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2. 07.22(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날씨, 높은 습로 인해 엄청힘듬도
☞ 참석인원 : 백두사랑 산악회 25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6.1km +2.6km / G.P.S 약 30 km / 12 시간 20분 소요
☞ 산행코스 : 오로고개-236봉-소로 안부-329봉-시루바위(330봉)-331봉-장구메기(임도)
330봉-347봉-302봉-304봉-곰재-270봉(82번 송전탑)-경운산-비재-247봉
우베틀산-베틀산-좌베틀산-반석바위-326봉-334봉-내밀재-334봉-통큰바위(355봉)
409봉-냉산 갈림봉-냉산-갈림길-땅재
☞소 재 지 : 경북 구미시 장천면, 산동면, 해평면 / 군위군 소보면
요즘이 정권의 말기인 모양이다. 5년마다 되풀이되는 대통령의 측근인사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교도소로 들어가고... 대통령의 형님에다가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대통령의 집사들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권을 노리는 사람들은
民草들의 안위에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권력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추한 모습들.
거기다가 더욱 과간인 것은 애국가를 부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는 자들이
버젓이 국회의원 뺏지를 다는 나라... 거기다가 뇌물혐의가 있어서 검찰의 소환장을
보냈는데도 거부하는 야당 대표님... 혐의가 없다면 당당하게 응해야죠. 보기는 별로 않좋다
이 나라는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같은 느낌이다
요즘 중소자영업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고 월급쟁이들은 희망이 없는 세상인데,
천문학적인 거액의 뇌물이 오고간 사건을 보노라면 그들의 절망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정직하고 깨끗한 세상도 아니고, 공정한 사회도 아닌 오늘, 어떻게 해야 부패와 비리를
막을 수 있을까. 참으로 재미없는 세상이다. 아이고 모르겠다. 산에나 가자
저녁 10시30분에 양재역에 도착한다. 며칠 계속내린 비로 인하여 엄청나게 높은
습도로 인해 잠깐동안 가만히 서있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버스에 올라타서 조금 가다가 천안 휴게소에 들려서 고향향우이신 한 학문 회장님의
61번째 맞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산행대장이 준비한 케잌을 자르고 다시 차에 오른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산에 대한 열정 정말 존경합니다. 근디 회갑일에 산에 오는
저 분의 용기 정말 대~~~단해요. 나도 3년후에 저런 용기가 나올까. 암튼 부럽다.
다시 버스에 올라 오로고개를 향한다. 그런데 버스에 불을 끄면 조용히 해줬으면
좋으련만... 어느분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통에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다.
남을 좀 배려해줬으면 좋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의 구글어스
오로고개(03:00)
서울에서 너무 일찍 들머리에 도착한 관계로 선산 휴계소에서 버스안에서
30분정도 잠을 잔 후에 꼬불꼬불한 59번 지방국도를 따라 도착한 오로고개.
경북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와 불로리를 지나는 930번 지방도가 지나는 한적한 곳이다.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린후에 장비점검을 한다.
고개 정상 좌측에는 해피아일랜드라는 PAR3 골프장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고
우측에 있는 공장에만 작업을 하는지 불빛이 환하다. 우측 공장 옆들머리로
올라선다(03:25)
이곳 오로리는 장천면 오로지(五老池) 안쪽에 위치하며, 군위군과 경계로 지 가산(芝 歌山)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아늑한 곳 에 터를 잡아 전통적인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바른 작은 동네로서, 서기 1500년대 말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에서 살던
밀양 朴氏 박준(朴雋) 선생이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되어 세거한 곳이다.
선생은 호를 노은( 老隱)이라하고 고향을 그리워하여 고향 동리 첫 글자와 자신의 호의
첫 글자를 따서 오로실(五老室)이라고 동네 이름을 지었다.
後에 선생의 현손 5형제(永澤, 永善, 永發, 永達, 永郁)가 동네 입구에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를
각각 한 그루씩 심어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성하다.
마을에는 朴雋(준) 선생의 追慕所인 老隱堂이 있으며, 그5세손인朴永達 선생의 후손들이 건축한 春雨享이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동구의 다섯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오로실이라 부리워 지고 있다.
오늘 팔공기맥은 초반에 구미시 장천면에서 산동면을 거쳐 해평면을 지나서
군위군 소보면에서 끝을 맺는다.
구미시 [龜尾市]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정신문화의 산실이다.
구미지역은 낙동강 주변으로 가야시대 고분군과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고대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신라시대에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진 곳이고, 해동(海東)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桃李寺)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리학을 꽃피운 지역으로 야은 길재(冶隱 吉再), 강호 김숙자
(江糊 金叔滋), 점필제 김종직(店畢濟 金宗直) 등의 학자와 하위지(河緯地),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한말 의병대장허위(許蔿) 등 숱한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근대에 와서는 과감한 수출정책을 추진하고 새마을운동을 창시하여 국가경제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1995년 선산군과 통합되어 새로운 도농 통합형태의 구미시가 되었다.
1969년 구미면이 공업개발지구로 지정된 이후 공업생산활동을 기반으로 우
리나라 최대규모의 내륙전자공업도시로 발전했다.
330봉(04:00)
등로에 올라서자마자 선두대장은 정신없이 초반부터 내빼기 시작한다.
이쁘게 단장한 묘지를 지나면서 어지럽게 간벌한 소나무 사이로
빠져 나간다. 우측 아래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에 개짖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정신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곳을 오르니 잠시 소로 안부가 나타나고
어둠속에 조그만 봉우리 한두개를 지나니 330봉이 나타난다.
331봉(04:20)
330봉에 이어서 나타나는 331봉 어둠속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어둠속에 뭔 재미로 가는지 선두는 정신없이 가는 바람에 불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보니 뭣이(?) 빠지는 느낌이다. 다시임도를 따라 내려선다.
조금 내려서니 커다란 고추밭과 감나무밭이 나오고 이 밭이
기맥 정중간을 막고 있어서 부득히 좌측으로 우회를 한다.
어둠속에서 만난 감나무
장구메기(04:40)
임도로 내려서니 우측에 감나무밭이 있고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에서 우측의 중앙고속도로 군위I.C로 가는 고개로
장구의 모가지처럼 잘룩하게 생겼다고 해서 장구메기(장구머기)라고 부른단다.
요 능선뒤의 마을이름이 장구먹이란다. 그래서 이 고개를 장구머기라고 부르고
이곳 삼거리에서 원 정맥길은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야 하나. 소나무 간벌로
인해 아예 등로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임도를 따라 직진으로 치고 올라간다.
또 다른 330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330봉과 331봉(05:00)
임도에 올라서니 또다른 330봉이 나타난다. 서서히 날은 밝아오고...
지나온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후미그룹들이 오지않아서
이곳에서 10분이상의 휴식을 취한다. 초코렛 하나와 쥬스로 허기를 면한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엄청나게 높은 습도이나 그래도 산들바람이 불어주는
바람에 산행하기는 괜찮다. 그리고 등로도 예상외로 뚜렸하게 보인다.
330봉 아래에는 뭣에 쓰는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안테나가 있다.
다시 길을 걷는다. 등로는 뚜렸하지만, 나무와 잡풀이 너무 자라서 내 키보다도
더 큰 숲을 지나야 하니까. 억새같은 풀에 팔뚝에 상처가 나기 시작한다.
우측에 천수답의 논이 보이고 계속해서 347봉을 향한다.
그 사이에 대장은 벌써 영역표시를 해놓고 도망을 가버렸다.
수줍은 원추리꽃이 하는 말... 범여님 힘내셔요.
347봉(05:45)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중간그룹이 많다. 맨날 꼴찌로만 걷던 보라님이
운림님이 안와서 끈떨어진 연인줄 알았는데 운림대장이 안오니 완전히
물만난 고기처럼 완전히 날라버린다. 앞으로도 쭈~~~욱 같이...
347봉에서 크고 작은 봉우리 대여섯개를 넘어니 곰재가 나타난다.
이곳은 그리크지 않은 소나무들이 빼빽하다. 정말 간벌이 필요한 곳이다.
곰재(06:40)
경북 구미시 장천면과 산동면의 경계로 923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지금까지 같이해온 장천면은 이곳에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산동면을
맞이한다. 이곳에는 토종닭과 유정란, 가시오가피와 헛개나무를 키우고 재배하는
곰재농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이곳 도로를 올라서 벌목지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오랫만에 전체 산꾼이 모여서 아침식사를 한다. 비가 조금씩 뿌린다.
벌목지에는 늦은 고사리와 영지버섯이 가끔 보인다.
오로고개에서 곰재간의 구글어스
이곳에서 오랫만에 30분간의 여유로운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데 조급증이 있는 산꾼들은 대장이 출발도 하기전에 벌써
저만치 내빼 버리고 만다. 그래 먼저가시요. 그래봐야 후미팀이 오지 않으면
버스로 서울로 가지 않으니까 ㅋㅋㅋ. 아침을 먹고나니 살랑바람은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80%가 넘는 습도로 인하여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곰재로 연결하는 923번 지방도의 모습
이곳은 말이 구미시이지... 예전에 선산군을 통합한 면지역이라
그런지 상당히 오지로 보인다. 저기서 조금 더 가면 경운대학교가 나온다.
송전탑도 산꾼과 함께하고...
82번 송전탑 가는길에 적하수오도 한뿌리 캐고...
적하수오의 유래를 보면
옛날에 중국의 한 사람이 적하수오를 먹고 머리가 까마귀처럼 검게 되었다고
하여 하수오라 불리웠다고 한다.
효능은 몸에 혈기가 잘돌아 몸을 가볍게 하고 두뇌회전을 빠르게 하며
정신을 말게 해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여인들의 산후치료에 좋으며
얼굴을 붉고 좋게 해주며 장기복용할 경우 노화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82번 송전탑(07:20)
345,000V짜리 송전탑을 지나고...
송전탑을 지나 능선안부에 올라서니 좌측으로 구미C.C가 보이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비어있는 홀이 많고 골프 플레이어들이 별로 안보인다.
능선 안부를 따라서 경운산으로 향한다.
몇개의 봉우리를 치고 오른다. 오름길에 너럭바위가 하나 보인다.
나홀로 산행할 때는 이곳은 매트깔고 낮잠코스로 죽이는 곳인데...
경운산(341m:07:45)
경북 구미시 산동면 동곡리와 백현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 산아래
문수사란 절이 있어서 문수봉이라고 불렀는데 경운대학이 들어서서
산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경운산으로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정상에는 별 특징도 없고 산불감시초소와 재난방송 시스템만 산을 지키고 있다.
이곳 산이름이 바뀐것은 이 아래 산동면소재지에 경운대학교란 대학이 들어서서
경운산으로 바뀐 모양이다 (범여의 생각中에서)
경운대학교란 학교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내리막을 향해 내려간다.
경운산 산불감시초소
경운산 정상에서 멀리 바라보니 구미의 진산인 금오산이 짙은 안개로 인하여
잘 보이질 않는다. 그 앞에 보이는 내문수소류지로 위안을 대신한다
전망대(07:55)
경운산에서 소나무숲을 따라서 내려오니 데크목으로 전망대를 설치했는데
이곳 구미시 산동면에서 둘레길 형태로 ‘산동참생태숲’이란 길을 경운산까지 연결했다.
전망대에서 저 멀리보니 금오산이 아련히 보이건만 카메라론 잡히질 않는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이정표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만나는 이정표이다.
이정표를 따라 직진을 하니 둘레길 형태의 길이 산허리를 휘감고 있다.
산 정상에 334봉이 자리를 잡고있다. 젠틀맨이 산허리길을 그냥 갈라고 한다.
정통산꾼이 그러면 안되지 하고... 하면서 꼬셔서(?) 악착같이 힘든 334봉을 오른다.
젠틀맨님은 3년째 정맥, 기맥을 같이하면서 정이 들대로 든 사이라... 조금은 미안하다.
334봉(08:00)
334봉에 오르니 준.희님의 아크릴 표지판이 있고 주위가 소나무로 가려서
전망은 전혀없다. 이곳에서 우측으로는 등로가 뚜렸하다.
기맥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전혀 길이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334봉에서 내려오니 낭떠러지의 암릉이 나타나고 부처손이 푸르르다.
이곳에서 우측을 돌아서 겨우 내려오니 산허리의 등로가 나타난다.
이곳의 바위들은 마치 시멘트에 자갈을 버무려놓은 듯한 역암들이 많이 보인다.
포장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내림길이 톨탑이 하나 서있다.
뭔 심사가 꼬여서 저러시나...
포장도로로 내려서서 맞은편 등로로 올라가지 않고 우측 포장도로로 향한다.
포장도로를 따라서 비재로 향한다.
동료 산꾼인 산동네님이 G.P.S 트랙을 확인하면서 걷는다.
길가에는 원예용 천일홍이 참으로 이쁘게 피고있다.
이 넘도 자기 함봐달라고 사정을 하네...
철없는 코스모스
가을에 피어야 할 넘이 벌써부터 피고있다.
포장도로에서 산동 참 생태숲까지는 1.7km의 거리이다.
덥고 후덥한 날씨 때문에 땀은 비오듯이 흘러내린다.
오늘이 사슴의 뿔도 녹는다는 찜통더위가 시작되는 大暑이다.
이런 날은 거리를 좀 짧게잡고 내려와서 계곡에서 피서도 좀하는
이벤트도 했으면 좋으련만... 산행대장의 거리욕심에
범여는 정말 미치겠다. 이러다가 사람잡겠다.
비재(08:40)
경북 구미시 산동면 동곡리에서 백현리의 923번 지방도로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산동면에서 조성한 산동참생태숲이 지나가는 곳이다.
좌측 아래의 동곡리에는 산동논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오늘의 본격적인 苦行길에 접어든다.
비재 도로를 건너서 다시 등로로 올라서니 소나무를 간벌하고 정리를 하지않아
어지럽게 널려진 소나무가 다리가 무거워진 산꾼에게 자꾸만 태클을 건다.
높은 습도로 인하여 자꾸만 어깨가 짓눌러오는 무거움을 느낀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예전에 민초들이 넘었을법한 희미한 옛고개도 보이고...
247봉(H:09:05)
비재에서 25분을 치고 올라오니 봉우리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이곳에서 뾰족하게 생긴 베틀산과 뾰족봉 등 가야할 빨래판구간이
쳐다보는 산꾼을 그냥 질리게 만든다. 그래 가자꾸나 이보다 더한
곳도 수없이 지났는데...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247봉 정상에서 바라본 베틀산 능선의 모습
헬기장에서 뚝 떨어진 다음에 다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간다.
본격적으로 다리가 무거워지고 높은 습도가 산꾼을 질리게 만든다.
자꾸만 산행속도가 늦어지고 쉬는 시간이 많아진다.
능선을 치고 올라서니 仁同 張氏의 묘지가 나타나고 잠시의 휴식을
취하라고 안부 능선이 나타난다.
안부 능선을 걷다가 갑자기 급경사로 치고 오르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가야할 좌베틀산과 베틀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없는 무명봉이 사람을 잡는 느낌이다.
동료 산꾼들과 잠깐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 체력을 비축한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이곳은 작년의 낙엽이 그대로 쌓여
있어서 참으로 미끄럽다. 이곳은 고도의 높낮이가 너무나 많이 차이가 나서
금북정맥길의 빨래판 구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너무나 힘이든다.
무명봉에서 지옥까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코가 땅에 닿을정도로 정상을 치고 올라가니
등산객들이 쉴 수 있는 긴 의자가 2개가 있고 우베틀산이란 이정표가 나타난다.
우베틀산(332m:09:45)
경북 구미시 산동면 도중리와 백현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베틀산 능선중에
산동면소재지에서 바라볼 때 가장 우측에 있는 봉우리라서 우베틀산이라고 부른다.
정상에는 휴게용 벤취가 2개나 놓여있고 산동면 소재지가 안개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다시 휴식을 취한다.그래도 높은 습도 때문인지 몸은 천근만근이다.
가야할 베틀산과 좌베틀산의 모습
우베틀산을 내려서니 급경사의 스텐 계단이 나타난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야 한다.
우베틀산과 베틀산 사이에 있는 베틀재
우베틀산에서 바닥까지 내려왔다. 다시 베틀산까지 올라가기 위해선
얼마만큼 땀을 쏟아야만 올라갈 수 있을까? 정상을 쳐다보니 앞이 캄캄하다.
임도에서 다시 베틀산으로 향한다. 누가 대신 걸어주지도 않을 이 길을...
베틀재 임도에서 200여m를 치고 올라가니 커다란 암릉이 나타나고
스텐계단을 설치하여 조금은 편하게 올라간다.
상어굴 바위
스텐 계단을 올라서니 바위가 마치 엄청나게 큰 상어가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처렴 보여서
이곳을 상어굴바위라고 부른다. 바위쪽으로 가보니 무속인들이 굿을 했는지
여러가지 기물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옛날에 산의 형태를 보고 베틀을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관심이 가는건 이 아래의 지역 지명이 海平이란다.
어째서 "바다해(海)"가 붙었는가 이다.
뭍이 들어날때 평평한 땅은 해평이고 섬은 베틀산이 되었다는 유래가 내려오는데
지나온 우베틀산의 모습
베틀산 오르기전에 엄청나게 큰 너럭바위를 만난다.
이곳은 날씨만 좋으면 온 사방이 잘보이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나
오늘은 높은 습도와 짙은 박무로 인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게 정말 아쉽다.
이곳에서 젠틀맨님의 가방에서 인천 막걸리인 소성막걸리 한통이 나온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과일로 영양을 보충하면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베틀산 아래에 있는 동화사에서는 사시예불을 드리는 지 아님 천도재를 지내는지
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가 산 정상까지 뚜렸하게 들린다.
바위 사이에 숨어 피어있는 금계국이 너무도 이쁘기만 하다.
내가 오늘 가야할 능선의 모습
베틀산(290m:10:10)
경북 구미시 해평면 금산리에 위치한 산으로서 과거에는 조계산으로 불리기도 했고
경상도 방언으로는 비틀산이라고 한다.
3개의 베틀산 중에 가장 가운데 있는 산으로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문 익점의
둘째 손자인 문영(文英)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첫째 손자는 문래(文來)임)
조선시대 태종 때 일선부사로 부임한 문영은 처가가 있는 선산현 해평면 월호동에 자리잡는다.
화려한 벼슬보다 민생을 위한 산업발전에 힘을 기울이는데 보람을 가지고 문영은 할아버지(문익점)
의 뜻을 높이 받들여 베짜는 기계 만들기에 전념한다.
오랜 연구끝에 문영은 조계산(해평면 금산리의 뒷산)의 모양과 공상다리(오상리 국도에 놓인 다리)
모양을 본따서 만든 베틀로 문영베(무명)를 짜는데 성공한다
이 때부터 조계산을 베틀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베틀산인 주봉인 좌베틀산과
우베틀산, 본베틀산 등로 구분이 되며 높고 낮은 6개의 봉우리가 있다.
한편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데 산 위에서 여인의 베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거나,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여 베를 짰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베틀재(10:20)
베틀산과 좌베틀산 사이에 있는 재이다.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땀은 비오듯이 하는데 아직도 가야할 길이 10km이상이나 남았으니...
베틀재에서 땀을 바가지채로 흘리고 나서야 어느정도 숨을 쉴수있는 안부에 올라선다.
한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바위를 지나고 나서야 좌베틀산에 도착한다.
좌베틀산(369m:10:40)
베틀산의 실질적인 주봉으로 정상에는 돌탑봉과 2등 삼각점(△선산22 1981재설)이 있다.
높이가 369m로서 크게 높지 않으나,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암릉과 풍화동굴 등이 산재하고 있다.
해평면 금산리에서 볼 때 가운데 베틀산을 중심으로 북쪽 방향의 왼쪽에 위치한 좌베틀산 (369m)과
남동 방향의 오른쪽에 위치한 우베틀산(332m)이 연봉을 형성하고 있다.
산 중턱 바위절벽 곳곳에는 역암과 사암의 풍화동굴이 널려 있고, 동화사 부근에는 높이 6m 정도의
마애불입상이 동쪽을 향해 새겨져 있다. 주봉인 좌베틀산 정상에서는 구미 지역의 대표적
산지인 금호산, 냉산(태조산) 청화산 등이 보인다.
좌베틀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급히 내려선다. 우측길로 가면 대형 알바하는 곳이다.
좌베틀산 삼각점(△선산22 1981재설)
동화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아직도 가야할 능선들이 줄줄이 서있으니 가슴이 꽉 막힌다.
좌베틀산에서 급하게 내려서니 암릉사이로 멋진 계곡이 나오고...
등로에서 멋진나무를 만나서 다시 젖먹던 힘까지 내면서 332봉(반석바위)
까지 치고 올라가야 하는데 이젠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332봉(11:00)
높은 습도에다가 바람 한점이 없다.자꾸만 몸은 지쳐가는데
누가 대신 걸어주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부지런히 걷고 또 걷는다.
334봉(11:20)
또 휴식을 취한다. 너무 더워서 염치 불구하고 웃도리를 홀라당 벗는다.
여성 산꾼이 없었다면 아랫도리도 벗었을 것이다. 팬티도 다 젖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사타구니가 다 헐어 버렸는지 쓰리고 아파 미치겠다.
베이비파우더를 차에 있는 가방에 두고온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기만 하다
짧은 휴식을 취하고 걷고 또 걸으니 내밀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밀재의 모습(12:10)
경북 구미시 해평면 창림리와 군위군 소보면 도산리를 잇는 927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냄밀재, 남일재 등의 여러지명으로 불리워 혼란스럽다.
내밀재의 유래
남일(藍一)]이 마을의 칠봉의 남방의 1.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냄일이란 이름은
이 마을 서쪽 해평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에 옛날에는 산적이 나타나므로 밤에는
넘기 어려워 어둡기 전에 넘어야 되겠다는 뜻으로 내머리재가 내밀재로
그 가까이 있는 마을을 냄일로 불리워졌다.
내밀재에 등로로 올라서서 마지막으로 아껴둔 맥주 한켠을 나워 마시고
동료산꾼들이 쉬는 사이에 난 냉산을 가고 싶은 마음에 먼저 출발을 한다.
등로에 오르자마자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 기맥길을 이어간다
냉산이 왕복 2.6km라 가능할지 모르겠다. 마음은 앞서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젖은 팬티가 살과 부딪히니 쓰라리고 거기다가 옻나무 액이 몸에 묻었는지
온 몸이 가려운데 몸에선 땀이 아니라 물이 나오는듯 하다... 그래도 가야지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 6년 고행을 하셨는데 그까이껏 하루를 가지고 엄살이야...
대단해요... 글고 넘 고마워요
역쉬 대산꾼답습니다. 전국의 정맥과 기맥 곳곳에 힘들만한 곳에 격려문구를...
고도가 170정도인 내밀재에서 620정도 내는 냉산 갈림길까지 치고 올라가야
하는데 자꾸만 무거워진다. 휴식을 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密陽 朴公 묘지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약간의 안부를 지나가다가 다시 꺽어 올라가고 다시 조금한 안부가 나오기를
서너번째 하고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소득은 있어야제 도라지 2뿌리를 수확하고...
울창한 숲길에 등로는 잘 보이질 않고...
묘지 1기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시작한다.
묘지를 지나니 예전에 길이었듯한 희미한 고개길에 성황당인듯한 돌무덤이 보인다.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상당히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데 동료산꾼이 지친
모습으로 쉬고있다. 다들 힘이드는 모양이다. 오늘 컨디션 저하의 주범은 아무래도
높은 습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차라리 비라도 실컷맞고 싶다
이젠 발가락에 물집까지 생긴모양이다. 쓰리고 아프기 시작한다.
급경사를 오르면서 2번의 휴식을 취한끝에 마지막 암릉구간에 오른다.
암릉구간을 치고 오르니 그 위에는 평원처럼 넓은 곳이 나온다.
냉산 갈림길(14:15)
힘들게 냉산 갈림길에 도착하니 평소에는 인민무력부 공작 안내조만큼이나
빠른 주력을 가진 선두팀들도 힘이 드는지 패잔병처럼 앉아서 쉬고있다.
그리고 아무도 냉산을 가는 사람이 없고, 선두대장님이 5분전에 출발했다고 한다.
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냉산으로 향한다... 가야할 이유가 있기에
냉산 가는길은 고도차가 별로없는 완만한 코스라 컨디션이 좋으면 15분정도도
안 걸릴것 같은 곳에 도저히 속력이 나질 않는다. 헬기장 가기전의 오르막에서
3분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오르막을 오르니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 냉산에도 명찰(名刹)이 있어서 그런지 건강한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처럼...
냉산 헬기장
냉산(冷山:692m:14:45)
경북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군위군 소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일명 태조산(太祖山)이라고 부른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산성을 쌓고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인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산도호부의 동쪽 13리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그렇게 불리웠다’ 고 기록되어 있다.
불우조에는 ‘도리사에는 신라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있던 곳이다. 그 당시 신라에는
불교가 없었는데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와서 이 府의 도개부곡
모례의 집에 머물렀는데 모례가 움집을 만들어 거쳐하게 만들었다. 그가 물러간 뒤에 아도화상이
시종과 더불어 3명이 또한 모례의 집에 왔다.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여 수년을 살았는데
그 동안 질병이 없었다.나중에 시종이 머물러 있으면서 경율(經律)을 강론하였더니 더러
믿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이다. 아도화상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갔다 돌아와
이 산밑에 이르니 겨울이 한창인데 산 허리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이곳에 절을 세우고 도리사(桃李寺)라고 이름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법흥왕 때 이차돈이 순교(527년)하여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110년전의 일이다.
냉산 삼각점
이 냉산 아래에는 신라 최초의 초전지인 도리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회의장을 역임하신 법등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사찰로 내가 12~3년전에 도리사에서 큰스님의 법문을 들은적이 있는 절이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신라에 불교가 없던 訥祗王(눌지왕 417~458)때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한 겨울 이곳에 머물렀는데 善山(선산)의 桃開(도개)에서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만발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桃李寺)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국도에서 내려 도리사를 올라가는 입구에는 海東最初伽藍聖地太祖山桃李寺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라는 산문이 그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하는 곳이다
그 뒤 임란 뒤 화마를 만나 절이 페허가 되었다가 다시 부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리사에는 부처님의 眞身舍利(진신사리)를 奉安(봉안)한 寂滅寶宮(적멸보궁)이 있어
유명한 기도처이기도 하지요. 이는 1977년 외부에 있던 사리탑을 경내로 옮기던 중
金銅六角舍利函(금동육각사리함)과 함께 舍利(사리) 1과가 발견되어 그것을 사리탑을
세워 그속에 다시 안치한 것이다.
도리사 태조선원(桃李寺 太祖禪院)
태조 선원은 정면 7칸,측면8칸의ㄷ자형 건물로, 크기는 총50평이다,
내부에는 후불탱(159 X182cm,1931년)을 봉안 하였다,
근래 선지식인 전강과영신 큰스님을 비롯하여
성철 큰스님도 이곳 도리사 태조선원에서 정진 하였다,
阿道和尙尊象(아도화상존상)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로 일명 묵호자라고도 부른다
신라 19대 눌지왕 때 19세의 나이로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위해 몰래 들어왔다.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의 모례장자의집에 숨어서
낮에는우곡에서 소와 양을 기르는 목동이되고 밤에는 많은 사람을 모아 불법의 자비로운 진리를
강론하기를 3년이나 계속하였으며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도리사(桃李寺)와 직지사(直指寺)의 인연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짓고 금산(金山)(지금의 김천시) 금릉땅을 바라보니 황학산(黃鶴山)중턱에 좋은 절터가 보이므로 승도들에게 손가락으로 절터를 가리켰다하여 절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고 하였다고 한다.직지사는 신라(新羅) 눌지왕 2年(418)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후 936년에 능여대사가 중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입적(스님이 돌아가심)할 때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
極樂殿 (극락전 )
신라에 불교를 전하는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원래의 도리사는 불에타서 없어졌으나
"도리사 금당암 중창기"(1807)와 "선산 도리사 법당 중수(1876)에 따르면
도리사에는 금당암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각은 조선시대 후기 말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18호로 지정되있다
냉산 정상에서 도리사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다시 냉산 갈림길로 향한다
하얗게 핀 흰여로가 힘내라고 격려를 한다.
포행(布行)을 하시는 스님
냉산을 가는 길에 우보(牛步) 걸음으로 포행을 하시는 스님을 만난다.
참으로 여유로워 보이신다. 정말 부럽기만 하다
20년만 젊었어도 망설임없이 머리를 깍았을텐데
내생에는 꼭 스님이 되고싶다. 그리고 어영부영하는 스님이 아닌 제대로 된
중노릇을 하고 싶다. 기상이 초개같이 살아있고 부처님 말씀을 중생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정말 똑소리나는 중노릇 한번 하고싶다.
스님에게 인사를 건네니 자기는 도리사에서 올라왔단다.
법등 스님 안부를 물으니 잘 계신다고 하면서 산행 끝나고 절에
들려서 차한잔 하고 가란다. 호의는 고맙지만 정중하게 다음에 들리겠다고 하고
서둘러 냉산 갈림길로 되돌아온다.
등로에는 며칠전에 온 비가 비바람을 같이 몰고 온 모양이다.
나무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다.
다시 냉산 갈림길(15:10)
동료들은 다 도망(?) 가버리고 갈림길엔 적막감만 감돈다.
1시간 가량 갭 때문에 동료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젖먹는 힘까지내어서 뛰기 시작을 한다.
직진으로 길은 잘 나있었고 시그널도 몇개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조금전에 간 산꾼들의 발자국에 의심도 없이 내려가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리고 급경사에 냉산 올라온만큼 내려가야 하는 급경사를 내려오니
발톱이 빠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않다... 알바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젠 다시 돌아갈 기운도 없다... 체력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다.
급하게 내려오니 임도에 잡풀이 우거져서 걷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내려오면서 많은 옻나무에 가지가 꺽여서 액이 몸에 묻었는지
무지하게 가렵기 시작한다. 5분을 지나니 도로가 나오고 동료산꾼인
구름 나그네님이 완전히 그로기 상태로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량을 붙잡고
태워 달라고 사정을 한다. 얼른 따라가서 같이 일단 차에 올라타고나니
지가 안 태워주고 베기나...고개로 500m 정도 올라가니 땅재가 나온다.
500m를 알바를 한 셈이다.
소보면 연혁(沿革)
군위군(軍威郡)에 딸린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인데, 조선조에 소소본면(召召本面) 또는
석본면(召本面)이라 하여, 대흥, 농암, 상소, 하소, 부황, 호암, 상량, 달천, 어의, 모로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위치는 군위군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군위읍과 의성군 봉양면, 남쪽은 구미시
장천면과 산동면, 서쪽은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북쪽은 의성군 비안면과 구천면과 경계를 이룬다.
땅재(15:40)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에 있는 고개로 68번 일반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12시간 20분동안 높은 습도와의 사투를 벌인끝에 팔공기맥의 한 구간을 마무리 한다.
4년 가까이를 매주 장거리 산행을 했지만 오늘처럼 힘들기는 처음이다.
이곳에서 의성군 소보면 면소재지로 이동하여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향한다.
곰재에서 땅재까지 구글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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