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10.08~ 09
○ 산행날씨 : 일교차가 심하나 산행하기는 꽤나 좋은 날씨임
박무현상으로 가시거리는 그리 좋지못함
○ 참석인원 : 좋은 사람들 산악회 40여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17.5km / G.P.S 거리 : 18.4km / 약 9시간 소요
○ 산행코스 : 덕목재-곰치재-물한이재-작은물한이재재-421봉-바랑산-법계사 갈림길
월성봉-흔들바위-533봉-전망대-수락재-397봉-헬기장-새리봉-깔딱재
서각봉-대둔산 정상-낙조대-731봉-640봉-배티재
○ 소 재 지 : 충남 논산시 양촌면,벌곡면/ 금산군 진산면 / 전북 완주군 운주면
일교차가 무척이나 심한 전형적인 가을의 날씨이다.
요즘은 소득도 없는 일에 왜그리 바쁘고 매주마다 연례행사가
되버린 애.경사에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거기다가 동창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도 왜그리 많은지?
토욜은 고향(경남 의령)에서 열리는 초등학교 총동창회에엔
정말 중요한 약속 때문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참석을 못한게
두고두고 맘에 걸린다. 2년만에 열리는 행사에 불알친구들을
이제 안만나면 언제 만날지 모르는데 말이다. 정겨운 친구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같은날 학교에서 동국가족걷기 대회에 참석하고 서둘러 베낭을 챙긴다.
하루종일 쫓아 다니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베낭을 메고 금남정맥 구간
대둔산으로 향한다. 이젠 3정맥만 남았다.
그것도 원거리를 모두 정맥을 모두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충청도 길을 걷는다. 지난주 호남정맥 종주를 마치고 난 다음에
한 동안 머리가 텅빈 느낌처럼 허전한 것은 이제 범여는 산에
완전히 중독이 된 것일까? 오늘밤에도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와 고도표
덕목재 초입의 68번 지방도(03:10)
0시 10분에 서울 양재동에서 버스에 오르자마자 낮에 여러군데 다닌 관계로 인해
엄청나게 피곤한 탓인지 깊은 잠에 빠진다. 3시간만에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논산시 벌곡면 덕목재 앞의 68번 지방도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차가운
밤공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寒氣가 느껴진다. 베낭에서 바람막이 자켓을 입고
나니 조금은 나은것 같다. 베낭의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준비를 한다.
덕목리 버스 정류소
어두운 탓인지 버스가 덕목재 초입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200m 다시 뒤로
돌아와서 덕목리 마을 이정석을 타고 우측으로 접어들어 68번 지방도와
호남고속도로 지하차도에 접어드니 인근 농수로에서 흘러드는 물이 가득차서
도저히 건널수가 없다. 주위에 있는 커다란 돌맹이를 줏어다가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너니 커다란 트럭이 다닐만큼 폭이 넓은 농로가 나오고 20분정도
지나니 우측의 호남고속도로 차량들이 무섭게 질주를 한다.
잠시후에 가로수에 사용할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농장을 가로 질러
들로에 접어드니 반가운 시그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덕목재(160m:03:30)
충남 논산시 양촌면 산직리와 벌곡면 덕목리의 경계로
호남고속도로와 6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68번 지방도와 호남고속도로 지하차도를 징검다리 만들어 걷고...
등로에는 이슬이 많이 내린탓에 등산화가 젖기 시작하나 새벽공기는
서울에서 상상도 못할만큼 상쾌하다. 초반에 된비알을 치고 올라
짙은 어둠속에 여러차례 반복한 끝에 평범한 임도길인 곰치재에 도착한다.
곰치재(275m : 04:10)
곰치재는 재(峙)가 아니라 산림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임도로 보인다.
임도를 만든 목적은 벌목이나 기타 산림자원을 용이하게 이용하기
위한 임도와 강원도나 경기 북부지역에는 군사용 임도가 많이 있으나
이곳은 산림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인 임도인 모양이다.
아직도 어두컴컴한 길에서 지도에서만 확인하고 서둘러 길을 간다.
곰치재를 지나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어둠속에 확인이 되질 않으나
혹 예전에 성터인듯한 느낌이 정도인 너덜길이 나타나고 이곳의
지질이 전체적인 마사토群으로 이루어져 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에 오르니 꽤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나 산행하긴엔 최적의 조건이다.
앞서가는 선두조는 마치 산악 마라톤이라도 하듯이 무서운 기세로 질주한다.
아마 산길을 4km 정도는 가는 모양이다. 괜스레 마음이 급해지고
군중심리에 휘둘려 나도 그들을 뒤쫒듯이 따라가지만 렌턴 불빛은
보이질 않는다. 오늘따라 편안한 등산화를 신고 왔는데 밑창이 많이 달은
탓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느낌이다.
363.9봉 (05:10)
1시간 40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도착한 곳이 지도상에 363.9봉이다.
이곳에 서래야 박건석님이 ‘물한산’이라고 코팅지를 걸어놨다.
이 아래에 있는 고개이름이 물한재이라서 물한산이라고 명명했나?
이곳 정상에서 국가기준 2급 삼각점이 있고 이곳에서 5분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쥬스와 초코파이 하나로 허기를 면하고 다시 베낭을 짊어진다.
물한산 삼각점
쥬스하나 마시는 사이에 선두조는 마치 귀신에 홀린듯 쏜살같이 달아난다.
급한 내리막길이 엄청나게 미끄럽다. 나 역시 마음이 급해진다.
그러다가 미끄러져서 짙은 어둠속에 서너바퀴를 굴러서 내려가다
간신히 나무에 걸려서 멈춘다. 다행히 다친데는 없는데 베낭과 옷이
흙투성이가 되버렸다. 천만다행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직까진 염라대왕이 이 볌여가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ㅋㅋㅋ
물한재(05:30)
물한재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반한리와 벌곡면 덕곡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2009년도에 완공된 물한재 터널이 있다
어둠속에 볼 때 말이 터널이지 용도는 동물이동통로로 만들어진
모양인데 주변의 환경을 엄청나게 훼손하여 아마 무용지물이다.
국민의 祿奉으로 살아가는 공무원 나리들... 참으로 한심하다.
월급 받기가 미안하지 않소. 한경부라는 부서는 이런걸 보고
뭘하는지... 당신네들의 무개념, 무성의... 글고 복지부동
정말 대단하오... 이 현장에 한번이라도 나온적이 있소
거기다가 脈길까지 짤라먹고. ㅉㅉㅉ 이 정도의 절개지를 파려면
차라리 터널로 뚫어 자연도 보호하고 맥길도 이어지고 할터인데...
몇년전에 일본 홋카이도에 가서 동물이동통로를 본적이 있는데
이동통로를 전부 도로 밑으로 해서 동물을 상당히 배려한 모습이
감동을 주던데 말이다.
물한재 도로를 건너 휀스가 막혀서 우회하여 가니 이곳은 아예 정맥길을
없애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낙석 방지용 철조망을 마치 유격 훈련하듯이
기어 올라 등로에 접어든다. 겨우 오르니 수로를 만든다고 레미콘으로
콘크리트로 떡칠을 하듯 엉망으로 해놨다. 정말 분통이 터진다.
등로에 오르니 ‘대둔산 도립공원’이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짙은
어둠속에 등로를 걸어가니 갑자기 나타난 절벽 비슷한 암릉이 나타나고
손가락만한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조심스럽게 하강을 하여 다시
편안한 등로를 접어든다. 밤이 많이 길어진 모양이다. 6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짙은 암흑이니... 426봉을 지나간다.
조심해서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데...
작은 물한재(06:00)
지도상에 작은 물한재라고 하는데 아무런 표식이 없다.
돌맹이를 모아서 나무를 세워 깃대모양을 만들어져 있는데
그것도 뿌러져서 넘어져 있다. 대충 확인만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영주사 갈림길(06:20)
이제 서서히 날은 밝아오기 시작하여 해드렌턴을 벗어 베낭에 넣는다.
주위에 조망들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제 모습을 찿는 모습이다.
바랑산(555.4m :06:40)
충남 논산시 양촌면 반암리와 벌곡면 수락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이 산의
유래는 어느 고승(高僧) 한 분이 입적할 곳을 찾아 바랑을 둘러매고 헤매다
겨우 찾았다는 산이라해서 바랑산이라 불렀다 전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산의
생김새가 바랑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설 일뿐 명확한 근거는 알 수는 없다.
바랑이란 스님들이 메고 다니는 배낭(背囊)을 말하는데 그 배낭이
變音이 되어 바랑이라고 한다. 걸망이라고 한다.
여명은 밝아오고...
추모비
뜸띠고개(법계사 갈림길 삼거리)에 못간 547봉에 덕배라는 山友가 이곳에서
生을 마쳤는지 추모비가 서있다. 저런 친구들이 있다는게 참으로 부럽다.
내 주위 친구는 저런 친구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세상을 잘못 산것인지?
나를 산에 미친 놈으만 취급을 하니? 나 원참...
산이 있네 / 싸리문밖 / 느티나무 꼭대기 / 달을 / 걸어 놓으니
속세의 시름이야 / 흐르는 세월의 강을 건너네 / 산이여!
고독해 하지마라 / 강 건너 덕배 머무는 이곳은 / 극락이니
행여 / 외로울까 이 마음 / 한 웅큼 떼어놓고 가네 이 마음
능선 안부에서 바라본 법계사
충남 논산시 양촌면 오산리에 자리잡고 있다.
바랑산에서 월성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의 법계사는 400명의 비구니 스님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스님들 노후복지시설이라 한다.
일생을 선행과 참선으로 살아온 스님들의 말로를 책임지는 곳으로 모두 6개동으로
되어있고 108개의 별실과 선방, 식당들로 이루어져 아파트 형식으로 지어놓았다고 한다.
절을 소유하지 않은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거나, 은퇴한 노스님들이
지내는 곳으로 아파트같이 얻어 기거하는 곳이라 한다.
법계사 근처에는 바랑산, 장삼봉, 절골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아침 일출(06:40)
법계사 갈림길( 뜸띠고개;07:00)
이곳 능선은 정말 절경으로 왜 금남정맥을 ‘정맥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와
이곳 대둔산을 ’소금강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것 같다.
그만큼 조망이 뛰어나고 멋진 암릉들이 많다. 능선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천길 낭떠러지이다.
월성봉 가기전에 공터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지난해 낙남정맥을
같이 탄 풀초롱님과 한네산에서 초기 대장을 역임하신 장기리님.
그리고 오늘 처음뵌 사랑새님... 닉만큼이나 의상도 야시시하게 입었다.
나하고 비슷한 연배인 줄 알았는데 한참 위라니... 참으로 젊게 사시는 분 같다.
도시락에 해장술 한잔 들이키니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월성봉으로 치고 오른다.
멋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는 낙락장송
달이산성(07:50)
충남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에 달이산성이 있다.
석축으로 쌓았고, 둘레가 약 2Km에 달했다는데 정상 부근에 아직도 성터흔적이 남아 있다.
옛날 이곳에 ‘달이’라는 의적이 은거해 주둔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권력으로 모은 사람만의 재산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눠줘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어느 해 조정 군사들이 의적 소탕을 위해 산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군사들과 싸우기를 3년, 지칠대로 지친 의적들은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달이도 칼을 내팽겨치고 의적들에게 말하기를 "자 ~ 우리도 이젠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자."하자 의적들이 뿔뿔히 헤어졌다.
그후부터 사람들은 달이가 진을 쳤던 곳이라 하여 달이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독도 주의
월성봉 헬기장을 떠나 약 30초 거리에서 ㅓ갈림길을 만난다.
직진길은 평탄한 길이고, 좌측으로 꺾이는 길은 아래로 내려서는 경사길이다.
여기서 정맥길은 좌측으로 90도 꺾이는 경사길이다.
경사길을 내려서면 안부사거리 이정표(수락계곡, 영주사 )에서 영주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월성봉 (月星峰 : 651m:08:00)
논산시 양촌면 오산리와 벌곡면 수락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산으로서
이 지역 사람들은 달이 뜨는 봉우리라 부른다고 한다.
월성봉을 일명 다리성봉(達里城峯) 또는 달이봉으로 불렀다 한다.
달이성봉을 한자로 표기해 '월성봉'으로 된듯하다.
대둔산 자락도 이제 서서히 낙엽에 물들기 시작한다.
대둔산 월성고지 전적지
월성봉에서 흔들바위 가는길에 위치해 있다.
흔들바위 (08:10)
월성봉을 지나고 대둔산 월성고지 전적지 표시판을 지나니
흔들바위가 나타난다.거북이 등처럼 넓적하게 생겼다.
흔들바위라 적힌 조그만 표지석도 옆에 있다. 궁금증 많은 범여가
바위에서 올라가 흔들어 보니 엄청나게 육중한 흔들바위가 조금 흔들린다.
흔들바위 아랫쪽은 오금이 저릴정도로 까마득한 절벽이다.
바위사이에 핀 구절초는 울님만큼이나 수줍어 하는구나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흔들바위에서 수락재 가는 등로에는 우측으로 천길 낭떨어지 절벽을
쳐다보니 오줌을 저릴 정도로 아찔하고 그 위에 서 있는 정말 멋있는
소나무들이 정말 많다. 경제적으로야 아무 쓸모없는 나무지만 조경업자들
기준으로 보면 억대가 넘는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이곳에서 수락재 가는 길은 엄청나게 험한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어
구간 거의 나무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미끄러운 마사토라 조심해서 걷는다.
수락재까지 계속해서 이런 계단이 나타나고...
경찰 충혼탑
월성봉에 암릉구간 안부 계단길을 내리던 중, 건너편 대둔산 수락계곡
기슭에 있는 로켓 모양의 충혼탑이 멀리 보인다.
충청남도 경찰국에서 1986년 5월 31일 건립한 승전탑이라 한다.
6.25때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이 차단되는 바람에 미쳐 월북하지 못한
북한군이 전북 덕유산을 거쳐 이곳 대둔산에 2200여명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논산의 양촌면의 주민들과 이 지역의 국군 사단과 경찰 등이
이곳 월성봉에 고지를 구축하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당시 한이 서린 비극의 현장으로서 대둔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한
경찰관, 의용경찰, 애국청년 등 1,376명이 조국을 위해 목숨바쳐 장렬하게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수락재(364m : 09:35)
수락재는 논산 벌곡면 수락리에서 양촌면 오산리 오미로 넘는 고개이다.
지도상에는 무수재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 계곡이 수락계곡이라 칭한 모양이다.
대둔산 능선이 달이성봉 바랑산으로 이어지는 산릉 안부로 지금은 등산로로
이용되고있을뿐이다. 수락재 동서로 위령탑이 있는데, 수락재 동쪽 너머 수락리
끝닿는 곳에는 경찰승전탑이 있고, 수락고개 서쪽 양촌의 오산리 버스종점에는
6.25동란시 북한군에 무참히 살해당한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 2006년에 건립되었다.
이 나무의 이름이 입속에 맴맴 돌면서 생각이 영 나질 않는다?
혹 아시는 분은 답글 부탁합니다.
수락고개에서 깔닥고개까지는 편안한 능선길이 마치 둘레길을 연상할 정도로
편안하고 이 구간에는 헬기장들이 참으로 정리가 잘되어 있는 느낌이다.
깔딱고개(09:15)
여태껏 경계 능선을 양분해 오던 논산시 벌곡면과 양촌면의 경계는
이 깔딱고개 아래서부터 좌측은 벌곡면 수락리를 계속 연결되지만
우측은 양촌면과 이별을 하고 전북 완주군 운주면으로 바뀐다.
좌측은 220계단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빠지면 유명한 안심사가 나온다.
깔딱고개라는 의미는 어느 산이고 대체적으로 있는 지명으로 숨이
깔딱 넘어갈 만큼 힘이 든다고 해서 깔딱고개라고 하는데 여기는
그다지 힘은 들지 않으나 계속해서 암릉을 타고가야 하기에 스틱을 접고
맨손으로 릿지를 하면서 암릉을 넘나든다. 저 아래 안심사는 기와
불사를 하는 모양인지 지붕들이 천막으로 덮혀있다.
안심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638년(신라 선덕여왕 7년) 자장(慈藏)율사가 세우고 부처의 사리 10과와 치아사리 1과를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자장이 기도하던 중 부처가 나타나 ‘열반성지 안심입명처로 가라’고 하였다.
자장이 마침 이곳에 와 보니 산세가 부처의 열반상을 닮았으므로 절을 짓고 안심사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안심사사적비문》에는 고려 태조(재위:918∼943) 때 활동하던 조구(祖求)가 세웠다 적혀 있다.
875년(헌강왕1) 도선(道詵)이 중창하고, 1601년(조선 선조34) 수천(守天), 1710년(숙종 36) 신열(信悅)이 각각 중창하였다.
당시 이 절에는 대웅전과 약사전등 30여 동의 건물과 석대암(石臺庵)·문수암 등 2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명응(明膺)이 부도전을 세우고 부처 사리를 모셨으며, 영조가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와 어서각(御書閣)을
세워 보관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였고, 1991년 적광전과 요사를 지었다.
1993년에는 적광전에 제석천룡탱화를 봉안하였으며, 1995년부터 일주문과 법화불교대학·
약사암 법당을 세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건물로는 적광전과 보궁·대웅보전 ·일주문·수각·법화불교대학·요사 등이 있다.
대부분 1990년대에 지었으며 이 중 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진신사리보탑에
배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안심사사적비와 부도 등이 전한다.
안심사사적비는 1759년(영조 35)에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으며,
안심사 부도 및 부도전은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이 절에는 《원각경》과 《금강경》《부모은중경》 등 한글경판 658판이 전했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출처] 안심사 [安心寺 ] 네이버 백과사전
저 멀리 논산시내가 아련히 보이고...
이곳 암릉구간은 정말로 환상적이다
대둔산 능선에서 양촌쪽으로 나온 봉우리들.
끈질긴 생명력
내가 오늘 지나온 구간들. 우측에 수락 저수지가 보이고 암릉 저 뒤가
월성봉과 바랑산이다.
능선위의 등로는 계속해서 산죽길과 함께한다.
아기자기한 맛이 산행길의 피로를 풀어준다. 산길을 오르다
베낭에서 맥주 한 켠을 꺼내서 마시고 나니 갈증이 훨씬 덜한
느낌이다. 산을 타면서 늘어난 건 음주량인 것 같다.
서각봉 이정표.
서각봉(허둥봉:829m:10:10)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대둔산 능선群에 자리하고 있으며 안심사로 내려가는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다. 정맥 능선에서 약 1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 오르니 대둔산 정상인 마천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 아래
안심사와 대둔산 관광단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앞쪽으로는
천등산이 박무에 가려 아련히 보인다.
천등산(天燈山)
전북 완주군 운주면의 장선리와 신북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대둔산의 암봉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유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지각변동과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떨어져나가고 골이 파이고 계곡을 만들어
옥계천이 흐르게 되었고, 이 옥계천과 나란히 운주면에서 신북리와 배티재를
넘어 금산으로 빠지는 국도를 가운데 두고 북쪽이 대둔산, 남쪽이 천등산이다,
옥계천과 남쪽의 용계천으로 휘어감긴 천등산은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우려고
천등산 기슭에 용계산성을 쌓고 적군과 싸우고 있는데, 대둔산 용굴의 용이 닭이
우는 소리를 내고, 천등산의 신이 훤한 빛을 내비쳐서 견훤이 승리한 뒤부터
하늘 천(天), 등불 등(燈)을 썼다는 설화가 있다
한네산 산악회에 초기 대장을 맡으셨던 장기리님과 함께...
서각봉에서 바라본 대둔산의 전경은 환상 그 자체이다.
마치 설악산에라도 착각을 일으킬 만큼 환상적이다.
오랫만에 산행을 같이한 장기리님과 풀초롱님과 사과를
나눠 먹으면서 여유잇게 휴식을 취한다. 마주 보이는 마천대는
등산객들이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흐르는 세월을 막을수가 없구나.
서각봉에서 대둔산 정상인 마천대 가는 길은 산죽과 단풍이 어우러져
가을을 재촉하는 느낌이다. 여태껏 우리 일행이외는 만나질 못했는데
마천대가 가까울수록 등산객이 많아져 자꾸만 불편함이 가중된다.
마천대 아래에는 구름다리와 입석대가 보이고 대둔산 케이블카도
관광객을 태우고 수시로 왔다갔다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천하 절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암릉구간을 계속 오르내린다.
쑥부쟁이도 많이 있고... 암릉아래로 발을 내딛는데 뭔가 스르륵
하는 소리에 놀라 쳐다보니 바위 아래에 독사 한마리가 황급히
도망을 간다. 나 역시 얼른 피한다.
어느 神이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기가 막히다.
대둔산은 서서히 붉은 물결로 뒤덮히기 시작한다.
대둔산은 전북과 충남에서 각각 1977년과 1980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케이블카와 구름다리, 삼선계단 등 시설물이
몰려있는 완주쪽 개발이 두드러져 교통이 편리하고 숙박시설이
다양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는다. 완주쪽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케이블카에서 내려
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을 거쳐 마천대까지는 30분소요된다.
호남의 금강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대둔산은 충남 논산군과 금산군,전북 완주군 등 3개군에 걸쳐 있다.
최고봉인 마천대를 중심으로 기암괴석들이 제각기 위용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또한 능선상으로 바랑산,월성산이 대둔산과 이어져 있으며 산행 출발지에서 왼쪽편으로 바랑산과
월성산을 이어서 산행할수 있다. 대둔산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기경의 절벽을 이루는 전북 완주쪽과 순후한 시골아낙 같은 충남 논산,금산쪽이 바로 그것이다.
등산로 역시 양쪽 지형이 상반되는 것 만큼이나 특성이 뚜렷이 구분된다.
괴목 동천 남쪽에 있는 천등산이나 마천대에서 마냥 아득하게 보이는 바랑산과 월성봉도
대둔산의 그늘에 가려서 그렇지 여유있게 산행을 즐길수 있는 산이다.
개척탑 밑의 구름다리는 두려움을 느낄때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 밑으로 바로 밑으로 산행을 해도 된다
대둔산 정상 마천대 가는 갈림길(10:45)
대둔산 마천대(摩天臺, 876.9m:10:50)
대둔산은 우리나라 8대 명산 중의 하나이고, 등산객들이 찾는 빈도는
100대 명산 중 6위를 점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곳이다.
금남정맥이 지나는 마루금은 충남과 전북 도계를 따라 이어짐으로 오늘
산행은 옛 선조들이 대둔산을 걸었던 코스와 일치한다고 한다.
대둔산은 옛이름을 '한듬산'이라 했다는데,
이는 계룡산의 지세와 겨루다 패해 한이 맺힌 것이라는 뜻.
또, 순 우리말로 '크다'는 뜻의 '한'과 '덩이'라는 뜻의
'듬'을 한자화 하다보니 대둔산이 되었다고..
'한 맺힌 산'이라는 이름처럼 역사가 순탄치 않은 대둔산은
임진왜란때 대둔산 일대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이끄는 의병대와
권율장군의 군대가 일본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조선 말기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도 대둔산을 찾아
일본군에 대항하며 마지막 결사항전을 벌이다 바위벼랑에 모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한다. 대둔산 마루 삼선계단 직전에 있는
'대둔산동학군최후항전지' 표지가 그 역사를 전하고 있다.
형편없이 망가져버린 대둔산 정상 삼각점
삼각점은 국가의 재산으로 훼손시는 처벌을 받는다고
분명히 적혀 있건만 형편없이 망가져 버렸다. 거기다가
거기를 깔고앉아 음식물을 먹고 있는 사람도 있다.
준법 개념이 없는건지 글씨를 모르는지... 관심조차 없다.
정상에 서있는 로켓트 모양의 완주군에서 세웠다는 개척탑은
뭘 개척한지는 모르지만 범여가 보기에는 아주 흉물스럽고
추해 보인다. 자연은 자연 그대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거늘.
있는 그대로 훨씬 좋아 보일듯 한데 말이다.
대둔산 막걸리집(11: 15)
정상에서의 돗때기 시장같은 번잡함이 싫어서 먼저 정상에서
내려와 철계단을 지나니 기념품을 파는 곳에서 파는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며 동료 산꾼들을 기다려도 오질를 않는다
만원짜리 술 한병을 사서 먹다가 오질 않아서 먹다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등로를 따라 지나간다. 그런데 쎅에서
카메라가 빠져나와 떨어지면서 갑자기 작동이 되다 안되다 한다.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낙조대 갈림길(11:35)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지면 베티재 가는 길이고 직진 하면
낙조대 가는 길이고 좌측에 수락리 마애불이 있다고 표시를 해놨다.
참새가 그냥 지나가랴... 지체없이 내려가니 낙조산장 뒤에 마애불이
있는데 너무 마모가 되었는지 음각이 표시가 나질 않아 알아 볼수가 없다.
논산 수락리 마애불(11:40)
마애불을 둘러보고 다시 원위치하여 700여m 떨어진
낙조대를 향한다. 지금 보지 않으면 언제 볼 수 있으랴
낙조대(落照臺) :850m :859m)
낙조대는 정상에서 해질 무렵 서해 수평선상으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다하여
낙조대(落照臺)라 하였다.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일출일몰의 경관은 일대장관이다.
또한 신라 신문왕 원년(681)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태고사의 위치를 정했다고 한다.
대둔산 낙조대 아래에 있는 태고사는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태고화상이 중창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진묵대사가 재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낙조대 정상에 설치된 표식판
태고사(太古寺)태고사는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원효대사가 12승지의 하나로 꼽은 명당으로
한때는 대웅전만 72칸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인도산(印度産) 향근목으로 만든 불상이 봉안되었으나, 6.25때 소실되었고
최근에 복원한 대웅전, 무량수전, 관음전 등의 여러 전각들이 있으며 이 태고사를
끼고 낙조대를 오르면 대둔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금강산의 마하연사와 동렬의 명찰(名刹)로 서산대사의 법손인 진묵대사가 오랫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사찰이다.
우암 송 시열이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쓴 석문이 절 앞 암벽에 아직도 남아있다
태고사는 원효대사가 이 절터를 발견하고 좋아서 3일 밤낮을 춤췄다는 명당이다.
만해 한용운도 태고사를 보지 않고 천하의 승지를 논하지 말라고 했다는 곳이다.
태고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고사에 묵고 있던 원효대사가 하루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중국의 한 절에 불상사가 날 것이라는 괘가 나와서 널판지에 '척판구중'
즉 널판을 던져 사람들을 구한다라고 적어서 중국을 바라보고 던졌다고 한다.
중국의 한 절에는 나이 어린 동승 한 명이 화장실에 앉아 변을 보다가 하늘을 보니,
커다란 황금덩어리가 하늘에서 절 쪽을 향해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쳤다.
동승의 소리에 놀 란 사람들이 밖으로 모두 뛰어 나오자
절 뒤에 있는 산이 무너져내려 절을 덮쳐버렸다.
놀 란 사람들이 황금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 보니 황금은 없고,
널빤지에는 동방의 원효가 널 을 던져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고 적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낙조대에서 바라본 오대산
강원도의 오대산국립공원 외에 이곳에도 자그막한 오대산이 존재한다.
이곳 오대산은 대둔산을 오르는 산행기점인 배티재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배티재 고개에서 정북 방향으로 능선을 향해 오르면 약 30분 이내
오대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오대산 정상에서 대둔산으로는 서쪽 방향으로
낙조대를 향하여 걷다보면, 처음 배티재 아래에서 대둔산을 오르던 산행길과
만나게 된다. 이곳 산은 대둔산의 명성에 가려 일반산악인들은 잘 가지 않아
산 높이 등 산행 자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배티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대둔산의 모습
장군 약수터 가는 길
장군 약수터(12:10)
서기 660년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허둔 장군이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대둔산에 입산하여 물을 마신 곳이라
장군 약수터라 전해져 오고 약수터의 근원인 상여봉을 멀리서
바라보면 용이 하늘로 구름을 타고 힘차게 승천하는 현상을
볼 수 있고 상여봉이 용의 머리라면 장군 약수터는 용의 입으로
물을 내뿜는다고 하여 일명 용천수라고도 한다.
이 약수를 마시면서 100일을 기도를 하면 만병통치 된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한다.
배티재 입구(12:30)
배티재로 내려오는 인공 조형물이 참으로 촌스럽기 그지없다.
F.R.P.로 조형물을 만들었는데 산과의 전혀 밸런스도 맞지않다.
차라리 자연 그대로가 좋을듯 싶다. 약 9시간에 걸친 산행을 종료하고
배티재에 접어드니 먼저온 동료 산꾼들은 식사를 하고 있다.
일단 휴게소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수건에다 물을 적신 후에
몸을 닦고나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잠그고
옷을 갈아입고 동료들과 술과 음식으로 뒷풀이를 끝낸후 버스에서
잠에 떨어져 잠에서 깨어나니 서울에 도착하였다.
배티재(340m)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 진산면을 잇는 17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 고개 주변에는 돌배나무가 많았는데 배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에서 이치(梨峙) 또는 배티재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곳 배티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수인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산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전라도를 침략하려던 차에 당시 광주목사를 지냈던 권율장군의
1만5천의 향군(鄕軍)에게 야밤에 기습을 당해 대패를 하면서 그 기세가 꺽였는데
이 전공(戰功)으로 권율장군은 그 후 전라감사로 승진했다가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배티재에는 권율장군과 황진현감의 대첩비와 전승비가 있다.
황진장군 이현 대첩비
이티대첩(梨峙大捷) 유허비
이치(배티재)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로 통하는 17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2만여 왜적이 호남으로 나아가 군량미를 얻고자 이곳을 넘으려 하였으나, 먼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권율(權慄)장군이 1,500여 군사를 이끌고 결사전을 벌인 끝에 적을 섬멸, 그들의 호남진출을 막아낸 곳이다.
이치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에서 승리한 싸움으로 기록,
고종 3년(1866) 도원수 권공이 비와 함께 사당을 세웠으나 1944년 일제에 의해 폭파되어
1963년 이 대첩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손과 지역 유지들이 지금 장소에 다시 건립하였다.
참으로 멋있는 글귀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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