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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한북정맥(終)

한북정맥 제1구간 - 말고개에서 수피령까지

by 범여(梵如) 2014. 10. 13.

☞ 산행일자: 2014년 11월 11일

☞ 산행날씨: 맑고 청명한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12.8km / 5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안내 산악회 따라

☞ 산행코스: 말고개-대성산 동로-대성산 서로-대성산-대성산 남로-1,042봉-수피령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 철원군 금남면

 

늘 가슴속에서 응어리처럼 품고 있었던 코스... 가고 싶었지만 갈 수없는 등로를맨 처음 걸어 본다는 설레임.
마치 첫사랑처럼...이곳은 북한땅 추가령에서 시작하여 파주 장명산까지 이어지는 한강 북쪽의 맥길이지만
남.북이 대치하는 분단의 아픔 때문에 산꾼들은 한북정맥 첫구간을 수피령에서 시작했다.나 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 맨 처음으로 화천군에서 이 지역을 관할하는 15사단의 협조를 받아서 대성산 구간을 개방한다기에 
신원조회를 거친 다음에 산행 허가를 받는다.
물론 대성산 구간을 1년에 몇번씩 간간히 개방을 했지만 한북정맥 정코스는 처음이란다

 

한북정맥과 대성산(펌)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백두대간 추가령(752m)의 백산(1,120m)에서 분기하여, 백암산(1111m),

장암산(1,052m)을 거쳐 남하 하다가 적근산(1073m)에 이르러 남한 땅으로 넘어와 대성산(1174m),

수피령(740m), 광덕산(1046m), 백운산(907m), 국망봉을 거쳐,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장명산까지

이어지는 약 24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북한 땅에 속하는 백산, 백암산, 장암산 등은 통일이나 되어야 갈 수 있겠지만, 남한 땅으로 들어온

적근산, 대성산도 군사분계선 안에 있어 군의 허가를 받기 전에는 산행을 하 수 없는 곳이다.

 

화천군청(09:20)

양재역에서 06시 40분에 안내 산악회의 버스에서 올라 서울~춘천간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강원도로 향하는 단풍 행락객의 인파로 버스는 도로에서 꼼짝을 못하다가 다시 국도를

빠져나와 청평, 가평을 거쳐서 집결지인 화천군청에 도착하니 09시 20분이다

이곳에서 인원 파악을 거쳐서 민통선 안쪽에 있는 말고개로 향하는데 또다시 군부대의

통제속에 인원 파악을 하고 말머리로 향하는데 이곳의 날씨는 꽤나 춥다 

말고개(馬峴:690m10:15)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와 화천군 상서면 봉오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에는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와 추모비와 추모비가 있다

말고개의 지명유래는  옛날에 말을 몰고 가던 사람이 하도 고개가 높아서

쉬어 간다고 해서 말고개(馬峴)이라고 부르는데 6.25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말고개는 한중 지맥과 가까운 서석면 내촌천으로 서류하다 두촌면 철정에서 장남천으로 합류해

덩치를 한껏 키운 뒤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총 143㎞에 이르는 홍천강 서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전쟁 영화를 보면 북한군 탱크를 맨 몸으로 막아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말고개’ 전투가 바로 그런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면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제2·7사단으로 하여금

춘천·홍천을 통과한 후 이천·수원선으로 우회, 국군의 주력을 차단해 궤멸시킨다는

이른바 초기 승부를 노린‘3일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북한군 의도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지만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6사단의 강력한 방어로 초기 전투에서 차질을 빚었다.

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6월 24일 장병의 외출·외박·휴가를 전면 통제하고, 철저히

방어준비를 함으로써 6월 28일까지 방어선을 지켜내는 투혼을 보였다.

6사단은 춘천에 7연대, 홍천 북동쪽에 2연대를 배치하고, 19연대를 예비로

하여 전방을 방어함으로써 북한군의 선제타격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7연대 57㎜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이었던 심일 소위는 6월 25일 오후 소양강·북한강이

합류하는 옥산포(현재 춘천시 사농동) 도로변 소나무 숲에서 매복해 있다가 공격하는 적 2사단

SU - 76 자주포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지면서 육탄 공격을 감행, 적 자주포 3문을

파괴하는 큰 전과를 세우고 춘천전투의 신화를 창조하며 ‘자주포 킬러’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춘천 방어는 물론 그 사이 춘천주민들이 무사히 피란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또한번 군부대에서 파견된 장병들이 인원 파악을 끝내고 앞,뒤에서

장병들의 안내를 받으며 군사도로를 따라서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은 여러가지 제약으로 인해서 포토존 이외는 사진 촬영이 안되고

자료가 충분하지도 않아서 산행기를 제대로 기록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길을 걷는것만도 15사단과 화천군에 고맙기만 하다 

포토존에서 바라본 마현리(철원군 근남면 소재)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뒷산의 모습이 말처럼 생긴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마현은 현의 북쪽 64리

김화의 경계에 있다."는 기록을 통하여 지명이 오래 전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청구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호구총수』에 보면 상서면에 마현리(馬峴里)가 있다.

이 마을이 현재의 마현리가 되었다. 지명은 옛날 말을 몰고 가던 사람들이 고개가

너무 높아서 정상에서 쉬어가곤 하였기에 생겨나게 되었다.

적근산에서 발원하여 마현리를 지나 산양리 · 부촌리 · 노동리를 거쳐 화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을 화천천(華川川)이라 하는데, 이 하천의 상류를 마현천 (馬峴川)이라 한다.

군부대 포토존에서 적근산을 배경으로...

군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

능선에서 바라본 적근산의 모습

적근산(赤斤山:1,071m)은 철원군 원남면 봉당덕리와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현에 "적산(赤山)은 현 남쪽으로 20리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여지도서』 금성현에 "적근산(赤斤山)은 백역산(白易山)이

서쪽으로 이어져 적근산이 되었는데 관문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 「금성지도」에는 적근산(赤斤山)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적근산(赤根山)이 금성군 남면 봉당덕리(鳳堂德里)에 위치한 산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적근이라는 이름은 산의 암석이 붉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으로 짐작되는데, '붉은산'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적근산에는 희귀종인 솔나리와 왜솜다리를 비롯한 한국 특산종과

희귀식물 군락이 넓게 분포하며, 반달가슴곰과 사향노루 등의 서식도 확인되고 있다.

관련 지명으로 화천군 상서면에 설치되어 있는 '적근산지구전적비'가 있다.

이 비는 한국전쟁 당시 미 7사단 32연대에 배속된 에티오피아군 대대가 적근산 동북쪽 1.5㎞ 지점인

797고지에서 1951년 8월 12일부터 동년 8월 24일까지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이때 전사한 호국 용사들의 숭고한 넋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1983년에 육군 제15사단에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후배산꾼 산으로님과 벙글님

진양, 팔공, 호미, 한강기맥을 같이 걸었는데 오랫만에 만났다

군 장병들의 인솔하에 군사도로를 따라서 대성산으로 향한다

15사단에서 중간중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포토존을 만들어 놨다

포토존 등로에서 바라본 마현리의 모습

대성산을 향해서 Go Go~~~

이별을 준비하는 등골나물

諸行無常

가야할 대성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적근산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백암산과 그 좌측으로 북한땅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길이

아련히 보이는데 내 생전에 한북정맥 꼭지점까지 걸을 수 있을런지...

전 세계에서 유래없는 분단국가의 현실적인 아픔... 꼭 한번 걸어보길 소원하면서...

손님맞이 하느라 고생한 15사단장님 고맙습니다

포토존 아래로 펼쳐지는 마현리의 모습

포토존에서 바라본 대성산의 원경

벙글아우가 찍어준 대성산을 배경으로 한 컷

대성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봉오리의 모습

봉오리(峰吾里)는 화천군 상서면 지역으로 봉우재 밑이 되므로

봉골,봉오(烽五)이라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 폐합에 따라 갈전, 갈목,

밤나무골,멍에울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봉오리(峰吾里)라 칭하였다.

상집실, 중집실, 하집실, 주대, 가동, 율목, 갈매기골, 안봉오골, 밖봉오골 등의

9개 자연 부락이 합쳐서 봉오리가 형성되었는데 그 후 갈매기골, 안봉오골,

밖봉오골이 봉오2리로 1971년도에 분리되고 상집실, 중집실, 하집실, 주대일부가

1985년에 봉오3리로 분리되었고 현재는 가동, 율목일부가 봉오1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옛날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율목동이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비포장 도로를 지나니 대성산 공군부대로 향하는 포장길을 따라 걸어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곳인 이곳에 가을은 깊어가고...

대성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절골의 모습

그너머로 지난 8월에 걸었던 화악산 신선봉과 매봉, 석룡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대성산 정상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15사단에서 새로 만든

등로를 따라서 대성산을 우회하며 정맥길을 이어간다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는 한북정맥길... 맨 처음 밟는다는 이 기쁨, 이 기분 그대들은 알랑가!!!

철원군 근남면이 아련히 보이고...

맥 산행이면서 군인들의 통제속에 어린애들 소풍가듯 걸어가고...

점심

3일간을 계속해서 산행을 했더니만 집에 눈치가 보여서 점심으로 고구마와

막걸리 한병을 달랑 가져왔는데 벙글아우가 김밥에다 우유, 과일과 빵, 도라지즙

거기다가 막걸리 안주로 부침개까지 가져온 바람에 오랫만에 잘 먹었네

벙글아우님... 고마우이, 복받을겨

숲속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곰취가 많이 보인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니 비포장 임도가 나온다

도로를 따라서 조금을 올라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대성산으로 향한다

대성산으로 향하는 길

대성산 헬기장

여기에서 10km 정도 북쪽으로 가면 북한땅이란다

대성산 정상  200m 아래에 대성동산을 조성해놨다.

대성산 정상에는 공군부대가 있어서 정상은 오를수가 없다

대성동산에 서있는 詩碑 앞에서

대성산(大聖山:1,174m:13:50)

강원도 철원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산으로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와 화천군 상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보통 대성(大聖)이라는 지명은 "큰 성인이 이곳에서 나타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산의 유래도 그러한 의미로 짐작된다.

북동쪽의 말고개(馬峴, 558m)는 옛날부터 화천~김화 간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으며

남동쪽 기슭 해발고도 750m 지점에 절골(寺洞), 남서쪽 기슭 해발고도 400m 지점에 수피(水皮)라는

산간 마을이 있으며 산의 동쪽 사면에서는 마현천(馬峴川), 남쪽 사면에서는 사동천(寺洞川)이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흘러들어, 북서쪽 사면에서는 한탄강(漢灘江)의 지류인 남대천(南大川)이 발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화현에 "대성산(大聖山) 현 남쪽 24리에 있다."는 기록과 불우조에

 "보현사(普賢寺) 대성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에는 대성산 남쪽에 이름난 절이 있어 이곳을 절골이라 하였고, 절골고개ㆍ중고개 등의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으나 절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산봉우리에 부자가 살았는데 장자라는 아들을 두어서 대성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6ㆍ25 이후 널리 알려진 산으로 휴전이 될 무렵 아군과 중공군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특히,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 이곳을 사수하여 적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북쪽의 백암산(白巖山, 1,179m)ㆍ적근산(赤根山) 등과 함께 남쪽의 백운산(白雲山, 1,073m)ㆍ

화악산(華岳山, 1,468m), 서남쪽으로 수피령ㆍ복계산 등으로 이어진다. 6ㆍ25 때 격전지였다.

대성산은 한북정맥(漢北正脈)에 해당하며 한북정맥은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평강군

(平康郡)의 추가령(楸哥嶺)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한강과 임진강의 강구(江口)에 이르는 산줄기로

동쪽은 회양(淮陽)ㆍ화천ㆍ가평ㆍ남양주 등의 한강 유역이 되며, 서쪽은 평강ㆍ철원ㆍ포천ㆍ양주 등의

임진강 유역이 된다.

 

한북정맥은 추가령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오다가 휴전선을 넘어 적근산과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대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수피령을 지나 복주산(1,152m), 광덕산(1,046.3m), 백운산(904.4m),

국망봉(1,168.1m), 청계산(849.1m), 운악산(935.5m), 죽엽산(600.6m), 불곡산(470m), 서울의 경계인

도봉산(740m), 북한산(836,5m), 장흥 노고산(495.7m), 파주 교하의 장명산(102m)로 이어져 황해로

빠진다.

 

6ㆍ25 이후 널리 알려진 산으로 휴전이 될 무렵 아군과 중공군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특히,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 이곳을 사수하여 적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광복 전 사내면에서 수피령(水皮嶺)으로 가는 길목에 황우광산(黃牛鑛山)이라는 금광이 있어서

많은 금을 생산하였으나 현재는 폐광되었다.(두산백과 인용)

대성산에서 바라본 마현리의 모습

대성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서 오르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 수피령으로 향한다

대성산에서 바라본 저격능선의 모습

백마고지 전투와 더불어 한국전쟁 기간 중 최대의 격전으로 평가받는 저격능선 전투는

한국전이 진지전으로 변하여 전선이 고착되었던 1952년에 중부 전선의 금화(현 김화)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2사단과 중공 제15사단이 동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 전례(前例)없는 방대한 화력 지원하에 쌍방의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며 혈전을 전개했던 전투이다.

 

해발고도 580m, 넓이 1㎢ 크기의 장방형 능선인 저격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위치한

 오성산에서 우측의 금화지역으로 뻗어내린 여러 능선 중 남대천 부위에 돌출되어 있는데

그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51년 10월 Nomad선으로 진격하던 美 제25사단이 금화 지역에서 중공군 제26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538고지에 진출한 미군이 중공군 저격병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저격능선(狙擊稜線)이라 명명(命名)하게 된 것이다.

지난 8월에 걸었던 화악지맥 길의 화악산이 보이고...

대성산 남로를 따라서 수피령으로 향하는데 한북정맥에서 살짝 벗어난

복계산과 한북정맥의 중요한 산인 광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피령으로 향하는 대성산 남로에서 뒤돌아 본 대성산의 모습

마지막까지 화려함을 잃지 않는 야생화

그래 내년에 보자

대성산 남로에서 바라본 절골의 모습

이곳 화천군은 어디를 봐도 산밖에 보이질 않는다

 

화천군의 고구려 때 이름은 생천군(牲川郡)이고, 신라 때 낭천(狼川)으로 바뀐 후 조선 말까지

낭천현이었다가 190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김극기가 “옛 고을이 푸른 시냇가에 있는데,

푸른 산이 사방의 이웃이로다. 한 가닥 동쪽으로 향한 길이요, 천 리 북으로 가는 사람이로구나”라

노래하였고, 이지직이 “구름 가까우니 옷이 젖고, 바람 부니 여름 대자리가 밝구나”라고 읊었던

화천의 지형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 당시 호수는 264호요, 인구는 750명,

군정은 시위군이 100명이요, 선군이 30명이었다.

조선시대에 화천창(和川倉)이 있었고, 회양에서 추지령을 넘어 동해안의 통천으로

이르는 도로가 지나던 곳이 바로 화천이었는데, 화천(和川)이 언제부터

지금의 이름인 화천(華川)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화천군에는 높은 산들이 많다. 대성산(해발 1175미터), 재안산(해발 1060미터),

화악산(해발 1468미터), 석룡산(해발 1300미터), 적근산(1073미터) 등의 높은

산들 사이로 내금강산 장안사를 건너다보고 흘러내린 물이 북한강이 되어 화천군

동북쪽 끝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들어 파로호로 접어든다

(신 정일님의 새로쓰는 택리지에서)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의 모습

사곡리(沙谷里)는 모래올 또는 사곡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사곡, 하사곡, 당현, 안양동, 아사리, 후동, 원동, 봉춘리를 병합하여

사곡리라 하였으며 해방이후에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에 수복, 1963년에

철원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대성산 정상에서 1시간을 넘게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어 내려오니 도가니에

불이나는 느낌이다... 거기다가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니... 정말 미치겠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멋진 암릉을 만나 오르고 싶지만 이곳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야하고 어디에 지뢰가 있을지 몰라 눈으로만 감상한다 

1시간 10분이 지난 다음에야 시멘트 도로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접어든다

등로에서 바라본 화천군 사내면 다목리의 모습

화천군 상서면 지역으로 본래 다항(多項)리라 하다가, 이조때 황장목(黃腸木)을 많이

심어서 나라에서 쓰려고 금양하는 황장갓이 있었으므로, 나무가 많다는 의미에서

다목(多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따라 창바우, 도리동, 언동,

장재울, 늑동, 약동을 병합하여 다목리 (多木里)라 하였다.

1979년 9월 1일 다목1, 2리로 분리되어 특히 다목1리는 수복 당시 아무나 와서

집만 지으면 살게 되어 해방촌으로 불리우고 있다.

급경사를 내려서니 수피령이 가까워지나 보다 차량소리들이 많이 들려온다

드디어 철제문이 나타난면서 수피령에 도착하고 우리를 인솔한 15사단 장교가

먼저 도착하여 수고했다는 인사를 들으면서 산행을 종료한다 

수피령(水皮嶺:780m:15:35)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다목리와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56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정상에는 대성산지구 전적비와 넓은 공원이 있으며

한북정맥의 실제적인 들머리이기도 한 곳이다

수피령 정상에 있는 수분점

이곳에서 철원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한탄강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들고

화천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북한강을 거쳐 한강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중요한 곳이다

대성산지구 전적비

실질적인 한북정맥 들머리

4년만에 와보는 한북정맥 들머리...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6여년동안 매주 산을 다닐 수 있는 두 다리를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 산행의 기록

이곳에서 후미가 오는동안 30분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화천군과

15사단에서 개최하는 다목리 감성축제로 향한다

화천군 감성마을 축제

오늘 산행은 화천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축제를 벌이는 감성마을에 도착한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하면서 여행사를 위해 의무적으로 쇼핑코스를 들리듯이

오늘 산행도 화천군의 요청으로 인하여 감성마을 축제에 얼굴만 비친다

이곳 감성마을은 작가 이 외수씨가 사는 동네로 알려진 곳이다

산악회 버스에서 내려 10분간 주마간산식으로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예약한 화천읍으로 향한다

화천읍 옛골식당

다목리에서 화천읍으로 오는 20분정도에 버스에서 꿀맛같은 잠에 빠진다

화천읍에 도착하여 시장안에 있는 닭도리탕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는다

작가 이 외수 선생이 즐겨 찾는다는 닭도리탕집

음식값도 저렴하고 음식이 깔끔하고 참으로 맛이 있다.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에 서울로 귀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