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24년 04월 07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의 미세면지
☞산행거리: 도상거리 11.9km / 6시간 5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우슬재- 무명묘지- 임도- 벙커- 암봉- 조망바위- 447.3m봉 갈림길
447.3m봉- 다시 447.3m봉 갈림길- 암봉- 헬기장- 안부- 삼형제바위
440.3m봉- 조망바위- 안부- 깃대봉- 만대산- 465.8m봉- 무명봉- 안부
396.1m봉- 무명봉- 무명봉- 금강재- 쉼터- 암봉- 무명봉- 안부- 삼면봉
안부- 안부- 쉼터 갈림길- 헬기장- 우정봉 갈림길- 주차장 갈림길
조망바위- 금강산- 482.8m봉- 무명봉- 암봉- 458.2m봉-구교리 갈림길
암봉- 수직바위- 325.9m봉- 안부- 아침재- 무명봉- 갈림길- 무명봉
안부- 289.9m봉- 안부- 무명봉- 신 아침재- 파묘- 255.7m봉- 무명봉
뚜드럭재
☞소 재 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해남읍, 마산면
땅끝마을 해남땅의 산길 걷기가 참으로 힘이 드는구나.
워낙 잡목이 심한 곳이라 새순이 돋기전인 겨울에 산행을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갈려고 준비만 하면 비가오니...하는 수 없이 4월까지 걸어보고 남은 구간은
아무래도 다가오는 겨울에나 걸어야 할 듯 싶다.
한달만에 화원지맥 2구간을 나선다...토요일 낮에 친구의 늦둥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에와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저녁이 다가올 즈음에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센트럴시티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해남행 버스표
17시 30분에 목포를 경유하여 해남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는 滿車이다
서울에서 천안까지는 버스 전용 차선을 따라가기에 별 무리가 없었으나.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면서
차량이 밀린다...정안 휴게소에서 15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목포를 향하고
버스 승객의 2/3는 목표에서 내리고 다시 해남으로 출발하여 밤 10시 40분이
지나서야 해남터미널에 도착하는데 예상보다 많이 늦은 시간이다
해남 터미널(22:40)
모텔 SP(11:00~05:20)
근처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컵라면 하나를 산 다음에
모텔로 가니 다행히 오늘은 빈 방이 있다...샤워를 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니 04시 50분이다.
간단하게 씻고 커피포트에서 끊인 물로 라면을 끓여서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까지 한 잔을 마신후에 터미널 앞에있는 택시를
타고 산행 들머리인 우슬재로 향한다
해남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타고 10분도 안된 사이에 우슬재에
도착하니 해남라이온스클럽에서 세운 사자상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나 역시 라이온스 멤버로서 사자상이 무척이나 반갑다.
아직까지 어둠이 살짝 남아 있어서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면서
산행 채비를 한다
우슬재(牛膝峙:147.4m:05:32)
해남군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만대산과 덕음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국제라이온스 318 A지구 해남클럽과 해남군번영회에서 세운
사자상과 해태상, 5·18민중항쟁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정상 아래 옥천면 영춘리쪽에는
효열부 황자숙 열녀문이 있다
해남읍으로 이어지는 구도로로 해남로라는 도로명 주소를 부여받은 도로이다.
고개 아래로 통과하는 해남터널이 완공되기 이전에는 옥천면, 광주, 강진, 장흥, 순천,
여수, 부산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으나 2001년 해남터널이 개통되면서 옛 영화를
잃어버린 고개가 되었다... 예전 해남의 관문으로 해남 사람들은 우슬재를 넘는 순간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는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해남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고개이다.
고개 남쪽으로 13번 국도(공룡대로)인 해남터널이 뚫리고는 옛길이 되었지만 지금도
교통량은 꾸준한 편이며 동백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식재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우슬재의 명칭 변경 시기는 알 수 없다... 원래의 명칭은 우사현(于沙峴)이라 하였다가
우슬치(牛膝峙)로 변경되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한데서
‘우슬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청구도(24층 15면)에는 우슬치(牛瑟峙)로 대동여지도(20첩 4면)와 다른 고지도에서는
우슬치(牛膝峙)라고 한자가 각기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며 인근에 우슬저수지가 있다.
우슬재는 예전에 ‘하사와 병장’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해남 아가씨’에 노랫말에도
나오는 고개로 우슬재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고개이다
해남은 예전에 토호(土豪)들의 세도(勢道:정치상으로 세력을 휘두름)가 하도 높아 현감(縣監)들이
부임해도 이들의 세도 때문에 제대로 氣를 펴지 못해 부임하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해 현감 김서구(金叙九:1782~1783)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역학(易學)에 능한 사람이어서 금강산에 올라가 해남땅의 모양을 살펴보니 해남읍 호천리에
있는 호산(葫山)은 현무의 형상이고, 아침재와 우슬재는 각각 백호와 청룡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해남 사람들이 유난히 거센 것은 이러한 풍수가 좋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호천리에 있는 흑산과
우슬재를 3자 3치를 낮추어 끊어 버리면 지방민의 세도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이대로 시행한다.
이후로 현감의 권위를 세워 다스리게 됐다는 얘기가 구전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혈맥이 끊긴 영향
탓인지 이후로 해남에서는 출중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해남 들감자'나
'해남 풋나락'과 같이 그다지 명예스럽지 못한 명칭이 붙은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김서구는 재임 중 수해로 파괴된 석교(남천교)를 중수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는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남천교를 중수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였”으며, 다리를
만들 때에 김서구가 “평복 차림으로 날마다 공사장에 나와 앉아서 친히 공사를 감독”하였다고 적었다.
또한 정약용은 김서구에 대해서 “언제나 검소함을 좋아하여 거친
베 도포 위에 갖옷을 걸치고” 다녔으며, “백성들에게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5:40)
우슬재의 도로 주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10분정도만
더 기다려 날씨가 밝아오면 멋진 벚꽃을 감상할 수 있으련만...
가야할 길이 몰라서 길을 나서면서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숲 속이라
그런지 똑닥이카메라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아직은 어둡다
벌목을 한 맥길은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고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고이 잠드신 망자의 천년주택(무덤)을 만난다
무명묘지(05:48)
묘지를 지나면서 어둠은 완전히 걷히었고, 뒤돌아보니
한달전에 걸었던 녹우당 뒷산인 416.4m봉이 뚜렸하다.
잠시 발걸음을 재촉하니 산허리를 가로 지르는 임도가 나온다
임도(05:52)
임도를 가로질러 절개지 능선을 오르면서 빡세게 시작되는 오르막길
남쪽이라 그런가...지난주와는 달리 미세먼지는 좀 덜한 편이나
숨쉬기가 나은 편이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오르막길로 향한다
임도를 오르면서 동남쪽을 바라보니 임도 바로 아래에 해남터널 옆에있는
영춘지라는 저수지가 얼굴을 내밀고 있고, 옥천면 들녘에 깔려있는
짙은 안개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민초들의 보금자리를 감싸면서
夢幻的인 분위기가 정말 환상적이다
그 뒷쪽으로 성처럼 펼쳐지는 능선이 남도의 공룡능선이라 불리는
주작, 덕룡산 능선이 환상적으로 펼쳐지고, 우측으로는 올 가을에 걸어볼
계획을 잡고있는 남해 남(신산경표상:선은)지맥이 시작되는 대둔산
도솔봉이 어렴풋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맨 뒷쪽으로 보이는 산이 장흥의 천관산인 듯 하며
그 앞쪽으로는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강진으로
귀향살이를 할 때 거주하던 다산 초당이 있는 만덕산(萬德山:412m)이 보인다
강진군 강진읍과 도암면 경계에 있는 만덕산 일대의 동백나무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강진)에 "만덕산 앞 봉우리는 돌 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도다."라는 고려의 승려 혜일(慧一)의 시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명이 고려 시대 이전부터 불렸음을 엿볼 수 있으며, 동일 문헌에 "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
(萬德山)이라 한다."는 윤회(尹淮)의 기문이 소개되어 있다.
『청구도』에 만덕산에 "석봉은 아름다운 연꽃 같도다(石峯如美蓉)"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만덕산에 백련사(白蓮寺)가 표기되어 있다... 이 사찰은 신라 때에
세워지고 고려의 원묘대사가 중수하였는데, 무의대사 때에 이르러서는 법화도량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는데, 이러한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널리
알려져 이 산을 백련산(白蓮山)이라고도 부른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돌산의 모습과
함께 그 아래에 만덕사(萬德寺)가 묘사되어 있다. 관련 지명으로 만덕리(萬德里)가 있는데,
이것은 만덕사에서 유래하였다.
벌목을 한 뒤라서 그런지 등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 남도지방의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마삭줄이 군락을 이루면서 갈 길 바쁜 산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삭줄 군락지 사이로 봄소식을 알리는 꽃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데
이게 누구신가?...처음으로 만난 꽃이 흔히들 홀아비꽃대라고 알고있는
옥녀꽃대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옥녀꽃대(꽃말:외로운 사람)
우리나라의 경남과 전남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다년생초로
높이는 15~40cm 정도이고, 잎은 줄기 끝에 4장이 모여 나며 넓은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끝이 뾰족하다
꽃은 백색으로 향기가 있고, 수술은 3개이며 가늘고, 양쪽 수술대에는
1실로 된 꽃밥이 있고, 가운데 수술대에 2실로 된 꽃밥이 있으며, 씨방은
달걀모양이며, 암술대는 없다... 홀아비꽃대에 비해 남부 지방에 자라며,
가운데 수술에 2실로 된 꽃밥이 있는 것이 다르다.
과실은 삭과이며 둥글고, 노란색이 도는 녹색으로 7~8월에 익는데,
줄기는 곧추서며, 가지가 갈라지지 않으며, 전체에 털이 없다.
홀아비꽃대와 유사종으로 학자 간의 분류학적 소견을 거쳐 1996년 이우철
교수의‘한국식물명고’에 기재된 종으로, 정확한 분류학적 재검토 및 자생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 꽃이 처음 발견된 장소가 거제도의 “옥녀봉”이라서 “옥녀꽃대”라고
하였다는데, 남도지방에서는 이 꽃을 홀아비꽃대 또는 꽃이 작고 잎이
크기 때문에 과부꽃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홀아비꽃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서 지금은 옥녀꽃대라는 명칭으로 점점 굳어가고 있다.
* 홀아비꽃대와 옥녀꽃대의 구분법
홀아비꽃대는 수술의 길이가 짧고 굵으며, 꽃대쪽에 노란 꿀샘이
있고, 옥녀꽃대는 수술이 가늘고, 길고 많으며, 노란 꿀샘이 없다
옥녀꽃대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애닯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각시붓꽃도 얼굴을 내미는데
초반부터 들꽃들과 자주 눈맞춤을 하니 오늘 계획했던 산행거리를
달성하기엔 애시 당초 틀린 느낌이다...그래 산은 늘 거기에 있는데
한번 더 오면 되지하고 생각을 하니 한결 맘이 편하다
각시붓꽃 (꽃말:기쁜소식)
각시붓꽃의 학명 'Iris rossii' 가운데 속명 'Iris'는 무지개라는 뜻으로
슬픈 전설을 가직하고 있는 꽃이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붓꽃
종류로는 각시붓꽃 말고도 기본종인 붓꽃을 비롯해서 금붓꽃, 노랑붓꽃,
솔붓꽃 난장이붓꽃, 꽃창포, 타래붓꽃 등이 있고 붓꽃종류에서는 이 각시붓꽃이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시붓꽃에 대한 전설
신라와 백제가 격렬하게 싸웠던 황산벌 전투에서 화랑 관창은 죽게 된다.
그런데 관창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무용이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관창이 죽은 후에도 변치 않았던 무용은 영혼결혼을 하고 무덤에서
슬픈 나날을 보내던 중 슬픔을 못이긴 무용은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를 가엾이 여긴 사람들은 관창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보라색 꽃이 피었다...이 꽃의 모습이 새색시 무용을, 잎은 관창의 칼을
닮았다 하여 각시붓꽃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울 남산에서 맨 처음 발견되었다고 이름이 붙은 남산제비꽃...
너도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를 따라 내려와서 이곳에 정착했나?....
아뭏든 반갑구나...
화사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산꾼을 반기는 진달래야...
너는 오늘따라 왜 이리도 이쁜겨...참! 곱다
진달래를 참꽃이라 부르고, 철쭉을 개꽃이라 불렀제
근데 참으로 이쁜꽃이건만 별꽃이 아닌 개별꽃인데
억울하지도 않은가...너처럼 예쁜꽃의 이름에다 ‘개’자
붙이다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근데 너무 서러워 하지마라.
인간사에서도 나쁜짓하고서도 더 잘사는 인간이 더 많다.
너처럼 착한 꽃은 언젠가 좋은날이 올 것 같으니 말이다
들꽃들과 눈맞춤을 하느라 초반부터 발걸음은 느려지고
벌목지를 빠져 나오니 등로는 본격적으로 지맥의 本色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오르막을 올라서니 滿開한 산벚꽃 한그루가 이른 아침에
산에 오른 산꾼 범여를 반긴다
능선에 올라서니 잠시후에 오를 447.3m봉이 얼굴을 내민다
벙커(06:07)
등로는 잘보이지 않으나 딱히 불편을 느낄 정도의 산길은 아니다.
이런 산길을 걷기가 불편하다고 투정을 부리면 맥꾼 자격이 없는거야
멋진 암릉을 바라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봉(06:20)
암봉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서니 맥길을 우측으로 이어지고
약간의 미세먼지를 뚫고 동쪽에서 일출이 시작되는구나
얼마만에 보는 일출인가...까칠한 오르막길이긴 하지만
오늘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산길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4월 아침 / 김상아
오래 잊고 있던
아련한 기억이
너로 인해 목련꽃 만개하듯
가슴에 피어오른다
너를 만나고 있으면
사랑하는 이의
촉촉한 눈망울에서
새어 나오는
고요한 울림으로
이내 맑은 시냇물이고
삶은 시금치 빛깔의
네가 그리도 좋아
간절한
그리움의 늪에서
첫사랑의 그림자 같은
너를 붙들고
네가 떠나갈까
가늘게 신음한다
너만 곁에 있다면
너만 곁에 있다면
새벽을 여는 해남군 옥천 들녁은 아직도 잠이 덜 깬듯 눈을 비비고 있고,
바로 앞에 오똑솟은 차일봉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어린애같은
느낌이 든다
해남군 옥천면 영춘리의 우슬치 오른쪽 산기슭에 위치한 차일봉(遮日峰:227.7m)...
차일이란 햇볕을 가리기 위한 포장, 즉 천막을 말하는데, 산의 모양이 햇빛을
가려주는 천막처럼 생겨 차일봉이라 부르는데, 우슬치에서 송아지가 태어나면
햇빛을 가려 보호해 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산으로 맥길에서 벗어나 있다
산딸기도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이 넘은 산꾼에게는
정말 귀찮은 존재이지...이 넘이 기승을 부리기 전에
화원지맥을 끝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2번정도
더하고는 이곳 산행은 겨울철로 미뤄야될 듯 싶다
生을 마감한 枯死木과 멋진 바윗덩어리 하나가 예술 작품을
보는듯 하다...아무런 加減없는 순수함 그 자체가 예술이다
암릉으로 이어지는 지맥길...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다시피 올라간다
조망바위(06:25)
나뭇가지 뒷쪽의 야트막한 산이 해남읍에 있는 오봉산이고,
뿌연 안개가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저 너머가 지난
2월에 걸었던 진도지맥길이건만 너무 遠景이라 肉眼으로도
확인조차 안되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구나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약간의 미세먼지가 성가시긴하나
조망하나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바로 앞쪽에 우뚝 선
416.4m봉 너머로는 古刹 대흥사를 품고있는 두륜산 도솔봉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고, 가을쯤에 계획하고 있는 선은지맥이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좌측 아랫쪽은 공룡대로라 불리는 13번 국도가 지나가고 이제서야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있는 옥천들녘 너머로 남도의 공룡능선이라
불리는 주작산 산줄기가 마치 공룡의 이빨을 연상케 한다
10년도 넘은 시절에 땅끝기맥을 걷느라 저 능선을 거침없이 걸을때가
범여의 봄날이었는데 지금은 세월에 장사없다고 했듯이 이빨빠진
호랑이꼴이 되어 버렸으니...우짜면 좋노...
해가 중천으로 솟은 뒷쪽으로는 장흥의 진산이라는 천관산이
아련하게만 보인다
암릉길에 비가 자주왔는지 싱싱함을 자랑하는 부처손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다른 조망바위를 오르는 곳에서 만난 報春花라 불리는 춘란도 만난다
보춘화(꽃말:소박한 마음)
남부와 중남부 해안의 삼림 내에서 자생하는 보춘화는 상록 다년초로 관화,
관엽식물로 꽃대의 높이는 10-25cm, 잎은 길이 20-50cm 정도 자란다
잎은 뿌리에서 모여나기하고 선형이며 길이 20~50cm, 폭 6~10mm로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미세한 톱니가 있으며 뒤로 젖혀져 구부러지며,
가죽질이며 진록색이 나고, 생육환경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형태가 나타난다.
1(莖) 1(花)이며, 꽃은 3-4월에 피며 지름 2~3cm로서 연한 황록색이고 꽃대는
높이 10-25cm로서 육질이며 막질의 초상엽으로 싸여 있고 끝에 1개의 꽃이
달리며 포는 초상엽과 비슷하지만 초가 없고 피침형이며 길이 3~3.5cm로서
끝이 둔하고 꽃잎도 이와 비슷하지만 다소 짧다.
입술모양꽃부리는 백색 바탕에 짙은 홍자색 반점이 있으며 안쪽은 울퉁불퉁하고
중앙에 홈이 있으며 끝이 3개로 갈라진다. 중앙 열편은 크고 암술모양으로
젖혀지며, 자웅예합체는 길이가 15mm 정도되며, 열매는 곧게 서며 길이 5cm
정도로서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길이 5~6cm의 대가 있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해남읍내의 모습
해남읍의 멋진 전경을 바라보다 잠깐 사이의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우슬경기장과 전라남도 학생교육원쪽에서 올라오는 제도권 등로가 나온다
형광색의 안전로프를 따라서 편안한 길을 따라서 화원지맥을 이어간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가는데...
바로 앞에 집채보다도 더 큰 암봉이 길을 막는다.
저 봉우리가 화원지맥 능선에 있는 447.3m봉인데
직벽이라 오를수가 없어서 좌측으로 우회를 하면서 걷는다
계속되는 우회로...
447.3m봉 갈림길(06:43)
이곳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우회하면서 걸어온 447.3m봉을 만나러 간다
산행을 하면서 다치지 말라고 쳐논 안전로프를 따라서 올라간다
암릉위로 올라서니 어여쁜 참꽃의 격한 환영을
받으면서 447.3m봉 정상에 도착한다.
447.3m봉(06:47)
447.3m봉은 암봉인데 전망은 기가 막히게 좋은데
흠이라면 미세먼지 탓인지 흐릿하다는 점이다
우슬체육관 우측의 우슬저수지와 앞쪽에 보이는 신안2저수지
그리고 그 뒷쪽으로 야트막하게 보이는 호산과 서당산도 환상적이다
그 뒷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줄기는 대둔산 도솔봉에서 가지를 친
남해 남(선은)지맥 능선이다.
호산(葫山:193m)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남송마을과 해남읍 안동리 사이에 있는 산은
해남읍에서 바라보면 마치 마늘처럼 생겼다 하여 한자어로 호산(葫山)이라는 산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말뫼봉이라고도 부르며, “말”은 마늘을 뜻한다고 하며 해남읍 연동리에
사는 사람들은 문필봉(文筆峯)이라고도 부른다.
풍수지리상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형국을 보이는 해남읍의 안산(案山)에 해당한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 “군의 남쪽 5리[약 1.86㎞]에 있으며, 산 위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세칭 형제송이라고 한다... 소나무 주인이 이를 팔려고 했는데 안기재(安基在)가
130원에 매수하여 나무를 베지 못하게 타일러 지금에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산은 우슬재에 내려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산 높이보다
더 높았는데, 당시 해남현의 현감이었던 김서구가 해남 사람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꼭대기를
석 자 석 치씩 깎아 내려 현재의 높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저 멀리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내가 오늘 걸어야 할 해남의 금강산이다
우슬저수지와 내가 어제밤에 하루를 묵었던 해남읍내 뒷쪽으로는
남각산이 해남읍내의 서쪽을 외호하고 있으며 그 너머의 진도지맥은
미세먼지에 갇혀버려 산줄기의 파악조차도 어렵다
447.3m봉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잠시후에 걸어가야 할
깃대봉과 만대산 능선이 어서오라고 손짓을 하는 느낌이다
되돌아가는 길의 암릉 아래로 내려서는 길에 바위 틈새에서
숨어피는 보춘화는 시집온 첫날밤의 새색시처럼 다소곳한
모습으로 수줍은 얼굴을 내미는데, 참으로 곱다
다시 447.3m봉 갈림길(06:52)
봄은 봄인가 보다...바위 틈새에는 보라색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사면길에서 암봉위로 올라간다
암봉(06:54)
완만한 내리막길의 제도권 등로는 이른 아침에 우슬재에서
올라오면서 잠시나마 고생한 산길을 보상받는 느낌으로
편안한 길을 따라서 만대산을 향하는 맥길을 이어간다
오룩스맵상으로는 이곳에서 우측의 숲길로 맥길이 이어지는데,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틈이 보이지 않는다...직진의 편안길로 향한다
이제 피기한 시작하는 진달래의 응원을 받으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헬기장(420m:06:58)
넓은 공터의 헬기장에 도착하니 전라남도 학생교육원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산꾼을 반긴다...좌측으로 가리키는 B코스
방향으로는 전라남도 학생교육원과 우슬체육관이 있는
해남읍 해리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맥길은 만대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헬기장 모퉁이에 있는 이정표를 따라서 만대산으로 향하는데...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가 있는데, 오랜 산행 경험상으로는
산에서 만나본 뫳돼지는 안 무서운데,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
가장 무섭더라...
안부(07:01)
한참을 돌아와서 지맥길에 복귀를 한다
FM대로 걸었다면 어마 무시한 이곳으로 내려와야 했다
안부를 지나서 만대산으로 향하는 오르막으로 향한다
아기자기한 오르막길...융단처럼 깔린 마삭줄 사이로
걸어가다보니 멋진 입석이 나오는데 지도상에 표시된
삼형제 바위이다.
삼형제바위(07:08)
둘째 바위일까?
안부에는 누군가가 돌탑을 만들어놨고...
厚德한 모습으로 맨 위로 서있는 바위...
아무래도 큰형님 바위인 듯 하다
나에게 느림의 美學을 가르쳐준 달팽이...이른 아침에 마실을 가는 모양이다
등로의 동쪽으로는 설악산의 공룡능선에 비해 규모는 적다마는
남도의 공룡능선이라 부른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주작산 공룡능선이 몽환적 분위기가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440.3m봉(07:13)
지도상의 삼형제바위 윗쪽에 있는 440.3m봉에서
잠시후에 오를 깃대봉이 가깝게 산꾼의 시야로 다가온다
초반이긴 하지만 오랫만에 범여의 몸뚱아리가 호강을 한다.
거기다가 이렇게 좋은 길에 개미새끼 한마리도 안 보이는
호젓하게 홀로 걸으니 좋아도 너무 좋다
암릉 사이를 통과한 다음에 가야할 금강산이
시원스레 보이는 조망바위에 도착한다
조망바위(07:15)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잠시후에 가야할 해남의 금강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772~842)은 누실명(陋室銘)에서 산은 낮아도
조망이 좋으면 명산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山不在高(산불재고) 有仙則名(유선즉명)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이 나고,
水不在深(수불재심) 有龍則靈(유룡칙령)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하다.
안부(07:16)
안부를 올라서니, 멋진 암릉이 길을 막는다
안전 로프를 부여잡고...
안부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제도권 등로라서 그런지
해남군에서 설치한 구조이정판(다라2039 2120)을 보면서
올라서니 앙증맞은 바위 하나가 산꾼을 반긴다
만대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주 만나는 암릉들
암릉에 올라서니 아침에 끼었던 옥천 들녘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고 들녘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옥천천 너머로
해남군 계곡면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뒷쪽으로 보이는 호미동산(581m)과
가학산(574.7m)과 흑석산(652.8m), 두억봉(527.8m)이 병풍처럼 보인다
깃대봉 오르는 길에 옥천 들녘 뒤로 흑석지맥의 가학산-흑석산-두억봉을
가늠하면서 동쪽으로 주작-덕룡의 톱날 능선이 조망된다
암릉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깃대봉...이름과는 달리
펑퍼짐한 능선에 있어서 무심코 지나치기 딱좋은 봉우리다
깃대봉(458.4m:07:22)
해남군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신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그저 밋밋한
봉우리에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 있는데 주위의 만대산과 금강산의
명성에 눌려 약간의 홀대받는 느낌이 드는 산이다.
이곳의 깃대봉의 유래는 알 길이 없지만 전국에 수없이 많은
깃대봉의 지명유래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무심코 지나칠뻔한 깃대봉을 지나니 아직도 꽃봉오리가 잘 보이지
않은 진달래군락지 사이로 이어지는 맥길을 따라서 룰루랄라하면서
걸어간다
어머니의 편안한 품안처럼 느껴지는 맥길
늘 터프한 길만 걷다가 오랫만에 편한 길을
걸으니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오랜 세월동안
험한 맥길을 걸으면서 생긴 습관 탓인가?
濕이란 참으로 무섭구나
누가 산길을 빗자루로 청소한듯한 길을 걷다보니...
이정표가 보이고...
데크목 전망대를 만들어 논 만대산 정상에 도착한다
만대산(萬垈山:493.1m:07:30)
해남군 해남읍 해리, 옥천면 영신리와 마산면 장촌리, 송석리, 맹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남읍의 진산인 금강산과 이어지는 산인데,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두 군데에 걸쳐 있다.
지명의 유래는 만대산(萬代山)의 명칭은 대대로 이어지는 여러 대의 자손(子孫萬代)에서
유래된 듯하며, 만대산의 수려한 풍경을 해남의 진산 금강산에 빗대어 명칭을 만대산
(萬臺山)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만대산의 지명은 『대동지지(1865)』에 처음으로 나오며, 『호남읍지(1872)』에 따르면
“현의 북쪽 13리(약 5.11㎞)에 있다... 금강산에서 꿈틀거려서 나와서 북으로 굴러 여러
봉우리로 솟아나니 기세가 장하고 크다. 언전(諺傳)하기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그의
철석(鐵錫)을 던져 여기에 떨어지므로 그대로 눌러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유지(維持)인
석탑이 있다... 세칭(世稱)하여 원효봉(元曉峰)이라고 하는데 봉우리가 특출하게 서 있다.
이름하여 식봉(食峰)이라고 하는데 매년 정월 상원(上元)에 달을 보아 저녁달이 이 봉우리에서
뜨면 풍년이 들 것이라고 점쳤으며, 또 남쪽에 기암이 천길 높이 솟아 하늘을 떠받들었는데
이름하여 입암(立岩)이라고 한다... 석천(石川:지금의 마산천의 상류), 만대산(萬代山) 아래에 있다.
일동의 계류가 모두 반석 위를 흐른다... 감사(監司) 임억령(林億齡)이 계류가에 자리 잡고 살며
그대로 석천(石川)이라 호를 썼는데 그 마을 이름을 장자(長者:지금의 장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만대산 데크목 쉼터의 서쪽 뒷쪽의 아파트 단지 너머로 보이는 산은
해남읍 복평리 뒷산인 남각산(316.8m)인 듯 하다
이곳 만대산은 화원지맥에 걸쳐있는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만대(萬垈)란 ‘만개의 큰 바위’라는 뜻으로 큰 바위를 한자로 ‘대(垈) ’ 라 하고,
‘대(臺) ’를 작은 봉우리라 한다...결국 만대(萬垈)를 만봉(萬峰)으로 해석하면
해남의 금강산은 만대(萬垈)를 2개나 거느린 산이라 이만봉(二萬峰)이란
뜻이니...북한의 금강산인 일만이천봉보다 팔천봉이 더 많다는 얘기다.
결국 다르게 해석하면 해남의 금강산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산이란 뜻이다
데크 전망대가 있는 만대산 정상은 일몰과 일출, 해남읍의 야경이 좋아
비박지로 인기가 높다고 하는 곳인데, 만대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북쪽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으로 향한다
간간히 이어지는 산죽능선...
등로는 좌측으로 살짝 꺽이고 우측 등로 아래로 펼쳐지는
옥천면 영신리의 들녘은 육안으로는 뚜렸이 보이나
똑닥이카메라로는 읽지를 못하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심코 걷다보니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길을 막는다.
그렇다고 가야할 맥꾼이 안 가는거 봤어...
라디오의 음악소리에 장단을 맞쳐 흥얼거리면 길을 걷는다
산죽길이 끝나니 아직 피지도 않은 진달래 능선이
바통을 이어받는데, 나중엔 모르겠지만 지금의
등로는 좋아도 너무 좋다...무심코 걷다보니 족보가 있는
465.8m봉에 도착한다
465.8m봉(07:38)
약간의 내리막길에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서 금강재로 향한다
무명봉(07:43)
양지쪽이라서 그런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가는 세월을 잡을수는 없고, 나도 노후에는 저런 꽃길만
걷고 싶은데 그것이 내 바람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듯한 소나무를 뭐가 그리도 산이 났는지...
그래 멋지게, 그리고 긍정적인 삶을 가지고 산다는 건 좋은 일이지...
神仙들의 공깃돌?
안부(07:50)
해남군에서 설치한 구조이정판을 바라보면서...
완만길을 향해서 가니... 쉼터의자와 이정표가 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쉼터의자 2개와 이정표(←만대산 정상 1.1km, →금강산 정상 2.6km,
↑금강저수지 1.6km)가 있는곳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지고 직진의
금강저수지 방향 10m정도 떨어진 396.1m봉 정상으로 향한다
396.1m봉(07:55)
족보있는 396.1m봉에 갔다가 이정표와 쉼터의자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좌측의 내리막길을 따라서
금강산으로 향한다
뚜렸한 등로 사이로 도열해 있는 못난이 소나무?
무명봉(08:00)
고도차가 별로없는 편안한 길을 걷다가 보니 무명봉을 만난다
무명봉(08:05)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가야할 해남의 금강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어렴풋이 보인다
매주 걷는 맥길이지만 늘 2%가 부족한 듯, 밀려오는 공허함을
채울수가 없으니 산으로 향하는 허기를 뭘로 채워야 하나...
길을 막고있는 멋진 바위를 살짝 돌아서 내려서니...
이정표와 돌탑, 해남로터리클럽에서 세운
쉼터의자가 있는 금강재에 도착한다
금강재(290m:08:09)
해남군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신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좌측의
해리쪽에 있는 금강저수지 방향으로는 뚜렸한 등산로가 있는데
금강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은지 등로가 반반질하나, 우측의
옥천면 방향으로는 돌탑이 길을 막고있고, 등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지명의 유래는 인근에 있는 금강산으로 향하는 고개라고 해서
금강재라 부르는 듯 하며, 또다른 지명으로는 해리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신기리재골이 있는데 이곳을 넘어간다고 일명 ‘신기릿재’로 불리는 고개이다
해남읍 해리 금강저수지로 내려가는 길...맥꾼들의
중탈구간인지 지맥꾼들의 시그널도 몇장이 걸려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금강골이 나오는데, 해남읍에 사랑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해남읍에 있는 금강골은 매우 신성한 곳으로, 500년 전 금강골에는 절이
있었지만 신선이 사는 곳에 잡신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이유로 없어졌다고 한다.
금강저수지에서 금강골을 바라보면 여러 형상의 바위들이 보이는데, 첫 번째 바위는
남자와 여자가 성교하는 모습이며, 두 번째 바위는 아이를 가진 만삭의 어머니 모습이고,
세 번째 바위는 평범한 바위에 하얀 돌이 있어, 만삭인 어머니가 출산을 하는 모습과
흡사하며, 자식이 없는 사람이 바위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마시거나 기도를 하면 아이가
생겼다고 한다.
금강재에 있는 이정표
이렇게 멋진 길에 등산객 한명없이 홀로걷는 이 길.
해남로타리클럽에서 기증한 벤취만이 금강산 가는 길을 지키고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박인희의 “나무 벤취길”이라는 노래...
“ 저 바람 속에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있어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은 이 길은 끝없는 추억의 길
길가에 서있는 무성한 나무와 나무 나무들
가슴에 남겨놓은 잊지 못 할 그대의 눈동자
눈물의 그 모습이 지금도 있을 것 같은 벤치에
아무도 모르는 나의 마음을 두고 떠나면 ” 을
따라서 흥얼거리며 홀로 맥길을 이어간다
약간의 오르막길 등로에는 봉분에는 시누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亡者의 밥상(?)은 두동강났고, 밥상에 새겨진 망자에 대한 기록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이다...아!...무심한 세월이여...
이 세상 살다가 저승으로 가는길...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준 저 망자의 교훈,
분명히 알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세속의 중생들은 늘
우매한가 보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르막길로 향한다
쉼터(08:17)
구조이정판을 따라서 걷는데 이른
아침과는 달리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암봉(08:20)
반복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벽에 묶여 평생을 맴도는 시계도
한번 지난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몸통을 타 태우고서야
지구를 벗어난 우주선처럼
문을 나선 나에게는 길 뿐이었다
꿈이 길을 만들어내겠지만 때로,
길에 맡기고 가다 보면
어느 날 꿈꾸는 별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지금 내 길의 어디쯤 서 있는가
윤석호 시인의 “길에 대한 단상” 중에서
무명봉(08:25)
과잉친절?
안부(08:28)
다시 고도를 높히면서 오르막은 시작되고...
오름길 안전로프 옆의 낙엽속에 다소곳이 숨어있는 족도리풀.
남도지방에서는 그리 만나기가 쉽지않은 귀한꽃을 만난다
족도리풀(꽃말:새색시)
족두리는 옛날 여자들이 결혼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를 말하는데,
작고 동그란 꽃 모양이 마치 족두리를 닮아서 족도리풀이라고 한다.
족도리는 족두리의 옛말인데, 옛말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들풀로 쥐방울덩굴과에 속하며, 약재용 이름은 세신이라고도 한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뿌리는 약용으로 쓰이며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산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반그늘 또는 양지의 토양이 비옥한 곳에서
잘 자라며, 키는 15~20㎝이다. 뿌리줄기는 마디가 많고 옆으로 비스듬히 기며
마디에서 뿌리가 내고, 잎은 폭이 5~10㎝이고 줄기 끝에서 2장이 나며 모양은
하트형이다... 잎의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잔털이 많으며 줄기는 자줏빛을 띤다.
꽃은 5~6월에 자줏빛으로 피는데, 끝이 3갈래로 갈라지고 항아리 모양이고,
잎 사이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잎을 보고 쌓여 있는 낙엽을 들어내면 속에
꽃이 숨어 있으며, 열매는 8~9월경에 두툼하고 둥글게 달린다
풀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날 경기도 포천 지방에 아주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꽃처럼 아름다워서 꽃아가씨라고 불렸다... 꽃아가씨는 산나물을 캐고
꽃나무를 심으며 생활하다 궁녀로 뽑혔으며, 궁궐에서 생활하던 중 중국으로
팔려가고 말았다... 결국 중국 땅에서 들판에 굴러다니는 풀처럼 살다 죽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도 죽었다.
두 모녀가 죽은 뒤 그 집 뒷마당에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 풀에 핀 꽃은
여자가 시집갈 때 쓰는 족두리처럼 생겼으며,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사람들은 그 꽃이 꽃아가씨의 한이 맺힌 꽃이라고 했고,
그 풀을 족도리풀이라 불렀다고 한다.
* 쓰개는 머리를 보호하는 두의(頭衣)로서 발생한 것인데 점차 장식적, 신분의 표지
등으로 발전한 것이며, 쓰개의 발생은 건국 당시에도 의관정제(衣冠整齊) 하였다고
하므로 의복의 발생과 같은 시기라고 추측된다.
족도리풀과 반가운 눈맞춤을 하면서 올라서니...
419m 정상인 삼면봉에 도착한다
삼면봉(三面峰:419m:08:38)
해남군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신계리, 마산면 장촌리 경계에 봉우리로
정상에는 쉼터 벤취와 이정표,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 있으나,지도상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는 무명봉으로 맥길은 정상에서 좌측으로 확 꺽어져
금강산으로 향하고, 우측으로는 큰민재와 작은민재를 북만대산(北萬代山)이라
불리는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있는 만대산(443.2m)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곳부터 우측은 화원지맥 분기점부터 같이한 옥천면과 이별하고
새롭게 마산면으로 접어들며 좌측인 남쪽은 해남읍의 경계를 따른다.
좌측으로 향하니...
주위를 모두 볼 수 있는 앙증맞은 조망바위가
나오고 화사하게 핀 진달래가 산꾼을 반긴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있는 장촌저수지가 보이고
좌측으로 여인의 젖꼭지처럼 봉굿 솟아오른 산이 화원지맥길에 있는
역마산(308.3m)이다
만대산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등로는 ⊂형태로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조금전에
지나온 깃대봉과 만대산이 작별이 아쉬운지 그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아랫쪽의 계곡은 금강재에서 해남읍 해리로 이어지는 금강골인데 산중턱에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는 산벚꽃이 가히 환상적이다...오늘의 낮에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운 날씨로, 이제는 겨울이 끝나자마자 봄이라는
계절은 패스하고, 여름철로 곧바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안부(08:44)
구조이정판을 만나면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리기에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금강산 방향에서 젊은 친구가 내려오면서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건너면서 금강재 방향으로 향한다...오늘 처음으로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 셈이다
오랫동안 산길을 걷다보니 이제는 산과의 交感하면서
걷는 방법을 알것만 같다...佛家에서 말하는 解脫의 경지는
아닐지라도 산에 대한 妙味를 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
깨달은 셈이라고나 할까...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찌하리
매주마다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그 자체가 행복한데...
안부(08:49)
안부 양옆의 길바닥에는 꽃비가 내린듯한 보라색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 두고 두고그리운 사람은
어디간 줄 모르겠고, 나혼자 멋진 꽃길을 즐긴다
안부를 지나서...
고도를 높히면서 걷다가 북동쪽으로 뒤돌아 보니 북만대산이라
부르는 마산면의 만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스카이라인이
가히 환상적이다
맨 우측이 조금전에 지나온 삼면봉(419m)이고 능선을 따라서 큰민재, 작은민재
지나서 보이는 산이 북만대산이라 불리는 마산면에 있는 만대산이고, 그너머로
보이는 흑석지맥 산줄기는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해남 향토사학자들은 마산면에 있는 만대산(443.2m)을 북만대산(北萬代山)
이라 하고, 해남읍과 옥천면에 걸쳐져 있는 만대산(493.1m)을 남만대산(南萬代山)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만대산이라 부르는 마산 쪽 만대산에 죽산성(竹山城)과 해남 맹진리 암각 매향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137호)가 있으며, 해남읍과 옥천면의 경계에 금강곡과 금강저수지가 있다.
옥천면 쪽에는 만대산과 덕음산 경계에 우슬재가 있으며 우슬재 아래에는 우슬체육공원이 있다.
옥천면 영신리에 1919년 3·1운동을 일으킨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지강(芝江)
양한묵(梁漢黙:1862~1919)의 생가가 있다.
쉼터 갈림길(08:56)
쉼터(0.9km) 이정표가 보이는데 금강골을 지나 금강저수지로 내려가는
등로로 그 종착지는 해남읍 해리에 해당된다
해남읍에 속해있는 해리(海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만조 때면 바닷물이
해남천(海南川)을 거슬러 올라왔다 하여 본래 ‘갯몰’, ‘바댓몰’이라고 불렸는데,
한자식 지명에 따라 해리(海里)로 개칭하였다
현재는 해리마을과 성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리마을의
입향조로 초계정씨의 사위인 민중건과 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처음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전하나,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조선시대 초 이부상서를 지낸
초계정씨 정원기 또는 정윤기가 입향조라고도 한다.
관련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입향조를 알기는 어렵다고 하며, 성동마을은 해리마을에서
분리되었다... 본래 해리는 고려 옥산현의 지역으로 영암 땅이었는데, 조선 1437년에
해남현의 치읍에 딸린 땅이 되었고, 『호구총수(戶口總數)』[1789] 기록에는 해리와
관동리로 나뉘어 현일면 혹은 군일면에 속하여 있었다.
그 후 해리와 관동리가 어느 시기에 합하여졌다가, 1920년경 해남천 남쪽을 신해리,
북쪽을 해리라고 하였으며, 옛 관동리 지역인 신해리는 해방 후에 성동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본시 객관[객사]의 동쪽이라 관동이라 칭하였으나 객관은 없어지고
해남읍성의 일부만 남아 있어 그 성의 동쪽이란 의미로 성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금전에 지나온 깃대봉과 만대산을 바라보면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로 향한다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지도 못하는 팔각정자가는 이정표를
만나 올라서니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헬기장이 나오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헬기장(09:07)
직진으로 보이는 나무 뒷쪽의 봉우리가 족보있는 469.8m봉이다
잠시후에 오를 해남의 금강산이 손에 잡힐듯 가깝게 보인다
헬기장 아래에서 만난 금강산성(金剛山城: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7호)
전라남도 해남군의 해남읍 구교리와 마산면 장촌리 사이의 금강산에 있는 산성으로
원래 지명은 죽산성(竹山城)인데 금강산에 있기 때문에 금강산성이라고 이름도 바뀌었다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백성
피난용으로 건립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금강산에 옛 성과 금강사(金剛寺)가
있다는 간략한 내용이 있으며 산성의 둘레는 약 9 Km쯤 되는 매우 오래된 성인데
수비대장을 담당하였던 승병(僧兵) 영주(靈珠) 스님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성(金剛山城)은 13세기 중반 진도 용장산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14세기 왜구
침입기를 거쳐 해남읍성이 축조되면서 1434년(세종 16)까지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서 기능을 유지하였으며, 이후 봉수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정봉 갈림길(09:12)
너무 자주 만나는 구조이정판...해남군의 과잉친절인가?
등로 우측에서 금강산성의 흔적인가...너덜겅같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土沙 유출을 방지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산꾼의 발길을 가볍게 하기위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야자매트를 깔아놨다
주차장 갈림길(09:17)
어느 주차장이란 말인지?...외지에서 온 산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않는 그야말로 씨잘데없는 이정표다
주차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면서 바라본 해남읍내의 모습
이곳 해남 출신으로 조선전기 문신(文臣)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해남에 거주하면서 금강산과 어우러진 해남읍의 형국을 선녀가 가야금을 타는
형국으로 보고, 그 선녀의 아름다운 눈썹바위 미암(眉巖)을 호로 썼다.
유희춘은 승려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동사열전」의 저자이며 대흥사 13대 강사인
범해각안(梵海覺岸)은 「전라해남금강산은적사적」에서 금강산을 이렇게 예찬하였다.
"해남은 뿌리요, 금강산은 꽃이고, 월출산은 열매이니, 해남에 인물이 나오는 땅"이라 하였다
* 동사열전(東師列傳)은 19세기 해남 대둔사(大芚寺) 출신의 범해 각안(梵海覺岸:1820∼1896) )
스님이 1894년(고종 31)에 편술한 승려 열전(列傳)으로 삼국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고승전이다.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19세기 말까지 총 198명의 고승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조선 후기의 승려들이며 편저자인 각안이 속한 편양파(鞭羊派), 특히 대둔사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금강산성의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앙증맞은 돌탑하나가 산꾼을 반긴다
금강산성은 해남읍 둘러싸고 있는 해남의 진산인 금강산 정상부에 산정을 분기점으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뻗은 능선과 이들 능선사이에 형성된 골짜기를 막아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의 총 길이는 1087m로 남동-북서의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보인다.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대동지지〉〈증보문헌비고〉에 ‘옛성(古城)’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
정확한 축조연도를 알 수 없이 현재는 잔존성벽만 남아 있으며 금강산 정상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요지로 성내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은폐돼 있으면서도 충분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변란시
은신처로 삼기위해 쌓은 성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결과 금강산성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일부구간은 성벽을 쌓지 않고 험준한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고, 지형조건에 따라 능선부는 내탁식으로, 계곡부는 협축식으로 축조하는 등 13세기
중반 몽고침입기 여러 고을 배성들의 피난을 목적으로 축조된 입보용(入保用)산성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동. 서. 남. 북쪽의 성벽과 4개의 문지(門址), 치(雉), 용도(甬道), 집수지(集水址), 건물지(建物址),
봉수(烽燧) 등도 확인돼 이같은 결과를 뒷받침하고 있다.
금강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우정봉(牛頂峰:309m)의 모습
산의 정상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해서 불리우는 산이다.
저 능선을 따라서 좌측에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소의 머리를 닯았다는
우정봉이고, 직진으로 향하다가 뚝 떨어지는 곳으로 내려가면 해남
팔경중에 하나인 미암청풍(眉巖淸風)으로 불리는 미암(眉巖)바위로
내려가는 길이고, 그 뒷쪽으로는 한달전에 걸었던 녹우당 뒷쪽의 덕음산...
좌측으로 솟구쳐 오른 산줄기는 오늘 아침에 우슬재에서 깃대봉, 만대산으로
걸었던 능선이다
* 해남팔경이란
1, 금강폭포(金剛瀑布)...금강골의 폭포
2, 미암청풍(眉巖淸風)...금강산 미암바위의 맑은 바람
3, 홍교유수(紅橋流水)... 홍교에 흐르는 물
4, 호산명천(葫山名泉)... 호산 문필봉의 이름난 샘
5, 연봉제월(蓮峰濟月)... 덕음산 연봉에 뜬달
6, 두륜귀운(頭輪歸雲)... 두륜산에 떠있는 구름
7, 남포귀범(藍浦歸帆)... 어성교 남포에 돌아오는 돛단배
8, 은사효종(隱寺曉鐘)... 은적사의 새벽 종소리
조망바위(09:20)
금강산 가는 길
지나온 만대산과 똑같은 형태의 데크목 광장을 만들어 논
금강산 정상에 도착하니, 비박꾼들에겐 환상적인 박장소같은데
넓은 쉼터의자엔 젊은 처자가 큰 大자로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다가
내 베낭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보고 일어난다
대화를 해보니, 울산에서 온 처자인데, 어제 달마고도를 걷고 오늘
금강산에 올랐다고 한다...처자에게 부탁하여 인증샷 하나를 남긴다.
금강산(金剛山, 488.3m:09:20~32)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와 해남읍 구교리, 수성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강원도 금강산에 버금간다고하며, 금강산에서 시작되는 해남천과 마산천의 발원지로
해남읍의 진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이 산에 봉수가 있었는데 남쪽으로는 관두산에 응하고 북쪽은
다만 관문에 보고한다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해남)에 관아 동쪽 5리에 있으며 영암
월출산에서 뻗어 나와 고을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이다 라고 수록되어 있다.
지역 주민들은 북쪽의 금강산 줄기가 이곳에서 멈추었다고 말하고 지명은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지며, 한편 이 산에 수목이 무성하고 기암이 많은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는데
금강산의 명칭 유래는 북한의 금강산에 버금가는 풍경을 가지고 있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불교의 금강경(金剛經)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산에 옛 성과 금강사(金剛寺)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1872년
지방지도(해남)에는 금강산(金崗山)이라고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해남)에는
금강현(金剛峴), 금강천(金剛川), 금강보(金剛洑)가 표기되어 있으며 현재도 금강산성,
금강폭포, 금강령 등의 관련 지명이 있다.
인증샷
금강산 정상에서 바라본 해남읍
동쪽은 만대산, 서쪽은 남각산, 남쪽은 호산, 북쪽은 금강산이 위치하고 있어서
읍 전체의 시가지는 산들로 에워싸여 있는데, 한반도 서쪽의 맨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해남은 옛부터 한양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형적인 이유로
유배지로 이름을 날린 곳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귀양온 양반들이
심어논 문화와 유적이 오랫동안 이어져 유배 문화의 本山이기도 한 곳이
이곳 해남땅이다
잠시후에 도착할 산불감시초소를 바라보면서...
해남의 금강산에서 10분 넘게 이곳 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금강산을 지나가다, 낙엽속에 묻혀있다 얼굴을 내미는 현호색.
참으로 반갑구나...들꽃 구경을 하느라,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진다
현호색(玄胡索)이란 이름은 씨앗이 검은 데에서 유래하며, 특히 기름진 땅이나
척박한 땅 등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이를 달리 본 모양이다... 꽃 모양이 마치 종달새 머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속명을
그리스어로 종달새를 뜻하는 코리달리스(Corydalis)로 지은 것이다.
현호색은 애기현호색, 댓잎현호색, 가는잎현호색, 빗살현호색, 둥근잎현호색 등
여러 현호색 종류를 대표하는 종이며, 우리나라 산과 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로, 양지 혹은 반그늘의 물 빠짐이 좋고 토양이 비옥한 곳에서 잘 자라며,
키는 약 20㎝ 정도로 작은 편으로 꽃말은 비밀 또는 보물주머니라고 한다
현호색과 옆에서 친구를 하면서 피는 산자고도 자기를 봐달라고 한다.
언제봐도 너는 너무 멋있고, 도도하구나...근데 너는 늦둥이냐...왜
이제서야 꽃을 피우니?...다른 친구들은 한달전에 피고 졌는데 말이야...
482.8m봉(09:35)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무명봉에서는 거의 보기가 힘든
1등 삼각점이 정상을 지키고 있구나...금강산에 설치할 삼각점을
이곳에 설치한 건지...아니면 이 봉우리까지 금강산으로 본 건 아닌지?...
482.8m봉의 1등 삼각점(해남11)
위도34도35분30.15초, 경도126도36분00.60초
482.8m봉 삼각점(△해남11 / 1990복구)
산불감시카메라 휀스에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아직도 제도권 등로를 따라서 편하게 길을 걷는다
무명봉(09:39)
요즘엔 봄이란 계절은 사라진 모양이다...낮이 되면서
기온이 올라가는지 한 여름을 방불케하는 더위로 인해
조금씩 체력이 방전되어가는 느낌이다.
개별꽃은 어린 줄기와 잎을 식용하며 한방에서 위장약으로 쓰며,
약재명으로는 태자삼(太子蔘)이라 부르는데,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꽃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명의 이시진(李時珍)은 일생 동안 약초를 연구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약초학자로 그의 저서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중국에서 나는 약이 되는 식물과 동물, 광물의 효능과 성질을 집대성한
책으로 그 내용이 매우 자세하고 친절하며 과학적여서 뒷사람들한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다.
이시진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서 원고를 들고
남경(南京)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가던 어느 날. 날이 저물어 어느 자그마한
주막에서 묵었는데, 저녁을 먹고 막 잠이 들려는데 집 안쪽에서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시진은 주인을 불러 아픈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주인은 아내가 영양실조로 병이 들었는데 식구가 많아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이어서 약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시진은 안방으로 가서 누워 있는 환자를 살펴보았다.
환자는 기력이 떨어져서 맥이 좀 약할 뿐이고 뚜렷한 병은 없었다.
그는 부인이 무언가 약을 먹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어 오늘 낮에
먹은 음식을 갖고 와 보라고 했다...주인은 양식이 떨어져서 풀뿌리를
캐서 죽을 쑤어 먹고 산다면서 나물 광주리를 들고 왔다.
광주리에는 처음 보는 풀뿌리가 들어 있었다.
이시진은 그 풀뿌리를 잘라서 맛을 보고 나서 그 풀뿌리가 기력이
쇠약해진 사람한테 훌륭한 보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인에게 돈을 약간 주면서 부인에게 쌀을 구해서 음식을 먹이고
그 풀뿌리를 계속 달여 먹이면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시진은 그 풀이 무슨 풀인지 몹시 궁금해 주막집 주인한테 그 풀뿌리를
어디서 캤는지 물었다...주인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아들이 묻혀 있는
태자(太子)의 무덤 주위에 많이 자라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이튿날 이시진은 태자의 무덤에 가 보았다.
과연 그 풀이 무덤 주위에 양탄자처럼 넓게 퍼져 자라고 있었다.
이시진은 이 약초의 효능에 대해 '본초강목'에 기록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약초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태자의
무덤 주변을 파헤칠 것이 염려되어 빼기로 했는데, 그 뒤로 이 풀은
태자의 무덤 주위에서 많이 자라는 것이라 하여 태자삼(太子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암봉(09:47)
암봉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언제까지 될지 몰라도 아침에 전라남도 학생교육원쪽에서 올라오는
제도권 등로에서부터 아직까지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오랫만에
범여의 몸뚱아리는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등로 좌측의 암릉에 올라서니 남서쪽 방향을 보니 남각산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에 미세먼지에 갇혀버린 진도지맥의 점찰산 주변 산줄기는 오리무중이다.
해남읍의 아파트 단지 뒷쪽으로 보이는 산줄기는 올해 늦가을에 걸어볼 계획을
잡고있는 남해 남(신산경표상:선은)지맥 능선은 미세먼지 탓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458.2m봉(09:53)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니 어느분은 이곳을 작은 금강산이라 불렀던 곳이다.
구조이정판 아래에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고 맥길을 좌측으로 꺽어져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잠시후에 걸어야 할 능선이 보이고 좌측으로 볼록솟은 역마산 뒷쪽으로
펼쳐지는 해남군 마산면의 들녘은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흐릿하다
길이 막혔다는 말은 있어도
끝났다는 말은 없다
길이 막히면 길은 그 자리에 잠복한다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떨어진 빗물
머뭇거리지만 스스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길 안에는 또 다른 길들이 내장되어 있다
갈림길(09:57)
뚜렸한 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는
해남읍 구교리로 향하는 길이고,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구교리로 이어지는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초행길인 이곳에서 길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는지 선답지들의
많은 시그널들이 맥길을 안내한다...고맙소!...복받을깁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등로 우측으로는 암릉이 병풍처럼 보이고, 안부에서 올라선다
암봉(10:00)
조금전 갈림길에서 내려가는 능선이 보이고 그 아랫쪽에
펼쳐지는 해남읍 구교리와 그 뒷쪽은 남각산(316.8m)이다
남각산 우측에 있는 깃대봉(224.3m)의 모습
깃대봉은 지맥길에서 지맥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그 뒷쪽으로
가야할 역마산과 해남군 마산면 용전리 들녘이 어렴풋이 보인다
너럭바위가 나오고...
깃대봉 뒷쪽으로 펼쳐지는 흑석산의 산줄기도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수직바위(10:02)
지도상에는 이곳을 수직바위라고 표기를 해놨는데 엄격히 말해서
모양으로 치면 바위가 누워 있으니 수평바위가 맞을듯 하다
(범여의 생각 中에서)
수직바위를 지나면서 멋진 소나무가 있는 조망처가 나오고
해남읍의 서쪽지역이 한 눈에 펼쳐지는 멋진 곳이다
조망처에서 바라본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舊校里)일대의 모습
구교리(舊校里)는 구 향교가 있는 지역이라고 하여 구교(舊校)라 불리었던 마을로
마을의 역사는 해남향교와 같이 한다. 해남향교는 현산면 향교리에서 고도리-구교리-
수성리 순서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해남향교가 고도지리[현 고도리]에 있을 때는 해진군이
지금 삼산면 계동의 구 옥산현 지역으로 옮겨온 때였다... 구교리로 옮겨온 시기는 1437년
(세종 19) 해진군에서 해남현이 독립된 이후로 보고 있으며, 그 이전까지 이 지역은 옛 사라향인 고
려 옥산현의 한 지역이었으며, 1437년 이전에 해진군, 그 후 해남현의 땅이었다가 해남현 현일면
[임진왜란 후]이 되었고 현일면의 구교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구교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기 어려우나 세종(世宗) 때에 향교를 중심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살게 된 것으로 보이며, 입향조는 전주이씨라고 전하는데 관동마을의 형성은 대략 1930년대인 것으로
추정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지속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학동마을의 수령 300여 년 된
풍치림(風致林)은 명종 때의 현감이 심었다고 하는데 그 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학동마을의 입향조는 최씨, 이씨, 박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손가락 굵기의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그리 어렵지 않게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로 내리막길로 향한다
나무들은 아직까지 잎이 나오지 않았고, 해남군에서
조성한 듯한 둘레길의 형태인지, 알록달록한 리본들이 보이고
길이 좋아서 편하게 맥길을 이어간다
화랑 관창을 그리며 죽은 무용처자의 혼령인가...
바위밑에 핀 각시붓꽃이 낙엽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325.9m봉(10:10)
325.9m봉을 지나는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산벚꽃이 홀로걷는
산꾼을 격하게 환영을 하는구나...그래 나도 반갑구나
안부(10:14)
이곳이 아침재인줄 알고 트랙을 확인하니 조금을 더가야 한다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트랙을 본 김에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한모금
마시면서 숨쉬기를 한 다음에 다시 아침재로 향한다
아침재(朝嶺:10:20)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와 마산면 장촌리를 잇는 고개로 금강산이 서쪽으로
줄기를 뻗어 내려간 중턱에 가로질러 있는 재인데, 좌.우측으로 이어지는
고개는 민초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지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이 고개는 수목이 우거지고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은 왕래가 거의
뜸하나 옛날에는 해남과 마산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마산면에는 백제 이래의 현치지(懸治址)인 죽산현이 있었는데, 죽산현은 백제 때는
고서이, 신라때는 고안이라 불리다가 고려 때부터 이조 초기에 죽산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죽산현에는 명종때 대사간(大司諫)과 관찰사 등을 지낸 석천 임억령(1496년~1568년)을
비롯 명문고관 재사들이 모여 학문을 닦았다. 그런데 지금의 해남읍은 1412년(태종 12년)에서야
옥산현이 됐고 현감이 세종 30년에야 정식으로 부임했다... 당시 우리나라 5대 명문가에 꼽혔던
연안 이씨와 여흥 민씨가 죽산현에 살았는데 해남읍에 부임한 현감들은 당시 죽산현에
자신보다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많아 아침마다 옥산현 현감이 죽산현의 두 집안을 찾아
문안 인사를 여쭙고 난 후 정사를 돌볼 수가 있어서 아침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아침재는 조선시대까지는 현감들이 넘나들던 길이었지만 해방 후로는 마산면민들이 주로
해남읍을 왕래할 때 이용하던 중요한 길이었고, 학생들의 통학로와 함께 오일장날의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였다. 현재 마산면 상등리와 마산면 소재지를 연결하는 길이 뚫려 아침재는
옛길이 되어버렸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이 길을 뚫을 때 꼬불꼬불하게 했다고 해서 마산면민들은
이 고개를 꾸부럭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아침재에서 고도를 높이는데 등로 우측에는 돌아선 송전탑의 NO는 알수가 없고
송전탑 뒷쪽으로는 북만대산이라 불리는 마산면의 만대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무명봉(10:22)
갈림길(10:25)
무명봉을 지나면서 만대산과 금강산이라는 명산이 있어서 편하게
걸어왔던 제도권의 등로는 좌측으로 향하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향하는데 이곳부터는 악명높은 화원지맥의 잡목구간이 시작된다
우측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빛바랜 선답자의 시그널이 하는 말...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소’하는 듯 하다
무명봉(10:28)
안부(10:30)
어마무시한 등로...아예 길은 보이지 않고, 엄청난 잡목의 태클로
인하여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感이 오질 않는다...각오는 했지만
예상보다 강한 잡목의 저항에 베낭이 찢기고, 발 아래는 땅가시 같은 놈이
엄청난 저항을 하는구나...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니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뜻인데, 모든걸 체념하고 묵묵히 걸어가 보련다
289.9m봉(10:33)
험한 길을 헤쳐 나가려니 온 몸뚱아리는 상처투성이고, 손등은
가시로 인한 상처로 鮮血이 낭자하다...산길은 지맥의 本色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안부(10:36)
무명봉(10:40)
지독한 잡목의 저항으로 안그래도 느린 범여의 발걸음이 더 더딘 느낌이다.
등로가 보이지 않은 내리막길엔 가시나무와 산죽이 뒤엉켜서 산꾼을 괴롭힌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벌목지가 나오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편안한 벌목지로 내려간다
어랴!...아직도 진달래도 滿開하지 않았는데 철쭉이 피는구나.
원래는 진달래가 지고난 다음에 철쭉이 피는게 정상인데...
세속의 인간들이 비정상으로 살아가니 산에서 피는 꽃들도
똑같이 닮아가는구나...세상 참 末世로다
맞은편에는 잠시후에 오를 255.7m봉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역마산이 얼굴을 내민다
에공!...아까운거...먹지못할 정도로 두릅이 피어버렸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그래도 먹을수 있는 두릅들이 보이는구나.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다니면서 데쳐서 막걸리
서너병을 먹을만큼의 두릅을 수확한 다음에 임도로 내려간다
임도에서 만난 봄의 전령사인 양지꽃(꽃말:사랑스러움)
해남읍 구교리에서 장촌리로 넘어가는 임도가 나오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아침재라고 부른다.
해남군에서 임도를 따라서 걷는 둘레길 형태로 만들어 놨는데
구교리 학동까지 1.9km, 장촌까지 2.9km, 고개 우측 바로 아래의
화내까지는 0.1km라는 이정표가 있고, 바로 앞에는 아침재 농장이 있다
신 아침재(朝峙:150m:10:54~11:00)
조금전에 지나온 아침재와는 또다른 아침재를 만난는데, 주위에는 벌목한 산과
아침재 농장이 있는곳에 해남군에서 설치한 임도 둘레길의 이정표가 있고, 비포장
도로이긴 하지만 소형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학동마을에서 마산면 장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조선시대 마산면
장촌리에는 해남을 좌지우지하는 토호세력이 살고 있었다고 하며 해남에 부임해온 현감들은
토호세력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하여 매일 아침 아침재를 넘어 문안인사를 다녔다고 하는데
현감들이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가기 위하여 넘어 다녔다고 하는데서 아침재 이름이 유래
되었으며 조치(朝峙)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아침재는 본래 아침재 위치(학동마을에 있는 해남의 희곡작가 우록 김봉호 생가 쪽)와는
다른 해남읍 구교리 학동마을에서 마산면 화내리와 장촌리 쪽으로 임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지금은 해남읍에서 마산면 화내리와 장촌리로 넘어갈 때는 뚜드럭재를 통하여 다니고 있어
아침재는 인적이 드믄 편이다.
신 아침재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는데, 갑자기 목덜미가 가렵고 따가와서
미칠 지경이다...그렇다고 보이지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베낭을 내려놓고, 수건에다 물을 적셔서 가려운 부위를 닦아보지만
가려움을 멈추지 않는구나...일단 산행을 마치고 생각하기로 하고
가려움을 참으면서 다시 길을 떠난다
???
우측의 임도를 따라서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오르막길의 임도는 잠깐 사이에 길이 보이지 않은 묵은 임도로 바뀌고,
주위에는 여리고 보들보들한 고사리들이 많이 보인다...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거 봤어...산행이고 뭐고 생각않고, 잠깐 사이에 꽤많은
고사리를 수확한다
고사리를 채취하면서 올라서니...
소나무조림지로 바뀌어버린 묵묘가 나오고 등로는 갑자기 사라진다
묵묘의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가지를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변한다 하여 물푸레나무라는 이름이
붙혀진 물뿌레 나무가 꽃을 피우면서 힘들게 길을 걷는 산꾼을 반긴다
등로가 보이지 않는 희미한 길로 올라서니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지맥길을 안내한다
다시한번 치고 올라서니 막걸리병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파묘가 나온다
파묘(11:13)
이 분은 전생에 酒님을 엄청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조그만 암릉을 지나...
맥길을 우측으로 살짝 꺽어지면서 등로가 열리면서 장촌리(長村里)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남군 마산면에 있는 장촌리(長村里)는 장자(長者), 즉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자(長者),
장재(長材), 장촌(長村)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촌(長村)으로 부르게 되었다.
본래 해남군 마포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계리와 장재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로 개설되었는데, 이 중 남계리는 1789년(정조 13)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마포면에 속한 마을로 나온다. 현재 장촌마을과 남계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장촌마을은 마을 주민인 무안박씨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 중엽까지 송씨, 정씨, 마씨가
들왔다고 하며, 1650년경 무안박씨 박수향(朴壽鄕)이 해남읍에서 이주하였으며, 40년 후 장흥임씨
임성우(任聖佑) 형제가 들어왔다고 한다... 남계마을은 구전에 의하면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까지는
송씨, 정씨, 마씨가 거주하였는데, 1600년경 해남윤씨 윤면지(尹勉之)가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등로 바로 건너편에는 마산면에 있는 만대산이 보이고, 그 아래에
있는 저수지가 장촌저수지라고 불리는 만년저수지이다
255.7m봉(11:32)
신 아침재라 불리는 임도에서 올라오는 길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물론 산에서 먹은것이 없어서 그러기도 하지만, 목덜미의 가려운 부위가
이제는 쓰리면서 아프기 시작한다...다시 베낭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물로
적셔서 쓰라린 부위를 닦아본다...근데 이게 뭐여!...베낭에 진드기 몇마리가
붙어있는게 아닌가...아...이 넘이 주범이구나...근데 왜 진드기가 극성을 부리나?
빨리 뚜드럭재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무명봉(11:41)
지맥 산꾼들에게 엄청나게 갑질을 해대는 망개나무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면서 내려가는데 건너편의
역마산이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하는 말...
사서 개고생을 하는구먼...
지독한 잡목지대를 피해서 살짝 좌측으로
가다가 사면길을 따라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겨울잠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목지대 아래로 내려간다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군 교통호가 보이고 그 아랫쪽을 보니
도저히 내려설 수 없는 돌담이 보이고...
도로가 보이고 반사경이 있는 곳의 수로를 통해서 뚜드럭재로 내려선다
뚜드럭재(88m:12:00)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와 용전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화내리로 넘어가는 재로
상등리와 화내리 경계에 있으며, 2차선 아스팔트 도로(도로명 주소:마산로)가
통과하는 뚜드럭재라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뚜드럭재라는 지명의 유래는
찾을길이 없는데 또다른 지명으로는 유목재라고 부르기도 하며, 근처 마산면 용전리에
버드나뭇골마을(유목동)이 보이는데 버드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으로 유목동이라고도 불리는 마을이 보이는데 이 유목동에서 이름을
차용해 유목재라 불리기도 한다고 전한다
고개를 가로지르면서 이른 아침에 해남터미널에 문이 열리지 않아서
서울가는 버스표를 예매하지 못해서 스마트폰으로 17시에 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려고 하는데 버스표가 완전 매진이라는구나...
하는 수 없어 해남에서 목포로 가는 버스표는 많이 있으니
늦은 시간에 목포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려니
목포에서 서울가는 버스는 심야시간대까지 매진이란다.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이다
역마산으로 오르는 발걸음을 멈추며 오늘 산행은
여기서 접기로 하고, 다시 뚜드럭재로 되돌아 간다
뚜드럭재로 되돌아와서 베낭을 정리하고 수통에 남은 물로 수건에
적셔서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지나가는 차량들을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시도하는데 지나가는 차량들은 꽤나 많은데
10분동안 히치를 시도해 보지만 실패를 한다.
하는 수 없어서 서초동에서 인테리어를 하는 민사장이 이곳 마산면 출신이라
도움을 요청하니, 자기 친구 한명이 해남읍내에서 개인택시를 한다고 하면서
이곳으로 택시를 보내주겠다고 하여, 15분을 기다리니 택시가 도착하고
택시를 타고 해남터미널로 향한다
해남터미널(13:30)
해남터미널에 도착하여 행여 취소된 표가 있나하고 매표소에
문의를 해봤지만, 전혀없다...하물며 광주가는 버스표도 없다.
다행히 완도에서 출발하여 이곳을 거쳐 광주로 향하는 14시 30분
버스표 한장이 있어서 표를 예매하고는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
들려서 잔치국수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터미널 대합실
의자에서 멍때리기를 하다가 광주가는 버스에 오른다.
이번주에 왜 버스표가 없는지 알아보니 식목일에다 청명, 한식이
겹친탓에 승객이 많아서 그런걸, 터미널 직원을 통해서 알았다...
해남발 → 광주행 버스표
14시 30분에 광주로 가는 버스는 광주시내에 들어서서 상당히 밀리는
바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한참 늦게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에 도착한다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16:30)
광주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예매를 하는데, 우등과 프리미엄 고속버스는
저녁 9시 이전것은 모두 매진이다...참으로 난감하다...그런데 갑자기
17시 15분 40인승 일반버스표 한장이 취소된 게 나오는게 아닌가.
재빨리 예매를 하고는 시간이 좀 남아서 화장실에 가서 씻고 나오는데
조금전에 예매한 버스표가 사라진다...상당히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창구로 가서 사정을 하니 예매한 신용카드를 달라고 하여
카드를 주니 手記로 승차확인서를 끊어준다...총기있는 내가 언제부터
어리버리하게 되어 버렸나...
천신만고 끝에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 다음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 창밖을 보니 날씨가 어두워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또 다시 깊은 밤에 빠지고
광주를 출발하여 강남터미널에 도착하니 4시간이 더 걸렸다
♣ epilogue
집에와서 거울로 뒷 목덜미를 확인하니 진드기란 놈이 살 속을
파고 들다가 힘에 부치던지 몸뚱아리 절반을 바깥으로 드러낸
채 장렬히 전사했구나...은근히 걱정이 된다...한 여름에나 있을법한
일이 초봄부터 생기니...아무래도 화원지맥은 내년 겨울로 미뤄야
할 듯 싶다...이튿날 아침에 출근하여 병원문을 열자말자 병원으로
가서 몸에 박힌 진드기를 빼내고 치료를 받았다...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병원장 曰: 산은 이제 그만 타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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