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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한북정맥(終)

한북정맥 제5구간 - 화현고개에서 축석령 삼거리까지

by 범여(梵如) 2010. 11. 29.

산행일시: 2010년 11월 28일(나홀로 산행)

산행구간: 화현고개-443.6봉-425.4봉-명덕삼거리-수원산-705봉-국사봉

              육사전적기념비-근녁고개-작은녁고개-죽엽산-비득재-노고산

              공동묘지-다름고개-귀락터널-축석령 삼거리

거리/시간: 31.5km / 9시간 40분 소요

 

여느때의 습관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베낭을 꾸리고나니 30분간의 여유가 있어 좌복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는 참선을 한 다음에 아파트를 나선다.

새벽이라 그런지 꽤나 차가운 바람이 불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

나부낀다. 가로등도 졸고있고 아파트 입구 경비실에 평소에

항상 친절하며 살갑게 대해 주시는 나이드신 경비원 아저씨가

곤히 주무신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살금살금 

경비실을 지나 버스 정류장에 나오니 한참후에 차가 도착한다.

 

선릉역에 도착하여 광릉내가는 버스가 10분마다 온다고 표시되어 있건만

30분이 지나서야 7007번 버스가 도착한다. 올겨울 가장 추운 날씨에

새벽에 세찬바람이 더욱더 차갑게만 느껴진다.버스에 올라 잠을 

청하는데 버스 정류소마다 안내 멘트를 하는 바람에 잠자는걸

포기하고 눈만 멀뚱거리다 광릉내에 도착하자 일동가는 5번 버스가

기다린다. 얼른 구멍가계에 들러 우유 하나와 빵 하나를 사서 베낭에

넣고  차에 오르니 졸린다. 버스기사한테 봉수 지하차도에 내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잠깐 눈을 부치는 사이 기사가 내리라고 한다.

 

얼떨결에 내린곳이 서파 삼거리 지하차도다. 아~~미치겠다. 할수없이

30분을 도로를 따라 걸으니 이 지역은 얼마나 추운지 겨울 장갑을 끼어는데도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30분만에 봉수 지하차도(화현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구간의 산행지도

며칠전 연평도에 북한의 포격으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은 故 서 정우하사와

故 문인국 일병.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부디 좋은곳에서 왕생극락하기를 기원하마..

선릉역 버스정류장(05:45)

새벽6시에 광릉내 가는 버스를 타려고 선릉역에 도착한다. 집에서 출발한 버스가 빨리 오는 바람에

05:45분에도착한다. 10분마다 다닌다는 버스가 30분이 지나서야 도착한다. 그러고도 미안하다는

 말한마디 없다. 올겨울에 가장 추운날씨에 바람까지 새차게 불어 체감온도는 더 추운 느낌이다.

온도계를 보니 영하 5도를 가리킨다. 며칠동안 계속 약간의 감기기운이 있어서 그런지 부어있는

성대가 통증이 심하다.

봉수지하차도(08:30)

버스를 타고 1시간만에 광릉내에 도착하여 우유1개와 빵 1개를 사서일동가는 5번 버스를 타니 졸립다.

 버스기사에게 봉수리 지하차도에 내려 달라고 부탁하고 잠깐 눈을 부친다.

근데 기사가 내리라고 해서 내렸더니 봉수 지하차도가 아닌 서파 지하

차도에 내려주는 바람에 30분을 도로를 걸어서 화현고개(봉수지하차도)까지 왔다.

이쪽 버스기사들은 화현고개를 잘 모른다고 한다. 이곳은 북쪽이라 그런지 서울보다는

훨씬 더 춥다. 겨울장갑을 끼었는데도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화현고개

운악산에서 내려온 산세는 화현고개에서 다시 끊어진다.

서울과 강원도를 이어주는 47번 국도는 고속도로 못지 않을만큼

도로도 좋고 차량 통행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이 지역사람들은

화현고개를 아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버스 기사까지도...

봉수 지하차도를 나와 군부대 정문을 끼고 우틀하여 마루금을 향한다.

마루금 초입을 알리는 반가운 시그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초입부터 군부대가 막아서는 바람에 명덕 삼거리까지 이 부대의 철조망과 같이 간다

며칠전 일어난 연평도 포격사건 땜에 맘이 편치않다. 우리 군이 어떡하다 이 지경까지...

민간인까지 희생된 것은 전쟁인데 제대로 대응한번 못하고 당하다니 이스라엘처럼

당한것에 대한 몇배의 보복을 해버리면 절대 도발을 하지 않을텐데 가슴이 다답하다.

이 기회에 군수뇌부는 정말 개혁이 되야 할것 같다. 나라를 지키는데 진보, 보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지난 10년간 진보정권이 들어선 후 군인들이 권력의 비위나

맞추고 승진할 할 생각이나 하니 이 지경 아닌가 말이다.

국가가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하는 이 시대에 이 나라 국민들은....

군 철망을 끼고 걸으면서 바라본 수원산.

화현고개에서 올라와 25분만에 만난 443.6봉(08:55)

443.6봉 삼각점

군부대 망루에서 초병 2명이 근무를 하고있다. 수고하십니다라고 하니

고맙습니다 라고 응답이 온다. 혼자 산행을 하는게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425.4봉(09:20)

명덕 삼거리(09:30)

서파 삼거리 지하차도를 타고 올라오면 포천을 넘어가는 길이다

56번 지방도로서 급경사가 심한곳이며 천마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예전에 이곳을 몇번 다녔다. 이쪽 골프장들이 꽤 많다.한참 골프에

미쳤을 때 다녀본 곳이라 길이 눈에 많이 익는다.

수원산 가는 길

어제 내린 눈들이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꽤나 많이 쌓여있고 그것이 얼어서 그런지

오름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그렇다고 아이젠을 차기엔 그렇고 해서 그냥 걷는다.

길도 생각보다는 꽤나 가파르다. 집에서 일찍 나오는 바람에 배가 고파온다.

아침에 광릉내에서 산 우유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 그런데 우유맛이 이상하다.

제조일자를 보니 4일이나 지난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다 마신것을 상당히 찝찝하다.

내가 지난온 구간들이 연봉들이 아련하게 밀려온다.

바로 앞에 보이는 운악산, 국망봉, 백운사, 저 멀리 광덕산까지 보인다.

가평쪽의 산들은 연무로 인해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

어렴풋이 보이는 명지산, 연인산임을 짐작이 된다.

수원산 군부대 위에 떠 있는 스무 사흘날의 달은 무슨 미련이 남아 아직도 떠있나.

수원산(水原山 697m: 10:20)

운악산으로부터 연봉되는 포천의 진산. 포천천 본류로 서류하는 수원(물이 처음 시작되는 곳)

의 근간이 되는 넓은 산이다.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계곡지역 1.5㎞ 자연발생 유원지 수원산 계곡이 있다.

수원산은 하천의 발원지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남쪽에서 발원한 수원은
왕숙천(남양주시,구리시를 거쳐 한강유입), 북쪽과 서쪽에서 발원한 수원은 포천천
(포천시를 관통함,영평천으로 바뀌어 한탄강유입) , 동쪽에서 발원한 수원은 조종천
(가평거쳐 북한강으로 유입)이다.

 

수원산에 올라오니 방공포 부대가 정상을 점령하고 있어 정상을 밟지 못하고 전망대에서

지나온 구간인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을 조망한다. 부대안의 군견(軍犬)이 경계심을

나타내며 사납게 짖어댄다. 초병들도 산꾼을 바라보며 경계심을 갖는다.

정상에 올라오니 안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수원산 이정표

수원산(水源山)은 이 부근 모든 개울물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수원시와 발음이 같아서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즉 예전에 수원사람들은 수원산이 여기 있는 것은 자기네가 포천에 산을 빌려줬기 때문이라고 하여

 매년 포천에 와서 세금을 받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총명한 군수가 새로 부임을 하여 그 내력을 듣고,

 세금을 주지 않을 방도를 강구한 것이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세금을 받으러 온 수원사람들에게

신임군수는 ‘이제는 산이 필요 없으니 가져 가시요’라고 했단다. 이 재치 있는 말 한 마디에 할 말을 잃은

수원 사람들은 코를 움켜쥔 채 달아나서 그 후엔 세금을 받으러 오지 않게 됐다고 한다.  

수원산 망루에서 바라본 운악산

화현고개에서 수원산까지 내가 올라온 마루금 능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수원산에서 국사봉까지는 고도편차가 별로없이 편안한 걸음으로 걷는다.

아직까지 개미새끼 한마리 구경하지 못하고 홀로  法을 구하는 求道者의

심정으로 ... 들리는건 낙엽소리와 안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뿐.

난 참 이런길이 너무도 좋다. 나를 뒤돌아보고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고즈늑한 안부의 능선에 오직 낙엽뿐

시몬아 너는 아느냐. 낙엽밟는 소리를...

능선에서 바라본 포천시가지의 모습

포천시(抱川市)는 경기도 동북부에 있는 로서. 동쪽은 가평군, 서쪽은 양주시, 동두천시,

연천군이, 남쪽은 의정부시남양주, 북쪽은 강원도 화천군철원군 접하고 있다.

서울 인근에 있다보니 상당히 도시화 되어있는 느낌이고 조그만 공장들이 상당히 밀접해 있다.

인공으로 조림된 잣나무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지난번 도성고개를 지날때 좌측의 가평지역은 수익성이 있는

잣나무과 즐비한데 우측의 포천지역은 갈참나무 숲과는 상당히 대비 되었는데...

지나온 수원산 정상의 모습

이 지역은 휴전선이 가깝고 6.25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까닭에 군부대가

상당히 많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오늘 걷는 산에 이런 벙커가 수도없이

많다. 부디 이 나라 국민들이 두다리 쭉뻗고 살 수있는 것도 다 그대들

덕분인걸 잘 알고 있습니다.

산을 갉아먹고 있는 채석장

오늘 산행구간에는 채석장이 수도없이 많다. 저기 베어스타운 옆 채석장과

큰넠고개 못가서 채석장 등 시야에 들어오는것만도 서너개이다.

물론 좁은 국토에서 산을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환경파괴의

주범과 권력과 유착하여 이권사업이 되지 않기 바란다. 

705봉에서 바라본 베어스타운 스키장과 왕숙천의 모습

왕숙천은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 수원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 진접읍을 지나,

진건면과 퇴계원을 거쳐 구리시 토평동과 남양주시 수석동 사이에서 한강에 흘러든다 

한강의 제1지류로 길이는 38.5이다

 

왕자의 난으로 함흥에 갔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으로 환궁하던 중에

지금의 진접면 팔야리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이 마을을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왕이 자고 갔다'라는 뜻으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왕숙천이라 명명했다고도 전하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포천 문화원 지명유래 에서.....

범여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길

국사봉 (546.9m :12:00)

 국사봉(國師峰)이란 한나라의 스승으로, 또한 신라와 고려때는

 불교(佛敎)에서 최고의 職位에 있던 승려(僧侶) 칭하였고, 우리나라에 같은 山名만도

 25개나 있다고 한다. 아마 백운산 다음으로 많은 지명인 것 같다.

 

정상에는 관리가 되지 않은 헬기장엔 풀이 무성하고  국사봉이라 표지목이 한북정맥

이정목에 달려있고  또 그옆엔 국사봉이라고 한글로 쓴 표시석이 있다.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려는데 역광이라 사진이 잘 잡히지 않아 포기하고

수동으로 정상을 찍고 우측으로 꺽어져 큰넠고개로 향하는데 내리막길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오른쪽 아픈 팔목에 힘이들어가니 

통증이 오길 시작한다.

정맥을 난도질하고 있는 채석장

잠시 내려오니 삼각점이 있고 우측으로 정맥길은 이어지고 계속해서 내리막이다. 

엄청난 절개지에 채석장이 보인다. 정맥이 잘리는 현장이다. 낭떠러지 접근을 막기 위에 철조망과 줄이 늘어져 있다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아마 2년간 대간, 정맥을 타면서 본 중에 가장 큰 규모인것

같다. 얼마나 더 파먹고 훼손해야만 직성이 풀릴까.

이젠 제발 자연으로 돌려줬으만 하는 바람이다.

인고의 세월을 딛고 꿋꿋이 서있는 노 거목

아무래도 얼마전에 먹었던 우유가 탓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자꾸만 배가 아파오고 있다. 벌써 이렇게 넓은 화장실에서 3번이나

볼 일을 봤는데도 또다시 배가 아파온다. 할 수없이 바지를 내리고

볼 일을 본다. 그래도 뒷끝은 시원하지 않다. 이젠 먹는것이 겁이난다.

조금 굶어볼까 하는 생각이다. 보온통에서 따뜻한 물로 가져온 유자차를

타서 속을 다스려본다.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12:30)   "육사 1( 육사10) 312명과 2 330명은 육사교육기간 장교  교관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이를 기리기 위해  1979 12 1일에 격전지인 이곳 포천군 가사면 우금리 89-1 세웠다" 쓰여져 있다.

육사생도 기념비 안내문

몸을 추스리고 육사생도 기념비와 그 아래에 있는 아주 호화로운 묘지를

지나 2차선 도로에 내려온다. 이곳이 원래 큰넠고개이다. 새로난 4차선의

큰넠고개에 모든걸 다 넘겨주고 쓸쓸히 퇴장한 모습이 꼭 우리네 인생과도 같은 느낌이다.

신우식품 2차선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200m쯤 올라오면 극동금속이 나온다.

극동금속 맞은편 포천수지라는 스치로폼 공장 휀스를 끼고 들어선다.  

포천 수지라는 스치로품 공장 휀스를 끼고 들어서며 배추밭을 지나

솔밭을 들어선다. 다시 묘지 2기를 지나면 솔밭이 나오고 조금지나

상가를 지으려는지 불도저로 마구 붙인 택지를 지나니 G.S 주유소가

나온다. 이곳은 한북정맥 마루금이 깡그리 망가지고 있는 슬픈 현장이다.

큰넉고개(12:45)

큰넉고개는 포천시 가산면과 내촌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남북으로 이어지는 완마하게  경사진 이 고개는 50여리나 된다.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 보면 전후좌후가 탁트여 광활한 구릉지대가 이루고 있다.

이렇게 크고 넓은 지형이라 하여 ‘큰넉고개’ 부른다고 한다

 

 - 포천시 지명 유래집에서 인용

넓고개, 넙고개로도 부르는 넉고개(廣峴)는 '넓다'라는 어원에서 유래하는데

 음운동화 현상으로 발음이 변해 넓은고개-넙고개-넉고개가 된 것이다.

따라서 맞춤법 상으로는 ‘큰넉고개’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억지로 맞춤법에

 맞춘다고 하는 것이 큰넓고개라고 잘못 표기한 자료들이 여러가지로 표시하다

보니 처음 가는 사람은 상당히 헷갈린다.

심지어 큰넉고개 도로 상의 표지판조차 큰넓고개라 써 놓아서 더욱 혼선이 생긴다.  

 

큰넉고개에서 마루금이 짤리는 바람에 길이 없다. 횡단보도까지 가려면 저 아래 

오일뱅크 주유소까지 내려가야 하기에 차가 그리 많지 않은틈을 타 무단으로

4차선 중앙 분리대를 넘어서 건넌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있어야

하니 가끔은 9정맥 완주 목표에 회의도 들긴 하지만 사나이가 목표를 정했으면... 

이곳 포천지역은 상당히 호화묘지가 많이 보인다. 흔히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 했는데

또 하나 추가해야 할것 같다. 사거포천(死居抱川)이라는 단어를...

물론 자기 돈가지고 자기가 쓰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선 할 말이 없다마는

그래도 상생이란 것도 있고 남을 배려하는 아량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범여의 눈에는 상당히 거슬린다.

작은넠 고개(13:20)

큰넠고개에서 4차선을 무단횡단하여 마루금에 올라 S자형으로 편한 오르막 내리막을

계속한다. 이곳은 공장지대와 개 사육장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다시 묘지를 지나니

개사육장에서 개들이 합창을 하는지 시끄러워 고막이 터질듯한 기분이다.

거기다가 공장에 있는 개들까지 합창을 한다. 이 고개는 형님인 큰넠고개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는 모양이다. 비포장에다가 길이라고 할 수 없을정도로 초라하다.

작은넠 고개의 관용사

성황당의 정자나무 옆에 있는 사찰인데 종단소속 사찰은 아니고

아마도 개인사찰인 모양이다. 이 사찰을 옆을 끼고 다시 마루금을 오른다

이곳도 묘지 천국이다. 다른지역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가 호화묘소

로 보인다. 조금 지나니 이곳 아래로 포천시내로 통하는 새로운 터널이 있다.

오늘 산행에서 30km를 넘게 걸으면서 유일하게 처음만난 사람

작은넠 고개에서 출발하여 약간의 오르막에 오르는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거기다가 오후가 되니 기온도 내려가 춥기 시작하고... 베낭에서

자켓을 꺼내입고 오른는데 도저히 허기가 져서 걸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먹는것이 겁이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따뜻한 물에 커피를 타서

초코파이 2개와 키위 2개를 먹고나니 조금은 살것같다. 아침에 버스를 잘못내려

30분을 허비하고 설사로 인한 체력저하로 인해 약 40분 정도 지체하였다.

예상시간보다 70분 오버한다. 아무래도 축석령까지 해떨어지기 전에 도착한는 건

무리일 것 같다. 

광릉수목원 (光陵樹木園)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목원이다  

산림청에 딸린 임업연구원 부속기관으로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의

광릉 주변 약 500ha(150만 평)에 자리잡고 있다. 광릉은 세조의 능으로,

조선시대 세조의 묘지로 결정된 뒤부터 소나무·잣나무·전나무 등을

심어왔으며 엄격하게 보호되어왔다. 한일합병 뒤 1922년 임업연구원의

전신인 임업시험장이 생기면서 이곳은 임업시험장의 부속시험림이

되어 광릉수목원으로 개원했으며, 1989년에 산림욕장이 개장되었고,

1991년 야생동물원을 만들었다. 1987년 광릉수목원으로 개원하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공원이나 휴식공간 또는 산림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2,800여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1,600여 종류의 동물들이 산다.

이들 중에는 광릉물푸레·광릉개고사리·광릉용수염풀·광릉골무꽃·

광릉요강꽃 등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오직 광릉에서만 자라는

식물들도 있고, 외국에서 들어온 식물들도 900여 종류에 이른다. 

 

광릉 수목원이 국립 수목원으로 바뀐 모양이다.

근데 이곳부터는 독도에 유의해야하고 지도를 자주봐야 할것 같다.

수목을 보호한답시고 꼬리표도 없고 이정표도 없다.

산꾼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다 제거해버린 모양이다.

지난번 콘파스 태풍때 쓰러진 나무는 그냥 방치해둔 채 말이다.

순수하게 지도와 네비에만 의지한다. 네비게이션도 사람이 만든거라

완벽하게 믿지는 마시고... 국립이란 기관을 부친곳은 모두 다 오만한가보다.

제발 군림하는 기관이 아닌 봉사하는 기관이 되시길... 

국립 건설 연구소의 삼각점

죽엽산(竹葉山 :14:30)

고산자 선생이 쓴 대동여지도에는 죽엽산이 아니 주엽산(注葉山)

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은 실제로 대나무는 흔적도

없다. 아시다시피 요즘은 서울근교에도 기온 상승으로 인해 대나무가

심심찮게 보이지만 옛날에는 날씨가 추운탓에 충청도 이북에는

대나무가 거의 없었다. 나뭇잎이 물흐르듯이 많다고하여

주엽산이라고 했는데 어떤 연유로 죽엽산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정확한 고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신라(新羅) 14 유리왕(儒理王)때에 이서국(伊西國=지금의 청도군) 사람들이

 금성(金城=신라의 도성) 내습하자, 아군(我軍) 많이 동원하여 방어를 했으나

오래 싸울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상한 군병(軍兵) 나타나서 도와 주는데

모두 댓잎(竹葉) 귀에 꽂고 아군(我軍) 함께 힘을 합하여 적을 격파했다. 댓잎(竹葉)

 미추왕능(未鄒王陵)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선왕(先王)

음조(陰助)인줄 알고 죽현능(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득재의 어느 레스토랑 담장에 있는 열매

비득재(鳩峴 16:00)

죽엽산에서 2-3분 남쪽으로 전진하면 갈림길이 나타나고

정맥 길은 거기서 오른편(서쪽)으로 꺾어져 내리막을 내려가야 하는데 

이쪽은 지난 태풍에 쓰러진 나무 작업하느라 작업로가 상당히 많아서

까닥 잘못 길을 잡으면 알바하기가 쉬운 곳이다 

10여분 정도 내려오면 임도를 만나면, 임도를 가로지르고, 다시 조금

올라가면 송전탑(115번)이 있다. 그리고 다시 조금 걸으면 다른 송전탑을

만나고 10여분 가면 또 하나의 송전탑을 지나고,  다시 임도를 만난다.

그 임도를 가로질러 올라서면 전주 이씨의 무덤지대가 있고

전주 이씨 무덤에서

 1-2분 진행하면 또 송전탑(117번) 아래를 지나서  내려가면 비득재이다.

죽엽산에서 40분정도 소요된다.광릉 숲으로 연결되는 383번 2차선 좁은

아스팔트포장길이 지나는 비득재 정상엔 음식점들이 있다.

이곳은 주말에 아베크족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레스토랑과

찜질방, 서바이벌장들이 있다.

 비득재의 좌우로 노고산과 죽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비둘기를 닮았다 해서

 비득재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며, 그래서 한자로 비득재를 비둘기

 鳩字를 써서 구현(鳩峴)이라 한다. 

고모리 산성터

몸의 컨디션이 최악이다. 비득재에 도착하니 오후4시다. 축석령까지 가야하나

아님 여기서 오늘 산행을 해야만 하나 고민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무리하면

나 홀로 산행이라 교통편이 불편하여 좀 늦더라도 축석령가기로 맘을 먹고

산행을 다시 시작한다. 간단하게 허기를 면하기 위해 쥬스를 사려고 했지만

이곳은 식당만 있고 구멍가게는 없다. 할 수없이 초콜릿이 두개가 있어서

그것만 믿고 길을 떠난다. 8km정도이니까 2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몸의

컨디션 땜에 걱정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빠른 걸음으로 가야하는데

몸은 생각만큼 움직여 주질 않는다.

노고산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죽엽산의 겨울 풍경

고모리산성(경기 유형문화재 185호)

 

포천 고모리 고모산(古毛山, 해발 386.5m, 일명 老姑山)의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
이 산성에 대해서는 지리지 등에 전혀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그동안 지명의

유사함을 들어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비문에 나타나는

‘고모루성’으로 비정하려는 견해가 있어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고모산 정상부에 형성된 평탄대지를 감싸고 있는 내성과 서쪽에 외성이

결합된 형태의 성으로, 대부분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지형에

따라 일부구간에 석축과 토석혼축 기법을 혼용하였다.

산성의 둘레는 내성 967m, 외성 240m이며, 전체 둘레는 1,207m이다.

성 안 시설물은 문지 1개소, 건물지 7개소(내성 6, 외성 1),

우물지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남쪽에 솟은 정상부(해발 386.5m)의 봉우리와 북쪽 봉우리(해발 380.1m)를

중심으로 하여 서벽은 봉우리를 연결하는 가지능선상에 축조하였으며 동벽은

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계곡부의 상단면에 축조하였다. 서벽은 무봉리, 이곡리

 일대 방향으로 대부분 삭토에 의한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축조방법은 외벽은

 경사면을 거의 직각으로 삭토하고 상면에 내벽을 성토하여 토루를 조성하였다.

 북벽은 고모리 저수지 방향으로 멀리 포천평야 일대와 포천읍에 소재한

반월산성이 조망이 된다.유적이 위치한 곳은 경기북부인 포천의 남동편에

 해당된다. 북쪽으로는 한탄강의 지류하천인 포천천을 중심으로 발달한

포천 일대의 평야 지대와 낮은 구릉이 드넓게 펼쳐지고 멀리 시야가 확보되고

있다. 따라서, 남진세력이 이곳 일대를 점거하지 못하고 한강방향으로

진출하였을 때 쉽게 배후를 차단할 수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노고산(16:30)

뒷동산 같은 노고산 정상엔 작은 암릉이 있고, 노고산 산악회의 비석과 KBS

중계탑이 있으며, 조금 아래에 고모리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고모리산성은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나는 고모루성과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나는

 고모루성을 일컫는 것이라는 설이 있을 만큼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요충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산성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서서히 해가 기우는 느낌이다. 자꾸만 맘이 급해지길 시작한다.

노고산 (380m) 전망대 바위 이동통신 송신탑. 잡초만 무성하다. 등산로가 두개 있다.

송신탑정면 내리막이 있고, 고모리 성터 안내판이 있는 방향에 등산로가 보인다.

포천군 향토유적 43호인 고모리 산성은 해발 380m, 정상 둘레822m, 면적 36,418㎡인

삼국시대 .석성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상호관계를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문화재라고 한다.

노고(老姑)라면 할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동명이산(同名離山)으로 5개의 산과 2개의 () 있다.

노고산 정상에서 고모리 성터 안내판이 있는 쪽을 택하여 진행한다.

 

노고산에서 이곡리 도로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다. 고도편차가 없어서 가속도를

붙인다. 그럼에도 생각했던만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부지런히 길을 걷는데

사람소리가 난다. 얼마나 반가운지 그런데 산꾼은 아니고 아마 초상이 났는지

묘지를 파고있다.

이곡리를 연결하는 신설도로

아마 생긴지가 얼마되지 않은 도로인듯 싶다. 근데 마루금을 짤라 버렸다.

높이가 어림잡아 100m는 더 되는듯 싶다. 이 정도면 터널로 시공하여 동물통로도

만들고 마루금도 연결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사도

 파괴된다는 이치를 모르는가보다. 개발만이 능사가 아닐텐데...

이곡리 도로를 지나서 소나무 숲을 통과한다. 조금가니 아마 마을 주민들이

설치한 운동기구들도 보인다. 이제 주위도 서서히 어둠이 몰려온다

저 멀리 북한산에 걸린 낙조(落照)(18:40)

산길을 벗어나니 거대한 묘지군이 나타난다.

공동묘지나 공원묘지는 아닌것 같고 천도교 신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의 묘지가

 많이 보이고 일반 묘지도 많이 보이는데 하나같이 상당히 관리가 잘되어 있고

묘지 면적들도 상당히 크다.  그리고 공동묘지 구역이 끝나면 군부대 철조망이 딱 가로막는다.

거기서 왼편으로 꺾어져서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내려가는데, 10여분 내려가면 군부대 후문 앞에 내려선다.

상당히 중요한 부대인지 경계가 삼엄하다.

아마 포병부대인지 위장막으로 가려진 탱크들도 상당히 많다. 저녁에 사병들이

족구를 하고 있다. 약 30분 가까이를 거쳐서 철조망을 끼고 걷는다.

또 배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묘지 주위에서 볼일을 나니 서서히 어둠이 몰려온다.

군부대 옆에 있는 망부석

다름재 내림길 부대 철조망에 걸린 시그널

 

공동묘지를 지나서 30여분간 부대 철조망과 함께하며 걸어오니 서서히

차량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은 축석령에서 광릉수목원과 봉선사를 진접으로

가는 지방도이다 

다름재(17:20)

비득재에서 1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다름재엔 98번 2차선 도로가 지나고,

 정상엔 삐노꼴레라는 이태리식 레스토랑이 있다. 평소 자주 다니던 길이었지만

이곳이 한북정맥 마루금이란 걸 이번에사 알았다. 이젠 완전히 어둠이 내린다.

그래도 맘이 놓인다. 목이말라서 보온병에서 따뜻한 물을 한모금 마시고 베낭에서

헤드레턴을 꺼내서 머리에 매고 삐노꼴레 레스토랑 우측을 끼고 산으로 오른다.

어두워서 그런지 시그널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수목원이 나오고 조금 지나니

인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가다 다시 마루금에 오르니 또다시 부대가 나타난다.

부대를 끼고 좌측으로 돌아 내리니 상당히 미끄러운 길이 나타난다.

상당히 조심스레 내려온다. 미끄럽고 혼자 걸으니 렌턴이 더 어두워 보인다.

30분만에 쓰러진 나무를 피해 도착한 곳이 귀락터널이다.

생긴지가 얼마되지 않은 도로로 의정부 신도시와 축석령을 잇는 도로로 포천가는

길을 상당히 단축시켜 주는 곳이다.

귀락터널(17:50)

귀락은 포천시 소흘면과 경계를 이루는 의정부시 자일동을 잇는 최북단(最北端) 마을로,

조선 영조(英祖) 중엽 박해문(朴海文)이라는 사람이 평안도 도사(平安道 都事)를

지내다 이 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산수가 아름다운 이 곳에서의

 삶을 늘 만족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그의 가노(家奴)들이 마을이름이 없어서

 불편함을 털어놓고 이름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자

"내가 이곳에 돌아와서(歸鄕) 여생을 즐겁게 지낸다(樂業)"라고 말하면서

마을이름을 귀락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이곳의 지형(地形)이 거북이가 떨어진 것과

 같아서 귀락(龜落)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귀락터널에서 축석령가는 길로 조금 올라가면 엄청나게 큰 포유모텔을 건너서 다시

산으로 오른다. 이곳은 엄청나게 큰 모텔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대형 갈비집들이

엄청나게 많다. 소위 먹고 마시는 곳이다. 사실 이곳에서 축석령까지 산을 탄다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마루금이 다 잘려져 있어 그냥 도로를 따라 내려가더라도 되는데

범여는 고집스럽게 산을 택한다. 이곳도 묘지가 천지이다. 이곳의 망자들은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 때문에 시끄러워 편히 쉬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드디어 축석고개 검문소가 보인다. 이곳에는 고랑에 낙엽이 너무 쌓여 무릎까지

푹 빠진다. 조심해서 길을 내려 인도에 도착하여 32여km의 긴 여정을 끝낸다.

축석령에 설치된 포천시의 조형물

축석령(축석삼거리 :18:10)

축석령은 천보산(天寶山) 기슭에 있는 고개로 포천군 소흘면(蔬屹面)과

 경계를 이루며 의정부시 북쪽 관문이 된다. 일명 2백리고개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를 분수령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이르므로 철원과 서울까지의

거리가 2백리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축석령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전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吳伯周)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귀성도호사(龜城都護使)로 있을 때 고향에

계신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벼슬을 버린채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약도 차도가 없어 하늘을

탓하며 탄식만 하고 있는데 꿈에서 산신령이 크게 꾸짖으며 "네 아비의 병은

석밀(石蜜)을 먹으면 낫는데 게으름만 피우고 있느냐"하고 호령하자

그는 석밀을 구하기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온 산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가 죽으면 부친을 누가 돌보단 말인가"하며 통곡하자

호랑이는 간데없고 바위만 남아 바위틈에서 석밀이 흘러 나왔다.

이에 부친의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가호를

 베풀어 바위를 호랑이로 변신시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범바위라고 불렸으며,

 그 후 오백주가 매년 이 바위에 와서 고사를 지내고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

 하여 축석령이라고도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