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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차 북진(終)

제59구간 - 마등령삼거리에서 미시령까지(역산행)

by 범여(梵如) 2023. 10. 11.

達磨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산행일자:  2023년 10월 1일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산행하기 좋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9.2km  + 날머리 10.2km / 11시간 1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미시령-암봉-쉼터-무명봉-무명봉-안부-울산바위 갈림길-안부

                    암봉-안부-안부-황철북봉-안부-안부-무명봉-안부-암봉-쉼터

                    황철봉-안부-조망바위-황철남봉-안부-안부-저항령-걸레봉

                    1,273.9m봉-암봉-안부-암봉-암봉-암봉-조망바위-안부-암봉

                    쉼터-1,249.5m봉-안부-삼각점-안부-1,151m봉-암봉-조망처

                    안부-무명봉-안부-안부-무명봉-쉼터-마등봉-헬기장-마등령

                    마등령 삼거리-고개-무명봉-봉정암 갈림길-오세암-안부

                    쉼터-쉼터-쉼터-오세암 갈림길-영시암-설봉당부도

                   길골계곡 입구-설담당부도탑-철교1-철교2-조망처-쉼터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탑-백담탐방지원센터-백담사 입구

                   주차장

소 재 지: 강원도 인제군 북면 / 고성군 토성면 / 속초시 설악동

 

6일간 계속되는 추석 명절이다...추석 당일날 절에가서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집에오니 딸 내외가 인사를 왔고, 오랫만에 온 가족이 모여서 저녁을 먹고

좀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더니만 상당히 피곤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사우나에 가서 오전내내 밍기적거리다가 저녁에는 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지난주에 갔다가 산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미시령으로 가기위해

새벽 3시경에 집을나서 미시령에 도착하니 새벽 5시 30분경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미시령에 도착하니 05시 30분경.. 바람이 불어대는데, 예전의 악명높은(?)

미시령의 바람은 아니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기온은

영상 5도를 가리키고 있으니 날씨는 상당히 춥고 아직은 날이 밝지 않아서

산행채비를 하고 차 안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해가 많이 짧아진 모양이다...이제서야 날이 밝아질 모양이다

미시령에서 바라본 속초앞 바다는 일출이 시작될 모양인지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미시령(彌矢嶺:767m:05:30)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동국여지승람과 산경표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이라 기록되어 있어

고개를 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의미 였으나 현재의 표지석에는

彌矢嶺 (미시령)이라 표기돼 있고, 표지석 후면의 설명문에는 표지석

후면의 설명문에는 더디게 넘는 고개라 새겨져 있다.

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 · 연수령() · 연수파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미시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에는 미시파령이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다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는데 바다 고을 동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본조성종 때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은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고

여수파령()이라고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에는 연수파령,

『택리지』에는 연수령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데『여지도서』 간성군 관액조에는 미시령이

군 남쪽 팔십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는 간성군 석파령() 남쪽에

미시령이 묘사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위치한

고개 지명으로 미시령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이름으로 연슈파 또는 큰영이라 기록되어 있다.

1750년대 「해동지도」의 미시령 일대의 모습

미시령의 행정구역 주소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 12- 1로

56번 지방도(미시령 옛길)가 지나가는 고개로 해발 고도는 825.8m이고,

도로 표지판상으로는 767m로 표기되어 있으며,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미시령 터널이 지나가고 있으며, 고개 위 언덕에는 1960년에 이 고개로

56번 도로가 개통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제호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 고개 아래쪽에 2007년 5월에 미시령 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지금은

한적한 고개가 되어버렸다.

 

정상에는 구 미시령 휴게소가 있었으나, 미시령터널(미시령로) 개통 이후

영업 부진으로 폐업, 철거되었다가, 2,020년 3월에 미시령탐방지원센터를

개관하여, 한반도의 핵심 축이자 자연 생태계의 보고(寶庫)인 백두대간과 미시령의

역사와 문화를 과거와 현재의 사진 자료를 전시해 소개하고 있다.

미시령 정상석 옆에있는 미시령 옛길 표석

미시령은 진부령, 한계령, 구룡령, 대관령과 함께 강원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고개로  지금은 어둠속이라 잘 안보이지만 예전의 미시령휴게소가 철거된 

자리에는 기존의 미시령 휴게소를 새롭게 단장해 개관한 미시령탐방 지원센터는

지금은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철문이 굳게 잠겨있다

 

미시령 옛길은 인제와 고성을 잇는 고개지만, 실제로는 속초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고개로

예전의 56번 지방도가 미시령 고개 아래로 4차선의 신도로인 미시령 터널이 뚫리면서

예전의 구절양장의 꼬불꼬불한 길을 미시령 옛길이라 부르며, 미시령고개 정상에서

울산바위를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지방도로답게 도로 폭이 좁고, 선형이 상당히 불량하며 오르막 추월차로조차 없는 순수 왕복 2차로

도로이고 가드레일도 부실하여 매우 위험한 길로,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강원도의 동.서를 넘는

고개들 중 가장 먼저 전면 통제되는 고개라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5:45)

날씨도 춥고,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바람도 불고, 아직도 어둡지만, 더 이상

기다리기가 지루하여 오랫만에 헤드렌턴을 착용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예전에 산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CCTV가 없으니 한결 맘이 편하다.

백두대간상 구간에 출입을 금하는 비탐구간중에서 가장 단속이 심하기로 악명높은(?)

이곳 미시령에서 마등령까지 가는길을 이렇게 편하게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굳게 잠긴 철조망 좌측으로 올라서니 산꾼 한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개구멍이 보인다

젊잖은 체면에 개구멍이라니... 베낭을 먼저 밀어넣고 낮은 포복으로 철망을 통과한다

黎明이 시작됨과 동시에 능선 아래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등로로 밀려온다.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여밀게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고 땀이 흐르지 않으니 오히려 산행하기가 편안 느낌이다

암봉(05:53)

암봉을 지나면서 좌측으로는 1주일전에 가봤던 소노캄델피노 리조트(구 대명콘도)의

불빛이 흐릿하게 보이고, 그너머의 속초 앞바다는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벌겋게

보이지만, 짙은 안개 탓인지 아직도 사물이 뚜렸하게 보이지는 않는구나.

옛날 대간 산꾼들에게 저승사자처럼 군림했던 CCTV는 사라지고

기둥만이 옛 영화(?)를 잃어 버린채로 등로를 지키고 있는데, CCTV를

外護하던 피뢰침만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CCTV를 外護하던 피뢰침...그동안 대간 산꾼들에게 너무 갑질을 많이 했었지...

이제 그만 좀 쉬거라

어둠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날이 금새 밝어진다

오늘 산행구간인 미시령에서 마등령까지는 국립공원에서 지정한 비법정 탐방구간으로

등산객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강력한 단속으로 인해 대간꾼들은 범법자를

각오하고, 가슴 조이며 걸었던 등로이건만,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지,아니면

대간꾼들을 배려한(?) 흔적인가, 좀 아이러니하다

쉼터(06:15)

바람이 심한 곳이라 그런가?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어린 나무들을 심어놓고 가림막을 설치해 놓은것이 좀 특이하다

쉼터를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되고 바위들이 보이지만

본격적인 너덜겅이 시작되는 곳은 아니다

무명봉(06:17)

나뭇가지 사이로 속초항이 보이고 그 앞의 호수는 영랑호인 듯 하다

호수 옆에 있는 영랑호C.C...예전에 저 골프장에서 두어번 라운딩을

한 기억이 있는데 골프장은 이른 아침의 박무로 인해 잘 구분이 안되는구나

암릉구간의 능선이 아닌 살짝 사면길로 우회를 하면서 가는데

예전에 이곳을 통과할 때는 거의 어둠속에 지났기에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이 전혀 없구나

사면길을 돌아서 좌측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06:27)

무명봉을 지나면서 황철북봉으로 이어지는 너덜겅이 시야에 들어온다

안부(06:28)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生을 마감한 枯死木은 아직도 뭔 미련이

남았는지 대간길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죽을지언정 굽이지는 않겠다는

영사불굴(寧死不屈) 정신인가?

아무런 생각없이 걷다보니 울산바위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은 6.25 당시 전사한 우리 선조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국방부 유해 발굴 현장이 나오고, 이곳도 조금전 쉼터처럼

새로운 樹種의 나무를 심어놓고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바람막이 시설들이 많이 보인다

울산바위 갈림길(1,092m:06:32)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이어지는 1,092m봉을 지나서 울산바위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인다

최근에는 속초 시내 목우재에서 시작하여 울산바위를 거쳐, 황철봉, 저항령으로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이 간간히 지나는 곳이다 

울산바위 갈림길에서 만난 6.25전사자 유해 발굴지역

이곳은 8.15해방 이후 6.25전쟁 이전에는 설악산을 끼고있는 양양, 속초,

고성, 인제는 북한땅이 아니였던가...6.25전쟁 당시 수 많은 무명용사들의

흘린 피로 이곳 설악산을 수복하였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고성 화진포에는

아직도 김일성 별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당시 김일성이 설악산을 빼앗기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7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희생으로 지킨 이 나라...우린 저 분들이 목숨을 草芥같이

버리면서 지킨 덕분에 이렇게 好衣好食하면서 잘살고 있는데, 작금의 일부

정치하는 인간들은 그걸 忘却하고 북측의 귀때기 새파란 젊은 친구에게 동조하는 짓거리...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킨 저 분들은 저 자들의 행동에 지하에서 땅을 치면서 통곡할 일이다

부디 편히 쉬소서...아직까지 이 나라의 民草들은 일부를 빼놓고는

현명한 판단을 하는 양식있는 국민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랜드산악회의 옥희씨도 최근에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안부(06:34)

너덜길 가는 길에서 만난 빛내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속을 걷다보니 어느덧 일출은

시작됐고, 해는 울산바위 윗쪽으로 한참이나 올라와 버렸다 

동물의 이동추적장치들이 간간히 보이는데, 요즘에는 인간들만

CCTV에 노출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하는 줄 알았는데

산에서 자유롭게 살아야하는 동물들도 저렇게 감시를 당하는구나.

문명의 利器라는 CCTV에 노출되어 사는 건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은데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 시대에

살고있는 느낌이다

황철북봉으로 향하는 첫번째 너덜겅이 시작된다

집채만한 암릉구간이 시작되지만 밤이 아닌 낮이라 큰 걱정은 안하고 걷는다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황철북봉으로 올라가는 너덜겅이 보이고 무명봉에 서 있는 나무들의

가지 방향이 한결같이 동쪽 방향이다...바람이 드세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生存 방법의 일환인 모양이다...자연에 順應하며 살아가는 저 나무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암봉(06:52)

안부(06:53)

안부를 지나자마자 첫번째 만나는 본격적인 너덜길

오늘 미시령에서 마등령까지 이어지는마루금의 9km중에 6km 가까이를

암릉구간 아니면 이런 너덜겅을 걸어야 하니 거리에 비해 산행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고, 힘이 드는 곳이다... 예전에는 악명높은 국공파의

빨간모자 단속요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새벽 1~2시에 산행을 했기에 이곳을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통과했는데, 지금은 비법정탐방구간이라고는

하지만, 단속요원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밝은 시간대에 맘놓고 걸어가니 정말 좋다

두발이 아닌 네발로 걷는게 아니라 기다시피 암릉 구간을 걷지만

어둠이 아닌 날이 밝아서 안전에 대한 큰 염려는 안해도 될듯 싶다.

 

내 나라 내땅을 걸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늘 범법자 취급을 받는게 서럽기만

한데,  그렇다고 대간 산꾼치고 이곳을 안 지나간 산꾼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단속 명분은 희귀 동,식물 보호라고 하는데, 동.식물 보호도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들의 삶 역시 중요하다...동.식물과 산꾼이 공존하는 방법을 없을까?

국공파들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듯 싶다. 늘 국민들이 주는 祿으로 살면서

祿을 주는 국민들에게 봉사할 생각은 하지않고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수퍼 갑’이

국공파다...애꿎은 산꾼들을 범법자로 만들지 말고 좋은 대안을 제시했으면 한다.

 

지금의 백두대간 능선상에 있는 단속구간에는 국공파 단속요원은 없다

그라먼 아예 단속을 하지 않겠다고 관보(官報)에 계시해야 하는게 도리가 아닐까

너덜겅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뒤돌아보니 언젠가 한번을 걸어야 할

상봉에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마지막 봉우리와

우측 아랫쪽으로는 화암사로 이어지는 산줄기도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울산바위 길림길에서 이어지는 능선상에 있는

1,092m봉... 그 너머로 보이는 고성 앞바다는 박무로 흐릿하다.

2017년 10월 1일 백두대간 3차 때에 나홀로 이 구간을 걸었으니

정확하게 6년만에 다시오니 감회가 새롭구나...

 

그 이후인 2018년 6월에 평생동안 담배라곤 한 대도 피우지 않았던

나에게 폐암이라는 靑天霹靂같은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수술대에

올라 生死를 헤맸고, 다시는 산에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멀쩡(?) 산을 걸을 수 있다는데 늘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남은 인생은 덤이라 생각하고 살아간다.

 

물론 수술을 하면서 좌측 폐를 절개하는 바람에 오르막길에는

늘 힘이들고, 예전에 비해서 산행시간이 30%이상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게 어딘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맨 마지막 봉우리인 상봉 좌측 아랫쪽으로는

새벽에 용대리에서 올라온 미시령 옛길이 범여에게 훈계한다.

 

自慢하지 말고, 겸손하게 늘 남을 배려하면서 下心으로 살라고 한다.

알겠습니다... 自利利他心을 잊지 않고, 실천하면 남은 生을 살겠습니다

계속되는 너덜겅...멋진 조망을 기대했지만 이른 아침에다

기온 차이 탓인지 해가 뜨면서부터 薄霧가 더 심해서

멋진 풍경을 기대한 게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황철북봉으로 이어지는 너덜겅...예전에 비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오늘도 차량을 가져왔기에 귀경 걱정도 없고,

거기다가 추석 연휴라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용도 공짜이니 뭔 꺽정이람...

좌측에 있는 울산바위를 똑닥이 카메라로 당겨보는데, 박무에다

역광 탓인지 그림이 영 맘에 들지가 않고, 그 너머로 보이는

속초 앞바다 역시 맘에 않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감사 / 나태주

오늘도 물과 밥 먹을 수 있음에

감사

오늘도 무슨 일인가 할 수 있음에

감사

오늘도 누군가 만날 수 있음에

감사

더불어 어딘가 갈 수 있음에

감사

무엇보다 숨 쉬는 사람임에

감사.

너덜겅 아랫쪽으로는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용대리로 이어지는 미시령 옛길

뒷쪽의 우측으로는 민간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는 남한에서 백두대간

최북단에 있는 향로봉과, 칠절봉인 듯 하고 구름속에 가려져 있는 능선은

몇년전에 태양아우와 걸었던 소양(신산경표상:도솔)지맥은 흰구름에 가려져

夢幻的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6.25당시 치열한 전투로 인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잡는 해병 이란

칭호를 받은 도솔산과 대우산도 보이고 좌측 끄트머리쪽은 용늪으로 유명한

대암산인듯 하다

다시 너덜겅 중간에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데 깡통처럼 생긴 빛바랜 야광봉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만난 시그널 하나가 범여의 가슴을 짠하게 한다

‘나는 살려고 걷는다’...저 분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산길을 걸을까?

나 역시 살기위해 산길을 걷는다...근데 집착은 하지마소

어차피 한번 왔다가 한번가는 인생인데...

2번째 너덜겅을 향해서 올라간다

철없는 진달래인지 정신줄을 놓은 진달래인지는 모르겠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역광에다 박무로 인해서 바라본 울산바위 

그림은 실망스럽다

 

울산바위는 모두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상부에는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5개가 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의 기록에는 "기이한 봉우리가 꾸불꾸불하여 울타리를

설치한 것과 같으므로 이름하였으며, 울산(蔚山)이라 하기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6개 봉우리중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는 1봉은 가장 동쪽에 있어

울산 동봉이라 부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조선전기 문신 이행·윤은보, 신공제, 홍언필,

  이사균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하여 1530년에 편찬한 지리서로 55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목활자본으로 원래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 50권으로 완성했다.

 

  이 책은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1499년 임사홍·성현 등에 의해 2차에 걸쳐 교정과

  보충이 이루어졌고 중종대에 새로 증보하였으며, 권별 수록 내용은 권1·2는 경도 상·하,

  권3은 한성부, 권4·5는 개성부 상·하,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이며 경도 앞에는 <팔도총도(八道總圖)>, 각 도의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책은 조선 전기의 사회와 지역 사정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으로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암릉 사이로 이어지는 등로라 산행 속도를 도저히 낼수가 없어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계속되는 너덜겅

금강산의 끝자락인 상봉과 신선봉, 마산봉 너머로 보이는 북녘땅의 백두대간길

아마도 내 생애에 저 길을 갈수 없다는 생각을 착잡한 마을 금할수가 없다

등로 우측으로는 잠시후에 오를 황철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왜 산꾼들은 설악에 환호하는가를 刻印시켜 주는 그림이다.

이곳은 남설악이나 내설악, 외설악과는 달리 일반 등산객들이

찾는 경우가 거의없는 호젓한 등로라서, 어쩌면 딱 내 스타일인듯 하다

너덜겅에서 만나는 멋진 기암괴석들

돌고래처럼 생긴 넘도 보이고, 바다거북처럼 생긴 넘도 보이는데

예전의 어둠속에 지나갈 땐 모르고 지나쳤던 넘들이다.

 

혜민이란 젊은 스님은 자신이 지은 저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에서

“멈추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정신없이 앞만보고 살아가는 세속사회에서

시간에 쫒기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다양한 업무와 의무에 휘둘리기 쉬운 사회에서

호젓하게 홀로 걸으면서 예전에 보지못한 것을 보면서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해주는구나

잠깐 숲속에 들었다가...만나는 안부

안부(07:30)

안부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황철북봉으로 향하는 3번째 너덜겅이 시작된다

단풍이 시작되려나?...북설악 능선은 조금씩 붉은 색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리지만 예전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10명정도인데 이른 새벽에 미시령을 출발하여 황철봉을 찍고

다시 미시령으로 되돌아가는 등산객인데 대간 산꾼들은 아닌듯 하다

 

안산에서 오셨다는 이 분들... 등로옆에 빨갛게 익은 마가목을 채취하는라

여념이 없다

대간 능선에서 준.희 쌤의 흔적은 만나니 반갑다...늘 건강하셔요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홀로 올라가는데 바로 아랫쪽에서

3명의 등산객들이 올라온다...이 분들과는 이곳부터 백담사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동행을 하였다

백두대간중 가장 악명높고 안전사고 많이나는 향철봉 능선

그래도 황철봉 가는길의 이 맛... 기분은 짱이다 

 

황철봉가는길... 올 때마다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한테 괴로움을 당했지만

오늘은 바람이 거의 없는 고요한 날씨에 구름과 함께 장관을 만들어낸다.

수 分만에 수 차례에 걸쳐 세상의 모든 모습을 만들었다 지웠다한다. 

 

 신선의 세계가 따로 없다. 여기가 신선의 세계다.

그래서 사람(人)이 山(산)에 가면 신선(仙)이 된다고들 하지 않는가.

황철봉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대간 길이다

너덜길을 치고 올라서니 삼각점이 있는 황철북봉에 도착한다

황철북봉(1,318.9m:07:50)

황철북봉 삼각점(△설악22 / 1987 재설)

삼각점과 석재 말뚝 하나만 달랑있는 황철북봉

정맥이나 지맥길에 있었으면 아주 대접을 받을 봉우리지만

비탐구간에 있는 설움일까... 설악산의 여느 유명한 봉우리들의 명성에

가려져 초라하기 그지없는 봉우리를 한번 뒤돌아보고 황철봉으로 향한다.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서얼(庶孼)출신의 홍길동의 신세처럼...

 

* 서얼(庶孼)이란 조선시대의 신분 계급중에 하나로 양반의 자손 중 정실(正室:본부인)  소생이

  아닌 첩이 낳은 자식을 뜻하며, 불건전한 관계에서 태어났기에 정실 자손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양반들이 가진 특권의 일부만 적용된 준양반 취급의 꽤 애매한 존재이다

가야할 황철봉(뒷쪽 봉우리)으로 이어지는 봉우리의 나무들은

내년을 기약하려는지 서서히 붉은 옷을 갈아 입려는 채비를 한다

황철봉으로 향하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안부(07:54)

암봉이 나오고...

암봉을 향한 직진이 아닌 우회길로 걸어간다

성질이 급하구먼...

안부(08:05)

다음주쯤에는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겠구나

무명봉(08:18)

너덜겅을 지나고 황철북봉을 지나 황철봉가는 陸山길의 등로에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암릉들이 등로에 앉아 사고가 많다는 이 길에

경각심을 심어준다

안부(08:20)

암봉을 만나고 우회를 한다

암봉(08:25)

꿩 대신에 닭이라 했던가?...암봉을 오르지 않고 아랫쪽을 통과한다

나무뿌리와 암릉들이 엉켜있는 이런곳은 늘 긴장하며 조심해야 할 곳이다.

특히 나같은 독립군에게는 이런 곳에서 사고가 나면 대처할 방법이 없다

가야할 황철봉의 모습

암릉사이로 이어지는 황철봉가는 길

황철봉가는 길에 국공파가 아닌 바위가 검문(?)을 한다.

마치 죽어서 저승가는 길에 염라대왕이 死者의 善.惡을

심사하는 업경대(業鏡臺)를 통과하는 느낌이다.

 

* 업경대(業鏡臺)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간다고 하는 암흑세계)에서

  죄인의 업(業)을 나타내는 거울의 대(臺)로서 업경륜(業鏡輪)·업경(業鏡)이라고도 한다.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 권하에는 “1년에 3회 정월과 5월, 그리고 9월에

 명계(冥界)의 업경륜이 남섬부주를 비치는데, 만약 선악업이 있으면 거울에 모두 나타난다.”고 하였다.

  『지장보살발심인연시왕경(地藏菩薩發心因緣十王經)』에는 “사방팔방에 업경을 달아두어 전생에 지은

  선과 복, 그리고 악과 죄업을 나타내는데 모든 악업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현세에서 목전에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예로부터 서민 대중에게 있어서는 권선징악의 표본이 되었고, 또 명계를

  대변하는 한 상징이 되기도 하였으며, 우리나라에는 업경대에 얽힌 설화가 많은데, 이 같은 설화는

 불교의 내세관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쉼터(08:32)

황철봉가는 중간길에서 만난 암봉은 모두다 우회를 하면서 걷는다

무심코 걷고 있는데 사람들의 손이 타지않은 늙은 곰취가 범여를 유혹한다.

난 늙어빠진 할머니 곰취는 싫어...

황철봉 정상에 도착한다

황철봉 정상에는 3번째 백두대간 길에 있었던 멋진 스텐레스 표지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곳에 서 있는 천연보호구역이라 표기된 대리석

기둥에 누군가가 “황철봉”이라 표기를 해놨고, 10여개의 대간꾼 시그널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2017년10월01일...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

 

황철봉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 사람들의 기억에는 없는 지명이며,

그저 용태사골 상봉, 또는 문바위골, 상봉(두루봉)이라 부른다고 하며

용사태골 건너편 사면에는 칠봉단기도터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사흘 밤낮을 '산왕대왕'만 외우면, 신이 내린다는 무속적인 기도터였다

황철봉(黃鐵峰:1,379.5m:08:45)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설악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설악산의 서북릉,

즉 미시령과 마등령 중간에 있는 산으로 오늘 산행구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비탐구간이라서 그런지 예전에 걸려있던 멋진 정상 표지판은 사라지고 없다.

 

미시령에서 남쪽 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백두대간 상에 있으며 산세는 육산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산 주변에 엄청난 너덜과 색다른 식생(植生)을 지니고 있어서 

설악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대청봉이나 천불동쪽과는 또다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산이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오랜기간 동안 자연휴식년제에 묶여 통제구역이 되어 있고,

설악산의 다른 곳에 비해 특출한 기암괴석이나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간 종주꾼과 황철봉의 의미를 아는 사람 이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설악산에서 속해 있으면서도 소외되어 있는, 庶者 취급을 받는 산이다.

 

이곳 너덜의 암릉에는 황(sulfur)과 철분같은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나침판이 작동이

잘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속초문화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가을에 낙엽이 지고

햇빛을 받으면 산 전체가 누런 색깔의 쇠(鐵)같은 모습으로 비친다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비탐구간의 황철봉 수문장 역할을 하는 枯死木

죽어서도 대길길을 지키며 外護하고 있는 너의 노고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얼마전에 作故한 강수연이라는 여배우의 유명한 생전의 

일화가 생각나는구나...“돈이 없다고 해서 가오까지 없는건 아니다”라

했는데 이 고사목 역시 “비록 죽은 목숨이지만 도도한 가오까지 없는 건

아니다”라고 하는것 같은 느낌이다

황철봉에서 황철남봉으로 가는 길은 남쪽으로 확 꺽어져 가지만

등로는 뚜렸하고 고도차가 없어서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안부(08:50)

예전에 무심코가면서 보지 못했던 주목나무 몇그루가 보이고

황철봉 능선의 강한 기운을 받은 탓일까...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걸레봉에서 가야할 마등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이지만 이른 아침의 짙은 안개로 인해서

그야말로 오리무중 수준이다 

저 나무도 世俗의 衆生들 마냥, 왜 저리 힘들게 굴곡진 삶을 살아갈까.

마치 요즘 힘들게 살아가는 산 아래의 인간들과 별반 차이가 없구나.

그래, 한번왔다 한번가는 인생...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前生의 業이려니 생각하고 목숨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서 살자꾸나

2번째의 주목이 있는 곳을 지나니...

태고적의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암릉구간을 지나 조망바위에 도착한다

조망바위(09:00)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저항령 계곡에서 신흥사를 거쳐 속초 대포항으로 이어지는

깊은 계곡은 안개속에서도 도도함을 잃지않고 있고, 그 뒷쪽으로는 대청봉에서

가지를 쳐 화채능선을 지나 권금성, 설악소공원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라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코 앞에 황철남봉이 보이고, 동쪽으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황철남봉(1,368.1m:09:02)

국토정보지리원에 나오는 공식지명은 아니고 대간 산꾼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지명으로 가운데에 있는 황철봉을 기준으로 하면,

엄밀히 말해서 황철서봉이라 해야 맞을듯 싶다

황철남봉에서 악명높은 너덜겅을 통과하여 저항령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미시령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너무 밍기적거리면서 오다보니

안그래도 느린 범여의 발걸음인데 생각보다 너무 늦게 이곳을 통과한다.

愛馬를 가져 왔으니 歸京길의 걱정은 없으나, 오세암 절집의 점심 공양은

일치감치 포기해야할 듯 싶다

저항령 내리막길에서도 고사목의 검문을 받는다...신성한 사람만이 이곳을 통과하란다

가야할 걸레봉 너머로 펼쳐지는 내설악(내雪岳) 의 장쾌한 모습

 

설악산은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는 설화산(雪華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교에서는 설산(雪山) 또는 설봉산(雪峰山)으로 불려왔다.

 

지금은 거의다 설악산으로 부르지만, 옛 지도와 문헌에는 대부분 ‘산’를 빼고

설악이라 기술되어 있으며, 대부분 눈(雪)과 관련지어 설명해놓고 있는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해 쌓인 눈이 하지(夏至)에 이르러 비로소

녹으므로 설악(雪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증보문헌비고」에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쌓여 바위가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으로 이름지었다는’는 기록이 있다.

 

설악산을 또 한계산(寒溪山)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엄밀히 말해서 설악산과 한계산은

같은 산은 아니였다. .. 다산시문집의 산수심원기(汕水甚尋源記)에 보면 ‘소양수의 발원지는

두곳에 있는데  하나는 강릉 오대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기린(基麟)의 옛고을을

지나니 춘천부 동쪽 140리에 있다... 이른바 기린수(基麟水)요, 또 하나는 인제현 한계산에서

나와 (지금의 설악산 남쪽능선) 남쪽으로 흘러 서화(瑞和)의 옛고을을 지나니 

이른바 서화수( 瑞和水)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설악산과 한계산은 같은 산이 아니다.

 

설악산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한 산으로, 김시습은 단종이 세조에게 폐위 당하자, 책을 다 불사르고 집을 떠나 절로

도피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양주의 수락산과 수춘(壽春:지금의 춘천)의 사탄향(史呑鄕),

동해가의 설악산과 한계산, 월성의 금오산 등이 매월당이 머물렀으며, 스스로 호()를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였고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峯)이라고도 불렀다.

내설악 너머로 펼쳐지는 저  능선에 황홀감을 느끼지 않을 산꾼이 있겠는가.

구곡담 계곡 뒷쪽으로 펼쳐지는 귀때기청봉, 대승봉과 안산을 지나서

남교리로 이어지는 스카이 라인은 薄霧에서 벗어나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저항령으로 내려가는 너덜길에서 바라본 용대리(龍垈里) 계곡의 모습

용대리는 인제군 북면 설악산에 자리하며 낮은 산지가 대부분을 이루는

산촌마을로 서쪽으로 북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 구만이, 남교, 당정곡, 암자동

등이 있으며 구만이는 구만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남교는 조선시대 보안도()에 딸린 남교역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고

당정곡은 조선시대 어느 한 선비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암자동은 백담사에 딸린 작은 암자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용대리 일대에는 한국 최대의 황태덕장이 있는 곳으로 전국에서 생산되는 황태의

70%를 차지하는데 1961년 함경북도에서 월남한 나종오씨가 처음으로 덕장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어 다른 함경도 사람들이함께 시작하였고, 3년 뒤 대관령 황태덕장 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990~13,200㎡ 규모의 덕장이 15개 있고, 매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인제황태축제가 열린다. 

 

명태는 거는 즉시 얼어야만 물과 함께 육질의 양분과 맛이 빠져 나가지 않는데 이 곳의 밤의

평균 기온이 두 달이상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며 계곡에서 늘 바람이 불어오는 천혜의

기후조건으로, 진부령 동쪽 거진항 일대에는 할복장(割腹場)에서 배를 가른 명태들이 이곳에서

보통 1월초부터 3개월간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전체적으로 통통하고 속살이 황색을 띠며,

육질이 부드럽고 영양이 풍부한 황태가 되는데 황태의 깊은 맛은 물론 간장해독, 숙취해소,

노폐물 제거, 독사 독및 연탄가스 중독 해독에 효과 있다고 한다

두발이 아닌 짐승처럼(?) 네발로 기다시피 암릉구간으로 내려가는데 바위에

위를 보호하고 강장·각혈·하혈 등에 지혈제로 효험이 있다는 석이버섯이

바위에 잔뜩 붙어있다...넓은 너럭바위가 나오고,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베낭을 내려놓고, 가지고 온 두유 하나에 앙꼬빵으로 허기를 면하고

잠깐이지만 휴식을 취한다

다시 집채만한 너덜겅을 기다시피 내려가는데...

잠시후에 오를 걸레봉이 산꾼을 겁박하는 느낌이지만 이곳을 3번이나

통과한 경험이 있어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거기다가 오늘 날씨도

산꾼 범여에게 우호적(?)이다...이곳은 너덜겅을 통과하는 등로도 힘들지만

늘 이곳에만 오면 사람이 날아갈 정도의 세찬 바람이 불어대는 곳인데

오늘은 불지 않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잠시 숲길을  들어섰다가 곧바로 너덜겅을 다시 만난다

 잠시후에 걸레봉에서 마등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저 멀리 대청봉(좌측 끝쪽)은

설악봉의 주봉답게 구름을 인 채 근엄한 모습이 과연 설악의 제일봉임을 각인

시켜주는구나. 

 

그리고 바람, 나무, 구름, 태양, 안개가 차례로 등장하여 조화를 부리니

또 다른 자연인 바위 또한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낸다.

거대한 바위덩어리(巖塊) 밭인 너덜은 고비 때마다 나타나 진행을 힘들게 하니

가급적 피하고 싶은 존재이지만 피할 수 없으니 오늘 산행구간의 너덜이 악명

높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황철남봉에서 저항령으로 향하는 길의 마지막 너덜길을 벗어난다

숲길로 들어서니... 

비탐구간임에도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늘 조심하라는 경각심을 주기 위함인지 生을 마감한 채 누워있는

고사목이 말한다...“끝나도 끝난것이 아니니 긴장하면서 산행을 하란다”

滿山紅葉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산꾼을 반긴다

뚜꺼비 바위?

안부(09:20)

참취 씨방도 이별을 준비한다...그래 늘 이별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이 오겠지...

저항령이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잠시후에 오를 걸레봉 오름길의 너덜겅이 코 옆에 다가왔다

저항령에서 용대리로 내려가는 길골계곡의 모습

마지막 너덜겅을 통과하니...

간간히 보이는 대간꾼들의 흔적을 만나면서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09:28)

저항령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로프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내려서는데 숏다리의 悲哀를 뼈저리게 느낀다

정신 좀 차리셔요

암릉구간을 통과하여 편하게 걷다보니 저항령에 도착한다

저항령(低項嶺:1,100m:09:42)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설악동을 넘나드는 고개로 넓은 공터가 있으며

비박꾼들의 멋진 박장소로도 유명한 곳으로, 우측으로는 백담사와 용대리로

연결되고 좌측으로는 긴 저항령 게곡을 내려가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있는 신흥사와 설악소공원으로 이어지는 곳인데, 최근에는 대간꾼들이 아닌

일반 등산객들이 목우재에서 출발하여 울산바위, 황철봉을 찍고 이곳에서 저항령

계곡으로 하산하는 산악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북주 능선(北主綾線)에 있는 고개 중의 하나로 동쪽으로는 정고평(丁庫坪)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길골(路洞)을 거쳐 백담사(百潭寺)에 이른 곳으로 늘목령이라고도 하며,

저항령(低項嶺), 늘목령 모두 노루목 고개, 목우(牧牛)재와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진 고개’라는 의미의 늘으목, 늘목에서 유래하였다.

 

즉 늘목령은 늘목에 다시 고개 령(嶺)자가 합쳐져서 늘목령이 된 것이고, 저항령(低項嶺)은

늘목이 노루목으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로 장항(獐項)이라고 표기하여, 거기에 다시

고개 령(嶺)자가 합쳐져서 장항령(獐項嶺)이라고 하던 것이, 발음상 저항령(低項嶺)으로

변하고, 이것을 의미와는 관계없이 한자로 저항령(低項嶺)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볼 때 저항령(低項嶺)도 마등령(馬登嶺)처럼 옛날부터 이용된 길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신흥사쪽은 등로가 뚜렸하고,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지만, 우측의 용대리 방향은

등로도 안보이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치 않은듯 하다

6.25동란 당시 이곳 저항령은 상당히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라고 한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6.25 전쟁기간 중 설악산지구 전투에서 처절한 사투를 거듭하여

인민군 10,948명을 사살하고 417명을 생포. 그 당시 신원이 밝혀진 아군 전사자만  363명.

반세기가 지난 2012년 6월의 소청봉과 저항령 고지에는 6.25 전쟁 당시 전사자 65구가

발견된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녹슨 철모를 관통한 총알자국과 낡은 군화 속 발가락뼈가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려 지킨 조국을 우린 요즘 잊고 사는 건 아닌지...

걸레봉으로 오르는 길은 남쪽으로 살짝 내려섰다가 우측으로 올라간다

마지막 열정까지 불사르며, 꽃을 피우는 투구꽃의 모습

걸레봉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아무런 생각없이 땅만 바라보며 無心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추리며 앞을 쳐다보니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산꾼 한명이 내려오고 있는데, 나처럼 홀로걷는 독립군인가 보다

조심스럽게 능선으로 올라서니...

지나온 황철북봉 아래의 너덜겅처럼 집채만한 너덜겅이 산꾼을 겁박한다

조금전에 황철남봉에서 저항령으로 내려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

대간길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있는 문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산꾼의 눈을 호사스럽게 한다

문바위 뒷쪽인 황철봉에서 능선을 따라서 달마봉을 찍고 동해로

향하는 저 능선은 언젠가는 꼭 한번 걸어보고 싶은 능선이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데 아침에 만났던 3명의 등산객이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다...황철북봉에서 나를 추월했는데 왜 저 아래서 오지...

바람은 내게 말을 건넸다

흔들리면서 살아 내라고

뿌리를 단단히 박은 채

몸은 그저 맡기라고

바람이 불지 않은 삶은 없다고

있다해도 그건 산 사람의 삶이 아니라고...

저항령에서 걸레봉까지 한번에 치고 오르기에는 내 체력으론 무리이다.

고사목이 있는 곳에서 선 채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걸레봉으로 오르는 너덜겅...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나.

아주 천천히 걷다보니 그리 못갈 길도 아니기에 황소걸음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데 경사도가 7~80도 정도가 되니

힘이드는구나.

 

미시령에서 올라와 울산바위 갈림길에서 황철북봉으로 오르는 너덜길,

다시 황철남봉에서 저항령으로 내려오는 길, 또다시 저항령에서 걸레봉

오르는 너덜길은 국내 최대의 너덜겅 구간으로, 우리나라 산악지대

사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무더기들은 대부분 애추(崖錐)인데

우리말로는 ‘너덜겅’ 혹은 ‘너덜지대’, ‘돌서렁’이라고도 한다.

 

* 애추(崖錐)란  급경사  낭떠러지 밑이나 산기슭에 풍화 작용으로 

  암석 조각이 굴러 떨어져서 생긴 반원뿔 모양의 퇴적물(堆積物)을 말한다

용대리 계곡 저 너머로 도솔봉과 대암산으로 이어지는 소양(도솔)지맥 능선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대간길이지만 갈 수 없는 칠절봉,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저 능선...

아마도 내 생전에 저 길을 걸을수가 없을것 같다.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인 삼천리 금수강산...내 나라를 내 맘대로

걸을 수 없다는게 참으로 슬프고 가슴이 아프구나 

저항령 계곡에 걸쳐있는 멋진 달마봉(達磨峰:631.9m)이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년 당시  대구 효성여대 교수였던 배용균 감독이 만든 영화 제목으로

줄거리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젊은 스님 기봉은 홀로 살고 있는 앞 못 보는 어머니를 두고 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이게 하늘 뜻이니 도를 닦고

승려로서 살아가야할지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하던 기봉은 어린 동자스님

해진과 살고 있는 노스님 혜곡이 사는 작은 암자를 찾아가 마음 수련을 한다.

그러나, 이런 번민이 이어지고....

한편, 동자스님 해진은 어느 날 새 한마리를 줍게된다.

다친 새를 돌보며 정성껏 치료하지만, 새는 죽게 되고 죽음에 대해 해진은 고민하게 되고,

혜곡스님은 자신이 병에 걸려서 오래 살지 못함을 알게 된다...번민하던 기봉을 탓하던

혜곡은 나중에 자신이 오래 못 살고 죽을 것을 이야기한다... 결국, 혜곡은 입적하고,

그의 시신을 말없이 화장하는 기봉스님, 혜곡에 대한 유품을 모두 정리하고 기봉은

길을 떠나려한다...어디로 가시냐고 질문하는 해진에게 기봉은 답변하는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그건 달마대사만이 알 일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달마봉(達磨峰:631.9m)

달마봉 신흥사(神興寺) 앞의 세심천(洗心川) 건너 동편에 솟아있는 암봉(岩峰)으로

산봉우리의 둥글기가 흡사 달마와 같다하여 달마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둥글둥글한 달마대사의 모습처럼 달마봉도 둥근 것이 특징이며, 달마봉에 오르면

오른쪽에 보이는 영랑호(永郞湖)의 잔잔한 물결에 달마봉의 모습이 비친다고 한다.

 

 

『달마(達磨) 』라는 뜻은 달마대사의 준말로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선종(禪宗)의 시조(始祖)이며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왕의 셋째 아들로 인도의 향지국 왕족 출신으로 본 이름은 보리다라이다.

부처님 전등 제 27조이신 반야다라 尊者로부터 법을 받아 달마라는 이름을 받으니 곧 28조(祖)다.

존자(尊者)는 동쪽의 중국 땅에 불법의 인연이 성함을 보시고 바다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3년 간의

기간을 보낸 후에 중국으로 왔고, 그 당시 황제였던 양(梁) 무제(武帝:464~549) 와의 문답,

제자 혜가(慧可)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가 남긴 <二入四行>(報怨行. 隨緣行, 稱法行, 無所求行)의 가르침을 남겼다.

첫번째 너덜길을 지나니...

석가모니 탄생게에서 나오는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에서

따온듯한 ‘유아독종’이란다... 산에서는 독종은 아니됩니다...강한것이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하듯, 산에게는 이기는게 아니라 순응하는게

답입니다

다시 숲을 벗어나서 2번째의 너덜겅으로 올라간다

2번째 너덜겅에 오르면서 북서쪽을 바라본다.

황철남봉에서 용대리 계곡위로 이어지는 능선이 장쾌하고

좌측의 저항령 계곡너머로는 신흥사 맞은편의 권금성이 아련히 보인다

너덜겅에서 바라본 달마봉 맞은편 권금성의 모습

 

권금성(權金城)의 유래는

아주 오랜 옛날 한 마을에 권씨 성의 장사와 김씨 성의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쳐들어오자 산세가 험한 곳으로 피난하였다. 그곳이 지금의 권금성 자리이다.


적이 오자 방어할 길이 없어 서로 의논하였다. 그래서 두 장사가 그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적병이 오기 전에 성을 쌓아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안에 성을 만들어야 화를 면할 것이오.”

하지만 성을 쌓는 다는 것이 결코 생각 처럼 쉽지 않았다. 의논 끝에 돌을 날라다가 이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하지만 먼 거리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는 다면 몇 달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장사가 궁리 끝에 “이렇게 합시다. 돌을 날라서는 성을 쌓을 수 없으니

내가 강에 내려가 돌을 던질 테니 당신은 여기서 받아서 성을 쌓으시오,

그래야만 하루 밤에 성을 다 쌓을 수 있을 것이요.” “좋습니다.” 그래서 권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주어서 던졌고 그러면 김장사는 그 위에서 돌을 받아가지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들면 서로 교대로 김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던지고 권장사는 위에서 돌을

받아 성을 쌓았다. 이렇게 권장사와 김장사가 만든 성이라 권금성(權金城)이라고 부른다.

보라색 쑥부쟁이가 걸레봉에 거의 다왔으니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한다

좌측으로 가야할 멋진 능선으로 오르면서 걸레봉 정상으로 향한다

걸레봉(1,249.5m:10:35)

지도상에는 1,249.5m봉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예전에는 저항령 윗쪽에 있어서

저항봉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언젠가 누구한테서인지는 몰라도 걸레봉이라

부르면서부터 걸레봉이란 명칭 굳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봉우리 아래에 있는

너덜겅이 멀리서 보면 찢어진 걸레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건 아닌지?

 

저항령 윗쪽에 있는 봉우리라 해서 저항봉으로도 불렸으나 이제는

지명이 점점 걸레봉으로 굳어지는 느낌이다

걸레봉 정상에서 바라본 황철봉 능선의 모습

좌측으로부터 황철남봉, 황철봉, 황철북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이곳에 오면 산꾼들을 엄청 괴롭혔던 강풍은 오늘은 잠잠하다

걸레봉에서 로프를 이용하여 아랫쪽으로 내려간다

설악산은 한국(남한)에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3번째로

높은 산이며,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산으로, 음력 8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하는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했고,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란 뜻으로 설산(雪山), 설봉산(雪峯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산세, 울산바위를 비롯한 기암괴석,계곡의 맑은 물과 수많은 폭포 및 숲,

 그리고 백담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 등이 조화를 이루어 사찰경관이 뛰어나다.

 

설악산은 내설악(內雪嶽)과 외설악(外雪嶽)으로 구분되는데,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미시령(826m)과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주능선을 경계로 하여 동쪽을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고 부른다

등로에서 만난 배초향(꽃말:경애)

누군가가 나에게

낙엽 하나를 선물로 주면

그 낙엽을 곱게 붙이는 노력을 해야하리

누군가가 나에게 뜨거운 마음을 준다면

그 마음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하리 

암릉구간이 길을 막고있어 한참을 우회한 다음에 대간길을 이어간다

오를 수 없는 1.279.9m봉(암봉) 뒷쪽으로 오늘 대간 마루금의 마지막 봉우리인

마등봉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고, 그 뒷쪽으로는 중청봉과 대청봉이 물끄러미

산꾼을 내려다 보고 있구나

1.279.9m봉으로 가는 우회길

한참을 우회한 다음에 다시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1.279.9m봉으로 오르는 길...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苦行의 길이다

설악산에서 만난 늦둥이 산오이풀.

수줍은 새색시마냥 이곳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고

조신하게 피어있는 너의 모습이 참으로 곱구나

1,273.9m봉(10:50)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상에는 1,273.9m봉으로 표기 되어있는 족보있는 봉우리다

1,273.9m봉에서 정상은 오르지도 못하고 눈팅이만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좌측의 암릉구간으로 오르지 못하고 사면길로 가다가...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암봉(11:00)

암봉을 지나서 다시 능선으로 오르지 못하고 게걸음으로 남쪽을 향한다

미시령에서 계속되던 너덜길이 걸레봉을 지나면서 조금은

편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등로의 바위들이 태클을 걸어대면서

바쁜 산꾼의 발길을 붙잡는다

위치를 잘못잡은 탓인가?... 등로 가운데 있다보니 이리

밟히고, 저리 치이고하는 수난을 당하면서 불평없이

꿋꿋히 살아가는 너의 용기에 찬사와 갈채를 보낸다

안부(11:08)

암봉(11:10)

다시 암봉을 우회하는 내리막길

내리막을 내려섰다가 암봉을 우회하면서 다시 올라가는데

마치 알파벳의 W자 형태로 대간길의 마루금을 이어간다

밤새도록 운전을 하고 온 바람에 슬슬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투구꽃이 말을 건넨다...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정신줄을 놓지 말라고 한다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암봉(11:15)

생각보다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나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롤러코스트 타는 기분일까...오르막 내리막이 계속된다

힘들게 올라서는데 정상에 오르지 못할 암봉을 만난다

암봉(11:18)

암봉을 우회하면서 걷는데 갑자기 멋진 조망바위가 나타난다

조망바위(11:2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구곡담 계곡(九曲潭溪谷)의 모습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내설악에 있는 계곡으로 2013년 3월 11일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백담산장에서 수렴동대피소까지의 하류계곡을 수렴동계곡, 용아장성의 능선이 시작되는

수렴동대피소에서 소청봉 아래 봉정암까지의 상류계곡을 구곡담계곡으로 나눈다.

 

수렴동은 이곳의 경치가 금강산에 있는 수렴동계곡의 경치와 견줄만하다는데서

생겨난 이름이라 전하며, 구곡담이라는 이름은 굽이쳐 흐르는 계곡에 아홉 개의

담(潭)이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으며, 첫번째 담을 방원폭(方圓瀑)이라 부르지만,

나머지 담에는 이름이 없다.

조망바위 바로앞에 보이는 암봉이 1,151m봉이고, 그 뒷쪽 하얀 속살처럼

보이는 너덜겅이 있는 마등봉과 대청, 중청봉이 서서히 제모습을 드러낸다

안부(11:22)

조금씩 거칠어지는 암릉 사면길

암봉을 만나고...

좌측으로 우회하면서 마등령으로 향한다

또다시 암릉길의 힘든 여정은 계속되고, 도가니에 무리가 올까봐 걱정이다.

아직도 3여년간 가야할 산이 수도없이 많이 남았는데...

암봉(11:32)

아무런 생각없이 텅빈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다.

남들은 산행을 하지만 난 살기위한 修行을 하는 셈이다.

매주 미친듯이 홀로 산길에 들었기에 이만큼의 체력 유지가

되었으니, 산은 나에게 뛰어난 名醫이자, 훌륭한 藥師인 셈이다

쉼터(11:33)

춥기 시작하는데 아직 겨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어떻하려고...

이 구간의 암봉은 모두 다 오를 수 없는 곳이라서 사면으로 패스한다

완만한 내리막길

황철봉으로 향하는 저 비박꾼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다시 등로는 오르막길로 바뀌고 1,249.5m봉으로 올라간다

1,249.5m봉(11:41)

1,249.5m봉 정상... 오를 수 없는 암봉이라 우측 사면길로 내려간다

안부(11:43)

이곳을 지나면서 오늘 산행중에 암릉으로 힘든 구간은 거의 다 지나온 셈이다

편안한 등로로 내려오니 길 가운데에 삼각점이 박혀있는데

조금전에 지나온 1,249.5m봉 정상이 너덜겅 구간이라 삼각점을

설치할 수 없어서 이곳에서 설치한 모양이다

1,249.5m봉 삼각점(△설악22 / 1987 재설)

안부(11:48)

안부를 지나며 좌측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능선 너머로 울산바위와

황철봉 능선에서 이어지는 달마봉이 환상적이고 달마봉 품 안에 있는

신흥사도 아련히 보이는구나

 

설악산에서나 마실 수 있는 이 신선한 공기, 어쩌면 이 맛에  산꾼들이 백두대간을

환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 앞에 보이는 울산바위의 본명(?)은 籬山이라고 했는 ‘울타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는

뜻으로 이러한 울타리가 한자음 ‘蔚’을 빌어 사용하면서 蔚山바위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籬山이 蔚山으로 변했으니 울산과 관련되는 전설도 있게 마련, 조물주가 지금의 금강산에

봉우리가 1만 2,000이나 되는 명산을 만들려고 천하 명산들 다 모이라고 했다.

 

이때 울산에 있던 울산바위도 금강산으로 날아가다가 몸집이 무거워 지금의 자리에

서 쉬고 있는데 이미 1만 2,000봉이 다 차서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금강산에 가긴

했는데 미모에서 밀렸으며, 그렇다고 해서 울산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고 해서 여기

설악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세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이야기에 더욱

정감이 간다...금강산에서 잘난 봉우리들 틈바구니에서 왕따로 지내니 설악산에서

왕노릇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중국 전국시대에 秦나라가 商鞅法 등 개혁을 통해 힘을 키워나가자 인접 국가들은,

일치감치 진나라에 붙어서 지내느냐(連衡 : 연횡), 아니면 인접 국가들이 서로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合從:합종)하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인접 국가들을 설득해 합종을 성사시킨 인물이 소진(蘇秦)인데 합종을

주장하면서 그가 내세운 말이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鷄口, 勿爲牛後)”이다.

즉 닭대가리가 될 지 언정 소 엉덩이는 되지 말자는 뜻이다.

울산바위는 이러한 고사성어(계구우후:鷄口牛後)를 닮았다... 능력이 미치지도 않는 곳에

무리하게 끼어들어 일을 망치지(용두사미:龍頭蛇尾) 말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의미(鷄口牛後)이겠다.

오늘 대간은 龍頭蛇尾보다 鷄口牛後를 더 기억하자고 울산바위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안부에서 조금씩 고도를 높이면서 마등봉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다

한달음 치고 올라서면서 만난 밋밋한 1,151m봉... 예전의 산행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으나 최근 지도에는 표기가 안된 무명봉이다

1,151m봉(11:53)

지나온 황철봉 능선의 모습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1,151m봉에서 내려와서 다시 편안한 길을 걷는다

암봉(11:57)

마등봉으로 향하는 길은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한다

조망처(12:00)

저기 어디쯤에 부부바위 혹은 연인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어느 것이 부부바위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구나

당겨본 신흥사의 모습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는 조선 인조 때 고승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등이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세웠다가 소실된 향성사(香城寺) 자리에 창건한 절이다.

여기에는 향성사지 삼층석탑(香城寺址三層石塔, 보물 제443호)을 비롯하여 공포(栱包)와 단청이

아름다운 신흥사 극락보전(神興寺極樂寶殿,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신흥사 경판(神興寺經板,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호)·청동(靑銅)시루·석조계단(石造階段)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울산바위 너머로 보이는 속초시와 동해 앞바다

안부(12:03)

무명봉(12:08)

안부(12:10)

안부에 오르다기 뒤돌아보니 삼각점 뒷쪽에 있는

1,249.5m봉의 뒷때가 아래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우람하고 멋진 모습이다

쉼터처럼 생긴 넓은 공터가 나오고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오르막이 시작된다

안부(12:17)

무명봉(12:20)

마등봉을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쉼터(12:23)

오르막을 올라서니 너덜겅이 보이기 시작하고...

마등봉을 향하는 본격적인 너덜겅이 시작된다

힘들어하는 범여를 배려함을 위한 것인지 직진으로 치고 오르지 않고

사면길 형태로 마루금이 이어지면서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오름길에 지나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여인과 산은 멀리서 봐야 이쁘다고 했던가

지나온 황철봉 능선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을

뽐내면서 북설악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면길을 돌아서 마등봉 정상을 향한 오르막길로 향한다

본격적인 너덜겅으로 올라서지만 지나온 황철봉 주변의 너덜겅의

추(崖錐)와는 달리 돌덩이 그리 크지 않아서 그리 힘은 들지 않는다

마등봉 정상으로 향하는 너덜길

저 윗쪽에는 걸레봉에서 나보다 한참 먼저가신 3분의 등산객이 보인다,

대간 산꾼들은 아니고, 설악산의 구석구석을 유유자적 걷는 멋진 산객들이다

조그만 돌로 이루어진 너덜겅 사이로 뚜렸한 등로가 형성되어 있다

오늘 황철봉에서 이곳까지 걸어온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맨끄트머리의 흐릿한 능선은 민간인들이 갈 수 없는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마등봉 정상에 오르면서 바라본 내설악의 모습

마등봉((馬登峰:1,326.7m:12:52)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과 인제군 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약간 평평한  정상에는

뾰족한 돌멩이에다가 마등봉이라 표식을 해놨고, 3등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로

남쪽으로는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과 화채능선, 공룡능선, 천불동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황철봉을 비롯한 울산바위, 달마봉이 보이는 一望無際의

멋진 산이이지만 비탐구간에 있는 탓으로 설악산에서 지나온 황철봉과 함께 庶者

취급을 받는 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고개 아래에 마등령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나, 최근의 

국토지리 정보원 지도상에는 세존봉(世尊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인 듯 싶다...진짜의 세존봉은 이곳이 남동쪽 아래에

아주 멋진 모습으로 설악산을 지키고 있는데 이곳을 세존봉이라니...

국토지리 정보원은 확인을 하시고 수정을 했으면 한다

인증샷

난 홀로 다니기에 인물 사진으로 인증샷을 안 남기는 편인데

오늘 앞서거니 뒷거니하면서 같이온 등산객의 배려로 인증샷을

남긴다...복받을깁니다

마등봉 정상 삼각점(△설악304 / 2007 재설)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설악산의 뎃빵인 대청봉, 중청, 소청의 근엄한

모습 좌측으로는 화채 능선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면서 권금성으로 향한다

저 화채능선을 꼭한번 타고 싶은데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라 워낙 단속이

심한 비탐구간이라, 그 꿈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설악의 우측 날개로 불리는 화채능선... 풍수지리상으로는 설악의 산세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산세’를 지녔다고 하는데 대청봉이 닭의 머리이자 부리요,

서북능선이 왼쪽 날개, 화채능선이 오른쪽 날개, 그리고 공룡능선이 닭의 몸통이

되는 셈이고, 용아장성이 시작되는 봉정암은 설악의 심장이자 알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설악의 형상을 보면 화채능선은 닭의 오른쪽 날개이다.

닭의 부리로 쪼아 먹을 수 있는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오른쪽 날개 겨드랑이

밑이 죽음의 계곡이라 부르는데, 그 누가 이곳을 죽음의 계곡이라 명하였는가....

 

죽음의 계곡은 대청봉에서 희운각으로 곧바로 내려오는 능선의 바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자주 눈사태가 일어나는 곳으로 이 계곡에서는 설상훈련과

빙폭 훈련을 할 수가 있어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등정을 위한 해외원정대들이

전지훈련차 많이 찾는 계곡이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종종 등반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는 곳으로 1969년에는 한국산악회원

10명이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을 위한 훈련을 하다가 눈사태를 만나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계곡 루트는 1956년 8월 한국산악회원 전감(田堪)씨가 최초로 개척한 이래 아직

뚜렷한 등반로는 없다...죽음의 계곡은 바로 닭의 목에 해당한다. 

마등봉 정상에서 바라본 화채능선

화채(華彩)란 꽃처럼 고운 빛깔을 수놓은 능선을 일컬음이며 화채능선(華彩綾線)

화채릉은 일명 동북(東北)능선이라고도 하며 자연휴식년제로 오랫동안 등산코스를

개방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곳곳에 협곡과 절벽으로 인해

일반 등산객들이 개별적으로 산행하기는 위험하다. 

 

설악의 멋진 풍경사진등은 대부분 화채능선에 찍은 사진들이 많은데

화채능선을 찾는 사람은 산꾼보다는 사진작가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만큼 조망이 빼어날 뿐만아니라, 화채능선은 항상 출입이 통제돼 왔던 설악의

성역과도 같은 곳은 곳으로, 설악 매니아들 중에서도 화채능선 한번 가보는게

꿈이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코앞에 펼쳐지는 공룡능선...왜 산꾼들이 설악에 뿅가는지 알 것만 같다

마등봉에서 바라본 속초시내의 모습

 

속초의 지명유래는 

첫째, 속초는 속새(높이 30~60㎝의 상록 양치식물)가 많으므로 황무지, 원야(原野)의

의미로 속새, 또는 한자로 표기하여 속초(束草)라고 불리었는데, 이 두 땅이름이 함께

사용되다가 속초라는 땅이름만 남게 되었다.

 

둘째, 지금의 영금정 옆에 솔산이 있을 때, 바다에서 이 포구를 들여다보면 그 솔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서 세워 놓은 것 같은 형태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셋째, 풍수지리학 상 속초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소가 누워서 풀을 먹고 있는

형국이므로, 누워서는 맘대로 풀을 뜯지 못하기 때문에 풀을 묶어서 소가 먹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넷째, 울산바위에 관한 전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설악산에 구경 왔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신흥사 승려에게 울산바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는데, 어느 해에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 세금을

주지 못하겠으니 이 바위를 도로 울산 땅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울산 고을의 원님이 이 바위를 재(災)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동자승이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 곧 지금의 속초 시가지에 자라고 있는 풀을

새끼로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 맨 후 불에 태워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었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로 적는

속초(束草)로 불리게 되었다.

 

--- 속초문화원 발간 [속초(束草)의 옛 땅이름]에서 인용

마등봉 정상에 잠깐 머물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마등봉 정상을 내려서자마자...

멋진 암봉을 만나지만 우측으로 돌아서 마등령으로 향한다

흐미!..조금 있으면 설악산이 불타것네...

헬기장(13:00)

예전에는 이 비탐구간에 국공파들의 단속이 워낙 심해서

이곳에서 선두에 탐색조를 보내서 빨간모자  단속요원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마등령으로 내려섰던 비트역할을 했던 곳이다

설악산에서 길을 잃었다.

청봉에서 화채봉으로 빠지는 길길은 그날 하늘 속에 있었다.

 

(中略)

 

십년여 산을 들어도 길을 잃은 일은 없었다.

깊은 골짜기 함께 쓰러져 산과 내가 상처를 나누어 갖지는 못했다.

짐승 사이로 별 사이로 가듯길을 잃었어야 했다.

 

누구나 정상에선 길을 잃는 것을앞서 가면 가끔은 길을 잃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아래로만 고개를 내밀고 우왕좌왕했을까.

이젠 길을 잃어라 낙엽 속에 웅크려자듯 별 사이로 헤매어

떨듯 더 크게 길을 잃어라.

 

-이성선 <길을 잃어라>

헬기장에서 마등령으로 향하는데 흰구름을 이고있는 대청과 중청봉 

앞에 뾰족하게 서 있는 공룡능선상에 있는 1,275m봉으로  마등령

삼거리에서 무너미고개로 이어지는 정중간에 위치한 봉우리로

공룡능선의 등뼈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등령으로 내려간다

미시령에서 이곳까지 산양과 멸종위기 야생식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단속을 한다는데, 명분이 약한 것인지, 인력이 모자란(?)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전혀 단속을 하지않아 유유자적 禁線을

넘어서 제도권 등로로 들어선다.

 

예전 안내판에는 '출입 금지' 문구가 있었는데, 최근 설치된 안내판에는

 '출입금지'문구가 빠지고 '국립공원 특별 보호구역' 이란 안내문만 나와 있다.

아직까지 안내문에는 2,026년까지 출입을 제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나

예전처럼 CCTV나 산꾼을 단속하는 요원들은 없다

마등령(馬登領:1,220m:13:02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설악동의 경계에 있는 내 ·외설악(內 ·外雪嶽)을 연결하는

고개 중의 하나로 동으로 금강굴(金剛窟), 비선대(飛仙臺), 서로는 오세암(五歲庵),

백담사(百潭寺), 남으로 공룡(恐龍)능선, 대청봉(大靑峰), 북으로는 저항령(低項領),

황철봉(黃鐵峰), 미시령(彌矢領)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등산객들만이 넘어다니는 고개로 변해 버렸으나, 예전의 도보시대에는 행상인,

민간인들이 동·서를 넘어 다닐 때 이용한 옛길 중의 하나였다고 하며 지명위 유래는

말의 등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등령(馬登領)이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는 대부분 마등령(馬登領)으로 표기하나, 옛 기록에는 모두 마등령(馬等領)으로

되어 있으며, 속초시에서 편찬한 《설악(雪嶽)의 뿌리》라는 자료에는 마등령(摩登嶺)으로

표기하여, 산이 험준하여 손으로 기어 올라가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등령 삼거리로 향한다

마등령삼거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천화대(天花臺) 의 모습

설악산에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고

하는 릿지코스가 있다..."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숱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천화대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 내려서니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한다

마등령 삼거리의 모습

마등령 삼거리(1,209m:13:07)

마등령 삼거리에서 대간길 마루금을 종료하고 백담사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3번에 걸쳐서 설악산에 걸쳐있는 백두대간길을 마감한다.

예전에는 미시령에서 한계령까지 한방에 끝냈는데 이제는 3번만에

해도 이렇게 힘이드니...세월 탓이련가, 범여의 발걸음도 별 수 없구나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오세암으로 향한다

세상사가 諸行無常이요, 諸法無我인걸, 순리대로 살아야지 우짜겠노

마등령 삼거리를 지나면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완만하나 이제는

슬슬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길옆에 퍼질러 앉아 빵과 두유

하나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길을 떠난다

고개(13:12)

고개를 지나면서 오세암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돌틈 사이에서 피어있는 정신줄 놓은 하얀 제비꽃

산꾼들의 도가니에게는 독약같은 돌길이 시작된다

마등령 삼거리에서부지런히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0.5km밖에 못 왔다니... 헐?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02-08:↑마등령:해발 1,178m,↓오세암)

세상 참으로 불공평하다...누구는 올곧게 자라는데

누구는 넘어지고, 비틀어지면서 푸대접받는 삶이라니...

오세암에서 마등령으로 가는 길의 돌탑

돌멩이를 얹으면서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뭐가 저리도 좋을꼬?

오세암을 가는 계곡을 건너면서 바라본 암릉의 斷崖

오세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리 만만하게 볼 곳이 아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구나

무명봉(13:30)

황철봉 너덜길에서 만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여기까지 같이온 저 분.

친구 2명과 같이 오셨다는데 잠깐 대화를 나눴지만 대단한 포스를 갖추신 분 같다.

만경대를 들렸다 간다고 하면서 나를 추월한다

마등령 삼거리를 1km 지난 지점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02-09:↑마등령:해발 1,124m,↓오세암)

철계단따라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도가니에 무리가 갈까 두려워서 천천히 아주 천전히 걷는다

오세암가는 계곡너머로 보이는 멋진 풍경

휴식하기 참으로 좋은(?) 너럭바위도 통과한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02-11:↑마등령:해발 884m,↓영시암)

오세암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낭랑한 부전(副澱)스님의

염불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온다

오세암 절집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고...

봉정암 갈림길(13:50)

봉정암 갈림길에서 우측의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간 다음에...

오세암 절집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시무외전을 만난다(13:54)

오세암 시무외전(施無畏殿)

좀 특이한 명칭의 전각으로 우리나라 사찰중에 유일한 지명의 전각(殿閣)이

아닌가 싶은데, 시무외(施無畏)란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베푸는 걸 말하는데, 시무외전 법당에는 주불(主佛)이 천수천안관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일반적으로 성(聖)관음, 천수천안(千手天眼)관음, 마두(馬頭)관음,

십일면(十一面)관음, 여의륜(如意輪)관음, 준제(准提)관음 혹은 불공견색관음의

6관음을 말하고, 그 중에 성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라고 하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천개의 팔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있으며 육도 중에 주로 지옥을

관장하고 있고, 관음 중에서도 가장 힘있는 구제자로 신봉되고 있는 보살이다

 

* 대승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 하는데, 이는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의 준말로 보디는 ‘깨달음’, 삿트바는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라는 의미이다.

 

  보살의 수행을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말은 먼저 깨달은 다음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는

  그 자체가 중생 교화이고, 중생 교화가 곧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시무외전 법당에 모셔진 천수천안관음불(千手千眼觀音)

천수천안관음불(千手千眼觀音)은 천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음보살로,

대비심이 무한하다고 하여 대비관음(大悲觀音)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각이나 그림에서는 천 개의 손과 눈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보통 좌우에

스무 개씩 모두 마흔 개의 손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지옥에서

천상(天上)까지를 25단계로 나누므로 하나의 손이 25단계의 중생을 구제한다고

생각하면(40×25) 천 개의 손이 되며, 마흔 개의 손에는 각각 눈이 표현되어 있고

손마다 각기 다른 물건을 들고 있다.

시무외전을 참배하고 내려오니 등산객과 참배객들을 배려한 쉼터겸 공양간과

종무소 역할을 하는 요사(寮舍)가 나오는데 종무소에서 쌀 한봉지를 사서

동자전으로 향하는 길,  건너편에 우뚝선 만경대가 물끄러미 오세암을 내려다 보고 있다

공양시간을 잘 알아 놔야겠다

동자전 가는 길에 물 한바가지 마시고 옷매무새를 정갈히 한 다음에... 

동자전으로 향한다

오세암은 만해선사(卍海禪師)와 관련자료들이 많다

오세암은 647년(선덕여왕 1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서 자장율사(慈藏律師)

이곳에서 조그만 초막(草幕)을 짓고 수행하던 중에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으며, 조선 초기에

생육신(生六臣) 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출가를 했고, 조선조 명종때

보우스님이 암자를 중건하였고, 1643년(인조21년)에 설정스님이 중건한 다음에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뀌었으며 5세 동자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오세암의 큰 절집인 백담사가 있는 탓에 근대에는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

선사가 수행한 곳이며, 노산 이은상을 비롯한 시인 묵객들이 많이 거쳐간 절집이다

6.25때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세암의 상징적인 전각인 동자전(童子殿)의 모습

이 동자전은 야생화 동자꽃의 전설로 내려오는 motive가 된 곳이다

오세암(五歲庵)의 지명유래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내설악 백담사에서 10km 쯤 떨어진 해발 1,200m고지에

오세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옛날 매월대사가  두 살 된 자기 조카를 동자로

데리고 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암자를 짓고 매월암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해 늦은 겨울, 대사는 암자의 식량이 떨어지자 당시 4살된

동자에게 식량을 구하러 양양 큰 절에 가서 3일간 있다가 올터이니 기다리라 하고 떠났다.

 

대사는 3일분 식량만 남겨 놓은 채 길을 떠났으나 양양에서 식량을 구해 가지고 돌아올

무렵 공교롭게도 큰 눈이 내려 다섯자나 넘게 쌓였고 겨울이 다 지날때까지 눈이 녹지 않아

비통 속에서 해를 넘기고 이듬해 3월에야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사가 암자 못미쳐 망원대에 올라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암자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래서 급히 달려가 보니 동자가 불상 앞에 앉아 목탁을 치고 있는데,

몸은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나 가느다란 목소리로 계속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는 지난 겨을 식량을 구하러 절을 떠나기 전에 동자에게 너의 어머니는

관세음보살이니라고 일러 주었었다...대사는 다섯살 된 동자가 견성득도(見性得道)

한 것을 보고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五歲庵)으로 고쳤다고 한다.

오세암에 머물렀다는 노산 이은상의 흔적들

동자전에 들렸다가 다시 공양간이 있는 쉼터로 내려와서

과일로 원기를 보충하며, 조금전 쌀한봉지를 사면서 알게된

종무소 소임을 맡고있는 거사님에게 오세암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줏어 들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천진관음보전(天眞觀音寶殿)

오세암의 전각(殿閣)들 중에 주전(主殿)으로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이

반가상 자세로 앉아 설법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지금은 부전스님께서 한참 기도 축원을 하고있어 카메라를 갖다대는게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밖에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내려온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고 했던가...절집에서 너무 여유를 부렸다

오세암에서 40분정도 여유롭게 머문 다음에 범종각 아래로 빠져나온다(14:35)

근데 범종각 위에있는 황금색으로 떡칠을

한듯한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영 눈에 거슬린다.

시주자들은 저런걸 원치 않을텐데...

 

불전사물(佛殿四物) 또는 법구사물(法具四物)이라하여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가 있는데, 범종은 死後에 무간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치는 것으로,  종을 치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받는

죄의 고통을 잠시나마 쉬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참회(懺悔)하고 새로운 신심(信心)으로

지옥계(地獄界)를 벗어나라고 하는 바람에서 하는 것이고, 종각에 있는 큰 북을 법고라고

하는데, 북을 치는 소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와 닮아서 온몸을 힘차게 격동시켜

힘과 용기가 솟아서 그소리를 듣고 온갖 축생(畜生)들이 제도를 받게 된다고 한다.

 

구름모양을 한 엷은 청동판을 운판이라 하며, 이를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이 소리를 듣고

공중에 있는 고혼(孤魂)과 하늘을 나는 조류계(鳥類界)의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며,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목어고(木魚鼓), 어고(魚鼓),어판(魚板)이라고도 하며,  배 부분을

비워서 공동(空洞)을 만들어 나무막대기로 옆구리를 쳐서 소리를 내는데 스님들이 항시 몸에

지니는 목탁도 목어(木魚)에서 유래하였는데,  목어를 울리면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들과

수중(水中) 고혼들이 제도된다고 한다.

범종루 바깥쪽에는 「五歲庵」이 걸려있다

오세암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절집으로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 내 사찰들 중에서 제일이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기도 한 곳으로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불교가 피폐해진 조선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普雨:1515~1565) 스님 수도하였으며,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한 절집으로

특히, 김시습과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곳으로 유명하다

오세암에서 너무 여유를 부린 바람에 저 앞에 보이는 만경대는

아무래도 오를 시간이 없을듯 하다...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할 모양이다...6년전 3차 대간길에 올라가 본 것으로 대신한다 

 

설악산에는 만경대(萬景臺) 가 3곳이 있는데 오색약수터쪽에 있는

양양 만경대, 천불동계곡 천당폭포 근처에 있는 만경대, 그리고 오세암

맞은편에 있는 만경대가 있는데 이곳을 내설악 만경대萬景臺:922.2m)라 부른다

 

내설악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서쪽 일대를 가리키며 내설악

만경대는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영실천 골짜기를 따라 오세암 근처에서 해발고도

922.2m의 봉우리 형태를 취하는 경관 조망대로 영실천은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가야동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면서 백담사 앞을 흐르는 하천이다.

 

내설악은 설악산의 안쪽에 있다는 의미로 방향상으로는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서쪽의 마등령과 미시령, 서쪽의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설악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서북능선과 화채능선 등 3개의 주능선 서쪽을 지칭한다.

2017년 10월 1일...나홀로 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

 

만경대는 만 가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대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곳에

내설악에 있는 자연경관을 관망하기 쉽다는 데에서 내설악 만경대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만경대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조망대로 설악산 일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화강암의 차별침식

작용으로 인해 약한 부분은 씻겨 나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아서 형성되었으며 주변 지역보다

고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조망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만경대의 남쪽에 있는 가야동계곡 역시 노출된 기반암의 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 의해

폭포와 소가 여러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가야동계곡의 폭포와 소는 천불동계곡이나

십이선녀탕계곡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크고 웅장하지는 않다

오세암을 빠져나와 계곡을 지나고 만경대 갈림길인 안부로 올라선다

안부(14:45)

만경대 방향의 모습...출입금지 팻말을 보면서 입맛만 다시고 영시암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에는 오세암으로 향하는 순례객들을 간간히 만난다

愛馬를 가져오긴 했지만 조금은 불안하다...아직도 백담사로 가야할 길은 멀다

예전에 없는 안내판들이 많이 보이지만...

마음이 급한 탓일까...

건성건성...처삼촌 벌초하듯 대충보고는 빠르게 걷는다

쉼터(14:58)

쉼터를 지키는 이정표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

돌길은 천천히 걸어간다...산행을 오래하기 위해서는 도가니를 아껴야 하기에...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쉼터가 나온다

쉼터(15:05)

영시암쪽에서 올라오는 부산에서 오신 순례객들을 만난다.

한결같이 커다란 비닐 봉다리에다가 부처님에게 올릴 공양물을

잔뜩 넣고는 다들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다.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려는 求法을 얻어려면 그정도는 감수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영시암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체력이 방전된 탓인가, 힘이드는구나

예전에는 안 그런것 같았는데 의외로 힘이든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02-13:↑영시암:해발 708m,↓오세암)

쉼터(15:10)

앙증맞은 다리가 나오는걸 보니 영시암이 그리 멀지 않은듯 하다

2번째 다리를 통과한다

우측에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영시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하지만 귀경 시간 때문에 베낭을

내려놓고, 쪽잠을 잘 형편은 아니다...행여 깊은 잠에 빠졌다가

백담사에서 용대리로 내려가는 막차(19:00)를 놓쳐버리면 낭패를 볼 수 있기에...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02-14:↑영시암:해발640m,↓오세암)

가야동 계곡 사면에서 발원하여 내설악 만경대를 지나서 내려오는 영실천을 만난다

좌측 아랫쪽에 갑자기 사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에 

내려다보니 용아장성과 봉정암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다

오세암 갈림길(15:30)

좌측으로는 봉정암과 소청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영시암과 백담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부터는 백담사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시암으로 가는 길

오세암 갈림길에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서 4분만에 영시암에

도착하는데, 이곳부터 백담사까지는 평지에 가까운 트레킹 코스이다

영시암(永矢庵:15:34)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의 부속암자로 “화살 시(矢)”로 '영원히 쏜 화살'이라는

뜻으로 영원토록 널리 베푸는 암자라는 뜻인데,1709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김창흡이 심원사 남쪽의

조원봉 아래에 창건한 암자로 조선조 숙종 15년(1689) 장희빈 사건 때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재집권하는 등 혼란한 시기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수황(金壽恒)이 사화(士禍)

휩쓸려 숙청당하고  사사(賜死) 되자 아들 김창흡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하며 살겠다고 창건한

암자로 영시암 법당앞에 적혀있는 영시암이란 현판은 여초 거사 김응현의 글씨라고 한다.

 

영시암 주법당에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해서 원만보신노사나불과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부처님을 좌.우 협시불로 모시고 있다

김창흡은 1705년(숙종 31) 모친상을 마치고 난 후 설악산으로 들어가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1707년(숙종 33) 조원봉 남쪽 벽운사 옆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는데

이후 건물에 불이 나자 서쪽으로 몇 리(里) 더 깊숙한 곳에 정사를 지어 머물렀다고 한다.

 

「삼연 김선생 영시암 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 1709)년 10월에

다시 절에 돌아왔다가 동쪽 수리(數里)에 있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잣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영시암(永矢庵)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을 담고 있다 하는데, 그가 이곳에 머문 지 6년이 되던 해인 1714년(숙종 40) 10월에

함께 지내던 거사(居士)  최춘금이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춘천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찰은 그 뒤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인제현감 이광구(李廣矩)가 「김삼연유허비(金三淵遺墟碑)」를 세웠으며

1691년에 오세암의 주지였던 설정(雪淨)이 조원봉 북쪽에 승당 24칸과 비각 1칸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했고,1760년 11월 7일에는 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석존불에 개금(改金)을 하였다고 한다.

 

1925년에는 영시암 주지로 이기호가 부임하면서 절을 중수하였지만, 1950년 6·25전쟁 때

전각들이 불에 타버린 것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 김충현(金忠顯)과 김응현(金膺顯)의 후원을 받아, 법당과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동유기에 기록된 영시암의 모습

예전에 없었던 안내판들이 많이 보인다

영시암 쉼터에서 물 한바가지 마시고, 무료로 먹을수 있는 커피한잔을

타서 마신 후에 다시 백담사로 향하는 여정은 시작된다

설봉당 부도(15:45)

영시암 회주 설봉당도윤 대화상 부도와 탑비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연등이 보인다

 

탑비의 비문에는
"영시암복원을 시작하고 입적때까지 농사짓고 순례길을 정비하며
글씨쓰고 참선하는 주경야독으로 손톱밑에 흙과 승복의 먹물이

지워진날이 드물었다 며 내설악의 농부스님으로 불리던 설봉스님의 
입적 1주기를 맞아 영시암에 탑비를세운다"라 기록되어 있다

 

2018년 5월8일 법납 60 세납 88세로 원적에 든 道允 大和尙 雪峰스님은
한국전쟁이후 잿더미로 변한 오세암을 비롯해 봉정암, 영시암등 내설악을

불교성지로 복원했으며 중앙승가대를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등
승가교육발전에도 많은 역활을 했던 스님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14:↑백담사:해발564m,↓수렴동)

등로 주위에는 예전의 집터처럼 보이는 흔적을 지나간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13:↑백담사:해발554m,↓영시암)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12:↑백담사:해발566m,↓영시암)

영시암부터 백담사로 내려가는 길은 설악산 등산객과

봉정암, 오세암, 영시암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순례객들로

인해 번잡함에 홀로 다니는 독립군 범여로서는 상당히 불편하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11:↑백담사:해발555m,↓영시암)

길골계곡 입구(16:10)

저항령에서 길골계곡을 지나서 내려오면 만나는 다리이다

길골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영실천으로 합쳐지는 곳이다

아직도 백담사가 2.7km나 남았다니...부지런히 걸었는데 말이다

설담당부도탑(雪潭堂浮圖塔:16:12)

부도(浮圖)란 부도’ 승려 사리 유골 안치 이란 으로 설담당

스님은 백담사의 스님으로 계곡 건너편에 있었는데 여기로 옮겨 왔다고 한다

설담당 안내판의 내용을 인용하면...

 

설담당 부도 / 雪潭 18세기 (생몰 미상)

신계 재익(新溪 載益)을 은사로 출가하신 설담스님의 법호는 태활(泰闊)이다.

용암(龍岩)의 법통을 이어 받았으며 정월 지순(淨月 知淳)에게 법통을 전수했다.

1781년(辛丑)에 영남지역에서 올라와 설악산 심원사(尋源寺)에서 수행,정진하셨다.

그해에 최붕(最鵬) 등과 함께 대웅전과 향각 불사를 하고 2년 뒤인 1783년에 심원사를

백담사로 개칭하였다...그 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스님의 부도가 심원사 옛터

인근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 백담사에 화재가 자꾸나서 절 이름을 고치려고 하던 주지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웅덩이(潭)이 몇개인지 세어보라고 해서 세어봤더니 100개이기에 절 이름을

'백담사'라 개칭(改稱)했다고 하는 스님이 설담당 스님이었다고 한다

평지에는 돌을 안깔면 안되나요?

철교1(16:17)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10:↑백담사:해발492m,↓영시암)

조금 이른 시간인데도 해가 지려나?...스멀스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철교2(16:30)

영실천 옆으로 이어지는 데크목 등로를 따라서 백담사로 가는 길은 참으로 지루하다

수렴동 계곡이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09:↑백담사:해발517m,↓영시암)

영실천이 흐르는 수렴동 계곡을 지나간다 

수렴동계곡은 금강산의 수렴동계곡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금강산의 수렴동은 설악산의

수렴동보다 한 수 아래인 모양이다...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조선의 산수’에서

“금강의 수렴동이 오두막집의 들창에 친 발이라면, 설악의 수렴동은

경회루의 넓은 한쪽 면을 뒤덮고 있는 큰 발이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조망처(16:35)

조망처를 지나면서 뒤돌아서 바라본 용아장성(龍牙長城) 모습

 

용아장성(龍牙長城)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있는 설악산의 5대 능선중에

하나로 2013년 3월 11일 대한민국 자연명승 제102호로 지정되었으며 용(龍)의

이빨(牙)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내설악을 가르며 대청봉으로 솟아오른

모습이 장성(長城)같다하여 용아장성(龍牙長城)으로 불리는 암릉구간으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암봉들이 용의 송곳니처럼 솟아 있으며 소청봉에서 시작되어 구곡담계곡과

가야동 계곡을 가르며 수렴동대피소까지 암릉구간으로 설악산의 등로중에 가장 험한

코스로 자일과 클링, 카라비너 등 암벽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엄격하게 통제되는 구간이고,

비법정 탐방로이지만 산꾼들이 몰래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봉정암 석가사리탑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가야곡 계곡과 만경대, 공룡능선이 있고

서쪽으로는 수렴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을 끼고 서북 주릉이 장대하고 웅장하게 펼쳐진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08:↑백담사:해발504m,↓영시암)

사랑하는 까닭

                                                          만해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수렴동 계곡에 발을 담그며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시간이 내 맘을 조급하게 만드는구나

쉼터(16:40)

쉼터에서 만난 귀중한 자료들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탑(16:43)

계수기를 보면서 백담탐방지원센터 마당으로 들어선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07:↑백담사:해발502m,↓영시암)

백담탐방지원센터(16:45)

오세암에서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일까...백담사 참배는 포기해야 할 듯 싶다.

내년 가을의 학술세미나때 와서 백담사를 제대로 구경해야겠다

백담사 입구(16:50)

백담사 입구에 도착하면서 갈등이 심하다...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귀경 시간

때문에 과감히 포기한다

 

백담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만해 한용운 선사가 주석하며 여러 작품을 남긴 절로,

유명한데, 선사께서는 출가한 이후 이 절에서 잠시 머물며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와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그 이후에 이 절이 유명해진 것은 전두환 (전)대통령부부가 '5공 청산'의 일환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11월 23일부터 1990년 12월 30일까지 약 2년 동안 자의반 타의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는데, 1980년도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는 불교계를

제어할 필요성에 의하여 1980년 10월 27일을 기해 전국의 사찰 5,731곳을 수색해 1,700명에 이르는

승려와 신도를 불교계 내부의 수배자 또는 불순분자라는 명목으로 검거했던 10.27 법난으로 불교도들을

핍팍했지만, 말년에 이곳으로 와서 보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연을 지난 절집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설악 10-06:↑백담사:해발494m,↓영시암)

백담사(百潭寺)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간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절 이름은 한계사(寒溪寺)라 했으며,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한계령

중턱 장수대 근방이었다.

 

이 한계사는 불터고 없어지고 지금은 석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탄 자리에 43년 후에 다시 절을 중건했으나 이나마도 불타 버렸다.

이후 백담사는 많은 화재와 사연을 지닌 채 1천3백년을 존속해왔다.

 

최근에는 1915년 1백60여칸의 백담사는 불타버리고, 4년후에 중건했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찰이 계속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므로 이름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던 중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신령스러운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지금의 절까지 담(潭)을 세어 1백개가 되는 장소에 사찰을 건립하면 삼재(水,火,風)를

면하리라고 현몽하기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했으며, 담(潭)자는 불의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하였다고 전해졌으며, 담(潭)자가 들었기 때문인지 그 뒤부터는 화재가 일어나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주차장 가는 길에서 바라본 춘성대선사 부도비

춘성선사(春城:1891년 ~1977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문인으로 선승으로도 명성이

있었고, 출가후 받은 법명이 춘성(春城)이고, 법호는 춘성(春性)으로 이춘성으로도 부른다.

별칭은 무애도인(無碍道人)이었으며, 강원도 출신이며 13세 때인 1903년에 출가하여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선사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만공(滿空)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였으며,

망월사 전등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평생을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한국전쟁 때는 망월사를 지키기도 했고, 거침없는 육두문자

풍자로 유명하였다...그의 풍자 중 기독교 광신도들을 조롱하여 경찰서에 끌려가서도 당당하게

풍자를 말한 것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던 스님으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만공의 제자로

일제강점기 당시 반일 인사로 요시찰 인물이었으며 한국 불교계에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하였다.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만큼 실력을 드러내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라는 명성을 얻었던 스님이다

주차장가는 길에 백담사 세심교 너머의 금강문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백담사 주차장(16:55)

용대리로 가는 버스표

추석 연휴 탓인지 생각보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버스가 자주없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용대리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용대리 버스 정류장(17:40)

용대리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愛馬를 향해 미시령으로 향한다

미시령(18:05)

다시 미시령에 도착하여 1960년대에 이 길을 개통할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제호한 것으로 알려진 정상석을 둘러보면서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다음 구간에 걸어야 할 능선을 바라보면서 애마를 몰고, 원통, 인제를 지나서 

홍천군 두촌휴게소에 들려서 저녁을 해결하고나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졸음이 쏟아지니 미칠 지경이다...에라 모르겠다하고 차에서 잠을 자는데

얼마나 잤을까...누군가가 차 문을 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어떤 여인이 어둠속에 자기 차를 찾지 못하고 내 차문을 여는 바람에

나와 그 여인이 눈을 마주쳤는데, 그 여인도 놀랐는지 미안하단 소리도

없이 자기 차로  줄행랑을 친다...시계를 보니 휴게소에서 2시간은 잠을 잔 듯 하다.

 

다시 자동차를 몰고 동홍천I.C로 들어선 다음에 홍천, 남춘천을 지나고

가평휴게소를 지나면서 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가평휴게소에서 서울까지 2시간이 훨씬 넘게 소요되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집에 도착하니...몸뚱아리가 파김치가 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