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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한북정맥(終)

한북정맥 제10구간 - 윗배다리재에서 장명산까지(최종구간)

by 범여(梵如) 2011. 2. 6.

○ 산행일자 : 2011, 02, 05○ 산행날씨 : 입춘이 자나서 그런지 날씨는 포근함. 짙은 안개로 인해 고봉산성 안내판

                   주위 조망은 꽝, 매캐한 냄새에다 하루종일 끼어서 목이 엄청 아픔  
○ 참석인원 : 나 홀로 
○ 산행거리 : G.P.S거리: 26.7km)  / 7시간 25분 소요         
○ 산행코스 : 윗배다리개-512탄약중대-51탄약대대 정문-영의정 묘소-공양왕릉-탄약대대 철조망 

                  식사동도로-광목장-현달산-舊문봉동재-문봉동재 삼거리-타워골프클럽-안골마을 입구

                  인선이앤티-예빛교회-통화사-9사단 후문 위병소-성동재-만경사-고봉산-장사바위

                  고봉정-중산고개 삼거리-금정굴-108봉-S.M mart 앞-탄현 큰마을 정문-경의선 철도

                 현대 I PARK 아파트-한울마을 아파트-경기인력개발원-한라비발디 아파트-월드메르디앙

                 1차 정문-교하 고인돌 산림욕장-들꽃 어린이집-56번 국도-성재암-교하중학교

                 핑고개-페기물처리장-우신레미콘-장명산-곡릉천   
○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일산동구,일산 서구 / 파주시 교하읍

                 

한 구간의 정맥길을 마무리한다는 설레임에 새벽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3일만에 또 다시 한북정맥길을 나선다. 1시간에 걸친 지하철을 타고 화정역에 도착하니

아침 7시경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순두부로 아침 식사를 하고 간식으로 도넛 2개와

오렌지 쥬스 2개를 사서 베낭에 넣고 윗배다리재에 도착하니 어제가 春分인 탓인지

며칠 사이에 날씨가 너무도 많이 풀렸다. 39번 국도 512 탄약중대 앞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한다. 사실 오늘구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철저하게 망가진 정맥길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이 구간에 산이라고 해봐야 3개이고 가장 높다는 고봉산이 209m이고

견달산이138.7m, 그리고 종착지인 장명산이 102m밖에 되질 않는다.

 

그렇다고 정맥꾼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대신에 아파트와 공장지대를 무수히

지났다. 이럴줄 알았으면 견적서를 베낭에 넣어와서 아파트 인테리어 공사나 수주하고

갈껄 ㅎㅎㅎ 참으로 정맥길이 망가져도 이렇게 망가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년 봄에 시작할 한남정맥길은 이보다 더할거라 생각하니 기가 찬다.

참으로 실망스럽지만 꼭 갔어야 했기에 갔고 실망스런 마음으로 한 구간을

마무리하고 장명산 山神에게 하직인사를 고하고 한북정맥을 마무리 하였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고양(高陽) 덕양구청(07:30)

고양이란 명칭이 처음 생긴것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 때이다.

고양의 윗녁인 고봉현(高峰縣), 아랫녁인 행주현이라고 불렸던

덕양현(德陽縣)이 있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고봉과 덕양의

한 글자씩 따서 고양현(高陽縣)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조선시대 전국 도로망의 중심이었던 九大路에

들던 관서로가 지나는 통로이며 한양에서 의주까지 잇는 관서로에는

12개의 큰 역관이 있어 조선과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머물며 쉬었는데

지금의 백제읍에 있던 백제관은 그 첫번째 있던 역관으로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룻밤을 묵고 이곳에서 예의를

갖추어 한양으로 들어 가도록 했으며 평안도 강계와 의주에서 오는

군사소식을 한양으로 알려주는 봉화둑이 있어 평안도와 한양으로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개포동 집에서 05:40분에 집을나와서 도곡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화정역에서

내려 김밥집에서 순두부로 아침식사를 하고 인근 도넛가계에서 점심으로 도넛2개를

사서 베낭에 넣고 버스를 타려고 덕양구청앞 버스 정류소에 오니 엄청나게 큰

덕양구청이 나타난다. 이곳 구의 재정에 비해 건물이 너무나 큰 느낌이다.

용인시, 성남시, 용산구청 등 지자체장들이 혈세를 마치 자기 지갑에서 돈빼듯이 하여

이렇게 쓰고 세금을 마구 걷어들여 민초들의 허리를 휘게한다. 정신 좀 차리시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산다는 우리 강남구청에서 와서 좀 배워야겠다.

건널목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버스가 지나가 버린다.

15분정도 기다리고 나서야 윗배다리재(39번 국도) 지나 부대앞 가는

85번 버스가 온다. 버스를 타니 손님은 달랑 2명뿐이다. 조금지나 탄약창 앞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한다.

윗배다리재에 있는 39번 국도에 있는 탄약창 부대(08:00)

옛날 이곳에 서해안에서 밀물이 들면 하천까지 차올랐는데 배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의 행정지역명은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이다.

주교(舟橋)란 배로 만든 다리라는 뜻. 공식적인 행정명이 '주교리'가 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곳에는 박 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셨던 배다리 막걸리 양조장이 있는데   양조장은 박물관

겸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화정역서 내려 85번 버스를 타고 제512탄약창 정문에 하차하여 좌측의

넓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하나은행 연수원을 지나니 도로가 끝이 나면서

탄약중대 정문이 나타난다. 다시 군사 시설물을 우회하여 몇 기의 무덤을

지나니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 안내판이 나온다.

 배다리 쌀막걸리는 지하 200m의 천연 암반수와 누룩과 청결미로 빚어 5대째

내려오는 전통의 맛과 현대인의 미각에 걸맞게 발전시켜 자연 발효에서 우러

나오는 청량감과 감칠맛을 더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곳 배다리 막걸리가 유명해진 것은 1966년 박 정희 대통령이 이 지역에 경호원만

대동하고 순시를 나왔다가  능곡 양조장이 운영하던 삼송리 실비옥에서 인연을

맺은 이후 1979년 서거하실 때까지 14년동안 대통령 전용 막걸리로 납품했다고 한다.  

이곳에 '대통령의 막걸리'를 빚은 술도가로 유명한 '능곡양조장'(현 배다리 술도가)이 있다.

배다리 막걸리는 1999년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부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애타게 찾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배다리 막걸리도 이젠 예쁜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

 변신하면서 값도 꽤 비싸졌다. 지난해 연말 한정식집에서 마셔봤는데 2잔밖에 안나오는

막걸리 한병에 15,000냥이라 일반적으로 마시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도로입구에서 51탄약대대 정문을 향하는 길은 군부대 차량이외에는 통행을

할 수 없어 차량은 없으나 가끔 운동하는 산책객을 만난다. 좌측에는 하나은행

연수원과 부대를 끼고 걷고 또 걷는다.

안개가 자욱히 낀 도로에 외로이 걷고 있는 범여

탄약대대 정문 도착하기 직전에 우회를 하여 산길로 접어든다.

접어들자마자 헬기장이 나타나고 다시 우측으로 접어드니

영의정을 지낸 분들을 비롯한 묘지 여러 기가 나타난다. 눈이

녹지 않아 아이젠을 끼지 않았다가 첫번째 호되게 한번 엎어진다.

엉덩이가 깨지는 느낌이다. 오른쪽 아픈 팔목에 통증이 심하게 온다   

51 탄약대대 정문(08:20)

영의정을 지내신 분의 묘소

공양왕릉묘(08:35)

영의정 묘소에서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베낭에서 아이젠을 꺼낼까 하다가

에이 그냥 가자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어차피 홀로가는 길이니 정맥길에서 300m쯤

공양왕릉 묘소들 들러보기로 하고 정맥길을 벗어난다.

 

고려 34대 왕이자 최후의 왕인 공양왕(1345-94)의 이름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었다. 그의 비(妃)는 창성군(昌城君) 진(稹)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대립이 격심했던 때다.

친명파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뒤에 창왕(昌王)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1389년에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공양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정몽주(鄭夢周)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舊勢力)에 이어 새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가,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1392년에 폐위를 당했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했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백두대간 마루금에 있는 삼척(三陟) 건의령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양왕릉이 두 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삼척시 근덕면(近德面) 궁촌리(宮村里)에 있는 것으로 1995년 9월 18일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의 묘지는 모두 4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2기는 왕자의 무덤,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으로 전해져 온다. 이처럼 두 곳이 거론되는 이유는 공양왕의 재위 시기가 조선 건국과 맞물려

있어 문헌이 빈약하므로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까닭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와 1855년(철종 6) 김구혁

(金九赫)이 쓴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삼척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척 궁촌(宮村)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그에 앞서 반드시 공양왕릉 앞에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적 제191호인 원당동의 공양왕릉은 왕과 왕비를 쌍릉(雙陵)형식으로 합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것이 진짜 공양왕릉인지 모른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제가 찾은 공양왕릉이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만, 사적 제191호로 기록되어 있다.

사적으로 지정되었다면, 당연히 문화재로서 보호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한데 나무로 울타리만 쳤을 뿐

 거의 방치된 상태이다. 왕비 손씨의 일가 무덤도 그곳에 있는데, 보기에 흉할 정도로 묘지가 파헤쳐져

있으며 풀이 없이 흙이 드러나 있다. 패자의 역사도 역사인데...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선다.

고려 공양왕릉의 묘소 안내도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이 담긴 연못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이 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이곳 견달산 아래에 도착했는데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웠다.

배고픔과 두려움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 불빛이

보여 찾아가보니 조그만 암자가 있어 유숙을 청하였다.

국교가 불교인 고려가 망하고 유교가 국교인 조선이 창건되었으니

암자에 머물기는 어렵고 하여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는데 스님들이 몰래 밥을 날라서 왕에게 공양을 올렸다하여 이곳

마을 이름이밥 절이라 하여 지금은 식사동(食寺洞)이라 불린다고 한다.

삽삽이넘들이 삽살개의 후예인가 아님 똥개인가...왕릉을 들렸다가 논가운데로 지나오는데

개쉬끼 서너마리가 꼬리를 치며 쫄래쫄래 산꾼을 따라온다 

공양왕릉에서 마루금으로 복귀하니 세종대왕의 왕자였던 수천군의 묘소를

비롯한 여러기의 묘지를 지나니 다시 탄약대대의 철조망이 나타난다. 부대규모가

엄청난 지 거의 한시간 가까이를 돌아가다 마지막 초소에 가기전에 우측 산속으로

들어가니 위장막을 뒤집어 쓰고 있는 세 동의 하우스가 나타나는데 삼애교회인 세 번째

하우스가 나타난다. 삼애교회 주차장 좌측으로 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좌측으로 묘역이 나타나고

전방은 탄약창 부대 초소가 보인다. 펜스를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다 내리막 능선을 내려선다.

2차선 도로(09:15)

이 곳은 고양시 식사동 지역을 통과하는 2차선 도로인데 교통량은 그리 많지 않으나

고개는 상당히 가파르다  좌측으로 고양제일화물 지게차 966-2100’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좌측으로 도로를 따르다가 우측 소로로 들어서서 광목장으로 향하는 것도 편한 방법이겠지만,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돌아 마루금을 밟기로 한다. 오르막능선을 한차례 오르자 묘지 1기가

자리하고 있다. 완만한 능선을 지나고 내리막 능선을 내려서서 안부에 도착하고 다시 임도가 나타난다.

地,水,火,風을 실천하는 소나무

광목장 입구(09:20)

한북정맥 길은 광목장 정문 앞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사격시 입산금지라고 적힌

 안내판 뒤의 직진으로 이어진다. 임도를  따라 진행하여 광목장 후문을 지나고 계속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한다. 우측으로 목장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가축은 한마리도

모이지 않고 그렀다고 구제역에 대한 조치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큰 목장에 구제역의 피해가 없기를 기원한다. 

목장옆 임도와 헤어져 현달산 오름길의 편안한 황토길을 오르는데 좌측에 강릉 김씨 망향제단’이 있다.

이 묘지의 후손들은 아마 호남분인가보다. 묘지의 형태로 보아 묘지뒤에 土地之神 祭位라는

조그만 비석이 하나 더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없고 호남정맥길 옥정호 근처 가는정이

마을부근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묘지 풍습이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오르막 능선을 올라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는 지도상132m봉을 통과한다

오르막 능선을 올라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는 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를 몇 개 지나며

 오르막 능선을 오르자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 곳은 현달산 정상 바로 밑의 삼거리이고 정맥 길은 11시 방향으로 이어진다.

직진하여 현달산(지도상 견달산 138.7m)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삼각점(서울407 1994재설, 내용 없음)이 두 개가 설치되어 있고

봉우리 끝에는 지적삼각점 인식표가 자리하고 있다

견달산(見達山, 138.7m) 정상에서 셀카로 인증샷(09:35)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과 고봉동의 경계를 이루며 한북정맥 산줄기에 걸쳐있는 산이다.
정맥 종주꾼들에게는 '현달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본달', '번달'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풍수지리상 산봉우리가 마치 중국을 향해 절하는 형상이라해서 역적산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중국 황제가

세숫대야에 비춰져 그 기운이중국까지 도달했다하여 견달산이라 불렀으며, 하늘과 잘 통하는 산이라해서

고양시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높이가 야트막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모양새가 좋다.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조망이 괜찮아 고양시 일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는

짙은 운무로 인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것이 안타깝다.
삼각점이 3개 설치되어 있는데 서울시, 고양시, 군부대 등에서 각기 따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군사요충지로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기도 한 지역으로
지금도 산 곳곳에 군사시설들이 있다

 

현달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산높이도 동네 야산 수준이라 외지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지나갈 산이다. 산 정상에는 벙커 하나만 덩그러니 있고 억새만 어지러워 관리가

전혀 안되어 있다. 베낭위에 카메라를 얹어놓고 셀카로 인증샷을 하나 찍고 서둘러 문봉동재로 향한다.

하산길에 갈참 숲은 참으로 고즈늑히 좋은데 산 아래는 공장지대에서 나오는 매캐한 냄새로

인하여 머리가 띵하니 아프다.

문봉동재 삼거리(09:45)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과 덕양구 식사동을 잇는 문봉동재는 그 옆에 임도 수준의 舊  문봉동재가 있고

새로 생긴 문봉동재가 있다. 사실 이곳부터는 한북정맥길을 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 문봉동재는 공장지대가 밀집되어 있고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정맥길이 망가지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곳 고양시는 누리길이니 둘레길이니 만들면서 정맥길을

철저히 망가뜨리는 이유가 뭘까?  다음 선거를 위해 홍보용만 중요한가... 아님 역사의 무지인가

나중에 우리 후손들에게 뭐라 설명을 해야할까. 우리들의 역사적 인식부터 바뀌야만  될것 같다.

이웃에 있는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2년전 중국 연길, 용정, 도문,심양, 백두산.

여행을 갔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우리 고구려의 역사를 철저히 중국 역사로 바꾸는네

우리의 현실은 뭔가? 입시를 줄여준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이 현실이

이런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최소한 역사적 소명만 있드라도 정맥길이 이렇게 망가지진 않았을텐데.

문봉동재에서 계속해서 직진하여 도로를 걷는다. 조금 지나니 타워골프클럽이라는

인도어 골프 연습장이 나온다. 도로에는 커다란 화물차가 다녀서 위험하기 그지없다

타워골프 연습장에는 명절 연휴라 그런지 연습장에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마주오는 차를 피하면서 계속해서 좁은 2차선 도로를 걷는게 너무나 싫다.

그러나 어쩌랴 이 길을 가지 않으면 한북정맥을 마무리 할 수 없기에...

좌측에 마주치는 폐기물 처리업체인 인선이엔티라는 업체는 얼마나 큰 지

가도가도 끝이없다.  

안골마을 입구(09:50)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걷는다. 다리가 아파온다. 아무래도 범여는 아스팔트 체질이 아닌가보다

예빛교회 앞(10:05)

문봉동재 삼거리에서 20분동안 도로를 걷다보니 지나가는 차량 때문인지 아닌

오늘 짙은 안개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목이 상당히 아파온다. 하는 수 없어 베낭에서

마스크를 꺼내쓰고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이곳 예빛교회 앞에서 우측 임도로 접어든다 

임도에 접어드니 반가운 시그널이 정맥길임을 알려준다. 몇기의 묘지를 지나고

우측에는 부대가 있고 주위에서 버려진 폐기물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눈쌀이 찌푸려진다. 좌측에는 제법 잘지어진 민가들도 보인다.

조금 지나니 백마부대로 알려진 9사단 사령부의 철조망 담장을 만난다.

임도 안부에 내려서니 사단 사령부가 막혀있어 부득히 우측에 있는

마을로 접어들어야만 한다. 

안부에 내려서니 좌측에 폐 오토바이 처리업체인듯 한 S-BIKE라는 건물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들어서면 그 예전에 자연부락인듯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도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주위에 사이딩 패널로 지어진 집사이로 그 옛날 호젓한

한옥 한채로 참으로 정겹게만 보인다. 고향의 향수처럼 느끼진다.

거기에다가 지붕밑에 널려있는 씨래기가 정겹기만 하다. 울 엄니가 끓여주시던

그 국이 참으로 맛이 있었는데... 갑자기 잊어버린 고향생각이 난다.

한옥에서 내려서니 가정집처럼 꾸며진 통화사라는 사찰이 있고 바로 아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주) 신용사라는 간판을 지나면 전원단지인듯한 택지조성작업이 한창이다.

똑바로 직진하면 9사단 사령부 후문 위병소가 나온다

9사단 사령부(백마부대) 후문 위병소(10:25)

思之思之 天神通知 밝은 마음·웃는 얼굴·활기찬 모습라고 써있는 바리게이트가 처져있는

9사단 보병 사령부 후문 위병소가 나타난다. 범여의 바로 위인 5번째 형이 이곳에서 30년을 넘게 근무하다가

2009년 9월에 사단 주임원사로 명예롭게 정년퇴직 하였다. 가족. 형제들도 모르고 오직 군만을 생각하며

인생을 전부 다 바친 형이 자랑스럽다. 이젠 모든걸 잊어버리고 이젠 좀 편안하게 살았으면 한다.

오늘 장명산으로 졸업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다고 하니 빨리 보고싶다.

나 역시 이곳 9사단 신병교육대 늘푸른 법당에서 3년간 군포교 봉사활동을 경험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후문 위병소에서 우측으로 빠져 계속해서 철책선을 걷는다.

 

백마부대에 좀 알아보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제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완강히 대항하여 중공군 10,000여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그중 1만 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후문 위병소에서 10분정도 눈이 쌓여 미끄러운 철책선을 끼고 오르니 더운 날씨탓인지

옷이 젖는다. 겉옷을 벗고 폴리스 자켓 하나만 걸쳤는데 속옷까지 젖어온다.

어제가 입춘이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기온이 오르니 조금은 불편하다.

망루처럼 높은곳에 있는 초소에서 우측 산속으로 접어든다. 부드러운 길을

조금 걸으니 성동재가 나타난다. 시끄러운 차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성동고개(10:30)

고양시 일산서구 성석동과 중산동을 잇는 고개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성동고개'를 잘 모른다.

'잣골고개' 또는 '성석동고개'로 말해야 알아듣는다.

고봉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해 출입금지 지역으로 우회해야 된다. 

군부대로 향하는 가파른 시멘트도로를 따르다가 우측길로 들어 만경사로 올라간다.  

고봉산 안내도

만경사 대웅전

만경사(10:45)

만경사 경내에 들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콘크리트 임도로 해서 고봉산으로 오른다

이 곳은 등산길이라기 보다 산책길이라 표현해야 맞을 듯 싶다.

우리 동네에 있는 대모산과 비슷하다. 고봉산 정상에는 군 주요시설이 차지하고 있어 

영천사 이정표가 서있는 곳을 조금 지나 삼거리에서 포장도로와 헤어지고 우측 등산로로 접어든다.

벙커가 있는 곳을 지나고 산책로 같은 등산로를 따라 계속 진행을 한다. 곳곳에 군사시설이 있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자 묘1기가 나타나고 철탑도 잠시 보인다. 오르막 능선을 오르고

이정표(수연약수터 0.2km →)가 서있는 곳에서 직진하여 오르막 능선을 올라 

 이정표(←중산배수지 1.24km →만경사 0.45km ↓수연약수터 0.4km)가 서있고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장사바위 쉼터에 도착한다.

일산의 진산 고봉산(高峰山:10:50) 

 고양군지(高陽郡地)에 의하면 고양시가 개백현으로 불리던 백제시대에

이 지역에 한(韓)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이 부자한테는 한주라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한주가 길에서 옷차림은 남루하나 비범해 보이는 

청년을 만나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다 그 청년이 길을 떠나 헤어지게

되었는데 청년이 길을 떠나면서 자신은 고구려의 왕자이며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을 수복하기 위해 정탐하러 왔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사를 끌고 다시와

아내로 맞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했다.  그가 바로 519년에 왕위에 안장왕이다.

그러던 중 개백현의 태수가 한주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했으나 한주는 거절했다.

한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신하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 때 을밀(乙密)이라는 장수가 나서서 개백현을 되찾고 한주를 구해

올 터이니 이기고 돌아오면 왕의 여동생인 공주와 혼인하게 해달라고 했다.

안장왕은 쾌히 승낙하고 을밀은 용감한 병사 수십명을 광대패로 변장시켜 백제

땅 개벽현으로 잡입시켰다.

태수는 자신의 생일에 맞쳐 한주를 옥에서 끌어내어 재차 청혼을 했다.

이때 을밀이 이끄는  광대패들이 생일하객으로 참석했다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백제군과 광대패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 틈을 타 한주는 관아에서 빠져나와  고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이 신호를 보고 안장왕이 개백현을 공격하여 옛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내용이 흡사 춘향전과 비슷하다.  그래서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가 춘향전의 원형이라는

설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 부식은  한씨 미녀가 높은 산 위에서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이 했다고 해서 고봉(高峰)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봉산성 안내판

장사바위(11:00)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많이 올라와 있고 운동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이 바위를 장사바위라고 하나 보다. 이른 아침에 식사를 한 탓인지 배가 고파온다.

벤치에 앉아서 베낭에서 도넛 2개와 쥬스로 허기를 때운다. 그러면서 자료를 정리하니

나이드신 분이 다가와서 궁금한 듯 이것 저것을 물어본다. 그러면서 힘들게 왠 큰

베낭을 메고 다니냐면서 안쓰러운 듯 이야기를 한다.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대꾸도 안하고 다시 베낭을 메고 좌측의 등산로 향해 내려간다. 음지라 길이 미끄럽다

이곳 고봉산이 사유지인 모양이다. 철조망을 쳐놨다

128봉(11:15)

장사바위에서 좌측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니 등산로가 여러 군데다.

등산객이 엄청나게 많고 거기에다 라디오를 크게 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신경에 거슬린다. 우측 아래에 신병교육대에서 사격연습을 하는지

총성이 요란하다. 잠시 후 128봉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군부대에서 설치한

군사용 안테나가 2개가 서 있고 엉성한 군초소 한곳도 있다.

편안한 걸음으로 하산하니 산 정상이 아닌 중턱에 화려하게 지어놓은

高峰停이 나타나고 넓게 확장된 고봉 삼거리가 나타난다.

고봉정

고봉산 삼거리(중산고개:11:25)

일산과 1번 국도를 연결하는 98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고봉정에서 내려오니 도시화로 인해 도로가 넓게 확장되어 있어

방향감각이 없다. S.K 주유소 앞의 황단보도를 건너서 좌측에 금정굴이

있는 야트막 능선으로 오른다. 100m 정도 이르니 한이 서린 금정굴 도착한다.

금정굴 가는 길

금정굴 양민학살의 진실를을 알리는 내용

금정굴(11:30)

금정굴은 6.25당시 밀고 밀리는 교전중에  고양일대가 수복되면서 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곳이다.  가해자들은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사용되다

해방 후 폐금광으로 버려져 있던 금정굴에서 부역자란 명목으로 처단했다.

적극적인 좌익세력들은 이미 인민군을 따라 월북을 해버렸고 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은

월북자들의 가족들이나 친척, 그리고 소극적인 부역자나 개인감정으로 빨갱이로

몰린 자들이다. 친. 인척들의 주검을 확인하지 못하고 평생을 빨갱이 가족이란

오명을 쓰고 천추의 한으로 살아온 유가족들이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1995년 1차에 발굴된 유골을 감정한 결과 사망자가 최소 153명에

이른다고 한다.

요즘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곳에 죽산 조 봉암 선생을 비롯한 좌익이란 명목으로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을 명예회복이 복권되는데 이곳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명에회복을 철저한 조사로 이들의 恨도 규명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금정굴의 실상을 보고나니 후손들의 맘을 이해할 것 같다. 조속한 해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염원하면서 다시 길을 걷는다. 우측에 있는 골프 연습장의 비거리 끝이

300y라고 적혀있다. 대단한 거리다. 아마추어들은 아마 끝까지 가는 사람이 별로 없을것 같다.

다시 우측의 부대 철책선을 따라 도착한 곳이 108봉이다.

108봉에서 우측으로 가면 이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황룡산이 나타난다

108봉 정상(11:40)

108봉 정상 아래는 거대한 벙커가 자리잡고 있고 여러가지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우측에는 묘지들이 잔뜩 자리잡고 있다. 무연고 묘지들이 많은지 고양시에서

아크릴로 표식해놓고 있다. 묘지 좌측의 등로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니 단풍농원이란 음식점이 나타나고 좌측에 호곡중학교를 끼고 걸으니

탄현동을 가로 지르는 도로가 나타난다  

S.M mart에서 좌측길로 접어들면 천주교 탄현성당이 나타나고 탄현동 큰마을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다. 큰마을이란 이름답게 단지가 얼마나 큰지 단지안에

버스 정류소가 2군데나 있다.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상가가 나타나고 거기에서

좌측으로 나가면 큰마을 아파트 단지 정문이 나타나고 거기서 우회전 한다.

이곳에 장명산까지 걷는 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맥길을 걷는게 아니라 아예 아파트와 상가길 순례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을듯 싶다. 철저하게 정맥길을 망가져 있다. 

탄현 큰마을 아파트 정문(12:00)

큰마을 아파트 정문에서 우회전하면 경의선을 건너야 하는 큰마을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일산가구단지를 건너야 하는 서울-금촌간을 잇는 도로가 나온다.

서울-금촌간을 잇는 도로(12:05)

횡단도로를 건너 일산가구단지 1문이라고 표시한 우측으로 접어든다.

크로바 사무용 가구에서 우회전 한다

 

이정표 방향으로 우회전

한소망교회앞(12:35)

가구 골목 끝골목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고양덕이지구 택지개발로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온 천지가 아파트, 교회, 상가를 짓느라 정맥길은 아예없다.

한소망 교회앞에 오니 아예 길이 없다. 겨우 찾아서 현대 아이파크 101동에서

조금 지나 야산으로 가서 쌍동이 교회를 통과하여 교하로 가는 도로를 걷느니

L.H에서 짓고 있는 909동을 지나 한울마을 앞 도로를 따라 걷는다.

(주의) 이곳에서 길 찾기가 힘이든다. 그러나 아이파크 경비실이나  부동산에는 묻지 마시길

절대로 제대로 안 가르쳐 줌(20분간 알바함)

쌍둥이 교회

이곳에는 신도시 지역에는 엄청나게 큰 교회가 많이 들어선다.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이 단연 돋보인다. 어제 저녁에 故 이태석 신부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참으로 오랫만에 눈물을 흘리면서 낮은 사랑이 뭣인지

알았다. 그런데 요즘 그런 분들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종교인은 많으나

진정한 성직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성경에는 부자들이 천국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거늘... 저 큰 성전을 짓기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한번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이 진정 바라는 거 아닐까?

최근에 소망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보면서 과연 요즘 목사님들이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하고 있나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시길... 그리고 신도들도 목사를 믿지 말고 성경말씀을 믿어시길... 

신설된 도로를 건너서 한울마을을 끼고 새로 조성된 광장을 끼고 계속 직진...

셀프 서비스 주유소를 지나서 계속해서 직진

이곳부터는 고양시 덕이지구를 지나니 파주시 교하읍 운정택지개발지구다

이곳에도 온통 파헤쳐서 아파트 짓고 상가짓고 도로내고...ㅉㅉㅉ

개발만이 능사가 아닐터인데.

경기 인력개발원(13:30)

운정지구 한라 비발디 파크 정문 앞(13:35)

약 5분간 계속 직진하면 비발디 아파트를 지나면 빨간 아치형의 다리가 나온다. 우측에는

아직도 아파트를 지으려는지 빈땅들이 많이 있다.

도로를 지나면서 저 멀리 현대 아파트가 보이고 현대 아파트 112동과 113동이 보이면

좌측으로 빠지면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101동이 보이고 정문이 나타난다.

파주는 공순영릉, 장릉, 소령원, 유길원 등 6곳의 조선왕 가능원이 있고 윤관 장군,

황희정승,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허준 등 유명 역사 우인들의 묘소가 있는

음택명당으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연인천하로 유명한 중종비 문정황후

친정집안의 묘소(아버지 윤 지임, 형제들인 윤 원형, 윤 원로 악명을 떨쳤던

정 난정)가 있는 파평 윤씨 선산도 있고 조카 정조를 괴롭힌 악녀 와환옹주와

요절한 그의 남편 정치달의 묘소도 파주에 있다.

지금은 음택명당이 아닌 양택명당으로 각광받고 있다. 광해군이 도읍지를

파주(옛 지명 교하)로 옮기려고 했을 정도로 파주는 사람살기 좋은 곳이다

월드 메르디앙 정문(13:50)

월드메르디앙 아파트를 끼고 우회전을 하면 다시 신설도로와 비어있는 택지가

나오고 다시 월드 메르디앙 2차 아파트가 나온다. 

월드메르디앙 2차 204동앞(14:00)

이곳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월드메르디앙 204동이 보이고 이곳에서 교하읍 고인돌 산림욕장으로 들어선다

교하읍 고인돌 산림욕장 안내도

 파평 윤씨 묘소 가는 길이다 . 여기서 좌측으로 직진을 한다. 이곳 파주는 파평 윤씨의

영향력이 많이 미치는 곳이다. 이 분들은 잉어를 조상이라 여기어 절대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

경기도 서북단에 위치한 북동쪽에 양주군 서쪽에 한강을 경계로 김포군,남쪽으로 고양군에

  접하고 북서쪽에는 군사분계선인 최전선을 접하고 면적 676,89Km2 인구 181,161명(1989년

  현재) 4읍,11면.125개리로 군청 소재 지 금촌읍 아동리이다.파주군은 동쪽 연천에서부터

  마식령 산맥(馬息嶺山 脈)이북서쪽에는 임진강이 북동쪽에는 경기 5악인 감악산(紺嶽山,675m)

  등 노고산401,금병산293,파평산496,봉서산216,월롱산229,(감악산,북악산,송악 산,관악산,

  심악산)감악사 산중에 감악사(紺嶽寺)가 있었으나 폐사되고 객현리 웃배문리마을에서 500m

  거리에 절터만 ?아 있고 또한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 仁貴)를 모시는 감악사 였으나 산정에

  감악비(일명 설인귀비)가 남아있다.파평면 눌로리 있는산 미라산(彌羅山). 군의 주산(主山)

  으로.산꼭데기에는 파평윤씨의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이 무예를 닦은치마대(馳馬臺)가있고.

  중턱에 금강대사의 불당이 있고 미타사(彌陀寺.일명 金剛寺)가 있다.

들꽃 유원지(14:10)

산림욕장 날머리에 있는 유치원 이름이 들꽃 유치원이라 참으로 아름답다.

56번 국도(14:15)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와 와동리를 잇는 56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에 휴전선에 가까운 전방이라 참으로 오지였는데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 어디가 어딘지 모를정도 구분이 안 된다.

정맥 마루금이 무참히 망가져 도로가 나있어 부득히 도로의 지하차도를

건너니 성제암이란 비석이 서있고  파평윤씨 부원군 묘지로 가는 안내판이

서있다.  근데 저 쪽에서 정맥 산꾼 한명이 오고 있다. 외로운 길에 울매나

반가운지... 상대편도 나를 보고 엄청 반가워 한다. 자세히 보니 지난해 3월

낙남정맥 첫구간인 김해 매리에서 영운리 고개 구간에 같이 동행한 산꾼이다.

상대편도 나를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가워 한다. 

파주 장단 콩에 대한 유래

파주 장단콩은 쌀, 인삼과 함께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하였던 장단 삼백의 하나였다.

파주, 장단지역은 1913년 대한민국 최초의 콩 장려품종으로 선발된 장단백목을

탄생시킨 콩의 본고장이다. 민간인 출입통제지역(DMZ)의 맑은 청정 자연환경의

큰 일교차와 마사토(참흙)에서 자라는 장단콩은 다른 지역 콩에 비해 유기질은

두배 향암성분인 이소플라본은 50%정도 ?량이 높다고 한다.

파주, 장단지역은 청정지역에서 재배될 뿐만 아니라 생산, 유통에 이르기까지

생산 이력제로 운영되고 있어 그 품질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

성재암(14:25)

성재암 가는 길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279번지에 위치한성재암(聖在菴)은 조선왕조 세조(재위-1455~1468) 비 정희왕후

윤씨가 창건한 가람이다. 무진(1448)년 비의 친정아버지 파평부원군(윤번)이 졸하고 병자(1456)년 친정어머니

흥령부대부인 인천이씨가 졸하매 애통한 나머지 의경세자(성종의 생부, 추존 덕종대왕)을 보내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36칸의 가람을 창건하여 성재암이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왕비께서 목불을 조성하여 봉안하시고 수행하는 스님 20여분을 상주케 하였다.

파평윤씨 종중은 경내에 파평부원군 내외분의 재실인 본방능재를 짓고 족보편찬 사업도 하였던 곳이다.

중종(재위-1506~1544) 29년 갑오(1534)년 왕비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이 졸하매

수행하는 스님을 더 많이 상주케 하므로 더 번창하다가 을축(1565)년 문정왕후가 붕어하시고 숭유억불책과

왜란·호란 등으로 점점 쇠락하다가 왜정말기 끝까지 수호하던 강덕홍 스님이 광탄 보광사 수구암으로 목불상을

옮겨 모신 후 사실상 폐찰이 되다시피 되고 6.25사변으로 남은 건물마저 헐려진 것을 1994년 파평윤씨

교하종중에서 현 위치 부지 500평을 시주하여 성재암을 중건하고 1996년 수구암에서 목불상을 환봉하여

모시고 후일 또 파평윤씨교하종중에서 2000여평의 땅을 사용 승락하니 금일에 이르러서야 옛 가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게된 것이다.경내에는 약 550년된 성재정이라는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파주 당하리및 다율리 지석묘군

교하중학교 입구(14:35)

지석묘군에서 계속 직진하여 나오니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없는 옛 교하중학교가

나오고 군부대 담벼락을 지나면서 핑고개가 나온다. 우리 형이 1976년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옛날에 면회를 한번 온적이 있는 곳이라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핑고개 도로에 나오니

형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너무나도 고맙기만 하다...

핑고개 옆 (주) 미진 봉투사 건물

옛날에 상상도 못했던 곳에서 공장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아슬아슬하게 우측 아카시아

나무를 헤치고 마루금을 이어간다. 이곳이 조선조 광해군 때 도읍지가 될 뻔했던 교하이다.

 

수도권 서북부 거점도시’,‘생태도시’ 파주 교하지구 개발이 한창이다.

교하(交河)란 한강과 임진강 두 강이 교차한다는 뜻에서 나온 땅 이름이다.

교하는 광해군 당시(17세기 초) 조정과 온 나라를 몇 년간 시끄럽게 한 곳이었다.

또 1990년 초에는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가 통일 후 수도 후보지로 언급하면서 유명세를 탄 곳이다.

 

1612년(광해군 4) 8월26일, 6품 벼슬 이의신(李懿信)이 한 장의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 후 조정 대신들이 이의신을 반박하는 글 속에 그 편린이 조금씩 드러난다.

이를 모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 조정의 관리들이 분당하는 것,

한양 도성 주변 산들이 벌거벗은 것, 이 모두가 도성의 왕기(旺氣)가 쇠퇴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도성을 교하현에 세워 순행(巡幸)을 해야 합니다.

교하 땅은 한양과 개성의 중간 지점으로서 동으로는 멀리 삼각산의 영산이 병풍같이 보이고, 북으로는

송악산이 웅장하게 서 있으며, 남으로는 옥야천리(沃野千里)가 기름지게 펼쳐 있어 오곡이 풍성하고,

서로는 한강이 넓게 흘러 배가 다니기에 좋은 땅입니다.” 산과 물이 얼싸안고 달리는 吉地 광해군은

이의신의 상소를 예조에 내려 의논토록 했다.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가당치도 않은 내용으로

혹세무민한다며 이의신의 처벌을 주장했다.

 

홍문관과 사간원도 지속적으로 이의신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애당초 이의신을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파문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광해군 6년(1614)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이의신을 처벌하자는 상소 횟수가 100회를 넘었을 정도였다.

3일에 한 번꼴로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가 이어졌으니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결국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교하 천도는 이뤄지지 못한다. 17세기와 20세기 두 풍수학자가 도읍지로

언급한 교하는 과연 풍수적으로 그만한 땅일까? 

 

당시 조정 대신들은 “교하는 하나의 작은 현(縣)인 데다 포구에 치우쳐 있어 성을 쌓고 부서를

만들기에 결코 적절한 곳이 아니다”라고 했고, 영의정 이덕형은 “교하는 습한 저지대로서 도읍을

세우기에 부적합하다”고 했다. 

 

철저히 망가지고 있는 장명산

핑고개에서 미진봉투사 옆 능선을 타고 한북정맥을 한다는 마무리를 벅찬 감동을

안고 능선에 올라서니 정말 기가 콱막히는 기분이다. 폐기물 처리장과  골재 채취장

그리고 레미콘 공장이 장명산을 거의 다 갉아먹고 있다

참으로 허망하다. 어떻게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여기에 폐기물 처리장을

허가해 준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참으로 말도 되지 않은 자들...

아! 장명산아 미안하구나.

허탈감 분노를 가득안고 그래도 가야 하기에 우신 레미콘 옆을 지나 절반이상 날아가버린

급경사의 절개지를 타고 장명산 정상에 오른다. 분노가 치미는 마음으로...

장명산(長命山, 102m:15:05)
파주시 교하읍 오도리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얕으막하게 솟았지만 교하지역에서는 주산으로 취급 받는다.
한북정맥이 끝나는 마지막 지점에 자리잡고 있기도 해 유명세도 톡톡하다.

 

정상의 조망도 제법이다.
북쪽에는 곡릉천이 서류하여 한강유역으로 흘러들고,
곡릉천 너머 탄현일대의 들판이 시원스럽다. 개성 송악산까지 가깝게 조망되는 곳이다.

한북정맥을 마무리하다.

2010년 8월 4일 강원도 화천군 수피령에서 시작한 한북정맥길... 도상거리 182km를 9번에

걸쳐서 마무리를 한다. 이곳은 휴일이나 명절무렵 그리고 5번째 일요일에만 혼자서 틈틈히

하였기에 더더욱 애착이 간다. 혼자 하기에 더 많은 공부를 해야했다.

사실 한북정맥은 노고산 이후 구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구간을 마무리 하면서

너무나 허망하고 실망스럽다. 두번 다시오고 않은 코스이다.  낮은 구릉성 맥길이기에

현대화와 개발이란 명분하에 철저히 망가졌고, 지역상 군부대가 요소요소를 차지하고

있어서 더더욱 망가져 있다. 부디 더 이상은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장명산을 더 이상 볼 수 없지나 않을 안타까움에 마지막 타종으로

한북정맥길 마무리를 고한다. 참으로 시원하고 섭섭하다. 그리고 안타깝다.

곡릉천(15:25)

가둔천(佳鈍川)이라고도 한다. 길이 53.75km.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챌봉(51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고양시 고봉동, 파주시 조리면, 금촌읍 일대를 지나 파주시
탄현면 송촌리 북쪽에서 한강 하류 동쪽으로 흘러든다.
 
이 강의 중류지역인 고양 부근은 심천(深川), 조리면 부근은 봉일천(奉日川),
금촌읍 남쪽은 금성진(金城津), 하류인 교하부근은 방천(防川)이라 부른다.
 
조선 제8대 예종의 추존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이 조리면에 들어선 후,
공릉천(恭陵川)으로 부른 것이 곡릉천으로 변하면서 한자 표기도 바뀌어진 듯하다.
이 강유역에는 봉일천의 공릉을 비롯, 공양왕릉, 서삼릉(西三陵:禧陵·孝陵·睿陵),
일영의 온릉(溫陵), 탄현면의 장릉(長陵), 벽제의 최영장군묘 등 많은 능묘가 산재해 있다.
그리고 서울 근교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송추유원지와 일영유원지가 있어 도시인들의
휴식처를 제공해 준다. 이 강유역의 주산물인 쌀은 예로부터 교하미(交河米)라
하여 여주미·이천미에 비견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였다. 특히 강에서 잡은 게는
궁중에 올리던 진상품이었다. 이곳의 강변을 따라 남과 북을 이어주는 통일로(統一路)가
개설되어 있으며, 이 도로는 예로부터 서울-평양 간을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장명산에 내려와 곡릉천을 바라본다. 저 멀리 임진강과 개성 송악산이 아련히 보인다.
꼭 한반도 지도모양을 한 곡릉천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는다.
통일이 되면 북한지역의 백두대간길을 걷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도로에 내려오니 형님이 꽃다발을 건내주면서 축하를 해준다.
그리고 형님 차를 타고 자기집으로 가서 점심을 겸한 술한잔을 하고 광화문으로 오는 차를 타고 깊은 잠에 빠진다...
황홀한 꿈을 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