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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1차 북진(終)

중산리 ~ 천왕봉 ~ 성삼재까지

by 범여(梵如) 2009. 11. 14.

                                    산행일자: 2009년 5월~10일

                                    구간: 중산리~천왕봉~성삼재

 

흔히 지리산은 물이 많아 여자의 산이라고들 하지만 범여가 보긴 남자의 산이라고 하고 싶다

힘들고 고단한 사람이나 즐겁고 기분 좋은 사람이나 신분의 차이를 넘어 모든 사람을 보등어 주니까.

겁없이 지리산 종주를 무박으로 함 도전해 보았다. 서울서 출발 산청 중산리에 도착하니 새벽 3시반

근데 문제가 생겼다. 관광버스 기사가 새차라고 하면서 중산리 매표소까지 못가고 밑에 주차장에

내려주고 가버린다. 위에는 돌릴수 없으니 새차가 기스난다고 밑에다 산꾼을 내리는 바람에 30분을

아스팔트 길을 걸어 매표소에 가니 30분을 허비... 애궁 정상에서 일출보긴 틀렸구나. 부지런히 갔다

총 길이 35km(실제거리:50km)를 14시간에 가야하는 코스, 3개도(경남, 전북, 전남)

4개군(산청, 함양, 남원, 구례) 11개봉(천왕봉, 칠선봉,연하봉,촛대봉,명신봉,칠선봉,형제봉,

삼각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 2개문(개선문,통천문) 1개재(화개재)와 3개령(벽소령,임걸령,돼지령),

5개산장(장터목,세석,벽소령,연하천,노고단 산장)1개목(노루목) 을 해발 1900m에서 1500m까지

오르락 내리락 해야하는 정말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인지 아님 구도자의

길을 무아지경으로 겄는지 범여도 왜 이리 걸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얼마나 힘이드는지 물을 18L 우유 1000ml 마셨는데도 소변 한번 안보고 

내가 뭐 아쉬워 이 짓을 아는지... 울 아들이 걱정이다.

산에 다니는 아빠가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아들아 다만 산에오면 그저 편하고 좋을 뿐이기에....

 천왕봉에서 성삼재까지 3D 지도

지리산은 백두대간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솟아 있으며, 주봉인 천왕봉(天王峰)은

해발 1,915m로서 남한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고, 지리산은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산자락은 경남. 전북, 전남의 3개 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남원시, 구례군의 5개 시,군,

15개 읍,면에 걸쳐 있으며, 영?호남 8백여 리, 320km에 광대하게 펼쳐 있어서 그 넓이가

471.8㎢이며, 여의도 면적의 52배이다.

 

 그리고 서쪽 노고단에서 동쪽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 상에는 반야봉, 명선봉, 칠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 하여 1,500m 이상의 준봉이 10여개 이상 버티고 있으면서

그 안에 크고 작은 산줄기가 사방으로 얽혀, 수많은 계곡과 고원을 만들어 하나의

거대한 산국(山國)을 형성하고 있고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 이처럼 넓은 산국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이처럼 큰 덩치에다가 토심이 깊은 육산이어서 800여종의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드넓은 품새로 인하여 아름다운 자연미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이기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라 했으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라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서도 봉래산(금강산),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방장산(方丈山)이라 하여

삼신산의 하나라 했으며,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는 동남동녀 500명으로 하여금 해동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는데, 바로 그 삼신산의 하나가 지리산이다.

 

 이러한 지리산이기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라 했으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라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서도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방장산(方丈山)이라 하여

삼신산의 하나라 했으며,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는 동남동녀 500명으로 하여금 해동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는데, 바로 그 삼신산의 하나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5악 중의 남악(南岳)으로서 국가 수호산의 역할을 담당한 흔적이 노고단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이 산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혹은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사는 산’이란 뜻의 지리산(智異山)이란 이름이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다.

지리산 비상 탈출로

새벽 4시에 중산리 탐방 지원센터를 통과하고(산청군 시천면 소재)

버스는 대진고속도로 단성I.C를 빠져나와 20번 국도를 타고 중산리(지리산) 표지의 이정표를 보고 깊은 산골로 내달린다.

이곳 단성에는 산청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문으로 유명한 성철(性澈) 종정이 배출되기도 했으며,

성철 종정 입멸 후에는 그의 생가에 겁외사(劫外寺)라는 사찰이 들어섰다. 

 

버스가 지나가는 곳에는 우리나라에 목화를 전래한 문 익점의 시배지가 여기 있다. 그 뿐 아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조선 최고의 처사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산청군 단성면에서 의(義)를 주제로 한 사림문화를 키웠다.

이에 따라 인근지역에는 의를 지키는 지조 높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의 주역을 담당했다.

 

20번 국도는 경남 산청에서 경북 포항을 잇는 도로로 시발점이 이곳 지리산밑 중산리이다.

그 역사적인 그 고장을 이 야심한 새벽에 지리산을 향한다. 음력 4월 보름달은 산꾼들을 반긴다.

4월의 보름달이 지리산 능선으로 기울고

智異山.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다는 걸까. 智利, 地利, 智異 등이

혼용되다가 불교의 영향으로 智異로 굳어졌다고 한다.

지리산의 이름은 큰스님을 뜻하는 방장(方丈)산, 백두산에서 흘러왔다는

두류(頭流), 또는 머물렀다는 두류(頭留)산, 이성계가 기도 드릴 때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타오르지 않아 불복(不服, 不伏)산, 심지어는 빨치산 소굴이라고

적구(赤狗)산이라는 황당한 이름도 있었단다.

 

헌데 불교계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 지리산인데,

문수보살이 지혜(智慧)로써 많은 이적(異蹟)을 보인다하여 ‘智異山’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하며,

또 다르게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됐는데, 발음으로는 지리(智利), 문자로는

 지이(智異)로 쓴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이(異)는 문수(文殊)의 수(殊)와 같은 뜻임.

버스기사의 횡포에 기분이 잡친 상태로 산에 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잊어버리고 산에 몰입한다. 다 부질없는 짓인데 말이다.

이제 보름달은 서서히 기울고 동이 트려는 모양이다. 지리산의 등산로중 가장

고전적인 코스인 중산리에서 천왕봉 코스. 천왕봉가는 최단거리 코스이긴 하지만

그만큼 경사도가 심한 코스이다. 그러나 몇년전에 비해서 상당히 정비가 잘돼있어 길을

잃어 버릴 염려는 없어나 지리산의 웅장한 맛은 없어지고 자꾸 유원지화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黎明이 밝아오는 지리산

큰 산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지 않거나, 많은 일화를 담고 있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산이 크다고 산국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듯이 지리산의 품새는 세상사를 보듬는 포용력이 뛰어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산이라 했겠으며, 지리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은 일이 없다 했겠는가.

 이러하기에 지리산은 자연환경을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산국의 역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德이 모자람인가 정상에 가지전인 로타리 산장 도착할 즈음 이미 해는 다 올라와 버리고(새벽 5시 30분경)

로터리대피소(해발 1,330m:연락처 055 -973-1400)

산장에 도착하기 전에 일출을 만나고 이젠 주변이 훤해진 탓에 편한

걸음으로 도착한 로터리 산장에 도착하여 잠깐 휴식을 취한다.

1972년에 부산 로터리클럽이 세운 산장으로 법계사 바로 아래에 있으며, 수용인원 60명이란다.

비박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는 산꾼들이 주는 이스리 한잔을 마시고 대피소 앞

문창천(文昌泉)이라는 수량이 풍부한 샘에서 물통에 물을 채우고 법계사로 향한다.

대한민국 하늘  아래 첫 절 법계사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 (서기544년) 연기조사께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인도에서 모셔와

봉안한 유서깊은 사찰로서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건했다.적멸보궁 불전을 본당으로 하고

한국에서 가장높은 곳에(해발 1450m) 위치하고 보물 473호 삼층석탑이 유명하다


6,25때는 빨치산의 아지트의 지휘본부가 되는 수난을 당한 사찰이기도 하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최근에 중건해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

법계사 서쪽 헬기장 옆에는 신라의 유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전설이 깃들은 문창대(文昌臺)가 있다. 

개선문 아래서 그래도 기분은 내보고

로타리 산장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사이 동료산꾼들은 벌써 길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법계사 경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일주문에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좌측으로 돌아 암릉을 오른다. 이곳은 아직도 진달래의 봉오리도 보이지 않을정도로 추운 날씨인 모양이다.

저 멀리 진주쪽과 내 고향 의령쪽의 연봉들이 실루엣처럼 밀려온다,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개선문

개선문은 서쪽 통천문과 더불어 천왕봉을 오르는 주요 관문이다.

원래는 좌우에 비슷한 높이의 바위 기둥이 있었으나 오른편 기둥이 벼락을 맞아 무너졌다고 한다.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천왕봉 오르는 가장 급경사인 된비알이 계속되다가

거대한 바위 아래 남강의 발원지라고 하는 천왕샘에 이른다.

서서히 시장끼를 느낀다. 그렇다고 아침식사 할 시간은 아니라 간단하게 행동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동녁에 해는 많이 올라와 지리산을 비춘다.

개선문 지나면서 바라본 지리산 정상 천왕봉의 모습

바위틈새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어있는 진달래. 참으로 곱기만하다.

민족의 그 많은 애환을 안고 있는 지리산. 그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서도

슬픈 내색한번 안하고 모든 산꾼을 보듬어 주고있는 어머니의 산이다.

어머니의 품안같이 포근함이 그리워 매번 지리산을 찾는다.

올때마다 느끼는 그 감동 난 언제 그 빚을 다 갚을까?

남강의 발원지  - 천왕샘

서부경남의 식수원인 남강댐의 발원지라고 하는데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   

천왕봉 정상의 이정표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바라본 산청의 어느 조그만 마을의 한가로운 모습

 

 

천왕봉엔 타원형 자연석의 정상 표지석 한 면에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智異山 天王峰 1,915m’라 새겨져 있다.

 육지에서 제일 높은 정상답게 사방이 활짝 열려 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채근담(菜根譚)에는 ‘높은 데오르면 사람의 마음이 넓어진다(登高 使人心曠)’라고 했으며,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지 않았나 싶다. 三代가 德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정상

범여도 덕은 조금 쌓았는가 오늘은 가시권이 참으로 좋다. 저 멀리 다도해와 진주 시가지, 덕유산, ,

가야산, 광양 백운산, 사천의 와룡산까지 보인다.

남한에서 2번째 높은 곳(천왕봉:해발 1915m) 지리산 정상에서

지리산 장대하고 웅대함에 늘 겸손해지고 두려움이 앞선다

천왕봉 정상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발디딜 틈이 없을정도로 산꾼들로 인산인해다.

그리고 날씨도 상당히 차갑다.

인증삿을 하고 서둘러 제석봉으로 향한다. 정상에서의 내림길은

정비가 참으로 잘되어 있으나 자꾸만 상업화되고 유원지화 되어가는 지리산이 아쉽기만 하다.

총체적인 지리산 보호대책이 강구되어야 되는것은 아닌지... 

제석봉(帝釋峰:1,806m)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

그런데 소문대로 제석봉엔 하얀 고사목들이 처연하고 봉우리 일대가 황량하다.

이 제석봉 고사목은 늙어 죽은 고사목이 아니라 인재에 의한 고사목이라고 한다.

 

즉 자유당 말기에 당시 농림부장관이던 사람의 삼촌이란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석봉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러다가 여론이 악화되고 말썽이 날 것 같으니까 흔적을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렀단다.

그 때 불탄 나무들의 잔해가 지금의 고사목이다.

언제나 산꾼들을 반겨주는 제석봉의 枯死木들

장터목 대피소(해발 1,653m)

장터목은 옛날 천왕봉 북쪽 기슭의 주민과 남쪽 기슭의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장터목에서

장을 열어 서로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즉 남쪽 산청 사람들이 생선, 소금 등 해산물 따위를 지고 법천골로 해서

장터목으로 올라오고, 북쪽 남원, 함양 쪽 사람들은 곡식, 직물, 약초 등을 짊어지고

백무동으로 해서 올라와서 물물교환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터목은

지금도 법천골 코스와 백무동 코스가 만나는 4거리가 되어 있다.

 

제석봉에서 고사목과의 대화를 나누다 도착한 장터목 산장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아직도 꽤 추운 날씨에 바람이 세차다.

이곳은 미어 터지는 산꾼들로 인해 인산인해다. 겨우 비집고 자리를 펴서

코펠에다 부대찌게를 끓여서 소주 한잔을 곁들인

아침을 마치고 부지런히 세석산장을 향해 길을 나선다.

식사후에 곧 바로 출발한 탓인지 오름길이 힘이든다. 

연하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천왕봉

다소곳이 피어있는 얼레지꽃

연하봉 오름길에서 천왕봉을 배경으로

참으로 이쁘게 핀 하얀꽃이 백두대간을 시작하는 산꾼들을 반기고 있다.

연하봉의 웅장한 모습 이제 진달래가 막 피려고 준비중이다.

연하봉(煙霞峰:1.730m)

장터목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도착한 조그만 암봉이 있는 연하봉(1.730m)이다. 

연하봉엔 유별나게 얼레지가 많아 초여름엔 보라색 꽃밭이 기암괴석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그리하여 연하봉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연하선경(煙霞仙境)이라 하여 지리산 10경에 포함시킨다. 

연하봉에서 촛대봉으로 세석산장 가는 길은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참으로 많이 만난다.

촛대봉(1,703m)

연하봉에서 촛대봉 오름길에는 이제 얼레지들이 피기 시작하고 뒤돌아보니

천왕봉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듯이 눈앞에 다가온다.

올망졸망한 바위가 많은 촛대봉(1,703m)에 도착한다.  

촛대봉은 바위들이 마치 촛농이 녹아내린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세석평전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제공을 한 그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참으로 기막힌 슬픈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성삼재를 향한 길을 재촉한다.

세석평전 습지와 세석대피소

잔돌이 많은 평평한 곳(잔돌배기)이라 하여 세석평전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촛대봉의 서남 사면과 영신봉 사이에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고원의 둘레가 12km에 달한다.

아고산지대에 속하면서 비와 안개가 잦으며, 바람이 세게 불고, 짙은 일사량과 강한 자외선에다가

심한 일교차를 나타내는 독특한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희귀한 식물이 자라고 있어서 생태계의

가치가 높으며, 봄이면 과거 세석철쭉축제가 열릴 정도로 철쭉이 많고 아름답다.

 

지리산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세석대피소는 단순한 산장이기 이전에 지리산의 명소이기도 하다.

수용인원 240명으로 시설규모가 지리산 대피소 중에서는 가장 크고 물도 풍부하다.

샘터 위쪽에 고산습지가 발달해 있어서 수량이 풍부한 것이다.

세석대피소 이정표에는 ‘장터목대피소 3.4km, 벽소령대피소 6.3km, 거림골 6.0km,

백무동 6.5km, 천왕봉 4.1km’라 적혀 있다.

 

 세석평전 북쪽 사면에는 소와 폭포가 연이어진 아름다운 한신계곡이 백무동으로

이어져 가고, 남쪽 사면으로는 거림골로 내려가는 최단 코스가 있다.

그리고 이 남쪽 길은 중간에 대성리로 내려가는 길과 나뉘어진다.

 

그런데 이 남쪽 거림골과 대성리는 해방이후 이념 갈등에 휩싸여 빨치산 활동을 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어서 아직 그들의 원혼이 떠도는 듯하다. 빨치산

활동을 잘 한 일이라 할 수는 없으나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민초들이 친일파들의

핍박에 못 이겨 산으로 숨어든 것이 결국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빨치산이 됐고,

원통하게 희생된 것이니 그들의 진실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정확하게 밝혀질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영신봉(靈神峰:1651m)

세석산장에서 이스리 한병을 동료산꾼과 나눠 마시고 10분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산장 우측 계단을 올라 10분쯤 지나니 영신봉이 나타난다.

영신봉은 정상을 비켜서 오른편(남쪽) 허리 길로 우회하며, 영신봉 이정표에는

 ‘벽소령대피소 5.7km, 세석대피소 0.6km’라 적혀 있고, 저 아래

대성동 마을과 청학동 삼성궁도 아련히 보인다 

영신봉에서 남쪽 삼신봉(1,284m) 쪽으로 뻗어 내린 큰 능선이 낙남정맥(洛南正脈)이다.

영신봉에서 분기한 낙남정맥은 삼신봉을 지나 김해의 신어산(神魚山)을

거쳐 대동면 매리의 고암나루터까지 이어진다.  

언젠가는 내 고향길을 걸을 날이 있겠지.

칠선봉(七仙峰:1,588m)

칠선봉은 7개의 바위가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 노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선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바위들이 모두 거칠고 터프하게 생겼다.

칠선봉의 이정표에는 ‘벽소령대피소 4.2km, 세석대피소 2.1km, 천왕봉 7.2km’라 적혀 있다.   

서서히 피로도가 몰려온다. 아직 성삼재까지는 이정표도 잡히지 않는데 말입니다.

칠선봉을 지나니 날씨가 아침에와는 달리 날씨가 꽤나 덥다.

베낭속에 반팔로 옷을 갈아입고 공터의 야트막한 축대 아래에 가

느다란 대나무 파이프에서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다. 

시원하게 물한바가지 마시고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벽소령으로 향한다

선비샘의 유래

선비샘은 신분 갈등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선비들도 이곳에서 물을 마시려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어서 천민 앞에 선비가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선비샘이라 했다고 한다.  

 

선비샘 설명판에는

「옛날 상덕평 마을에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조망바위에서 천왕봉을 배경으로

덕평봉 가는 길에서 저 뒤에 지나온 천왕봉에 손에 잡힐듯이 보인다.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가장 사랑했던 여인 울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한 산인 지리산.

그래서 지리산을 어머니산이라고 했고 여자의 산이라고 했던가?

과거 빨치산을 토벌할  당시 건설한 군사작전도로가 지금은 임도가  돼 이곳에서 마천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천까지는 8.4km이나 주능선에서 평지로 내려가는 최단 거리의 하나로서 산기슭 마을이 빤히 보인다. 

1951년의 겨울 저 아래 국군토벌대에 의해 빨치산이 들이 떼죽음으로 의신마을과 대성동 마을에

3일 밤낮으로 피비린내 나는 그 아픔 아직도 아련하게 밀려오는구나. 

벽소령 대피소

벽소령(1,350m)은 지리산 중심부에 고도가 낮은 잘록한 허리와 같은

고개로서 북쪽 마천(馬川)과 남쪽 화개골을 연결하던 애환 어린 영마루이다.

그래서 지금도 북쪽으로 마천(음정)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고, 남쪽으로는

그 유명한 빗점골을 지나 대성리(의신마을)로 해서 화개(花開)로 내려갈 수도 있다.

 

푸른 숲 위에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 맑아서 오히려 푸른빛이 돈다고 하여

푸른 벽(碧), 밤 소(宵)를 써서 벽소령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벽소령의 달밤(碧宵明月 혹은 碧宵夜月)이

유난히 아름다워 지리산 10경중의 하나로 꼽힌다.  

연하천 산장 가는 길에서

형제바위
형제봉 동편 아래에 10m 크기의 입석이 두 개 등을 맞대고 서 있다.
이 바위를 일러 ‘형제바위’라 하고, 그래서 봉우리 이름도 형제봉이 된 것이다.
형제봉 바위 아래에 이정표가 있어서 '노고단 12.6km, 벽소령대피소 1.5km, 정터목대피소 11.2km'라 적혀 있다.
벽소령대피소에서 형제봉에서 1.5km, 30분정도가 소요가 됐다. 연하천대피소에서는 3.6km 거리인데,
큰 굴곡은 없으나 체력도 많이 소진된 지친 상태이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는지 자꾸만 쓰라려만 온다.

연하천 대피소 산장에 쓰여있는 이 원규님의 이 詩구절 - 왜 이리 산꾼의 가슴에 와 닿을까

 

연하천대피소는 개인이 운영하는 수용인원 50명의 아담한 산장이다. 

노고단에서 10.5km, 5시간-5시간 30분 정도 전진한 곳이고, 천왕봉이 15km 남은 지점이다. 

연하천(烟霞泉)이란 이 산장 부근에 솟는 샘물이 마치 구름 속에 흐르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연하천대피소의 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다. 뿐만 아니라 비가 올 때는 수십 가닥의 물길이

 연하천의 작은 분지에 몰려 들어와서 사방이 물이 질척거리고, 거기에 안개마저 끼이면 그야말로 연하천이 된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남쪽 빗점골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아랫동네 의신마을 사람들이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기나 할 뿐 정식 등산로는 아니다.

 

빗점골은 저 유명한 지리산 빨치산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최후를 마쳤다는 곳이다.

당시 빨치산들이 명선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 덕평봉에 이르는 일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하여 이 일대를 ‘피의 능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리산 낭인의 한 사람인 시인 이원규는 그의 <지리산 편지>에서

 “행여 지리산에 오시거든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길 바랍니다.

다만 등산(登山)은 말고 입산(入山)하러 오시길…”이라 했다. 

등산은 인간의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상생(相生)의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 또한 도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명산론(明山論)에 이르기를 ‘산이 비옥하면 사람이 살이 찌고,

산이 척박하면 사람이 굶주리고, 산이 맑으면 사람이 깨끗하고, 산이 부서지면

사람들에게 불행이 생기고, 산이 멈추어 기가 모이면 사람들이 모인다.’라고 했다.

아마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지리산에 모여들었던 것이고, 깨끗한 기가 모이는 곳이니

뜻이 깊고 지조가 높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며,그래서 지금도 가슴속에

나름의 뜻을 숨긴 많은 도학 지망생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는 것일 것이다.

노루목 3거리

삼도봉에서 반야봉 길이 갈라지는 노루목 3거리에 도착한다.

거기서 반야봉을 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그냥 패스한다.

지리산 3대 주봉의 하나인 반야봉(般若峰;1,732m)에 다녀오려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나  갈길은 먼데 시간이 없으니 어찌하랴.

 화개재(花開峙)

토끼봉(卯峰)에서 여유있는 걸음으로 30여분정도 오르내림을 한 끝에 만난 화개재

거기 이정표에 ‘노고단 6.3km, 천왕봉 19.2km’라 적혀 있으며, 반야봉을 들리지

않는다면 화개재에서 성삼재까지 3시간 반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화개재에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으며, 헬기장이 있다. 화개재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200m 거리에 수용인원 100명의 뱀사골대피소가 있다.

뱀사골대피소 앞을 지나 계속 그 길로 내려가면 반선마을에 이른다.

화개재에서 반선마을까지 9.2km이다.

  

 지금은 공식적인 등산로가 아니나 화개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목동골(일명 연동골)로 해서 화개로 내려가는 최단 코스가 있다.

길이 옛날 화개장터에서 생선, 소금 등 해산물을 지고 화개재로

올라가서 지리산 북쪽의 운봉, 산내, 마천 등지에 공급을 하고,

그 대신 북쪽의 곡식, 산채, 약초 등을 짊어지고 화개, 하동 지방으로 넘어가던 옛길이다.

전북, 전남, 경남 맞닿은곳 삼도봉(해발: 1499m)에서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3개

도 경계지점으로 전망이 시원하고 아담한 청동 표지물이 서 있다.

삼도봉에서 남쪽 황장산(942.1m)으로 뻗어가는 불무장등 능선이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이다.

임걸령(林傑嶺)노루목 3거리에서 임걸령에서 2km, 30여분 전진하면 반야봉 길이 갈라지는 노루목 3거리에 닿는다.

 

거기서 반야봉이 1km이고, 노고단에서 4.5km 전진한 곳이다.

지리산 3대 주봉의 하나인 반야봉(般若峰;1,732m)에 다녀오려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나

실제 산행을 해 보면, 올라가는데 40분, 내려오는데 30분, 하여 1시간 10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거의 기초 체력은 다 바닥이 나 버려 이제 초코파이와 소금에

물을 타서 먹으며 체력 안배를 한다.반야봉은 백두대간 마루금이 아니라 담 기회로

미루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마루금 주능선 상의 돼지평전에 닿는다. 예전에 멧돼지들이 그 일대 군락을 이룬

원추리 뿌리를 캐먹기 위해 많이 몰려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의병부터 한말 의병활동, 좌우 이념대립의 풍진을 껴안은 산.
지리산 중에서도 피아골은 처절한 역사의 혼이 숨쉬는 곳.

노고단 정상의 돌탑 나와 인연 맺은 모든 분들에게 올핸 존일만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노고단(老姑壇) 정상 아직까지 성삼재까지 3,1km나 남았는데 긴장이 풀리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기력이 쇠진해진다.갈길은 아직도 먼데 해는 서쪽으로 떨어지고 막막하다.

다행히 길은 좋아 큰 어려움은 없다

 

노고단은 예전에 길상봉(吉祥峰)이라고도 했으며,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지리산 3대

주봉의 하나로서 정상의 서남 방향으로 35만평의 넓은 고원이 형성돼 있으며,

현재 자연휴식년제에 묶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피아골 3거리에서 노고단 가는 길은 서쪽을 향해 너덜길  산허리 길로 평이하게 전개된다.

지리산만큼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산도 없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대간 길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하게 정비한 국립공원 정책자들께 마구잡이 장사를 맡기고 싶다.

이러니 구례-남원 간 산업도로 놔두고 ,대간 정맥 마루금을 통과하는 신작로 건설에

반대하는 환경론자들의 반감을 살 수 밖에...'토지'의 최참판댁을 재현 한답시고

섬진강 어귀에 지은 大家를 보고 박경리 님이 "지리산에 미안하구나"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언제까지 이 명산을 훼손시킬 셈인가?

노고단대피소

이제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인내력으로 버틴디. 주위의 자꾸만 어두워 오는데 후배 산꾼은 자꾸만

 쉬어 가잔다. 전망대에서 1km, 10분 정도 내려오니 노고단대피소(1,422m)에 닿는다.

아직도 성삼재까지 2.5km라 이젠 완전히 임도라 30분 정도 걸릴것 같다.

노고단대피소 앞 이정표에 ‘천왕봉 25.9km, 반야봉 5.9km’라 적혀 있다

노고단대피소는 수용인원 270명이며, 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성삼재(姓三峙)

14시간의 긴 여정이 산행이 끝나는 성삼재(1,090m)는 구례에서 남원 혹은 산내면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이다.  성삼재는 노고단 입구라 할 수 있으며,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어서 항시 등산객, 관광객으로 붐빈다. 삼한시대에 한 부족이 성삼재 아래 달궁골에 터를 잡고,

각기 성(姓)이 다른 세 장군으로 하여금 이 고개를 지키게 했다는 데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