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2. 4. 30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바람 한점없는 무더운 날씨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도상거리 21.9km, G.P.S 거리 23.2 km / 8시간 20분 소요
☞ 산행코스: 발산재-전망바위-준봉산-깃대봉-528봉-선동치-벌발들-남성치-옥녀봉-암봉-담티재-필두봉-필봉산갈림길
안부 사거리-봉광산-탕근재-신고개-매봉산 갈림길-248봉-밤나무 단지-배치고개-덕산-덕고개-324봉-455봉
장전고개-백운산-501봉-큰재
☞ 소 재 지: 경남 마산시 진전면 / 진주시 이반성면 / 고성군 구만면, 개천면, 마암면, 대가면
낙남정맥을 2010년에 3월에 시작하여 8월에 끝냈는데 그해 6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상해 엑스포 구경을 가는 바람에 한구간 빼먹은 것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는데
거리상 쉽게 접급근하기가 어려워 차일피일 미룬것이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고
이젠 9정맥이 마무리 되어가는 싯점에 더 미룰수도 없어서 과감하게 베낭을 지고 늦은 오후에
서울을 탈출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토욜에 사무실에 일정을 조금 일찍 마무리하고 집에와서 샤워를 마치고 베낭을 꾸려
고속터미널을 향하는데 집에 있던 딸이 아무래도 아빠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빠 오늘은 왜 일찍 가는거야’ 하고 질문을 던진다. 애들한테는 늘 미안하다
서울에서 마산가는 고속속버스표
터미널에 도착하여 돌솥비빕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커피한잔을 마신 다음에
여유로운 시간에 바빠서 오늘 신문을 보지 못해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서 본다.
버스 시간에 맞쳐서 차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하여 1시간이상을 자고나니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을 지나고 있다. 주위에는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 곧바로 잠을 자서 그런지 속이 거북하다.
요 며칠사이에 이상하게 뭣을 먹고나면 체기가 있다... 월욜에는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다.
마산고속버스 터미널(22:10)
버스는 선산 휴게소에서 15분간을 정차한 다음에 마산으로 향하여
밤 10시 15분경에 마산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이곳은 친척들이 많이 사는곳이다. 집안 조카이자 동갑내기 친구가 자기 집에서
같이자고 내일 아침 발산재까지 태워 주겠다고 사양하고 부담을 주기 싫어
핸드폰까지 끄버리고 남부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그 친구는 벌써 애들을 다 출가 시켜
며느리와 사위를 다보고 홀가분하게 단둘이 살고있다. 이곳 경상도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기는 하지만 늘 이 지역을 올때마다 난 이방인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마산 고속버스터미널앞 버스 정류소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마산남부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데 늦은 시간인데도
손님이 꽤나 많은 편이다. 그리고 기사양반이 손님은 아랑곳 하지않고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 터미널에 내려 달라고 부탁한
다음에 차창 밖을 쳐다보지만 이곳 마산은 생소한 곳이다.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간다. 이윽고 버스기사가 내리라고 하여 내려서 길을건너
잠을 자기위해 찜질방으로 향한다.
남부사우나 찜질방(23:00)
찜질방의 규모는 꽤나 크지만 시설은 별로이다. 특히 찜질방은 수면실과 찜질방이
구분이 안되어 있어 TV 같은 소음이 수면실에 다 들려서 상당히 불편하다.
거기다가 덩치는 강호동이보다도 더 큰넘이 어찌나 밤새도록 코를 골아대던지
잠을 한숨도 못자고 5시반에 찜질을 나온다. 엄청나게 피곤하다.
아침에 본 찜질방 건물
찜질방을 나와서 길건너 김밥천국집에서 4,000원 주고 비빕밥으로 아침을 먹는다.
밥을먹고 출발을 하면 그만큼 베낭 무게를 줄일수 있다.
그리고 컵라면 끓일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다가 담아서 식당을 나선다.
그리고 인근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와 이 지역 막걸리 한통을 사서
베낭에다가 넣고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찜질방 앞에서 바라본 마산 경남대학교 캠퍼스
마산에서 발산재가는 버스표
아침 6시 40분에 마산 남부터미널에서 발산재가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진동을 거쳐서 좁은 2차선 2번국도를 따라 40여분만에
발산재 고개에서 내려준다. 원래는 발산재 아래 봉암리에서 내려
수발사라는 절에 들렸다가 정맥길을 탈 예정이었으나 아무래도 시간이
맞질않아 발산재에 내려 산행을 준비한다.
이곳 수발사는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지만 엄 경덕의 시로 유명한 곳이다.
수발사 가는 길
....... 엄경덕 시인
황토먼지 휘날리는 새벽
마음속 깊은 상념에 잠기어
눈물 머금고 가던 꼬부랑길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바람
다 말라버린 낙엽 떨어뜨리고
긴 밤 재촉하듯 무거운 발걸음 딛고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귀담아
걸어가는 비탈진 언덕
물소리 잔잔한 길목에서
달려가는 마음은 무겁고
산새 소리 울음에 마음 다 잡는다
온갖 풀벌레 소리에 귀 쫑긋 세우고
사방 둘러보니 적막함이 감도는데
가도 끝이 없는 미궁 속에서 헤매는
수발사 가는 길이 그립다
개울가 떠내려가는 풀잎처럼
길 잃은 사람들의 아우성에
보이지 않는 저 먼 산길을 걸어
도착한 하늘 아래 작은 쉼터
목탁 소리 염불 소리 등에 업고
돌아본 그 길은 그리움에 눈물이
서려 있는 작은 옹달샘
다시 그 길을 걷고 싶다
발산재(鉢山峙:07:20)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과 마산시(지금의 창원) 진전면의 경계지점으로 국도 2호선이 지나는 곳이다.
발산(鉢山)재란 스님의 탁발을 엎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하며, 이곳은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김준민 장군과 고종후 장군 등
선열들이 왜적에 맞서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 당시 발산재 싸움은 진주성
전투에 앞서 치열하게 벌어진 격전지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고개 양쪽으로
토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 고개 바로 아랫마을 발산저수지 부근에는 김준민
장군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신도비는 파리장서사건으로 유명한 면우 곽종석이
지은 문장이라고 한다. 김준민 장군은 발산전투를 지휘했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가 죽자 아들 김봉승이 다시 의병장이 되어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며
아예 가족까지 이끌고 발산으로 넘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이곳에 살고 있으며 발산재에서 깃대봉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는 고종후장군의 치적비가 세워져 있어 발산재를 예사롭게 지날
고개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역사의 현장을 지나면서 우리 선조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느끼며 또한 배우게 되는것 같다.
효열공 고종후 묘소 입구
발산재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버스를 바라보면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정류장 좌측의 출구로 구 도로에 내려선 후
창원시 마산 합포구와 진주시 이반성면의 경계선 상에 있는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심하게 잘려나간 산줄기를
따라 구간 들머리인 효열공 고종후 묘소 입구가 나온다
고종후 장군 신도비 우측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가족묘소인 듯한 곳에 '준봉산 탐방로' 비석이 있으며
다소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길은 고종후 장군 묘소를 지나 발산재의 동물이동통로로 이어지는 마루금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반가운 산꾼들을 만난다. 서울 위하여 등산클럽 회원들이 오곡재에서부터 배티고개 가는 길인데 이곳에서 만난다.
이 산악회 한 학문 회장님은 나하고 진양기맥을 같이 하신 분이고 고향도 같은 의령이라 더욱 더 반갑기만 하다.
후미대장이 무전기로 한회장에게 보고를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발산재의 모습
발산재는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에 밀려후퇴하다 창설된지 얼마 안된 '김성은 부대'로 불리던
해병대가 1950년 8월 1~3일 진주에서 발산재를 넘어오는 북한군 6사단의 정찰부대를 궤멸시킨곳으로
서북산 전투와 더불어 인근의 진동리 전투에서도 북한군을 섬멸하고 이후 통영 장평리 해안에
기습상륙하여 통영의 관문인 원문고개에서 북한군 7사단과 치열한 백병전을 펼친 끝에 대승을
거두기도 했던 해병대의 기상이 서린 지역으로써 미국의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이때의 김성은
부대를 일컬어 ‘귀신 잡는 해병’ 이라고 기사를 쓰게 된 단초를 제공한 작전지대였다고 한다
장흥 고씨 묘지를 가로질러 정맥길을 이어간다.
할미꽃도 이젠 완전히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묘지를 가로질러 낙남정맥길을 이어간다.
‘長興高氏’ 묘지에서 바라본 창원시(옛 마산시) 진전면 봉암리의 모습
효열공 고종후의 묘소
후세들이 2009년 4월 설립한 비석에는 효열공 고종후가 임진왜란당시
의병장인 고경명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남강에 의병장 김천익, 최경회등과 투신순절했다는 역사를 기록해 두었다
묘지옆에 흐드르지게 피어있는 영산홍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본 함안의 진산인 여항산의 山群들
준봉산의 계곡은 한여름만큼이나 숲이 우거져 있다.
전망대 바위(07:50)
발산재에서 준봉산가는 길은 등로관리가 아주 잘되어 있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니 거야말로 사방이 一望無際이다.
아쉽다면 운무 때문에 바쳐주지 못하는게 아쉬움이다
저 멀리 진주8경의 하나인 월아산도 아련히 보이고... 그 아래는 발산리의 모습
준봉산(520m:08:18)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와 창원시 진전면 봉암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커다란 암릉위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준봉산 아래에서 고향 향우(경남 의령 대의면 출신)이면서 진양기맥을
같이 산행한 위하여 등산클럽 한 학문 회장님과 조우를 한다.
다른 팀으로 와서 산에서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침에 막걸리 한사발을 나눠 마시고 난 가야할 길이 멀어 이내 헤어진다.
지나온 준봉산의 모습
물뿌레 나무도 꽃을 피우고...
깃대봉(528m:08:25)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깃대봉인데 아무도 알아주질 않고 있다.
이곳을 지나간 산꾼들의 시그널만 요란하다.
깃대봉(520.6m:08:30)
경남 창원시 진전면과 진주시 이반성면, 그리고 고성군 구만면이 만나는
3면 경계봉이다. 이곳에서 부터는 진전면과 이별을 하고 고성군 구만면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유명한 적석산으로 이어지고 낙남정맥길은
우측으로 계속 이어간다.
깃대봉은 산에서 만나는 국사봉과 백운산 만큼이나 흔한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에 자본수탈을 위해서 깃대를 꽂아 측량하기 위한 수단으로
했던게 깃대봉이란 설이 많다.
깃대봉 정상에서 바라본 적석산(積石山)
진동만 서쪽에 우뚝 솟아있는 고성이 자랑하는 산으로서바위가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여 있어서 적석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마산 사람들은 그냥 적산(積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마산과 고성군 경계에 놓여 있으며,
산정에 구름다리가 있고, 바다 조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깃대봉과 연계산행이 가능하며, 근처 주민들에게 인기 있는 산이라 한다.
적석산 넘어 창포만이 아련히 보인다.
깃대봉의 우측 내리막길에는 건강한 소나무들이 참으로 많다.
바람한 점 없는 찌든 날씨에 벌써부터 옷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가야할 거리가 너무 멀기에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길이 좋은 곳은
산악 마라톤 하듯이 달린다. 내가 봐도 내꼴이 우습다. 뭐가 아쉬워서...
선동치(仙洞峙:08:40)
경남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와 고성군 구만면 주평리 선동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선동마을의 뒤의 ‘선박골’의 풍경이 아름답고
자연용수가 약수로 이름나 있어 옛날에 선인(仙人)이 이곳에서
목욕을하고 다녀갔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선동치는 무심코 가면 그냥 지나치기 좋을듯 싶을 정도로 길이 희미하다.
고개를 넘어 밤나무 단지로 올라서니 새로 지은 집한채가 나타나고
개새끼 한마리가 홀로가는 산꾼을 잡아 먹을듯이 짖어대고 머리위론 까마귀가
저공으로 날으면서 산꾼을 경계한다.
밤나무 단지를 지나서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철쭉도 이쁘게 피어있고...
벌발들(418.5m:08:50)
경남 고성군 구만면 주평리에 위치한 봉우리를 벌발들이란 특이한 명칭이다.
삼각점(함안 439)이 있는 벌발들은 이름이 특이한데,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벌밭들’이라 표기되어 있다.
벌발들의 정확한 의미는 찾을 길 없고,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벌발들을 ‘풀국새산’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양지쪽 산이 유난히 따뜻해 첫봄 일찍 풀국새가 보인다하여 풀국새산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풀국새’는 전래동화 ‘콩쥐팥쥐’에 나오는 이야기 속의 새다.
벌발들 내려서는 길도 약간 가파르고, 산딸기나무가 많아 걷기에 심히 불편하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것은 산정상을 "산,봉"으로 표시하지 않고 "들"로 표시를 했는지 궁금하다.
벌발들 삼각점(함안 439 2002 복구)
아기자기한 조금만한 바위군도 지나고...
깃대봉까지의 편안한 등로는 자취를 감춰버리고 이곳부터는
개옻나무, 산딸기를 비롯한 잡목과 잡풀들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등로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소나무들도 갈길 바쁜 산꾼들을 붙잡는다.
내림막길에 좌측으로는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들이 멋있다.
곳곳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붓꽃도 갈길바쁜 산꾼에게 자기도
좀 봐달라고 애원을 한다. 꾸밈없는 들꽃은 언제봐도 이쁘다.
다시 편안한 내리막길을 만난다.
남성치 다다르기 직전에 임진년 윤삼월에 조상들의
묘를 이장작업을 하는 포크레인의 소리가 요란하다.
신선들이 목욕을 하고 갔다는 선동마을(고성군 개천면 나선리 소재)
뒷산으로 가는 입구도로는 포장이 잘되어 있다. 이곳은 상당히 오지이다.
남성치(09:15)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촌마을에서 개천면 선동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있고 주위에는 묘지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으면 이곳 사람들은 남성치가 아닌 선동고개(화촌고개)
라고 많이들 부른다. 고개를 지나 전주이씨 묘지를 가로질러
낙남정맥길을 이어간다.
전주이씨 묘지를 지나서 다시 그리 힘들지 않은 산길을 호젓하게 걷는다.
봄이 온줄도 모르게 봄은 가버리고 오늘은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더운 날씨에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아님 밤에 잠을 설친 탓이지
벌써 지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땀냄새에 산모기가 물기 시작한다.
옥녀봉(338m:09:27)
남성치에서 12분정도를 올라오니 그저 밋밋한 봉우리에 고산마루님께서
옥녀봉이란 표지판을 달아놨다. 오늘은 일욜이라 옥녀는 남친을 만나러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정상은 적막강산이다
성터의 흔적같은 곳도 보이고...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김해사는 친구한테의 전화이다.
자긴 늘 어리버리하다고 하는 친구인데 얼굴을 본 지가 2년이 넘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똑똑한 친구 같은데... 어제에 3사 성지순례를 같다 왔단다,
용암산(399.5m:09:50)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와 개천면 나선리의 경계의 능선에
있는 산으로 이 지역 산에는 표지판이 나무로 댄 명패로 되어있다.
삼각점이 있고 주위에는 벌목을 해놓긴 했지만 전망은 없다.
이곳에서 삼각대를 설치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길을 가는데
진달래를 비롯한 나무들이 어지럽게 등로를 막아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용암산 삼각점(△함안 442)
이곳은 국립 건설 연구소 대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용암산을 지나면서 진달래 군락지가 있고 멋진 암봉들이 많이 나타난다.
암봉 아래로 펼쳐지는 고성군 구만면의 모습이 정말 멋지게 다가온다.
정맥길 암봉에서 바라본 고성군 구만면의 모습
구만면은 소가야 시대에는 의선향(義宣鄕)에 속하였으며 고려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固城縣)으로
개칭되면서 구만촌(九巒村)으로 호칭하다가 근세조선시대(갑오경장시) 군제실시 이후에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굴안 같다고 하여 구만면으로 개칭되었고, 와룡(臥龍), 용당(龍塘), 저동(苧洞),
연동(蓮洞), 내원(內院), 외원(外院), 주천(酒泉), 원평(遠坪), 효대(孝大), 낙동(洛洞), 광암(廣岩),
덕암(德岩)의 12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고성읍에서 17.8㎞ 동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회화면과 마산시 진전면, 남쪽은 회화면과 서북쪽은
개천면과 마산시 진전면과 접하고 있는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인 분지형태의 지형이다.
청심목장 초지(草地)에서 바라본 필두산의 모습
마치 붓의 모양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저 멀리 소곡산과 수리봉(개천면 정광리 소재)이 보인다.
담티재(10:05)
경남 고성군 구만면과 개천면의 경계 지점의 고개로 100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우측에는 규모가 꽤나 큰 청심목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도로를 건너 필두산으로 오른다.
도로를 건너 등로에 접어드니 4륜차가 드나들 정도로
넓은 임도가 나타난다. 한참을 편안한 산행을 한다.
kt 이동통신 중계탑과 송전탑이 같이 서있는 곳을 지난다(01:15)
괘불주머니를 비롯한 야생화들이 만발한 필두산 오름길은
오늘 처음으로 빡센 오름을 하는 상당한 급경사이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바람한 점 없는 한여름같은 더운 날씨에
땀은 비오듯이 흘러내리고 가져온 이온음료 한병과 식수 1L짜리
한병은 절반도 안남았다. 서서히 식수조절에 들어간다.
정상에 오르니 무전기를 가진 산꾼 한명을 만난다. 위하여 소속이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곳에서 초코파이 하나와 커피한잔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필두산(筆頭山:420m:10:35)
경남 고성군 구만면과 개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멀리서 보면 붓의 끝처럼 뾰족하게 생겼다고 하여 필두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필두봉에서 10분정도의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고도를 300이상을 낮추면서
내리막길을 계속 내려간다. 산꾼들은 내려가는 길을 가장 겁을낸다.
무릎에 무리도 많이 가지만 그보다는 내려온 만큼 올라가야 한다는걸 알기에
그것이 겁이 나는 것이다. 35분만에 새터재에 도착한다.
새티재(鳥峙:11:20)
고성군 구만면과 개천면을 지나는 6번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원래는 새티(鳥峙)
또는 조치리(鳥峙里)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쌍쓰럽고 듣기가 거북하다고 하여
새 조(鳥)字에다가 궤를 씌워 봉치리(鳳峙里)라 부른다.
새터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 개천면 봉치리이다. 이곳도 아주 예전에 천지가
개벽하여 온 천지가 물에 잠겨 버릴때 이곳은 모두가 다 잠겨버리고 새 한마리
앉을 정도의 장소만 있다고 하여 새티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새터재를 건너 등로에 접어드니 ‘수원백씨 가족묘’입구의 표지석이
나타나고 이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간다.
표시석을 지나니 쌍둥이 측백나무가 있는 묘지를 지나 올라간다.
봉광산(386m:11:40)
고성군 구만면과 개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그저 그냥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한 산으로 주위가 막혀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냥 사진 한장만 남기고 서둘러 떠난다.
탕근재(宕巾峙:367m)
고성군 구만면과 개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재(峙)로서 ‘재’라기보다는
‘봉우리’라 불러야 맞을듯 싶다. 2007년도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에는
탕근재라 표기되어 있고 재 아래에 있는 개천면 좌련리 좌이마을에서는
좌이산 또는 탕근산이라고 부른다.
탕근재란 이름이 독특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옛날 선비들이 집에서 맨상투를 드러낼
수 없어 쓰던 작은 관, 즉 앞은 낮고 뒤는 높은 형태의 탕건(宕巾)을 닮아 얻은 이름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소바구 또는 우암산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소처럼 생긴 바위가 탕건(宕巾: 옛날 선비들이 갓 안에 바쳐쓰던 관)처럼 보여
탕건재라 했던게 탕근재라 바뀐 모양이다.
봉우리의 형태가 계단식으로 앞은 낮고 뒤는 높은 형태여서 탕건을 닮았다 여겼나 본데,
원래 경상도가 '으'와 '어'의 발음이 잘 안되는 지라 탕근재로 변음되어 오늘에 이르렀나 보다.
탕근재 삼각점(△함안 315)
탕근재를 지나 우측으로 돌아 내려서니 갑자기 왁자지껄한 사람소리가 난다.
자세히 보니 ‘위하여 등산클럽’ 선두그룹 대여섯명이 묘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거기서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길을 일부 같이했던 동료산꾼
럭키가이님을 만난다. 그 양반이 준 토마토 하나를 맛있게 얻어먹고 같이 간다.
내리막길은 등로가 관리되지 않아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더워서 반팔 T를 입었는데 팔뚝이 상처 투성이다. 이곳에서 우리와 반대로 정맥길을
걷고있는 울산의 어느 산악회 회원들을 만난다. 상당히 많은 숫자이다.
상당히 빠른 속도를 걷다가 뚝떨어지는 곳에 도착하니 신고개가 나타난다.
신고개에 세워진 입산금지 표지판
신고개(12:15)
고성군 개천면 좌련리 윗자구실 마을과 성전마을 잇는
조그만 고개로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있는 농로수준의 도로이다.
고개를 지나 다시 빡센 오름을 시작한다. 우측에 밤나무 단지가 있고
아주 오지에 속하는 좌구실 마을의 한가로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10분간의 힘든 오름을 끝내고 좌측 매봉산 갈림길을 지나니 내림길이 나온다.
이 고개에서부터 좌측으로는 여태껏 같이 걸어온 구만면과 이별을 하고 새로이 마암면을 맞이한다.
매봉산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사람 키의 2배나 되는
엄청나게 큰 산죽 군락지를 나타나고 어지러운 등로는 계속된다.
범여가 가장 싫어하는 개옻나무들이 상당히 많다.
옻나무를 피해서 능선에 올라서니 밤나무 단지가 나타나고...
밤나무 단지를 지나니 밤나무와 잡풀들이 뒤엉켜 있는 길을 올라선다.
갑자기 등로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자세히보니 희미한 등로가 겨우 보인다.
이곳에서 길이 좋은 좌측 임도를 가면 알바구간이니 조심해야겠다.
힘들게 등로에 올라서니 앞서가던 럭키가이님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밤나무 단지 오름길에 금강초롱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우산나물은 너무
커버려서 식용으로 이용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이곳에서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다 내려다보니 배치고개가 보인다.
배치(拜峙)고개(170m: 13:00)
고성군 마암면과 개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1007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예전에 이 고개를 넘을 때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고개를 숙이고
넘었다고 해서 배치(拜峙)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그저 밋밋하고 평범한 고개이다.
또다른 설은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하여 해일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 뒷산으로 피신하였던 신리마을 주민들이 계속 불어난 골짜기의
물에 실려 갔다가 어디선가 밀려온 한 척의 나룻배를 발견하고는 배를 타기위해
밀고 당기고 하다가 대부분은 배를 못타 물에 빠져죽고 몇사람만 겨우 배를 타고
이 재를 넘어 개천면쪽으로 흘러 갔다고 한다.
그래서 불어난 골짜기 물에 실려 고개를 넘어가던 배를 탔던 고개라고 하여
‘배타재’가 불렀던 것을 변음이 되어 배치고개라고 불렀다는 유래이다.
배치고개 저 아래에는 좌련리 마을이 보이고 저 멀리 고성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연화산도 보인다. 10여년전에 저기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로 성지순례를 온 적이 있는 산이다.
예전에는 비슬산(琵瑟山)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시대 인조때에 이 산이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연화산(蓮花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중의
하나인 옥천사(玉泉寺) 자리를 잡고있다. 옥천사 경내에는 물맛이 좋은 약수가 있다.
이곳에서 탕근재에서부터 같이온 럭키가이님과 이별을 한다.
이곳에서 위하여 산악회 차량에서 식수를 보충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난 여기서 아직도 약 3시간이나 더 가야 하기에...
배치고개로 다시 돌아와서 우측 능선으로 오르는데 우측에 감나무 단지를
끼고 올라가니 계속해서 송전탑이 계속해서 낙남정맥길을 동행을 한다.
급경사의 과수원을 지나니 좌측으로 마암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숲으로 들어서는데 서낭당 터인지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지는
몰라도 집터인듯한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땀으로 범벅이 된 끈적끈적한 몸에
산에 사는 모기떼가 집중공격을 한다. 가려워서 미치겠다.
덕산(德山:278m:13:15)
고성군 개천면과 마암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이곳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묘지 몇기가 나타난다.
덕산 삼각점
떡고개(13:20)
덕산에서 5분정도를 내려오니 묘지와 넓다란 잔디광장 같은 고개가 나타는데 떡고개이다
고성군 개천면 월곡마을과 마암면 신지마을 연결하는 조그만 고개로 쓰레기만 나딩군다.
월곡마을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하나있고 대낮인데도 닭울음 소리가 요란다.
엄청나게 허기가 진다... 그리고 너무 더워서 더 이상 산행을 진행을 할 수가 없어서
이곳에서 점심을 겸한 휴식을 결정한다.
맛있는 점심시간(13:20~40)
떡고개 위에 있는 김해김씨 묘지 상석에서 망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점심상을 펼친다.
점심이래야 새벽에 마산 편의점에서 산 즉석 짬뽕과 막걸리 1통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과일이 전부이다. 짬뽕에 뜨거운 물을 붓고 난 다음에 망자에게 막걸리를 고시래
한 다음에 막걸리 한통을 게눈 감추듯이 마시고 나니 좀 살것만 같다.
거기다가 짬뽕에다가 과일까지...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늘 자유롭다는 것이다.
잠깐이나마 식사시간에 옷을 벗어 묘지에 걸어놓는데
웃도리에서 잠깐사이에 땀이 뚝뚝 떨어진다. 웃도리를 벗고
팬티만 입고 땀을 말리고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바람만 불어준다면 시원스럽게 거풍이라도 즐기련만... 바람이 없으니
묘지 주위에는 고사리가 꽤나많다. 이걸 부수입으로 챙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꽤나 넓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데 이곳에 있는 묘지에는 잔디가 전혀없다.
보기가 좀 민망하다... 후손들이 신경을 좀 써줬으면 하다.
조금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꺽어져 올라간다.
서서히 고도를 높혀가는데 459봉 오르는 길은 장난이 아닐 정도로 급경사이다.
거기다가 어제밤 찜질방에서 잠을 자지못한 사이인지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74번 송전탑
455봉(14:35)
필두산에 이어 오늘 2번째로 힘들게 올라온 봉우리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도립공원인 연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과 가까운 높이 477m의 연화산은 울창한 숲과 계곡, 등
자연 경관이 수려해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끝이지 않는다고 한다.
옥녀봉, 선도봉, 망선봉 등 삼대 봉우리와 산의 북쪽기슭에 옥천사가 있다.
옥천사 뒤에 있는 사시사설 마르지 않고 옥천샘이 있는데 이 약수를 장기간
마시면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온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을 비슬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 산의 동북쪽에 선유, 옥녀, 탄금 등 세 봉우리가 마치 선인이
거문고를 타고 옥녀가 비파를 다루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455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능선 암릉을 타고 내려오니 오늘 지나온
능선들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오전에 비해 박무가 잔뜩 끼어서 산이 잘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느낌에 맘이 급해진다.
저 아래에 어은골 저수지가 보인다. 암릉구간을 속보로 걷는데 자꾸만 잡목들이 태클을 건다.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들이 박무에 가려 잘보이지 않는다.
암릉 구간을 내려오니 윤달에 묘지를 새로 손을 봤는지 깨끗하지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정맥길에 있어서 조금은 아쉽다.
이곳에서 장전고개를 내려오는 길은 그야말로 잡목과의 전쟁이다.
길도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 능선 아래로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라 산아래는 차량소리로 시끄럽다.
팔뚝에는 상처투성이다. 이윽고 장전고개에 도착한다.
장전고개(場田峙:14:50)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송계리와 척정리 사이에 있는 1009번 지방도가 지나는
"장전고개(장밭고개.송계재)" 2차선 포장도로이다.이 도로 밑으로 대전-통영 고속도로
고성터널이 지난다. 대가면 사무소 쪽에서 송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지역의 택시나 버스 기사 뿐아니라 이곳 주민들도 장전고개라하면
모르고 장밭고개로 통용되고있다
고개 우측의 송계리에는 장전과 괴정마을이 있으며 장밭(場田)은
원래 마당만한 밭이 많았다고 하여 마당 장(場), 밭 전(田)字를 붙여
장전마을이라 부르고 괴정(槐亭)은 옛날 이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나무가 회화나무로 회화나무 괴(槐)字를 괴정이라고 한다.
금북정맥길에 수덕사 입구에 있는 육괴정과 비슷한 연유를 가진 곳이다.
주변에는 제일목장과 수도원이 있다.
도로를 건너니 우측에는 한림공업이라는 제조업체가 있고
좌측에는 목장이 있다. 목장길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홀로가는 산꾼이 저 소도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온누리 목장 도로를 따라 올라가 가다가...
제일목장이라는 표시석을 끼고 우측 등로로 들어선다.
초지에는 괴불주머니를 비롯한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심어놓은 소나무 숲을 지나서 다시 등로로 올라서는데 임도를 올라서다가 다시
빡센 구간으로 치고 오르는데 자꾸만 다리에 힘이 빠져간다.
급경사 올라가는 길에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지고 있는 유혹의 꽃 얼레지를 만난다.
얼레지의 꽃말이 ‘질투, 바람난 여인’이란다. 요염한 자태로 뭇남성을 유혹하던
얼레지가 추한 모습으로 지고있는 모습이 요즘의 인간사와 똑같음에 씁쓸함을 느낀다.
매일 매스컴을 도배하고 있는 MB측근들의 비리와 무엇이 다를까?
花無十日紅이요... 權不十年이라... 아무리 붉고 탐스러운 꽃이라도 열흘을 넘기기
어렵고, 제아무리 권력가라도 그 권세는 10년을 넘기지 못하는게 하늘의 이치이기늘...
어찌 그리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말년에 추한꼴을 보이는지...
자연은 인간에게 참 많을걸 가리킨다.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 오르막을 오른다.
매달 100km이상의 산을 오르내리는 범여도 오늘은 참으로 힘이 드는구나.
낙엽이 물기에 젖어있어 미끄럽다. 젖먹는 힘까지 내서 암릉구간인 정상에 오른다.
천신만고끝에 마지막 능선에 올라서니 저 멀리 당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당항포하면 생각나는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4월 28일)이
충무공 탄신 467년이 되는 날이다. 세계 해전사(海戰史)를 다시 쓰게한 명장
한국에서보다도 세계에 더 많이 알려진 명장... 전부 내가 서있는 저 남해
앞바다에서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출신성분의 불이익과 온갖 견제와 모함에 옥살이까지 하지만 오직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일념으로 풍전등화 앞에서 나라를 구한 성웅이시다.
이 난세에는 저런분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요즘에 정치판을 보면 개판보다도 더 못하다는 느낌에 씁쓸함을 느낀다.
20일전의 선거에 이긴 여당은 마치 정권을 잡은 것처럼 오만방자하게 굴면서
뽑아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밥그릇 싸움에만 정신이 빠져있고...
맞은편에 있는 야당은 어떤가? 여당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나은거 하나도 없다.
이러면 어떨까... 지금 같으면 국회의원과 국회를 없는게 더 낫지 않을까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지나온 475봉과 장밭고개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보인다.
백운산에서 바라본 박무가 잔뜩 낀 고성 앞바다... 앞에 보이는 대가저수지는 고성의 젖줄이다.
이 앞바다는 충무공이 나라를 지킨 빛나는 해전이 전개된 곳이다. 충무공이 최초로 해전에
나선 지금의 거제시 옥포에서의 옥포해전과, 거북선을 최초로 투입한 사천포해전,
임진왜란의 3대대첩의 하나로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만든 한산도 대첩.
이곳에서 처음으로 학익진 전법을 구사하여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66척을 격파한 곳이다.
충무공에 대한 온갖 시기와 모함으로 변방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을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조선 수군에 남은 12척의 배로 삼도수군 통제사에
오른 뒤 빠른 조수를 이용하여 왜선 31척을 격파하고 133척을 물리치고 대승한 명랑해전.
일본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봉쇄하고 임진왜란을 끝낸 노량해전에서의 장렬한 죽음
다 이 고성 앞바다를 중심으로한 이 남해 앞바다에서 이루어진 곳이다.
백운산(486m:15:10)
백운산 정상에 서니 고성읍내와 대가면이 한눈에 보이고 고성 앞바다는
박무로 인하여 희미하기만 하다. 산 아래에는 중창불사가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천비룡사가 내려다 보인다. 정상에는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와 묘지가 있다.
501봉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따라 큰재로 내려선다.
큰재(350m:15:30)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봉산마을과 양화리 삼계마을을 잇는 고개로 1차선 포장길이다.
봉산쪽으로 농장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차량통행이 아예없는 곳이라 히치는 생각도 못한다.
고성 택시를 부를려고 하니 어~라 핸드폰이 터지질 않는다. 난감하다.
에라 모르겠다. 도로옆 계곡에서 알탕을 한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니
천비룡사가 나타난다.
천비룡사에 들려 핸드폰이 터지질 않아서 그런는데 고성택시 좀 불러 달라고 하니
거사님이 자기가 고성읍내에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고성읍 버스터미널까지 태워준다.
어~잉 이런 횡재가... 고맙습니다.
신호 대기를 하는데 계승사 표지판이 보인다. 그런데 16km라 꽤나 멀다.
계승사 주지 소임을 맡고 계시는 법진스님께서는 동국대 불교대학원
총 동창회장을 역임하신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용 머리를 닮은 듯한 큰바위를 머리에 인채 조용히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 영현면 대법리 금태산. 그 품안에서 신라 천년고찰 역사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계승사가 최근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계승사는 신라 문무왕 15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 「금태사」로 불리워 오다가 임진왜란때
병화에 의해 소실, 지난 63년 지금의 주지 법진스님의 재 창건불사에 의해 중건됐다.
산세가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즐비한데다 유서가 깊어 많은 신도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계승사는 절벽사이에서 솟아나고 있는 석간수로도 그 명성이 높다.
용두봉에서 발원되어 기암괴석과 절벽사이로 흐르고 있는 이 석간수는 그 옛날에는 매일
서되두홉의 공양미가 쏟아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시봉행자가 더 많은
공양미를 받기 위해 구멍을 키웠더니 공양미가 약수로 변해 버렸다는 설과 함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평범힌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이약수는 피부병을 비롯해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말이면 인근 사천, 진주, 마산 등지에서 약수를 받기 위해 차량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삼남도를 내려왔다가 이 절에서 수행, 조선 창건의 꿈을
키웠으며, 이후 조선 건국을 이룬후 태조 이성계가 이 산의 이름을 금태산이라 지어 하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성버스 터미널(16:00)
고성버스 터미널은 난생 처음으로 와보는 곳이다.
이곳 고성은 인물이 참으로 많이 배출한 곳이다.
장흥 보림사에서 구산선문의 선풍을 떨치며
유,불학에 능하고 시에도 뛰어난 혜문스님이 이곳 고성 출신이다.
도시빈민의 대부로 불린 故 제 정구의원이 이곳 고성 출신이다.
그러나 이곳 고성출신은 5공시절이 전성기 아니었나 싶다.
이른바 5공시절 3許의 1명인 허문도 통일부 장관, 이기호 건교부장관, 이 원웅 문광부장관
이 희성 국방부 장관이 이곳 고성 출신이다.
고성에서 진주가는 버스표
고성에서 서울가는 버스는 많이 있으나 표가 없단다. 참으로 난감하다.
이곳은 거제, 통영을 걸쳐서 오는 차이다보니 그쪽에서 자리가 없으면
이쪽에선 가는 방법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진주로 가야만 한다.
진주가는 버스표를 끊고 캔맥주 하나로 목을 축인다.
진주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진다.
40분정도 단잠이 깨기도 전에 진주에 도착한다.
진주시외버스 터미널(16:50)
진주에서 표를 끊고나니 약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이곳에서 이른 저녁을 먹는다. 이 지역 막걸리 한병과 함께...
서울가는 버스표와 버스
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한다. 그런데 이 버스는 진주에서 산청까지
국도를 달려서 산청에 들려 손님을 태운 다음에 서울로 향한다.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니 밤 10시 30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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