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original 三道峰이여!
☞산행일자: 2023년12월 03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8.5 km + 들머리4.5km +날머리 0.6km+헛짓거리 2.1km / 7시간 10분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황룡사-쉼터-민주지산 갈림길-황룡사-다시 민주지산 갈림길-잣나무숲 삼거리
목교-용소폭포-석기봉 갈림길-음주암폭포 갈림길-쉼터-쉼터-음주암 폭포
돌탑-쉼터-쉼터-무덤골-삼막골재-안부-전망봉-안부-삼도봉-안부
안골사거리-무명봉-1,113.1m봉-안부-무명봉-안부-1,142.5m봉-암봉
안부무명봉-1,182m봉-안부-무명봉-무명봉-늪지대-박석산-싸리재 갈림봉
1,093.8m봉-안부-무명봉-무명봉-무명봉-안부-973m봉-안부-조망바위
백수리산-암봉-갈림길-합류점-무명묘지-안부-능성구씨 묘소-안부
무명봉-부항령-삼도봉 터널
☞소 재 재: 충북 영동군 상촌면 / 경북 김천시 부항면 / 전북 무주군 설천면, 무풍면
이제 백두대간길이 몇개 안 남은 듯 하다...올해안에 대간길을 마치고 내년부터 죽으나사나
2년안에 지맥길을 마무리 하려 했는데 어디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된 적이 있었던가...
11월에 첫주일에는 비가오는 바람에 산행을 못했고, 3주는 빙모님喪으로 산행을 못하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이제 남은 구간이 강원도쪽은 태백과 삼척쪽이고, 남쪽에
2곳이 남아 있는데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쪽의 2구간이다...강원도쪽은 당일 산행으로는
거리가 길어 짧아진 日沒로 겨울 산행이 어려울 것 같고, 거기다가 나홀로 산행을 하다보니
갑자기 닥치는 變數에 대처가 쉽지 않을것 같아서 내년 봄으로 연기하기로 하고, 무주쪽에
남은 2구간중에 하나인 삼도봉 구간을 하기로 하고, 인터넷으로 열차표를 예매한 다음에
일요일 새벽에 집 앞에서 한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역발 → 영동행 열차표
서울역(05:45)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온 탓인지, 아니면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생긴
버릇인지는 몰라도, 차를 올라타면 一場春夢(잠)에 빠지는 습관이 있다.
얼마나 잤을까...늙은 여인들이 주위를 아랑곳 하지도 않고, 웃고 떠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니 열차는 초치원역을 지나고 있다.
서울역에 처음 탔을때는 내가 탄 객실을 텅 비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거의
滿車 수준으로, 염치없이 떠들어 대는 여인들의 등쌀에 찍소리 한번도 못하고,
참고 또 참다보니 열차는 영동역에 도착한다.
영동역 플렛홈에서 내려 지하보도를 통과하는데 음악을 상징하는
浮彫物들이 많이 음각되어 있다...아! 그렇지, 이곳 영동이 우리나라
3대 樂聖으로 불리웠던 박연(朴堧:13:78~1458)의 고향이 아니던가.
세종대왕이 가장 아끼던 음악가이자, 천문학자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예악(禮樂)을 매우 중요시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이 편안해서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롭게 된다.
이 때문에 성(聲)으로 음(音)을 알고, 음을 살펴 악(樂)을 알고,
악(樂)을 살펴 정치(政治)를 알게 되어 정치의 도리가 갖추어진다.
예(禮)는 천지의 질서이고 악(樂)은 천지의 마음이므로 한 나라에 예악이
잘 갖추어져야만 백성들이 선악의 이치를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종은 신생국 조선에서 무엇보다도 예악의 완비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박연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채원정의 《율려신서》, 주자의 《의례경전서》,
임우의 《석전악보》 등을 깊이 연구하여 악서 찬집, 아악기 제작, 아악에 관련된
각종 제도의 정비라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박연은 피리의 명 연주가였다... 그는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으며,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여
당시에 불완전했던 조선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였다.
박연은 혼천의, 자격루, 간의대, 흠경각, 앙부일구를 장영실을 데리고 만들었으며
훈민정음의 기본이 되는 오음 궁상각치우를 창조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음계인 12율은 길이가 서로 다른 12개의 율관을 불어서 만들어지는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음계를 정한 것이다. 아악을 정리하여 조선 초기 음악의 기초를
확립한 박연은 기본음을 내는 황종율관의 길이를 1/3 만큼 줄이는 삼분손일과, 1/3 만큼
만큼 늘이는 삼분익일을 반복 적용하여 기본 음계인 12율을 완성하였다.
* 3대 악성(樂聖)이란
고구려의 음악가인 왕산악(王山岳:생몰연대:미상)은 거문고의 제작자이며 거문고
연주의 대가로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晉)나라에서
보낸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었는데, 그 개량된 악기가 바로 오늘날의
거문고(玄琴)이다.
당시 그는 고구려의 제2상(第二相)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만든 새 악기로 100여곡을 지어
연주하였더니,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 만든 악기를 현학금
(玄鶴琴)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현금이라 불렀다고 전하여진다.
우륵(于勒:생몰연대:미상)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의 나라 가야는 6가야 중에서 대가야로 추정하는데, 이유는 551년 이후 562년에 멸망한
가야가 대가야이기 때문이다...가실왕의 뜻으로 12현금을 만들고 가야금 곡 12곡을 지었으며,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투항하고, 552년 대내마 계고와 법지, 대사 만덕 등 세 사람에게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으며, 진흥왕에 의해 가야금 곡이 궁중음악이 되었다.
성열현(省熱縣)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근처(범여의 고향)라는 설과
신반해국(散半奚國)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결국 그가 어떤 가야에서 태어났는지, 그에게
12현금을 만들도록 한 가실왕이 몇 대 임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지는데, 이는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박연(朴堧:13:78~1458)은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태어났으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을 시조로 하는 밀양 박씨이며, 중시조는 고려조의 상서좌복야였던 박언인이고, 할아버지
박시용은 우문관대제학이었고, 아버지 박천석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영동역(08:40)
영동역은 109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역사(驛舍)가 소실되어 임시역사를 거쳐 1956년 복구 준공되었는데, 당시 역사는 328㎡
규모의 벽돌 기와와 단층 역사였다...현재의 역사는 1996년 준공된 것으로 영동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교통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1973년 영동역 광장에 설립된
심석재, 송명순의사 동상은 옛 역사에 이어 오늘까지 영동역사를 지키고 있다.
영동(永洞)이라는 지명은 이수(二水)와 길동(吉洞)에서 유래되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
행정구역을 두 글자의 한자로 고치게 되면서 이수를 합쳐 영(永)자가 되고, 길동의 동(洞)를
따와 영동(永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동지역의 지맥길을 걸으면서 이용했던 택시기사가 전화를 받지않아서
역 앞에 서있던 택시를 타고, 물한리로 향하는데 시간도 40분 이상 걸리고
요금도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43,000) 주머니가 늘 빈약한 산꾼에게 왕 부담이다.
택시에서 내린 황룡사 입구 공터에서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9:30)
겨울 날씨치고는 상당히 포근한 날씨이다...“珉周之山凰龍寺”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一柱門을 통과하면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일주문에 걸린 현판이 이채롭다
보통의 황룡사라고 하면 노란 용을 뜻하는 누를 “黃” 자를 썼을텐데, 이곳은 누를 “황(黃)”이
아닌 봉황새 “황(凰)”을 써서 황룡사라고 한게 특이하다.
황룡사(黃龍寺)
황룡사(黃龍寺) 대웅전앞 석등이 이채롭다... 삼도봉(三道峰)의 정기를 이어받아
민족화합, 남북통일, 국태민안을 성취하려는 취지로 1972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황룡들이 석등(石燈)을 떠받들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봉황사 창건 연기문(緣起文)
물한리 계곡에 자리한 절집이라 그런가...대웅전, 요사, 전각들의
꽃살문이 한결같이 비니루에 꽁꽁 묵혀있어 참배도 못하고
절집을 빠져 나가니 조금 아쉽다...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절집을
빠져 나간다
물한리 계곡에 걸쳐있는 출렁다리를 통과하여 삼도봉으로 향한다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에 있는 물한계곡(勿閑溪谷)은 물이 많아서 붙은 이름으로
물이 차다해서 붙여진 한천(寒川)마을 상류에서부터 약 20㎞를 흐르는 깊은 계곡으로,
삼도봉(1,176m)· 석기봉·각호산(1,176m)· 민주지산(1,242m) 등 1000m고지급
산 4개를 아우르고 둘러싸여 있어 계곡의 물이 풍성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끝없이 흐른다
대동여지도의 勿困의 困(곤)은 閑(한)의 약자로 보이고, 勿閑 지명이 표기된 옛 지도도
여럿인데, 안내판에 표시된 계곡 이름만 미니미골부터 은주암골, 무지막골, 쪽새골,
배나무골, 보리밭골, 각호골까지 일곱이니 물이 많기도 하겠다
요즘 이래저래 몸뚱아리의 컨디션이 망가진 상태이지만
이렇게 산 속으로만 들어오면 삶의 활력이 생기는 기분이다
늘상 그렇지만 산행을 시작하는 첫 발을 내딛으면서 느끼는
기분은 오늘 뭔 존일이 있을라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등로 좌측 계곡으로는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휀스가 처져있고,
이곳 안에는 옥소폭포를 비롯한 폭포들이 있는데 지금은 접근이
불가능하다
옥소폭포를 '기우제(祈雨祭)폭포'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통일신라시대 가뭄이 심할 때에 황간 현감이 이 옥소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내어 가뭄을
이겨냈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에 이 상촌지방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였다.
이 옥소폭포에서 면장이 농민들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였더니 지내기도 전에
후드득 후드득 내리기 시작한 비가 장대비로 변하더란다...그 후로는 마을에서 큰
고목이나 큰 바위에서 지내던 기우제를 아예 이 옥소바위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쉼터(09:44)
좌측의 철조망 너머로 흘러 내리는 물한계곡의 청량한
물소리가 꽉막힌 가슴을 뻥 뚫리게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간간히 만나는 山客들과 눈인사를 나누면서
올라서니 민주지산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민주지산 갈림길(09:48)
민주지산(岷周之山:1,241.5m)은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민주지산(岷周之山)의 한자(漢字) 이름을 보면 민(岷)은
산맥을 뜻하고, 주(周)는 두루 혹은 둘레를 뜻하므로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백운산(白雲山)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며, 그 이후에 삼도봉에서
각호봉까지의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고 해서 ‘민두름산’이라고 부르던 것을 일제시대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민주지산(岷周之山)으로 단순 표기하여 원래의 이름과는
다른 지명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YS가 이 산의 지명이 산악회의 지명으로
사용됨으로 전국적인 명성과 유명세를 더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민주지산’이 민주화투쟁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여기는걸까.
하지만 민주지산(岷周之山)은 민주(民主)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또한 봄철 능선에 지천으로 피어난 진달래와 산죽이 매우 아릅답다.
황룡사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약1.1km 지점...포근한 날씨 탓인지
잠깐 사이에 너무 더워서 웃옷을 한겹 벗어려고 베낭을 내리는데
헐~~~!...이게 뭐여...베낭이 입을 쫙 벌리고 있는게 아닌가.
택시에서 내리면서 지갑을 꺼내서 요금을 지불하고는 지퍼를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다...옷을 벗어 베낭에 넣고는 베낭속을
점검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면서. 머리속이 지진이 나는 기분이다.
아무리 뒤져봐도 지갑이 보이지 않는구나
민주지산 갈림길 쉼터 의자에 베낭을 벗어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조금전에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서 가는데 황룡사로 들어가는
출렁다리를 지나는데도 지갑이 보이지 않으니 미칠것만 같은 기분이다
황룡사 경내를 통과하고 일주문을 지나 아침에 택시에서
내렸던 장소까지 왔다...부처님이 도와주시겠지 하는
간절한 생각으로...
아~~~! 부처님께서는 아직도 나를 이쁘하시는 모양이다.
아침에 베낭을 내려놓았던 의자 아래에 지갑이 얌전히
쥔장을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황룡사에 들려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민주지산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민주지산 갈림길(10:20)
갈림길에서 삥 돌아서 가니 잣나무숲이 나오면서 오르막이 시작된다
완만한 오르막 능선이 나오나 길은 고속도로 수준이고,
八等身의 멋진 미녀처럼 쭈쭈빵빵하게 생긴 잣나무숲
끄트머리에 갈림길이 나온다
잣나무숲 삼거리(10:24)
잠깐의 잣나무숲이 지나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이어지는
속새골 방향으로는 이 지역의 主峰 노릇을 하고있는 삼도봉보다
훨씬 많이 알려진 민주지산 방향으로 향하는 길이다.
♩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
.
♪ 아 이쪽저쪽 사방팔방 둘러봐도
.
중 략
.
♬ 어쩌다 닮은 사람 한. 두명씩 오고갈 뿐
설운도라는 가수가 부른 ‘나침판’이란 노래가 라디오에 흘러
나오는데,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럴 고민을 할 필요가 없구나.
이정표가 가야할 삼도봉의 위치를 가르쳐 주고 있으니 말이다.
목교(10:27)
멀건 등로를 두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에 목교를 설치해놨는데
아무리 내 돈이 아니라곤 하지만 민초들이 피땀흘러 낸 세금으로
저런 헛짓거리 좀 안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차체장들의 저런 헛짓거리를 전시행정이라고 했던가...씁씁하다
목교 아래의 등로를 따라가는게 훨씬 편하고 거리도 가깝다.
물길을 건너니 쉼터의 평상이 있는 용소 폭보(무지소)가 나온다
용소폭포(10:29)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황룡사에서 이곳 용소(무지소)까지를
물한계곡이라 부르고 , 이곳부터 삼막골재 아래까지 골짜기가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하는데 미니미골이라고 부른다
용(龍)이 목욕한 폭포...늪(沼)이란 얘기인가?...무지소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폭포이다
쉼터의자에서 바라본 용소(龍沼:무지소)의 모습
상수도 보호를 목적으로 쳐놓은 휀스로 인해 폭포 접근이 불가능하다
삼막골재에서 내려오는 미나미골과 석기봉에서 내려오는
음주암골과 만나는 지점으로 좌측의 미나미골로 향하면서
본격적의 삼도봉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다
용소를 지나면서 계곡의 폭은 급격히 좁아지며, 水量도 아주적고
그에 비례하여 물소리도 적으니 제대로 산의 맛이 나는 느낌이다.
가뭄에 콩나듯이 만나는 등산객들의 인사를 받느라고, 고요한
적막감이 깨지는 것 빼고는 정말 호젓한 산길이다.
뚜버기 걸음으로 생각없이 오르다가 보니 쉼터 의자가 있는 석기봉 갈림길이 나온다
석기봉 갈림길에 도착하니 노년의 부부가 물 한병정도 들어갈 수
있는 콧구멍만한 베낭 하나만 메고, 나무가지를 지팡이 삼아
여유롭게 걷는 저 모습... 神仙이 따로 없구나
“ 一日淸間 一日仙”이라 했던가...신선이 따로 있나...
산 속에서 하루가 맑고 여유로움을 느낀다면 내가 신선이제
아마 저 분들이 지금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석기봉 갈림길(10:41)
10년도 훨씬 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한 해에 혼자서 삼도봉에
올랐다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민주지산 가는 걸
포기하고, 석기봉에서 중탈하여 내렸섰던 저 길...급경사에 길이 엄청 미끄러워
개고생하면서 걸었던 추억이 내 머릿속에서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구나
아직까지도 삼도봉으로 가는 길은 완만하고 여유롭다
음주암폭포 갈림길(10:46)
음주암 폭포 갈림길을 지나면서 오르막이 시작되고 아침에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서 음주암 폭포로 가는 걸 포기하고 삼도봉으로
향한다
쉼터(10:50)
쉼터(10:53)
2016년 2월에 초강(신산경표상:각호)지맥 첫 구간을 할 때에
이곳을 올랐으니 7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그 당시에는
없었던 시설물들이 많이 보이니 조금은 헷갈리는 느낌이다
데크목 쉼터를 지나 미나미골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을 따라는 걷는 이 길...
마치 토끼비리를 걷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스릴을 느끼는 재미도 솔솔하다
낭떨러지 아래에 폭포가 보이는데 안내문에는 음주암 폭포라고 한다
* 토끼비리(兎遷)란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이다가 남하하는
도중에 길을 잃고 말았는데, 수직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절벽 앞에 이르러 군사들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났다... 그 토끼를 쫓아가니
험하기는 했지만 길을 낼 만한 곳이 나타났는데, 여기서 ‘비리’란 ‘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의미한다... 길을 찾던 왕건에게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여 이 길을 ‘토천(兎遷)’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과 문경새재에서 흘러오는 조령천이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S자형으로 산간 협곡을 파고돌면서 동쪽 산지에 형성된 벼랑에 가까스로 깎아
만든 길이다. ..토끼비리는 영강의 하천변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벼랑길을 잔도(棧道) 라 하며, 이는 약 2km에 달하며, 잔도(棧道)는 험한 길을 의미하는 어휘다.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벼랑길과 사다리길을 뜻한다
음주암 폭포(10:57)
口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음주암이란 암자를 가기전에 만나는 폭포로 물한계곡에
기대어 고단한 삶을 살아내던 지역민들의 쉼터이자 음주암에 佛供을 드리러 가던
이들이 마음을 가다듬던 일주문 역할을 했던 곳이 음주암 폭포라고 한다.
조금전에 좌측 이정표 방향으로 음주암 폭포라고 했놨는데 쌩뚱맞은 곳에서
폭포를 보다니... 폭포는 눈 앞에 있는데 나는 엉뚱한 곳에서 폭포를 찾았으니...
예전에 법정스님 생존시에 들었던 법문이 이 광경과 딱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네.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천당이고 지옥이다.
내 맘이 즐거우면 천당이고,
내 몸이 괴로우면 지옥이다.
세상을 모르는 중생들아!
하느님이 어디 있고 부처님이 어디 있나?
지옥과 천당은 내가 만들어 살고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여보게 친구,
산에 오르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
자네를 내려다 보고 있지 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
만천지에 널려있다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
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는 지금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 마음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살면서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
자네 마음이 부처고
자네가 관세음 보살 이라네.
여보시게 친구!!!
죽어서 천당 가려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자네가 부처라는 것을 잊지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 바라네,
부처답게...
法頂 스님이 명동성당에서 하신 法門 중에서
쌩둥맞게 만난 음주암 폭포 안내문 옆에 있는 의용골 폭포 안내판...
음주암 폭포를 의용골 폭포로 말함인지 아니면 큰스님께서 하신
법문처럼 마음속에서 의용골 폭포를 찾으라는 것인지 禪文答을
제시한 영동군의 의도(?)를 모르겠다
미나미골 계물을 건너서 삼도봉으로 향한다
삼막골재 북사면에서 발원하여 미니미골을 거쳐 오면서 의용골 폭포,
음주암폭포를 지나 용소폭포를 지나면서 석기봉 동사면에서 발원한
음주암골 물기와 합류하여 물한계곡이라는 명칭을 바꾸어 절경을
이루면서 옥소폭포, 황룡사 앞을 지나 초강천(草江川)이란 이름으로 흐르는 물줄기다
돌탑(11:01)
돌탑 형태의 돌무더기는 마치 구석기 시대의 주거지 형태로 꾸며놨다
어느새 겨울은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오르막을 향한다
쉼터(11:05)
그리 급하지도 않은 능선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산죽길이 펼쳐지는 능선 사이로 夢幻的 분위기를
자아내는 빛내림이 환상적이다
쉼터(11:22)
쉼터에 올라서니 얼마전에 다정한 모습으로 올라가던 부부를 만난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휴식을 취한 다음 부부를 추월하여 삼막골재로 향한다
완만한 사면길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름길로 향하는데
예전에 없었던 무덤골이란 안내판이 골짜기 내력을 설명한다
무덤골(11:23)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이 나라 山河에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쟁을 겪어면서 저런 슬픔을 간직하지 않은 골짜기가 있었던가...
‘과거를 잊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선조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지켜낸 이 나라를 망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도를 높혀서 올라서니 殘雪이 보이고 강한 바람이 불어댄다.
백두대간 마루금 접속구간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이다
엉터리 이정표
이곳에서 삼도봉까지 거리가 1.2km밖에 안되는 거리를 2.2km라고 적어놨다
범여를 반겨주렴인가?...데크목 계단에 白雪로 뿌려놓은 멋진
계단으로 올라서니 오늘 산행의 백두대간 마루금인 삼막골재에
도착한다
삼막골재(森幕谷嶺:11:40)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여기서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삼마골, 삼박골로 불리는 삼도봉 준령의 하나이며 지명유래는
나무가 우거져 장막을 쳐놓은 것 같다하여 나무빽빽할 삼(森)자와 장막 막(幕)자를
따서 삼막골이라 하는데 산마골재는 산막골재의 誤記로 보인다
삼마골재는 삼마골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본래 '산막골'이라 불리다가 '삼마골'로
변음된 것으로 보이면 일제시대부터 이곳에 화전민들이 정착해 숯을 구워 팔며
살았고 한국전쟁 전후로는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까지 이곳에 들어와 화전민 그룹에 합류했다.
그들은 생활력이 강했고 참나무를 베어 일주일만에 산막 한 채를 뚝딱 지었다고 한다
백두대간에 걸친 마을이 대부분 그랬듯 한국전쟁 동안, 그리고 휴전 후에도 한동안
이곳은 국군과 빨치산 사이에 놓인 접전지였으며 산을 점령한 군인이 주야로 바뀌던 시절,
화전민들은 며칠씩 산 밑에서 피신해 지내다가 산막으로 올라오고, 또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했으며, 당시 전쟁으로 같은 날 희생을 당한 화전민들이 많았다.
삼마골 아래 해인리만 해도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휴전 뒤 숯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고 이후 화전민들은 산비탈을 골라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생계를 해결했으며, 외부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소금 정도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산 속에서
생산했으며, 그러다가 1960년대 말기 김신조 사건 같은 일들이 터지면서 정부 정책에 따라
화전민들은 산을 내려와야 했다...그게 삼마골에 살던 화전민들의 숨겨진 역사다
좌측의 우두령 방향으로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을 바라보고는...
좌측의 계단을 따라서 삼도봉 방향으로 향한다
고도를 높힐수록 눈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걸어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해인리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상당히 차갑다.
아침에 벗었던 자켓을 다시 껴입고 천천히 능선을 따라서 삼도봉으로
향한다
삼도봉으로 향하는 제도권 등로라서 그런지 구조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부(11:48)
오르막 계단으로 향하는데 눈의 量은 조금씩 많아지고
바람의 강도도 점점 거칠어지는 느낌이다.
계단 좌측으로 웰빙숲길이라는데 갈 길 바쁜 대간꾼이
거기까지 갈 일이야 있겠나...그냥 직진길로 향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미나미골의 모습
산에서 느끼는 執着과 欲望...다 부질없는 짓거리인줄
알면서도 집착을 하면서 걷는건...내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二律背反的인 그것 때문만을 아닐 것이다
삼막골재에서의 오름길은 나무계단과 돌계단이 번갈아
나오는데 조금은 미끄러운 능선을 따라서 힘겹게 올라선다
이곳 오름길은 굴참나무를 비롯한 고산식물의 나뭇가지가 자라지 못하고
천태만상으로 구부러져 있어 신기함을 자아내고 있으며, 희귀한 고산 식물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생태학자들의 연구의 현장이기도 하다.
수목은 상수리나무가 특히 많으며, 김천 부항면 해인리 쪽으로는 호도나무가
많아 호도의 생산량이 연 70톤에 이른다고 한다.
멋진 전망봉이 눈 앞에 나타난다
전망봉(11:55)
내가 잠시후에 삼도봉을 거쳐서 박석산, 백수리산을 지나 부항령으로
가야할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대덕산과 덕유산의 스카이라인이
실루엣처럼 보이는게 신비스럽기만 하다
조망봉 바로 아랫쪽으로는 삼막골재 남쪽에 있는 해인리가 보인다
미나미골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강풍이 불어대기에...
서둘러 삼도봉 방향으로 향한다
안부(11:57)
안부에서 올라서니 까칠한 암봉이 나오는데 ‘등산로 아님’ 팻말이 걸려있다.
미끄러운 눈길에 괜히 헛짓거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통과한다
구조이정판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니 왁자지껄하는
등산객 소리를 들으면서 삼도봉 정상에 올라선다
10번도 더 올랐던 삼도봉 정상에 도착하니 예전과는 달리 넓은 공터
전체를 데크목으로 깔아놓아 모든게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둘 때가 가장 자연적인 법인데...뭔 지랄인지 모르겠다.
더군더나 삼도봉을 접속하고있는 김천, 무주, 영동지역의 지자체들이
재정자립도가 좋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비싼 돈지랄로 데크목 시설을 했다고해서 등산객들이 더 오는것도 아닐텐데...
산이 좋으면 등산객들이 오지말라고 해도 오겠끔 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정상에는 비박족 대여섯명이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 있다...저 비박족들이 나에겐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20여전 전에는 나도 저짓거리 많이 했는데, 이젠 흘러간
추억이 되어 버렸다...젊은 친구들에 부탁하여 인증샷 하나를 남긴다
삼도봉 안내판
삼도봉(三道峰:1.113.1m:12:01)
전북 무주군 설천면, 경북 금릉군(현지명:김천시) 부항면, 충북 영동군 상촌면 3도에
걸쳐 있는 봉우리로 1989년부터 영남, 호남, 충북의 삼도 화합의 상징인 거북, 용,
검은 여의주의 돌탑을 세우고, 매년 10월10일 삼도의 산악인과 주민들이 동서화합의
제를 올린다고 한다.
삼남의 기(氣)가 한곳으로 모이는 꼭지점이라고 하며, 원래이름은 화전봉이었으나
조선 태종대인 1414년에 조선을 8도로 나누면서 이 봉우리에서 충청, 전라, 경상
3도가나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8도 강산은 바로 조선의 다른 이름이다.
옛날엔 호랑이가 누비고 다니던 백두대간 능선 길, 민주지산 끝자락 각호봉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 삼도봉과 민주지산 일대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영토전쟁이 이루어진 곳이자
삼도가 만나는 곳으로 각 도의 사투리와 풍속, 습관 등이 모두 확인되는 지역이다
삼도봉 물줄기는 서쪽은 금강의 품에 안기고, 동쪽은 부항천을 통해 낙동강으로
흐르며, 조망 또한 사방으로 확트여 서북쪽으로 석기봉(1,242m),민주지산(1,241.7m)과
각호산(1,176m)이 이어지고, 동북쪽으로는 화주봉을 비롯한 대간 능선과 황악산 줄기가
달리며, 남동쪽으로는 해인리 산곡 마을을 지나 가야산 줄기가, 남으로는 삼봉산 너머
덕유산 줄기가 이어진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석기봉의 모습
예전의 대간길을 걸을때는 우두령을 출발하여 삼도봉을 찍고 보이는
저 석기봉까지 갔다와서 부항령까지 갔는데, 이제는 저질체력으로
이빨빠진 범여가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꼬...
석기봉(石奇峰:1,242.0m)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전체가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식품봉(食品峰), 석의봉(石衣峰)이라고도 한다
쌀겨처럼 생겼다고 하여 쌀개봉이라 부른데서 석기봉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삼도봉에서 북서쪽으로 약 40분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석기봉은 민주지산의 주릉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산이기도 하며 석기봉 한켠에는 일신삼두상(一身三頭像) 또는 삼두마애불(三頭磨崖佛)
안내판이 서 있는데 ‘민주지산 석기봉 삼신상(民主之山 石奇峰 三神像)’이라고 적혀있다.
백두대간 능선에는 3군데의 삼도봉이 있는데
1, 지리산 주릉에 있는 삼도봉(일명: 날나리봉)은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
전북 남원에 걸쳐 있다
2, 삼도봉(일명:초점산)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전북 무주,
경남 거창과 경북 김천에 걸쳐있는 산이다.
3,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걸쳐있는 이곳 삼도봉이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오리지널 삼도봉인 셈이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해인리(海印里) 의 모습
해인리의 유래는신라 시대에 마을 뒤 삼도봉(1,176m) 골짜기에 있던 해인사(海印寺)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일설에 삼도봉 해인사가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옮겨 간 것이라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으며, 조선 말 지례군 상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윗두대·해인동이
통합되어 김천군 부항면 해인리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부항면 해인리로 개칭되었고,
1995년 다시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가 되었디.
백두대간 준령인 삼도봉을 비롯하여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마을 앞으로 삼도봉에서
발원한 부항천의 상류 하천이 지나며, 해인동에서 삼도봉 오르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인산장
못 미쳐 도로변에 마치 우람한 몽둥이처럼 생긴 큰 바위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데 예부터 유명한
고추방골의 남근석(男根石)이다...이 남근석은 효험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해 아들 낳기를 염원하며
치성을 올린 많은 여성들이 효험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김성옥(金聲玉)이 경기도 양주군에서 피난 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광산김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으며, 농경지가 좁고 오미자, 호두, 천마를 주로 재배한다. 문화 유적으로 광산김씨 문중
재실인둔암재(遯庵齋)와 쌍광재(雙光齋)가 있고, 마을 뒷산인 삼도봉은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 경상북도 김천시 등 삼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정상에는 1989년 김천문화원, 영동문화원,
무주문화원에서삼도봉 만남의 날 행사를 기념해 만든 삼도화합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디지털 김천문화대전 자료인용)
이곳 삼도봉은 초강(신산경표상:각호)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한 곳이다
신산경표상의 각호지맥(角虎枝脈)은 백두대간 삼도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민주지산,
각호산, 도마령을 건너고 천만산, 삼봉산,백마산을 지나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서 금강으로
빠지면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km의 산줄기로 남으로 천만산에서 발원한 영동천과
북으로 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며, 동시에 상주 봉황산부터 영동 삼도봉까지의 백두대간과
북쪽의 팔음지맥과 함께 초강물을 오롯이 가두어 금강으로 흘려보내는 울타리가 된다.
산으로님이 작성한 대한산경표에서는 초강지맥이라고 부르며, 2016년도 나홀로 걸었던
지맥길이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모습
저 가야산을 볼 때마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운 이 나라의 진정한
불교 선지식이셨던 퇴옹(退翁) 성철(性徹:1912~1993) 큰 스님이 생각난다
불교신자들이 아니더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禪文答으로 잘 알려진
큰 스님...1980년대 군부 독재시절의 당시 최고 실력자도 스님을 어찌해보려
했다가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돌아가라는 불호령에 찍소리도 못하고
해인사에서 발길을 돌렸다는 얘기는 아직도 회자되는 일화중에 하나이다
올해가 큰 스님께서 열반하신지가 30년이 되는 해인데, 五濁惡世로 물든
요즘의 衆生들에게 죽비를 내려쳐서 올바른 길로 가게 하소서...
아주 오랜 옛날에 조계사에서 법문하실 때 法床에 앉아 柱杖子를 내리치던
그 모습이 이제는 볼 수 없으니...큰 스님이 너무 그립습니다
서남쪽으로 바라보니 좌측으로는 대덕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이 보이는데 스키장이 개장 되었는지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스키장 코스가 보인다
삼도봉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산이 높아서 그렇지 바람이 강하게 부는걸 제외하고는
날씨는 참으로 좋다...주위의 전망도 굿이고, 등로도 아주 좋으니
뭘 더 바란다는건, 대간길을 걸으면서 요구하는 사치인지도 모르지...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 스스로 육체를
위해 마음을 부렸으니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어찌 한탄하고
원망하며 홀로 슬퍼하랴?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지난 일은 탓해봐야
소용없음을 이미 깨달았고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앞으로의 일은 똑바로
할 수 있음을 알았도다
陶淵明(도연명) 詩, 「歸去來辭(귀거래사)」 中에서
대간길 마루금에서 바라본 무주군 설천면 계곡의 모습
설천면의 지명유래는 조선 영조 때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이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설천(雪川)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또한, 이 고장에
9천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는데, 이들의 밥을 짓기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던 하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온통 눈과 같이 하얗게 흘러 내렸다 하여 '설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1914년에는 이전의 금산군에 속했던 구천동 지역을 설천면에
통폐합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늘 산에 대한 그리움 땜에 산에 오르긴 하지만 산에 올라서면
그리 딱 생각나는 건 없고, 그냥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다.
그러다보면 산과 내가 一心同體가 된 듯한 기분으로 걷는다
예전에 삼도봉 →0.2km, ←해인리 1.66km란 글씨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워진 채 묵묵히 대간길을 지키고 있다
아카데미상 수상자가 Red carpet을 밟고 단상에 오르듯이
산꾼도 레드카펫 대신에 멋진 데크목 계단을 밟고 길을 떠난다
안부(12:12)
안부 북서쪽으로는 삼도봉에서 분기한 초강지맥 능선에 있는
석기봉(뾰족한 봉우리)이 아주 멋진 모습으로 산꾼을 호강하게
하는구나...2016년 2월 28일에 삼도봉에서 도마령까지 첫 구간을
혼자 걸었을때는 하루종일 추위와 진눈깨비로, 주위 전망은 그야말로
곰탕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멋지게 능선을 보니 가슴이 후련하다
안골사거리(12:14)
전북 무주군 설천면 미천리 안골에서 경북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넘어가는 고개로
길은 뚜렸하고 특히 해인리쪽으로는 해인산장이 있어 등산객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고개에는 이정표와 구조 안내판,구급약품이 비치되어 있고 안골과 해인리로
통하는 등로가 아주 뚜렸하다...특히 해인리 방향은 등산객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안골사거리의 이정표
무명봉(12:15)
무명봉을 내려서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움팍한 곳이 나오기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베낭을 내리고 밥상을 펼친다
점심식사(12:17~45)
맨날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빵과 우유를 가지고 다니니
추운 날씨 탓인지 잘 체하고 하여, 오늘은 보온 도시락에 밥을 싸고
김치에다, 따근한 생강차로 점심을 해결하고나니 훨씬 몸이 편안 느낌이다
식사를 마친후, 베낭을 베개삼아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20여분간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바람의 영향인지
능선 사이로 쌓인 눈이 많이 보인다
조금씩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빡센 오르막길...음지라 그런지 등로는 얼어있고,
잔설이 많아서 아주 조심스럽게...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걷는다
칼바위 능선으로 오르면서 쉼호흡 한번 크게하고...
1,113.1m봉 정상으로 향한다
뒤돌아보니 석기봉이 멋진 모습으로 조심해서 가라고 손을 흔드는 듯 하다
1,113.1m봉으로 올라선다
1,113.1m봉 좌측으로 이어지는 해인마을쪽은 등로가 아주 험한 모양이다.
근데 너무 걱정하지마소...이 산꾼이야 그리로 갈 일 없으니 말이요
1,113.1m봉(13:10)
1,113.1m봉에 내려서는 등로는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가야산이 멋진 모습으로 산꾼의 눈을 호강시켜 준다
등로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모습
안부(13:15)
엄니의 가슴처럼 포근한 산죽길을 따라서 이름없는 봉우리로 향한다
무명봉(13:18)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잠시후에 가야할
봉우리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까칠하게 보인다
안부(14:22)
오후가 되면서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당히 차갑다.
하는 수 없이 체온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베낭에서 바람막이
자켓을 꺼내 입는다
저 윗쪽에 있는 봉우리가 지도상의 1,142.5m봉인데 아무도 올라간 흔적이 없고...
대부분의 대간꾼들이 이곳으로 간 모양인데 나 역시 그 길을 따른다
1,142.5m봉(13:30)
꿩 대신에 닭이라 했던가...저 윗쪽에 있는 1,142.5m봉을
산꾼들은 이곳을 1,142.5m봉이라고 하는구나
등로는 계속해서 사면으로 이어진다
암봉(13:31)
등로 북동쪽을 바라보니 석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렸하다
안부(13:33)
낙엽 아래에 얼어있는 눈 때문인지
조금씩 몸뚱아리가 힘이들기 시작하는구나
무명봉(13:41)
쉽게 취한 물건은 귀하게 여기지 않듯,
약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산길이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라는걸 산길을 걸으면서 터득했다
1,182m봉(13:49)
1,182m봉을 내려서면서 멋진 입석을 만나고...
계속해서 길은 좋다
삼도봉에 오르기 직전부터 만나는 해인리의 계곡,
해인리를 품고 대간길을 따라서 반원형으로 계속 이어진다
안부(13:53)
등로가 아주 미끄럽다...미끄러지기를 몇번 반복한 끝에 간신히 올라선다
이름없는 봉우리는 띵가묵고, 좌측의 사면길로 향한다
평평한 양지에는 등로가 질척거려 불편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가야할 박석산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무명봉(14:00)
갑자기 등로는 편한해지고...
무명봉(14:08)
무명봉을 지나면서 가야할 박선산을 뚜렸하게 보인고
우측으로는 초지처럼 넓은 지대가 보이는데 예전에
이곳이 목장지대였다고 한다
갑자기 나타나는 산죽 군락지를 지나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넓고 묵은 임도를 따라서 박석산 아랫쪽으로 펼쳐지는 늪지대로 향한다
대간길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나...
예전의 목장길 임도를 따라서 편하게 걸어간다
다시 마루금에 복귀하여 늪지대로 향하는데 싸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갑자기 안부에 쌩뚱맞은 데크목 다리가 나오는데 이곳은 늪지대라 하는데
겨울철이라 확인할 방법이 없고, 우측으로 넓게 펼쳐지는 공터가 목장터였다고 한다
늪지대(14:19)
생태복원 차원에서 이 시설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해불가이다
늪지대를 지나서 박석산을 향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보니 아주 잘생긴 석기봉 뒷쪽으로
민주지산의 둥그스럼한 자태가 이름값을 하는구나
민주지산의 옛 지명은 백운산이었다고 하는데 “월간 山”이란 잡지를 보면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나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 조심...다치면 나만 힘들어...
돌 계단을 지나...
무명봉을 통과한 다음에...
편안한 길을 걸어가니 박석산이 나온다
박석산(1,170.4m:14:32)
경북 김천시와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1,170.4m봉으로만 표기되어 있으며, 예전에 3번이나 백두대간을 걸을때도
이곳은 무명봉에 불과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김천시에서 박석산이란 멋진
정상석을 세워 놓았지만 아쉽게도 지명의 유래는 알 길없다
산 아래에서 보면 정말 멋지고, 우람한 산이지만, 주변에 있는 삼도봉과
백수리산의 명성에 가려져서 약간의 홀대받는 느낌의 산이랄까.
정상에는 3등 삼각점이 자리잡고 있다.
박석산 정상 3등 삼각점(△무풍 304 / 2003재설)
인증샷
박석산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박석산의 사면으로 내려오니 잠깐동안 추운 바람을 피할 수 있어 좋다.
등로 우측으로는 무풍면에 있는 삿갓봉(812.5m)이 보이고 저 능선을
따라서 계속 내려가면 무풍면 현내리 싸리재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늘상 이런 길을 걸으면서 생각나는 건 어머님의 포근한 품안이다
난 막내다 보니, 어머니의 情이 그립지만 그걸 느껴보지 못하고 자랐다.
일찍 세상을 하직한 탓에 내 머릿속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늘 무섭고
엄한 분”이란 것 밖에 없지만, 내가 자식낳아 키워보니...우리 엄니가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라는 걸 새삼 느낀다...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왠지 50여년전에 돌아가신 엄니가 보고 싶다
싸리재 갈림봉(1,150m:14:40)
경북 김천시 부항면과 전북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펑퍼짐한 정상에는 잡풀만 무성하다...3개面의 꼭지점에 있는 봉우리라 하여
일명 삼면봉이라 부르는 봉우리로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멋진 삿갓봉이
있고, 무풍면 현내리 싸리재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리막길로 향한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에 소재한 싸리재는 설천면 미천리 장자터에서
무풍면 현내리 두둘기로 넘어가는 재를 말하는데, 『조선지형도』(무풍)에서
싸리재(축현)가 표기되어 있다... 그만큼 당시에 이 고개를 통해 무풍과 설천의
왕래가 많았음을 의미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이 고개에 큰 싸리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아~~~! 날씨한번 좋다.
가야할 백수리산 정상이 뚜렸하게 보이고, 우측 아래에는 967.3m봉,
그 뒷쪽으로는 지난 10월 8일에 걸었던 대덕산과 초점산이 보인다
멋진 백수리산 너머로 황강(신산경표상:수도)지맥 능선이 뚜렸하다
소사고개 윗쪽의 초점산 아래에서 출발하여 내 고향과 가까운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앞 낙동강에 입수하는 80여km의 지맥길을 걸은지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구나...보이는 저 산은 그대로인것 같은데
나만 자꾸만 늙어가니...하! 무심한 세월이여...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다...버리라고 해놓고
왜 이리 집착을 하는지...요즘의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급하게 내려서 능선에 도착하니 등로에서 2m정도 벗어나 있는 1,093.8m봉에 도착한다
1,093.8m봉(14:50)
다시 고도는 급격히 낮추어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안부(14:52)
안부를 지나면서 등로는 살짝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강풍으로 바뀌어가는 느낌이다
무명봉(14:55)
통계무 계단 아래로 내려온 다음에...
고도차가 없는 밋밋한 능선을 한동안 편하게 걷는다
무명봉(14:58)
한동한 고도차가 없는 길을 걷다가 무명봉을 지나면서 고도를 낮춘다
무명봉(15:05)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백수리산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낙엽이 무성한 등로를 내려간다
안부(15:10)
973m봉(15:15)
향긋한 피톤치드향을 뿜어내는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다시 내리막길...
산길에서는 내리막길이 가장 두렵다(?)
다시 내려온만큼 올라가야 한다는 걸 알기에...
이곳도 무한정 내려섰다가 1,000m가 훨씬 넘는
백수리산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은근히 걱정된다
안전로프를 따라서 내려오니 늪지대의
흔적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에 잡풀만 무성하다
안부(15:22)
안부 능선을 따라서 걷는데 강한 바람 탓인지 손이 시릴정도의 추위가 몰려온다
백수리산을 향한 본격적인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이런 팻말은 산에서 하도 많이봐서 별 감흥이 없다
빡센 오르막길에 선 채로 휴식을 취하면서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내가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망바위(15:40)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에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안부에서 빡세게 올라왔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 들었다
천길 낭떠러지를 지나고...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통나무 계단으로 올라서니 백수리산 정상이 나온다
오늘 내가 걸었던 삼도봉은 멀게만 느껴진다.
범여의 기럭지 짧은 두다리로 참으로 멀리 왔구나
백수리산(1,034.2m:15:48)
경북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와 전북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겨울이면 이 산에 특히 많은 눈이 쌓이는데, 무주군 설천면에서 볼 때 수리를
닮은 이 봉우리가 눈에 쌓여 하얗게 보여서 '백수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수리산 정상에는 폐헬기장이 있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데 바람이 심하고 너무 추워서 서둘러 내려간다
백수리산 정상에서 등로는 서쪽 아래로 이어지고...
암봉(15:50)
계속되는 내리막길
나뭇가지 사이로 967.3m봉이 보이는데 갈까말까 고민중이다
갈림길(16:00)
오리지널 대간길은 직진을 한 다음에 967.3m봉을 찍고, 좌측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곳은 약초 재배지로 단속도 있고, 山主가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만들어놔서 많은 대간꾼들이 967.3m봉을 생략하고 지름길을 택하는 곳이다
원칙을 고수하는 범여가 갑자기 고민이 생긴다.
967.3m봉을 찍고 내려가는 시간과 지름길로 가는 시간 차이가
약 20분정도 차이가 날 것 같다... 저 봉우리를 찍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그렇게 되면 무주에서 서울가는 막차인 17분 45분
버스 시간이 애매하여 고민을 하다가 과감히 포기하고 지름길을
택한다...아침에 지갑 사건만 아니였다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인데...
山主가 만들어논 지름길을 따라서 부항령으로 향한다
토끼비리처럼 생긴 절개지의 사면길에는 낙엽이 수북하다.
고마운 것은 바람이 불지 않으니 조금은 살 것만 같다
능선위에 보이는 967.3m봉은 눈팅이로 인증샷을 남기고...
나말고도 많이 이 길을 다니는 모양이다
모퉁이를 돌아 967.3m에서 내려오는 대간길과 다시 합류한다
합류점(16:12)
무명묘지(16:12)
부항령 계곡이 조금씩 보이니 날머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안부(16:14)
부항령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다
능성구씨 묘소(16:16)
안부(16:21)
무명봉(16:23)
부항령이 800m밖에 안 남았으니 무주에서 서울가는 막차는 탈 수 있겠다
이곳에서 무풍택시 기사님에게 부항령으로 와 달라고
전화를 하고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걷는다
차량소리가 들리고 능선 아래로 내려서니 부항령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항령(釜項嶺:680m:16:32)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과거에는 김천과 무주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로서 우마차가 넘어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었지만 인근의 덕산재에 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 이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지방도가 만들어진 이후에 비로소 부항령을 이용하게 되었다
경북과 전북의 도계를 이루는 부항령의 지명유래는 가목마을에 있는 고개여서 마을의
지명을 따 가목령 또는 부항령 (釜項嶺)이라 하였으며, 가목은 '가매목'의 줄임말인데,
부뚜막이란 의미로 ‘부뚜막을 닮은 고개란 뜻’인데, 이를 한자로 '부항(釜項)'이라 적는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오래된 고갯마루인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에도
'부항현(釜項峴)' 으로 기록돼 있다... 부항령에서 무주군으로 이동하면 나제통문 (羅濟通門)이
있는데, 현재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지만 과거에는 나제통문
지역을 기점으로 생활권이 달랐다고 한다.
부항령 안내판
마루금 산행을 마치고 날머리인 삼도봉 터널로 향한다
늘 가슴속 한켠에서 웅어리져 있는 땜방 구간을 마치고
내려가는 이 길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삼도봉 터널 입구에 있는 이정표와 백두대간 안내지도
김천 방향으로 가목마을 살짝 보이는데 가목(부항:釜項)마을의 유래를 보면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釜項)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가목재에서 감내(甘川)의 큰 줄기 샘이 발원하는데,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 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도봉 터널에 있는 부항령 표시석
삼도봉 터널(605.1m:16:40)
경북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탄방(炭坊:쑥뱅이)
마을 경계에 있는 길이가 391m( 경북 151m, 전북 240m)이며,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연결하는 1089 지방 도로가 관통하는 터널로, 1999년 12월 6일 무주와 김천의 교통이
단절돼 있던 두 지역의 교류 촉진을 위해 백두대간 길목인 부항령(가목재)에 도로를 내고
터널을 개통했다고 한다
삼도봉 터널 개통으로 무주로 가는 길을 가는 영.호남인들이 더욱더 가까워졌으며,
삼도봉 터널 앞 소공원은 영.호남인의 화합과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교통량이 거의 없어 여름이면 500m 터널 양쪽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길이 없을
만큼 돗자리를 펴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하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속도를 줄이거나 함께 피서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도봉 터널 지명에 대한 유감
지명은 당연히 '부항령 터널'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8km나
떨어진 삼도봉의 지명을 데려와서 생뚱맞게 삼도봉 터널이라니...사연은 이렇다.
'부항령 터널'로 명명할 경우 부항은 부항면의 경상도만 돋보여서 안 된다는
전라도(무풍면) 쪽에서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삼도봉'을 데려와서 지명으로 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 씁쓸하다
삼도봉 터널에 내려서니 무풍 택시 기사분이 나를 반갑게 기다린다
2개월만의 邂逅라 그런지 더욱 더 반갑다...비슷한 연배라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무주 터미널에 도착한다
무주터미널(17:15)
무주터미널에 도착하여 매표소로 가니 오늘은 다행히 서울로 가는
17시 45분 막차표가 있어서 예매를 하고 화장실에 가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에 베낭에 남은 간식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무주발 → 서울 남부행 버스표
서울 남부터미널(20:10)
무주를 출발한 버스에 오른 다음 평소의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는 벌써 안성휴게소를 지나고 있다...전용 차선 덕분에
생각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남부터미널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白頭大幹 4차 북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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