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山 남쪽 능선을 神仙처럼 걷다
☞산행일자: 2023년 10월 15일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강풍...오후에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7.6km + 날머리 6.2km / 6시간 5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미시령-825.8m봉-안부-암봉-쉼터-샘터-안부-조망바위-안부-암봉
암봉-안부-상봉-안부-암봉-안부-조망처-화암재-조망바위-암봉
헬기장-신선봉-공터-암봉-안부-800.5m봉 갈림길-안부-공터-868.4m봉
무명봉-안부-대간령-마장터-화암재 갈림길-홀리 갈림길-소간령
약수터-공터-청암계곡-주차장-박달나무 쉼터
☞소 재 지: 강원도 인제군 북면 / 고성군 토성면 / 속초시 설악동
10월에 접어들어서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내리는 비로 인하여 강원도의 대간길을
향한 발걸음이 자꾸만 지체되는데 이번주도 토요일에 강원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이다... 또 고민을 하다가 토요일 저녁 늦게 기상청 예보를 검색하니
토요일 자정이후부터는 날씨가 개인다고 하여 강원도 중에서도 대간길 최북단인
미시령 구간을 가기로 하고 베낭을 대충 챙겨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4시쯤에 일어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누군가가 내 차앞에 차를 세워놓고
기어를 중립으로 해놓지 않아서 차를 뺄수가 없다...차주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괜히 이른 새벽부터 서로 기분을 잡치는 일이 생길까봐 포기하고 아들한테 차를
빌려서 04시 20분경에 오늘 산행 들머리인 미시령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고속도로에서 좀 속력을 냈더니만 이른 새벽에 차량이 별로 없었던 탓인지
2시간이 채 안 걸린 시간에 미시령 정상에 도착하니 아직도 어둠이 깔려 있고,
주위에는 일출을 기다리는 10여명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2주전과는 달리 몸을 가누기가 힘들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대니, 과연 미시령이다
나도 일출을 기대하며 차 속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이 시작되고 차 속에서 나온다
일출(06:47)
동해안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우측의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夢幻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잠깐 사이에 너무 추워서 서둘러 차 속으로
산행을 준비한다
미시령(彌矢嶺:767m:07:10)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동국여지승람과 산경표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이라 기록되어 있고
그 후 여수파령 (麗水坡嶺)으로 불렸다고 하며, 택리지에서는 연수령(延壽嶺),
대동여지도에는 연수파령(連壽坡嶺)으로도 불리던 고개가 현재는 미시령(彌矢嶺)
으로 불리고 있으며, 조선 중기에 조선 중기에 송시열의 문인으로, 이조 참판ㆍ
대제학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인 김유(金楺 :1653~1719)가 쓴 유풍악기(游楓岳記)에다
금강산 가는 금강산 가는 길에 미시령을 지났다... 령(嶺)을 넘었는데 미시(彌時-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개), 혹은 미일(彌日-여러 날이 걸리는 고개) 이라고...
세속에서는 연수파(烟樹坡-안개가 자욱하고 나무가 많은 고개)라고도 했는데, 이는
험준함을 일컫는 말이다라고 한다...고개를 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의미였으나
현재의 표지석에는 彌矢嶺(미시령)이라 표기돼 있고, 표지석 후면의 설명문에는
더디게 넘는 고개라 새겨져 있다.
미시령은 진부령, 한계령, 구룡령, 대관령과 함께 강원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고개로
미시령에 서 있는 정상석은 1960년에 이 고개로 46번 도로가 개통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제호(題號)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 고개 아랫쪽에 2007년 5월에 미시령 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지금은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고 하며, 남쪽으로는 황철봉,마등령,
공룡능선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상봉, 신선봉, 마산봉 진부령으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원래 이 미시령 구간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 4차의 大尾를 장식하려고
했는데 그 시기가 아마도 12월쯤 될 것 같다...그렇게 되면 이곳은 한겨울이라
강원도에 동절기가 되면 가장 먼저 교통이 통제되는 곳이 이곳 미시령이기에
우선 이곳부터 산행을 하기로 한다...거기다가 이곳을 3번이나 통과하면서
늘 국공파에 쫒겨서 한밤중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산행을 했기에 이번에는
이곳에 국공파들의 단속이 느슨한 건지 안하는 건지는 몰라도 낮에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과감하게 도전해 보기로 한다
잠시후에 오를 금강산의 맨 끝자락
강풍으로 인해서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든다.
상봉으로 향하는 봉우리는 철조망이 굳게 처져있고, 어린 묘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보호막 윗쪽에는 CCTV가 째려보고 있지만 기왕 주사위는 던져졌고, 차 안에서
산행준비를 마치고 차 밖으로 나온다
산행을 시작하다(07:20)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아직까지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았는지
문은 굳게 잠겨있고 주차장도 폐쇄되어 있는 미시령탐방지원센터
옆의 나무 계단으로 올라간다...예전에는 국공파들의 강력한 단속으로
꿈도꾸지 못할 일이 벌어졌으니 그야말로 桑田碧海가 된듯 하다
미시령탐방지원센터 옆 계단으로 올라가니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철조망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아서 숏다리인 나도 넘어갈 수가 있겠다
베낭을 걸어놓고 간단하게 월담을 한 다음에 상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아프리카 돼지열병(ASF)을 차단하기 위한 철조망이란다.
* 아프리카 돼지열병(ASF: African swine fever)은 전염되기 쉽고 일반적으로 치명적인
돼지의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혹멧돼지콜레라(warthog fever)'라고도 한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1910년 발견된 이래 유럽을 거쳐 아시아 일대까지 전파되었으며,
이 병에 걸린 돼지는 고열과 호흡 곤란을 거쳐 일주일 안에 대개 사망한다.
한국에서는 2019년 9월 17일 경기도 파주에서 처음 발생한 이래, 경기도 연천, 인천광역시
강화, 경기도 김포 등지에서 연속해서 발병이 확진되었고, 비무장지대 일대 야생 멧돼지
사체에서도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미시령을 기준으로 북쪽은 금강산에 속하는 곳이라 설악산 국립공원과는
무관하고, 관리 주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아닌 환경부가 관리하는 곳이다
철조망을 월담하여 올라서니 CCTV가 범여를 감시한다
모자를 푹 둘러쓰고 CCTV를 지나는데 뭐라, 뭐라 방송을
해대지만 걍~~~그냥 모른체 윗쪽으로 향한다
CCTV를 지나 등로가 안 보이는 풀섶으로 오르는데 미시령 옛길에서
올라오는 강풍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몸을 가누기 힘들정도이다
느린 발걸음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봉으로 향한다
등로를 오르다가 미시령을 뒤돌아 본다...어둠속이 아닌 밝은 낮에
이곳을 걷는데 感慨가 無量하다...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2주전에 걸었던 미시령에서 황철봉을 걸었던 능선들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 입었고, 미시령 정상석 아래에 세워둔 빌려 타고온 우리 아들의
愛馬는 아빠가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올 때가 기다릴 모양이다
등로에서 내려다 본 미시령 옛길
미시령은 한계령과 함께 설악산 서쪽의 인제와 동해안의 외설악을
이어주는 교통로이다...조선시대에는 미시파령으로 불린 험준한
고개로 15세기에 길이 개척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다시 폐쇄되기도 했다.
미시령 정상에서 북쪽으로는 신선봉~대간령~진부령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주능인 황철봉~마등령~공룡능선을 이어주고 있다.
현재 미시령길은 1960년대에 개통되었으며, “미시령”표시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제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름길 등로 옆에는 노란 국화가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면 흐드르지게 피어있다
그래...이 무시무시한 미시령의 강풍에도 살아남은 너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저 노란국화는 민초들이 꽃을 말려서 국화차로 마시기도 하는 유용한 꽃이다
미시령을 출발하여 한번 빡세게 치고 오른 다음에 첫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825.8m봉(07:28)
이곳 아래로 미시령 터널이 통과하며 예전에 삼각점(△설악416)이 있었던
자리에는 CCTV를 설치했던 말뚝이 보인다...미시령봉이라고 불렸던 봉우리인데,
예전에 3번에 이곳을 통과했거나, 옆구리의 샛길로 올라왔기에 이 봉우리에 대한
기억은 전혀없다
825.8m봉에서 안부로 내려가는데, 이곳은 1년내내 바람이 안 부는 날이 없을 정도로
강풍이 심한 곳으로 이곳의 바람이 얼마나 세었는지 바람에 돌이날려 그 돌에 학(鶴)이
맞아 죽었다고 하는 곳인데 그래서 이 능선 우측 아래에 있는 속초의 마을 지명이
학사평(鶴死坪)이라고 하며, 순두부 요리가 유명한 곳이다
상봉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들의 가지가 한결같이
동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것은 이곳의 바람이 워낙 심한 탓에
바람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탓이다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滿山紅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금강산의 남쪽 끝자락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듯 산 위에 밀려 내려오는
짙은 안개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듯 하지만 그렇다고 여태껏
산길을 걸어면서 한번도 쉽게 포기한 적은 없었다...그래도 멀건 대낮에
주변의 山勢를 즐기면서 걷는 그 자체가 나는 즐겁다
안부(07:33)
옛날에는 미시령에서 오르지 못하고 용대리에서 올라오다 미시령 옛길에서
철조망 개구멍을 따라서 이곳으로 올라와서 진부령으로 향했던 안부이다
안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와 속초의 영랑호는 짙은 안개로 완전 곰탕이다
다행히도 물빛에 비치는 햇빛 탓으로 곰탕인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랑호는
뚜렸히 보인다
속초시 장천동·금호동 및 영랑동에 걸쳐 있는 영랑호(永郎湖)는 둘레 길이가 약 8㎞로
속초시에는 영랑호와 청초호(靑草湖)의 두 석호(潟湖)가 동해와 접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조(杆城郡條)에, “영랑호는 고을 남쪽 55리에 있다.
주위가 30여 리인데,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며,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옛 정자터가 있으니 이것이 영랑신선무리가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화랑 영랑·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祥) 등이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무술대회에 나가기 위해 고성군의 삼일포(三日浦)에서 3일 동안 쉬다가 금성(金城)으로
가는 길에 영랑호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영랑은 호반의 경치에 도취되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조차 잊었고, 이로 인해 호수의 이름을 영랑호라 부르게 되었다.
이중환(李重煥)도 『택리지』에서 영랑호에 대해, 구슬을 감추어둔 것 같다고 하며 신비로움을
표현한 바가 있으며, 청초호는 속초항의 내항으로 쓰이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낚시·뱃놀이·수상스키·골프 등을 고루 즐길 수 있는 영랑호는 척산온천·오색약수·장수대·백담사·
낙산사·송지호·삼포해변·문암해변·진부령과 함께 설악권(雪嶽圈)의 주요 관광지로 손꼽힌다.
안부를 지나서 상봉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길에 대한 넋두리 / 유옹 송창재
길을 간다.
돌아오지 못할 길 일 수도 있다.
반복되어 오가는 길이기도 하고
낯선 길 일 수도 있다.
뜨거운 포장길이거나
거친 자갈길이거나
숲속 오솔길이거나
먼지 푸석거리는 황토 길일 수도 있다.
길은 친하다.
매일 다니는
친근한 길을 아무 생각도 없이 걷기만 한다.
이미 그 길은 친하게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 길도 알고 있다.
내가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를 미워했는지
누구를 그리워했는지....
금강산으로 가다가 몸집이 무거워 지금의 자리에서 쉬고 있는 저 울산바위...
이미 1만 2,000봉이 다 차서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금강산에 가긴 했으나
다른 바위들에 비해서 美貌에서 밀렸으며, 그렇다고 해서 울산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고 해서 여기 설악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저 울산바위...
그때 좌절했던 그 심정을 이해를 할 것만 같다...너무 서러워 마시게...세속세계의
중생들의 삶에는 그런 일이 非一非再하다오
오르막에서 만나는 奇巖들이 이곳이 금강산 초입이라는 걸
알려주듯 멋진 仙景이 초반부터 범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예전에는 어둠속에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갔던 구간이었는데
밝은 날에 지나는 길에 자세히보니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될 모양이다
옛날에는 국공파의 등쌀에 못이겨 저 아래 보이는 구절양장의
저 곳에서 헤드렌턴을 끈채로 치고 올라와서 진부령으로 향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구나...아침에 출발한
미시령이 잘 다녀오라고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간간히 만나는 동물이동감시 카메라...동물들의 사생활은 眼中에도 없는 모양이다
土沙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듯한 나무계단.
높고 간격이 넓어 나같은 숏다리에게는 엄청나게 힘들고
불편하다
낙엽 / 한정숙
가을이면
낙엽이고 싶다
한 치 더 자란 가지에서
푸르른 녹음이었던
한 해의 보람을 다하고
눈물 같은 가을비가
지나가고 나면
잎새는 붉어지고
떠날 기약은
가까워 온다
물든 새 옷일랑
수의로 입고
이승보다 더 좋은 데로
옮겨가리라
바람이 부른 대로
계절의 섭리 대로
짐 벗어 가벼운 가을
훠어이 훠어이 떠나는
한 잎
낙엽이고 싶다
오늘 이곳으로 산행 코스를 잡은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인듯 하다
맥길을 걷는 독립군이 올 여름부터 맥길을 포기하고 대간길을
접어들어 올해안에 대간 4차를 끝내고, 맥길을 시작하려 했는데
뜻하지 않게 이 멋진 단풍구경을 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초반부터 시작되는 암릉구간은 맞은편에 보이는 황철봉 능선에
비하면 鳥足之血이긴 하지만 그래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걷는다
조그만 방심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곳이 산이 아니던가...
암봉(07:55)
암봉 좌측을 치고 오른 다음에...
등로가 보이지 않는 좌측의 사면길로 대간 마루금을 이어간다
늘 그 자리를 지키다가 生을 마감하는 저 枯死木 .
本分에 충실하다 삶을 끝내고서도 아직도 뭔 미련이 있는지
아니면 죽어서도 대간꾼의 수호신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하였던간에 고맙구나
흐미...금강산이 불타겄네...
조금씩 조금씩 상봉을 향한 등로는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등로에는 사람의 흔적들을 나타내는 시설물들이 보이는데
이곳이 휴전선이 그리 멀지않은 최전방이라 그런지
시설물들은 군부대에서 설치한 듯 하며, 등로에는 군 통신선으로
사용했던 삐삐선이 계속 대간길과 같이한다
쉼터(08:05)
쉼터를 통과하는데 멋진 암릉이 길을 막는다.
그렇다고 가지 않은 산꾼은 없을 것이다
살짝 우회를 하면서 상봉으로 향하는 대간길을 이어간다
우회하면서 바라본 암봉
능선 윗쪽으로는 암릉구간이라 대간길은 사면길로 이어진다
사면길이라 그런지 강하게 불어대던 바람이 잠잠하니 살 것같은
느낌이다
모진 風波에 시달려 몸뚱아리가 이리 저리 뒤틀리면서도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저 모습이 측은하게
보이지만 산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구성원의 일원으로
충실히 꿋꿋하게 살아가는 너의 용기가 가상하구나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니 샘터가 나온다
샘터(08:20)
샘터옆에는 예전에 산꾼들을 감시하던 CCTV는 사라지고,
폴만 남아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끔 한다
고도를 높혀서 오르니 이곳은 아래와는 달리
벌써부터 단풍은 겨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곳은 벌써 겨울 준비중이다...아!, 세월앞에 장사가 없구나
아무런 생각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취해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산객의 소리가 들려서 엄청 놀란다
뒤돌아 보니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분과, 외국인 남성이
올라오는데, 자기들은 화암사에 차를 주차해놓고, 미시령에서
출발하여 신선봉을 찍고, 화암재로 하산을 계획하고 있으며,
방글라데시 직원과 사장과의 관계란다.
그러면서 같이 사진을 찍고는 서로간의 인사를 나누고 먼저 가신다
안전로프가 처져있는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가니 용도를 알 수 없는 쇠말뚝이 있는 안부가 나온다
안부(08:37)
조망바위(08:38)
안부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조망바위...조망은 커녕
주변은 곰탕국물처럼 완전히 五里霧中이다
조망바위를 지나면서 대간길 등로는 서북쪽으로 이어지고...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
산에서 짙게 밀려오는 짙은 안개가 멋진 仙景을
기대하고 이곳에 온 범여의 가슴을 조리게 할 모양이다
이곳부터는 6.25 당시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전사자의
유해발굴 현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하기사 이곳은 해방이후
6.25 당시까지는 김일성 치하의 공산국가에서 신음했던 북한땅이
아니였던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모윤숙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이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나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어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아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착잡한 마음으로 걷는데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산꾼의 흔적을 만난다
안부(08:45)
짙은 안개는 계속해서 몰려오고...
상봉의 전위봉인 암봉을 향한 본격적인 너덜겅의 애추(崖錐)가 시작된다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어서 암봉으로 향한다
암봉(08:48)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보는데 그야말로 완전히 곰탕이다
숲을 지나자마자 상봉으로 향하는 길에 2번째 암봉을 만난다
암봉(08:50)
조심스레 너덜겅을 지나가는데 몸을 가누기 힘들정도의 강풍이 시작된다
잠시 숲속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너덜겅으로 기어 올라간다
상봉가는 길
철없는 넘들...
암봉에서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08:53)
예전에는 헬기장이었고 6.25전사자들의 유해발굴 현장이었는데
지금은 헬기장은 사라지고, 묘목을 심어논 조림지로 바뀌었다.
군벙커처럼 보이는 구덩이가 있는 안부에는 바람막이에 갇혀있는
조림지가 보이고, 밀려오는 짙은 안개로 인해 주위의 조망은 완전히
곰탕국물처럼 변해 버린다
또 다시 너덜겅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直立步行이 아닌 네 개의
발을 가진 짐승처럼 기어서 너덜겅을 통과해야만 하는 곳이다
상봉을 오르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
안부(08:57)
안부의 오르막길에 심어논 조림지의 가림막은 죄다 다 날아가 버렸다
이곳이 그만큼 바람이 심하다는 얘기렸다...저 여린 나무들이 부디
살아 남기를 바란다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70년이 지난 6.25 당시 상봉전투에서 전사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시작되는
곳을 지나는데, 이곳은 1951년에 북한군 6사단과 12사단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산화한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인데, 6ㆍ25전쟁 전사자 중
13만여명은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금강산 상봉 1243고지에서 저 분들의 희생...요즘 우리는 너무 가볍고
보고 있는 건 아닌지...6·25전쟁 당시 국군 수도사단과 6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과
맞붙었던 격전지가 펼쳐진 곳인데 1951년 5월 상봉을 차지하기 위한 열흘 간의
전투 흔적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곳곳에 남아있어 그 당시 치열했던 현장을 보는 듯 하다
상봉(上峰:1,242.6m:09:0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 전체가
암릉으로 되어있고 정상에는 커다란 돌탑 하나가 서 있으며 오늘 구간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기도 하지만 금강산 일만이천봉중에 남한에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관리는 설악산국립관리공단에서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설악산권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금강산 자락이다.
옛 우리 선조들은 미시령을 경계로 북쪽은 금강산, 남쪽은 설악산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이곳 상봉과 신선봉 사이의 좌측 능선아래에 있는 화암사 일주문 편액에는
“金剛山 禾巖寺”로 표기되어 있고 진부령 아래에 있는 유서깊은 사찰 건봉사
일주문에도 “金剛山 乾鳳寺”로 적혀있다
인증샷
상봉에 잠깐 머무르는 사이에 차갑고 드센 바람이 肺腑까지 파고들고,
산 아래에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 때문에 가야할 신선봉 방향은 그야말로
五里霧中이다...하기사 명산치고 정상을 쉽게 허락한 산은 한번도 없었다.
하물며 금강산의 끝자락이긴 해도 명색이 금강산인데, 쉽게 정상을 허락한다면
자존심이 말도 안되는 거 아닌가...
상봉을 지나서 신선봉으로 향하는 길.
감히 俗人이 神仙을 만나러 가는 길을 어찌 가벼이 갈 수 있으랴...
차갑게 불어오는 강풍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는 마음으로 걷다보니
예전에 3번을 통과하면서 어둠속에 가느다란 로프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통과했던 암릉구간을 만난다
암릉구간 윗쪽에 있는 멋진 바위가 말하는 듯 하다.
어둠속이 아닌 멀건 대낮에 지나가는 기분이 어때요...
범여 曰...기분요...그야말로 짱이죠...
예전에는 벤뎅이 소갈머리의 국공파들이 로프를 짤라버려
간간히 애을 먹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설악산 국립공원쪽에서
관리를 안해서 그런지 아니면 대간꾼들에게 암묵적으로 용인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온전한 로프가 있어서 조금은 편하게 이곳을 통과한다
암릉구간 아래로 내렸갔다가...
조금전에 보았던 멋진 암릉을 우회한 다음에 다시 빡센 오르막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동물이동추적장치 카메라를 자주 만난다.
동물도 privacy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을텐데 너무 심한거 아닌가...
산도 이제는 인간 중심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돌려주는게
도리가 아닌지?...
짙은 안개가 계속 밀려온다...멋진 선경을 포기해야 하나...
못보면 할 수 없제, 그것도 운명이라 생각해야제 우짜겠노...
최근에 내린 비 때문인가?...등로에 암릉들의 물기 때문에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09:13)
안부를 지나 마치 토끼비리처럼 보이는 암릉 옆구간을
통과하는데 우측 아래로 너널겅이 보이는데 천길 낭떠러지다.
* 토끼비리의 ‘비리’란 ‘벼루’의 경상도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의미하며, 중국에서는 잔도라고 부르는데, 잔도(棧道)는 험한 길을 의미하는
어휘로,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벼랑길과 사다리길을 뜻한다.
토끼비리의 대표적인 곳이 문경시 마성면에 위치한 석현성의 진남문 아래에는
성벽이 축조되어 있는 토끼비리이다.
토끼비리의 유래는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이다가 남하하는
도중에 길을 잃고 말았다... 수직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절벽 앞에 이르러 군사들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났다.
그 토끼를 쫓아가니 험하기는 했지만 길을 낼 만한 곳이 나타났는데, 토끼가 지나간
벼랑을 잘라 길을 내고 왕건은 힘겹게 진군할 수 있었다.
길을 찾던 왕건에게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여 이 길을
‘토천(兎遷)’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으며,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과
문경새재에서 흘러오는 조령천이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S자형으로 산간 협곡을 파고돌면서
동쪽 산지에 형성된 벼랑에 가까스로 깎아 만든 길로 토끼비리는 영강의 하천변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벼랑길을 잔도라 한다. 길이는 약 2km에 달한다.
이곳 역시 오르지 못할 암봉이라 쳐다만 보고, 우회하면서 통과한다
스스로 겸손하여 잘 참는 사람은
마음이 고요하고 행실도 바르다
좋은 말은 채찍을 받지 않듯이
비난과 모함도 그의 곁을 떠난다.
- 법구경 -
호젓한 이 길...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짙은 안개로 인해 주변의 멋진 仙景은 곰탕 국물처럼
변했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이 길에 대한 후회는 없다
암봉으로 올라서는데 군부대가 훈련하면서 설치한 듯한 삐삐선이 보인다
암봉(09:16)
암봉에 올라섰다가 내려서면서 부부인듯한 山客을 만난다
이른 아침에 산에 오셨는지 아니면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겨울 등산복으로 완전무장하고 강풍을 피하기 위해서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이채롭다
2번째 만나는 로프지대...다행히 로프는 살아있어(?) 편하게 내려간다
대간 등로와 삐삐선은 계속 같이간다...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을 듯 싶다
안부(09:21)
서사면길을 걸어가니 다행히 바람의 영향은 덜한 편이라
추위는 면했으나 그래도 손이 시릴 정도이니 서울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상당히 추운 날씨이다
멋진 암릉에 魂이 빠진 상태로 걷다가 땅바닥에 깔린
삐삐선에 등산화가 걸려서 된통 꼬꾸라지면서 무릎이
바위에 부딪힌 바람에 엄청난 통증이 수반되는데 새벽부터
집을 나와서 개고생하면서 뭔 지랄인지 모르겠다
조망처(09:28)
이곳 우측 아래에는 금강산의 마지막 자락에 걸쳐있는 유서깊은 절집
화암사가 있는 곳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구나.
화암사(禾巖寺) 일주문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로 손꼽히는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위치한 화암사(禾巖寺)는
전통사찰 제27호로 신라 혜공왕 5년(769)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비구니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진표율사는 법상종의 개조(開祖)로서 법상종은 참회불교의 자리매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으로부터 359년 전인 인조 11년(1633)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선생이 간성군수로
있을 때 썼다는 간성지 화암사조에 의하면, 「천후산 미시파령(天吼山 彌時坡嶺=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절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
모든 산과 평원심곡이 눈 아래 보이고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진표율사는 금강산 동쪽에 발연사를 창건하였고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하면서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화엄사(華嚴寺)라 불렀는데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면서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다. 그러면서 기도중에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하고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조선조 정조 18년(1794)에는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이 되었으며, 미타암의 화응전이
정조의 원당이 되면서 관음보살상과 정조친필병풍 8폭이 하사되기도 한 곳이다.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의 본당으로 1919년 7월에 완공되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모셨으며, 정면3칸과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정면 창호의 어간과 협간에 모두 꽃창살을 달았으며
정면 2칸은 잔잔하지만 바깥쪽 2칸은 시원스런 꽃문양으로 장식되었다.
화암사에 대한 전설
간성군 남쪽 70리되는 곳에 있는 산으로서 석굴이 많고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나온다 하여
천후산(天吼山)이라 부르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양양과 간성 사이에 큰 바람이 많은 것도
이 까닭이라 하는데, 뛰어난 성인대가 있는데 돌모양이 불상과 흡사해서 성인대라 하였다.
그옆에 또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곡식을 쌓아둔 둥근 곳집같이 보인다하여 세속에서 화암(禾岩)
이라 부른다.
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서 적과 싸울때 짚으로 만든거적으로 이 바위를
둘러싸서 마치 벼가리같이 보이게 하여 적을 물리쳤다하여 화암(禾岩)이라 했다.
화암사는 창건 이래 고종 원년까지 1096년간 화재가 5번이나 났는데 이것은 화암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이다...화(火)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나 ‘화’자를 쓰지 않도록 하고
‘火’자대신 ‘禾’자로 쓰자는 것이다.
풍수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수극화(水克火)로 물은 불을 이긴다하여 물 수(水)자를
써야겠는데 수(水)자를 쓰자하니 절이름에 대한 역사적의의가 없어진다해서 수(水)
대신 수(穗)자를 쓰면 음(音)은 수(水)와 같고 뜻은 화(禾)와 같으니 수암(穗岩)이라
했으나 또 화재가 생겨 1912년에 화암(禾岩)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이 바위를 ‘수바위(穗岩)’로 부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수(穗)자는
좀 어려운 한자여서 아는 사람이 적고 바위경치가 아름답다해서 수바위(秀岩)라고
세속에서 쓰기도 한다.
수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벼(禾)에 얽히 이야기가 많다.
화암사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계란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어 초행길에도 찾기 쉬운
목표물이기도 하였는데, 바위위에 왕관모양의 바위가 또 하나 있는가하면 직경 1m 주위 5m
가량되는 웅덩이가 항상 물이 고여 있고 가뭄이 심할때 이물을 주위에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고 옛날에는 스님들의 수도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조망처 앞에는 정말 멋진 바위가 범여의 눈길을 잡는데 짙은 안개로 아쉽기만 하다
멋진 암릉을 지나니 황철봉 못지 않은 너덜겅이 시작된다
짧은 너덜겅이 지나...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 다음에...
화암재를 향하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잠깐 사이에
등로가 열리면서 신선봉 자락의 남사면 능선이 가슴 설레게 한다
화암재 내려서면서 바라본 신선봉 자락은 짙은 안개로 인해 夢幻的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 신비로움이 과연 신선이 살만한 곳인듯 하다.
神仙의 “선(仙)” 자는 ‘사람 인(人)변에 뫼 산(山)자’ 합치면 ‘신선 선(仙)’이
아닌가...사람이 산에서 살면 신선이라는 뜻인가?
화암재(禾庵峙:09:40)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마장터에서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우측 아래 화암사에서 고개 이름을 따와서 화암재라고 부른다.
마장터와 화암사로 내려가는 등로는 뚜렸하고, 대간길은 직진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신선봉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신선을 만나러 가기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오르막길을
뚜버기처럼 한발한발 오르막을 향해서 올라가는데, 금강산의
낙엽이 응원을 하는듯 滿山紅葉으로 단장하고 범여를 반긴다
조망바위(09:52)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지나온 상봉의 모습은 말 그대로 餘白이다.
화암재 내려오면서 바라본 능선과는 달리 숲으로 들어서니 고도는
그리 높지않고 심심하지 않게 기형적으로 생긴 나무들이 범여를 반긴다
느림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신선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나를 추월하는 대간 산꾼 2명을 만난다... 한명은 오늘 대간
졸업식이고, 한명은 축하객인듯한 산꾼이다...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저 윗쪽에서 축하객 2분이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린다면서
같이 음식을 나눠 먹자고 하는데, 나야 좋지만, 민폐일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숲이 끝나고 너덜겅이 나오는데 조금전에
상봉 오르는 길에서 만난 한국인 사장님과 외국인 근로자 분은
신선봉을 찍고 화암재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서로 安山을 하라는
인사를 건내고 헤어진다
신선봉을 향한 통과의례인가...집채만한 너덜겅을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다시피 너덜겅 윗쪽의 암봉으로 향한다
암봉(10:10)
신선봉의 전위봉격인 암봉에 올라서니 조금전만 해도
주위가 온통 곰탕국 그릇을 엎어놓은듯 오리무중이었으나
신선께서 범여를 어여삐 여기셨는지 갑자기 조망이 확트면서
지나온 상봉과 그 뒷쪽의 황철봉이 뚜렸하게 보인다
암봉 아래로 내려선다
헬기장(10:12)
헐~~~ 이게 뭐여! 예전엔 헬기장이었고, 박꾼들의 멋진 비박장소로
유명했던 헬기장에 새로운 樹種의 나무를 심어놓고, 바람막이로 가려
놨는데 이곳의 바람이 어찌나 드쌨는지 가림막이 다 날아가 버렸다.
이곳은 암릉구간에다 등로가 그리 좋지 못해서 산악 사고가 났을 경우에
인명구조에 용이한 헬기장이건만 왜 헬기장을 없셨는지 아둔한 범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구나...하기사 설악산 정상 아래에 있는
중청대피소도 없애는 마당에 이런 헬기장을 관심이나 두겠는가...
영 뒷맛이 개운찮다
휴식(10:15~35)
암봉에서 헬기장 아래로 내려서니 대간 졸업을 축하해주러 오신 산꾼들이
삼겹살에 술 한잔을 하면서, 오셔서 같이 음식을 좀 드시라고 한다.
이 분들과 어울려 삼겹살을 좀 얻어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서서 신선봉으로 향한다...맛있게 잘 먹고 갑니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신선봉의 모습
신선봉 오름길에서 바라본 속초 앞바다의 모습
신선봉 정상으로 가는 길...그리 쉽지는 않다
길이 아닌 너덜지대를 오르는데 바람소리에 모든것이 묻혀 버린다.
가쁜 숨소리, 스틱소리, 고지가 높아질수록 한발한발 내딛기가 힘에
겹고, 가슴은 콩닥콩닥 머릿속은 바람들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두발아닌 네발로 너덜지대의 바위를 기어 오르니 오르니 신선봉의 정상인데
강풍탓에 몸뚱아리의 중심조차도 잡기가 힘이든다.
그래도 칠흙같은 어둠속이 아닌 백주(白晝:환하게 밝은 낮)에 신선봉 정상을
밟을 수 있는 그 자체로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중심을 잡기 힘든 몸뚱아리로 이곳 저곳을 향해서 카메라 셧터를 눌러대고
있는데, 부부 산객이 정상에 도착하여 인증 사진을 찍어주는데 참으로 고맙다
신선봉(神仙峰:1,212.2m:10:40~50)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우리나라에는 신선봉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40여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선봉이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다고 하며, 정상부근은 완전히 너덜지대로 구성되어 있고 그 너덜의
바위로 이루어진 돌들이 신선봉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시작이 되는 봉우리이다.
강원도 고성 사람들은 옛부터 미시령 북쪽부터 금강산으로 보는데 금강산 1봉이
신선봉이고, 2봉을 마산봉으로 쳤다고 한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중 남한에 있는 여섯 봉우리(향로봉, 칠절봉, 둥글봉, 낙타봉, 신선봉,
상봉)중 하나로 산 중의 산, 절경 중의 절경이며 일만이천 봉이 위용을 자랑한다는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에 발원한 신선봉에서 시작되니 이 신선봉이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첫 번째 봉우리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미시령을 넘다 보면 양측으로 장관처럼 펼쳐지는 산이 있으니 우측의 산이 설악산이며
좌측의 산들이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자락이다. ..그러기에 금강산은 결코 휴전선
이북에만 있는 禁忌의 땅이었던 그 명산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보았고 디뎠던 그 산에서 시작된다
신선봉은 뒤늦게나마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지난 2003년 8월26일 설악산 국립공원에 편입됐다.
인증샷
조금전에 지나온 상봉이 뚜렸하다.
조금전만해도 한치앞도 볼 수가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왔는데
이렇게 뚜렸하게 상봉을 볼 수 있다니...신선이 범여를 어여삐 보신 모양이다
신선봉 정상에서 바라본 북동쪽 고성군 토성면의 산그리메
대간령으로 내려가는 등로는 만산홍엽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그 뒷쪽의 마산(馬山峰:1,052.0m)
너머로 보이는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에 휴전선 이남에 있는 칠절봉(七節峰:1,171.1m)과
둥글봉(1,276.7m),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향로봉 (香爐峰:1,290.3m) 은 흰구름과
悠悠自適 遊戱를 즐기고 있는데, 구름 우측의 하얀 군부대 건물이 선명하게 보인다
신선봉 정상에서 당겨본 향로봉(香爐峰:1,290.3m) 의 모습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과 고성군 간성면, 수동면, 그리고 북한땅의 회양군의 3군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의 하나로 남한에서 오를 수 있는
백두대간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산의 북쪽 사면으로 휴전선이 지나가는 봉우리다.
고도가 높아 구름이 덮인 날이면 향로에 불을 피워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향로봉이라
불리는 것으로 전해지는 산으로 옛날에는 제사 지내던 터가 있었다 하며, 원래 지명은
마기라산(磨耆羅山)이었으며 신라 시대에는 가리라봉(迦里羅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간성군에 "마기라산 고을 서쪽 30리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남산 고을
남쪽 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마기라산군 바로 서쪽 30리에 있다.
진부령의 주맥으로 인제의 경계로부터 뻗어와 군의 진산이 되었고, 봉우리를 향로봉이라 하고
도량과 마주보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 산으로 『조선지도』에는 마기산(磨耆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와 『대동여지도』에서는 진부령 북쪽에 위치한 마기라 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향로봉이 진부리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73년에 향로봉의 북동쪽에
위치한 건봉산(乾鳳山:908m)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247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향로봉 ·
건봉산 천연보호구역'으로 향로봉 정상에 위치한 성황당에서 매년 두 차례 성황당제를 지낸다.
조선 후기에 이명한(李明漢)이 지은 금강산 기행문인 유풍악기(游楓岳記)를
그의 문집인 『백주집(白洲集)』 권16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명한이 1640년(인조 18)
4월 13일에서 16일까지 금강산의 여러 유명사찰과 주변의 경관을 보고 느낀 점에
대하여 기록한 글이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작자는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을 중국인들도 한번 보고자 원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출생하여 가보지 못한다면 한(恨)이 될 것이라 말하면서 기행문을 시작하고 있다.
이명한은 두 아들과 함께 금성(金城)으로부터 단발령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서
회양과 춘천에서 온 두 관원과 함께 장안사에서 하룻밤을 잔다... 산행의 둘쨋날인
4월 14일에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을 따라 영원사(靈源寺)와
대소 송라사(松蘿寺)를 찾아보고 표훈사(表訓寺)에서 잠깐 쉰다.
작자는 점심때가 되어 정양사(正陽寺) 동루(東樓)에 앉아 금강산 1만2000봉을 감상하면서
황홀한 시간을 보낸 다음에 그 때에 평생을 두고 생각해오던 친구들을 만난다.
산행 3일째 되는 날에 산의 안개가 흩어지고 천지가 말끔히 개고 산과 바위가 씻은듯
깨끗하여 산 속의 초목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명한은 이 명산을 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간절한 기원에서 이러한 현상이 비롯되었다고 여긴다.
그 곳의 승려들도 수십년 내의 보기 드문 좋은 날씨라는 것이다.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를 보고 친구인 인근지방의 3태수들과 함께 유쾌한 놀이를 한
경험이 이명한이 「유풍악산기(游楓岳山記) 」를 짓게 된 동기라 할 것이다.
잠시후에 내려가야 할 암봉 아래가 내가 오늘 날머리로 잡은
마장터와 소간령으로 이어지는 계곡이고, 그 아래로 아침에
지나온 용대리의 마을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신선봉의 신령님 배려로 인해 지나오면서 보지 못했던 상봉과
좌측 아래로 내려가는 울산바위 능선이 뚜렸하게 보이고, 그 뒷쪽으로
황철봉 능선까지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신령님 감사합니다
늘 착하게 살겠습니다
신선봉에서 바라본 속초시내는 생각보다 그리 뚜렸하지는 않다
아쉬워서 다시 한번 더 상봉을 뒤돌아 보는 사이에
몸을 가누기가 힘이들 정도로 강풍이 불어대는 바람에
서둘러 신선봉 아래로 내려간다
대간령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신선봉 정상의 모습
앞에 우뚝솟은 암봉을 포스트 삼아서 대간령으로 향한다
신선봉 아래의 너덜겅을 내려와서 숲속으로 들어선다
바람의 영향 탓일까...이리저리 뒤틀리고, 꼬부라진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그래도 아무런 불평 불만없이
환경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면서 살아가면서 배우는 뛰어난 지혜,
참으로 배울게 많다... 그러기에 자연은 늘 인간의 위대한 스승이다.
공터(10:56)
예전에는 군부대 시설물과 원형 철조망이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군부대 시설물들은 철거가 되고, 뭔가 덮어놓은 타포린 천막만 보인다
힘겨루기?
암봉(10:57)
조금전에 신선봉 정상에서 바라 보았던 암봉 아래로 통과한다
암봉 아래에서 다음구간에 걸어야 할 병풍바위봉을 바라본다
이별을 준비하는 산오이풀
백두대간 북측의 마지막 구간에 걸어야 할 병풍바위봉(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과
우측의 마산봉 뒷쪽으로는 향로봉 너머로 아무래도 내 생전엔 걸을 수 없을듯한
북녘땅의 백두대간 능선이 아련히 보인다...내 나라의 땅이건만 갈 수 없다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신선봉에서부터 대간령까지는 거의 내리막 수준의 등로이다.
이런 곳에서는 범여의 몸뚱아리도 정상적인 산꾼들과 거의
동등하게 갈 수 있는 곳이다
秋景(가을풍경) / 최석항
秋山樵路轉(추산초로전)
가을 산의 오솔길 굽이져 있고
去去唯淸風(거거유청풍)
가도 가도 맑은 바람만 스치네
夕鳥空林下(석조공림하)
해거름에 산새들 텅 빈 숲에 내려오고
紅葉落兩三(홍엽락양삼)
붉은 단풍 두세 잎이 떨어지네
* 최석항(崔錫恒:1654~1724)은 조선의 정치가로,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의 동생으로
1680년(숙종 6) 문과에 급제, 경종 때 이조 판서ㆍ좌의정을 지냈으며, 몸집이 작고 차림이
초라하기로 유명했으며,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로 사리(事理)의 정확한 판단이 전국 관찰사
중에서 제일이라고 알려졌으며, 1721년(경종1) 10월 왕세제 대리청정의 교(敎)가 내리자
당시 좌참찬(左參賛)으로서 이를 듣고 한밤중에 왕을 만나 그 부당성을 논리 정연하게 지적하여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그 뜻을 돌리게 한 당시 소론(少論)의 4대신(四大臣) 중 한 사람이다.
안부(11:10)
안부를 지나서 집채만한 너덜겅을 지나는데 숏다리인
이ㄱ런 곳에서 범여는 이상하리만큼 숏다리의 컴플렉스를 느낀다
너덜겅에서 바라본 상봉의 모습
뒤돌아보니 조금전에 지나온 암봉과 신선봉이 멋진 모습으로
범여의 눈을 호강시켜 주는데 여태껏 이곳을 밤에 지나갔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상봉에서 신선봉까지는 간간히 山客들을 만났고, 조금전
암봉 아래에서 신선봉으로 향하는 한분과 조우하였으나
여기서부터 대간령까지는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800.5m봉 갈림길(11:16)
등로도 희미하고 애매한 곳으로 알바에 주의할 곳이다
직진으로는 멋지고 족보있는 800.5m봉 방향으로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지만, 우측 아래로 이어지는 대간령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조금을 두리번 거리니 등로가 거의 안보이는 곳에
대간꾼의 시그널 한장이 바람에 휘날린다
우측으로 겨우 방향을 잡아서 내려서니 뚜렸한 대간길 마루금이 보인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내리막길에서 만난 낙타나무
아! ...세월도 무심하지.
봄날같은 청춘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이제는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 되어 버렸구료.
그러나 어찌 하겠소... 사는게 다 그런 것인데...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우측으로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고성군 간성앞 바다가 흐릿하게 살짝 보인다
신선이 잘 계시나하고 신선봉도 한번 뒤돌아 본다
많이도 내려온 모양이다...급경사가 아닌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사면길을 걷는데 능선이 아닌 사면이라 그런지 바람의 등쌀은 잠시 피한다
잠시후에 걸어야 할 능선 좌측의 계곡은 대간령에서 마장터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안부(11:42)
등로 좌측 아랫쪽의 능선에는 마치 갈참나무들을
조림한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게 이채롭다
공터(11:46)
어둠속에 지나갔던 그 자리에 있었던 소나무는
변함없이 대간길을 지키고 있구나...고맙구나.
예전엔 국공파들의 등쌀에 어둠속을 지나면서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근데 어쩌지, 오늘이 너를 보는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네... 5번째 대간길을
걷는다는 보장도 없고, 체력도 안 될것 같으니 말이다
갈참나무와 철쭉들의 도열을 받으면서 헬기장이 있는 868.4m봉에 도착한다
868.4m봉(11:50)
넓은 공터에 헬기장과 4등 삼각점이 있는 868.4m봉 정상.
지나온 신선봉과 다음 구간에 가야할 병풍바위봉과 마산봉이
한 눈에 보이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인 정상에는 수줍게 피어있는
용담꽃이 간간히 보인다
지나온 신선봉을 지키는 神仙께서 홀로걷는 衆生이 잘 가고있나 하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오늘 배려에 감사드리며,
늦게나마 멋진 선경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868.4m봉 삼각점(설악415 / 2007 재설)
맞은편의 병풍바위봉과 마산봉도 잡목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있고,
헬기장 모퉁이 한 켠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셨고,미술사학자였던
혜곡 최순우(1916~1984)관장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용담들이 보인다
그 분은 야생화 중에서도 용담을 유난히도 좋아했고,
‘그리워서 슬픈 나의 용담꽃’이라는 산문집까지 펴냈는데
산문집에서는 아래와 같이 시작하고 있다.
<나는 들꽃이나 산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정원에서 가꾸는 목련꽃·모란꽃·장미꽃·글라디올러스·코스모스·
달리아 같은 화려하고 기름져 보이는 꽃들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오히려 산배꽃이나 산수유꽃 같은 산나무들의 조촐한 꽃차림이나
산에 피는 파리한 가을 꽃들에 마음을 쏟는다. 예를 들면 용담(龍膽)이나
‘달개비꽃’ 같은 하찮은 꽃들 말이다.>
혜곡은 이 글에서 오대산 상원사에서 묵으면서 용담꽃을 찾아다닌 일화도 소개하고
있는데, 용담꽃을 찾아 헤매다 ‘듬성듬성 억새 우거진 초원에서 드디어 용담꽃 언덕을 발견’
했을 때 ‘사뭇 신비롭고도 청정한 파아란 꽃색과 순리대로 늣늣이 피어난 청초한 꽃모양을
보면서 과연 산기(山氣)의 슬기로움을 역력히 보는 듯 싶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용담꽃은
향기도 매무새도 뽐낼 줄을 모르면서 이 9월에도 아마 그 언덕 위에 숨어 피었을 것”이라며
“가을이 오면 나는 못견디게 그 용담꽃 피는 언덕을 생각한다”고 했다고 한다.
868.4m봉 정상에서 용담과 조우하면서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동해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산꾼을 괴롭힌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대간령으로 향한다
군부대 벙커를 지나니...
주위 조망이 확트이면서...
맞은편에 내가 백두대간의 大尾를 장식할 병풍바위봉과
마산봉을 잇는 능선들이 시원스레 보인다.
좌측으로는 마장터로 내려가는 계곡이다.
내가 오늘 저 골짜기로 내려갈 것이다
마산봉 뒷쪽의 흰구름이 머물고 있는 저 능선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휴전선 너머의
북녘땅이다
이곳도 바람이 드센지 억새들의 방향이 한쪽으로 몰려있다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무명봉(12:03)
안부(12:08)
대간령으로 내려가는 길
마지막 걸어야 할 능선을 바라보는 범여의 심정은 참으로 뿌듯하고
내 자신이 참으로 대견하다는 느낌에 너무 기분이 좋다.
5년전 폐암 초기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오를 당시만 해도 다시 산에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다니...
비록 느림보라서 산악회를 따라서 가지는 못할지언정
1년에 6~70번정도를 산에 다닐 수 있다는 내 의지에 나도 놀랄때가 있다.
그래 여태껏 잘 살아왔는데 더 이상 뭘 바래...남은 人生은 덤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 보련다
마산봉을 바라보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어, 돌담을
쌓아서 만든 벙커를 지나서 대간령으로 내려선다
禁線을 넘어서서...
해방된 민족(?)이 된다
대간령(大間嶺:641m:12:13)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미시령에서 이곳까지는 비탐구간으로 예전에는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된
등로인데 지금은 많이 느슨해진 탓(?)인지 좀 편하게 이곳까지 왔다
고개 정상에는 이정표와, 출입금지 팻말, 돌탑과 돌로 만든 벙커, 쉼터 의자와
예전의 주막터가 있 펑퍼짐한 고개이다
샛령 혹은 새이령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진부령과 미시령의 사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샛령·새이령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이 되었고,
큰 샛령(새이령)과 작은 샛령(새이령)으로 구분하여 대간령·소간령이 되었고,
그 옛날 인간이 네발(자동차)이 아닌 두발로 다닐때 강원도로 가는 유일한 길이
이곳 대간령으로 미시령과 진부령이 생기기전에 영동과 영서는 잇는 중요한 고개로
속초와 고성에서 해산물을 싣고 원통과 인제로 넘나들었다 하는데 대간을 순 우리말로는
사이이다.그래서 "새이령"이라고도 한다.
대간령보다는 샛령으로 부르는 원주민들에 의하면 고갯마루(샛령)에는 산신각과
원터(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직도 고갯마루에서는 돌담과 집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간령은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옛길로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도 사람들의 왕래가 더 빈번했던 고개였다.경사가 완만한 데다
거리도 지금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던 탓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파령(石坡嶺)이라고도 했고,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어서 원기령(院基嶺)이라고도 했다는 대간령, 지금은 대간꾼 외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이고, 석파령(石坡嶺)은 신선봉의 너널지대에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소파령은 석파령(石破嶺)이라고도 했다’고 쓰고 있고
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文臣을 지낸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은
『수성지(水城志)』에 ‘죽도와 토성 사람들이 영서로 갈 때 쓰던 지름길’이라고 기록했다.
그래서 지름길을 뜻하기도 하는 샛길은 새이령의 다른 이름인 ‘샛령’을 낳았다고 한다.
“진부령은 지루하고, 미시령은 짧지만 까다롭고, 한계령은 수려하지만 험악스럽고,
구룡령은 장쾌하지만 무거웠고,반면에 새이령은 참으로 부드럽다”며 주변 고개보다
인지도가 높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마산봉까지 거리가 3km이고, 마산봉에서 홀리마을까지는
2.5km 거리의 내리막길이라 이런 곳에서는 대간 산꾼들 수준으로
충분히 걸을 수 있고, 홀리마을에서 진부령까지 2km 정도인데
이곳은 도로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곳이라 오늘 진부령까지
가더라도 日沒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것 같고, 진부령을 찍고
택시로 미시령으로 가서 차를 회수해서 귀경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더군더니 이곳에서 용대리까지 6km가 넘는 거리이니
용대리 가는 시간에 마산봉을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많은 고민을
하다가, 내가 다시 이곳을 온다는 보장도 없고, 마장터와 소간령,
청암계곡으로 이어지는 인제 천리길을 걷고 싶어서 다음에 한번 더
이곳을 오기로 하고 진부령으로 가는 길을 과감히 포기한다
대간꾼들의 안식을 위해서 대간령을 지키는 쉼터의자
이곳이 옛날 성황당과 주막이었던 자리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는 여기저기 돌담을 짓느라 흩어져 있는
이곳 돌무더기 있는 곳이 예전에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한 주막이란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용대리로 가는 인제 천리길이 조성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고성군 토성면 문암천을 끼고 도원리 계곡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곳이라 최근에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대간령에서 박달나무 쉼터까지의 지도
진부령으로 향할까말까 많은 고민을 하다가 용대리로 향한다
대간령...지금은 잊혀진 고개로 변했지만 백두대간을 넘어 강원도의
동.서쪽을 잇는 고개중에서 가장 柔順한 고개가 이곳 대간령길이다
이 길을 따라서 내륙의 物産과 동해안 바닷가의 소금과 생선을 지고
넘나들었던 짐꾼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라서 예전에는 주막도 있었고
말과 당나귀들이 쉬었다는 마장터도 있었다고 한다
대간령에서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맞은편의 앙증맞은 폭포를 만난다
신선봉 서사면에서 發源한 물줄기와 함께 계곡을 건너고,
편안하고 완만한 길을 따라서 용대리 방향으로 향한다
비록 날머리이긴 하지만 이렇게 편안한 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인 듯 하다.
평지를 가다가 계곡을 건너고 다시 평지를 만난 다음에, 계곡을 건너고 잠깐
사이에 몇번이나 되풀이 하는지를 모르겠다
마장터를 비롯해 고개 서쪽(영서)은 ‘밭갈애비’들의 땅이라고 하는데,
강원도에서는 논밭 가는 사람들을 ‘밭갈애비’ 혹은 ‘보애비’로 불렀다.
밭갈애비 기술의 정점은 화전 경작이었는데, 밭이 비탈진 데다, 돌과 나무
뿌리가 많아 소가 끄는 겨리연장(쟁기)을 기술적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인제·화천·양구·홍천 등 영서 중북부 지역은 화전 경작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시대에 농학자(農學者)였던 우하영(禹夏永:1741~1812)이 쓴
『천일록(千一錄) 』의 기록에는 ‘(강원도) 산골짜기에는 본디 황무지가
많아서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니, 묵정밭을 불태우고 경작하고 파종하며…
(음력) 5~6월 사이 한 달 동안 장맛비가 오면 곡식이 모두 녹아버린다…
강원도 산골만이 밭농사를 망치면 바로 유리도산하게 되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곳의 기록이 있다
또다시 물길을 건너는데 계속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된다
예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듯한 집터같은 흔적들이 보인다
예전에는 마장터 주변에 서른 가구가 살았었다고 하지만, 그때도 마장터는
세상과 등 돌려 앉은 꼭꼭 숨겨진 오지였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마장터까지 가는 숲길은 멀고, 그 길을 꼬박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곳이 얼마나 오지였는지를 설명하는 마장터 사람들의 이야기 끝에 늘
등장하는 게 ‘8·15 해방을 보름쯤 뒤에야 지나던 스님의 귀띔으로 알게 됐다’는 얘기다.
스님에게 해방 소식을 들고 일본인 관리인 아래서 침목을 만들던 이들이 연장을
던져버리고는 만세를 부르며 산에서 내려갔다던가... 흔히 오지를 말할 때 ‘6·25전쟁 때
난리가 난 줄 몰랐다’는 비유를 들지만, 마장터는 그랬을 리 없을 때니까...
6·25 때는 백두대간 첩첩산중까지 전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니까.(문화일보 자료인용)
한계령과 진부령, 미시령 고갯길이 닦이고, 터널까지 뚫리면서 걸어 넘던 대간령은
교역로의 수명을 다했다... 빠르고 편한 길이 놓이면서 이전의 길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렇게 길이 잊힌 뒤 마장터에는 화전민이 찾아들었다가 전방지구의 잦은 무장공비
출몰을 이유로 화전민이 쫓겨난 뒤에는 봄이면 나물을, 가을에는 버섯을 따며 산에
기대서 생계를 꾸리는 서너 가구가 들어와 투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마장터가 ‘오지의 전설’이 됐던 게 바로 이 무렵이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닿지 않는 곳.
짙은 숲 속으로 난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첩첩산중으로 걸어 들어가면 거기 호롱불
심지에 불을 켜고 사는 이들이 있었다... 압축성장 시대를 힘들게 건너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그곳은 로망이 되고도 남았다.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 다들
안간힘을 써야 했던 그 무렵, 마장터는 ‘시간의 변화를 거부하는 곳’의 상징이자,
감행할 수 없는 상상 속 탈출의 목적지였다.
마장 터(馬場:12:50)
‘마장(馬場)터’란 마을 이름은 ‘말을 사고팔던 장이 있었던 터’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지명으로, 마장터에는 육지 사람보다 고성 사람들이 더 많았다... 고성의 소금이며
수산물은 한 발짝이라도 내륙으로 더 들어가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성 사람들은 대간령을 넘어 인제를 지나서 원통까지 드나들었고, 일제강점기
무렵에 마장터에는 서른 가구가 넘게 살았다니 역사상 가장 북적이던 시절이다.
‘고작 서른 가구’라 코웃음을 치겠지만, 가서 보면 안다.
이 멀고 깊은 첩첩산중에 그게 얼마나 믿기지 않는 얘기인지. ..그 무렵 마장터에는
함지박을 만드는 공장과 기차선로 침목 생산 공장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산봉과 신선봉 사이 계곡을 따라 타래 풀린 명주실처럼 이어진다.
계곡이라곤 하지만, 폭포를 이루는 바위 계곡이 아니라 땅을 스미듯 적시며
흘러가는 물길인데 이런 계곡을 따라가니 길이 순할 수밖에. 마장터로 이어지는
길은 평지는 아니지만, ‘평지나 다름없다’고 써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가파르지 않아서 쉬지 않고 걷는대도 숨이 차서 멈춰서는 일은 없다.
박달나무 쉼터에서 올라오는 트레킹족을 간간히 만난다.
이 분들을 위한 것인지 인제천리길 인증을 위한 우체통
모양의 스탬프함이 보인다
마장터 마을은,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그야말로 거대한 숲 한가운데 있다.
첩첩산중에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평평한 ‘수평의 세상’이다.
지형만 봐도 마장터에 마을이 생겨난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다.
마장터에는 마을의 흔적이 희미하다.
그저 숲 한가운데 가느다란 오솔길이 있을 따름이다.
그곳이 마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숲은 다채롭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마을 여기저기 군집을 이룬 낙엽송 숲이다.
1970년을 전후해 화전만이 나간 빈 집터와 밭터에 심은 것이란다
심은 지 반세기가 지난 낙엽송들은 온통 ‘수직의 세상’을 이뤘다.
인제 천리길을 따라서 걷는데 멋진 민가 한채를 만난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려니 부부인듯한 남.녀가 마당에서
뭔가를 모를 일을 하고 있어서 禮가 아닐것 같아서 포기한다
입구에는 양은 들통 뚜껑이 매달려 있고 ‘들어올 때 솥뚜껑 매우 치셔요
산골 초인종’이라는 안내 글귀가 이채롭다
평지에 가까운 편안한 길을 걸어가는데 화암재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난다
화암재 갈림길(13:05)
화암재 갈림길 좌측으로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공터를 지난다
홀리 갈림길(13:07)
우측으로는 고성군 간성읍 홀리로 가는 길이고, 난 용대리 방향으로 향한다
앙증맞은 나무 다리를 지나서 올라서니 소간령이 나오는데 조금전에
지나온 계곡과는 달리 소간령 북쪽 아래에서 발원하여 진부령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구비 계곡의 시작점인 곳이기도 한 물줄기이다
소간령(小間嶺 작은샛령:585m:13:22)
대간령(샛령)에서 마장터를 지나 1시간 10분정도 걸어서 만난 고개
대간령의 오름길이 된비알이라 이곳 사람들은 "된박재"라 부른다.
대간령을 ‘큰 대(大)’ 자를 썼지만, 대간령은 부드러운 언덕 수준이다.
대간령이 그러니 소간령은 말할 것도 없다... 백두대간을 넘는 데도 길이
순한 건, 이미 인제 쪽 들머리 해발고도가 높아서 표고 차가 적기 때문이다.
고개 가운데에 커다란 돌무더기와, 인제천리길의 스템프가 있고,
우측의 성황목 아래 작은 제단(祭檀)이 소간령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 제단은 마장터에서 44년간을 살면서 마장터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던 약초꾼 정준기씨가 제단을 만들고, 바로 아래에 약수터도
만들었다고 한다
소간령을 지나 용대리로 향한다
잠시후에 약초꾼 정준기씨가 만들었다는 약수터를 만난다
약수터(13:25)
약수터를 지나면서 평탄한 수평을 이루면서 걸어가던 인제 천리길은
고도를 낮추면서 박달나무 쉼터 방향으로 가는데, 등로가 너무
유순한 탓인지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인제천리길은 사람, 문화, 자연을 하나로 새로운 역사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인제 숲길은 남북 북단으로 나뉘어지고 소양호로
옥토가 수물되고 고원지대 수천만평이 훈련장으로 차가 다니는 길로
포장되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제천리길은 다시 길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옛길은 찾아 다시 잇고
있으며, 인제 숲길을 생명의 텃밭,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인제천리길은 36구간(505km)이어진 길이라고 한다.
소간령을 내려서면서 고도를 확 낮추니 서어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신선봉 서사면 계곡에서 발원한 물길은 홀리 방향으로 빠져
버렸고, 소간령 남쪽 아래에서 발원하여 용대리까지 이어진다
박달나무 쉼터로 가는길에 참당귀 한포기가 인제천리길을 지키고 있다
셀 수를 없을만큼의 계곡과 둘레길을 넘나드는데 정말
오랫만에 내 두다리에게 호강을 시켜주는 셈이다
이곳 금강산의 지역에는 환경부에서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평지길은 계속 이어지고...
간간히 마장터로 향해서 올라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공터(13:58)
예전에 군부대가 있었던 자리에 군부대는 사라지고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날머리가 가까워졌는지 56번 국도를 지나가는 차량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린다
청암계곡(14:00)
미시령 아래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청암 계곡을 건너니
박달나무 쉼터 주차장이 보이기에 이곳 계곡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쉼터로 향한다
주차장 가는 길에서 바라본 청암계곡의 모습
박달나무 쉼터 주차장(14:10)
박달나무 쉼터를 바라보면서 오늘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박달나무 쉼터
이곳은 음식점이면서 쉼터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마장터와 대간령을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쉼터이기도 한 곳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음식을 주문하려는데
음식 이름이 ‘아무거나 찌게’ 인데 이것을 시켰더니 주방에 있는
음식을 갖다준다...이름은 비해 맛은 괜찮은 편이고 쥔장도
친절한 편이다...밥을 먹고나서 2주전에 백담사 입구의 용대리
주차장에서 미시령갈 때 이용했던 택시를 호출하려는데 자기가
미시령까지 태워주겠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공짜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행여 몰라서 ‘얼마드리면 되요?’ 하고 물으니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고, 30,000원을 달라고 한다
용대리 주차장에서 미시령까지 요금도 23,000원 밖에 안 줬는데
여기가 미시령까지는 훨씬 가까운데 그렇게 비싸냐고 하면서 택시를
부르겠다고 하니 ‘고양이 쥐 생각하듯’ 20,000원만 달라고 하는데
상당히 불쾌하지만 20,000원을 주기로 하고 미시령으로 향한다
다시 미시령(14:50)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차에서 내리니 오후이지만 아침
못지않게 강한 바람이 불어댄다...서둘러 베낭을 정리하고
트렁크에 베낭을 싣는다
아침에 상봉으로 향했던 능선을 한번 바라보니 또 다른 느낌이다
15시에 미시령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는데 원통, 인제를
지나 동홍천I.C로 접어드려 하니 주말 오후라 그런지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하기에 그냥 44번 국도를 타고 용문, 양평을 지나
양수리를 지나 서울로 들어오니 차가 그리 밀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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