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10.1~ 02(무박산행)
○ 산행날씨 : 아침에는 상당히 추움, 낮엔 덥고 그러나 산행하긴 아주좋음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46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4.5km / G.P.S 거리 약 17km/8시간 50 소요
○ 산행코스 : 토끼재-288봉-불암산-탄치재-249봉-286봉-국사봉 -상도재-뱀재-잼비산-삼정치
중산마을-남해고속도로-천왕산-194봉-2번국도-망덕산-섬진강하구 외망포구
○ 소 재 지 : 전남 광양시 다압면, 진상면, 진월면
섬진강/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2주전 산경표상 호남정맥의 종착점인 백운산을 지났지만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취지에 맞춰 섬진강 물길을 가르는 호남기맥구간인 백운산에서 망덕산을 거쳐
섬진강 하구 광양시 외망포구까지 이은 다음 호남정맥을 졸업하기로 한 터여서
오늘이 공식적인 호남정맥 졸업산행이다.
호남의 산불기와 물줄기
금남,호남정맥은 백두대간 장수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북서쪽으로
63.3km를 뻗어가며, 장안산. 수분령. 신무산.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거쳐, 완주의 조약봉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나뉜다.
여기서 금강과 섬진강이 발원하는데, 신무산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의 물줄기는 장수를 지나, 전북과 충남을 거쳐 군산(금강하구둑)에서
서해로 흘러드는데 길이가 장장 407.5km나 된다. 진안 팔공산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호남의 옥토를 가꾸는 젖줄기로 광양만까지 225km를 흘러간다.
호남정맥은 산경표상, 모래재 북쪽 0.6km지점의 완주 조약봉에서
남북으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나뉘는데 호남정맥이 전북지역을
지나는 동안 웅치, 만덕산, 슬티,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강천산, 산성산 등을 일구고 전남지역을 지나면서는 무등산,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주월산, 조계산, 백운산 등을 일군다.
호남정맥은 그 이름처럼 호남땅의 16개 시군을 지나는 산줄기로
동서로 물을 가르고 문화와 풍습을 가른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왼쪽은 판소리와 농악 등에서 특이한 문화권을 형성하며, 평야가
많은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 등은 평야지대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남북으로 향하는 산줄기(조약봉-사자산)는
호남좌도의 서편제, 호남좌도농악과, 호남우도쪽으로는
동편제 및 호남우도농악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토끼재(03:20)
토욜에 예식장 3군데를 돌면서 바쁘게 인사를 하고 다니고 일욜에
예식장 두 군데는 봉투로 인사를 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요즘같은 경우에는 예식을 거의 호텔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서 참으로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다. 일단 식대가 10만원 정도이니 축의금 5만원 내고
10만원짜리 밥먹으면 눈치보이니... 거기다가 점심 예식에 호텔에서 먹은 스테이크가
위에 부담을 준 탓인지 소화가 안되 상당히 불편한 상태에서 호남길 마지막길 산행을
위해 차에 오르니 전혀 잠이 오질 않는다. 속이 더부럭 탓인지 아님 호남의 마지막길
벅찬 감동 탓인지는 몰라도 예전과는 달리 차에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전주~순천간 고속도로를 지나 순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들어서 광양시 옥과I.C를
벗어난 버스는 깊은 오지로 들어선다. 컴컴한 산중턱인 토끼재에 도착하니
날씨는 꽤나 차가웠다. 하늘의 별은 쏟아질 듯 맑게 떠있고...
토끼재에 도착하여 워밍업과 장비 점검을 하고 산행을 시작하려니
정맥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소나무 농장이 있다.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니 아주 고약한 사람으로 광양의 인심을 다 잃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거기다가 경고문구를 보면 웃기는 게 적발시 ‘형사 처벌’ 하겠다니...
요즘은 민간인도 사법권이 있나... 이보슈 쥔장나리 공부좀 하슈
당신은 고발은 할 수 있으나 처벌은 할 수 없으니 경고문을 좀 고치슈
정맥 산꾼들이 얼마나 독한 사람들인데 그런다고 안가나 ㅋㅋㅋ
철대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빠져나간다. 거의 80%가 말이다.
범여 역시 간단하게 통과한다. 뚱뚱하신 낡은모자님과 탱크님은
아예 시도도 하지 않고 우회로 해버리니 쥔장 당신이 우짤것이여...
그리고 기왕하려면 막으려면 대문 파이프 좀 촘촘히 박으슈
그렇다고 산꾼들은 지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절대 없지만...
대문을 통과하니 소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고 여기저기 경고문이
어지럽게 붙혀져 있다. 소나무를 훔쳐 간다고... 산꾼들이 정맥길
걷기도 바쁜데, 내 원참 쥔장님 산꾼들은 소나무 쳐다볼 시간도 없소.
그건 다른 사람 소행인 것 같으니 길좀 열어주소 脈길 끊어서
잘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요. 아예 정맥길을 조성해서
지나가게 만들어 주면 오히려 광고효과도 뛰어 날텐데 말이요
철조망을 약간 우회하여 마루금에 올라서니 꼬리표들이 산꾼을 반긴다.
어둠속에 쥔장 닮은 개쉬끼가 사납게 짇어된다. 등로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에 자켓을 벗어 베낭에 넣고 길은 걷는다. 능선 우측의 능선넘어
수어 저수지 부근의 가로등을 졸고있고 그 너머 진상면 면소지의 불빛은
꽤나 큰 면소재임을 느껴진다.
이 소나무 농장 주인은 아주 고약한 양반인 모양이다.
철조망을 나무에다 박아서 철사가 아예 나무속에 묻혀 버렸다
손톱밑에 가시하나만 박혀도 얼마나 아픈데...ㅉㅉㅉ
땅은 사유지인지 모르겠으나 자연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거늘
인식 전환이 필요한 사람인 것 같다. 가슴이 아프다.
급한 경사를 20분간 빡세게 치고 오르니 288봉이 나타나고 다시
한번 치고 오르니 돌무덤이 나타나고 암릉이 약간 보이고 이곳이
예전에 산성인듯한 표시가 나타나니 불암산성이다.
불암산(431m : 04:20)
불암산성은 광양읍 마로산성, 옥룡면 중흥산성, 진월면 봉암산성 등과
함께 광양의 4대 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으로 불암산(佛岩山)의 서남 지역에 해당한다.
1999년 12월 3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었다.
불암산성의 축성기법과 수습된 기아와 토기편, 무기의 일종인
석환으로 보아 백제시대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가운데 있는 산이 불암산이다.
날이 밝으면 저 섬진강 너머 하동읍내와 화개장터가 환히
보이는 곳이련만이곳에서 10여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어둠속에 해드렌턴에
몸을 의지한 채 남도길 끝자락을 향해 계속해 걸어간다.
불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광양시의 야경과 불암산 아래의 津上面
진상면의 유래는 진상면 청암리에 있었던'숭어쏘 나루터'를 중심으로 나루터 위쪽에
위치한 고을이 다하여'津上面'이라 하였으며, 이와 대칭적으로 나루터 아랫쪽에
위치한 고을을'津下面'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진월면 차사리∙진정리에서부터
신아리에 이르는 지역 고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숭어쏘 나루터 위치는 진상면 청암리 목과마을에서 면소재지쪽 도로를 따라
150m지점 있었으며 그곳 부근지역을 '효자문터'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서 태어난
효자 양복수(梁福洙)란 분이 동짓달 추운 날씨에 숭어쏘에서 숭어를 잡아 부친의
묘상(墓床)에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분의 효행을 기르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려를 처음 세웠던 지역이기도 하다.(광양시 진상면 홈페이지 인용)
불암산에서 꿀맛같은 휴식을 취함 후에 다시 탄치재로 향한다.
주위에서 묘지들이 꽤나 많이 보이고 그로 인해 벌초를 했는지
잡목들이 베어져 있어 걷기는 참으로 편하다. 급한 내림길을
내려오니 도로가 나타난다. 오늘 처음 만나는 2번 국도인 탄치재다.
이곳에 도착하니 오늘 산행을 지원나온 돌쇠대장이 승합차를 세워놓고
반갑게 맞이한다. 건강도 그리 좋지 않다는데 봉사를 나섰다고 한다.
역시 뭣진 산꾼이다. 하긴 산행대장은 아무나 하나... 늘 건안하이소
탄치재(매치재 168m: 04:50)
전남 광양에서 경남 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아래의 터널은 순천에서 밀양 삼랑진으로 연결하는
慶全線 철길이 지나는 곳이 비교적 교통이 좋은 곳이다.
수준점이 설치되어 있다. 탄치재는 옛 지형도에는 ‘매치재’라 표기되어
있는데 최근 지형도에는 ‘탄치재’로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석탄 ‘매(煤)’ 와 숯 ‘탄(炭)’ 자를 사용하는데 이곳의 지명은 숯과 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이유로 명명 되었다고 한다.
정상석은 오래전에 설치한 듯 한데 해발 100m라고 해놨는데 이건
틀린것 같다. 168m가 맞다.
국가 기준 수준점
수준점(BM; Bench March)이란 수준원점으로부터 표고를 정밀측정하여 영구적인 말뚝을 설치하고, 차후 부근의
수준측량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 표고를 국토지리정보원의 수준측량 성과표에 등록해 놓은 기준점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수준점은 인천만의 평균해수면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
수준원점을 측설하고 그 표고를 정밀하게 결정해 놓았는데, 이 수준원점의 표고값은 26.6871m이다.
아울러 주로 국도 주변에 수준점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1등 수준점은 약 4㎞, 2등 수준점은 약 2㎞간격 설치되어 있다.
국사봉을 알리는 이정표(←국사봉2.8km)를 따라 올라가 좌측으로 진행하면
임도를 만나고 숲길을 접어들고 묘지를 지나면 헬기장이 있는 지도상 260봉에 도착하여
어둠속에 무명봉 서너개를 지나 급하게 내려서면 이정표(←국사봉2.8km,→대리경모정2.0km)
가 있고 성황당인 듯한 돌무덤이 있는 안부를 지나 가파른 급오름길을 허겁지겁 힘들게
올라서면 45번 철탑을 지나고 계속되는 가파른 급오름 등로를 한동안 힘겹게 올라서면
우측에 개인 소유의 고사리밭이라는 팻말이 있고 오늘 처음으로 빡세게 치고 오른 후
잠시 편안하게 올라 봉우리를 넘고 편백나무가 있는 안부를 지나고 무명봉을 넘어선 후
바위지대를 가파르게 올라서니 여명은 밝아오고 저너머 지리산은 서서히 보이고 섬진강과
하동 읍내 뒤의 성제봉이 확연히 나타난다.
섬진강과 지리 능선에도 아침은 밝아오고...
국사봉(國師峰:445.2m :06:20)
정상에는 삼각점(하동15 1991재설)이 설치되어 있고 통신중계탑이 있으며
봉우리 주변은 돌로 쌓은 성터를 연상케 한다
이번 구간의 최고봉이다.
우리나라 대간이나 정맥중에 백운산이나 깃대봉만큼이나 흔한 이름이
국사봉 아닌가?... 國師가 난 곳이라 해서 국사봉이라 붙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에 선비들의 자기과시욕에 의해 국사봉이라 붙여진 곳도 많다.
또다른 하나는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곳도 국사봉이라 부른다.
이곳 국사봉은 정상에 널려진 돌무더기로 보아 아마 제단인 모양이다.
성제봉과 경남 남해쪽의 연봉들
성제봉의 이름은 형제봉이다. 경상도에서는 형을 성이라고 부른다 .
정상 표지석에는 성인 성(聖)자에 임금 제 (帝)자를 쓴 성제봉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이름처럼 어진 임금 같은 산이다 .
풍요로운 고장 악양의 진산으로 언제나 덕을 내리는 산이라고 한다 .
광양만(光陽灣)
광양만 하면 聖雄 이순신 장군을 빼놓을 수가 없는 곳이다.
임진왜란 침입이후 왜군이 2번째 침입한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7년 11월부터 1598년 11월까지 1년동안 이 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과 함께 광양 앞바다에서 해상봉쇄작전을 펴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끌던 왜군 1만 3천명을 꼼짝달삭 못하게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왜군은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에 주둔하면서 본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는데 이 순신이 광양만에서 퇴로를 막아버리자
꼼짝을 못하는 소서행장은 명나라 수군 장수에게 뇌물을 주고 노량 앞바다로
달아나는 걸 알아챈 이 순신은 경남 남해군 노량 앞바다를 봉쇄하여 커다란
전투가 벌어진다. 이곳에서 일어난 전투가 노량해전인데 이것이 이 순신의
마지막 전투지이자, 전사지가 된 곳이다.
이곳 광양만은 그때 1년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벌어졌는데 지금도
광양 앞바다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창고터가
곳곳에 있으며 소섬, 염소섬, 나팔섬, 북골, 징골, 통사골 등 전장과
그때 당시 전쟁과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국사봉 내림길에서 바라본 광양(光陽)
조선시대 영조때 암행어사 박문수는 광양을 두고 “朝鮮之 全羅道요, 全羅道之
光陽이라” 하며 광양을 예찬 하였다고 한다. 卽 조선에서는 전라도가, 전라도에서는
광양이 가장 살기 좋다는 뜻이다. 그는 이곳 광양에 머물때 이곳을 評하기를
뒷문을 열고보니 산이 있어 재목이 많을터이고, 앞문을 열고보니 들판이 펼쳐
있어 곡식이 넉넉할 터이고, 멀리는 바다가 있어, 해물과 소금이 많을 터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광양시는 1개읍과 6개읍을 보유한 15만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전남에서
재정자립도 1위의 도시라고 한다. 백운산에서 돼지의 정기를 받아 부자도시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의 근면과 성실함 때문이 아닐까?
옛날에 한 광양사람이 순천에서 광양까지 벼룩 몇만마리를 풀섶으로만 몰고
삼십리를 왔는데 광양에 도착하여 벼룩을 세어보니 벼룩이 한마리도 빠지지
않고 다 몰고 왔더라는 얘기가 있다. 광양사람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빈틈없음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힘든 세상사 야무짐으로 이야기하자면 광양사람을 따를 수 없다고 한다.
광양사람들은 고추가루 서말을 먹고도 속 10리를 간다고 했고
흔히 이웃지방인 순천사람과 견주어 “광양의 죽은 송장하나가 순천 산 사람
셋과 맞먹는다”는 말이나 “광양 여자가 순천남자에게 시집가면 잘 살지만
순천여자가 광양남자에게 시집을 오면 게을러서 못산다”는 말은 광양사람 특히
광양 여자들이 생활력이 유난히 강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전라남도 총각사이에는 “광양 큰 애기한테는 두말않고 장가들겠다”고
하였단다. 이곳 광양출신들이 한때는 우리나라 중앙기관부서의 사무관급 공무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였단다.
철없는 철쭉
청사초롱으로 꽃단장하고 남도길 완주를 축하하고...
억불봉과 백운산과 앞에 보이지는 수어천의 모습
광양 4계곡의 하나인 수어천은 백운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커다란 수어저수지를 형성하고 진상면과 옥곡면의 농토에 젖줄역할을 한다.
상도재(07:30)
광양시 진월면 치사리와 진상면 청암리를 잇는 조그만 고개이다.
상도재에 도착하면 T자형 시멘트도로를 만나고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국사봉에서 일출 사진 한장 건지려고 기다리다 졸지에
맨 후미가 되는 바람에 내려오니 동료산꾼들은 벌써 식사가 끝나가고
있다. 서둘러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여서 주종(酒種)불문하고 여기저기서
받아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얼얼하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기념사진을
찍으란다. 기념사진 찍고 베낭 챙기는 사이 동료 산꾼들은 사라져 버리고...
상도재 주위에는 관리되지 않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지천이다.
상도재에서 아침 식사를 끝낸후에 가장 늦게 출발을 한다.
앞서간 동료 산꾼들이 웅성거린다. 모두다 밤을 줍느라 야단이다.
나 역시 견물생심이라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이 대열에 동참을 한다.
주인이 없는건지 관리가 안된 밤나무 아래 엄청나게 큰 밤알이 떨어진
것만 줍는데도 약 30분정도 주었는데 약 2됫박은 더 줏은것 같다.
밤알이 적은 건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고개 하나 넘어 줏어 담은게 베낭을 질 수도 없을만큼 많이 줏고나서
서둘러 길을 나선다. 이곳에는 속된말로 발에 차이는게 밤이다.
정박산(08:20)
광양시 진상면 청암리와 진월면 치사리의 경계능선에 있으며
일개 봉우리인데도 산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정상에는 묘지가 하나있고 묘지안에 국립건설 연구소 삼각점이 있다.
정박산이란 이 아래 동네에 혹 정씨와 박씨들이 많이
살아서 붙인 이름인가?. 호남 첫구간에 슬치 오기전에 있던
박이뫼산도 아래 동네에 박씨와 이씨가 많이 살아서
박이뫼산이라고 불렀는데 혹 그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고
광양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을 해도 자료가 전혀없다.
일산에 있는 정발산(鼎鉢山)은 마두1동(馬頭1洞), 마두3동(馬頭3洞)
그리고 장항2동(獐項2洞)의 경계에 있는 해발 88m의 산인데,
산이름의 유래는 산밑에 사는 마두 1리에는 정(丁)씨가, 그리고 마두2리에는
박(朴)씨가 각기 씨족촌(氏族村)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산이름을
정박산(丁朴山)이라고 부르다가 정발산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박산 정상 산소에 안에 있는 국립건설 연구소 삼각점
취나물 밭을 가로질러 매실나무 과수원을 지나고 얕은 봉우리를 넘어 급하게 올라서면 묘지와
삼각점이 있고 삼각점봉(167.2m)이라는 이름표를 단 봉우리에 도착한다.
봉우리를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또 다른 밤나무 단지가 이어진다.
밤나무 단지를 통과하고 개활지를 지나면 수원백씨묘 등 여러 기의 묘지를 지나 내려서면
곧이어 진월과 진상을 잇는 2번 국도인 뱀재(140m)에 도착한다
뱀재( 140m : 09:20)
뱀재는 광양시 진상면과 진원면의 경계로 2번 국도가 지나는 2차선의
포장국도이며 지도상에는 배암재로 기록되어 있다.
잼비산(09:10)
뱀재에서 10분정도 밤나무밭을 지나서 10분정도에 오르니 산봉우리도 아니고
그냥 능선길에 잼비산이라고 표지판을 붙여놧다. 아무리봐도 산 이름이
붙을 자리가 아닌것 같은데 이 지역 사람들은 산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성향일까. 밤 줍기에 눈이 멀어 졸지에 꼴찌이다.
이젠 동료들을 따라가야기에 마구 내달리다시피 한다. 그런데 줏은
밤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작은 소나무들이 많이 있고 길은 트레킹 코스같다.
삼정치(09:15)
잼비산에서 꽤나 큰 매실밭을 지나고 묘지 몇기를 지나 내려오니
콘크리트 임도가 나온다. 이곳이 삼정치이다. 콘크리트 임도를
치고 올라가니 다시 등로가 나오고 밤나무와 단감나무 단지가 나타난다.
오늘은 싸가지고 온 간식을 손도 안된다. 지나가다 떨어진 홍시 몇개를
줏어먹고 나니 배속이 든든하다.
진월면 앞의 수어천에서 흘러가는 광양만은 썰물로 인해 뻘이 드러나 있다.
진월면(津月面)의 유래는 일제시대인 1914. 4. 1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
기존에 있던 행정구역 지명인 진하면(津下面)과 월포면(月浦面)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진월면(津月面)이라 하였다. 이곳은 일제시대에
여러 부락을 통합하여 자기들 편한대로 부른 지명이 많은 곳이다.
밤나무밭을 지나고 매실나무밭을 가로질러 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올라서면 임도갈림길을 만나는데 아마도 이곳이 진정리 마을로
내려가는 할미당고개로 예상된다. 이곳에 도착하니 먼저가던
쉬크석님, 허공님과 사이먼님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막걸리
한사발이 생각나 술상을 펼치려는데 앞서가던 참이슬님이 전화가
오는 바람에 서둘러 앞서가는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떠난다.
다시 고구마밭과 감나무 단지와 밤나무 단지를 거쳐 선답자들의
꼬리표를 따라가다 보니 대나무밭이 나오고 가정집을 들어선다.
아차하고 실수하여 알바를 한 것이다. 주인장의 인상이 좋지않아
미안하다는 목례를 하고 서둘러 집을 빠져 나온다(알바구간 주의)
이곳은 감나무밭을 지나 대밭이 나오기전에 우측으로 90도 꺽어져서
남해고속도로를 쳐다보면서 절개지로 내려와 중산마을 앞 고속도로
지하차도를 지나는 밤나무 단지로 올라서야 한다.
대밭으로 접어드니 가정집이 나타나고...
갑자기 나타난 가정집으로 인해 쥔장에게 미안하다는 목례를 하고
서둘러 골목으로 나서니 중산마을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꺽어져서 남해고속도로 지하도를 지내 급경사의 절개지로 오르니
동료 산꾼들이 산상주막을 펼치고 있고 주위에는 밤이 천지다.
이곳에는 밤이 얼마나 굵은지 밤 몇개를 줍지도 않았는데 금방 한주머니가 된다.
우측 중산마을로 내려서지 말고 화살표 방향으로 내려와야 한다(펌)
진월면 중산마을 (09:40)
순천에서 부산을 잇는 남해고속도로
고속도로 절개지 위에서 항상 봉사하시는 정문교님과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쉬크석 대장, 그리고 오늘 첨뵙는 자연님이 야채에다 묵을 넣어
즉석에서 술안주를 만든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랴 소주에다 맥주를
말아서 한잔 그리고 막걸리 2잔을 마시고 천왕산에 오르니 걷기가 훨씬 수월하다.
이곳에도 걸리는게 밤이다. 주인이 있는데 일손이 모자라
따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떨어진 밤을 줏는다. (조금은 미안한 맘을 가지고)
그리고 밤나무와 감나무단지를 지나 급경사로 치고 오르는데 장난이 아니다.
오늘 산행중 가장 힘이드는 곳이다. 베낭이 무거운데다 급경사이다보니 입에
단내가 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더덕도 보이고...
밭고랑 사이로 정맥길을 지나가고...
내가 지나온 길들 저 넘어 아련히 지리산 주능선이 보이고
오늘 지나온 불암산과 국사봉도 아련히 보인다. 이제 내 평생
다시 못올지도 모를 이 호남정맥길이라 생각하니 자꾸만
가슴이 저려온다. 그리고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건 이 범여만의 생각일까?
지난 여름 그렇게도 많은 폭우에도 불구하고 이곳 황금들판은
보기가 좋다. 저리 힘들게 지은 농작물의 시세가 중간 상인들의 착취없이
농민과 소비자에게 함께 이익공유를 했으면 한다.
천왕산 가기 직전 전망바위에서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에서
가장 사진을 잘 찍으시는 국보급 찍새 원일님께서
멋지게 한커트 찍으 주시고... 고맙습니다. ㄲ ㅃ 복받으실겨
천왕산 정상에 서니 왜 이곳이 고도가 225.6m 밖에 되지 않는 곳이
천왕산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 남해고속도로 진월I.C이고 저너머가
섬진강이며 섬진강 휴게소도 보인다. 그 너머가 높은 산이 하동 성제봉이다.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젓줄인 섬진강
남북한을 합쳐서 9번째로 긴 강이지만 남한에서는 4번째로 긴 강인
섬진강. 흔히들 MB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하면서. 낙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을 개발하면서 영산강이 섬진강보다 긴 줄을 알지만
실제로 섬진강(225km)이 영산강(136km)보다 훨씬 긴 4대강이다.
다만 영산강은 남도의 대도시인 광주, 나주, 목포를 거치는 바람에
4대강 사업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도지방의 가장 큰 젓줄이기도 한 섬진강(蟾津江)은 호남 동부지방을
적시며 도도히 흐르는 물길로 수많은 哀歡을 지니고 있다.
섬진강은 특히 고운 모래가 유명해서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으로
불리기도 했고 고려 우왕 11년(1385년)에 왜구가 강 하류로 침입했을 때
수십만리의 뚜꺼비떼가 울부짖어 왜구를 퇴각시켰다고 해서 ‘뚜꺼비 蟾’字를
붙여 섬진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 강은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전북 진안의 팔공산 기슭인 데미샘에서 시작하여 전북의 진안,
임실, 순창, 남원을 거쳐 전남의 곡성, 구례를 적신 뒤, 광양과 경남 하동의
경계를 가르며 광양만을 지나 남해로 흘러드는 총 225km의 물길이다.
주요 지류는 추령천, 이중천, 오수천, 심초천, 경천, 옥과천, 요천, 수지천,
보성강, 황전천, 서시천, 가리내, 화개천, 횡천강 등이다.
진안군 백운면과 마령면 등에서충적치를 발달시키고 성수면에서 구비구비 흘러
임실군 운암면에서 운암강이란 이름으로 옥정호로 흘러든다.
섬진강 댐에서 잠시 가로막혀 흐름을 멈추다가 실낱같은 물을 끌어모아 순창군
적성에서 적성강이란 이름을 얻어 다시 조금씩 강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순창은 단백질이 많고 때깔이 고우며 알싸한 맛을 지녀 임금님의 수라상에
진상했다는 순창 고추장이 유명하며, 순창을 지난 섬진강은 곡성에서 판소리의
동편제의 고장인 남원에서 흘러오는 요천을... 전라선의 압록역 근처에서는
호남정맥의 저 깊숙한 곳을 적신 보성강을 받아들여 품을 한껏 넓히고 구례로 접어든다.
구례부터 섬진강은 협곡을 형성하며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섬진강을
넘나들며 만든 그 유명한 화개장터를 뒤로하고 박 경리 선생의 소설 “土地”로 유명한
평사리를 지나 지리산과 백운산의 계곡을 빠져나와 하동포구에 다다른다.
30~40년 전만해도 수백척의 어선들이 정박하여 밤새 흥청거렸던 광양만은 이제
우리나라 경제의 충추적인 역할을 하는 광양제철소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섬진강
명산물로는 재첩과 은어, 참게 등이 있다.
천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광양시
이곳 광양 봉강면 출신인 신재 최산두 선생은 조선시대에 조광조와 도덕정치, 개혁정치를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매천 황현선생은 봉강면 서석촌 출신으로 한일합방 때 ‘나라가 망하는데 책임지는 선비하나 없다’ 고 하면서
1909년 그는 서울 남산에 올라 한양 장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산에 올라 한번 굽어 본 서울 땅/보는 것마다 더욱 처량하고 혼미하여라…/
예전에 망한 나라가 다 이 모양이었던가/망한 것이 분명하니 슬플 수도 없구나’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선비의 지조지키신 분이다.
그 밖에 이곳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많이 난 곳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해상봉쇄작전 편 해상전적지 광양 앞바다
광양만은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7년 11월부터 1598년 11월까지 1년 동안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수군과 함께 해상봉쇄작전을 펴서 고니시키 유키나가(小西行長)
이끌던 왜병 1만 3천명을 무찌른 해상 전적지이다.
당시 소서행장이 거느린 왜군은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에 머무르면서 본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광양만 해상을 봉쇄하자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소서행장은 명나라 장수에게 뇌물을 주고 끝내
노량으로 달아나게 되었으나 이를 미리 알아낸 이순신 장군이 경남 남해군 노량 앞
바다에서 퇴로를 막음으로써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해상봉쇄가 이루어졌던 1년 동안에
광양만에서는 크고 작은 싸움이 여러 차례 벌어졌는데, 광양만연안에는 임진왜란당시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창고 터가 곳곳에 있으며, 소섬, 염소섬, 나팔섬, 북섬
징골, 통사촌 등 전장과 관련하여 붙여진 지명들이 많다.
천왕산에서 바라본 망덕산
광양숯불구이는 쇠고기를 구리 석쇠에 놓아 참숯불에 구워먹는 재래식 고기구이이다.
불고기는 전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광양불고기를 볼 수 있으나
원조는 따라갈 수 없다. “天下一味 馬老火炙” (馬老: 광양의 옛 지명)으로
의례적으로 광양에 와서 숯불구이를 먹어야만 광양을 다녀왔다는 말이
될 정도로 광양 숯불구이는 널리 알려진 광양전통음식이다.
조선시대시대 김해 김씨 성을 가진 부부가 사연 끝에 아들을 데리고 광양으로
들어와 성밖 김씨 성을 쓰며 광양읍성 밖에 거주하였고 역시 성밖 인근에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 귀양 온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선비들은 성밖에 사는 천민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김씨 부부는
그 보은의 정으로 어린 송아지나
연한 암소를 잡아 갖은 양념을 하여 참숯불을 피우고 구리 석쇠에 고기를 구워 접대를 했다.
그 선비들 중 혹간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한양에 가서도 광양에서 맛본 그 고기맛을
못 잊어 천하일미 마로화적 (마로: 광양의 옛 지명)이 라며
광양 불고기의 맛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천왕산(225m:10:40)
기껏해야 225m 밖에 지나지 않은 산을 천왕산이라니...
이해가 별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서니 광양 제철소가 보이고
섬진강 하구와 남해도 조망되어 왜 천왕산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을것 같다.
천왕산에서 멋진 조망의 추억을 뒤로 하고 망덕산을 향한는 길에
우회로 하여 ㄱ자 형태로 194봉을 향한다.
천왕산 바로 아래의 뱀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금방이라도 산꾼을 물것처럼 하는 형태가 어쩐지 겁이난다.
그 이후론 편안한 걸음으로 주위의 조그만 소나무와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꽤나 많고 편안한 트레킹 코스를
걷는 것처럼길을 걷다 도착한 194봉에는 도리깨님을 비롯한 동료 산꾼들이많이 모여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다시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2번 국도를 향해 내려간다.
아주 편안한 길로... 이 지역 사람들의후하고 순수한 남도 인심만큼이나 편안한 길을....
천왕봉에서 바라본 진월면 구룡리 마을
이곳에는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공동샘이 있으며 천왕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천왕산을 문필봉으로 부르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왜 문필봉이라고 부르냐 하면 이 마을에서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문필봉이라
부른단다. 함안 조씨, 창녕조씨,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3,4,5 대 국회의원과 1960년대 초에 법무부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 재천씨도 이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194봉에서 20분정도 편안한 길을 걸어서 내려오니 2번 국도가
나타나고 도로 펜스가 처져 있어서 젊잖은 체면에 불구하고
개구멍을 통해서 나오니 다시 2번 국도에 중앙분리대가
가로막고 있어서 참으로 난감하기만 하다.
달리는 차를 피하면서 목숨을 건 중앙 분리대 아래로 호은 위로 월담을 시작한다.
하긴 정맥, 대간을 하면서 이런 짓을 어디 한두번 해봤던가.
2번국도(11:30)
전남 신안(목표)에서 출발하여 목포를 거친 강진, 보성, 벌교, 순천을 거쳐
진주, 마산을 지나 부산에 다다르는 남쪽의 서에서 동쪽으로 잇는
도로이다. 오늘 호남정맥 마지막 길에서 3번째나 만난다.
망덕산 가는 마루금의 표시(펌)
2번 국도를 건너니 진주기업이라는 포스코 협력업체가 있고 이곳에서
범여의 지난해 낙동정맥길에 동지이자 호남정맥길을 계속하다가 중간에
무릎을 다쳐 같이 졸업하지 못한 마카루님이 자동차를 대기하고 있다가
베낭을 받아 외망포구까지 픽업 해주는 바람에 홀가분하게 스틱과 식수만
가지고 망덕산을 오른다.
망덕산 오르는 길에는 감나무가 꽤나 많이 있고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대봉 홍시가 많아서 한개 줏어 먹으니 상당히 달고 맛있다.
조금 급경사에 오르니 좌측엔 구룡리가 보이고 꽤나 큰 함안 조씨 봉분을
지나니 상당히 급경사 오름길이 나타나고 이 곳은 산꾼이 많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등로가 뚜렸하지 않고 좌측에 철조망이 쳐저있다.
잠시 후에 준.희님이 부쳐논 이정표가 보이고 10m 뒤엔 표시석이 있다.
망덕산 자락에 있는 망덕포구는 섬진강 하구언과 남해가 맞닿아 있는
곳이며 그 옆에 망덕산을 보고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배알도가 있다. 그 너머에는 거대한 광양제철소가 보인다.
망덕산 부석정과 전망바위(浮石)에서 본 외망포구와 섬진강의 모습
전망대 바위에서 호남동지이자 갑장인 송 영우님과 함께
1년간을 호남정맥길을 다니면서 참 많이 진솔한 얘기를 나누신
분이다. 정읍출신인 이 분은 제조업에 종사하시다보니 많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산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분이다. 그리고 갑장이라
더욱 애착이 가기도 하고... 늘 하시는 사업 잘되시길 기원하며...
내년 여름 범여 1대간 9정맥 졸업식 때 보구곶리에 오실거죠.
동료와 사진촬영을 끝내고 우측 능선을 따라 나오니 섬진강 하구의
태인도와 배알도가 호남정맥 완주를 축하하는 듯 선명하게 보이고
바다건너 남해의 망운산도 뚜렷히 보인다. 내려오는 길엔 소원을
담은 돌탑들이 꽤나 보이고 조금 내려오다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다
다시 덕산사를 좌측에 두고 내려오니 등산로 입구가 나타나 정맥길을
종료한다.
우측에 보이는 섬이 배알도
전남 광양시 태인동 1630-1번지에 자리한 배알도는
섬진강 하구 태인도의 맨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양시와 경남 하동군의 경계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배알도라는 이름은 해수욕장 건너편의 망덕산(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소재)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1940년경 배알도에 정자가 세워지고, 주민들이 이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게
되면서부터 망덕리해수욕장이라 불리다가 점차 백사장이 줄어듦으로써
1970년 말에 폐장되었다
섬진대교와 태인도
2번 국도가 지나가는 태인대교를 연결하는 섬인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김이 생산된 곳이며 광양 김의 원산지이다.
본래 이름도 없던 한 바다말이 ‘김’이라는 이름을 얻은것은 300여년 전쯤이다.
이곳 태인도에 살았던 어부 김 여익이 섬진강 하구에 떠 있는 밤나무 가지에
이름모를 바다말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뜻어내어 돗자리에서
말려 밥상에 올렸더니 꽤나 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많이 거두어
들여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개펄에서 조릿대를 꺽어다 꽂아 양식을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김 양식의 효시라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바다말을 김 여익을 성을 따 ‘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남정맥길의 종착지(12:20)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갈라져 1500리길을(실거리 598.1km)
12개월 보름동안 걸어서(봄~겨울 산악회와는 조금 다름)
전라도 땅 16개. 시군을 거치면서 참으로 많은걸 배우고 느꼈다.
이젠 머나먼 여정의 무거운 베낭을 내리며 벅찬 감동에 희열을 느낀다.
남도 사람들의 후한 인심과 먹거리에 정말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
그리고 도강재 대장님을 비롯한 산악회 집행부에 정말 감사한다.
동료산꾼들의 훈훈한 情에 감사드리며 귀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지난해 낙동정맥 산행때 기분죤 산악회 때도 감동을 먹었는데
여기서 또 한번 호강을 한다. 가는 길이 달라 일시 헤어지지만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날이 있겠죠.
山友님들 늘 건안하시고 안산, 즐산하시길요
호남정맥 능선의 모든 山神님께 감사의 禮를 올리는
終山祭를 올리고 남도길을 마무리 한다.
그동안 우리 산꾼들을 돌봐주신 산신님들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들 왕림하시여 비록 약소하나마 음향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호남정맥 완주를 축하하는 꽃다발도 받고...
외망포구의 모습(13:00)
망덕산 바깥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외망이라 불렀고
마을 앞에 있는 포구를 합쳐서 외망포구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간단하게 종산제를 올리고 이곳에서 축하 파티를
하려 하였으나 이곳은 한꺼번에 50여명이 되는 인원을 수용할
만한 식당도 없거니와 “가을전어에는 깨가 서말”, “집나간 며느리가
전어굽는 냄새에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듯이 살이 오른
가을 전어의 맛을 제일로 치며 남해안지역에서 잡히는 가을전어 맛이
최고인 전어축제가 지금 이곳에서 열리는 기간이라 부득히 버스를
타고 하동I.C를 빠져나와 하동읍내를 거쳐서 청학동을 지나고 묵계터널
넘어서 산청 중산리 가는 아래에 우천정이라는 식당겸 펜션을 운영하는
곳에 1시간 30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걸려서 도착하고 샤워를 하고
호남정맥 완주 축하연을 연다.
하동 재첩마을(버스에서 촬영)
하동으로 가는 길옆에 재첩마을 가는 길이 보인다.
재첩은 5~6월 섬진강 하구를 끼고 있는 하동과 광양을 대표하는 명물음식이다.
이 철에 나는 재첩이야말로 1년 중 맛과 영양이 으뜸이다.
재첩에 부추와 소금만 넣고 끓여도 제맛나는 심플하기 그지없는 요리. 하지만 이 맛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쌀뜨물처럼 뽀얀 국물이 전해주는 개운한 맛은 속풀이에 그만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등 여러 산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기에 수려한 풍광과
깨끗함이 다른 강에 비할바 아니라고 한다. 이 맑고 깨끗한 섬진강에서
서식하는 섬진강 재첩마을의 재첩은 주민들이 직접 채취하여 만든 재첩국이다.
때문에 재첩 고유의 맛이 오롯이 살아있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40년전쯤 부산에 갔을때 이른 새벽에 아낙내들이 ‘재첩국 사이소’ 하고 외치는
소리는 그땐 알지 못했는데 이제사 그 뜻을 알것만 같다.
산청 우천정(宇天庭 : 14:40)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덕산 관광휴양림에 위치한 우천정(055-974-3366)
이곳은 특이한 형태의 황토로 지은 집으로 펜션과 민박과 찜질방도 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땀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샤워를 끝내고 행사장소로 모인다.
음식은 취나물로 싸먹는 한방돼지고기에다 산채정식이 깔끔하게 나온다.
동동주 맛도 괜찮았고, 그래도 가장 맛있는건 소주에다 맥주 말아먹는게 별미였다.
우천정의 모습
지리산 천왕봉의 모습
우천정에서 쫑파티를 끝내고 나오니 우천정 마당에서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이 손에 잡힐듯 선명하게 보인다. 이별의 아쉬움으로
모두들 거나하게 한잔이 되어 오후 5시가 넘었는데도 귀경할
생각도 하질 않는다. 서로 부여잡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서울 오는길은 연휴라 그런지 차량은 막히지 않아 휴게소에 3번이나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양재동에 도착하니 저녁 9시 20분밖에 되질
않고 집에오니 아무도 없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다 각각등보체로...
찬물과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끝내고 잠에 떨어져 일어나니 새벽 5시다
어제 수확한 밤
알도 굵고 토실토실 맛도 끝내준다. 산행길 걸으면서
발에 걸리는것만 줏었는데도 족히 소두 1말은 더 될듯싶다.
밤 주인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절대 밤은 딴게 아니라
줏은 겁니다. 그리고 누가 줏어도 줏을건데 길가에 있는걸
줏은 거니 양해 하시고 정말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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