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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낙남정맥(終)

낙남정맥 마지막구간(산청) - 고운동재에서 영신봉까지

by 범여(梵如) 2010. 8. 22.

 

 산행일시: 2010년 8월 21일~22일(무박산행)

산행구간: 고운동재-묵계재-외삼신봉-삼신봉-석문-음양수-세석산장-영신봉

              세석평전-한신계곡-백무동

 거리:시간: 약22km / 9시간 40분 소요

 

지리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고  빨치산의  참상을 겪은 슬픈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산. 그러나 찌든 세속에서 중생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함을 주는 산

 

오늘은 낙남정맥의 마지막 구간인 지리산 구간 고운동재에서 시발점이자 종점인 

영신봉을 향한다. 지난 5개월동안 매달 2번의 무박산행을 하면서 김해의 매리에서

시작한 낙남정맥 도상거리 580리(232km)를 마무리를 한다.

내 고향길을 걸으면서 처음 시작한 가슴 설렜던 그 길이 무참히 망가진 정맥길을 대하면서

실망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슬픈 역사도 경험했고 내 부모.형제들이 살았던 이 땅에 많은

애정을 가져보려 했지만 잘되지도 않았다.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서울사람도 경남 사람도 아닌...

낮으막한 정맥길을 걸으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면서 사는 법을 보았고 자연의 위대함도

보았다. 이젠 그 길을 마무리 하련다.

 

산청I.C를 빠져 나온 버스는 남명 조식선생의 혼이 서린 산천재가 있는 덕산을 지난다.

이곳도 지리산의 영향으로 상업화가 상당히 많이 진척되어 10년전에 다녔던 그 길은 아니다  

주위에는 비알나무(백일홍의 경상도식 발음)가 빨갛게 흐드르지게 피어있다.

버스는 긴 삼신봉 터널을 지나 산청 양수 발전소 상부댐을 지나고 고운동재 가는 오름길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힘들게 오른다. 03시 20분에 고운동재에 도착하니 찬 기운의 이슬이 참 많이

내려있고 청명한 하늘에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지천으로 하늘에 떠있다.

고운동재에서 외삼신봉까지는 입산통제구역이라 새벽 산행을 해야만 한다.

 

오늘도 마음에 산행 전과기록을 하나 올린다. 시작하자마자 시작되는 산죽터널은 삼신봉

지나는 구간까지 계속된다. 묵계재까지 오름길에 힘이들긴 했지만 산죽에 걸려 얼굴과

산죽으로 굵킨 자국으로 쓰라리고 아픈데 거기다가 땀으로 범벅이 되니 더 힘이든다.

산행 2시간만에 도착한 외삼신봉. 서서히 아침 일출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낙남정맥 완주를 축하해 주렴인가. 최근에 보기드문 좋은 날씨이다. 운무속에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뚜렸하게 보이는 지리산군의 장엄한 모습이 기가 질린정도의 멋진 모습이다.

10분정도 서있는데 땀으로 젖은 옷이 寒氣로 있해 상당한 추위를 느끼게 한다.

체온유지를 빠른 걸음으로 삼신봉을 향한다. 삼신봉 도착 지금부터 자유다.

 

통제구역을 벗어낫다. 삼신봉 정상에 오르니 氣가 상당히 많이 느껴진다. 천왕봉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이 약간 밀릴정도의 기운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삼신봉을 찾는가보다.

삼신봉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우리가 가야할 영신봉도 뚜렷이 보이고.

촛대봉, 일출봉, 제석봉, 천왕봉에다 서쪽으로 반야봉까지 거기다가 남쪽에 사천의 와룡산과

광양 백운산까지 오늘은 참으로 복받은 날인가보다...

 

석문을 지나 해방이후 남부군과 국군 토벌대의 피비린내 나는 슬픈 역사의 현장인 의신.

대성동계곡, 음양수를 거쳐 세석산장에 도착하니 아침 10시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긴 했지만

출출하여  행동식으로 허기를 면한뒤 영신봉에 도착하여 지리산 산신에게 낙남정맥

완주를 외호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예를 올리고 한신계곡을 지나 백무동으로 향한다.

백무동에 도착하니 숨이 막힐정도로 날씨가 덥다. 하늘의 뭉게구름만 한가롭고...

이로써 9정맥중 한구간을 마무리하고... 9정맥을 완주하고나면 뭘하지... 벌써부터 고민이 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산천재 편액

산청 I.C를 빠져나온 버스는 덕산을 지나간다. 이곳이 산천재가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이 경남 산청군 시천면 덕산이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리면서 평생을

 정치적 라이벌이자 학문적 동지로 살아간 남명(南冥) 선생을 모신 산천재가 있는 곳이다.

덕산에서 만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작 남명이 태어난 곳은 경상도 삼가현

(현재 경남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남명(南冥)은 호다. 4~7세 사이에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옮겨 20대 중반까지 한양에서 살았다.

 혼인 후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15년여를 살았다.

 

엄격한 자기 절제와 현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등을 통해 현실에서도

 경(敬)과 의(義)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제자들에게도 계승되어 임진왜란 당시

 제자들의 적극적인 의병활동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때 이곳 진주, 의령, 산청, 고성, 사천등 의병활동이 활발하여 구국에 앞장이

많이 배출된 이유도 남명 선생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내 고향 의령(宜寧) 紅衣將軍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해 수많은 의병장과 학자들이

배출 되었고 탐관오리들과 양반들의 횡포에 항거하여 불의에 맞서 항거한 민초들도

남명 선생의 영향을 받은 탓이 아닐까...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서부 경남의 反骨기질은 남명(南冥) 선생이

 泰斗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산천재의 모습

고운동재(03:30)

새벽 3시30분에 지난구간 날머리였던 청학동 위 고개. 孤雲선생이 이상향을

 꿈꿨던 고운동재(하동군 청암면과 산청군 시천면 경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철조망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의 하는 짓거리들이라곤... ㅉㅉㅉ

차에서 내리자 음력 7월 열사흘날의 하늘에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처럼 많이있다.

그리고 차가운 날씨에 이슬이 많이내려 금방 바지가 다 젖어버릴 정도이다.

 

시작하자마자 좌측 산죽길로 접어든다. 3m이상 되는 산죽길은 길이라보다는 터널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얼굴이 긁키고 찔리고 장난이 아니다. 고운동재에서 외삼신봉

까지는 더군더나 통제구간이라 전혀 관리가 안돼있고 길도 없는 편이다

정말 힘든 산행의 연속이 새벽부터 시작된다. 초반부터 가파르게 고도를 높인다

산죽으로 인해 얼굴에 난 상처가 땀에 쩔어 쓰리고 아프기 시작한다.

암릉 오름길

속좁은 관리공단 직원들이 없애버린 로프를 어느 산꾼들이 새로 설치에 겨우겨우

미그러운 바위를 조심조심해서 올라간다. 거기다가 시그널까지 모두 다 잘라버려 길찾기가

보통 힘이드는게 아니다. 단속을 하려면 24시간 강력하게 단속을 하여 산꾼들에게 아예 이 길은

갈수 없다는 곳이라 것을 각인시켜 포기를 시키던가 아님 개방을 시켜 철저하게 관리를 하던가

하는것이 맞는거 아닌가. 자기들은 근무시간 지나면 가버리고 아침에 출근하여 단속을 하면

새벽에 다니는 산꾼들을 어케 단속을 하나 이 바부들아. 제발 개방하여 편안히 정맥길을

마무리하게 정비를 좀 해주시길.

묵계재(1090m / 04:25)

1090m의 높은 봉우리 헬기장인 묵계재에 도착한다. 어두워서 헬기장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기 좋은 곳이다. 고운동재에서 이곳까지의 산죽터널에 시달려 숨이 차긴 했지만

높다는 인식을 못하고 올라왔다.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서 산청군 시천군 내대리를 넘는 묵계재는 왜 默溪라고 불렀을까.

산이 높으면 계곡 물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게 상식인데 침묵하는 계곡이라...

머리나쁜 범여로서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ㅋㅋㅋ 별 잡생각을 다하면서 길을 걷는다.

외삼신봉 정상에서

가느다란 로프를 타고 암릉에 오르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아마 산이 자연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곳인가 보다 벌써 해뜨는 시간이 상당히 늦다.

3대가 발복(發福)을 해야 볼 수있다는 지리산의 일출. 물론 천왕봉은 아니지만

이곳 외삼신봉에서 볼 수있다는 건 여간 행운이 아니다. 가느다란 운무 사이로 펼쳐지는

 智異山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이면서 변변한 사랑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내 어머니의 품처럼 ...

산행시작 2시간만에 도착한 외삼신봉. 땀으로 옷이 다 젖은 탓인지 일출을 구경하기 위해

10분간 서 있으니 한기(寒氣)가 들 정도로 춥다. 서둘러 삼신봉을 향한다.

빨리 단속구간도 벗어나야 하는데 산죽으로 우거진 숲이 자꾸만 태클을 건다  

외삼신봉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고(05:40)

삼신봉 올라가는 길의 이정표

삼신봉 정상에서 바라본 

삼신봉 정상에서

지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온다지리산을 수 없이 왔어도 이렇게 시야가 좋은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삼신봉에서 내삼신봉-관음봉-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그림같다.
오늘 가야할 영신봉은 물론 촛대봉, 일출봉, 제석봉, 천왕봉까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이고 발아래 내대리와, 청학동의 삼신궁이 
눈 앞에 있는듯 하고

6.25의 참상을 잊지 않은 듯 대성동골도 조망이 된다   
 남쪽 운해속에 아련히 광양의 백운산과 사천의 와룡산 그리고 남해까지 조망된다.

삼신봉(1284m 06:30)

삼신봉은 성산(聖山)인 지리산 봉우리 중 성봉(聖峰)으로 자리매김한다.

삼신봉 정상에서 보면 천왕봉과 노고단의 100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쌍계사사와 세석을 잇는 등산로의 중간 기착지이다.

삼신봉은 지리산 남쪽에서는 한 개의 봉우리이지만 실제

삼신봉은 외삼신봉과 내삼신봉과 더불어 세 개의 봉우리다.

삼신의 사전적 의미는 환인, 환웅, 환검의 세 삼신인 三聖 아기를 점지한다는 세 신령.

三神靈. 즉 삼신 할머니를 지칭하고 있어 신화적인 의미와 생명을 점지 하는 주술적 의미가 강한 편이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인 봉래산(蓬來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일컫는다.

삼신봉은 신화적인 의미와 영적(靈的)인 의미가 진하게 풍긴다.

더군더나 저 아래 청학동의 청학(靑鶴) 역시 神仙이 부리는 전설속의 새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삼신봉과 청학동은 인류가 꿈꿔온 이상향을 지칭하며 지리산 남쪽

어느 자락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라의 대학자 孤雲선생이 이상향을 꿈꾸었던 저 아래 청학동의 모습

계곡속에 보이는 건물이 삼성궁이다

石門을 지나면서(07:20)

대성동, 의신길 이정표
조선시대 유몽인, 이륙, 김일손 같은 선비들이 천왕봉을 구경하고 세석고원의
영신사로 이동했다가 쌍계사로 하산할 때 대부분 대성동 길을 이용했다는
문헌을 남겼는데 이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터 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선비들의 힘든 여정이 녹아있는 대성동을 오르는 이 코스는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이태 남부군)..

 60여년 전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저 대성골안에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피아의 구분없이 빨치산과 수색대간의 치열한 교전 속에서 그들이 바랬던 당위와 정의와 자유는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민초들의 영혼은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들이 이 산중에서 얻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평등은 또 무엇이냐'고..

저 바위는 누구를 기다리시나

과거 빨치산이 살았던 흔적들이 아직도 곳곳에서 보이고

영신봉 정상에서 바라본 대성동 계곡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버린 저 民草들의 흐느낌이 60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범여의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제 모든걸 잊버리고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마시고 부디 西方淨土로 가시길...

부디 왕생극락 하옵시고.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음양수(陰陽水 09:30)

지리산 능선 해발 1420m 고지에 있는 이 샘은 신령한 영신봉에서

내려온 약수이다. 좁은 돌틈 사이에서 비집고 이 물은 지리산 샘중에서

빼어난 맛을 자랑한다. 음양은 易學에서 우주만물을 만들어내는 상반된

성질의 두 기운을 합친 물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흔히들 지리산을 물이 많다고 해서 여자의 산이라고 한다. 해발 1800m 고지부터

풍부한 수량의 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니 말이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에는 식수를

많이 가져와도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샘터가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말이다.

 

참으로 물맛이 너무도 좋다. 양쪽에서 흘러나와 합쳐진 물을 받아 수통에 채우고

땀으로 범벅이 된 웃옷을 빨아서 입으니 한결 시원하다. 거기에다 등목을 하니

세석평전으로의  가는 길은 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벌써 여긴 가을 준비를 한다.

하긴 내일이 더위가 가시기 시작한다는 처서(處暑)이니 말이다

음양수 제단

음양수는 음양수제단이 설치된 바위 바로아래 있는 석천(石泉)으로,
햇볕이 드는 쪽이 양수(陽水),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고 하며,
두 줄기의 물은 음양화합이 되듯 한 곳으로 합쳐져 흐른다.
자식없는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단다.

 

그리고 이곳에도 분단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부군에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여성대원 15명이 지리산

토벌군에 쫒기다가 이곳에서 포위가 되자 전원 자결했다는 슬픈 기록이 있다. 

세석평전(細石平田)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은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하고 북으로 덕유산 국립공원에 이어지며 천왕봉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智異山 명칭은 두음법칙의 예외로 특이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이다 

세석평전(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이다. 높은 산 고원 어디서 이런 습지가 있단 말인가!
세석평전은 본시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신봉 정상에서 마지막 제(祭)를 올리고...

김해 대동면의 매리 고암나루터에서 시작하여 김해, 창원, 마산, 함안, 고성, 사천, 진주, 하동,

산청을 거쳐온 낙남정맥길의 무사산행의 감사히 여기며 지리산 산신님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고 앞으로의 산행도 무탈하게 할 수 있도록 부디 보살펴 주시기 바라면서 禮를 올린다

낙남정맥의 종점 영신봉 정상에서(10:20)

도반들이 축하까지 해주고

김해 고암나루터를 출발하여 5개월동안 도상거리 580(232km)리길의 낙남길을 무거운 베낭을

이 영신봉에서 내리니 정말 홀가분하다. 범여의 조그만 발이(255m/m)이 너무도 수고 많이 했구나

발아 미안하다. 쥔장 잘못만나 고생이 많구나.그러나 어쩌나 너와 나의 인연인 걸을...

지리산은 정말 올때마다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이 설랜다.

그리고 항상 기대치에도 어긋나지도 않고 말이다. 보일듯 말듯 애간장을

다 녹이는 반야봉이 눈앞에서 보일듯 말듯... 

세석평전과 촛대봉의 전설이 적힌 안내판

세석평전에서 바라본 촛대봉

영신봉(靈神峰)에서 낙남정맥을 무사하게 마친것을 지리산 산신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고

세석산장 뒷길로 한신계곡 가는 길로 나선다. 주위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벌써 가을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제공을 한 그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참으로 기막힌 슬픈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마지막 길을 재촉한다.

국립관리공단은 모든일을 부정적 투성이다. 하지마라, 들어가지 마라. 과태료 매긴다.

도대체 당신들이 할 수있는 건 뭐요. 국민들의 녹을 먹으면서... 제발 군림하지 말고

下心으로 봉사할 수 있는것 함 찾아보슈. 요즘 모 건설회사의 광고를 좀 보시요.

모든걸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마시고 긍정을 믿습니다 라는 생각을...

저 아래는 폭염주의보니 열대야니 난리이건만 이곳 세석평전에는 벌써 가을을 준비한다.

누굴 기다리는지 다소곳이 피어있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들이 참으로 보기좋다.

역시 꽃은 야생화가 좋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들꽃이 아름다운 이유.

세석산장 대피소(10:00)

세석에서 백무동 가는 이정표(11:00)

세석평전에서 백무동 내림길

영신봉에서 멋진 마무리를 하고 세석대피소를 뒤로 하고 백무동 내림길로 접어든다.

6.5km의 내림길은 말 그대로 고행길이다. 아예 스틱을 접고 네발로 기어 내려간다.

온 천지가 바위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다가 몇일전에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바위들이

많이 젖어있고 나무 뿌리들이 상당히 미끄럽고 위험하다.

인생길이고 권력이고 내려올 때 조심하라고 했거늘 아뭏든 조심 조심해서 내려온다.

거기다가 정맥 산꾼들에겐 체질이 안 맞는건 하루종일 걸어도 사람하나 구경 못하는

산을 타다가 이곳 구간 내림길에는 사람들에 부딪히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곰이 자주 출현하는 지역인 모양이다

한신(寒新)계곡
깊고 넓은 계곡 또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계곡의 물이 차고 험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산하다고 해서 부르던 이름이 한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에 한신이라는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여러 개의 폭포를 이루면서 10㎞에 걸쳐 흐른다.

 백무동 위에서 세석까지 흐르는 본류 외에도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과 칠선봉

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흐르는 한신지계곡 등 4갈래의 물줄기가 엄천으로 

흘러 남강 상류를 이룬다. 본류는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을 흘러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한다.

지리산 계곡 가운데 폭포를 가장 많이 끼고 있으며, 지리산 등반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계곡과 절벽 사이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2㎞ 정도 오르면 20여 개의 물줄기가 흐르는

첫나들이폭포(바람폭포)가 나오고, 다시 1㎞를 더 가면 폭포수와 넓은 반석, 울창한 수풀이

 어우러져 계곡의 절정을 이루는 가네소폭포가 나온다. 15m 높이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며,

사철 변함없는 수량을 자랑하는 검푸른 소(沼)를 만들어 기우제 장소로도 유명하다.

가네소폭포 아래부터 본류까지 오층폭포와 한신폭포를 따라 세석으로 흐르고, .

내림폭포를 따라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한신지계곡이 흐른다

올라가면 폭포가 5층으로 이어지는 오층폭포 또는 오련폭포가 나오고, 다시

계곡을 건너 등반로를 따라가다 보면  계곡의 상징인 한신폭포가 나오는데,

여기서 1㎞를 더 가면 세석고원이다.

가네소 폭포의 유래

이제 백무동이 거의 다 내려온 모양이다. 백무동 900m라는 표시가 보인다.

거기다가 식당까진 다시 1km나 더 가야하고 점점 다리가 무거워 진다.

세석에서 들어설 때 6.5km라는 표시에 2시간이면 충분하겠지 생각했는데 턱도 없는

소리다. 미끄러운 바위에다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의 교행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점점 무릎은 아파오기 시작한다. 산꾼들에겐 이런 길이 가장 싫다.

아직도 가야할 우리나라의 산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림길에 참으로 눈에 많이 거슬리는 꼴볼견들이 너무도 많다.

많은 등산객들이 등산객인지 소풍나온 나들이 객들인진 몰라도 산엔 올라가지 않고

물가에 않아서 음식을 즐기면서 거기다가 쓰레기는 아무데나 버리고 있다.

저런 자들은 산에 올 자격이 없다. 관리공단 직원들은 도대체 뭘하는 지...

백무동 계곡

寒新溪谷은 백무동 계곡의 상백무마을 위쪽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 골은 중간에서

세석평원으로 이어지는 한신주곡과 장터목 방향의 한신지곡으로 크게 갈래진다.

 지리산 국립공원 백무동 입구

백무동 계곡(함양군 마천면) 탐방 안내소(13:10)

지리산에는 청학동과 백학동이 있었는데 백학동은 지금의 白武洞으로 지금의 무(武)자는

일제강점기에 무(鵡)자로 써서 백학이라 불렸으나 1914년 일제가 개명할 때 새조(鳥)자를

떼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한신계곡 코스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무릎은 불이 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낙남정맥 완주라는 대의를 끝내고 나니 정말 가슴 뿌듯하다

 

한신계곡 내림길에 저 맑디 맑은 물에 이 육신 덩어리를 담가서 일상에서

찌든 스트레스와 욕망, 미움, 분노, 그리고 그리움 등을 이 계곡물에 흘러 보내고

텅빈 마음으로 세속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