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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금남정맥(終)

금남정맥 제8구간 - 진고개에서 구드래나루까지

by 범여(梵如) 2011. 11. 27.

 산행일자: 2011,11,27

 산행날씨:초반에 흐리고 짙은 안개. 오후에 맑음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거리: 도상거리 : 18.5km        G.P.S거리: 25.36km
 산행코스: 진고개-161봉-215봉-감나무골-262봉-가자티고개-됨봉-187봉-신앙고개-

                 190봉-평정말 삼거리-조석산-청마산갈림길-청마산성터-오산고개-장대지-

                  석목고개-금성산-통수대-무로정-계백문-부여여고-삼충사-부소산-영일루-군창지

                  반월루-사자루-백화정-낙화암-고란사-구드래나루-부여시외버스터미널

 

요즘 내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왜 이르는지를 모르겠다.

법도 없고 원칙도 없이 말 그대로( ?)판같은 세상이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의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트리지 않나 민초들은 하루하루를 팍팍하게 살아가건만 국민을 좀 잘 살게

해달라고 국회를 보냈건만 맨날 비싼 밥먹고 쌈박질이나 하고 있으니...

난 FTA다 뭐다 하는건 잘 모른다. 하지만 어느게 국익이 되고 백성들에

德이 되는게 좋은건지 판단해서 행동했으면 한다. 나으리들의 사욕보단

국익이 우선이었으면 한다. 무능한 여당이나 대안없이 반대만  하는 야당...

나으리들 요즘 너무나 힘든 민초들의 삶... 한번이나 생각을 해보시기나 하셨소.

 

 

 

오늘 산행구간 지도와 고도표

지난 토요일에 평소에 존경하는 양주 육지장사 회주이신 지원 큰 스님께서 대한 불교 조계종

포교원장으로 취임하시는 고불법회(告佛法會)가 조계사에서 여법하게 봉행되었다.

축하하기 위해 조계사에 들렸다가 오랫만에 修性 法師님과 기념사진 한장을...

큰 스님! 부디 힘들어 하는 중생들을 잠 보듬어 주시길 바랍니다.

 

취임사를 하시는 신임 포교원장 지원 큰 스님

서울고속터미널앞 김밥집(05:10)
나홀로 산행이후에 몇번 다니다보니 단골이 된 김밥집이다.

오늘은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4,000원인데 그런대로 먹을만하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한잔까지 마시고 터미널로 향한다

공주가는 버스표

새벽 4시반에 집에서 나온탓에 의례 습관적으로 차에 오르면 잠에 떨어진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것만 같은 분위기다. 1시간을 조금 더 잤나

버스가 정안I.C를 벗어나면서 잠에서 깬다. 차창밖에는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들녘은 한가하기만 하건만 짙은 안개에 휩싸여 여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부여가는 탄천행 버스 시간표(07:40)

차가 막히지 않은 관계로 고속버스는 공주에 07시 25분에 도착한다.

서둘러 내려 탄천가는 버스표를 사러 갔지만 07시 20분 버스는 놓치고

07시 40분발 버스표를 사서 기다린다. 그 시간에 해후소도 갔다오고...

버스는 잠시후에 출발하는  일반버스인데 손님이라곤 나를 포함해서 달랑 2명뿐...

공산성을 바라보며 공주시내를 지나 23번 국도를 들락날락 하다가 이인면  면소재지를

거친 다음에 탄천면 차부에 25분만에 도착한다. 지난주에 이용했던 택시기사에게 콜한다.

공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탄천가는 버스표

탄천 버스 정류소(08:05)

택시기사는 정류소 바로 아래에 수퍼마켓을 겸하고 있다.

개인택시(충남 52바 1038)를 하시는 분인데 참으로 후덕하게

생기신 분인데 진고개에서 산꾼들이 만이 이용하는 모양이다.

산꾼들을 습성(?)을 잘 아시는 분 같다.(011-425-1321)

 

탄천면은 충청남도 공주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고도 100-200여m의 비교적 낮은 산지들이 국지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의 칠봉산(228m)이 대표적인 산지이다. 면의 동부와 남부에는 석성천이 흐르며, 동부에는 금강이 남북

방향으로 흐른다.

소하천으로 운곡천과 송학천 등이 있다. 현재 삼각리 · 광명리 · 장선리 · 안영리 등 17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진고개(81m:08:30)

택시 기사분은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건네준다. 지난주의 인연 때문인가?

별건 아니지만 고맙다. 이 분이 이곳 진고개에 이야기를 해 주신다.

 

흔히들 진고개란 지명은 비만오면 질척거렸다는 고개를 칭하는데 이곳도

예전엔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탄천에서 논산, 강경으로 이어지는 645지방도가 지나가는 이곳은 예전에는고개가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중요한 군사도로였고 6.25당시는 미군 장갑차들이 고개가 높아 몇대나 굴러 사고가 났던 곳이라고 한다.

산자락에서 바라본 진고개의 모습

혼자서 다니면 위험하니 조심하시라는 택시기사의 안부를 뒤로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조금 오르니 좌측엔 커다란 콘크리트 흄관 제조업체가 정맥길

능선을 절반쯤 짤라먹고 있고 우측에 밤나무밭을 만난다. 이곳이 사장골이다

오늘 구간은 가장 높은곳이 해발 262m밖에 안되는 그야말로

비산비야(非山非野)구간이다. 그러나 거리는 그리 녹록치는 않다.

고도편차는 거의 없다. 다행인것은 지나구간인 공주 계룡면과 이인면 구간과는

달리 이곳 탄천면 구간은 등로 정리를 깔끔하게 잘해놨고 꼬리표들이

쉴새없이 만나는 바람에 초반부터 편안한 산행을 시작한다.

알바주의 구간

밤나무밭을 10여분 지나다 보면 삼거리길이 나온다.

직진하는 길이 잘나있고 정맥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 정도

꺽어진다. 무심코 가면 직진을 해 알바를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우측에

 꼬리표가 많이 붙어있어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듯싶다.

공주시 탄천면 삼가리의 모습삼각리(三角里)는 국사봉(國師峰), 월봉(月峰) 및 매봉(梅峰)의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어서 삼각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깃대봉(161.4봉:08:50)

산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지명중에 하나인 깃대봉. 일제시대에 침략의 수탈로

삼기위에 측량하면서 깃대를 사용한 것이 지명이 된 경우가 가장 많은 곳이 깃대봉이다.

이곳은 지도상에는 161.4봉이지만 박 건석님이 깃대봉이란 코팅지를 붙혀놨다.

바로 앞에는 삼각점이 있고 편안한 임도길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161.4봉 삼각점

안경구덩이산(106m:08:50)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로서 동네 뒷산같은 느낌이다.

안경골은 금광이 많이 있어 안경을 쓰고 금을 발견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공주시 탄천면 삼각리의 모습

감나무골 고개(명덕재:153m:09:00)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와 삼각리를 잇는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가

나타나고 이 근처에 목장이 있는지 분뇨의 악취가 진동을 한다.

 망개나무(청미래)도 서서히 겨우살이 준비를 하고...

감토봉(262m:09:15)

탄천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능선으로 오늘 산행중 가장 최고의 봉우리로 별다른 표식도

없고 주위 전망도 전혀없다. 정상에는 관리가 안된 무더진 묘지의 봉분만 하나있고, 산꾼들이

지나간 흔적의 시그널만 잔뜩 붙어있다. 설치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는지 지도상에는 262봉이건만

최근엔 이름을 하나 부여 받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를 꺽어져 내리막을 향한다.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부여지역의 산그리메들

262봉을 내려오니 소나무가 무성한 호젓한 산책길 같은 길이 나타나고 바닥에는

깔비(소나무잎의 경상도식 표현)가 수북하다. 범여는 이 깔비에 관한 추억이 많다.

아버님 생각에... 산골에 살았던 이유로 아버님은 이 깔비를 지게에 지고 시골장에 팔아

자식들에 뭐하나라도 해주려고 애쓰셨던 분이셨는데... 그런 아버님이 요즘처럼

힘들때 왠지 그립기만 하다. 8남매를 키우시느라 무진 고생도 많이 하셨고...

 

일제시대에는 일본 오사카 철공소에 일하시면서 악착같이  벌어서 시골에 농토를

사셨던 분이시다. 그리고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홀로 쓸쓸히 여생을 보내셨던

아버님 당신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그리운 지... 오늘이 동짓달 초사흘이라 그런가?

내일은 시간을 내어 사찰에 모셔진 아버님의 위패라도 함 찾아뵈야겠다.

금남길에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가자티 고개 내려오는 길엔 철재 휀스에 대문이 달려있어

그 문을 열고 내려왔다고 했는데 오늘은 아예 그곳을 개방을 해놨다.

가자티 고개(123m:09:50)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고개로서 남산(南山) 아래에

있어 남산골이라고 부른다. 지방도 799번이 남.북으로 뻗어있어

남쪽으로는 부여군 조촌면에 북쪽으로는 덕지리로 연결되는 고개이다.

여기서부터 한동안 계속됐던 공주시와 이별을 하고 부여군으로 접어든다. 

 

가자티고개를 올라 진행하던 마루금은 공주시 탄천면에서
부여군 조촌면으로 왼쪽을 넘기고 공주의 탄천면 경계를 타던
마루금은 신앙고개를 조금 더 지나 187봉에 오르면 오른쪽을
부여읍에 넘기면서 종점 구드래나루까지는 부여군을 지난다.

 아직도 이 사바세계에 뭣이 그리도 미련이 남아있소?

됨봉(160m:10:10)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로  이 봉우리 아래에

있는 홍성골 마을이 뒤웅박(됨박)처럼 생겼다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됨봉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홀로가는 산꾼은 아무래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된다.

가자티 고개에서 부터 군 경계가 바뀌고 나니 이곳 부여군 조촌면 지역은

등로관리가 엉망이다. 가시나무를 비롯한 온갖 잡풀들이 태클을 건다.

조금 올라오니 잘 관리된 파평 윤씨 묘지 3기를 지나니 또 다른 파평 윤씨

묘지가 한 기가 나타나는데 이곳은 최근에 그랬는지 멧돼지 소행으로 보이는데

묘지를 아예 작살을 내놨다.  후손들이 성묘하러와서 봉분에 막걸리를 뿌렸나?

이곳에서 찹쌀모찌 하나와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10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옷이 땀으로 젖은 탓인지 꽤나 추운 느낌이다. 자켓으로 체온을 유지하면서...

신앙고개(130m:10:35)

부여군 초촌면 세탑리 신탑골과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 돌정이 마을을 넘나들 수 있는

 고개로 아직도 고개로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고개의 흔적이 뚜렸하다.

신앙고개를 지나니 낙엽이 많이 쌓였고 최근엔 산꾼들이 지나간 흔적들이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부드러운 능선의 오르내림을 시작하고 다시 오르니 수령이

꽤나 오래된 듯한 노거수 몇그루가 보인다. 홍성산꾼들의 이정표가 보이고...

다시 내리막을 내려오니 우측에는 산 하나를 다 갉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 진형행이다.

환경파괴가 심각하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은 언제까지 진행형인가?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산이 없어지는 채석장이 보이고...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난다.

평정말 감림길(11:25)

계속해서 벌목 현장의 경계 능선을 걷는다. 우측으론 신암리 가는 길이고

좌측 아래 마을은  송곡리 마을이다. 이곳 부여지방의 백제가 있었던 곳은

삼국(고구려,백제, 신라)중에서도 가장 불교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백제가 망하면서 백제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 불교는

백제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 10년전에 일본 교토에 갔을때

광륭사에 있는 일본국보 1호인 반가사유상이 백제의 목불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부여지방을 걷는 범여는 지금 사찰의 염불소리

보다는 이 아래 교회에서 들여오는 종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87번 송전탑(11:30)

평정말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오니 87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낙엽이 수북한 낣은 길이

편안하기만 하다. 조금 더 오르니 좌측 산 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하나 있고 그 아래

묘지들이 많이 조성된 걸로 보아서 아마도 기독교 공원묘지인듯 싶다.

능선을 올라 ‘ㄷ자 형태로 산을 빙 돌아서 다시 능선길을 90도 꺽어서 올라간다.

저 아래 신암리 마을회관에선 경로잔치를 하는지 김 영임의 창부타령이 흥을 돋운다.

무너진 산성

미끄러운 낙엽길을 걷다가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아마도

발굴작업을 하려는지 산 능선의 나무를 다 잘라 버렸고 산성터인듯 돌무더기가

가득하다. 이곳에서 조망은 좋으나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부여읍 송곡리의 모습

백제는 크게 3시기로 나뉜다. 첫째 B.C 18년에 한성(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건국하며 융성한 한성백제 시기-. 이 시기는 B.C 18년에서 서기 475년 문주왕까지

500여 년에 이른다. 문주왕은 즉위 첫 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긴다.

바로 이어 웅진백제시대가 열리며, 이 시기는 475년 문주왕에서 538년 성왕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성왕 16년(538)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는 사비백제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660년까지 이어진다.


 

실제로 백제가 500여 년간 한성에 수도를 두었건만 정작 사람들은 백제 하면 부여와

공주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마 오늘날 공주와 부여에 많은 백제 유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주에는 무령왕릉과 공산성으로 대표되는 유적과 유물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부여에는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오층석탑, 그리고 능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이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여주고 있다.

조석산(184.9m:11:45)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산으로서 이정표 하나만 달랑 있고 특별한 것은 없다.

이곳에서 우측 용정리 방향으로 편하게 그것도 아주 편하게 정맥길을 걸어간다.

184.9봉 삼각점

조석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184.9봉은 위에있고 삼각점은 20m 아래에 있다.

멧돼지의 똥

오늘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사람하나 구경하지 못했다.

금남정맥 마지막길을 완전히 통채로 빌린 느낌이다. 유일하게 만난거라곤

가자티 고개 근처에서 만난 노루 한마리 뿐이다. 그 넘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도망가버리니 인증을 할수도 없고...

희한한 이정표

이곳은 산에 있는 이정표에 L.P.G 충전소가 기준점이 된다.

그 충전소가 있는곳은 석목고개이거늘 석목고개라면 간단할 것인데

굳이 충전소를 기준점을 잡은 부여군청을 이해할 수가 없다.

산꾼들이 가스 충전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이곳에서 힘있는(?)

자의 소유인가? 아뭏든 이곳에서 가스 충전소 방향으로 간다.

청마산 갈림길(12:00)

청마산 갈림길에서 10분정도 오른니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의

무인 카메라가 홀로가는 산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이다.

이곳부터는 또다시 능선안부의 편안한 걸음이다. 좌측 아래에는

서서히 능산리 고분군으로 유명한 능산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4번 국도의

시원하게 달리는 차량과 부여터널도 안개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는 흐린 날씨가 햇빛이 나타나고 날씨는 조금씩 더워진다. 

4번 국도가 지나가는 부여터널의 모습

청마산성(靑馬山城:12:25)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때의 산성으로 사적 제34호이다.

 부여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5㎞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능산리와 용정리에

 걸쳐 있는 월명산(月明山)에 축조된 포곡형의 토석혼축산성으로 우리나라

고대 성곽중에 최대 규모이다.

 둘레는 6.5㎞에 달하고 있는데, 하나의 골짜기를 성 안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2개 구릉을 감싸듯이 축조되어 있다. 내부의 흙을 파서 축조했으므로 안쪽으로

 자연적인 호를 이루게 되었다. 북쪽 성벽에는 석축상태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나머지 대부분의 구간은 거의 무너진 상태이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현재 서쪽 부분에서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4~5m, 너비는 3~4m에 이른다. 성 안에는 망대·우물터·건물터를

비롯해 경용사지(驚龍寺址)·의열사지(義烈寺址) 등의 절터도 있다.

 서쪽에는 수구(水口)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성벽이 무너져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산성의 기능은 수도인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남쪽에는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청마산성 위에는 영일 정씨의 묘지도 하나있고...

이곳부터 청마고개까지는 소나무 향기 가득한 내리막이다.

오늘 산행은 너무 편하여 마치 양넘 지갑줏은 느낌으로 공짜로 간다.

오산고개(12:33)

충남 부여읍 용정리와 능산리를 넘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청마고개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채마소 고개로 더 알려져 있다.

고개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백제의 왕과 왕족들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백제 왕릉원이라고도 부르는데 발굴 당시에는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곳 능산리는 무덤사이의 사지(寺地)에서 발견

되었다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유명하다. 맨 꼭대기는 봉황 한마리가

꽁지를 들어 올리고 앉아있고 타오르는 불꽃 하나하나마다 악기를

든 신이나 코끼리를 탄 사람, 말을 탄 사람, 새, 학, 원숭이 등을 조각하고

향로의 바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용 모양이라는 높이 64cm, 무게 11.8kg

백제금동대향로는 불을 담는 그릇이다.

백제금동대향로 받침, 용이 꿈틀거리며 향로를 받치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본체를 두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 

1993년 12월 23일 부여군 능산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국보 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잇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뉘,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가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각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능산리의 모습

이곳은 평소에 사람들이 많이 다닌 산책로 처럼 넓은 길이건만 사람은

구경도 할 수가 없다. 홀로 느긋하게 산보하는 기분으로 길을 걷는다.

잠시후에 남양 홍씨 묘지를 지나니 장대지가 나타난다.

부여사비나성 장대지(12:50)

나성(羅城)이란 2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왕궁을 둘러싼 성곽을 왕성 또는

내성으로 부르는데 대하여 바깥으로 둘러싼 성곽을 말한다.

또한 장수가 지휘하던 장소를 장대(將臺)라고 하는 백제의 사비성에는

나성이 존재하였다는 뜻이고  그 흔적이 지금 이곳이다.

장대지에는 안내판과 함께 대리석으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구경을 한다. 이곳에는 쉼터같은 곳에 나무 십자가를

세워놓았다. 대중들이 다니는 곳에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세워놓다니...

거기다가 60은 넘은듯한 사람하나가 저렇게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 인구의 15%도 안되는 기독교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고 남의 종교를 무시하는 오만 방자한

짓거리들은 그만 했으면 한다. 대통령, 국무총리, 야당대표 여당원내대표

등등 다 장로이고 집사이라 그런가.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알건 85%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기독교 신자중에도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모든 물을 흐리지 말았으면 한다.

 

얼마전에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여의도 모교회의 趙某 목사의 처남이라는

자가 목사로 있는 강남순복음교회 목사라는 자가 불교는 전부 미신이며

우상숭배를 하는 정신나간 자들이라 폄하하면서 절에 성경책을 보내고

스님목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신도들을 현혹하는 일이 있었다.

참으로 가소롭다. 어찌 그런자들이 목사가 됐을까. 지도자면 지도자답게

행동하시길...불자가 부처에게 예배,공경하는게 우상숭배라면 당신네들이

십자가에게 예배드리는 건 우상숭배가 아니란 말인가?

제발 남을 좀 배려하면서 삽시다

단촐한 밥상(13:10)

가재티 고개 지나서 간식을 먹은탓에 길이 걷기 편하고 여유로워 이제사

밥상을 펼친다. 당일 산행에 키포인트를 베낭무게를 줄이는 방법이 필수라...

아침을 매식을 하고 오면 많이 줄일 수 있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에 반찬은

매추리알과 내가 농사지은 배추속 마눌이 오늘 김장하려고 해논것을

몇잎 가져왔다. 거기다가 맥주 한켠과 커피 한잔 얼마나 여유로운가.

남은 간식이 아직도 건빵 한봉지가 있으니 말이다.

 

십자가 아래에 내려오니 호화로운 묘지가 여러기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상석이 놓인 함양 박씨의 상석이 제일 멋있다.

상석에다 밥상을 펼친다. 산 자나 죽은 자나 밥상은 매한가지인데 멀...

박씨 할아버지가 이해 하시겠지 ㅋㅋㅋ

15분간의 느긋한 만찬을 즐기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내리막길의 아주 편안함으로... 조금 내려오니 진주 강씨의

호화 가족묘지가 나타나고 조금 더 내려오니 표고버섯 재배단지

하우스가 여러동이 나타난다. 거기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도로로

내려서니 충전소가 있는 석목고개가 나타난다.

석목고개(13:20)

석목고개는 부여읍 석목리와 능산리를 잇는 4번 국도가 금남정맥의

주 능선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도로는 왕복4차선 아스팔트포장도로이고

가나다 SK가스충전소와 버스정류장이 있다. 차량이 꽤나 다니는 도로를

용감하게 무단으로 횡단하여 편안한 산책길로 금성산을 향한다.

신호등이 고장났는지 차량이 꽤나 많이 다니건만 점멸등 형태이다.

재빨리 좌우를 살핀 다음에 쨉싸게 도로를 건너서 금성산쪽으로 향한다.

500m정도를 가니 조그만 고개가 하나 나오고 이곳에서 오늘 두번째 사람을

만난다. 반가운 맘으로 인사를 건낸다. 다시 나무계단을 올라 금성산으로 향한다.

금성산(錦城山, 121.2m:13:45)

해발 121.2m밖에 안 되지만 백제의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다.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중에는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다.

백제국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 위에 신선이 살며 서로 날아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이 없었다.

삼산 중에 일산은 부여 시가지의 동편에 있으며, 지금의 금성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산은 현재의 오석산, 부산은 백강 마을 뒷산을 말한다. 이들 삼산은 금성산을 중앙에

놓고 서쪽에 부산과 동쪽에 오산이 3㎞씩의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삼산의 중앙 금성산은 백제 전역의 각 산성에 송수신을 담당하는 통수대(統帥臺)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 행동의 지시와 통제 및 총괄적

연락의 시작점이 되거나 종착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 통수대가 눈앞에 있다.

통수대는 말 그대로 장군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계백공원과 조왕사

통수대에서 좌측 길을 따라서 조금 내려오니 계백공원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는 조왕사라는 절이 있다. 이곳부터는 산책나온 사람들이

꽤나 많이 만난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번잡하지는 않다.

무로정(13:50)

계백공원에서 무로정으로 올라가니 정자가 멋지게 자리잡고 있고

도로 우측으로 꼬리표들이 잔뜩 달려있다. 그런데 이곳에 택시 한대가

있는데 택시기사가 아는 척을 한다. 혹시 아침에 진고개까지 가신

분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침에 나를 태워주신 분이다.

부인과 함께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고 부여구경을 하고 가는 길이란다.

참으로 반갑기만 하다. 그러면서 조심해서 다녀가시라고 한다.

 

야산 이달선생 강역사적비 (계백문 위:13:53)

이달 선생(1889~1958)은 전설적인 기인으로 독창적인 주역을 해석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유명한 일화는?

 

일제 강점기 말엽에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에 대규모의 신궁(神宮)을 건립하려고

하였는데 한군데는 서울 남산이었고 또 한군데는 부여 부소산이었다.

남산은 조선의 한양이었으니까 세우려 했던 것이고 부여의 부소산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에 세우려 했던 것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아니고

하필이면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고 했던것은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제는1944년 무렵 부소산의 삼충사터에 신궁을 짓기

위한 기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본신을 조선땅에 안치시키므로써 영적인

영적인 차원에서마져 조선을 병합하고 말겠다는 의도가 담긴 공사였다.

조선 주역의 대가이자 조선의 호국신을 신봉하였던 야산 이달선생은

공사현장을 지켜보다 미친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네 놈들이 상랑식도 하기전에 망할것이다.” 일본 경찰은 현장에서 잡아다가

취조를 하였지만 광인(狂人)으로 취급되어 풀려놨다. 그리고 해방 4,5개월

전부터 조선의 독립을 예감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다고 한다.

이곳에 이달 선생의 사적비가 세워진 것은 부여와의 인연 때문인 것 같다.

1889년 경북 금릉군 구성면에서 태어난 이달선생은 1951년 부여 은산으로

이사를 했고 65세에 다시 부여읍 구교리로 이사를 하여 부여와 인연을

맺고 살았다고 한다.

계백문(13:55)

계백문 위의 산책로

지도상에는 동물이동통로라고 해놨지만 산책로라고 봐야 맞을것 같다.

이곳에서 택시위로 올라가는 좌측으로가면  우측에는 조선시대 문인이신

석벽 홍춘경님이 쓰신 낙화암이라는 漢詩비가 있고 좌측에는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 추모비가 있다. 저 아래 부여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석벽 홍춘경 시비

 

낙화암 / 홍춘경

 

나라는 깨어지고 산하도 옛날과 다르니,

홀로 강에 머문 달은 그 몇번을 차고 이지러졌음이오.

낙화암 언덕에 꽃은 아직 피었으니,

비바람 치던 당년에 모두 날리지는 않았음이라.

독립운동애국지사 추모비

이곳에서 길 찿기가 애매하다. 콘크리트 도로를 S자 형태로 내려가면

부여읍 국궁장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반사경을 끼고 우측의 밭으로

들어서면 궁도장 사대뒤의 나무숲으로 가는데 길의 거의보이질 않는다.

이곳에서 겨우 길을 찾아 들어가 보면 겨우 희미하게 보이나 찾기가싶지는 않다.

바로 언덕에 새로남 교회 담장을 끼고 돌아 연립주택 앞으로 나간다.

부여읍 국궁장의 모습

부여 새로남 교회를 끼고 내려가면 가끔 꼬리표가 보이며

이곳이 금남정맥길임을 알려준다.

교회의 옆길을 껴우 빠져 나온다.

교회에서 골목길을 내려오면 회림참치집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2차선 도로가 나오고 거기를 건넌다.

부여 도서관이 나오면 우측으로 100m 정도만 가면 부여여고 정문이 나타난다.

부여여고 정문에 들어서 운동장을 지나고...

운동장을 지나서 계단으로 올라가 교시옆으로 가면 팔각정터가 있고

다시 뒤로 돌아가면 개구멍(?)으로 나간다.

부여여고를 빠져나가는 개구멍(?)

부여여고를 빠져나와 부소산으로 접어드니 이곳은 아직까지 단풍이

빨갛게 물이 들어있고 참으로 곱기만 하다. 도로에 올라서니 사람들이

꽤나 많고 좌측에 120m 정도 정맥길에서 비켜나 있는 삼충사를 찾는다.

삼충사(三忠祠:14:30)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백제말기 의자왕 때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57년 <삼충사 봉건기 총회>라는 모임에서 처음 지었으며 국가 성역화 사업으로 1981년 11월에 다시 지었다.

삼충사는 외삼문(밖에 있는 삼문), 내삼문(안에 있는 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년 10월 백제 문화제행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충(成忠?-656)은 백제 의자왕 때 백제 최고의 관직인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興首?-?)도 좌평으로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무너져 가는 백제를 구하려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과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계백(階伯 ?-660)장군은 2등관직인 달솔에

 이르러렀으며, 성충, 흥수, 계백은 이름이고, 성은 전해오지 않고 있다.

 

삼충사 사당 건물의 용마루 양끝에는 치미(망새)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치미는 부소산 절터(서복사지)에서 출토된 것을 복제하여 장식하였는데

진품은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치미는 주로 사찰이나 궁궐 건물에 사용되었으며 길상(吉祥)과 벽사를 상징한 것으로

상상의 새인 봉황을 형상화하여 만들었다.

삼충사 경내에 모셔진 세분의 충신

죄측이 성충, 중앙이 흥수, 우측이 계백장군이다.

아늑한 길은 1,500여 년을 거슬러 이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서 패자인 이들이 어떻게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만은 아니기 때문에? 아니면 이들이 패자지만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충신이기 때문에? 하여튼 역사는 많은 화두를 던진다.

그 화두를 던지는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삼충사를 참배하고 다시 왔던길을 되돌아서 영일루로 향한다.

이곳의 느낌은 범여의 집이 가까운 마치 남한산성을 걷는 느낌이다.

영일루(迎日樓:14:40)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영일루의 편액

현재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관아의 문루를 옮긴 것으로

기단은 정갈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1단으로 쌓고 주춧돌은 키가 큰 8각 장초석을 썼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하고, 기둥위의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으로 짜 올렸다.

영일루의 현판 글씨는 부여출신 서예가 원곡 김기승선생의 글씨로

영迎과 루樓자는 크게 하고 일日는 작게 썼는데,

이것은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누각안의 [寅賓出日인빈출일]은 정향 조병호선생의 작품으로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말이다. 

 옛 군창지(14:42)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동 서 남 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부소산성( 扶蘇山城) 국가사적 제5호로 백제의 26대 성왕(聖王) 16년(538) 공주公州에서

이곳으로 옮겨 부소산에 쌓아 123년간 사용한 사비도성(泗沘都城)의 중심 산성으로

이중의 성벽(城壁)을 두른 백제식 산성이다.

 

테뫼식(머리띠를 두르듯 산봉우리를 중신으로 쌓은 모습)과

포곡식(산능선과 골짜기의 자연지형을 따라 쌓은 모습)이 혼합된 백제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이다.

부소산성은 성둘레 2,495m와 면적 746,198평방m 의 규모로

군창지와 영일루를 중심으로 쌓은 길이 840m 정도의 테뫼식 산성과

군창지 동쪽에서 반월루를 거쳐 사자루를 향해 골짜기를 감싸며 부소산을 크게 둘러싼

 길이 1,655m2의 포곡식 산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 다져 쌓은 토석 혼축의 토성이다.

반월루 (半月樓 :14:50)

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등성이에 1972년 지은 2층 누각으로 

현재 부여의 시가지와 부여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부산의 대제각, 규암진

수북정이 아련하게 들어와 부여가 반월성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곳이다 

반월루 누각에서 바라본 부여(扶餘)

부여는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이 부여현에 합쳐져

이루어진 곳으로 백제시대에는 소부리 또는 사비로 불렸다.

사비는 원래 새벽이라는 이 지역 토속 사투리였다고 하며  지금의 이름인

부여도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나온 토박이 말로서 나중에

한문으로 표시하다보니 扶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부여라는 뜻은 이 땅이 새벽의 땅이며 아침의 땅이라는 뜻이다.

백제는 성왕(26대)때인 538년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이곳 부여로

수도를 옮겨 122년동안 나라를 지켰는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망한때는 의자왕(31대)때인 660년 7월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망하기 직전에 나라안 곳곳에서 기이한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고 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위에 올라 앉았고 귀신이 대궐에 들어가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는

땅속에 들어가므로 그 땅을 파보니 거북이 한마리가 있고 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 같다”는 글귀가 씌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옳은 충고를 하는 충신들을 가두고  사비강가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호젓한 태자골 숲길

이 숲은 [산림청.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유한킴벌리]에서 주관하는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어 우수상을 수상한 숲이다.

 

특히 태자(太子)골 숲길이라 하여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 가볍게 편안한 맘으로 걷는 것 만으로도 족한 곳이다.

고목이 된 참나무와 부소산의 소나무향, 봄이면 새순의 싱그러움,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과 백마강 바람을 끌어앉고,

가을이면 오색 낙엽을, 겨울이면 나뭇가지에 핀 눈꽃이 아름답다.

낙화암의 시비

사자루((泗沘樓: 15:10)

정맥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아래에 백마강이 한눈에 보인다.

부소산 정상에 있는 누각으로서 편액의 글씨는 조선 고종황제의

다섯째 왕자인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라고 한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사자루에서 바라본 백마강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라는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의 금강을 일컫는데 백제 사람들은 이 강을 사비강, 백강이라고 불렀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내산 뜬봉샘에서 시작하여 장항, 군산앞 서해바다까지

401km를 흐르는 큰 강으로 금강을 지역에 따라 고유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금산군 제원부근에서는 광석강(廣石江) 대전시 회덕에서는 부강芙江 또는 절강, 공주에서는 곰강 또는 금강(錦

江) 금강천이 합류되는 천정대 부근에서는 창강(蒼江)으로 불리며, 백마강 이하 서해바다까지는 진포鎭浦라고 부른다.

원래 금강은 곰강(웅진熊津)의 음역이므로 공주부근에서는 한정하여 불렀으나 점점 확대되어 지금의 금강

전체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고란사(皐蘭寺 :15:20)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본사인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백제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 왔다.

법당 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 기중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사 삼성각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약수의 전설

아득한 옛날 소부리(옛 부여지명)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금실이 참 좋았으나 늦도록 자식이 없어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고 있던 중 어느날 할머니의 꿈속에 일산(日山)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에 있는 지금의 고란사 바위에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물, 곧 유강(柔剛)이 합한

음양(陰陽)약수가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날밤 남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걱정에 찬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약수터로 가봤더니 왠 간난아기가 남편의 옷속에 누워 울고 있었다.

도사가 얏 한잔 마실때 마다 3년이 젊어진다고 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그 아이가 자라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에

최고 큰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란초의 발견

옛날 원효대사가 사자강[錦江] 하류에서 강물을 마시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皐蘭)이 있음을 알고

물맛을 따라 올라 이곳 부소산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은 진란은 없어지고 고란만 남아 있으나

고란마저 아깝게도 멸종의 위기에 있다.

고란사 마당에서의 범여

낙화암의 나루터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군의 쌍북리(雙北里) 고란사(皐蘭寺) 북동쪽으로 백마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이다.

조룡대(釣龍臺), 용바위, 용암이라고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호암(虎岩)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조룡대는 관아의 북쪽,

강 가운데에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비바람이 크게 몰아쳐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소정방이 바위 위에 서서 흰 말을 미끼삼아 용을 낚았다. 잠깐 사이에

비가 멎고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들이 강을 건너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런 까닭에 강의

이름을 흰 말의 강이라는 뜻으로 '백마강'이라 부르고, 바위는 용을 낚았다는 뜻에서

'조룡대'라고 불렀다. 바위 위에는 아직도 신발자국이 남아 있다."라고 적혀 있다.

고란사 가는 길

백화정(百花亭:15:30)

낙화암의 바위위에 있는 정자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 적국의 병사들에게

유린을 당하느니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한 3천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서 매년 10월 백제 문화제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의자왕은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백제의 오랜 전통에는 다른 나라의 혈통을 받은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금기시 되어있었다 한다.

그러나 의자왕이 왕자시절에는 신라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극복하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포섭하기에 힘쓰는 한편, 부왕인 무왕과 모후인 선화공주에게 극진히

효도를 다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결국 나이가 40이 되어서

 태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자 반대세력을 거세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고,

 신라를 침공하여 100여성을 함락시켜 국토를 확장하는 등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재위 20년 중 초기에 이룩한 업적과는 달리 신라의 적의를 크게 자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득세한 왕으로서의 오만이 생겼는지 국정을 소홀히 하고 충신의 충간을 물리치며

 주지육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이라도

 했어야 할 터인데, 살아서 당나라에 끌려가는 그 처량한 모습에 백성들은 얼마나 원망하였으리.

낙화암(落花巖) 아래에서

꽃들이 떨어진 바위라... 백제가 멸망하던 날(660년 7월) 백제의 여인들이

굳은 절개와 충절을 지키기 위해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을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교훈적인 문화적 유산으로 패자(敗者)의 역사로 대표된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 색인데 당시 백제의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였기 때문이라는 전설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고적조에 ‘(낙화암은) 부여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불렀다 한다’고 적혀 있다.

 낙화암은 부소산 서북쪽 강변의 단애로 백제의 700년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의 3,000 궁녀와 함께 최후를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으나, 이는 철저하게 백제를
무너뜨린 당사자인 신라가 문화대국 백제왕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3,000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들이라
한다. 3,000 궁녀는 패배한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을 강조하려는
교묘한 각색이라는 주장으로 본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 옆 절벽에 송시열이 쓴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낙화암 위에서는 볼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만 1,500여 년 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부소산(扶蘇山)

해발 106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동쪽과 북쪽으로 두 봉우리로 나누어진

 부여의 진산이다. 그 산의 정상과 능선을 흙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 부소산성으로

사적 제5호로 지정돼 있다. 백제 도성으로 추정되는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쟁 시에는 최후 방어성으로 이용했던 사비백제시대의 대표적 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식량을 저장하던 군창지(軍倉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고란사와

 고란초, 해맞이 명소 영일루(迎日樓), 사자루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부소산이라는 산 이름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보이며 그 이전에는 무어라 불렸는지

(삼국사기)등의 역사책에도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보는 학설이 유리하다 .

느긋한 마음으로 삼충사,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고란사, 낙화암, 백화정을

두루두루 감상을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졸업식을 위해 구드래 나루로 향한다.

부소산의 장송들이 축하라도 해주는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마음마져 상쾌하다. 어느 누가 축하해주지 않아도 기분은 너무나 좋기만 하다.

낙화암에서 올라와 우측으로 내려오니 구드래 나루가 보인다.

금남정맥의 종착지 구드래 나루(15:50)'구드래'는 부소산(扶蘇山) 서쪽 기슭의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泗沘水)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 나루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말없는 백마강

금남의 산줄기, 청색이 산경표 금남정맥, 주황색이 대동여지도 금남정맥)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태백산
덕유산으로 줄기차게 내려오다 전북 장수군 백운산 가기전 영취산에서 갈래를
쳐 금남호남정맥을 이루어가다 전주 진안간 국도 모래재 위에 있는 조약봉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나뉜 후 운장산-대둔산-계룡산-금성산-부소산으로
이어가다 부여 구드래 나루에서 금강으로 스며드는 도상거리 130여 km의
비교적 짧지만 명산들을 꿰차고 있어서 정맥의 꽃이라 불리는 금남정맥.

이번에 지나온 금남정맥은 금강하구가 아닌 이곳 부여 구드래나루에서
맥을 다하다 보니 완전한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는 장군봉 지나 작은싸리재 직전에 만나는 (진안군
주천면과 완주군 동상면, 운주면 삼면봉인) 750봉에서 서쪽 왕사봉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름없는 야산을 꿰차며 논산천의 물길까지 모아 명실공히
금강의 아래쪽 울타리가 되어 금강하구인 군산의 장계산에서 바다로
스며드는 산줄기이다 보니 정맥의 이름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에 따라 이 산줄기를 '금강정맥',
'실질적 금남정맥' 등으로, 금남정맥을 '금강기맥'으로 새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하지만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은 그대로 두고 금강하구로
향하는 산줄기를 '대동(여지도) 금남정맥'으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공감님 글 참조)

부여 시외버스 터미널(16:20)

구드래 나루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버스 시간표를 보니 걸어가도 될듯

싶어서 나루터에서 부여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걸어서 온다

택시로 계산하면 기본요금 코스밖에 안되기에 산길도 걷는데 도로야

식은 죽먹기지 20여분만에 터미널로 와 서울가는 표를 예매하고 나니

30분정도 시간이 난다. 사우나에 가기는 시간이 짧고하여 터미널 뒤에

허름한 순대국집에 가서 순대국 한그릇에 소주 한병을 시키고 화장실가서

간단하게 씻는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니 훨씬 개운한 느낌이다.

그리고는 순대국에다 소주 한병 마시고나서 서울가는 버스에서 잠에 떨어진다.

순대국에다 소주 한병 정말 맛있게 먹었다.

오늘 산행구간의 G.P.S 기록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