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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금남정맥(終)

금남정맥 제5구간 - 덕목재에서 엄사리(엄사초등학교)까지

by 범여(梵如) 2011. 10. 23.

○ 산행일자 : 2011, 10, 23(당일 산행)
○ 산행날씨 : 이른 아침에 안개, 맑은 날씨에 상당히 더웠음

○ 참석인원 : 좋은 사람들 산악회 32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4.7km / G.P.S거리: 16.2km / 4시간 50분 소요 

○ 산행코스 : 덕목재-깃대봉-391봉-347봉-398봉-함박봉-황령재-332봉-대목재-353봉-377봉

                  천호산-304.8봉-임도-두리봉-천마산-255봉-233봉-양정고개-S-OIL-호남선 철길-엄사초교
○ 소 재 지 : 충남 논산시 양촌면, 불곡면, 연산면 / 계룡시 두마면, 엄사면

 

우라나라 산꾼중에 전 세계의 자랑이며 동문(동국대)인 박 영석 대장인 희말라야 8000m 이상의

봉우리  14좌를 완등한 후 희말라야 안나푸르나 코리아 루트 개척 등정 중에 실종된 뒤에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구조하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부디 구조되기를 기원하며... 

가야할 능선은 너무도 많은데 세월은 왜이리도  빠른지? 범여도 자꾸만 조급증이 온다. 

 

 어제 한남정맥구간을 갔다가 이른 아침에 금남정맥 한 구간을 마무리 하기위해 다시 이른 아침에 베낭을

메고 양재역으로 나선다. 요즘 단풍 시즌 때문인지는 몰라도 양재역 주변은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물론 일반산행객들이 많지만 대간이나 정맥 산꾼들도 많이 보인다.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은지 3년이 다 되어가니 아는 사람이 꽤나 많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다가 버스가 오는

바람에 각자 헤어진다.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에 빠지고 고속도로 공주

휴게소에 도착하여 장국밥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다시 차에올라 들머리인 충남 논산시

벌곡면 덕목리에 도착하여 장비 점검을 하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1년 2개월만에  지난해 낙남정맥 대장을 하셨던 백두대장님도 만나고 낙남동지들이

많이 눈에 띈다. 다행히 날씨는 맑으나 꽤나 덥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호남고속도로

공주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오니 짙은 안개가 자욱하여 걱정을 많이 했으나

계룡I.C를 빠져 나오니 그 우려는 사라진다. 안개가 걷힌 것이다.

호남고속도로와 나란히 하는 68번 도로로 접어들어 좁은 길을 지나 덕목재에 도착한다.

고속도로 옆 조그만 마을인 덕목리는 산 언저리에 무량사라는 사찰이 있고 감나무에

감도 보인다. 말 그대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덕목재(09:50)

차에서 내려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뒤에 산행을 시작한다. 마루금 초입에는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연구소가 마루금을 점령하고 있어 우회로 하여 등로로 접어든다.

좌측의 호남고속도로는 대전~천안간 고속도로에 교통량을 많이 뺏긴 탓인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운 차량들이 빠르게 달린다.

자동차 부품연구소 좌측의 절개지로 올라서 마루금으로 접어든다.

산행을 시작한 지 5분정도 지나니 짓다가만  노인 요양원이 나타나고 절개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 공사장을 통과하는데 인기척은 전혀없고 개쉬끼만 요란하게 짖어댄다.

다시 임도를 거쳐 조금은 가빠르게 치고 깃대봉으로 향한다.

깃대봉 오르기 직전에 성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치열했던 전장터였으며, 그 후에는

후백제와 고려 개국직전에 왕건과의 치열했던 전장터이기도 했던 곳이다.

깃대봉(394m :10:15)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덕목리와 연산면 신양리에 있는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산행 시작 25분만에 깃대봉 정상에 오르니 삼각점(△ 논산 23 1984 복구)이 있다.

지난구간의 바랑산과 월성봉이 박무에 가리긴 했지만 제법 또렸하게 보인다.

대간이나 정맥 산행중 백운산이나 국사봉만큼이나 자주 만나는 깃대봉

거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본 수탈을 하기위해

측량을 하면서 자기들 임의로 깃대를 꽂았다 해서 깃대봉이라고...

깃대봉 삼각점

논산시는 지리학상 힘의 원천을 상징하는 땅이다.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 위치가 바로 단전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상들이 정착하여 온 곳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위치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터를 잡아 계백장군이 이끄는 5000결사대와 신라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5만 군대가

황산벌에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연산·은진·노성·석성 등 4현이 위치했다. 1912년 4현이 4군으로 변경됐다가

1914년 4군이 병합돼 논산군이 설치됐다. 이후 82년 만인 1996년 3월1일 논산시로 승격,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외유내강’형인 충청인의 기개를 나타내는 계룡산국립공원,

 대둔산 도립공원이 위치해 있고 논산평야를 감싸 안고 흐르는 금강 등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재가 각지에 분포하고 있어 역사 및 자연 탐방형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젊은 날의 꿈과 추억 간직한 ‘한국 남성의 제2의 고향’인 육군훈련소는 1951년 창설된

 이래 해마다 13만 명의 정예신병을 양성하는 호국장병양성의 요람이다.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국방의무를 이행한 한국 남성들에겐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군에 간 아들을 보기 위해 황토먼지 날리는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셨던 부모님들의 기억과 고된 훈련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젊음의 열정을 불사르던

청년시절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논산시 벌곡면과 양촌면의 경계를 이루며 달려온 마루금은 깃대봉에서

좌측 국사봉 방향으로 양촌면과 연산면의 경계를 보내고 마루금은 우측으로 꺾어

 벌곡면과 연산면의 경계를 이루며 내려선다. 

 

깃대봉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림막 길을 내려간다.

오늘 산행길은 정맥 산행이라기보다는 둘레길 같은 느낌이다. 가장 높다는

함박봉이 404m 밖에 되질 않고 고도 편차가 그리크지  않기 때문이다.

임도(10:35)

398봉 등 고마고만한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오니 임도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개인 사유지에 약초와 버섯등을 심어놨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판이 있으나 약초와 버섯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산에서 보기 힘든

금계국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다시 치고 오르니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함박봉에 오르니 삼불감시초소가 산꾼들을 반긴다.

함박봉(10:50)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한삼천리와 연산면 신양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함박봉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통신사의 중계기지가 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고

그 흔한 이정석 하나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그저 밋밋한 산이다.

그러나 전망은 정말 끝내주는 곳이다. 산 아래에는 삼국시대에 망해가는 백제를

구하기 위해 5000결사를 이끌고 5만의 신라 군대를 맞선 백제의 마지막 장수 계백의

恨이 서린 황산벌이 한 눈에 보인다. 이곳은 페러글라이더 활공장이기도 한다.

천호봉 남쪽의 최고봉이며 서쪽의 산록에는 연산 미륵이라고 불리는 약 4.5m 높이의

입석 불상이 노송에 쌓여 있으나 고려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논산, 강경지역까지 조망되는 경치가 좋은 산이지만 일반등산객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는 산이다.

주의 사항

조심할 것은 이곳에서 무심코 산불감시초소에서 직진하면 무조건 대형알바이니

정상에서 좌측으로 90도를 꺽어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금남정맥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함박봉 정상에서 황산벌을 배경으로

산불삼시초소 저 건너 산에는 골재채취로 산이 통째로 없어질 위기에 있다 

함박봉 추모비

「하늘 날기를 사랑했던 한 사나이가 여기 있다! 그의 고향은 푸른 창공 이었고..

 이제 그는 이곳에 고단한 날개를 접었다. 뜨거운 인생을 날았던 안타까운 서른여덟 해.

오늘 문득 그의 힘찬 비상을 다시 한번 보고싶다. 2000년 5월 최훈정을 기리며..

좋았던 친구들이」라고 쓰인 추모석이 묻혀있다.

페러그라이딩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모양이다

그래도 세상을 잘살은 것 같다.  저런 친구들을 두었으니...

5000 결사대의 충절정신과 충청인의 얼 살아있는 황산벌

삼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논산을 이야기할 때 계백장군유적지를 빼놓을 수 없다.

계백장군은 660년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쳐들어오자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일당백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현재의 계백장군 묘는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장군의 충절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이었다. 현재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성역화사업이 진행 중이며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에서 매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 백제군사박물관이 개관돼 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역사 문화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함박봉에서 황령재 내려가는 길은 아주 급경사에다가 나무계단 간격이

너무 좁아 발목을 다치기 딱좋게 생겼다.  산행시 이런곳이 가장 위험하다.

조심해서 내려오니 우측에는 기독교인들의 공동묘지인듯한 무덤들이 보이고

조금 더 내려오니 기독교 연수원인 삼천리 연수원이 있고 조금 더 내려오니

황산벌 전적비 안내판이 있는 황령재가 나온다.

황령재에 설치되어 있는 황산벌전투[ 黃山 ─ 戰鬪 ] 안내판

660년(태종무열왕 7)에 있었던 신라와 백제 사이의 큰 전투로서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지방이다.

7세기 중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자 당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했고, 당 역시 여러 차례의

고구려원정에서 실패하자 백제를 선제공격하기로 하여 당과 신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660년 3월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1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둥[山東] 반도를

출발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호응하여 신라 무열왕은 그해 5월에 김유신 등의 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 : 지금의 이천)에 머물렀다. 그리고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 : 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다. 이때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합세하여 공격할 계획을 정했다.

태자가 돌아오자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品日)·흠춘(欽春)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泗?城 : 지금의 부여)으로 향하게 했다. 당시 백제 조정에서는 방비책을 강구하던 중

당군이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炭峴 : 지금의 충남 대덕)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흥수(興首)의 견해를 묵살했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백강에 상륙한 당군에게 대패했고,

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했다.

의자왕은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가족을 죽인 뒤 비장한 각오로 출전하여 황산벌에 먼저 도착하고 3군데에 진영을 설치했다.

신라군은 군사를 3갈래로 나누어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군사들은 지쳤다.

이때 신라의 장군인 흠춘이 아들 반굴(盤屈)을 적진으로 보내 힘껏 싸우다 죽게 했다.

 

그러자 장군 품일 역시 아들(官昌)을 내보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게 하여 결국 죽게 했다.

 반굴·관창의 용감한 모습에 감격한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고 좌평(佐平)·충상(忠常)·상영(常永)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 그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고

 하여 당군과 신라군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황령재(11:15)

논산시 벌곡면 한삼천리와 연산면 신암리를 연결하는 20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황령재란 신암리 황령마을의 이름을 따서 황령재라고 부르는 듯 하며 백제의 마지막

한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황령재에서 한삼천리 쪽으로 200m 정도 올라가다 도로를 건너서 좌측 마루금을

들어서니 이곳부터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만큼 논산시에서 이정표를 잘해놨다.

삼천리 연수원

기독교관련 연수원으로  교도소 전문선교를 하는 자들을  훈련시키는 연수원이란다

창원 정씨와 추계 추씨의 합장묘를 지나고...

묘비가 한글로 되어있다. 한글도 좋지만 나중에 족보에 本을 찾을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332봉(11:15)

편안한 능선길을 걷다가 조금은 큰 봉우리에 오르니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는 팔각정이 나타난다. 앞서가던 백두대장이 식사를 한다.

범여도 여기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막걸리 한잔을 하면서 주위를 살피니

저 아래에는 1번국도와 함께 호남선 철도가 지나가고  저 멀리 다음구간인

계룡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10여분간의 휴식을 끝내고 길을 나선다

대목재(11:35)

충남 논산시 벌곡면 대목리에 있는 고개로서 지금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등로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예전엔 중요한 고개인 듯 하다.

이곳부터 3시간을 넘게 일행들과 떨어져 나홀로 산행을 즐긴다.

호젓한 길에 트레킹 하는듯한 코스가 너무나도 좋다. 여럿이 가면서 번잡하게

떠들면 웃고하다가 보면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고 思索을 즐길수가 없기에

정맥길에 가급적이면 일행과 떨어져 나홀로 산행을 즐기는 편인데

오늘은 너무나 기분좋게 가고있다.

1번 국도와 저 멀리 계룡산의 모습

논산은 유교이야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고장이다.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 조선의 정치와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분들이 이곳 논산에서 태어나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강학을 펼치며 활동했다. 그래서 논산에는 서원이 많다.

돈암서원(국가지정 사적 제383호)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조선 헌종 13년(1672년)에 건립된 노강서원은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로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충곡서원(도지정 기념물 제12호)에는 백제의 마지막 충신인 계백장군의 위패가 주벽으로 배향되어 있다.

이 서원은 대부분의 서원이 문인을 주향으로 모신 반면 계백이라는 무인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향교로는 연산향교(도지정 기념물 제119호), 은진향교(도지정 기념물 제120호), 노성향교(도지정 기념물 제118호)

등이 있다.

점차 가을산은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대목리의 한가로운 가을풍경

엔돌핀의 길이라... 맞는 말 같다.

377봉을 지나니 능선 정상에는 방화선 임도같은 곳을 참으로 편안하게 걷는다.

주변의 산들은 서서히 깊은 가을로 접어들고... 단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산들이 그리 높지 않은 탓인지 저 아래 1번국도로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소리가

번잡하게만 들린다. 하기야 모든게 다 좋을수는 없겠지...

철없는 철쭉인가? 게으름뱅이 철쭉인가? 아님 돌연뱅이인가

천호산 갈림길에 접어든다. 우측으로는 입암 저수지가 있는 화학리와 입암리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조금 더 가면 고려 태조와 관련이 있는 개태사 가는 길이다.

천호산(天護山:311m :12:35)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위치한 산으로서 원래의 이름은 황산이며 일면 누르기재이다.

황산의 우리말 표기는 ‘늘뫼’로 논산의 시명과 같은 것이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의 세력을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축출하고 난 다음 하늘이 고려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천호봉이라고 개명하였다 하였다.

 

천호산은 수많은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있는 산으로 등산로가 능선과 흙길로 연결되어 있어 누구나

편안하게 등산할수 있으며, 각 봉우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탑정저수지와 계백장군의 5천결사대 구국정신이

깃든 황산벌 일대 전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마음을 숭고하게 한다. [충청남도 100대산 참조]

개태사 가는길

천호산은 명성과는 달리 이정표와 찢어진 태극기만 펄럭이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주위 전망은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숲으로 싸여있고

논산시에서 새로 심은듯한 잣나무들이 도열하듯이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를 꺽어서 천마산 쪽으로 향하는데 시원한 가을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개태사(開泰寺)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위치한 사찰로써 이규보의「개태사 조전원문」에 의하면

고려 태조 19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곳에 국찰로 창건토록 한 국립 개국사찰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왕이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토록 하였는데 이는 태조가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유지하게 하며 나라를 세웠음은 부처님과 산신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창건 개태사라 불렀다.

 

이 일대는 백제의 계백장군과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에 가깝고 고금을 통해서도

군사, 교통상의 요지로서 사찰 주변에는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었고, 승병이 주둔하여 사찰을 수비하였다.

이 지역에는 동시대의 철확(가마솥 ; 충남 민속자료 제1호)과 삼존석불상 (보물 제219호)이 봉안되어 있다.

 

 개태사지 석불입상은 중앙에 본존불,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입상이다.

본존불은 좌우 230㎝, 앞뒤 216㎝의 방대형 대좌에 서 있다. 대좌 네 면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 위에는 별석으로 본존불이 서 있고, 발등 위로 천의자락 끝이 돌대처럼 가로로 얹혀 있다.

소발(素髮)에 육계는 큼직하며 얼굴은 둥글게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선각되어 있고 대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모습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렸고, 왼손은 복부 가까이에 대고 있다.

좌협시보살은 머리 부분이 결실된 것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에 비해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오른손은 외장한 채 네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으며, 왼손은 가볍게 쥐고 있다.

 양 팔뚝에는 연화문 띠가 돌려 있고 손목에도 팔찌가 조각되어 있다. 천의(天衣)는 우견편단의

 모습이나 직선 및 호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우협시보살은 소발에 높은 육계를 가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띠

장식은 어깨에 닿아 있다. 천의는 우견편단으로 S자형 및 호선으로 처리되어 발등까지 내려오고 있다.

팔뚝에는 넓은 연화문 띠가 조식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꽉 쥐고 있고, 왼손은 약지와

 소지만 편 상태이다. 대좌 중앙에는 좌협시보살처럼 20×12㎝의 구멍이 패여 있다.

개태사 철확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개태사 철확은 개태사

공양간에서 사용한 대형 솥으로한번에 500명분의 양을 끓일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솥이다.

천호산에서 천마산 가는길은 낙엽이 가득싸여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이곳은 일반산행 하는 사람이 드문 모양이다. 마치 처녀림처럼

때가 타지 않은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등로 주위에는 이곳이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접경지역 탓인지 산위에 집터인지 성터인지 구분이 안되지만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아마 역사 유적지가 발굴해도 될듯 싶다.

사람들의 때가 묻지않은 처녀림같은 편안한 마루금

이정표가 잘되어 있는 길을 혼자서 내려오니 마치 오늘은 내가 이 코스를

전세내어 가는 기분이다. 잠시후 전주에서 온 산꾼 2명이 미친 년 널뛰듯이

예를 갖추지도 않고 휘익하고 추월을 한다. 산행을 하러 온것인지 산악 마라톤을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후에 농소리와 개태사를 연결하는 임도가

나타나고 잠시후에 여성 등산객 5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인사를 건낸다.

청미래(망개나무) 덩쿨도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고...

304.8봉과 삼각점(13:00)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서 MP3에서 흘러 나오는 영인스님의 금강경 독송을 들으면서

삼매경에 빠지는데 갑자기 들판이 보이고 감나무를 새로 심은듯한 농장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곳은 감나무가 성장하지 못했는데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지금은 서울에도

감나무가 성장하니... 저 아래에 임도를 쳐다보고 길을 가는데 저 멀리 산에 동료 산꾼이

보이기 시작한다.  좌측에는 새로 뭣을 하려는지 벌채를 한 민둥산이 나타난다. 

임도(13:20)

이곳은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와 계룡시 두마면 농소리를 잇는 고개로 여태껏

좌측에 논산시 연산면은 게속해서 같이 가지만 우측 등로 아래는 벌곡면에서

계룡시 두마면으로 바뀐다.  임도 옆에는 폐타이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듯한

창고 건물이 보이고 좌측 등로 이어지는 두리봉으로 향한다.

우측의 농소리를 바라보며 등로에 오르니 우측에 20여기 가까이 되는 가족묘지인듯한

호화묘지가 보이고 다시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니 좌측엔 전원주택을 지어려는지

중장비로 온 산을 파헤친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다시 두리봉으로 오르는데 로프로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미끄러운 마사토라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두리봉(278m : 13:35)

두리봉 정상에는 벤치가 있고 가지많은 소나무에 두리봉이란 펫말이 붙어있다.

거기에는 젊은 청년 3명이 나무 3그루를 뿌리째 뽑아 정리를 하고 있다가

내가 산 정상에 올라가니 흠찟 놀라는 모습이다. 왜 나무를 캐냐고 물으니

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그런다고 그러면서 머리를 끍적거린다.

그 나무 이름이 뭐냐고 하니까 꾸찌뽕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료를 검색해본다

꾸찌뽕나무의 모습

두리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꾸찌뽕나무를 만난다. 효능을 알아본다.

 

꾸찌뽕나무의 효능

 약성은 따뜻하고 맛은 달고 쓰며 독은없다.

이 나무는 여성들의 여러 가지 질병에 특히 좋은 약초다.

또한 근골을 튼튼히 하고 혈액을 맑게하는 작용이 탁월하다.

특히 위암 식도암 간암 대장암 폐암 부인암 자궁암 등 갖가지 암에 민간요법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가장 탁월한 효과가 있는암은 자궁암으로 알려져 있다.

 

꾸찌뽕 나무의 항암 효과에 대하여는 이미 민간요법중 가장 탁월 하다

 동물실험 에서도 갖가지 암세포에 대한 억제작용이 입증되었고 중국이나 일본 등지의

실제 임상실험에도 좋은 결과를 보고있다. 꾸찌뽕나무는 암세포를 더이상 자라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암세포를 줄어들게도 하고 통증을 가볍게하며 밥맛을 좋게하고

몸무게를 늘려주며 특히 소변을 잘나오게하여 복수를 없애주는 작용이 있다.

또 말기 암환자의 저항력을 키워주어 스스로 병을 이겨내는데 도움을 준다 부작용이 없이 암을

다스리는데 최고의 민간요법중 으뜸인 약재라 할수있겠다.(펌글)

천마산(天馬山 :287m : 13:45)

계룡시를 감싸안고 있으며 전망이 좋아 인근인 충남, 대전의 모든

산들을 조망 할 수 있다. 하늘로 비상하는 말의 형상 덕인 탓인지 계룡시는

하늘로 비상하는 천마처럼 비상하는 것 같다.

계룡시는 전국에서 가장 적은 시 단위 자치 단체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인구는 3만명을

약간 넘긴 수준이지만 3군 본부인 계룡대가 있고, 주변에 계룡산이 버티고 서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삼각점

천마산에서 송전탑을 지나 금바위 가는 길에 만난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삼각점이 나타나고 이곳은 바로 아래 계룡시의 아파트

주민들이 많이 다니는 산책로인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다.

천마정(天馬亭:13:50)

금바위에 올라서면 오랜만에 앞이 트여 훤히 조망할 수 있어 계룡시의 아파트

단지와 가야할 마루금을 바라보고 계룡시가지를 한바퀴 둘러보는데 바로

아래로는 미소지움아파트와 우림아파트 단지가 있다.

금바위(金岩)

계룡시 두마면 금암리에 금암이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옛날에는 연산군 두마면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금암리 천마산 중턱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는데 큰 바위가 한 가운데를 칼로 갈라 놓은 것과 같이

잘려져 있는데 이 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다.

 

때는 고려 중엽, 외세의 수차 침략으로 국가기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승려들까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연산 천호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백제 신검을 하늘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고려를 창건 함에 따라 고

결의 국운을 크게 연다는 뜻의 개태사라는 절을 지어 차후 승리의 기념과 국운 융창을 빌게 하고, 삼남지방

유사시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태사에 수천명의 승려를 두었다.

 

국력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개타사절의 세력이 강성해져 국가의 명령에 복종치 않고 승려들이 작당하여

인근 촌가를 습격 약탈하고 부녀자까지도 겁탈하는 횡포가 날로 심하였다.

이를 보다 못해 관군이 출동하여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패하니 할 수 없이 이 사실을 나라에 상소하니

왕이 이를 바로 잡고자 수차 관군으로 이 절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기만 하니 승려들은 더욱 강성해져 횡포가 더욱 심하였다.

 

개태사 절의 횡포로 인근 주민들이 살 수가 없게 되니 왕께서 크게 근심하여 개태사를 칠 계획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한 장수가 지원하였다. 그 장수는 최일 장군이었다. 최일 장군은 왕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연산 개태사에

도달하여 진영을 정비하고 개태사를 부근에 이르러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싸움을 할 수 없어 최일 장군은 하는 수 없이

퇴각하여 30여리 떨어진 노성방면에 진을 치고 부하 몇 사람을 데리고 개태사 뒷산에 올라 이 절의 동정을 살폈으나

안개로 인하여 절의 사정을 파악할 수 없어 최일 장군은 이 사실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어느날 최일장군이 말을 타고 개태사를 향하여 가던 중에 있었다.

때는 산에는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따스한 봄날이라 논과 밭에서는 농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금암리 앞에 이르니 한 농부가 검은 암소로 논을 갈면서 이 놈의 미련한 소야! 최일 장군 만큼이나

미련하고 어두운 소이구나 하며 논을 갈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최일 장군은 말에서 내려 논을 가는 농부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내가 바로 최일 장군인데 어찌해서 소를 보면 나같이 미련하다고 합니까?

농부는 깜짝 놀라며 아 당신이 최일 장군이십니까? 미안합니다.

 

장군께서는 아무리 개태사를 치려고 하나 저 천마산 중턱에 있는 암소바위가 개태사를 보호하고 있어

이 절을 치려하면 안개가 끼게 하여 절을 보호하니 암소바위를 칼로 내려 친 다음 개태사를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농부는 온데 간데가 없이 사라졌다. 최일 장군은 신의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마음으로 감사한 후 금암리

천마산 암소바위에 올라기니 과연 집채만한 바위가 있었다.

 

최일 장군은 장검을 빼어 암소바위 한복판을 내려치니 바위가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최일 장군은 군대를 휘동하여 개태사에 이르니 거짓말처럼 연일 끼어있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최일 장군은 일경에 개태사절 승려들을 토벌하여 인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였다.


아 암소바위 뒤 탕건바위 있는 곳에 하(河)씨들이 피난하였다는 바위굴도 있으며 용이 바위 뒤를 통과하여

용의 흔적도 있고 사람의 시신처럼 보인다 하여 송장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도 있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바위들이 있다 하여「금암(金岩)」이라 부르고「금바위」라고도 부른다.

 

금바위 유래 표지판

주변에 운동기구들이 많이 보이고 마치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 같아 보인다.

천마정에서 바라본 계룡시의 모습

마루금 옆에 있는 묘지

하도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심심하지는 않으시겠다.

아마 망자는 생전에 사람들을 좋아한 모양이다. 금바위에서

간식을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편한 걸음으로 양정고개를 향한다.

233봉(14:05)

이곳 정상에는 특이하게 삼각점이 2개가 동시에 있고  계룡산이 손에 잡힐듯이

보인다. 양정고개가 가까워진 탓인지 차량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약 15분정도의 숲길을 내려오니 1번국도가 나타나고 계룡지구대가 나타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 도읍지로 꼽은 천하명당 - 계룡시

신도안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성계의 뜻이 펼쳐지지 못한 이유는 이곳이 ‘정씨의 도읍지’라는 도참설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 새로이 도읍지를 세우려 했던 이성계는 왕궁을 짓는 공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서울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뱃길과 다른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으로 적당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때에 왕궁을 세울 공사가 진행됐음을 입증하는 왕궁 초석 105개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전체 면적의 67.5%가 임야인 계룡시는 동쪽으로는 대전 유성구, 서쪽은 논산 상월면과 연산면,

남쪽은 논산 벌곡면, 북쪽은 공주 반포면과 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국사봉, 향적산, 북쪽으로는

 신라 5악(五嶽)의 하나로 꼽힌 계룡산(鷄龍山)과 잇닿아 있다.

 

삼한 때는 마한에, 백제 때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에 속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황산군(黃山郡) 소속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연산현(連山縣)과 공주목(公州牧)에 부속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역시 연산현에 속하다가 1895년(고종 32년)

연산군을 거쳐 1914년 두마면(豆磨面)으로 이름이 바뀌어 논산군에 편입됐다.

 

양정고개(14:20)

계룡시 두마면 엄사리에 「양정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옛날 어느 해에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서로 모함을 해가며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 그치질 않고

계속되니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 때 경상도에 사는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글을 읽어 크게 출세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하였는데 세상일 돌아가는 것을 보고 책을 팽개친 채 출세할 것을 포기하고 유람길에 나섰다.

그는 여기 저기 발길 닿는대로 다니면서 세상을 살폈다.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저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아직도 조정에서는 싸움질 뿐이니 걱정이로구나. 한탄하면서 이거 나라에 무슨 정변이라도

일어나야 백성들이 살지, 큰일이구나.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그는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딴 세상 같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었다.
그는 한 절간에 머무르면서 며칠간을 쉬다가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한 장수가 나타나더니

그래 쓸만한 놈들은 세상을 피하여 산속에 쳐박혀 있고 몹쓸 놈들은 임금님 옆에서 서로 제가 잘났다고 야단들이니,

허참. 세상 잘 돌아가는 구나.하고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수 앞에 나가 앉으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구시온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하고 물었다.

그 장수는 나는 충청도 사는 장수인데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소.

당신은 여기 있을 사람이 못되니 어서 빨리 충청도에 있는 계룡산으로 가시오.

때 내가 말하리다.하고 사라졌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꿈속에 나타났던 그 장수는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여장을 차리고 충청도 계룡산으로 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두계고을에 다다르자 밤이 어두워졌다.

피곤한 여독을 풀기 위하여 그 근처에 있는 주막집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는데 꿈속에 먼저 나타났던 그 장수가 또 나타났다.
잘 왔소. 그런데 이것 참 큰일이오. 이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꼭 정씨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질 않고 있고.

 그것도 정씨 한 사람이 아니라 정씨 여덟 사람이 나와서 이 세상을 평정해 놓고 그 여덟 사람 중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사람이 죽어야만 이 나라가 평온해 지는데 여덟사람의 정씨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참으로 큰 일이요.

근심스러워 하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여덟 사람의 정씨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오?하고 그 선비가 묻자

그걸 알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겠소, 누구인지 한 사람도 모르오.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했소?하며 선비는 장수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야 당신은 정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단 한가지 알려 드리리다.

정씨 두사람이 나타날 때에는 금강 물줄기가 변하여 논산 강경으로 흐르게 될 것이요.

 

 웅진땅 계룡산 밑을 흘러서 말이요. 하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요?하고는 그 장수는 또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꿈을 깨고난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한번도 아닌 두번씩이나 나타난 그 장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며 생각해 보아도 알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온다는 정씨는 과연 언제 나타난다는 것이냐?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그 선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도안에 정씨가 도읍한다면 틀림없이

이 고개야말로 정씨가 나타날 고개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정씨는 나타나지 않고 이제는 노잣돈까지 떨어져서 아주 이고개 아래에 뗏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생황은 어려움이 더해갔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여덟 정씨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줄 몰랐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꿈에 나타났던 그 장수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흘러 그는 이제 늙어서 허리는 꼬부라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날 그 선비는 자기가 며칠 안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들리는 초동들에게 기다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고 내가 죽은 후라도 정씨가 나타나면

내가 기다리다 늙어 죽었다고 꼭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비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양정고개에서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나서 왕관을 놓고 싸워야 할 고개라고 전하며 기다리다

지친 어느 선비의 한이 맺힌 고개라고도 한다.  

양정고개 버스 시간표

계룡지구대에서 전방으로 100m 정도 내려오다 신호등을 건너 버스정류장

골목으로 들어서니 도로포장 작업이 한창이다. 다시 굴다리를 지나 조금가니

호남선 열차가 지나가는 신도과선교가 나타나고 저 앞에 버스가 보인다.

굴다리를 지나고...

호남선 철도의 건널목인 선도과선교를 지나서  엄사초교로 향한다.

신도과선교를 지나  비사벌 아파트 103동으로 간다.

저 앞에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보이기 시작한다.

정맥길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의미도 없는 정맥길에서

오늘 산행을 종료한다.

후미를 기다리면서 지난해 낙남정맥을 같이했던 백두대장님을 비롯해

동료 산꾼들을 1년 2개월에 해후를 하고 막걸리 파티를 마친 다음로

서울로 향한다. 또 한구간을 마무리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