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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팔공기맥(終)

팔공기맥 - 제4구간 갑령재에서 한티재까지

by 범여(梵如) 2012. 7. 9.

산행일자 : 2012. 07.08(무박산행)

산행날씨 :흐린날씨, 짙은 안개에 높은습도, 오후에 맑음 

 참석인원 : 백두사랑 산악회 25명과 함께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2km /  G.P.S 23,2 km / 12시간 50분 소요
 산행코스 : 갑령재-오림터널-임도-298.8봉-사기정 고개-성황당-388.2봉-300봉

                   자주고개-505봉-시루봉-군부대 우회길-헬기장-1213봉

                   시루바위-군사도로-비로봉-마애여래좌상-오도재-1054봉-마당재

                   파계봉-파계재-834봉-805봉-748봉-한티재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신령면/ 군위군 부계면, 산성면 / 칠곡군 동명면 / 대구시 동구

 

토요일은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다는 24절기 중 열 한번째에 해당하는 小暑이다.

금요일(6일)에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로 인하여 초여름에 극심했던 가뭄은

단박에 해소한 느낌이다. 토요일 아침 창밖을 바라보니 정말 화창한 날씨다.

오늘 저녁에 팔공기맥의 주봉인 팔공산 구간을 가는데 괜히 가슴이 설렌다.

일요일 아침(8일)까지 이 상태로 유지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지난해 9월 동화사에서 수계법회에 참석했다가 팔공산을 올라가 멋진

조망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에... 지난달 셋째주에 고향에서 열린

불알친구들과의 모임 때문에 기맥구간을 빠진 바람에 한달만에 동료산꾼들을 만난다.

 

 

요즘 유럽발 경제위기로 인하여 내가하는 인테리어업에는 매출저하로

인하여 상당히 고민이 많다. 30년간을 해 온 이 직업을 접자니 갈곳이 없고

계속하자니 재미도 없고 의욕도 없어지고... 내 사무실에 내 매장에

임대료 나가지 않으니까... 버티고 있긴하지만 언제까지 해야할 지...

그나마 다행인게 아들, 딸 두놈 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자기

밥벌이하니까... 내야 이제 내 용돈 벌어쓴다는 기분으로 맘 편히 살란다.

 

 

그래도 토요일 저녁마다 베낭메고 산에 갈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가.

본격적으로 산에 미친지가 벌써 3년 6개월이 지나버렸다. 이젠 한번정도 빠지면

우울증 비슷한게 오는데, 아마 이것도 집착이겠지?

3년 반동안 산길만 거의 5,000km를 걸었으니... 약간 맛이간 정도가 아닌지?

오늘은 동료산꾼 젠틀맨이 늘 자랑하는 인천 소성막걸리 맛보러 양재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의 구글어스

토요일 밤 10시 40분경에 양재역에서 산악회 버스에 오른다.

오늘부터 28인승 리무진 버스로 산행을 하는데 마치 비행기 이코노석에서

퍼스트 클래스석으로 격상된 느낌이다.  편안하고 너무나 좋은데 오늘도 산행대장은

산악회 운영에 대한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빨리 불을끄고 잠을 자게 해주면 좋은련만

계속해서 산악회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천안을 다 와서야 불을 끄는데 이젠

뒷좌석에 앉은 동료산꾼들이 소등을 한 다음에도 계속 소근대는 통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러면서 천안삼거리 휴게소에 차를 세운다.

 

성격이 못된탓에 잠을 잘 시간을 놓쳐버리면 잠을 못자는 성격이라...

20분의 휴식끝에 차를 출발하여 겨우 잠이든다. 그러다가 차가 흔들리는 통에 잠을 깬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구미I.C를 빠져나와 구미시내를 가로질러(02시 20분) 

다시 중앙고속도로 가산I.C와 나란히 달리는 5번국도를 타고 군위쪽으로 달린다.

이곳은 경북지역에서도 오지로 통하는 곳이라 그런지 꼬불꼬불한 2차선 길을 덩치큰

리무진 버스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03시 05분에 들머리인 갑령재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꽤나 쌀쌀한 날씨에 주위에 축산농가가 있는지 축산 분뇨냄새가 코를 찌른다.

장비 점검을 한 다음에 03시 30분에 어둠을 헤치고 산행을 시작한다

갑령재(甲嶺:288m:03:30)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수리와 영천시 신령면 화남리의 경계인 화서교차로가 있는 곳이다.

28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는 “甲嶺”으로 표기된 곳이다.

팔공기맥의 준령을 횡단하는 고개로 6.25때에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한 곳이다.

이 고개 아래에는 갑현(甲峴)이라는 마을과 갑현제(甲峴堤)라는 못이 있는데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못하고 아쉬움 속에 산행을 시작한다. 

성덕대학 간판이 있는 뒷쪽의 등로로 올라선다. 초반부터 잡목들이 태클을 건다.

오림터널(03:35)

이 등로 아래로는 경주에서 서울 청량리로 이어지는 중앙선 철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 시간에 열차가 지나가는지 주위가 온통 기차소리에 새벽의 정적이 깨진다.

오림터널 능선위에서 등로는 급격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을 내려간다.

다른 기맥, 지맥길에 비해서 비교적 등로는 뚜렸한 느낌이고 시그널이 많아

길을 잃어릴 염려는 안해도 되는 곳이다.

 

조금을 더 진행을 하니 좌측 어느 사찰에서 새벽예불을 시작했는지

목탁소리와 함께 낭랑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원차종성 변법게(願此鐘聲遍法界)

철위유암실개명(鐵圍幽暗悉皆明)

삼도이고파도산(三途離苦破刀山)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

.........    .......   .....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 (지옥을 파하는 진언)
나모 아타 시지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아자나 바바시 지리지리 훔

 

문뜩 새벽예불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게으른 중생이 새벽예불에 언제 동참했는지 기억도 안나니...

목탁소리 나는 쪽을 향해서 저두 삼배의 예를 올리고

앞선 동료산꾼 헤드렌턴 불빛을 따라 서둘러 길을 떠난다.

298.8봉과 삼각점(04:00)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새벽부터 빠르게 치고 나가는 선두그룹들과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앞에선 동료 산꾼의 헤드랜턴 불빛만 쫓아서 부지런히 걷는다.

봉우리조차 느끼지 못하는 곳에 대산꾼 준.희님의 ‘298.8m’라는 아크릴 표식판과

4등 삼각점(△군위 468)만 어둠속에 봉우리를 꿋꿋히 지키고 있다. 싸한 날씨에 아마도

이곳 경북지방은 토요일에도 비가 왔는지 땅이 많이 젖은탓에 상당히 미끄럽다.

 

사기정 고개(04:20

경북 영천시 신령면 부산리 능선에 있는 고개로 919번 904번 지방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이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사기정이라 하여

사기정 고개라고 한다. 어둠속에 아무것도 확인을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사기정 고개를 지나서 성황당 고개 넘기 직전에 후미그룹이 너무 쳐지는 바람에

어둠속에 10분정도의 단체 휴식을 취하는데 마치 그 모습이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빨치산의 모습처럼 보인다...하긴 내 친구놈이 나한테 인민무력부 공작안내조라고

놀리면서 산에 완전히 맛이 간 넘으로 취급하는데 이 모습을 보니 이해가 가는것 같다. ㅋㅋㅋ

하긴 오늘 걷는 이 능선이 1950년 8월에 풍전등화같은 이 나라를 구한 피비린내가

피비린내가 진동한 그곳이 아니련가? 그 당시 전 국토가  다 빼앗기고 대구, 부산만 남은 그 시기에...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아마 지도상에 대한민국은 사라졌겠지.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주위에는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건만

짙은 안개로 인해서 팔공산의 멋진 전망을 기대했는데 실망감이 앞선다.

그래도 상큼한 공기에 바람은 불지않지만 그래도 꽤나 선선하여 걸을만 하다.

388.2봉(05:20)

휴식을 취한후에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면서 우측으로 꺽어지다

다시 좌측으로 간다. 성황당 안부를 지나는 이곳부터는 갑령재에서 헤어진 영천 시계(市界)를

다시 만난다. 우측은 군위군 고로면에서 산성면으로 面界가 바톤 터치를 하였다.

다시 좌측으로 등로를 돌아서니 차량소리가 들린다. 자주고개가 가까워 진 모양이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삼각점이 있다고 나오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확인할 길이 없다.

다시 좌측으로 등로를 돌아서니 차량소리가 들린다. 자주고개가 가까워 진 모양이다.

항일운동가 용연 김치량과 만은 김흔의 충절비

등로에서 자주고개로 내려서기 전에 항일운동가 용연 김치량과

만은 김흔의 충절비가 산꾼을 반긴다.

자주고개로 내려서기 전에 좌측에 보이는 영천시 신령면 치산리의 모습

자주고개(230m:05:40)

경북 군위군 산성면 삼산리와  영천시 신령면 치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 지역 사람들은 자주고개라고 부르지 않고 잦이고개라고 부른다.

신령면에서 28번 국도와 갈라져 군위로 가는 2차선 919번 아스팔트 길로서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지나는 차량은 거의없고 가끔씩 1톤 트럭만 오간다.

이제부터 팔공산 구간을 접어들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물 한모금을 마신 다음에 좌측의 등로로 접어든다.

초입에 잡풀이 가득하여 잔뜩 긴장을 하였는데 조금 올라서니 등로는 뚜렸하고

임도같은 길이 나타나기 시작을 한다.  고도표를 보면 이 고개가 해발이 250m이고

팔공산 정상이 약 1,200인데 도대체 얼마나 치고 올라가야 하는지... 잔뜩 긴장을 하는데

나중은 모르지만 처음에는 등로는 뚜렸하고 완만하게 고도를 높이니 긴장이 풀린다.

언 놈이 나쁜짓을...

뚜렸한 등로인 임도 따라 올라가니 언 넘의 새끼가 몰래 샌드위치 판넬에

붙어있는 스티로폼 폐기물을 몰래 버려놓았다. 이 신성한 팔공산 자락에...

이노무 쉬끼 너 잡히기만 해봐라.

몇기의 묘지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혀간다.

후손들이 전혀 돌보지 않은듯한 묵묘도 지나고...

산꾼들의 키보다도 더 큰 잡풀을 헤치며 팔공산을 향해 걸어간다.

갑자기 밭을 묵힌듯한 넓은곳에  산꾼들이 산딸기를 따먹느라 정신이 없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랴... 범여도 적극 동참한다.

울님의 입술만큼이나 상큼한 산딸기

서서히 팔공산 자락이 보이기 시작을 한다.

예전에 밭인듯한 이곳에 완전히 억새와 개망초가 점령하였다.

묵밭을 지나서 좌측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올라서니 모과나무

단지가 나타나는데 관리가 안 된 탓인지 나무가 병이 많이들었다.

다시 고도를 높혀간다... 서서히

참깨밭의 밭능선을 따라서 진행을 한다.

신령면 치산리 마을로 연결되는 콘크리트 농로를 지나 본격적인 팔공산으로 접어든다.

팔공산 시루봉이 보이는데 급경사의 뾰족한 봉우리가 산꾼의 기를 확 꺽어버린다.

저기를 올라가려면 급경사에 얼마만큼의 땀을 흘려야만 갈 수 있을지... 시간이 해결하겠지.

322.3봉(06:25)

다시 고도를 높혀서 올라가니 옛날 성황당인지 집터의 흔적같은 곳에 크게 구멍이 난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이 팔공산 구간은 소나무들이 건강하게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걷고있는 이 코스는 일반 등산객은 전혀 오질않는 아마추어들은

상당히 위험하고 재미없는 코스이다. 다시 고도를 높혀간다.

소나무 사이의 뚜렸한 등로를 계속 걸어간다. 바람 한점이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그리덥지 않아서 걸을만 하다

팔공산 도립공원 경계 표시석(06:40)

등로에 팔공산 도립공원 표시석이 나타난다.

지금 이곳부터는 팔공산 도립공원인 모양이다.

공원구역 면적만으로도 속리산 국립공원 면적의 2배나 된다고 했다.

 새 행정수도인 세종시(2천160만평) 보다도 훨씬 클 정도로 팔공산이 대단한 산이다.
그런데 지난번 걸었던 팔공산 도립공원인 가산산성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 홀대를 받는 느낌이다. 같은 팔공산도립공원인데도 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처럼...

 

팔공산을 옛 선조들은 하나의 산으로 보지 않았다. 울타리를 쳐놓은 팔공산도립공원

그 안만을 팔공산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 산의 그림자가 미치는 모두의 땅을 그 산의 지경으로 인식했다.

이어진 줄기는 생명의 시작인 물의 산지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성호 이익(1681~1763)의 글에는 산과 물의 조화로운 合이 우리에게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한다는 글이 있으며, 60의 나이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애국이라는 말은

그 땅과 그 땅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라 하고, 그 땅의 됨됨이도 모르면서

애국을 이야기한다면 허공의 것이라 하였다.

도립공원 표시석에서 20분 정도를 올라가니 패랭이꽃이 피어있는 넓은 곳에

處士 密陽朴公이라고 써있는 묘지석이 있는 묘지에서 모여서 아침식사를 한다.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펼치니 즉석 부페가 된다. 30분간의 만찬이 끝나고 일부는

벌써 출발을 하건만... 평소에 가장 고생을 하시는 후미대장이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은지 통  나타나지를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려니 괜시리 미안하기만 하다.

 

묘지에서 시루봉까지 급경사의 고도 250을 높이려니 조금전에 먹은 밥알이

튀어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이든다. 젖은 땅이 더욱 더 미끄럽기만 하다

힘들어하는 산꾼 범여를 응원하는 초롱꽃

급경사에 이끼가 잔뜩 끼여있는 너덜길이 나타난다.

수줍어하는 하는 하늘말나리가 새색시처럼 수줍게 피어있다.

미끄러운 길에 자꾸만 스틱에 힘이들어가고 氣가 세기로 유명한

팔공산 기 받으러 가는 길에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너덜길을 거쳐 올라가야 하고...

사람이 다니지 않은 탓에 마치 원시림에 온 느낌이다.

미끄러운 너덜길에다가 잡목도 태클을 걸면서 산꾼을 힘들게 한다.

다시 바위계곡을 통과하는데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 생똥을 싼다.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이 안개속에 아련히 보이고 그 아래에는

신령면 치산리 관광단지가 안개속을 비집고 빼꼼히 내다본다.

이곳은 날씨가 좋으면 전망이 그야말로 一望無際인 곳이다.

전망대 바위에서 로프에 몸을 의지한 체 암릉 아래로 내려선다.

다시 암릉 사이의 능선을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미끄러운 능선을 올라서니 시루봉이 산꾼을 반겨준다.

시루봉(08:20)

朴公 묘지에서 아침을 먹고 급경사에 고도 250을 급격하게 놓혀서 1시간만에 도착한 곳이

시루봉이다. 오늘 산행중 가장 힘들게 올라왔다. 땀을 바가지채 흘리고 도착한 시루봉이다

그러나 그 명성만큼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조금전에 지나온 전망대 바위보다 못하다.

시루봉은  팔공산 능선을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면 배꼽부분에 해당되는 정도이다.  

시루봉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함께 인증샷을 남기고...

갑령재에서 시루봉까지의 구글어스

시루봉에서 다시 정상쪽으로 향한다. 조경업자들이 보면 군침을 삼킬만큼이나

멋진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조경을 잘 모르는 나도 탐나는데...

공산성의 흔적들

시루봉을 지나서 다시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산성의 흔적들이 보인다.

이곳 팔공산은 우리나라 전쟁의 아픈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와 후백제의 다툼, 몽고군의 침입,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여 부산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대구쪽으로 몰려올 때

조국을 침략하여 강토를 유린하고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일삼는

왜적을 섬멸하고 조국과 겨레를 지키고자 주변 고을의 선비 사대부들이 팔공산에 모여 들어

 구국 의병을 일으키기로 맹세한 것이 바로 공산회맹이다.

이때 회맹한 의병장은 대구, 상주, 밀양, 영천, 하양, 흥해, 청송, 청도, 영일, 울산의 수십명이었다.

임진 7월, 신녕의 권응수 장군은 각 고을 의병장들을 거느리고 군사교통의 요충인 영천성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3천 5백의 창의정용군이라 이름한 구국충절에 불타는 군대로 영천성을

공격하여 화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 휴정으로부터 팔도의 승려들이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받고 영규, 처영, 사명당 유정 등이 승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용감히 싸웠다.

동화사에는 영남 승군 사령부를 두어 사명당 유정선사가 승군 총섭(사령관)이 되어 승군을 훈련하고

 이들을 지휘하여 공산성을 수축하고 이 지역을 수호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재침략했을 때도 이곳 팔공산성은 민초들을 지켜준 곳이다.

 

팔공산 전쟁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2대 전투를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 하나는 신라말 후삼국을 통일하는 통일전쟁시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전광석화처럼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세운 후 국보, 인재를 약탈하여 개선길에 오른 후 백제 견훤군을 맞아

신라 구원군으로 달려온 고려태조 왕건의 5천 기병부대가 팔공산에서 싸운 동수대전이다.

여기서 왕건군은 전멸하고 왕건은 겨우 탈출했다. 이로 인하여 팔공산이 역사적인 전적지로 삼아

파군치, 왕산, 살내, 일인석, 지묘사 등 이 대전과 연관된 많은 지명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6·25 때에 북한 공산군의 결정적인 패전이 된 다부동 전투는 전쟁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은 엄청난 전사자를 내어 시산혈해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팔공산 다부동 전투였다.

지금 그곳에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자취는 없어지고 전적기념비가 서 있어 우리의 심금을 울려준다

멋진 암릉사이로 안개에 훕싸여 신비감을 더해주는 팔공산

며칠전에 내린 비로 인하여 부처손은 생기가 돌고...

원효대사가 득도를 했다는 이곳 팔공산에서 동료산꾼 산동네님도 득도를 하려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산수국도 갈길 바쁜 산꾼을 유혹하고...

준.희님 참으로 대단해요. 글고 늘 감사해요... 그 산에 대한 열정

관리 안 된 군부대 방공호를 지나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08:55)

팔공산 주봉인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1213봉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군사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고  이 도로를 따라서 100여m를

오르다가 좌측의 등로로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선두대장을 만난다.

대장이 주는 오이맛은 정말로 꿀맛이다. 10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정상으로 향한다.

철없는 쑥부쟁이

9월에 피어야 할 넘이 지금 피었다. 참으로 철없는 넘이다.

요즘에는 꽃이고 인간이고 제 정신으로 사는 넘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공군부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이렇게 응원의 메시지도 보이고...

팔공산 자락에 있는 황장송(黃腸松)은 참으로 건강해 보인다.

능선을 치고 올라서 안부능선을 걷는다.

이곳은 모든 능선들이 암릉구조로 되어 있어서 산행속도를 낼 수가 없다.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 소나무도 만나고...

원래 팔공기맥길은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인데 그곳은 접근할 수 없어서

부득히 우회를 하는데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이곳에서 아찔한 안부의

바위능선을 걷는데  저 위의 팔공산 정상이 안개속에 보일듯 말듯하다.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1213m)에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

민간인을 출입을 할 수 없는 곳이다. 부득히 우회길을 따라 기맥길을 이어간다.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인증 샷으로 대신하고...

본격적인 정글(?)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길은 없고 감각적으로 간다.

엉킨 터널 숲으로 접어드니 시원하긴 하나 베낭을 땡기고 바짓가랑이를

잡아 당기고 모자가 벗겨지고 참으로 미치겠다. 그래도 가야 하기에...

조금 지나니 군부대 철조망이 나타나면서 야생화 천국이 열린다.

멋진 자태를 뽐내는 노루오줌

기린초의 모습

요염한 자태로 산꾼을 유혹하는 꿩의 다리

이중으로 처져있는 철조망 안에는 수많은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이중 철조망도 모잘라 땅바닥에는

원형 철조망이 깔려있다. 거기다가 등로는 너덜지대로 구성되어

명색이 전문산꾼이 1시간에 1km를 진행하기가 힘든 코스이다.

베낭이 찢어지고 선그라스도 잊어 버렸는데 뒤에오는 동료산꾼이

줏어오는 바람에 다행히  큰 손실은 면하였지만  그래도 피해가 많다.

멋진 암릉이 나타나는데 여성 산꾼이 연자방아 바위란다.

자세히 보니 연자방아처럼 생겼다. 근데 이름은 믿거나 말거나...

다시 철조망쪽으로 접근할 수가 없어서 아랫쪽으로 내려오니

바위틈에서 오염이 안된 石間水가 흘러 나온다.

잠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저 멀리 멋진 시루바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팔공산도 잠시 사이에도 안개가 잔뜩 끼였다가 금방 걷히고 종잡을 수가 없다.

인적이 거의없는 곳이라 그런지 귀한 곰치도 꽤나 보인다.

지나온 험한 길의 모습

가야할 길이 아직도 먼걸만 도저히 산행속도를 낼 수가 없다.

정글같은 철조망을 지나니 너덜길에도 철조망이  깔려있고

참으로 힘이든다. 숲으로 들었다가 다시 철조망 옆을 걸으니

따가운 햇살이 산꾼을 괴롭힌다.

앞으로도 그림에 보이는 이중 철조망을 따라서 한참을 가야한다.

시루바위(10:30)

내 몰골이...

바지는 완전히 논을 메다가 온것 갔고 베낭은 찢어지고 새로 산 지가

얼마 안된 등산화 모퉁이 살점 한쪽이 날아가 버렸다.  내가봐도 우습기만 하다.

그래도 시원하게 얼려온 삿포로 생맥주맛은 정말 꿀맛이다.

이곳에서 동료 산꾼과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길을 간다

멋지게 피어있는 참조팝나무

마지막으로 잡목과의 전쟁을 치른다. 얼굴도 할키고...

그러나 위에 보다는 밑으로 조심해야 한다. 미끄러운 암릉과

눈에 잘 안보이는 철조망이 늘 산꾼을 긴장시킨다.

지나온 시루바위의 모습

한반도의 큰 지맥인 백두산 줄기는 비록 군데군데에 곁가지 지맥들을 가지쳐 놓기는

하였지만 그 주된 지맥은 줄곧 남쪽으로 내리치달아 태백산 줄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태백산 줄기의 보현산 부근에서 한가닥 큰 힘이 솟구쳐 나와 서쪽으로

뻗으면서 장엄수려한 명산을 하나 일으켜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팔공산이다.

결국 팔공산은 백두산의 무량한 기운을 연면히 이어받은 적자의 뼈대있는 명산인 셈이다.

팔공산은 그 규모 또한 엄청나게 커서 동서로 뻗은 능선의 길이가 20㎞에 달하며,

 그 앉은 전체 면적만도 122㎢에 달한다. 그 뿐이 아니다.

 

대동여지전도에 나타나는 팔공산을 찾아보노라면 그 뛰어난 위치에 자못 신비로움마저 느낄 정도다.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의 태백산과 소백산이,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의 주왕산과 가지산 등이,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속리산과 덕유산이, 남쪽으로는 낙남정맥의 여항산과 신어산 등이

 각각 팔공산을 위호하니,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팔공산은 분명 하늘이 내린 영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 옛날 신라가 나라의 수호산인 오악을 설정할 때 그 가운데산으로 팔공산을

 앉히고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등을 사방에 거느리도록 한 것만 봐도 아버지산인

 팔공산의 됨됨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삼거리 안부(11:00)

드디어 지긋지긋한 철조망과 잡목지대를 벗어난다.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팔공산 최고봉(1,213m) 의 안부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비로봉을 가기전에 너덜지대로 향한다.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팔공산의 최고봉(1,213m)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공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군부대 아래의 우회길의 너덜지대에는 설악산 황철봉 구간의

너덜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아름드리의 바위가 너덜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도 모잘라서  철조망이 너덜지대를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숲속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 기맥길을 이어간다.

 

팔공산 동봉에서 관봉(갓바위봉) 으로 연결되는 팔공산 주능선의 장엄한 산줄기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책을 저술하신 조 석필님은

'산맥'으로 읽지 말고 '산경'(山經, 산줄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산맥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질 구조, 산경은 땅 위에 있는 그대로의 산줄기라고 했다.

산줄기 흐름을 족보로 파악한 것이 '산경표'(山經表)라는 저술이고, 그림으로 그린 것이 산경도라고도 했다.

'태백산맥은 없다'는 산과 물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철리(哲理)를 하나 내걸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둘이 아닌 하나이나 섞일 수는 없다는 말. "남과 조화는 하되 혼동하지는 않는(和而不同)" 것이

군자라 했던 공자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던 옛 조사 말씀이 연상됐다.

물이 시작되는 곳이 산 끝나는 곳이노라, 산은 물을 나누는 물가름이 되고(山自分水嶺),

물은 산을 구획 짓는 산가름이 되노라….

 

산을 산맥으로서가 아니라 산경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산줄기에는 대간, 정맥, 기맥(岐脈) 등의 등급이 있다.

가장 중요한 맥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동해를 따라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남으로 내려오는 백두대간이다.

대간은 태백 즈음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반도의 복부로 들어 가 버린다.

 대신 동해를 따라 계속 달릴 줄기를 하나 남겨 두니, 그것이

낙동정맥이다.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을 지나 신불산 천성산 금정산에 이른다.

팔공산으로 오는 줄기는 이 낙동정맥의 가지줄기 중 하나이다. 포항 죽장면의 '가사봉'(744m)에서

 정맥을 빠져 나와 달의령-꼭두방재 맥으로 그 고을을 가로지른다. 베틀봉(934m)-면봉산(1120.6m)을

거치며 죽장의 북부-서부 경계선을 이루고 보현산(1124m)에 도달한다. 팔공산에서 바라 봐

 정북(正北) 기준 60도 방향에 허리 부분을 구불구불한 도로 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이 면봉산,

 그 바로 앞의 것이 보현산이라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영천 화북면의 북서쪽 경계선을 만들며 갈재-방각산-노귀재를 거쳐 석심산(750m,

군위 고로면)에 이른다. 수기령-방가산(755m)을 지나 화산(824m)으로 오면서 영천과 군위를 경계짓는다.

갑령재를 거치며 물길을 신령천과 위천으로 나눠 붙인다. 그리고는 드디어 신녕∼부계 사이 도로의

두 고을 경계점에 있는 재(일명 자주고개)를 통해 본격적으로 팔공산 덩어리로 들어선다.

팔공산에서는 그 맥을 받는 배꼽 격인 시루봉(726m)에서 급하게 치솟아 정상에 도달한다.

비로봉, 제왕봉, 혹은 중봉이라 불리는 그것이 주봉이다. 높이 약 1193m, 낙동정맥에서 빠져 나온

이 가지줄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이것이 팔공산의 태생적인 족보이다.

(대구 매일신문 기사 인용)

너덜길을 빠져나오니 다시 철조망의 좁은길을 곡예하듯이 걷는다.

지나온 구간의 멋진 암릉들

범여가 오늘 지나온 팔공기맥길은 군부대의 통제와 험한 길 때문에

팔공기맥을 종주하는 산꾼들 이외는 전혀 다니지 않는 곳이다.

그러기에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이곳의 멋진 암릉구간의 정말

탄성을 자아낼 만큼 멋진 곳이다. 마치 설악산에나 온 것처럼...

이곳은 화강암이 솟구쳐 올라 변성 퇴적암이 된 곳이란다.

그래서 돌이 상당히 단단하다고 한다.

팔공은 사방 수백 리에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정상에 서면 온 세상이 일망무제. 더 올려다

볼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뿐이다. 하늘과 만날 수 있는 통로, 하늘의 뜻을 물으려면

찾지 않을 수 없는 자리, 그것이 팔공산이다.

팔공산은 '우리'가 수 천년을 기대 살아 온 산,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산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산, 영원히 함께 할 우리의 산이다. 김유신은 거기서 핍박받던 나라

지킬 힘을 빌었다. 원효는 10년을 구도했다. 신라는 국가적인 대제(大祭)를 하늘에 올렸다.

많은 유학자들은 수행처로 삼았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품안을 찾아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그 날개 밑을 둥지 삼아 가부좌 틀고 용맹정진 중이다.

그리고, 그렇고 그런 우리 중생들의 마음들도 끊임없이 쉼 없이 팔공산을 향하고 있다.

팔공산은 그 뭇 생명들을 그 오랜 세월 보듬어 왔다. 그들의 뜻과 고난을 지켜봐 줬다.

몽고군이 처절히 유린할 때는 민초들과 함께 아파했다. 왜군이 짓밟을 때는 의병을 감싸 안았다.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나라를 지켰다. 공비들로 인해 동네가 화염에 휩싸이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처절함, 홍수와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돼 수십 호가 같은 날 제사를

모셔야 하게 됐던 참혹함에도 팔공산은 말없이 그 아픔을 함께 했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서 군부대 철조망을 벗어나니 군사도로가 보인다.

드디어 팔공산의 정상인 비로봉이 보인다

 

팔공산의 지명 유래를 보면...

공산은 우리 말로 곰뫼 즉 웅산이란 뜻이다. 고대에 곰은 신, 신성의 뜻을 가졌다.

곰나루가 공주가 되듯 '곰'이 '공'자로 표기되었다.

이 공산이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설이 있다.

① 8장군이 순절했다고 하여 ② 8고을에 걸친 산이라 해서 ③8간자를 봉안했다고 해서

④ 8성인이 득도해서 나온 산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여덟 장군의 순절설을 보면 고려의 통일전쟁시에 태조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이

동수대전에서 격돌했을 때 신숭겸, 김낙 두 장군 외에 다른 장군의 순절사실은 없었다.

8성인이 득도했다던 설은 원효의 제자 8인이 천성산에서 공산에 들어와 세 스님은 삼성암에서,

다섯 스님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불교계의 전설이다. 또 하나는 신라 헌덕왕자인 심지대사가

속리산에 가서 진표율사가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팔간자를 받아와서 공산 동사에 봉안한

사실에서 생겨난 불교계의 전설이다.

여덟 고을에 걸쳐 있었다는 설은 조선초기에 생긴 팔공산의 이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선초기 이후 공산은 해안, 하양, 신녕, 팔거, 부계 등 다섯고을 즉 현에 걸쳐

있었지만 여덟 고을에 걸쳐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 팔공산 명칭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것은 사대주의 모화 사상가들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안휘성 봉대현 동남비수의 북, 회수의 남에 위치한 팔공산에서 북조 전진왕 부견과

남조 동진 효무제 사이에 팔공산 비수에서 대전이 전개되어 부견왕이 참패한 고사와 유사성이

있어 그 고사에서 따다가 공산을 팔공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보겠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산을 혹 팔공산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에 공산을

일명 부악(父岳)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악이란 공(公)자가 부자와 닮은 자로

 붓으로 베낄 때 혼동된 것이라고 보겠다. 2천년간 공산이라 써오던 이름에 팔공산이란

이름이 후세에 생기게 된 것은 중국문화를 숭모해온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젖은 우리의

 유학자들이 중국 역사사실의 유사성에서 붙인 명칭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공군부대와 비로봉 방송 중계소를 연결하는 도로가 나온다.

군사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비로봉으로 향한다.

힘든구간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갑자기 허기가 지고

긴장이 풀리니까 다리에 힘이 쭈~욱 빠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도로에서 소주와 함께 빵과 깁밥으로 허기를 때우고 다시 길을 걷는다. 

대구방송 송신소를 지나고...

한참을 걸어가서 kt 중계소에 도착하니 철문은 잠겨있고...

그런다고 안가나 이 바부들아... 요런건 간단하게 통과한다.

누워서 식은 죽먹기보다도  더 쉽게...

팔공산의 실질적인 주봉 역할을 하는 비로봉으로 올라간다.

팔공산 제천단에서

비로봉 바로 아래에  신라시대에서 祭를 지내던 祭天壇이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봉은 옛날 조상들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이다.조상의 얼이 기려있는 자손만대

기리 보존하기 위해 표석을 세웠다.

2001년 7월 2일 달구벌 얼찿는 모임

비로봉 정상에는 공군부대, kt 중계소를 비롯하여 KBS,MBC, BBS,

대구방송 등 우리나라 산 중에서 중계탑이 아마 가장 많은 곳 같다.

몇년전만 하여도 이곳은 보안상 이유로 전혀 개방이 안된 곳이지만

지금은 개방하여 팔공산 최고봉을 오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린다.

경상도 사람들의 산 사랑에 비하면  이 명산에 정상석 하나 없다는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낙동정맥을 타면서 경북지역 산마다 각 산악회에서

표시석을 세우는 바람에 어떤 산에는 3~4개의 표시석이 있는데 실망스럽다. 

팔공산 비로봉(제왕봉 1192.6m:12:00)

경북 영천시,군위군, 대구광역시를  가르는 명실공히 3개시군의 경계봉이다.

정상에는  제천단 표지석과 1등삼각형이 설치되어 있으며, 각 방송사들의 중계소와 통신탑들이 설치되어있다

 

팔공산은  대구광역시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지점에 솟은 대구의 진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 영천시, 경산시, 칠곡군, 군위군 등 4개 시군이 맞닿는 경계를 이룬다

팔공산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영험의 상징으로 불리는 갓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갓바위는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골짜기에 있으며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의 좌불상이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갓바위를

찿아와 소망을 기원한다  갓바위 석불은 해발 850m에 위치하며 높이는 약 6m이고 머리의 갓 지름은 1.8m이다

 신라 선덕왕때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머리에 쓴 갓의 모양이 대학학사모와 비숫하여 입시철 합격을 기원하는 행렬이 해마다 북새통을 이룬다

1980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비로봉 삼각점(△군위 11  79 재설)

험준한 공산이 우뚝이 솟아서 /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 날을 가야 할꼬 /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 /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세

 

매월당 김시습의 '팔공산을 바라보며'(望公山)라는 詩에서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팔공산 남사면 지역

 '팔공기맥'이 오는 원래 기맥길이다.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주봉인데 군부대가 장악하고 있어

대접을 못받는 곳이지만 비로봉에서 보니 장엄하다.  그 밑에 사는 부계 사람들이 '남포루'라

불러 왔다고 했다. ‘남쪽에 있는 대포 요새’ 같이 생겼다는 뜻이라고 그렇게 불렀단다

공군부대가 둥글게 울타리를 치고 포진한 저 봉우리가 바로 옛 ‘공산성(公山城’이다.

후삼국시대(927년) 고려개국공신 신숭겸이 견훤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위급하자

태조(왕건)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싸우다 전사했는데 견훤은 이를 왕건으로 알고 목을 베어 갔다.

 ‘태조왕건’의 TV드라마에서도 본 내용인데 바로 그 배경이 이곳 ‘공산성 전투’다. 신녕면의

향토자료에도 일제시대 때 신시암마을의 소작민들이, 남자는 지붕 덮을 억새를 베러,

여자는 밥 대신 먹을 나물을 뜯으러 하루 두 번씩이나 공산성을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팔공산의 지명유래 중에서, 태조왕건과 함께 공산에서 싸운 8충신을 위하여 원래는

공산이었는데 팔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說)도 있다.

 

비로봉을 내려와서 원래 계획은 기맥길에서 왕복 1.2km 정도 떨어진 동봉을

갖다 오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군부대를 통과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아쉽지만 그냥 포기하고 서봉으로 향한다. 지난 9월에 다녀온 걸로 만족하면서...

비로봉을 내려와서 우측 공터에서 숲으로 접어든다. 

숲으로 접어들자 이중으로 된 철조망이 나오고 거기에는 개구멍이 있다.

개구멍을 통과하여  너덜길의 등로를 지나간다. 이곳 팔공산은 등로 전체가

암릉구간이라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장거리 산행을 하는 우리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길이 아닐수가 없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자꾸만 지체된다.


흔히 말하는 팔공산의 주능선은 가산(901m)에서부터 주봉(1193m)을 거쳐 관봉(852m)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상거리가 약 20여km 정도가 된다고 한다
주능선은 그 끝 가산에서 3개의 줄기를 낸다. 한 줄기는 더 서쪽으로 달려 또 하나의 커다란

산군(山群)을 형성한 황학지맥과 북쪽으로 달려 의성 단밀까지 내리 뻗는다 했던 위천지맥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東峰(미타봉)의 모습

팔공산 정상은 서봉(삼성봉)-오도재-주봉(비로봉)-장군메기-동봉(미타봉)의 구성은

 마치 삼각편대를  연상케 한다. 주봉이 좀 북쪽으로 물러앉았고 양 날개는 남쪽으로 나와

있어 더욱 그렇다. 마치 절에가면  대웅전에  석가모니를 주불로 하고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협시불로 있는 것처럼... 그 아래에는 수태골이 형성되어 있다.

신라의 五岳중에 中岳이었던 팔공산

신라에는 삼산 오악이란 나라 최대의 신산영악이 있어 숭배했다.

삼산에 지내는 제사는 신라 최대의 제전인 대사라 했다.

 

오악이란 신라가 중사를 제사지내던 신라 강역의 다섯 방위에 위치한 성산을 말한다.

동 토함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남 지리산, 중 공산(팔공산). 이 오악은 신라인의 거국적인

숭배를 받았던 신산영악이었고 이 오악산신은 신라 호국의 신으로 신라의 국운을 진호하고 있었다.

신라의 신령스런 명산 오악중에서도 신라 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중악은 가장 신령스런 영산이었다.

이 산 위에는 산신 즉 천신에 제사지내던 제천단이 있어 국가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산신에게 나라의 안녕과 시절의 조화와 풍요를 기원했던 것이다. 지금 오악 중에서 제천단이

 완전하게 근래까지나마 있던 산은 북악 태백산과 중악 팔공산 뿐이었다. 애석하게도 팔공산의

제천단은 산정에 레이다 기지의 조성과 TV 중계탑 건설 등의 정지공사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다. 신라 이래 오악 산신에게는 나라에서 봉작하여 대왕의 칭호를 올렸다.

중악 산신에게는 공산(중악)대왕이라는 작호를 봉했다.

이 중악대왕에 기원하고 제사지내는 전통은 고려말까지 내려왔고 이조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고려말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제공산대왕문, 헌마공산대왕문, 공산대왕사제문이 실려있다.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영남 지방의 민란을 평정한 사실을 공산대왕께 기원하고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는 글이다.

이 제문은 이규보가 지은 것이다. 물론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국가에서 중대한 변고가 있을때 나라에서 국왕이 몸소 공산 신에 기도드렸고 뒤에는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중악 공산은 영원히 민족의 숭배를 받아온 민족의 신령스런 성산이었고 그것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등로에서 바라본 동화사 계곡과 수태골의 안개낀 모습

 

동봉에서 서봉까지의 능선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부채꼴 형상으로 여러갈래의

 지계곡을 만들어 한곳으로 모아 넣는데, 바로 수태못이다.

 대구매일신문의 개념도를 보면 동봉부터 서쪽으로 국도림골, 주추바위골, 삼성골,

 용무골, 보라우골의 물이 오롯이 수태못으로 흘러들어가고, 수태못에서 한줄기로 합한

 이후부터 수태골을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기를 못가진 부인이 이 골짜기에서

 기도를 하고 수태(受胎)했다는 전설이 있단다

가야할 서봉(삼성봉)의 모습

팔공산의 정상부는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동서로 뻗는 주능선과 북으로 뻗는

 팔공기맥의 젖줄 능선에 걸쳐 ⊥ 형태의 큰 덩어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정상부는 우선 주능선상에 서봉-주봉-동봉의 삼봉(三峰)을 형성한다.

그 세 봉우리 사이에는 두 개의 재가 있다. 서봉과 주봉 사이에 '오도재'.주봉과

 미타봉 사이에 있는 재는 북사면의 백학마을 사람들은 '생부처메기'. 남사면 사람들은

 '장군메기'라고 했다. 생부처메기는 그곳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석불상에 인연한 이름일 터.

장군메기라는 호칭에는 이곳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던 지역민들의 기억이 깔려 있는 듯 하다.

 재 북쪽에는 '장군수'라는 샘도 있다고 했다.

비로봉에서 서봉가는 길의 암릉 아래에 숨겨진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이 나타난다.

이곳 팔공산은 약사신앙의 성지같은 곳이다. 산 곳곳에 약사여래불이 산재해 있다.

베낭을 벗어놓고 약사여래좌상을 친견한다. 내 주위의 아픈사람들이 없게 해달라고...

약사불은 중생세계의 약국의 약사에 해당하는 부처로 중생의 아픔을 구원하는 부처님이시다.

갈길 바쁜 산꾼이 부처님께 여법하게 예를 올릴 수는 없고 저두삼배로 예를 올린다.

참배하는 어느 부부가 불단위에 소주병을 올려놓고 서원을 발원한다.

내가 부처님께 술을 올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자, 술병을 가지고 간다. 

 

팔공산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9교구 본산(本山)인 동화사(桐華寺)를 비롯하여 은해사
(銀海寺)․파계사․부인사(符仁寺)․송림사(松林寺)․관암사(冠岩寺) 등이 있고, 비로․
부도(浮屠)․양진(養真)․염불(念仏)․거조(居祖)․백흥(白興)․운부(雲浮)․묘봉(妙峰)․중암
(中巌)․내원(内院) 등의 암자가 산재한 불교의 성지이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12:20)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산1번지에 있다.

팔공산 동봉의 석불입상에서 서쪽에 솟아 있는 비로봉의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새겨져 있는 약사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다.

그리고 두광(頭光 : 부처나 보상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

그리고 불꽃무늬의 거신광(擧身光 : 부처나 보살의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함께 갖추어진 완전한 불상이다.

현재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대좌 부분에는 이끼가 가득하여 조식(彫飾 : 잘 다듬어 꾸밈.)을 잘 알아보기는 힘들다.

 

코는 오뚝하며 인중(人中)은 뚜렷하고 입은 좀 작게 표현되었으며, 엷은 미소를 띄고 있다.

두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어깨는 당당하나 경직되었고 가슴은 편평하여 양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는 우견 편단(右肩偏袒 :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

으로 옷주름이 유려하고도 규칙적이다.

특히 왼쪽 어깨 위에서 반전되어 뒤로 넘어가는 옷깃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우견 편단을 한 불좌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주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본존상과 비교될 수도 있지만 이 불상에서는 보다 더 경직되고 도식화되었다.

 

오른손은 외장(外掌 : 손바닥을 바깥으로 함.)한 채 곧게 내려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았다.

손금이나 다섯 손가락 마디마디의 표현이 뚜렷하다. 손목에도 2조의 음각선이 짙게 그어져 있다.

팔찌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손목 마디를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왼손은 배 앞에서 약호를 들고 있으며 손가락이 유난히 길게 표현되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 그리고 거신광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머리에는 큼직한 단판 육엽(單瓣六葉 : 여섯 잎의 홑꽃잎)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둘레에 2조의 테두리선을 돌렸다. 그 바깥으로 다시 2조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는 덩굴무늬로 장식하였다. 신광 역시 두광과 같은 모습이고

두·신광 주위에는 대좌에서 두광 정상까지 불꽃무늬로 장식했다.

대좌는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과 복련(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

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연화대좌이다.

무릎 밑의 단판 앙련은 이중으로 겹쳐져 있고 그 밑으로 복련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앙련 중앙의 큰 연꽃잎 안에는 귀꽃 모양의 문양을 새겨 넣어 장식성을 더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연화좌 밑으로 목은 길게 빼고 대좌를 받치고 있는 용의 형상이다.

두 마리의 용은 서로의 몸을 엇갈려서 대좌를 떠받들고 있듯이 표현되었다.

입을 딱 벌리고 있으며 눈은 부리부리하다.

 

이처럼 불상의 대좌에 용두를 조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기록상으로는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四山碑)인 숭복사(崇福寺) 비명에 “2층 불전의

용으로 된 대좌위에 노사나불을 모셨다.”라는 대목이 있어 이러한 대좌가 숭복사

 불상이 만들어진 9세기 이후에는 제작되어졌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우수하고 구도도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평면적인 신체의 구성이나 화려한 장식성으로 미루어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오도재(12:30)

이곳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경북 군위군 부계면을 잇는 고개로

등산객들이 꽤나 많이 다니고 있는 수태골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수태골(水台谷)은 대구시 동구 용수동의 자연부락으로 경주최씨들이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수태(受胎)의 유래는 불임의 여자가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끝에 임신에 성공했다고 해서 수태골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항상 계곡에 물이 넘쳐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서봉 가는 길

지나온 팔공산 정상의 모습

서봉가기전의 헬기장

신라시대 3성인이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는 이 지점은 동쪽으로 동화사까지

팔공산 주능선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지점부터는파계봉까지 계속 톱날능선이 이어진다.

곳곳에 암릉에 올라갈 수 없다는 주의 문구가 있으므로 암릉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아 나 있는 산길을 따라 진행한다.

 

서봉이나 삼성봉이나 결국은 같은 봉우린데 이름이 둘인 셈이다.

신라시대 삼성암에서 3성인이 득도하였다고 삼성봉이란다.

삼성봉(三聖峰)

서봉에 올라서니 서봉이란 표시석이 나오기 전에 삼성봉이란 표시석을 만난다.

서봉의 또다른 봉우리 명이다. 동봉을 미타봉이라고 하듯이...

서봉은 그 바로 밑에 있었다는 '삼성암'(三聖庵)이라는 절 이름에서 따 '삼성봉'이라 했다. 

삼성암 절 자리는 100여평. 방향은 정 서남향. 우물도, 굴도 있었다.

초석들이 여전히 제자리에 놓여 있고,  뒤로 빙 둘러 천연의 기암 병풍이 벌려섰고,

바로 앞으로 삼성봉의 아들이라 할만한 '성인봉'(903.5m)이 우뚝이 보였다.

서봉(西峰:1.150m:12:45)

서봉의 표시석을 카메라에 담고 산 아래의 동화사 계곡을 내려보니

아직도 대구시내는 박무로 인하여 사물이 보이질 않는다.

정상석의 위치는 가파른 곳에 세워져 있어 카메라에 담기가 불편하다.

서봉에서 다시 왔던길을 되돌아와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이곳은 등산이라기보다 유원지에 온 느낌으로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가져온 음식을 즐기면서 쉬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갈림길(12:50)

이곳에서 내려서 파계재. 한티재쪽으로 계속 걸어간다.

서봉에서 파계재가는 길은 소위 말해서 톱날능선이다.

등로는 뚜렸하나 계속해서 등로에 암릉이 태클을 거는 바람에 도저히

산행속도를 낼 수가 없다. 능선 안부에는 계속해서 멋진 암릉을 만난다.

 

팔공산이 어떻게 해서 이런 특징을 갖게 됐는지 살펴보면 
약 1억년 전쯤 경상도는 거대한 호수였다. 일본은 한반도와 연결돼 있는 땅.

그 사이에 '경상도 호수'가 있었고 기본 지질은  퇴적암이었다.그때는 지질시대

구분상 중생대 백악기. 화산 폭발로 산들의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뒤였다.

 비슬산과 대구 앞산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앞산의 바위는 검은 화산암이다.

화산 폭발 시기가 하도 오래 돼 흔적들이 많지 않으나, 그곳에서도 기둥 모양(柱狀)으로

갈라진(節理) 바위들은 발견된다. 마그마가 식을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를 가다가 다시 급경사의 능선으로 내려선다.

오늘 내가 가야할 능선의 모습

저 멀리 파계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도 갈길이 멀기만 하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 급경사로 내려 섰다가 다시 치고 오른다.

저 멀리 파계사가 있는 계곡의 모습이 보인다.

대구시의 행정편의주의 발상의 극치

오도재에서 오늘의 날머리인 한티재까지 자그마치 이런 이정목이 60여개나

설치가 되어 있는데 한결같이 → 파계재, 한티재 ←동봉, 갓바위란 이정표이다

구조목에 숫자만 붙이는 건 대구시 담당자인 당신네들만  그 위치를 알뿐이다.

마치 간첩들이 사용하는 포스처럼... 동봉과 파계재가는 위치를 모르는 사람있나?

그렇게 많은 구조목은 안 세워도 될 듯 싶은데 너무나 과다하게 많이 설치해놨고

곳곳에 위치와 함께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표시를 왜 안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팔공산에는 대구 사람만 오나... 남을 위한 배려가 아닌 지극히 행정편의주이 발상이다.

당장 시정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업자들에게만 맡기지말고 현장확인도 좀 하시요.

 

대구의 몇십분의 일밖에 안되는 한북정맥길의 경기도 포천시와 진양기맥길의 거창군의

산에 함 가보슈. 어떻게 해놨는지...일은 돈으로 하는게 아닌 머리로 하는거요.

솔직히 말해서 구조 표시목을 길이 좋은곳에 100~200m에 하나씩 설치하는 건 낭비아니오

솔직히 말해서 대구의 재정상황은 엄청나게 힘들잖소... 필요없는 지출을 줄이시고

제발 하심으로 봉사해야지... 당신네 위주로 한 이정목 시정해 주시길

기생인지 공생인지...

암벽이 있는 로프지대와 암릉지대가 자꾸만 지치게 한다.

같이가는 동료산꾼 산동네님과 정 의수님이 오늘 끝까지 동행한다.

소주 한잔에 참외와 빵을 나눠 먹으면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산동네님이 지난달에 중국에 골프를 가서 홀인원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난 구력이 15년이나 됐지만 아직 못했는데...

축하합니다... 앞으로 5년간은 모든게 술술 잘 풀릴것입니다.

오늘 내가 지나온 톱날능선의 모습

마당재를 가기전 바로 우뚝 솟은 벼랑바위 능선이 장관을 드러낸다.

당장 1천18mㅡ1천54m로 더 높아져, 드디어 1천m를 넘는 능선을 이어가는 것.

 주봉 서쪽의 이 벼랑바위 능선을 '칼날능선'또는 '톱날바위'라 불렀다.

하나 이가 어긋난 모양새로 봐서는 '톱날능선'이란 이름이 나아 보인다.

지친 산꾼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산나리

마당재(14:40)

파계재로 가는 등로에서 대구시 동구 신무동,부인사 내려가는 길이

좌측으로 나있는 마당재가 나타난다. 마당재에서 다시 고도를 높인다.

마당재 헬기장(14:45)

헬기장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청순한 산나리의 모습

이곳 헬기장에는 대구 동부 경찰서에 설치한 구급함도 있다.

등로길에 멋진 쌍둥이 바위도 만나고...

헬기장을 조금 지나니 등로 좌측으로 학생 야영장 가는 길도 있고...

파계봉 이정표

지루한 기다림 끝에 파계봉이 나타난다.

파계봉(99.2m:15:05)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북 군위군 부계면의 경계로 대구 공산산악회에서

파계봉이라고 검은 표시석을 세워 놓았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한 느낌이다.

대구매일신문의 ‘팔공산하’에는 ‘장꼬방봉’으로 나온다. 주민들은 '장꼬방 말랭이'라 부른단다.

장꼬방은 장독, 말랭이는 정상(頂上)이라는 뜻이다. 그 봉우리가 장독을 닮았다는 비유일 것이다.

파계봉이란 명칭은 지형도에는 없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파계사는 이곳 봉우리에서는 꽤나 먼거리에 있어 파계봉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파계봉 삼각점(△310 재설: 78,11 건설부)

파계봉을 지나고 부터는 암릉구간이 끝나고 부드러운 육산이 연결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가는데 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파계봉에서 편안한 육산길을 15분 정도를 내려오니  우측으로는 제2석굴암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파계사로 향하는 길이다. 그리고 팔공기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파계재(805m:15:20)

대구시 동구 신무동과 군위군 부계면을 연결하는 옛 길이 마루금을 넘어가는 고개로

등로는 뚜렸하다. 이곳에서 대체적으로 좌측인 파계사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산한다.

파계사 뒤쪽 고개라 파계재인데 파계(把溪)란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에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측으로 가면 경주의 석굴암보다도 제작연도가 100여년이 앞선다는 군위 제2석굴암이 나온다.

파계사(波溪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804년(애장왕 5)에 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한 절로 그 연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뒤 1605년(선조 38)에 계관(戒寬)법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원통전(圓通殿)을 중건하고,

 1695년(숙종 21)에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6년 6월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을 개금할 때 불상 안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와

영조대왕과 인연이 깊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에

들어서면 법당인 원통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이 높은 기단 위에 서 있고 그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설선당(說禪堂)이 있다. 이 건물 뒤쪽으로 기영각·산령각·응향각(凝香閣)·미타전

등이 있는데 그중 기영각은 숙종·영조·정조의 어필(御筆)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어필각(御筆閣)

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어필이 전해지지 않는다. 중요문화재로는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을 비롯해 삼장보살도(1707)·팔각석 등이 있다.

또한 절의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원의대사의 부도와 비(1648), 전명대사의

 부도와 비(1658), 현응대사의 부도와 비(1701)가 있다.

 

근처에 있는 부인사가 신라의 선덕여왕과 인연이 있다면

파계사는 조선시대 영조대왕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진동루(鎭洞樓)

파계사 원통전 앞에 있는  누각으로  1715년(숙종 41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파께는 원래 아홉갈래나 되는 사찰 좌,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地氣가 흘러 나가는 것을 방비하는 의미가 들어있으며 진동루 또한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곳의 氣를 제압할 수 없어 기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원통전
파계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없고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 적묵당, 진동루 등이 네모 모양으로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1605년 계관법사가 중건하고, 1695년 현응조사 때

삼창하여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한다.

성전암

파계사에서 약 1km를 가서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성전암이 나온다.

성전암은 파계사의 부속암자로 1695년(숙종 21)에 현응(玄應)이 중창하였다.

이 성전암터는 경상북도의 3대 참선도량 중 도리사(桃李寺) 다음으로 손꼽는 곳이며,

조사 현응이 영조의 탄생을 위하여 백일기도를 하였던 곳이다.

 

영조는 자신의 탄생을 감사하는 뜻에서 11세 때 현응전(玄應殿)이라는 현판을 써서

이곳으로 보냈는데, 그 편액은 지금까지 성전암 법당에 걸려 있으며,

영조 때 제작한 특이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임자는 성철스님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수도도량으로 만든 선원으로도 유명한데

1955년부터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곧 한 번도 성전암 문을 나서지 않고 수행하였다고한다. 

파계재부터는 고도차가 거의 없고 편안한 육산으로 마치 산보하는

느낌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이곳은 한티 휴게소가 가까워 그런지

등산보다는 그냥 휴식을 위한 트레킹족들이 많아 보인다.

파계재에서 조금 올라서니 멋진 소나무 2그루가 등로에 서있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조금을 내려오니 원당봉석 표석이 나온다.

파계사 원당봉산표석

팔공산 파계사 원당봉산표석은 팔공산 파계재에서 한티재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당봉산(願堂封山)은 "원당"과 "봉산"이란 두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원당은 왕실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던 장소를 뜻하며, 봉산은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지한 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석은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의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게 하고 주변 산림도 보호하고자 세운 것이다.

1806년 작성된 『파계사원당사적把溪寺願堂事蹟』에 따르면 파계사는 1696년(조선 숙종22년)세자(영조)의

탄진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의 원당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696년 이후 파계사가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

원당봉석표석에서 조금을 더 지나가니 등로옆에 멋진 암릉이 나타난다.

고속도로(?)만큼이나 넓은 등로 좌측으로는 파계사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기맥길인 한티재로 이어지는 길이다.

대구시계 분기봉(834m:15:55)

바닥 편편한 헬기장에서 쳐다보이는 봉우리를 보고 또 올라가나 싶었는데,

기맥은 봉우리 직전에서 우측으로 꺾여간다.

이 봉을 경계로 대구시가 끝나고 칠곡군 동명면으로 바뀐다

동료산꾼 젠틀맨님, 산동네님, 정 의수님과 함께 여유로운 걸음으로 한티재로 향한다.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한티재가 보인다.

더위를 피해서 나온 사람들로 한티재 주차장에는 사람과 차량이

가득 차있고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가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12시간 50분의 여정을 마치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제2 석굴암가는 길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위치한  제2석굴암으로 불리는 석굴사원 삼존석굴은

 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 한다..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삼존석굴은 가파르게 경사진 절벽의 동굴안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온화한 모습 그대로 전해져오는게 느껴진다..

당초에 석굴앞에 절이 있었다고하는데 폐허가 되고 주축돌만 남아있었는데 사찰 복원사업으로

1989년에 선방, 산신각등 증개축하였다고 한다.. 주변 경치가 수려해여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고구려때부터 전해진 신라불교가 팔공산 자락에서 시작되었고 신라왕도 경주로

전혀져 결실을 맺었다고해서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이라고 한다..

 

삼존석굴 모전석탑은 단층기단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형성한 조금 특이한 형태로 통일신라시대때

건립된것으로 추정되며 탑신부는 근세에 다시 축조되어 추언형에서 변형되었다고하는데

탑형을 유지한 귀중한 유물이며 일정치 않은 판석을 쌓고 여러단의 층급을 놓았다..

높이는 약 4미터 정도되며 문화재자료 제241호로 지정되어있다.

 

군사의 위세가 매우 당당하다고 해서 고려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지어준 지명 군위..

일반사람들에게는 사과 재배지로 알려져있지만 곳곳에 숨겨진 관광지와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곳이

많다고 하는데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도 군위에 있고 지금 소개할 경주 토함산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된 석굴사원 삼존석굴도 이곳 군위 팔공산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도 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삼존석굴 비로자나불좌상은 작가 미상의 좌상으로 대좌와 광배는

소실되었으며 9세기경의 불상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한다.. 양쪽어깨의 법의가 조금 걸쳐져있었고

앞가슴이 넓게 드러나 있었으며 손은 비로자나불의 전형적인 지권인을 나타내고 있다고한다..

목에는 삼도를 표시하였으니 다른 불상에 비해 짧은 편이였으며 얼굴은 풍만하고 두뺨과 함께 길게

늘어진 두귀 그리고 뚜렷한 각부의 모습은 양감을 느끼게 해준다.

가운데 본존불 여래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의 특징인 장중한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좌우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목과 허리 다리에서 살짝 굽은 삼곡자세를 하고 있다고한다.... 솔직히 가까이서

자세히 볼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인지 정확하게 기록할수 있겠지만 지금은 삼존불을 보호하기위해

일반인들에게 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니 아래에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봐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렌즈로 최대한 가깝게 찍어봤지만 난간때문에 앉아있는 모습이나 손모양을 볼수가 없었지만

온화한 자태는 충분히 느낄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해 본다..

경주 석굴암과 비슷하여 제2의 석굴암으로 흔히 불린다고하는데 1960년대 말까지

세간의 눈에 띄지않았으나 1970년대 학자들에 의해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 이상 일찍

창건된것으로 밝혀져 세계적인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고 한다.

한티재(718m:16:20)

2차포장도로의 79번지방도로가 마루금을 지나가는 칠곡군 동명면과 군위군 부계면을

잇는 한티재는 팔공산 도립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휴게소 건물도 멋지고

넓은 안부에는 대형주차장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과 차량들로 마치 돗대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그리고 이곳은 해발 718m에 위치한 상당히 높은 지역이다. 

 

이곳 휴게소 인심한번 야박하네...  화장실에서 수건을 적셔 몸을 딱으려는데

주인이란 자가 와서 난리부르스다.  그런 벤댕이속으로 뭔 장사를 하겠다고...

왜 아예 화장실문에 못을 박아버리지... 사람들 못 들어오게

 

하는 수 없이  산악회에 주는  시원한 맥주 2컵을 마시고  후미가 온 다음

버스를 타고 40분정도 걸리는 칠곡군 가산으로 옮겨서 한우 고깃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예전에 이 산악회에서 총무를 역임했다는

묘령의 여인이 식대를 쏜다고 한다. 결국 만만치 않은 엄청난 巨金을...

이 여인의 고향이 이곳인 모양이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세세생생 공덕을 쌓은만큼 복받을깁니다. 버리는 즐거움을 아는...

 

식사가 끝난 후에 18:30분에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시루봉에서 한티재까지의 구글어스

대구 매일신문 기사 팔공산하의 상당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