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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49

영주시 안정면의 리별 지명유래 안정면 리별 지명유래 ☆신전리 (살포쟁이) 소재지가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 죽령을 넘나들던 길손들이 말에 물을 먹이며 이곳에서 쉬어가던 길목이자 가축을 도살하기도 했던 마을이라하여 (殺浦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고한다. (새끼실) 풍기군 생현면 지역으로 새로 개척된 마을 (신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명 윗새끼실이라고 부른다. (매갑) 옛날 독산 밑에 못이 있어 그 주변의 매화나무가 꽃이 지면 그 못에 떨어져 매갑 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향산) 화향정이라는 우물이 있어 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명 아랫새끼실 이라 고 한다. 매향정-일제 시 인근부락의 선비 30여명이 시세를 탄식하며 향산사이라는 모임을 조직, 그 뒤 2세들이 선조들의 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 2015. 10. 4.
태조 왕건과 관련된 대구 주변 지명 팔공산 비로봉 태조 왕건과 관련된 대구 주변 지명 고려시대는 대장경 등 목판인쇄물의 판각과 함께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 인쇄역사상 간과 할 수 없는 창조적 기술발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를 연 고려 태조 왕건의 발자취가 내 고장 대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구 공산에서의 동수회전(桐藪會戰) :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고려의 왕위에 추대되어 후백제의 견훤과 삼국의 패권을 다투던 중,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고 약탈하자 친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대구 공산에서 일전을 벌이니 이를 동수회전(桐藪會戰)이라 한다. 병산대전, 운주대전과 함께 고려 통일전쟁의 3대 전투로 유명한 이 동수회전은 공산 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역사적인 전투이다. 이.. 2015. 9. 12.
대구지명의 유래 대구지명의 유래 大邱의 옛이름은 多伐(다벌), 達伐(달벌), 達弗城(달불성), 達句伐(달구벌), 達句火(달구화). 大丘(대구)등으로 바뀌었다. "불"과 "벌"은 우리말의 모음접변에 의한 것으로서 같은 말인데 평지, 평야, 촌락, 성읍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達(달)"의 뜻은 圓(원), 周(주)등 넓은 공간을 뜻하므로, 결국 達句火(달구화)와 大邱는 서로 같은 뜻이 된다.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757年(경덕왕 16年) 주, 군, 현 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달구벌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2015. 9. 12.
설악산 지명 알기 * 설악동(雪嶽洞) 1914년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도문면(道門面)과 소천면(所川面)이 합쳐져 도천면(道川面)으로 되었고, 도문면(道門面)이 있던 상도문, 중도문, 하도문 외에 설악산 부근에 장항리(獐項里)가 행정 지역으로 신설되었다. 1966년 동(洞)제 실시 때 장항리를 설악동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고 1998년에 대포동과 설악동을 합쳐 대포동으로 통합하였다. 1) 관광지 일대 1. 구단지 - 신단지가 조성되기 전에 현재의 소공원 자리에 있었던 관광단지. 2. 군량암(軍糧岩) - 군량장(軍糧場)에 있는 큰 바위. 3. 군량장(軍糧場) - 정고평(丁庫坪)과 소공원 사이에 있는 벌판. 비석 형태의 자연석에 군량장(軍糧場)이라고 새겨져 있음. 예전에 군인들이 양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4. 권금성(權金城).. 2013. 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