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白頭大幹의 마무리하는 스틱을 내려놓는다
☞산행일자: 2024년 11월 03일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약간 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9.3km 들머리 6.2km / 6시간 5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박달나무 쉼터- 약수터-소간령- 홀리 갈림길- 화암재 갈림길- 민가- 마장터
대간령-조망바위-889.0m봉-마장터 갈림길-안부-갈림길- 병풍바위봉 갈림길
병풍바위봉-갈림길-안부-마산봉 갈림길-마산봉-다시 마산봉 갈림길 -쉼터(1)-안부
쉼터(2)-무명봉-쉼터(3)-안부- 무명봉-알프스콘도-홀2리입구-눈물고개-군부대정문
홀리마을갈림길-임도 사거리- 진부령관광농원- 홀1리마을 갈림길- 안부- 무명봉
백두대간 종주기념공원-진부령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 인제군 북면
2017년 10월 29일에 3번째 백두대간을 마무리하고 한동안 산행을 지맥길에 올인하다가
2018년 여름에 건강검진을 하면서, 靑天霹靂과 같이 찾아온 날벼락...폐암 초기라는
판정을 받고, 곧바로 수술대에 올라 9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 그리고 긴 시간의 항암치료를 받고나서, 서서히 조금씩 기력을 회복한다.
힘든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지만, 참으로 인간의 목숨은 질긴기라... 수술을 하면서 비록 좌측의 폐를 도려
내고, 저승 문턱까지 갔다왔지만, 아직까지 今生에서 할 일이 있었는지 염라대왕이
부르지 않아서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고, 병원을 다닌 끝에, 만 6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지금은 거의
완치 판결을 받았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지난 8월에 정기 검진차
병원에 들렸더니만, 주치의가 깜짝 놀란다...선생님! 의지력이 참으로 대단하시다고...
다행히 내 병은 약은 전혀 안 먹어도 되고, 무조건 걸어야만 살 수 있는 병이란다...
그래... 人命은 在天이라 하지 않았던가...죽고사는거야 하늘의 뜻이라 했지
그래서 시작한 게...2020년 10월 나홀로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4번째
길을 나섰는데, 오늘 강원도 최북단 진부령에서 有終의 美를 거두려고 한다
앞선 3번째의 대간길은 대부분이 산악회를 따라 무박 산행을 하면서 35구간을
나눠서 했지만, 지금의 내 체력으로는 산악회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焉敢生心이다.
나 혼자서 대부분이 당일 산행으로 하다보니 산행 횟수가 61회나 되었고, 소요되는
경비도 만만찮았지만, 그 대신에 예전에 어둠속에 지나갔던 산줄기를 전부 볼 수
있어서 좋아도 너무 좋았다...한반도의 등뼈라는 백두대간의 山川景槪를 즐겼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듯 싶다
백두대간 개념도
백두대간이라는 말의 사용은 10세기 초,『옥룡기』에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이 등장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 있다. 이후 「고려사」,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 「산수고」와 「산경표」같은 문헌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과 기록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렇듯 백두대간은 10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인식개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시대를 지나며
산맥론에 묻혀 잊혀졌다.
이후 1980년대에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가 헌책방에서「산경표」를 발견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백두대간을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시민들에게도 친근한 개념이 되었다.
최근에는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을 제정하여 백두대간의 실체를 법으로도 인정하였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엔 한반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14개의 산맥으로 구성돼
있다고 했으며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개념을 정립했다고 되어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두류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하는데, 백두대간의 개념을 처음 사용한 인물은 도선국사(道詵國師)로 알려져 있다.
도선국사는 한반도 산세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그친다며, 그 산세는 뿌리에 물을 품은
나무줄기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며 우리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는 조선 중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처음 등장하고, 이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1712~81)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에서 한반도 산줄기와
갈래, 그리고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백두대간,장백정간과 13개 정맥으로
산줄기에 위계를 부여하여 체계화 했다.
이 산경표가 실제 산줄기와 물줄기의 흐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산과 강에 대한 독특한 인식체계로서 [강이 흐르듯 산이 흐르며,
산은 강을 가르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기준에 따라 분류했던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따라서 산맥은 땅밑 지질에 따라 정리한 개념이고, 백두대간은 산줄기, 산지에 따라 이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교과서에 실려있는 산맥 지도는 완전히 변형된 체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산맥 개념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80년대 초 지금은 고인이 된 고지도 연구가 이우영씨에
의해서다. 이후 30년 가까이 산맥과 대간(일종의 산줄기) 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아직도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내 체력으로는 들머리(박달나무 쉼터)까지 대중교통으로는 조금 애매하다.
그러던 중에 가뭄에 콩나듯이 간간히 이용했던 안내산악회가 이날 나와 똑같은
구간에 졸업산행을 한다는 공지가 산행 대장님한테 자리 하나를 부탁했더니만
출발 하루전까지도 빈 자리가 없다고 미안해하면서 전화가 오는구나.
들대장님한테 괜히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 괜찮다고 하면서 산행 계획을 세운다.
이 구간은 거리도 짧고, 대간령에서 마산봉까지만 올라가면, 내리막길에다
그 이후는 고도차가 별로 없는 곳이라 이런 곳에서는 내 몸뚱아리도 정상 산꾼을 충분히 따라
잡을수가 있기에 산악회를 따라가면 경비도 줄일수 있어서 내심 기대했지만...아쉽다
박달나무 쉼터(06:10)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동서울터미널에 가서 06시 49분에 백담사 입구인
용대삼거리까지 소요되는 버스시간이 2시간 10분...이곳에서 박달나무
쉼터까지 택시를 타고가서 산행을 준비하면 산행 시작 시간이 아무리 빨라도
10시는 되야될 듯 싶다.
그리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귀가를 해야 하기에 귀경하는 차 시간이 애매하여
차를 가지고 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차를 몰고 들머리인
박달나무 쉼터에 도착하니 06시 10분...아직도 여명은 가시지 않고, 犬公 2마리가
차를 주차시키는 범여를 격하게 환영(?)한다
견공들의 난리부르스 때문인지 쉼터에는 불이 켜진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듯한 쥔장 여인에게 하산하여 식사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쉼터에서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6:20)
쉼터를 지나 주차장같은 넓은 공터를 지나 창암계곡을 지나는데
물소리가 정겹다...미시령 서사면에 發源하여 내려오는 창암계곡...
날씨만 밝았다면 우측에 보이는 멋진 창암바위는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듯 어둠속에 갇혀 꼬빼기도 안 보인다
창암계곡을 지나니 억새밭이 나오는데, 예전에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인데, 遊休地로 지금 이곳에는 억새가 쥔장
노릇을 하고 있구나
국립공원이란 노란 말뚝이 박혀 있는데 관리 주체가 국립공원이 아닌
환경부라고 되어 있는데, 미시령을 기준으로 남쪽의 설악산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북쪽은 금강산이라 환경부에서 관리하는 모양이다
금강산의 거의 대부분이 북녘땅에서 그러는 모양이다
어둠속에 20여분 정도 걸어니 갑자기 날씨가 밝아지기 시작하고
며칠전에 온 비의 영향 탓인지 낙엽은 젖어있고, 안개가 살짝 낀
계곡이 夢幻的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신선봉 서사면 계곡에서 발원한 물길은 홀리 방향으로 빠져
버렸고, 소간령 남쪽 아래에서 발원한 이 물길은 용대리까지 이어진다
1년전에 혼자 내려왔던 길이라 그리 낯설게 느껴지는 않는구나
조금의 고도를 높혀서 올라가니 양은그릇이 물을 받아내고 있는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06:55)
예전에서 이곳에서 살았다는 약초꾼 정준기씨가 만들었다는
약수터에 도착한다...이곳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듯 싶어서 옆에있는 컵으로 물 한모금을
마시고 올라서 소간령에 도착한다
소간령(小間嶺 작은샛령:585m:06:58)
대간령(샛령)에서 마장터를 지나 1시간 10분정도 걸어서 만난 고개
대간령의 오름길이 된비알이라 이곳 사람들은 "된박재"라 부른다.
대간령을 ‘큰 대(大)’ 자를 썼지만, 대간령은 부드러운 언덕 수준이다.
대간령이 그러니 소간령은 말할 것도 없다... 백두대간을 넘는데도 길이
순한 건, 이미 인제 들머리 해발고도가 높아서 표고 차가 적기 때문이다.
고개 가운데에 커다란 돌무더기와, 인제천리길의 스템프가 있고,
우측의 성황목 아래 작은 제단(祭檀)이 소간령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의 통과의례에 관한 속설이 있었다고 하는데
1, 돌무더기에 돌 세개를 얹히고
2, 세번 절하고
3, 세번 침을 뱉으면 재수가 좋다고 했단다.
이 제단은 마장터에서 44년간을 살면서 마장터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던 약초꾼 정준기씨가 제단을 만들고, 바로 아래에 약수터도
만들었다고 한다
소간령에서 마장터로 내려가는 정말 호젓하다.
이 청정지역을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정말 좋은 날씨에
나홀로 걷는다는 건...난 정녕 복받은 산꾼인가보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새이령(대간령)으로 향하던 중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을 유난히 많이 만나는데,
이 낙엽송은 박정희 정부가 화전정리사업을 위해 1970년대 말
화전민을 이곳에서 이주시킨 뒤 그들이 살던 곳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소간령을 내려오니 정겨운 계곡이 나오는데, 박달나무 쉼터를 지나면서
만난 지나온 계곡과는 달리 소간령 북쪽 아래에서 발원하여 진부령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구비 계곡의 시작점인 곳이기도 한 물줄기이다
홀리 갈림길(07:15)
좌측으로는 고성군 간성읍 홀리로 가는 길이고 우측의 대간령으로 향한다
1년전에는 보지 못했던 프랑카드가 걸려 있는데, 이곳도 사람이
다니는 길인가 보다...우측에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넓은 공터를 지나니 화암재로 올라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화암재 갈림길(07:17)
화암재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마장터에서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우측 아래 화암사에서 고개 이름을 따와서 화암재라고 부른다.
언젠가는 화암재 아래에 있는 화암사로 가볼 생각이다.
이른 아침에 홀로 걷는 이 기분...
내가 마치 신선(神仙)이 되는듯한 기분이다
神仙의 “선(仙)” 자는 ‘사람 인(人)변에 뫼 산(山)자’ 를 합치면
‘신선 선(仙)’이 아닌가...사람이 산에서 살면 신선이라는 뜻인가?
민가(07:18)
지난해와는 달리 이른 아침인데도 인기척이 없다.
산골살이가 힘들어서 산 아래로 내려갔나?...
지난해 입구에 있던 초인종 역할을 했던 양은 솥뚜껑도 안보인다
마장터에는 마을의 흔적이 희미하다.
그저 숲 한가운데 가느다란 오솔길이 있을 따름이다.
그곳이 마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숲은 다채롭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마을 여기저기 군집을 이룬 낙엽송 숲이다.
1970년을 전후해 화전만이 나간 빈 집터와 밭터에 심은 것이란다
심은 지 반세기가 지난 낙엽송들은 온통 ‘수직의 세상’을 이뤘다.
인제천리길... 사람, 문화, 자연을 하나로 새로운 역사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인제 숲길은 남북 북단으로 나뉘어지고 소양호로
옥토가 수물되고 고원지대 수천만평이 훈련장으로 차가 다니는 길로
포장되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제천리길은 다시 길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옛길은 찾아 다시 잇고
있으며, 인제 숲길을 생명의 텃밭,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인제천리길은 36구간(505km)이어진 길이라고 한다.
개울 건너편에는 비박쪽 텐트 서너개가 보이는데,
이제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는가 보다.
나도 예전에는 무거운 텐트를 메고 비박을 참으로 많이 했는데,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하는 저질 체력이 되어 버렸으니...아!..옛날이여...
가는 세월을 어찌하면 좋을꼬...
마장터 마을은,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그야말로 거대한 숲 한가운데 있다.
첩첩산중에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평평한 ‘수평의 세상’이다.
지형만 봐도 마장터에 마을이 생겨난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다.
마산봉과 신선봉 사이 계곡을 따라 타래 풀린 명주실처럼 이어진다.
계곡이라곤 하지만, 폭포를 이루는 바위 계곡이 아니라 땅을 스미듯 적시며
흘러가는 물길인데 이런 계곡을 따라가니 길이 순할 수밖에... 마장터로 이어지는
길은 평지는 아니지만, ‘평지나 다름없다’고 써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가파르지 않아서 쉬지 않고 걸도 숨이 차서 멈춰서는 일은 없다.
계곡을 끼고 올라서니 지붕이 폭삭 주저 앉은채로 있는 마장터 가옥이 나온다
마장터(馬場垈:07:31)
‘마장터(馬場垈)’란 마을 이름은 ‘말을 사고팔던 장이 있었던 터’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지명으로, 고성과 양양(지금의 속초), 인제 사람들이 물목을 교류하던 장터다.
고성과 양양 사람들은 소금과 고등어, 이면수어, 미역 등을 지게로 날라왔는데,
내륙지역인 인제 사람들이 좋아하는 해산물이었고, 반대로 인제 사람들은 감자와 콩,
팥 등의 곡물들을 이곳까지 가지고 왔으니 마장터는 수산물과 농산물이 오가던 길인
셈인데, 마장터란 이름도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성과 인제를 오가던 보부상들이 쉬어가고 물목을 교환하던 곳으로 또한 예전에는
말을 이용해 짐을 운반하며 고개를 넘기도 했으니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말들을 쉬게 해서
마장터란 지명이 불리지 않았을까?
당시에 고성 사람들은 대간령을 넘어 인제를 지나서 원통까지 드나들었고,
이 길은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생기기 전에는 인제에서 고성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이었다
일제강점기 무렵에 마장터에는 서른 가구가 넘게 살았다니 역사상 가장 북적이던 시절이다.
‘고작 서른 가구’라 코웃음을 치겠지만, 가서 보면 안다.
이 멀고 깊은 첩첩산중에 그게 얼마나 믿기지 않는 얘기인지. ..그 무렵 마장터에는
함지박을 만드는 공장과 기차선로 침목 생산 공장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샛령정상 성황당에서
성황제를 올렸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화전정리가
시작되고 진부령과 미시령이 생기면서 마장터는 옛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전설의 고향이 되어 버렸구나.
마장터 개울 너머로도 비박족이 보이는데 지금으로선
나에겐 비박이란 꿈도 꿀수없는 안감생심이다...그저 부러울 뿐이다
한계령과 진부령, 미시령 고갯길이 닦이고, 터널까지 뚫리면서 걸어 넘던 대간령은
교역로의 수명을 다했다... 빠르고 편한 길이 놓이면서 이전의 길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렇게 길이 잊힌 뒤 마장터에는 화전민이 찾아들었다가 전방지구의 잦은 무장공비
출몰을 이유로 화전민이 쫓겨난 뒤에는 봄이면 나물, 가을에는 버섯을 따며 산에
기대서 생계를 꾸리는 서너 가구가 들어와 투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마장터가 ‘오지의 전설’이 됐던 게 바로 이 무렵이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닿지 않는 곳.
짙은 숲 속으로 난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첩첩산중으로 걸어 들어가면 거기 호롱불
심지에 불을 켜고 사는 이들이 있었다... 압축성장 시대를 힘들게 건너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그곳은 로망이 되고도 남았다.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 다들
안간힘을 써야 했던 그 무렵, 마장터는 ‘시간의 변화를 거부하는 곳’의 상징이자,
감행할 수 없는 상상 속 탈출의 목적지였다.
예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듯한 집터같은 흔적들이 보인다
예전에는 마장터 주변에 서른 가구가 살았었다고 하지만, 그때도 마장터는
세상과 등 돌려 앉은 꼭꼭 숨겨진 오지였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마장터까지 가는 숲길은 멀고, 그 길을 한참동안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곳이 얼마나 오지였는지를 설명하는 마장터 사람들의 이야기 끝에 늘
등장하는 게 ‘8·15 해방을 보름쯤 뒤에야 지나던 스님의 귀띔으로 알게 됐다’는 얘기다.
스님에게 해방 소식을 들고 일본인 관리인 아래서 침목을 만들던 이들이 연장을
던져버리고는 만세를 부르며 산에서 내려갔다던가... 흔히 오지를 말할 때 ‘6·25전쟁 때
난리가 난 줄 몰랐다’는 비유를 들지만, 마장터는 그랬을 리 없을 때니까...
6·25 때는 백두대간 첩첩산중까지 전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니까.(문화일보 자료인용)
대간령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신선봉 서사면에 흘러 내리는
합수점을 지나서 대간령으로 향하는 등로는 고도를 조금씩 높이는데
들머리인 대간령이 다와 가는 느낌이다
마장터를 비롯해 고개 서쪽(영서)은 ‘밭갈애비’들의 땅이라고 하는데,
강원도에서는 논밭 가는 사람들을 ‘밭갈애비’ 혹은 ‘보애비’로 불렀다.
밭갈애비 기술의 정점은 화전 경작이었는데, 밭이 비탈진 데다, 돌과 나무
뿌리가 많아 소가 끄는 겨리연장(쟁기)을 기술적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인제·화천·양구·홍천 등 영서 중북부 지역은 화전 경작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시대에 농학자(農學者)였던 우하영(禹夏永:1741~1812)이 쓴
『천일록(千一錄) 』의 기록에는 ‘(강원도) 산골짜기에는 본디 황무지가
많아서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니, 묵정밭을 불태우고 경작하고 파종하며…
(음력) 5~6월 사이 한 달 동안 장맛비가 오면 곡식이 모두 녹아버린다…
강원도 산골만이 밭농사를 망치면 바로 유리도산하게 되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곳의 기록이 있다
이 길을 따라서 내륙의 物産과 동해안 바닷가의 소금과 생선을 지고
짐꾼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라서 예전에는 주막도 있었고
말과 당나귀들이 쉬었다는 마장터도 있었다고 한다
앙증맞은 조금만 폭포를 지나...
마지막 대간길의 들머리인 새이령(대간령) 정상에 도착한다
대간령(大間嶺:641m:08:00)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미시령에서 이곳까지는 비탐구간으로 예전에는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된
등로인데 지금은 많이 느슨해진 탓(?)인지 좀 편하게 이곳까지 왔다
고개 정상에는 이정표와, 출입금지 팻말, 돌탑과 돌로 만든 벙커, 쉼터 의자와
예전의 주막터가 있는 펑퍼짐한 고개이다
샛령 혹은 새이령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진부령과 미시령의 사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샛령·새이령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이 되었고,
큰 샛령(새이령)과 작은 샛령(새이령)으로 구분하여 대간령·소간령이 되었고,
그 옛날 인간이 네발(자동차)이 아닌 두발로 다닐때 강원도로 가는 유일한 길이
이곳 대간령으로 미시령과 진부령이 생기기 전에 영동과 영서는 잇는 중요한 고개로
속초와 고성에서 해산물을 싣고 원통과 인제로 넘나들었다 하는데 대간을 순 우리말로는
사이이다.그래서 "새이령"이라고도 한다.
대간령보다는 샛령으로 부르는 원주민들에 의하면 고갯마루(샛령)에는 산신각과
원터(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직도 고갯마루에서는 돌담과 집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간령은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옛길로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도 사람들의 왕래가 더 빈번했던 고개였다.경사가 완만한 데다
거리도 지금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던 탓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파령(石坡嶺)이라고도 했고,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어서 원기령(院基嶺)이라고도 했다는 대간령, 지금은 대간꾼 외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이고, 석파령(石坡嶺)은 신선봉의 너널지대에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소파령은 석파령(石破嶺)이라고도 했다’고 쓰고 있고
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文臣을 지낸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은『수성지(水城志)』에 ‘죽도와 토성 사람들이 영서로
갈 때 쓰던 지름길’이라고 기록했다...그래서 지름길을 뜻하기도 하는 샛길은
새이령의 다른 이름인 ‘샛령’을 낳았다고 한다.
“진부령은 지루하고, 미시령은 짧지만 까다롭고, 한계령은 수려하지만 험악스럽고,
구룡령은 장쾌하지만 무거웠고,반면에 새이령은 참으로 부드럽다”며 주변 고개보다
인지도가 높았음을 밝히고 있다.
아...이게 누구십니까?
한검선사께서는 언제 지나 가셨나...
몇년전 지리산 묘향암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낸지가
엊그제 같은데...보고 싶습니다.
그 당시 같이갔던 권작가(현오), 수헌, 산으로 아우님들도
잘 지내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구료.
신선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출입금지란다.
다닐 산꾼은 다 다니고 있소이다
이곳이 옛날 성황당과 주막이었던 자리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는 여기저기 돌담을 짓느라 흩어져 있는
이곳 돌무더기 있는 곳이 예전에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한 주막이란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용대리로 가는 인제 천리길이 조성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고성군 토성면 문암천을 끼고 도원리 계곡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곳이라 최근에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 곳인데,
본격적인 범여의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의 첫 발걸음을 시작한다
대간령에서 박달나무 쉼터까지의 지도
마산봉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길로 향한다
비가 온 뒤의 습개로 인해 생긴 안개는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고, 어느새 해는
中天까지 떠올라, 범여의 4번째 대간길 마지막 구간을 축하해주는 듯 하다
무슨 버섯일까?
산행을 오래하면서 본 야생화는 조금 알겠는데, 버섯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으니...범여의 머리가 나쁜걸까?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이라...나무에 매달려 있는 버섯을 툭치니
포자(胞子)가 툭 터지면서 방귀버섯처럼, 희안한 가루를 내뿜는다
마치 지맥길(?)같은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최대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산봉으로 향하는 고도를 높혀간다
사랑하는 후배들의 흔적.
저 산방에서 백두대간 2번, 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 참으로
愛憎이 많았던 산방이었는데, 예전에 나와 같이 걸었던
Legend 산꾼들은 대부분이 스틱을 내려 놓거나, 활동을
중지한 상태고, 지금은 잘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
지금이야 내가 저 산악회를 나간다는 자체가 민폐라서
가지도 않을 뿐더러, 앞으로도 갈 일이 없을 것 같은데도
그래도 저 시그널을 보니 무척이나 반갑구나
지맥길같은 희미한 등로를 올라서니 좁은 암릉구간이 나오고
로프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로 암릉위로 올라서니 조금전
내가 지나온 용대리 계곡을 뒤덮은 雲海의 춤사는 환상적이다
歡喜心으로 다가오는 벅찬 이 감동...나홀로 보기에는 정말 아깝구나
4번째의 마지막 대간길.
다시한번 대간길을 도전하기에는 현재의 내 체력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듯 싶다
착잡한 내 심정을 저 운해는 잘 아는듯, 마지막 걸음에서 새로운 발걸음으로...
점점 짙어지는 雲霧의 춤사위를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울만큼 환상적이다
아쉽다면 축하산행을 해주는 동료 산꾼은 없지만, 내 몸뚱아리는 내가 알기에
스스로 慰安하며 진부령으로 향하는 뚜버기 걸음을 계속된다
걸을 수 있다는 건 살아있음을 刻印시키는 거 아닌가...
대간을 끝내면 이제 30여개정도 남은 지맥길을 마무리 해보려고 하는데
70대 나이에 사람의 앞일이란 어찌될찌 몰라 조금은 걱정이 된다
水水山山是何問(수수산산시하문)
물은 물, 산은 산
이 소식을 그 어디 물어볼까?
碧空笑破三日聾(벽공소파삼일롱)
푸른하늘 웃음소리에 사흘 귀먹었네
東嶺雲起西風吹(동령운기서풍취)
동령에 일어난 구름 서풍에 사라지니
滿目靑山風月清(만목청풍월청)
눈앞의 청산에 맑은 바람과 달
최근에 입적하신 혜거(慧炬)스님 열반게송(涅槃偈頌)
* 게송(偈頌)이란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를 뜻하는데,열반게송(涅槃偈頌)은
열반송(涅槃頌), 임종게(臨終偈), 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하며, 선승이나 고승들이
열반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말한다...漢詩의 오언절구(五言絶句)나 칠언절구(七言絶句),
형태를 취하지만, 임종게 역시 형식이라 하여 남기지 않는 고승들도 있다
범여의 마지막 산길에는 아직까지 바람한 점 없는 고요한 날씨이다.
조금전 조망바위에서 운해의 춤사위에 잠깐 魂이 나갔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다음에 암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조망바위(08:45)
용대리 계곡에서 대간령을 넘어 도원계곡으로 향하는 운해 너머로 보이는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868.4m봉(첫번째), 신선봉(2번째)과, 상봉(3번째)이
아직도 운무에 가려진채 흐릿하게 보이고, 맨 뒷쪽으로는 황철봉이 여인의
적꼭지처럼 볼록하게 보이는게 이채롭다
저멀리 황철봉 너머로 보이는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과 중청봉
그 우측으로 펼쳐지는 용아장성 능선은 肉眼으로는 흐릿하게 보이나
아무래도 똑닥이 카메라로는 워낙 遠景이라 그런지 확인이 안되어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볼 수 있으니 오늘은 복받은 날이다
대간령에서 된오름으로 힘든 암봉으로 향하는 길에 우측으로
펼쳐지는 속초항의 동해바다는 조선조 당시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뭇남성의
애간장을 다 녹였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의 치맛자락처럼 보일락말락
하면서 범여의 애간장을 다 녹인다
펑퍼짐한 산줄기 너머 신선봉 아래에는 쌀바위라 부르는 왕관모양의 수(穗)바위가
있고, 인간의 貪慾을 경계하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화암사라는 절집이 있는데,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한번 가보고 싶은 절집이다
수바위에 전해지는 전설은
첩첩산중인 화암사의 스님들은 시주하러 마을로 오고 가기도 힘들어서
불도를 닦는데 어려움이 컷다고 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공부하던 스님의
꿈속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숫바위 주변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서 지팡이를 넣고 세번 돌리라고 하면서, 그러면 2사람 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을 깬 스님은 꿈속의 노인이 알려준 대로 수바위 주변을 살펴보니
노인의 말대로 구멍이 있어, 이를 발견하고 지팡이를 넣고 3번을 돌렸다.
그랬더니 꿈속의 노인 말대로 딱 2사람이 하루동안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와서,
그 후로는 쌀걱정 없이 열심이 불도(佛道)를 닦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객승(客僧)이 와서 묵게되자, 쌀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자 객승은 "3번 돌려서 2인분이 나온다면 6번을 돌리면 4인분이
나오지 않겠느냐"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앞장서 수바위의 쌀나오는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6번을 힘차게
돌렸는데, 그랬더니 쌀나오는 구멍에서 쌀은 나오지 않고 빨간 피가 나오더니,
이후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부처님의 불법을 공부하는 것도 결코 욕심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암봉에서 주위의 멋진 仙景을 감상하고, 앞에 보이는 889.0m봉으로
향하는 길... 이곳부터는 강한 바람이 불어대는데, 다행히 낮이라 기온이
많이 올라,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암봉을 지나 바람을 피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대간길 능선에
집채보다도 더 큰 돌기둥이 범여의 대간길을 가로 막는다.
이런 장애물이야 셀수도 없을만큼 많이 만났으니...
이런데서 쫄면 산꾼이 아니제...좌측으로 우회하니
미시령에서 황철봉으로 향할때 만났던 너덜겅이 나온다
짧은 구간이지만 두발이 아닌 네발로 암릉 구간으로 기다시피
올라가는데, 부부 등산객과 조우하면서 서로 인사를 건넨다.
오늘 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니, 무척이나 반갑다
힘들게 암릉위로 올라와서 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조금전에 지나온
암봉 너머로 신선봉과 상봉이 범여의 마지막 길을 축하해주는지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잘가라는 인사를 건네는 듯 하다
조금전에 지나온 암봉의 모습
이곳의 바람이 참으로 드센 모양이다.
한결같이 나무들의 가지가 한쪽 방향으로 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저 나무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어쩐가.
반칙과 태클,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잘 살고 있으니
자연의 법칙을 적용하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그러기에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라 했던가?
잘 지내고 있어요 / 목필균
그리움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묻게 한다.
물음표를 붙이며
안부를 묻는 말
메아리 없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전하게 한다.
온점을 찍으며
안부를 전하는 말
주소 없는 사랑이다.
안부가 궁금한 것인지
안부를 전하고 싶은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묻고 싶다가
잘 지내고 있어요.
전하고 싶다.
내가 산을 좋아한다는 건 내 주위 사람들은 다 안다
그리고 가장 많이받는 질문이 어느 산이 가장 좋더냐? 고
하는 말인데 참으로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지리산은 지리산대로 설악산은 설악산대로 특징과 감흥이 있고,
심지어는 백두대간 마루금중에 가운데 가장 높이가 낮아 非山非野라고
불리는 상주 구간의 지기재, 개티재도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
이들 산들은 조화를 이루어가며 때로는 서로 의지해가며 대간 마루금을 형성한다.
만약 모든 산들이 지리산 같으면 지리산은 웅장함을 알 수 없고 모두 설악산
같으면 설악산을 찾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키가 크고 작은 사람, 부자 빈민층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그리고 나름대로의
역할과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에 기여하고 있기에,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산은 특히 대간 마루금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없이 깨우쳐
주는 존재로, 산(대간)은 인간에게 생명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어머니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스승이기도 하다...그러기에 산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되며
산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는게 이 범여의 생각이다
889.0m봉(09:05)
889.0m봉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쭉 내려가는 길에 동쪽의 도원계곡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범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잠시후에 빡세게 올라야
할 병풍바위봉을 향한 워밍업을 하라는 듯 고도를 한없이 낮추면서
안부로 내려간다
마장터 갈림길(09:08)
889.0m봉에서 삼거리 안부로 내려오니 이정표가 있는 이곳 안부가 마장터
갈림길이란다... 마산봉과 병풍바위봉으로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이 대간령을
거치지 않고, 마장터로 내려가서 용대리나 홀리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마장터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
마장터 갈림길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마산봉에서 분기하여
간성(고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멋진 봉우리가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죽변봉(681m)이라는데, 아무래도 내 생전에는
갈 일도 없고, 갈 시간도 없을것 같아서 눈으로 바라본다
안부(09:15~35)
능선에서 옴팍한 안부로 내려서니 능선보다는
바람의 강도가 덜한 느낌이다...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서 이곳까지
물 한모금도 안 먹고 왔더니만,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베낭을 내려놓고, 빵 한조각에, 보온통에 가져온 따뜻한
물로 커피한잔을 타서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대간령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너무 천천히 걸었더니만
생각보다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다
비교적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오니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마산봉 갈림길(10:10)
급경사의 까탈스런 병풍바위봉을 띵가묵고, 마산봉으로 향하는 샛길이다
대간길은 병풍바위봉으로 이어지기에 우측 사면길이 아닌 직진의
급경사로 올라서서 병풍바위봉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까탈스런 오르막길...비록 아주 짧은
구간이지만 이런곳은 몸뚱아리가 부실한 범여에겐 쥐약같은 곳이다
병풍바위봉 갈림길(10:20)
갈림길에서 20m 벗어난 병풍바위봉으로 향한다
병풍바위봉(1.054.6m:10:22)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간성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토성면쪽에서 보면 부드러운 육산으로 보이지만 간성읍쪽에서 보면 바위로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병풍바위는 백두대간상 마산봉과 대간령(새이령)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된 봉우리로
생긴 모습이 산 아래에서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조망이 아주 뛰어난 곳으로 북쪽으로는 마산봉과 향로봉, 칠절봉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신선봉과 상봉, 서남쪽은 매봉산이 멋진 모습으로 우리곁으로 다가온다
봄이면 주위에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여름이면 산의 푸르름과
상쾌함을 느낄 수 있고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과 운해가 산에 끼면 마치 산 전체가
단풍으로 물들어 훨훨 타다가 연기를 품어 올리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는 봉우리로
겨울에는 허리까지 빠지는 많은 눈과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병풍바위봉에 올라 서남쪽을 내려다보니 온 사방이 산으로만
펼쳐지는 인제군 북면, 원통, 인제읍은 雲海의 춤사위로 인해
환상 그 자체이다...대한민국 지자체중에서 2번째로 면적(1646.33㎢)이
넓은 인제군이 크기는 큰 모양이다(첫번째는 홍천군(1,819.60㎢)이지만
인제군은 많은 땅이 휴전선 이북에 있기에 실제로는 가장 큰 군이라고 한다
참고로 서울의 면적이 605.02㎢이라고 하니 인제군이 얼마나 큰 지 알거 같다.
운해 뒷쪽으로는 가까이 보이는 산이 용대리에 있는 매봉산(1,270.8m)이고
맨 뒷쪽으로는 6.25전쟁 당시 북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귀신잡는 해병 ' 이라는 칭호를 받은 도솔산(兜率山:)과 람사르습지로 지명되어 있는
대암산(1,312.6m)도 멋진 모습으로 4번째 대간길 마지막 구간을 걷는 범여의 눈을
호강시켜주니 그저 눈물나게 고맙기만 하다
다시 병풍바위봉 팻말이 서 있는 정상으로 되돌아와서 서북쪽을
바라본다...마산봉에서 알프스리조트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북진
코스의 마지막 등로 뒷쪽으로 진부령에서 북쪽의 대간길로 이어지는
칠절봉(七節峰:1,172m)과 향로봉(1,296m)이 어렴풋이 보이니 가슴이 저려오는구나.
예전에는 아예 꿈도꾸지 못하는 禁斷의 산이였으나, 지금은 1년에 한번은 평화트레킹이라는
타이틀로 군부대의 통제속에 걸을 수 있다고 하며, 칠절봉은 매봉산에서 칠절봉을 거쳐
진부령으로 내려오는 구간은 개방되었다고 하니 언젠가 한번은 가볼 생각이다
알프스 리조트로 내려서는 능선 너머로 진부령관광농원과 좌측으로
홀리마을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펼쳐지는 능선 좌측에 칠절봉이 보이는구나
병풍바위봉 정상에 피어있는 철딱서니 없는 진달래...
병풍바위봉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마산봉으로
향하는 급경사에는 수없는 대간꾼들의 흔적이 보이고...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등로의 낙엽이 비에 젖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갈림길(10:30)
병풍바위봉에서 미끄러운 등로를 따라 내려오니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조금전 병풍바위봉으로 오르지 않고, 마산봉으로
향하는 사면길과 합류하는 지점이다...조금을 더 지나면 마루금이란
샘이 있는 곳인데 지금은 팻말이 보이지 않고, 확인도 못하고 통과한다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고 했던가...
갑자기 등로가 좋아지니 슬슬 졸음이 쏟아지는걸 억지로
참으면서 백두대간 북진길의 마지막 봉우리인 마산봉으로 향한다
안부(10:38)
아무런 동행자도 없이 홀로걷는 마지막 대간길.
예전에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다르지만, 언제부터인가
홀로걷는 이 길이 편해도 너무 편하게만 느껴진다.
이 참에 주변에 필요없는 인연하고는 슬슬 정리하는
계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그래 동반자가 없다고
서러워 하지말자...이 세상에 올때도 혼자왔고, 갈때도
혼자가야 하는게, 사바세계 중생들의 삶이니 너무 서러워 말자
예전의 직진으로 이어지는 급경사길은 편안한 서쪽의
사면길로 돌려놨구나...알프스리조트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가다가 오르막으로 향한다
약간의 오르막길...이런데를 만나면 갑자기 범여의 몸뚱아리가
굳어지는 느낌으로 숨이 차면서 힘이 들지만, 이 또한 산을 타기
위해서는 내가 극복해야 할 길이기에 運命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오~~~통제라...이걸 모르고 왔지만 법을 위반한 건 맞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 통제구간을 벗어났으니 벌금 10만원은
벌은 셈이다...담부터는 절대 안 오겠습니다
마산봉 갈림길(10:50)
이곳에서 우측으로 30여m 벗어난 지점에 있는 마산봉으로 향한다
마산봉 정상에 있는 2등 삼각점(△ 간성24 / 2004 이설)
마산봉(馬山峰:1.051.5m:10:52~56)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과 토성면에 경계를 이룬 봉우리로 산세가 말과 같이 생겨
마산(馬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것으로 전해지며 마산봉(馬山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1911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대대면 죽포리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두 곳의 마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이곳의 마산은 토성면 원암리의 마산이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고지도와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마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는데
금강산 1만2천봉 가운데 하나로 설경이 뛰어나 건봉사(乾鳳寺), 천학정(天鶴亭) 화진포(花津浦)
등과 함께 고성 8경의 하나에 꼽힌다.
금강산 1만2천봉의 남한 제2봉인 해발 1,052m의 마산봉은 백두대간 준령의 알프스스키장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봉우리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절경과 함께 겨울철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위용과 위엄을 함께 느끼게 하는데 마산봉은 봄철 등산코스로도
이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마산봉을 정점으로 서쪽 방향으로 수개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을 중심으로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남한쪽의 백두대간 최북단에 위치하며 신선봉과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이다.
마산봉에서 바라본 칠절봉과 홀리마을의 모습
칠절봉(七節峰:1,172.2m)은 영동과 영서지방을 경계하는 백두대간
진부령(陳富嶺) 서쪽에 있는 천봉(天峰)으로 신선봉 동굴봉 삼봉 향로봉과 함께
금강산(金剛山) 1만 2천 봉 중 남한에 있는 5개 봉 중 하나이며, 영서지역인 인제군
서화면 동개마을에서 일곱 굽이를 돌아 있다하여 칠절봉(七節峰)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한편은 그 옛날 진부령을 통해 영동(고성군 간성읍)과 영서(인제군 서화면)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산적이 많은 이곳을 향해 7번의 절을 하며 무사통과를 빌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전해지기도 하는데 향로봉과 더불어, 백두산과 지리산에
이르는 1625km의 백두대간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곳, 휴전선에 가까이 접해 있다
바라보이는 향로봉 너머로 보이는 북한땅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는 범여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내 나라 내 땅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서글퍼지는구나
마산봉에서 바라본 향로봉의 모습
저 건너 향로봉은 자꾸만 범여를 유혹한다.
2018년 6월에 건강 검진을 받다가 폐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아산병원에서 9시간의
대수술 후, 하루를 지나 깨어나보니 몸뚱아리에는 대엿섯개의 약주머니가
대추나무 연 걸리듯,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이 보일 때, 아~~~ 내 삶은 여기서
끝나는가 하고 앞이 캄캄했지만, 사람의 목숨이 참으로 모질었던가 보다.
힘들었던 항암 치료와, 방사선과의 전쟁(?)을 하면서 死鬪를 벌인 끝에 어느 정도
몸뚱아리가 조금씩 제 자리를 잡아가니 또 다시 산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래 지금부터의 삶은 덤으로 생각하고, 다시한번 대간길을 도전해보기로 하고
2020년 10월 나홀로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무박이 아닌 당일산행으로 61번에 걸쳐
걸어온 길이 오늘이 그 마지막날이다...감회와 회한이 범여의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참으로 얻은게 많은 것이 4번째의 백두대간 길이다
부질없는 상념 속에서 지나 온전히 4년이란 세월이 흘러 또 가을을 보내고...
예전의 범여는 기억속에 지우고,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이곳까지 왔다니,
벅찬 감격에 쥔 잘못 만난 범여의 몸뚱아리에게 구저 고맙고 미안하구나.
내가 택했던 내 방랑의 길.
이 마지막 구간의 내림길을 바라보며 회한의 눈물이 흐른다.
마산봉 정상에 서서 향로봉을 바라보면서 갈 수 없는 북녘땅의
대간길에 대한 미련을 가슴속에 담는다
“바라 보이는 저 향로봉이 백두대간의 끝이 아닐진데”
내 생애에 저 넘어 북녘땅의 걸어볼 수 있으려나하는 조바심에...가슴이 답답하다
향로봉(1,298m)은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 중 하나이며 인제. 고성군 경계지역에
위치한 봉우리로 구름이 덮인 날이면 향로에 향불을 피워놓은 형상으로 보인다하여
향로봉이라 불린다는 향로봉은 예전에는 없었던 하얀 원형 건물이 보인다.
맑게 개인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과 고성 절벽강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동해
해금강의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넘실거리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산이 했거늘.
내 생전에는 저 향로봉을 지나 휴전선 너머 북한땅의 대간길 걷는 걸 포기해야할 듯 싶다
인증샷
마산봉 안내판
마산봉에서 10여분간 머물다가 다시 왔던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마산봉 갈림길(10:58)
정오가 지나면서 간간히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초겨울 바람이
차갑다...그래!,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제...
쉼터1(11:00)
쉼터를 지나면서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지나온 병풍바위봉과
작별을 고한다...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만날날이 있겠지 뭐...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은 범여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다.
근데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산악회에서 온 듯한 등산객들이 무리지어 올라 오기에
등로를 비켜준다...뭐가 그리도 급한지 쫒기는 사람처럼
후다닥 지나간다
안부(11:07)
안부에서 금새 오르막을 올라서니 이정표와 의자가 있는 쉼터2에 도착한다
쉼터2(11:10)
진부령까지 5.3km 남았다는 이정표 팻말이 보이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지금부터는 거의 평지라
정상적인 산꾼들과 같이 걸을 수 있으니까...
무명봉(11:15)
암봉으로된 무명봉은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데,또다시 등산객들이 무리지어 올라오는데
한결같이 산악마라토너들처럼 정신없이 달린다.
조금전 선두팀과의 차이가 너무나서 그런가 보다
쉼터3(11:20)
예전에 통나무를 짤라만든 의자는 사라지고, 지금은 편하게
쉴수있는 장의자를 설치해놨다...마산봉으로 오르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쉼터에 서 있는 이정표
급경사의 내리막길
오늘은 오로지 산행에만 집중한다.
그렇다고 위험한 구간이 있는것도 아니다.
평소 동반자였던 라디오의 음악조차 틀지않고
호젓하게 편하게 걷고 싶다
물개바위?...
홀리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집에와서 메모리 카드에서
사진을 복원하는데 한결같이 사진이 흐릿하다...똑닥이 렌즈를
확인하니 잔뜩 뭔가가 물어있는 것을 확인 못한게 원인이다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부도가 난 후에 오랫동안 영업을 안하고 흉물처럼 방치되어 있는
알프스리조트가 보이는 걸로 봐서는 급경사는 거의 다 내려온 듯 하다
좌측으로는 망해버린 알프스리조트가 시작하고...
예전에 알프스리조트 리프트가 있었던 자리에는
리프트가 사라지고 뭔가 새로운 공사를 하려는 모양이다
진부령까지의 세밀도
안부(11:38)
무명봉(11:40)
예전에는 알프스리조트 철조망을 따라서 걸었는데 지금은 약간
우측으로 편안한 등로가 보이고, 일본잎갈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마산봉 등산로 안내판과...
잘 배웠습니다
이정표를 빠져 나오니 2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눈물고개이다.
눈물고개(11:47~12:00)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홀2리 마을에서 진부령으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나오고, 지도상에는 이곳을 눈물고개라고 하는데 유래는
알 길이 없다...아마도 대간꾼들이 힘들었던 종주를 끝내고 마지막
구간을 걸으면서 환희에 찬 눈물을 흘렸다고해서 눈물고개일까?.
아니면 예전에 민초들이 힘든 삶이 베어있는 고개라서 붙혀진 지명일까...
아둔한 범여의 머리로는 알 길이 없다
눈물고개에 서있는 홀2리마을 표시석 아래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베낭을 베개삼아 휴식을 취한 다음에
진부령으로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로를 따라 진부령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알프스리조트의 모습
도로를 향해서 홀리마을로 내려가다가 우측의 小路로 들어선다
이곳부터 진부령 도착 직전까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군부대와 마을,
개인 사유지로 인해서 많이 변형되었다(스키장에서 진부령까지 세밀도 참조)
소로를 따라서 가다가 마을로 이어지는 소로를 버리고
좌측의 숲속으로 들어선다
숲길 옆에는 앙증맞은 저수지 하나가 보이고...
억새가 무성한 넓은 공터를 빠져 나가니...
예전에는 없었던 DMZ트레일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지만
백두대간을 걷는 산꾼들에게느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
씨잘데 없는 이정표다
도로에 올라서서 원 대간길은 직진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군부대가 대간길을 점령하고 쥔장 노릇을 하고 있어서 갈 수가 없다
도로 좌측으로 향한다
군부대 정문(12:10)
군부대 정문에서 바라본 홀리마을
군부대 정문을 지나자마자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향한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홀리마을 갈림길(12:18)
나뭇가지 아래로 보이는 흘리(屹里)마을은
산림이 울창하고 산이 높다하여 흘리(屹里)라 불렀고 속칭 밖(外)흘리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마을의 면적이 광활하여 지역별로 구분할때 칭하던 이름으로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홀리의 행정구역은 고성군 간성읍에 속해 있으나 읍 소재지에서 워낙
먼 거리에 있고 백두대간 준령 최북단에 있는 오지중에 오지로서 예전엔
감자와 옥수수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화전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나 이곳에
알프스 리조트가 생기면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피망과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면서 부농의 꿈을 이루고 있는 곳인데, 피망이 유명한 지, 보이는
비닐하우스 대부분이 피망을 재배하고 있다.
* 피망은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추의 품종을 개량하여 매운맛을 없앤 채소로 과실 모양은
긴 타원형, 사과·토마토 모양으로 과피 모양은 고추와 흡사하고 완숙하면 적색 또는
황색이 되는데 녹색일 때 수확하며, 고추 특유의 비타민 C를 다량 함유하고 있으며,
조직이 견고하여 가열해도 비타민이 잘 파괴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홀리마을로 이어지는 뚜렸한 내리막길을 버리고 직진으로 향한다
등로는 보이지 않고, 마치 지맥길을 걷는 느낌으로 잡목과 사투를
벌이면서 군부대 옆구리를 통과하니...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나온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시멘트 도로 우측의 능선으로 걸어가야 하지만
조금전에 짧은 구간을 치고 나오면서 개고생을 한 탓이라 거기로
간들 변해버린 백두대간 길...별 의미가 없는듯 하여 그냥 걸어간다.
비닐하우스 너머의 능선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칠절봉이 얼굴을 내민다
도로옆 전봇대에 낡은 대간 산꾼의 흔적이 보인다.
나 말고도 이 길을 따라서 진부령으로 간 모양이다.
도로 우측의 찢어진 비닐하우스 윗쪽이 오리지널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족보있는 642.1m봉이 있는 곳으로 4등 삼각점(△간성449)가 있다
홀리마을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예전에 없던 멋진 주택이 보이고...
홀리마을 끄트머리가 나오고 폐가를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임도 사거리(12:37)
예전에 없던 DMZ 트레일 이정표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올라가면 조금전에 눈팅이만 하고 지나온 642.1m봉으로
가는 길인데 그냥 패스를 하고 좌측으로 향한다
임도사거리에 있는 DMZ 트레일 이정표
조금전 군부대에 막혀서 헤어진 대간 마루금에 다시 복귀한다
진부령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내가 왔던 길을 뒤돌아 보는데 홀리마을 너머로
병풍바위봉(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과 마산봉(좌)이 범여와의 작별이 아쉬운 듯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잘가라 손을 흔드는 듯 하다... 그래 인연이 되면
또 만날 날이 있겠지 뭐...
임도 우측에 DMZ 트레일 이정표가 보이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서 진부령으로 향하는 길에 뒤돌아 보니...
조금전에 패스하고 지나온 642.1m봉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내가 다시 이 길을 걷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꼭 들리고 올 걸 하는
생각에 자꾸만 후회스러운 생각이 드는구나
호젓한 길을 따라서 걸어가니 수확이 끝난 진부령 관광농원이 보인다
진부령관광농원(12:48)
진부령관광농원을 지나 내리막길이다
이곳의 산도 서서히 겨울준비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노란잎을 떨어뜨리며, 내년에 새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데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감에 生老病死의 법칙이
적용되는 모양이다.
홀1리마을 갈림길(12:51)
직진으로 내려가면 홀1리마을로 가는 길이고 진부령으로
향하는 길은 우측의 넓은 임도로 이어지는데, 예전에 없던
이정표를 따라서 진부령으로 향한다
진부령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임도 아래의 도로를
지나가는 길에서 간간히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군부대 시설물인지,
이동통신탑인지 알 수 없는 철탑이 보이고...
홀리마을로 이어지는 임도삼거리에서 우측의 진부령으로 향한다
안부(12:56)
안부에서 DMZ 트레일코스는 능선 사면으로 내려가
버리고 백두대간 마루금은 안부 윗쪽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58)
이 무명봉이 백두대간 북진길의 마지막 봉우리다
진부령으로 향하는 길
진부령으로 향하는 도로로 내려선다...무사히 도착했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산행...성치않은 몸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하여 4년만에 진부령으로 향하는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다.
시간이 얼마쯤 됐나하고 스마트폰을 켜는데, 이게 뭐여...
베터리가 방전되어 죽어 있는게 아닌가...하는 수 없이 베낭을
뒤져서 보조베터리를 찾는데...또 이건 뭔가...
차에다 두고온 옷가방에다 보조베터리를 두고 왔구나.
그나마 천만다행인게 종착지인 진부령이 300m밖에 안 남았다.
휴~~~하는 한숨이 나온다
백두대간종주기념공원(13:04)
백두대간종주기념공원은 1994년 4월 1일 한전 KPS(주)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일환인 백두대간 종주를 기념하고, 단절된 남북의 백두대간을
이어 우리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강원도 고성군과 협의하여
정식 허가를 얻어 조성한 곳이다
내가 잘아는 산악회 기념비도 많이 보이는구나.
나같은 독립군에게는 아무 씨잘데 없는 짓거리이기는 하지만...
백두대간종주기념공원 여기저기를 두루두루 살펴본 다음에...
진부령미술관을 바라보면서 종착지인 진부령으로 내려선다
진부령(陳富嶺:520m:13:1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 사이에 있는 고개로 칠절봉 (七節峰:1,172m)과
마산봉(馬山峰:1,052m)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으며, 오래전부터 관동지방과 영서지방의
중요한 교통로가 되고 있으며 남쪽의 대관령, 북쪽의 추가령과 함께 3대 영(嶺)으로 불린다.
고개길이는 약 60㎞이다. 이곳에 나 있는 도로는 1981년 국도로 승격되고, 1984년 10월에
2차선으로 확장 및 포장공사가 완료되었으며 고갯길 구비구비에서 바라다보이는 동해의
모습이 장관이며, 이곳에 안개가 감돌아 봉우리를 덮게 되면 대자연의 장엄한 모습이 연출
되는 곳으로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에는 강설량이 매우 많다.
그 옛날 동서를 잇는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은 "1632년 간성 현감이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해 좁은 길을 넓혔으며,1930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1987년 2차선 도로로 넓혔다."는 고개마루 빗돌의 글은
진부령의 유래를 어렴풋이 전해주지만,정작 진부(陣富)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부령(520m)은 한계령(1,004m),미시령(770m)과 더불어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개지만, 두 고개와 달리 진부령은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다.
고갯마루에 주차장이 있는가 하면 가게들이 마을을 이루어 백두대간의 고개로는
통 믿기지 않는다.고갯마루가 마을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부르기를 ’조쟁이’라 하였다.
지난날,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마주 올라와 ’이른 아침부터 장이 선다.’는
뜻으로 얻은 이름인데, 요즈음 부르는 이름으로 흘3리(屹三里)이며 고성군 간성읍을 따른다.
고성과 간성이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그만 남북으로 갈라졌다.
고성은 북녘땅이 되고 간성은 남녘땅이 되고,남녘땅에 붙여진 고성군의
명칭은 창졸간에 코앞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향수를 달래는 이름이다.
진부령 길은 이제 46번 국도로 바뀌어 제법 오가는 이의 발길이 늘었지만,알고 보면
마치 몸뚱이의 절반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운명처럼 아주 가엽고 애처로운 길이다.
인증샷을 남기기 전에 진부령의 이곳 저곳을 보기 위해서 진부령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아! 진부령
백두대간 남한지역의 최북단으로 남진의 시발점이자 북진의 종착지이기도 한곳이다.
물론 그 북쪽에 향로봉(1,296.3m)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군사통제지역으로 모든 대간꾼들이 이곳 진부령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향로봉 지구 전투전적비
맹호수도사단 용사들이 1951년 3월 7일부터 그해 6월 9일까지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계속하여 설악산으로 진격하였고 패주하던 적은 중동부
요충지인 인제를 방비하기 위해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괴뢰군 제5군단 예하 제11, 12, 13사단을 증원하여 아군 수도사단 및
제11사단에 89회라는 회유의 반격을 가해왔으나 도처에서 연전 연승을 자랑하는
아군용사들은 반격을 격퇴분쇄하고 설악산과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오늘의 광범위한 중동부 일대를 수복하였고 혁혁한 공훈이 되었으며
전장병들의 영웅적인 전투를 높이 찬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장렬하게 충국(忠國)의 발로로 고귀한 희생을 치러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전몰장병의 명복을 빌며 자손만대에 길이 그 위훈을 전하기 위해
전적비를 1957년 7월 15일에 제3군단에서 세웠고, 이 전적비 우축에 설화희생순국비
(雪禍犧牲殉國碑)가 있다.
향로봉 지역은 예부터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하여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리는 곳이다.
1956년 2월중순부터 3월초순까지 영동북부지방에 많은 눈이 내려 그때 향로봉에서
전선을 지키다 참변을 당해 비통하게 산화한 장병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비도 있다
* '통고지설 양강지풍 일구지난설(通高之雪 襄江之風 一口之難說)
통천과 고성에는 눈이 많고, 양양과 강릉에는 바람이 많은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의 진부령 유별시비
진부령유별시는 1633년 1월 이식 선생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한양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진부령 정상까지 배를 주리며 따라온 백성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
西行正値北風詩(서행정치북풍시) :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 북풍이 불고
雪嶺參天鳥道危(설령참천조도위) : 눈이 덮히어 음산한 영마루 새도 넘기 험한 길
自是人情傷惜別(자시인정상석별) : 이제 인정에 마음 아픈 이별을 하네
君來饑我俄留詩(군래기아아유시) ; 그대들 배 주리며 따라서 왔는데 나는 이별시를 남기네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조선조 인조(조선 16대 임금) 때의 문신(文臣)으로 대제학, 예조판서를
역임한 분으로 그 당시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양평군 양동으로 낙향하여 택풍당
(澤風堂)을 짓고후학 양성과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1631년부터 1633년까지 강원도 간성 현감을 지낸 바
있으며 택당은 이곳에서 양사제를 두어 강학에 힘썼으며 개간 사업을 통한 소득증대와 진부령도로
확장 등 지역개발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1633년 1월 선생이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에 많은 군민들이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뒤따랐는데
그 추운 겨울 진부령까지 따라온 군민들의 인정에 택당은 시를 한 수 지어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진부령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졸업 인증을 남기기 위해 내려간다
누구 하나 축하해주는 사람도 없고, 축하 꽃다발 하나도 없는 독립군의
졸업식이지만, 성치않은 몸으로 지리산에서 이곳까지 홀로 걸어왔다는
그 의지만큼은 누구보다도 더 강하다고 자부한다.
일반적으로 산악회를 따라가면 무박으로 34에서 36번에 걸쳐 이곳에
도착했다...3번이나 그 짓거리를 했으니 더 이상하고 싶지 않아서
나홀로 당일 산행으로 61번에 걸쳐 이곳에 오면서 들꽃과 수많은
눈맞춤을 했고, 날이 밝은 날에 걸으면서 대간 능선에서 바라본
삼천리 금수강산을 두루 두루 구경했고, 山川景槪를 다 즐겼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듯 싶다
인증샷
시화님!...고마워요...世世生生 福받을겨...
진부령 정상석 옆에 예전에 없었던 진부령아가씨 노래비도 보인다
나홀로 조촐하게 졸업식을 끝내고 박달나무 쉼터를 가기위해
차를 불러야 하는데 핸드폰이 먹통이라 방법이 없구나.
이리저리 헤매다가 주차장쪽으로 내려서니, 송백산악회 표식이
되어있는 관광버스가 보인다...기사님에게 부탁하여, 박달나무 쉼터
쥔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진부령으로 오라고 한 다음에 주변을
서성되다가 잠시후에 박달나무 쉼터에 도착한다
박달나무 쉼터(14:10)
진부령에서 박달나무 쉼터까지 오는 잠깐 사이에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잠깐 조는 사이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주차비와 요금을 지불하고 내 愛馬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얌전히 쥔장을 기다리는 애마를 몰고, 원통, 인제를 거쳐 홍천으로
가기 직전에 너무 졸음이 몰려와서 휴게소에 들려 잠깐 눈을 붙인다는게
얼마나 피곤했던지, 잠에서 깨어나니 2시간을 훨씬 넘게 잠을 잔 듯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홍천, 양평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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