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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금남정맥(終)

금남정맥 제6구간 - 엄사초교에서 윗장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1. 11. 13.

 

○ 산행일자 : 2011. 11. 13(일) 
○ 산행날씨 : 흐림.오후 맑음... 짙은 안개로 인하여 가시거리 거의 제로상태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8km / G.P.S 거리 22.3 km(어프로치 2.7km포함 /  9시간 소요   

○ 산행코스 : 엄사리-음절-305봉(H)-349봉-344봉-향적산 갈림길-전망암-멘재-454봉-504봉-463봉(H)

                  434봉-큰서문다리재-446봉-계룡산 천왕봉-쌀개봉-관음봉-삼불봉-금잔디고개-수정봉-612봉-468봉

                  만학골재-294봉-327봉-265봉-윗장고개

○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계룡면,반포면 / 계룡시 남선면, 엄사면 / 논산시 상월면

 

이제 금남정맥도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리는 서울과 가깝지만

교통은 영남이나 호남지역 정맥길에 비해 홀로 다니기엔 교통이 무척이나 좋지 않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산악회를 따라다니자니 코드가 별로 맞지 않은 것 같아 이번 산행은 토욜 오후

7시에 집을 나선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옥수역에서 내려 국철로 갈아타 용산역에 내리니

저녁 8시가 좀 안된 시간이다. 평소 열차를 타지 않은 탓인지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해 본건 40년이 넘은 것 같다. 이곳은 예전에 허름한 완행열차 역쯤으로 여겼는데 서울

살아도 용산역을 이용할 일이 없어 오질 않았는데 완전히 천지개벽이 될 정도로 바뀌었다.

역에는 백화점과 할인점 극장등 복합 쇼핑몰로 바뀌었다. 깨끗하긴 하나 상당히 번잡하다.

20시 25분발 계룡역가는 열차를 타고 기차여행을 하는 셈이다. 잠도 오질 않아 보다가 만

책한권을 보는사이에 계룡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오늘 숙소(?)인 계룡시 엄사면에 있는

계룡웰빙 찜질방에 짐을 풀고 내일 아침 산행을 준비한다. 




 

 

 

 

 

 

 

 

 

 

 

 

 

 

 

 

 

 

 

 

 

 

 

 

 

 

 

 

 

 

 

 

 

 

 

오늘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용산역에서 계룡역 가는 열차표

용산역(20:00)

열차 여행을 용산역에서 해본다. 정확하게 말하면 20대 초반에 부산에 갔다가

부산진역에서 용산역까지 오는 완행열차를 타고 13시간 정도 걸려서 온 적이

기억이 난다. 그것도 차비를 아낄려고 입석으로 서서 말이다.

그래도 그때의 젊음이 좋은것 같았다.  용산역의 허름하고 지저분한 기억밖에

없었는데 오늘 와보니 최신 건물에 깔끔함에 정말 놀랐다.

용산역 앞의 야경

시간이 다 되어 열차를 다러 가는중

용산역의 플랫폼

오랫만의 기차여행이다. 사실 열차를 타고 개인적인 산행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계룡역(22:37)

열차는 정확하게 계룡역에 도착을 한다. 역사는 조금 외진곳에 있어서 한가하고

교통이 불편하다. 예전엔 계룡역이라 부르지 않고 두계역이라고 불렀다는데

군의 3개 사령부가 이곳으로 이전해와 계룡대가 생기는 바람에 계룡역으로 바뀌었다.

열차에서 내리니 대중교통도 없고 기다리는 택시도 없어서 한참을 기다리니 택시 한대가

와서 엄사 중학교 옆에 있는 계룡웰빙 찜질방으로 향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 도읍지로 꼽은 천하명당

신도안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성계의 뜻이 펼쳐지지 못한 이유는 이곳이 ‘정씨의 도읍지’라는 도참설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 새로이 도읍지를 세우려 했던 이성계는 왕궁을 짓는 공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서울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뱃길과 다른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으로 적당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때에 왕궁을 세울 공사가 진행됐음을 입증하는 왕궁 초석 105개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전체 면적의 67.5%가 임야인 계룡시는 동쪽으로는 대전 유성구, 서쪽은 논산 상월면과 연산면,

남쪽은 논산 벌곡면, 북쪽은 공주 반포면과 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국사봉, 향적산, 북쪽으로는

신라 5악(五嶽)의 하나로 꼽힌 계룡산(鷄龍山)과 잇닿아 있다.

 

삼한 때는 마한에, 백제 때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에 속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황산군(黃山郡) 소속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연산현(連山縣)과 공주목(公州牧)에 부속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역시 연산현에 속하다가 1895년(고종 32년)

연산군을 거쳐 1914년 두마면(豆磨面)으로 이름이 바뀌어 논산군에 편입됐다.

 

전통과 현대가치 공존하는 전국 ‘초미니시(市)’
계룡시는 2003년 9월19일 전국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시로 개청했다.
1990년 충청남도 직할의 계룡출장소가 설치된 뒤 주민들의 민원이 잇따르면서
2003년 ‘충청남도 계룡시 도농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고
 출장소에서 계룡시로 승격했다. 시 승격 이후 3만 6,000여 명(2006년 12월)에
 불과하던 인구는 2009년 말 현재 4만 2,000여 명으로 늘었다.
 
행정구역은 엄사면, 신도안면, 두마면 3개면과 금암동으로 구성돼 있다.
 2011년도 예산은 1,191억원 규모다. 도농복합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거주환경이 뛰어나다. 육·해·공 3군본부가 위치한 국방중추도시로서 교육, 복지, 국방의
 살기 좋은 도시로 ‘도약하는 계룡, 매력 있는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군사 요충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던 이 지역이 대한민국 최고의 군사 요충지로 변한 건 1993년 무렵이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완료된 계룡대(육·해·공 3군본부) 이전 사업으로 대규모 군대 시설이 들어서고 전국 각지에서 군인 가족들이 유입됐다. 1989년 육군과 공군본부가 계룡대로 먼저 이전했고 4년 뒤인 1993년 해군본부가 이전을 마쳤다.(계룡시 홈페이지 인용)

계룡시 엄사리 계룡웰빙 찜질방(23:00)

찜질방에 도착하여 요금을 계산하는데 깜짝 놀란다. 요금이 9000원이나 한다.

왜이리 비싸냐고 하니까... 다 그렇게 받는다고 한다. 기가 막히다.

서울에 있는 아주 시설이 잘 되있는 찜질방도 7000~8000원이면 가고 지난주

천안에 있는 아주 시설이 좋았던 찜질방도 7500원에 자고 나왔는데 말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락카키를 받아 베낭을 넣고 사우나에 샤워를 한 다음에

수면실로 향한다. 시설은 여관으로 치면 여인숙 수준이다. 손님도 별로없고

다행인건 토굴 수면실에 가니 20여개의 토굴에 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바람에 일찍 잠이들어 새벽 4시까지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계룡웰빙 찜질방 출발(04:40)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한 다음에 베낭을 챙기고 싸가지고 간 아침을 사우나에서

먹고 커피 한잔 마신 다음에 사우나를 나서는데 카운터에 있는 사람도 손님이

없으니 깊은 잠에 빠져있다. 깨워서 신발장 키를 받아 신발을 신고 밖을 나오니

산밑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는 꽤나 차갑다. 이곳은 계룡 신도시 지역에 속하는데

보이는거라곤 빨간 교회 십자가만 보인다. 기독교의 공격성 교세는 참으로 대단하다.

불교도 저런 열정을 배웠으면 한다. 부디 민초들의 아픈곳을 보듬어주는

빛과 소금이 되기를...

찜질방에서 1.2km 떨어진 엄사초교 정문까지 와서 다시 마루금을 이어간다.

엄사초등학교(05:00)

웰빙 찜질방에서 약 1.2km를 걸어서 이곳으로 온 후에 다시 마루금을 이어간다.

엄사초교 정문을 끼고 좌회전하니 선답자들의 시그널들이 전봇대에 달려있다.

학교 담벼락이 끝나는 지점에 도착하면 한진택배가 나오고 다시 도로를 끼고

우측으로 올라가면 신축건물들이 보이고 끝나는 지점에서 들머리에 접어든다.

엄사리 들머리(05:10)

들머리에 접어드니 선답자들의 꼬리표들이 잔뜩 붙어있어 들머리임을

알려준다. 자연과 송정님의 시그널도 보인다. 얼마전에 지나간 모양이다.

부부가 함께 다니는 산꾼인데 부부가 꼭 같이 다니시는 분이시다.

금남정맥에서 두번 같이 탓는데 정말 산을 잘 타시는 분이다.

급한 경사도에 로프를 타고 오르니 수로옆에 조그만 삼각점이 하나 보이고

그 이후는 계룡대를 우측에 끼고 편안한 걸음으로 어둠속에 오르내림을 시작한다.

 

계룡대

난센스 퀴즈 하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진작가들의 노하우에 의지하는 것도 좋을 법 하다.

사진작가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보다 선명한 별 사진을 찍기 위한 조건으로 ‘깜깜하고 사방이 트여있는 곳’을 찾는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보현산(경북 영천), 소백산(충북 단양) 정상을 거론하거나 청양천문대, 대전시민천문대 등을 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센스’라는 조건을 상기하면 정답은 의외의 장소가 된다. 전국 초미니시인 충남 ‘계룡시’가 바로 정답이다.

 육·해·공 3군본부가 위치하고 있어 각 군 총장을 포함해 수백여 개의 ‘별(장성)’을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사람들은 계룡시를 ‘별천지’라고 부른다.

향적산 갈림길(06:10)

어둠속에 나홀로 호젓하게 걷는 이 길이 너무나 좋다.

1주일간의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 풀기에는 정말 그만이다.

이곳이 계룡산이라 그런지 저 아래 마을에서 들리는 새벽닭 울음소리는

정겹기만 하다. 이곳은 새벽 운동을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등로 곳곳에

운동시설들이 있고 끝까지 계룡대의 경고판을 보다가 드디어 급한 경사길로

접어든다. 좌측의 향적산 정상 가는길에서 우측 513능선으로 빠진다.

6시가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칠흙같은 어둠은 계속된다.

전망암(455m : 06:25)

전망암에는 아직까지 칠흙같은 어둠이 계속되고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될 정도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향적산 가는 길이고 출입금지구역 목책뒤로 직진하는

길이 금남정맥 길이다. 2017년까지 다니지 말란다. 그렇다고 안가나...

갈 사람은 다 가는데... 하옇든 국공파들은 하지말라 벌금 매긴다 하는 소리만...

산꾼들이 없으면 당신네들 밥그릇 떨어져요...

오늘 계룡산 구간의 금남정맥길은 75%가 입산금지구역이다

이곳에서 부터 천황봉, 쌀개봉, 관음고개까지 그리고 또다시 금잔디 고개에서

부터 만학골재까지다.  막는 이유를 모르겠다. 제발 행정편의주의 발상을

치워 버리시길... 국립관리공단 나으리들 군림하지 말고 下心으로 봉사좀 하시요

시월 열여드랫날의 새벽달은 이별을 준비하고...

능선 안부에서 바라본 금강대학교의 모습

서서히 여명은 밝아오고 좌측의 논산시 상월면의 모습과 금강대학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금강대학교는 천태종 종립학교로 불교 교육에 상당히

매진하는 학교이다. 지난달 21일에는 상월원각대조사탄신 100주년 기념

 ‘미래세계와 불교’국제학술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하였다.

맨재의 모습(06:35)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와 계룡시 남선면 부남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향적산(574m)에 매달린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맨재 또는

현령

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멘재에서 직진하면 향적산(香積山, 575m)인데 정맥길은 왼쪽 엄사리 쪽으로 간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으로 삼으려 할 때 향적산 정상 국사봉에서

 지형을 살폈다고 한다. 신도안(新都內, 新都案, 神都案)은 지금의

계룡대(우리나라 3군 통합기지) 자리다.

 

신도안(新都內)으로 도읍을 정하려던

이성계

로 인하여 계룡산에는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으로 신도안을 선택하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자신은 계룡산의 사연봉에 올라가 제단을 차려 놓고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던 곳은

기도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반년쯤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하얀 할머니가

 나타나 공사를 계속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니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정도령

이라는 신인이 나타나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800년간

다스릴 것이니 이성계는 500리 북쪽으로 올라가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다.

이성계는 공사를 중지시켰는데 그때 일군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모여 신털봉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계룡산은 한 때 토속신앙의 터전이었다. 조선 시대 계속되는 국난으로 국민들은 피난처를 찾았고,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정감록에 나오는 새 도읍지 신도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984년에는

100여개의 종교단체들이 밀집하여 집성촌을 이루기도 했다. 이후 삼군통합본부 이전계획에 따라 모두 해

체 및 인근 지역으로 옮겨가, 지금은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507m봉의 갈림길(07:20)

맨재에서 이곳까지는  고도편차가 거의 없어 편안한 낙엽길을 걸어온다.

이곳은 단속구간이라 꼬리표가 전혀 없으나 자세히 보면 등로는 뚜렸하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그 사람들이 잠 안자고 단속나올 충성스런 사람들도

아닐테고 느긋하고 길을 걷는다. 조금 건조한 날씨탓에 먼지로 인하여 목이

상당히 아프다. 이곳은 봉분이 없는 ‘密陽 孫氏’ 비석을 끼고 좌측으로 간다.

길이 잘 나있는 우측 헬기장으로 가면 계룡대 내려가는 길이다(알바주의)

구절초 한송이가 산꾼을 반기고...

 

계룡산의 역사는 ‘신도안’(新都內)의 역사다. 하늘의 최고신인 천황대제가 강림한다는 천황봉

(天皇峯)을 비롯한 계룡산의 여러 봉우리로 둘러싸인 남북 4㎞, 동서 3㎞의 분지가 바로 신도안이다.

이곳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위해 공사를 시작한 ‘도읍 후보지’였다.

 신도안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태조가 한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1년 만에 공사가

중단됐지만, 이후 〈정감록〉 등을 통해 ‘민중의 이상향’을 표상하는 핵심 공간이 됐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역사교육학)는 “이 때문에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한 대원군은 전국의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면서도, 은밀하게 신도안 천도를 위한 터닦기 공사를

지시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반역의 상징적 공간으로 일종의 ‘봉금’(封禁) 지역이었던 이곳은

 결국 일제 강점 이후 종교취락지로 변모했다. 신도안에 정신적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를 거치며

사분오열하는 와중에 ‘탈정치 노선’을 주창한 시천교가 탄생했고, 그 내부에서 다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도들이 1924년 2월13일 신도안으로 이주한 것이다.

 

〈정감록〉과 동학의 은근한 연관, 일제강점과 민족종교세력의 내분, 그리고 정신적 상징공간으로의

귀향이라는 드라마틱한 과정은 이후 수많은 신흥종교 탄생의 씨앗이 된다. 그 거름은 근현대사의 격랑 가

운데서 〈정감록〉의 예언이 바로 이 신도안에서 실현될 것이라고 믿은 이름없는 필부들이었다.

그러나 1975년 계룡산 국립공원화 사업으로 무허가 암자와 종교건물을 철거하면서 신도안의 쇠락이 시작됐다.

1984년에는 육군 계룡대 설치 사업을 이유로 이 지역 주민들의 분산이주 정책이 실시됐다. 그들과 함께 깃들었던

 종교인들도 함께 이곳을 떠나야 했다.

 

진철승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주정책 실시 당시 “시민아파트와

간척지 우선분양권을 주겠다는 특혜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이주한 신도안 주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계룡산이 내다보이는 인근 마을과 도시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한세기에 걸친 민족의 수난과

민중의 아픔이 빚어낸 세계 개벽에 대한 변함없는 열망” 때문에 신도안에서 새 세상이 펼쳐지는 날을

지켜보겠다는 이유였다.

헬기장을 바라보고 좌측 벙커를 지나가야 금남정맥 길이다.

아무리 막아도 가는 사람은 있더라 어느 산악회에서 길 표시를 해놓고...

금남정맥 등로에는 이런 참호도 길을 막고...

463봉 헬기장의 모습(07:35)

성황당 안부(07:45)

헬기장에서 편안한 내림길을 내려오니 성황당인듯한 돌무덤도 보이고

신령스러 보이는 나무 한그루가 있다. 계룡산 정상은 가까워 오는데

갈수록 짙은 안개가 몰려온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든다.

큰서문 다리재(용천재:382m:07:50)

이곳에서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이곳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낙엽이 발목까지

차오른다. 그리고 그 낙엽이 엄청나게 미끄럽다.  그리고 먼지가 너무 심해 목이

너무 아파 베낭에서 마스크를 꺼내쓴다. 걷는 속도가 자꾸만 더디어 지는데

이제는 안개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배는 서서히 고파오고...

 

신원사 [新元寺] 가는 길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계룡산의 3대 사찰중의 하나인 신원사 가는 길이지만

오랫동안 출입금지 구역이라 등로의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국립공원인 계룡산의 연천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신원사는 공주시에서

 23km 떨어져 있으며, 백제 의자왕 12년(652년)에 보덕화상이 세운 것으로

동학사,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 3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편이어서 조용하며, 계곡의 맑은물은 잠시나마 속세를 잊게 해준다.

경내에는 대웅전, 중악단, 5층석탑과 부도들이 있다.

 신원사 중악단(보물 제 1293호)

중악당은 국적인 산악 숭배처로 조선시대 계룡산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로 계룡산 신원사 내에 있다.

원래는 묘향산의 상악단,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이 있었으나 현재는

중악단만 보전되어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계룡산은 풍수지리학자들이 전하는 최고의 吉地로 꼽히고 있으며 태조

이성계도 조선의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직접 계룡산 일대를 다니면서 궁궐터를

측량했다는 신도안이 남아있다. 태조때부터 중악단에서 산신제를 지내다가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효종(조선 17대 임금)때 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

(1879년)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되어 중악단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명성황후가 중악단을 재건한 이유는 이씨조선의 국운과 국권회복, 또한 고종과

아들 순종의 만수무강을 염원하는 애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볼 수 있다.

중악단은 구릉지에 동북,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였고 둘레는 담장을 두른 궁궐양식으로  위엄이

있는 화려한 재향 건축물이다.

 

중악단 현판은 이중하(1846~1917)가 쓴 글로 백두산 정계비에 관해 청나라와

영토회담을 하면서 “목이 잘릴지언정 한치의 땅도 내줄수 없다” 고 울부짖던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닉 이름이 멋있다 . ‘월하독주(月下獨走) 라 달빛아래 나홀로 걷는데

아무리 금지구역이라 해도 언 넘이 단속할 것이여...

 

갑자기 사람소리가 난다. 바짝 긴장을 하고 나무뒤로 몸을 숙인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벌금 30만원이면 허리가 휘청하제...

자세히 보니 정맥 산꾼이다. 5명인데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에 베낭에서 찹쌀모찌 한개에 사과 하나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후 다시 길을 나선다.

천황석문(08:45)

계룡산 정상은 자꾸만 안개가 짙어진다. 거의 앞을 가름하기가 힘이들 정도이다.

천황석문이 나타난다. 직진하여 진행하면 천황봉과 쌀개봉 사이 참호로 연결되고...

석문 직전에서 우측 암봉을 우회하여 오르면 천황봉(천단)으로 직접 오를수 있는데

 암릉이 위험하므로 피하는게 좋다.  우회하여 비알길을 조심스레 걷는데.

군부대에서 아무렇게나 버린 폐기물이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케이블 전선들이

흉물스럽기만 하다. 우리나라에 氣가 가장 센 곳에 말이다

김해 백두 산악회 홍길동님과...

석문을 지나는데 남자 2명 여자 1명의 산꾼을 만난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말씨가 경상도 사투리라 고향을 물으니

김해란다. 김해 분 중에  나홀로 산행을 하시는 김해 백두산악회

홍길동님 꼬리표를 많이 만난다고 하니까. 자기가 홍길동이라

소개를 한다. 같이 사진 한장을 찍고 서로 헤어진다.

이 분들은 너티재에서 새벽 2시에 출발하여 양정고개까지 간다고 한다.

천황문 갈림길(08:55)

군부대 아래에서 천황봉 정산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계룡산의 정기를 좀 받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계룡산의 산 이름은 무학대사가 말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과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에서,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계룡산은 오랜 역사속에 숭배 받아온 산으로 예언적으로는 비결서에 만주 곤륜산과 같은 영산으로
여기고 있어서 향후 계룡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품어왔던 산. 어쨌든 계룡산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신비스런 곳으로 믿어 웬만한 도인들은 계룡산을 갔다와야 명함을 만들고 경력이 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도인들과 온갖 무속인들이 모여들어 이름도 생소한 간판을 걸고 골짜기

구석구석에 들어 앉아 있었는데 그 수가 2백 곳도 넘었다고 한다.

이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종교정화운동을 하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계룡산은
터가 센 수도처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천황봉을 우회하여 힘들게 올라오니 베낭도 메지않고 운동화 차림의

등산객 한명이 송신탑쪽에서 걸어 오면서 안개속에 일행을 놓쳐버려

길을 잃었다고 하면서 동학사 가는 길이 어디냐고 한다. 안개는 10m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날씨도

추워지고 이쪽은 집중단속구간이라 일반 산객들은 오지 않은 곳이기에...

자세히 가르쳐주기는 했는데 찾아갈련지 모르겠네. 군부대 아래를 지나

다시 올라가 난간 철계단을 넘으니 적사함이 보이고 조금 오르니

난간을 조금 짤라놨다. 국공파가 있는지 없는지 조심스레 확인을 한

다음에 천단쪽으로 오른다.

군부대 오르기 직전에 난간 틈사이로 재빠르게 좌측으로 접어들어 바위

틈을 지나서 오르니 아래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송신소가 코 앞인데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정도로 짙은 안개이다. 천단 정상에는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오한이 들 정도로 날씨가 춥다. 베낭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셀카로 인증샷을 한 다음에 서둘러 내려온다.

계룡산 천황봉(鷄龍山: 845m:09:10)

충청남도 공주시와 계룡시, 논산시 그리고 대전 광역시에 걸쳐 있는 이다.

1968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충청지역에서 계룡산은 대표적인 산이나 높이나 면적에서 최고나 최대는 아니다.

 

계룡산의 천황봉과 연천봉, 삼불봉을 잇는 능선이 닭의 볏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고봉인 천황봉의 높이는 해발 845미터이고 계룡산

전체면적은 60.98평방킬로미터이다. 계룡산 기슭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으며, 국어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남매탑이 있다.

계룡산의 남쪽 지역인 신도안은 조선 왕조 개국 직전 도읍 후보지로 꼽히기도 했다.

 

계룡산은 백제시대도 중요한 산으로 중국측의 문헌에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기록된 것이 확인되는데, 신라에서 계람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계룡산이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

의 하나로 중요시 되었다.

신라는 국가의 제사를 대사, 중사, 소사로 분류하였는데, 계룡산에서 지내는 제사는

중사에 해당되었다. 이후 이 신앙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전해져 내려왔다.

이 제사는 신원사의 중악단에서 지내져왔다.

계룡산은 태백산맥에서 차령산맥이 서남쪽을 뻗어나가다가 금강에 의하여 침식되고

남은 잔구성 산이다. 주봉은 천왕봉이며,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등 20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있다. 산세는 동쪽으로 U자형으로 열려진 침식분지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5악(五岳)의 하나인 중악으로 중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중사(中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제사를 지내던 중악단(中岳壇)이 남아 있다. 계룡산의 신도안이 신종교 및

 각종 민간신앙의 터전이 된 것은 1920년대부터인데, 이는 조선건국 때 무학대사가 새로운 도읍을

여기에다 세우려 했던 사건과, 그에 얽힌 많은 구전이나 풍수지리설및 정감록에서 이 신도안이

십승지지(十勝之地)이자 새로운 정씨 왕조의 수도로 지목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태조가 계룡산 남쪽에 도읍을 세우기 위해 기초공사까지 마쳤으나

조운(漕運)이 멀어 중단했는데, 그 이후 이곳을 신도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실용적 이유를 댄 공식

 기록일 뿐이고, 이후 계룡산 신도설은 조선왕조의 운명과 연관된 수많은 이설을 낳으며 민간의 반왕조적(反王朝的)

성향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까지도 신도안에 거주하던 풍수가들에 의하면 계룡산은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지기(地氣)가 멈춰 선 곳으로 이른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지세라고 한다.

계룡산 국립공원 관리소장 나으리 이게 뭡니까?

맨날 정맥 산꾼들만 윽박 지르고 겁박하지만 말고 본인 할일이나

좀 똑바로 하소. 계룡산에 넘어지고 찢어지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간판,표지석, 이정표가 왜 그리 많소? 책상머리에나 있지말고

현장 다니면서 확인좀 하시구료... 소장 나으리는 계룡산을 1년에

몇번이나 올라오시요? 몇년전에 상영된 ‘친절한 금자씨’ 란 영화

대사중에 유명한 단어 아시죠...

조금 전 만났던 참호로 다시 되돌아와 우측 쌀개봉으로 향하는데 아예

이제는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갑자기 쌀개봉을 만난다.

쌀개봉 가기 직전에 계룡산의 산성 흔적을 만난다.

이곳은 백제와 고구려,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영토확장 전쟁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안개속을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쌀개봉 정상에도 어김없이

시설물이 정상을 점령하고 있다.  금강 홍수를 조절하는 시설물이다.

이곳에서 또 한명의 산꾼을 만난다. 이곳 쌀개봉에서 시작되는 관암지맥을

타시는 분인데 안개속에 길을잃어 쌀개봉 정상에 서서 쌀개봉을 물어본다.

그 만큼 안개가 짙게 깔려있다

쌀개봉(09:20)

디딜방아의 받침대가 쌀개라고 하는데 산의 형상의 디딜방아의 쌀개를

닮았다고 하여 쌀개봉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전망이 좋으면 저 아래

동학사가 보인다고 했는데 동학사는 커넝 바로앞도 보이질 않으니...

동학사 (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에 있는 사찰로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724년(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암자를

지은 곳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절을 창건해 상원사(上願寺)라 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곳에

 와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절을

지으니 승려들이 모여들어 사찰이 커지면서 이름을 동학사로 바꾸었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 길재(吉再)가 고려 태조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457년(세조 3)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는데, 다음해 이곳에 들른 세조가 단종을 비롯해 세조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

 월인선사(月印禪師)가 예조에 상소하여 중건했고, 1864년(고종 1) 보선국사(普善國師)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다.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肅慕殿)이라고 개칭했다.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

975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무량수각·삼은각·숙모전·범종각·

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는데  청도 운문사, 예산 수덕사(견성암)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사찰을 감싸고 있는 2개의 산줄기가 높고 험해 하루에

볕이 드는 시간이 반나절도 안되며 억울한 영혼을 천도해주는 사찰로 유명하다.

쌀개봉의 암릉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내려오니 또다시 커다란 암릉이 나타난다.

위험하니 돌아가란 팻말이 보인다. 우측 급경사를 내려오니 안개가 이젠

칠흙같다고나 할까... 10m 앞도 보이지 않는다. 통천문이 이 근처인데 보이질 않고...

급경사를 내려서서 200m 정도가도 통천문은 보이질 않고 예감이 이상하다.

다시 위로 되돌아와 자세히 보니 우측 능선위에 안개가 가려진 통천문이 보인다.

휴~~~  큰일날 뻔 했다. 하마터면 대형 알바를 할 뻔했다. 이곳은 단속지역이라

꼬리표가 없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가야만 하는 곳이다.

통천문(通天門 : 09:45)

하늘과 통하는 문이라는 이름답게 정말 멋진 바위이다

통천문을 통과하여 우측 위로 오르니 능선 안부가 나타나고 계룡산 전체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능선 안부로 내려서니

커다란 암릉위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나타나고 암릉을 자일을 타고 내려온다.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논산시 두마면을 거느린 해발 845m의 계룡산국립공원을 동학사

지역에서 바라봤을 때, 천황봉 정수리에서 북쪽으로 내리뻗은 쌀개릉은 닭비슬처럼 생겼다.

그 아래의 길다란 자연성릉은 용의 등줄기와도 같아서 마치 닭비슬을 쓴 용처럼 생겼다 하여

계룡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흔히들 계룡산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극치라고 한다.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의 영취산 마이산으로 휘돌아 주줄산에서 운장산, 대둔산으로

 휘어지면서 계룡산까지 굽이치니 산태극이다.


또한, 금남정맥따라 흐르는 금강은 계룡산의 북쪽으로 휘감아돌며 서해바다로 태극형상으로 돌아들어가니

이를 수태극이라 부른다. 이렇듯 강물과 산맥이 태극형상으로 굽이치는 계룡산을 천하명산이라고 한다

손가락만한 로프가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을 접고 어렵사리 로프를 타고

내려오니 천황봉 밑에 있는 석문과 비슷한 곳이 나타나고 앞에 있는 암릉은

오를 수가 없어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내려가니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데

길이 보이질 않는다. 조심해서 간다. 이곳이 집중단속지역이라 도둑고양이처럼...

암봉 갈림길(10:00)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가서 보니 관음고개에는 국공파 단속요원들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는 등산객이 많아서 얼른 목책을 넘어

등산객에 휩싸여 아무렇지도 않게 200m 위에 관음암으로 오른다

관음고개(10:20)

이곳부터는 정규 등산로라 그런지 번잡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우측 동학사와 은선폭포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다.

관음봉(觀音峰 : 816m:10:25)

산의 모습이 후덕하고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님을 닮았다고

하여 관음봉이라 부르면 정상아래에는 관음정이란 정자가 있다.

관음암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내려와 좌측 계단으로 내려선다.

이곳은 험준한 바위능선이 마치 설악산 공룡능선을 닮았건만

아쉽게도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자연성능 가는 길에서

안개가 자욱한 자연성능의 모습

동학사와 은선폭포 계곡

은선폭포(隱仙瀑佈)

은선폭포는 옛날 신선들이 숨어서 놀았을만큼 아름다운 곳이라하여 이름지어졌으며, 폭포의

물줄기가 낙차되며 피어나는 운무는 계룡팔경 중 7경으로 지정되어 계룡산의 자랑거리가 되고있다.

이 폭포는 홍색장석질 화강암에 나타난 20㎝정도의 두께로 겹겹이 쌓인 판상(板狀)의 사(斜)절리들이

외부로부터 떨어져나가 만들어진 높이 46m,폭 10m, 경사 60도 정도의 폭포로써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산지의정상부 주변에 위치하여 폭포를 형성 할 수 있을 만큼의 유수량이 계속

유지될수 없기 때문에 갈수기에는 낙수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다.

정맥길이 북진하는 길 계룡산에서 금남정맥은 서쪽으로 꺾였다.

정맥길의 끝이 대개 바다가 되는데

금남정맥이 강(부여 백마강)에서 끝나는 것은 계룡산을 제외하지 않을 수 없어 그랬다는 설도 있다.

자연성능길에 바위에 메달려 있는 소나무

그대도 나만큼이나 삶이 고단한 모양이다.

자연성능 길(10:50)

자연스런 성곽의 능선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계룡산 일대가 도읍지로 여겨온 이유중의 하나가

이 자연성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앞은 천혜의 요새이고

뒤는 물좋은 평야, 말그대로 금상첨화이라. 이 능선은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으로 늘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남쪽 기점인 관음고개에서 동학사,

신원사, 갑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있고, 북쪽 기점인 삼불봉 역시 동학사, 갑사

천장골, 삼신리계곡, 신선봉 코스가 만나는 지점으로 자연성능을 찾는 등산객이

붐비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남으로 쌀개봉을 거쳐 천황봉

또는 황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북으로 수정봉-말재능선, 그리고 북동으로

신선봉-장군봉 능선등 사방팔방으로 뻗은 능선뿐만 아니라 동학사 계곡과 갑사계곡을

모두 볼 수 있어 산행 묘미 또한 멋진 곳이다. 마치 설악산의 용화장성의 일부를 옮겨

놓은듯한 자연성능은 동학사 계곡쪽은 자연성곽을 이루고 있어 가슴 서늘한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험한 산세이나 갑사계곡의 부드러운 산세는 가슴을 포근하게 해주어

강약의 산세를 함께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관음봉과 삼불봉의 중간부터는 아쉽게도 능선을 오를 수가 없어 좌측 우회도로로

된 길을 걸어간다. 정맥꾼이 능선을 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곳은 등산객이 많은 곳이라 어쩔수 없이 잘되어 있는 도로와 철계단을 따라

삼불봉으로 향한다.

오늘 내가 걸어온 능선들

맨 뒤에 관음봉과  연천봉은 보이나 좌측에 천황봉과 쌀개봉은 보이지 않는다.

담겨본 삼불봉의 모습

마치 주불과 좌,우 협시불이 외호하고 있는 삼존불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여전히 오리무중인 계룡산 정상의 모습

삼불봉 갈림길(11:05)

금남정맥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금잔디 광장으로 가야하나 삼불봉을

가지 않을 수 없기에 이곳에서 800m 정도 떨어진 삼불봉을 향한다.

이곳은 등산객이 미어 터질정도로 많아서 불편하고 짜증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삼존불을 친견하는 마음으로 간다. 10분정도 걸려 정상에 도착하니 천황봉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부처님을 친견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전망을 본 후에

다시 왔던길로 되돌아 간다.

삼불봉에 오르니 계룡산  천황봉(왼쪽 송신탑 겨우 보임)을 비롯한 능선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삼불봉(三佛峰:777m:11:15)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계룡산의 연봉중의 하나인 삼불봉은 높이가 775.1m이며,

 계룡산의 연봉 중 하나로 남쪽의 천황봉[845.1m], 쌀개봉[827.8m]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룡산

주능선에 해당한다. 계룡산은 전체적으로 화강암질 산지이며, 그 중 삼불동은 편마상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불동의 동쪽에는 신선봉과 장군봉이 있으며, 서쪽에는 갑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능선이 이어지며, 남동쪽에는 동학사가 있고, 북쪽으로는 수정봉을 지나 금강 에 이른다.
 삼불동은 조망이 좋은 편인데, 동쪽과 서쪽으로 동학사와 갑사 를 볼 수 있으며, 관음봉, 문필봉,연천봉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삼불동은 겨울에 눈이 내리면 그 아름다움이 더 해진다고 하여,

계룡팔경 중 제2경인 삼불동설화(雪花)로 유명하다.

삼불봉에서 카메라로 당겨본 연천봉(連天峰:739m)의 모습(맨 오른쪽)

하늘과 이어진다는 뜻의 연천봉은 그 기운이 계룡산 봉우리중 가장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천봉 아래 서쪽으로 무속인들이 많이 굿당을 만들어 두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성계가 계룡산 연천봉에 올라 제단을 차려 놓고, 이곳에 왕도가

서고 모든 일이 잘 되도록  천지신명께 엄숙히 기도를 드린 곳이라고 한다.

다시 돌아온 삼불봉 갈림길(11:30)

이곳은 아마 후손들이 계룡산의 정기를 받아 복락을 누릴려고 쓴지는

몰라도 묘지 한기가 목책속에 둘러처져 있다. 아마 이 망자분은 사람들이

많이와 심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번잡함은 피하지 못할것 같다.

금잔디 고개(649m:11:45)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수정봉과 삼불봉 사이에 있다.

금잔디고개는 예전에 금잔디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고 금잔디의 흔적은 겨우 조금 보일정도이다. 좌측으로 갑사쪽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다. 이곳은 점심시간이  다되어 그런지 일반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이 옹기종기 않아서 음식들은 내놓고 점심식사를 하는 중이다.

난 혼자서 벤치에 앉아 찹쌀모찌 한개와 감 한개를 먹고 있으니 옆에서 단체로

식사하시는 분 중에서 안쓰러워 보였던지 오라고 하여 막걸리를 연거푸 2잔을 준다.

거기다가 밥을 싸오지 않았냐고 하면서 자꾸 밥을 먹으라고 권한다.

왜 혼자서 산을 다니냐고 하며 조금은 의하하게 생각을 한다.

저 뒤 목책넘어 플랑카드 뒤로 가야 하는데?

이곳 금잔디 고개에서부터 만학골재까지 집중단속구간이라 이리저리

주위를 살핀다. 국공파들에게 걸리면 안되니까 말이다.

10분간의 정탐을 했는데도 관리공단 직원들은 보이질 않고 재빨리 목책

넘어로 몸을 숨기면서 수정봉으로 향한다. 올라가니 어렴풋한 낙엽길에

길은 희미하게 보인다. 잠시후에 통신탑인듯한 탑이 보이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향한다. 크고작은 봉우리를 여러개 오르 내린다.

금지구역에서 바라본 삼불봉의 모습

이런 태양광으로 된 무슨 용도인지 모를 철탑도 있고...

번 구간은 멘재에서 관음봉 직전까지와 금잔디고개에서
만학골 도로가 지나는 327봉까지 거의 전 구간이 국립공원과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어있어 부담을 안고 지나가야 하는 구간으로 
얼마남지 않은 1대간9정맥의 마지막 관문이 아닌가 싶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수정봉(662m:12:00)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과 계룡면 경계능선에 있는 계룡산에 있는 연봉 중의 하나로 
수정봉이란 명칭은 전국의 많은 산봉우리에 쓰이는 이름이지만, 특히 금강산

금강의 한 봉우리의 명칭으로도 유명하다.

 

보통 수정봉이란 이름은 봉우리가 수정처럼 곱다 해서 수정봉이라고 불리며, 계룡산의 

수정봉 역시 마찬가지이다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봉우리 중 하나이다.

 

 수정봉의 서편에는 금잔디고개를 지나 용문폭포와 갑사가 위치해 있으며 갑사계곡 입구를 따라

내려가면 계룡저수지와 금대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편으로는 신선봉이 위치해 있으며, 신선봉

 남쪽에는 동학사가 자리잡고 있다. 동학사나 갑사를 통하여 많은 산행객들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암릉도 만나고...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갑사의 모습

갑사(甲寺)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하고 있다.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이래 풍부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정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써, 백제 구이신왕원년(久爾辛王元年,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후의 통일신라시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갑사는 이때 신라 화엄종 10대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사는 왜군의 대항하는 승별궐기의 거점이 되어 당시 갑사 청련암에 주석하시던 영규대사는

왜병이 북상하자 800여 승려들을 이끌고 궐기, 충청도 의병장 조헌선생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청도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전투에서 800여 승병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셨고

영조 14년(1738년)에 건립된 경내의 표충원의 임진란의 대표적인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갑사는 조선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수년이 지난 

선조 37년(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효종(孝宗) 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중수하였다.

이어 고종(高宗) 12년인 1875년에도 寺憎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默堂)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갑사는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寂默堂)인 요사(寮舍)가 있다.

이외 종각(鍾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 하나의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요사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堂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위치는 아님을 나타낸다.

 

원사당지에는 대형의 이동은 임난후(壬亂後)의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외에 주요문화재(主要文化財)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象), 배살입상(菩薩立象), 사적비(史蹟碑)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경역(寺境域) 주변에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대적암(大寂庵), 신흥암(新興庵)등 5개의 부촉암(附屬庵)을 거느리고 있다. 

예전부터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태화산 마곡사가 좋고, 가을에는 계룡산 갑사가

좋다는 말이다. 갑사의 가을 단풍은 계룡8경중 하나로 진즉부터

 그 빼어남이 널리 소문이 나 있다. 현재는 비록 동학사가 대전시와 가깝다

보니 계룡산의 주된 산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동학사는 대부분의 영역이 비구니들의

수련도장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고, 또한 예로부터 사찰의 목적 보다는 충절을 기

리는 사당을 목적으로 세워진 터라 계룡산 대표 사찰은 역시 갑사라 할 수 있겠다. 

지나온 능선들

드디어 가슴 졸이며 걸어온 출입금지구역이 해제하고...

만학골재로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낙엽이 부스럭거리며 사람소리가 난다.

느낌이 이상하여 나무뒤로 몸을 숨기며 동태를 살피니 아마 이 아랫동에인듯한

사람인 모양이다. 남녀 3명이 음식물을 싸들고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아이구 깜짝이야...

다시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니 묘지 몇기가 있고 좌측 밭에는 무우와 배추들이

심어져 있는데 전기 철조망이 처져있고 경고판이 붙어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모습에 참으로 허탈하다.

만학골재(13:00)

공주시 반포면 만학골과 계룡면 중장리를 잇는 왕복 2차선의 도로로

교통이 뜸한 편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갑사가 나온다.

이곳에서 물한모금 마시고 옹벽을 타고 오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라이온스

회원 아드님 결혼식을 깜빡했다. 지인에게 축의금을 부탁하고  292봉으로

오르는데 산행시간 8시간이 지났고 단속구간에 가슴 졸이며 걸은 탓인지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온다.  하는 수 없이 292봉 못간 지점 솔밭에 주저안고 만다.

쥬스하나와 고구마 2개를 먹고나니 훨씬 나은 느낌이다.

만학골재에서 다시 등로를 진입하고....

저 사마귀는 어디로 가는지?

327봉(13:25)

묘지에 삼각점이 박혀있고... 이 이후로는 편안한 능선길이지만

상당히 힘이들고 다리가 무겁기만 하다.

327봉에서 바라본 계룡 저수지

드디어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윗장고개로 내려선다.

9시간동안 마음 졸이면서 걸었던 산행에 오늘 마침표를 끝내고 나니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윗장고개(158m:14:00)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에서 중장리의  갑사로 넘는 691번 도로가 지난다.

도로에 내려서 장비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한 다음에 중장리까지 히치를시도한다.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지쳐있고 힘이든 상태라 어쩔수가 없다.30분을 해도 어느 누구

태워주는 사람이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지나가는승용차가 차를 세운다.

40대 초반의 부부가 신원사 드라이버 가는 길이라며차를 세우고 태워주는 바람에

중장리에 와서 14:40분 차로 공주시내로 들어온다.

 

고마운 부부들 땜에 갑사가는 중장리 삼거리에 내려 공주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다음주엔 이곳을 다시와야 하기엔 이곳오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저기

앉아있는 샘통맞은 할마시가 공주가서 물어보란다. 기분이 확 잡친다.

잠시 후에 갑사에서 시민교통이란 버스가 14:40분에 도착하여 공주시내를

향한다. 근데 이곳 충청도의 대중교통 요금이 1200원으로 상당히 비싸다.

 

서울은 900원인데 말이다. 거기다가 공주시외버스 정류장에 좀 내려달라고

기사에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다섯 정거장이 지난 다음에 하는 말...

여기서 내려 건너가서 타란다. 이런 샘통맞은 기사 양반 정말 약이 오른다.

다시 다른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와서 표를 끊으니 17:00 차란다.

한시간 반을 어디서 기다리나... 잠은 쏟아지는데 말이다.

중장리 버스 정류장(14:30)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15:35)

한시간 반을 기다리기 뭐해서 사우나를 찾았더니만 가는 사우나마다

일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다 문을 닫아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밥이나

먹으려고 식당을 갔는데 식당마다 다들 놀고 있다. 하는 수없이 터미널로

돌아와서 쌍둥이네 김밥집에서 돌솥 비빔밥을 한그릇 시켜먹고 커피까지

한잔 한 다음에 화장실에서 가서 간단하게 씻고 이빨까지 닦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대합실에서 기다리는데 잠은 계속 쏟아진다.

공주~서울간 버스표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은가 보다 공주에서 서울가는 버스에 오르니  금남여객 버스기사는

터미널을 출발하자마자 불법 U턴을 하더니만 계속해서 난폭운전을 하면서 운행을 한다.

불안해서 안전밸트를 꽉맨다. 거기다가 웃기는 버스노선이 명색이 우등고속이라는 버스가

가까운 고속도로를 내버려두고 천안까지 일반국도를 타면서 신호란 신호를 다받으면서

천안 시내를 통과하니 공주에서 천안까지 1시간 반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그것도 사람을 싣는것도 아닌데 말이다. 운이 없으려니 바로 앞에 앉은 등산객 2명이

캔맥주를 잔뜩사서 차안을 완전히 술집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다가 계속해서

큰소리로 떠들어 대는 바람에 모두들 눈쌀을 찌푸리는데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참다못해 이보시요 여기가 술집도 아니고 민폐 끼쳐서 되겠냐고 이야기를 하니 그제사

조용하더니만 이내 잠이 들면서 코를 곤다. 공주에서 서울까지 짜증스런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귀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