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진도지맥(終)

진도지맥 제1구간 - 진도대교에서 챙재까지

by 범여(梵如) 2024. 1. 23.

☞산행일자:  2024년 01월 14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오후에 흐림...봄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12.6km  / 6시간20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진도대교 준공기념-망금산(진도타워)-진도타워 진입로-갈림길

                    묘지-18번 국도 암거-도로-무명봉-18번 국도 암거-신동교차로

                    56.2m봉-안부-축사-63.8m봉-안부-113.4m봉-갈림길-132m봉

                    136.6m봉-갈림길-안부-금골산 갈림길-마애여래좌상 갈림길

                    금골산-다시 금골산 갈림길-갈림길-쉼터-해언사 갈림길

                    진주하씨 묘-배수탱크-농로-63.0m봉-남양김씨 가족묘-안부

                   무명봉-사각정자-연산마을 버스 정류장-무명봉-농로-18번 국도 암거

                   무명묘지 -ㅏ자 안부 -묘지 -묘지 -편백나무 조림지 -안부 -고두산 분기봉

                   234.9m봉 -안부 -231.5m봉 -현풍곽공 묘-안부 -197.8m봉 -200.4m봉

                   둔전재-222m봉 -안부 -양천허공 묘-챙재(진고개)  

☞소  재 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 고군면

 

진도가는 길이 이리도 힘이 들었던가?

춥고 힘든 겨울 산행이 싫어서 따뜻한 남녘지방을 택한 것이 진도지맥이었는데,

갈려고 준비만 하면,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하여 2번을 연기한 끝에 3번만에

진도지맥길을 나선다...오늘도(14일) 저녁 7시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지만

산행 후에야 비가 오던지 말던지 내 사정은 아닐테고...조금 염려가 되는 것은

며칠전 교통사고로 인해 허리가 아픈게 조금은 걱정이 된다

 

나에게 진도라는 곳은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30대 초반에 진도의 판소리와 상여소리에 매료되어 그 당시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소리를 採錄하러 다니다가 우연히 진도의 상여소리, 육자배기, 진도 아리랑,

다시래기(진도의 喪家에서 부모상을 당한 상주와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고

위로하기 위하여 벌이는 상여놀이)소리에 흠뻑 몇년동안 주말마다 진도에

내려왔던 기억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해겠지...

 

내가 이번에 진도지맥을 택한 건,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섬지역의 산이라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워낙 잡목이 심하다고 하여, 힘든 지맥길은 이제

체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끝내려는 목적이 첫번째다...이번 겨울과 초봄에는

진도, 화원, 흑석, 선은지맥까지 계획을 하고 있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겠으나, 첫번째로 진도지맥 1구간을 나서기로 한다 

 

진도지맥 개념도

 

진도지맥(珍島枝脈) 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남쪽끝 서망항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서, 망금산(112m), 도암산(122m→1.2km),

금골산(198m), 고두산(252.2m→1.4km), 챙재, 철천산(161.2m),상봉(266m), 출일봉(226.7m),

첨찰산(485.2m→0.7km), 수리봉(389m), 여귀산(458.7km), 연대산(148.8km), 월출산(110m),

희여산(269m→0.2km), 한복산(232m)을 지나 백도앞 갯바위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km인 산줄기 이다.

 

땅끝기맥 첨봉(352m)에서 분기한 화원지맥이 화원반도의 끝을 향해 서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울돌목으로 가는 짧은 산줄기를 내 보내는데, 이 산줄기를

따라가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또 다시 산줄기가 이어진다.  

 

망금산, 첨찰산, 여귀산을 거쳐 희여산에 이른 산줄기는 북쪽 지력산으로 가는 산줄기를

내보내고 한복산을 거쳐 백미도 앞에 이르러 끝이난다...(지력산으로 가는 산줄기가 더 길게

이어지지만 거제지맥, 남해지맥, 여수지맥, 고흥지맥, 사자지맥, 땅끝기맥과 같이 대양을 향해

남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봤다)

 

 

섬의 산줄기를 지맥이라 부르는것이 어딘가 좀 어색하고 산경표상 논리에 맞지 않는것

같지만 섬의 산줄기라 그섬의 이름을 붙여 진도지맥이라 부르는것에 동감 한다.

진도지맥의 산줄기는 많은 견해차이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신산경표(박성태저)에

따르면 진도지맥(珍島枝脈) 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남쪽끝 서망항까지 이어지는 48km의 산줄기라 말한다

진도지맥 구글어스

진도(珍島)는 전라남도 진도군에 속하는 섬으로 대한민국의 최서남단 (동경 126°15′,

북위 34°28′)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 430.7㎢, 인구 34,000여명, 1읍 6면 2출장소,

230개 도서(유인도 45, 무인도 185)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주도·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대체적으로 남동부는 급경사, 북서부는 완경사를 이루며, 첨찰산

(尖察山, 485m)이 최고봉을 이루며 남쪽에는 여귀산(女貴山, 457m)이 있다.

 

하천은 인지천(仁智川)·석교천(石橋川)·이십오천(二十五川)·진도천 등의 소하천이 흐르며

이곳은 온화한 해양성기후를 보이는 곳으로 1월 평균기온은 1.7℃, 8월 평균기온 은 26.4℃,

연강수량은 1,350㎜이며, 해마다 태풍의 피해가 심한 곳이다.

 

식생은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팽나무 등의 상록활엽수가 자라고 있다.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비중이 크다.

 

1984년 해남반도와의 사이에 진도대교가 설치되어 광주간 직행버스가 운행되며

교육 시설로는 초등학교 20개교, 초등학교분교 16개교, 중학교 7개교, 중학교분교 1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문화재로는 용장리의 용장산성(龍藏山城, 사적 제126호), 남동리의 남도석성(南挑石城,

사적 제127호) 등과 첨찰산 남쪽 기슭에 쌍계사, 운림산방(雲林山房) 등이 있으며, 또한,

매년 음력 4월에 펼쳐지는 ‘모세의 기적’이라 부르는 진도와 모도 사이의 바닷길이 유명하다.

 

천연기념물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와 진도의 백조도래지(천연기념물 제101호),

진도 의신면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07호), 진도 임회면의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1호) 등이 있다.

 

그 밖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인 <강강술래>, 제51호인 <남도들노래>, 제72호인 <진도씻김굿> 등이 있다.

이곳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매년 4월 옥주문화제(沃州文化祭)가 열린다.

 

◆ 종주에 필요한 지도 

영진1/5만 (p594신안, p595진도.해남, p611진도, p610진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목포행 버스표

토요일 밤11시 55분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목포로 향하는데 정시에 출발한

버스는 28인승 滿席이다... 고속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갑자기 소란스럽더니

출발한 지 10분도 안되어 버스기사가 서울 만남의 광장에 정차를 하더니

잠시후에 경찰이 출동한다...사연인 즉,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인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쉬키가 옆 좌석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에게

성추행을 하다가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멍청한 넘...요즘 아랫도리 잘못

휘둘다가 신세 망친 넘이 한 둘도 아닌데...이 쉬키는 신문도 안보는 모양이다

 

그 쉬키는 경찰서로 연행되고, 그 바람에 40분정도 늦게 서울을 출발한다.

그랬던 탓인지, 버스기사가 얼마나 과속을 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다...새벽 4시경에 목포터미널에 도착한다

목포종합 버스 터미널(04:10)

불꺼진 목포터미널 대합실에 내리니 같은 버스에 타고온 사람들은 다들 가버리고

갈데없는 나혼자만 터미널에 남는다...행여! 아침 식사라도 할 수 있는 식당이라도

있나하고 주위를 살펴보지만 식당은 안 보이고 편의점만 있기에 아침 식사를 포기하고

溫氣라고는 전혀없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추운 느낌이다...청승맞게 뭔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목포터미널 버스시간표

진도로 가는 첫 차가 06시 30분...2시간을 넘게 溫氣라고는 전혀없는 대합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이런 고역도 없다...차라리 고문에 가까운 느낌이다

05시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한두명씩 보이고 05시 30분이 지나면서 터미널 관계자들이

출근하면서 불이 환하게 밝혀지는데, 대합실에 그 흔한 온풍기 하나도 없다.

명색이 전남 서남부를 대표하는 도시이건만 터미널은 군청소재지 터미널만도 못하다

목포발 → 녹진행 버스표

목포터미널 대합실에서 오뉴월 개떨듯이 떨다가 06시 30분에 진도가는

첫 차를 탔는데도 몸이 좀체로 풀리지가 않는구나...첫 차라서 그런가

손님이라고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다...행여 몰라서 맨 앞좌석에 앉은

다음에 버스 기사에게 녹진 버스정류장에 내려 달라고 부탁하고는

깊은 잠에 빠진다...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기사 양반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버스에서 내린다

녹진 버스정류장(07:20)

진도군 시내버스 시간표

버스정류장에서 진도타워를 바라보면서 걷는데 도로변에 이른 아침에

영업을 하는 식당이 있어서 진도대교국밥 식당에 들어가서 국밥

한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분기점인 진도대교 방향으로 향한다

진도대교의 모습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사이에 놓인 길이 484m, 폭 11.7m의 국도 18호선인

전국에서 유일한 쌍둥이 사장교로 1984년 10월 18일 준공되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5년 12월 15일 제2의 진도대교가 개통되고 특히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고 다리 아래의 울돌목

물살은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울돌목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서해의 길목으로 해남과 진도 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이다.

1984년 진도대교의 개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진도는 연간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260만여 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 명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경관과 수많은 특산물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고장 진도로 오는 첫 번째 관문이다.

길이 애매하다...무단횡단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진도읍으로 향하는 군내대로라

부르는 18번 국도는 교통량이 별로 없어서 한산하다

도로를 건너 진도대교 준공탑이 있는 들머리로 향한다

도로를 건너가니 좌측 아래의 광장에는 진도각 휴게소가 보이고,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를 지나 진도대교 준공기념탑이 나오는데

이곳이 진도지맥의 들머리라고 보면 되겠다

진도대교 준공 기념탑(07:50)

진도대교 준공 기념탑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녹진관광지

내에 1984년 10월 18일 진도대교가 건설되면서 섬이던 진도가 육지와

이어진 것을 기념하여 현대건설이 세웠다


기념 조형물 형태로 지어진 탑 상단에는 화강암 환조물이 있고, 하단에는

대리석 위에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으며, 상단에는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가족과 재회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서 진돗개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귀가(歸家)를 반기고 있다... 하단 왼쪽에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앞세워

왜구를 무찌르는 명량대첩의 장면이, 오른쪽에는 농악대가 신명나게 춤추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 진도대교준공탑은 가족, 진돗개, 명량대첩, 농악대 등의 소재로 진도

문화의 특성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단의 烏石에다가 ‘여기 이 울돌목의 소용돌이에서 이순신 장군님이

임진왜란에 벼락같이 일본 해군을 무찔렀을 때에는 징검다리 돌들도

너무 좋아 울었었나니 그로부터 3백8십7년만에 그 충무공과 오늘의

온 겨레의 마음이 함께 어울려 바로 그 자리에 이 다리를 세움이 어찌

다만 진도와 해남을 이를뿐이요?...이 겨레의 영원한 넔의 역사를

이음이로다 ’라고 적혀있는 진도대교 준공탑 비문의 글은 서정주 시인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하남호가 썼다고 한다.

준공탑 뒷쪽의 진도타워를 바라보면서 진도지맥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07:55)

준공탑 뒷쪽의 능선으로 올라간 다음에...

가건물을 지나는데 시작부터 강력한 잡목의 저항이 시작된다

초반부터 잡목에 갇혀 버리고, 그나마 위안거리란곤

선답자들의 흔적이 있으니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무작정 치고 올라간다

아!...미치겠다...꼭 이 짓거리를 해야할 이유를 모르겠다

앞서간 부뜰이부부의 시그널이 용기를 복돋아 주는구나

등로가 안보이고 잡목의 저항이 강하다고 탓하지 말자.

100% 다 그런건 아니지만 162개의 지맥길중에 어디 한군데라도

만만한 지맥길이 있었던가...좋던 싫던간에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던가...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을 수 있다는데 감사하자

 

 

진도대교 남단 끝 좌측의 울돌목(좁은해로)은 전남의 진도와 해남반도를 사이에 두고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진 해로가 있는데 이것을 울돌목이라 한다.

바닷물이 간조와 만조의 때를 맞추어 병의 목 같은 좁은 곳을 일시에 지나가므로 울돌목의 조류는 거세기로 이름이 높은데 남곤(南袞)은 시에서 붉은 비 내리고 녹음은 살찌는데 거센 바람이 물결을 치매 조수(潮水)소리가 장하구나 라고 해 조수가 요란한 곳임을 표현하고 있다.

조수는 썰물 때 물을 따라 해벽에 부딪혀 요란한 울음 소리같이 들리므로 명량(鳴梁)으로 통용하기도 하는데 오도숙(吳道淑)이 상경해정기에서 울돌목을 한자로 울도항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목이 곧 항인 것만은 분명하고 또한 동서가 물길로서 분리된 해안에는 석벽이 솟아 있고 바다의 넓이는 수십 보밖에 안 되나 파류(波流)가 세어 소용돌이 일고 상경하는 배들은 이를 피하여 옆으로 세웠다 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해

길이 없는 길을 내가 만들어서 오르다가보니 진도타워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感은 오질 않고, 망개나무(청미래),

노간주, 동백에다가 억새까지 태클을 걸어대니 자꾸만 걸음이 느리다

길이없는 능선으로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빛바랜

백두사랑산악회 이 대장의 흔적을 만난다...이 친구

안 본지가 10년은 넘은듯 하다...옛 동료산꾼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초반부터 나뭇가지에 걸려서 피를 보기 시작한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일출이 시작되고, 개고생을 하면서

잡목을 치고 오르니 진도타워를 조성하면서 파헤쳐는지

망금산 정상은 정상은 형체조차도 알아볼 수가 없다

망금산(望金山:106.5m:08:15)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있는 산으로 진도의 관문산으로 명량해협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망금산은 산꼭대기에 가로 30m, 세로 20m의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으며, 백제시대 때부터 바다 물목을 지키는 군대 주둔지였다.

 

망금산은 한자로 바랄 망(望)자와 쇠 금(金)자를 쓰는데,진도의 울돌목을 건너오는

길목에 있고, 백제 때 군사가 주둔하였으며,토성을 쌓은 것으로 보아 망을 보는 것과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옛 토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지금은

산정상에 진도타워가 세워져 있다.

 

호남지도에는 망금봉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주변에 금골산및 녹진과 함께 명량도를

마주하고 있으며 망금봉을 지나 간재을 지나 진도군 치소로 이어지는 길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군일면의 신동리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진도를 남도의 요충이라 하였고 조선 선조 때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진도를 가장 중요한

관방지역이라 한 점과 동국여지지에 해로요해지지라 한 것에서 울두목을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망금산성은 이를 지키기 위한 관방성이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유인하여 명량해협(울돌목)에 모아 놓고 이 산에서 아녀자로 하여금 떼를 지어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게 했고 이에 넋을 빼앗긴 왜병과 적선 300여 척을 섬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정상에는 강강술래터가 있는데 망금산은 13척의 배로 3백여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지 (울돌목)에 연접하여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해발 106.5m의 나지막한

산으로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부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을 시켜 산봉우리를 원을 그리며

반복하여 돌게 하였다고 한다...주로 추석날 밤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며 추던 부녀자들의

민속놀이를 의병술로 사용한 것으로 지금도 망금산 산봉에는 망터가 있고 그 밑으로

강강술래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망금산에 대한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진도 타워로 내려간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위치한 진도타워는 망금산(106.5m)정상에 세워졌는데, 

이전에는 이곳에 녹진전망대가 있었으나 2011년 7월 이를 허물고, 2013년 10월

21일 진도타워를 새롭게 건립했다.

타워의 높이는 60m이며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만들어졌으며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등에서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진도타워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고 진도군

관광의 랜드 마크로 군민들에게 자긍심을,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진도대교와 울돌목이 한 눈에 보이는 곳으로 이마도 포토죤인 모양이다

진도대교 너머로는 우수영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이곳 진도지맥을

끝내고 3월쯤에 걸어볼 예정인 화원지맥 능선이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진도대교 밑으로 흐르는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슬픈 내색을 않는 울돌목

 

울돌목()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진 해로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조류(潮流)가 가장 빠른 곳으로 유명한데, 지형적으로 폭이 좁은 데다가 수심이

얕아 조류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살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밀물과 썰물에 의한 바닷물의 이동이 많은 것도 이곳의

물살이 빠른 요인이 되는데, 해협 중 폭이 가장 좁은 곳은 약 300m 정도이며, 유속은

수심 전반에 걸쳐 평균 5.5m/s, 바다 표층은 최대 6.5m/s에 달하며, 특히 조차가 가장

큰사리(대조, 大潮) 때 가장 빠르다.

좁은 지형에 대량의 물이 지나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도 하며,

물살로 인한 소리가 매우 큰 것이 특징인데, 예로부터 바위가 우는 것 같다는

의미로 '울돌목'이라 불렸고,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명량(鳴梁)'이다.

역사적으로 명량해협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함대를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배경은 조류가 빠른 명량해협의 지리적 요건을 이용한데 있었다.

진도타워에서 바라본 울돌목 공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1593년) 격려 글과 물품을 보내 준 현덕승(玄德升)에게 답글을

보내는데 글에서 호남국가지보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

그때도 무기와 식량, 군사와 격군(노 젖는 사람)을 호남에 기댔고  정유재란 때는 오로지 호남

백성들과 이순신의 힘만으로 나라를 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도타워에서 바라본 울돌목의 모습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삼대해전(三大海戰)중에 하나인 명량(鳴梁)대첩이 벌어졌던 울돌목의

바닷물은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5년만에 정유년(1597)에 왜란이 다시 일어나는데 정유재란은

임진왜란보다 훨씬 더 잔인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은 물론이고 코와 귀가

잘려나가는 일도 허다 했으며 잡혀서 국제노예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전라도를 비롯한 하삼도(下三道) 점령전쟁이다... 이 지역에서 조선인의 씨를 말리고,

왜놈들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려 했다. 따라서 그만큼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전쟁이었다.

이곳 울돌목이 역사에서 벌어질 뻔한 비극을 막아낸 물길이다.

명량 대첩(鳴梁大捷)은1597년(선조 30) 에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2척이 명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 함선 133여 척을 격퇴한 해전으로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낮춰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순신이 파직당할 당시

그의 계급은 대감급인 정헌대부 정2품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하기는 하였으나 정3품의 계급으로 부여했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는데 그 당시에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유명한 장계(狀啓: 예전에,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일이나 그런 문서를 이르던 말)가 유명하다

 

상유십이척 미신불사(尙有十二隻 微臣不死)

 

전하!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 해전의 전개도...위키백과 자료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범위는 좁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흘렀다.

울돌목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 치게 되는 것이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순류에 맞춰 울돌목을 단숨에 넘어가 고니시 육군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특히 구루시마 수군은 원래 해적 출신으로 이 같이 물살이 빠른 지역을 근거로 했던 바,

빠른 물살에 익숙한 이들은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이 막는다 하더라도 무리없이 전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1597년 10월 16일(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퇴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지만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330여 척 중 30여 척

(31~33)이 초전에 격침되었고,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으며,또한

추가적으로 철선과 해류에 휩사여 침몰하거나 거의 대파한 함선이 격침 함선을

포함하여 320여 척이었으며,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는데,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지장 충무공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다.

 진도타워 마당에서 남서쪽에서 눈을 돌리니  뿔처렴 뾰족하게 생긴

도암산(122m) 또는 독굴산으로도 불리는 멋진 산이 群鷄一鶴처럼

빼어난 산세가 산꾼의 눈을 호강시켜주는구나 

진도타워 진입로(08:20)

진도타워에는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으나 난 여행객이 아닌 산꾼으로

이곳을 왔기에, 이곳을 둘러보는 것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차후에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떠난다

트랙상으로는 앞에 보이는 저 절개지 윗쪽이 지맥길이나

초반에 한 개고생으로 인한 트라우마인가...그냥 편한 길을 걷는다

갈림길(08:25)

급경사로 내려서니 진도타워 오르는 길에

바리게이트가 있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도로 좌측의 나뭇가지에 선답자들의 시그널들이 많이 보인다

묘지로 이어지는 길로 향한다

묘지(08:26)

묘지에서 갑자기 사라진 지맥길

조금전에 시그널을 걸어뒀던 선답자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여기저기 쑤셔봐도 등로는 보이지 않고, 이곳에 갇혀서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절개지 위로 올라선다...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서 단단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왔지만 이렇게 힘든줄은 몰랐다

千辛萬苦 끝에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서니 유난히 뾰족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아마도 도암산인듯 하다...능선 우측으로는 진도읍으로 이어지는 18국도가

지나가고, 절개지 바로 아래에는 만금리로 이어지는 農路인 듯한 시멘트

도로가 있는데 저곳으로 갔으면 개고생을 안하고 갈걸...사서 개고생을 한다

절개지 능선에 빛바랜 ‘독도는 우리땅’님 시그널을 만난다

한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정말 대단하십니다

절개지에서 내려오니 18번 국도 너머로 만금마을이 보인다

전봇대 끄트머리에 보이는 금골산을 바라보면서 시멘트 도로로 걸어간다

18번 국도 암거(08:38)

18번 국도 지하를 통과하자마자 좌측 절개지로 올라간다

절개지로 올라서니니 진도로 향하는 18번 국도 방음벽이 성처럼 보이고.

요즘 무쟈게 비씬 대파들이 수확을 앞두고 있는 밭고랑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대파밭에서 바라본 만금리(滿金里)의 모습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속해있는 만금 마을은 망금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유래된 지명으로, 또는 명량을 망보는 망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전의이씨가 진도군 고군면에서 살다가 만금리로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대파밭을 지나서 농로로 내려서니...

도로(08:42)

만금리 마을에서 18번 굴다리로 지나 바닷가로 향하는 도로를 통과하는데

지맥길은 도로를 가로질러 18번 국도 방음벽과 비닐하우스 사이로 이어진다

비닐하우스를 통과한 다음에...

밭고랑을 지나서 다시 苦行의 길로 들어선다

진도지맥의 지독한 잡목을 예상하고 왔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상상을 초월한다... 求道者의 심정으로 길을 걷지만 길을 걸은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인내심의 한계점에 도달하는 느낌이다

지독한 잡목지대를 벗어나 18번 국도 우측의 절개지에 서니

멋진 진도타워가 보이는데 멀리서보니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18번 국도 너머의 바다에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보이는데

아무리 작은 섬이라도 이름없는 섬은 없다...좌측 송전탑

뒷쪽으로 보이는 섬이 넙섬이고, 가운데이 있는 섬이 굴섬,

우측의 송전탑 뒷쪽에 있는 큰 섬이 녹도이다...그 우측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李舜臣)과 관련이 깊은

수군영(水軍營)이 배치되어 있었던 곳이 이었으며 예전에 

진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의 역할 벽파진(碧波津) 나루터가 있다

무명봉(08:49)

내려가는 길 또한 장난이 아니다

이곳에서 잡목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한채로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끝에 탈출하여 내려서니 밭이 나온다

밭고랑 좌측의 절개지 능선을 따르는데...18번

국도 좌측의 봉우리로 진도지맥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18번 국도를 가로질러 가려다가 낯선곳에 와서

목숨을 걸어가면서 산행을 할 필요가 있겠냐 싶어서

그냥  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내려간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가니  철지난 억새가 태클을 걸어온다

우측의 민가 마당을 통과하여 도로로 내려선 다음에

18번 국도 아래를 통과한다

18번 국도 암거(08:58)

18번 국도 암거를 통과하자마자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대파밭 고랑을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대파밭을 지나서 이동통신탑을 지나서 내려서니...

18번 국도 아래를 통과하는 신동교차로가 나온다

신동교차로(09:04)

신동교차로에서  대사마을 표시석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대사마을 표시석을 따라서 좌측으로 향하는 대사마을 표시석에는

“世宗王朝 大沙邑串”이란 글귀가 보인다...세종대왕에 관한 자료가 있나 싶어서

여기저기 자료를 뒤져보니...

 

옛 문헌상 1446(세종 28)의 <세종실록> 111권에 

<珍島南面女歸山串牧場第一所珍島郡事 第二所金甲島萬戶 第三所南挑浦萬戶分掌

西面富支山串 北面海原串兩牧場 珍島郡事兼之>로 진도의 여귀산곶(女歸山串), 

부지산곶(富支山串), 해원곶(海原串)이란 지명이 나오며 <세조실록, 1475>,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여지도서, 1757등에도 진도의 곶()이라는

지명들로 사월곶(沙月串), 대사읍곶(大沙邑串), 요곶(蓼串), 상당곶(上堂串등이

나오고 인근 해남에 우수영이 들어오기 이전 그곳 이름은 황원곶(黃原串)이었다.

 

진도지역에는 ()이란 지명이 많이 보이는데

()은 바다 쪽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나 그러한 곳을 말한다

신동교차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도로를 따라서 대사리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를 버리고 밭으로 올라선다

등로 우측으로는 농장이 보이고 진돗개인지 똥개인지

모를 개 한마리가 짖지도 않고 물끄러미 산꾼을 바라본다.

 

내가 똥개라 부르는게 가소로운 모양이다...이보소!

 요즘에 유행하는 말도 모르시요?...서울 시내안에 있는

대학은 다 서울대이듯이, 진도에 살면 똥개든, 멍멍이든

다 진돗개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네...

농장을 지나서 다시 숲으로 올라간다

조금전에 잡목의 거친 저항을 받으면서 힘들게 지나왔던 

trauma 때문에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능선으로

오르는데, 반가운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산꾼을 반긴다.

너무 겁먹지 말라고... 

좌측 아랫쪽의 송전탑을 바라보면서 희미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56.2m봉(09:13)

약간의 難解한 무명봉을 지나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반가운 흔적들이 보이고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그래!...지맥길 시작부터 苦만 되었는데, 끝까지 苦로 산행을

한다면 누가 이 길을 오겠나... 잠시나마 離苦得樂(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을 누림)을 맛보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푹신한 잡풀지대로 내려서니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산꾼의 生氣를 북돋아 주는 발풀고사리가 산꾼을 반긴다.

 

상록성 다년초로 대형 양치식물에 속하는 발풀고사리는 잎은 드문드문 나와서

높이가 1m내외에 달하고 엽병은 길이 20-60cm로서 철사같이 딱딱하며 자갈색의

윤채가 있고 끝이 2개로 갈라져서 각 1쌍의 우편이 달리며 동시에 갈라지는 곳에서도

1쌍의 우편이 달려 모두 6개의 우편으로 된다.

 

우편은 긴 타원상 피침형이고 길이 15~30cm, 나비 3~7cm 정도로서 우상으로 깊게

갈라지며 표면은 녹색의 윤채가 있고 뒷면은 흰 빛이 돌며 적갈색의 털이 약간 있다.

열편은 선형이고 나비 3~4mm정도로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둔두 또는 요두이고

수평으로 퍼진게 특징이다

안부(09:18)

안부를 지나면서 이고득락의 잔상(殘像)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잡목의 강력한 태클에 한참동안 버벅거리다가

길이 없는 곳을 빠져 나오니 꽤나 큰 축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축사(09:21)

지맥길의 트랙은 축사 가운데로 이어지나 외국인 노동자와

쥔장인듯한 분이 한참 일을 하고 있어서 괜히 부딪힐 필요가

있겠나 싶어 좌측 아래로 내려가서 우회를 한다

우회를 하는데 개쉬키 한마리가 지랄발광하면서 짖어댄다

축사를 빠져나와서...

좌측으로 향하는데 송전탑을 건설하면서 만든 임도인가?

잡목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비교적 뚜렸한 길을 따라서

금골산으로 향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도암산과 대사저수지를 품고있는 대사리의 산그리메

 

대사리(大沙里)는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속해있는 마을로 마을 뒤

도암산이 있으며, 비교적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대꾸지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남평 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도암산 아래에는 꽤나 큰 대사저수지가 지리를 잡고 있다

63.8m봉(09:25)

안부(09:33)

송전탑이 서 있는 113.4m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완만한 오르막길로 오르는데 남녘땅이라 그런지 봄날씨처럼

따뜻하다...그리 덥지는 않으나 생각보다 땀을 많이 흘리면서

113.4m봉  정상으로 향한다 

113.4m봉  정상 아래에 있는 NO69 송전탑

113.4m봉(09:42)

힘든 이런 길을 누가 다닐까 싶나 생각하지만 다닐 사람은 다 다니는 모양이다.

남들이 다니지 않은 이런 길을 걷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충만감으로 인한

healing... 험한 이런 길을 다니지 않은 사람을 모르리라...

금골산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대야저수지 뒷쪽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는 지맥길에서

꽤나 벗어나 있는 146.0m봉이다...저기까지 갈 일은 없다

갈림길(09:45)

조금전에 축사에서부터 시작된 묵은 임도를 따라다가

대사저수지로 향하는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조금전의 묵은 임도와는 달리 다시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나

초반에 맞딱드린 잡목의 저항에 대한 학습효과 탓인지 그런대로

걸을만 하다 

등로 좌측으로는 신동저수지와 18국도 너머 보이는

해남쪽의 산그리메는 옅은 薄霧가 산을 가려 버렸다

다시 뚜렸한 등로에 올라서니 말라 비어진 부처손이 많이 보인다

132m봉(09:47)

서남쪽에 보이는 146.0m봉...1주일간 世俗에 찌든 때를 털어 내는건

아무런 생각없이 산 속을 홀로 걸으면서 산과의 渾然一體가 될 때의

느끼는 쾌감은 정말 좋다

저 분의 똥벼락이란 닉이 늘 궁금하다.

2021년 4월이던가 서화(신산경표상:장령)지맥 합수점 갈때

잠깐 조우한 적이 있었는데 먼저 지나가셨군요

잠시후에 오를 금골산을 바라보며 완만한 오르막으로 향한다

오늘 내가 걸었던 능선을 뒤돌아 본다.

망금산 위에 우뚝선 진도타워로 이어지는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섬 / 이해인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 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 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 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136.6m봉(09:58)

136.6m봉에서 당겨본 146.0m봉의 모습

갈림길(10:00)

146.0m봉으로 이어지는 우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희미한 등로로 내려가니...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10:04)

136.6m봉에서 한참을 내려왔다가 안부에서 다시 오르는 산길... 

아무런 생각을 않고, 오직 산길에만 집중하면서 오르지만

길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왜 이런 길을 걸어야 하는지

나 자신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신대륙을 개척한 콜럼버스의 심정으로 길이없는 길을 걷지만

참으로 힘이든다...한발, 한발 천천히 걷다보니 금골산 갈림길이

나온다

금골산 갈림길(10:21)

지맥길은 우측 아래로 내려가지만 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금골산을 향한 데크목 계단으로 향한다

곰골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암릉구간으로 능선에 올라서니

약간의 박무가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一望無際로 잠시후에

가야할 마루금 맨 뒷쪽으로 진도의 最高峰인 점찰산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나같이 느림보가 오늘 저기까지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일기예보로는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능선 아래로 내려다보니 해언사라는 절집의 殿閣들이 보이고 운동장이

있는 금성초교와 운동장 우측의 뒷쪽에는 5층 석탑이 흐릿하게 보인다

 

금골산 오층석탑(金骨山五層石塔: 보물 제529호)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4.5m의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반구형의 돌로 상륜부를 조성하였으며, 백제의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조성 연대는 고려 말기로 보인다

마애여래좌상 갈림길(10:23)

능선에 올라서니 바닷가라 그런지 강한 바람이 불어대나, 북쪽의

산길에서 만난 차가운 北風寒雪이 아니라 남도지방의 봄바람같은

微風이라 너무 좋다...오늘 진도지방의 낮 최고 기온이 14도란다.

 

우측 암릉구간에 처져있는 쇠사슬을 따라서 마애여래좌상으로

가는 길이나 일단 직진으로 이어지는 금골산으로 향한다 

능선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오늘 내가 걸어던 마루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바로앞 능선 아랫쪽으로는 대사저수지의 파란물이 영롱하다

진도타워 아래쪽에 도도히 흐르는 울돌목 뒷쪽으로는 화원반도가 보이는데

올 3월에 저 길을 걸으려고 계획하고 있는 화원지맥길이다 

금골산 가는 길

내게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 이태백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내게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빙그레 웃을 뿐 대답 못해도 마음 더욱 넉넉하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복사꽃 물에 흘러아득히 가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인간세상 벗어난 또 다른 세계라네

금골산(金骨山:198.0m:10:25)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와 덕병리 경계에 있는 '진도의 금강'이라 불리고

있는 산으로 개골산(皆骨山) 이라고도 부르며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또 다른 이름으로 상골산이라고도 부르며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석수(石獸)가 수만 년에 걸쳐 예술품을 조각해 놓은 듯 층층인가 하면 구멍이고,

구멍인가 하면 기둥이고, 사람인가 하면 짐승인 모습을 보여주며 기암의 색깔

또한 황색, 백색, 흑색, 회색 등으로 다양하다.

 

산 아래 자리한 아담한 금성초교에 있는 보물 제 529호 금골산 오층 석탑은

진도의 기나긴 연륜을 대변하는데 산 중턱에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굴암이 있다. 

 

산 위에는 세 개의 석굴이 있는데, 맨 왼쪽 굴 북쪽 벽에는 1470년 정후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좌우 3.5m 크기의 미륵불이 있다... 이 미륵불 배꼽에서

쌀이 나와 석굴에서 깨우침을 얻으려는 수도자들의 양식이 되어 왔으나

그 중 한사람이 욕심을 부려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금골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없으나 쇠 금(金)자에 뼈 골(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전체가 철분함량이 높은 화산암과 누런 금빛의 응회암으로 이루어졌고, 뼈처럼

골격미가 드러나 있는 산지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관직을 빼앗기고 진도에 유배되어 온 이주(李胄)는 금골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금골산록」이라는 글에서 금골산에 대해 기록했으며, 또다른

기록으로는 서거정의 동문선 금골산록편에는 영험이 많은 금골산이 매년 빛을

발해 유행병 등 재앙을 막았으나 미륵불이 조성된 후 빛을 발한 적이 없다 라고

해 민간신앙의 변천 모습을 보여준다.

 

* 동문선(東文選)은 조선전기 문신·학자 서거정 등이 왕명으로 우리나라 역대

  시문을 모아 1478년에 편찬한 시문선집으로 본문 130권, 목록 3권, 합 133권 45책.

  활자본·목판본으로 당시 대제학이던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강희맹

  (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 책 이외에 또 신용개(申用漑)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과 송상기(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세가지가 있는데,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은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을 비롯,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약 500인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하였다. 목록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과 양성지의 「진동문선전(進東文選箋)」이 실려 있다.

금골산 끄트머리에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진도바다에 떠있는

올망졸망한 섬 좌측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수군령(水軍營)이 있었던 벽파진(碧波津) 나루터가 보인다

금골산 정상에서 바라본 벽파진(碧波津)

벽파진(碧波津)은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었던 나루터로 본래 국방상

중요지역의 하나였던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임진왜란 ·정유재란 때에는

수군영(水軍營)을 두었으며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전첩비(戰捷碑)가 있다.

 

또한 순천에서 시작된 봉수(烽燧)가 지나는 길목이자 해남현(海南縣) 삼기원(三岐院)

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지금도 목포~완도 간, 목포~제주 간을 잇는 여객선의

기착지이다.

마애여래좌상 갈림길(10:31)

금골산  마애여래좌상(金骨山 磨崖如來坐像: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10호)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금골산(金骨山)[해발 193m]에는 수도처로 사용된 세 개의 굴

(상굴·서굴·동굴)이 있는데, 이중 동굴(東窟) 안에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굴은 입구가 너른 편이며 서너 명이 기거할 수 있는 크기이며,  마애불은 굴의 한가운데

남동 방향으로 새겨져 있으며, 진도의 비옥한 토지와 한려수도의 장쾌한 경관을 바라다보는

위치에 놓여 있다.

 

『속동문선』에 실려 있는 이주(李胄)의 「금골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 1469년부터 약 3년 동안

진도군수를 역임한 유호지(柳好池)의 발원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청회색 암석 알갱이들로 매끄럽지가 않고 표면이 쉽게 부서지는 화산암 계열의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낮은 부조로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도 어깨 폭이 좁고 목이 짧고, 두상(頭象)은 고려 후기

불화에 보이는 세 개의 타원을 좌우와 중앙에 올린 삼산형(三山形)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왼손을 정좌한 다리 위로 올린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아미타구품인

(阿彌陀九品印) 가운데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며, 손은 비례에 맞지 않게 작은 편이며,

왼손이 아래로 내려가 있다. ..복식은 승기지(僧祇支)와 복견의(覆肩衣), 그리고 대의와 군의를 착용한

일반형이며, 승기지의 상단은 수평을 이룬다.

오른쪽 어깨자락에 파상문이 있고 왼쪽 어깨 자락에는 Ω형 주름이 있으며, 가부좌한 다리 사이에

부채꼴 주름이 있고, 대좌는 표현되지 않았다... 이 상의 자세와 수인, 복식 등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전형적인 조선 전기 불상의 형태로 보인다.

이곳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금골산  마애여래좌상(金骨山 磨崖如來坐像)이

있는데, 며칠전 교통사고로 인하여 허리가 좋지 않아서 내려가려니 허리에

부담이 올 것 같고 포기를 하려니 아쉽기만 하다...내 전공이 불교인데

하지만 우짜겠노...몸뚱아리를 보전한 다음에 후일을 도모해야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던길을 되돌아 간다

다시 금골산 갈림길(10:33)

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에서 경로를

이탈했다고 지랄발광을 하기에 확인하니 우측으로 벗어나고 있다

갈림길(10:36)

뚜렸한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길이 없는 좌측 숲으로 내려간다

숲을 헤치고 트랙을 따라서 내려가니...

트랙상으로는 분명히 지맥 마루금이 맞는데 천길 낭떠러지라 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내려가는 길이 없어서 암릉위로 올라서니

조금전에 내려왔던 길이 보이는데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삶의 지혜 하나를 배운다

 

무조건 직진만이 좋은건 아녀!...때로는 물러서서

돌아가는 것도 삶의 지혜 중에 하나라는 것을...

1분도 안되는 거리를 암릉 위에서10분정도 버벅거리다가

다시 제도권 등로로 복귀한다(10:46)

갈림김(10:47)

좌측으로 꺽어져 금골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한참을 돌아서 마루금에 복귀를 한 다음에...

해언사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쉼터(10:50)

저 석굴 윗쪽이 마애여래좌상이 있는데 갈 수가 없다

마애불(摩崖佛)은 바위에 조각한 불상을 말한다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은 가슴앞에 왼손은 다리 위에

올린 자세로 얕게 새겨져 있으며, 둥근 얼굴에 작은 눈과 주먹코로 표현하였고 손은

비래에 맞지 않게 작은 편이며 양쪽 어깨는 법의로 덮었다. 가슴에는 사각형의 홈이

패여 있는데 이는 불상 안에 사리와 불경 등 종교적인 상징물을 보관하기 위한 곳으로 보인다

인간이 배려해주는 편안한 시설물로 내려가기는 하나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둬야 하는 법인데 몸뚱아리는

편하지만 마음은 그리 편치가 않으니 이런 걸 두고

二律背反的이라 하는거겠지

해언사 갈림길(10:53)

좌측으로 0.2km 지점에 해언사라는 절집이 있다고 하는데

지난 수욜에 차량 접촉사고로 아픈 허리가 산행을 하면서

조금씩 통증이 오는 걸 참느라 힘이든다...앞으로 가야할

거리가 너무 많이 남아있어 해언사가는 걸 포기하고

지맥길로 이어지는 연산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있는 해언사는 원래 사찰의 명칭이 해언사(海堰寺)·

해안사(海岸寺)·해월사(海月寺) 등으로도 전해내려 오고 있으나 가장 오랜

기록인 이주(李胄)의 『금골산록(金骨山錄)』에 해원사(海院寺)로 기록되고 있다.

 

해언사는 금골산 아래의 금성초등학교 교정 옆에 위치하며, 1973년 학교주변을

정리하면서 많은 석재와 초석·와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한동안 廢寺地로

남아 있다가 5층 석탑이 있는곳에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우측 아래로 꺽어져 내려가니...

등로는 뚜렸하다

진주하씨 묘(10:56)

순애할매 묘지에서 내려가는 길은 완전히 고속도로(?)이다

배수탱크(10:57)

농로 샛길에서 내려서니...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농로에서 바라본 진도군 군내면소지가 있는 둔전리(屯田里)의 모습

서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으로, 구릉성 평지에 있는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둔전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조선 때 둔전(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이 있었으므로 둔전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둔전, 금골, 방죽골, 알바웃골, 어름박골, 연산, 제터마을 등이 있다.

둔전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둔전리의 그것과 같으며  금골마을은

금골산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방죽골마을은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알바웃골마을은 알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어름박골마을은

얼음처럼 희고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산마을은 부락 뒤쪽의 산이 서로 이어져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제터마을은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둔전리의 금골산오층석탑(金骨山五層石塔)은 보물 제5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농로(10:58)

농로를 가로질러 배추밭으로 올라선다

배추밭으로 올라서자마자...

등로는 보이지 않고 잡목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맥길이라 모든걸 체념한 체 운명이라

생각하고 잡목을 헤쳐 나간다

잡목의 저항도 피할 겸 왔던길을 뒤돌아 보니

멋진 금골산이 힘들어하는 산꾼을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힘든 구간을 지나는데 백두사랑 이 대장의 흔적을 만난다

잡목을 헤치면서 조금을 진행하니 풀섶에 묻혀버린 벤취가 보이고...

관리가 안되는지 용도 폐기가 된 듯한 이동통신탑이 있는 63.0m봉 정상에 도착한다

63.0m봉(11:13)

등로는 보이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내려간다

흐릿한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남양김씨 가족묘가 나온다

남양김씨 가족묘(11:20)

묘지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려서니 수확이 끝난 배추밭이 보이고 옆에 있는

배추밭에는 지금 한창 수확중인데 거의 대부분의 인부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이다...지금 우리 농촌의 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서 씁쓸함을 느낀다.

안부에 내려와서 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안부(11:23)

안부를 지나 비닐하우스 옆으로 간 다음에...

다시 잡목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1:30)

무명봉 아래에는 아무도 찾지않은 벤취는 풀섶에 묻혀 버렸다

대단하십니다

갑자기 뚜렸한 등로가 나오는데 직진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이탈하여 우측의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간다

사각정자(11:33)

우측으로 내려서니 사각정자가 나오고 뚜렸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 좌측 능선이 마루금이다...건너편에는 잠시후에 오를 능선들이 보인다

연산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향한다

오리지널 마루금은 전봇대 뒷쪽으로 내려온다

연산마을 버스 정류장(11:38)

삼거리에 도착하니 연산버스정류장과 그 옆에 용인마을입구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군내면 둔전리에 속해있는 연산마을의 지명은 마을 뒤쪽의 산이 서로 이어져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혼자놀기

삼거리에서 우정가든농원 방향으로 들어서자 마자 배추밭을 끼고

좌측의 민가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에공!...아까번거...

배추밭 끄트머리에서 산 속으로 올라서니 내가 좋아하는 묵은 영지버섯이 방치되어 있다

무명봉(11:46)

동백나무들이 많이 보이는 지저분한 등로를 내려서니...

편백나무들이 조림되어 있는 시멘트 도로가 보인다

농로(11:50)

농로 가운데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좌측으로는 잠시후에 오를 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가운데 옴팍한 곳이 녹진에서 진도읍으로 향하는 18번 국도상의 진도터널 윗쪽인

간재이다

 

간재는 진도군의 북쪽에 있는 고개로 군내면 연산리에서 분토리의 한사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두산(254m)의 안부에 해당되며, 과거 녹진에서 이어지는

역로가 이곳을 지나가므로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현재 18번 국도가 진도터널을 통해서 이곳을 지나가는데, 『호남지도』(진도)에는

간령(艮嶺)이 녹진(鹿津)에서 진도읍내로 들어오는 초입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으며 『대동지지』(진도)에 영로(嶺路)로 간치(艮峙)가 기재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진도)에도 녹진과 진도읍내의 주요 초입 길목에 위치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우수영)에 고두산에 간치가 표기되어 있다.

18번 국도가 마루금을 막아버려서 하는 수 없이 좌측으로 향한다

자꾸만 시야에서 멀어지는 금골산의 모습

18국도를 통과하기 직전에 고두산을 바라본다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와 분토리 경계에 있는 고두산(254m)은 북쪽의 북풍을 막아주는

군내면의 주산으로 녹진에서 진도로 진입할 때 반드시 통과하는 간재(艮峙-지금은 터널)를

끼고 있고 18번 진도대로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지승 및 1872년지방지도에 지명은 찾아볼 수 없으나

조선지지자료(진도)에 군일면(郡一面, 현 군내면) 분토리(粉土里)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우수영)에도 고두산이 표기되어 있다.

18번 국도 암거(11:54)

오늘 4번째 18번 국도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지그재그로 통과한다

18번 국도 암거를 통과하자마자 우측으로 꺽어진다

고도를 높이기 위한 warming-up의 전초

단계를 거치면서 숲으로 들어서니 깔끔하게

의관정제를 갖춘 亡者들의 천년주택 3채(?)가 보인다

무명묘지(12:01)

묘지 뒷쪽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서 올라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곳 역시 산꾼 범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는지 잡목의 저항이 심한데 솔가비에

숨어있는  보춘화라 불리는 春蘭들이 꽃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잠시후에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예전에 이곳이 공동묘지였는지

묘지들이 많이 보이는데 한결같이 묘비나 상석(床石)들이 없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묘지옆에 피어있는 불쟁이의 딸...쑥부쟁이

ㅏ자 안부(12:12)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는데

저 길을 따라서 왔으면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겠다

직진의 오르막으로 올라서면서 급격하게 고도를 높힌다

묘지(12:15)

묘지들이 많아서 그런지 비교적 등로는 뚜렸하다

묘지(12:17)

무명묘지를 순례하는 기분이다.

마지막 묘지를 지나 갑자기 고도를 높히는데 교통사고의 휴유증인지

허리에  엄청난 통증이 오는 바람에 선 채로 잠깐 휴식을 취한다

빡세게 올라서니 벌목을 하고 편백나무를 심어놓은 조림지가 나온다

급경사의 조림지에서 왔던길을 뒤돌아 본다

금골산에서 둔전리의 야트막한 산을 통과했는데 산이 낮고

마을을 통과하는 非山非野구간이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치기 딱 좋은 등로이다

편백나무 조림지(12:26)

안부(12:29)

나에게는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세상살이가 와 이리 힘드노...

암릉 구간을 치고 올라서니 고두산 분기봉이 나온다

고두산 분기봉(220m:12:37)

우측으로 가면 간재(진도터널)를 지나 고두산으로 가는 길이고

지맥 마루금은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등로는 흐릿하나 그런대로

그럴만하다

나의 산행길에 유일한 동반자인 라디오도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그래 너도 쉬어야지...

완만 능선에 올라서니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은 무명봉에

237m봉이라는 산패와 설매봉이란 코팅지가 있는 정상에

도착한다

234.9m봉(12:43)

설매봉(雪梅峰:234.9m)에 대한 유래는 알 길이 없어서 아쉽다

겨울 산길의 호젓함...지난번 강원도와 충북의 산길에서 추위에 떨면서

개고생하던 추억을 잊지 못했는데, 이곳은 바람도 안불고 봄날씨를

방불케하는 편안함을 느낀다

안부(12:45)

231.5m봉(12:51)

빛바랜 신경수선생님의 흔적...저 분은 이 길을

진도지맥이 아닌 뭔 분맥, 단맥으로 걸었을까 궁금하다.

만난지가 어언 7~8년이 다되어 가는데 잘 계시겠지?

희미한 능선에서 등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지맥길을 걸으면서 다 그런건 아니지만 언제 뚜렸한

등로를 기대하면서 맥길을 걸었던가...그런 생각을

사치에 불과하다...트랙을 따라가지만 등로는 보이지

않고 내가 길을 만들면서 걸어간다

지도상 트랙에 그려진 희만한 등로로 내려가니 현풍곽공 부부묘가 나온다

현풍곽공&배유인 창녕조씨묘(12:56)

현풍곽공&배유인 창녕조씨묘비

글자의 디자인 독특하고 내가 여태껏 산길을 걸으면서

만난 묘비중에 가장 멋있는 묘비인데 아쉽게도 후손들이

돌보지 않은 무덤이라 봉분은 사라지고 숲으로 변해 버렸다.

 

너무 서러워 하지도 말고, 후손들에 섭섭해 하지도 마소.

어차피 人生이란 이생에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이거늘...

그래도 낙엽속에 묻혀버린 현풍곽공의 문인석은 후손들을 기다리나보다

안부(13:05)

안부에서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온다.

아무래도 지난주의 교통사고 휴유증인 듯 하다...지난주에

현장에 갔다오다가 신호를 대기하고 있는데 젊은 친구가

핸드폰을 보면서 운전하다가 서 있는 내 트럭을 보지 못하고

들이받힌 사고... 그 당시는 몰랐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할 만큼 통증이 심한데, 나이 탓인지 그리쉽게

통증이 가라 않지가 않구나...이럴때는 쉬어야 하는데 아직 가야할

산이 많아서 힘들드라도 길을 걷는다

197.8m봉(13:12)

등로는 보이지 않지만 잡목의 저항이 없는것 만으로도 감사하다

200.4m봉(13:18)

지맥스러운 길...언제부터인가 이런길에 gaslighting을 당한 느낌이지만

반듯한 제도권 등로보다는 거친 이런 길을 홀로 걷는길에 자꾸만

익숙해진 느낌이다 

희미한 등로를 내려오니 어마무시한(?)한 안부가 나오는데

지도상에는 아무런 지명 표시가 없는데 반바지님이란 분이

둔전재라 코팅지를 붙혀놨다

둔전재(屯田峙:165m:13:22)

좌측으로 둔전리로 내려가는 등로가 있으나 지금은 용도

폐기한 듯 보이는데 그 지명을 따서 둔전재라 하는 모양이다

 

* 둔전(屯田)이란 고려·조선 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를 말하는데 고려시대에는 영토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군량 확보를 위하여 변경 지대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둔전병(屯田兵) 또는

  방수군(防戍軍)을 두어 경작하였다.

 

 말기에 이르면서 둔전을 경작하는 농민의 부담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농장(農莊)의

 발달과 함께 권세가에 겸병되는 폐해를 가져왔기 때문에 새로 왕조를 개창한

 조선 전기에는 둔전문제 해결책의 하나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점차 국방문제와 군량 확보가 문제가 되면서 치폐(置廢)를 반복하다가 성종때

 (재위:1469~1494)에 제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둔전은 설치 목적에 따라 군둔전과

  관둔전으로 나뉘었고, 설치방법도 다양하였으며, 그 경영도 부역노동에 의한 경작이

 사라지고 영(營) ·아문(衙門)의 둔전에서는 병작제가 행해졌는데, 때문에 영·아문과

 둔전 경작자 간에는 지주제에서와 같은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둔전 [屯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여름철에 진도지맥을 걷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알겠구나

지독한 잡목 뒷쪽으로 오전에 지나온 금골산이 보이고

진도타워와 울돌목은 遠景이라 흐릿하게 보인다

남녘지방이라 그런가 낙엽속에서 제비꽃 이파리가 얼굴을 내민다

오르막길에도 그림과는 달리 잡목의 저항이 너무  심하여

잡목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걸어 올라간다

222m봉(13:35)

언제쯤 잡목의 저항에서 벗어날 있을런지...

안부(13:50)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서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내려서니 양천허씨 가족묘가 나온다

양천허공&현풍곽씨묘(13:53)

앙증맞은 문인석(文人石)

능묘 앞에 세우던 문관 모습의 석인(石人)인 문인석을 세우는 전통은

전통은 중국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나 유물로 확인되는 것은

한대(漢代) 이후부터인데 당대(唐代)에 이르러 석인상은 능묘제도의

일부로 체계화되면서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구분되었고, 송대(宋代)를

거쳐 명.청대(明,淸代)까지 계승・발전되었다.

우리나라는 당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석인상이 처음

등장하지만, 무인석만 설치되었을 뿐이다... 반면, 고려시대 왕릉에서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뚜렷이 구별하여 세웠으나 고려 말의 묘에서도 문인석은

드물게 확인된다.

묘지로 이어지는 뚜렸한 길로 내려서니

문패없는 망자의 천년주택이 나오고...

좌측의 능선이 지맥 마루금이나 그냥 묵은 임도로 내려선다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절개지라서 도로를 따라서 내려온다

저 곳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우회하여 황토밭 가운데로

내려서니 송산 버스정류장이 있는 챙재로 내려선다

 챙재(14:05)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의 송산리와 세등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정상에는

버스정류장과 GS 진고개 주유소가 보이고, 고개 동쪽과 서쪽에는 구릉이,

남쪽과 북쪽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 고개로 산꾼들 사이에는 챙재라고

부르나,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챙재가 뭔 뜻인지도 모르고 알 지도 못한다

그냥 진고개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유소 지명이 진고개 주유소다

 챙재는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고개였으나, 2003년 진도

터널 개통 후로 차들과 사람들의 왕래가 줄었으며,  동쪽으로 철천산이 있으며,

18번 국도와 801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고 진도읍에서 6.8㎞ 거리에

있는데 북쪽의 삼거리 우측으로는 용장성과 벽파진으로 가는 도로가 있다

챙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바람을 피해 버스 정류장에서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길 건너에 있는 주유소에 가서 녹진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알아보려고 도로를 건너는데 저 아래에서 승용차 한대가 오기에 믿져봐야

본전이제 생각하면 손을드니, 차를 세워준다...서울로 가는 등산객인데

녹진에서 목포가는 버스를 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곳의 버스 시간을

몰라서 그러니 좀 태워달라고 하니, 아무말 태워준다

 

이 분은 나를 버스정류장 조금 못가서 진도휴게소에서 나를 내려주고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가버린다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14:40) 

 

산길을 걸으면서 별로 먹은것이 없다보니 갑자기 허기가 진다.

휴게소 맞은편에 진도국밥집이란 식당이 보이기에 들어가서

국밥 한그릇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녹진버스정류장(15:10)

 

진도군 군내면에 속해있는 녹진리(廘津里)는 지형이 사슴의 뿔처럼 생겼으므로

녹진(廘津)이라 하였으며, 이 동네 동쪽과 해남 간에 1982년 다리가 놓여 진도의

관문이 되었으며, 쪽의 망금산(望金山)[111m], 서쪽에 도암산[122m]이 있을 뿐

대부분 지역이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녹진, 고지, 다리안, 망금, 대야, 샘골, 서당골마을 등이 있는데 녹진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녹진리의 그것과 같으며,  고지마을은 곶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다리안마을은 부락 앞에 다리가 놓여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망금마을은 망금산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대야마을은 앞에 큰 들이 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샘골마을은 샘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서당골마을은 서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5시30분발 녹진 → 목포간 버스표

버스표를 예매한 다음에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며

아래를 내려보니...허허허...범여의 몰골보소, 잡목에 걸렸는지

옷이 다 찢어져 거지중에 상거지네...바지는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아무래도 목포가서 바지를 사입어야겠다

녹진버스정류장 버스 시간표

15분 30분에 목포가는 버스를 타자마자 꿀맛같은 깊은 잠을 자는데

얼마나 깊이 잠이들었는지 버스가 목포터미널에 도착하여 기사가

깨우는 바람에 있어났다(16:20)

 

정신이 차리고 서울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터미널에서 바지를 하나

사려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서 그냥 포기한다

목포발 → 서울행 버스표

17시에 목포를 출발하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비가 쏟아진다.

오늘 산행은 좀 무리해서라도 오목재까지 가려고 했었는데

체력도 문제지만 비를 맞을뻔 했으니 챙재에서 산행을

종료한 게, 신의 한수였다...버스를 탔으니 비야 오는지

말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