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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한남정맥 (終)

한남정맥 제3구간 - 하고개에서 양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1. 10. 22.

○ 산행일자 : 2011, 10, 22(당일 산행)
○ 산행날씨 : 이른 아침에 비오다가 07시이후 갬. 산행하기 좋은 날씨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6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약 25.3km / G.P.S거리 : 27.8km / 9시간 35분 소요

○ 산행코스 : 하고개-부아산-영진골프랜드 옆-송전탑(NO:65)-42번국도(오일뱅크 주유소)-멱조고개-324봉

                 통화사 우회길-헬기장-석성산-마성터널-터키군 참전 기념비-작고개-할미산성-안현-검단지맥 분기점

                 88C.C-향린동산서문- 물푸레아파트 앞-영동고속도로 지하통로-182.4봉-아차지고개-어정가구단지 갈림길

                강남대 삼거리-202.2봉(무년산)-수원C.C철조망-녹원마을-대우 푸르지오 아파트-용인 선릉초.중교-

               구갈 2지구 주공 아파트 104동-면허시험장앞-양고개
○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기흥읍 / 구성읍 / 포곡면 

 

한주동안 머리 아픈 일을 식히는데는 산만큼 명약은 없는 모양이다.

사바세계에 사는 자체가 苦이긴 하지만 직업상 요즘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토요일에는 행사가 참으로 많다. 재경 의령군 향우회가 열리는 날이고

내가 활동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 포교사 체육대회도 있는 날이지만 모든걸 포기하고

산으로 향한다. 이제 1대간 9정맥을 서서히 마무리 해야할 시점에 모든걸 내년 6월 이후로

미루고 3년 6개월에 걸친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선 산 이외는 모든걸 포기해야 할것 같아서...

더군더나 한남정맥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탓에 사실 정맥길이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홰손이 된 탓에 脈에 대한 아른 의미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에 대한 열정에 누구보다 못지 않지마 도시화 되버린  한남정맥길은 혼자서

타는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그러던 차에 가장 홰손이 많이된 용인시 구간을

호남정맥 동지들이 탄다고 해서 토요일 바쁜 와중에 불구하고 따라 나선다.

이 분들은 용인 42번 국도에서 아침 7시 45분에 시작하는데  나중에 2구간을 두창리에서

이곳까지는 30km가 넘는 탓에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혼자서 하고개에서 시작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차를 가지고 집을 나선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개포동에서 출발하여  분당을 지나 죽전근처에서 순대국 한 그릇으로 아침밥을 먹고

양고개가 있는 용인 면허 시험장 옆에 차를 세우고 택시를 타고 용인 대학교 지나

하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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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하고개 터널(05:45)

용인 면허 시험장에 차를 파킹하고 택시를 타고 하고개로 향하는데 비가 자꾸만

내려 불안하기만 하다. 25분만에 도착하여 택시비 8800원을 주고 하차를 하여

산행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빗줄기는 가늘어진다. 그 바람에 거추장스런 우의는

입지 않고 장비점검을 한 다음에 터널옆 헨스 옆으로 들어서니 금새 바지가 빗물에

다 젖어 버리고 데크목 계단을 따라 터널위 동물이동통로로 오르다가 우측으로 접어든다.

하고개(鶴峴: 220m)

42번 국도에서 나와 우측으로 321번 2차선 도로로 오르니 상덕곡 마을로 넘어가는

하고개가 나타난다. 지도상에는 하고개로 나와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학고개로 부른다.

하고개옆 역삼동 구성(九星)말은 아홉 개의 별이 있는 마을이므로 3군사령부가 들어서게 됐고,

 이동면 어비리(魚肥里)는 고기가 살찌는 곳이므로 어비리저수지가 생기게 되었다는 등

 용인시 처인구엔 지명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용인대학교가 자리잡게 된 이유도 그 중 하나로 대학교 뒷산의 형상이 어린애를 업고

 어르는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인시(龍仁市)

땅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금구음수형(金龜飮水形, 거북이 물 마시는 모습), 금구몰니형

(金龜沒泥形, 거북이 뻘에 묻힌 모습),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 거북이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

 부해금구형(浮海金龜形, 바다위로 거북이 떠오르는 모습), 금구입해형(金龜入海形, 거북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금구입수형(金龜入水形, 거북이 물로 들어가는 모습), 구갑주형(龜甲胄形, 거북 등 모양),

금구하전형(金龜下田形, 거북이 밭으로 내려오는 모습) 등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풍수지리에서 얘기하는 명당보국의 길지로 알려진 곳이 많다.  

풍수에서 거북은 부귀와 장수 그리고 번창을 상징한다.

또한 풍수에서 형상이 제일 많은 대표적인 동물이 거북이고 하늘의 기(氣)을 먹고 사는 영험하고

신성한 동물로 알려진 거북은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로 팔괘를 완성하는데 낙서를 제공한 동물이

거북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거북을 금구(金龜)라고 부른다. 수지구가 거북이 머리에 해당하며

용인시청이 있는 곳이 거북이 배에 위치하고 있다. 

 

용인지방의 지리적 특성 중의 하나는 경안천, 탄천, 오산천, 청미천, 진위천, 안성천 등 대소 하천이

모두 용인에서 발원하여 인접 시. 군으로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용인지방이

분지를 형성하면서 인접 시. 군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멸오'나 '용구(龍駒)', '구성(駒城)'이 ‘높다’는 의미에서 표기된 지명이라면,

이미 삼국시대에 이와 같은 용인(龍仁)의 지리적 특성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용인시(龍仁市)에서 '용(龍)'자가 들어가게 된 유래에는 이런 설화가 내려온다.

인시의 좌측으로는 투구봉이 있고 우측으로는 칼봉이 자리잡고 있는데, 봉우리의 형상이

투구와 칼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투구봉과 칼봉 사이에는 넓은 터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장군대지형의 땅'으로 믿고 있다.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기에 꼭 알맞을 정도의 넓은 지형이다.

 옛날에 남씨 문중에서 이곳에 묘를 썼는데, 그후 얼마 안 있어 그 문중 가운데 한 집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다.

아기는 낳은 지 사흘 만에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났으며, 힘 또한 장사여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아기장수가 태어날 무렵은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로,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간에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혹 다른 집안 자제 가운데 훌륭하게 될 소지가 있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물론 그 집안 전체를 몰살하였다.

열세에 몰려 있던 남씨 문중에선 아기장수가 태어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이라고 불안해했다.

남씨 문중에서는 전체 회의를 열어 숙고한 끝에 아기장수가 성장하기 전에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워낙 힘이 센지라 여럿이 커다란 바위로 눌러 죽였다.

아기를 양지 쪽에 묻어 주려고 땅을 파보았더니 거기에서 투구와 칼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남씨 가문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날 때 장군대지형에서 마주 보이는 액교산에 있는 바위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울었다고 한다. 이 용마는 아기장수가 죽자 태울 주인이 없음을 슬퍼하며

 성산(城山, 석성산)을 향해 달려나갔다. 현재 고림리의 액교산에는 용마가 났다는 용마바위가

아직도 전하는데, 용마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 지역은 이런 설화가 많다. 「고장군 묘소 전설」, 「아기장수와 용마바위」,

「유방리의 남씨네 아기장수」등이 내용이 비슷하다. 이것이 훗날에 조선시대의 남이장군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이런 전설들이 전해져 삼국시대의 구성현(駒城縣)이 고려 초 용구현(龍駒縣)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아산(05:55)

지도상에는 부이산이라고 표식을 해두었건만 어둠속에 아무것도 확인을

할 수가 없다. 좌측은 꽤나 호화로운 묘지들이 가끔 보이고 우측의 용인 시가지는

아직도 불빛이 화려하다.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비에 젖은 바지가랑이 불편하기만 하다.

6시이건만 아직도 칠흙같은 한밤중에 헤드렌턴을 끼고 홀로 걷는 이 마음 참으로 편안하다.

역시 산은 혼자가야 제 맛인 모양이다. 심심하여 MP3를 끼고 금강경 독송을 들으면서

걷는 이맛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부아산(負兒山402.7m:06:20)

조선시대에 이 중환이 쓴택리지부아산에 관한 기록으로'죽산의 칠장산(七長山)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 부아산(負兒山)

일으킨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네미고개(水踰峴)에서 끊어져 평지가

되었다가 함박산과 하고개(鶴峴, 학고개)를 거쳐 부아산에서 높이 솟았다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2등급 삼각점이 박혀있고, 정자와

 벤치까지 설치되어 있다. 아직도 용인 시내에는 불빛이 불야성처럼 보인다.

1995년에 출간된『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는 다음과 같은 부아산의 유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홀로 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외아들을 키우며 사는 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하지만 남들

부러워할 만큼 부친을 잘 봉양하였다. 할아버지 역시 손주를 끔찍이 아껴 항상 집안에 화기가 돌았다.

어느 해, 남편이 관가에서 시키는 부역 때문에 여러 날 집을 비우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며느리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는 아들 대신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돌아올 때쯤이면 항상 아이를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렸.

그런데 웬일인지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업은 며느리는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길을 헤매게 되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혹시나 시아버지가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와 호랑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런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테니 우리 시아버님은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어린아이를 호랑이 앞에 주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금하지

못했으나 며느리의 간곡한 애원으로 결국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시아버지가 낙담하며,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텐데, 어째서 어린아이를 죽게했느냐?" 하였더니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부모는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 하며 마음 상하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였다.

시아버지도 며느리가 더욱 마음 아파할까 봐 겉으로는 슬픈 척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사람들은 부인이 아이를 업고 헤맨 산’이라고 하여 '부아산(負兒山)' 이라고 부르고, 어린아이

할아버지를 찾던 고개’라고 하여 '멱조현(覓祖峴, 멱조고개)'이라고 이름 붙였다.

부아산 아래에 있는 코리아 C.C와  골드C.C에는 이른 새벽인데도 골퍼들을 맞이하기

 위해 라이트를 불야성처럼 켜놓고 있다. 부아산 정상에서 약간의 심호흡을 다진

다음에 지곡리로 표시한 이정표를 따라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바로아래 능선에는 산불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급경사가 나타난다.

이른 새벽에 비에 젖은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혼자이기에 이런데서

다치면 대책이 없기에 조심스럽게 내려서니  새로 설치한 NO19번

철탑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90도 꺽어서 철탑을 따라 정맥길을 간다.

NO19번 철탑(06:35)

서서히 아침은 밝아오기 시작하는데 비가 온 후 흐린 날씨탓인지

아직도 주위는 어둡기만 하다. 반가운 꼬리표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편안한 능선을 따라 계속하여 내림길을 내려가니 우측에 예전에

자주 다녔던 PAR3골프장과 인도 연습장이 있는 영진골프랜드가

나타나고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엄청나게 깊이 파인 도로가 지곡 저수지

가는 길임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보인다.

지곡리 넘어가는 도로(06:45)

엄청나게  높은 절개지를 내려오려니 비에 젖은 풀섶 때문에 신발창까지

젖은 탓에 자꾸만 불편하다. 절개지를 타고 내려오다 지곡리 낚시터 넘어가는

도르를 건너 급경사의 철계단을 오르니 시그널이 한남정맥임을 알려준다.

이곳도 정맥길은 송전탑만 따라가면 된다. 지나온 부아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찾기 힘든 정맥길에 만나는 시그널은 확실한 등대역할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어둠속에 지나온 부아산과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송전탑들

NO 65번 철탑(07:15)

호젓한 길을 걸어오니 65번 송전탑을 끼고 내려오다 여러갈래 난길을 따라

중앙으로 내려오니 차량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수로를 따라 내려오니

길 건너에  오일뱅크 주유소가 보이고 42번 국도가 나타난다.

산부추의 꽃도 이쁘게만 보인다.

정맥길의 이정표가 되주고 있는 42번 국도가의 오일뱅크 주유소

42번 국도(07:40)

인천 ~ 동해선(國道制四十二號 仁川東海線)은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시흥시와 안산시를 거쳐 수원시를 지나 강원도 동해시까지 연결하는 일반 국도이다.

 

지하통로가 없어서 무단횡단을 해야 하는데 6차선의 넓은도로에 엄청나게 많은

교통량 때문에 건너는데 상당히 신속한 행동을 요구한다.

다행히 신호등 때문에 공간이 생긴다. 신속하게 중앙 분리대를 뛰어넘어 도로를

건너니 여기서 만나기로 한 호남정맥 동지들을 만난다. 3주만에 만나지만

눈물나게 반가운 사람들... 레인저회장님, 렌총무님, 참이슬, 바람대장님, 고문님, 아리아리님등

모두 모두 반가운 열굴들이다. 눈가에 진물이 나도록 보고픈 사람들...

주유소 좌측의 절개지를 타고 올라야 하는데 아주 급경사라보 통 힘이 드는게 아니다.

천신만고끝에 미끄러운 길을 올라 정맥길에 오른다.

능선에 오르니 벌목을 한 산이 나타나고 저 멀리 석성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립용인정신병원 [市立龍仁精神病院]

1987년 서울특별시에 의해 설립되어 의료법인 용인정신병원이 위탁경영하고

있는 정신과 전문병원이다. 전문 신경정신병원으로서 시민의 정신건강에

 이바지하며 지속적인 정신의학 연구 및 교육을 통하여 정신의학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한다는 목표 아래 설립되어 주로 의료보호 대상자의

진료를 맡고 있다. 도심에서 벗어난 전원적 환경과 잘 갖춰진 시설로 정신과

환자의 전인적 요양과 치료에 힘쓰고 있다.

2000년 현재 504병상 규모로 신경과·정신과 2개 진료과를 설치하고 있다.

 전공의(레지던트) 수련기관으로서 신경과 및 정신과 전문의 양성의 요람이 되고 있다.

정신병원 갈림길을 지나니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용인 배수지가

정맥길을 짤라먹고 산꾼들을 철조망 밖으로 내몬다. 미끄러운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동백지구가 보인다.

화운사 가는 길

화운사는 조계종 2교구인 용주사의 말사로서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에 있는 화운사

(華雲寺)는 한남정맥 능선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화운이란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서 꽃구름이 피었다는데서 붙인 명칭이다.

멱조고개(覓祖峴 170m:08:20)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고개로 용인정신병원에서 용인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고개로 현지인들은 메주고개라고도 부른다.

부아산의 효부 이야기의  전설에 관련된 ‘할아버지를 찾아 넘던 고개’ 라는 뜻이다.

요즘은 고갯마루를 따라 용인경전철이 설치되어 있는 메주고개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지나는 길목으로 천년 고갯길이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동래(부산)를 연결하는 최단거리로 멱조고개는

 고려시대 부터 역로(驛路)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0여년전에 이곳을 지날때는 꾸불꾸불한 편도 1차선 도로였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많은 차량이 다녀 격세지감을 느낄수가 있다.

 

수원과 인천을 연결하는 수인선과 함께 수원에서 여주까지 연결하는 ‘水驪線’

우리나라에서 첫 협괘열차가 지나 다녔던 멱조고개...일제시대에 사설철도회사인

‘조선경동철도’에서 여객열차와 화물열차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주로 이천쌀과

소금을 운반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1930년에 개통하여 삼박골과 김량천교를 건너

용인으로 다녔던 이 열차는 1972년에 적자폭을 감당하지 못해 없었졌다고 한다. 

화운사 입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무단횡단을  감행하여 길을 건너니 요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용인 경전철이 정맥길을 짤라 먹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인도를 따라 동백지구로 내려가 S-OIL 주유소가 나오는걸 보고 우측으로

경전철 통로를 지나 우측으로 돌아 셀트리온 기술연구소 공사 현장으로 따라가니

또 길이 끊어졌다. 또 다시 돌아나와 아파트 공장을 지나 우회길을 따라 능선으로 오른다.

용인 경전철 지하통로도 지나고...

울님의 입술만큼이나 빨간 이름모를 열매

절개지 끝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멱조고개라는 신작로를 지났는데 한참이나 올라온 이곳의

나무가지에 멱조고개라는 팻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동래정씨 가족묘도 지나고...

오늘은 여유롭게 산길을 걷는다. 여기서 물한모금을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걷는 길은 겨울 준비를 하는

정맥길은 낙엽으로 누렇게 채색이 된 느낌이다.

324봉(08:50)

324봉에 올라서 좌측으로 내려가니 석성산 가는 길이 나타나고 등산객이

보이기 시작한다. 좌측으로 호화청사로 비난받는 용인시청 행정타운 가는 길이다.

석성산 우회길(09:05)

조금 지나니 콘크리트 도로가 나타나고 군부대 때문에 부득히 우회길을 택한다.

가는 길에 유명한 성샘은 가뭄탓에 말라버려 물이 한방울도 없다.

 

성산샘

서울에 사는 큰 벼슬아치가 돌아가신 부친을 모실명당을 찾아 지관을 데리고

남쪽지방을 다 둘러봐도 마따안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용인을

지나다가 성산이 마음에 끌려 올라가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중에 동부 8부쯤

높은 곳에서 명당을 찾았다. 날을잡아  이곳으로 부친의 묘를 이장하기로 하고

상여가 길도없는 현장에 도착, 인부들이 땅을 파니 땅속에서 큰 물이 솟구쳐

가만두면 산 아래 마을에 홍수가 날것 같았다.

벼슬아치는 크게 놀라 지관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이 산이 호랑이 형상이고

이 터가 호랑이의 눈으로 눈물샘을 건드려 물이 나오는 것으로 이 일을 막으려면

저기 큰 바위를 옮겨 이 물구멍을 막아야 한다.” 하여 천신만고 끝에  큰 바위로

물을 막으니 물이 잡히고 바위틈에서 조금씩 샘물이 솟아 지금의 약수터가 되었다고 한다.

군 통신부대가 정맥길을 접수하는 바람에(?) 우측 통화사로 우회를 한다.

콘크리트로 포장한 우회도로 아래에는 단풍이 참으로 이쁘게 물이 들었다.

호젓한 길을 계속해서 걷는다. 오늘 처음 산행을 같이한 아리아리님은

연신 카메라 셧터를 눌러대며 열심히 기록을 한다. 내공이 대단하신 분 같다.

단풍이 곱게 물든 통화사 길

이런 호젓한 길을 나홀로 걷는다. 일상의 찌든 스트레스를 털어버리고 싶다.

산에 미친 탓인지 자꾸만 산 때문에 다른것에 담을 쌓고 사는것은 아닌지?

석성산성(石城山城)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석성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약1500년 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이고 쫒기는 백제군을 몰아

남하하다 이곳을 장악했을 당시 축성한 것으로 추측한다.

석성산성(石城山城), 성산성(城山城)이라 하며 보개산성이라고도 한다.

흔적이 조금 남아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축성연대는 475년경이며 길이는 약 2km이다.

석성은 험악한 산세를 이용한 천혜의 요새로서 경사가 완만한 동쪽에만 반원형으로

 남아 있다. 산 서쪽에는 관음사, 동쪽에는 통화사와 백령사가 있는 등 산의

규모에 비하여 사찰이 많은데, 관음사는 큰 사찰이었지만

2001년원주쪽 고려사로 이전하여 빈 건물만 남았다.

통화사 입구(09:10)

통화사 원통보전(09:20)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 78번지 석성산 중턱에 아담하게 자리 하고 있다

일주문은 없고 경내에 들어서니 요사체겸 종무소 같은데 인기척이 전혀없다.

원통보전 마당에는 낙엽이 가득하고 법당문은 굳게 잠겨있다.

부처님은 친견도 못하고 마당에서 저두삼배로 합장하며 보이지도 않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뒷편 삼성각으로 향한다.

미륵보살과 삼성각

원통보전 뒷편에 있는 삼성각 앞에는 미륵부처님이 계시고 우회로 하여

정문으로 나와야 하는데 앞서간 동료들을 따라잡기 위해 삼성각 뒷편 산으로

올라가니 곧바로 석성산으로 가는 길로 합류한다.

정맥 등로에서 바라본 통화사 원통보전과 삼성각의 지붕

호젓한 석성산의 등로

석성산 봉수대(石城山 烽燧臺) 가는  길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과 포곡읍 마성리에 걸쳐있는 석성산 북서쪽

능선에 걸쳐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로 현재는 토석단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봉두라지’라고도 부르며 1796년(정조 20)에

화성봉돈(華城烽墩)이 축조되면서 제2거인육봉이 용인의 석성산에서

수원화성의 안산 봉수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잘 발달된 등로는  용인의 진산답게 등산객이 꽤나 많다.

헬기장에 올라서니 어느 직장에서 온듯한 단체 등산객들이 떠들면서 막걸리 파티를 벌인다

조금 지나니 팔각정이 나타나고  석성산 정상이 나타난다. 내가 통화사에 들린 사이에

동료 산꾼들이 먼저 도착하여 정상에서 파는 막걸리를 한잔씩 하고 계신다.

동료가 사주는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주위를 살핀다.

석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용인 동백지구와 영동고속도로... 그리고 오늘 지나온 능선들

석성산(石城山: 471.5m : 09:45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포곡읍면 마성리 처인구 유림동 등 3개

지역에 연결되어 있는 산으로 부아산,광교산과 더불어 용인 지역의 3대

 명산으로 불린다. 광교산이나 법화산, 향수산 등 이곳 산들의 조산(祖山)으로

 용인의 진산(鎭山)으로도 불린다. 진산은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이고 쫓기는 백제군을 몰아

남하하면서 이곳을 장악했을 당시인 475년에 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을 오악(五嶽)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는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택리지》의 기록이 있다.

부아산에서 법화산으로 이어주는 석성산은 용인시에서 10번째로 높은 산이다.

일명 '성산(城山)' 또는 '구성산(驅城山)'이라 부른다. 또한 '보개산(寶蓋山, 349.7m)

이라고 혼동하여 부르고도 있다. 그래서 조선 중기에 제작된 『용인현지도읍지』의

 고적조(古蹟條)에는 보개산과 석성산을 구분 지어 설명하고는 있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못하다.

 

   
▲ 석성산 정상

제1경. 성산일출 - 육중한 산세,

성스런 자태, 용인 최고봉 만난다 성산(해발 471.5m)은 용인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매년 용인시민들의 새해 첫날 일출맞이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처인구 삼가동,역북동과 기흥구 구성동에 걸쳐있으며 석성산, 구성산으로도 불린다.

 
▲ 어비저수지

제2경. 어비낙조로 유명한 어비저수지 
경기도내 최대 규모 저수지, 석양의 감동에 잠긴다 처인구 이동면 어비리 저수지에

여울진 석양의 낙조이다. 황홀한 감동을 자아내는 장관을 연출한다.

본래 어비리를 지나던 큰 내가 있었고 예전에 이를 장호천이라 했는데 저수지가

되어 마을 명칭대로 어비리가 되었다.

 
▲ 용담저수지 연꽃

제3경. 곱든고개와 용담조망 - 못에서 용이 승천 한다

칠봉산과 문수봉 사이의 곱든 고개(처인구 원삼면 사암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황금들판 사이로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용담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한국의 고향마을 풍경이다. 용인 백옥쌀이 생산되는 곡창지대이기도 하다.

용담저수지는 저수지에 용이 승천하여 예전부터 이곳을 용못 또는 용담이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광교산 설경

제4경. 광교산 설경 - 설산(雪山)의 진수

수지구 광교산(해발 582m)은 처인구 성산과 더불어 용인의 2대 명산이다. 광교산은 용인시와 수원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용인시 관내에는 수지 신봉동, 고기동, 동천동에 걸쳐있다. 광교산의 주봉인 시루봉이 용인시에 속해 있으며 시루봉 정상에서 보면 수지 일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광교산에 눈이 내려 나무에 수북이 쌓여있는 설경을 일컫는 ‘광교적설’은 이 산의 겨울 절경을 이르는 말로 내려온다.

   
▲ 선유대

 

 

 

 

 

 

 

 

 

 

 

 

 

 

 

 

제5경. 선유대사계 - 선비, 신선이 되어 시조와 풍류를 즐긴다

처인구 양지면 제일2리에 위치한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전하는 선유대는

조선 후기 풍류를 좋아하는 마을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정자와 연못

주변에서 아름다운 사계절의 자태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시조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 조비산

 

 

 

 

제6경. 조비산 - 용인의 가장 아름다운 산, 동양화 따로 없다

용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조비산(해발 260m)을 꼽는다.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석천리, 장평리에 접해 있는 해발 295m의 높지 않은 돌산이다.

 새가 나는 형상이라 해서 조비(鳥飛)로 명명됐다고 한다. 황금들판 가운데 봉우리가

 돌연히 우뚝 솟아 돌을 이고 있는 듯 특이한 형상을 지녔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그

 모습의 아름다움과 멋이 다양한 곳이다. 조비산은 산에 얽힌 전설과 이야기도 많다.

다른 산들은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 조비산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 있어

역적산이라고 했다는 속설도 있다.

 
▲ 비파담단풍

 

 

 

 

제7경. 비파담 만풍 - 비파 소리와 단풍

용인팔경의 제7경으로는 처인구 모현면 갈천1리 파담마을 일대 가을 풍광을 꼽는다.

 비파담 만풍은 조선 현종, 숙종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 선생이

파담마을에 낙향해 이 일대 빼어난 풍광에 반해 정자를 짓고 비파를 연주하며

 풍류를 즐겼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울창한 숲과 백로들이 나는 모습이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 가실벚꽃

 

 

 

 

 

 

제8경. 가실벚꽃 - 호암미술관 가는 길, 천상으로 비상 한다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에 위치한 호암미술관 가는 길이 가실벚꽃길이다.

미술관 향하는 왕벚꽃나무 터널은 용인시민들이 사랑하는 산책로이다.

 세속을 떠나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봄철 벚꽃 풍광 뿐

아니라 사철 각양각색 비경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호수에 잠시 멈추어 형형색색

금붕어와 물오리들과도 벗할 수 있는 볼거리 많은 곳이다. 국내 최대규모의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은 한국미술품 1천 2백여 점을 소장(국보·보물 지정 문화재

100여점 포함)한 곳으로 전통한옥 형태 본관, 전통정원 희원, 부르델 정원들로 구성됐다.

오늘은 날씨는 썩 좋은 편은 아니나 가시거리는 엄청나게 좋다.

저 멀리 북한산과 관악산, 청계산과 광교산 그리고 좌측에 수리산까지 보인다.

한남 정맥 구간의 함박산과 부아산 그리고 화성 동탄까지 훤히 보인다.

석성산 삼각점(△ 수원 321 1983 재설)

석성산에서 휴식을 겸한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고 주위의 멋진 조망을 한 다음에

우측의 내리막길로 하여 작고개로 향한다. 비가 온뒤라  등로가 미끄럽긴 하지만

낙엽이 떨어져 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한다. 좌측의 동백지구 아파트 가는길이 보이고

곧 바로 직진하니 에버랜드 들어가는 마성I.C 나타나는데 일요일이라  에버랜드

놀러가는 차량이 엄청나게 많다. 난 40여년을 서울 살면서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곳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한남정맥 구간이 끊겨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지 안내판이 붙어있다.

마가실 서낭(10:15)

석성산 들머리에 할미성 원주 대동굿 보존회가 세운 마가실 서낭(魔姑仙人)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과거에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무사안녕을 빌던 곳이란다.

 

대동굿이란 온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펼쳐지는

굿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전승되고 있는 “도당굿”과 같은 형태로 나타내고

있으며 용인 할미성 대동굿은 일반적으로 도당굿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나 마을의 풍장패가 길놀이 풍물굿을 먼저 친 다음에 他洞에서

동참하기 위해서 오는 풍물을 맞아 들이는 것이 색다른 모습인데

그 규모가 크다고 해서 ‘대동굿’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가실 서낭이란 이정석으로 내려오니 철계단이 있고 지하통로로 들어서니

마성 I.C로 하여 에버랜드 들어가는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작고개로 들어선다.

좌측 도로로 향하니 다행히 나가는 차량은  그리많지 않아 다시 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지나온 석성산이 보이고 길 건너편에는 6.25때 참전한

터키 참전 기념탑을 바라보면서 우측 산으로 오른다. 교통경찰이 있으면

딱지감인데... 고속도로 무단횡단하면 범칙금이 얼마지? ㅋㅋㅋ

에버랜드(10:25)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전대리·마성리·유운리·신원리 일대에 있는

총면적 14.88㎢로 포곡면 전체면적의 1/3을 차지하며, 1977년 경기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1996년 3월 용인자연농원에서 에버랜드로 개칭되었다. 동양 최대의

기업적인 인공 관광지이다. 에버랜드 내에는 잣나무·오동나무 등을 심어놓은 국내

최대 규모의 경제조림단지(6.61㎢)와 밤·호두·살구·은행 등의 과수·유실수 단지(5.46㎢)를

 비롯해 양돈단지(0.99㎢)·종합묘포장(0.66㎢)·양어저수지(0.13㎢)·가족동산(0.33㎢),

그리고 민속관·미술관·연구원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는 종합문화 센터(0.33㎢)가 있다.

1976년 4월 문을 열었다. 삼성그룹은 전국토의 약 70%가 산지인 한국의 현실에

 맞춘 국토 이용사업으로, 급경사의 고지대는 경제조림단지를 조성해 임야지대로

하고 완경사지역은 과수·유실수 단지를 조성했다. 양돈·양어·묘포장은 토질이 불량한

지역을 이용했고, 산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오락 시설을 곳곳에 건설했다.

 

 자연동물원에는 세계 최초의 사자와 호랑이 혼합 방사장(放飼場)을 비롯해

200여 종(種) 4,500여 마리의 동물이 있다. 또한 식물원에는 세계에서 수집된

150여 종의 장미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는 베고니아를 비롯한

각종 희귀식물이 있다.그밖에 대규모 물놀이 시설인 캐리비안 베이와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경주시설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 종합 캠프장인 로그캐빈,

 호암미술관 등의 문화·체육시설도 갖추고 있다. 1978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은

 군선도병을 비롯한 국보 28점, 평저주형토기를 포함한 보물 53점이 소장되어 있고,

 각종 전통 석조물과 사군자를 포함한 자생화초를 배치하여 한국 전통의 멋을

재연한 전통정원인 희원(熙園)이 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35㎞쯤의 거리에 있어

자동차로 1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접한 곳에 한국민속촌과 양지파인리조트를

 비롯해 용인한화리조트, 수원 컨트리클럽 등 여러 개의 골프장이 있다.

작고개(210m:10:25 )

용인시 기흥구 동백리에 있는 고개로 에버랜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일반적으로 마성고개라고 많이들 알려져 있다.

원래의 이름은 잣고개로 잣나무로 만든 배가 지나갔다는 전설과 잣나무가

많았다는 고개로 백현(栢峴)으로 전대리에서 어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백제와 연합해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한강 중상류 일대는 신라가 차지하고. 백제는 그들의 옛 도읍지가 있던 한강

 하류유역을 수복했다. 하지만 신라는 곧이어 진흥왕14년(553) 한강하류

유역마저 백제에게서 탈취한 후 그곳에 신주라는 지방행정을 설치하면서

용인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때 할미산성도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신라시대에 쌓은 성터로 추정되는 할미성을 마고할미가 쌓았다고

 해 “마고성(麻姑城)” 또는 마귀(魔鬼)할미가 쌓았다고 하여 “할미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산성을 넘는 이 고개를 작고개라 했다.

남쪽성벽 입구 나무기둥에는 누가 언제 달아놓았는지 “작고개” 라는 안내판도

 빛바랜 채 걸려있다. 성(城)의 옛 우리말은 “잣” 또는 “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마성I.C 앞 도로에서 동료 산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산으로 오른다.

6,25 터키 참전 기념탑

이렇게 찾기 힘든 곳에서 시그널은 늘 고마운 존재이다.

이 산 아래로 영동고속도로 마성터널이 지나가는 곳이다.

영동고속도로의 한부분인 마성터널을 사이로 북쪽으로 작고개와 할미산성,

보개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석성산, 보개산성, 석성산 봉수,

 금수암지(金水庵址)로 이어진다. 또한 보개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향수산, 법화산으로

 이어주고 서쪽으로 인성산(仁聖山:122.4m, 용인)으로 이어 수원의 형제봉(448m,

수원시 장안구, 용인시 수지구), 광교산의 산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보통 상대고도 해발 300m 이상 되는 경우를 산지(山地)라고 하고 그 이하는

구릉지(丘陵地) 또는 저산성(低山性) 산지(山地)라고 표현한다.

산지가 연속된 것은 산맥(山脈)이라고 한다. 보통 '~산(山)'이라는 명칭이 붙지만

 '~봉(峯)'이라는 지명 접미사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용인시 포곡면 영동고속도로 에버랜드 길목. 서쪽 산 정상에 자리 잡은 할미산성은

진천. 안성 지역사람들이 서울을 갈 때 지름길이 됐던 옛길이었다.

용인지역에서 석성으로 유일한 할미성은 석성산 정상에서 한눈에 조망된다.

테뫼식 산성으로 북쪽은 높고 남쪽은 경사가 완만하면서 남북이 동서보다 긴 형태이다.

산성 둘레는 660m. 성안 북쪽 정상 아래는 용도를 알 수 없는 180여m 석축이

늘어져 있어 내성의 느낌을 준다. 성벽 높이는 약 4m로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성벽 하단부는 원형으로 남아 있으며. 상부는 거의 붕괴돼 바깥쪽으로 흘려 내렸다.

남서쪽에는 치성형태의 성벽이 무너져 있다. 성안은 넓은 평지가 있어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조각은 대부분 삼국시대

 초기의 유물이다. 우물자리는 현재 보이질 않는다. 동쪽의 지대가 낮은 곳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땅', '문지(門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다.

할미산성(349.3m : 10:50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할미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성 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180m의 공유 벽을

기준으로 북쪽의 내성과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이 되며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높은 지대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외성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형태상 사모형(紗帽形)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m로 할미산성의 정상부와 그 남쪽의 능선을

둘러싸며 협축하였고 내,외벽 기저부에서 보축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최정상부에서 매납 유구와 아궁이, 평지에서는 적심석이 나왔으며

수구지와 토광 등이 조사되었다.

 

할미산성은 조선 후기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考》에는

지금은 폐성(廢城)이 된 고모성(姑母城)이라  기록이 되었다.

그 이후에《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고려시대에 한 노파가

하룻밤에 성을 쌓았다’ 라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어 오랫동안

고려시대의 성곽으로 이해되어 왔다.

석성산 정상에는 펑퍼짐한 공터가 나타나고 낙엽이 가득한다.

나무 한그루에 무속인이 한것인지는 몰라도 소지종이로 만든 것 같은 것을

잔뜩 붙여놨다.  혹시 마고 할머니가 붙혀놧나?  이곳에서 시간이 어중간 하긴

하지만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각자 가지고 온 음식으로 즉석 산상부페가

펼쳐진다. 거기서 곡차가 없으면 되겠나. 회장님, 렌 총무님 등 비주류는 빼고

참이슬, 바람대장, 고문님, 범여 등 주류는 오늘도 교외(郊外)에서 어김없이

일요일날 주(酒)님을 모신다. 술 종류을 불문하고... 7명의 단촐한 식구 때문에

여유롭게 시간에 쫒기지 않고 30여분간의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식사를 끝낸후에  할미산성을 출발하여 편안한 걸음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향린동산 쪽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이곳 할미산성 아래의  산의

80%는 향린동산 소유라고 한다. 곳곳에 철조망으로 맥길을 막아놓아

이기적인 냄새가 진동을 한다. 우측 산아래 최근에 생긴 글렌로스 골프장엔

일요 라운딩을 즐기는 골퍼들의 모습도 보인다.

안현(11:45)

용인시 기흥구 북동부에서 포곡읍 서부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산을 넘어가는 능선부로서 주요 교통로서 이용된다. 보통 고개라는 지명이 쓰이지만

이 밖에 재·현·치·령 등의 지명 접미사가 쓰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큰 고개에는 치(峙)나 령(嶺)이 쓰이고 작은 경우는 고개·재·현 등이 쓰인다.

고개는 그 지역 산지 중 가장 높은 곳을 통과하는 관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인시는 전형적인 구릉성 산지 지역으로서 각 구릉지를 넘는 50여 개의 고개가 있다.

대부분 고개라는 지명이 붙었지만 일부는 재·현 등의 지명이 쓰이고 있다.

그중에서 현으로 쓰는 고개는 이곳 안현과 작고개로 불리는 백현이 있다.

검단지맥 오름길에 향수산이란 코팅지가 붙어있으나 이곳은 아무래도 향수산은

아닌듯 싶다. 조금후에 검단지맥 분기점이 나타난다.

검단지맥 분기점(12:05)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법화산(383m), 불곡산(335m), 영장산(414m), 검단산(542m), 청량산(438m), 용마산(596m), 검단산(657m)을 거처 하남시 창모루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한강에 넘겨주는 도상거리 43km인 이 산줄기를 한남검단지맥(漢南黔丹枝脈)이라 부른다.

 

향린동산을 향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좌측으로 가서 향린동산 서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등로가 뚜렷하지 않아 우측으로 계속 내려 갔더니만 88 C.C가 나와 버린다.

원칙상 이곳이 정맥의 정코스가 맞으나 골프장이  정맥길을 짤라 먹는 바람에 88 C.C의

동코스와 향린동산 우측 능선을 타고 내려와야 맞으나 속칭 알바를 한 것이다.

다시 올라갈수도 없고하여 동코스의 PAR 5홀을 가로질러 튀어 나가니 티샷하는 골퍼들이

깜짝 놀란 모양이다. 잠시후 마스타가 카트카를 타고나와 나가라고 윽박을 지른다.

이럴때 대처요령은 누구보다 잘아는 범여인지라 일단 큰소리를 친다.

그러면 그 친구들이 골프장 이미지차원에서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고분고분 나오기에...

(낙동정맥(통도사 C.C)과 낙남정맥(김해 가야 C.C) 골프장 통과하며 써먹은 수법임)

잠시후에 고참 마스타가  카트카를 타고 나타나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여 준다

진작에 그렇게 나와야지... 2번홀을 우회하여 클럽하우스를 거쳐 도로를 타고 빠져 나온다.

이곳은 단풍이 참으로 곱다. 오늘의 홍일점 렌 총무님의 뭣진포즈

골프장 카트 도로에서 정맥길을 확인하고...

88 C.C 정문을 빠져나와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니 무릎에 불이나는 느낌이다.

허기도 지고하여 잔디밭에 앉아 과일과 이슬이 한병을 비우고 길을 나서니

향린동산 서문이 나타난다. 앞으로 한참을 더 걸어야 하는데 말이다.

조금 더 내려오니 정맥길을 향린동산 측에서 철조망과 대문으로 꼭꼭 막아놨다.

결과론이지만 골프장으로 잘 내려온 셈이다. 있는자들의 오만함의 극치를 보는 느낌이다.

지금은 누가 사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의 이기주의를 보는 느낌에 씁쓸하다. 

하나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다고 하는 기독교의

 10계명중 1을 보면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물론 깊은 뜻이 있겠지만

유독 다른 종교에 비해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의 이기주의 배타심은 다른 종교에 비해

심한 느낌이다.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나의 종교도 소중할 터이거늘... 그리고 예수님도

뜻도 그게 아닐터인데... 아마 성직자들의 왜곡된 전달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향린동산(13:00)

한국의 대표적인 전원주택 단지로 불리는 향린동산을 1970년 향린

교회 교인 30명을 포함한 100여명이 각자 30만원씩을 내어 지금의

향린동산 자리 23만평의 산과 전답을 매수하여 전원주택단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향린동산 주택의 모습

철통같은 보안장치와 철조망이 마치 安家를 연상케 한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저 속에서 살까? 궁금하다. 저렇게 살면

맘이 편안할까.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천당에 가는걸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힘들다고 했는데 말이다.  잘 사는걸 탓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향린동산 입주민의 공지사항

향린동산 서문을 지나 계속해서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내려 온다.

골프장으로 가는 자가용들을 피해 가면서 내려오니 PAR 3 골프장과

인도어 연습장 가는 도로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조금 가다가 우측으로

물푸레 아파트 단지쪽으로 간다.

우측에 보이는 아파트가 최근에 입주한듯한 물푸레 아파트 단지이다.

방음벽 도로를 지나간다. 오늘은 아파트와 도로 구경을 나선 느낌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진 한남정맥길을 걷는다.

물푸레 아파트 단지(13:30)

경기도내의 용인과 수원 지역에 있는 석성산(보개산)과 법화산, 광교산은 높은 지역에 속한다.

용인 · 수원 지역의 지리적 특성 중의 하나는 경안천, 탄천, 오산천, 청미천, 진위천, 안성천,

유천, 성복천, 갈천 등 대소 하천이 모두 용인 · 수원에서 발원하여 인접 시. 군으로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용인 · 수원 지역이 분지를 형성하면서 인접 시.

군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된다.

건너편의 법화산은 법화경에서 이름을 따온 구성동의 중심 산으로 마북동,

 청덕동과 모현면 오산리에 걸쳐있다. 더구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으로

 불리는 탄천(炭川)의 발원지 부근은 ‘옛날부터 물푸레 나무가 많고 항상 푸른 물이

많이 흘러 내린다’고 하여 청덕리 혹은 물푸레골이라 불리고 있다.

 

반면에 석성산에서 발원하는 오산천(烏山川)은 기흥읍 중앙을 가로질러 신갈저수지로 흘러든다.

영동고속도로의 마성터널이 뚫려 있으며, 산 북쪽 능선 끝에는 마성톨게이트가 있고

그 뒤쪽으로 에버랜드가 펼쳐져 있다. 마성터널을 사이에 두고 석성산쪽은

동백동, 법화산쪽은 청덕동으로 나눠있는 지역이다.

영동고속도로 구성I.C의 모습

청덕리 앞 도로를 따라가다 구성 교차로 지하통로 옆 골동품 가게인 지인방을 끼고

좌회전하면 지하통로가 나온다.

다시 영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좌회전하다가 오르막 주택지로 올라선다.

주택지 좁은 골목을 올라서면 좁은 골목이 나타나고 조금 지나니 본향교회가 있고

좌측에 커다란 광도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다.

광도 아파트 단지 버스 정류소(13:40)

이곳 도로를 따라 걷다가 좌측 능선옆 주택가로 올라서면 182봉이 있고

밤나무가 심어져 있고 주변 공터에는 지주들의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텃밭들에는무우, 배추를 비롯한 야채들이 심어져 있다.

영동고속도로 신갈과 마성구간의 모습

아차지고개(140:00)

옛길 영남대로 아차현이다.

지금의 삼가리 부근에서 열심히 일해 뙤기 밭을 갖게 된 부부가 콩을 심어 메주를 만드는데

 쉬파리 한마리가 메주에 내려 않자 잡을 요량으로 부인이 주걱으로 내려쳤으나 쉬파리는 피하자

 부인은 메주가 엉망이 되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무주걱을 계속 휘둘렀다.

쉬파리가 메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뒤 따랐다.

 지금의 역조현을 넘어서자 쉬파리도 지쳤는지 날지 않고 한발쯤 떨어진 곳에 않았을 때에 

이제는 꼭 잡으리라는 생각으로 몸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놓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차”하는 소리를 질렀다.

이 때문에 “아차지고개”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역조현을 메주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아내가

 쉬파리를 쫒아 넘었던 고개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용인군지 인용)

도로에 내려서니 아차지 고개가 나타나고 좌측 으로 내려가면 구성읍 동백리에

자리잡고 있는 꽤나 큰 어정가구단지가 보인다. 다시 산 능선에 접어드니 좌측으로

화장품 제조회사인 한불화학 철조망이 처져있고 우측에는 건축 페기물 처리장에서

자갈 분쇄작업이 한창인지 온 산이 시끄럽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참이슬 대장이

주는 션한 맥주 한잔을 들이키니 갈증이 한결 덜어지는 느낌이다.

철조망을 끼고 한참이나 지나가니 이곳에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단어에

어울리게 호화묘지가 꽤나 많이 보인다. 요즘은 죽어 용인이 아니라 살아서도

살기좋은 곳이 용인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 골프장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강남대학교 갈림길(14:30)

202봉(14:35)

202봉인 이곳에 누군가 무년산(無年山)이란 표시를 해놨고 이곳은 산책객들이

꽤나많고 곳곳에 운동기구 시설과 벤치들이 많이 비치되어 있다. 

202봉을 끼고 아파트 단지까지 수원 C.C 철조망이 함께한다.

이 수원 골프장이 36홀이니 철조망 길이도 그만큼 크다. 예전에 이곳을

참 많이 다녔는데 몇년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 카트카가 없어서 캐디를

2명이 카트를 손수 끌고 다녔고 서울에서 가까운 관계로 편하게 다녔던 곳이다. 

녹원마을 아파트 단지와 수원C.C의 경계 통로를 걸어서...

녹원마을 약수터에서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길을 걷는다. 마지막 양고개를 향하여...

약수터와 숲길을 지나 녹원마을  새천년 그린빌 5단지 중앙이 정맥길이다.

최소한 정맥길에 대한 예의도 없이 철저하게 망가뜨렸다. 그리고는 이곳을

베낭을 메고 지나는 산꾼들을 원숭이 쳐다보듯 한다.

녹원마을 새천년 그릴빌 5단지 정문(15:00)

 

다시 길을 건너니 대우 푸르지오 아파트가 있고 길을따라 계속 내려가니

용인 선릉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타난다.

선릉초등학교 앞

공원 광장을 지나니  저 멀리 삼거리에 용인 면허시험장이 보이고 거기서

우회를 하니 구갈 아파트 104동이 코너에 자리잡고 있다.

영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지나니 오늘의 날머리인 양고개가 나타나고

길건너 다음 들머리인 오대오 바지락 칼국수집에서 맛잇는 칼국수와

만두로 식사를 한다. 특이한 건 이 식당에 술을 팔지 않으니 고문님과

참이슬 대장이 엄청 섭해한다. 나야 차를 가서와서 먹지 못했고 더군더나

내일 아침 일찍 금남정맥길을 가야하기에 아쉬울게 없지만...

동료 산꾼 덕분에 어려운 한구간을 마무리하고 서울 집으로 간다.

양고개 (15:20)

23번도로(천안-파주)가 지나며, 용인시 구성읍과 기흥읍의 경계에 있으며신갈오거리와

죽전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그 위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