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구간: 성삼재-고리봉-묘봉치-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고기리-노치마을-수정봉
입망치-700봉-여원재 (21,6km)
산행일자: 2009년 11월 15일
날 씨: 성삼재에서 큰고리봉까지는 눈보라에 강풍까지 서있지 못할정도. 만복대 정상 영하8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는 될듯. 고기리서 영원재까지
추운 날씨이나 그냥 견딜만함
04:30 성삼재 출발
05:05 고리봉 도착
05:35 묘봉치 도착
06:10 만복대 도착(눈보라에 강풍이 얼마나 심한지 몸을 가누지 못함)
06:55 정령치 도착 (도시락으로 식사, 베낭의 물호스가 얼어버려 물을 못먹고 보온통의 샤케로 대용)
07:30 식사후 정령치 출발
07:50 큰고리봉 도착
09:00 고기리 도착
09:30 노치마을 도착 (마을회관에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이고)
10:20 수정봉 도착
10:50 입망치 도착
11:10 700봉 도착
11:45 여원재 도착
1, 성삼재에서 정령치까지
서울에서 밤 11시 사당역에서 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져
버스가 서는 동시에 잠이 깨니 대진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다. 그때 시간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화장실 갔다가 다시 잠이들어 버스가 흔들리는 바람에 잠이 깨에 보니 성삼재 올라가는
861 지방도로를 들어선 모양이다. 이 도로는 남원과 구례를 잇는 도로로 그 옛날 선교사들을
위해 만들었다는데 지금은 구례군청에서 성삼재까지 자연보호라는 미명아래 케이블카를
놓겠다고 난리인 모양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게 최상인데 지자체의 세수에 눈이 어두운
공무원 나리 제발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시기를... 새벽 4시 조금 넒은 시간 6개월만 성삼재에 도착.
아직도 지리산은 어둠속에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하늘이 울어도 지리산은 울지 않는다는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말을 생각하면서 성삼재에서
내리니 올해 첫눈을 맞았다. 그것도 허벌나게... 오늘 9시부터 국립공원 등산로 1개월동안 전면
통제되는 바람에 그 추운 날씨에도 등산객은 인산인해 그런데 전부 노고단 쪽으로 향하고
만복대 쪽은 우리 한팀밖에 없다. 미끄러운 길에 아이젠을 차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면서
정령치로 향했다.
여원재-6.75-주촌리-2.15-고촌리-3.4-고리봉-0.9-정령치-만복대-5.2-성삼재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성삼재 [性三峙:1,102m]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에 있는 지리산 능선 서쪽 끝에 있는 고개로, 높이 1,102m이다.
마한 때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던 고개라 하여 성삼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고갯마루에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성삼재에서 천은사까지의 구간에는 1988년 개통된 지리산 횡단도로(지방도 861번)가 개설되어 있는데 거리는 약 10㎞이다.
성삼재 주차장 앞에서
성삼재에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눈보라로 인해 산죽 대밭길은 상고대로 변해 버렸다.
꽤 가파른 삼각능선을 이루는 오름길의 오른쪽 달궁계곡은 크고 깊은 어둠의 바다속에
잠들어 있고, 왼편 당동 마을 쪽 내산리 불빛들이 가지사이로 간간이 함께 걷는다.
편치 않은 첫 오름을 30 여분이 지나고 난 후, 작은 고리봉으로
여겨지는 안부에 이르니 구례쪽에서 불어오는 살을 에일듯한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난 고리봉을 다녀오니 동료 산꾼들은 모두들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후미로 처진다
호흡을 가다듬는 가운데 어디 먼데서 짐승 울음소리가 흉흉스레 들려온다
지난번 5월에 노고단 입구와는 반대편 길 울타리에
작은 철망 문을 비집어 열고 오름 행렬의 헤드랜턴 불빛을 이어 간다.
이 쪽 서북능선은 국립공원 관리지역이 아닌가.
성삼재 휴게소에서 861번 지방도를 따라 달궁계곡 내려가는 길을
내려가다 좌측으로 백두대간 들머리로 표시되어 있는
시그널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안전망 펜스뒤의 백두대간의 마루금으로 들어선다.
대간길에서 50m 비켜나 있는 작은 고리봉(1,248m)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헬기장을 지나고 미끄러운 숲을 지나 성삼재를 출반한 지
35분만에 마구금에서 50여m 살짝 떨어져 있는 “고리봉”에 오른다.
이 “고리봉”은 “정령치”뒤에 있는 “고리봉”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고리봉”이라고 한다.
“고리봉”은 한자로“環峰”이라고 한 것이라 “고리 環”이라 부른 모양이다.
아득한 옛날 남해안 하동 앞 바다에서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남원의 오수정까지 배를
오르내렸다고 하는데 그때 오르 내리던 배들을 묶어 놓았던 고리가 이 산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만복대 정상 이정표도 눈에 쌓이고...
만복대(萬福臺) 정상에서
높이는 1,437m이다. 노고단(老姑壇:1,507m)·반야봉(盤若峰:1,732m)과 함께 지리산 국립공원의 서부를 구성하며,
소백산맥 중의 고산을 이룬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 전체가 부드러운 구릉으로 되어 있어 산 높이에 비해 산세가 부드러운 편이며,
고리봉(1,305m)까지 3km에 이르는 남능선에는 지리산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억새 군락지가 있어 주변의 정경과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정상에서는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1,915m) 등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북쪽에 있는 정령치(1,172m)와 남쪽에 있는 성삼재(1,090m) 고개에는 도로가
나 있어, 두 고갯마루를 잇는 당일 산행을 할 수 있다. 섬진강의 지류인 서시천(西施川)이 만복대의 서사면에서
발원한다. 인근 구례군의 산동면(山洞面)에 있는 온천관광지와 연계한 등반지로서 찾는 이들이 많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민둥위에 솟구친 힘이 맏형다움이 묻어난다 억새 군락지로도 유명하다
만복대 정상위의 돌탑
정상에서는 얼마나 눈보라가 센지 서있기조차 힘이든다.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는 넘을것 같은 느낌이다.
사진 한컷 찍고 서둘러 정령치로 나서는데 내림길은 너무나도 미끄러워 조심조심해서 발을 내딛는다.
만복대 하산길에 여명을 맞이하고...
온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고 추웠지만 정말 환상 그자체 역쉬 겨울 산행이 一味야
정령치 산불감시초소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이 지역에 사용되고 있는 지역명이
삼한시대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진한의 왕은 성삼재 아래에 있는 달궁(宮)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 10리밖에 嶺에 鄭氏 姓을 가진 장군을 배치하여 “鄭嶺峙“라 하였고
동쪽 20리 밖의 嶺에 黃氏 姓을 파견한 곳에는 “黃嶺峙”라 칭했으며 남쪽 20리 밖의
산령에 각기 다른 姓을 가진 3명의 장군을 보낸 곳이 성삼재였으며 북쪽 30리 밖에는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해서 “八郞峙 ”라 하여 외적의 침공을 막았다고 한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지리산에서 반다리 피하는 요령도 있고
정령치(1172m) 정상에서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眞韓)과 변한(弁韓)의 침략을 막기위해 鄭氏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이곳을 지키게끔 하였다고 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치의 안내 표지판
산불감시초소를 내려오니 눈이 그치기 시작한다. 정령치 휴게소 화장실앞에서 바람을 피해 아침상을 펼친다.
모든게 다 얼어버려 겨우 버너를 꺼내 라면 하나를 끓여서 밥을 말아먹고 큰고리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정령치 휴게소에서 바라본 지리산 반야봉
2, 큰고리봉 - 고기리 - 노치마을까지
어느 통신회사 광고 카피문구가 갑자기 생각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 ㅋㅋㅋ) 정령치에서 깨 떨드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큰고리봉을 향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아이젠을 착용하고 산행을
하니 한결 편한 느낌 그 자체 큰고리봉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고기리로 하산하는데 갑자기 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부지런히 치고 내려와 해발 800고지쯤 내려오니 이곳은 아직 가을이다. 채 낙엽도 지지않고
고기리를 하산하여 노치마을을 가기 위해 60번 지방도로를 2km를 걸어야만 노치 마을을 갈 수 있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거치는 유일한 마을이다 (백두대간의 유명세(?)로 인위적인 길을 만들어 그 마을을
지나가게 하는곳도 있긴 하지만 국립지리원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마을이 노치마을이란다.
매일 지나가는 백두대간 산꾼에다 이곳은 지리산 둘레길 코스라 외지인에 시달려 귀찮을 법도 한데
이곳 주민들은 길을 물으면 참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주민들이 참으로 고맙다)
설화(雪花)가 만발하고...
큰 고리봉 가는 길
호젓한 산죽길을 걸으면서 고기리가는 내림길로 들어선다.
해발 800고지 아래에는 눈이 오질 않고 비가 내린다.
큰 고리봉 정상(1,305m)
정령치 휴게소에서 민생고를 해결한 후 물이 얼어붙은 해우소에서 생리현상까지
해결한 후에 느긋하게 큰고리봉으로 향한다.
이젠 눈보라도 그치고 저너머 반야봉은 운무에 가려 어렴풋이 보일듯말듯 애간장을 녹인다.
눈이 쌓여 미끄럽긴 하지만 조심조심해서 간다.
정령치를 출발한 지 20분만에 도착한 큰고리봉에서 인증샷을
하고 고기리 마을로 급한 내림길을 내려간다.
우측으로 가면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다.
대간길은 좌측으로 90도를 꺽어야만 한다.
저 아래 고기리 마을은 눈은 보이지 않고 한가로운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여유로운 걸음을 걷는다.
큰 고리봉 정상...이제부터는 약 40분 동안 내림길에 송림과 잡목 숲길인
날머리 주촌이니 여유를 갖고 산행을 마무리하고자...
저 아래 남원시 주촌면 고기리 마을은 평온하기만 하고 이곳
남원지역 에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하여 신라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해발 1100고지이상은 눈이 내리고 800고지 이하는 아직 가을이고...
고기리 하산지점 정령치 모텔 - 대간 산꾼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3, 노치마을 - 수정봉 - 여원재까지
노치마을에서 여원재까지는 지난주에 탔던 범여의 복습구간이라 따로 설명은 부치질 않겠다
노치마을에서 수정봉 가는길에 600년이상 된 소나무 4그루가 노치마을 당산(堂山)을 지키고 있다.
4그루의 나무가 멀리서 보면 1그루 처럼 보인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당산가기전 마을에 있는
노치샘의 물맛도 정말 일품이고 노치마을에서 당산을 지나 수정봉으로 가는 길은 깔닥고개이다
약 2km정도인데 봉우리가 비슷비슷하여 수정봉 다 왔다 싶으면 또가야하고 다시 반복을 3차례
해야만 수정봉에 도착할 수 있다. 수정봉 정상에서 동료 산꾼이 준 밀감이 꿀맛이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진 편안한 워킹코스이다. 주위에 S라인의 소나무들이 즐비하고 특히 이 지역의
소나무들이 색깔이 곱고 힘이 있어 보인다. 아마 공기가 맑아 오염이 덜된 탓이 아닐까 싶네
백두대간 유일의 마을 노치마을 - 남원시 주촌면 덕치리 노치마을이 정확한 주소이다
갈대 노(蘆) 고개 치(峙)를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평지가 아닌 고개임을 암시한다.
지금 이곳은 갈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가롭기만한 노치마을 가는 길
대간 마루금이 지리산의 높은 산군을 벗어나 속세로 내려왔다가 크고 작은 마을
몇 개를 살펴 보고 또 다시 산으로 오르는 길목격인 가재마을...
고촌에서 가재마을까지는 대간의 주능선인 730번 지방도로 따라 북으로
약 1km 정도 가면 우측으로 길은 꺽여져 갈림길이 나온다.
(버스정류장이 있음)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곧장 가면 수정봉 아래에 자리한 마을에 닿는다.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동네 뒷산에 보기 좋은 소나무 다섯그루가 서 있어 산객의 마음을 들뜨게하고...
그 나무 아래 작은 가지마다 대간길임을 알리는 시그널이 풋풋한 풀내음이 풍기는 바람결에 몸을 흔들며 걸려 있다.
1주일전 이 코스때 비를 참 많이 맞았는데
노치마을은 섬진강과 진주 남강의 분수령으로 물의 흐름이 나뉘게 된다.
운봉고원인 이곳은 옛날 바다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바다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가재마을은 바닷가재에서 딴 이름이고, 주촌(舟村)은 ‘배마을’이란 뜻이며,
고리봉은 배를 맨 고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유명한 물맛 좋은 노치샘에서 목을 축이고...
마루금에는 상식상 샘이 있을 수 없으나 노치샘이 있다.
물맛이 참으로 좋다. 바가지로 한모금 마시고나니 속이 시원하다.
노치샘 이정표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은 서쪽으로 떨어지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동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 지류의 남강으로 흘러들어 낙동강을 거쳐
남해에서 다시 만난다.
노치마을 당산 - 600년된 소나무4그루가 멀리서 보면 한그루처럼 보이고
노치마을 당산의 제단과 위패
그 옛날 이곳에 짚신을 만드러 팔던 거지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주려 했으나 눈이 많이와 묻을 땅을 찾지 못하던 차에
노치(蘆峙)마을 뒷산에 관 하나 들어갈 정도의 땅이 녹아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거지를 장사를 지내주었는데 그 자리가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 노치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1월1일 자정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내주고 있다고 한다.
수정봉까지는 산행로 주변에는 잡목들이 약간 줄지어 서 있고. 길은 평이하나.
정상에 서면 잡목으로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전망은 포기하고 진행하여 능선에 서면 우측으로 운봉면 소재지와 크고 작은 동네들이 보인다.
고리봉에서 헤어졌던 바래봉-덕두산 능선과 대간 주능선에 둘러 싸인 마을과 도로들도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가재마을 뒷산에 올라 보면 주촌리 덕산저수지 너며 60번 지방도로 옆에 자리한
마을이 공안리(공안저수지) 즉 이성계의 황산대첩지다.
햇살을 받은 공안리 일대 천수답들이 보석을 깔아 놓은 것처럼 반짝이며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이 1380년(고려 우왕 6년)태조 이성계가 왜군 아지발도(아키바쓰)를 죽이고 크게 이긴 황산벌이다.
중간에 우뚝 솟은 산이 황산이다.
전라도에 상륙해 약탈과 방화 그리고 살육을 일삼는 왜구의 침탈을 막은 곳...황산벌!
이성계가 아키바쓰의 투구를 화살로 쏘아 맞힌 뒤 드러난 얼굴에 다시 화살을
날려 즉사케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전쟁 황산대첩!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 많은 한과 아품을 심어 논 민족이다.
수정봉 정상에서
수정봉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속해있는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운봉 쪽에서 바라보면
야산과 같이 보이지만 남원 쪽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의 주능선과 같이 하늘금에 맞닿아 있고,
산세는 부드러운 능선길로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은
수정봉에서 입망치 내림길은 참으로 편안하다.
좌측에 운봉읍 소재지가 아련히 보이고 벌목허가를 받아서 채취를
했는지 나무들이 많아 솎아내어 먼 거리도 꽤나 잘 보인다.
입망치까지는 약 20여분이 소요되며 소나무가 많은 편안한
육산이다. 오랫만에 룰루랄라하며서 내려온다.
판소리의 고향...운봉!
판소리의 동편제 발생지인 운봉에는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하나인 흥보가의 배경이 된 마을들도 있어 판소리의
고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 음악의 싹이 튼것은 오래 전 일로 통일신라 때 옥보고는 거문고를 가지고 운봉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바래봉 북쪽의 옥계동 계곡이 옥보고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은 조선 말기 운봉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판소리를 본격적인 창으로 생성시킨 대가들은 모두 송흥록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이었다.
즉 송흥록의 수제자인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에 의해 중고제가...주덕기의 아들 상한과 순창 사람 박유전에 의한
서편제가 갈려 나갔다. 이 때문에 송흥록은 판소리의 증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송홍록의 종손으로 송광록.송우룡 등 쟁쟁한 명문가 출신인 대천재 송만갑도 운봉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나 일곱살에
소리에 입문했다. 판소리 200년사에 가장 많은 제자를 가진 송만갑의 歌風은 요즘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고종의 생일 잔치에 전라도 광대 대표로 임금 앞에서 노래를 불러 절찬받은 장재백과 가야금의 천재인 장행진도
운봉 출신이었고. 수궁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박초월은 고향은 아영면 청계리지만 어릴적에 송흥록과 송만갑의
고향인 화수리 비전마을로 이사가서 소리를 익혔다.
입망치 고개에서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우마차가 많이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입망치에서 여워내 가는 길은 참으로 편안하다. 주위에 벌채로 인해 조망권도
확보되고 저 멀리 운봉읍내도 잘 보인다. 이젠 하산점이 얼마 안남았는지
여원재 지나가는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700봉에서 바라본 운봉읍
700봉에서 본 수정봉 정상
여원재 막걸리집 - 간판을 시원한 막걸리에서 따뜻한 막걸리로 바꿔야겠다
정겹기만한 여원재의 벅수와 함께
20번 국도가 지나는 전북 남원에서 경남으로 지나는 중요한 도로였으나 88고속도로가 금방에 생기면서 통행량이 많이
줄었들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를 잇는 중요한 도로일 뿐 아니라 양국의 전략적 군사 요충지이기도 한 곳이다.
동학혁명 유적지 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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