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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회천(칠봉)지맥(終)

회천(칠봉)지맥 제3구간 - 배티재에서 물한령까지

by 범여(梵如) 2024. 12. 19.

☞ 산행일시: 2024년 12월 08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강하게 부는 바람에 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12.3km+날머리 2.8km / 6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배티재- 성산이공 묘- 갈림길- 303.2m봉- 안부- 무명봉- 안부

                    갈림길- 347.4m봉- 안부- 태봉- 묵묘- 태봉재- 안부- 갈림길- 260m봉

                    갈림길- 안부- 무명봉- 무명봉- 무명봉- 277.6m봉- 안부- 263m봉

                    갈림길- 고개- 묘지- 갈림길- 칠령재- NO112 송전탑- 236m봉

                    갈림길- 232m봉- 묵묘- 안부- 385.7m봉 갈림길- 안부- 232m봉

                    274m봉- 안부- 279m봉- 안부- 294.7m봉- 안부- 갈림길- 안부

                    306m봉- 고개- 무명봉- 안부- 무명봉- 296.4m봉- 305m봉- 임도 갈림길

                    314m봉- 무명봉- 안부-무명봉- 335m봉- 묘지- 무명봉- 전주이씨 묘지

                    이례재- NO47송전탑- 213.7m봉- 신간리 갈림길- 너덜겅- 무명봉

                    441.7m봉- 물한령- 무란마을- 물한저수지- 신간리 마을

☞ 소 재 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용암면 / 고령군 운수면

 

올 겨울의 원래 산행 계획은 서울에서 가장 멀고, 잡목이 태클이 심하기로 악명(?)이 높은

해남과, 강진, 영암쪽의 지맥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곳은 이상하리만큼 주말만

되면, 비가 온다는 구라청의 예보가 나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꿩 대신 닭이라고 

3주를 연이어 회천(칠봉)지맥을 나서기로 하고, 대충 베낭을 정리해놓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역(04:55)

새벽 4시에 집을 나와 서울역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타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데 날씨가 상당히 추워서 지난주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수술 이후에 변해버린 몸뚱아리는 워낙 추위를 많이타는 채질이라

추울때는 은근히 걱정이 된다 

서울역발  김천구미역행 열차표

 

배부른 자들의 횡포

역에 도착하여 예매한 표를 찾는데, 결행되는 열차가 많은지 전광판에 운행이

취소되었다는 열차가 많구나...사연인 즉, 철도 노조원들의 파업 때문이란다.

월급도 많이 받는 자들이 파업이라니... 정작 밑바닥에서 최저 임금조차도 못받는

자들은 정작 직장을 잃을까봐 찍 소리도 못하고 죽은듯이 일하고 있는데, 이 자들은

고액 연봉에다 누릴걸 다 누리고 사는 자들이 철도를 이용하는 민초들의 불편하게

만들면서 자기 이익을 쟁취하려는 저 자들은 뭔 배짱일까...심히 불편하다

김천(구미)역(07:15)

철도 노조원들의 파업 탓일까?

도착 시간보다도 20여분 늦게 김천(구미)역에 도착하여, 편의점에서 

김밥한줄에다 커피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버스 승강장으로 향하는데

지난주보다 날씨가 추운지 손이 상당히 시리다

버스 승강장에 도착하여 성주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7시 30분쯤에

오던 버스도 오늘은 7시 40분이 다 되어서야 버스 승강장에 도착한다.

오늘도 성주로 향하는 버스에는 손님이라곤 달랑 나혼자다

수많은 버스정류장이 있지마는 손님이 없으니까 그냥 내달린다.

한참을 달리다가 초전면소재지에서 외국인 노동자 한명을 태우고

성주읍내로 향하는데, 버스가 과속을 염려할만큼 달리면서 온 탓인지

평소와 거의 같은 시간대에 성주에 도착한다

성주 버스 정류장(08:20)

성주(星州)의 역사

삼한시대에는 사회분화가 진행되어 소국(小國)으로 발전했는데, 반파국(伴跛國)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比定)되고 있으며, 그것이 성산가야(星山加耶)의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가야연맹의 한 나라로 발전하였던

성산가야는 늦어도 6세기 중엽까지는 신라에 복속되어 군현체제하에서

본피현(本彼縣)이 되었다.

 

 성주는 6가야 중 벽진가야(碧珍加耶)로 가야연맹의 중심국 중의 하나였다.

신라가 가야 지역에 진출함에 따라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

(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 설치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 성산군(星山郡: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일대의 加利縣)의

영현이 되었다.    

 

현재까지 성주읍 성산리, 월항면 수죽리 등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성산가야시대와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757년(경덕왕 16) 본피현은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어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되었다.

 

나말 여초의 전환기에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할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성주지역에는 이총언(李悤言)이라는 대호족이 출현하여 인근의 중소

호족을 거느리고 군림했는데, 태조 왕건의 회유정책으로 귀부하여 그의

아들 영(永)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었고,

신안현·적산현(狄山縣)·수동현(壽同縣)·유산현이 통폐합되어 귀속되었다.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되었다가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개칭되면서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조선 태종 성주목(牧)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 · 팔거현 · 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고,

이때 성주는 경상도에서 개간된 농토가 가장 넓었고, 제방이 많아 물이 풍부해 생산량이 많은

풍요로운 곳이었고,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왕의 태실이 3곳이나 위치한 명당으로 평가 받은데다가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까지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성주는 16세기 조선에서 경상도의 주요 군현 중에서 1위인 상주에 이어

2위까지 성장해서 경상도 5대 도시(경주,상주, 진주, 안동, 성주)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남인과 북인(동인)의 대학자로이황, 조식에게서 모두 수제자로 수학한

정구(鄭逑)와 김우옹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고, 1558년(명종(13)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학파의 한 중요한 근거지 구실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성주에서는 많은 서원이 설립되고 영남학파 를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는데,이진상(李震相)은 그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조선 후기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에서 성주를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고 평가했다.

성주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성주시외버스 터미널에 들려 저녁에

서울가는 막차표를 예매하려는데 표가 맨 뒷좌석에 딱 한장이 남아있다

얼른 표를 예매하고는 다시 택시를 타고 용암면 상신리 윗쪽에 있는 배태재로

가자고 하니 지난주의 수륜택시 기사와는 달리 금방 알아채고 미터기를 꺽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성주읍내를 빠져나와 33번 국도를 따라서 가다가 913번 지방도로로 빠져나와

지난 구간에 걸았던 호령고개와 하미기재를 지나 거산 아래에 있는 용암면  상신리

윗터 마을에서 우측 꺽어져 올라와 정확하게 배티재에 도착한다

 

어떻게 이 길을 잘 아시냐고 하니까...예전에 성주에서 상신리까지 다니는 버스를

운전했다고 한다...그 바람에 지난번에 탔던 수륜면 택시에 비해  20,000원 정도 차비를

아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단 말인가...택시기사와 유쾌한 작별을 하고 산행을 준비한다

배티재(08:45)

성주군 수륜면 작은리의 동남쪽 가장자리, 즉 보월리와 접한 산간 협곡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 주민들은 배티 고개를 통해 북동쪽 용암면 상신리와

대봉리, 그리고 산간 협곡을 따라 흐르는 대가천의 지류를 따라 수륜면 보월리와

남은리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해 배티 마을은 작은리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고개로 정상에는 동물생태통로가 설치되어 있으나 차량통행은 워낙 오지라

그런지 거의 없는 편이다

 

배티재의 지명유래를 찾을 수 없지만 가까운 작은리의 배티마을의 유래가

배나무가 많은 고개 밑의 마을이란 자료가 있어 배(梨)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어디까지나 범여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산행을 시작하다(08:55)

1주일만에 다시 온 배티재...배티재면 어떻고, 배틀재만 어떠리.

그저 산길이 있어서  머나먼 한양에서 이곳에 왔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동물이 편하게 다니라고 만든 생태통로...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이곳을 건너는 짐승들은 보이지 않고, 인간인 범여만 홀로 건넌다

조금전 윗터고개에서 올라와서 지난 생태통로는

이제 막 잠에서 덜 깨어 났는지 크게 하품을 하는듯 하다

생태통로에서 곧추선 능선으로 올라서니 묘지 한 기가 산꾼을 반긴다

성산이공 묘(09:02)

處士星山李公之墓라... 處士란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草野 묻혀 사는 선비를 말함이렸다  

성산이공 묘지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는데 지난주와는

달리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낙엽밑이 살짝 얼었는지

조금은 미끄럽다...스틱에 힘을 주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갈림길(09:07)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그러나 맥꾼의 흔적인

그 흔한 시그널 하나 보이지 않아서 수시로 스마트폰의

트랙을 확인하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이 지역을 걸어면서 유난히 많이 만나는 건 제선충으로

희생(?)된 소나무 무덤들이 많이 보인다

소나무의 에이즈라 불리는 제선충에 감염되면 소나무는

100% 枯死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제선충을 막아주는

약이 없는 모양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우측 아래에 수륜면 보월리에 있는

배티저수지가 산꾼을 반긴다...저 뒷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월산(236.6m)이 짙은 박무를 뒤집어 쓴 채

얼굴을 감추고 있구나

303.2m봉(09:13)

동쪽으로 길을 나서는데 홀로걷는 산꾼이 만만하게

보이는지 잡목들이 서서히 태클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벌목지대가 나타나고, 예전에 불이 난 지역인지 키작은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 지금은 편백나무를 많이

심어놨고, 벌목지대 너머로 가야산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다.

멋진 모습으로 범여의 눈을 호강시켜주는 가야산의 모습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를 품고있는 가야산의 지명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ㆍ설산ㆍ

삼왕산ㆍ중향산ㆍ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는데,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있지 않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으로 명산으로 불렸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고 실려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 뒤

여러 차례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는데, 신라의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ㆍ세조ㆍ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1000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 전통의 중심지였다.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 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는 『가야산 기행』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겨준다”라고 느낌을 표현하였다.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종찰 중의 하나로

일연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통도사는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 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 가르침을 기록한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어 법보종찰(法寶宗刹)이라 하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國師)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高僧)들이 배출되었기에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 부르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본사인 법보 종찰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애장왕 3년(802)이었다. 

해인(海印) 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심법계(一心法界)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正覺)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해인삼매(海印三昧)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는데,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가르침인 것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와 신라 불교계의 쌍벽을 이루며, 해동화엄의 시조로

추앙되고 존경받았던 의상(義相)대사의 화엄십찰(華嚴十刹)로도 유명한 절이다

벌목지 너머로 보이는 가야산의 주봉인 칠불봉을 바라보며

좌측으로 이어지는 동쪽을 향해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09:21)

오늘은 생각보다 날씨가 추운 편이다...아직까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음지쪽의 오르막길에서 손이 시릴정도로 춥다.

빛바랜 백두사랑산악회 이 대장의 흔적이 반갑기만 하다.

이 친구...맥산행에 관한한 대단한 열정과 지식을 가진 후배인데

안 본지가 10년도 넘은 것 같은데 잘사는지 모르겠다

무명봉(09:29)

바스락거리는 낙엽길을 걸어서 맥길은 동남쪽으로 이어지는데,

가뭄에 콩나듯 보이는 선답자의 시그널이 나참판 역할을 해준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의 트랙 때문에 편하게 맥길을 걷지만, 내가

처음 맥길을 걸을때만 하더라도, 오직 선답자의 산행기와 시그널,

나침판과 感으로만 맥길을 걸었으니 隔世之感을 느낀다

안부(09:31)

계속해서 만나는 소나무 무덤을 보면서 걷다보니

능선이 나오면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09:33)

죽어서 누워있는 저 소나무를 보면서 하는 생각...

산다는 거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리 아둥바둥 사는지...

347.4m봉(09:36)

347.4m봉에서 맥길은 우측 깜빡이를 켜고, 내리막으로 향한다

대간길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길이라 그런지 등로는 아주 좋은듯 하다

안부(09:39)

우측으로 성주군 수륜면 웃맏질(상형곡 上兄谷)로 이어지는

흐릿한 길이 보이는데,  수륜면에 속해있는 보월리(甫月里)는

까치산(572m)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계곡이 대가천(大伽川)이

합류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별뫼(星山:230m)와 달뫼(月山:200m)

주변과 그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은리, 서쪽으로는 오천리,

북쪽으로는 작은리와 접하여 있다.

보동(甫洞)과 월촌(月村) 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보월리(甫月里)라는 지명이

붙었으며, 탑안(塔內) 또는 탑동(塔洞)이라 불리는 마을과 새뜸(신기), 월촌,

귀만(귀암·보리골·보동 甫洞), 웃맏질(상형곡 上兄谷), 아래맏질(하형곡 下兄谷)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탑안마을에는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유형문화유산

제119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높이 5.2m)이 있는데 탑안마을이라는

지명도 이 탑으로 인해 붙은 것이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건, 산에서는 머피의 법칙과도 같은걸까.

안부에서 다시 짧은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앙증맞은 정상이 나오는데

맥길은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정상 아래의 사면길로 이어지지만

범여는 사면길이 아닌 직진으로 치고 올라서니 어느 산꾼이 시그널에다

태봉산이라 적어놨다

태봉(胎峰:325.5m:09:44)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그저 그런 무명봉인데

어느 맥꾼은 자기의 시그널에다 태봉산이라고 표식을 해놨다.

 

자료를 찾아보니 신산경표의 저자이신 박성태 선생님의 자료에 태봉은

지도상 태봉재로 표기된 봉우리를 말하는데 이 봉우리는 실제 태봉재의

서북쪽 바로 위의 325.5m봉을 말하며 고시는 되지 않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이

발간한 한국의 산지(山誌)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태봉(胎峰)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과 용암면 및 고령군 운수면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326m이고 서북쪽으로 추산과 이어지며 남동쪽으로는 칠령재와

물한령으로 연결되는데, 산의 남쪽으로는 회천이 흐르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주목에 주 남쪽 35리에 있고 태종의 태를 봉안하였다고 전하는데, 태봉은 

조선시대에 조곡산(祖谷山)이라 불렀으며 조선시대 태종의 태를 이 산에 봉안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아래에 태봉재가 있어서 태봉산이라 했는가보다.

정상에서 소나무숲을 비집고 내려서니 눈을 뒤집어 쓴

가야산이 가깝게 보이지만, 요즘에 돌아가는 나라꼴과

같은지 흐릿하게만 보이는구나

325m봉에 바라본 가야산.

가야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해인사이고, 해인사하면

뭐니뭐니 해도 가야산호랑이라 불렸던 퇴옹당(退翁黨) 성철(性徹:1912~1993)

큰 스님이 아닐까...불교 신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명문구로 유명하신 큰스님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그리울까...

 

작금에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자들의 일탈 행위를 큰 스님이 계셨다면

따끔하게 훈계하면서 어떤 죽비(竹篦)로 내려칠까?

모든걸 잊어버리고 無常心으로 희미한 맥길을 이어가는데

소나무 가지 너머로 보이는 오늘 내가 걸어야 할 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묵묘(09:46)

이곳에서 우측으로 400m 정도만 가면 삼각점이 있는 303.2m봉이

있지만, 후반에 급격하게 떨어지는 내 체력을 생각하면, 그곳을

갔다오기가 무리일 것 같아서 그냥 희미한 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홀로걷는 산꾼이 길을 잃을까 조바심이 났는지 조금만 애매한 길이

나오면 어김없이 나타는 선답자들의 흔적...독립군인 나에게는 늘

고마운 분들이다

태봉재(09:47)

트랙상의 지도에는 이곳을 태봉재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선답자들의 흔적은 전혀 없다...수륜면 보월리에서 용암면

상신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의 역할을 잊어버렸는지

등로는 전혀없는데, 태봉 아래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태봉재라 부르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늘 고마운 존재들...

안부(09:50)

억새꽃 그리움 / 이원문

 

쓸어 안은 너의 꽃

바람 불어오면

그날이 잊혀질까

 

몇번의 마음으로

다시 찾았건만

못 잊을 그날만이

 

그날만의 흔적만

옛날을 찾는다

그 옛날을 찾는다

갈림길(09:53)

오랫만에 맥길에서 만나는 준.희 쌤의 흔적

260m봉(09:55)

무명봉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약주를 좋아하는 산꾼은 막걸리통으로 길을 안내한다

갈림길(09:58)

오늘 산길은 와이리 갈라지는데 많은지, 迷路를 걷는 느낌이다

안부(10:01)

무명봉(10:06)

계속해서 만나는 이름없는 봉우리들, 그러나 나에게

다행인 것은 고도차가 크지 않아서 무리없이 걷는다는 점이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나처럼 추위에

약한 사람은  이럴때가 참으로 힘이든다

무명봉(10:08)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남쪽으로 향한다

무명봉(10:12)

이름없는 봉우리를 여러곳 거치면서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는 277.6m봉 정상에 도착한다

277.6m봉(10:16)

덩치큰 관목의 호위에다 폭신한 낙엽을 밟고 걸어가는

이 기분은 세속에 찌든 마음의 때를 벗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덩치큰 팽나무 노거수를 지나 우측으로 확 꺽어져 내려가면서 칠령재로 내려간다

맥길을 지키는 그대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는구나

요 며칠전에 초보 대통령이 게엄령을 선포했다가 150분만에 해제한 해프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感조차 오지 않는구나...그 이후의 엄청난 후폭풍은

생각이나 해봤는가...그러나 일말의 惻隱之心은 든다...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는 거대 야당의 정치하는 나무랭이들 때문에 울매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

싶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너네들이야 너거들 밥그릇은 챙겨 잘 살겠지만

힘없는 민초들이 받는 경제적인 고통을 한번이나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하기사 누굴 원망하랴... 우리 손으로 저 자들을 뽑았는데...가슴이 답답하다

어제 대구에서 라스트콘서트를 펼친 ‘가황(歌皇)’으로 불리는 가수 나훈아가 

한 말이 생각나는구나... “정치의 근본은 무엇이냐.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배곯지 않게 하는 것이 원리”인데, 그런것은 眼中에도 없고, 오직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 쌈박질이나 해되는 저 인간들을 염라대왕은 그냥 두는지

모르겠네...

이런저런 想念에 젖어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다가 낙엽에 미끄러져

보기좋게 된통 꼬꾸라진다...땅바닥에 깔린 낙엽이 충고한다

본업(산행)에 충실해야지. 엉뚱한 짓거리를 하니 그렇게 되는거 아닌가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正道”라는 단어를...

쑥부쟁이...아귀다툼만 하는 사바세계의에 뭔 미련이 있는냐?

 

* 아귀(餓鬼)는 탐하고 질투하는 마음만을 가진 굶주린 귀신을 말하는데,아귀에는

  무려 36종이 있다고 하며, 그 모양새가 하나같이 끔찍하기만 하다.

 일반적인 아귀의 형상은 대개 집채만 한 몸에 작은 입과 가늘고 긴 목구멍을 가지고 있어

 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탐한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음식물을 차지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기만 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지옥도를 방불시키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대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귀다툼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처음에는 말다툼을 일컫는 속어로만 쓰였는데,

 요즈음엔 먹을 것이나 그밖의 이익을 위해서 죽을 듯이 싸우는 일을 일컫는다.

안부(10:20)

안부에서 올라서는 길에 봄에 피어야 할 생강나무가 이 추운 날씨에

꽃망울을 터트리려고 한다...인간들이 제 정신이 아니니, 꽃들도

인간을 닮아가는 모양이다...제발 너희들이라도 정신을 차리거라

263m봉(10:22)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 길의 좌측으로는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넓은 공터같은 등로를 올라서니...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0:25)

일반 등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는 오지의 맥산행

10년을 넘게 이 짓거리를 하고 다닌 탓인지 요즘은

제도권 등로를 걸을때면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다

고개(10:27)

예전에 민초들이 다녔던 길인지 고개의 흔적은 뚜렸하나

지금은 지맥 산꾼외는 아무도 찾지않는 잊혀진 고개인듯 하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 간 다음에...

잡목의 강한 태클을 이겨내고 내려서니

잠시후에 잘 관리된 묘지가 나온다

묘지(10:32)

묘지로 올라오는 편안한 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갈림길(10:33)

갈림길에서 내리막으로 내려가니 서낭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가

있는 고개에 도착하는데 이곳이 지도상의 칠령재이다

칠령재(七嶺峙:170m:10:35)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와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를 잇는 고개로  과거 성주군과

고령군을 왕래하기 위하여 두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이례재·칠령재·태봉재를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도로가 정비된 이례재와 배티재를 통해 성주와 고령을 오가는

교통로로 활용하고 있으며, 고령군 방향에서 칠령재 부근까지 임도가 개설되어 있으나

성주군에는 임도와 같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실상 교통로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로 지맥꾼들이나 지나간 잊혀진 고개가 되어 버렸다

 

칠령재의 북쪽 사면은 신천으로 유입되는 지류의 발원지이며, 최상류부에

칠령 소류지가 있으며, 칠령재의 남쪽 사면은 회천의 작은 지류의 발원지로

이 지류는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흑수 마을에서 회천에 합류한다.

칠령재와 칠령재의 주변 산지를 구성하는 기반암은 중생대 백악기 및 상부

쥐라기에 형성된 낙동층으로 이암·사암·역암 등이며, 회록색 내지 갈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칠령재를 기준으로 여태껏 같이해온 좌측은 아직도

성주군 용암면이지만 우측은 고령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서낭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 우측 아래로 내려가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359호)로 지정된 고령 대평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곳이다

칠령재를 지나서 이어지는 맥길은 송전탑을 세우고 산지를

복원하면서 만든듯한 뚜렸한 오르막의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구로 이어지는 대형 송전탑의 모습

송전을 세우고 돌담을 쌓아놓아서 양 옆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산은 그저 산일 뿐 / 법정 스님

산을 그저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 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NO112 송전탑(10:42)

송전탑을 돌아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뒤돌아보니 가야산은 조금씩 시야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236m봉(10:48)

236m봉을 지나면서 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로 향한다

水路처럼 생긴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갈림길(10:51)

뫳돼지 사우나를 지나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서니...

소나무의 공동묘지인가?

고도차가 거의 없는 등로는 계속되고...

왜 산에서는 산불이 나도 제일 피해가 많은게 소나무이고,

제선충도 왜 하필이면 소나무가 타켓이냐...한민족의 氣像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언제까지 희생양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232m봉(10:59)

묵묘(11:01)

안부(11:02)

385.7m봉 갈림길(11:03)

이곳에서 우측으로 벗어난 지점에 있는 삼각점이 있는 385.7m봉이

있지만 귀경 시간이 맞추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포기를 한다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안부(11:05)

고도차가 없는 탓인지 범여의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진다

232m봉(11:07)

등로에서 바라본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의 모습

용암면에 속해있는 덕평리(德坪里)의 ‘덕평(德坪)’이란 이름은 지역 내

네 개 자연 마을 중 큰 마을인 원덕평에서 따왔다고 전하는데, 평야

가운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덕평이라 불렀다고 하며, 덕평리의

자연 마을로 원덕평(元德坪), 사부골[사부곡(沙阜谷)], 오백리[오봉리(五峯里)],

윗골[위동(渭洞)]이 있다.

원덕평은 덕평리가 시작된 마을로, 마월리와 상신리 방향에서 뻗어 나오는

두 갈래의 신천이 합류하는 지점 남동쪽에 있는 평야 마을이고, 사부골은

임진왜란 당시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이곳에서

사금(砂金)이 생산될 때 사금 채취를 위해 건져 올린 모래가 쌓인 흔적이 있어

‘사부(沙阜·沙夫·沙鳧)’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봉리는 마을 뒷산 봉우리가 다섯 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다른 이름인

오백리에 대한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윗골은 두릉방(杜陵坊)에 속해 있을 때

바깥 동네, 즉 외동(外洞) 혹은 위동(渭洞)으로 불렀다가 마을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윗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 산행은 그리 힘들지는 않지만, 고만고만한 무명봉이 은근히 많다

274m봉(11:12)

등로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 은근히 많다 

안부(11:14)

약간의 장애를 가진듯한 소나무이나 의연하게 살아가는

너의 용기에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279m봉(11:18)

안부(11:20)

계속 이어지는 陸山의 능선에 간간히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앙증맞은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는

294.7m봉 정상이 산꾼을 반긴다

294.7m봉(11:24)

294.7m봉 정상 아래로 내려서니 등로는

희미하지만 아직은 걸을만한 산길이다

안부(11:27)

갈림길(11:33)

좌측으로 편안하고 뚜렸한 등로가 보이지만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우측의 거친 숲속으로 이어져 트랙을 확인하니 그쪽이 맥길이다

거친 숲을 헤치고 나오니 곧바로 좋은 길이 나오는데...괜히 쫄았잖아...

안부(11:35)

안부에서 오르막길로 올라가는 길...예전같으면 한참을

버벅거리면서 올라왔을텐데...오늘은 편하게 통과한다

왠지 기분이 좋은 느낌이랄까.

306m봉(11:43)

다시 등로는 우측 깜빡이를 켜면서 7시 방향으로 향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오늘 가야할 이름이 비슷한

이봉산과 의봉산이 얼굴을 내민다...오늘 산행의 날머리 목적지는

담밑재로 잡았는데 거기까지 갈 수 있을런지 모르겠구나

고개(11:48)

올팍인 고개 좌측으로는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이고 우측은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인데 예전에 민초들이 왕래했던 고개였는지

아직도 조금은 흐릿하긴 해도 사람들이 다닐만큼 길은 보인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여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 

 

내가 등을 돌리면 상대방은 마음을 돌려 버리고

내가 은혜를 져버리면 상대방은 관심을 져버리며

내가 배신하면 상대방은 아예 무시하는 태도로 맞서 버린다. 

무명봉(12:02)

잠시후에 오를 봉우리를 지나는데...

등로는 갑자기 지맥길의 本色을 드러내면서 산꾼을 괴롭힌다

그래...오늘 이곳까지 오면서 편하게 걸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범여가 편한길을 걸으면서 맥길에 대한 野性을 잃을까봐 주는

예방 주사약쯤 알아야지 우짜겠노...

안부(12:08)

지맥길에 이 정도면 걸을만한 길이 아닌가?

무명봉(12:12)

살짝 우측으로 향하면서 걸어가니 296.4m봉 정상이 나온다

296.4m봉(12:16)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가는데...

희미하던 등로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직진으로 내려서니 잡목과 가시의 저항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치고 나갈수가 없구나...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했던가...우측으로 살짝 돌아서 내려간다

갑자기 나타나는 묵은 임도...아마도 송전탑을 건설하면서

만든 임도인듯 한데, 반간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범여를 안내한다

조금전에 잠깐의 힘든 산행을 보상이라도 받는건지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이례재로 향한다

한참동안 편안한 임도를 걸어가는데 좌측으로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용암면 덕평리 들녘 뒷쪽으로 10여년전에 걸었던

백천(신산경표상:영암)지맥 능선에 있는 영암산과 선석산과

그 아래에 있다는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는 곳이 아련하게 보인다

세종대왕자 태실비...사진 별고을님 블로그 인용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의 큰아들인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원손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모셔져 있다.

 

단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석물은 남기고 태실은 성주군 가야산 법림산(가천면 법전리)으로

이전하였고, 세조는 태실을 옮기지 않고 왕이 되었다는 표시로 가봉비를 세웠다.

 

세종대왕은 6명 부인과의 사이에 22명의 자식들을 두었는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世孫)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群集)을 이루고 있는데 태실(胎室)이란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胎)를 넣어둔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에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 즉위에 반대했던

다섯 왕자(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은 석물은 방형(方形)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

즉위한 이후에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세워 태실비 앞에 세웠다

송전탑을 건설할 때 만든 송전탑 옆으로 조성된...

 임도를 따라서 올라간다

오름길에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걸었던 길을 뒤돌아 본다

좌측으로 우뚝솟은 가야산을 기준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산줄기는 환상 그 자체이다 

305m봉(12:38)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라디오에 흘러 나오는

노랫가락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간다

임도 갈림길(12:40)

송전탑을 건설할 때 개설된 임도는 좌측으로

내려가고 임도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간다

비실이님은 이곳이 나와바리 구역인가 보다.

늘 맥길에서 어김없이 만나는데 어찌 안보인다

했는데 만나서 반가워요

314m봉(12:44)

무명봉인 314m봉에서 내려서니 잠깐 등로가 보이지 않다가...

이내 등로가 좋은 곳이  나오고 곧이어 고도차가 없는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봉(12:45)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2:45)

완만한 오르막길

철쭉 군락지 사이로 이어지는 좁은길을 따라서

올라서서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12:49)

보이지 않는 등로에 걸려있는 선답자의 흔적을 

따라서 2분정도 걸어가니... 지도상에도 없는

무명봉인 335m봉이 나온다

 335m봉(12:51)

 335m봉 정상에서 맥길은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진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송전탑 아래로 잠시후 도착할 이례재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대구 시내의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묘지(12:55)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용정교가 보이는데 자주 가지는 않지만 내고향으로 가는

길이라 더욱 더 정겹게만 보이는구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의봉산이 점점 가깝게 다가온다

무명봉(12:58)

무명봉에서 직진으로 무대포로 치고 내려오니 잡목의 저항이 엄청나다

여름철에는 산행이 거의 불가능할 듯 싶다...우측으로 향한다

백두사랑의 이대장도 우회해서 내려간 모양이다

임도로 내려가는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는구나

무대포로 묵은 임도를 치고 내려간다

전주이씨 묘지(13:08)

묘지로 이어지는 임도로 내려서니 ...

성주군 용암면과 고령군 운수면으로 이어지는 67번 도로가 보인다

도로로 내려서서 이례재가 있는 알프스가든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례재(13:12)

경북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와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운수면 소재지에서 용암면소재지와 중부고속도로 남성주I.C로 이어지는

67번 지방도가 통과하며, 성주쪽으로는 알프스 가든이라는 식당이 보이고,

고개 우측 아래에는 대가야호텔앤 리조트와 대가야요양원이 있는데 지방도로

치고는 꽤나 교통편이 많은데 고령읍에서 성주군 성주읍을 갈 때, 33번 국도보다

이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가깝기 때문에 통행량이 많다고 한다

 

서부의 산지와 의봉산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 이례재의 남서부는 금성천의 발원지로

지명에 관한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고개가 높고 험하여 이레 동안 사람이

모여 함께 넘어서 붙였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옛날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을 때에 일곱 번 쉬었다고 붙였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배티재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픈줄 모르겠다.

그래도 알프스가든이라는 식당에 들려 점심요기를 할까 하다가 그냥 숲으로 들어선다

휴식(13:15~40)

철조망 옆으로 올라서자 알프가가든의 소유인듯한 염소농장이 보이는데

방목하는 염소들이 나를 보더니 놀라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나를 경계한다.

이 넘들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너희들을 해치지는 않을테니...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염소들을 바라 보면서 등로 가운데

베낭을 내려놓고 가지고온 초코파이에다 단감 한개, 쥬스로 원기를

보충하면서 25분간의 여유로운 휴식을 즐긴다 

NO47송전탑(13:48)

송전탑을 지나면서 맥길은 조금씩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213.7m봉(13:51)

NO47송전탑에서 3분정도 올라서니 밋밋한 등로 가운데에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는 213.7m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쌤의 산패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잠시후에 오를 441.1m봉을 바라보면서 평평한 걷다가 내려서니

고령군에서 설치한 듯한 신간리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신간리 갈림길(13:51)

신간리 갈림길 옆에는 국가지점번호 라마7491 5683 안내판을 

지나면서 441.1m봉을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곧추선 등로에는 다행히도 돌계단이 나오고...

안전로프가 쳐져있는 빡센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너무 급경상의 오르막이라 그런지 범여의 아킬레스건인

수술부위의 통증으로 인해 가슴이 터질것만 같은 통증이

시작되는데 정말 미칠것만 같다

너무 통증이 심하다...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황소걸음으로

천천히 올라서는데 자꾸만 시간은 지체되고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그래...너무 비관하지 말자...2주동안 편안하게 회천(칠봉)지맥의

산길을 걸었는데 이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 되는거 아닌가 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씩 옮긴다

국가지점번호 라마7508 5663 안내판이 서 있는 뒷쪽으로는

설악산 구간의 황철봉 너덜길과는 비교가 안되겠지만 멋진

너덜길이 힘들어 하는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너덜겅(14:10)

조물주가 빚어낸 멋진 석공예 작품인가?

너덜겅을 가로질러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갑자기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력으로 인해 발걸음은 무거워지는데

계속해서 곧추선 너덜길이 산꾼 범여의 기를 꺾는 느낌이다

너덜겅 동북쪽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도도히 흐르는 영남인의 젖줄인 낙동강은 나무가지 뒷쪽으로 숨어 버렸다

급경사의 직진길로는 올라가는 길은 힘이 부친다.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잠깐 능선에 올라 숨쉬기를 한 다음에 다시 시작되는 빡쎈 오르막길...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된비알에 준.희 쌤의 격려문구를

만나는데, 반갑기보다는 너무 힘이들어 쌤에 대한 고마움도 사라진다

죽을만큼 힘들게 능선에 오른다...이곳이 441.7m봉인줄

알았는데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만 할듯 싶다

쉼호흡을 크게한번 하고 다시 오르막길로 향한다

건조한 날씨 탓인지 낙엽이 수북한 오르막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무명봉(14:37)

까칠한 산치고는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법인가 보다...

방전된 체력으로 마지막 힘을 다해서 441.1m봉으로 향한다

441.7m봉(14:42)

441.7m봉...참으로 힘들게 올랐는데 오후에 접어들면서 날씨는

흐림에서 맑음으로 바꿨으나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상당히 춥다

너무나 힘들게 올랐던 441.7m봉이라 정상에 있는 돌탑에다

무사 산행을 기원하면서 바람을 피해 서둘러 산 아래로 향한다

하산길에서 만난 선답자의 시그널...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이봉산(451.2m)과 삼각점봉(449.3m)을 

바라보면서 물한령으로 내려선다

내리막길의 등로 좌측으로는 지난 4월에 걸었던 금호 남(신산경표상:청룡)지맥

능선에 걸쳐있는 달성군 다사읍의 아파트와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이 보인다

관리가 안된 묘지 아래로 내려선 다음에... 

물한령으로 내려선다

물한령(勿閑嶺:385m:14:50)

경북 성주군 용암면 선송리와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정상에는 고령군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있는데

고개의 지명은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 곳인 물한리(勿閑里)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례재에서 급경사의 너덜길을 오르면서 체력을 다 소진해버려

처음에 계획했던 담밑재까지 가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 같아서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청룡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청룡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의봉산의 모습

물한령까지 이어진 넓은 임도를 따라서 내려가면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빛의 영향인지 역광으로 인해 의봉산은

흐릿하다...저 산만 넘어면 임도라서 충분히 담밑재까지

갈 수 있었는데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청룡사 내려가는 길에서 묘지 너머로 바라본 441.1m봉

북사면은 엄청 거칠고 까칠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듯한

개고생을 했건만, 남사면은 한없이 유순하니 산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곳에서 지도를 보니 우측으로 내려가면 청룡사인데 길은 보이지 않고,

좌측으로 넓은 임도가 보여서 일단 편안한 좌측의 임도를 따라서 무란마을로

내려간다

이봉산을 바라보면서 편안한 길을 내려가니...

무란마을 입구에 고령군에서 설치한 듯한 이정표가 나온다.

무란마을(15:05)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에 속해있는 물한이는 물한리(勿閑里) 또는

무란이라고도 불리며 의봉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이고 골이 좁고

산세가 험하여 한가롭게 지낸다는 뜻과 난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이정표에 표기된 청룡사는 보이지 않고

우측 산밑에 민가처럼 보이는 저 곳이 청룡사인 듯 하다

빛바랜 청룡사 안내판을 지나니 앙증맞은 물한지(勿閑池)가 나온다

물한저수지(15:08)

신간리(新間里)  마을(15:10)

물한지를 지나 최근에 포장한 듯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운수면 신간리 마을 위로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신간리(新間里)는 의봉산(儀鳳山) 북서 자락에 자리 잡은 산간마을로

서남쪽에는 약간의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자연마을인 산간봉산리가 있고,

의봉산 중턱에는 골이 좁고 산세가 험하여 한가롭게 지낸다는 뜻에서 물한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난(亂)이 없다는 뜻에서 무란이라고도 한다.

 

가는평골·돌목골·물한골·점토골·앞망터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물한재·

이릿재[일명 칠일령]· 솟집재 등의 고개가 있으며, 서남쪽 평야 지대에는

경기나무밑들·느티나무밑들·다리깨들· 배루병들·샛논들·세모개들·시북들·

화장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고, 가야토기를 재현한 고령요와 상황버섯을 주로

생산하며, 신간1리에서는 한우를 사육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도로를 따라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트럭 한대가 내려온다.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손을 들었는데, 조금을 지나가다말고,

차를 세워준다...마을 아래 동네로 가는 길이라면 버스가 다니는

67번 지방도까지 태워준다...복받을깁니다

 

도로에 도착하여 지나가는 차량들을 향해 히치를 해보지만 차량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누구하나 태워 주지를 않는구나...하는 수 없어

운수면 택시를 불러서 고령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난생 처음와 본 고령읍내

지금은 고령읍이 아닌 대가야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택시에서 내려 고령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고령시외버스 터미널(16:20)

매표소에 가서 표를 파는 여인에게 아침에 성주에서 서울가는 표를

예매했는데, 여차여차하여 고령으로 왔노라고 하면서 어차피 버스는

합천에서 출발하여, 고령, 성주를 거쳐서 서울로 가는 똑같은 버스니까

고령에서 성주까지 추가 요금을 줄테니 버스표를 바꿔달라고 하니까.

 

이 여인 曰...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여기서 버스를 탑승할 수 없으니 성주가서 타던지 말던지 하란다

이럴때 저 여인을 다루는 방법은 무대포가 최고일 것 같아서

이런 융통성 없는 직원을 봤냐고 하면서 큰 소리를 내면서

버스회사 전화번호 가르쳐 주라...내가 해결하마 하니

버스 회사에 전화를 한 모양이다...그리고는 갑자기 공손히 대하면서

그냥 그 버스표를 기사에게 보여주고, 고령에서 성주까지의 추가요금

3,800원을 주라고 한다... 진작 그럴것이지

서울가는 버스표

교통편을 해결하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진다.

길건너에 있는 중국집에 들려서 간짜장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화장실에 들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다시 터미널로 향한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서 대합실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쉬고 쉽지만

괜히 매표소 여인과 부딪히면 미안할것 같아서 버스 승차장에서 기다린다

고령에서 17시 30분에 출발하여 성주로 거쳐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경부고속도로 옥천휴게소에 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이렇게 지맥 한구간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