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청당
대전 대덕구 중리동은 대대로 은진 송씨(恩津 宋氏)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옛날에는 이 마을을 윗중리, 백달촌 또는 하송촌이라 불렀는데 마을 동쪽은 상송촌으로 동춘당과 고택이 있다.
은진 송씨들이 이곳에 모여 살게 된 것은 고려 때부터인데 입향조(入鄕祖)는 송명의지만 그의 손자로 쌍청당(雙淸堂)을
지은 쌍청당 송유(宋愉·1389∼1446)에 의해 가문이 번성해서 은진 송씨들은 송유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계족산 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면서 쇠스랑처럼 몇 개의 자락이 ‘물(勿)’자 꼴로 뻗어 북에서부터 읍내동,
송촌동, 가양동이 勿자의 한 계곡씩 차지하고 있다. 쌍청당은 송유가 낙향해서 1432년에 안채에서 조금 떨어져 지은 별당이다.
꽤 오래된 집인 만큼 나중에 지어질 이 동네 집들의 전형이 된다. 집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지만
이 동네에서는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이 집은 민가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단청이 되어 있다. 당시 단청 원료는 중국에서 수입해 썼으므로 대단히 비쌌다.
이러한 사치를 보다 못한 세종은 1429년 민가에 단청하는 것을 금했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가 아니라서
이 법이 실제로 시행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동춘당은 그 와중에 옛 방식으로 단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은 그 후 1937년까지 7차례를 중수하면서 계속 이 단청을 유지해 왔다. 1563년 중수기에 “가정 계해년에
내가(송남수·송유의 5대손) 또 옛 제도에 따라 지붕을 얹고, 기둥과 주춧돌을 각각 그 자리에 놓고 화채(단청)를 더하였다”고
적었고, 1616년 정유재란이 끝난 후에는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다시 세웠다.
이미 그 시대에 단청은 국법에도 어긋나고,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규범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춘당은 여러 번의 보수와 개축을 하면서도 계속 단청을 입고 있는데, 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은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라 할 수 있다는 공자의 예를 따른 것이다.
청빈함이 사대부의 자존심으로 여겨지던 조선시대에 단청을 유지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딴은, 그 불편을 다른 가문에 과시의 수단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송준길 송시열로 완성되는
조선 후기 기호예학의 단서를 이 집에서 보는 것 같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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