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의 傲慢과 貪慾으로 점철된 대간길의 自畵像
☞산행일자: 2023년 11월 12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올 겨울 가장 추운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8km / 8시간 28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삽당령-임도-송현리갈림길-안부-무명봉-폐헬기장-안부
외고단갈림길-863.7m봉-이정표-안부-843.3m봉 갈림길-안부
무명묘지-906.1m봉 갈림길-906.1m봉-다시 906.1m봉 갈림길
암봉-안부-쉼터-안부-무명봉-982.9m봉-덕우리재 갈림길
두리봉-안부-무명봉-안부-988.9m봉-무명봉-안부-무명봉
무명봉-안부-석병산 갈림길-돌탑봉-석병산-일월문
다시 석병산 갈림길-폐헬기장-쉼터-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
안부-무명봉-무명봉-안부-911.6m봉-안부-무명봉-고뱅이재
안부-쉼터 갈림길-안부-ㅜ자 삼거리-897.8m봉-안부-쉼터
934.2m봉-안부-928m봉-조망봉-안부-쉼터-쉼터-824.5m봉
강릉 서대굴-쉼터-무명봉-쉼터-생계령-무명봉-765m봉-안부
무명봉-안부-쉼터-788.4m봉-무명봉-안부-큰피원 삼거리
무명봉-갈림길-무명봉-NO45 송전탑-무명봉-쉼터-무명봉
NO44 송전탑-자병산 갈림길-안부-도로-백복령
☞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옥계면 / 정선군 임계면/ 동해시
지난주 일요일에 전국적으로 비가 오는 바람에 산행을 하지 못했더니만
한 주 내내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않고,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것 같아서
엄청 불편하기 그지없다...이제 내 몸뚱아리는 산행에 모든게 셋팅이
되어있는 느낌이다...춥기전에 강원도의 산길을 한번이라도 더 갔다와야
되겠다 싶어서 이번주에도 아들의 愛馬를 빌려타고 삽당령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대동여지도 (출처:규장각)
새벽 4시쯤에 집을 나서서 영동고속도로 마지막 휴게소인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하여 따끈한 국물이 있는 것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삽당령으로 가려고
했는데, 음식 코너에는 영업을 하지않고, 편의점만 문이 열려 있어서 아무것도
먹지않고, 밖으로 나와서 자동차의 히터를 켜고 한 40분간의 非夢似夢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자동차를 몰고 삽당령의 도착하니 06시 50분...
삽당령 정상은 이제서야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2주전과는 달리 강한 바람이
불면서 엄청나게 추운데 자동차판의 게이지에 표기돤 온도계를 보니
영하 7도를 가리킨다...자동차 밖을 나오니 강한 바람 탓인지 엄청나게 추운
상태에서 산행을 준비한다
삽당령(揷唐嶺:682.3m:06:50)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과 정선군 임계면을 잇는 35번 국도가
지나는 해발 680m의 고갯마루로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짚고 왔던 지팡이를 버리고
(꽂아 놓고) 갔다 하여 '꽂을 삽(揷)'자를 써 삽답령이 되었다고 전하며,
이곳의 지형이 당나라에 있는 삽당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같아 삽당령이라
부르게 되었다도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정상에서 북으로는 대기(大基)로 가는 길과 서쪽으로는
고단(高丹)가는 길로 세 갈래로 갈라지는 삼지창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도 하는데, 이 고개는 강희 54년(숙종41년)인 1715년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府) 서쪽 60리 정선으로 가는 길’이라 기록되어 있다."
라고 적혀 있고, 고개의 양쪽 골짜기는 강릉시의 도마천과 정선군의 임계천 하곡을
잇고 있는데, 그래서 예부터 강릉과 정선을 오가는 길로 이용되었으며,지금은 35번
국도가 이 길을 지나고 있으며, 강릉~정선~ 태백으로 통하고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조선전기 문신 이행·윤은보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하여 1530년에 편찬한 지리서. 관찬지리서로55권 25책.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서로
이 책은 세 차례의 수교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으며, 원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였으며,
체재는 남송(南宋)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나라의 대표적 통지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 이에 ‘신증(新增)’의 두자를 삽입하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이 책은 더욱 희귀해져 일본 경도대학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군 3)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으며, 1455년(단종 3)의 을해자로 인쇄된
『동국여지승람』의 초간본 중 권37·38은 김두종(金斗鍾)이 소장하고 있다.
역시 강원도다...잠깐 사이에 너무 추워 손가락이 굳어지는 느낌이다
삽당령 성황당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무사 산행을 기원하고...
삽당령 성황당은
삽당령 정상에서 임계쪽 방향의 동물이동통로 직전에 있는 성황당은 휀스가 처져있어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조선조 제21대 임금인 영조 재위시절(1724~1776) 당시 삽운령이라
불렸던 이곳 삽당령으로 갓 시집 온 새 신부(경북 안동출신)가 밭일을 마치고 물동이를 이고,
샘물을 길러 나갔다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온 골짜기를 뒤지며 찾기
시작했는데 3일이 지나 찾게된 새 신부는 헝클어진 머리만 남아 넙적한 바위위에 놓여 있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너무나 처참하고 괴이한
모습에 새 신부의 恨이 깊을 것이라 여기고 시신을 수습하고 그 위치에 산신각(성황당)을
세워 억울하게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은 새 신부의 혼을 위로하는 한편, 삽답령을 오르내리는
길손의 안녕과 우마차의 무사고를 기원하며 매년 음력 8월 초정일(初丁日:초정일이라 함은
음양오행의 기준으로 한 색깔로는 붉은색 날에 해당하고 음력으로 표시된 일력을 보면 ‘丁’자가
들어가는 날이 있는데 그 달의 처음 丁자가 들어 있는 날을 초정일이라고 함)이 되면 익히지
않은 제물과 황소의 머리 및 주요 부위를 정성껏 마련하여 마을 원님을 모시고 성황제를 지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맞은편의 욕쟁이 할머니 막걸리집을 쳐다보니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삽당령 유래 안내판
산행을 시작하다(07:00)
올해는 웬지 휴일만 되면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더군더나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에 접어든 계절에 내리는 아무 쓰잘데 없는
비가 아닌가...어둠속에 걷는 무박 산행과, 비 올때 걷는 雨中 산행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범여로선 지난 일요일에 내린 비로 인해서 산행을 하지않고, 2주만에
산행을 나섰더니만 몸뚱아리가 엄청 무겁다.
2주전에 맞은편의 석두봉쪽으로 걸었고, 오늘은 역산행으로 삽당령에서
백봉령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데, 2주전에는 포근하고, 바람한 점 없는 정말
산행하기 좋은 날씨였는데, 오늘은 2주전 하고는 정반대의 날씨인 듯 하다.
초반부터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과 맞서야 했고, 올 겨울들어서 가장 추운듯한
날씨이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하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두꺼운 겨울장갑이 아닌 앏은 장갑 탓인지는 몰라도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손가락이 빠질것만 같은 추위가 엄습해온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버리고 호젓한 임도로 들어서니
완벽한 겨울철을 대비한(?)듯한 등로가 산꾼 범여를 맞이한다
임도(07:03)
삽당령 초입에서 우측으로 향한 임도를 버리고 직진길로 올라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를 5여분만에 다시 만나고...만나자마자 이별이라
했던가...왕산면 목계리로 향하는 임도를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든다
이정표가 옷을 갈아 입은 모양이다...예전의 정겨운 이정표는
사라지고, 동부지방 산림청에서 새로 설치한 이정표를 따라서
빡센 오르막을 천천히 올라간다...다행히 옴팍한 곳이라 그런지
삽당령 정상에서 불어대던 바람이 이곳에서는 좀 잠잠한 듯 하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빡센 오르막이지만 2주만에 걷는 산길이라 그런지
왠지 첫사랑의 만남처럼 산길에 들어선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면서 오르니 오늘 처음 만나는 갈림길에 오른다
송현리(松峴里) 갈림길(07:11)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게 무명봉에 올라서니 우측의 왕산면 송현리(松峴里)쪽으로는
‘등산로 폐쇄’라는 팻말을 보면서 좌측으로 두리봉으로 향하는 대간길을 이어간다.
왕산면 송현리(松峴里)의 지명 유래는 조선 태조 때 송경(松京)을 생각하면서
강릉의 서남쪽을 송현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송현리는 본래 구정면
지역으로 소재[솔재] 밑이 되므로 소재[송현리]라고 하였다는 설, 그리고 옛날
이 고개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생긴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다.
‘소재’는 ‘솔재’의 ‘솔’에서 ‘ㄹ’이 떨어져 나가 생긴 이름이다.
안부(07:14)
산죽이 보이는 안부를 지나 칼날(?) 능선을 통과하는데 아직까지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탓인지 양쪽의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매섭다.
올해 처음 만나는듯한 겨울 날씨가 추위에 지독히도 약한 범여를
괴롭히긴 해도 이 정도의 추위를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산꾼이
아니기에...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무명봉(07:18)
안부에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암봉과 새로 설치한 이정표가
나오고, 맞은편의 석두봉으로 향하는 산줄기로 따사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무명봉에 서 있는 이정표
무명봉을 지키는 앙증맞은 바위는 이런 추위쯤은 살아가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질 않는 모양이다...하기사 여가 어딘가?...강원도여!
안부를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가는데 예전에 다녔던 직진길의 오르막은
동부지방산림청에서 설치한 ‘등산로 폐쇄’ 팻말이 길을 막는다.
그리고 우측의 편안한 사면길을 걷는데, 대간꾼들의 띠지들도 우측으로 향한다
우측의 편안한 사면길을 따라서 한참을 돌아서서 가다가 좌측으로 올라간다
통나무 계단을 올라서면서 마루금에 복귀하고, 예전에 있었던 헬기장은
폐허가 되어버린 지도상의 780m봉으로 표기된 봉우리이지만, 국토정보
지리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그저 무명봉이다
폐헬기장(780m:07:24)
잠깐 사이에 아침해는 벌써 저만치 올라와 버렸구나.
날씨야...춥건 덥건 상관없고, 민초들의 세상사가 힘이 들건
말건 상관없이 뜨고 지며 걱정없는 저 해가 참으로 부럽구나
인생길이나 산길이나 언제나 내리막이 있으면...
안부(07:27)
오르막이 있는게 자연의 攝理인가...낙엽 아래에 얼어있는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간다...강원도라 그런가
공기 하나는 끝내준다...기저질환을 앓고있는 범여...
오늘은 참으로 숨쉬기가 편하구나
아무런 생각없이 오르다가 보니 무명봉이
나오는데 외고단 갈림길이 시작되는 봉우리다
외고단(外高丹) 갈림길(07:29)
강릉시 왕산면 고단리 외고단마을로 내려가는 등로가 우측으로 보이는데
고단리 마을은 1916년 한늪이, 다릿골, 사반동 등을 합쳐 고단리가 되었고,
1917년 면제개혁 때 상구정면이 왕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왕산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이 백두대간 고원지대에 있으며, 1009m의 덕구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마을 가운데로는 삽당령에서 발원한 고단천이 흐르며 일교차가 크고 강수량이 많아
국내 최고의 고랭지 농업 지역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단역은 府 서쪽 60리에 있다”고 하여 ‘高端’을 ‘高丹’으로 적었다.
고단은 높은 곳에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마을 가운데는 삽당령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거리고단에서 합류하여 정선군 임계면으로 흐르는 고단천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충신
高尙丹忠을 기려 고단리라 했다 하며, 또 다른 일설은 조선시대 南師古의 비결에 왕이 발왕산에서
출발하여 고단에 궁궐을 짓는다 하여 궁중의 색깔인 붉을“丹”을 쓴다고 한다.
자연마을로 한늪이(大淵洞), 샛골(間谷洞), 다릿골(橋洞), 사반동(沙盤洞) 등이 있으며,
한늪이는 과거 이곳에 큰 늪이 있었다는데서 불리는 이름으로, 현재는 개간되어 고랭지
농업이 활발하며, 사반동은 마을이 송현천 가에 있어 모래가 쌓여 있었다는데서 생긴
이름으로 문화재로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했던 덕우산 칠연정이 있다
텅빈 생각으로 길을 걷는다...佛家에서는 “空”이라 말하지만
일상적인 어감에서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며, 온갖 경험적인 사물이나 사건이 공허(空虛) 하여
덧없음을 뜻하며,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는 모든 술어(述語)나
속성(屬性) 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입장에서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술어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적극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머리를 비우고 아무런 생각없이 걷고 또 걷지만, 자꾸만 호스피스 病棟에서
生死의 기로에서 지금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모님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어제 병원을 같다왔는데, 아마도 이번주를 넘기기가 힘들것 같은 예감이 든다.
누구든간에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한번가는게 인생이긴 하지만, 자식을 많이
낳은 죄로 호강한번 못해보고, 자식들의 뒷바라지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노인네
생전의 삶이 참으로 허무하게만 보이는구나...어제 병실에서 큰 사위의 손을 잡고는
말씀도 못하시고, 悔恨의 눈물만 흘리시던 모습이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갈림길이 나온다...예전에는 산죽길 능선으로 대간길을 이어갔는데
지금은 좌측의 사면길로 대간길을 돌려놨다...사면길로 향한다
사면길 가는길에 강릉시와 정선군의 경계지점 표식이 있다
삽당령에서 이곳까지는 강릉시 왕산면이었는데, 이곳부터
우측으로는 강릉시 왕산면에서 정선군 임계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지만 좌측은 계속해서 강릉시 왕산면과 산길을 같이한다
호젓한 사면길을 걸으면서 북서쪽으로 바라보니...
2주전에 걸었던 안반데기 능선과 풍력발전기가
흐릿하게 보이는 고루포기산이 따스한 햇살을 머금고 있다
땅과 같아서 성내지 않고
산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네
阿羅漢은 번뇌가 없어
세상에 나고 죽음은 없네...
법구경 10장 羅漢品 중에서
* 법구경(法句經)은 불경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으로, 팔리어로 Dhammapada라고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Dharmapada라고 한다... 가르침의 조각들, 진리의 길, 진리의 말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후대에 나온 반야심경이나 법화경같이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면보다는 짧게
서술된 시들로 구성되었음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비불교도에게는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격언이라고 할 수 있고, 불교도들에게는 쉽고 간결한 시로써 불교에 입문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나한품(羅漢品)은 아라한(阿羅漢)의 품성과 관련된 내용으로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수행자로서 마지막 경지에 오른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한다...수행자에게는 아라한 이상의 수행 단계는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의 단계에 오른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한다
날씨가 많이 추운지 아직까지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릿발이 등로에 많이 보이니 이곳은 벌써 겨울에 접어든 느낌이다
음지를 벗어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족보가 있는 863.7m봉이 나온다
863.7m봉(07:38)
폐헬기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의 잡풀숲에 묻혀있는
낡은 삼각점과 대간꾼의 노란 시그널 하나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863.7m봉 삼각점(△488 재설 / 77.8 건설부)
이끼가 너무 심하게 끼여있어 판독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최근에 기록된 국토정보지리원의 2021년 5월 자료에는 ‘△구정 455’로
표기되어 있고,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 산 460-1로 지번이 표기되어 있다
예전에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않은 나무 계단 아래로...
따사로운 햇빛의 빛내림 영접을 받으면서 내려선다
삽당령을 출발한 지 꽤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가야할 두리봉은 멀게만 느껴지는데, 모든게 마음먹기에
달린 모양이다...해가 뜨고 나서부터는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는지
손가락이 빠질것만 추위가 누그러졌는지 손이 시리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드는구나
連理枝를 닮아가고 있는 갈참나무
이정표(07:44)
산죽길로 이어지는 대간길...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호젓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고라니인지 청솔무인지 모를 짐승 한마리가
계곡의 적막을 깨고 도망가는 바람에 나 역시 많이 놀랬다
안부(07:50)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무명봉을 올라서니 새로운 이정표가 산꾼을 반긴다
843.3m봉 갈림길(07:51)
이제서야 두리봉과 삽당령 사이 절반을 왔는데 바람한 점 없는 탓인지 발걸음이 느려진다.
등로 좌측으로 약간 떨어진 843.3m봉이 있지만 대간길 능선이 아니라 그냥 통과한다
산꾼의 맘이 변하고, 산길이야 변하던 말던간에
오직 대간길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저 소나무.
변치않는 너의 진심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안부(07:54)
안부에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대간길의 마루금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죽은 나무들조차도 저리 다정하게 지내는데, 하물며 萬物의 靈長이라는
인간들은 왜 화합하지 못하고, 남을 비방하면서 추하게 사는지 이해가
안되는구나
가야할 두리봉이 조금씩 가까워진 느낌이나 아직도 멀게만 보인다
잠시 잠잠하던 바람이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니 다시 불기 시작하는구나
무명묘지(08:02)
무심코 걷는데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무명묘지를 만난다.
예전에는 산에만 들어서면 죽기 살기로 걸었던 탓인가
지금은 천천히 걷다보니 예전에 보지못한 것들을 보는
여유를 느끼는데...이제서야 진정한 산의 妙味를 알것만 같다
고도차가 거의 없는 편안 능선으로 올라간다
906.1m봉 갈림길(08:05)
백두대간 능선에서 좌측으로 살짝 벗어난 906.1m봉으로
가는 길인데,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906.1m봉으로 향한다
906.1m봉 가는 길
906.1m봉(08:08)
아무도 찾지않은 906.1m봉 정상에는 峰산행의 大家이신
문정남 선생의 시그널 하나가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다시 906.1m봉 갈림길(08:11)
왕산 계곡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지만 따스한
햇살 때문인지 그리 춥다는 생각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편한 마음으로 길을 걸어간다
암봉(08:13)
안부(08:14)
쉼터(08:17)
쉼터 뒷쪽의 무명봉에서 대간길은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무명봉으로 올라서니...
잠시후에 오를 두리봉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안부(08:22)
조금씩 완만하게 고도를 높이는 탓인지 그리 힘드는 줄 모르고 걷는다
무명봉(08:25)
올라갔으면 내려가야 하는게 산행의 不變 원칙이제...
미국 예일대 교수 셸리 케이건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죽음의 본질과 의미를 철학적으로 접근했는데 케이건 교수는 죽음을
“생명의 소멸”로 정의하면서 죽음은 모든 생명체의 필연적인 종말로
그것은 동.식물이나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는 길...오늘따라 대간길이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푹신한 낙엽길은 이 겨울에도 어머님의 품 속처럼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건 이 산꾼만의 생각일까?
982.9m봉(08:40)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펼쳐지는 강릉 남(신산경표상:만덕)지맥 능선이
아련히 보이는데, 2021년 7월에 저 능선을 걸으면서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대형 알바를 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구나
무명봉에 올라서서 잠깐 숨고르기를 한 다음에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얼레지 군락지 팻말이 서 있다.
예전에 걸었던 경험으로 봐서는 두리봉이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덕우리재 갈림길(08:43)
덕우리재는 옥계면 북동리와 강동면 임곡리 사이에 있는 재로
덕우리골(德佑洞) 마을 제일 안쪽에 있는 고개를 말하는데,
덕우리골은 덕우리재에서 내려온 줄기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 가운데에는
달내(月川)가 흐르고 있으며, 옥계면 북동리에는 덕우리골과 검정밭골이 있는데,
마을 들머리에 있는 북동저수지에서 오른쪽 골로 가면 덕우리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검정밭골이 나오고, 덕우리골에서 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덕우리재가 되고,
내(川)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낙풍리가 된다
덕우리골에는 밀양박씨의 재실인 덕우재와 효부려가 있다.
옛날에 박씨 집으로 동냥 온 스님의 말을 믿고 묘 뒷등에 있는 비석을 깬 후
그 집안이 망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지금도 깨진 비석이 남아 있다.
덕우리재 방향으로는 강릉바우길과 강릉 울트라 산행 팻말과 함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어 무심코 걷다보면 대간길로 착각할 우려가
있을 듯 하다
강릉바우길이란?
소설가 이순원씨와 산악인 이기호씨가 강원도 전역의 길들을 이어 개척한 길로 백두대간의
대관령,선자령의 풍력발전단지에서 경포대, 정동진을 경유하는 11개의 트레킹 코스에는 바닷길,
산길, 숲길, 마을길, 둑방길 등 모든 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선자령 풍차길', '산 우에 바닷길' 등
11개 구간의 각 이름은 이순원 작가가 붙인 것이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르키며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강원도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 친화적인 트레킹코스이다.
바우(Bau)는 바빌로니아 신화에 손으로 한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죽을병을 낫게 하는 아주
친절하고도 위대한 건강의 여신이기도 하다. 이 길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바우 여신의 축복처럼
저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길 위에 담았다
100m 윗쪽에 있는 두리봉 정상으로 향한다
두리봉 가는 길
삽당령을 출발한 지 1시간 45분만에 두리봉 정상에 도착했으며,
내 기준으로 계산하면 생각보다 빨리온 셈이
두리봉(斗里峰 1033.4m:08:45)
강릉시 옥계면 북동리, 왕산면 목계리, 정선군 임계면 임계리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산꾼들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목재 테이블이 여러개가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는
강릉남(만덕)지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국토정보지리원과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
‘두리봉(頭理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두리’는 ‘둥글둥글하다’는 순 우리말로 ‘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로,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한 것에 불과하며, 두리봉 또는 두위봉(斗圍峯)으로 두리뭉실해서 두리봉이라
부른다고 한다...이 산줄기의 분기하는 가지줄기는 만덕봉에서 두 줄기로 나누어 진다.
한 줄기는 옥계로 보내고 다른 한 줄기는 칠성산으로 불리는 담정산을 지나 강릉으로
이어지는데 산자락 끝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인 굴산사가 있다.
* 사굴산파(闍崛山派)는 신라 말에 형성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의 문파로 신라 문성왕 때의
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조(開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는 스승인
제안으로부터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았고, 특이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창하였다.
진귀조사설은 선의 원류를 석가모니불에 두지 않고, 진귀조사로부터 석가모니가 선법을 전해받았다고
주장하는 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개청(開淸)·행적(行寂) 등 10대제자가 있었다.
범일국사는 847년(문성왕 9)에 중국에서 돌아와 충남 백달산에서 수행하던 중, 851년 명주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강릉 굴산사에 머물면서 사굴산문을 개창했는 명주는 김주원이 무열왕의
직계손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은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김주원은 명주군왕으로 봉해졌으며,
그후에도 이 계통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세거했으며, 범일도 그의 조부가 명주도독을 지낸 것으로
보아 그 계통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증샷
이곳 두리봉은 강릉남(만덕)지맥의 분기봉이기도 한 봉우리다
강릉 남(신산경표상:만덕(萬德) 지맥은 백두대간(白頭大幹) 두리봉(x1033.4m)에서
분기하여 △만덕산(1035.3m봉)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 피래분맥 (皮來分脈)을
북동쪽으로 보내고, 만덕지맥은 칠성대(953.7m봉), 매봉산(820.7m),△갈미봉(813.6m봉),
△모산봉(104.4m)을 거처 강릉시 견소동 공항대교에서 맥을 다하는 섬석천, 강릉남대천의
분수령으로 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 산경표에서는 강릉남지맥이라 부른다
봉우리가 높아서 그런가 세차게 불어대는 차가운 바람을 피할 방법이 없다.
바람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면서 서둘러 길을 떠난다
안부(08:50)
두리봉에서 완만한 내리막에 내려와 안부를 만나고 다시 오르막으로 향한다
무명봉(08:55)
무명봉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좌측의 상황지미골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따사로운 햇볕 탓인지 기온이 많이 올라간 듯 하다
다시 내리막길...산죽길 사이로 비춰지는 빛내림은
환상 그 자체이다
안부(09:00)
두리봉에서 내려온 것 만큼이나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데
좌측으로 오늘 산행의 白味인 석병산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보기보다는 낙엽 아래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동물의 이동을 감시하는 카메라도 보이고...
빛내림
빡세게 한달음 치고 올라서니 폐헬기장이 있는 988.9m봉이 보인다
988.9m봉(09:10)
988.9m봉은 두리봉과 석병산의 정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정상에는
폐헬기장이 있고, 이정표와 산림유전자원, 백두대간 보호지역 안내판이 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고뱅이재에 있어야 할 팻말이 왜 여기에 있는겨?
뒤돌아본 988.9m봉의 모습 뒷쪽으로 두리봉이 보인다
폐헬기장에서 암릉으로 된 무명봉으로 향한다
무명봉(09:12)
눈앞에 보이는 석병산은 생각보다 멀게만 느껴진다
안부로 내려서는 길에 좌측으로는 만덕봉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안부(09:16)
안부를 지나 돌계단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이고, 등로 걸려있는 시그널이
심하게 흔들리는데, 코 끝이 짠할 정도의 추위가 몰려온다
무명봉(09:21)
강한 바람에 저항하기 보다는 약간 비스듬하게 걸으면서 바람에 순응하며 걷는다.
지난주에 산에 오지 않은 것이 이렇게 몸뚱아리가 무디어 지는데,
산에 대한 매력과 그리움이 사무쳐오는 오늘 걷는 이 산길...참으로 좋다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石屛山
이름에 걸맞게 마치 암릉으로 둘러쌓인 산이 병풍을 둘러친 듯
보이는데, 우리 선조들이 산 이름 하나도 예사로 짓지 않았다는 걸
느끼며, 그 慧眼에 感服한다
깍아지른듯한 능선에 올라서니 바람의 강도는 더 심해지고
행여 산꾼들이 다칠까봐서 예전엔 없었던 안전로프를
동부지방 산림청에서 설치한 듯 한데 그저 고맙기만 하다
무명봉(09:30)
점점 산꾼의 곁으로 가까워져 오는 석병산을 바라보며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09:33)
석병산으로 향하는 또 다른 오르막길
월동준비를 끝내고 冬眠에 들어간 나무들 사이로 올라서니 석병산 갈림길이 나온다
석병산 갈림길(09:38)
대간 마루금에서 60m 벗어나 있는 석병산으로 향한다
석병산 갈림길에 있는 안내판
돌탑봉(09:40)
갈림길에서 올라 처음 만나는 봉우리...안내판에는 돌탑봉이라 되어 있고,
정상에는 깨져서 판독이 불가능한 3등 삼각점과 돌탑이 정상을 지킨다.
돌탑봉에 올라서니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만큼 강풍이 불어대고, 주변은
그야말로 一望無際... 막힌 血이 뚫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하다
석병산은 3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가 돌탑봉이라 부르고
석병산이라 부르는 主峰은 2번째, 주봉 아래는 日月門이 있고, 마지막으로
뾰족하게 새긴 봉우리를 일월봉이라 부른다
석병산 삼각점(△309재설 / 77. 건설부)
조금전에 두리봉에서 걸어온 마루금을 뒤돌아 본다
생각보다 완만한 길이고, 그 뒷쪽으로 2주전에 걸었던 고루포기산과
안반데기~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채소밭에 서 있는 풍력발전기가
아련히 보인다
山居(산에 살며) / 翠微 守初(취미 수초)
山非招我住(산비초아주)
산이 나를 불러 살지 않았고
我亦不知山(아역불지산)
나 역시 산을 알지 못하네
山我相忘處(산아상망처)
산과 내가 서로 잃고 사는 곳
方爲別有閑(방위별유한)
바야흐로 다른 한가함이 있네
* 취미대사(翠微大師:1590~1668)는 호는 취미(翠微), 자는 태혼(太昏)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후예(외손자)로서 성균관 북쪽의 이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의 뜻을 품었으나 형이 허락하지 않자 몰래 설악산으로 가서
경헌(敬軒)의 제자가 되었으며, 1606년(선조 39) 두류산(頭流山)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인
부휴(浮休)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부휴는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을 알고 제자 각성(覺性)에게 특별히 지도할 것을 부탁하였고
그 뒤 여러 고승들을 찾아가서 지도를 받고 서울로 올라가 이름 있는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유학에 관한 지식을 넓혔다.
저서로는 ≪취미대사시집 翠微大師詩集≫ 1권이 있으며, 부도(浮屠)는 중주(仲州)의 오봉사(五峯寺),
학성(鶴城)의 설봉사, 승평(昇平)의 조계사(曹溪寺) 등에 세워졌으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성총(性聰)·
해활(海闊)·민기(敏機) 등이 있으며, 이들은 조선시대의 불교계를 주도한 고승들이다.
그는 선교일치(禪敎一致)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정토문(淨土門)과 성도문(聖道門)의
2문(門)을 합일시키려 한 회통적(會通的) 성격을 반영시킨 고승으로 특히 회통의 이론적 기반을
화엄사상(華嚴思想)에 두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를 모색하였다.
또한 선승(禪僧)인 그가 정토왕생(淨土往生)과 타력신앙(他力信仰)을 주장한 점은 한국불교사상사에서
주목되는 한 유형으로 유학에 대한 식견은 당시의 유학자인 김육(金堉)·이식(李植)·이안눌(李安訥)
등으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돌탑봉에서 석병산을 바라보면서 다시 내려간다
석병산 정상으로 가는 길의 强風도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돌탑봉에서 내려와 안부를 지나 석병산 정상으로 향한다
석병산(石屛山:1052.5m:09:42)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석병(石屛)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정상에 서면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찍이 동해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다.
동쪽과 북쪽의 급사면에서는 주수천(珠樹川)의 지류가 발원하고, 서쪽의 완사면에서는
임계천의 지류가 발원하며, 남동쪽 비탈면에 옥계석화동굴이 있고, 생계령 기슭에는
임계 카르스트지형이 있다...서쪽 기슭으로는 강릉~태백 국도가, 남쪽 기슭으로는
정선~동해 국도가 각각 지나며 석병산에는 바위 한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일월문과 철쭉꽃 군락지가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삽운령 동북쪽 줄기 상에 있는 큰산으로 “담정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산이 석병산인데, 이러한 표기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에도 나타나는데
석병산이란 이름을 기암괴석들이 바위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돌 병풍처럼
보인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석병(石屛)산”으로 불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담정산이란 지명은 남대천이 발원하는 석병산과 두리봉 사이의 골짜기를 “담정골”
또는“담정계곡”으로 불리던 것이 구전된 것으로 보이며 담정골에는 고려에 대한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져 온다.
고려 "우왕"은 전란을 피해 대관령 근처 제왕산에 제왕산성을 쌓고 피난시절을 보냈는데
이 때 성 안에서 우왕을 모시던 유신들은 고려가 멸망하자 우왕의 위패를 모시고 담정골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위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곳이라는 의미로 담정골의 이름을
“단경동(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바로 아래에는 안내판에 표기된 일월봉(日月峰)이라 표기된 암봉인데
엄격하게 보면 석병산이라 부르는 3개의 봉우리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예전의 대간길에 한번 가 본적이 있었는데,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암봉으로 석회석 재질의 푸석푸석한 돌이라서 상당히 위험하여
주의를 해야할 봉우리다
일월봉 너머로는 두리봉에서 분기하여 만덕봉~칠성대~매봉산으로 이어지는
강릉남(신산경표상:만덕)지맥이 뚜렸하게 보이는데, 2년전 여름에 저곳을
홀로 걸으면서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곳이라 그런지
왠지 아련한 추억이 다시한번 생각나게 만드는구나...세월이 흘러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그 당시는 生死의 촌각을 다툴만큼 위급한
사항이었고, 어둠속에 길을 잃어 버려 길이없는 계곡을 따라서 한참을
내려오니 방터골이 나오고, 그 당시에 코로나라는 역병이 창궐하여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어서 힘이 들었는데 다행히 요양원에 근무하시는 분을
만나서 九死一生으로 산행을 마감한 기억이 저 능선을 바라보니 새롭게
생각이 나는구나
석병산 인증샷
석병산 정상의 바람은 장난이 아니지만, 온 사방이 시원하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석병산에 오른 본전은 뽑은 셈이다...두리봉 너머로 보이는 고루포기산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발왕산, 우측으로는 능경봉과 제왕산도 아련히 보이고, 그 뒷쪽에
있는 선자령과 황병산, 노인봉은 너무 멀어서 그런지 흐릿하기만 하다
석병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월봉과 그 너머에 우뚝솟은 만덕봉의 모습
삽당령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두리봉(1,033m)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뻗어나가다가 솟은 봉우리로 옥계면의 주수천(珠樹川), 왕산면의 도마천, 강동면의
군선강(群仙江) 등의 발원지이며,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 망월을 보려고 많이 올라간다고 하여
망덕봉이라 부르던것이 변천되어 지금은 만덕봉(萬德峯)1,035m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봉우리 우측 아래로는 단경골 계곡이 있다... 한때 동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탈출로로
이용된 적이 있을 만큼 계곡이 깊으며, 단경골(檀京谷)이란 이름은, 고려말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 충신 최문한·김충한·이장밀·김지를 비롯한 수십 명이 이 지역으로 피신해왔다.
이들은 굴산동에 고려의 종묘(宗廟)를 모시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우왕의 제사를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어단을 만든 사실이 발각되자 유신들은 사패(祠牌)를 모시고 골짜기로 숨었다가
단경골 뒷산인 석병산(石屛山)에 사패를 모시고 개동명왈단경(改洞名曰檀京)이라 한 뒤 각자
흩어졌는데, 그 뒤부터 이곳을 단경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설은 주변에 박달나무가 많아 단경(檀景)이라 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계곡 근처에는 이이(李珥)의 위패를 모신 송담서원(松潭書院, 강원유형문화재 제44호)과
정동진해수욕장·경포도립공원 등 유적지와 관광지가 많다
서남쪽으로는 노추산을 비롯한 정선의 산그리메가 펼쳐지는데
보이는 것이라곤 산 밖에 보이지 않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석병산의 강한 바람을 피하여 정상을 내려와서 석병산 아래에
있는 일월문(日月門)으로 향하는데, 이 길을 따라서 계속 내려가면
상황지미골이 나오는 길이다
아그들의 흔적
석병산 일월문(09:44)
석병산 정상의 우측 아래에 커다란 천연 동굴 형태의 돌구멍이 있는데
이곳을 일월문(日月門)이라 부르는데,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며, 석병산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추면 장관이라고 한다.
휴식(09:46~10:05)
일월문을 들렸다가 올라오는 석병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는 바람이 불지않아
이곳에서 아침겸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가지고 온 인절미에다가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이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석병산 갈림길(10:06)
석병산을 내려서면서 강한 바람이 많이 잦아 들은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날머리인 백복령까지는 현재의 내 발걸음으로는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면서
걷는 이 기쁨은 지난주에 걷지 못한 산길을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폐헬기장(10:08)
잡풀이 무성한 폐헬기장에는 망가진 이정표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대간 마루금은 직진의 뚜렸한 등로로 이어지고, 이정표 뒷쪽의 등로가
보이지 않는 내리막 등로로는 상황지미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셈이다
상황지미골(上凰池尾谷)은 강릉시 옥계면 산계3리에 있는 마을로서 지명의 유래는
봉황이 날아오는 정자에 못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며, 상황지미골(上凰池尾)은
황지미골 안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석병산과 만덕봉에서 내려온 줄기 사이에 있고,
상황지미골로 들어서면 증어리가 나오고, 왼쪽 계곡인 증어리골로 들어가면 석병산이 되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선목이가 된다.
증어리골에는 범바우골이 있는데 이곳이 황지미골 마갈이며 산계8경 가운데 하나인
호암잔설(虎岩殘雪)에 해당되며, 상황지미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하황지미가 된다
옛날에 사일거사(四一居士) 심래조(沈來助)가 무릉도원을 찾다가 황지미에 들어오게 되었다.
심래조는 이곳이 무릉도원과 비슷하다고 하여 냇가 바위에 방도계(訪桃溪)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그 옆에 봉황이 많이 날아오는 곳이라 하여 봉래정(鳳來亭)[나중에 迎鳳亭으로 고침]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마을 입구 냇가 바위에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한다
내리쬐는 햇볕이 따사롭기만 하다
쉼터(10:11)
바람마져 잠깐 머문 산자락에 지나가는 산꾼이 없는 탓인지 그리움에
지쳐서 안쓰럽게만 보이는 의자가 마치 이 범여의 삶과 같은 처지처럼
보여서 同病相憐의 측은한 생각이 든다...나라도 잠깐 쉬었다 갔으면
좋으련만...조금전에 휴식을 취한 탓에 가야할 길이 너무 멀어서
길을 떠난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슬슬 산죽의 군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주수천(珠樹川)의 모습
강릉시 옥계면 일대를 흐르는 옥계면에서 가장 큰 하천으로 총 길이는 15.5km로,
옥계면 산계리의 생계령, 절골, 황지미골 등 세 곳의 물이 학림(鶴林)에서 모여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른다... 상류에서는 두리봉(1,033m), 석병산(1,055m), 자병산(972.5m) 등의
높은 산지를 지나면서 협곡을 형성하여 곡류하면서 흐르다가 하류로 가면서 유로가
직선화되어 남양천, 낙풍천 등의 작은 하천들이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나간다.
통나무 의자가 있는 쉼터에서 5분정도 내려오니 등로 가운데 무명묘지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5.9km를 가면 백두대간 수목원이
나오고 백복령으로 가는 길은 직진의 내리막으로 향해야 한다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10:16)
석병산의 줄기들이 옥계면 산계리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황홀한 빛내림이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부(10:24)
八等身처럼 쭉쭉빵빵 뻗어있는 낙엽송 조림지를 지나서
호젓한 발걸음은 계속되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나훈아의 노래 ‘남자의 일생’이라는 가사가 남자들의
힘듦을 말해주는 느낌이라 그런지 가슴에 와닿는다
한참을 내려왔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향한다
무명봉(10:29)
" 적당히 일하고 좀 더 느긋하게 쉬어라.
현명한 사람은 느긋하게 인생을 보냄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
< 그라시안 >
무명봉(10:37)
메마른 겨울산을 오르내리지만 땀 한방울 나지 않으니 산행의 묘미가 없다.
겨울산을 걸을때는 여름 산길을 그리워하고, 여름 산길을 걸을때는 겨울
산을 그리워하니...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간사하다
안부(10:43)
석병산을 지나서 한참동안 고도를 낮췄다가 다시 飛翔을 준비하면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2주간의 휴식 탓인지 그리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않고, 천천히 911.6m봉을 향한 오르막길로 향한다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석병산이 아쉬운 듯 산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생각보다 조금 수월하게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공터의
폐헬기장에 이정표가 서 있는 911.6m봉 정상에 도착한다
911.6m봉(10:52)
911.6m봉의 넓은 공터를 지나...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162지맥을 두루 섭렵하고 다시
백두대간을 시작하신 듯한 대구 산꾼의 legend 비실이부부님의
따끈따끈한 시그널이 산꾼을 반긴다
대간길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미역줄기 사이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이어간다
안부(10:56)
지나온 석병산과 그 뒷쪽으로 보이는 만덕봉의 모습
무명봉(10:58)
등로에서 바라본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주수천의 모습
산계리 너머로 옥계항과 동해바다가 미세먼지 탓인지 흐릿하다
옥계항을 바라보면서 내려서니 ‘백두대간과 석병산’이란
스텐레스 안내판과 망가진 이정표, 통나무 의자가 있는
고뱅이재에 도착한다
망가진 고뱅이재 이정표
누군가가 망가진 이정표를 가지런이 정리를 해놨는데 석화동굴
표시는 이정표 뒷쪽으로 해놔야 맞는데, 착각을 한 모양이다.
석화동굴(石花洞窟)은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동굴로 절골에 있어 절골굴이라고도
하며, 만덕봉·두리봉·석병산 일대는 약 10만 년 전 고생대에 생성된 석회암지대로 곳곳에
많은 석회동굴이 발달해 있는데,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총연장
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이라 한다.
고병이재(11:05)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임계리 큰골의 동서로 잇는 고개로
일명 골뱅이 재라고도 불리고, 옛 지도에는 기뱅이재로 나와 있는 등
지명이 제각각이며, '고뱅이'는 강원도 사투리로 '무릎'이라는 뜻이란다.
고뱅이재 정상의 모습
고뱅이재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대간길의
대표적인 자연 파괴 지역의 산인 자병산(紫屛山:775.9m)이
흉칙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망가진 산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양식있는 대간꾼들은 2번의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대간을 끝내는 진부령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북녘땅을 걷지
못한다는 생각에 悔恨의 눈물을 흘리고, 2번째는 저 자병산을 바라보면서
망가진 자연 파괴현장을 바라보면서 운다고 한다
안부(11:10)
안부에 있는 한계령풀 안내판
이곳에도 한계령풀 군락지인 모양이다
설악산 오색계곡의 한계령 능선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므로 한계령풀이라고 하는데
그 밖에도 중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환경부에서 희귀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난 한계령풀꽃을 찍으러, 태백산 유일사 군처와 청태산으로 출사를 자주 다녔다
쉼터 갈림길(11:12)
대간길은 직진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능선이 이어지는 임계면 체육회에 만든
수목원(백두대간 수목원을 말하는 듯) 방향의 사면길로 마루금이 이어진다
오르막 봉우리 방향이 아닌...
사면길을 따라서 편하게 걸어간다
안부(11:16)
안부를 지나서 오르막으로 향한다
잡목의 저항이 거칠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르막길 등로는 뚜렸하다
아그들을 오늘은 자주 만나는구먼...다들 잘 있겠지
조금 빡세게 올라서니 통나무 의자가 있는 ㅜ자 삼거리가 나온다
ㅜ자 삼거리(11:30)
우측으로 가면 임계면 임계리 방향으로 향하는 넓은 등로가 보이고...
내가 올랐던 길로는 수목원으로 가는 임계면 둘레길인 모양이다
좌측으로 향하니 삼각점이 있는 897.8m봉이 나온다
897.8m봉(11:32)
정상에는 4등 삼각점과 백두대간 안내판이 서 있다
897.8m봉 삼각점(△434 재설 / 77 건설부)
897.8m봉 정상에 있는 백두대간 안내판
잠시후에 내가 걸어야 할 대간 등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직진으로 이어가는 대간길 앞에는 961.8m봉이 보이지만 큰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저 봉우리 가기 직전에 대간길은 좌측으로 꺽어지니까...
등로 좌측으로는 인간들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하여 봉우리가
날아가버린 자병산이 허연 속살을 드러낸 모습이 산꾼에게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저 추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다시 벌거벗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안부(11:50)
쉼터에는 낡아빠진 복수초의 안내판이 보인다
홀로걷는 겨울산은 煩惱를 털어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想念에서 벗어나 걷고, 또 걷다보면 無我之境에 경지에 도달하는
느낌이다...그래 부처가 따로있나...부처처럼 행동하면 내가 부처인데...
쉼터(11:52)
입맞춤?
934.2m봉(11:56)
이 분은 지맥파(支脈派) 이신 모양이다
능선 줄기에는 다시 강한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고, 한낮이
날씨는 그리 춥지 않으나 바람의 영향인지 자꾸만 옷깃을 여미게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정선군 임계면 임계리(臨溪里)의 모습
임계리(臨溪里)는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점촌, 장승거리,
도톨고지 등이 있는데, 점촌은 과거 이 지역에는 옹기그릇을 만들어 파는 공장이
있었다 하는데, 점토가 많이 난다고 하여 점촌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장승거리는 임진왜란 당시 아군의 병력이 부족한 것을 왜군이 모르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과 비슷하게 나무로 깎아 만든 장승을 무수히 세워 놓았던 곳을 지금까지
'장승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안부(12:00)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로 대간길은 이어지고...
산계리 너머로 보이는 동해바다...7번 국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사면길을 따라서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는데 대간길에서
벗어나 있는 934.2m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928m봉(12:07)
이곳에서 우측으로는 934.2m봉과 민둥산(938.8m:억새로 유명한 민둥산이 아님:
정선군 임계리와 직원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쉼터가 있는 928m봉에 바라본 934.2m봉... 저 뒷쪽에 민둥산이 있다
928m봉에서 좌측으로 가니 아주 전망이 좋은 조망봉이 나온다
조망봉(12:10)
이름답게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지나온 석병산과 두리봉(좌),
만덕봉(우)...그리고 내가 오늘 걸어온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움 / 김준태
꽃은 죽어서
하늘로 날아가고
나비들은 죽어서
땅으로 내려온다
사람은 죽어서
하늘에 자신의
그림자를 적시고
새들은 죽어서
땅 위에
자신의 날개를
퍼덕퍼덕 남긴다
그리움 때문일까
살아서
못다 한 그리움!
땅 위의 목숨은
하늘로 날아가 목숨을 이루고
하늘 위의 목숨은
땅 위에 내려와
목숨을 이룬다
능선 좌측의 산계리쪽은 천길 낭떠러지...오금이 저릴정도로 아찔하다
조망봉 정상에서 사정없이 급경사의 내리막길
마치 극락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으로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우측에는 잣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벌목을 하는지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다
급경사 내리막길의 끝이 보이는 듯 하다
안부(12:30)
좌측으로 지나온 897.8m봉, 911.6m봉, 석병산과
그 뒷쪽으로 만덕봉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조금전에 급하게 내려온 조망봉을 바라보는데, 내려온
등로가 肉眼으로도 까칠하게 보이는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안부에서 고도차가 없는 완만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쉼터(12:36)
쉼터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824.5m봉으로 향하는데
잠시 주춤했던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는데 좌측에 있는
동해바다의 영향인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속담이다.
저렇게 수백년 의연한 소나무는 산바람이 일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산과 바람이 부여한 악조건을 이유없이 저항없이 다 받아들여도 저렇게
수려한 모습으로 정정해 보이는구나...지금처럼 모든걸 훌훌 던져 버리고
山河를 따라 평생 오르 내리다가 온 천지가 白雪로 만곤건(滿坤乾) 할 때
세상에서 저 나무처럼 천갈래 만갈래 뻗어가며 독야청청(獨也靑靑)
낙락장송(落落長松) 금강적송(金鋼赤松)이라도 될까나?
좌측으로 정상의 봉우리가 날아가버린 흉물스런 자병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들은 세상을 얼마나 더 뜯어고쳐야 평안을 얻을까.
산천을 막무가내로 뜯어고치는 건설의 포크레인 소리,
여기저기 엄청나게 파 뒤지어 쌓아놓은 흙더미, 아! 아! 하루라도 좋다.
건설 없는 평화로움 속을 나는 거닐고 싶다. 정말 우린 왜 사는가?
뜯어고쳐야 할 세상을 두고 사람들은 강과 산을 뜯어 고친다”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님이 읊은 「세한도」의 일부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꽤나 많이 남았는데 먹은 것이
변변찮아서 그런지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강한 바람 탓에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구나
쉼터(12:43)
이곳에서 망가진 자병산이 가장 확실하게 잘 보이는 곳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철저하게 망가진 자병산의 모습.
석회석 채취 현장에서 서면 “자주 빛 병풍은 옛말” 운운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병산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걷고있는 석병산~자병산 구간 일대는 카르스트지형으로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산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자병산은 마루금에서 사라진 대신 생태보전 관련 매스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산으로 변해버렸고, 마치 눈에 뒤 덮힌 듯하기도 하고 스키장이기도 한 듯한
산이 멀리에서 시야에 들어오는데 저 곳이 자병산이다.
눈처럼 보이는 것은 석회석 채취 때문이고, 스키장인 듯 한 것은
정상부를 슬로프처럼 깍아내었기 때문인데 산의 형태가 변했으니 병풍은 있을 리 없다.
대간꾼들의 산행기에서 자주빛 병풍이라는 말은 옛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등로 가운데 서 있는 멋쟁이 소나무를 지나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등로 능선 아래로 펼쳐지는 금강송 군락지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향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구나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가니 경, 위도 표식이 되어있는 824.5m봉 정상이 나온다
824.5m봉(12:53)
824.5m봉 정상에 있는 경,위도 표시목
824.5m봉에서 다시 내리막 능선으로 향하는데 오늘 산행에
오르 내리막이 계속되는 빨래판 구간이라서 은근히 힘이든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강릉 서대굴 표시판이 나온다
강릉 서대굴(강원도 기념물 제36호:12:58)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석병산 중복벼랑에 위치한 강릉 서대굴은
주굴(主窟)의 길이는 약 800m이고, 총 연장은 1,500m이다.
하부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8천만년 전)에 퇴적된 조선누층군
석병산층 석회암 내에 형성되어 있으며, 석병산 석회암층(石屛山石灰岩層)
내에 형성된 수직동굴(垂直洞窟)이다. 일명 ‘범록굴’이라고도 한다.
서대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 약 250m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며,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으며 주변의 동대굴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데,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으며 옆면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그리고 꽃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서대굴이 위치하고 있는 산계리 지역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들이 모여 있는
동굴지대로서 동굴들의 형태가 모두 같으며, 강릉 서대굴은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고도차가 거의 없는 등로로 내려가니 쉼터가 나온다
쉼터(12:59)
겨울이면 어김없이 강원도의 산길에서 만나는 겨우사리도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은 잠잠해지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등로를 따라서 목적지인 백복령으로 향한다
무명봉(13:04)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면서 내려가는 이 기분도 참으로 좋다.
홀로 걷는 산꾼이 아니면, 이 호젓한 기분은 만끽할 수 없제...
그러기에 난 기분을 만끽하러 홀로 걷는지를 모르겠다
아쉽다면 맞은편에 보이는 망가진 자병산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 뿐...
그래 자병산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잊어버리자꾸나
쉼터(13:07)
오늘 등로에는 유난히 통나무 의자로 만든 쉼터들이 많이 보이는데,
대간꾼들을 위한것이 아닌 임계면의 둘레길 등산객들을 위한 것인듯
한데, 이렇게 쉬다보면 언제 산행을 할까하는 씰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낙엽이 미끄러운 등로로 내려서니...
생계령이 시야에 들어오고...
곧이어 생계령으로 내려선다
생계령(生溪嶺:640m:13:15)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큰피원을 잇는 고개로
옥계면 산계리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개로
산계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 고개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이 고개에서
도토리 열매를 채취했다고 하며, 생계령은 거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생계령은 동쪽 산계리에서, 또는 산계리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산계령’이라
일컫던 것이 변음(變音)되어 생계령이 된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르게 ‘쌍계령’ 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산계령이 경음화 된 것으로 보인다.
생계령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옛날에 지관이 이 산에서 닭 두 마리를 울게 한 뒤 묘지를
잡았다 하여 쌍계령(雙鷄嶺)으로 부르던 것이 지금은 생계령으로 불리고 있다.
생계령의 이정표(→옥계 1.9km, ←직원리 2.1km↑석병산 6.8km,
↓카스트르지형 황토음식점 2.9km)가 있고 대간길은 음식점 방향이다
임계면 직원리와 옥계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로 이어지는데
자동차가 다닐정도의 비포장 임도이고, 직원리 방향으로는
커다란 밭과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정선군 임계면에 속한 직원리(稷院里)는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를 이루는 산촌으로
마을 동쪽으로 등갈산과 갈고개가 있고 서쪽으로 못둔지들이 있는데,자연마을로 구룡동,
군대동, 늙은피, 도전동, 안도전 등이 있다... 구룡동은 직원리 남쪽에 있는 마을, 군대동은
직원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늙은피는 직원리 서남쪽에 있고 도전동은 직원리 남쪽에 있다.
안도전은 도전동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생계령 안내판
생계령...내 생전에 5번째 대간 종주를 한다는 확신이 서지않아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어서 아쉬운 맘으로 뒤돌아 보고는...
백복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정표상에는 백복령까지 5.9km 나 남았다고 되어 있다
오후가 되면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내 몸뚱아리의 특성을
알기에 부지런히 백복령으로 향한다
갈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인생살이의
세월의 무게 때문일까...무미 건조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오늘도 산 길을 걷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 형성된 카르스트 지대쪽은 안전로프가 처져있고,
조금씩 고도를 높이면서 마지막 피치를 올리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석병산이 홀로걷는 범여가 안쓰러운 지
자꾸만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걱정마소...잘가고 있습니다
잘 관리된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무명봉(13:34)
안전로프가 처져있는 카르스트 지대를 지나 오르막으로 향하는데
똑닥이 카메라가 추운 날씨 탓인지 베터리가 다됐다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하고...
카르스트 지대를 지나서 통나무 계단을 따라서 오르막으로 향한다
자병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고도를 높일수록 범여의 숨소리는 가팔라지고, 다리는 자꾸만 무거워진다
대단혀요!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대간 마루금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765m봉(13:46)
다시 마루금은 내려가기 시작하고...앞에 보이는 저 능선을 따라서 좌측으로 가야한다
안부(13:52)
내려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올라가야 하는게 不變의 산행법칙인 모양이다
무명봉(13:58)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4:03)
점점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똑닥이 베터리의 눈금이
사라져 버렸지만 간간히 셧터가 작동하니 고맙긴 하지만
언제 작동이 멈춰 버릴까 하는 조바심이 범여의 애간장을
태운다... 난 사실 스마트폰의 사진을 찍는데는 좀 서투르다
산이 범여를 배려하려는지 잠시동안 편안 길을 걷는다
쉼터(14:15)
경.위도 표시목을 지나서...
능선에 올라서니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는 788.4m봉에 도착한다
788.4m봉(14:17)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나뭇가지 사이로 오늘의 날머리인 백복령의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지금 걸어왔던 방향으로 1.2.3코스는 가는 길이라
해놨는데 대간 산꾼들에게는 아무 씨잘데 없는 표식인듯 싶다
무명봉(14:22)
갈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등로 가운데로 내려선다
직진 능선이 아닌 사면길로 내려간다
안부(14:25)
안부에서 2분정도 걸으니 자동차가 다닐만큼의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생계령의 이정표에서 만난 카르스트 지대 향토 음식점으로 가는 길이다
큰피원 삼거리(14:27)
우측으로 가면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큰피원으로 가는 길이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백복령으로 향한다
무명봉(14:32)
무명봉을 내려서서 내려서니 돌리네 지역이 나오고...
쉼터 형태의 사각평상이 있는 향토음식점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4:32)
갈림길 옆에 있는 카르스트 지형 안내판
‘돌리네’지역을 강원도 사투리로 ‘쇠곳’이라 하는데, 이는 빗물이 석회암을
용해하여 지하에 대규모 석회동굴을 만들기도 하고, 함몰 지를 만들거나
지하에 하천이 흐르게 되는 구조로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땅이 내려앉아
있는 함몰 지를 여러 곳 발견할 수 있다.
카르스트(karst)는 유럽 발칸 반도 북서부 슬로베니아에 속한 카르스트 지방의
지명에서 나온 학술용어로, 석회암 분포지에서 용식에 의해 형성된 지형을 가리킨다.
백복령 카르스트 지대는 임계면 직원리 산1-1 등 11필지에 해당되며, 2004년 4월 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543,000㎡이다
카르스트의 생성과 발달은 암석 및 기후조건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카르스트 작용의 규모와
그 강도는 가용성 암석, 특히 석회암의 탄산칼슘 함유량과 절리 · 층리 · 단층선 등 공극의
밀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나라의 주요 카르스트 분포지역은 황해도의 곡산 · 수안 · 신막 · 평산, 평안남도의 덕천 · 양덕 ·
신창 · 성천 · 순천 · 강동, 함경남도의 고원 · 문천, 강원도의 삼척 · 평창 · 영월, 충청북도의 단양 ·
제천, 그리고 경상북도의 문경 지역 등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카르스트 지형은 대부분 캄브로-
오르도비스기에 퇴적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 지대에 발달한다.
정선 백복령 카르스트 지대는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많은 돌리네가 분포하는데,
대부분의 돌리네는 너비에 비해 깊이가 얕은 형태로, 지름은 수 m에서 수십여 m에 달하는
것까지 다양하며, 특히 임계면 가목리 북쪽 능선 주위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돌리네가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 지하로 스며든 유수나 빗물이 산맥을 관통하여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일대로 스며 나와 계곡수나 용천수를 이루는 것으로 추정된다.
돌리네(Doline)는 일명 쇠곳이라 하는데, 빗물이나 지하수에 의해
용해되거나 지반의 함몰로 생긴 우묵한 타원형의 지형을 말한다
원 대간 능선은 돌리네 구덩이 좌측의 능선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대간꾼들이 다닌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임도를 바리고 직진의 나무 계단으로 대간길을 유도한다
잣나무 조림지를 끼고 편하게 오르는데 아마도
송전탑을 건설하면서 만든 임도처럼 보인다
꼬여버린 삶
무명봉(14:46)
묘지를 이장한 듯한 무명봉에서...
다시 오르막으로 향하는 길...길은 좋으나
체력이 바닥이 나서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NO45 송전탑(14:53)
송전탑을 우회해서 올라간다
카르스트 지대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한참을
우회한 다음에 오리지널 백두대간 마루금에 복귀한다
무명봉(14:57)
송전탑을 건설하면서 만든 임도를 따라서 룰루랄라 하면서 백복령으로 향한다
쉼터(15:00)
쉼터 좌측으로 100여m 지점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860m봉이
보이고 저 곳이 대간 마루금이나 그냥 편안한 임도로 내려간다
체력도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하여 860m봉을 띵가 묵고 그냥 임도로 향한다
편안한 길을 내려간 다음에...
다시 대간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
능선 바로 앞에는 흉물스런 자병산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속살을 드러 내놓고 있다
무명봉(15:05)
무명봉을 내려와서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백복령으로 향한다
NO44 송전탑(15:08)
자병산 갈림길(15:09)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5:10)
대간 마루금은 직진으로 가야하고, 이곳에서 올라서면 족보가 있는
834.0m봉이나 대간꾼들 대부분이 띵가묵고 가는 봉우리라
범여도 時流에 편승하여 834.0m봉을 패스한 다음에 그냥 임도로
내려간다
임도에서 바라본 자병산(775.9m)의 모습
자병산은 원래 백두대간에 포함된 산으로, 1994년 이전에는 자병산이 있어
대간 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쳐 갔으나, 그 뒤 한라시멘트에서 시멘트 재료인
석회석을 채취하기 위해 대간길을 완전히 기형아로 만들어 버렸다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산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셈이다
자병산(紫屛山:775.9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려한 경관의
산계8경에 속하는 자병산이 있었으나 시멘트 재료 채취로 형태마저 없어졌다
자병산은 강원도를 동서로 가로 질으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경계로 자리 잡고 있고
수병산, 괘병산,석병산 등과 함께 아름다운 산군을 형성 하였다.
자병유화로 불리기도 하는 자병산(자주빛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산이란 뜻)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생겨 난 말이며 가뭄 때 자병산 산자락에 있는 닭목병대(닭목대)에서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러한 기우제는 80년대초 까지 이어 지다가 자병산이 헐리기 시작하면서
오랫 동안 전해져 오던 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紫屛油花 또는 紫屛血花“란 닭의 피를 뿌릴 때 나타나는 모습이 ”혈화”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낼 때 혈화(닭의 피꽃)가 피면 비가 내린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백복령으로 향한다
띵가문 834.0m봉 내려온 길을 다시 만난
다음 채석장을 통과하는 시멘트 도로를 만난다
도로(15:17)
석회석을 채취하여 공장(한라 라파즈)으로 나르는 도로를 가로 지르는 곳에
공장에서 설치한 듯한 이정표가 보이는데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도로 우측으로는 동해에서 정선으로 이어지는 42번 국도가 지나간다
자병산 채석장으로 가는 길
시멘트 도로를 가로질러 백복령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냥 사면길로 대간 마루금을 유도한다
정말 웃긴다. 이 나라 등뼈인 대간길을 자기들의 사유물처럼 마구 홰손한 죄
치도곤으로 다스려야 할듯 싶다
자연 복원현장 - 자병산의 파괴현장 바로옆에 어이없게도 생태보전 특별구역을 정해놓고 있다.
4년전 저 능선위에 자연 복원현장이란걸 설치해놔 그나마 일말의 양심이란 걸 있는줄 알았는데
이제 그마저도 보이지가 않는구나
직진으로 더 가야 하는데 철조망을 막아놓아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이곳에 우측으로 내려간다
이곳은 다행이 철문을 개방해놔서 편하게 백복령으로 내려선다
백복령(百卜嶺:780m:15:28)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정선군 임계면과 동해시 신흥동. 삼흥동의 경계에 잇는 고개로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는 길로, 고개 정상에는 백두대간 표시석과
정선 아리랑 표시석과 정자, 넓은 주차장이 고개를 지키고 있다
백복령은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으로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
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하며,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으며,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택리지』에는 백봉령
(百福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
(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이는 등 명확하지는 않다.
고갯길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백복령을 ‘뱃복이재’라고 불렀으며, 고갯마루에서
북쪽 산등성이에 올라가게 되면 둘레가 300-400m 쯤 되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가 여자들 배꼽에 뜸을 뜬 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뱃복이라
부른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옮기고 있다. ‘뱃복’은 배꼽의 옛말이다.
카르스트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의 움푹 파인 웅덩이가 신체의 배꼽처럼
보인다는데서 유래한 지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한자다.
한자로 쓰였던 지명은 앞에서 본 것처럼 제법 복잡 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領)은 일제 때 지도 제작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으로, 백두대간보전회에서는 백복령(白福領) 보다는 주민 정서에서도 좋고
택리지에 근거가 있는 흰 봉황의 뜻인 백복령(白鳳領)으로 부르기를 홍보하고 있다.
백복령 정상석 옆에 있는 안내판 뒷쪽이 대간길이나
철조망이 굳게 잠겨있어 갈 수가 없는 곳이다
백복령 표시석
인증샷
백복령 안내판
정선 아리랑의 유래
고려왕조가 망한뒤 고려유신 72명은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하여
세상 미련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송도(개성) 두문동에 은거하여
살았는데, 여기서 유래 된 것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이성계일파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응하지 않자 역적을 살려둘수 없다하여
두문동을 불바다로 만든다...거기서 나온다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한사람도
나오지 않고 그곳에 있던 유신은 모두다 불타 죽었다.
그때 비명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민족사에 이처럼 불행한 역사가 또 있었을까.
한나라의 인재가 모두 몰살 되는 순간이었다.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는 그과정에서도 처절하고 눈물겨워다고 하며
집뒤에다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를 진상을 모셔놓고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지
몇년후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는데 바로 목은 이색이다.
목은 이색 문하에서 배운 뛰어난 인재들(정도전,정몽주,길재,등..)과
고려왕조 중책에 진출해 있던 성리학 인재들이었다.
모두 불타 죽기전 두문동에서 나온 단 한사람이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으로, 그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을 도와 조선을 반석위에 올려놓게 된다.
정선아리랑은 두문동에서 강원도 정선이라는 유배간 전오륜(형조판서)외 선비들이
망국의 한과 고향의 그리움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마을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오늘날 정선아리랑 이라 한다.
아리랑은 지역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으며 남과 북을 합쳐 3,600여 수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의 진도 아리랑, 경남의 밀양 아리랑이
3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타관객리 외로히 난 사람 괄시를 마라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떨치고 청려에 의지하여 지향하여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달라 만물이 소연한데
해저무는 저녁노을 무심히 바라보며
옛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
눈앞에 왼갖것이 모두시름 뿐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태산준령 험한고개 칡넝쿨 얽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구비치는 골짜기
휘돌아서 불원천리 허덕지덕 허위단심
그대를 찾아 왔건만 보고도 본체만체 돈담무심
- 정선 아리랑 가사中 일부-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삽당령으로 가기위해 산행을
하면서 호출한 임계택시는 30분이 지나도 오질 않아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만 자기가 지금 멀리 있어서 올 수가 없다고
하면서 다른 택시를 보내 주겠단다...헐!...이게 뭐여
다른 택시에 전화를 하니 또다시 30분을 기다리란다
백복령에서 1시간 가까이 있으려니 옷에 땀이 식어서 그런지
추위가 몰려오고...50여분만에 임계 택시를 타고 삽당령으로 향한다
삽당령(17:20)
택시를 타고 백복령에서 삽당령에 도착하니 17시 20분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35,000원의 택시비를 주고
차에서 내린다
새벽부터 아빠를 기다리는 아들의 愛馬
서둘러 출발하여 지나번처럼 고속도로가 아닌 성산면에서 대관령 옛길을
따라서 구절양장의 대관령 고개를 넘어 대관령I.C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평창 휴게소에서 장칼국수로 저녁을 해결하고 차에서 1시간정도 숙면을
취한 다음에 서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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