加耶)라는 이름은『삼국유사(三國遺事)』5가야조(五加耶條)와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 상주(尙州) 고령군조(古寧郡條)에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5가야조에는 고려시대의 함녕(咸寧)이라고 하였으며, 함녕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의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대체로 지금의 함창(咸昌)을 중심으로 한 가야이다. ,

 

마지막이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에 관한 얘기다

후백제『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反旗)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고,

이곳 상주땅 화북지역에는 견훤산성이 있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견훤산성이 있는 곳이 상주이다

가을편지 / 김사랑

잘계시나요
사랑한다
편지를 보냈지만
늘 당신의 안부가
궁금했지요

행여나 저를 잊었을까
걱정하다가도
가끔은 생각하겠지
가을 하늘에
얼굴을 그려 봅니다

고추잠자리는
할 일없이 왔다가고
돌담 위 누런 호박은
갈 햇살에 익어가고
내 사랑도 익어 갑니다

칼바람을 맞으면서 꾸역꾸역 오르다가 보니... 

눈 앞에 나타난 봉황산 정상

2020년 2월에 나홀로 보청(신산경표상:팔음)지맥 걸으면서

올랐으니 어느듯 이곳에 온 지가 3년반이란 세월 흘렀구나

봉황산(鳳凰山:740.6m:12:19)

경북 상주시 화서면과 화북면, 화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표지석엔

'白頭大幹 鳳凰山 740.8m'라 적혀 있고 삼각점과 백두대간 안내 표지판, 원형의자,

3등 삼각점, 준.희 쌤이 설치한 보청(신산경표상:팔음)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영주 부석사 뒷산인 봉황산(819.9m)이 하도 유명하여 이곳의 봉황산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현지에서는 꽤 알려진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1300여년 전 이 산에 봉황새가

찾아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여 봉황산이 됐다고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정상을 봉황새의 

머리라 하고, 양쪽으로 뻗은 봉우리들을 날개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그런대로 봉황 같다고

할 수 있어서 그런 전설이 배태(胚胎)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조선시대 중종(9대 임금)의 태(胎)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는 태봉산(胎封山)

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그러나 태봉산은 이 산 아래에 있는 무동정수지 옆에 있는 산을 말한다

 

윤지미산에서 피앗재 구간은 상주시 화서면에 위치한 화령(火嶺), 봉황산 고개의 생김새가 

나는 새의 형국이어서 비조령(飛鳥嶺)이라 불렀다는 비재, 형제의 우의를 다지면서 정답게

산을 지키고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형제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다 

인증샷

팔음지맥 분기점 산패의 모습

보청(팔음)지맥은  2021년 7월에 2구간을 마치고는 아직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未完의 지맥길로 대간이 끝남과 동시에 맨 처음 마무리할 지맥길로 정해논 곳이다.

팔음지맥(八音枝脈)이란?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남서방으로 분기하여 천택산(683.9m), 팔음산(771m), 천금산(464.9m),

천관산(445.4m), 철봉산(449.5m)을 만들고 북으로는 보청천, 남으로는 송천(초강천)의

분수령이 되어 금강2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로, 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보청지맥이라고 부르는 산줄기이다

새로 설치한 봉황산 안내판

봉황산 정상 삼각점(△관기 303 / 1980재설)

봉황산 정상에 잠깐 머무는 사이에 강풍에다 손이 시릴정도의 추위

탓인지 몸뚱아리가 조금씩 굳어지는 느낌이라 서둘러 길을 떠난다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무심코 내려가니 위험 표지판이 나오는 암릉구간이다

암봉(12:24)

위험 표식이 되어있는 암봉위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온 사방이 

다 보이는 일망무제라서 산꾼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살짝 트인 시야가 지나온 상주땅과 나아갈 속리산 남쪽 자락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우측으로 대궐터산이 제일 먼저 자릴잡고, 서쪽에는 구병산이 호위하듯

반겨주는데, 가히 속리산 입구를 장식하는 첫 용오름으로서 손색이 없다.

북쪽으로는 내가 오늘 날머리로 잡은 갈령으로 이어지는 49번 도로가

보이고, 좌측으로 형제봉에서 속리산의 주봉인 천황봉으로 연결되는

속리산의 주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서남쪽으로는 당진~영덕간 고속도로 너머로 펼쳐지는 보은의 산그리메도

아련하게 보이는데, 산꾼의 눈에는 산들이 다 멋있게만 보이는가?...

암릉 아래로 로프에 의지한 채 내려서니 바람이 잠잠하다

점심(12:235~35)

암봉 위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바람이

불지않아 비탈진 곳이긴 해도 바람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점심으로 가져온 빵과 우유 하나로

점심을 대신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데, 날씨가 추운 탓인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 빵조가리를 억지로 밀어넣는 느낌이다 

10분정도 비탈진 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무동마을의 모습

상현리 무동(舞洞, 武洞)마을은 은 당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으 봉황산(鳳凰山)에서

봉황새가 대밭골의 죽실(竹實)을 배부르게 먹고 춤을 추었다는 데서 무동(舞洞)이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옛날에 무인이 살았다고 무동(武洞)이라고도 하며 무동마을은 나주정씨(羅州丁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식재하였다고 전하는 느티나무가 현재 면목(面木)으로

지정관리하고 있으며, 마을 뒤편 봉황산 기슭에 백운사(白雲寺)와 해룡암(海龍庵)이 잇고

마을 앞에는 무동지(武洞池)가 있다.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천택산(川澤山:683.7m)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와 화남면 입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2등 삼각점과

헬기장이 있는 산으로 2020년 2월 15일에 보청(팔음)지맥 첫 구간때 걸었던 산이다

 

산 이름은 한문으로 쓸때 대체적으로 ‘천’자를 ‘하늘 천(天)으로 쓰는데 이곳의 천택산의

‘천’자는 ‘내(川)’자로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물론 ‘하늘 천(天)’자를 써서 ‘천택산(天澤山)’으로

기록된 자료도 보인다마는... 

지형도에는 내(川)이고 상주시 지명유래에는 하늘(天)을 쓰는데 산봉우리에 내(川)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예전에 산꼭대기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없고, 국사당 봉수대(國師堂烽燧臺)

있었지만 그마저 헬리콥터 착륙장을 만들면서 흔적이 없어졌고, 봉수대 서쪽 임곡리에서

중눌리로 넘어 가는 고개를 봉우재라고 부르는 고개가 있으며, 천택산 또는 천탁산이라고도

부르는데 ‘가릴 택(澤)을 ‘흐릴 탁(濁)’을 잘못 읽어 천탁산으로 부르는 모양인데 천택산으로

부르는게 맞는 듯 싶다 (범여의 생각中에서)

 

천택산(川澤山)은 속리산 국립공원 남쪽 구병산과 봉황산 남쪽으로 흘러내린 산으로 이들 산과

확실하게 연결된 부분이 없으며 이 산 밑에는 지금도 우복길지의 비결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임실 안골에서 보는 구병산은 사람() 얼굴 형상으로 태조산이라고 하며, 임실 안골의 앞산은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으로 대모산이라 하여 숭상을 하고 있다.

 

용굴은 석회암 동굴로 동학농민 항쟁시 지도부 은신처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굴 입구에서 20m정도는

진입이 가능하나 그 이후는 구멍이 협소하여 들어갈 수 없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면 그 길이가 상당히

길고 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택산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경북자원개발에서 석회를 채굴하고 있으며

과거에 석탄을 캔 흔적도 남아 있는 특이지형이다.

 

 산 밑에는 지금도 우복길지의 비결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 후기때 대선사로 알려진 이량박(李輛舶)이 임실 안골을 우복동이라 칭하고 그의

우복가 유서에 "天地合德三皇舍 天鼓任實五常舟 善錄君子道通庭 無量靈廻萬仙京

地德 雨復四時源 五合化運得好時" 글을 남겼으며 또한 우복동과 관련된 태조산.대모산.

용굴.시루봉 적바위 등의 지명들이 있다

안부(12:37)

암봉을 빙돌아서 우회를 한 다음에 안부로 올라선다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다시 강한 바람이 산꾼을 괴롭힌다.

다시 잠시후에 사면으로 만든 길을 따라 내려서니 바람은 잦아든다

사면길의 낙엽이 푹신한 길을 걷는데 낙엽속에 가지버섯들이 눈에 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10여개의 가지버섯을 수확한다...라면을 끓일때

넣어서 먹으면 먹을만한 버섯이다

가지버섯

저칼로리로 식이섬유와 미네랄 성분도 아주 풍부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며

철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빈혈예방에 효과적이, 단백질나트륨당질니아신

비타민 성분들이 다양하게 함유하고 있어 체내노폐물 배출은 물론 피부미용

효능이 있고,칼슘도 풍부해 치아건강은 물론 골다공증예방근육생성신경기능상승

혈액응고방지에도 효과적이며, 그 밖에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항암작용에도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는 버섯이다.

가지버섯을 먹을만큼 수확을 했으니 오늘 산행에서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듯 싶고, 오르막을 올라서니 무명봉인

717,7m봉에 올라선다

717,7m봉(12:48)

비조령을 향한 내리막길을 향해서 조금씩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누워있는 저 고사목과

우리가 사는 세속의 세계도 그리 다르지는 않으리라...

안부(12:58)

안부를 지나 호젓하게 걷는데 들리는 소리라곤 낙엽과 바람소리,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뿐...고독을 즐기면서 걷는다

암봉(13:05)

산길을 걸을때는 가급적이면 텅빈 가슴으로 걸으려고 노력한다.

雜念을 버리고 아무런 생각없이 걷다보면 산과의 渾然一體가 되어

정신이 훨씬 맑아지는 느낌이다

백두대간 표식이 있는 660m봉 정상에 도착한다

상주지역 산길을 걷다보면 행여 알바할 구간이 있으면 이런 이정표를

세워놓아 산꾼들의 헛발걸음을 하지 않에 많은 배려를 해주니 참으로 고맙다

660m봉(13:11)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가면 족보있는 691.8m봉이 나오고

화서면 상룡리에 복용(伏龍)마을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복룡(伏龍)의 유래는 뒷산에 용이 엎드린 듯한 터가

있다고 하여 복룡이라 불린다고 한다

660m봉에 우측으로 꺽어져 고도를 확 낮추면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조금전 660m봉에서 갈라진 691.8m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암봉(13:14)

계속되는 내리막길

무명봉(13:18)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구병산 아래로 펼쳐지는 비재 고갯길이 낭떠러지 같은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의 강도는 더 심해지는데, 대간꾼들이

걸어둔 시그널도 정신을 못 차릴정도로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점심으로 먹은 빵과 우유를 차갑게 먹은게 뒷탈이 났나...

갑자기 바늘로 찌르듯이 배가 아파오는데 힘이든다.

조금 걸으면 괜찮겠지, 아니 괜찮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걷는다

산부추가 근심스런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는 듯 하다.

그러니까 따뜻한 국물같은 것에다가 제대로 먹어야지

뭔 개고생이여...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구병산은 계속해서 보이니 아련한 옛추억이 떠오른다.

2015년 여름이던가...한참 산에 미쳐 있을 때(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낙동정맥을

같이한 山友 3명과 함께 2박 3일간의 충북 알프스를 종주할 때 맨 처음 올랐던

산이 저 구병산이 아니였던가...

 

그 당시에는 110L 베낭에다 텐트와 그외 비박장비를 지고서도 끄떡없이

다녔는데 지금은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린 범여...아!...세월의 무상함이여...

산행 시작 얼마후부터 계속해서 만나는 경고 플랑카드...

죽기 살기로 앞만 보고 대간 산꾼들은 당신들의 영역을

침범할 일도없고, 침범할 시간도 없으니 그런 걱정 1도 

안해도 되니, 걱정하지 마소...

안부(13:30)

551.9m봉(13:32)

족보있는 봉우리인데 그흔한 시그널 하나 걸려있지 않다

조금씩 고도를 낮추면서 간다

무명봉(13:38)

551.9m봉과 무명봉을 지나는데 몸뚱아리의 통증은 계속된다.

억지로 참으면서 힘겹게 걷는데, 枯死木이 한마디 한다.

세상 살아가면서 어디하나 쉬운게 있었던가요?

무명봉(13:49)

봉황산에서 출발하여 고도가 낮아진 탓인가 

바람은 처음에 비해서 많이 잦아진 느낌이다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폐묘(13:58)

묘지를 移葬한 폐묘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비조령으로 향한다

안부(14:00)

무명봉(14:02)

등로에서 바라본 구병산(九屛山:876.3m) 의 모습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장안면, 마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봉산(九峯山)은 고을 동쪽 43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해당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 당시 구병산은 구봉산으로 불리었으며, 이 이름은

대략 『1872년지방지도』 이전까지 통용된 것으로 보이며,  『1872년지방지도』부터는 구

봉산 대신 '구병산(九屛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구병산(九屛山)은 산 모양이 아홉 쪽 병풍을 쳐 놓은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 산 남쪽에 있는 마로면 관기리에서 산을 조망하면 구병산 산 능선이

병풍처럼 동서 방향으로 약 10㎞이상 뻗어 있는 산이다.

459m봉(14:07)

459m봉에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니 나무

계단이 나오는데 비조령이 다와 간다는 이야기다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리기다소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그 가운데를 힐링하면서 

걸어야 하는데, 자꾸만 배가 아파오니 힐링이 아닌 

고통속에 길을 걷는 지금...범여는 너무 힘이든다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니...

생태통로가 조성된 비조령으로 내려선다

이 생태통로 아래로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서 장자동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상의 고갯마루인 비조령이 있는 곳인데

지금은 생태통로에 숲이 우거져 도로와 도로 옆에 서있는

비조령 표시석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구나.

비조령(鳥嶺:320m:14:13)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장자동 사이에 있는 재로 새(鳥)가 나는 형국이어서

불리는 이름으로  비조치(飛鳥峙), 비조령(飛鳥嶺)으로 불리는 고개로

예전엔 철계단에 2차선 도로였는데 지금은 생태통로가 조성된 지 오래

되어서 그런지 고개 아래로 지나가는 비조령 고개는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표시석을 보려면 다시 내려가야 할 듯 싶다

 

《‘비스듬하다, 비탈, 벼랑’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을 지명에서 한자로

표기할 때는 ‘천(遷), 애(崖), 별(別), 성(星), 비(飛)’로 나타난다.

 

상주지역에서는 ‘비루, 비알’이라고 한다. ‘비탈’과 ‘비루’를 땅이름에서

한자로 옮길 때 ‘비(比, 飛, 琵)’를 썼는데 특히 ‘비(飛)’가 많이 쓰였다.

비조령 생태통로 윗쪽의 모습

비조령의 또다른 유래는 비조투림(飛鳥投林)의 좋은 터가 있다는 비조령

아래에 있어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하며, 북동쪽 청계산에 후백제왕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고, 대궐 터, 차력 굴, 용암(龍岩), 주춧돌,

우물 터 등이 있다고 한다

생태통로 끄트머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비조령 정상석이

있는데, 내려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심한 통증으로 인해서

포기하고 윗쪽에 있는 쉼터로 향한다

쉼터(14:17)

쉼터에서 베낭을 내려놓고,구급약통을 열어보니 다행히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정로환이란 알약이 있기에 한꺼번에

2알을 먹고 5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다시 길을 나선다

비재로 내려선 다음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고, 이런 오름길은

갈령 삼거리까지 지속되는데 비재에서 급경사의 오름길은 

나에게는 숨이 끊어질 것만 통증이 밀려오는 빡센 오르막이다.

하지만 나는 걸어야 한다...내가 언제까지 산길을 걸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을때까지는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무명봉(14:35)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서 빡세게 올라서니 무명봉이다

잠시 편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서 숨고르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조그만한 소나무에 둘러쌓인 폐묘가 자리잡고 있는 510m봉이 나온다

510m봉(14:41)

갈령을 향한 힘든 여정에 들기전의 워밍업이랄까.

잔봉우리들을 오르 내리면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무명봉(14:44)

기본에 충실한 산길이다.

빡세게 올라선 다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듯 내려간다

정신없이 내려가다보니 연리지를 닮아가는(?) 갈참나무를 만난다

안부(14:50)

무명봉(14:53)

안부(14:55)

다시한번 빡세게 치고 올라서니 집채보다도 훨씬 큰 암봉이

나오는데 이곳이 상주시가 팻말을 걸어둔 조망바위 아래이다

또다시 창자가 끊어질 듯 배가 아파온다.

하는 수 없이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볼일을 보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봉황산을 지나면서부터 5번이나

볼 일을 봤으니 괜찮을줄 알았는데 고통은 계속되니

미칠것만 같다 

조망바위를 우회하여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조망바위(15:05)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조망바위...

저 곳에 올라서면 구병산을 비롯한 충북 알프스 능선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인데, 만사가 귀찮아서 그냥 통과한다

잠시 잠잠했던 바람은 다시 강풍으로 변하고, 가야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지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명봉(15:07)

조망바위 윗쪽에 있는 무명봉에서 대간길은 좌측으로 꺽어진다.

비록 오늘 힘든 산행을 하지만 그래도 산에서 느끼는 喜悅

까지도 나에게서 뺏어갈 수는 없겠지...그래서 걷고 또 걸어간다

陸山길을 걷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암릉구간을 지나니

국토정보지리원에 등록된 517.6m봉이 나타난다

517.6m봉(15:11)

북동쪽으로 마루금은 이어지고 잠시후에 나뭇가지 사이로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청계산 두루봉이 얼굴을 내민다

등로에서 바라본 청계산 두루봉(874m)의 모습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와 화서면 하송리, 화남면 동관리의 능선에 위치한

삼면 경계봉을 이루는 산으로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商山誌)》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랫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른다.

 

두루+봉=두루 봉. ‘두루’는 ‘들’의 옛말인 ‘드르’와 같이 ‘땅’ 또는 ‘산’ 에서 왔다.

‘달’은 ‘높다’는 뜻으로도 쓰인다는데, 산마루가 두루 뭉실하거나 어느 고장을

울타리 치듯 휘어 돈 산을 ‘두루산’이라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는데

대궐터산은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더 내려가 극락정사 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이며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는데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 상산지(商山誌)는 1617년 이준이 경상도 상주읍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사찬(私撰)한 지방지. 읍지로 2권 2책. 필사본. 목사로 부임한 강복성(康復誠)의 후원으로

  시작하여 뒤를 이은 정호선(丁好善)의 재임기간에 완성하였으며, 책머리에 목록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으며, 1989년 한국인문과학원에서 『조선시대사찬읍지(朝鮮時代私撰邑誌)』

  제20권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권2는 문한(文翰)으로서 제영(題詠)·기(記)·서(序)·비문(碑文)·상량문(上樑文)·잡저(雜著)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17세기 초에 편찬된 초기 형태의 사찬읍지(私撰邑誌)로서, 임진왜란을 겪은 뒤

  지방 통치질서 재편의 자료로 편찬된 읍지로 임진왜란으로 분탕된 상주의 문화, 즉 편찬 당시까지의

  시문, 인물을 비롯하여 사회 실태 등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지금은 한없이 내려간다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가 백두대간과 충북 알프스가 만나는

689.6m봉으로 저기까지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한없이 내려가니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안부(15:20)

무명봉(15:22)

우측으로 약초재배지를 표시한 하얀 노끈이 아직도 보이는데

봉황산 아래 산불감시초소에서 이곳까지 징하게도 따라온다

안부(15:24)

안부 주변으로는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갔던 잣나무 조림지가 보이고

다시 689.6m봉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되는 힘든 구간이지만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생각한다

겨울철에 감기가 걸리면 약을 먹어도 소용없고, 앓을만큼

앓고나야 감기가 낳는다고 했는데, 산길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걸을만큼, 걸어야만이 산행이 끝난다는 걸...

암릉구간으로 이어지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고통속에 걸으면서 山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흔히 예술가들이 하는 말...위대한 작품은 고통의 産苦를 겪고난

후에 탄생하는 법이라 했던가.

 

산을 신격인 堂山으로 삼아 제사를 올렸다는 이야기나 동네마다 산신당을 두고

산신을 섬겼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산은 우리 가슴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특히 ‘산은 세상살이를 배울 수 있다’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산 넘어 산이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산보다 골이 더 크다/

산에 가야 범을 잡지/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갈수록 태산이다/

티끌모아 태산 …………등등

이런 말들은 수백년 이상 오랜 기간 동안 민중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진리들로 생활 속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혜들 가운데 상당수가 산을 통해서

투영된다는 의미인데, 산은 신성한 것인 동시에 우리의 스승인 셈이다.

등로 우측으로는 이안(신산경표상:작약)지맥과 우복동천으로

불리는 상주 십승지와 겹쳐지는 청계산 두루봉에서 대궐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이안(작약) 지맥이야

몇년전에 마무리했고, 지맥길 끝나고, 체력이 허락된다면 십승지를

걸을때 또한번 지나가야 할 능선이다 

로프에 의지한 채 올라서니 암봉이 나온다

암봉(15:40)

계속되는 오르막길

바위와 나무가 雌雄을 겨루는데 내가 보기에는 나무가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인 듯 한,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싸움이다

다시 오르막길... 移葬한듯한 묘지의 흔적을 지나니 억시길 갈림길이 나온다

억시기고개 갈림길(15:45)

화령에서 화북으로 이어진 49번 도로상의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 있는

고개로서  못제의 견휜에 대한 전설과 연관된 고개의 지명이 억시기라고 한다

 

옛날 견휜이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의 신라 황충과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자

황충장군이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염탐꾼을 시켜 뒤를 밟은 결과 견휜이

기진맥진 상태에서도 이곳 못재에서 힘이 솟구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황충장군은 견휜이 지렁이 자손임을 알고 지렁이가 소금물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곳 못재에 소금 300석을 풀게 하였다...소금을 푼 물에 견휜이 목욕을

하고 난 뒤 힘이 빠지자, 견휜을 쳐서 크게 이겼다고 한다

갈령삼거리까지 아직 1.7km나 남았다...그리고 다시 1.3km를

더 내려가야 갈령인데 다리는 천근만근, 몸뚱아리는 말을 안듣고

그야말로 미칠것만 같은 기분이다

689.6m봉 아래에 와서 봉우리를 쳐다보고 저길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氣가 꽉 막히는 기분이다

窮하면 通한다고 했던가... 689.6m봉 맨 아래의 우측 사면길로

대간길이 이어지는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편하게 사면길을 따라서 갈령삼거리로 향한다

689.6m봉 끄트머리로 가니 충북알프스로 이어지는 등로에

표식이 붙어있고 689.6m봉은 대간 마루금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는 봉우리이로 충북알프스에 속해있는 봉우리인 셈이다

충북 알프스는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 사이에 걸쳐있는 산줄기로서 보은군 서원면

서원교를 들머리로 하여 충북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구병산 구간과  속리산 구간의

산줄기를 이어서 보은군 신정리나 또는 보은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활목고개를

날머리로 하는 산행코스로 충북 보은군에서 1999년 5월 17일 충북 알프스로 특허청에

등록하였고 이곳에는 신라 진흥왕때 의신조사가 창건한 법주사와 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있을 뿐 아니라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된 구병산과 그리고 수석 전시장이라

불릴만큼 기암괴석과 속리산을 비롯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이곳부터 주요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충북 알프스와 겹쳐있고 못제에서 문장대까지는 함께한다. 

충북알프스 표식이 있는 689.6m봉 아래를 지나자 못제가 나온다

못제(15:53)

못제는 백두대간상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작은 습지로서 천지(天池)라고도 하며 사방이

막혀있는 2~300평의 정도에 물이 고여있는 면적은 10여평이라고 하는데 이젠 그것마저

보기가 힘들고 주변에는 참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져 습지라는 걸 느낄 수 없는 실정이다

 

못제는 방죽을 의미하는데  산꾼들은 고개 이름을 착각하여 못(嶺)재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견훤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휜이 이곳 상주출신(가은)으로

가은이 지금은 문경시 가은읍이지만, 예전에는 상주에 속했던 지역이다

이 습지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못재의 맞은편에 솟은 대궐터산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곳 못제에서 목욕을 하여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자, 이를 알게 된 신라 장군 황충이 못에 소금 수백포를

풀어 견훤의 힘을 꺽었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소금을 매우 싫어한다는 데 착안하여,

「삼국유사」에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이라는 데에서 유래된 듯한 전설이다.

 

전설에서 눈에띄는 것은 ‘지렁이’ 와 ‘소금 뿌리기’ 이다.

지렁이 이야기는 왠지 혐오감은 주고 있으며, 연못(습지)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유쾌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까?

어쩌면 자연보호 혹은 생태계 보호를 위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마루금상의 습지라면 각종 곤충의 집과 알, 애벌레 그리고 번데기 들이 서식할 것이다.

 

습지가 잘 보전되면 이들의 활동이 왕성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 인간과 공생할 수

있는 보다 나은 터전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산림을 훼손하지 않고 아끼고 잘 보전하자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나온 속담들일게다.

특히 ‘썩은 나무를 땔감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은 다른 생물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

썩은 나무는 다른 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못제와 관련하여 혐오감을 주는 전설이 전해져 온 것은 인간들의 접근을 막아

이웃 생태계를 배려하기 위함이고 이는 나아가 우리 인간에게도 유익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다면 못재는 아주 소중하게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대간꾼들은 관심을 가지고 발걸음 하나 하나도 조심스럽게 옮겨야 할 장소다.

못제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못제의 유래

대간 마루금에 유일한 못이라는 못제는 약 오륙백 평 정도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주변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이때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견훤은

세력 다툼을 하며 거의 매일 싸움을 벌였다...하지만 싸움을 벌인 족족

황충은 패하고 만다...이에 황충은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캐기 위해 부하를 시켜 견훤을 미행했다...황충의 부하는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낸 이 사실을 황충에게 알렸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이 못제에 얽힌 전설은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 터 산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장암리 견훤산성과 함께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던

견훤의 야망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화북면 면지(面誌)인 화동승람(化東勝覽)에는못제에 대하여 “백두산 천지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형체는 다 갖추었고 물이 마를 때도 있으나 못임을 분명하다.

천봉이 연립한 곳에 있는 못이니 정령 이는 천작이요, 천수로 된 천지이다.

꼭 커야만 되겠는가 못이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기한가, 조화의 공이로다”

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만약에 견훤이 후삼국을 통일했다면 이런 기록이 있었을까?

못제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오르막 능선으로 향한다.

폐헬기장(16:02)

폐헬기장에서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가면서 지난해

7월에 걸었던 형제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다

안부(16:07)

안부에 내려서니 백두대간과 충북알프스가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부터 북쪽으로는 문장대까지 대간길과 충북알프스길이 겹쳐지는 곳으로

이정표에 표시된 장고개는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 있는 고개로 바로 밑에

장자동 마을의 지명을 빌어서 장자동고개라고도 부르며 고개가 ‘길다’고 하여

장고개(長峴)이라고 한다

안부앞에는 까칠한 무명봉이 있으나...

대간길은 무명봉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으로 향한다

無想無念으로 걷는 이 산길을 걸을때 만큼은

모든걸 잊고, 산길에 매진하려 노력한다

무명봉(16:10)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급경사의 위험 팻말이 붙어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16:13)

대간길은 직진으로 이어지나 까칠한 암릉이라 올라갈 수가 없다

좌측의 급경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빡세게 암릉 윗쪽으로 올라가는데 봉황산 지나면서 

급체로 인해 5번이나 볼 일을 보고, 먹은게 없었던 탓인지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인지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봉(16:18)

오늘 대간길 마지막 봉우리가 보이는데 저 봉우리 아래가 갈령 삼거리다

계속되는 암릉구간이라 올라갈 수가 없어서 사면(斜面)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안부(16:21)

안부앞 대간길 등로에 또다시 통곡의 벽처럼 보이는 암릉이 길을 막는다

뾰족한 방법이 없다...좌측의 급경사 절개지로 내려섰다가...

다시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서는데 체력의 방전으로 인해 그로기 일보 직전이다

무명봉(16:30)

오늘 대간길의 마지막 봉우리다

급체로 인한 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여기까지 온게 어디야...

산행을 하면서 힘들지 않았던 구간이 어디 있었냐마는

오늘은 참으로 힘이 들었지만 해냈다는 자부심에 喜悅을

느끼면서 갈령 삼거리로 내려가는데 늦은 오후인데도 강풍 탓인지

나무에 걸어둔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심하게 흔들린다

갈령(葛嶺) 삼거리(680m:16:31)

삼거리 정상에는 산행 안내판과 이정표, 원형으로 만든 쉼터가 있으며

직진을 하면 백두대간 길이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갈령으로 가는 이안지맥길이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산꾼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곳으로 대간, 이안(작약)지맥,

우복동 십승지, 충북 알프스 등로가 겹쳐지는 곳으로 그야말로 사통팔달 지역이다.

 

산속이라 그런지 해가 지면서 나타난 그림자로 스멀스멀 어두워지는데

조금씩 맘이 급해진다...오늘 가지고 온 똑닥이 카메라는 빛의 잔량(殘量)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지 그림이 자꾸만 어둡게 나온다.

도시로 치면 갈령삼거리는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이곳은 이안(작약)지맥의 분기봉이기도 한 곳으로 2019년도 

10월에 이곳에서 나홀로 첫 구간을 시작하여 1개월만에 이안천과

영강이 만나는 합수점까지 걸었던 지맥길이기도 하다

이안(작약)지맥 개념도

작약지맥(芍藥枝脈)은 백두 대간 속리산군 형제봉 남동쪽 0.6km지점의 721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갈령(49번국지도),두루봉(대궐터산. 873m),동네실재,국사봉(703.3m),황령고개,

칠봉산(598m),갈티재, 성재산(356m),작약산(774m),은점재,수정봉(488m), 태봉산(106m) 을

거쳐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낙동강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9m 되는 산줄기로 이안천의

우측, 영강의 남쪽 분수령을 작약지맥(芍藥枝脈) 이라 칭하느네, 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이안천(利安川) 의 우측 산줄기라 하여 이안지맥(利安枝脈)이라 부른다

 

* 이안천(利安川)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서 발원하여 함창읍 금곡리 영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으로 상주시 외서면, 은척면, 이안면을 지나 함창읍 금곡리에서 영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으로 낙동강 수계의 지방하천으로 낙동강의 제 1지류이며, 영강의 제 1지류이다.

  하천의 수계는 본류인 이안천과 지류인 대중천, 시암천, 지평천, 지산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천연장은 38.5km, 유로연장 52.6km, 유역면적 241.21㎢이다.

 하천의 이름은 이안부곡(利安部谷)의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하천 유역의 모양은 새의 깃과 같은

 모양인 우상으로, 본류의 좌안으로 지류가 합류하며, 유역 내 농경지는 영강과 접하는 하류부

 일부 구간 및 은척면의 황령지 관개구역 외에는 하천변을 따라 좁게 존재하고 있다.

 하천의 하상경사는 약 1/650~1/210 정도로 비교적 급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해가 저무니 맘이 급해지기 시작하여 서둘러 갈령으로 향한다

갈령까지는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라 예상 시간을 추측할 수 있어서 이 지역에

오면 자주 이용하는 화령택시 기사에게 시간에 맞춰서 갈령으로 오라는 전화를

해놓고 갈령으로 내려간다

암봉(16:37)

앞에 보이는 청계산 두리봉에 걸려있는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암봉(16:52)

2번째 암봉에서 바라본 십승지 중의 하나인 우복동천의 모습(화북면 소재지) 

 

십승지(十勝之)는 예언의 땅으로, 전란·굶주림·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으로 불렸다.

 

서양에는  유토피아(Utopia)가 있다면, 우리 조상들은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이상향으로

꼽았는데  ‘십승지지(十勝之地) ’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10곳의 땅을 의미하므로 오지로 접근이 쉽지 않은 곳으로, 십승지지를 언급한 고서(古書)로는

정감록(鄭鑑錄: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온 예언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등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비기(秘記)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지가 유명해 지금도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조선시대 평범한 민초들이 천수(天壽)를 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흉년과 홍수로 굶어 죽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백성이 개죽음을 당했다.

 

십승지는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인 이상향 의식과 맞물려 한국인의 심층

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우복동(牛腹洞)은 예로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로 상주 속리산 동편에 숨어 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백성들은 물론 몰락한 양반의 후예들도 우복동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약용의 <다신시문집> 제18권 ‘증언(贈言)-

다산이 제생(諸生)에게 주는 말’에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단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 하난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빛이 나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 중략 -  

 

- 정약용 ‘우복동가(牛腹洞歌)’ 중에서 그 곳은 속리산 동편,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일대였다

속리산의 주봉인 천황봉도 夕陽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신라말기에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로 이름을 날렸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속리산에 와서 남긴 유명한 시가 있다.

 

道不遠人(도불원인)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人遠道(인원도)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山非離俗(산비이속)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俗離山(속리산)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갈령으로 향하는 길은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다...이런 곳에서는

범여도 정상적인 대간꾼과 똑같은 산행 속도를 낼 수 있어 

큰 걱정은 없는데, 상주시에서 위험구간에는 편한 우회로를

만들어놔서 예전에 비해서 훨씬 편하게 내려간다

암봉(16:57)

갈령가는 길에 해가 저무는 청계산 두리봉을 바라보면서

세상살이에 많은 생각을 한다...견훤의 고향인 상주땅.

그런데 역사적인 자료를 보니 견훤은 상주에서 지지를 받지 못한듯  하다.

 

통일신라 말기 시절에 세력을 형성한 견훤과 왕건의 정책이 달라서 그렇다고 한다.

견훤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무력으로 신라에 맞섰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왕건은

신라에 유화정책을 펴면서 신라 왕실과 지방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지금의 경북 북부지역의 가은, 문경, 풍기, 예안 등의 호족들이 왕건을 지지했고,

당시 상주지역의 호족(豪族)이었던 가은땅의(지금은 문경시 가은읍) 호족인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玆蓋)까지 아들인 견훤이 아닌 왕건을 지지했다고 한다.

 

오늘 산길을 걸어면서 배운것은

세상을 살면서 인심을 잃지 말라는 진리를 배운다

 

* 호족(豪族)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으로 본래 중국사에서

  한대와 위진남북조시대 지방의 토착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신라말 고려초에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집단이 출현한 호족은 대토지소유로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병(私兵)을 중심으로 한 무력도 갖추고 중앙과 비슷한 관부를 두어

  지역민을 통치하면서 문화를 독점적으로 향유했고, 이 세력이 고려왕조를 성립시켰는데,

  건국 후 한 부류는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귀족화하였고 한 부류는 지방 향리의 길을 걸었다.

  향리(鄕吏:고려와 조선 시대에 한 고을에서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중인 계급의 관리)에게도

 과거(科擧)·천거(薦擧)를 통해 중앙관리가 되는 길은 열려 있었다.

고릴라 바위(17:01)

고릴라 바위 바로 아래에 조망바위가 있고 상오리에서

갈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헬기장(17:06)

헬기장으로 내려서니 저 아래에 호출한 화령택시가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다

갈령(葛嶺:443m:17:08)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었으나 고개 아래로 새로운 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구불한 고갯길을

넘지않고 갈령터널을 통해 쉽게 지나갈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대간 산꾼들이나

오르내리는 잊어진  고개였으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화령전투가 치열했던

곳이기도 했는데 갈령의 동쪽에는 청계산이 있고 서쪽은 형제봉이 자리하고 있다.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데 갈령(葛嶺)은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 있지만 칡을 뜻 하는 ‘칡 갈(葛)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순 우리말 ‘가르다’,

‘갈라지다’에서 어원을 찾는다.

 

물길을 가르거나 행정구역을 가르는 곳을 말하는데, 금북정맥의 가루고개, 영산기맥의

갈재나 노령(蘆嶺) 역시 마찬가진데  가르다는 ‘갈’의 우리말을 한자화 하면서 칡 갈‘葛’이나

갈대 노‘蘆’자를 들이댄 것이라(音借表記). 한자를 보고 그 뜻을 풀게 아니라 한자 이전의

우리말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칡이나 갈대와는 무관하게 ‘가르는 고개’라는 뜻의 갈령이다. 

갈령 정상에는 우복고을 관광화북’이라는 글씨가 나무속에 가려져 있다

고개 넘어 화북면 용유리에 우복동마을이 있는데 백두대간 청화산 남쪽

골짜기 마을로 최근들어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꾸며져 있으며. 우복동(牛腹洞)은

조선시대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 ‘우복길지(牛腹吉地)가 청화산에 있다’라는데

근거를 두고 소의 뱃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설을 한다...소 뱃속이 아늑한지 어떤지

들어가보질 않아서 알 수는 없고, 혹은 풍수에서는 ‘牛伏’이라 하여 소가

엎드린 형국으로도 풀이를 한다.

 

지난 여름에 만난 화령택시...이 분과 이곳의 대간과 지맥길을 걸으면서 10번 이상을

이용했던 탓인지 내 이름을 폰에 저장해놨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화를 하며 단박에

나를 알아본다... 차에 타자마자 포도쥬스 2개를 주는데, 혹시 까스명수같은 같은

소화제가 없느냐고 하면서 트렁크에서 까스명수 하나를 꺼내준다.

갈령에서 출발하여 20분만에 화령터미널에 도착하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자꾸만 갈수록 체력이 부치는데 이 길을 걸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화령터미널 버스 시간표(17:30)

터미널에 도착하여 18시 25분에 상주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는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대합실에

아무도 없이 나홀로 앉아서 상주가는 버스만 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자꾸만 줄어드는 농촌의 인구 탓인지 운행을 하는 버스도 줄어드는

모양이다...지난 여름에는 이곳에서 18시 25분에 상주로 가는 직행버스와

완행버스가 동시에 출발했는데 2개월 사이에 완행 버스만 있다 

화령발 → 상주행 버스표

18시 25분에 화령을 출발하는 버스는 상주터미널까지 달랑 나혼자다.

늦은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상추터미널까지 많은 버스정류장을 통과하지만

사람은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마리도 안 보이고, 버스 기사는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내가 안 탔으면 화령에서 상주까지 빈 차로 올뻔 했다...예상시간보다 일찍 상주에 도착한다

상주터미널(19:00)

상주터미널에 도착하니 서울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는 대합실에서

한참을 멍때리기를 한 다음에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화령택시 기사가

준 소화제 탓인지 속이 편안하니 잠이 쏟아지고, 얼마나 잤느지 버스가

경부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잠에서 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