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0년 5월 30일
산행구간: 한치재-대부산-서북산-706봉-여항산-743.5봉-미산령-557봉-오곡재
527봉-큰정고개-356봉-363봉-발산재
거리/시간: 도상거리 22.1km/실제거리 26.5km, 소요시간 7시간 20분
지난 5월 16일 연등축제 행사로 인해 이 구간을 산행하지 못해 항상 마음 한구석 찜찜한 구석이 있었던 차에
당일 산행을 한티재에서 오곡재까지 하는 산악회가 있었다. 일욜에 손님과 계약건이 있고 해서 토욜 이
산악회를 따라 나섰다. 경부 고속도로 지나 중부내륙을 타고 다시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함안 I.C를 빠져
나와서야 남녁지역 아라가야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의 낙동강도 4대강 사업으로 온 천지가
파헤쳐져 있다. 개발만이 능사가 아닐진데 국민들이 상당수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밀어 부치는 정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저런 생각에 한티재를 향하는 도로옆에는 무기연당(舞沂蓮塘)이 아름다운 고택의
자택을 뽐내면서 차창사이로 지나간다. 잠시후에 한티재에 도착한다.
그런데 너무 늦게 서울서 출발하는 바람에 11시 반이 되서야 산행을 나섰다. 한티재에서 출발하여 봉화산
삼거리에 도착하는 약 40분간 급경사의 된비알을 오르내리면서 아직 몸이 예열되지 안된 상태인지 숨이 많이 차다.
삼거리에 도착하니 저 넘어 지난 구간의 광려산, 삿갓재, 대산등이 손에 잡힐듯이 눈앞에 와있다.
오늘 정말 가시거리는 죽인다. 거기다가 마루금의 능선은 숲으로 되어있어 정말 산행하기는 정말 좋은 날씨다.
대부산을 지나 서북산에서 6.25 동란때 전사한 미군들에 감사함을 표하고 그늘에서 간단한 점심 요기를 하고
함안의 진산인 여항산으로 향한다. 여항산 오름길은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을 태세이다.
로프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저 넘어 함안면 넘어 내 고향 의령의 능선이 어렴풋이 보인다.
내 고향 선영을 향해 고두삼배(高頭三拜)로 조상님들에게 예를 표하고 부지런히 미산령을 지나 오곡재로 향한다.
오곡재 내림길 주위는 취나물을 비롯한 나물 종류가 등산로 주변에 많이 보인다. 오곡재까지만 갈려면 나물을
채취하련만 난 일행들 보단 약 9km를 더 가야 하기에 모든걸 포기하고 오곡재로 향한다.
선두로 내려온 산꾼들과 하도 목이 말라 막걸리 한통을 게눈 감추듯이 마시고 산꾼들과 작별을 하고 발산재로
향한다. 지금 시간이 오후 4시 20분경 약 9km라 3시간이상 생각하니 좀 미련하다 싶었지만 밀어 부친다.
약 40분간의 된비알 치고 올라 큰정고개에 이루니 오후 5시다. 맘이 급해진다. 왜냐하면 산에는 평지보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에 말이다. 길은 참 좋다. 베낭을 메고 산악 마라톤 모드로 전환한다.
근데 이곳은 오곡재 구간과는 전혀 다르게 이정표 하나가 없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간다.
오직 해 떨어지기 전에 발산재에 도착해야 된다는 그 생각뿐... 온 몸이 소나기 맞은 것처럼 땀으로 범벅이
된다. 얼마나 갔을까. 이젠 지치기 시작한다. 아까 마신 막걸리로 인해 목이 탄다.
베낭에 남은 토마토와 오렌지 쥬스 하나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다행히 고도는 높지 않아
뛰기는 참으로 좋다. 그 와중에도 산딸기 줄기와 옷나무, 고사목이 마음 급한 범여에게 태클을 건다.
얼마나 뛰었을까. 저 아래 차량 소리가 들린다. 발산재가 가까와 온 모양이다.
주위의 적송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 향은 참으로 머리를 맑게 해준다.
발산재에 도착 시계를 보니 8,85km를 2시간 10분만에 도착 범여 정말 미친것 아냐 그것도 단단히...
민가에서 물을 얻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4차선 대로에서 차를 태워 달라고 30분을 손을 들어도 아무도
안 태워주고, 참으로 인심 고약하네. 할 수 없이 거금 3만원을 주고 택시를 불러 진주에 도착
저녁 식사할 시간도 없이 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 집에 도착하니 0시 20분이다.
넘 피곤하여 잠도 오질 않는다. 그래도 한 구간을 마무리했다는 그 뿌듯함에 희열을 느끼면서....
한티재에서 발산재까지 지도와 고도표
아라가야(阿羅加耶)는 삼국지에 전하는 변한 안야국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가야이다.
아나가야, 안라국, 아시라국으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
바다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함안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이다.
아라가야는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었으며,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던 큰 세력이었다.
아라가야의 유적과 유물들은 함안지역을 비롯해서 인근의 마산, 의령, 진주 일대에서도 다수 확인되고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나타난다. 아라가야의 고분문화는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눌 수 있고,
중기의 무덤양식과 유물의 특징에 따라 다시 2단계로 세분이 가능하다. 전기는 서기 3세기경에서
4세기 말에 해당되는데, 길이 4m이내의 소형 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룬 시기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황사리 고분군, 윤외리 고분군, 회산리 신산고분군, 말이산 고분군 북쪽 능선부의 발굴유구 등이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을 둘러보면 둑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습지를 기름진 농토로 바꾸어 놓은 둑만 하여도 모두 24개나 되고 그 길이만도 74킬로미터가 된다.
둑과 둑으로 연결된 함안군의 지형을 살펴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물줄기의 흐름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역수하는 형국이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 방향으로 물줄기가
흐른다하여 옛날 조정의 눈총을 산적도 있었다고 한다.
산의 높낮이도 744미터의 남쪽의 여항산을 주봉으로 하여 봉화산(649m) 서북산(739m) 광로산(379m)
천주산(640m)으로 형세를 이루면서 동쪽으로 오봉산(623m) 작대산(648m) 무릉산(556m)이
자리 잡고 중앙에 솟은 402미터의 자양산이 있으나 낮은 구릉의 지대를 이루면서 북쪽으로 갈수록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 변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검안천과 광로천의 작은 하천들이 물이
북류하면서 주변을 침식시켜 분지를 만들어 버렸다.
함안군은 경상남도의 중남부에 자리 잡으면서 동쪽으로 창원시와 마산시가 자리 잡고 서쪽으로
의령군과 진양군, 그리고 남쪽으로 마산시와 고성군, 북쪽으로 남강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녕군과 의령군이 인접하고 있다.
함안군은 옛날 삼한시대 변한의 땅이었으며 6가야중 아라가야의 영역이었지만
신라에 속하게 되어 경덕왕때 함안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함안은 옛 삼한시대의 아라가야의 역사와 향기를 지닌 땅으로 각종 고분과 문화유산이 많은 땅이다.
지석묘군이 함안면 봉성리와 칠원면 예곡리, 군북면 동촌리에 있으며 지석묘가 일부 남아 있는 곳이
함안군 괴산리. 칠서면 회산리에 있고, 사적이나 유물이 지역의 면적에 비해 월등히 많다. 경상남도의
중남부 지방의 이러한 아라가야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개발한다면 잊혀진 옛 아라가야의
세계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며 지역관광 사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적으로는 함안산성을 비롯하여 함안도항리 고분군, 함안말산 고분군이 있는데,
함안도항리 고분군은 가야읍 도항리에 있는 고분군으로 아라가야의 옛터로 말산리, 도항리, 가야리등의
가야읍 북쪽 낮은 구릉지대에 70여기의 고분이 흩어져 있어 봉토 높이가 약 4미터, 봉분 바닥의 지름이
약 15미터로 대형 무덤에 속한다. 함안 말산리 고분군 역시 가야읍 말산리 일대 가야시대
고분군들로 면적이 2023㎡ 이며 가늘고 긴 구릉 위에 둥근 봉토분 50여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석실 속에서 수레바퀴토기, 말띠드리개, 새모양토기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3주만에 다시 찾은 한티재, 대부산 오름길)
40분의 급경사 오름길을 치고 난 후에야 만난 대부산과 봉화산 갈림길 (12:00)
마산시와 함안군의 경계에 있는 봉곡리 고개라고도 하는 한티재(진고개 휴게소)
마산시 진동면과 함안군 가야읍에서도 각각 약 30리 길
79번 도로의 중앙에 위치한 고개로 이 길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쉬어갔던 곳.
이 고개에 올라서면 진동 앞바다가 한 눈에 확 트이게
보인다는 뜻에서 한티재라 불린다
며칠전에 온 비로 인하여 한층 푸르러진 부처손
대부산 정상에서(12:20)
한티재에서 출발하여 40분 가량의 급경사의 된오름으로 옷이 젖어온다. 오늘 함안지역의 온도가 25도란다.
다행히 숲길의 편안한 산행이다. 아직까지 몸에 예열이 안된 상태라 계속해선 가뿐 숨을 몰아쉬고 대부산 삼거리에서
오늘 갈길이 멀기에 봉화산은 그냥 패스하고 대부산으로 곧장왔다. 오늘은 정말 산행하기가 좋은 날씨이다.
시계도 많이 확보된다. 저 건너 내가 지나온 대산, 광려산. 삿갓봉 등이 손에 잡힐듯이 가까이 와 있다
임도에서 만난 엉경퀴꽃 - 한약재료로서 특히 관절염에 좋다고 한다.
내가 지나온 봉화산과 대부산의 정상 모습 - 봉화산은 마루금에서 0.9km에서 벗어난 지점이라 그냥 패~~스하고
대부산을 향했다. 봉화산 봉화대는 마산에서 봉화를 받아 의령으로 보내는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임도에서 만난 입산통제 - 공무원 위주의 행정 편의주의 이젠 제발 그만 합시다.
제발 국민들을 위해 군림할 생각말고 봉사하는 맘을 좀 가집시다
오른쪽은 버드내, 왼쪽은 대밭골, 직진하면 가파른 서북산 오름길(12:40)
서북산 하산길에서 바라본 평암 저수지의 농촌 들녁과 저 넘어 3주전에 맛있게 회를 먹었던 감함항
(서북산 / 738.5m) 정상에서(13:20)
서북산은 여항산에서 뻗어내린 남쪽능선이
진북면과 진전면의 경계선을 따라 흘러내리다 솟은 봉우리
진동면의 서북쪽에 위치한 산이라 이름이 붙여진 산이라고 한다.모든 걸 함안군에서
관리하는데도 명칭은 마산쪽을 기준을 하는가보다
민족상잔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흔 6.25 한국전쟁중 낙동강 방어전투가 치열했던 50년 8월
미 제25사단 제5연대 전투단이 인민군을 격퇴하여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격전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전사한 티몬스 대위를 비롯한 100여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 주한 미8군 사령관 리챠드 티몬스 중장과
39사단 장병,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전몰자 위령비. 이곳에서 이름모를 이국땅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젊은 영령들에게 禮를 표한다. 요즘 우리는 그 소중한 자유를 망각하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제 일본에 유학 가 있는 딸한테 메일이 왔는데 일본에선한국에서 전쟁이 난다고 난리라고 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이렇게 평안하기만 하니...
참으로 정다운 일심동체의 소나무 -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아래에서 본 여항산의 모습
여항산 오름길은 쉽게 허락을 하지 않는다.
로프를 타고 어렵게 올라서고 나서야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여항산 (艅航山 770m) 정상에서(13:50)
함안은 물이 거꾸로 흐르기 때문에 풍수지리상으로‘불경스러운’ 땅이라고 불렀고, ‘역수의 고장’이라고 하여 무척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여항(艅航)’이란 지명은 ‘산이 오히려 낮아 배를 수 저어 갈 수 있다’라는 뜻을 담아 배가 닿는 포구를 뜻하게 해, 지형이 높으면서도 이름을 통해 지형을 낮추는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여항산은 ‘갓데미산’이라고도 불린다. 6.25 동란때 격전지였던 이곳은 당시 미군들이 많이 희생돼 미군들이 이 산을 보고 ‘갓뎀’이라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 낙동강 전투는 최후의 방어선 이었는데 여항산과 서북산이 함락되었더라면 마산지역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 밖에도 써릿발 같이 생겼다는 |
써리봉, 바위색이 붉다 하여 피바위 등 군데군데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6ㆍ25때 치열했던 격전지로 동족상잔의 비극적 선혈이 스민 곳 이기도하다.
출처 : 함안군청 문화관광과 및 선행자료.
피바위에서 바라본 가야읍 전경과 저 너머 아련히 내 고향 宜寧 땅도 보인다.
내 고향 떠나 서울 생활 어언 35년이다. 이젠 고향은 그냥 아련한 추억일 뿐...
별 기억이 없다. 고향도 부모님 생전에 고향이지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썩 애정이 가질 않는가보다. 그래도 이곳에 왔으니 나 태어난 고향을 향해
조상님 선영을 향해 高頭 三拜의 예를 올리고 심호흡을 한다음에 부지런히 미산령으로
향한다. 그래도 고향에 대한 야련한 미련이 남는가 보다. 칠순이 넘어 村老가 다 되신
큰 형님에게 하산하여 전화라도 함해야겠다.
여항산에서 미산령 가는 길에서 만난 옛 아라가야의 성곽 지금은 기원탑으로 가득하다.
미산령 가는 길에서 바라본 여항산의 정맥 마루금 - 한가운데 바위가 여항산 정상이다.
오곡재 하산길에서 만난 시그널 - 그래도 그렇지 기분이 영... 다른걸로 교체하시죠
오곡재(16:10)
함안군 군북면 오곡리에서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를 잇는 도로로서 옛날에는 보부상들에겐 중요한
도로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어쩜 우리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같이 동행한 당일 산행팀들은 오곡재에서 하산을 한다. 시계를 보니 16시 10분 그 팀들이 식사하는데서 막걸리 한병을
얻어 마시고 발산재까지 8.85km라 잘 하면 해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것 같것 느낌에 무모하게 길을 나선다.
막걸리 기운 탓인지 숨은 가팔라도 힘은 들지 않는다. 30분간의 된오름길을
오른 큰정고개서 바라본 여항산 마루금은 정말 예술이다.
군북면 오곡리쪽은 일제시대에 금을 캐는 광산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광산을 캐던 흔적이 남아 있는 동굴이 더러 보인다고 한다.
오곡재의 이정표
큰정고개에서(16:40)
지금 시간이 오후 5시 아직까지 발산재까지 7.39km라 마음이 급해진다.
산에는 해가 일찍 떨어지기에 물한모금 마시고 베낭을 추스린다. 이젠 해 떨어지기 전에 발산재에
도착하려면 마라톤 수준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훼방꾼이 많이 나타난다. 산딸기 나무와 옷나무.
그리고 죽어 쓰러져 길가로 누워있는 고사목들이 마음 급한 범여에게 태클을 건다
낙남정맥 마루금을 점령하고 있는 묘지들
진짜로 마지막 봉우리(310m).
처녀 젖가슴 만한 봉우리들이지만
이젠 마지막이겠지 하고 오르면 또 하나 나타난다.
끝까지 장애물 경주하느라 힘을 소진한 탓에
310봉을 터벅터벅 정말 힘들게 올랐는데
바로 내려서는 것이 아니고 또 서쪽으로 휙 틀어 능선을 탄다.
저 아래 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날머리 발산재가
다 된 것 같기는 한데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오곡재에서 발산재까지의 길은 그저 고향길 걷는 것처럼 편안하기만 하다.
적송(赤松)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 향은 범여의 머리를 참 맑게 해준다.
저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발산재를 다 왔다는 뜻이다.
오곡재에서 발산재까지 8.85km를 2시간 20분에 걸쳐 도착했다.
이건 산행이 아니라 산악 마라톤이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점과 야행성인 멧돼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요즘 이넘들이 발정기라서 더욱 더 겁이난다. 발산재에 도착한 내 몰골이 우습기만 하다.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팔은 산딸기 줄기로 인해 상처 투성이다.
발산재에 옛 휴게소에 개인의 살림집으로 변해있다. 노크를 하여 쉰내가 진동을 하는
몸뚱아리를 씻고 옷을 갈아 입고나니 한결 쿨하다.
이제 갓 나기 시작하는 산딸기의 수줍은 모습
발산재에 내렸는데 구도로가 끊긴 탓에 휴게소도 문을 닫은 모양이다.
발산재를 지나는 4차선 2호 국도는 고속도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차들이 쌩쌩 달린다.
한 30여분을 진주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손을 들어 봤지만 어느 한 사람
태워주는 사람이 없다. 낙동정맥 구간에 울진, 봉화 사람들은 참으로 잘 태워 주더만...
이곳은 도시 지역이라 그런지 참으로 매정하다. 할 수 없이 114로 물어 진주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3만원이라는 거금을 택시비로 주고서야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옛 영화(榮華)를 잊어버린 발산재의 옛길
발산재(18:30)
마산시 봉암리와 진주시 발산리를 잇는 2번 국도로 스님들의 공양구(밥그릇)인 발우(拔羽)처럼
생겼다고 해서 바리고개라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발산재라고 했다는 유래이다.
옛날 舊 도로는 인적이 전혀없는 폐허가 되었고 4차선의 현 도로는 차들이 고속도로보다
더 세게 달린다. 마치 레이스라도 펼치듯이... 이곳도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낙남정맥 마루금을 무참하게 파헤쳐져
본래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지 동물 이동통로는 만들어 놨네.
자연이 살지 못하는 땅엔 인간도 살지 못하는 걸 왜 깨닫지 못하는가. 꽃 한송이 풀한포기도 인간의
소유가 아닐진대 저런 무지한 인간들의 머리는 언제쯤 자각(自覺)을 할까...ㅉㅉㅉ
청순한 울님만큼이나 고운 찔레꽃
서울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타기위해 도착한 진주고속버스 터미널
범여를 실고 서울로 갈 저녁 8시의 중앙고속버스
버스를 타기가 참으로 미안하다. 28인승 리무진 버스에 달랑 5명을 실고 서울로 출발한다.
공공성 때문에 운행을 하겠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비효율적이다
결국 세금으로 메꾼다는 얘기인데. 개선해야 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 도착하니 11시 30분 부지런히 지하철에서 마지막 차를 타고 도곡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도탁하니 0시 15분 마지막에 기력을 너무 빼 버린 나머지
사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피곤이 엄습해 오는데 잠은 오질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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