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24년 01월 21일
☞산행날씨: 잔뜩흐린날씨 생각보다 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15.7km(점찰산 왕복 포함) / 7시간15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챙재- 송산리 입구- 창녕조씨 가족묘- 밀양박공 묘- 155m봉- 철전산
성재- 무명봉- 262m봉- 용장성 성곽- 용장성 끝- 안부- 상봉- 조망바위
무명봉- 안부- 출일봉- 오목재- 진도진길성당- 삼거리- 장흥임공 묘
165.4m봉- 안부- 암봉- 무명봉- 334.4m봉- 안부- 361.1m봉- 암봉
⊃자형 임도- 갈림길- 넓적바위 갈림길- 437.2m봉- 조망바위- 안부
암봉- 점찰산-다시 ⊃자형 임도- 안부- 임도 삼거리- 임도- 암봉- 안부
너럭바위- 수리봉- 안부- 무명봉- 암봉- 임도- 안부- 무명봉- 254m봉
∩자형 임도- 임도- 182m봉- 성죽재- 226.6m봉- 안부- 215.9m봉- 안부
무명봉- 안부- 146.0m봉-안부- 183.4m봉- 188.4m봉- 왕무덤재
☞소 재 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 고군면 / 진도읍 / 의신면
진도지맥 2번째 길을 나선다...이번 겨울에는 날씨도 따뜻하고, 전국의 지맥길 중에
잡목의 저항이 전국에서 첫번째(?)인 이 지역의 산줄기는 여름에는 산행이 힘들것
같아서 새싹이 트기전에 어느 정도 하려는 욕심이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될 지는
미지수이지만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한다.
토욜날 사무실에서 일찍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7시...저녁을 먹고
베낭을 대충 챙긴 다음에 아시안컵 축구 요르단과 경기를 관람하고 목포가는
막차를 타기위해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23시 55분 서울발 → 목포행 버스표
서울에서 목포가는 막차에 타고 여느 때처럼 잠을 청해보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잠이오질 않고, 불편한 의자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목포터미널에 도착하니
새벽 3시 20분...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는데 참으로 혼란스럽다...비가 온다는
예보가 없었는데 참으로 기상청의 예보가 원망스럽다
목포종합버스터미널(03:20)
노리타 P.C방(03:30~06:00)
버스에서 내려 대합실로 들어가려니 문은 굳게 잠겨있고 비는 오곳 갈데가 없다.
지난주에는 문이 안 잠겨 있었는데, 왜 이러지...
지금 이 시간에 모텔로 들어간다는 건, 돈이 너무 아깝고, 찜질방을
가자니 기저환자인 나로서는 영 찜찜하다...일단 베낭에서 우산을
꺼내 쓰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터미널 바로옆에 불이 켜져있는
P.C방이 보인다.
3층에 있는 P.C방에 들어가니 알바생인듯한 직원이 회원이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하니 회원이 아니면 입장이 안 된다고 하는데...전후 사정을
하니 입장을 시켜준다...P.C를 안하는 조건으로 시간당 1,000원씩
3천원을 주고 3시간동안 머물면서 잠을 좀 청하려고 하니, 주변에 젊은
친구들이 웃고 떠들기에 잠을 청할수가 의자에서 앉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목포 터미널로 향한다
목포발 → 녹진행 버스표
06시 30분에 녹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50분동안 꿀맛같은 쪽잠을 잔
다음에 녹진버스정류장에 내리니 07시 20분...날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한다
녹진 버스 정류장(07:20)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아침 식사를 할 요량으로 진도휴게소 방향으로 올라가니
지난주에 늦은 점심을 해결했던 진도대교 국밥집에 불이 켜져있다
진도대교 국밥집(07:25~50)
시골 식당 치고는 아주 깔끔하고 관광객을 많이 상대하는 식당인지 인테리어도
시골답지 않게, 럭세리하게 꾸며져 있고 착한 가격대에 음식도 깔끔하고
입맛에 맞다.
가격대비 밑반찬도 넉넉하고, 쥔장인듯한 여사장의 후덕한 맘씨 덕분에
여유로운 식사를 마다...남도지방의 음식 솜씨는 역시 다르다는 느낌이다
식사를 끝내고 택시를 호출하니 15분만에 도착하여 들머리인 챙재로 향한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바라본 망금산(진도타워)의 모습
챙재(55.8m:08:08)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의 송산리와 세등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정상에는
버스정류장과 GS 진고개 주유소가 보이고, 고개 동쪽과 서쪽에는 구릉이,
남쪽과 북쪽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 고개로 산꾼들 사이에는 챙재라고
부르나,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챙재’가 뭔 뜻인지 알 지도 못한다
그냥 진고개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유소 지명이 진고개 주유소다
챙재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니 아직도 가는비가 내리지만 산행을
포기할 정도의 비는 아니라 버스 정류장에 들어가서 산행 채비를 한다
그리고 지맥 마루금이 이어지는 주유소 뒷쪽으로 가보니 2m가 넘는
옹벽이 길을 막고 있어서 이리저리 들머리를 찾아보지만 길이 없다
하는 수 없어서 내려와서 송산마을 표지판이 있는 건물 뒷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집주인듯한 남자 한명이 나와서 그리로 가는
길이 없다고 하면서 가지말라고 난리부르스를 친다...내가 알아서
갈테니 좀 가자고하니 금방이라도 헤코지할것만 같은 스텐스를 취하는데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서 고군쪽으로 내려간다
송산리 입구(08:15)
진도군 군내면에 있는 송산리(松山里)는 소나무가 많아 솔뫼 또는 송산이라
하였으며, 입향조로 조씨가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본래 진도군 군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가리를
병합하여 송산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며, 서쪽에 있는 고두산(高頭山)
[252m]지맥의 동쪽에 해당되며, 동쪽에는 철천산[161m]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면소재지와 벽파로 연결된 도로와 고군면의 오일시리에서 만나는 국도 등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챙재에서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송산리 입구가 나오고
'태극기선양운동기념탑'이 서 있는 도로 주변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좌측으로 민가와 축사가 있지만 조금을 더 간다
산행을 시작하다(08:20)
마루금을 한참 벗어난 지점에서 묘지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선다
묘지 뒷쪽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산길이 보이고 마루금이
너무 멀어졌는지 이제는 스마트폰에 깔려있는 오룩스맵의
아가씨는 아예 안내 멘트도 없이 침묵중이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그쳤고 등로는 젖어있어 상당히 미끄럽지만
아쉬운대로 걸을만하다...늘 같은 생각이지만 산에만 접어들면
내가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든다...걷는다는 거...참좋다
창녕조씨 가족묘(08:26)
창녕조씨 가족묘로 이어지는 편안한 임도는 묘지를
지나면서 조금은 거칠어지나 아직은 걸을만하다
밀양박공 묘(08:31)
밀양박공 묘를 지나면서 임도 형태의 등로는 사라지고...
밀양박공 묘를 지나 등로가 없는 곳을 무작정 치고 올라서니
조금전 진고개 주유소 뒷쪽에서 올라오는 마루금과 만나는
155m봉에 도착한다
155m봉(08:37)
155m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철전산으로 향한다
마루금에 복귀하니 초반이긴 하지만 이번 구간도 역시 진도지맥의
잡목의 횡포는 산꾼의 기대에 부응하는 느낌이지만 첫 구간의
완벽한(?) 학습 효과의 탓인지 이런 건 개의치 않고 그냥 치고 나간다
비가 온 뒤의 날씨 탓이련가...산 속으로 스멀스멀 밀려오는
안개 때문에 진도땅의 멋진 仙景을 볼 수 있을라나 모르겠다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세등리(細登里)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진도군 군내면에 속한 세등리는 본래 진도군 군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이면의 유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세등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며 지명의 유래는 가는 등성이가
되므로 가는골재에서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고두산의 동쪽사면에 있으며, 남쪽에는 고군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철천산[161m]과 동쪽에는 선황산이 있으며, 세등리 마을은 참봉공의 증손
곽호례(郭好禮)[1541~1591]가 1560년대에 밀양박씨 박령의 사위가 되어
해남에서 건너와 살면서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비가 그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탓인지 겨울인데도 잎을 틔우기
시작하는 가시나무에 매달린 물방울...잔뜩 흐린 날씨에 초반부터
장갑이 젖어오기 시작하고 지난주와는 달리 조금 춥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철전산 정상에 도착한다
철전산(162.1m:08:45)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와 세등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아무런 전망도 없고
볼 품도 없는 산이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산으로
왜 철전산으로 부르는지에 대한 유래는 찾을길이 없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밀려오는 안개를 피해서 서둘러 길을 나선다
철전산 정상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세등리의 마을과 꽤나 큰 둔전저수지가 보인다
희미한 첫사랑의 추억을 찾아 가듯, 흐릿한 등로는 오랫동안
이런 길을 걸었던 感 하나로 용장성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한다
잠시후에 가야할 능선위에 있는 용장성의 등줄기 뒷쪽으로
상봉이라 부르는 봉우리 우측으로 가야할 마루금이 보인다
철전산에서 희미한 내리막길로 10분정도 내려서니 예전에
서낭당의 흔적인 듯한 돌무기가 있는 안부에 도착하는데
반바지님이란 분이 코팅지로 “성재”라 써놓았으며, 이곳이
서해랑길이라는 둘레길 시그널도 보인다
성재(95m:08:55)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서 고군면 도평리를 넘어가는 고개인데,
서해랑길이라는 트레킹 코스와 겹쳐지는 고개로 양 마을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주변에는 수령(樹齡)이 꽤 된 편백나무들이
보인다...이곳의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지만 추측을 해보면 이 고개
위에 용장성이란 산성이 있어서 “성(城) 아래에 있는 고개” 라는
뜻으로 붙혀진 이름은 아닌지...범여의 생각 中에서
성재에 있는 서해랑길 시그널
서해랑길은 서낭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를 넘어 도평리로
넘어가고 지맥길을 성재를 가로질러 용장성 방향으로 향한다
성재에서 올라서니 용장성으로 향하는 편안한 길이 나오는데
늘 거친길만 걸었던 맥꾼들은 이런 길이 나오면, 늘 긴장을 한다
남녘지방의 산이라 그런지 역시 다르다...푸르름이 참 좋다
그러면 그렇지...용장성으로 향하는 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비에젖은 등로는 생각보다 미끄럽다...조심스럽게 고도를 높혀간다
무명봉(09:02)
조금 힘들게 올라온 무명봉 이후부터는 등로가 무쟈게 좋다.
그래!...이런 맛도 있어야제...편안 길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인지 조금은 추운 느낌이나
산행을 하기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라서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262m봉 오르는 길에 멋진게 생긴 돌탑들이 많이 보인다
참으로 정성스럽게도 쌓았구나... 신라에 가서 석가탑을 만든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이 불국사 앞에서 쌓은 돌탑처럼...
이곳이 옛날에 백제땅이었으니 아사달의 후예답게 저 돌탑도
참으로 멋지구나...
262m오르는 길에서 만난 부처손...비가 온후라 그런지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등로에서 바라본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의 들녘
도평리(道平里)는 진도군 고군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전체적으로 구릉성
평지 지역에 해당하며, 마을 앞으로 작은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이루어지는
마을로 도론리와 평산리 일부를 병합하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따 도평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도평, 날근터마을 등이 있다... 도평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날근터마을은 전에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넓은 공터가 있는 262m봉 정상에 올라선다
262m봉(09:25)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무명봉인데
준.희 쌤께서 산패를 걸어 놓으셨다...아뭏든 감사합니다
잠시후에 내려설 용장성 너머로 보이는 상봉은 삼각뿔처럼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여야 할 두륜산을 비롯한 남해바다의 꼬마섬들은
비 온후의 펼쳐지는 안개에 갇혀 버렸다
이곳부터 가지고 온 똑딱이 카메라가 또다시 말썽을 부린다.
지난주에는 케논카메라가 쏙을 썩여서 오늘은 년식이 좀 됐지만
아쉬운대로 쓸만한 소니 알파 5000이란 카메라를 가져 왔는데
갑자기 작동이 멈추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스마트폰을 촬영을 한다
용장성 성곽(09:28)
262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3분만에 관리가 잘 되어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항몽유적지 가운데 하나인 용장성 성곽에 도착한다.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세등리와 고군면 벽파리·오류리·유교리 일대에 걸쳐 있으며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량해협과 접해 있고,
3개의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있으며,현재 성벽은 곶 지형에만 남아 있다.
용장성(龍藏城)은 1270년(고려 원종11)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 등이 몽고에 굴복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와 그 지지자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 온 (承和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 때 쌓은 성이 진도 용장성이다
용장성의 축성연대는 1270년(원종11) 이후이며 삼별초군은 기존의 사찰 건물을 개조하여
궁지로 삼고 그 외곽의 산에는 구간을 따라 석축과 토축으로 된 산성을 개축하여 그들의
근거지로 이용하였는데, 원종 12년(1271) 5월 고려 정부는 김방경 등을 내세워 몽고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도 용장성을 공격하였고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갔다...제주도에서는 1273년(원종14) 4월까지 지탱하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소멸하였다
* 승화후 온 (承和侯 溫: ? ~ 1271)은 고려 현종(顯宗:8대 임금) 영녕공 준(永寧公綧)의 맏형으로
1270년(원종 11) 고려가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이를 반대하던
삼별초(三別抄)의 배중손(裵仲孫) ·노영희(盧永禧) 등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을 따라 강화도를 버리고 전라도 진도(珍島)로 옮겨 항전하였으나, 다음해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대패하자 아들 환(桓)과 함께 원(元)나라 장수 홍다구(洪茶丘)에게 살해되었다.
그 당시 배중손이 삼별초를 이끌고 저항했던 마지막 보루였던 용장성
예나 지금이나 국가 힘이없으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게 힘없는 民草였는데
요즘에도 지도자라는 자들은 1,000년이 지났는데도 민초를 위한다는 지도자는
눈을 씻고봐도 없다...언젠가 歌皇 나훈아가 공연을 하면서 한 얘기가 생각난다
저거들끼리 맨날 밥그릇 싸움하느라 치고 박고하는 뉴스를 보면 스트레스 받고
짜증나는데, 국회의원 뭐라 할 일 아입니다... 누가 찍었나? 우리가 찍었으니
가슴에 손을 올리고 반성합시다”면서도 “여러분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대통령도 뽑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잘 나셨으니 기죽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찾으이소”라고 조언했다...제발 다가오는 4월 선거에는 인간다운 인물로
싹 바꿔 저 인간들 정신 좀 차리게 하입시다
힘없는 백성들의 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용장성
아무것도 모른채 힘이 없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삼별초의
전투에 투입되어 生을 마감한 민초들의 哀歡이 아련하게 밀려온다
* 삼별초(三別抄)는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로 1219년(고종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으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용장성 끄트머리에서 용장성은 좌측으로 내려가고 맥길은
우측의 성 아래로 내려서서 상봉으로 향하는데 직진의
끄트머리에 있는 선황산(230.9m)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선황산...「옥주지」에 따르면 지금의 용장이 있는데
고진도에 따라 선황신당을 건립하면서 산성을 쌓아 변란이 있으면 입보처로 삼았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이에 주목하여 진도지역의 향토사가들은 선황산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굴조사 결과 선황산에는 제사 유적과 제사에 사용될
제물을 준비하는 용도나 장대로 추정되는 건물지만 확인되었으며, 2~3m 높이의 건물지
기단이 흙으로 덮어있었기 때문에 토성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 옥주지(沃州誌)는 1761년(영조 37) 김몽규(金夢奎)가 편찬한 전라도 진도군의 사찬읍지
(私撰邑誌:저자가 관의 도움이나 협의 없이 순수한 개인적 기록물) 이며, 진도의 가장
상세한 읍지로 또한, 현전하는 진도군의 가장 오래된 개별 읍지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역사적인 사실과 고적·산천·시문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군내 여러 지역의 내력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용장성 끝(09:35)
용장성 담벼락을 내려와서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안부(09:38)
용장성 근처에 있는 등로라서 그런지 등로는 아주 좋다.
용장성을 내려와서 9분만에 삼돌이님 걸어둔 산패가 있는
상봉 정상에 정상에 도착한다
상봉(上峰:266.4m:09:44)
진도군 군내면 도평리와 고군면 오산리 경계에 있는 상봉...
맥꾼이 아니면 잘 오지 않을듯 한 산으로 삼돌이님의 산패만
아니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상봉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서면서 출일봉을 향한 급경사로 내려선다
조망바위(09:46)
가야할 능선 끄트머리가 출일봉이고 그 너머에 있는 진도의
최고봉인 점찰산은 속살을 드러내기 싫은듯 구름속에 숨어 버렸다
조망바위를 내려서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산속으로
스며드는 시나브로 현상을 겪으면서 호젓하게 길을 걸어간다
조망바위에 바라본 오산제(五山堤)와 고군면 오산리의 들녘
진도군 고군면에 속해있는 오산리(五山里)는 오산리는 외딴 산이
있으므로 오미 또는 오산이라 하였는데 또 다른 유래로 오산(五山)은
원래 오산(烏山)이었으나 까마귀를 흉조라 하여 오(烏)를 오(五)로
바꾸었다는 설도 전한다.
고군면에서 가장 큰 평야를 끼고 발달한 지역으로 첨찰산 동동북 산록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출석봉과의 안부인 오목재를 분수계로 하여 고군천이
흐르고 있는데, 고군천은 오산저수지에서 잠시 머물다 오산리 앞바다로
흘러나가는데, 현재 고군천 하류는 황조리와 마산리를 잇는 방조제로 간척되어 있다
이른 아침에 비하여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산줄기는
안개속에서 헤메고 있다...비에젖은 낙엽을 밟는 소리는
별 감흥이 없다
무명봉(09:54)
또 다시 이어지는 내리막길...생각보다 등로는 뚜렸하고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안부(09:58)
출일봉을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이 시작되고...
넓은 공터에 삼각점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출일봉 정상에 도착한다
출일봉(出日峰:228.6m:10:12)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와 고성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또다른 지명으로
출석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산 아래의 안부인 오목재를 분수계로 하여
고군천(古郡川)이 흘러 오산제를 거쳐 남해바다로 흘러드는데, 일출봉도
아닌 출일봉이라는데 진도군의 자료에서는 유래를 찾을 길이 없다
출일봉 정상 삼각점(△진도 408 / 1986재설)
출일봉을 한번 뒤돌아보고...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다가...
반가운 권작가님의 흔적을 만나는데 언제 지나간 겨?
요즘은 사업이 바쁜지 아니면 선배를 잃어 버렸는지
한번도 안 찾아주니 얼굴을 잊어 버릴것 같다.
시간되면 언제 쐬주 한잔 합시다
급경사로 내려서면서 갑자기 사라진 등로...
악명높은 진도지맥의 잡목이 오늘 처음으로 꼬라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희미한 등로를 찾아서 내려서다가 보니 너덜겅이 나오고
트랙상의 마루금에서 많이 벗어나 버렸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
등로에서 꽤나 많이 벗어난 지점으로 내려와서 오목재로 향한다
출일봉에서 저곳 능선으로 내려와야 마루금인데...
오목재(65m:10:35)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와 고성리 경계지점에 있는 고개로 18번 국도
2차선 도로가 통과하며 이곳 역시 오목재에 대한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오목재에서 오산리 방향으로 내려서다가 진길성당쪽으로 향한다
대단하신 반바지님...고개마다 코팅지를 붙혀놓아 감사합니다
고즈녁한 돌담길을 따라서 진길성당 방향으로 향하는데
민가 담벼락에 있는 동백꽃이 흐드러지기 피어있다.
♬붉은댕기 다홍치마 동백꽃따서 머리에
꽂고 쌍고동 소리만 기다린다네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진도라 아가씨 생성화났네
일엽편주 달빛싣고 정처도없이
떠나는 배야 이제나 가면 어느때 오나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진도라 아가씨 몸무림치네♪
나훈아 / 진도아리랑 가사중에서
돌담길을 따라서 가다가 진길성당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성당 주차장에는 미사를
보러온 차량들이 많이 보인다
진도진길성당(10:40)
마을 도로를 따라서 편하게 걷지마는 이곳 진도의 산줄기는
.대파밭 뒷쪽으로 보이는 저 능선이 맥길이다
언제 험한길이 나올지 몰라서 바짝 긴장하면서 걷는다
삼거리(10:47~10:52)
좌측으로는 진도 기상대로 가는 길인데 이곳이 서해랑길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잠시 베낭을 내려놓고, 두유 하나에 초콜렛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5분정도 쉬었다가 길을 나서는데 등로 입구 우측에는
장흥임씨 재각(齋閣: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이
보인다
서해랑길이란
전남 해남부터 인천 강화까지 서해안에 인접한 31개 기초자치단체의 109개
걷기길 약 1800km 구간을 연결한 국내 최장거리 걷기 여행길을 말한다.
서해랑 이정표 우측에는 장흥임씨 재각이 보이고 이곳부터 첨찰산으로
향하는 임도까지는 빡센 오르막이라 바짝 긴장을 하면서 걷는다
급경사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하고 산속으로 들어서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너무 쫄지 말라고 격려하는듯 바람에 흔들린다
묘지에서 뒤돌아본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古城里)의 모습
본래 진도군 고이면의 지역으로서 고려 때 진도읍성이 있으므로 고성 또는 고성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리와 모산리, 평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성리라 해서
고군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행정리 오일시, 고성, 신리를 합쳐 법정리 고성리로 해서
고군면에 편입되었다
여러 기의 고인돌로 보아 신석기 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마을의 입향조는 장흥임씨로 이들이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쪽의 첨찰산(尖察山, 485m)의 북쪽 산줄기인 진도 용장성의 상봉 줄기가
남서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의하여 둘러싸인 분지 형태이고 북서쪽으로 터진 곳으로
진도읍과 연결되며 동쪽으로 오목재를 넘어 오산리와 연결되고 있다.
장흥임공 묘(10:55)
후손들이 돌보지 않은 장흥 임공의 묘지를 지난다.
이 모습은 조상에 대한 도리가 아닌듯 싶다...우리
부모님 묘소도 저러는 건 아닌지, 고향을 한번 가봐야겠다
마루금은 대밭 사이로 이어지고...
예전의 묘지들이 많이 보이는데 지금은 대밭으로 변해버려서 보기가 영 그렇다
대밭을 지나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급경사의 오르막길...비가 온 후라 그런지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스틱에 바짝 힘을 주어 올라서니 봉우리가 나온다
165.4m봉(11:08)
165.4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안부(11:10)
에공 !...저승가는 길에도 설움을 받는구나.
어떤 망자는 자식 잘 만나 구중궁궐같은 호화묘지에서
편히 잠들건만, 이 분은 前生에 무슨 業을 지었길래
죽어서도 저리 薄福할까...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은 오르막길에 누군가가 ‘등산로’라는
팻말을 붙혀놨지만 전혀 도움이 안되는구나
내가 길을 만들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봉(11:22)
암봉에서 바라본 고군면 오산리의 모습과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용장성, 상봉, 출입봉 능선이 보인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무명봉(11:34)
장흥임씨 재각에서 이곳까지 빡세게 올라왔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들었는데 오후가 되어가는
싯점에 날씨는 자꾸만 꾸무리해지고, 기온은 그리
낮지 않으나 잔뜩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대니
상당히 추운 느낌이다
날씨가 추우니 몸뚱아리도 움추려드는 느낌이다.
오늘 처럼 잔뜩 흐리고 습한날엔 범여를 몸뚱아리는
상당히 고통스럽다...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점찰산으로 향한다
334.4m봉(11:41)
비에젖은 암릉 사이로 고도를 조금씩
높혀가는데 자꾸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된다
안부(11:43)
마루금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등로 주변에는
황칠나무들이 조림되어 있다...아마도 수종변경을
하는중인 모양이다
황칠나무는 오리발 모양처럼 생긴 잎사귀를 가졌으며 병을 가져가는
만병통치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나무인삼’으로 불리며,
숙취해소, 피로회복, 간세포보호, 변비 치료에 좋으며, 이 밖에도 항당뇨,
항산화작용, 면역력 증진 등의 효과도 있다고 한다.
황칠나무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 ‘보장왕 4년(645) 조’에
등장하는데 이해 봄, 당 태종은 명장 이세적을 선봉으로 삼아 직접 요동성을 공격하여
12일 만에 함락시킨다... 이 작전에 “백제는 금 옻칠한 갑옷(金髹鎧)을 바치고 군사를 파견했다.
당 태종이 이세적과 만날 때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금 옻칠은
바로 황칠을 말하며 실증자료도 있다... 2007년 경주 황남동 통일신라시대 유적지에서 나온
항아리 밑바닥의 유기물 덩어리를 분석하였더니 황칠이었다는 것이다.
361.1m봉(11:47)
암봉(11:50)
안부 능선에서 올라서니 임도가 나온다
⊃자형 임도(11:57)
임도에 올라서니 동쪽에 우뚝솟은 죽제산(424m)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임도 아래에 베낭을 숨겨놓고 진도의 최고봉인 점찰산으로 향한다
비록 마루금에 0.9km정도 벗어난 지점에 있긴 하지만,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점찰산을 갔다오지 않으면 후회를 할 듯 싶어서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길을 나선다
넓은 공터를 지나자마자...
갈림길(12:00)
진도 기상대로 향하는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우측 계단으로 향한다
넓적바위 갈림길(12:01)
우측 아랫쪽 0.5km 지점에 넓적바위가 있다고 하나 그냥 점찰산으로 향한다
어제 내린비로 인해 등로는 촉촉히 젖어있고 누군가가
범여가 온다고 기별을 했는지 레드 카펫은 아니지만
야자매트로 치장해놔서 영화 ‘기생충’을 감독한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상 감독상’을 타러 무대에 오를때 레드카펫을
밟았던 기분을 느끼며 점찰산으로 향한다
오르막길에는 멋진 데크목 계단을 만들어 놓았고...
첫번째 데크목 계단을 통과하니 벌거벗은 裸木들이 도열하며
범여를 반기는 듯 하니 괜스레 기분이 UP되는 기분이다.
아쉽다면 진도의 최고봉을 가는 길이라 차가운 强風이
무사 통과시키지는 않을 모양이다
2번째 데크목 계단을 통과한다
데크목 능선에 올라서니 잔뜩 흐린 날씨에 옅은 안개가
조금 있긴 하지만 그리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데크목
정상 위에서 남서쪽을 바라보니 진도읍내가 흐릿하게
보인다
점찰산을 찍고 되돌아가서 가야할 수리봉이 소나무 뒷쪽으로 보이고
계곡 아래 끄트머리에 보이는 사천저수지는 꽤나 크게 보이고, 진도
지방은 섬 지역이라 그런지 마을마다 크고 작은 저수지 하나씩은
있는듯한 느낌이다
진도군 의신면에 소재한 사천리에는 古刹 쌍계사와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大家)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 선생의 운림산방이 있고, 진도 다시래기(전라남도
진도의 상가에서 상주와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고 위로하기 위하여 행하는 놀이)가
전해 내려오는 마을이다
* 雲林山房(운림산방)은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
선생이 말년에 그림을 그렸던 화실로 첨 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2년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복원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선생의 본관은 양천,
자는 마힐, 호는 소치이며 초명(初名)은 허유이다. 20대에 해남 대둔산(현 대흥사)의 초의 선사
(草衣禪師)에게 학문을 익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문화에서 서화를 배워 일세를 풍미(風靡)
하는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으며 시(詩) · 서(書) · 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그의 작품은 강한 느낌을 주는 갈필(마른 붓질) 산수가 주를 이르지만 노송, 노매, 모란, 괴석 등
문인화 또한 일품이다.
선생은 헌종(憲宗)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갈아 왕을 상징하는 화중지왕(花中之王)
이라는 모란을 그려 바쳤고, 왕실 소장의 고서화(古書畵)를 평(評)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았으며, 대표작으로 59세(1866년)에 운림산방을 그린 서면 산수도와 스승 김정희의 초상,
묵모란, 파초 등이 있으며, 꿈처럼 지나간 세월을 기록한 몽연록(夢緣錄)이 수록된 소치실록
(小痴實錄)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보배 섬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의 화백이 2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9인의 화가를
배출하였고, 선생의 화혼은 후손들을 통하여 지금도 찬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살아있는 미술관”이다.
437.2m봉(12:10)
진도의 최고봉인 점찰산 동북쪽에 자리한 죽제산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리운 나의 친구야 / 용혜원
친구야!
지금 이 곳이 네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하고픈 말은 가슴이 벅차도록
터져나오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구나
너와 난
언제나 마음이 통했지
시간을 멈춘 듯 이야기해도
시간을 잊어버린 듯 이야기해도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친구야!
그때 우리들의 시절엔
마음껏 나눌 이야기가
많고도 많았는데
지금은 하고픈 이야기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구나
나이 탓일까
세월 탓일까
우리들의 졸업앨범엔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그때 그 모습인데 말이야
지금은 어디 살고 있나
나의 친구야 그리운 나의 친구야
조망바위(12:13)
잠시후에 오를 점찰산과 그 뒷쪽에 위치한 진도기상대가 있는
봉우리는 갑자기 안개에 휩싸인다...비록 육지에 있는 산보다야
고도가 낮다고는 하지만 바닷가에 있기에 해수면에서 시작되는
고도를 따지니 그리만만하게 볼 산은 아니다...그리고 명색이
진도의 최고봉인데 그리쉽게 얼굴을 내민다는 건 자존심 상하지...
名山치고 정상을 쉽게 허락하는 산 봤어...
안부(12:14)
진도의 최고봉이자 동석산과 함께 진도의 명산에 속하는
점찰산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는데
맥꾼 범여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런 길이 영 어색하다
암봉(12:16)
마음을 비우고 점찰산으로 향하는 길에 동백꽃이 반겨준다
산길에 취해 걷다가 나무 밑에 落花된 동백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보다
權不十年이요, 花無十日紅이라...
떨어진 저 동백꽃을 보면서 며칠전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큰 스님께서
모 일간지에 실린 인터뷰 내용이 膾炙된다.
“요즘 정치가 시끄러운 건 정치인들이 빈 깡통처럼 내공이 없기
때문이다...내공이 없는 자들이 꼭 큰소리치고 싸우면 자기 밥그릇만
챙기면서, 자기것은 하나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내것을
양보한다고해서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다는 걸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해준다”고 하셨는데 정작 그 뜻을 아는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떨어진 저 동백꽃에게 물어봐도 대답대신 빙그레 웃기만 한다.
落花를 바라보면서 올라서니 점찰산이 정상을 허락해 줄 모양이다
드디어 진도의 최고봉인 점찰산 정상에 도착한다
봉수대와 이정표 이동통신탑이 보이는 정상에는
아직도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다
점찰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를 올라간다...점찰산 봉수는 자연적인 바위산 위에
원형의 연대(煙臺:조선 시대에 해륙 변경의 제일선에 봉화를 올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단)를 쌓아 만들었으며, 연대는 대체로 30×20cm 크기의 자연석으로
‘난층쌓기’ 방식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규모는 남북 길이 약 9m, 동서 길이 8.5m,
둘레 30.3m 정도로 일부 원형이 남아있어 전라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향토
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봉수이다
점찰산 정상 봉수대의 모습
『대동지지』(진도)에 "동으로 20리에 있다"라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점찰산(占察山)은
진도군의 동쪽 20리에 있다"는 기록과 "점찰산(占察山) 봉수가 남쪽으로 여귀산에 응하고"라는
기사내용으로 보아 봉수로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동역도』에도 점찰산(占察山)으로 나오지만, 『호남지도』와 『1872년지방지도』(진도)에는
첨찰산(尖察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의하면 점찰산봉수는
동쪽의 해남 관두산 봉수, 남쪽으로는 여귀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해남 일성산 봉수에 전달하였다.
점찰산 봉수 안내판
봉수대를 내려와서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정상석 뒷면에는
“珍島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적혀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글귀이다...아!...맞다...지리산 천왕봉 정상석 글귀와 같구나
점찰산(尖察山:482.0m:12:22~27)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와 향동리, 의신면 사천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진도군의 최고봉이자 진산으로 정상에는 봉수대와 이동통신탑, 정상석,
이정표, 2등 삼각점이 있고 주위의 전망이 전부 다 조망되는 곳이나 오늘은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짙은 안개로 모든게 흐리기만 하여 많이 아쉽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서 봉화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백제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山城)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설치한
봉수대의 유적이 있으며 정상 맞은편의 봉우리에는 정상부에 진도 기상대가
있으며, 산밑에는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쌍계사와 천연기념물인 상록수림대가
있고, 쌍계사 바로 옆에는 소치 허유의 운림산방과 기념관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산에 오르는 길목에는 진도아리랑 비가 세워져 있으며, 산 서쪽 아래 의신면 사천리는
다시래기로 유명한 민속 마을이며, 사천이 유입되는 사천저수지는 진도에서
가장 큰 수원지며, 가장 아름다운 산악미와 다양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어 계곡을
중심으로 많은 마을들이 입지하고 있다.
점찰(尖察)이란 용어는 신라 시대때,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하여 많은 선악의 종류를 적은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던져 점(占)을
쳐서 과거에 지은 잘못을 관찰하고 참회하는 모임에서 나왔으며 600년
(진평왕 22)에 수(隋)나라에서 귀국한 원광(圓光, ?-630)이 처음으로 개최하고,
경덕왕(742-765) 때의 진표율사(眞表律士)는 점찰법(占察法)에 계율과 미륵
신앙을 결합시켜 널리 유포였다는 내용인데 한문표기는 이곳의 산 이름은
점찰(尖察)이고 佛家에서 사용하는 점찰(占察)이라했는데 ...
이곳 점찰산의 명칭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봉화대가 있어 봉화산으로도 불렸다고
하며, 한자로는 뾰족할 첨(尖), 살필 찰(察)을 써서 첨찰산이라고 한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주위를 조망하기에 적합하며, 뾰죽한 산 정상에서 적이나 지세를 살피기
적합하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증샷...스마트폰으로 인증샷을 남겼는데
작동법이 서툴러 영 이상하게 보인다
갑자기 밀려온 짙은 안개로 맞은편의 죽제산과 직진 능선에
있는 진도 기상대가 있는 봉우리는 갑자기 오리무중이다.
높은 산치고 자기의 속살을 쉽게 드러내는 산이 있었던가
점찰산 정상 삼각점(△진도21 / 1990재설)
점찰산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돌아가는 길에 446m봉에서 바라본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와 사천제(斜川堤) 의 모습
의신면에 속해있는 사천리(斜川里)의 지명유래는 내가 비껴 흐르므로 비끼내,
빗내, 사천이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사천, 가래골, 방죽안, 사상리, 절골마을 등이 있다. 사천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사천리의 그것과 동일하며, 비끼내라고도 불리운다.
가래골마을은 가래봉 밑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방죽안마을은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사상리마을은 사천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절골마을은 쌍계사가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나온 점찰산은 안개에 완전히 포위(?)되어 흔적조차도 안 보인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날씨에 행여 비가 쏟아지지나 않을까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부지런히 걸어서 마루금에 복귀한다
⊃자형 임도(12:50)
임도 아래에 숨겨둔 베낭을 메고 다시 마루금을 이어간다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하나 마루금과 그냥
나란히 가기에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간다
그래!...이런맛도 있어야제
안부(12:53)
마루금과 임도가 같이 가는데 좌측으로 휘어져서 내려간다
비 개인 임도는 촉촉히 젖어있고 그리 춥지 않은 날씨건만
성질못된 시어머니의 성깔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되는 날씨에 몸뚱아리는 움추려드는데, 이럴때는 따뜻한
라면국물에 이스리 한잔 생각이 간절하건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발걸음이 느려지니 착한 心性을 가지고 늘
선배를 배려해주면서 걸어주던 수헌 아우는 내 곁을 떠나고,
강철 체력에 늘 내 베낭까지 짊어지고 나를 따라 다녔던
진권아우는 어느날 갑자기 잠수해버려 연락도 없으니...
나이먹고 체력 떨어지니 왜 이리 서러운지 모르겠다
오늘은 평소에 나의 동반자 역할을 해주는 라디오도 충전이
안된 것을 가져오는 바람에, 이미자, 장윤정, 영탁이, 나훈아같은
기쁨조들의 노랫소리조차 끊겨 버렸으니 더욱 더 외롭다
그래!... 엄니, 배속에서 이 세상 나올때도 혼자왔고, 어차피
生을 마감하고 저승길 갈때도 동반자없이 가야하니, 미리
예습하는 셈 치자...내가 호강하면서 걸었던 산길이 몇번이나
됐던가...어차피 내가 택한길 힘들고 외로워도 가야지 우짜겠노...
임도 삼거리(13:02)
시멘트로 포장된 역 y자 임도가 나오는데 우측 아래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군내면 월가리로 내려가는 임도이다
임도 좌측 아래로는 진도 체류형 등산로가 이어지는
의신면 사천리로 내려가는 길인데, 사천리는 진도다시래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이라 언젠가는 꼭 한번 가고싶은 마을이다
임도(13:03)
⊃자형 임도에서 13분정도 편하게 왔다가 임도를 버리고
수리봉으로 이어지는 우측의 숲속으로 들어서는데 가야할
수리봉이 0.5km 지점에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암봉(13:06)
산길로 들어섰지만 등로는 제도권 등로인지 고속도로 수준이고
산 아래에서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寒氣를 느낄 정도이지만
등로에서 올라오는 상큼하고 풋풋한 흙냄새가 산꾼의 코끝을
자극한다
안부(13:13)
너럭바위(13:16)
잡풀이 무성한 완만한 등로를 오르다가 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지나온 점찰산과 진도기상대가 있는 봉우리는 구름속에
휩싸였고, 먹구름으로 변해가는 날씨가 아무래도 심상찮다
기상청의 예보로는 오늘의 진도 날씨는 흐림으로만 나왔고
비는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하기사 구라청의 예보를 믿을수가
있어야제...지금의 내 처지로는 비가 오더라도 맞아야지, 뾰족한
수가 없다
수리봉 바로 직전에 동남쪽을 바라보니 진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며
진도의 水源池 역할을 하는 사천제1저수지가 마치 바다처럼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진도지맥으로 이어지는 여귀산으로 보인다
수리봉(388.5m:13:20)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와 의신면 사천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준.희 쌤의 산패만 없었다면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은 산이다
오늘 걷는 지도지맥상에 있는 산들은 한결같이 명산에 들만큼
멋진 산이건만 진도군의 자료에는 지명에 대한 설명이 있는
자료는 눈을 씻고봐도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이곳 수리봉 역시 진도군 자료에서 찾을 길이 없으나, 이곳도
전국에 數도 없이 많은 수리봉과 마찬가지로 독수리가 어쩌구
저쩌구하는 부류의 내용과 같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수리봉에서 직진하여 암릉끝에 선다
의신면 사천리와 사천제...그 너머로 보이는 여귀산
다음구간에 저 여귀산을 넘을수 있으라나...
수리봉 끄트머리에서 바라본 진도읍의 모습
진도군 일대의 해역은 대륙붕 지역이고,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어족이 풍부하며, 해수 오염이 없어 해조류 양식에 유리하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지만 주민의 일부가 반농반어(反農反漁)에 종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주민은 농업을 전업으로 하였으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
참깨·고구마를 비롯해 마늘·대파·배추 등 각종 채소류가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구기자·돌미역·돌김·멸치·유자와 진도홍주가 있고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진도는 예로부터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이름 높았으며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을 비롯해 남도지방에서 불리는 창이나 민요 등 어디를 가나 부녀자들의
노래 가락을 들을 수 있다... 진도지방에서 불리는 민요는 김매기 등 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농업요가 대부분이고, 닻배노래 등 고기를 잡으면서 부르는 어업요나 유희요
등도 많으며, 또한 조선 후기 남종 문인화의 대표적 화가인 소치 허유~미산 허형~의재
허백련~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화가와, 서예가 소전 손재형 등이 진도 출신이다.
매년 4~5월 신비한 바닷길이 열리는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모도의 간조육계도에서
영등제가 열린다.
수리봉 끄트머리에서 암릉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서는 암릉은 비에젖어 있어 생각보다 까칠한데 누군가가
새끼손가락만한 로프를 설치해놓아 조금은 편하게 내려선다
수리봉 아래로 내려서니 제도권 등로처럼 생각보다 등로는 좋다
안부(13:29)
등로는 희미하지만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을 듯 하다...완만한 등로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좌측으로 꺽어져 안부로 내려서는데 빛바랜 신경수쌤의 흔적을 만난다.
아마도 기.지맥이 아닌 분맥, 단맥 산행에서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산꾼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시다.
무명봉(13:32)
꽈배기의 모습으로 보이는 저 나무...멋있게 보이지만
정작 저 나무는 줄기 식물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을까.
바라보는 산꾼 범여는 惻隱之心이 앞선다
암봉(13:36)
암봉에서 내려서니 우측에서 내려오는 넓은 임도를 만나고...
임도(13:37)
등로 좌측에는 점찰산에서 내려오다가 헤어진 도로를 다시
만나지만 임도로 내려서지 않고 우측의 숲길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안부(13:42)
간간히 만나는 이정표를 보면 이 길도
진도군에서 조성한 체류형 등산로인 모양이다
무명봉(13:47)
당겨본 진도읍내의 모습
철마산(303.9m), 북산(299.9m), 망적산(284.1m)이 진도읍을
외호하고 있고 산 아랫쪽에 보이는 저수지가 월가제이다
갑자기 만나는 급경사 내리막길
비에젖은 암릉구간이 상당히 미끄러워 조심스레 내려간다
힘들게 너덜겅을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를 다시 만난다
오늘 구간의 진도의 산줄기에는 임도가 거미줄처럼 처져있다
시멘트 임도를 따라서 100여m를 진행한 다음에...
국가지점번호 나-라 8093 0946 팻말이 있는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산으로 들어선다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평평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254m봉(13:58)
인생살이에는 노후가 편안해야 하는데 오늘은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산길이다...오늘 오전에는 너무 힘들게 걸었는데
점찰산을 지나면서 부터는 너무 편하게 산길을 걷는다...내 남은 生도
이랬으면 좋겠다.
암봉에서 내려서자마자 임도가 나온다
∩자형 임도(14:01)
∩자형 임도를 가로질러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동백 /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임도를 지나 400m 정도 걸으니 운림산림욕장과
진도개 테마파크 갈림길인 임도를 금새 만난다
임도(14:08)
우측으로는 진도개 테마파크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운림산림욕장으로 가는 길인데 우측은 진도읍 동외리
좌측은 의신면 사천리로 이어지며, 마루금은 임도를
가로질러 삼별초등산로 종점,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향한다
임도를 가로질러 올라서니 좋은 길은 계속 이어지고...
182m봉(14:20)
182m봉 정상의 이정표
마루금은 이곳에서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향한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멋진 팔각정과 체육시설과 앙증맞은 공원이 있고
진도읍과 가까운 거리라서 그런지 간간히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오늘 산행을 하면서 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우측으로는 진도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진도읍내
성죽재(165m:14:25)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와 의신면 사천리를 잇는 시멘트 임도가 있는데
진도공설운동장에서 운림산림욕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팔각정 쉼터와 체육시설, 이정표가 있으며, 고개 윗쪽에는 반바지님이
성죽재(165m)라는 코팅지를 붙혀놨다...지명은 우측의 공설운동장
방향에 있는 동외리에 성죽골이 있어서 붙힌 모양인데, 진도읍의
어느 자료에도 성죽골에 대한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늦은 오후에다
조금 흘린 땀이 식으면서 갑자기 惡寒이 찾아오는 것
같아 빠른 속도로 능선으로 올라간다
감사합니다
빡세게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서니...
남도지방 산에서 흔히 볼 수있는 동백나무 군락이 산꾼을 반긴다.
그리고 얼마후에 226.3m봉에 올라선다
226.6m봉(14:38)
조금 잠잠하던 바람은 다시 강하게 불어대고, 하늘은 자꾸만
어두워지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226.6m봉에서 우측으로 확 꺽어지면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안부(14:42)
안부의 우측에는 성터는 아닌것 같고, 예전의 집터였는지
돌담의 어느정도 살아있는데 등로는 겨울비에 젖어있다
성죽재를 벗어나면서 제도권을 벗어난 등로인데
그래도 등로관리가 잘되어 있는 봉우리로 올라선다
215.9m봉(14:45)
홀로 산을 걷다보면 간간히 無我之境에 빠질때가 있는데
나홀로 걷는 독립군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황홀한 시간이다
황홀하고 짜릿한 이 기분...느껴보지 않은 산꾼은 모르리라...
안부(14:49)
내려왔으니 올라가야 하는건 당연하다.
오르내림의 연속은 산행에 대한 不變의 원칙이 아닌가...
무명봉(14:58)
가야할 마루금을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서울가는 버스시간 때문에 저기까지 가기는
힘이들 것 같다
내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지나온 수리봉이 범여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래!...잘 있어라...저질 체력이라 來生에
너를 다시 보러 온다는 보장이 없구나...
등로는 좌측으로 이어지고...
안부(15:02)
등로에서 만난 철지난 방귀버섯
진도읍내는 우측에 있는데 마루금의 등로는
또 다시 좌측으로 향하니 조금은 헷갈리는 느낌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트랙을 확인하니 잘 가고 있다
그러다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잡목의 강한 저항을 받으면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146.0m봉(15:10)
맥꾼들이 잘 찾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진도지맥 능선에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로 반바지님이 ‘진도지맥 양미굴 146m’ 라는
코팅지를 붙혀놨다...양미굴이란 지명도 알 길이 없다
146.0m봉 정상에서 90도 좌측으로 꺽어지니 다시
맥길의 잡목들이 꼬라지를 부리기 시작하는데,이리
저리 헤매면서 생채기가 난다...결국 망개나무 줄기에
걸려 장갑을 끼지 않은 오른손 손등이 할켜서 피를 본다
잡목의 강력한 저항에 한참을 버벅거리면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등로의 안부에 도착한다
안부(15:12)
안부에서 올라서니 마루금 능선에 벌목한 폐목들을
쌓아 놓아서 우측 벌목지를 따라서 올라간다
183.4m봉(15:15)
역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진도지맥길답다.
우짠지 점찰산을 지나면서 좀 편하게 걸었는데
그 사이에 맘이 변해서 꼬라지가 놨는지
지독한 잡목지대에 늦은 말년에 개고생을
하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188.4m봉 오르는 길에 客死한 개 한마리를 만난다.
風餐露宿을 하다가 이리 되었는가...다음 生에는
개가 아닌 천상에 태어나서 부디 편한 삶을 살거라
너의 왕생극락을 발원한다
188.4m봉(15:28)
아무래도 오늘 산행은 이 봉우리 아래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산행을 끝내야 할 듯 싶다...그러면 이곳이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가 되는 셈이다
188.4m봉에서 길이 없는 급경사를 치고 내려서니...
공동묘지는 아닌것 같은데 묘지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묘지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면서 내려서니...
절개지로 내려서니 의신면에서 진도읍으로 이어지는
왕온로(도로명 주소)에 GS칼텍스 주유소가 있는
왕무덤재로 내려가는 급경사로 미끄러지듯 내려선다
왕무덤재(90m:15:35)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와 진도읍 남동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진도읍에서 약4km정도
떨어져 있으며, 정상에는 주유소와 요양병원, 모텔 등이 시설이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으로 통하고, 금갑만호진이나 의신면
소재지인 돈지(敦地)로 갈 수 있으며, 회동 신비의 바닷길로 연결된다
『조선지지자료』에 왕치(王峙)로 기재된다. 부기에 "고려 원종 11년(1270)에 왕온(王溫)의
분묘가 영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호남지도』에 '용장왕온구기(龍藏王溫舊基)'
라는 표기에서 그 왕무덤재를 확인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후기 삼별초의 난 때 영영공이 아들들에게 자신의 친형인 왕온을
구해오도록 했는데 영영공은 자신의 친형이 삼별초의 인질로 잡혀가 타의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왕온은 삼별초가 몽골 및 고려 연합군과 항전하면서 이 고갯길을
넘어 퇴각하는 과정에서 홍다구(洪茶丘:1244 ~1291:몽골명 찰구이(察球爾)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 고갯길 동쪽 기슭에 그의 묘가 있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왕무덤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 왕온(王溫)은 고려 후기의 왕족으로 삼별초에 의해 진도에서 왕으로 추대된 인물로
고려 현종의 8대손으로 청화후 왕경(王璟)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 왕서·왕염(王剡)·
왕정(王珽)이 있다... 아들은 왕환(王桓)있고, 왕춘(王瑃)·왕희(王禧)·왕기(王祺)가 숙부이다.
승화후(承化侯)에 봉해졌다.
1270년(원종 11) 고려와 몽고가 강화하기로 하고 왕실이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를 반대하던 삼별초의 배중손(裵仲孫)·노영희(盧永禧) 등이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선포하였다... 왕온이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1271년(원종 12) 고려·몽고의 연합군에게
삼별초가 패한 뒤 몽고군 지휘관 홍다구(洪茶丘)에게 아들 왕환(王桓)과 함께 살해되었다.
* 홍다구(洪茶丘:1244 ~1291)는 고려시대에 원나라에 귀화한 무장(武將)이다
앙무덤재에 도착하여 베낭을 정리하고, 주유소에 들려 쥔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후, 옷을 갈아 입는다... 산에서 먹은것이 없다보니
허기가 몰려오고, 주유소 옆에 쪼그려 앉아 초코파이 하나에 두유로 허기를
면한 후에 주유소 직원에게 진도가는 교통편을 물어보려고 하는 차에 의신
방향에서 빈 택시가 넘어 오기에 얼른 손을 들어 택시를 타고 진도로 향한다
왕무덤재에서 진도 터미널까지 택시로 7분도 안 걸리며, 요금은 6.000원이다
진도 터미널(16:14)
택시에서 내려 진도터미널로 들어서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늘 산행을 왕무덤재에서 종료한게 어쩌면 신의 한수였다.
다른 산꾼들은 대체로 분기점에서 왕무덤재까지 한방에 주파하거나
그 너머까지 갔는데, 느림보 범여는 2번에 걸쳐서 이곳까지 왔지만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다른 산꾼들은 어둠속에 산행을 시작하여 죽기
살기로 했지만, 범여는 밝은 시간대에 山川景槪를 즐기면서 산행을 했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 듯 싶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표를 사는데 16시 20분에 목포로 출발하는 버스가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재빨리 버스에 오른다...진도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침에 내렸던
녹진과 우수영 정류장에 들린 다음에 논스톱으로 목포로 향하는데 1시간 10분정도
걸린 듯 하다...심야고속을 타고 내려오면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탓인지, 아니면
버스의 따뜻한 히터 때문인지, 세상 모르게 자다보니, 버스가 목포터미널에 도착한
다음에야 잠에서 깨어난다
목포터미널(17:30)
목포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예매하고 나니 30분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서울에 도착하면 밤 10시가 넘을것 같아서 이곳에서 식당을 찾으니 다 문이 닫았고
토스트집만 문이 열려있어 토스트에다 커피 한잔으로 저녁을 해결한다
목포발 → 서울행 버스표
진도지맥과 비와는 인연이 참 많은 모양이다.
지난주에도 목포에서 서울가는 버스에 올라서니 비가 오더니만
오늘도 지난주와 똑같이 비가온다...버스를 탔으니 비야 오던지
말던지..버스는 정안휴게소에서 15분정도 정차한 다음에 서울로
향하고 밤 10시 조금 넘어서 서울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진도지맥(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도지맥 제5구간 - 신동삼거리에서 백미도 앞까지 (0) | 2024.03.13 |
---|---|
진도지맥 제4구간 - 무지개재에서 신동삼거리까지 (0) | 2024.02.10 |
진도지맥 제3구간 - 왕무덤재에서 무지개재까지 (0) | 2024.02.02 |
진도지맥 제1구간 - 진도대교에서 챙재까지 (0) | 2024.01.23 |
진도지맥 개념도와 지도 (0) | 2013.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