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2. 08.19(무박산행)
☞ 산행날씨 : 새벽에 짙은 안개, 낮에맑음, 높은 습도로 상당히 더움
☞ 참석인원 : 백두사랑 산악회 27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6.km / G.P.S 28.5 km / 12시간 30분 소요
☞ 산행코스 : 땅재-551봉(H)-497봉-612봉(H)-690(3군 경계봉)--695봉-청화산
643봉-638봉-사거리 안부-286봉-293봉-갈현-343봉-387봉-367봉
343봉-383봉-장자봉-심령-435봉-446봉-만경산-279봉-무명고개
171봉-방지고개-산불감시초소-182봉-굿고개-191봉-224봉-195봉
솔티(성황당)-토봉-192봉-새티고개-취수장-우물2교
☞소 재 지 : 경북 군위군 소보면/ 의성군 구천면, 단밀면 / 구미시 도개면
상주시 중동면
오늘은 지난 지난 5월부터 시작된 팔공기맥의 마지막 구간을 떠난다.
더운 날씨에 장거리 산행은 참으로 힘이든다. 오직 자신과의 싸움으로
의지력 시험을 하는 산행이 기맥 산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흔히 전문 산꾼들이 하는 말 중에 백두대간은 고속도로이고, 정맥 산행은
일반도로이고 기맥, 지맥 산행은 비포장 도로라고 비유한다.
기맥, 지맥길은 일반 등산객들은 거의 다니지 않고 길은 없다시피 하다보니
그만큼 산행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하여 무척이나 힘이든다.
토욜 밤 10시30분에 양재역에서 버스에 올라 천안 휴계소에서 30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진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구미I.C를 빠져나와 시내를 지나
새벽 2시 35분에 오늘의 들머리인 땅재에 도착하여 20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03시 10분에 마지막 구간 대장정을 시작한다
○ 신 산경도
○ 대동여지도
팔공기맥(八公岐脈)
백두대간의 태백산 1145봉에서 분기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던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의
가사령으로 내려서기전 고라산(古羅山 대동여지도에 표기)에서 한줄기의 산줄기가 서쪽으로 분기하여
39.4km를 뻗어내려간 지점인 석심산(750.6m)에서 산줄기는 북서쪽과 남서쪽으로 두 갈래의 산줄기로 갈라진다.
분기봉에서 석심산을 거쳐서 남서쪽으로 분기한 약160.1km의 산줄기를 팔공기맥이라하고,
또 한줄기가 분기봉에서 석심산을 거쳐서 북서쪽으로 분기한 약166.8km의 산줄기를 보현기맥이라한다.
이 팔공기맥과 보현기맥의 두 산줄기는 경상북도 북부 내륙지역과 중남부지역을 구분하면서
북쪽으로는 길안천, 미천등의 물줄기를 낙동강 상류에 합류시키고,
팔공기맥과 보현기맥의 두 산줄기 사이에 위천과 쌍계천을 형성시켜서 낙동강 상류에 합류시키면서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간물리 새띠마을앞 위천에서 두 산줄기는 그 맥을 다 한다.
오늘 산행을 시작하는 팔공기맥의 산줄기는 남서쪽으로 흐르는 자호천,신령천, 금호강의 북쪽 산줄기로
낙동정맥의 가사령으로 내려서기전 1.1km 지점인 고라산(x744.6봉)에서 남서쪽으로 분기하면서
달의령~구암지맥갈림봉(705.4m)~옷재~꼭두방재~베틀봉(934m)~면봉산(1120.6m)~보현산(1126.4m)
~노귀재~석심산(750.6m)~수기령~방가산(755.8m)~화산(828.1m)~갑령재
~시루봉(726m)~팔공산(1213m)~파계봉(991.2m)~한티재~가산(901.6m)~효령재
~응봉산(334.1m)~곰재~경운산(341m)~비재~우베틀산(332m)~베틀산(324m)~좌베틀산(369.2m)
~냉산(691.6m)~땅재~청화산(700.7m)~갈현~장자봉(421.5m)~만경산(499m)~토봉(284.9m)을 거쳐서
위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1리 새띠마을에서 그 맥을 다 하는 약160.1km의 산줄기를 팔공기맥이라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트랙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 들머리 땅재
팔공기맥의 마지막 구간의 들머리인 군위군 소보면과 구미시 도개면의 경계인
땅재에 들어선다. 지난 구간에 냉산에 들렸다가 마지막 혼자서 허겁지겁
내려오다가 엉뚱한 곳을 내려와 알바를 한 아쉬운 구간이기도 하다.
이른 새벽에 헤드렌턴에 의지한 채 땅재에서 의미는 좀 남다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언제 이 오지를 다시 올 수 있어런가?
이제 삼국유사의 고향인 군위를 조금후면 벗어난다.
산행을 하면서 군위군에 접어드니 너무 심하다할 정도로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집착을 하는 것 같다.
삼국유사가 군위군에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의 유물이 넘쳐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정부나 학술단체에서 할 일을 조그만 지자체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오랜 학술조사와 연구 홍보등을 통해 삼국유사를
재조명하는 군위군의 열정에 그저 감복할 뿐이다.
삼국유사는 안타깝게도 활자본만 전한다고 한다.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지만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확한 편찬연대도 모른다고 한다.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 미련없이
삼국유사를 택한다”고 말할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저서이다.
땅재(03:10)
경북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 성종때 큰 고목과
서낭(돌무더기)과 당집(성황당)이 당고개, 당현(堂峴) 또는 당재라고 불렀다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서 구미시 도개면을 잇는 6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냉산과 청화산의 안부에 해당하는 고개로 이 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을 당현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는 당재이다. 세월이 흘러 당재라는 말이 변하여 땅재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땅재라 부르니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하는 지도에도 이 고개를 두고서 땅재,
마을 이름을 당재라고 표기하고 있다.
땅재 지적도근점
청화산 등산로 표지판
모두가 고요히 잠든 이른 새벽인 03시 10분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이 짓거리를 한 지가 벌써 4년이 다되어 간다
오늘은 마지막 산행이라 그런지 28인승 리무진 버스에 만차가 되었다.
땅재에서 청화산 오름길은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구간과는 달리 등산로 잘 관리되어 있고
이정표도 곳곳이 있어서 그저 일반산행하는 느낌이다.
청화산까지 고도를 250m 정도를 치고 올라가지만 급경사로
치고 올라가는게 아니고 완만하게 치고올라 가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비가 오고 난 뒤라서 그런지 높은 습도로 인해 산행 20분만에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버렸고 옷이 다 젖어 버렸다.
551봉(03:40)
땅재에서 완만하게 치고오르며 만난 첫번째 봉우리인 551봉에 도착한다.
이곳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높은 습도로 인하여 새벽안개가 자꾸만 짙어진다.
다곡리 갈림길(03:50)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내려가는 길이다.
690봉(04:30)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군위군 소보면 보현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은 군위군 소보면, 의성군 구천면, 구미시 도개면이 만나는 3군 경계봉이다.
여태껏 오랫동안 팔공기맥을 함께해 온 군위군과는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측에는 새로운 의성군 구천면과 같이한다. 좌측 도개면은 계속 동행을 하고...
의성군(義城郡)
185년 무렵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여 '조문국'은 '조문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조문'이라는 이름만은
없어지지 않았고 삼국사기는 673년에 문무왕이 '조문성'(城)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통일신라가 남긴 걸작 의성탑리5층석탑의 처음 이름도 '조문탑'이었다고 한다.
조문군은 다시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중국식으로 지명(地名)을
바꾸는 조치가 취해질 때 그렇게 됐다고.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함께 '영남 4대루'로
일컬어지는 문소루(聞韶樓)가 고려 중엽 의성땅에 세워진 것도 고을의 옛날 이름이 문소군이었기 때문이라고.
문소군이라는 이름의 의성 일대가 '義城'(의성)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초의 일로 문소군은
고려의 장수 홍술이 지키고 있었는데 문소군의 성주였던 홍술은 후삼국의 다툼 속에서 왕건을 지지했고
이미 고려의 장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견훤은 5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문소군을 공격해 왔고
홍술은 전사하나다고. 왕건은 "나의 팔이 떨어져 나갔구나"하고 애통해 하며 홍술에게 김씨(金氏) 성을
하사(下賜)하고, 그를 의성군(義城君)이라 높여 부르게 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왕건은 940년(태조 23)에
문소군(郡)을 나라 안에 10곳밖에 없는 부(府)의 한 곳으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홍술 장군을 기려
의성부(義城府)라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 의성이리는 지명이 생긴 유래라고 한다.
의성은 마늘이 특산품으로 첫손에 꼽히는 고장이다.
마늘은 우리 건국신화에서 사람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가 먹었다는 친숙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농산물. 이 마늘로 유명한 고장이 바로 경북 의성군이다.
마늘 재배 면적이 약 1500㏊, 연간 생산량이 약 1만 5000t이나 된다.
의성 마늘은 한지형(내륙 추운 지역에서 재배하는 마늘을 가리키며, 남부 해안지역 따뜻한 곳에서
재배하는 마늘은 난지형이라고 한다)으로 전국 마늘 생산량의 4% 정도를 차지하며, 한지형만 따지면
24~25%를 차지해 전국 제1위의 점유율을 보인다고 한다. 의성 사람들은 이곳 마늘이 조상 대대로
재배해온 토종으로 즙액이 많아 적은 양으로도 양념 효과가 높고 김치의 신맛을 억제하는 기능도 탁월하다고 자랑한다.
이곳 의성은 명찰 고운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운사(孤雲寺)
신라 신문왕(681) 시대에 의상조사가 창건, 그 후 여지․여사스님이 최치원과 함께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비축 및 승병의 뒷바라지를 한 곳이다.
원래 고운사는 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로서 60여개의 말사를 관장하며 국가 및 지방지정
문화재와 27동의 건물이 유존하는 유서 깊은 대사찰이다.
죽어서 저세상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갔다왔느냐” 묻는다는
고운사를 말하면 호랑이 벽화가 가장 먼저 연상된다.
천년고찰 도량인 孤雲寺에는 좀 특별한 그림 호랑이 벽화가 있어 소개함.
우화루(樓) 오른쪽(서편)에 그려진 이름난 벽화, 그린 연대와 사연은 정확히 알수 없으나,
벽화 감상에서 감상하는 사람이 위치를 달리해 이동해 가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호랑이 깃털(갈기) 모양이 달라보였고 호랑이 눈동자 또한 보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응시하고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신기하였다.
호랑이 왈
" 누가 내 눈을 피 할 수 있으랴"
가운루
최치원이 지었다고 우각이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계곡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었다.
연수전
조선 영조20년(1774)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 牒)을 봉안 한 전각이다.
695봉(04:40)
우측으로 가면 장군봉가는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산허리를 타고
청화산으로 가는 길에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앞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수첩에 잠깐 메모를 하는 사이에 동료 산꾼을 놓쳐 버렸다.
능선 안부를 타고 걷지만 10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마치 납량특집물에 나오는 귀곡산장길 같은 느낌에 갑자기 으시시해진다.
거기다가 안경에 자꾸만 성애가 끼니까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잠시후에 저 위에서 동료 산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속에 이 대장이 붙여놓은 시그널을 따라간다.
청화산 (靑華山:707.7m:04:45 )
경북 구미시 도개면과 의성군 구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이다.
청화산 내 지명으로 마당미기. 수리덤. 방앗골. 점티골, 칭 이골, 벌샘, 옷샘, 불당골, 위기소,
통시웅덩, 대목바위 등이 있는데 모두가 깊은 전설을 가졌다. 백련 사지(白 蓮寺址)가
상상봉에 남아 있는데 빈대가 많아서 절이 없어졌다고 전하며 군위땅이다.
용솟음 마루는 메워서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변하여 졌는데 여기서 내려다 보면 의성서부 7개면
상주일부 구미시.군위 등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막혔 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현재 청화산 자연휴양림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다.
본래 청화산(靑火山)으로 꽃(華)이 아닌 불(火)로 표기한 것을 꽃(華)으로 표기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불을 뜻하는 산이름 탓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산불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어느 선비의 제안으로 불을 뜻하는 화(火) 대신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바뀌게 되었다는
믿지 못할 얘기가 전한다. 어쨌든 산명의 표기를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산불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합리적인 경계석
경북지역의 낙동정맥구간이나 일반산행을 하다가 보면 정상에 각 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정상석을 세워놔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는데 이곳 청화산은 구미시와 의성군이
지혜를 모아서 정상석 하나를 세워서 양면에다 합리적으로 자기 구역을 표시한 점 정말 현명하다.
청화산 정상에 있는 1등삼각점(안계12-1981재설)
청화산 정상의 이정표
청화산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에는 백운동(白雲洞)과 청운동(靑雲洞)이
있어 예부터 청산은 아름답고 흰 구름이 드높은 선경이라 했다.
‘무한청산 행욕진(無限靑山 行慾盡=끝없는 청산 산길 끊겨진 곳), 백운심처 유인가
(白雲深處 有人家=흰 구름에 감춰진 곳 인가가 있더라)’라는 옛 글을 취하여 청산1리를 백운동
, 조성지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청산2리를 대칭의 개념으로 청운동이라 한다.
또 서편의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아래 도개리에는 최근에 지은 신라불교 초전기념관과 함께
도문화재자료 제296호인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毛禮)의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물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나무판자는 아직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 우물과 이웃마을의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불교의 전파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불교 성지다.
도개는 신라시대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유서깊은 곳이다.
삼국의 불교 전래시기는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 (372)에 전진의 순도가 불교를 전하였다고 하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의 마라난타가 전하였다고 한다.
그 중 신라가 가장 늦어서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로부터 승 묵호자가 일선(지금의 선산) 지방
모례의 집에 들어와 전도하였고 소지왕(479∼500) 때 다시 고구려에서 아도가 와서 전도하였으나,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공인되었다.
청화산 정상에는 팔각정과 헬기장, 그리고 1등 삼각점이 있다.
이곳에서 후미그룹을 기다리면서 2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3년간을 몽유병 환자처럼 오지산을 헤매고 있는 동료산꾼 젠틀맨님이
인천의 명물이라고 늘 자랑하는 소성 막걸리 한 통을 꺼내서
일요일엔 교외(郊外)에서 주님(酒)을 모셔야 한다면서
이른 아침에 해장술을 한다. 힘들땐 막걸리 한사발이 왜그리 맛이 있는지?
말걸리를 한잔을 마시고 나니까. 뱃속도 든든하고 훨씬 낫다.
주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늘 산악회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시는
보라님이 헬기장에서 즉석 리사이틀을 펼친다.
요즘 한창 인터넷에 유행하는 ‘오빤 강남 스타일’이란 말춤을 추면서
지친 산꾼들의 배꼽을 잡게 한다. 힘든 산꾼들을 웃기게하는 이것도 재능기부다.
근데 정작 강남사는 범여는 강남스타일을 모르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걸일까 ㅋㅋㅋ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젠 날도 밝아서 헤드렌턴을
벗어서 베낭에 넣고 길을 떠나는데 한동안 고속도로같은 임도길을 걷는다.
임도길 숲사이로 새벽에 어둠속에 걸었던 마루금이 빼꼼히 보인다.
임도 갈림길(05:40)
청화산에서 여기까지 넓다란 임도를 따라 신작로길 걷는것 처럼 걷다가
이곳에서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독도주의)
우측으로 꺽어지니 계속해서 고도를 낮추어 간다.
길은 며칠전에 온 비로 인하여 상당히 미끄럽다.
그러나 등로 곳곳에 로프를 설치하는 걸 보니 이곳으로
청화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가보다,
편안한 길을 걷는데 이곳은 그리크지 않은 소나무가 빼꼭히 들어서 있어
아무래도 간벌을 꼭 해야만 할것 같다. 계속해서 고도를 낮추어 간다.
고도를 낮춰가는데 묘지6기가 나란히 나타나는데 언 넘의 짐승들이
한짓인지 묘지 1기에 구멍을 크게 뚫어놨다. 그렇게 보기가 좋지는 않다.
다시 이곳에서 고도를 급하게 나춰 내려오니 잡풀과 칡넝쿨이
산꾼을 괴롭힌다. 참기가 힘이 들 정도로...
갈현 내려가는 길은 참으로 힘이든다.
갈현(葛峴:06:30)
경북 구미시 도대면 도개리와 의성군 구천면 청신리를 있는
12번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2차선 포장도로가 나있고 가끔 차량이 보인다.
험한 고개의 좌우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칡이 많이 있었다 한다.
지금도 도로 주위에 칡넝쿨이 많이 뒤엉켜 있다.
갈현고개 도로를 지나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좌측에 꽤나 호화로운
묘지가 나타나고 청화산에서 내려온 만큼 다시 아주 급경사로 다시
능선으로 치고 오르려니 상당히 힘이든다. 더군더나 땅에서 올라오는
높은 습도 때문에 산꾼을 정말 지치게 한다.
지나온 293봉의 모습
급한 오름길에 묘지 1기가 마구 파헤처져 있다.
근데 특이한 점은 봉분 전체가 온통 모래이다
후손들이 다른곳으로 이장을 했는데 관리가 안 된 묘지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데 나무에 생전 처음보는 벌집을 만난다.
벌을 보아서는 땡벌처럼 보이는데 벌집은 나무에 달려있다.
통상적으로 땡벌은 땅속에 벌집을 짓고 사는데 말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계절에는 벌은 산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말벌같은 큰 벌에 쏘이면 잘못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이렇게 사이좋은 나무(?) 만나고...
능선 안부를 올라서니 제주도의 묘지처럼 돌로 담장을 쳐놓은
묘지를 만나고 잠시후에 343.1봉이 나타난다.
343.1봉과 삼각점(06:50)
갈현에서 20분간을 혓바닥이 빠지도록 빡세게 20분간을 급경사로 치고 오르니
대산꾼 준.희님이 표시판이 걸려있고 삼각점(△411 재설. 1978.8 건설부)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살짝 빠져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오랫만에 전 산꾼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일찍부터 체력이 소진된 탓인지
밥맛이 영 없다. 그래도 아직 가야할 길이 18km나 남았는데... 가져온 오이냉국에다
가지무침에 억지로 도시락을 비운다. 그리고 막걸리 한통과 복분자로
해장을 한 다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 출발하니 벌써 조급증(?) 많은
선두팀은 벌써 다들 도망(?)을 가고 없다. 그나마 다행인게 젠틀맨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이 범여를 챙겨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친구가 존겨...
343.1봉에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선다. 이 구간도 그런대로 길은 괜찮으나
빨래판 구간처럼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해댄다. 사실 산꾼들은 이런곳이 쥐약이다.
가장 빨리 지치고 힘든 구간이기에...
능선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의성군 구천면의 山河들
평소에 늘 선두에서 도망(?)가던 인민무력부 공작 안내조만큼이나
날쌘 선두팀들도 오늘만큼은 힘이드는지 능선 안부 봉우리에서
힘들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구간과 마찬가지로 높은 습도땜에 힘이든다.
소나무에 막혀 주위의 조망은 없지만 암릉으로 된 안부능선은
물을 머금은 바위 때문에 상당히 미끄럽다. 가끔은 멋진 소나무도 보이고...
이 지역 바위들은 시멘트에 자갈을 버무려 논것처럼 한결같이 역암이다.
소나무 사이의 등로의 구간을 빨래판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걷는다.
등로에는 갈비(솔잎)가 많이 쌓여 있다. 이런곳은 가을철엔 송이버섯이 나올법한 곳이다.
바위에 뿌리를 박고 끊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소나무도 보이고
바위 사이에 끼여 생명을 이어가는 떡갈나무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침식사후 이제 겨우 1시간정도 걸었을 뿐인데 동료 산꾼들의
걸음걸이는 무디어지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진다.
이젠 휴식시간에 아예 드러눕는 동료들이 많아진다.
오늘따라 산동네님은 75L짜리 베낭에다 캔맥주 6개를 비롯해
바라바리 싸왔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옆에서 얻어먹는 사람들이야 좋지만 정작 당신은 얼마나 힘들까...
급하게 오르막을 오르니 다시 안부 능선이 나타난다.
정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나타난다. 조경업자들이
보았으면 아주 침을 질질 흘릴만한 아주 멋진 소나무다.
마치 울님의 엉덩이처럼 생긴 아주 이쁜 암릉도 만나고...
마루금 능선에서 바라본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에 있는 사곡지의 모습
가야할 마루금들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온다.
장자봉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온다.
만경산으로 연결되는 팔공기맥의 능선들
안부 능선의 멋진 소나무 아래에서 동료산꾼 구름나그네님이
닉만큼이나 멋지게 신선처럼 쉬고 있다.
나의 영원한 동료산꾼 젠틀맨님의 멋진 포즈도 쥑인다...멎져부러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바위에 있는 부처손은 싱그럽기만 하다.
안부능선에는 천연동굴처럼 보이는 꽤나 깊은 굴도 보이고...
383봉(07:50)
383봉에서 다시 고도를 높인다. 이곳은 석축으로 쌓은 것럼 보이는
산성의 흔적도 보인다.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 의성은 지명에서
보는 것처럼 군 전체가 城으로 된 곳이기는 하지만 土城이지 石城은
어느 문헌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데 좀 이상하다... 내가 잘못 본것일까
조금 빡세게 올라서니 장자봉이 나타난다.
장자봉(莊子峰:421.5m:08:55)
경북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와 의성군 구천면 용곡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어지럽게 자란 나무와 잡풀만 가득하다.
장자봉의 유래를 보면 예전에 어느 선비가 이곳 정상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꿈에 중국의 대학자인 장자가 나타나서 이곳을 장자봉(莊子峰)이라 불렸다고 한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정상에 삼각점이 있다고 했는데 5분가량을
헤매고 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삼각점을 찾지 못하고 능선을 내려온다.
장자봉 능선에서 바라본 만경산의 모습
다시 장자봉에서 심령내려가는 길에 고도를 200이상을 낮춘다.
이곳은 등로는 뚜렸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나무들로 인하여 팔뚝이
할키어 엄청나게 쓰라리다. 그보다도 더 힘든건 땅에서 올라오는
높은 습도로 인하여 죽을 맛이다. 거기다가 햇살마져 따갑다.
내려오는 중간에 바람부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캔맥주 한잔하면서
10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니까 조금은 살것만 같다.
등로에는 곱사등처럼 생긴 소나무를 지나니 심령이 나타난다.
장자봉에서 심령구간에는 산초나무가 지천으로 군락지를 이룬다.
이놈들이 반팔 상의를 입은 범여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미칠지경이다.
심령(09:30)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동산리와 의성군 구천면 용곡리를 잇는 옛고개로
준.희님의 표시판이 있고 묘지 2기가 자리잡고 있다. 길은 거의 보이지
않아 고개의 기능을 잊어 버린지가 꽤나 오래된 모양이다.
이 고개를 심령이라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십령(十嶺)이다
十嶺의 유래를 보면
조선말기에 동학란 때 사회도처가 한창 불안하여 도처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니 관군은 이를 토벌하러 나섰고 그 틈을 타서 도적떼들이 우글거렸고
외진 산길을들어와서 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곳 열재(십령)도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여 한 두사람이 재를 넘기는 위험하고
열사람이 이상이 모여서 넘었다고 해서 열재(십령)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변음이 되어 심령이라고 부른단다.
조선말기 3월말 보리고개에 60이 넘은 노인이 9살의 손자를 데리고 도개에서
의성쪽을 넘고 있는데 산속에서 바람소린지 사람소린지 알 수없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자세히 들으니 분명 사람소리였다. 젊은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데 상투를 튼
남자가 아기를 잡아 먹으려고 발버둥이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남편이 몇날 며칠을 굶어
눈이 뒤집혀 아기를 고기인 줄 알고 잡아 먹으려고 한다고 한다.
손자가 우리가 싸가지고 가는 떡을 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일부를 나누어 주고 가는데
손자의 말이 너무 기특하고 배고픈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떡을 전부 다주었다.
자기들은 너무 굶주려 이 고개 넘어 의성땅에 사는 친지들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소판돈을 주고 가잔다.
소판돈을 주고가는 조손(祖孫)에게 젊은 남녀는 어디사는 누구냐고 알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그 조손은 그냥 길을 떠났다. 이 노인은 성이 趙氏로 이 고장에서
꽤나 잘 살았으며 널리 보시공덕을 많이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손자는 어느덧 30이란 나이를 먹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거늘 조씨가(趙氏家)도 살림이 기울어 생계가 어려웠다.
열재에서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상당한 富를
축적하여 이 지역에서 노(魯)부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난날 열재에서 도움을 받았던 그 은인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인을 찾기위해 지난날 구원을 받았던 십령(열재) 아래에 주막을 내고
술을 파는게 아니라 이 고개를 넘는 과객들에게 쉬어가게 하고 술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달이가고 해가가고 몇해가 지나도 그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봄철도 지나고 초여름의 긴긴해가 뉘엇뉘엇 넘어갈 때 덥수룩한
나그네가 지나간다. 지나가는 나그네이 차림은 궁색하였으나 기품은 있어 보였다.
들어와서 좀 쉬어가라는 청하는 부인의 말에 “말씀은 고마우나 해는 지는데 갈길이 바쁘다”
하면서 그냥 가려고 한다. 부인의 재삼 간청에 “돈이 없으니 술 먹을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다.
다시 간청하는 부인의 말에 나그네는 발길을 돌려서 주막집에 들려서 쉬기로 한다.
후히 대접을 하고 어느 손님에게나 마찬가지로 지난날의 얘기를 하면서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그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있다가 20년전의 9살때의 기억을
기억을 더듬어 얘기를 하니 초로의 부인은 젊은이를 와락 껴안으며 그리도 목메이던 은인을 찾았다.
지난날 죽음의 경지에서 구츨해준 은인을 잊지 못하여 이곳에 주막을 차리게 된 동기까지 이야기 한다.
조씨도 지난날 화려했던 가세가 기울고 어렵게 살아가는 지금의 실정을 이야기하니 주막집 내외는
의논하여 조씨를 크게 도와서 보답의 기회를 찾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산의 노씨와 의성의 조씨는 그 후손들도 친형제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십령 중턱에는 조그만 집한채가 문짝이 떨어 나간채로 있다고 한다.
심령에서 다시 급경사의 고도를 높인다. 묘지를 지나면서는 이곳의 돌들은 마치
칼로 자른듯 반듯반듯한 편마암이 주류를 이루고 집터의 흔적인지는 몰라도
돌담으로 쌓은 흔적도 보인다. 이제 겨우 산행거리가 반을 지났는데 자꾸만 다리는 무거워진다.
435봉(09:45)
심령에서 15분을 힘들게 치고 오르니 이젠 길은 좀 좋으나 소나무를 간벌하여
햇볕을 전혀 피할 수 없다. 땅에는 지열이 올라오고 위에 햋볕이 내리쬐고
땀은 비오듯이 한다. 능선을 조금 걸으니 다시 잡목지대이다.
좌측에는 돌탑이 있는 전망대 바위가 나타난다.
통신탑이 있는 삼거리(09:50)
이곳 좌측의 능선에는 S.K 통신탑이 있고 등로는 뚜렸하게 나있다.
기맥길은 이쪽에서 우측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산딸기가 많이 보인다.
반팔 상의를 입었더니만 팔뚝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조금을 더 진행을 하니까. 1톤 트럭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정상까지 이어진다
팔공기맥 맞은편 능선에 있는 이동통신 중계탑
계속되는 임도를 따라 만경산 정상으로 향한다.
힘들게 올라오는 동료산꾼의 모습이 꼭 나를 보는 느낌이다.
오늘은 정말 힘들다. 이제 체력이 한계에 온 느낌이다.
예전같이 않다 가야할 산은 너무도 많은데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니 자꾸만 고민스럽기만 하다.
힘들게 만경산 정상에 오른다. 정상석 오르기 직전에 선두에 가던
동료산꾼들이 팔각정에서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고 팔각정
좌측에는 의성군 단밀면의 서기 3000년에 개봉할 타임캡술이 묻혀있다.
팔공기맥의 마지막 명산인 만경산에 인증샷을 남기고...
물길따라 말없이 흐르는 위천 그리고 낙동강 줄기를 조망하게 되는데 조선 개국이후 초하루
보름마다 산마루에 올라 깊은 한을 품고 당시 수도이던 개경(開京)을 바라보던 이가 있어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때 불렀다 하는데, 당시에 산위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던 이는
鵝洲申氏 의성 입향조가 되는 判圖判書겸 軍器寺事로 종 2품에 해당하던 관직에 이르렀으나
唐介에 버금간다 하던 공의 충성된 절의로 고려조가 막을 내리게 되자 落南하여 아들과
은거하고자 이곳으로 오게 된 申允濡이다. 그의 恨은 그가 바라보던 강물들이 강줄기를 따라
바다로 흘러가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 속으로 묻혀져 버렸으나 그의 절의는 길이 남을 일이다.
만경산에는 새로 생긴듯한 정상석이 2개나 있는 바람에 산꾼들에게
그렇게 고맙기만 준.희님의 표지판은 찬밥(?) 신세다
그런데 난 이 표지판이 너무도 정이 많이간다.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만경산(萬景山:499m:10:15)
경북 의성군 단밀면에 위치한 산으로 팔공기맥의 마지막 산이다.
산이 높고 경치가 좋은데다가 산에 오르면 저 멀리 낙동강을 비롯한 사방의
일만가지 경치가 눈아래 보인다하여 만경산(萬景山)이라 불린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 정상에 서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200여년 전 商山誌의 기록에는 만경산을 일명 만악산(萬嶽山) 이라고도 불렀으며
널따란 반석과 높은
봉우리의 모습은 깍아지는 듯하고 옛 성터의 흔적도 있다고 하였다.
만경산은 단밀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낙동강의 장엄하고
도도한 흐름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계평야와 위천, 구미의 냉산과 금오산, 상주의
나각산과 갑장산 등 사방의 여러 고을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만경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4대강 사업의 산물인
낙단보(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소재)가 나타나고 기맥길은 시치골로 이어진다.
만경산에 30분 이상의 휴식을 취한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다.
염치 불구하고 웃통을 벗어서 말린 다음에 입으니 훨씬 나은 느낌이다.
만경산에서 급하게 고도를 낮춰서 내려간다. 산 아래는 원시림을
방불케 할정도로 숲이 우거졌고 나무 계단을 따라 고도를 낮추는데
지형 토질이 마사토라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기만 하다.
만경산 아래에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숲의 모습
급격하게 고도를 낮추니 등로에는 연안 이씨의 묘비가 나타나고...
만경산 하산길에서 바라본 낙동강(落東江)
낙동강은 태백시 황지천에서 발원하여 영남지역 땅을 골고루 적신 뒤 부산 을숙도를
거쳐서 남해바다로 빠져 나간다. 본류의 총 길이는 521.5km(1300리)로 한반도에서
압록강에 이어 2번째로 긴 강이다. 낙동강의 유역 면적은 2만 3817㎢로 남한 전체의
24%를 차지한다.
상류에선 안동의 반변천을 비롯한 여러 지류가 합쳐지고 상주시 함창읍 부근에서
내성천, 영강을 받아들인다. 또 상주 남쪽에서 위천, 구미시 선산읍 부근에서 감천
대구 부근에서 금호강, 경남 합천군에서 황강, 창년에서 남강을 합친다.
이어 동쪽으로 흐름을 바꿔 밀양시 삼랑진읍 부근에서 밀양강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 하구언에 도달한다.
삼국시대에 불렸던 원래의 이름은 ‘황산강’이었다. 황산은 경남 양산시 물금읍에
있던 옛 나루터의 이름이다. 고려, 조선시대에 들어서 ‘낙수’ ‘가야진’ ‘낙동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다산 정약용은「아방강역고」에서 “낙동이라 함은 가락의 동쪽”이라
했고 이긍익의「연려실기술」은 “낙동은 상주의 동쪽”이라고 기술했다.
낙동강 700리하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내륙 물류의 중심이었던 상주시 낙동면
낙동나루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이다. 당시 영남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을 낙동강
물길을 이용, 낙동나루까지 실고온 뒤 육로로 문경을 넘어 충주에서 다시
남한강 물길로 한양까지 운반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 인조때에 끊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고대 중국의 고사를 들어 나라에 변고가 생길 조짐이라는
말이 돌았다. 반면 여름에는 자주 범람해 낙동강을 접한 각 고을에 홍수피해를
남겼다. 조선시대에도 낙동강은 갈수기에 물이 부족하고 장마철에는 물이 넘쳐
치수하기 어려운 강이었다고 한다.
만경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북 의성군 안계평야
위천이 감싸고 흐르는 안계평야는 영천 금호평야, 경주 안강평야와
더불어 경북지역의 3대 곡창지중에 하나인 곳이다.
단밀지역은 과거 진한계열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도읍지로 우리나라
미작(米作)의 기원이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시작되었기에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의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가 당시 축조되면서 우리 고장에도
고대(古代) 저수지로 대제지(大堤池)가 축조되었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고
있는데 이 산위에서 보이는 넓은 안계평야가 국내에서도 미곡의 주생산지로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이자 당시 부족국가시대부터 번영을 이루던 곳임을 알려주는 거다.
들(안계평야)의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의성의 젖줄인 위천 덕분에 이곳 안계평야는
예전부터 곡창 지대였다고 한다.
의성의 쌀 재배면적은 1만 1천668ha이며 이는 경북지역 재배면적의 9%를 차지한다고 한다.
풍부한 수량과 최적의 기후 조건덕에 ‘의로운 쌀’ 과 ‘의성 황토쌀’ 등의 브랜드가 있고
미곡처리장도 5개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땅이 넓은 들(평야)은 예로부터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곳 안계평야는 그 옛날 삼국이 영토 다툼이 치열할 때 보물단지였다
신라는 의성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서 의성의 뿌리인 조문국
(지금 금성면 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을 멸망시켰다.
신라는 안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남하하는 고구려, 동진하는 백제 등과
안계들 넘어 예천 삼강, 문경새재 등지에서 수많은 전투들을 벌였다.
후삼국의 견훤과 고려의 태조 왕건 역시 안계들을 차지하기 위해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안계들은 평상시에 나라의 살림살이였고 유사시엔 군수물자의 보고였던 것이다.
한편으론 역사의 주인공들이 땅 빼앗기에 이곳 민초들의 고충은 얼마나 심했을까?
들이 넓은 고장에 역사는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보이는 저 안계들에도...
고도를 300이상을 낮추니 길은 편해졌으나 그늘이 없어서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익는 느낌이다. 정말로 견디기 힘들만큼 힘이든다.
호젓하게 나있는 길을 걷는다. 따가운 햇빛에 고독하게 피어있는 마타리꽃도 힘들어 보인다.
패랭이꽃도 지친 모습으로...
뒤돌아서 본 만경산의 모습
산은 뒤돌아 볼때 정말 자기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느낌이다.
사람이나 산이나 뒷모습이 아름다워 보일때 진정한 자기 모습이 아닐까.
앞으로 가야할 팔공기맥의 능선은 아득하게만 보인다.
오늘 산행중 만경산에서 토봉까지는 역 C자 형태로 빙 돌아서 가는 형태이다.
묘지 몇기를 지난다. 등로 우측에는 만경목장의 초지가
보이는데 사육하는 축생들은 한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조금 더 내려오니 좌측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여태껏 따라온 넓은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희미하게
나있는 등로를 따라간다.(독도주의) 길은 험하지 않으나
잡풀로 인하여 오늘 반팔을 입은 범여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다.
희미한 등로를 내려오니 묘지 상석 하단에 아마도 글짜를
잘못 새긴 탓인지 청색 테이프를 부쳐놓은 나주 정씨 묘지가 나온다.
다시 억새를 비롯한 키보다도 훨씬 큰 숲을 헤치고 나오니 포장도로가 나온다.
시멘트 포장도로(11:25)
이 길은 912번 지방도에서 만경목장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이다.
이곳 길을 지나서 임도로 올라선다. 이곳에서 5분간 휴식을 취하니
동료산꾼 젠틀맨이 온다. 마지막 구간이라 나를 상당히 배려해준다.
임도로 올라서니 가을바람님이 힘들게 도로에 누워있다.
나 역시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으나 참고 계속 걷는다.
갈림길(11:35)
임도에서 출발하여 300m 정도 올라오다가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 묘지쪽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무심코 길이 좋은 임도를 가면 단밀면 소재지로 향하는 대형 알바이다
이곳 정상이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는 171봉이다. 그러나 별의미도 없는 산이라
산꾼들은 정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묘지앞 옆길을 따라가다 임도를 만난다.
임도로 들어서니 최근에 조성된 듯한 묘지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묘지에 참배를 한다.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조상한테 잘하면 복받을겨... 하니까 고맙습니다 하는 답을한다.
이곳에는 최근에 조성한 듯한 묘지1기가 더있고 주위에는
묘지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난 임도길을 계속 걸어간다. 묘지옆에 핀 배롱나무꽃이
정말 화려하게 보인다. 소나무에 나오는 피톤치드향이 지치고 힘든
산꾼의 머리를 상당히 맑게 해주는 느낌이다.
임도를 가로지르는 농업용 수로를 건는다.
이것도 山自分水領에 위배되는 걸까 ㅋㅋㅋ
912번 지방도(11:45)
의성군 단밀면 면소지에서 낙단보가 있는 낙정리로 이어지는
912번 지방도가 2차선 도로이다. 이곳은 차량들이 꽤나 다닌다.
이곳에서 도로를 건너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길을 이어간다.
포장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좌측의 밭에는 사과나무에 사과가
꽤나 열려있고 최근에 심은듯한 감나무도 보인다.
그리고 임도 주위에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 독성이 강한 제초제를
많이 살포를 하였는지 도로 주위의 잡초들이 몽땅 죽었다.
이렇게 뿌린 제초제가 당신네들이 마시는 지하수로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아뭏든 이곳을 지나는데 머리가 상당히 아프다. 그 인과응보를 어떻게 하려고.
방지고개(11:50)
912번 도로에서 5분정도 올라서니 방지고개가 나타난다
우측 포장도로 아래에는 꽤나 큰 한우 목장이 보이고 이곳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콩밭사이로 난 임도를 따라서 올라간다.
넓은 임도를 타고서 올라가다가 우측으로 꺽어져 산불감시봉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젠틀맨님과 천도 복숭아 하나씩을 나눠먹고 봉우리 올라선다.
산불감시초소(12:05)
지도상에 180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에 도착한다.
산불감시초소에 올라서니 정상에는 감시초소와 냉장고 TV 안테나가 서있고
간이 플라스틱 탁자가 있다. 나홀로 산행시에 식탁으로 사용하면 좋을듯 싶다.
초소에서 바라본 경북의 3대 곡창지대의 하나인 안계평야가 보이고...
씨알이 꽤나 굵은 도라지도 캐고...
산불감시초소를 지나서 임도를 걸어가다보니 갑자기 길이 없어진다.
좌측으로 길이보여 그 길로 가니 석탄을 채굴한듯한 굴이 보인다
조금 지나니 길이 없어지고 한참을 헤매다고 다시 원위치를 하여
우측으로 보니 희미한 길이 보인다. 그런데 조금을 더 지나가니 또다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두번째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야 하는데
첫번째 봉우리를 내려가는 바람에 젠틀맨님과 깔끔하게 10분정도를 알바를 하고
농로를 따라 포장도로를 올라서니 굿고개가 나타난다.
갑자기 길이 없어진다. 젠틀맨과 즐겁게 담소하다가 길을 놓쳐 버렸다.
이곳은 길도없고 시그널도 없어서 알바하기 딱좋은 코스다
마지막 구간중에 길찿기가 가장 힘든 구간이다.
굿고개(12:40)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와 세제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콘크리트로 포장된 농로가 고개를 가르고 있다.
이곳의 논에는 벼가 다 피었다. 아직까지 봐서는 풍년처럼 보이지만
장마철을 잘 넘겨서 대풍을 이뤄 고단한 농민들의 허리가 좀 펴졌으먼 한다.
도로를 지나서 산능선에서 알바를 한 다음인지 급속하게 피로가 몰려온다.
이곳에서 1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조그만 봉우리를 오르막 내리막
하면서 힘든 여정을 계속한다. 금방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쉬고 싶다.
아이구 이런 횡재를...
좀 치고 올라가다가 盆城 裵氏 묘지가 있는 등로 아래 죽은 소나무에
꽤나 큰 영지를 도히님이 발견하여 얼른 내려가서 채취를 한다.
延安 車氏 묘지
커다란 영지를 수확하고 기분이 쿨한 상태에서 조금 더 치고 올라가니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묘지가 나타난다.
묘지 주위로 돌담이 둘러처져 있다. 이곳에서 다시 치고 오르니 풍양조씨
묘지가 나타난다. 다시 고도를 높인다.191봉을 지나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 갔다가 다시 고도를 높혀간다.
224봉(13:50)
224봉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에 몸을 식히며 3분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능선을 따라 기맥길을 이어간다.
224봉에서 솔티고개로 향하는 등로는 조그만 소나무들이
이리저리 엉켜있어 걷기가 굉장히 불편하고 걷는 시간이 지체된다.
아직도 가야 할 거리가 만만찮은데 다리는 무거워지기만 하다.
다행히 내리막길이라 힘이 조금은 덜드는 느낌이다.
솔티고개(14:05)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와 팔등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최근에 포장한듯한 콘크리트 도로가 나타난다.
솔티란 이 지역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松)이고 티(峙)는 고개 개념이라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의 松峙를 솔티라 부르는 건 아닌지(범여의 생각中에서)
시골 동네에서는 예전부터 성황당을 아주 신성시 하는 곳인데
이곳 솔티는 새로운 도로를 내면서 성황당을 반토막을 내버렸다.
그 아래로 도로로 자갈과 토사들이 흘러 내리고 있다.
솔티에서 다시 마지막 힘을 쏟아 부으며 팔공기맥의 마지막 봉우리로 올라선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 쓰러진 나무를 피하며서 25분만에 토봉에 올라선다.
토봉(兎峰:284.9m:14:30)
경북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토끼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쉰등이라고도 한다.
낙동강과 위천의 이수(二水)가 합류하고 속리산, 일월산, 팔공산 등 삼산(三山)의
지맥이 한곳에 모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일대를 일컬어 이수삼산(二水三山)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봉황성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위천이 좌,우로 흘러내려 동,서, 남면이 강이고,
북쪽은 영양의 일월산이 내려와 비봉산이 되었고 서쪽의 강건나 나각산은 속리산이
동남으로 200리를 뻗어 가에 다달아 멈춰서면서 솟아 올랐고 동쪽의 토봉(일명:쉰등)은
팔공산이 군위에서 위천과 같이 북으로 역류해서 끝을 맺은 지역으로 한마디로 강은
大江이고 산은 모두 名山이다
봉황성은 봉황대 북쪽에서 동으로 위천 절벽까지 건너막은 토성으로 성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쌓은지는 알 수가 없으나 봉황성 절벽에는 임진왜란때 피난을 했다는
전설이담긴 양처사굴이, 북쪽의 낙동강 동면에는 층암절벽 천인대가 솟아있고 연하여
토진벼루,물양절벽이 있으며 하루에는 쉰등, 골벼루, 뒤뛰미절벽, 관수루절벽 등이
저마다 높고 낮고 길고 짧게 일품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이젠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에 올라서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저 멀리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합수점이 보인다.
이곳부터는 여태껏 같이해온 의성군 단밀면과 이별을 하고 상주시 중동면을 만난다.
팔공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에서 저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는 이 기분...
여름철에 힘들게 더위와 싸우면서 도착한 곳... 동료 산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저 멀리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하여 1300리 물길을 도도히 흘러가는
물길이 이곳 상주땅에서 위천을 만나는 합수점이 보이고 그 위에 내년쯤에
걸어야 할 보현기맥의 마지막 산인 나각산이 보인다.
나각산(螺角山·240m). '나각'은 소라껍데기를 뜻한다. 낙동에서 보면 소라 형태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주변 산줄기와 이어져 있지 않고 휘어 도는
강줄기 옆에 외로이 홀로 서 있는 산이다
낙동강 너머로 상주땅이 보인다.
한 지역에서 3국의 왕을 배출한 곳 - 상주
역사적으로 한 지역에서 국왕을 수명내지 수십명을 배출한 곳은 많다.
고도 경주가 그렇고, 고려의 개성과 조선의 한양이 있다.
하지만 한 고을에서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곳은 바로 이곳 상주이다.
고대의 사벌국과 함창 고령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사람이라고 한다.
상주는 경주, 개성, 한양과 함께 왕의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의미다.
영남학파의 최후의 보루 상주 도남서원
상주의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 1606년(선조 39)에 창건되었으며 영남땅에서
영남 제1의 수학궁(首學宮)으로 걸출한 조선 선비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
상주에는 조선말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기 전까지는 18개의 서원과
13개의 사단(祠壇)이 운영됐고 그 정점에는 도남서원이 있었다.
도남서원 중수기에는 “우리나라 선비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학파의
주체세력은 상주 인물이었다”고 적혀있다.
서원의 한가운데 건물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다.
유학을 대표하는 다섯분의 위패가 정면에 모셔져 있다
제1위인 포은 정몽주를 비롯해 힌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모셨다.
조선의 조정은 학문과 당파가 무관하지 않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융화되지 않았다.
지역도 달랐고 학문적 차이는 조정에서도 서로 다른 정치이념을 낳았다.
하지만 영남땅 상주에서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공존했다.
상주의 영남학파는 서애 유성룡이 상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상주는
명실공히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고을로 우뚝섰고 서애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 수암 류진, 월간 이전, 창석 이준 등 내노라하는
대유(大儒: 대유학자)를 배출했고 상주만의 독창적인 학파를 형성했다.
율곡 이이의 학맥인 기호학파는 영남땅에선 그리 반갑지 않은 학맥이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에 기호학파가
뿌리 내리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상주에서는 기호학파가 자리했다.
상주의 기호학파는 창녕 성씨 가문이 주춧돌이 되었다.
특히 청죽 성람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의료국인
존애원(상주 청라면)의 주치의로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과 교우했다.
또 우복의 사위는 동춘당 송준길로 기호학파였다.
당시 상주땅에서 당색을 초월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래로 보니 4대강 사업의 산물인 낙단보와 낙정리가 보인다.
192봉(14:55)
토봉에서 이곳까지 급경사로 내려왔다가 이곳부터는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기맥의 한 구간을 마쳤다는 성취감에 뿌듯하다.
새티고개(15:10)
드디어 팔공기맥 160.1km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으로 힘든 여정을 대과없이 마쳤다. 내가 생각해도 대견하다.
경북 상주군 중동면 우물리(于物里)의 새티고개에 선다.
새티고개에서 최근에 포장된 도로를 따라서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향한다. 10분정도를 지나서 위천 취수장을 만난다.
이곳에서 위천에 발을 담그며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싶었지만
최근에 내린 비로 인하여 강물이 너무 불어서 모든 걸 포기한다.
새띠마을
위천 취수장에서 좌측 새띠마을을 지나서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고 싶었지만
날씨탓에 산행시간이 예상보다도 너무 늦어서 모든걸 포기하고 버스가 있는 곳을 향한다.
이 새띠 마을은 상주시 중동면 우물1리에 속하는데 이 우물리(于物里)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명당지로 즉,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고, 속리산에서 이어진 나각산 줄기와 팔공산에서
이어진 토봉의 줄기,일월산에서 이어진 비봉산의 줄기와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이수삼산의 명당지라고 한다. 새띠는 임진왜란 후에 성산 이씨와 남원 양씨가 정착하였으며
이곳 합수점의 넓은 강변에 옛날에 모래를 많이 쌓았다하여 사대(沙帶)라고 불렀으며
또한 이곳이 잡목의 밀림지대인 관계로 새떼가 많이 모여 부락민들이 새떼골이라
부르던 것이 새띠마을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간상 합수점에는 가지 못하고 취수장에서 다시 도로를 따라 새띠고개까지
와서 고개를 넘으니 좌측으로 위천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포장도로를 타고
우물2교가 있는 마을까지1.5km를 25분에 걸쳐 걸어가는데 콘크리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인하여 아~ 이러다가 죽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
위천 [渭川]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동쪽에서 발원하여 군위군 중심부를 북류(北流)하여
의성군(義城郡)을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하천. 유로(流路)의 길이는 110.7킬로미터이다.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이수는 낙동강과 위천(渭川)을 의미한다.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 일대에서 발원한 위천은 군위읍과 소보면, 의성군 비안면을
거쳐 우물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낙동강과 위천은 서로 만나서 땅을 'T'자로 가른다.
우물2교(15:40)
드디어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너무 더우니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다. 100m 정도 남겨논 지점에 도착하니
운림대장님이 맥주와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하는데
너무 더우니 만사가 다 귀찮기만 하다. 버스에서 베낭을 정리하고
이곳 마을회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졸업만찬이 열리는 의성 낙정리에 있는 청산회관으로 향한다.
상주에서 우물 2교를 지나서 낙단대교를 넘어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에 온다.
식당가는 길에 관수루와 낙단보가 보인다.
관수루가 보고싶어 혼자서 얼른 식사를 마치고 낙단보에 있는 마애불과
관수루를 보기 위해 500여m 떨어진 관수루로 향한다
낙정리의 모습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낙정나루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였다.
옛날 이곳에는 주막과 숙소가 즐비한 곳이었다고 한다.
낙정리 일대는 낙동강 경제사에 큰 비중을 차지한 곳이라고 한다.
저 멀리 남해바다에서 올라온 소금, 수산물과 경상도 지방 관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들이 이곳 낙정나루에 집결하였다.
이를 말하듯 낙정리에 위치한 낙동역은 역에선 보기 드물게
참(站: 조선시대 대형 숙박시설)이 설치됐고, 490명이나 되는
역리(역 종사원)가 근무했다고 한다. 낙정리 인근에는 소금을
저장, 관리하는 염창도 있었다고 한다.
관수루(觀水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낙동강 삼대 누각의 하나이다.
절경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관수루는 낙정(洛井) 나루의
바로 옆 북쪽 층암절벽에 위치한다. 관수루가 위치한 낙정마을은 태백, 일월, 팔공산,
낙동, 위수강(위천)이라 불리우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신령스런 정기가 모여든다.
관수루는 수려한 주위환경을 배경으로 동.서.남.북을 왕래하는 큰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강서안인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에 있었으나 동안인 이곳으로 옮겨져 중건 되었다.
고려시대에 세워져 1734년(영조 10)에 상주 목사 金泰衍이 다시 세워 현판하고 1843년(현종 9)에 다시 수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넘어져 유실되었으나 1889년 양도학(梁道鶴)의 특지로 복원되었다.
고여조(高麗朝)의 李奎報(1168~1241)를 대표로, 金宗直(1431~1492), 金馹孫(1464~1498),
이황(李滉, 1501~1570) 등이 지은 15편의 시가와 권상일(權相一, 1679~1760), 유주목(柳疇睦, 1813∼1872)
등의 중수기문이 있었다.
후에 신현택(申鉉澤) 군수의 중건기문, 신사 하서룡(進士河瑞龍)의 상량문, 강재기(康在璣)의 중건상량문이 추가되었다.
관수루 연혁기
이글 서두에 올린 김종직의 시
김종직, 김일손의 시
백운 이규보의 시
퇴계 이황의 시
관수루에 들렸다가 오는 길에 낙단보를 만난다.
MB정권에서 가장 치적사업으로 내세우는 4대강 사업의 산물이다.
난 정치에 대해 잘 모른다. 4대강 사업의 공과는 후손들에게 맡기고...
흐르는 낙동강물은 아무 말이 없으니. 알길이 없고
보의 지붕 역할을 하는 곳은 전통적인 루각 모형으로 관수루(觀水樓)의 처마를 모방했다고 한다.
보의 지붕 아래에는 풍경이 달려 바람이 불면 종소리가 경쾌하다
낙단보에 들렸다가 낙단보 옆에 있는 마애불 가는 길로 향한다.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에 위치한 마애불좌상
머리에는 화관이 아닌 삼산형(三山形) 보관(寶冠)을 하고 있는 모습.
오른손엔 연꽃을 들고 있고 연좌(蓮坐)에 앉아 있다
마애불좌상에 코어드릴로 뚤렸던 구멍을 마감재로 막았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관리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2010.10월에 공사 발파수행중 구멍뚤렸던 사진(한겨례 기사 갭쳐)
-낙동강/안도현-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팔공기맥 종주증
힘든 여름 산행에 동고동락을 같이한 동료산꾼들에게 감사드리며
산행대장을 비롯한, 총무, 산과스키, 한회장님, 운린대장 등
집행부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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