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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낙남정맥(終)

낙남정맥 제11구간(하동) - 배토재에서 고운동재까지

by 범여(梵如) 2010. 8. 8.

 산행일시: 2010년 8월 7일~8일(무박산행)

산행구간: 백토재-옥산 삼거리-옥산-옥산 삼거리-천왕봉(활공장)-526.7봉-돌고지재

              652봉-양이터재-칠중대고지(565.2봉)-555봉-길마재-766봉-790.4봉-798봉

              875봉-902봉-고운동재

거리/시간: 약25km/8시간 50분 소요

 

  토욜은 서울에는 하루종일 비가 많이내려 기온이 많이 내려갔으나 남부지방에는

폭염 주의보가 발효중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젠 2번 남은 마지막의 낙남정맥을

위해 베낭을 매고 나선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하는데 버스기사 양반이 뭐가

그리 급한지 과속을 하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대진고속도로 산청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2시반쯤. 여기서 마지막 워밍업을

하고 산청I.C를 빠져 나와 배토재에 도착하여 새벽 3시 반에 산행을 나선다.

 

어제가 처서이고 오늘이 말복이라 이제 더워봐야 얼마나 덥겠냐고 자위 하면서

시작한 산행이 20분도 안되서 옷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그믐달과 별들이

새파랗게 떠있다.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없는 풍경이다.

 

백토재(하동군 북천면)의 해발 180m에서 옥산 갈림길(해발 600m)까지의 고도를

높임에 새벽부터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아침이슬에 바지는 젖어오고 여기도

산이 낮아 그런지 개옻나무가 많다. 그런대로 등로는 정리되어 편안 걸음을 한다.

1시간만에 삼거리에서 숨을 돌리고 마루금에서 1km 떨어진 옥산을 향한다.

그런데 35명중 옥산을 가는 사람은 4명밖에 없다. 근데 이 명산을 언제 개인적으로

올 수 있으랴. 왕복 2km를 부지런히 갔다오니 졸지에 대오에서 낙오된 느낌이다.

(?)알 요령 소리 나도록 뛰는데 돌고지재 가는 길은 아예 길이 없다.

네비게이션을 보니 마루금은 제대로 가는데 망개나무, 진달래, 억새등이 길을 막는다.

거기다가 고사리, 더덕을 재배하는 농장이 철조망으로 막고 있으니...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돌고지재 가는 내림길에 겨우 후미조들과 합류한다

.

산길은 2km차이가 엄청나게 차이가 많이난다. 돌고지재 오름길 너럭 바위에서

시장기를 느껴 아침을 먹는다. 초반에 너무 힘을 뺀 탓인지 밥맛이 싹 가신다. 

망개떡(내 고향 의령 특산품) 몇개와 오랜지 쥬스 1잔과 막걸리로 식사를 대신하고

양이터재를 향한다. 양이터재를 지나니 이제 등로가 다듬어져 있는 편이다.

햇빛은 따갑지만 소나무 숲으로 걷기에 그리 따가운 느낌은 없다. 그 대신에

땀냄새 때문인지 모기와 새끼 개미처럼 생긴 벌레가 엄청나게 몸을 물어댄다.

가려워서 미칠지경이다. 이 구간은 60년전 6.25 전란 이후 지리산 빨지산 공비

토벌 작전으로 유명한 칠중대고지와 방화고지 등이 있다. 이념전쟁에 아무

영문도 모르고 무수히 희생된 민초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그 한을 누가 달랠 것인가.

산불감시초소에 오르니 저 아래 하동호가 뚜렷이 보이고 이제 본격적인 지리산군이

눈앞에 들어온다. 길마재까지 긴내림에 다시 고도를 300이상 높이는 급경사가

나타난다. 이 길마재는 지리산에 숨어있는 남부군의 빨지산들의 주요 통로였다고 

한다. 40분 이상을 치고 오르니 약간의 탈수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790봉에서 식수를 확인하고 미수가루와 과일로 원기를 보충하고 무거운 다리로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부터 산죽 군락지를 계속 통과해야 한다

다행히 정리가 되어 있는 탓에 큰 어려움은 없다. 마지막 902봉을 오른후에

산청 양수 발전소 상부 댐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운동재가 다 왔다는 뜻이다.

신라의 대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이 무릉도원을 꿈꿨던 이 아름다운 곳에 발전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양수 발전소가 가당치나 한가. 더군더나 지리산 국립공원에...

무조건 길을 내고 발전소 짓고 아니면 아니면 자기 편한대로 통제하고 이것이

우리나라 관광정책인가? 국민의 녹을 먹는 자들이 국민위에 군림하려고 하니

세금 내는 것이 아깝다. 내 돈으로 저 멍충이들의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나리들 제발 밥값 좀 하시요. 그리고 민초들에게 下心으로 봉사 하시길 바라오.

고운동재에 도착하니 아스팔트 길이 뜨겁기만 하다. 저 아래 버스가 보인다.

 

계곡의 시원한 물에 팬티까지 벗어 버리고 알탕을 하고 나니 정신이 든다.

청학동에서 산채 비빔밥과 션한 맥주+소주를 서너잔 들이키고 나니 이 세상

모든거 부러울것이 없다. 한 구간의 숙제를 끝내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백토재(배토재: 180m)

경남 하동군 옥종면과 북천면을 잇는1005번 지방도인 배토재에 음력 유월 스무

여드렛날 야심한 새벽 03시 10분에 박 요양병원 주차장에 도착한다.

하늘에는 그믐달이 떠있고 별들이 촘촘하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바람한 점이 없다. 오늘의 산행이 힘듬을 예고한다.장비를 점검하고 3시 반에

(주) 범우라는 공장을 끼고 산행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180고지에서 602고지의

천왕봉까지(지리산 천왕봉이 아니고 하동군 옥종면 소재)오름에 20분도 안지나 벌써 옷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온다.

바람 한점 없는데다 개옻나무는왜 이리 많은지 마루금을 가득 매운 풀들이 갈길 바쁜 범여의 마음을 더 바쁘게 한다.(03:30)

 

옥산 삼거리(04:15)

산행시작 45분에  옥산 갈림길에 도착하여 베낭을 내려놓고 마루금에서 1km 떨어진 옥산을 향한다

옥산은 낙남정맥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지만 이 명산을 내어이 언제 또다시 올지 몰라 무조건 간다.

35명이 산행한 오늘 코스에 4명밖에 가질 않아 왕복 2km를 갔다오니 졸지에  꼴찌가 되어버려

너무 많이 처져 (?)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가는데도 일행은 보이지도 않는다 

옥산(614m 04:50)

가파른 산세답게 정상에 오르니 시위도 거침없이 호쾌하다. 아직은 캄캄한 밤인데도

저 멀리 智異山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 좌측의 옥종면과 우측의 북천면

소재지에는 아직도 한밤중인지 불빛만이 졸고 있다.

산경표에는 삼신봉과 황치를 거쳐온 낙남정맥이 이 옥산에서 기둥줄기와 가지줄기

두 갈래로 나뉘진다 라고 씌어 있다. 백토재에서 돌고지재를 이야기 할때 이 옥산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될정도로 약방의 감초격이다. 우리 선조들이 훗날 옥산이

중요한 산이 될것임을 예고하고 옥산 분기점이라고 산경표에 규정한 것일까

산줄기에서 왼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낙동강으로, 오른쪽은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산줄기는 높지 않지만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山分自水嶺을 또다시 한번 확인한다. 

천왕봉(활공장)

난 활공장이라고 해서 무슨 넘의 산 정상에 활공장을 만들었나 했더니만

활공장이 아니고 패러그라이딩 활공장이구먼 ㅋㅋㅋ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는 하동군 횡천면 지역의 운해

돌고지 가는 길에서 만난 진달래 - 이제사 피는 진달래 이넘은 게으름뱅이일까 아님 바람피워 난 늦둥이일까

돌고지재(310m)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와 옥중면 회신리 돌고지를 넘나드는 고개로 돌거리재, 회티(回峙)

돌고개라 부르는 것으로 봐 돌아 올라가는 고개 또는 돌고 도는 고개라는 뜻으로

돌고지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06:00)

돌고재에서 쌍계사 가는 이정표

천왕봉 아래 임도를 지나 산길에는 아예 길이 없다. 마루금에는 고사리와 더덕을 재배하는

농장이 마루금을 막아 주인인양 행세하고 있고 그 옆길은 정글도 아니고 낙남정맥을

산행하는 범여는 진정 신대륙을 개척하는 컬럼부스는 아닐진대 왜 이렇게 다녀야 하는지?

망개나무, 진달래, 억새 개옻나무와 잡풀등이 너무 우거져 베낭을 매고 나갈 수가 없다.

하동군수 나리 이런데 제발 마루금 길 정비좀 해주소. 쓸데없는데 전시행정에 예산

낭비하지 말고...어렵게 사는 민초들에게 예산 몇푼 안드려도 가능한 사업일것 같고

그리고 민초들의 삶도 도움이 될것 같으니 말이요

달맞이꽃 -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아직도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다니..

양이터재(480m 08:20)

양이터는 궁항 서쪽 마을에 있는 마을로 동학란 때 양씨, 이씨의 피난처라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돌고지재 오름길 바위에서 아침으로 마신 해장술이 그나마도 좀 나은 것인가 산행시간 약5시간만에

양이터재에 도착하니 몸은 파김치가 된다. 오늘이 말복이라 그런지 산속의 기온도 만만치가 않다.

거기다가 따가운 햇살이 자꾸만 괴롭힌다. 그래도 비 오는것보다야 백번 났지만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은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는가 보다. 비오는 날은 제발 좀 맑은 날만 기다리더니

베낭의 물을 6L를 가져왔는데 벌써 절반이 없어졌다. 이젠 물을 조절해야겠다. 여긴 산에서는

식수를 전혀 구할 수가 없는 곳이다. 더군더나 여기서부터 급격히 고도를 높여햐 하기에 말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이름모를 버섯들이 참으로 많다.

요렇게 앙증맞은 버섯도 보이고...

저 아래 하동호도 보이고

칠중대 고지(09:00)

칠중대 고지는 지리산 공비 토벌 때 7중대가 주둔한데 유래 되었다고 한다.

60년이 된 아직도 벙커 흔적이 남아있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 지역의 궁항리(弓項里)는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고 해서 활미기 또는 궁항이라고 부른다.

자꾸만 베낭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만큼 지쳐간다는 얘기다 계속 오르내림을 거치며 고도를 높혀간다,

작은 봉우리를 넘어 오름길에서 고인돌 처럼 큰 바위를 지나 오랜만에 급한 된오름을

지쳐 오르니 산죽길에 묻힌 칠중대고지(565.2)를 넘어선다.

6.25 격전지의 느낌을 풍기는 칠중대야 이미 이 능선을 떠났겠지만, 승자도 패자도

즐겁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사상전이 되고만 동족의 비극 속에서 누굴 기념하고 누굴 탓하리요..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희생된 선량한 민초들의 그 한을 누가 풀어주리오

산죽길에 묻혀진 고지 삼각점 처럼 그 의미를 찾기가 힘들구나..

길마재 (09:30)

59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질매재라고도 부르고 열두 모랭이 입구 옛 묵계리로 넘어가는 도로이다.

열두 모랭이란 질매재 먼당(높은 곳의 경상도식 발음)에서 묵계로 가는 모퉁이로 열두 번을 돌아간다는 뜻이다.

추측컨대 길다는 모퉁이의 진 고개와 모랭이가 합쳐져 진모랭이재가 질매재, 질마재를 거쳐 길마재가 된 모양이다.

지리산에 은거해 있던 빨치산들이 자주 이용하던 고개라고도 한다.

 

길마재의 고도가 해발 400고지에서 760고지까지 급경사는 사람을 완전히 잡는다.

급경사가 얼마나 심한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이럴땐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좋으련만 그것마져도 협조를 하지 않는다. 40분을 치고와 능선에 도착하니 도저히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꿀에탄 미수가루와 토마토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근데 땀냄새 때문인지 이 높은 산에 모기가 왜그리 많은지 새카맣게

붙어 있고 개미보다 더 적은 것은 다리를 물어 대는데 어찌나 아프고 상처가 나는지

오늘은 억새풀 사이로 지나오면서 긇힌 자국에다 온 몸 전체가 상처 자국이다.

앞으로 900까지 고도를 높여야 하는데 자꾸만 발걸음은 무거워만 진다 

 760봉을 지나면서는 고운동재까지는 완전히 산죽과의 싸움이다. 사람 키보다도 훨씬

큰 산죽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는 이 산죽으로 저 먼 하동장까지

가져가 판돈으로 생계를 눈물젖은 빵의 상징이었는데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인걸

산죽길 지남에 땡벌집을 만나 땀냄새에 벌들이 달려든다. 다행이 쏘이진 않았지만 오늘은 별것이

다 태클을 건다.

지리산 산죽은 800m ~ 1200m 높이에 분포하여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데 주등로야 길이 넓고

 정비를 하니까 문제가 없지만 등로를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면 키를 넘는 산죽이 숲을

 이루고 있어 길찾기도 어렵거니와 헤쳐 나기기도 보통 힘들지 않다.

산에서는 길을 잃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어주는 반가운 시그널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마음의 여유를 같고 산행을 한다.

산청 양수발전소 상부댐

고운동재 내림길에서 상부댐이 보인다. 산청군 시천면 고운동에서 반천리로

흘러드는 계곡이름이 반천(反川)이다. 반천은 물이 거꾸로 올라 간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반천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냇물이 거꾸로 올려보내 발전을 하리라 예측도 못했을 터인데 선조들의 先見之明에

거져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 양수발전소에서 발전량을 얼마나 얻는지는 몰라도

孤雲이 무릉도원을 꿈꾸던 이 아름다운 곳에 발전소 건설이 가당치나 한가

백두대간 구간 점봉산 아래 있는 양양과 무주 안국사 아래에 있는 양수발전소가

있는 구간이 환경 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을 한번이라도 고려해 봤는가.

더군더나 이곳은 지리산 국립공원 구간이 아닌가.

나으리들 제발 탁상머리 정책은 그만하시고 국민의 녹을 먹고 살면 국민들의

가슴에 와닫는 일들을 좀하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고운동재에 다다른다.

고운동재 내림길에서 만난 약초농장 - 산꾼들이 마치 범죄집단이나 되는 것처럼 전기울타리까지

쳐놓았다. 고운 심성으로 약초를 키워야 약성이 있을 터인데. 쥔장 나리 잘 좀 생각해보슈

고운동재 정상에서(797m)

1200여년전 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 치원 선생이 자신이 은거할 이상향을 찾아 들어갈 때 넘어던 고개가 고운동재란다.

신라의 대학자요 문장가인 최 치원은 당나라에서 명성을 날리다 29세인 나이로 헌강왕(890년)때 귀국한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고국의 회생을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괴리앞에 청운의 뜻을 펴지 못하고 관직을 버리고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청학동에 은거를 결심한다. 

소요자방(逍遙自放)하던 孤雲이 넘던 고개를 이 범여가 걷고 있다.

 

그가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강주(지금의 경북 의성), 합천 청량사(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등이었는데 특히 지리산 쌍계사 부근이 이살향의 청학동이 있는고개

孤雲이 유토피아를 꿈꾸던 고운동재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고 있다. (12:20)

8시간 50분에 거쳐 25km의 긴 여정을 끝내고 고운동재에 도착하니

몸과 마음은 더위와의 전쟁에서 그로기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식수배분을 잘하고 끈기로 완주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젠 2주후에

한번만 더하면 낙남정맥은 졸업을 한다. 은근히 그날이 기다려진다.

오늘따라 TV에 방영되는 연속극에 나오는 빵집 할아버지 말이 자꾸만 되뇌인다

천재가 노력하는 놈 못이기고 노력하는 놈이 즐기는 놈 못이긴다고...

산도 즐기면서 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선두에서 아무것도 못누리고

죽기 살기 가봐야 버스는 후미가 다와야 간다는 사실을...

청학동(13:00)

고운동재 아래에 흐르는 계곡에서 느긋하게 알탕을 즐기고 식사 장소인 청학동을 향한다.

청학동 들어서면서 범여는 비위가 거슬린다. 옛날의 신비스런 청학동은 온데간데 없고...

온 천지가 유원지로 변하고 음식점과 민박촌이고 서당도 옛 서당이 아니다.

오래전 이곳 서당의 젊은 훈장이 매스컴과 광고를 탄 이후에는 서당들이

너무나 많이 난립하여 혼돈스러울 지경이다. 역겨울만큼 상업주의에 만연되어

있는 느낌이다. 가장 청학동적인 것이 가장 청학동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속한 청학동은 해발 800m의 지리산 삼신봉 남쪽 자락에

신라시대 최치원이 은거했던 그림같은 마을이다.

청학이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을 가진 곳으로 수많은 묵객들이 유토피아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른 곳이라는 느낌이 들게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지니고 있다.

 靑鶴이란 새는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을 부리는 새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도인촌은 유불선삼도합일 경정유도회(孺佛仙三道合一更儒道會)

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불교,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도를 크게 밝혀 유도(儒道)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道라는 뜻이다.

대부분은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에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하여 하동장에 내다팔아

생필품을 구해쓰며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여 흰 한복차림에 처녀,총각은 머리를 땋아

댕기를 드리고 성인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성인 여자들은 쪽을 찐다.

한결같이 흰 옷 도포를 입고 언젠가는 이상향의 세계가 이곳에 올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청학동 하늘의 뭉게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